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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4.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

이윤진이카루스 2019. 1. 8. 12:27

4.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

 

철학자들로서 우리의 주요 과제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능하면 방법론적으로 흥미로우며 독창적인 동시에 논증적이며 비판적인 이론들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함에 의하여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을 거의 대부분, 심신 이원론이라는 주제에 관한 변종들과 그 변종들과 연관된 방법의 문제들인 세상 개념들로 구성된다. 이 서양적인 이원론적 주제로부터의 주요 변화들은, 그 주제를 어떤 종류의 일원론으로 갈음하려는 시도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시도들은 성공적이 못했고 일원론적 항변들의 장막 배후에는 심신이라는 이원론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1. 다원론(pluralism)과 세 가지 세계들의 원리

 

그러나 일원론적(monistic) 일탈들뿐만 아니라 몇 가지 다원론적 일탈들도 또한 있다. 우리가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을 그리고 심지어 다신론의 일신론적(一神論的: monotheistic) 변종들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거의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에게는 세계에 대한 다양한 종교적 해석들이 심신이라는 이원론에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지는 의심스럽게 보일 것이다. 신들은 (gods), 많건 적건, 우리들 자신과 대조적으로 불멸의 신체들이 부여된 정신들이거나 순수한 정신들이다.

그러나 몇몇 철학자들은 3 세계의 존재를 지적함에 의하여 철학적 다원론을 향하여 진지하게 시작했다. 나는 플라톤, 스토아철학자 그리고 라이프니츠(Leibniz)과 볼차노(Bolzano) 및 프레게(Frege)와 몇몇 현대인들을 (그러나 강력한 일원론적 경향들을 구현한 헤겔은 아니다a)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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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93일 비엔나에서 수행된 (축약된 독일어로) 강연. 문서 XIV. 비엔나 국제 철학회의(Akten des XIV. Internationalen Kongress für Philosophie in Wien), i, 비엔나 1968, 25-53쪽으로부터 재생됨. 지금 포함되고 있는 어떤 추가 재료는 스위스 월간지(Schweizer Monatshefte), 50. (Jahr), 3, 1970. 207-15쪽에 처음 발표되었다 (독일어로).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 표현은 but not of Hegel who embodied strong monistic tendencies인데 선행사가 고유명사 Hegel임에도 불구하고 관계대명사절이 제한적 용법을 쓰여서 문법적 오류이다.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의 세계는, 많은 측면들에서, 고등 실재들의

세계인 종교적 세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는 인격적 신들(gods)의 세계도 아니었고 의식의 세계도 아니었으면 또한 그 세계는 어떤 의식의 내용들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 세계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의 세계에 추가되어 존재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제3 세계였다.

나는,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이 신체들과 그리고 정신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 속의 이데아들과 다시 말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 경험들과 다르다고 믿는 플라톤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따른다: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은 다른 것과 달리 3 세계를 구성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은 가설적 혹은 가능한 사고의 대상들이다 이해될 수 있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것들, 물리적 물체들인 가시적인 것들만큼 객관적이다: 가설적이거나 가능한 시각의 대상들.

그리하여 플라톤주의는 심신이라는 이원성(二元性: duality)을 초월한다. 플라톤주의는 3자로 이루어진 세계, 즉 내가 선호해서 말하는 바와 같이 제3 세계를 도입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플라톤에 관해 논증하지 않겠다; 오히려 나는 다원론에 관하여 논증하겠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원론을 플라톤에게 귀속시켜서 잘못되었다면 심지어 그 경우에 나는, 진정으로 이원론적 도식을 초월하는 철학의 사례로서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의 이론에 대하여 잘 알려진 해석의 도움을 구한다.

내가 플라톤주의자도 아니고 헤겔주의자도 아닐지라도 나는 이 다원론적 철학을 나의 토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다.

이 다원론적 철학에서는 세계가 적어도 세 가지 존재론적으로 구분된 하위-세계들로 구성된다; 혹은 내가 말할 것과 같이 세 가지 세계들이 있다: 첫 번째 세계는 물리적 세계이거나 물리적 상태들의 세계이다; 두 번째 세계는 정신적 세계이거나 정신적 상태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세 번째 세계는 가지적인 것들의 (intelligibles) 혹은 객관적 의미에서 개념들의 세계이다; 세 번째 세계는 가능한 사고 대상들의 세계이다: 본질적인 이론들과 그 이론들이 지닌 논리적 관계들의 세계; 본질적인 논증들의 세계;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 상황들의 세계.

이 다원론적 철학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는, 이 세 가지 세계들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세 가지 세계들은 그렇게 관련되어서 처음 두 가지 세계들이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뒤의 두 가지 세계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2 세계인 주관적 혹은 개인적 경험들의 세계는 다른 두 가지 세계들 각각과 상호작용을 한다, 1 세계와 제3 세계는, 2 세계인 주관적 혹은 개인적 경험들의 세계의 개입을 통하지 않고는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

 

2. 세 가지 세계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

 

내가 보기에 세 가지 세계들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2 세계를 제1 세계와 제3 세계 사이의 중재자로서 사용하여 기술하여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드물게 서술될지라도, 이 견해는 내가 보기에 분명히 제3 세계 이론에 포함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눈이 (eyes) 과정에 참여하는 본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물리적 물체를 볼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또한 산술적이거나 기하학적 대상을 보거파악할 수 있다; 숫자나 기하학적 도형.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보다(see)’파악하다(grasp)’가 은유적으로 사용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신과 정신에게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인 산술적이거나 기하학적 대상 사이의 실제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보는 것(seeing)’과 밀접하게 유사하다. 그리하여 정신은 제1 세계와 제3 세계 모두의 대상들과 연계될 것이다.

이 연계들에 의하여 정신은 제1 세계와 제3 세계 사이의 간접적 연계를 확립한다. 이것은 극도로 중요하다. 수학적 및 과학적 이론들의 제3 세계가 제1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진지하게 부인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 이론들의 특정 결론들을 적용함에 의하여 제1 세계에 변화들을 야기하는 기술자들의 (technologists) 개입을 통하여 제3 세계는 제1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연하여, 자신들의 이론들 안에 내재된 기술적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했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원래 개발된 이론들의 특정 결론들을 적용함에 의하여. 그리하여 이 가능성들은 이론들 자체 속에, 객관적 개념들 자체 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들은 이 개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론들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논증은, 신중하게 전개된다면, 내가 보기에 세 가지 세계들 모두의 객관적인 실재를 뒷받침한다. 더구나, 내가 보기에 그 논증은 개인적인 경험들로 구성된 주관적인 정신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뿐만 (행동주의자들에 의하여 부인되는 주장) 아니라 제3 세계의 대상들을 파악하는 것은 제2 세계의 주요 기능들 중 한 가지 기능이라는 주장도 뒷받침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이행하는 중요한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인간이 됨의 본질적인 부분이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프레게[Frege]가 그것들 지칭한 바와 같이) 파악하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날 인간 정신을 제3 세계의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바라봄에 의하여 우리는 심리학을 혁명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 대상들을 이해하여 그 대상들에 공헌하고 그 대상들에 참여하기 위한; 그리고 그 대상들을 제1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3. 3 세계의 객관성

 

3 세계 혹은 더 정확하게 제3 세계에 속하는 대상들인 플라톤이 발견한 개관적인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은 흔히 주관적인 개념들이나 사고 과정들로서 오해되었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 상태들로서, 3 세계라기보다는 제2 세계에 속하는 대상들로서.

이 오해에는 긴 역사가 있다. 이 오해는 플라톤 자신과 동시에 시작된다. 이유인즉 플라톤이 자신이 주장하는 이데아들의 제3 세계 특징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을지라도, 숫자 7이나 숫자 77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들이나 관념들뿐만 아니라 ‘7 곱하기 1177이다라는 명제와 같은 수학적 진리들이나 명제들과 심지어 ‘7 곱하기 1166이다와 같은 허위 명제들 및 덧붙여 모든 종류들의 비-수학적 명제들이나 이론들 또한 우리가 제3 세계에 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한 언어 철학을 발전시킨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 알려진 듯이 보인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깨달은 바와 같이 인간의 언어는 세 가지 세계들 모두에 속한다. 인간의 언어가 물리적 행동들이나 물리적 기호들로 구성되는 한, 인간의 언어는 제1 세계에 속한다. 인간의 언어가 주관적이거나 심리학적 상태를 표현하는 한, 혹은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언어가 우리의 주관적 상태에서 변화를 포함하는 한a, 인간의 언어는 제2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언어가 정보를 담고 있는 한, 즉 언어가 어떤 것을 말하거나 서술하거나 기술하거나 혹은 또 다른 의미나 중요한 정보를 함유할 혹은 또 다른 의미나 중요한 정보와 일치하거나 충돌할 의미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한, 인간의 언어는 제3 세계에 속한다. 이론들이나 명제들이나 서술들은 가장 중요한 제3 세계의 언어적 독립체들이다.

