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학의 목표
과학적 활동의 ‘목표’를 말한다는 것은 혹시 다소 철없는 소리로 들리지도 모른다; 이유인즉 분명히, 다양한 과학자들이 다양한 목표들을 지니고 있고 과학 자체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목표들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을 말할 때 우리는 과학적 활동에 특징적인 것이 있다고 우리는 다소 분명하게 정말로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과학적 활동이 상당히 합리적 활동처럼 보이기 때문에 또 합리적 활동에는 틀림없이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에a, 과학의 목표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전혀 쓸데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설명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설명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고 나는 제안한다b. 설명에 (혹은 인과적 설명) 의하여, 다른 서술들인 설명적 서술들은 그 단어의 더 협소한 의미에서 ‘설명’을 (피설명항[explicandum]의 설명항[explicans]) 형성하는 반면 우리가 설명될 사태를 기술하는 서술들의 (피설명항[explicandum]) 집합이c 의미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피설명항(explicandum)이 참으로 다소 잘 알려졌거나 혹은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전제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유인즉, 전적으로 상상적인 것으로 밝혀질 사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접시들이 그런 경우들을 대표할 것이다: 필요한 설명은 비행접시들에 관해서라 아니라 비행접시들에 대한 보고서들에 관한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접시들이 존재한다면, 보고서들에d 대한 추가 설명이 요구되지 않을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 설명항(explicans)은 우리의 탐구 대상인데 통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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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Ratio, i권, 1호, 1957년 12월, 24-35쪽에 처음 발표된 논문의 수정본이다. 뉴튼의 이론에 의한 갈릴레오의 이론 및 케플러의 이론 수정에 대한 간략한 토론은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 이론과 실재(Theorie und Realität), 1964년에 (특히 100쪽 참조) 재인쇄된 지몬 모제르(Simon Moser) (편집), 법칙과 진리(Gesetz und Wirklichkeit), 1949년 (특히 57쪽 이하 참조)에 대한 나의 기고문에서
최초로 발표되었다. 이 논문의 영어 번역은 현 저서의 부록 I에서 발견될 것이다.
a 역주: 두 번째 종속적인 ‘또 합리적 활동에는 틀림없이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에’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ugge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주장한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e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d 역주: 이 단어는 원어로 강조되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강조되지 않았다.
으로a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설명은, 그 설명이 발견일 때마다b, 미지의 것에 의하여 알려지는 것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설명항(explicans)은, 만족스럽게 되기 위하여 (만족스러움은 정도의 문제일 것이다), 몇 가지c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그것은 피설명항(explicandum)을 논리적으로 함유해야 한다. 둘째로, 설명항(explicans)은, 일반적으로 참으로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참이어야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설명항(explicans)은 심지어 가장 비판적인 시험 이후에도 허위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설명항(explicans)이 참으로 알려지지 않으면 (통상적으로 사실일 것과 같이d) 설명항(explicans)을 선호하는 독립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설명항(explicans)은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명항(explicans)이 독립적인 시험들의 더 큰 엄격함에서 살아남았을수록 우리는 설명항(explicans)을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여길 것이다.e
나는 여전히 나의 ‘독립적인’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그 반대표현들인 ‘임시방편적인(ad hoc)’ 및 (극단적인 경우들에는) ‘순환적인(循環的인: circular)’과 함께 설명해야 한다.
α를 참으로 알려진 피설명항(explicandum)으로 하라. 하찮은 말이지만 α가 α 자체로부터 귀결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α를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 경우에 설명항(explicans)이 참이라는 것과 피설명항(explicandum)이 설명항(explicans)으로부터 귀결된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지라도, 극도로 불만족스러울 터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설명들의 순환성(循環性: circularity) 때문에 이런 종류의 설명들을 배제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순환성(循環性: circularity)은 정도의 문제이다. 다음 대화를 참작하라: ‘오늘 바다는 왜 거친가?’ ㅡ ‘해신(海神: Neptune)이 매우 화가 나서’ ㅡ ‘어떤 증거에 의하여 당신은 해신(海神: Neptune)이 매우 화가 났다는 서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가?’ ㅡ ‘오, 당신은 바다가 얼마나 매우 거친지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해신(海神: Neptune)이 화가 났을 때 바다는 항상 거칠지 않은가?’ 이 설명은, (완전히 순환적인 설명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설명항(explicans)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피설명항(explicandum) 자체이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밝혀진다. 이런 종류의 거의 순환적이거나 임시방편적인 설명이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느낌과, 이런 종류의 설명들은 회피되어야 한다는 상응하는 요건들은 과학 발전의 주요 동력들 중의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불만족은 비판적이거나 합리적 접근방식의 최초 결실들 중의 하나이다.
