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구름과 시계에 관하여
합리성과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
I
이 강의실에서 최초의 아서 홀리 콤프튼 기념 강연(Arthur Holly Compton Memorial Lecture)을 1년 전에 했던 나의 선배는 나보다 더 운이 좋았다. 그는 아서 콤프튼(Arthur Compton)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20년대 나의 학창시절이래, 특히 콤프튼(Compton)과 사이먼(Simon)의 유명한 실험이 아름답지만 단명했던 보어(Bohr)와 크래머스(Kramers)와 슬레이터(Slater)의 양자론을 반박한 1925년 이래 나는 콤프튼(Compton)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이 반박은 양자론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들 중 하나의 사건이었는데 이유인즉 그 반박이 야기한 위기로부터 소위 ‘새로운 양자론’이 ㅡ 보른(Born)과 하이젠베르크 이론, 슈뢰딩거(Schrödinger) 이론 그리고 디랙(Dirac)의 이론 ㅡ 출현했기 때문이다.
콤프튼(Compton)의 실험적 시험들이 양자론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물론 아인슈타인의 광자들 즉, 광양자(photons)에 대한 최초의 독립적인 시험인 (콤프튼[Compton]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콤프튼 효과(Compton effect)의 발견이었다.
몇 년 후인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콤프튼(Compton)이 위대한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진솔하고도 용감한 철학자였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고 놀랐고 기뻤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철학적 관심사들과 목표들이 몇 가지 중요한 요점들과 관련하여 내 자신의 관심사들 및 목표들과 일치했다. 그가 1935년에 인간의 자유(The Freedom of Man)라는 제목이 붙은 저서에서 발표한 매혹적인 테리 강좌들(Terry Lectures)을 내가 거의 우연히 손에 넣었을 때 나는 이것을 발견했다.
내가 콤프튼(Compton)의 저서 인간의 자유(The Freedom of Man)의 제목을 오늘 내 자신의 제목에 포함시켰음을 여러분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의 강좌가 콤프튼(Compton)의 저서들 중 이 저서와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그렇게 했다. 더 정확하게, 이 저서의 최초 두 가지 장(章)들에서 그리고 다시 그의 저서들 중 또 다른 저서인 과학의 인간적 의미(The Human Meaning of Science)에서 콤프튼(Compton)이 토론한 동일한 문제들을 토론할 의도가 나에게 있다.
오해들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그러나, 오늘 나의 강좌가 주로 콤프튼(Compton)의 저서들에 관한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겠다. 오늘 나의 강연은, 오히려 이 두 가지 저서들에서 그가 씨름했던 동일한 고대 철학적 문제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이고 이 고대의 문제들에 대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a 내가 여기서 개괄할 예정인 개략적이고 매우 잠정적인 해결책은 내가 보기에 콤프튼(Compton)의 주요 목표들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가 그 해결책을 승인했을 터이기를 나는 희망한다 ㅡ 정말로 나는 그렇게 믿는다.b
II
나의 강연의 핵심적 목적은, 이 고대의 문제들을 여러분 앞에 단순하고 강조하여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나는, 나의 강좌의 제목에서 나타나는 구름과 시계(clouds and clocks)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언급해야겠다.
내가 말하는 구름들(clouds)에는, 기체들처럼 고도로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하고 그리고 다소 예측될 수 없는 물리적 체계들을 대변할 의도가 있다. 매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구름이 왼쪽에 놓인 도식이나 배열이 우리 앞에 있다고 나는 가정하겠다. 우리의 배열의 오른쪽인 그 배열의 다른 극단에, 우리는 그것들의 행태에서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하며 고도로 예측 가능한 물리적 체계들을 대변할 의도가 있는 매우 신뢰할만한 추시계인 정밀 시계를 놓을 것이다.
내가 사물들에 대한 상식적 견해로 지칭할 것에 따라, 날씨나 구름들의 오고가기와 같은 몇 가지 자연적인 현상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는 ‘날씨 변덕’을 이야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고도로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현상을 기술하고 싶으면 우리는 ‘시계장치 정확성’을 말한다.
많은 물체들, 자연적 과정들 그리고 자연현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이 두 가지 극단들 사이에 놓을 것이다 ㅡ 구름들은 왼쪽에, 그리고 시계들은 오른쪽에. 변하는 계절들은 다소 믿지 못할 시계들이고 그리하여 너무 멀지는 않을지라도 오른쪽 방향으로 어느 곳에 놓일 것이다. 내가 예상하건대 우리는 쉽게 동의하여 구름들로부터 너무 멀지 않게 동물들을 왼쪽에 놓을 것이고 식물들은 시계들에 다소 더 가깝게 놓을 것이다. 동물들 가운데서 어린 강아지는 늙은 개보다 더 멀리 왼쪽에 놓여야할 것이다. 자동차들 또한 그것들의 신뢰도에 따라서 우리의 배치에서 어느 곳에서 자리를 발견할 것이다: 캐딜락은 내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멀리 오른쪽으로 건너갈 것이고 롤스로이스는a 훨씬 더 그러한데 그 차는 시계들 중 최고의 시계에 아주 가까울 것이다. 아마도 오른쪽으로 가장 멀리 위치되어야 하는 것을 태양계이다.
구름에 대한 전형적이고 흥미로운 사례로서 나는 여기서 구름이나 작은 파리들 혹은 각다귀들의 무리를 이용하겠다. 기체 속의 개별적인 분자들처럼, 함께 각다귀들의 무리를 형성하는 개별적인 각다귀들은 놀라울 정도로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 각다귀들의 각각이 아주 충분히 커서 분명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한 마리의 개별적인 각다귀의 비행을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각다귀들의 속도들이 매우 넓은 분산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별도로, 각다귀들은 기체 구름 속에서 분자들의 혹은 먹구름 속에서 미세한 물방울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에 대한 탁월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물론 차이점들이 있다. 그 무리는 해체하지도 않고 분산하지도 않고 상당히 잘 대열을 유지한다. 다양한 각다귀들의 움직임의 무질서한 특징을 고려하면, 이것은 놀랍다;a 그러나 이것은 중력들에 의하여 결집되는 충분히 큰 기체 구름에서 (우리의 대기권이나 태양과 같은) 자체와 유사한 것을 지닌다. 각다귀들의 경우에, 그것들이 완전히 불규칙하게 모든 방향들로 나를지라도 자기들이 무리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각다귀들이 매우 밀집된 저 부분을 향하여 회귀한다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그들이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 가정은 무리에게 지도자가 없고 구조가 없을지라도 무리가 대열을 유지하는 방식을 ㅡ 단지 각다귀 각각이 자기의 동료들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각다귀 각각이 무법적이거나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정확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귀결되는 무작위적인 통계적 분포 ㅡ 설명한다.
각다귀 사회가 상상 가능한 가장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그 사회가 위대한 사회이거나 적어도 훌륭한 사회라고 어떤 철학적인 각다귀는 아마도 주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열린사회(The Open Society)에 관한 저서의 저자로서 나는, 각다귀 사회가 열린사회임을 부인할 터이다. 이유인즉 나는, 열린사회는 민주주의적 형태의 정부와 별도로 결사의 자유를 중시한다는 것과 각각의 하부-사회가 다양한 견해들과 믿음들을 지닌 자유로운 하부-사회들의 형성을 보호하고 심지어 격려한다는 것을 열린사회의 특징들 중 한 가지 특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b 그러나 이성적인 각다귀라면 자신의 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다원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인정할 터이다.
그러나 오늘 나에게는, 자유의 문제와 연관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쟁점들을 중 어떤 쟁점을 토론할 의도가 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각다귀들의 무리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s surprising, considering the disorderly character of the movement of the various gnats;인데 considering 이하 분사구문의 주어가 This일 수가 없으므로 잘못된 분사구문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I take it to be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an open society that it cherishes, apart from a democratic form of government, the freedom of association,
and that it protects and even encourages the formation of free sub-societies, each holding
different opinions and beliefs.인데 each holding different opinions and beliefs라는 분사구문의
주어인 each가 an open society와 동격이 아니라 문맥상 free sub-societies이기 때문에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관계대명사절로 표현해야 한다.
를 사회적 체계의 보기로서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고도로 불규칙하거나 무질서한 구름의 보기나 전형으로서 이자 구름-같은 물리적 체계에 대한 나의 주
요 예시로서 이용할 의도가 있다.
많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체계들처럼, 각다귀들의 무리는 ‘전체’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 전체의 가장 밀집된 부분이 무리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하지 않는 개별적 각다귀들에게 미치는 일종의 인력에 의하여 그 전체가 대열을 유지한다는 우리의 추측은, 이 ‘전체’가 자체의 요소들이나 부분들에 미치는 심지어 일종의 행위나 통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체’는, ‘전체’란 항상 단순히 자체의 부분들의 총화 이상이라는 만연하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추방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a ‘전체’가 때때로 그럴 것임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다귀들의 무리는, 정말로 자체의 부분들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 ㅡ 그리고 매우 정확한 의미에서 ㅡ 전체의 보기이다; 이유인즉 그 무리는 모든 개별적 각다귀들의 움직임들을 기술함에 의해서 완벽하게 기술될 뿐만 아니라 전체의 움직임은, 이 경우에, 정확하게 구성원들의 숫자에 의하여 나누어진 자체의 구성원들의 움직임들의 (방향적: vectorial) 총화이기 때문이다.
자체의 부분들의 고도로 불규칙한 움직임들에게 어떤 통제를 가하는 생물학적 체계나 ‘전체’의 사례는 (많은 방식들에서 유사한) 몇 시간 동안 숲을 돌아다니지만 가족 차량으로부터 (말하자면, 인력의 중심과 같은 작용을 하는) 멀리 떨어지는 적이 없는 소풍 가족일 ㅡ 몇몇 자녀들과 개와 함께하는 부모들 ㅡ 터이다. 이 체계는 우리가 든 각다귀들의 구름보다 훨씬 더 구름 같다고 ㅡ 다시 말해서, 자체의 부분들의 움직임들에서 덜 규칙적인 ㅡ 언급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앞에 내가 말하는 두 가지 전형들이나 모범들에 관한 개념인 왼쪽에 구름들과 오른쪽에 시계들이라는 개념과, 그것들 사이에 우리가 많은 종류들의 물체들과 많은 종류들의 체계들을 배열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개념을 지니고 있을 것을 나는 희망한다. 여러분은 배열에 관한 어떤 모호하고 일반적인 개념을 잡아서 여러분의 개념이 여전히 조금 안개 낀 상태이고 구름이 깔린 상태일지라도 여러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III
내가 기술한 배열은 상식에 전적으로 수용 가능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더 최근인 우리의 시대에는 그 배열이 심지어 물리과학에도 수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선 250년 동안 그 배열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들 중 한 가지 혁명인 뉴튼의 혁명은,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려고 노력한 상식적 배열의 배척을 야기했다. 이유인즉 거의 모든 사람이 뉴튼의 혁명에 의하여 확립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다음의 충격적인 명제였기 때문이다: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이다 ㅡ 심지어 구름들 중 가장 흐린 구름도.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이다’라는 이 명제는, 내가 ‘물리적 결정론’으로 지칭할 견해에 대한 간략한 정식화로서 생각될 것이다.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이라고 말하는 물리적 결정론자는, 구름들을 왼쪽에 그리고 시계들을 오른쪽에 두는 우리의 상식적 배열이 오해를 야기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맨 오른쪽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또한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상식을 사용하여 우리가 물체들을 그 물체들의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무지에 따라서 배열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배열은, 기체 구름이나 유기체를 형성하는 입자들의 상세한a 상호작용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없는 반면 시계의 부분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태양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우리가 좀 상세하게 안다는 사실을 반영할 따름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식을 획득하자마자 기체 구름들이나 유기체들이 우리의 태양계처럼 시계와 같음을 우리가 발견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할 것이다.
뉴튼의 이론은, 물론, 물리학자들에게 이것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 이론은 구름들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 이론은 특별히 행성들을 다루었는데 행성들의 움직임들을 그 이론은 자연의 어떤 매우 단순한 법칙들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했다; 또한 포탄들과 조류들을 다루었다b. 그러나 이 분야들에서 그 이론의 엄청난 성공으로 인하여 물리학자들의 행동이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분명히 이유가 없지 않았다.
뉴튼과 그의 선배인 케플러의 시대 이전에, 행성들의 움직임들은 그 움직임들을 설명하거나 심지어 완벽하게 기술하려는 많은 시도들을 벗어났다. 분명히, 그 움직임들은 항성들의 엄격한 체계가 변함없이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들은, 각다귀들의 무리의 일반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이탈하는 단일한 각다귀들과 거의 같이 저 체계의 움직임으로부터 이탈했다. 그리하여 행성들은, 생명체들과 다르지 않게, 구름들과 시계들 사이의 중간 위치에 있는 듯이 보였다.a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플러(Kepler) 이론의 성공과 뉴튼 이론의 훨씬 더 많은 성공은, 행성들은 사실상 시계들이라고 생각한 저 사상가들이 옳았음을 밝혔다. 이유인즉 행성들의 움직임들은 뉴튼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정확하게 예측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 세부사항들의 피상적인 불규칙성에 의하여 천문학자들을 당혹시킨 모든 저 세부사항들에서 예측 가능한.
뉴튼의 이론은 인간의 역사에서 첫 번째로 실제로 성공적인 과학적 이론이었다; 게다가 그 이론은 엄청나게 성공적이었다. 여기에 실제적인 지식이 있었다; 심지어 가장 대담한 정신들의 극단적인 꿈들을 초월한 지식. 여기에 자기들의 운행 과정에 놓인 모든 별들뿐만 아니라, 꼭 정확하게, 떨어지는 사과들이나 발사체들이나 추시계들과 같은 지구상에 있는 물체들의 움직임들도 또한 정확하게 설명한b이론이 있었다.