나는 파피루스 위에 쓰인 것을 보았다’, 혹은 나는 청동에 새겨진 것을 보았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1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언어적 독립체들을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b 연설에서 전달되는 성실함과 신념에 의하여 나는 큰 인상을 받았다거나 이것은 서술이라기보다는 분노의 표출이었다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우리는 제2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언어적 독립체들을 말한다. ‘그러나 제임스는 존이 어제 말한 것과 정반대를 오늘 말했다제임스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존이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귀결된다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혹은 우리가 플라톤 철학이나 양자 이론을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객관적인 중요성인 어떤 객관적인 논리적 내용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언급되거나 서술된 것에서 전달된 정보나 전언의 제3 세계 의미를 우리는 말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의 (3 세계적) 객관적인 논리적 내용과 우리가 관하여 말하고 있는 대상들을 처음으로 중요하게 구분한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이 대상들은 반대로 세 가지 세계들 중 어떤 세계에도 속할 수 있다: 우리는 첫 번째로 물리적 세계에 관하여 (물리적 물체들이나 물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또는 두 번째로 우리의 주관적인 정신적 상태들에 (이론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포함하여) 관하여 또는 세 번째로 몇 가지 산술적 명제들 및 가령 그 명제들이 지닌 진리나 허위성과 같은 몇 가지 이론들의 내용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제3 세계의 의미에서 어법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표현의사소통과 같은 용어들을 피하려고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매우 권유할만하다. 이유인즉 표현이나 의사소통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적 용어들이고, 3 세계의 사고 내용들을 제2 세계의 사고 과정들로서 해석하려는 매우 강력한 유혹이 있는 분야에서는 그 용어들이 지닌 주관론적이거나 개인적인 어감들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제3 세계 이론을 플라톤적 이데아들로부터 이론들이나 명제들로 확대하지만 않은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또한, 선언적 서술들이나 주장들과 같은 제3 세계적인 언어적 독립체들에 추가하여, 문제들과 논증들 및 논증적 연구들과 그 외에도 심지어 명령들과 훈계들과 기도문들과 협약들은 물론 운문과 이야기와 같은 것들을 포함시켰다. 그들은 또한 성실성에 관한 개인적인 상태와 이론이나 명제가 지닌 진리를 구별했다; 다시 말해서, 3 세계 술어인 객관적으로 참인이 적용되는 이론이나 명제.

 

4. 인공적 산물로서의 제3 세계

 

우리는 주로 철학자들을 두 가지 부류들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플라톤처럼, 자율적인 제3 세계를 수용하여 그 세계를 초인적 것으로서 그리고 신적(神的: divine)이어서 영원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철학자들로 구성된다. 두 번째 부류는, 로크나 밀(Mill) 또는 딜타이(Dilthey)나 콜링우드(Collingwood)처럼, 언어와 언어가 표현하소통하는것은 인공적이라고 지적하는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제3 세계가 존재한다는 제안을 배척하며 언어적인 모든 것을 제1 및 제2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보는 철학자들로 구성된다. 인문학자들 대부분이 제3 세계를 배척하는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첫 번째 부류인 플라톤주의자들은, 우리가 영원한 진리들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명제는, 시간과 관계없이, 참이거나 거짓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것으로 보인다: 영원한 진리들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틀림없이 참이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진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일 리가 없다.

두 번째 부류의 구성원들은, 영원한 진리들이 우리가 만든 것일 리가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으로부터 영원한 진리들은 실재적일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실재적, 술어 (true)’ 및 적어도 특정 문맥들에서 우리가 (true)’을 시간-독립적인 술어로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사용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종류의 어법은 그다지 매우 놀랍지 않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피터의 아버지 폴은 한 때 피터보다 몸무게가 더 나가고 1년 후에는 몸무게가 덜 나갈 반면, 금속 두 조각 중 한 조각이 고유한 1파운드 무게로 남고 다른 한 조각이 고유한 2파운드 무게로 남는다면 이과 같은 일은 두 가지 금속 두 조각에게는 발생할 수 없다. 여기서 고유한이라는 술어는 서술들과 연관된 술어 (true)’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사실상 우리는 고유한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무게들이 인공적일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지적할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철학자들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재나 (지칭될 바와 같이) 3 세계의 자주성을 수용하는 것과 동시에 제3 세계가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비롯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는 심지어, 3 세계가 인공적이고 매우 분명한 의미에서 동시에 초인간적임을 인정할 수 있다. 3 세계는 그 세계를 만들 사람들을 초월한다.

3 세계는 허구가 아니란 실재에서존재한다는 것은, 2 세계를 통하여 제1 세계에 미치는 제3 세계의 엄청난 효과를 우리가 고려할 때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비유기적 및 유기적 환경에 미치는 전기 송전이나 원자이론의 충격을 혹은 선박이나 항공기를 구출할 것인지의 결정에 미치는 경제 이론들의 충격을 생각할 필요만 있다.

내가 여기서 채택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서, 꿀이 벌들의 생산물이거나 거미들의 줄들이 거미들의 생산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3 세계는 (그 세계의 한 부분이 인간 언어인) 인간의 산물이다. 꿀과 다르지 않게, 인간의 언어와 그리하여 제3 세계의 더 큰 부분들은, 생물학적 문제들이나 다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이든, 인간 행위들의 계획되지 않은 산물이다.

수 이론을 고찰하자. 심지어 자연수들도 사람의 작품, 인간 언어의 그리고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크로네커[Kronecker]와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 의하여 선언되거나 컴퓨터들에 의하여 이용될 것보다 더 많은 그런 숫자들의 무한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숫자들 사이에는 무한한 숫자의 참인 방정식들과 거짓인 방정식들이 있다; 우리가 참이나 거짓으로서 선언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러나 훨씬 더 흥미롭고 기대되지 않은 것인 새로운 문제들이 자연수들의 수열의 의도되지 않은 부산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소수들의 (prime numbers) 이론이라는 미해결 문제들 (가령, 골드바흐[Goldbach]의 추측). 이 문제들은 분명히 자주적이다, 그 문제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제들은 우리에 의하여 발견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발견되기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채로 존재했다. 게다가, 적어도 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중 몇 가지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들이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론들을 창안할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시,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이 이론들은 우리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의 산물인데, 거기서 우리는 존재하는 다른 제3 세계 이론들에 의하여 크게 도움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이론들을 만들어내자마자 그 이론들은 새롭고 의도되지 않고 기대되지 않은 문제들인 자율적인 문제들이자 발견될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체의 근원에서 우리의 산물인 제3 세계가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으로 지칭될 것에서 자율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심지어 이 세상의 작은 구석을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제3 세계를 근거로 행동할 수 있고 제3 세계를 확대할 수 있거나 제3 세계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 모두는 제3 세계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우리의 개인적인 기여 활동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우리 모두는 제3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우리들 중 누구도 제3 세계와 접촉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터인데 이유인즉 우리 모두는 언어를 이용하고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 세계는 여하한 사람의 파악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람들의 파악을 멀리 뛰어 넘어 성장했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의 존재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미치는 제3 세계의 영향은 그 세계에 미치는 우리의 창조적 행위보다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 세계 자체의 성장을 위하여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유인즉 거의 모든 제3 세계의 성장은 정보(feed-back) 효과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문제들의 발견에 대한 도전에 기인하는데 그 문제들 중 많은 문제들이 결코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의 발견이라는 도전적인 과업이 항상 있을 것인데 이유인즉 문제들의 무한성이 항상 발견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세계의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한 제3 세계의 자율성 때문에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의 기회가 항상 있을 것이다.

 

5. 이해하기의 문제

 

나는 여기서 객관적 세계의 자율적 존재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해하기 이론(‘해석학’) 기여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고 그 이론은 인문학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 도덕 및 정신 과학들’) 연구자들에 의하여 많이 토론되었다. 여기서 나는, 인문학의 핵심적 문제인 것은 3 세계에 속하는 대상들의 이해하기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하겠다. 이것은 거의 모든 인문학 (그 용어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연구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이해하기의 문제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근본적인 독단으로부터의 급격한 변화로 보인다. 나는 물론, 우리의 이해하기 대상들이 주로 제2 세계에 속한다는 혹은 그 대상들이 아무튼 심리학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독단을 의미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해하기라는 포괄적인 용어에 의하여 다루어지는 활동들이나 과정들은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심리학적 활동들이다. 그것들은 (다소 성공적인) 이 활동들의 결과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해석인 이해하기의 (당분간의) ‘최종 상태로부터. 이것이 이해하기의 주관적 상태일지라도, 이것은 또한 제3 세계의 대상인 특히 이론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後者)의 경우는 나의 견해로 더 중요한 경우이다. 3 세계 대상으로서 간주되어, 해석은 항상 이론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일련의 논증들에 의하여 그리고 혹시 문서적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역사와 관련된 설명.