설명항(explicans)이 임시방편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설명항(explicans)은 내용에서 풍요로워야 한다: 설명항(explicans)에는 다양한 시험 가능한 결론들이 있어야 하고 특히 그 결론들 가운데서 피설명항(explicandum)과 다른 시험 가능한 결론들이 있어야 한다. 내가 독립적 시험들이나 독립적 증거를 말할 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이 이 다양한 시험 가능한 결론들이다.a
이 언급들이 혹시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설명항(explicans)이라는 직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데 다소 도움을 줄지라도, 그 언급들은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시험 가능한 설명을 규정하는 데 여전히 전혀 충분하지 않다. 이유인즉 α가 우리의 피설명항(explicandum)이라면 ㅡ α를 다시 ‘바다가 오늘 거칠다’로 하라 ㅡ 설명항(explicans)에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결론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완전히 임시변통적인 매우 불만족스러운 설명항(explicans)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결론들을 우리가 좋아하는 바로서 선택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이 자두들은 과즙이 많다’ 그리고 ‘모든 까마귀들은 검다’를 선택할 것이다. b를 그것들의 결합으로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α와 b의 결합만을 설명항(explicans)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술된 우리의 모든 요건들을 충족시킬 것이다.
설명이 전칭명제들이나 자연법칙들을 (초기조건들에 의하여 보완되는) 이용할 것을 우리가 요구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독립적이거나 비-임시방편적인 설명들이라는 개념들의 실현을 향하여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이유인즉 보편적인 자연법칙들은 풍요로운 내용을 지닌 서술들일 것이어서 그 법칙들은 도처에서 그리고 언제라도 독립적으로 시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법칙들이 설명들로서 사용된다면, 그 법칙들로 인하여 우리가 피설명항(explicandum)을 재생될 수 있는 효과의 사례로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법칙들은 임시방편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험 가능한, 다시 말해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들에게 국한시킨다면, 참일 따름이다.
‘어떤 종류의 설명이 만족스러운가?’라는 질문은 그리하여 다음 답변을 낳는다: 시험 가능하고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a 보편적인 법칙들과 초기조건들을 통한 설명.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설명은 이 법칙들이 더 고도로 시험 가능할수록 그리고 그 법칙들이 더 잘 시험되었을수록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b (이것은 초기조건들에도 또한 적용된다.)