열린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ㅡ 열렬히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지식의 성장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 ㅡ 그 새로운 이론으로 전향했다. 열린 정신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과 특히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결국 그 새로운 이론이 전기와 자기뿐만 아니라 구름들과 심지어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물리학적 결정론은 ㅡ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이라는 교설 ㅡ 계몽된 사람들 가운데서 지배적인 신념이 되었다; 이 새로운 신념을 열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은 반(反)계몽주의자나 반동주의자로 간주되었다.
IV
극소수의 반대자들 가운데, 위대한 미국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고 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 한 명이라고 내가 믿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있었다. 그는 뉴튼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이나 일찍a 그는, 이 이론이 참이라할지라도 구름들이 완벽한 구름이라고 믿을 타당한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자신의 시대의 모든 다른 물리학자들과 공동으로 세계는 뉴튼의 법칙들에 따라 작동하는 시계라고 그가 믿었을지라도, 이 시계나 어떤 다른 것이 아래로 가장 작은 세부사항까지 완벽하다는 믿음을 그는 거부했다. 아무튼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완벽한 시계와 같은 어떤 것에 대하여 혹은 물리학적 결정론이 전제한 저 절대적인 완벽함에 심지어 약하게 근접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고 도저히 주장할 수 없음을 그는 지적했다. 나는 아마도 퍼스(Peirce)의 탁월한 비평들 중 한 가지 비평을 인용할 것이다: ‘... 무대 뒤에 있는 사람은’ (퍼스[Peirce]는 여기서 실험주의자로서 말한다) ‘... 정확성에서 모든 다른 [물리학적] 측정들을 멀리 초월하는 [심지어] 질량들 [그리고] 길이들에 대한 가장 정교한 비교들도... 은행계좌들의 정확성에 뒤진다는 것을, 그리고... 물리학적 상수들의 결정들은... 양탄자들과 커튼들 업자의 측정들과 개략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안다...’. 이것으로부터 퍼스(Peirce)는, 모든 시계들 안에는 어떤 느슨함이나 불완전성이 있다고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추측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퍼스(Peirce)는, 세계가 엄격한 뉴튼적 법칙들에 의하여 지배될 뿐만 아니라 세계는 또한 동시에 우연의 혹은 무작위의 혹은 무질서의 법칙들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추측했다: 통계적 확률의 법칙들에 의하여. 이로 인하여 세계는 구름들과 시계들이 서로 맞물리는 체계가 되어 심지어 최고의 시계도, 자체의 분자 구조에서, 어느 정도의 구름 같음을 보여준다. 내가 아는 한 퍼스(Peirce)는, 그리하여 어느 정도까지 모든 시계들은 구름들이라는 견해를 감히 채택한 최초의 뉴튼-이후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혹은 다시 말해서, 매우 다양한 등급들의 구름 같음을 지닌 구름들일지라도, 오직 구름들만 존재한다는 견해.
퍼스(Peirce)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르게 모든 물리적 물체들 심지어 시계 속의 보석들도 기체의 분자들의 움직임과 혹은 각다귀들 무리 안의 개별적 각다귀들의 분자들의 움직임과 유사한 움직임인 분자 열운동에 종속된다고 지적함에 의하여 이 견해를 뒷받침했다.a
퍼스(Peirce)의 이 견해들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오직 한 철학자만 그 견해들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그 견해들을 공격했다. 물리학자들은 그 견해들을 무시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뉴튼의 고전 역학을 참으로서 수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물리학적 결정론을 그리고 그 결정론과 함께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이라는 명제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할 터이라고 믿는다.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적 결정론을 포기할 준비가 된 것은 고전 물리학의 몰락과 새로운 양자론의 발흥 때문이었을 따름이었다.
이제 형세가 역전되었다. 비결정론은 1927년까지 반계몽주의와 동일시되었는데 주류의 유행이 되었다; 그래서 막스 플랑크(Max Planck),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그리고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몇몇 위대한 과학자들은 결정론 포기를 주저했는데 양자론 발전의 선두에 섰을지라도 고루한 늙은이들로 간주되었다. 내 자신은 예전에 어느 탁월한 젊은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묘사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인슈타인은 당시 ‘노아의 홍수 이전 사람’으로서 여전히 생존했고 열심히 연구 중이었다.a 아인슈타인을 휩쓸어 버리기로 예상되던 그 홍수는 새로운 양자론이었는데 1925년에서 1927년 동안에 발흥했고 그 이론의 도래에 기껏해야 일곱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이 기여업적들과 비견될 수 있는 기여업적들을 이룩했다.
V
아마도 나는 여기서 잠시 중단하고, 상황에 대한 그리고 과학적 유행들에 대한 내 자신의 견해를 진술할 것이다. 모든 시계들은 상당한 정도까지 구름들이라고 ㅡ 심지어 가장 정확한 시계들도 ㅡ 주장하는 데서 퍼스(Peirce)는 옳았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구름들을 시계들이라는 잘못된 결정론적 견해에 대한 매우 중요한 뒤집기이다. 나는 나아가, 이 견해는 심지어 뉴튼의 고전 물리학에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퍼스(Pierce)가 옳았다고 믿는다. 이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과 훨씬 더 분명하게 양립될 수 있고, 새로운 양자이론과 훨씬 더 분명하게 양립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a 다시 말해서, 나는 ㅡ 퍼스(Peirce), 콤프튼(Compton),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동시대의 물리학자들처럼 ㅡ 비결정론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대부분과 함께, 아인슈타인이 결정론을 고수하려고 노력함에서 틀렸다고 믿는다. (나는 아마도, 내가 이 문제를 그와 토론했다는 것과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언급할 것이다.) 나는 또한, 양자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을 구시대적인 것으로서 무시한 저 현대 물리학자들이 크게 틀렸다고 믿는다. 아무도 양자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인슈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드 브로이(de Broglie), 슈뢰딩거(Schrödinger), 봄(Bohm), 비지에(Vigier)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란데(landé)와 같이 그 이론에 관한 유행성 해석에 ㅡ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ㅡ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너무 가볍게 무시되었다. 과학에는 유행들이 있고 몇몇 과학자들은 거의 몇몇 화가들과 음악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기꺼이 시류에 편승한다. 그러나 유행들과 시류가 약한 사람들을 매혹할지라도 그것들은 격려되기보다는 저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비판과 같은 비판은 항상 귀중하다: 우리는 항상 그 비판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VI
아서 홀리 콤프튼(Arthur Holly Compton)은 새로운 양자론과 1927년의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물리학적 비결정론을 환영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콤프튼(Compton)은 하이젠베르크가 1929년 봄에 수행한 강좌 과정 때문에 그를 시카고로 초청했다. 이 과정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이론에 행한 최초의 전체 해설이었고, 그의 강좌들은 아서 콤프튼(Arthur Compton)의 서문과 함께 시카고대학 출판부에 의하여 1년 후에 그의 최초의 저서로서 발간되었다. 이 서문에서 콤프튼(Compton)은, 자신의 실험들이 그 이론의 바로 앞 이론을 반박함에a 의하여 새로운 이론의 도래에 기여한 새로운 이론을 환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고음도 냈다. 콤프튼(Compton)의 경고는 아인슈타인에 의한 몇 가지 유사한 경고들이 선행했는데b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새로운 양자론을 ㅡ 콤프튼(Compton)이 그 이론을 너그럽고도 현명하게 ‘물리학의 역사에서의 이 장(章)’으로 지칭한 바와 같이 ㅡ ‘완벽한’ 것으로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주장했다. 그리고 이 견해가 보어(Bohr)에 의하여 배척되었을지라도, 새로운 이론이 예를 들어 1년 후에 채드윅(Chadwick)에 의하여 발견된 중성자에 대한 암시조차 제시하지 못했고 중성자는 새로운 양자론에 의하여 그 존재가 예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소립자들의 긴 수열 중 첫 번째 수열이 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양전자[positron]의 존재가 디랙[Dirac]의 이론으로부터c 도출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같은 년도인 1931년, 자신의 테리 재단 강좌(Terry Foundation Lectures)에서a 콤프튼(Compton)은 물리학에서 비결정론의 인간적이고 보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적인 함의들을 검토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왜 그가 새로운 이론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환영했는지가 분명해졌다: 새로운 이론은 그를 대신하여 물리학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및 철학적 문제들 또한 해결했는데 후자(後者)들 가운데서 특히 윤리학과 연관된 문제들.
VII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콤프튼(Compton)의 저서 인간의 자유(The Freedom of Man)의 두드러진 첫머리 구절을 이제 인용하겠다:
도덕성의 근본적인 문제, 종교에서 사활적 문제 그리고 과학에서 능동적 조사의 주제는:
인간은 자유로운 대행인(代行人: agent)인가?
우리 몸들의 원자들이... 행성들의 움직임들만큼 불변적으로 물리학적 법칙들을 따른다면, 왜 노력을 하는가? 우리의 행위들이 이미 기계적인 법칙들에 의하여 미리 결정된다면 노력이 얼마나 큰지가 무슨 차이를 낳겠는가... ?
콤프튼(Compton)은 여기서 내가 ’물리학적 결정론의 악몽‘으로 지칭할 것을 기술한다. 결정론적인 물리학적 시계장치의 기제(機制: mechanism)는b 무엇보다도 완전히 자족적c이다: 완벽한 결정론적인 물리학적 세상에는 외부 개입을 위한 여지가 없을 따름이다. 그런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모든 우리의 움직임들과 그리하여 모든 우리의 행위들 포함하여 물리학적으로 미리 결정된다. 그리하여 모든 우리의 사고들, 느낌들 그리고 노력들은 물리학적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순한 망상들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물리학적 사건들의 불필요한 부산물들이다 (‘부수현상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구름들은 시계들임을 증명하려고 희망했던 뉴튼적 물리학자들의 백일몽은 악몽으로 변하려고 위협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시하려는 시도는 정신분열증과 같은 것을 낳았다. 콤프튼(Compton)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어려운 지성적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데 대하여 새로운 양자론에 감사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유(The Freedom of Man)에서 서술한다: ‘물리학자는, 완벽하게 결정론적인... 법칙들이... 인간의 행위들에 적용된다... 면 그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에 괘념치 않았다a...’ 그리고 과학의 인간적 의미(The Human Meaning of Science)에서 그는 자신의 안도감을b 표현한다:
이 필수적인 주제에 관하여 내 자신이 생각하면서 그리하여 나는, 과학의 이전 단계들에서 내가 만족할 수 있었을 터인 것보다 훨씬 더 만족한 정신 상태에 놓여있다. 물리학의 법칙들에 대한 서술들이 올바른 것으로 전제된다면, 자유에 대한 느낌이 망상적이라고 우리는 가정했어야 할 터이거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운] 선택이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물리학의 법칙들에 대한 서술들이... 신뢰될 수 없다고 우리는 가정했어야 할 터이다. 당혹스런 상황은 불편한 것이었다c...
나중에 동일한 저서에서 콤프튼(Compton)은 다음 단어들로 상황을 명쾌하게d 요약한다: ‘... 물리학적 법칙을 인간적 자유에 반대하는 증거로서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콤프튼(Compton)으로부터 나온 이 인용구들은, 하이젠베르크 이전에 그가 내가 여기서 물리학적 결정론자의 악몽이라고 지칭한 것에 의하여 당혹했다는 것과 그가 지성적 정신분열증과 같은 것을 채택함에 의하여 이 악몽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혹은 그 자신이 그것을 표현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물리학자들] 난제들에 주목하지 않기를 선호했을 따름이다...’ 콤프튼(Compton)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한 새로운 이론을 환영했다.
나는, 진지하게 토론할 가치가 있는 결정론에 관한 문제의 유일한 형태는 바로 콤프튼(Compton)을 괴롭혔던 저 문제라고 믿는다: 세상을 물리학적으로 완벽하거나 물리학적으로 폐쇄된 체계로서 기술하는 물리학적 이론으로부터 나타나는 문제. 물리학적으로 폐쇄된 체계에 의하여 나는, 원자들이나 소립자들이나 물리적인 힘들(forces)이나 힘들(forces)의 장들(場들: fields)과 같은 물리적 존재들의 집합이나 체계를 의미하는데 그것들은, 저 폐쇄된 물리적 존재들의 집합이나 체계들 외부의 어떤 것과 상호작용할 혹은 그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간섭을 받을 여지를 남기지 않는 확정된 상호작용의 법칙들에 따라서 서로 ㅡ 그리고 단지 서로 ㅡ 상호작용을 한다. 결정론적 악몽을 야기하는 것은 이 체계의 ‘폐쇄’이다.
VIII
나는 여기서, 내가 근본적인 중요성을 띤다고 여기는 물리학적 결정론과 흄(Hume)을 좇아서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대체한 결코 진지하지 않은 문제를 대비시키기 위하여 잠시 동안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흄(Hume)은 결정론을 (자신이 ‘필연성의 교설[the doctrine of necessity]’이나 ‘불변적 접속[the constant conjunction]’으로 지칭한 것), ‘유사한 교설들은 항상 유사한 효과들을 야기한다’라는 그리고 ‘유사한 효과들은 반드시 유사한 원인들로부터 귀결된다’라는 교설로서 해석했다. 인간의 행위들과 판단력들에 관하여 그는, ‘관찰자는 우리의 동기들과 인격으로부터 우리는 행위들을 통상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더욱 특히 믿었다; 그리고 심지어 관찰자가 그렇게 추론할 수 없는 곳에서조차 관찰자는
일반적으로, 그가 우리들의 상황과 기질과 가장 비밀스러운 우리의... 의향의 근원들에 대한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추론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a. 이제 이것은 바로 필연성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흄(Hume)의 계승자들을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행위들이나 우리의 판단력들이나 우리는 취향들이나 우리의 선호들은 앞선 경험들에 (‘동기들’) 의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받은 유전이나 환경에 의하여 심리학적으로
‘야기된’다b.