그리하여 모든 해석은 일종의 이론이고, 모든 이론처럼, 그 해석은 다른 이론들 안에 그리고 다른 제3 세계 대상들 안에 고정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해석의 장점들이라는 제3 세계의 문제가 제기되어 토론될 수 있으며 특히 우리의 역사관련 이해하기를 위한 그 문제의 가치가 제기되어 토론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해하기의 주관적 행동이나 의향적 상태도 반대로 제3 세계 대상들에 대한 자체의 연관성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유인즉 나는 이해하기의 주관적 행위에 관하여 다음 세 가지 논제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1) 이해하기의 모든 주관적 행위는 주로 제3 세계 안에 고정된다는 것;

(2) 그런 행위에 관하여 수행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중요한 언급들은, 3

세계 대상들에 대한 그 행위의 관계들을 지적하는 데 놓여있다는 것; 그리고

(3) 그런 행위는, 3 세계 대상들을 통한 작동들로 주로 구성된다는 것:

우리는 마치 이 대상들이 거의 물리적 대상들인 것인 양 이 대상들로써 활동한다.

내가 제안하는 바, 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고 모든 주관적인 지식의 행위에 대하여 성립한다a: 우리가 지식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중요한 것들은, 행위에 관한 제3 세계 대상들을 이론이나 명제 그리고 알려진 대상들뿐만 아니라 문제들에 영향을 미치는 논증들과 같은 다른 제3 세계 대상들에 대한 지식의 행위를 지적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6. 사고의 심리학적 과정들과 제3 세계 대상들

 

3 세계 대상들을 통한 (주관적) 이해하기의 최종적 상태를 분석할 필요를 인정하는 사람들 중 심지어 몇몇은, 파악하기나 이해하기의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활동에 관한 상응하는 주장을 배척할까봐 나는 저어한다: 동정적 이해하기나 감정이입이나 타인들의 행위들의 재연 (콜링우드[Collingwood]) 혹은 또

다른 사람의 목표들이나 문제들을 우리 자신의 목표들이나 문제들로 만듦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그 사람의 상황에 놓으려는 시도와 같은 주관적인 절차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 suggest, can be generalized, and holds for every subjective act of ‘knowledg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으며 또한 지식의 모든 주관적 작용을 옹호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 없으면 우리는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진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나의 견해는 이렇다. 이해하기의 주관적 상태가 최종적으로 확대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상태에 도달하는 심리학적 과정은 그

과정이 고정되는 제3 세계 대상들을 통해서 분석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과정

은 이 관계들을 통해서분석될 수 있다.a 이해하기의 과정이나 활동은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상태들의 배열로 구성된다. (이 상태들 중 하나가 최종적인지 아닌지는 흔히 흥미로울 뿐인 망라의 느낌에 주관적으로 의존할 것이다.)b 중요한 논증이나 어떤 새로운 증거가 이루어졌다는 조건으로만 다시 말해서, 어떤 제3 세계의 대상 더 많은 것이 그 상태에 관하연 언급될 수 있다. 그때까지는 과정인 것은 이전 상태들의 배열이고 활동인 것은 도달된 상태를 비판하는 (다시 말해서, 3 세계의 비판적 논증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이해하기라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제3 세계 대상들로써 작동하는 것에 놓여있다.

그 활동은, 창의적인c 추측과 비판의 방법에 의한, 혹은 내가 흔히 그것을 지칭한 바와 같이 추측과 반박의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의 일반적인 도식에 의하여 표시될 수 있다. 그 도식은 (자체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이렇다:

 

P TT EE P .

 

여기서 P 은 우리가 출발하는 문제이다,d TT(‘잠정적 이론: tentative theory’)는 우리가 처음에 도달하는 창의적인 추측성 해결책인데 예를 들어 우리의 첫 번째 잠정적 해석이다. EE(‘오류제거: error elimination’) 우리의 추측인 우리의 잠정적 해석에 대한 엄격한 비판적 검토로 구성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문헌적 증거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구성되고, 우리가 이 초기 단계에서 한 가지 이상의 추측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경쟁하는 추측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 및 비교 평가로 구성된다. P 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첫 번째 시도로부터 출현하는 방식으로서 문제 상황이다. P 는 우리의 두 번째 시도에 (기타 등등) 다다른다. 만족스러운 이해하기는, 그 이해하기가 해석인 추측성 이론이 새로운 문제들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지지를 받는다면, 이룩될 것이다; 혹은 그 해석하기가 많은 하위 문제들을 설명하고 그 문제들 중 몇몇은 시작할 때 알려지지 않던 것이라는 사실에서 지지를 받는다면. 그리하여 우리는, P 을 우리의 추후 문제들 중 몇 가지들과 (가령, P ) 비교함에 의하여 우리가 이룩한 진보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도식적 분석은 매우 널리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석은, 전적으로 문제들과 추측들과 비판적 논증들과 같은 제3 세계 대상들로써 작동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석은,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주관적인 제2 세계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석이다.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면 우리가 항상 우리의 문제를 제3 세계 배경의 뒷받침을 받아 고르는 것이 밝혀질 터이다.a 이 배경은 적어도 언어로 구성되는데 언어는 항상, 자체의 용법들의 바로 그 구조 안에 많은 이론을 포함하고b (예를 들어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에 의하여 강조되는 바와 같이) 그리고 이 배경은 적어도 당분간 도전을 받지 않는 많은 다른 이론적 전제들로 구성된다. 문제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이와 같은 배경의 뒷받침을 받아서이다.c

자체의 배경과 함께 (그리고 아마도 다른 제3 세계 대상들과 함께) 문제는, 내가 문제 상황으로 지칭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우리가 이용하여 작동하는 제3 세계 대상들은: 경쟁과 갈등 (이론들과 문제들, 추측들의 양상들, 해석들, 그리고 철학적 입장들 사이의); 그리고 비교들이나 대조들이나 유추들. 해결책과

문제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관계이어서 객관적인 제3 세계의 관계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해결책이 대체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름을 주목하는 것. 이로 인하여 I. 라커토스(Lakatos)에 의하여 문제 전환으로 지칭되는 제3 세계의 관계가 생기는데 그는 진보적 문제 전환과 퇴행적 문제 전환을 구분한다.

 

7. 이해하기와 문제-해결

 

나는 여기서, 이해하기라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모든 문제 해결의 활동과 동일하다고 제안하고 싶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모든 지성적 활동들처럼 이해하기라는 활동은 주관적인 제2 세계적 과정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주관적인 작업은 객관적인 제3 세계의 대상들을 이용하는 작동으로서 분석될 수 있고 분석되어야 한다. 관련된 주관적 작업은, 몇몇 경우들에서 이 대상들과 그리고 이 대상들을 다루는 것과 일종의 친밀성을 확립하는 작동이다.a 유추를 이용하면, 그 주관적 작업은 교량들이나 주거들의 건축가의 활동들에 비교될 수 있다: 어떤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함에서 그는 단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교한 도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단순한 구조적 단위들이나 더 복잡한 구조적 단위들로써 작동하거나 그 단위들을 다룬다.

