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서양문명에 대한 단상(斷想)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29. 08:08

서양문명에 대한 단상(斷想)

 

 

 

 

 

 

 

 

 

 

 

 

 

 

 

 

 

 

 

 

 

 

 

 

 

 

머리글

 

 

   얼마 전에 미국의 한 학자가 ‘한국인들은 아직도 미국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미국 학자의 말이 싱가포르나 홍콩의 시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나 중국도 미국문명과 그 근원인 유럽문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싱가포르나 홍콩을 논외로 한 이유는 그 곳의 시민들은 이미 유럽식 사고방식으로 충분히 교육받고, 그 사회체제를 서구식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야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과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경제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서로 통할 리가 없다. 실제로 나는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먼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 한반도까지 뻗칠 수 있는 미국의 힘은 무엇인가?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민 가는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중국도, 소련도 어쩌지 못하고, 기세등등하던 일본 제국도 대적하다가 망해 버린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나는 이런 문제를 늘 지니고 이 땅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양의 한 철학자를 알게 되고 그의 글 거의 모두를 읽고 서양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글을 읽고 어떤 국가나 지역의 문명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일천한 경험이나 협소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우주적 문제와 한 가지 문명을 다루는 그 사상가나 철학자의 해석이나 주장이 매우 새로운 동시에 이해가능하고 나아가 동의할 수 있다면 나는 그 해석이나 주장을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일시적이라도 어떤 합리적인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할 따름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글이 옳다고 주장하기는커녕, 차라리 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견은 언제라도 더 나은 의견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2007년 10월 필자

 

 

 

 

 

 

 

 

 

 

 

 

 

 

 

 

 

 

차 례

 

 

1. 서양문명의 근원과 이해

2. 서양문명의 보편성과 기본적 개념

3. 동양문명의 진단

4. 동양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5.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와 언어

6. 이성주의 교육

7. 문명충돌과 제국주의

8. 영미(英美)의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9. 맺는말

 

 

 

 

 

 

 

 

 

 

 

 

 

 

 

 

 

 

 

 

 

 

 

 

 

 

 

 

 

 

 

 

 

1. 서양문명의 근원과 이해

 

   일본에서 ‘철학의 천황(哲學の天皇)’이라고 불리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하버드와 동경대학에서 철학교수를 지낼 정도로 유명하고, 우리나라의 내노라 하는 철학자 김용옥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실토할 정도로 박학한 사람으로 이름이 나있다. 김용옥이 만나서 대화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김용옥의 묘사에의 의하면 헤겔주의자이다. 그 엉터리없는 철학자 헤겔의 말을 믿는 사람이다. 아무튼 마루야마 마사오는 유럽문명의 근원을 헤브라이즘, 즉 유태문명과 중세 스콜라철학으로 보는 반면,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칼 포퍼(Karl Popper)는 아테네 문명을 유럽문명의 근간으로 본다. 너무나 큰 시각 차이이다. 그러나 구미(歐美)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언어가 소아시아 지방의 페니키아 문자를 토대로 하여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발전해온 사실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버트런드 러셀이 옳다.

   나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서구문명의 근원으로 헤브라이즘과 스콜라 철학을 지적하였음을 밝혔다. 마루야마의 지적은 서양사회가 기독교화 되어있다는 점을 피상적으로 관찰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은 기독교가 우세한 나라이지만 기독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미국대통령이 성서를 놓고 취임선서를 한다고 해서, 미국화폐에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한다(In God We Trust)’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유럽의 국가들을 기독교가 중심인 신정국가(神政國家: theocracy)로 판단해버리면 오산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 전 유럽이 기독교의 영향 하에 들어갔고, 급기야는 서세동점(西勢東占)의 물결을 타고 동양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를 정복함에 따라 가톨릭이 그 대륙을 석권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유럽인들은 중세 암흑기에 기독교조차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역사적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이란 얼마나 무모하고 반인륜적인 행위였는지를, 이슬람의 저항에 많은 기독교도들의 생명을 잃고, 반성했다. 그러한 반성 없이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긴 이슬람교도들과 유태인들이 유럽문명을 받아들이겠는가?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에 대하여 얼마 전 사과의 뜻을 발표했다.

   미국에는 약 600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있으며, 그 외 불교와 힌두교 등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최근 미국에 대한 일부 극렬 이슬람교도들의 테러행위에 대하여 세계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으로 몰고 간다. 미국은 기독교가 물론 우세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국가인데도 말이다. 그와 반대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거의 신정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국가에서는 다른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미국이나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중동은 이슬람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인 메이지 유신 시대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도 아시아를 버리고 서구로 들어가야 한다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하면서도, 서구문명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야만성과 반개성(半開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에는 완성된 문명이란 없기 때문에 미국이라 해서 야만성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위 제3세계의 야만성은 어떠한가? 탈레반이 집권하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얼마나 많은 인민재판식 처형과 부녀자 강간, 심지어 살해가 자행되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불교유적을 폭파하고 여성교육을 금지하였으며, 최고지도자는 내전으로 굶주리는 국민들을 외면하고 호화롭게 살았다.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독단(dogma)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이라 미명(美名) 하에 저질러진 종교재판, 그리고 고문과 화형은 종교 또한 비판되지 않으면 타락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지배를, 그리고 종교의 맹목적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발달이 덜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생존이 최우선인데, 인간의 생존방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불완전한 생존방식에 자신의 생존방식을 의존한다는 것은 역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생존이 최우선이어서 도덕이라든지, 윤리, 종교조차도 인간의 생존에 보조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지, 인간생존을 초월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만약 도덕적이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생명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의지 역시 삶의 한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도덕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주장이 이해될 수 있다:

 

 

나는 또한 과학 분야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도덕분야에서도 최종점(最終點)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두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나는 예를 들어 최종적 이상(理想)이나 최종적 도덕적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과학적 의견뿐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견해도 끊임없이 수정하고 숙고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으로 여기는 도덕 원칙과 그 외의 것들에 파고드는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난다. 우리 자신과 정신적 세상 사이에 뿐 아니라, 특히 우리와 세상 속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 사이에도 주고받기가 있다.