이런 방식으로, 만족스러운 설명들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는 추측으로 인하여 우리는 설명들의 시험가능성 등급을 향상시킴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더 잘 시험될 수 있는 이론들로 나아감에 의하여 설명들의 만족스러움 등급의 향상이라는 개념에 나아가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언제나 더 풍요로운 내용을 지닌, 더 높은 보편성의 등급들을 지닌 그리고 더 높은 정밀성의 등급들을 지닌 이론들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론과학들의 실제적 관행을 따른다.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과에 또한 도달할 것이다.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면, 지금까지 설명항(explicans)으로서 수용된 것을 설명하는 것이 또한 과학의 목표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법칙. 그리하여 과학의 과제는 부단히 자체를 혁신한다. 우리는 점점 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지닌 설명들로 나아가면서 영원히 계속할 것이다 ㅡ 정말로 우리가 궁극적 설명에 도달하지 않는다면c; 다시 말해서, 추가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은 설명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궁극적 설명들이 있는가? 내가 ‘본질주의(essentialism)’으로 칭한 교설은, 과학은 본질들을 통한 궁극적 설명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에 해당한다a; 우리가 사물의 행태를 그 사물의 본질을 ㅡ 사물의 본질적 속성들을 ㅡ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질문이 제기될 수 없고 어떤 질문도 제기될 필요가 없다 (혹시 본질들의 창조자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제외하고).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이, 연장(extension)이라고 가르쳤던 물리적 물체의 본질을 통하여 물리학을 설명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몇몇 뉴튼주의자들은, 로저 코츠(Roger Cotes)를 추종하여, 물질의 본질은 물질의 관성과 다른 물질을 끌어들이는 물질의 인력이라고 그리고 뉴튼의 이론은 모든 물질의 이 본질적인 속성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속성들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b. 뉴튼 자신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프린키피아(Principia)의 말미의 주해(註解: Scholium generale)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을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중력에 대한 궁극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인과적 설명에 관한 가설이었다c: ‘지금까지 나는 중력의 힘에 의하여 현상들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중력 자체의 원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자의적으로 [혹은 임시방편적으로] 가설들을 창안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 설명이라는 본질주의적 교설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 교설에 대한 비판자들은 통상적으로 도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과학적 이론들은 설명력이 없는 예측을 위한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해석했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또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째 가능성인 내가 ‘세 번째 견해’로 지칭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수정된 본질주의’로서 잘 기술되었다 ㅡ ‘수정된’이라는 단어를 강조함으로써.
내가 옹호하는 이 ‘세 번째 견해’는 본질주의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수정한다. 먼저 나는 궁극적 설명이라는 개념을 배척한다: 나는, 모든 설명은 더 높은 등급의 보편성을 지닌 이론이나 추측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설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추가적 설명이 필요 없는 설명은 있을 리가 없는데 이유인즉 어떤 설명도 본질에 대한 자기-설명적 기술일 (데카르트에 의하여 제안된 바와 같이, 물체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의[定義: definition]와 같은) 리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모든 무엇인가 물음들(what-is questions)을 배척한다: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들은 그것의 본질이나 그것의 참된 본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는, 모든 개별적인 물체에는 내재적인 본성이나 원리인 본질이 (포도주에서 포도주의 주정[酒精: spirit]과 같은) 있다는 본질주의의 특징적인 견해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 견해는 반드시 그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그것을 현재 작동하는 것과 같이 작동하도록 만든다a. 이 물활론적 견해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견해는 본질주의자들이 (뉴튼과 같은) 중력과 같은 관계적 속성들을 회피하도록 그리고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느껴지는 토대들을 근거로 만족스러운 설명은 틀림없이 내재적 속성들을 (관계적 속성들과 반대로) 통해서라고 믿도록 영향을 미쳤다. 본질주의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정사항은 이렇다. 이 물체의 행태에 대한 설명으로서 도움을 받게 될 것은 각각의 개별적이거나 단일한 물체에 내재한 본질적인 속성들이라는 물활론과 밀접하게 연결된 (그리고 플라톤과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특징적인) 견해를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b 이유인즉 이 견해는 왜 다양한 개별적인 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의 질문에 여하한 설명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물체들의 본질들이 같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된다면,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왜 다양한 물체들이 있는 것만큼 많은 다양한 본질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가?
플라톤은 후손들은 개별적인 물체들을 닮았고 그리하여 동일한 원래 ‘형상’의 복제품들인데 ‘형상’은 그리하여 다양한 개별적인 물체들의 ‘외부’이고 ‘이전(以前: prior)’이고 그 물체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함에 의하여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더 나은 닮음에 관한 이론이 없다.a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가 두 사람의 혹은 한 마리의 새와 한 마리의 물고기의 혹은 두 대의 침대들의 닮음이나 두 대의 자동차들이나 두 가지 언어들이나 두 가지 법률적 절차들의 닮음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공통적인 근원의 도움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로 유전적으로 유사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으로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를 만들면 그 이론체계는 역사주의적 철학이 되기 쉽다. 플라톤의 해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배척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 해석본은 심지어 해답의 암시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인 자연법칙들을 통하여 설명들을 선택함에 의하여 우리는 정확하게 이 마지막 (플라톤적)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유인즉 우리는 모든 개별적 물체들과 모든 단일한 사실들이 이 법칙들에 종속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법칙들은 (반대로 추가적 설명이 필요한) 그리하여 개별적인 물체들이나 단일한 사실들이나 사건들의 규칙성들이나 유사성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단일한 물체들에 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칙들은
세계 외부의 플라톤적 이데아들도 아니다.) 자연법칙들은, 더 정확하게, 자연의
ㅡ 우리의 세계 자체의 ㅡ 구조적 속성들에 대한 (추측성) 기술들로서 생각된다.