그러나 우리가 철학적 또는 심리학적 결정론으로 지칭할 이 교설은 물리학적 결정론과 매우 다른 사태일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물리학적 결정론자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사태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유사한 효과들에는 유사한 원인들이 있다’나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철학적 결정론의 주장은 매우 모호해서 물리학적 비-결정론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결정론은 ㅡ 혹은 보다 정확하게, 물리학적 비결정론 ㅡ 물리적 세계 안의 모든 사건들이 자체의 모든 극도의 세부사항들에서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미리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교설일 뿐이다.c 이것과 별도로, 비결정론은 여러분이 원하는 실제로 여하한 규칙성의 등급과도 양립될 수 있고 그리하여 비결정론은, ‘원인들이 없는 사건들’이 있다는 견해를 수반하지 않는다; 단지 ‘사건’과 ‘원인’이라는 용어들이 충분히 모호하여 모든 사건에는 물리학적 비결정론과 양립될 수 있는 원인이 있다는 교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결정론이 완벽하고 무한히 정확한 물리학적 사전 결정과 여하한 예외의 결여를 요구하는 반면, 물리학적 비결정론은 결정론이 허위라는 것과 이곳저곳에서 정확한 사전 결정에는 적어도 몇 가지 예외들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모든 관찰 가능하거나 측정 가능한 물리적 사건에는 관찰 가능하거나 측정 가능한 물리적 원인이 있다’는 공식은 단지 어떤 측정도 무한히 정확할 리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물리학적 비결정론과 양립될 수 있다: 이유인즉 물리학적 결정에 관하여 두드러진 요점은, 뉴튼의 역학에 근거하여 그 결정론이 절대적인 수학적 정확성을 지닌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 결정론은 가능한 관찰의 영역을 넘어설지라도 (퍼스[Peirce]에 의하여 목격된 바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론은, 원칙적으로, 바라는 정확도를 이용하여 시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론은 실제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시험들에 반대했다a.
대조적으로,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공식은 정확성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특히, 우리가 심리학의 법칙들을 본다면 심지어 정확성에 대한 암시조차 없다. 이것은 ‘내성적’ 심리학이나 ‘유심론적’ 심리학만큼 ‘행동주의적’ 심리학에도 성립한다. 유심론적 심리학의 경우에 이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심지어 행동론자도 기껏해서, 주어진 조건 하에서 쥐에게는 미로를 달리는 데 20초에서 22초가b 걸릴 것이라고 예측할 것이다c: 그는, 점점 더 정확한 실험적 조건들을 특정함에d 의하여, 자신이 점점 더 정확해지는 ㅡ 그리고, 원칙적으로, 무한히 정확한 ㅡ 예측들을 할 수 있을 터인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 것은, 행동론적 ‘법칙들’이 뉴튼 물리학의 법칙들과 같이 미분방정식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미분방정식들을 도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행동론을 넘어 생리학을e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물리학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우리를 물리학적 결정론이라는 문제로 다시 이끌 터이다.
라플라스(Laplace)에 의하여 언급된 바와 같이, 물리적 세계의 현재
a 역주: 이 동사의 원어는 withstoo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거역하고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twenty to twenty two second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20번의 시도 끝에... 22초’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동사는 may predic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예측할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pecifying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덧붙임’으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hysiolog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심리학’으로 번역되었다.
상태에 관하여 충분한 지식이 우리에게 있다면 물리학적 결정론은 먼 미래의
(혹은 먼 과거의) 모든 물리적 사건은 바라는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될 수 (혹은 소급언급될 수a)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흄(Hume)이 주장한 유형의 철학적 (혹은 심리학적) 결정론의 주장은, 심지어 자체의 가장 강력한 해석으로도 두 가지 사건들 사이의 관찰 가능한 차이점은 어떤 당시로서는b 아마도c 알려지지 않은 법칙에 의하여 어떤 차이점과 ㅡ 아마도 관찰 가능한 차이점 ㅡ 관련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매우 많이 더 취약한 주장이고 부수적으로, 외견상 ‘완전히 동등한’ 조건들 하에서
수행된 우리의 실험들 대부분이 다양한 결과들을 낳을지라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 터인 주장. 이것은 흄(Hume) 자신에 의하여 매우 명료하게 서술되었다. ‘심지어 이 상반되는 실험들이 완벽하게 동등할 때도, 우리는 원인들과 필연성이라는 개념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표면적인] 우연은... 물체들 자체에 놓여있지 않고... 우리가 지닌 불완전한 지식에 놓여있을 따름이고 그 물체들은 나타나는 바로는 동등하게 불변적이거나 확실하지는 않을지라도 모든 경우에서 동등하게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결정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그는 서술한다.
이것이, 흄적(Humean) 철학적 결정론과, 더욱 특히, 심리학적 결정론이
물리학적 결정론의 예봉을 결여하고 있는d 이유이다. 왜냐하면 뉴튼 물리학에서 물체들은, 체계 안의 표면적인 느슨함은 사실상 우리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인 양 실제로 보여서 우리가 체계에 관하여 완벽하게 안다면 느슨함의 모습은 사라질 터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심리학에는 이런 특징이 없었다.
물리학적 결정론은, 물리학에서의 모든 발전에 따라서 표면적으로 피할 수 없는 악몽이 될 때까지 더 실제적으로 보였던 전능한 지식(omniscience)이라는 백일몽이었다고 우리는 아마도 회고하여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의 상응하는 백일몽들은 언제나 허황된 꿈들e일 따름이었다: 그 백일몽들은 물리학을, 물리학의 수학적 방법들을, 그리고 물리학을 강력하게 적용함으로써 동등함에 도달하려는 유토피아적 꿈들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사람들과 사회들을 주조함에 의하여 심지어 우위에 도달하려는. (이 전체주의적 꿈들이 과학적 관점에서 심각하지는 않을 반면, 그 꿈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에서 이 위험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 문제를 토론할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
IX
나는 물리학적 결정론을 악몽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안에 지닌 그 전체 세계가 거대한 로봇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작은 톱니바퀴들이나 기껏해야 그 세계 안에 있는 하위-로봇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악몽이다.
그 결정론은 그리하여 특히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그 결정론은,
내가 이 강좌를 준비하면서 내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나의 두뇌를 사용했다는 개념을 완벽한 망상으로 환원시킨다. 물리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나의 몸의 특정 부분들이 흰 종이 위에 검은 표시들을 적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은 그 결정론 안에 없었다;a 상세한 지식을 충분히 지닌 여하한 물리학자도, 나의 몸과 (물론 나의 두뇌와 나의 손가락들을 포함하여) 나의 펜으로 구성된 물리적 체계가 저 검은 표시들을 적을 정확한 장소들을 예언하는 단순한 방법에 의하여 나의 강좌를 적을 수 있었을 터이다.
혹은 더 인상적인 사례를 이용하여: 물리학적 결정론이 옳다면 완벽한 귀머거리인 그리하여 어떤 음악도 들은 적이 없는 물리학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신체들의 정확한 물리적 상태들 연구하여 그들이 오선지 위에 검은 표시들을 할 곳을 예언하는 단순한 방법에 의하여 그들에 의하여 작곡된 교향곡들이나 협주곡들을 작곡할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그 귀머거리 물리학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을 할 수 있을 터이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신체를 충분히 신중하게 연구함에 의하여 그는, 그들에 의하여 실제로 작곡된 적이 없지만 그들의 생애의 특정 외부적 환경이 달랐더라면 그들이 작곡했을 터인 악보를 작곡할 수 있을 터이다: 가령 그들이 닭 대신에 양을 먹고, 커피 대신에 차를 마셨다면.
그 귀머거리 물리학에게 순전히 물리적인 환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주어진다면 이 모든 것은 그 물리학자에 의하여 수행될 수 있을 터이다. 음악 이론에 관하여 그가 알 필요는 없을 터이다 ㅡ 그가 혹시 시험 상황 하에서
대위법 이론에 관한 문제들이 주어진다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서술했을 터인 답변들을 예언할 수 있을지라도.
나는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터무니없음은 우리가 이 물리적 예언의 방법을 결정론자에게 적용할 때 훨씬 더 명백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결정론에 따르면, 여하한 이론들도 ㅡ 가령, 결정론과 같은 ㅡ 신봉자의 (혹시 그의 두뇌의) 특정 물리적 구조 때문에 믿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결정론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논증들이나 이유들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우리가 믿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기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기만할 정도로 물리학적으로 그렇게 결심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물리학적 결정론은, 참이라면 우리에게 논증들에 근거한 믿음들로서 순전히 물리적 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반응들을 틀림없이 설명하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론이다. 우리의 물리적 환경을 포함하는 순전히 물리적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말하거나 수용하는 모든 것을 말하거나 수용한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론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는 잘-훈련된 물리학자는 결정론에 관한 프랑스어 트론에서 프랑스 결정론자가 말할 것을 예언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물론 또한 그의 비결정론자 상대방이 말할 것도. 그러나 이것은, 특정 논증들이 지닌 논리적 힘에 의하여 우리가 설득을 당했기 때문에 결정론과 같은 이론을 우리가 수용했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물리학적 결정론에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보다 정확하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하도록 우리를 결심시키는 물리적 조건에 놓여있다.
흄(Hume)은 이것이 자신의 논증들에 대하여 의미하는 것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이것의 많은 것을 보았다; 이유인즉 그는 ‘우리의 판단’에 관한 결정론을 ‘우리의 행위들’에 관한 결정론과 비교하는 데 국한시켜서 ‘우리에게 후자(後者)에서 자유가 없는 것처럼 전자(前者)에서도 자유가 없다a’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과 같은 고찰들은 아마도, 물리학적 결정론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하여 그 결정론을 ‘두려운 것’으로서 무시하는 그렇게 많은 철학자들이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기계다라는 교설은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오래 전인 1751년에 드 라 메트리(de La Mettrie)에 의하여 매우 강력하고도 진지하게 논증되었다; 그리고 진화론은 살아있는 물질과 죽은 물질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없을 것이라고 제안함에 의하여, 그 문제에 훨씬 더 예리한 효과를 부여했다. 그리고 새로운 양자론의 승리와 그렇게 많은 물리학자들의 비결정론으로의 전향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기계라는 드 라 메트리(de La Mettrie)의 교설은 아마도 오늘날 물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서 전보다 더 많은 옹호자들을 보유한다; 특히 사람은 컴퓨터라는 주장의 형태로.
이유인즉 우리가 진화론을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수용한다면 생명체가 무기물질로부터 출현했다는 이론에 관하여 우리가 회의적으로 남을지라도 이유들과 논증들과 과학지식과 같은 추상적이고 비-물리적인 존재들과 철로들이나 불도저들이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들을 만들기 위한 규칙들이나 가령 문법이나 대위법에 대한 규칙들과 같은 추상적인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무튼 물리적 우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던 때가 틀림없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 우주가 어떻게 규칙들과 같은 추상적 존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 다음에 이 규칙들의 영향 하에 놓여 이 규칙들이 반대로 물리적 우주에 매우 현저한 효과들을 미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아마도 적어도 한 가지 다소 회피적이지만 아무튼 쉬운 이 난관으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다. 우리는, 이 추상적인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존재들이 물리적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두뇌들이라고 그리고 이것들은 컴퓨터들처럼 기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추상적인 규칙들로 주장되는 것들은, 우리가 이용하여 우리의 컴퓨터들을 ‘프로그램 하는’ 구체적인 물리적 천공카드들과 꼭 마찬가지로 물리적 존재들이라고; 그리고 비-물리적인 것의 존재는 아마도 다만 ‘망상’이라고, 그리고 그런 망상들이 없다할지라도 모든 것은 현재 그러한 것처럼 계속될 터이기 때문에 아무튼 중요하지 않다고.
이 탈출구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망상들의 ‘정신적’ 위상에 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망상들은 만물이 지닌 보편적 속성들일 것이다; 내가 던지는 돌에는, 나에게 내가 그 돌을 던진다는 망상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돌이 도약한다는 망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펜이나 나의 컴퓨터에는, 사실상 순전히 물리적 상호작용들을 제외하고 일어나는 중요한 것이 없는 반면 그것이 해결하고 있다고 그것이 생각하는 ㅡ 그리고a 내가 해결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ㅡ 문제들에 대한 그것의 관심 때문에 그것이 작동한다는 망상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콤프튼(Compton)을 괴롭힌 물리학적 결정론이라는 문제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문제는 철학적 수수께끼만이 아니라 적어도 물리학자들, 생물학자들, 행동론자들, 심리학자들과 컴퓨터 공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상당히 많은a 철학자들이, 그 문제가 ‘자유’라는 단어의 사용에 관한 수수께끼인 언어적 수수께끼일 뿐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흄[Hume]과 슐릭[Schlick]을 좇아서).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물리학적 결정론이라는 문제와 철학적 결정론 사이의 차이점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흄(Hume)처럼 결정론들로 그들이 결정론자라는 것은 그들에게 ‘자유’가 ‘단어일 따름’인 이유를 설명하거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우리가 언어적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 것 이상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을
터인 물리과학들이나 컴퓨터공학에 저렇게 가깝게 접촉한 적이 없었다.