 

그러나 도덕규범은 자체로 궁극적인 적이 없다; 도덕규범은 개연적인 결과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고 있어서 본질적으로 사람의 판단력으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옳을 것을 인정하게 하고 객관적으로 틀린 것을 부정하게 인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한번 상당히 올바른 규범이 수용되면, 그 규범에 대한 예외들은 그 규범이 수용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적은데, 그 까닭은 결과들 중 하나가 그렇고 그런 예외를 인정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을 능가할 정도로 통상적으로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크게 잘못된 규범에 대해서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대부분의 전통적 규범들은 개인적이거나 전문적이거나 국가적인 증명 불가능한 이기심을 어느 정도 구현하여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유럽문명은 아테네에서 시작된 이성주의(理性主義)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문명이다. 이 개인주의는 플라톤에 의하여 최초로, 그리고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문명인은 양심 없는 이기주의자임이 거의 틀림없다’라는 말로 이기주의로 폄하되지만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절대로 아니다. 나의 자유만큼 소중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그리하여 개인주의는 나와 남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가장 인도주의적 사고에서 우러나온다. 개인주의는 영국 사람들의 무표정에서 잘 나타난다. 남에게 말 거는 것조차 남의 자유를 방해할까봐 꺼리는 것이 앵글로색슨 문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부른다.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살다가 개인적 자유가 침해당하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러한 사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막강한 독일군과 일본군에 대항했던 그들의 정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종전 후 영국의 대학은 전사자들 때문에 텅 비다시피 했다.

   한국인들은 아이들이 길에서 넘어지면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일으켜 주기 바쁘다. 그리고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 어디 아프지 않느냐고 어른이 아이에게 곰살궂게 군다. 아이들의 스스로 일어날 기회를 빼앗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마치 박애정신인양 착각한다. 그러나 막상 한강에 사람이 빠지거나, 이웃에 불이 나거나, 사람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어도 구경만 한다. 전쟁이 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망갈 준비를 하기에 바쁘다. 개인주의란 스스로 일어서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지면 모두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영국인들은 싸우다 쓰러진 자에게는 주먹질을 멈추는 게 상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쓰러져 기절할 때까지 주먹질을 하지 않을까?

   개인주의자들과 이성주의자들은 인간을 존중할지라도 숭배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지식이란 진정한 지식(epistēmē)인 진리가 아니어서 언제라도 새로운 지식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 상상이나 추측(doxa)이라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에서 시작된 유럽인들의 사고(思考)는, 역사적 굴곡의 기간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런 전통을 통하여 지식의 진보와 과학의 발달에 관한 초석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양인들은 정치제도에서 삼권분립이라는 서로 견제하는 제도를 채택하며, 과학과 이론에서는 토론과 시험, 그리고 비판이라는 검증과정을 중요시한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 시작된 도편 추방제도를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삼권분립에서 나타나듯이 자기들의 지도자를 믿기보다는 끊임없이 감시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서양인들이 자유인임을 주장하는 글과,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 관한 글은 이렇게 기술(記述)된다:

 

 

인간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자연의 힘과 비교하여 단지 작은 일이다. 노예는 시간과 운명과 죽음을 숙명적으로 숭배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노예가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무엇보다도 더 중대하기 때문이며, 노예의 모든 생각을 그것들이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중대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들의 열정 없는 위엄을 느끼는 것이 훨씬 더 중대하다. 모든 그런 사고는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동양적 복종으로 운명 앞에 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을 흡수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투쟁을 버리는 것, 일시적 욕망의 모든 열정을 내버리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하여 정열적으로 불타는 것 - 이것이 해방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인이 숭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방은 운명을 관조함으로써 이룩된다; 그 이유는 운명 자체는, 시간이라는 정화용 불에 의하여 제거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의하여 극복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는 국가의 도덕성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이 평범한 시민의 도덕성보다 많이 낮은 경향이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도덕성은 그 반대보다는 시민들에 의하여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道德化)하자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시각으로 정치이론에 접근한다면,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이라고 상정(想定)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그 문제들을 단지 건너뛰었음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심지어 플라톤의 이 상정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정치지도자들이란 항상 충분히 ‘훌륭하지도’ 또 ‘현명하지’ (우리는 이 술어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않음을, 그리고 사람들이 그 훌륭함이나 현명함에 묵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정부를 만나는 일이 조금도 쉽지 않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수용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정치에 대한 생각이 나쁜 정부의 가능성을 직시(直視)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최악의 지도자에 대비하면서 최고의 지도자를 바라야 하는지. 그러나 이것은 정치문제(政治問題)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接近方法)을 낳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가 어떤 정치제도를 만들어 나쁘거나 무능한 지배자가 너무 많은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느냐? 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배자들이란, 도덕적으로든 지적(知的)으로든, 평균(平均)을 넘는 경우가 드물며 흔히 그 이하(以下)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물론 동시에 가장 훌륭한 지배자를 구하려고 애를 써야만 한다 할지라도, 정치에서 가장 열등한 지배자에 최대한으로 대비하는 원칙(原則)을 채택하는 것이 합당(合當)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정치적 노력을, 우리가 탁월하거나 심지어 유능한 지도자를 얻는데 성공하리라는 약한 희망에 거는 행위는,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는 이론은 말하자면, 다수지배(多數支配)라는 자연적인 미덕이나 올바름의 원칙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독재라는 사악함으로부터 나오는 이론이다. 그 까닭은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종류의 정부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종류는 예를 들어 총선거를 통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정부로 구성된다. 두 번째 종류는 성공적인 혁명을 통하지 않고는 피지배자가 없앨 수 없는 정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도와 관련하여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여자가 쓴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일본 여자의 책은 일본과 한국에서 한 때 베스트셀러로 장기간 팔려나가서 저자를 돈방석에 올려놓았다. 그 책의 내용 중에 어느 아테네 지도자가 아테네의 거리를 걸어가는데 한 아테네인이 어떤 지도자의 이름을 도편에 써 줄 것을 요구하는데 그 이름이 자신이었다. 그러자 그 지도자는 글을 모르는 아테네인의 요청대로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면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문맹인 그 아테네인은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이름을 들먹이는 게 싫습니다. 그래서 그를 추방하자는 데 찬성하려고요’라는 의미로 대답한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여자는 이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웃는다: 글도 모르는 아테네인이 자신의 지도자를 추방한다고.

   그런 정도가 아시아인 중에서 가장 발달했다고 자랑하는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이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 싫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시민의 핵심적 가치이다. 2차 대전 동안 자유 프랑스를 지도했던 프랑스의 드골도 처음에 대통령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선거에서 떨어진다. 프랑스 국민들이 전쟁 영웅 드골을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된 도편추방제도는 다음과 같이 평가된다:

 

 

아테네 사람들이 믿기에 독재를 할 수 있는 시민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편추방제도가, 적어도 독재자 히피아스(Hippias)를 추방한 뒤 1세기 동안은, 아테네 시민들이 독재예방을 그들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도편추방제도가 추방(追放)을 처벌로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이 생각은 매우 분명해진다. 추방을 당함으로써 시민은 명예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으며, 그는 자기 재산과, 자기가 도시에 남아 있을 권리를 제외한 실제 모든 권리를 유지(維持)했다. 어떤 의미에서 도편추방은 존경의 표시였는데 그 이유는 어떤 시민이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지도자 중 몇 사람이 추방되었다. 그래서 그 개념은: 민주주의에서는 교체 불가능한 인물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도력을 존중한다 할지라도 특정 지도자 없이도 우리는 해 나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지도자는 우리 주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주 임무다 였다.