그리하여 여기에b 내 자신의 견해와 (‘제3의 견해’) 본질주의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 우리의 보편법칙들에 의하여 우리가 세계의 궁극적인 본질을 언젠가 기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혹은 우리가 혹시 말할지도 모르는 바와 같이 점점 더 본질적인 세계의 혹은 점점 더 깊은 심오함의 속성들을 우리가 점점 더 깊이 조사하려고 노력할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a.
더 높은 보편성의 등급을 지닌 새로운 추측성 이론에 의하여 어떤 추측성 법칙이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로 우리가 나아갈 때마다, 세상의 비밀들을 더 깊이 관통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론을 오류로 판정하는데 성공할 때마다 우리는 새롭고 중요한 발견을 이룩한다. 이유인즉 이 오류판정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오류판정들은 우리에게 기대되지 않은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이 우리 자신들에 의하여 만들어질지라도, 우리의 이론들이 우리 자신의 발명품들일지라도, 그 오류판정들은 우리의 이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관한 진정한 주장들이라고 우리를 위로한다;b 이유인즉 그 오류판정들은 우리가 만든 적이 없는c 어떤 것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정된 본질주의’는 자연법칙들의 논리적 형태라는 의문이 제기될 때 도움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 본질주의는, 우리의 법칙들이나 우리의 이론들이 보편적d이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세계에 관하여 ㅡ 세계의 모든 시공간적 영역들에 관하여 ㅡ 주장들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게다가 그 본질주의는, 세계의 구조적이거나 관계적 속성들에 관하여 주장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설명적 이론에 의하여 기술되는 속성들은 이런저런 의미에서 설명될 속성들보다 더 심오해야 한다고. ‘더 심오한’이라는 단어는 완벽한e 논리적 분석을 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직관들에 대한 지침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수학에서도 그렇다: 수학의 모든 정리들은 공리들[axioms]이 있을 때 논리적으로 대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은 ‘심오함’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과학적 이론의 ‘심오함’은 자체의 단순성과 그리하여 자체의 내용이 지닌 풍요로움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심오함은
a 역주: 이 문장의 주절 원문은 I do not doubt that we may seek to probe deeper and
deeper into the structure of our world or, as we might say, into properties of the world
that are more and more essential, or of greater and greater dept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나는 다음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세계의 구조나, 소위 말하듯이, 좀 더 본질적이거나 점점
더 깊은 세계의 속성들에 의해 점점 더 깊이 들어가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은 두 개의 종속절이 접속사 없이 연결되었고 ‘위로한다’의 원어는 reassu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재차 확실하게 한다’로 번역되면서 reassure의 목적어 us는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어 표현은 we never mad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가 여태 만들지
못했던’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강조되지 않았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exhaustiv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남김 없는’으로 번역되었다.
수학적 정리의 심오함과 관련되는데 그 내용은 0으로 생각될 것이다.) 두 가지
요소들이 요구되는 듯이 보인다: 풍부한 내용, 그리고 기술된 사태의 특정a
일관성이나 조밀성b (혹은 ‘유기성[有機性: organicity]’). 직관적으로 상당히 분명할지라도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고 본질주의자들이 우연한 속성들의 축적에 불과한 것과 대조적으로 본질들을 말할 때 기술하려고 애를 쓰고 있던 것은 이 후자(後者) 요소이다.c 우리가 여기서 직관적 개념을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유인즉 제시된 특정 이론의 경우에, 그 이론에 대한 관심을 결정하는 것은 그 이론의 내용이 지닌 풍요로움과 그리하여 그 이론의 시험가능성 등급이며 그 이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실제적 시험들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c 방법의 관점에서, 이론의 심오함, 이론의 일관성, 그리고 심지어 이론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직관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지침이나 자극에 불과한 것으로서 우리는 간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오함에 대한 혹은 심오함의 등급들에 대한 충분조건과d 같은 것이 정말로 있는 듯한데 그것은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과학의 역사로부터 한 가지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이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겠다.