이 제1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과 도구들을 문제들이나 이론들이나 비판적 논증들과 같은 제3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과 도구들에 의하여 대체하면서, 우리가 어떤 제3 세계 구조를 이해하거나 파악하려고 노력하거나 제3 세계에 어떤 다른 문제-해결 공헌을 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황 묘사를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상황 묘사 이상을 얻는다. 나의 핵심적 주장은, 이해하기라는 활동에 대한 지성적으로 유의미한 여하한 분석도 주로,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3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과 도구들을 우리가 다루는 것을 분석함에 의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다소 더 수용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나는 혹시 이 제3 세계 구조적 단위들이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사실상 이해할 수 있는) 대상들이라는 것을 상기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해 과정에 혹은 그 과정의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에 흥미를 가진다면 우리는 거의 전적으로 이 이해의 대상들인 이해 가능한 것들과 그것들의 관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나 이룩하고 있는 것들을 틀림없이 기술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들인 흥분이나 실망이나 만족에 대한 기술과 같은 모든 다른 것들은 매우 흥미로울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서, 3 세계 대상들이나 구조들이 이해 가능한 것들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해의 과정에서 정말로 역할을 하는 특정 주관적인 경험들이나 태도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나는 강조와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검토 중인 어떤 문제나 이론이 정확하게 문제나 이론이 아닐지라도 그 문제나 이론을 중요한 것으로서 선정하기; 혹은 그 반대의 것을: 어떤 이론을 거짓으로서 라기 보다는 무관한 것으로서 제거; 혹은 가령, 또 다른 단계에서는 그 이론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특정 단계에서는 토론과 무관한 것으로서 제거. 혹은 아마도 이론을 거짓으로서 동시에 명시적으로 토론되기에는 너무 무관한 것으로서 심지어 이론의 제거. 논리적으로 고찰되어, 이것은 이론의 허위성이나 무관성이 토론의 배경으로 격하되어야a 한다는 제안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이론이나 문제를 (혹은 이야기나 과제[project]’) 격하시키려는a 제안은 흔히 표현적이고 감정적인 수단들에 의하여 전달된다. 3 세계 대상들을 다루는 관점에서 이 수단들은 일종의 속기(速記: shorthand)로서 작용한다b: 원칙적으로 그 수단들은 더 상세한 객관적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을 터이다. 문제는, 복잡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그리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질 것인데 왜냐하면 그 분석의 문제가 관련이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립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감정적인 함축들에 대한 이 개괄적인 분석은, 심지어 그런 함축들도 때때로 문제 상황들과 같은 제3 세계 대상들을 통하여 최고로 이해될 것이라는 주장을 예시하려고 시도한다.a

이 주장은 훨씬 더 중요한 주장과 감정들과 같은 심리학적 상태들을 설명하는 과제는 그 과제 자체의 이론적 문제를 만들어내어, 그 과제 자체의 잠정적 이론들에 의하여 해결된다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2 세계에 관한 이론들 (다시 말해서, 3 세계 대상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오직 혹은 주로 사람들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을 연구함에 의하여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b 또한 이것에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들의 이해하기를 포함하여 모든 이해하기에서와 그리하여 역사 이해하기에서 3 세계 상황들의 분석은 우리의 최고 과제라는 나의 주장을 철회하거나c 심지어 제한하려는 의도가 없다.

반대로 나의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행위들과 그리하여 역사가 문제 해결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고 추측들 및 반박들의 도식(6절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P TT EE P ) 통한 나의 분석이 문제 해결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요점으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그러나, 먼저 제3 세계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의 보기를 다소 상세하게 토론하겠다: 간단한 산술적 방정식.d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sketchy analysis of some emotional overtones attempts to illustrate the claim that even such overtones may sometimes be best understood in terms of

third-world objects such as problem situ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정서적인 어떤 부대적 의미에 대한 이런 간략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런 의미조차도 때로는 문제 상황들과 같은 제3세계 대상들에 의해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this should not be taken to mean that we can understand persons solely, or mainly, by studying psychological theories about the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인간들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을 탐구함으로써 단지 인간들만을, 혹은 주로 인간들을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eca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바꾸거나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efore proceeding to this important point I will, however, first

discuss in some detail an example of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a third-world object: a

simple arithmetical equ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이런 중요한 논점을 진전시키기에 앞서 나는 먼저 어떤 제3세계 대상인 단순한 산술 방정식에 대한 이해의 과정 사례를 약간 상세히 논의해 보겠다.’로 번역되었다.

 

 

 

 

8. 매우 하찮은 사례

 

777 곱하기 11186,247이라는 것은 매우 하찮은 산술적 사실이다. 그것은 방정식으로서 서술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자연수들에 대한 이론의 매우 하찮은 정리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 사소한 명제를 나는 이해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그 주장을 특히 그 주장이 서술되어 있는 것을 내가 볼 때, 그렇지 않으면 내가 86,247만큼 큰 숫자를 다루거나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해한다. (나는 실험을 했고, 나는 86,24786,427과 혼동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들을 때 나는 어떤 의미에서 물론 그것을 즉각 이해한다: 777111은 다루기가 쉽고, 나는 문제의 명제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시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십진법에서 어떤 숫자가 777 곱하기 111과 같은가?

이 문제 해결하기에 관하여,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내 자신은 매우 열심히 노력함에 의하여 겨우 해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결과를 확신하고 싶어 하거나 심지어 다음 순간에 내가 나의 결과를 다른 결과와 혼동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싶어 하면 나는 브리지먼(Bridgman)필산(paper and pencil op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전체 것을, 쉽게 다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 단위들이 있는 연산(algorism) 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물론, 3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 여기서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오류-제거이다: 확립된 필산들로 (paper and pencil operations) 인하여 오류 탐지와 제거가 쉬워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의 문제 해결 도식에서 (6절에서 도입된 도식 P TT EE P ) 발생하는 네 가지 대상들 중에서 세 가지 대상들을 사용했다. 잠정적인 이론인 명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이렇게 묻는다: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여 계산을 했다. 우리가 명제 즉, 잠정적 이론으로부터 (TT) 시작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기초 문제 (P 으로) 나아갔다;a 그리고 나중에는 오류를 제거할 목적인 계산의 방법으로 (EE). 두 번째 문제가 (P ) 등장하는가? 등장한다: 오류-제거의 방법은 정말로 문제 전환을 야기한다: 우리의 경우에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ough we started from a proposition or tentative theory (TT), we proceed from there to the underlying problem (to P );인데 TTP 위치가 뒤바뀐 듯하다.

 

매우 하찮고 퇴행적인 문제 전환 한 가지 곱셈 문제를 세 가지 더 단순한 문제들에 의하여 그리고 덧셈에 의하여 갈음한 것. 문제 전환은 (P 에서 P ) 물론 퇴행적이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이론적 흥미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그러하다 우리는, 그 요점이 해결책을 사용하여 작용하기 더 쉽게 그리고 검토하기 더 쉽게 만드는 (다시 말해서, 오류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것인 틀에 박힌 것을 적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이 극도로 하찮은 사례에서도 우리는 이해하기의 다양한 등급들을 구분할 수 있다.

(1) 언급된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a 이해하기인 자체가 허위임을 깨닫지 못하고 ‘777 곱하기 11168,427이다를 우리가 이해할 의미에서 이해하기.

(2)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이해하기.

(3) 문제에 대한 이해하기.

(4) 해결책이 참이라는 이해하기인데 우리의 경우에서 그것은 하찮게 쉽다.

(5) 어떤 오류 제거의 방법에 의한 진리 조사하기인데 역시 우리의 경우에는 하찮게 쉽다.

분명히 추가적인 이해하기의 등급들이 있다. 특히 (3), 문제에 대한 이해하기는 추가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유인즉 ‘777 곱하기 111’이 십진법 서술로 서술되지 않을지라도 숫자 ‘8 곱하기 10,000, 더하기 6 곱하기 1,000, 더하기 2 곱하기 100, 더하기 4 곱하기 10, 더하기 7’의 동의어를 형성하기와 꼭 동등하게 훌륭한 방법이거나 더 나은 방법인 한 문제가 언어적임을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b 그리고 ‘86,247’은 단지 후자(後者) 명칭을 서술하는 속기 방식임을. 이런 종류의 이해하기는, 일반적으로 당연시되는 배경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예시한다. 그리하여 그 이해하기는 배경 안에 있는 문제를 발견한다.

이해하기의 이 등급들은 물론 통상적으로c 순차적d 순서에 넣어질 수 없다; 추가적이고 더 나은 이해하기의 새로운 가능성들이 거의 모든 요점에서, 특히 덜 하찮은 경우들에서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매우 간단한 사례로부터 매우 많이 배울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심지어 여기서 토론된 방정식과 같은 하찮은 것인 이론이나 명제를 우리가 해석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이해하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것은 항상 문제에 관한 문제로 판명된다; 다시 말해서, 더 높은 수준의 문제.

 

9. 객관적인 역사적 이해하기의 사례

 

이 모든 것은 이해하기의 모든 문제들에, 그리고 특히 역사적 이해하기의 문제에 대하여 성립한다. 나의 주장은, 모든 역사적 이해하기의 주요 목적은 역사적 문제-상황의 가설적 재구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또 다른 보기의 도움을 받아서 다소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겠다: 갈릴레오의 조수이론(theory of tides)에 대한 몇 가지 역사적 고찰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이론은 성공하지 못한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달이 조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 이론이 부인하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시대에는 갈릴레오가 그렇게 명백하게 허위인 이론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면서 자신의 독단론 때문에 심하고 인격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개괄적으로, 조수는 반대로 지구의 복잡한 움직임들의 결과인 가속도들의 결과라고 갈릴레오의 이론은 말한다. 보다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자전하는 지구가 추가적으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을 때, 태양 반대편 서 있는 순간에 위치한 표면 지점의 속도는 12시간 후 그것이 태양과 마주할 때의 동일한 지점의 속도보다 더 클 것이다. (이유인즉 α가 지구의 공전 속도이고 b가 적도상의 어느 지점의 자전 속도라면, α+b는 자정에서의 이 지점의 속도이고 α-b

 

 

정오에서의 그 지점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속도는 변하는데, 이것은 주기적인 가속도들과 감속들이 틀림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하한 유역(流域: basin)의 주기적 감속들이나 가속들은 조수의 모습들을 닮은 모습들이 된다고 갈릴레오는 말한다. (갈릴레오의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다음 형태로 옳지 않다: α0이라면 또한 발생하는 지구 자전에 기인하는 불변 가속과 다시 말해서, 구심 가속도 별도로, 추가적인 가속과 그리하여 특히 주기적 가속은 발생하지 않는다.)