 

사람들이 국가의 건장을 보전하기에 경쟁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 그 가장 순박한 표현에서 완전히 적나라한 - 주목하고 싶다면, 에베소 사람들이 헤르모도루스(Hermodorus)를 추방할 때 에베소 사람들에 의하여 언급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도편추방(ostracism)의 원래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누구도 최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최고가 된다면, 그를 다른 곳과 다른 사람들 사이로 보내라.” 왜 누구도 최고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럴 경우에 경쟁이 끝날 것이고 그리스 국가의 생명의 영원한 근원이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서양문명의 보편성과 기본적 개념

 

   미국인들은 승리에 도취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소련 연방과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도 미국인들은 적(敵)이 사라져 버려 시원하다가 아니고 미국이 자기만족에 빠져 타락하는 것을 우려했다. (지나치게 적[敵]의 의견을 존중하는 앵글로 색슨 문명에 대하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주장이 그 문명 안에서 대두한다.) 미국 군인들은 항상 전쟁에서 진다는 시나리오로 승리의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최강이 되는 길을 언제나 찾아다니는 최강의 국가이자 국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문명을 완전한 문명으로 간주하지 않았듯이, 나도 앵글로 색슨 문명이 결점 없는 완벽한 문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명이, 유럽문명이 세계 최고의 문명이라는 칼 포퍼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세계의 어느 문명보다도 앵글로 색슨 문명은 개인주의와 이성주의가 살아 있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가능한 인간 자유의 최대치를 보장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앵글로 색슨 문명은 아테네에서 시작된 개인주의와 이성주의가 그대로 살아서 숨 쉬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이다. 그러니 그 문명에 세계의 다른 문명이 모두 빨려 들어간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하는 문명의 세 번째 단계, 즉 가장 발달한 문명 상태와, 서구문명이 가장 훌륭한 문명이라는 칼 포퍼의 주장은 이렇게 기술(記述)된다:

 

 

셋째 단계. 하늘과 땅 사이의 사물을 규칙 안에 집어넣지만, 그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활동을 전개하며, 사람들의 기풍이 쾌활하고 활달해서 옛 습관에 혹닉하지 않고서, 스스로 자기 한 몸을 지배해서 다른 사람의 은혜와 위엄에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덕을 닦고 스스로 지혜를 연마해서 옛것을 섬기지 않고 새것에 만족해하지 않으며, 작은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대성大成을 도모하며, 나아가 물러서지 않으며 거기에 이르러 멈추지 않으며, 학문의 도는 공허虛하지 않아서 발명의 기틀基을 열고, 상업과 공업은 날로 성해서 행복의 원천을 깊이 하고, 사람의 지혜人智는 이미 오늘 다 써도 여분이 남아서 훗날의 계획을 짜는 것과도 같다. 이것을 오늘의 문명이라고 한다. 야만ㆍ반개 상황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서구문명에서 당연히 발견될 수 있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서구문명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올바르며, 가장 인간을 사랑하며,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명 중에서 최고의 문명이라고 믿는다. 서구문명은 자기비판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개선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문명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 평화, 그리고 폭력의 최소화 요구와 함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널리 인정되고 심지어 널리 실현되는 곳은 오직 우리 서구문명에서 뿐이다. 물론 서구문명은 개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하면, 서구 문명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많이 개선하려고 협력하는 유일한 문명이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이 인기 없는 개념이라는 것과 서구(西歐)가 이 개념들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신뢰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 개념들을 멸시하며 취급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이성주의는 없이는 서구가 존재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우리 서구 문명에서 서구문명이 과학과 분리될 수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을 생산하고, 그 안에서 이 과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일한 문명이다. 그러나 자연 과학은 그리스 고전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교수는 서양 문명이 18세기에 시작된 현대화(modernization)를 추진해서 보편적인 문명이 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현대화의 특징은 산업화(industrialization), 도시화(urbanization), 문자해득율과 교육과 부(富)와 사회적 동원(social mobilization)의 확대, 그리고 보다 복잡하고 다양화된 직업구조라고 지적한다. 이 현대화의 동기는 18세기에 시작되어 인간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자연환경을 통제하여 구성할 수 있었던 엄청난 과학지식과 공학지식의 확대였다. 그렇다면 서양이 다른 사회보다 먼저 현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까닭과 현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능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먼저 헌팅턴 교수는 서양이 물려받은 고전적 유산(the Classical legacy)을 지적하는데, 고전적 유산이란 그리스 철학과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 로마의 법률, 라틴어를 가리킨다.

   둘째, 서양은 기독교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계승하는데, 기독교는 서양 문명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6세기부터 서양인들이 해로를 개척하여 세계를 탐험하고 정복하는 정신은 먼 나라에서 금(金)을 발굴하고자 하는 욕망만큼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감에서 생겨났다.

   셋째, 서양역사를 통하여 기독교와 다른 교회들이 존재했는데, 이 종교가 국가의 권력과 다르게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제외한 다른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한 사람이나 한 계급이 속하는 제정일치로 독재 권력을 구성했지만, 서양은 인도와 함께 종교가 정치와 분리된 권력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영혼의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분립은 서양에서 자유사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크기 기여하였다.

   넷째, 로마에서 서양이 물려받는 법치주의인데 법치주의는 문명화된 삶의 핵심을 이룬다. 16 및 17세기 서양의 절대주의 하에서 법치주의 실현되기보다는 더 무시되었지만 인간의 권력을 외부의 억제에 종속시킨다는 그 정신은 지속되어 ‘왕은 만민의 위에 있지만 하느님과 법의 아래에 있다(Non sub homine sed sub Deo et lege)’라는 법언으로 남았다. 법치의 전통은 전횡적 권력에 대항하여 헌법주의와, 사유재산권을 포함하는 인권보호의 기초를 놓았다.

   다섯째, 역사적으로 서양은 고도로 다원적인 사회인데 혈연과 결혼관계가 드믄 다양한 자주적 집단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 집단들이 수도원이나 수도회, 그리고 상인조합으로 출현했다가 나중에는 확대되어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다른 결사와 단체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단체적 다원성은 계급의 다원성에 의하여 확충되어, 강력하고도 자주적인 귀족과 중추적인 농부계급, 그리고 작지만 중요한 상인계급을 낳았다. 중세의 귀족들이 지녔던 권력은 절대군주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제한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 유럽의 다원성은 다른 지역에 없던 시민사회, 귀족의 강력한 권력과 대조를 이루고, 다른 지역에서 흔하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와 대조를 이룬다.