뉴튼의 역학이 갈릴레오의 지구물리학과 케플러의 천체물리학의 통합을 이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뉴튼의 역학이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법칙들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고 흔히 언급되고, 그 역학은 그들의 법칙들로부터 엄격하게 연역될 수 있다고 항상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논리적 관점에서, 뉴튼의 이론은 엄격히 말해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 모두를 부정한다 (우리가 사용하여 연구할 뉴튼 이론을 지니자마자 이 후자[後者] 이론들이 물론 근사치들로서 획득될 수 있을지라도).
이런 이유 때문에 뉴튼 이론을 갈릴레오의 이론이나 케플러의 이론으로부터 혹은 두 이론 모두로부터 연역에 의해서건 귀납에 의해서건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연역적 추론도 귀납적 추론도 일관적인 전제들로부터 우리가 출발한 전제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결론으로 어느 때고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귀납에 반대하는 매우 강력한 논증으로 간주한다.
나는 이제 뉴튼의 이론과 그의 선배들의 이론들 사이의 모순들을 간략하게 지적하겠다. 갈릴레오는a, 던져진 돌이나 발사체가 움직일 때 불변 가속도로 수직 자유낙하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포물선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토론 내내 공기저항을 무시한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이 두 가지 주장 모두는 허위이다. 첫 번째 주장은, 대륙간 탄도탄과 같은 장거리 발사체의 경로가 (수직이나 수평 방향으로 발사된b) 심지어 근사치로도 포물선형이 아니라 타원형일 것이기 때문에 허위이다. 미사일의 전체 비행거리가 지구의 반경과 비교되어 무시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 경로는 근사치로서 포물선이c 된다. 이 요점은 뉴튼 자신에 의하여 그의 보급판인 세계의 체계(The System of the World)에 뿐만 아니라 프린키피아(Principia)에서도 지적되었는데 그곳에서 뉴튼은 이 쪽에 재생된 그림의 도움을 받아서 그 요점을 예시한다.
a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문장의 이 주어가 누락되었다.
b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 표현이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arabola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타원’으로 번역되었다.
뉴튼의 그림은, 발사체의 속도가 증가하고 그와 함께 발사체의 비행거리가 증가한다면 발사체는 ‘마침내, 지구의 경계들을 넘어,... 지구와 접촉하지 않는 공간 속을 통과할’ 것이라는 그의 서술을 예시한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발사체는 포물선이라기보다는 타원을 따라서 움직인다. 물론, 던지기들이 충분히 짧다면, 포물선은 탁월한 근사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뉴튼의 이론에 사실상 허위인 초기 조건을 (그리고 덧붙여 터무니없는 결과들을 낳기 때문에 뉴튼의 이론에서 실현될 수 없는 그 조건 하나를) 첨가하여 지구의 반경이 무한하다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면 포물선 궤적은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엄격하게 연역될 수 없다. 이 가정이 허위로 알려질지라도 우리가 이 가정을 수용하지 않는다면a 그 법칙에 따라 우리가 틀림없이 포물선을 얻는 갈릴레오의 법칙과 반대로 우리는 항상 타원을 얻는다.
정확하게 유사한 논리적 상황이, 불변 가속도의 존재를 주장하는 갈릴레오 법칙의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물체들의 가속도는 불변인 적이 없다: 그 가속도는, 물체가 인력의 중심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사실 때문에, 낙하하는 동안에 항상 증가한다. 이 효과는, 높이가 지구의 반경과 비교된 것으로서 무시될 수 있다면, 물론 무시될 수 있을지라도 물체가 커다란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매우 상당하다. 이 경우에, 지구의 반경이 무한하다는 (혹은 낙하 높이가 0이라는) 허위 가정을 우리가 다시 도입한다면 우리는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갈릴레오의 이론을 다시 얻을 수 있다.