매주 자주 오해를 받은 이 이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이해하기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해하기의 문제(내가 P 로 표시할) 대한 나의 답변은, 우리의 하찮은 산술 방정식과 관련하여 이전에 토론된 이해하기의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의 노선들과 유사한 노선들을 따라서 나아간다.a

나는, 첫 번째이자 매우-중요한 단계는 우리 자신에게 묻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갈릴레오의 이론이 잠정적인 해결책이 되는 (3 세계)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문제가 발생한 상황은 논리적인 문제 상황 무엇이었나?

갈릴레오가 지녔던 문제는, 매우 간단하게, 조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 상황은 간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갈릴레오가 내가 방금 그의 문제라고 지칭한 것에 심지어 즉각적으로도a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를 조수의 문제를 이끌었던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b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진리나 허위의 문제 지구가 움직이고 있었는지 혹은 정지하고 있었는지의 문제. 자신이 조수에 관한 성공적인 이론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는 결정적인 논증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 터임이 갈릴레오의 희망이었다.

내가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으로 지칭하는 것은 복잡한 일로 판명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 문제 상황은 조수의 문제를 수반하지만 특별한 역할에서 그렇게 한다: 조수에 대한 설명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급은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유인즉 갈릴레오의 잠정적인 이론은 변하는 조수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특정 배경에 비추어, 게다가, 특정 주어진 이론적 틀 안에서 조수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 배경은 갈릴레오에게 문제가 아니었던 반면, 내가 갈릴레오의 틀로 지칭하기를 제안하는 것은 고도로 문제가 있었고 갈릴레오는 이 사실을 완벽하게 인식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해하기의 문제(P )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당히 복잡한 제3 세계 대상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판명된다. 그 대상은 자체의 환경과 자체의 배경, 그리고 자체의 틀 함께 조수의 문제로 (갈릴레오의 이론이 잠정적인 해결책이었던) 구성된다: 내가 문제 상황으로 지칭하는 것은 이 복잡한 대상이다.a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은 이와 같이 규정될 것이다.

참된 우주론자이자 이론가로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요 아이디어인 지구와 다른 행성들은 태양의 위성들이라는 아이디어의 믿을 수 없는 용감성과 단순성에 의하여 매료되었다. 이 대담한 아이디어의 설명력은 매우 컸다;

그리고 목성의 위성들 안에서 작은 태양계의 모형을 인식하여 갈릴레오가 목

 

understanding discussed before in connection with our trivial arithmetical equation.인데

similar 이하의 형용사구는 앞의 명사 lines를 뒤에서 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대명사절로 써야

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mmediate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직접적으로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was/is which의 강조구문이 쓰였는데 it was/is ~ that의 오류이다.

 

성의 위성들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아이디어가 지닌 고도의 사변적이고 거의 선험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이것 안에서 이 대담한 구상의 경험적 입증을 보았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예측을 시험하는 데 성공했다:a 그 예측은, 내부의 행성들이 달의 위상들(phases)처럼 위상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금성의 위상들(phrases)을 관찰할 수 있었다.a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프톨레미(Ptolemy)의 이론처럼, 기학학적인 (그리고 운동역학적인) 수단에b 의하여 구축되어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인 우주론적 모형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물리학자였다. 그는, 실제적인 문제는 역학적인 (혹은 아마도 역학을 가로지르는[trans-mechanical]c) 물리학적 설명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런 설명의 요소들 중 몇 가지 요소들을, 특히 관성의 법칙들 및 회전운동들에 대한 상응하는 보존의 법칙들을d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물리학적 지식에는 틀림없이 제3 세계의 격차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지라도, 대담하게 자신의 물리학을 이 두 가지 보존법칙들에만 근거시키려고 시도했다. 방법의 관점에서 갈릴레오는 모든 것이 매우 좁은e 근거를 기초로 설명하려고 시도함에서 전적으로 옳았다; 이유인즉 우리의 오류 가능성이 있는 이론들을 한계까지 이용하여f 시험하려고 노력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 이론들의 실패로부터 배우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갈릴레오가 자신이 케플러(Kepler)의 저작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성들의 원운동(circular motions) 가설을 고수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원운동이 그의 기본적인 보존 법칙들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을 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그가 그렇게 한 것을 전적으로 옳았다.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궤도들에 대한 난제들을 은폐하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는 코페르니쿠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각각 In addition to all this, he had been successful in testing a prediction derivable from Copernicus’s theory: and Galileo had been able to observe the phases of Venus인데 시제를 대과거인 had been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mea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기관에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초역학적인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the corresponding conservation law for rotary mo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자전운동에 대응하는 보존법칙을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narrow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엄밀한으로 번역되었다.

f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exploi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개발하여로 번역되었다.

 

스의 이론을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했다고 흔히 언급된다; 또한 그가 틀림없이 케플러(Kepler)의 법칙들을 수용했다고.a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이해하기에 대한 실패를 3 세계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의 오류 보여준다. 갈릴레오는 대담한 과도한-단순화로써 연구를 하는 데서 전적으로 옳았다; 그리고 케플러(Kepler)가 말하는 타원들은 또한 과도한 단순화이면서 갈릴레오의 원들(circles)만큼 꼭 대담했다. 그러나 케플러(Kepler)는 자신의 과도한-단순화들이b 뉴튼에 의하여 자신의 이체문제(二體問題: two-body problem)에 대한 해결책의 시험으로서 사용되고 그리하여 설명된 것을 곧 경험함에서 운이 좋았다.

그러나 왜 갈릴레오는 조수에 미치는 달의 영향에 관하여 이미 잘-알려진 개념을 배척했는가? 이 물음은 문제 상황의 고도로 중요한 국면을 드러낸다. 먼저, 갈릴레오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행성들을 신들(gods)과 동일시하던 점성술의 반대자였기 때문에 달의 영향을 배척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케플러(Kepler)를 찬양했을지라도, 계몽주의 선구자였으며 또한 케플러(Kepler)의 점성술을 반대했다. 두 번째, 그는 자전 운동들에 관한 역학적인 보전 원리로써 연구를 했고 이것은 행성간의 영향을 배제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 매우 좁은 토대를 근거로 조수를 설명하려는 갈릴레오의 시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 토대가 너무 좁았다는c 것과 추가 개념이 뉴튼의 인력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과 함께, [force]이라는 개념) 필요했다는 것을 그렇게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 터이다; 거의 점성술적 개념들의 특징을 지녔고 버클리(Berkely)와 같이 매우 개명한 사람들에 의하여 마술적으로 느껴졌던 개념들. 그 개념들은 심지어 뉴튼 자신에 의해서도 마술적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 의하여, 갈릴레오가 다양한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은 몇 가지 요점들에서 갈릴레오의 방법이 지닌 합리성을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는 갈릴레오를 역사적으로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야망, 질투, 혹은 공격성이나d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소망과 같이 시도된 심리학적 설명들은 불필요하게 된다. 그것들은 여기서 제3 세계의 상황 분석에 의하여 대체된다. 유사하게 갈릴레오가 원운동을 고수했기 때문에 독단론으로 인하여 그를 비판하거나 신비로운 원운동에 신비로운 심리학적 매력을 도입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된다.a (딜타이[Dilthey]는 그것을 전형적인 개념이나 심리학적으로 매력적인 개념으로 부른다.) 이유인즉 갈릴레오의 방법은, 자신이 자전 운동들에 대한 합리적인 보존 법칙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가려고 노력했을 때, 옳았기 때문이다.b (아직 역학 이론이 없었다.c)