   여섯째, 이 사회적 다양성으로 인하여 사유지와 의회, 그리고 귀족층과 사제들과 상인 및 다른 단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다른 제도들이 출현한다. 이 대의제도(代議制度: representative bodies)는, 절대주의 하에서 폐지되거나 그 권한이 축소되지만, 현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한다. 이 대의제도는 동양문명이나 이슬람문명에서 볼 수 없는데 특히 9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도시에서 자주적 정부를 결성하는 운동이 발전하여 북부로 퍼졌으며 사제들이나 지방권력층이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거나 심지어 시민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곱째, 위에 언급된 서양문명의 특징으로 인하여 문명화된 사회에서 독특한 개인주의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이 일어났다. (헌팅턴 교수는 서양에서 개인주의가 14~15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주류를 이루었다고 주장하지만, 개인주의가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의 기초가 되는 이념이라면 개인주의의 시작과 발흥은 멀리 그리스 아테네 시대, 특히 기원전 400년경 페리클레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헌팅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아테네에서 시작되는 서양철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중대한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에 서양문명의 특징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설명하지 못하여 많은 오류를 남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표본을 추출하여 각 나라의 개인주의 지수를 산정한 결과 최고점을 받은 20개국에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모든 유럽 국가들이 포함되고, 서양과 다른 지역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성향을 조사한 다른 조사도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우세하고 다른 곳에서는 집단주의가 대종을 이루어 “서양에서 매우 소중한 가치들은 다른 곳에서 가장 하찮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상 일곱 가지의 특징을 서양적이라고 헌팅턴 교수는 주장하면서, 서양의 언어가 라틴어에서 분화되었음을 지적하지만 나는 서양의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기타 언어가 원래 소아시아 지방의 페니키아어에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거쳐 분화되고 발전했다고 생각했고, 언어만으로는 서양문명의 특징을 말한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목록에서 제외했다.

   헌팅턴 교수의 이 저서는 매우 위험한 역사주의적 사고를 -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미래의 역사를 예견할 수 있는 역사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사고 - 기초로 서양과 특히 동양, 그리고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해석하고, 나아가 미래의 시나리오조차 만들기 때문에 학설로서의 신빙성의 크게 떨어진다. 더욱이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헌팅턴의 저서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과 과학, 나아가 민주주의적 이념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현대 서양 문명을 기원 이후로 상정하는 바람에 서양 문명의 뿌리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하여 서양 문명의 보편성조차도 혼동하는 실수를 드러낸다.

 

   미국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CILHI부대는 남북전쟁 때 설립된 실종된 미군 유해를 찾는 부대다. 무려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갖는 부대로 미군 전사자의 유해를 기를 쓰고 찾아낸다. 이 부대의 좌우명은 ‘당신은 잊혀지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와 ‘어느 곳도 간다 (Nowhere is too far)’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 상태로 끝난 뒤에도 미국인들의 관심사는 북쪽에 남아있는 미국들의 유해송환이었다. 미국인들은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일을 최고의 영예로 기리고, 국민들은 그 희생자들을 잊지 않는다. 현충일의 장엄한 행사는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이다.

   대조적으로, 한국 전쟁이 끝난 후 50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남쪽에 이름 없이 묻힌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한 우리의 모습을 보라. 철원, 개화산, 다부동, 경주, 기타 수많은 지역에서 그냥 흙에 묻힌 국군의 숫자는 약 10만이고 인민군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는 북한에게도 항의한다, 지리산에 묻힌 빨치산의 유해를 포함하여 낙동강 전선등지에서 전사한 인민군의 유해를 왜 거두지 않았느냐고. 남한은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 조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미군의 유해를 넘겨주면서 미국에게 요구하면 될 것 아닌가, 한국 정부와 상의해서 한국군의 유해와 함께 발굴하도록? 그와 반대로 휴전 이래 미국은 끊임없이 미군 유해의 수색과 송환을 요구하지 않는가? 이래저래 국민을 위한 군대라는 국군이나 인민군이나 제 대접 못 받기는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씨는 국군으로 별을 달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인데 어째서 대통령이었을 당시에 국군 장병들의 죽음을 끝까지 찾지 않았는가? 결국 그들도 부하를 ‘머슴’으로 아는 계급주의자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 종족사회를 대변하는 민족주의는 8.15 해방을 고비로 미국의 영향 하에서 급격히 붕괴된다. 이 종족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을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취하는 일본과 한국을 생각하며 아테네 전통사회의 붕괴와 비교해보자:

 

 

도시에서 부(富)가 매우 빠르게 증가했고, 또한 문화에서도, 그리고, 그러한 때에 변함없이 발생하는 바와 같이, 특히 부(富)가 외국과의 교역에 기인할 때, 전통적인 도덕과 전통적인 믿음이 쇠퇴했다.

 

그리스의 종족주의, 즉 닫힌 사회의 붕괴는 땅을 소유한 지주라는 지배 계급 사이에서 인구 성장이 느껴질 때로 추적될 수 있다... 처음에는 자매 도시를 건설하는, 이 문제에 대한 ‘유기체적’ 해결책 같은 것이 있었듯 싶다... 그러나 식민지화라는 이 의식도 사회 붕괴를 뒤로 미루었을 따름이다. 식민지화는 심지어 문화 접촉을 낳은 새로운 위험 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문화 접촉은 나중에 닫힌 사회에는 아마도 가장 위험한 것을 - 상업과, 무역 및 해운에 종사하는 신흥 계급 - 만들어냈다. 기원전 6세기 경, 이 추세는 옛 생활방식의 부분적 해체, 심지어 일련의 정치적 혁명과 반동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 추세는 스파르타에서처럼 힘으로 종족주의를 유지하고 고정시키려는 노력뿐 아니라 위대한 정신적 혁명인 비판적 토론, 그리고 결과적으로 마술적 미혹이 없는 사고(思考)의 발달을 낳았다.

 

 

   한국의 종족중심 사회가 붕괴된다는 사실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이유는, 한국인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할 영역이 넓어졌다는 정신적 해방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만 자기들의 특권을 내놓지 않으려고 수구세력으로 남아 있지만. 칼 포퍼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술적 미혹’이 없어진다면 새로운 사고, 즉 과학적인 사고가 태어날 수 있다. 세계인들이 가진 원칙과 한국인들이 가진 원칙이 충돌한다. 그러나 그 충돌은 반드시 ‘역사는 아(我)와 피아(彼我)의 투쟁이다’라는 단재 신채호의 주장처럼 파괴적인 결과만을 낳지는 않고, 오히려 문명의 충돌은 창조적 사고를 낳을 수 있다:

 

 

원칙의 충돌은 파멸이 아니다 - 그것은 기회이다.