내가 지적한 모순들은 장거리 미사일들에 관해서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이것들에게 우리는 갈릴레오의 이론이 아니라 뉴튼의 이론을 (물론 공기저항으로 인한 수정사항들을 사용하여) 적용할 것이다: 갈릴레오의 이론은, 뉴튼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허위 결과들을 낳을 따름이다.
케플러의 이론에 관해서, 상황은 유사하다. 뉴튼의 이론에서 케플러의 법칙들은 단지 근사치로서 타당하다는 ㅡ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부당하다는 ㅡ 것은, 우리가 행성들 간의 상호 인력을 참작한다면, 명백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론들 사이에는 이 다소 명백한 이론보다 더 많은 근본적인 모순들이 있다. 이유인즉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양보로서 우리가 행성들 사이의 상호 인력을 무시할지라도, 뉴튼 역학의 관점에서 고찰된 케플러의 제3법칙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근사치 이상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질량들이 동등하거나 동등하지 않다면 태양의 질량과 비교된 것으로서 무시될 수 있는 행성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두 개의 행성들 중에서 다른 행성이 매우 무거운 반면 한 행성이 매우 가볍다면 그 법칙은 두 행성들에게 심지어 근사치로서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케플러의 제3법칙이 갈릴레오의 법칙에 모순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뉴튼의 이론에 모순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쉽게 밝혀질 수 있다. 뉴튼의 이론은 두 물체 체계에 ㅡ 쌍성 체계(a binary system) ㅡ 대하여 천문학자들이 흔히 ‘케플러의 법칙’으로 지칭하는 법칙을 산출하는데 왜냐하면 그 법칙이 케플러의 제3법칙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소위 ‘케플러의 법칙’은, m
(1) α
도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곳에서 α는 두 물체들 사이의 거리이고, T는 한번 공전하는 시간이다. 이제 케플러 자신의 제3법칙은,
(2) α
다시 말해서,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에 대하여 동일한 상수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법칙을 (1)로부터 m
이것은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아주 훌륭한 근사치이다; 그러나 동시에, m
갈릴레오나 케플러의 이론들로부터 뉴튼의 이론과 같은 또 다른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타당한 이론으로 우리가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
이론들이 어떻게 조정되어야 할 터인지에 ㅡ 어떤 허위 전제들이 채택되어야 할 터인지 혹은 어떤 조건들이 명시되어야 할 터인지 ㅡ 대하여 심지어 가장 사소한 암시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뉴튼의 이론을 소유한 이후에야 우리는 옛 이론들이 그 이론에 대한 근사치라고 언급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언급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이 어떤 특별한 뉴튼적 결과들에 대하여 탁월한 근사치들일지라도 뉴튼의 이론은 다른 두 가지 이론들의 관점에서 그 이론들의 결과들에 대한 근사치라고 언급될 수 없다고 말함에 의하여 우리는 이 사실을 개괄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논리는 이 이론들로부터 뉴튼의 역학으로 도저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문제해결 능력c뿐이다.d 그 능력이 이룩되자마자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낳은 결과들은 새로운 이론을 입증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귀납의 불가능성이라기보다는 심오함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사례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운다. 뉴튼의 이론은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을 통합한다. 그러나 단순한 이 두 가지 이론들의 통합은커녕 ㅡ 이것은 뉴튼 이론에 관하여 피설명항들(explicanda)a의 역할을 한다 ㅡ 뉴튼의 이론은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을 설명하면서 그 이론들을 수정한다. 원래의b 설명적 과제는 이전 결과들의 연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는, 이 이전 결과들을 연역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들 대신에 더 나은 것을 연역함에 의하여 수행된다:c 옛 결과들의 특별한 조건들 하에서 숫자적으로 이 옛 결과들에 매우 근접하고d 동시에 그 옛 결과들을 수정하는 새로운 결과들. 그리하여 옛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새로운 이론을 입증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수정사항들은 나중에 시험될 것이다 ㅡ 그리고 아마도 반박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입증될 것이다. 내가 개괄한 논리적 상황에 의하여 강력하게 현저해지는 것은, 새로운 이론은 도저히 임시방편적이거나 순환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이론의 자체의 피설명항e을 반복하기는커녕, 그것을e 부정하고 수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심지어 피설명항f에 대한 증거 자체도 새로운 이론에 대한 독립적 증거가 된다. (부연하여, 이 분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계량적 이론들의, 그리고 측정의 가치g를 설명할 수 있다; 또 그리하여 이 분석은 우리가 측정과 정밀을 궁극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가치들로서 수용하는 오류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경험과학들에서 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이론이 어떤 옛 이론을 수정함에 의하여 그 옛 이론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때마다 이것은 새로운 이론이 옛 이론들보다 더 깊이 관통했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나는
a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설명항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origin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독창적인’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this task is discharged, no by deducing these earlier results