이 결과는, 그가 처했던 객관적인 문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이해하기와 함께 어떻게 갈릴레오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이해하기가 성장했는지를 틀림없이 예시한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 상황을 P 에 의하여 표시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 문제 상황이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저 P 과 유사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갈릴레오의 잠정적 이론을 TT에 의하여 표시할 수 있고, 그 이론을 비판적으로 토론하여 오류들을 제거하려는 그 자신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도들을 우리는 EE에 의하여 표시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희망에 차있었을지라도 자신의 토론 결과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P 가 그의 P 과 매우 근접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훨씬 나중에 그 문제는 문제 상황에서 (P ) 혁명적인 변화를 (뉴튼 때문에) 낳았다: 뉴튼은 갈릴레오의 틀을 갈릴레오의 문제가 상상된 보존 법칙들의 틀 확대했다. 뉴튼의 혁명적인 변화의 한 부분은, 그가 달(moon)을 이론 속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조수 이론으로부터의 달(moon)의 추방은 갈릴레오의 이론의 틀의 (동시에 배경)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요약하면, 갈릴레오의 물리학적 틀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모형을 다소 단순화한 형태였다. 그 틀은 불변의 자전 속도를 지닌 원들의 (그리고 아마도 주전원들[周轉圓: epicycles]) 체계였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갈릴레오가 관성의 법칙과 그 법칙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완벽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했던 갈릴레오의 원운동의 개념에 대한 집착에 관하여 비평했다. 그러나 그는, 뉴튼의 이론이 관성의 법칙이나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근거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불변의 속도들을 고수하는 자체의 더 단순한 형태로 원-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론은 그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선호된 형태였다 원래 각운동량(角運動量: angular momentum) 보존의 법칙에 근거했음을 잊었다. 두 가지 보존 법칙들 모두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마도 실제적인 경험의 압력을 받는 추측들의 선택과 같은 것 때문에 본능적으로믿어졌다: 각운동량(角運動量: angular momentum) 법칙에 관하여 기름이 찰 쳐진 마차 바퀴들에 의한 경험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천제들의 원형 자전에 관한 고대 이론이 (이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궁극적으로 지구의 자체 각운동량(角運動量: angular momentum) 보존에 의하여 대체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들은 (cycles) 여전히 흔히 생각되는 만큼 단순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았다는 징표. 이 틀 안에서 점성술사들의 틀과 반대로 천제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수에 관한 달 이론은 점성술사들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갈릴레오에 의하여 배척되어야 했다.

이 사례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가? 나는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 사례는 갈릴레오의 이론을 (TT) 이해하기 위한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의 재구축이 지닌 엄청난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재구축의 중요성은, 성공적인 이론들을 위해서보다 갈릴레오의 이론과 같은 성공적이지 못한 이론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훨씬 더 큰데 이유인즉 성공적이지 못한 이론이 지닌 결함은 (TT의 결함) P 의 틀 안이나 배경 안에서의 결함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현재의 경우에서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의 (P ) 재구축이 이번에 추측(그리고 또한 과도한 단순화나 이상화[idealization])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이것은, 이 문제 상황에 (P ) 대한 나의 분석이 개괄적일지라도 갈릴레오의 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다른 사람들의 분석으로부터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는 것을 고려하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P 재구축이 추측이라면, 이 추측이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 문제는 갈릴레오의 이론 이해하기의 문제P 이다.

나의 세 번째 요점은 이렇다: 우리의 이해하기 문제인 P P 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하기의 문제는 상위문제(metaproblem)이다: 그 문제는 TT에 관한 것이고 그리하여 또한 P 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해하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안된 이론은 상위이론(metatheory)인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그 과제의 한 부분이 모든 특정 경우에서 P , TT, EE, 그리고 P 가 무엇으로 실제로 구성되는지를 발견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a

이것은, 부언하여, 도식 자체는 ( P TT EE P )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반면 모든 특정 경우에서 P , TT, 기타 등등의 구조들상위이론(metatheory)에 의하여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도식은 과도한 단순화여서 필요한 경우가 발생할 때마다 상세하게 설명되거나 심지어 근본적으로 변경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나의 네 번째 요점은, 이론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가장 하찮은 시도를 제외하고) 이 이론과 이 이론이 지닌 문제에 관한 역사적 조사를 개방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은 그리하여 조사 대상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a 이론이 과학적인 것이었다면, 조사는 과학의 역사 속으로 향하는 조사일 것이다. 이론이, 가령, 역사와 관련된 이론이었다면 조사는 역사기록학의 역사 속으로 향하는 조사일 것이다.b 이 역사적 조사들이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문제들은, 조사 중인 대상들인 문제들과 예리하게 구분되는 상위문제들(metaproblems)일 것이다.

나의 다섯 번째 요점은, 과학의 역사가 이론들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문제 상황들과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의 개입을 통한 그 상황들의 수정들의 (때때로 감지될 수 없고, 때때로 혁명적인) 역사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들은 꼭 성공적인 시도들만큼 추가 발전을 위하여 중요했던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나의 여섯 번째 요점(세 번째 요점을 상술할 따름인), 우리는 과학 역사가들의 상위문제들(metaproblems) 및 상위이론들(metatheories)(P 수준에 있는) 과학자들이 지녔던 문제들 및 이론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혼합하는 것은 너무나 쉬울 따름인데 이유인즉 우리가 갈릴레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함에 의하여 역사가의 문제를 정식화한다면 답변은 P 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P (‘갈릴레오의 문제가 P 이었던 것과 반대로) 상위수준(metalevel)이라기보다는 대상 수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두 가지 수준들은 혼동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수준들에 공통적인 문제들을 일반적으로 없다.c 이것은 쉽게 알려진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두 가지 잠정적인 상위이론들(metatheories)은 흔히 매우 다르다. ‘사실들에 관하여 동의하는 과학 역사가들은 그 사실들을 매우 다른 방식들로 (때때로 보완적 방식들로, 때대로 심지어 갈등적 방식들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문제들인 것에 관하여 의견을 달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그들은 서로 문제들을 공유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그들의 조사 및 해석의 대상인 이론에 관하여서도 더욱a 공유하지 않을a 것이다.

또한 이론을 해석하기 위하여, 상위이론가(metatheorist)는 도움이 될 어떤 것도 자유롭게 이용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이론을 몇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이론들과 대조할 것이다. 그리하여 상위이론(metatheory)을 구성하는 제3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 중 몇 가지 단위들은, 해석되거나 이해될 이론을 구성하는 단위들과 전혀 유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요점은 중요하다. 그 요점은, 한편으로는 제3 세계의 사유-내용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내용들을 파악하는 제2 세계의 사유-과정들 사이의 유사성과 같은 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말할지라도 (내가 부인하고 싶은) 나는 여전히 내용들과 상응하는 사유-과정들 사이에 문제들의 수준에서 유사성이 실제로 일반적으로 있다는 것을 부인해야함을 더 강력한 이유 때문에b 확립한다. 이유인즉 내가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 역사적 이해하기의 제3 세계 방식은, 가능한 곳에서 마다 심리학적 설명들을 3 세계 관계들에 대한 분석에 의하여 대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인 설명적 원리들 대신에 우리는 주로 논리적 특징을 지닌 제3 세계 고찰들을 이용한다; 그리고 나의 주장은, 그런 분석들로부터 우리의 역사적 이해하기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일곱 번째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점은 내가 때때로 상황 논리상황 분석으로 기술한 것과 관련된다. (후자[後者] 명칭이 선호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자[前者]는 인간 행위에 대한 결정론적 이론을 제안하는c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을 제안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결코 아니다.)

상황 분석에 의하여 나는, 대행인이 (代行人: agent) 자신이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배우는 상황의 도움을 받는 어떤 인간 행위에 대한 특정 종류의 잠정적이거나 추측적인 설명을 의미한다.d 그것은 역사적 설명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개념들의 특정 구조가 어떻게 그리고 왜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어떤 창조적 행위도 완벽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a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행인(代行人: agent)이 자기가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배운 문제 상황의 이상화된 재구축을 제시하려고 그리고 저 정도까지 그 행위를 이해 가능하게’ (혹은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다시 말해서 그가 그 상황을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의 상황에 합당하게 만들려고 추측성으로 노력할 수 있다. 이 상황 분석의 방법은 합리성 원리의 적용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대행인이 (代行人: agent) 상황을 보았던 것과 같은 상황과 과거의 상태와 같은 상황으로서 상황을 (두 가지 모두는 물론 추측된 것이다) 구분하는 것은 상황 분석에 관한 과제일 터이다. 그리하여 과학 역사가는 상황 분석에 의하여 과학자에 의하여 합당한 것으로서 제안된 이론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과학자의 실패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추측과 반박에 의한 우리의 문제-해결 도식이나 유사한 도식은 인간 행위들에 대한 설명적 이론으로서 사용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행위에 대한 설명적 이론은, 주로, 문제와 문제의 배경에 대한 추측성 재구축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시험될 가능성이 높다.b

나는 다음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어떻게 과학적 이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하기를 향상시킬 수 있는가?그리고 나는, 문제들과 문제 상황들을 통한 나의 답변은 과학적 이론을 멀리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a.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경우들에서, 나의 답변을 심지어 예술작품들에게도 적용할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추측할 것이고 우리는 독립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석은 우리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과학적 이론을 해석하는 과제와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것 사이의 다소 중간적인 입장은, 훼손된 예술 작품을 재구축하는 가령 훼손된 파피루스의 형태로 발견된 시[]를 재구축하는 과제에 의하여 추구될 것이다.)