X
콤프튼(Compton)처럼 나는 물리학적 결정론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고, 콤프튼(Compton)처럼 우리가 계산기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계산기들로부터 ㅡ 심지어 우리 자신에 관하여 ㅡ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내가 기꺼이 인정할지라도). 그리하여 콤프튼(Compton)처럼 나는 물리학적 비결정론자이다: 물리학적 비결정론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비결정론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결정론이 충분하지 않음을 밝히려고 시도하겠다.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는 이 서술과 동시에 나는 새로운 요점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문제의 바로 핵심에 도달했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전체 세계는 모든 구름들과 모든 유기체들과 모든 동물들과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여 완벽하게 작동하는 무결점의 시계이다. 다른 한편으로 퍼스(Peirce)의 비결정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비결정론이나 어떤 다른 형태의 비결정론이 참이라면, 단지 우연이 우리의 물리적 세계에서 주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연은 결정론보다 더 만족스러운가?
그 질문은 잘 알려져 있다. 슐릭(Schlick)과 같은 결정론자들은 그것을 이런 방식을 표현했다: ‘... 행동의 자유, 책임 그리고 정신적 온전성은 인과성의 영역을 초월할 수 없다: 그것들은 우연이 시작되는 곳에서 멈춘다... 더 높은 등급의 무작위성은... 더 높은 등급의 무책임을 [의미할 따름이다].’
나는 아마도 슐릭(Schlick)의 이 개념을 내가 이전에 사용한 사례를 통하여 표현할 것이다: 내가 이 강좌를 준비하면서 산출한 흰 종이 위에 쓰인 검은 표시들은 다만 우연의 결과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표시들이 물리적으로 사전에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지 않다. 사실상, 그것은 훨씬 덜 만족스럽다. 이유인즉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나의 강좌의 원고가 내가 받은 교육과 내가 읽고 있던 저서들과 내가 청취했던 대담들을 포함하여 내가 받은 물리적 유전과 나의 물리적 환경에 의하여 원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전적으로 기꺼이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읽어주고 있는 것이 우연만의 결과라고 ㅡ 목적이나 심사숙고나, 계획이나 의도 없이 조합된 영어 단어들이나 혹시 글자들의 무작위적 표본일 따름 ㅡ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정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다만 우연뿐이라는 개념은, 흄(Hume)이 ‘물리적 필연성’으로 지칭한 것의 ‘제거’는 틀림없이 ‘우연과 동일한 것’을 항상 야기한다고 주장한 흄(Hume)으로부터 그 주제에 관한 슐릭(Schlick)의 견해들 중 많을 견해들과 함께 슐릭(Schlick)에 의하여 인수되었다. ‘대상들은 틀림없이 결합되거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우연과 절대적 필연성 사이에 매개를 인정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나는 나중에 이 중요한 교설에 반대하여 논증하겠는데 그 교설에 따르면 결정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우연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교설은 인간 자유의 가능성을 설명하거나 적어도 예시하려는 목적을 지녔던 양자론적 모형들에 대하여 유효한 듯이 보인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이것은 이 모형들이 그렇게 매우 불만족스러운 이유인 듯하다.
콤프튼(Compton) 자신은, 특별히 어떤 모형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런 모형을 고안했다. 그 모형은 양자 비결정성과 양자도약의 예측 불가능성을 인간의 중대한a 결정으로서 이용한다. 그 모형은, 개별 양자도약의 효과를 그 효과가 폭발을 일으키거나 폭발을 야기하기 위해 필요한b 중계를 파괴할 정도로 증폭하는 증폭기로 구성된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개별적인 양자도약은 주요한 결정과 대등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그 모형에는 합리적인 결정과의 유사성이 없다. 그 모형은 오히려,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자’고 말하는 곳에서 일종의 결정-내리기의 모형이다. 사실상, 양자도약을 증폭하기 위하여 전체 기구는 다소 불필요한 듯이 보인다: 동전 던지기 그리고 던지기의 결과에 따라서 방아쇠를 당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터이다. 그리고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한 곳에는 무작위적 결과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내장된 동전-던지기 장치들이 구비된 컴퓨터들이 있다.
아마도 우리의 결정들 중 몇 가지 결정들은 동전-던지기들과 같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흔히 숙고할 충분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숙고 없이 취해지는 즉석-결정들이다. 운전자나 항공기 조종사는 종종 이와 같은 즉석-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가 잘 훈련되어 있거나 단지 운이 좋다면 결과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양자-도약 모형이 그런 즉석-결정들을 위한 모형이 될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양자-도약의 증폭과 같은 것은 우리가 즉석-결정을 한다면 실제로 우리의 두뇌들 속에서 발생할 것임은 상상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즉석-결정들은 실제로 그렇게 매우 흥미로운가? 그 결정들은 인간 행위의 ㅡ 합리적인 인간 행위의 ㅡ 특징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양자 도약들을 이용하여 우리가 훨씬 더 멀리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a 양자 도약들은, 완벽한 우연은 완벽한 결정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흄(Hume)과 슐릭(Schlick)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이는 사례들의 종류일 따름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행위를 ㅡ 그리고 정말로, 동물의 행위 ㅡ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구름들과 완벽한 시계들 사이에서 중간적인 어떤 것인 완벽한 우연과 완벽한 결정론 사이에서 특징 상b 중간적인c 어떤 것이다.
우연과 결정론 사이에는 중간적인 것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흄(Hume)과
슐릭(Schlick)의 존재론적 주장은 내가 보기에 고도록 독단적일 (교조적임은 말할 것도 없고d) 뿐만 아니라 분명히 터무니없다; 그리고 우연에는 우리의 무지라는 징후로서를 제외하고 위상이 없다는 완벽한 결정론을 그들이 신뢰했다는 전제를 토대로 해서만 그것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I don’t think that we shall get much further with quantum leap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또한 나는 양자 도약들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in charact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울리는’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ntermedi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매개적인’으로 번역되면서
강조되지 않았다.
d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not to say doctrinai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공론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으로 번역되었다.
경우에도 그것은 터무니없어 보이는데 이유인즉 부분적 지식이나 부분적
무지와 같은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고도록 신뢰 가능한 시계들도 실제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슐릭
(Schlick)은 (흄[Hume]이 아니라할지라도a) 이것이 주로 마찰과 같은 요인들에 ㅡ 다시 말해서, 통계적이거나 우연한 효과들에 ㅡ 기인한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적어도 짧은 기간들 동안에 날씨를 우리가 아주 성공적으로 흔히 예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름들이 완벽하게 우연-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XI
그리하여 우리는 왼쪽에 구름들을 그리고 오른쪽에 시계들을 그리고 그 사이 어디엔가 동물들과 사람들을 지닌 우리의 옛 배열로 돌아가야겠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는 그렇게 한 후에도 (그리고 이 배열이 현대 물리학과 일치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기 전에 해결될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겨우 기껏해야 우리의 주요 문제들과 관련하여 여지를 마련했다b.
이유인즉 분명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목적들, 심사숙고들, 계획들, 결정들, 이론들, 의도들, 그리고 가치들과 같은 비-물리적인 것들이 어떻게 물리적 세계에서 물리학적 변화들을 야기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이렇게 하다는 것은, 흄(Hume)과 라플라스(Laplace)와 슐릭(Schlick)의 의견과 반대되지만, 명백한 듯이 보인다. 우리의 펜들이나 연필들이나 불도저들에 의하여 시간마다 야기되는 저 엄청난 모든 변화들이, 결정론적인 물리학 이론에 의해서나 아니면 (확률론에 의하여) 우연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순전히 물리학적 관계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콤프튼(Compton)의 테리 강좌(Terry Lectures)로부터 나온 다음의 매혹적인 구절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이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1월 10일 오후 5시에 강좌를 열기로 동의하면서 예일 대학의 사무장에게 내가 편지를 보낸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는 나를 신뢰하여 내가 예일 대학에 와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a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made roo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자리를 양보했을’으로 번역되었다.
발표하였고 청중들은 그의 말을 신뢰하여 정해진 시간에 강당으로 왔다. 그러나 청중들의
신뢰가 맞는다는 커다란 물리학적 비개연성을 고려하라. 그러는 동안 나의 업무로 인하여
나는 로키산맥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햇볕이 가득한 이태리로 갔다. 향광적(向光的: phototropic) 생명체는 [내가 우연히 그런 생명체인 것과 같이] 그곳에서 [쉽게] 자신을 되돌려서 쌀쌀한 뉴 헤이븐(New Haven)으로 가려하지 않을 터이다. 내가 이 순간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들은 숫자로서 무한하다. 물리적 사건으로서 고려되어, 나의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믿을 수 없이 작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왜 청중의 믿음은 맞았던가?... 그들은 나의 목적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곳에 가야한다고 결정한 것은 나의 목적이었다.
콤프튼(Compton)은 여기서, 물리학적 비결정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매우 아름답게 밝힌다. 확신컨대 우리는 비결정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떻게 인간들과 혹시 동물들이 목표들이나 목적들이나 규칙들이나 동의들과 같은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거’나 ‘통제를 받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의 핵심적 문제이다.
XII
그러나 보다 세밀하게 보면, 이태리에서 예일로 향한 콤프튼(Compton)의 이 여행 이야기에는 두 가지 문제들이 있음이 밝혀진다. 이 두 가지 문제들 중에서 첫 번째 문제를 나는 여기서 콤프튼의 문제(Compton’s Problem), 그리고 두 번째 문제를 데카르트의 문제(Decartes’s Problem)로 지칭하겠다. 콤프튼(Compton)의 문제는 철학자들에 의하여 보이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겨우 희미하게 보였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것이다:
강좌 제안을 수락하는 서한들과 같은 것들과 의도의 공개적 발표들이 있다; 공개적으로 선언된 목적들과 목표들; 일반적인 도덕적 규칙들. 이 서류들이나 공언들이나 규칙들 각각에는 특정 내용이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번역하거나 재정식화를 할지라도 불변한다. 그리하여 이 내용이나 의미는 아주 추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 인간의 물리적 움직임들을 그 인간이 이태리에서 코네티컷 주로 다시 움직이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ㅡ 아마도 약속을 표시한 달력에 짧은 암호 표시를 통하여 ㅡ 있다. 저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이 내가 콤프튼(Compton)의 문제로 지칭할 것이다. 이런 형태로, 우리가 행동론적이나 유심론적(唯心論的: mentalist) 심리학을 채택할지의 질문과 관련하여 그 문제가 중립적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주어지고 콤프튼(Compton)의 원고에 의하여 제시된 정식화에서, 그 문제는 예일 대학으로 돌아오는 콤프튼(Compton)의 행위를 통하여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정신적 사건들을 결정이나 개념을 파악했거나 얻었다는 느낌으로 포함시킨다할지라도 차이점은 없을 터이다.a
콤프튼(Compton) 자신의 행동론적 언어사용법을 유지한다면, 콤프튼(Compton)의 문제는 인간의 행위에 (그리하여 물리적 우주에) 미치는 추상적 의미들의 우주의 영향이라는 문제로서 기술될 것이다.b 여기서 ‘의미들의 우주’는 약속들, 목표들과 문법들이나 예의바른 행위나 논리학이나 체스나 대위법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포함하는 약칭 용어이다; 또한 과학적 발간물과 (그리고 다른 발간물들) 같은 것들; 우리가 지닌 정의감이나 아량에 대한 호소 혹은 우리가 지닌 예술적 감상에 대한 호소; 기타 등등, 거의 무한하다.
내가 여기서 콤프튼(Compton)의 문제로 지칭한 것은, 그 문제를 본 사람이 없을지라도,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견해로 그 문제는 실제적인 필수 문제이고, 내가 여기서 ‘데카르트의 문제’로 지칭하고 있는 고전적인 몸-정신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
오해들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아마도, 그의 문제를 행동론적 용어들로 정식화함에 의하여 콤프튼(Compton)에게는 틀림없이 전면적인c 행동론을 지지할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그는 자기 자신의 정신의 존재도 다른 정신들의 존재도 혹은 결정이나 숙고들이나 쾌락이나 고통과 같은 경험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해결될 두 번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을 터이다.d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t would make very little difference if we included such mental events as volition, or the feeling of having grasped, or got hold of, an idea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의지나 어떤 관념을 파악하거나 이해한 느낌과 같은 심적인 사건들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Retaining Compton’s own behavourist terminology, Compton’s
problem may be described as the problem of the influence of the universe of abstract meanings upon human behaviour (and thereby upon the physical universe).인데 Retaining
으로 시작되는 분사구문의 주어가 Compton’s problem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ull-fledg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He would therefore have insisted that there is second problem
to be solv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므로 그는 해결해야 할 두 번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면 좋았을 터이다.’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문제를 고전적인 몸-정신의 문제, 즉 데카르트의
문제와 동일시할 것이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것이다: 정신의 상태들과 같은 것들이 ㅡ 의지들, 느낌들, 기대들 ㅡ 우리가 지닌 사지들의
육체적 움직임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움직임들을 통제하는 것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문맥에서 덜 중요할지라도) 생명체의
육체적 상태들이 자체의 정신적 상태에 영향을 미칠 것은 어떻게 그러한가? 이 두 가지 문제들의 어느 한쪽 문제에 대한 만족스럽거나 수용 가능한 해결책은, 내가 콤프튼의 자유에 대한 공준(Compton’s postulate of Freedom)으로 지칭할 다음 공준(公準: postulate)에 맞아야 할 터이라고 콤프튼(Compton)은 제안한다: 그 해결책은 자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또한, 어떻게 자유는 단지 우연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거의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인 것과 물론 경직된 제어는 아닐지라도 제한적이거나 선택적인 제어와 같은 것 ㅡ 목표나 표준과 같은 ㅡ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의 결과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유인즉 콤프튼(Compton)을 이태리로부터 되돌렸던 제어들로 인하여 그에게는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과 프랑스와 이태리 선박을 선택하는 자유; 혹은 어떤 더 중요한 임무가 발생했다면 자신의 강좌를 연기하는 자유.