 

문제에 대한 흥미의 강렬함은 제외하고, 창조적 사고를 특징짓는 것은 덜 창조적인 사색가(思索家)가 자기의 능력시험을 선택하는 범위의 한계를 돌파하거나 - 그 범위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흔히 느껴진다. 이 능력은, 분명히 비판적 능력인데, 비판적 상상력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 능력은 흔히 문화 충돌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생각들이나 생각의 틀 사이의 충돌이다. 그러한 충돌은 우리가 우리 상상력의 통상적 한계를 돌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두 개 이상의 다른 문화가 서로 접촉할 때, 사람들은 매우 오래 동안 당연시되었던 자기들의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으며, 유일하게 합당하지도 않으며, 신(神)에 의하여 명령된 것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한 부분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문명충돌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펼친다: 문명 충돌은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인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법칙이고,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테네는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상(理想)인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민주주의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정치제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cles)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정치제도는 다른 곳에서 시행되는 제도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모방하지 않고 본보기가 되려고 애쓴다. 우리의 정치는 소수대신 다수를 선호한다: 그것이 우리 정치가 민주주의로 불리는 이유이다. 법은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논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동등한 정의를 부여하지만 우리는 우수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느 시민에 뛰어나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국가에 봉사하도록 소환되지만,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점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다; 그리고 가난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는 또한 일상생활에까지 미친다;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웃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해도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를 무법상태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재판관과 법을 존중하도록 교육받고, 우리가 부상당한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올바른 것에 대한 보편적인 느낌만을 허용하는 성문법을 준수하라고 교육받는다... 우리의 도시는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다; 우리는 외국인들 추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지만 어떤 위험도 맞이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 우리는 환상에 몰입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수치가 아니지만; 가난을 피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수치스럽게 여긴다. 아테네 시민은 개인적인 일을 돌볼 때도 공공의 일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일에 흥미를 갖지 않는 사람을 해롭지 않다고 여기지 않고 쓸모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소수가 정책을 만들지라도,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행동에서 토론을 장애물로 간주하지 않고 현명하게 행동하는데 필수적인 사전 행동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행복이란 자유의 결실이며 용기의 결실이라고 믿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위축되지 않는다... 요약컨대, 나는 아테네가 희랍의 학교하고 주장하며, 아테네인들은 성장하여 행복한 다양한 재주와, 위기상황에 대한 준비, 그리고 자주성을 발전시킨다고 주장한다.

 

 

   이 페리클레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현대 유럽문명, 특히 영국과 미국의 문명에 적용된다. 여기에서 독자 여러분들이 또한 눈여겨볼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핵심적인 진술인데, 그것은 바로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정치를 하게 되는 사람은 특권을 받는 게 아니고 장점에 대한 보상이다’라는 선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링컨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미국인들도 한국인들에게 자기들의 정치제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미국인들은 외국에 대고 인권(人權)을 끊임없이 외친다. 이 인권을 외치는 소리는 바로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에서 나온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인들은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 전국에 퍼져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뉴스로부터 단절된 광주의 고립은 다른 한국인들이 실상을 알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국민들이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7함대는 전두환이 거머쥔 정권을 지지하기 위하여 동해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경고였다, 개입하지 말라는. 실제로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북한은 군대를 남쪽으로 모으는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는 정보를 미국은 가지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에서 터져 나오는 한국 주둔 미 8군사령관의 분노는 단순히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한국군이 군대를 움직였다는 차원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시민들에게 총을 들이대느냐?’는 민주주의자의 분노가 앞선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이유는 내가 만난 많은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이 자기들의 자유는 물론, 남의 자유도 진심으로 축복했던 사실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남이 행복한 것을 보면 자기도 행복해 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그런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운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것도 미국식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었다. 대통령 김영삼의 철부지 아들을 고발하여 그 정권을 무너뜨린 것도 박경식이라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박경식 씨는 ‘대통령의 눈을 쳐다볼 수 없는 국가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했다. 총선연대를 만들어 권위의식에 가득차고 범죄자나 다름없는 국회의원들을 낙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 박원순 변호사와 장원 교수가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이다. 우리가 듣는 천박한 미군들의 범죄가 미국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유럽문명이 이성주의에 기초를 둔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비판적이며, 따라서 개혁적인 특성을 인정함으로써 - 우리는 자료의 축적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의 근본적으로 비판적이며, 따라서 개혁적인 특성 -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고의 (비권위적[非權威的]) 근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문제들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가 비판하는 것은 거의 항상 전통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오류성은 전통과 개혁적 사고 양자를 평가하는 절실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오류성이 사고의 역할이란 폭력과 전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비판적 토론에 의하여 혁명을 수행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 칼로써 보다는 말로써 우리의 전투를 싸우는 것이 서구 이성주의(理性主義)의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 그런 까닭에 우리 서구문명은 근본적으로 다원주의(多元主義) 문명이며, 획일적 사회목적은 자유의 죽음을 의미한다: 사고의 자유, 진리를 향한 자유로운 탐구, 그와 함께, 인간의 이성과 존엄의 죽음.

 

 

   우리는 위 글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이 배우기를 원했던 서구의 문명 상태를 다시 본다. 획일적인 사회인 아시아에서 서구의 다원사회로 향하기를 원했던 후쿠자와는 서구의 다원사회를 이렇게 기술(記述)한다: ‘무릇 옛시대에는 사업이 적어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그 때문에 그 힘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치 일 없던 세계가 일 많은 곳으로 되고, 몸과 마음을 위해 새롭고 움직일 수 있는 땅을 개척한 것과도 같다. 지금의 서양 국가들은 바로 그 일 많은 세계라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문명을 나아가게 하는 요체는 모름지기 일人事을 많이 만들고 쓸 곳需用을 번다하게 늘려서, 사물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더욱 더 많이 그것을 채용하여 점점 더 정신의 능력을 활발하게 하는 데 있다.’

 

 

3. 동양문명의 진단

 

   마루야마 마사오는 김용옥과 만나서 ‘동양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픽션일세. 그 실체가 부재한다는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1866~1934)선생의 말을 긍정적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지. 서양은 어찌되었든 통체적 연속성(monolithic continuity)을 가진 위대한 문명일세. 동양은 아직도 자고치말고 서양문명의 성취를 철저히 흡수할 필요가 있네. 지금 우리가 과학문명의 흡수를 통해 일시적으로 대등관계를 이룩했다고 방자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될걸세. 우리가 서구라파 계몽주의(마루야마에게서는 헤겔로 집약됨)가 제시한 인간관의 요체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아직도 장구한 세월이 걸릴걸쎄’라는 말을 했다.