 

10. 문제들이 지닌 가치

 

우리는 어떻게 과학적 이론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하기를 향상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제안한 해결책이 문제를 전환시킬 뿐이라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이유인즉 그 해결책은 다음 관련된 문제에 의하여 자체를 갈음할 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과학적 문제를 이해할 수 있거나 그 문제 이해하기를 향상시킬 수 있는가?’

반론은 유효하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문제 전환은 진보적인 문제 전환일 (라커토스[Lakatos] 교수의 언어사용법을 이용하여) 것이다. 통상적으로, 두 번째 질문이 문제 이해하기의 상위문제(metaproblem) 첫 번째 질문보다 더 어렵고 더 흥미로울 것이다. 아무튼 나는, 두 번째 질문이 두 가지 질문들 중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과학이 문제들로부터 (인정되는 바와 같이 문제의 배경이 이론들과 허구들을 포함할지라도, 관찰들로부터 혹은 심지어 이론들로부터 라기 보다는)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것이 어떻든 간에, 이 두 번째 상위문제는 (metaproblem) 첫 번째 문제와 다르다고 나는 제안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첫 번째 문제를 다루었던 것과 같이 두 번째 문제를 이상화하는(idealizing) 역사적 재구축을 통하여 항상 다룰 수 있고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불충분하다고 제안한다.

나의 주장은, 주어진 문제에 (가령, 갈릴레오의 문제 상황) 대하여 실제적인 이해하기를 얻기 위하여 이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어떤 훌륭한 해결책이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문제에 대한 분석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죽은(dead)’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틀림없이 적어도 우리 인생에서 한 번은 어떤 살아있는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을 했다a.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는 과학적 문제 이해하기를 배울 수 있는가?’라는 상위문제(metaproblem)에 대한 나의 답변은: 어떤 살아있는 문제 이해하기를 배움에 의하여. 그리고 이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함에 의해서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함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젊은 과학자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와 마주친다고 기정하라.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가 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고 자신의 해결책을 자신이 비판할 (혹은 자신의 해결책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비판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해결책은 실패작일 것이다; 비판에 의하여 밝혀질 사실. 이런 방식으로 첫 번째 단계는 난관이 놓여있는 곳을 적시함을 향하여 수행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첫 번째 단계가 문제 이해하기를 향하여 수행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유인즉 문제는 난관이고, 문제 이해하기는 난관이 있다는 것과 난관이 놓여있는 곳을 발견하는 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왜 특정 처음 보기에 해결책들인 것들이 작동하지 않는지를 발견함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a 역주: 이 동사 부분의 원문 표현은 must have wrestl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씨름해야

한다로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그리고 실패함에 의하여 문제 이해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가 100번 실패했을 때 우리는 이 특정 문제와 관련하여 심지어 전문가들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해결책을 제안한다면, 우리는 이 제안에 대한 성공 전망이 있는지 혹은 제안이 우리 자신의 과거 실패들로부터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저 난관들 때문에 실패할 것인지를 우리는 즉각 알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 이해하기를 배우는 것은 제3 세계의 구조적 단위들을 다루는 문제이다; 그리고 문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 단위들과 그 단위들이 지닌 논리적 상호관계들에 친숙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이론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살아 있는 문제들과 그렇게 씨름을 한 사람만이 갈릴레오의 문제와 같은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한다a; 이유인즉 오직 그가 그 자신의 이해하기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그가, 이론 이해하기를 향한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가 이론이 출현하는 문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나의 주장이 지닌 중요성을 완전하게 이해할 (말하자면, 3의 수준에서b) 것이다.

나는 또한, 한 가지 분야에서 또 다른 분야로의 학습 이전에 대하여 많이 토론된 문제는 살아 있는 문제들과 씨름을 하면서 경험을 얻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제안한다. 어떤 주어진 이론적 틀을 이 틀 안에서 출현하는 그리고 이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적용하는 방법만 학습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훈련이 또 다른 전문분야에서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c 그들 자신이 문제들과 씨름을 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들의 이해하기와 설명과 정식화가 난해한 것으로 판명되었다면, 상황이 다르다.d

그리하여 나는, 문제와 씨름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동떨어진 분야에 대한 이해하기를 얻음에 의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멀리 우리가 상황 분석을 (문제 해결에 대한 개념a) 미술, 음악 그리고 운문에 적용할 수 있는지와 상황 분석이 이 분야들에서의 우리의 이해하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흥미롭고 유익할 것이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상황 분석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위한 베토벤의 비망록들은, 이 악장의 도입부가 문제를 단어들로 새롭게 시작하는 문제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준다. 이것을 아는 것은 그 음악과 그 음악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하기에 도움이 된다.b 이 이해하기가 그 음악을 우리가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11. 인문학에서의 이해하기 (“해석학”)

 

이로 인하여 나는 인문학에서의 이해하기라는 (인문학 [Geistewissenschaften]) 문제에 도달한다.

이 문제를 역구하는 훌륭한 학자들 거의 모두는 나는 딜타이(Dilthey)와 콜링우드(Collingwood)만을 언급하겠다 인문학이 자연과학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그리고 가장 특출한 차이점은 다음에 놓여있다고 판단한다: 인문학의 핵심적 과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하기라는 것.

이해하기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닌 인간성에 근거한다고 언급된다. 이해하기는 자체의 근본적인 형태에서 일종의 타인들과의 직관적인 동일시인데 그 안에서 우리는 몸짓들이나 말과 같은 표현적인 움직임들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동일시는, 나아가, 인간 행위들에 대한 이해하기이다. 그리고 그 동일시는, 궁극적으로, 인간 정신의 산물들에 대한 이해하기이다.

여기에서 지적된 의미에서 우리가 자연태양계, 분자들, 혹은 소립자들 이해할 수 없는 반면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들 및 산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예리한 구분이 없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의미와 매우 유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고등동물들의 표현적 움직임들 이해하기를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고등동물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이해하기는 그 움직임들에게 국한되는가? (H. S. 제닝스[Jennings]는 목표들과 의도들을 단세포 생명체들에게 귀속시킬 정도로 충분히 잘 그 생명체들 이해하기를 알았다.) 이것과 반대로a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직관적 이해하기는 완벽함과 거리가 멀다.

나는, 이해하기가 인문학의 목표라는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기가 자연 과학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해야 하는지 의심한다. 물론 그 이해하기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 이해하기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사람들의 행위들을 이해하기에는 이미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보른(Born)에게 보낸 서한에서 적은 다음과 같은 서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하느님을 믿고, 나는 내가 통제되지 않은b 사변적인 방식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어떤 객관적인 실재의 세계 안에서 완벽한 법칙의 지배를c 믿는다.’

실재를 발견하려는 아인슈타인의 통제되지 않은 사변적인 시도들은, 이해하기라는 단어에는 인문학에서의 이해하기와 관련하여 적어도 네 가지 유사성들이 있는 그 단어의 의미에서 실재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나는 확신한다. (1)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이해할 것이다. (2)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사유들과 행위들의 어떤 합리성에 때문에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연법칙들에 내재한 어떤 종류의 합리성이나 이해 가능한 필연성 때문에 자연법칙들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헤시오드(Hesiod)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아낙시맨드(Anaximander) 이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의식적인 희망이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먼저 뉴튼의 중력이론에서 그 다음에는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서 적어도 일시적인 어떤 잠정적인 완성에 도달했다. (3) 아인슈타인의 서한에 언급된 하느님에 대한 언급은 인문학과 공유된 또 다른 의미를 자연의 세계를 우리가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지적한다. 그리고 (4) 자연과학들에는, 인문학 연구자들에 의하여 많이 토론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다름(otherness)’인 실재적인 스스로-이해하기의 불가능성과 독특하고 실재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내재한 과도한 단순화의 불가피성에 귀속된 우리가 지닌 모든 이해하기의 노력들의 궁극적인 실패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실재가 우주적인지 혹은 소우주적(小宇宙的: microcosmic)a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고 부언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해하기의 방법을 인문학의 특징인 우리가 인문학을 자연과학들과 구분할 표시로서 선언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 특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의 견해와 같은 견해를 실증주의적이나 과학주의적으로서 비난할 때, 나는 아마도 그들 자신들이 실증주의나 과학주의가 자연과학들에 적절한 유일한 철학임을 묵시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이 보인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이 과학주의적 철학을 수용한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이해될 수 있다.b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연구자들은 아마도 더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과학은 결국 문학의 한 분야이다; 그리고 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성당을 짓는 것과 같은 인간의 행위이다. 물론 현대 과학에는 전문분야가 너무 많고 전문성이 너무 많은데 그로 인하여 현대 과학은 비인간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하게도 거의 자연과학들에서만큼 현대

역사학이나 심리학에서도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역사의 한 가지 중요한 분야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분야 있는데 인간 견해의 역사인 인간 지식의 역사로 그 역사는 종교의, 철학의 그리고 과학의 역사로 구성된다. 이제 과학의 역사에 관하여 두 가지 것들이 있다. 한 가지는 과학을 (다시 말해서, 과학적 문제들) 이해하는 인간만이 과학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과학의 역사에

(과학의 문제 상황들에 대한 역사) 대하여 어떤 실제적 이해하기를 지닌

사람만이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차이점을 상술하는 것은 오랫동안 유행이었고

지루한 일이 되었다. 문제 해결하기의 방법인 추측과 논박의 방법은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 의하여 실행된다. 그 방법은 방사선 이론 구축에서 뿐만 아니라

훼손된 문헌을 재구축에서도 실행된다.