콤프튼(Compton)의 자유에 대한 공준(公準: postulate)은, 우리가 지닌 두 가지 문제들에 대한 수용 가능한 해결책들이 자유와 제어를 결합하는 개념에 그리고 또한 내가 ‘경직된 제어’에 대조하여 지칭할 것과 같이 ‘유연한 제어’라는 개념에 맞아야 한다고 요구함에 의하여 그 해결책들을 제한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콤프튼(Compton)의 공준은, 내가 기꺼이 그리고 자유롭게 수용하는 제한이다; 그리고 무비판적은 아닐지라도 자유롭고도 신중한 내 자신의 이 제한 수용은, 바로 콤프튼(Compton)의 자유에 대한 공준의 내용인 자유와 제어의 저 결합의 예시로서 간주될 것이다.
XIII
나는 우리가 지닌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들을 ㅡ 콤프튼(Compton)의 문제와 데카르트의 문제 ㅡ 설명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믿는 바,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사실상, 진화에 관한 그리고 생명체의 새로운 모형에 관한 이론.
이 필요성은, 현존하는 비결정론적 이론들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이론들은 비결정론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결정론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현존하는 비결정론적 이론들이 어떻게 슐릭(Schlick)의 반대로부터 도피하는지 그리고 그 이론들이 콤프튼(Compton)의 자유 더하기 제어의 공준에 부합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시, 콤프튼(Compton)의 문제는 그 이론들을 완전히 벗어난다: 그 이론들은 콤프튼(Compton)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이 이론들은 데카르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일지라도, 그 이론들이 제시하는 해결책들은 만족스러운 듯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론들은 ‘제어의 주-스위치(master-switch) 모형들’이나, 더 간략하게, ‘주-스위치(master-switch) 이론들’로 지칭될 것이다. 그 이론들의 근본적인 개념은, 우리의 신체가 하나 이상의 중앙 제어 장소들로부터 하나의 지렛대나 스위치에 의하여 통제될 수 있는 일종이 기계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심지어, 제어 장소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지경까지 갔다: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송과선(松科腺: pineal gland) 안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몇몇 양자이론가들은, 몇 가지 양자 도약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도약들을 선택함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들은 우리의 신체들에 영향을 미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콤프튼[Compton]은 이 제안을 매우 잠정적으로 수용했다). 그 다음에 이것들은, 전자기 증폭기처럼 작용하는 우리의 중추신경계에 의하여 증폭된다: 증폭된 양자 도약들은 중계기들이나 주-스위치들(master-switches)의 직렬연결에 작용하고 궁극적으로 근육수축들을 야기한다. 내가 생각하기 콤프튼(Compton)의 저서들에는, 그가 이 특정 이론이나 모형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는 그리고 그가 그 이론이나 모형을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했다는 몇 가지 징표들이 있다: 인간의 비결정론은 (혹은 심지어 ‘자유’) 반드시 양자물리학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 주-스위치(master-switch) 이론들에 대한 혐오를 포함하여 그가 이 모든 것에서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이 주-스위치(master-switch) 이론들은 ㅡ 데카르트의 이론이든지 아니면 양자물리학자들의 증폭기 이론들이든지 관계없이 ㅡ 내가 혹시 ‘작은 아기 이론들’로 지칭할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이론들은 내가 보기에 거의 작은 아기들만큼 매력적이지 못하다.
여러분 모두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 미혼모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작은 아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미칠 확대되지 않은 수학적 지점일 따름입니다.’
양자이론가들은 매우 유사한 작은 아기 이론을 지닌다: ‘그러나 정신이 신체 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양자도약을 사용해서 이고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들 안에서 ㅡ 그리고 이것들은 정말 매우 작다 ㅡ 이다.’ 아기의 규모가 특정되는 한 여기에 혹시 작은 진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주-스위치(master-switch)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주-스위치(master-switch)-겸- 증폭기 모형은, 우리의 모든 결정들은 즉석-결정들이거나 (내가 위 X절에서 그것들 지칭했던 것처럼) 아니면 즉석-결정들로 구성된다고 강력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증폭기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이 생물학적 체계들의 중요한 특징들임을 인정하는데 이유인즉, 반응 에너지가 생물학적 자극에 의하여 방출되거나 촉발되어 통상적으로 촉발하는 자극 에너지를 크게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또한 물론, 즉석-결정들이 정말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결정들은 콤프튼(Compton)이 염두에 두고 있던 종류의 결정과 크게 다르다: 그 결정들은 거의 반사작용들과 같고 그리하여, 우리의 행위에 미치는 의미들의 우주의 영향이라는 콤프튼(Compton)이 지녔던 문제 상황과 맞지도 않고 콤프튼(Compton)의 자유에 대한 공준에도 맞지 않는다 (또한 ‘유연한’ 제어라는 개념에도 맞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 맞는 결정들은 통상적으로 긴 심사숙고를 통하여 거의 부지불식간에 도달된다. 그 결정들은, 주-스위치(master-switch) 모형에 의하여 충분히 상징되지 않는 일종의 성숙하는 과정에 의하여 도달된다.
이 심사숙고의 과정을 고찰함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이론에 관한 또 다른 암시를 얻을 것이다. 이유인즉 심사숙고는 항상 시행착오에 의하여, 혹은 보다 정확하게, 시행과 오류 제거의 방식에 의하여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잠정적으로 제안함에 그리고 합당하게 보이지 않은 것들을 제거함에 의하여.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새로운 이론에서 시행과 오류-제거의 어떤 기제(機制: mechanism)을 아마도 사용함을 암시한다.
이제 어떻게 나아갈 의도가 나에게 있는지를 개괄하겠다.
일반적인 용어들로 나의 진화 이론을 정식화하기 전에, 나는 그 이론을 나의 첫 번째 문제인 콤프튼(Compton)이 지녔던 행위에 미치는 의미의 영향이라는 문제에 적용함에 의하여 특정한 경우에 그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먼저 밝히겠다.
이런 방식으로 콤프튼(Compton)이 지녔던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나는 그 이론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정식화하겠다. 그런 다음에 그 이론이 데카르트가 지녔던 고전적 몸-정신 문제에 대한 직선적이고 거의 사소한 답변을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ㅡ 새로운 문제-상황을 야기하는 우리의 새로운 이론이라는 틀 안에서 ㅡ 밝혀질 것이다. (아래 255쪽의 추가사항 참조.)
XIV
동물 언어들로부터 인간 언어들로의 진화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을 통하여 우리의 첫 번째 문제에 ㅡ 다시 말해서, 행위에 미치는 의미의 영향이라는 콤프튼(Compton)의 문제 ㅡ 이제 접근하자.
동물 언어들과 인간 언어들에서 많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있지만 차이점들도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 언어들은 정말로 어떤 정도로 동물 언어들을 능가한다.
고인이 된a 나의 스승 칼 뷜러(Karl Bühler)의 개념들을 이용하면서 확대하여, 동물 언어들과 인간 언어들이 공유하는 두 가지 기능들과 인간 언어만이 소유하는 두 가지 기능들을 나는 구분하겠다; 혹은 다시 말해서, 두 가지 하위 기능들과, 하위 기능들을 토대로 진화한 두 가지 고등 기능들.
언어의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은 이렇다. 먼저, 행위의 모든 다른 형태들처럼 언어는 징후들이나 표현들로 구성된다; 언어는, 언어적 기호들을 만드는 생명체의 상태에 대하여 징후적이거나 표현적이다. 뷜러(Bühler)를 좇아서, 나는 이것을 언어의 징후적 혹은 표현적 기능으로 지칭한다.
두 번째, 언어나 의사소통이 발생하려면 기호-만드는 생명체나 ‘송신자’뿐만 아니라 반응자인 ‘수신자’ 또한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생명체인 송신자의 징후적 표현은 두 번째 생명체에게서 반응을 방출하거나 자아내거나 자극하거나 촉발하는데 그 반응은 송신자의 행위에 반응하고 그리하여 그 행위를 신호로 변환시킨다. 수신자에게 작용하는 이 언어의 기능은 뷜러(Bühler)에 의하여 언어의 방출이나 신호 기능으로 지칭되었다.
예를 들면, 새는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고 특정 징후들을 보임에 의하여 이것을 표현할 것이다. 이것들은 그 다음에 두 번째 새에게서 특정 대응이나 반응을 방출하거나 촉발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두 번째 새 또한 날아갈 준비가 될 것이다.
표현적 기능과 방출 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이 구별됨을 주목하라; 이유인즉 첫 번째 기능의 사례들은, 반대 방향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두 번째 기능 없이도 발생할 것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자신이, 그리하여 또 다른 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도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첫 번째 기능은 두 번째 기능 없이도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 의한 진정한 의사소통의 사례에서 두 가지 기능들이 항상 함께 발생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기능들이
구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a
한편으로는 징후적이거나 표현적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는 방출이나 신호 기능이라는 이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은 동물들과 더불어 인간들의 언어들에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은 항상, 고등 기능들 중 어떤 기능이 (특징적으로 인간이 소유한) 존재하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유인즉 인간 언어는 크게 훨씬 더 풍요롭기 때문이다. 인간 언어에는 많은 기능들과 차원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동물 언어에는 없다. 이 새로운
기능들 중 두 가지 기능이 추론과 합리성의 진화를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기능 및 논증적(論證的: argumentative) 기능.
기술적 기능의 사례로서, 나는 아마도 이제 여러분에게 이틀 전 어떻게 나의 정원에서 목련이 피고 있었으며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기술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마도 나의 느낌들을 표현하여 또한 여러분 안에서 어떤 느낌을 방출하거나 촉발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목련 나무들을 생각함에 의하여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이 존재할 터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덧붙여, 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사실들을 틀림없이 기술했다; 나는 몇 가지 기술적 서술들을 틀림없이 실행했다; 그리고 나의 서술들 중 이 서술들은 실제로 참이거나 실제로 거짓일 터이다.b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의 말을 청취한다면 여러분은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하위 기능들은 항상 존재한다. 기술적 기능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데 이유인즉 내가 사실을 기술하지 않고도 여러분에게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조함을 ㅡ 가령, 여러분이 이 긴 강좌를 끝까지 들을 것인지에 관한 의심 ㅡ 보이거나 표현함에서 나에게는 어떤 것을 기술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측된 사태들의 상태들에 대한 기술을 포함한 기술은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ich shows that they can be disentangled in spite of the
fact that, in any genuine instance of communication by language, they always occur
togeth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런데 방출기능은 언어 소통의 실제적인 어떤 사례에서도 그 두
기능들이 항상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따로 분리될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앞의 세 문장의 원문은 But in addition to all this, I should have described to you some facts; I should have made some descriptive statements; and these statements of mine
would be factually true, or factually false.인데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의 미실행 의무를 표현하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틀림없이 ~했다’라는 의미로 must have + 과거분사를 써야 할 듯하다.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이 모든 것에다 또 나는 여러분들에게 몇몇 사실들, 예컨대 내가 약간의 기술적인 진술들을 하고 이런 내 진술들은 실제 참이 되거나 실제로 거짓이 될 것이라 기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우리가 이론들이나 가설들의 형태로 정식화하는데 분명히 인간 언어가 지닌 극도로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고 다양한 동물 언어들로부터 인간 언어를 극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저 기능이다 (비록 벌들의 언어에는 그 기능에
근접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a 그것은 물론 과학에 필수불가결한 기능이다.
이 탐구에서 언급될 네 가지 기능들 중에서 마지막이자 최고의 기능은, 자체의 최고 발전 형태로 충분히-훈련된 비판적 토론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일 것처럼, 언어의 논증적 기능이다.
언어의 논증적 기능은 내가 여기서 토론하고 있는 네 가지 기능들 중에서 최고의 기능일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은 네 가지 기능들 중에서 가장 늦게 진화했다. 그 기능의 진화는, 논증적이고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의 진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그리고 이 태도가 과학의 진화를 야기했기 때문에, 언어의 논증적 기능이 아마도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적이 있는 생물학적 적응을 위하여 가장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다른 기능들처럼, 비판적 논증의 기술은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발전했고 그 기술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형식논리학 자체는 ‘비판적 논증의 지식 습득 도구’로서 기술될 것이다.) 언어의 기술적 사용처럼, 논증적 사용은 제어의 혹은 ‘규제적 개념들’의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여) 이상적 표준들을 진화시켰다: 언어의 기술적 사용에 관한 주요 규제적 개념은 진리이다 (허위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논증적 사용에 관한 주요 규제적 개념은, 비판적 토론에서, 타당성이다 (부당성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논증들은 통상적으로 어떤 제안이나 기술적 서술을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이것이, 우리의 네 번째 기능이 ㅡ 논증적 기능 ㅡ 틀림없이 기술적 기능보다 더 늦게 나타난 이유이다. 내가 어떤 위원회에서, 우리가 그 비용을 댈 여유가 없기 때문에 혹은 돈을 사용하는 어떤 대안적 방법이 더 이롭기 때문에 그 대학은 특정 비용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논증할지라도, 나는 어떤 제안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서 논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제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여 ㅡ 가령, 제안된 사용은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과제에 찬성하여, 그리고 제안된 사용은 이로울 것이라는 과제에 반대하여 ㅡ 나는 논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논증들은, 심지어 제안들에 관한 논증들도 과제들과 관련되고 매우 흔히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과제들과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논증적 사용은, 단지 내가 논증을 하지 않고 기술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기술적 사용과 분명하게 구분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기술이 지닌 진실성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들을 제공하지 않고도 나는 기술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가 지닌 네 가지 기능들에 ㅡ 표현적, 신호적, 기술적 그리고 논증적 기능들 ㅡ 대한 우리의 분석은, 고등 기능들이 존재할 때마다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이 ㅡ 표현적 및 신호적 기능들 ㅡ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위 기능들로부터 고등 기능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을 함에 의하여 요약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행동론자들과 많은 철학자들은, 고등 기능들이 나타나든 아니든 하위 기능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분명한 이유로, 고등 기능들을 간과했다.