   우선 마루야마와 김용옥의 말에서 틀린 부분, 그것도 매우 무식하게 틀린 부분을 찾아보면 ‘우리가 서구라파 계몽주의(마루야마에게서는 헤겔로 집약됨)가 제시한’이라는 말인데 계몽주의 최후의 철학자는 칸트이지 헤겔이 아니다. 헤겔과 피히테(Fichte)는 낭만주의를 도입하면서 당시 독일 철학계의 거봉 칸트를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칸트는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낭만주의에 반대했다. 도대체 마루야마와 김용옥은 서양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몽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계몽주의란 일본의 근대화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럽 문명을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기 한 몸을 지배해서 다른 사람의 은혜와 위엄에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덕을 닦고 스스로 지혜를 연마해서 옛것을 섬기지 않고 새것에 만족해하지 않으며 거기에 이르러 멈추지 않으며, 학문의 도는 공허虛하지 않아서 발명의 기틀基을 열고, 상업과 공업은 날로 성해서 행복의 원천을 깊이 하고, 사람의 지혜人智는 이미 오늘 다 써도 여분은 남아서 훗날의 계획을 짜는 것과도 같다.’로 표현한 것과 같음을 그들은 알고 있는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럽을 문명 상태를 가장 발전한 문명으로 규정하고 그 문명의 기초를 낭만주의에 반대가 되는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임을 이해했음과 같이 버트런드 러셀도 야만과 문명의 분계선을 이성주의에 두었고, ‘사고(思考)의 분야에서 절제적인 문명이란 대략 과학과 동의어’라고 말한다. 더구나 독일 철학의 거봉 칸트가 거의 궤변론자와 권련추종자에 지나지 않던 헤겔을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천박하게 여겼으며 결국 칸트의 죽음 이후에 헤겔과 피히테의 음모에 의하여 칸트가 독일 낭만주의와 관념론의 시조로 둔갑하는 것을 마루야마와 김용옥은 이해나 하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동양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픽션일세. 그 실체가 부재한다는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1866~1934)선생의 말을 긍정적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지.’라는 말에 긴장하고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열등하다는 말을 듣고 발끈하는 행위는 감정이다. 그리고 결코 감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동양은 픽션’이다, 다시 말해서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는 의미이다. 언제나 쉽게 무너지는 허황한 문명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우리에게는 심각한 말인가, 동양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모든 분야가 모래 위에 건설한 가짜라니? 니체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렇게 표현한다: 유럽은 일관되고, 비판적인 사색의 학교를 경험했다; 아시아는 여전히 진실과 시(詩)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고, 아시아의 신념이 개인적인 관찰과 조직적인 사고로부터 나오는지 환상으로부터 나오는지 깨닫지 못한다.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많은 동양인들. 그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탐미적인 환상에 빠진다. 동아리를 만들어 술친구가 되고, 기생을 끼고 자연을 노래한다.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환상 속에서 이태백은 술에 취해 시를 읊다가 호수에 빠져 죽는다. 어찌 자연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 의하여 개간되고 정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일 따름이다. 인간이 자연을 개간하고 정복한 후에야 우리는 자연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인은 그 자연에 빠져 죽는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사쿠라 꽃 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칼을 휘두른다. 지금은 새로운 세대에 의하여 서구식 개인주의 생활로 바뀌고 있지만,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만해도 한국인은 근무가 끝나면 당연히 한잔하면서 너는 나이고, 나는 네가 되었다.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각자의 인생이고, 삶인데도 말이다. 삶은 각자의 몫이다. C. P. 스노우(Snow)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외롭고 홀로 죽는다: 우리 각자는 외롭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나 애정 또는 아마도 창조적 순간을 통하여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지만, 그 승리도 길가가 암울할 때 우리 스스로 만드는 빛 무리이다: 우리 각자는 홀로 죽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고대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Pericles)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말로 들어보자:

 

 

우리는 환상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향상시키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완전히 깨어 있는 반면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다. 후자(後者)는 의견을 가지고 있고; 전자(前者)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갑작스런 통찰로 보이는 것은 기만적일 수 있고, 멋진 도취가 지나면 심각하게 시험되어야 한다.

 

 

   동양 사람들의 사고(思考)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다. ‘정서적’이라는 말은 ‘감정적’이라는 말과 같다. 정서적인 마음은 과학적인 사고(思考)나 논리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정서적인 마음은 오히려 예술세계와 가깝다. 그리고 정서적인 마음이 지나치면 나와 너, 자연과 나가 하나라는 정신병적 환상에 빠진다.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 정서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사물의 이치를 논할 때에는 의문을 발하고 미심쩍은 점을 캐묻는 용기’라면 그런 용기가 없는 것이 정서적인 것이리라. 일본의 근대화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유럽을 이성적이어서 문명 상태라고 평가하고 이성적이 못한 상태를 반개 상태로 아시아와 일본이 반개 상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지닌 유전자가 동일한 사람을 찾으려면 수 십 만의 인간 중에서 한 명을 만날까 말까하고, 설사 유전자가 동일한 사람이라 하여도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너와 내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만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자연을 개척하고 심지어 바꾸려는 노력이 없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헛수고가 아닌가? 니체는 ‘엄격한 방법으로 발견된 작은 겸손한 진실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고급문화의 특징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주장은 서양의 근본적 사상이 아니라 동양의 근본적 사상이다. 물론 인간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자연을 필요에 따라 개발한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자연에 순응만 하고 살아왔다면 인류의 문명은 없고, 그냥 원시인들처럼 살면 된다.

   여기에서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이라는 다윈(Darwin)의 냉혹한 생존논리는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다. 무엇이 생존을 위한 적당함인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수동성이 생존의 필수요건인가, 또한 인간의 서로 간의 투쟁에 의해서만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서 문명을 이룩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생존과 인간 문명의 진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정복과 인간 사이의 협동으로써 이룩되어 왔다. 원시인들이 큰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서로 돕지 않고 싸움질만 하였다면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해버린 동물들처럼 인간이라는 종(種) 또한 오래 전에 멸종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근세에 일어난 1, 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문명을 파괴했는지 잘 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 낸 대량학살 무기의 성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투쟁이나 전쟁의 인류가 생존하는 방식도 아니요 인류의 문명이 진보하는 방식도 아니다.