그러나 나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서 적어도 몇몇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의

과학주의에 관하여 비판해야겠다: 자연과학의 방법을 그 방법의 실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잘못 주장되는 것으로서 자연과학의 방법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관하여. 주장은 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방법은, 관찰사항들을 수집하여 그 다음 그 관찰사항들로부터 결론들을 도출하는방법이다. 그 방법은, 자연과학의 관찰사항들에 상응하여 자기들의 결론들에 대한 경험적 근거를 형성하는 문헌적 증거를 자기들이 수집할 수 있다고 믿는 몇몇 역사가들에 의하여 노예처럼 모방된다.

이 주장되는 방법은, 결코 실행될 수 없는 방법이다: 여러분은 먼저 문제를 지니지 않으면 관찰사항들이나 문헌적 증거를 수집할 수 없다. (집표원은 서류를 모으지만 역사적 증거를 모으지는 않는다.)

적용될 수 없는 방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역사가들이 과학의 이상으로서 오해하는 확실한 혹은 무오류의 혹은 권위적인 지식이라는 우상의 숭배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 모두는 오류를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가 오류를 저질렀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를 피하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이상(ideal)이다: 매우 어려워서 오류를 거의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우리가 감히 다루지 않는다면 지식의 성장을 없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오류인 이론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대담한 이론들로부터이다; 훌륭한 일은 그 이론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12. 주관적 재연이라는 콜링우드(Collingwood)의 방식과의 비교

 

역사에 대한 상황 분석의 적용을 예시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적용을 주관적 이해하기라는 제2 세계의 방법과 대조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자 역사기록학 연구자인 R. G. 콜링우드(Collingwood)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나는 콜링우드(Collingwood)로부터 이 구절을 인용하겠는데 왜냐하면 나는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아주 많은 정도까지 그에게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2 및 제3 세계들의 쟁점들에 관하여 결별한다: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쟁점. (우리는 문제 상황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동의한다.) 사물들을 표현하는 콜링우드(Collingwood)의 심리학적 방법은 전혀 정식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그 방법은 그의 이해하기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딜타이[Dilthey]가 자의성을 두려워해서 주관성을 배제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그 방법이 그의 방법이 것과 마찬가지도.)

콜링우드(Collingwood)에게서 유래하는 글귀가 예시하는 바와 같이, 그의 주장은 역사에 대한 역사가의 이해하기는 과거 경험들에 대한 그의 재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가 (역사가) 테오도시우스의 법전을 읽고 있고 자신 앞에 어떤 황제의 칙령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라....a 단지 단어들을 읽고 그 단어들을 번역할 수 있는 것은 그 단어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아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저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황제가 다루려고 시도하고 있던 상황을 상상해야 하며 그는 그 상황을 저 황제가 상상했던 것처럼 상상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바로 황제의 상황이 자기 자신의 상황인 양 어떻게 그런 상황이 혹시 다루어질지를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는 가능한 대안들과 또 다른 대안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대안을 선택하는 이유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특정 과정을 결정하면서 황제가 겪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정신 속에 황제의 경험을 재연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하는 한에서만 그는 칙령의 의미에 관하여 문헌학적 지식만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역사적 지식을 지닌다.

 

여러분은, 콜링우드(Collingwood)상황(내가 문제 상황으로 지칭하는 것에 밀접하게 상응하는) 크게 강조함을 알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역사 이해하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상황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원래 경험의 공감적 반복인 역사가의 정신적 재연 과장이라고 제안한다. 콜링우드(Collingwood)에게 상황 분석은 단지 이 재연을 위한 보조로서 필수불가결한 보조 역할을 한다. 나의 견해는 완전히 반대다. 심리학적 재연 과정이 때때로 역사가의 상황 분석의 성공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검토인 역사가를 위한 보조로서 역할을 할 것임을 내가 수용할지라도 나는 그 과정을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간주한다. 본질적인 것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은 재연이 아니라 상황 분석이다. 상황에 대한 역사가의 분석은, 이 경우에 황제의 추론에 관한 상위이론(metatheory)인 그의 역사적 추측이다. 황제의 추측과 다른 수준에 있기 때문에a 그 분석은 황제의 추측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 아닌 요소들을 생략하고 아마도 그 추측을 확대하면서 그 추측의 이상화되고 추론된 재구축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역사가의 핵심적인 상위문제는 (metaproblem): 황제의 문제 상황에서 결정적인 요소들은 무엇이었던가? 역사가가 자신의 상위문제를 (metaproblem) 해결하는 데 성공하는 정도까지, 그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다.

그리하여 역사가로서 그가 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들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측성 상황 분석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객관적인 논증들을 조직하는b 것이다.

이 방법은, 심지어 재연 시도가 반드시 실패하는 저 경우들에서도 매우 성공적일 것이다. 이유인즉 많은 정도들로 행동에 대한 그리하여 재연에 대한 역사가의 능력을 초월하는 행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연될 수 있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잔인성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행위는 최고의 영웅주의적 행위이거나 비열한 비겁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행위는 역사가의 능력들을 멀리 초월하는 예술적 또는 문학적 또는 과학적 또는 철학적 업적일지도 모른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가 분석하고자 시도하는 분야에서의 그의 능력들이 충분하지 않다면, 그의 분석을 흥미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가 시저, 키케로, 카툴루스(Catullus) 그리고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의 재능들을 겸비한다고 기대할 수 없다 (콜링우드[Collingwood]가 제안하는 듯한 바와 같이). 어떤 미술사학자도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위대한 걸작을 모방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c

가장 흥미로운 경우들에서d 재연은 역사가에게 실행 불가능할 것인 반면, 다른 경우들에서 재연은 완벽하게 가능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상황이 분석되자마자 대행인(代行人: agent)의 행위가 하찮고도 평범한 방식으로 상황에 적당했던 것이 명백해지는 저 무수한 하찮은 경우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가의 과제는 문제 상황이 대행인(代行人: agent)에게 보이는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Being on a level different from the emperor’s reasoning인데

different 이하의 형용사구가 명사 level을 뒤에서 수식할 수 없다. 따라서 Being on a different level from the emperor’s reasoning으로 써야 한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marsh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증대시키는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앞의 두 문장의 원문은 No historian of art can be a Rembrandt; and few will even be able to copy a great masterpie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떤 미술사학자도 렘브란트가 될 수 없으며 위대한 걸작을 모사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n the most interesting cas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대부분의 흥미 있는 경우들에서로 번역되었다.

 

 

바로서 그 상황을 그렇게 구축하는 것이어서 대행인(代行人: agent)의 행위들은 상황에 적당하게 된다. 이것은 콜링우드(Collingwood)의 방법과 매우 유사하지만 이것은 이해하기 이론으로부터 그리고 역사적 방법으로부터, 콜링우드

(Collingwood)와 대부분의 다른 이해하기 이론가들에게 (해석학자들) 자체의 핵심적인 요점인 정확하게 주관적인 즉, 2 세계의 요소를 제거한다.a

상황에 대한 우리의 추측성 재구축은 실재적인 역사적 발견일지도 모른다. 그 재구축은 지금까지 설명되지 않은 역사의 한 모습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재구축은 새로운 증거에 의하여, 예를 들어 그 재구축이 혹시 우리의 주의를 이전에 간과되었거나 설명되지 않은 언급들로 이끎에 의하여 어떤 서류에 대한 우리의 이해하기를 향상시킬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3 세계라는 개념이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하기를 합리적 비판의 객관성과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해하기 이론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a을 보여주려고 나는 노력했다.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4.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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