but by deducing something better in their pla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이 과업은 이런 그 전의 결과들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들에 적합한 어떤 더 좋은 것을 연역함으로써 실행되었다.’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which, under the special conditions of the older results, come numerically very close to these older result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즉, 더 이전의 결과들에 대한 특수한 조건들 하에서 이런 더 오래된 결과들에 수치적으로 매우 근사한’으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explicandu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논리적 상황의) 설명항’ 및
‘상황’으로 번역되었다.
f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설명항’으로 번역되었다. 위 역주 e 참조
g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valu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기준’으로 번역되었다.
제안한다.a 새로운 이론이 그 이론의 한도들b이라는 합당한 가치들에 관하여
옛 이론을 근사치로서 포함해야 한다는 요건은 ‘대응의 원리’로 불릴 (보어[Bohr]를 좇아서) 것이다.
이 요건의 충족이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심오함의 충분조건이다. 그것이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맥스웰(Maxwell)의 전자기파 이론이 프레스넬(Fresnel)의 빛의 파동이론을 이런 의미에서 수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심오함에서의 증가를 의미했지만 다른 의미에서였다: ‘편광(偏光: polarized light)의 진동들의 방향에 관한 옛 문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두 가지 매체들 사이의 경계들에 관한 경계 조건들에 관한 난제들은 이론의 바로 그 토대들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임시방편적 가설들은 세로 광파들(longitudinal light waves)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광압(光壓: light pressure)은 방사 이론(the theory of radiation)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겨우 최근에야 실험적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이론의 결론들 중 하나의 결론으로서 도출될 수 있었다.’ 이 탁월한 구절은 아인슈타인이 그 구절로 맥스웰 이론의 주요 업적들 중 몇 가지를 개괄하여 그 이론을 프레스넬(Fresnel)의 이론과 비교하는데, 나의 분석에 의하여 다루어지지c 않은 다른 충분한 심오함의 조건들이 있다는 표시로서 생각될 것이다.
과학의 과제는 내가 제안한 바, 만족스러운 설명들을 발견하는 것인데, 우리가 실재론자들이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다. 이유인즉 만족스러운 설명이란 임시방편적인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ㅡ 독립적인 증거라는 개념 ㅡ 발견이라는, 더 심오한 설명의 층들(layers)로 나아간다는 개념이 없으면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할 것, 그리고 비판적으로 토론할 것이 있다는 개념이 없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방법론 안에서 우리가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직관적 종류의 도움을 제외하고 우리는 그 실재론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도출할 수 없다. 이유인즉 과학의 목표가 설명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운 설명은 매우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고 매우 엄격하게 시험된 설명일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방법론자들로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기 때문이다a. 우리에게 여하한 종류의 확신이 아니라 단지 어떤 직관적인 격려인 어떤 희망을 부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도움을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 목표는 실현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방법론b에 대한 합리적 취급이 과학의 전제된 즉, 추측된 목표에 의존한다고 언급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취급은 틀림없이 세상에 대한 참인 구조적 이론이 (있다면) 사람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거나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이며 아마도c 허위인 전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 진리에 가까운 곳에 온다할지라도d ㅡ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과 같은 것이 있다할지라도d ㅡ 우주의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e 조건들로 인하여 우리가 찾고 있는 종류의 구조적 법칙들의 발견은 ㅡ 그리고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의 실현 ㅡ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이유인즉 우주의 거의 모든 영역들이 혼란스러운 방사선으로 가득차고 나머지 거의 모두는 유사한 혼란스러운 상태의 물질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f 이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과학의 목표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내가 제안한 것을 향하여 나아감에서 기적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 이상한 사실은 너무 많은 것g을 증명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저 목표를 실제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을 추가 격려를 우리가 얻지 못할지라도,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저
a 역주: 이 문장의 주절 원문은 we know all that we need to know as methodologist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는 방법론자들로서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methodolog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방법’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most like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가장 그럴듯한’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절의 접속사는 if이고 내용상으로 양보를 의미하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조건을 의미하는 절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obtaining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성립하는’으로 번역되었고 이 문장
자체의 시제가 현재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f 역주: 이 문장의 시제도 현재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것이기 (때문이다)’론 번역되었다.