XV
인간과 함께 그리고 인간의 합리성과 함께 진화하고 출현한 언어의 새로운 기능들과 별도로, 우리는 거의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 또 다른 구분인 기관들(organs)의 진화와 도구들이나 기계류의 진화에 대한 구분을 고찰해야 하는데 그 구분은 영국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 한명인 에레혼(Erewhon)의 (1872년) 저자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에게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구분이다.
동물 진화는 주로, 배타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혹은 행위) 수정이나 새로운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혹은 행위) 출현에 의하여 나아간다. 인간 진화는 주로, 우리가 지닌 신체들이나 인물 외부에서 새로운 기관들(organs)을 발전시킴에 의하여 나아간다: 생물학자들이 그것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신체외적으로(身體外的으로: exosomatically)’나 ‘초-인물적으로(extra-personally)’. 이 새로운 기관들(organs)은 도구들이거나 무기들이거나 기계류이거나 주택들이다.
이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발전의 초보적인 시작들은 물론 동물들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잠자리나 굴이나 둥지 만들기는 초기 업적이다. 나는 또한 여러분에게, 수달들이 매우 교묘한 댐들을 구축한다는 것을 환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더 좋은 눈이나 귀를 발달시키는 대신에, 안경과 현미경과 망원경과 전화기와 보청기를 발달시킨다. 그리고 점점 더 민첩한 다리를 기르는 대신에, 인간은 점점 더 빠른 자동차들을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의 흥미를 끄는 초-인물적(extra-personal)이거나 신체외적(身體 外的: exosomatic) 진화의 종류는 이렇다: 기억력과 두뇌를 발전시키는 대신에 우리는 종이와 펜과 연필과 타자기와 전화녹음기와 인쇄기와 장서들을 발전시킨다.
이것들은 우리의 언어에 ㅡ 그리고 특히 우리 언어의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및 논증적 기능들에 ㅡ 새로운 차원들로서 기술될 것을 추가한다.a
최근의 발전은 (우리가 지닌 논증적 능력들을 주로 뒷받침하여 이용되는) 컴퓨터들의 성장이다.
XVI
고등 기능들 및 차원들은 어떻게 하위 기능들 및 차원들과 관련되는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고등 기능들 및 차원들은 하위 기능들 및 차원들을 갈음하지는 않지만 하위 기능들 및 차원들에 대하여 일종의 유연한 제어(plastic control)를 ㅡ 정보(feed-back)를 이용하는 제어 ㅡ 확보한다.
예를 들어 과학 회의에서의 토론을 생각하라. 그 토론은 흥미롭고 유쾌하고 자체가 그러함에 관한 표현들과 징후들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나중에 다른 참석자들에게 유사한 징후들을 방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특징까지 이 징후들과 방출하는 신호들이 토론의 과학적 내용에 기인하고 그 내용에 의하여 제어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적 및 논증적 특징을 지닐 것이기 때문에 하위 기능들은 고등 기능들에 의하여 제어될 것이다. 게다가 훌륭한 농담이나 유쾌한 웃음으로 인하여 하위 기능들이 단기간에는 승리할지라고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훌륭한 논증이고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se add to our languageㅡand especially to its descriptive and
argumentative functionㅡwhat may be described as new dimens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런 것들은 우리의 언어를 증진시키며 그리고 특히 새로운 차원들로 기술될 수 있는 언어의 기술적이고 논증적인 기능들을 증진시킨다.’로 번역되었다.
ㅡ 타당한 논증 ㅡ 그 논증이 확립하거나 반박하는 것이다.a 다시 말해서,
우리의 토론은 유연하게일지라도 진리와 타당성이라는 규제적 개념에 의하여 제어된다.
이 모든 것은, 인쇄물 및 출판물에서 새로운 차원들을 발견하여 발전시킴에 의하여, 특히 그 차원들이 과학적b 이론들과 가설들을 그리고 그 이론들과 가설들이 비판적으로 토론되는 논문들을 인쇄하여 출판하는 데 사용될 때 강화된다.
나는 여기서 비판적인 논증들의 중요성을 공정하게 다룰 수 없다: 그 중요성은 내가 상당히 폭넓게 서술한 주제이고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다시 그 주제를 제기하지 않겠다. 나는 단지, 비판적 논증들은 제어의 수단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 논증들은 선택의 수단인 오류들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경쟁하는 다양한 이론들과 가설들을 말하자면 여론 타진용 정보로서 잠정적으로 제시함에 의하여 우리의 문제들 해결한다; 그리고 그 이론들과 가설들을 오류-제거를 목적으로 비판적 토론 및 경험적 시험들에 부침에 의하여.
그러므로 내가 기술하려고 노력한 언어의 고등 기능들의 진화는, 새로운 종류의 시도들에 의한 그리고 오류-제거의 새로운 방법들에 의한 문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수단들의 진화로서 규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행들을 제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
XVII
이제 나는, 우리의 첫 번째 주요 문제인 행위에 미치는 의미의 영향이라는 콤프튼(Compton)의 문제에 나의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 해결책은 이렇다.
언어의 고등 기능들은 두 가지 것들 더 잘 제어하기 위한 필요의 압력을 받아서 진화했다: 새로운 도구들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새로운 과학적 이론들 및 새로운 선택 표준들을 성장시킴에 의한 우리가 지닌 언어의 하위 기능들과 환경에 대한 우리의 적응을 더 잘 제어하기 위한 필요의 압력.
이제 우리가 지닌 언어의 고등 기능들을 발전시킴에서, 우리의 언어는 추상적인 의미들과 내용들 또한 성장시켰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양태들의 이론 정식화하기와 표현하기로 추상하는 방법과 이론이 지닌 불변적인 내용이나 의미에 (이론이 지닌 진실이 의존하는) 주목하는 방법을 우리는 배웠다. 그리고 이것은, 이론들 및 다른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서술들에게 뿐만 아니라 제안이나 목표들이나 비판적 토론에 부쳐질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성립한다.
내가 콤프튼(Compton)의 문제로 지칭한 것은, 우리의 이론들이나 목표들이나 목적들이 지닌 내용들과 같은 의미들의 통제력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문제였다; 몇몇 경우들에는 심사숙고하고 토론한 다음에 우리가 채택했을 목표들이나 목적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것들의 힘은 이 내용들과 의미들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이유인즉 내용들과 의미들의 기능이 하는 한 가지 역할은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콤프튼(Compton)이 지녔던 문제에 대한 이 해결책은 콤프튼(Compton)의 제한하는 공준에 적합하다.a 이유인즉 우리 자신들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과 목적들에 의한 우리의 행동들에 대한 제어는 유연한 제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우리가 만드는 이론들에 종속시키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서 그 이론들이 우리가 지닌 규제적 기준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면 우리는 그 이론들을 자유롭게 배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제어는 일방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우리의 이론들이 우리를 제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이론들을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b 기준들을) 제어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정보(feed-back)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이론에 복종한다면 우리는 심사숙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렇게 한다c; 다시 말해서,
대안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 이후에 그리고 저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한 이후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solution of Compton’s problem conforms to Compton’s restricting postul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러한 콤프턴 문제의 해결은 콤프턴의 제한적인 공준을 따르고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 표기는 out인데 our의 오기이다. 그리고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 부분이
‘(심지어 기준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we do so freely, after deliber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는 숙고 후에 자유로이 이론들을 제어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나는 이것을 콤프튼(Compton)이 지녔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d으로 제출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문제로 진행하기 전에 나는 이제, 내가 나의 해결책a에서 이미 함축적으로 사용한 더 일반적인 진화 이론을 간략하게 개괄하겠다.
XVIII
나는 나의 일반론을 많은 변명들과 함께 제출한다. 그 일반론을 완벽하게 고찰하여 내 자신에게 분명하도록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일반론에 전혀 만족하지 못함을 느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 일반론이 진화론적 이론이고 내가 우려하는 바, 아마도 새로운 강조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이론들에게 추가하는 게 없는b 진화론적 이론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내가 이런 고백해야 할 때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c 이유인즉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진화론적 철학들에 관하여 매우 경멸적인 말들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22년 전 성당 참사회원 찰스 E. 레이븐(Charles E. Raven)이 자신의 저서 과학, 종교 그리고 미래(Science, Religion and the Future)에서 다윈적 논란을 ‘빅토리아 시대의 찻잔 속 폭풍’으로 기술했을 때 나는 동의했지만 그 찻잔으로부터 나오는 수증기들에 너무 주목한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했는데 그것에 의하여 나는 진화론적 철학들의 (특히 불변적인d 진화 법칙들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철학들) 뜨거운 분위기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찻잔이 결국 나의 찻잔이 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는 내가 틀렸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진화론적 철학들과 완전히 별도로, 진화론적 이론에 관한 문제는 자체가 지닌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거나 거의 항진명제적인 특징이다: 난제는, 다윈론과 자연선택이 극도로 중요할지라도 ‘적자생존’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게서 유래하는 용어) 의하여 진화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들은 가장 적합한 것이다’라는 주장과 ‘살아남는 것들은 살아남은 것들이다’라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할지라도 많은 차이점이 있는 듯하지 않다. 이유인즉 내가 우려하는 바a,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생존 외에 적합에 대한 다른 기준이 없어서 몇몇 생명체들이 생존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생명체들이 생명의 조건들에 최고로 적합한 생명체들이거나 가장 잘 적응된 생명체들이라고 우리가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윈론이 자체의 위대한 장점들 모두에도 불구하고b 전혀 완벽한 이론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윈론에는 자체들 덜 모호하게 만드는 재서술이 필요하다. 내가 여기서 개괄할 예정인 진화론은 그런 재서술에 관한 시도이다.
나의 이론은, 우리가 동물 언어로부터 인간 언어로의 진화를 분석했을 때 우리가 배운 것을 진화의 전체에 적용하려는 시도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론은, 유연한 제어들의 성장하는 계층적 체계로서의 특정 진화에 관한 견해로 구성되고 이 성장하는 유연한 제어들의 계층적 체계를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ㅡ 혹은 인간의 경우에, 신체외적으로(身體外的으로: exosomatically) 진화하는 것으로서의 ㅡ 특정 생명체들에 관한 견해로 구성된다. 신-다윈론적 진화론이 전제된다; 그러나 신-다윈론적 진화론은, 자체의 ‘돌연변이들’을 다소 우연적인 시행착오 책략들로서 그리고 ‘자연선택’은 착오-제거에 의하여 그 책략들을 통제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해석될 것임을 지적함에 의하여 재서술된다.c
이제 나는 그 이론을 12 가지의 짧은 주장들의 형태로 서술하겠다:
(1) 모든 생명체들은 부단히, 밤낮으로, 문제-해결에 몰두한다; 그리고 모든 저 생명체들의 진화적 계열들도 ㅡ 가장 원시적인 형태들로 시작하는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최근 구성원들인 직계들(phyla) ㅡ 그러하다.
(2) 이 문제들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은 말하자면 사후지각(事後知覺: hindsight)에 의하여 가설적으로 재구축될 수 있다. (나는 이것에 관하여 나중에 더 많을 것을 말하겠다.) 이런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 am afrai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내 생각에’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with all its great virtu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가능한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t is restated by pointing out that its ‘mutations’ may be interpreted as more or less accidental trial-and-error gambits, and ‘natural selection’ as one way of controlling them by error-elimin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내 이론은 다음과 같이 재진술된다. ‘돌연변이들’은 다소 우연적인 시행과 착오 전략들로 해석될 수 있고, 또한 ‘자연선택’은 오류 제거에 의한 그 전략들을 제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문제들에는 그 문제들을 의식하는 상대방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문제들에 그 문제들을 의식하는 상대방이 있는 곳에서는 의식적인 문제가 객관적인 문제와 일치할 필요가 없다.
(3) 문제-해결은 항상, 시행착오 방식에 의하여 나아간다: 새로운 반응들,
새로운 형태들, 새로운 기관들(器官들: organs), 새로운 행위 방식들, 새로운 가설들이 잠정적으로 제시되고 오류-제거의 의하여 제어된다.
(4) 오류-제거는 성공적이지 못한 형태들의 완벽한 제거에 (자연선택에 의한 성공적이지 못한 형태들의 제거) 의하거나 성공적이지 못한 기관들(器官들: organs)이나 행위 형태들이나 가설들을 수정하거나 억제하는 (잠정적인) 제어의 진화에 의하여 진행할 것이다.
(5) 단일 생명체는 하나의 신체로 축소되는데 말하자면 자체의 직계
(phylum)가 진화하는 동안에 발전된 제어들로 축소된다 (그 생명체가, 자체의 개체 발생적 발전에서, 자체의 계통 발생적 진화를 부분적으로 반복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6) 단일 생명체는 일종의, 자체가 속하는 생명체들의 진화적 계열의 (자체의 직계[phylum]) 선봉이다: 그 생명체 자체는, 새로운 환경적으로 안락한 장소를 조사하여a 그 환경을 선택하여 수정하는 잠정적 해결책이다. 그리하여 생명체 자체는, 개별적인 생명체의 행동들이 (행태) 이 생명체와 관련되는 것과 거의 꼭 마찬가지로 자체의 직계(phylum)와 관련된다: 개별적인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행태는 모두 시도들이고 그 시도들은 오류-제거에 의하여 제거될지도 모른다.