   우리는 요즈음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지나친 환경 파괴를 걱정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환경은 파괴되었고,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이래 환경이 자연 그대로였던 적은 없다. 인간이 있기 전부터 빙하기는 있었으며, 거대한 산불과 지진도 일어나서 자연은 파괴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에 의하여 추방되었다는 성경의 전설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다시 말해서 이성(理性)이 생겼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에덴동산, 즉 순수한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염병이 만연하고, 홍수가 넘치고, 기근이 대량 아사 내지는 전쟁을 불러오고, 태풍이 인간을 휩쓸어 가는 ‘잔인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니체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Scott Pec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들은 ‘자연에 따라’ 살고 싶다고? 오 고상한 스토아 철학자들이여, 거짓말! 터무니없이 낭비적이고, 무관심하며, 목적도 없고, 의지도 없이, 자비심과 정의도 없고, 생산적인가 하면 황폐하고 불안한 자연을 생각해 보라. 자연의 무관심한 힘을 생각해 보라. 어찌 그런 무관심한 힘에 따라 살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은 이 자연과 달라지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삶은 평가며, 선호며, 불의한 것이며, 제한되는 것이며,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당신들이 촉구하는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게 실제로는 ‘생명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어찌 내가 한 말과 다르게 살 수 있는가?

 

에덴동산 이야기는 물론 신화(神話)이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처럼 그 이야기는 사실의 구현이다. 에덴동산의 신화가 전하는 많은 사실 중에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의식 속으로 진화했는지가 있다. 우리가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사과를 먹었을 때, 의식을 갖게 되고, 의식을 갖자, 즉각 우리는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우리는 영원히 추방되었다.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길은 천사와 불타는 칼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다. 우리는 돌아 갈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유아기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자궁이나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황량한 땅을 지나 점점 더 깊은 의식의 수준으로 고통스럽게 가면서, 삶의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마약 남용을 포함하여, 많은 인간의 병이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사막을 통과하여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여행은 어렵고 의식은 자주 고통스럽다... 노망은 생물학적 병일 뿐 아니라, 심리적 성장을 일생의 형태로 시작하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서도 예방될 수 있는 심리적 질병인,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일찍이 자기들 삶에서 배우기와 성장하기를 중단하고 변화하기를 중단하고 고착된 사람들은 때로는 그들의 “두 번째 아동기”라고 불리는 것 속으로 타락한다. 그들은 투덜거리고 고압적이며 자기중심적이 된다... 우리, 정신과 의사들은 성인들같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인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정서적으로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안다.

 

바지에 배설하거나 칫솔질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연스러움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부자연스러움을 배운다... 인간 본성의 또 다른 특징은 - 아마도 우리를 매우 인간적으로 만드는 한 가지 특징 - 부자연스러운 짓을 하고, 초월해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자연과 똑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옛날부터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서적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동양인들은 자연처럼 살면 마치 영원불멸할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연식을 찾고, 야생 동물의 고기를 먹으며, 신비한 약초를 구한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는 자연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효능을 아직 모른다. 어떤 약초와 동물이 암을 치료하고, 당뇨병을 고치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이 게놈의 지도를 완성할 때, 동양인들이 자연의 신비를 찾아 헤매는 것은 심한 정신적 차이를 드러낸다.

동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동화하려는 마음을 정신적 미개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고, 올바르지 못한 길을 가는 비이성적이자 비과학적인 행동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인간이 여태까지 이룩한 문명을 거부하는 몸짓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일을 부정하고 내팽개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이러한 행태는 문명이 지니는 결점 때문에 발생하며,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기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한 문명이란 없으므로, 인간이 만든 문명 모두가 불안정하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 놓은 문명을 고스란히 무너뜨리지 못할 바에야, 문명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개선되고 전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문명이 시행착오를 통하여 전개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명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난 우연스런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느 날 문명을 한꺼번에 이룩한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시공(時空)을 차지해가면서 이룩한 것이기에 그 문명의 교정 역시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개선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또 독재체제를 전복하기 위하여 폭력적 혁명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회의 전통적 가치 모두를 일순에 파괴하는 사회적 혁명은 기존 가치가 모두 사라지면서 우리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

   플라톤이나 근세에 이르러 히틀러 레닌, 스탈린 따위의 많은 독재자들이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휩쓸어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만다. 모택동은 홍위병으로 중국 대륙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가 실패한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원시시대부터 인간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문명을 이룩하였지, 기존문명을 없애고 새로 지으려는 미치광이 짓으로 문명을 이룩한 적은 없다. 그러한 인간의 시행착오는 종교에서는 원죄(原罪)나 업(業: karma)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되지 않는 먼 옛날부터 실수를 저질렀고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인간 문명의 시행착오를 피하거나 줄이는 방식으로 인류가 만들어 낸 정치제도로서 가장 뛰어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들이 소수 인간들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로 독단적으로 결정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가장 훌륭한 사회적 결정을 도출해낼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제도이고, 따라서 사회의 진보를 이룩할 수 유일한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동양인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장점을 이해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스스로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한국에서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국민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의아해 한다. 민주주의의 빈곤은, 자유가 노예 상태보다 나은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정치나 전제정치에서 생겨난다고 주장되는 번영보다 낫다’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말을 우리는 정말로 이해하고 간직하려는 것일까? 다행히도 199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빈곤과 민주주의를 연구해온 하버드대학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교수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최근에 들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문명은 개선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아직 미숙 상태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정신 상태, 다시 말해서 진보를 거부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인간들에게 존재한다. 스콧 펙은 이 정신 상태를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하고, 죤 오닐은 실패한 지도자 오디세이를 설명한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혁신에 대한 그의 저서 성공의 모순에서, 존 오닐(John O'Neil)은 어떻게 지도자가 자기 일생에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두 번째 곡선모형을 사용한다. 그는 한 가지 필수요소는 자신의 과거를 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람이 너무 감정적으로 지나간 것에 매달리면 어떤 정도로도 변화하기가 어렵다. 그는 한 때 탁월하게 잘하던 돌아다니며 공격하기에 매달려서 트로이 전쟁에서 자기 왕국인 이타카(Ithaca)로 돌아와서 다스리는 책임 맡기를 주저하여, 20년을 보냈던 젊은 군인 사령관의 보기로 오디세이(Odysseus)를 인용한다. 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누더기를 걸친 실패한 사령관이었고, 그의 왕국은 엉망이었다. 이것이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동양문명이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비이성적 사상의 본보기가 인도에서 시작된 윤회사상이다. 이 윤회사상은 인간들에게 겁을 주어 순치시키는 데는 매우 효과적일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인 주장은 아니다. 인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 1888~1975)이 쓴 “인도철학사”에 의하면 윤회사상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새싹이 솟는 것을 보고 인간이 만든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씨앗이 떨어져서 다시 싹이 트는 일을 보고 인간은 죽어서 환생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런 윤회사상에 대하여 지각 있는 사람들은 사후(死後)에는 지옥도 없고 천당도 없다고 설명하며, 그런 설명은 많은 사람들의 옹호를 받는다.