g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too muc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too가 번역되지 않고 ‘많은 것’으로
번역되었다.
목표를 추구하도록 격려를 받을 수 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부터도 다른 근원으로부터도 그런 추가 격려를 우리가 얻지 못할지라도.
발췌 참고문헌
별표는 이 저서에서 나타나는 항목을 나타낸다.
R. 칼 포퍼,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 1934년 (1935년); 증보판 1966년, 1969년.
ㅡㅡㅡㅡ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44-5), 1957년, 1960년.
ㅡㅡㅡㅡ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3년, 1965년, 1969년.
*ㅡㅡㅡㅡ 구름과 시계에 관하여(Of Clouds and Clocks), 1965년. (아래 6장 참조.)
*ㅡㅡㅡㅡ 지몬 모제르(Simon Moser) 편집, 법칙과 진리(Gesetz und Wirklichkeit)에서
‘자연법칙과 이론 체계(Naturegesetze und theoretische Systeme)’ (1948년), 1949년.
(여기서는 본 저서의 부록 I로서 번역됨.)
ㅡㅡㅡㅡ M. 붕게(Bunge) 편집, 양자론과 실재(Quantum Theory and Reality)에서
‘“관찰자”없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without “The Observer”’), 1967년.
*ㅡㅡㅡㅡ B. van Rootselaar(한글 발음 미상)와 J. F. Staal(한글 발음 미상) 편집, 논리,
방법론 및 과학철학(Logic, Methodology and Philosophy of Science), 3, 1968년,
333-73쪽에서 ‘지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Epistemology without Knowing Subject)’.
(위 3장 참조.)
*ㅡㅡㅡㅡ 국제 철학회의(Internationalen Kogresses für Philosophie, 빈(Wien), 1968년,
I, 기록 14, 25-53쪽에서 ‘객관적 정신론에 관하여(On the Theory of the Objective
Mind)’. (위 4장 참조.)
참고문헌 주석
이론들이 설명해야 하는 ‘관찰적’ 혹은 ‘현상적’ 법칙을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3법칙과 같은) 이론들이 수정할 것이라는 여기서 토론된 개념은 나의 강좌들에서 반복적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이 강좌들 중 한 강좌는 예상되는 현상적 법칙의 수정을 자극했다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 1957년, 1960년, 134쪽 이하의 각주에 언급된 1941년 논문 참조). 이 강좌들 중 또 다른 강좌는 지몬 모제르(Simon Moser)의 책 법칙과 진리(Gesetz und Wirklichkeit) (1948년), 1949년에 발표되어 본서의 주석 I로서 번역된다. 나의 개념들 중 동일한 개념이 P. K. 파이어아벤트(Feyerabend)의 논문 ‘설명, 환원과
경험론(Explanation, Reduction and Empiricism)의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과
그로우버 맥스웰[Grover Maxwell] 편집, 미네소타 과학철학 연구[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3, 1962년에서) ‘출발점’이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66] 현재의 논문에 관해서이다 (Ratio, I, 1957년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서). 파이어아벤트(Feyerabend)의 인정은 관련 주제들에 관한 다양한 논문들의 저자들에 의하여 간과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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