(7) 문제(problem)를 대신하여 ‘P’를 사용하고, 잠정적 해결책(tentative solutions) 대신에 ‘TS’를, 오류-제거((error-elimination)를 대신하여 ‘EE’를 사용하여 우리는 사건들의 근본적인 진화 순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P → TS → EE → P.
그러나 이 순서는 순환이 아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일반적으로, 첫 번째 문제와 다르다: 두 번째 문제는, 부분적으로 시험된 잠정적 해결책들과 그 해결책들을 제어하는 오류-제거 때문에 출현한 새로운 상황의 결과이다. 이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위의 도식은 재서술되어야 한다:
P
(8) 그러나 이 형태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빠졌다: 시도들의 다양성인 잠정적 해결책들의 다양성. 그리하여 우리의 최종적 도식은 이와 같은 것이
된다:
↗ TS
P
↘ . ↗
.
.
.
.
TS
(9) 이 형태로, 우리의 도식은 신(新)-다윈론의 도식과 비교될 수 있다. 신(新)-다윈론에 따르면 주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존의 문제. 우리의 이론 체계에서처럼 다양한 잠정적인 해결책들이 ㅡ 변종들이나 돌연변이들 ㅡ 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오류-제거 방식만 ㅡ 생명체를 죽이는 것 ㅡ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 이유 때문에) P
(10) 우리의 이론체계에서, 모든 문제들이 생존 문제들인 것은 아니다: 많은 매우 특별한 문제들과 하위-문제들이 있다 (최초의 문제들이 완전히 생존 문제였을지라도). 예를 들어 초기 문제 P
자신의 자손에 의하여 질식하는 것을 피하는 문제가, 다세포 생명체들의 진화에 의하여 해결된 저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일 것을 주목하는 일은 아마도 흥미로울 것이다: 자신의 자손을 제거하는 대신에, 생명체는 다양한 새로운 공생 방법들을 이용하여 공동 경제를 설립한다.
(11) 여기에 제시된 이론은 P
(12) 우리의 도식은 오류-제거하는 제어들의 (눈[eye]과 같은 경고하는 기관들[organs]; 정보[feed-back]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 발전을 참작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도 오류들을 제거할 수 있는 제어들; 그리고 우리의 도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닌 가설들이 우리 대신에 죽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다.
XIX
생명체 각각은 유연한 제어들로 구성된 계층적인 체계로서 ㅡ 구름들에 의하여 제어되는 구름들의 체계로서 ㅡ 간주될 수 있다. 제어되는 하위체계들은, 제어하는 체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억제되고 부분적으로 저지되는 시행착오 움직임들을 만든다.
우리는 이미, 언어의 고등기능들과 하위기능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의 사례를 만났다. 하위기능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자체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위기능들은 고등기능들에 의하여 저지되고 제어된다.
또 다른 특징적인 사례는 이렇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게 서있어도 (생리학자들a에 따르면) 나의 근육들은 거의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수축하고 이완하면서 부단히 움직이지만 (앞 절의 주장 (8)에서 TS
이 사례는 앞 절의 주장 (1)을 ㅡ 모든 생명체는 시행착오에 의하여 항상 문제-해결에 몰두한다는 ㅡ 또한 예시한다; 모든 생명체는, 성공적이지 못하면 제거되는 다소 우연-같거나 구름-같은 시행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제들과 옛 문제들에 반응한다. (성공적이라면, 그 시행들은 그렇게 도달된 해결책들을 ‘모의 실험하는’ 돌연변이들의 생존 가능성을 증가시켜 새로운 생명체의 공간적 구조나 형태 속에 그 해결책을 포함시킴에 의하여 그 해결책을 유전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XX
이것이 그 이론에 대한 매우 간략한 개요이다. 그 개요에는, 물론, 많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요점을 다소 더 완전하게 설명하고 싶다 ㅡ ‘문제’ 및 ‘문제-해결’이라는 용어들을 내가 사용한 것과 (XVIII절의 주장 (1)에서 (3)까지에서) 우리는 문제들을 객관적이거나 비-심리학적 의미로 말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
그 요점을 중요한데 이유인즉 진화는 분명히 의식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생물학자들은, 특정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진화가 특정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눈의 (eye)의 진화가 움직이는 동물에게 딱딱한 것과 부딪히기 전에 자신의 방향을 바꾸라는 시기적절한 경고를 제공하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아무도,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이런 종류의 해결책이 의식적으로 추구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해결을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은유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이렇다: 우리가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거의 항상 사후지각(事後知覺: hindsight)으로부터 그렇게 한다. 문제를 풀려고 작업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그가 해결책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심지어 그가 자신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오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과학자들에게도 성립한다 ㅡ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들을 완벽하게 의식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저 극소수의 사람들에 속할지라도. 예를 들어, 케플러가a 의식하고 있던 문제는 세계 질서의 조화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해결한 문제는 두 가지-물체 행성 체계의 집합으로 된 운동에 대한 수학적 기술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유사하게,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시간-독립적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명함에 의하여 자신이 해결한 문제에 관하여 오해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파동들이 전하의 변하는 지속적인 장(場: field)의 전하-밀도 파동들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막스 보른(Max Born)이 슈뢰딩거(Schrödinger) 파동 진폭에 통계적 해석을 부여했다; 슈뢰딩거(Schrödinger)에게 충격을 안겼던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혐오했던 해석. 그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ㅡ 그러나 그 문제는 자신이 해결했다고 그가 생각했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이제 사후지각(事後知覺: hindsight)에 의하여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우리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가 매우 의식하고 있는 것은 과학 안에 있다.b 그러므로 사후지각(事後知覺: hindsight)을 다른 경우들에 사용하여 아메바가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메바가 여하한 의미에서 자체의 문제들을 의식하고 있다고 전제할 필요가 없을지라도) 틀림없이 부당하지 않다: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단지 한 단계이다.
XXI
그러나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행동들이 합리적이라고 전제할 것임인 반면, 콤프튼(Compton)은 아메바의 행동들이 합리적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결국 틀림없이 어떤 차이점이 있다.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나는 인정한다: 거의 무작위적이거나 구름-같은 시행착오 움직임들인 아메바의 행동 방식들이 근본적으로 매우 다르지는 않을지라도
자기 자신의 개념들에 대한 이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태도가 아인슈타인의 방법과 아메바의 방법 사이의 실제로 중요한 한 가지 차이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태도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혹은 또 다른 한 가지 가설을 더 신중하게 검토하기 전에 그 가설이 더 엄격한 비판을 견딜 수 있게 보이면 수 백 가지 가설들을 부적당한 것으로서 재빨리 배척할 수 있었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가 (John Archibald Wheeler) 최근에 말했듯이, ‘우리가 지닌 전체 문제는 실수들을 가능한 한 빨리 저지르는 것이다’. 휠러(Wheeler)가 지녔던 이 문제는 비판적인 태도를 의식적으로 채택함에 의하여 해결된다. 내가 믿는 바, 이것은 지금까지 합리적인 태도에 관한 혹은 합리성에 관한 최고의 형태이다.
과학자의 시행들과 착오들은 가설들로 구성된다. 과학자는 가설들을 말들로 그리고 흔히 글로 정식화한다. 그 다음에 과학자는, 이 가설들 중 한 가지 가설 안에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즐거워 할 동료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가설을 비판하고 그 가설을 실험적으로 시험함에 의하여 그 가설에서 결점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그 가설이 자체와 경쟁하는 가설들만큼 적어도 이 비판들과 이 시험들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 가설은 제거될 것이다.
원시인과 아메바와 관련해서는 상황이 다르다.a 여기에는 비판적 태도가 없어서 자연선택이, 틀린 가설을 유지하거나 그 가설을 신뢰하는 저 생명체들을 제거함에 의하여 틀린 가설이나 틀린 기대를 제거하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적이거나 합리적인 방법이 우리 대신에 우리의 가설들이 죽도록 하는 데 놓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진화의 경우이다.
XXII
여기서 나는 아마도, 결국 내가 매우 단순한 해결책에 도달했을지라도 나에게 많은 고민을 제공한 질문으로 선회할 것이다.
그 질문은: 유연한 제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밝힐 수 있을까? 자연에는a 유연한 제어들의 보기들로서나 물리학적 모형들로서 생각될 수 있는 무기적인(無機的인: inorganic) 물리적 체계들이 있는가?
이 질문은, 데카르트나 콤프튼(Compton)처럼 주-스위치(master-switch)를 사용하여 연구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흄(Hume)이나 슐릭(Schlick)처럼 완벽한 결정론과 순수한 우연 사이에는 중간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는 많을 철학자들에 의하여 함축적으로 부정적으로 답변된 듯하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인공두뇌학자들과 컴퓨터공학자들은 최근에 기재(hardware)로 만들어지지만 고도로 유연한 제어들을 내장하는 컴퓨터들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정보에 (feed-back) 의하여 검토되거나 평가되고 (자동조종 장치나 자동추적 장치의 방식으로) 오류가 발생하면 제거되는 우연-같은 시행들을 위한 내장된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을 지닌 컴퓨터들. 그러나 이 장치들은, 내가 유연한 제어들로 지칭한 것을 내장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복잡한 주-스위치들(master-switches)의 중계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내가 찾고 있던 것은 퍼스적(Peircean) 비결정론의 단순한 물리적 모형이었다; 몇몇 다른 구름 같은 구름들에 의하여 ㅡ 다소 덜 구름 같은 구름들에 의해서일지라도 ㅡ 통제되는 열운동에서 매우 구름 같은 구름을 닮은 순전히 물리적인 체계.
구름을 왼쪽에 시계를 오른쪽에 지닌 우리의 옛 구름들과 시계들의 배열로 우리가 돌아간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생명체처럼 혹은 우리의 각다귀 구름처럼 중간적이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닌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in natu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본성상’으로 번역되었다.
터이다: 말하자면a 물리적으로 그리고 ‘부드럽게’ 제어되는 순전히 물리적인
체계. 제어될 구름이 기체라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외쪽 끝에 곧 흩어져서 물리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중단할 제어되지 않은 기체를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오른쪽 끝에 기체로 가득 찬 철제 원통을 놓는다: 이것은 우리의 ‘강력한(cast-iron)’ 제어인 ‘딱딱한’ 제어의 보기이다. 그 사이에, 그러나 왼쪽으로 멀리 다소 ‘유연하게’ 제어되는 많은 체계들이 있는데 우리의 각다귀들의 떼와 다소 태양처럼 중력에 의하여 집결되는 기체와 같은 입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공들이 있다. (제어가 완벽함과 거리가 멀어서 많은 입자들이 달아난다할지라도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행성들은 아마도 자체의
움직임에서 강력하게(cast-iron) 제어된다고 언급될 것이다 ㅡ 물론 상대적으로 말해서인데 이유인즉 심지어 행성 체계도 구름이고 모든
은하수들과, 성단들과 성단들의 성단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기적
체계들 및 저 거대한 입자들의 체계들과 별도로, ‘유연하게’ 제어되는 작은 물리적 체계들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우리의 도표 중간에 어린이의 풍선이나, 혹시 더 낫게, 비눗방울을 놓을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매우 원초적이고 많은 면들에서 퍼스적(Peircean) 체계와 동시에b ‘부드러운’ 종류의 유연한 제어의 탁월한 보기나 모형으로 판명된다c.
비눗방울은, 두 가지 모두 구름들이고 서로 제어하는 두 가지 하위체계들로 구성된다: 공기가 없다면 비누 막은 붕괴할 터이고 우리에게는 비눗물방울만 있을 터이다. 비누 막이 없다면, 공기는 제어되지 않을 터이다: 공기는 흩어질 터이고 체계로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할 터이다. 그리하여 제어는 상호적이다; 제어는 유연하고 정보(feed-back) 특징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어되는 체계와 (공기) 제어하는 체계들 (막)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밀폐된 공기는 밀폐하는 막보다 더 구름 같을 뿐만 아니라 막이 제거되면 물리적인 (스스로-상호작용적인) 체계가 되는 것을 멈춘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막은 공기의 제거 이후에 다른 형태를 띨지라도 여전히 물리적 체계라고 언급될 작은 물방울을 형성할 것이다.
방울을 정밀 시계나 컴퓨터와 같은 ‘기재(hardware)’ 체계와 비교하여, 심지어 이 기재(hardware) 체계들도 구름들에 의하여 제어되는 구름들이라고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s it we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실제로’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nd로 강조되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와’로 번역되면서 강조되지 않았고 ‘원초적이면서’에서 강조되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turns ou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판명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물론 말해야 한다 (퍼스[Peirce]의 관점에 따라서). 그러나 이
‘딱딱한(hard)’ 체계들은 분자 열운동과 파동들의 구름-같은 효과들을 가능한
한 최소화할 목적으로 구축된다: 그것들이 구름들일지라도, 제어하는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은 가능한 한 많이 모든 구름-같은 효과들을 억제하거나 보상하도록 고안된다. 이것은, 심지어 우연-같은 시행착오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을 모의 실험하는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을 지닌 컴퓨터들에게도 성립한다.
우리의 비눗방울은 이런 면에서 다르고 생명체와 더 유사한 듯이 보인다: 분자 효과는 제거되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거죽에 ㅡ 체계를 ‘개방된 상태’로 두어 말하자면 자체의 ‘조직’ 속으로 구축되는 방식으로 환경적 영향들에 ‘반응할’ 수 있게 하는 투과성 벽 ㅡ 의하여 밀폐되는 체계의 작동에 기여한다: 비눗방울은, 광선에 맞았을 때, 열을 흡수하고 (온실과 많이 비슷하게a) 그리하여 밀폐된 공기는 물방울을 공중에 띄우면서 팽창할 것이다.
그러나 유사성이나 유추의 모든 이용에서와 같이, 우리는 한계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적어도 몇 가지 생명체들에게서 분자 파동들이 표면적으로 증폭되어 시행착오 움직임들을 방출하곤 했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아무튼 증폭기들은 모든 생명체들에게서 (이런 점에서 자체의 주-스위치들[master-switches] 및 증폭기들과 중계기들의 직렬장치들을 장착한 몇몇 컴퓨터들을 닮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눗방울에는 증폭기들이 없다.
이것이 어떨지라도, 우리의 물방울은 다른 구름-같은 체계들에 의하여 유연하고 부드럽게 제어되는 자연적인 물리적 구름-같은 체계들이 정말로 존재함을b 보여준다. (부연하여, 물방울의 막은 큰 분자들을 틀림없이 포함할지라도 물론 유기적 물질로부터 도출될 필요가 없다.)
XXIII
여기에 제시된 진화 이론은, 우리의 두 번째 주요 문제에 ㅡ 고전적인 데카르트적 몸-정신 문제 ㅡ 대하여 즉각적인a 해결책을 낳는다. 그 이론은, 진화에 관하여 그리하여 정신이나 의식의 기능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함에 의하여 그렇게 한다 (‘정신’이나 ‘의식’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의식이 작은 시작들로부터 성장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아마도 의식의 첫 번째 형태는, 생명체가 짜증스러운b 실체로부터 피하는 것과 같은 해결할 문제를 경험할 때 겪는 모호한 짜증b 느낌이다. 이것이 어떠하든, 의식은 가능한 대응 방식들을 기대하기 시작할 때 진화적 중요성을 ㅡ 그리고 증가하는 중요성 ㅡ 띌 것이다: 가능한 시행착오 움직임들, 그리고 그 움직임들이 야기하는 가능한 결과들.
이제 우리는, 의식적 상태들이나 의식적 상태들의 순서들은 제어의, 오류-제거의 체계들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초기) 행위, 다시 말해서, (초기) 움직임의 제거. 이 관점에서 의식은 제어의 많은 상호작용하는 종류들 중 단지 한 종류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가 예를 들어 저서들에 포함된 제어 체계들을 ㅡ 이론들, 법칙의 체계들, 그리고 ‘의미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 ㅡ 기억한다면 의식은 계층구조에서 최고의 제어 체계로 언급될 수 없다. 이유인즉 의식은 상당한 정도까지 이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언어 체계들에 의하여 제어되기 때문이다 ㅡ 비록 그 체계들이 의식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언급될지라도. 의식은 반대로 신체적 상태들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우리는 추측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신체적 상태들을 상당한 정도까지 제어한다. 법적이거나 사회적인 체계가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우리를 제어하면서 어떤 합당한 의미에서도 우리와 ‘동일하거’나 ‘유사하지’ 않지만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의식 상태들은 (‘정신’) 신체를 제어하고 신체와 상호작용한다.
그리하여 유사한 관계들의 전체 집합이 있다. 우리의 의미들의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세계가 의식과 관련되는 것과 같이, 의식은 행동하는 개별적 생명체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리고 개별적 생명체의 행위는 유사하게 자체의 몸과, 생리학적c 체계로서 생각되는 개별적 생명체와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mmedi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직접적인’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들의 원어는 각각 irritant 및 irrit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자극적인’ 및
‘자극’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hysiologic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심리학적인’으로 번역되었다.
관련된다. 후자(後者)는 생명체들의 진화 순서에 ㅡ 말하자면a 후자(後者)가
최근 선봉을 형성하는 직계(phylum) ㅡ 유사하게 관련된다: 개별적 생명체가 직계(phylum)에 의하여 시험기구로서 실험적으로 생성되고b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직계(phylum)의 운명을 제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행위는 생리학적c 체계에 의한 실험기구로서 실험적으로 생성되고b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d 이 체계의 운명을e 제어한다. 우리의 의식 상태들은 우리의 행위와 유사하게 관련된다. 우리의 의식 상태들은 시행착오에 의하여 우리의 행위가 낳는 합당하게 보이는 결과들을 야기하면서 우리의 행위들을 미리 생각한다f;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 상태들은 제어할 뿐만 아니라 시험하기인 숙고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이론이 우리에게 데카르트의 문제 대하여 거의 하찮은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을 안다. ‘정신’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도, 이 이론은
우리의 정신적 상태들은 우리의 신체적 움직임들을 (그 움직임들 중 몇 가지 움직임을) 제어한다는 그리고 생명체의 정신적 활동과 다른 기능들 사이에는 어떤 정보(feed-back)인 어떤 주고받기가 그리하여 어떤 상호작용이 있다는 결론을 즉각적으로g 낳는다.
제어는 다시 ‘유연한’ 종류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 모두는 ㅡ 특히 피아노나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ㅡ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몸이 항상 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로부터, 우리의 제어를 둘러싸고 있는 저 제한사항들을 참작하면서 우리의 목표들을 어떻게 수정할지를 우리가 배워야 함을: 비록 상당한 정도까지 우리가 자유로울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들을 두는 조건들이 ㅡ 물리적이거나 다른 방식의 ㅡ 있다. (물론, 항복하기 전에 우리는 자유롭게 이 한계들 초월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처럼 나는, 물론 두 가지 종류의 상호작용하는 본질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을지라도 이원론적인 관점의 채택을 제안한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상호작용하는 상태들인 (혹은 사건들) 물리-화학적 상태와 정신적 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되고 합당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 두 가지 종류의 상태들만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 대하여 너무 편협한 견해를 여전히 지닌다고 나는 제안한다: 적어도 우리는, 생명체들의 산물들인 저 인공물들과 특히 우리의 정신들의 산물들 및 우리의 정신들과 그리하여 우리의 물리적 환경의 상태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저 인공물을 또한 구분해야 한다. 이 인공물들이 흔히 ‘물질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 것’인 혹시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일지라도, 그 인공물들은 심지어 동물 수준에서도 때때로 기술의 완벽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 정신의 산물들은 흔히 ‘물질 조각들’을 많이 넘어선다 ㅡ 가령 표시된 종잇조각들; 이유인즉 이 종잇조각들은 지식 성장의 상태들인 토론의 상태들을 대변할 것인데 그 상태들은, 그 조각들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 대부분의 혹은 심지어 모든 정신들의 이해력을 초월할 (때때로 중대한 결과들을 낳으면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원론자들뿐만 아니라 다원론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물리적 우주에서 흔히 무의식적으로 야기한 위대한 변화들이 추상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개념들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인간의 정신들에 의하여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되는 그것들 중 몇 가지는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a
XXIV
한 가지 사후생각으로서, 나는 한 가지 마지막 요점을 추가하고 싶다.
자연선택 때문에 진화가 ‘공리주의적’ 결과들로 지칭될 것을 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일 터이다: 우리가 생존하는 것에 도움이 될 적응들을 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we have to recognize that the great changes which we have
brought about, often unconsciously, in our physical universe show that abstract rules and abstract ideas, some of which are perhaps only partially grasped by human minds, may move mountains.인데 some of which 이하는 관계대명사의 계속적 용법이기 때문에 some of which
are perhaps only partially grasped by human minds and may move mountains로 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 또한 다소 달라진다.
유연한 제어들을 장착한 체계에서 억제하는 하위체계와 억제되는 하위체계가 상호작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들은 우리의 문제들과 그리고 또한 우리의 목표들과 상호작용한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과 목표 선택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목표들이 경쟁할 것이고 새로운 목표들이 창안되어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제어될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새로운 목표가 생존 목표와 충돌한다면 이 새로운 목표는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거될 것이다. 많은 돌연변이들이 치명적이고 그리하여 자살적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살적인 목표들에 대한 많은 사례들이 있다. 다른 사례들은 생존과 관련하여 아마도 중립적이다.
처음에는 생존에 부차적인 많은 목표들이 나중에는 자주적이 되고 심지어 생존에 반대가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용기에서 뛰어나고자 하는,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고자 하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려는, 혹은 달에 착륙한 최초인이 되려는 야망; 혹은 어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는 야망.
다른 목표들은 바로 시작부터 생존하려는 목표와 독립적으로 자주적인
출발들일지도 모른다. 예술적 목표들이 아마도 이런 종류들이거나 몇몇 종교적
목표들과 그 목표들을 간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들이 생존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될지도 모른다.a
이 모든 것은 삶의 과잉 풍요로움의 ㅡ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이 의존하는 시행들과 착오들의 거의 지나친 풍요로움 ㅡ 한 부분이다.
예술가들이 과학자들처럼 이 시행착오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아마도 흥미롭지 않지는 않다. 화가는 색깔 한 점을 시험적으로 찍고 자신이 해결하고자 원하는 문제를 그 점이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점을 바꾸기 위하여 그 점이 내는 효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려고 뒤로 물러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시험적 시도의 ㅡ 색깔의 점이나 붓질 ㅡ 예기치 않거나 우연한 효과가 자신의 문제를 바꾸거나 혹은 새로운 하위문제나 새로운 목표를 낳을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예술적 목표들의 그리고 예술적 표준들의 진화는 (논리의 규칙들처럼,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제어 체계들이 될) 또한 시행착오 방식에 의하여 나아간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동안, 물리적 결정론이라는 문제를 그리고 음악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단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신체들 연구하고 물리적 체계들로서의 그들의 환경을 연구함에 의하여 그리고 오선지 위 어디에 그들의 펜이 검은 음표들을 기록할지를 예측함에 의하여 모차르트 오페라나 베토벤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을 터인 귀머거리 물리학자의 사례를 되돌아 볼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물리학적 결정론의 수용 불가능한 결과들로서 제시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취향’인 그들의 음악적 평가 체계에 의하여 제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체계는 강력한 것이 아니라 다소 유연하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들에 반응하고, 그것은 새로운 시행들과 착오들에 의하여 ㅡ 아마도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불협화음인 우연한 실수에 의하여 ㅡ 수정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상황을 요약하고 싶다.
우리는, 세상을 폐쇄된 물리적 체계로서 ㅡ 엄격하게 결정론적인 체계이건
엄격하게 결정되지 않는 모든 것인 단지 우연에 기인하는 체계이건 ㅡ 간주하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대한 그런 관점에 근거하면 인간의 창조성이나 인간의 자유는 망상들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양자-이론적 비결정성을 이용하려는 시도 또한 불만족스러운데 왜냐하면 그 시도가 자유보다는 우연을 그리고 의도적 결정들보다는 즉석-결정들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세상에 대한 다른a 견해를 ㅡ 물리적 세상이 개방된 체계인 견해 ㅡ 제시했다. 이것은, 시행과 오류-제거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체의 진화라는 견해와 양립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생물학적 새로움의 출현과 인간의 지식 및 인간의 자유의 성장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그리고 콤프튼(Compton)의 문제와 데카르트의 문제에 해결책들을 제시하는 진화 이론을 개괄하려고 노력했다. 그 이론은 너무 단조롭고 동시에 너무 사변적인 이론임을 나는 우려한다; 그리고 그 이론으로부터 시험 가능한a 결과들이 도출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내가 제시한 해결책이 철학자들이 찾고 있던 것이라고 나는 결코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제시한 해결책이 자체가 지닌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에 가장한 답변을 ㅡ 혹시 추가적인 진보를 낳을 답변 ㅡ 제공한다고 콤프튼(Compton)이 아마도 말했을 터이라고 느낀다.
(1974년에 추가. 나의 강좌 원고에서 나의 ‘여기에 제시된 이론은 ... 고전적인 데카르트의 몸-정신b 문제에 즉각적인c 해결책을 낳는다d’고 내가 다소 부주의하게 말했을 때 (250쪽), 상호작용 이론이 선호될 수 있는지의 문제와 정신적 상태들과 신체적 상태들 사이의 유사성에 (혹은 동일성) 관한 문제를 나는 의미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토론이 상호작용을 선호하는 훌륭한 진화론적 (혹은 기능적) 이유들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토론이 이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낳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상호작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의 문제를 물론 나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이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고 ㅡ 정신적 및 신체적 상태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ㅡ 생각한다. 이유인즉 예를 들어 전하들이 서로 반발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반면, 우리가 맥스웰의 이론을 수용할지라도 어떻게 전하들이 그렇게 하는지에 관한 ‘궁극적 설명’이 (194쪽 참조)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인과성에 관한 일반론이 없다 (아무튼e 모든 인과성은 밀치기라는 데카르트 이론의 붕괴 이래).f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testabl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검증할 수 있는’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mmedi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직접적인’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yield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밝힌 것’으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t any r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적어도’로 번역되었다.
f 역주: 이 문장에는 ‘이래’의 의미인 since가 쓰여서 본문에는 현재완료형의 동사형태가 쓰여야
하는데 We do not have any general theory of causality로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문법적 오류다.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6장 구름과 시계에 관하여.hwp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8장 논리학, 물리학 및 역사에 대한 실재론적 접근 (0) | 2019.06.18 |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7장 진화와 지식의 나무 (0) | 2019.05.07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5장 과학의 목표 (0) | 2019.02.02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4.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 (0) | 2019.01.08 |
객관적 지식, 3장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 (0) | 2018.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