   윤회사상이 발전하면 죽음과 삶이 같다는 주장까지 나와서, 세상에서 유명한 성자(聖者)나 철학자도 심심찮게 그런 주장을 한다. (서양에서는 최초로 변화라는 주제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 헤라클리투스[Heraclitus]가,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이론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이 동일하다는 교설에 의하여 죽음과 삶이 동일하다는 철학을 제시한다.) 이런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헛소리는 특히 감수성이 강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젊은이들이 자살을 찬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매우 심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어 이 세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비극을 낳는다. 정작 삶과 죽음이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도 드물거니와 그 알량한 주장으로 명성이 드러나 자신의 위상을 즐기고 살아간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으로 정복전쟁을 펼치면서 인도에 왔던 백인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거나 원주민들과 결혼하면서 피정복자인 원주민을 하급인간으로 취급한 데서 생겨났다고 라다크리슈난은 설명한다. 역시 비과학적인 카스트 제도이지만 이 두 가지 사상이 인도의 과학발달을,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막았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도 있다.

   신화(神話)나 전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묘사적 언어 기능(descriptive function of language)은 이성적, 즉 과학적 비판을 거치지 않으면 설득력을 잃는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비판을 거쳐서 모든 과학이론이 발달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나 전설은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신화나 전설에 비판 없이 몰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다. 동양인들이 신화나 전설에 몰두하는 것은 그 신화나 전설들이 권위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권위자에 의하여. 인도에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도인들이 피부가 흰 코카서스(Caucasus)인인 백인들의 권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수 천 년을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 살아온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도 감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전하는 전설이나 신화를 비판하지 못한다. 설사 학교라 하여도 스승의 설명에 비판을 가하는 행위는 그 사회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국공립학교는 통치자인 절대군주의 신하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절대군주의 통치이념을 거스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반란이어서 잔혹한 형벌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이성적(理性的)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탄생할 수 없다. 동양의 문명은 불교와 유교,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문명이다. 인도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이렇게 전개된다: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현실은 하나라는 믿음이다. 신비주의자 중에서 가장 본질주의자들은 모두가 경계로 서로 분리된 많은 개별적인 물체를 - 별, 혹성, 나무, 새, 집 우리 자신 - 포함하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보통 지각이 그릇된 지각인 망상이라고 믿는다. 우리들 대부분이 사실로 잘못 믿는 이 집단적 오해인 망상의 세계에게,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마야”라는 말을 적용한다. 그들과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진짜 현실은 자아 경계를 버리고 하나임을 경험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자신을 어떤 방식, 형태 또는 모양으로 우주의 나머지와 분리되어 구별 불가능한 개별적인 물체로서 계속해서 본다면 우주의 통합을 진실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그러므로, 자주 성인(成人)들은 알지 못하는 반면, 자아 경계발달 전의 유아는 현실을 안다고 주장한다. 어떤 교도는 심지어 현실이 하나임에 대한 계몽이나 지식을 향한 길은 우리가 뒤로 돌아가거나 우리 자신을 유아처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어른의 책임을 지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청년과 젊은 성인(成人)에게는 위험스럽게 유혹적인 원칙이 될 수 있고, 그 책임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 놀랍고 압도적이며 강제적이다. 그러나 이 상상에 의하여 행동함으로써 성인(聖人) 보다는 정신분열증이 생겨난다.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는 설령 그 목적이 폭압적인 ‘패도(覇道)’를 없애고 백성을 위한 소위 ‘왕도(王道)’를 건설하는 것이라 하여도 ‘왕도’란 지배자에게 설득하여 이루질 수 있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며, 유교가 그런 정치적 목적을 갖는 한 과학 발전을 위한 철학이 될 수 없다. 유교주의자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맹자도 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한나라의 무제는 경학을 들으라는 권유에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경학 따위는 나에게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소위 춘추전국시대라는 전쟁이 일상사였던 시대에, 더구나 적대적 관계에서 음모술수로만 생존을 추구하던 지배자의 세상에서 도(道)를 말하고, 왕도(王道)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주장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춘추전국시대란 순수한 이성이 가치 없는, 폭력과 음모의 시대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춘추전국시대를 진시황의 제국이 분열하면서 일원적 독재정치에서 다원적 사회로 이전되어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논쟁을 벌이는 바람직한 사회로 평가한다.) 이러한 폭력적 시대의 폭력적 통치자를 전제로 한 사회구조가 근세까지 계속되고, 통치자를 견제하거나 추방하는 민주주의적 이념이 없었던 근대까지, 동양에는 전근대성이 남아있었다.

   백보를 양보하여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도, 그 강압적이고 형식치중의 유교식 교육이 인간의 본능적인 탐구 정신을 말살한다고 나는 주장하겠다. 더구나 유교의 교육이라는 게 군주의 신하를 만드는 목적을 지니고 있음에 다다르면 나는 유교의 교육이란 노예를 만드는 세뇌교육이라고 주장하겠다. 그런 유교적 교육이 펼쳐지는 사회에서 학교의 우등생은 민주사회의 열등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는 늘 변하고, 새로운 문물이 순식간에 밀려오는 사회에서 윗사람 잘 떠받드는 예절 따위나 강조하는 학교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동양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이 시점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아시아가 감싸고 있는 민족이라는 판단 근거로는 절대로 보편적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기껏해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므로 결코 진리도 아니고 설득력도 없는 민족의 우수성을 기준으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이나 박애를 외치는 서구문명을 상대할 수 없다. 동학 혁명이나 3.1 운동 등은 민족주의 운동이기 전에 인간애에서 시작된 인간사랑 운동이자 인간평등을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구호가 인간 사랑의 구호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태인들의 선민사상, 히틀러의 게르만 족 우수 주장, 일본 제국주의의 황국신민 주장도 민족주의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한국인에게서 나는 무수한 논리적 모순을 발견한다. 아울러 일본이나, 중국인들이 외치는 주장에도 민족주의 색채가 농후한 비논리적 발언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일본의 경우는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지배로 민족주의를 포기했지만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민족주의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일본 정치가들을 편협한 일본인 감싸기를 계속한다; 자기 민족이 최고라는 발언을 해서 자국인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다. 어떤 일본인 정치인은 미국에서는 흑인이 저능하기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가 저 모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미국은 흑인들이 있기 때문에 재즈 음악이 있으며, 흑인 영가가 있으며, 세계 기록을 보유한 육상 선수가 있으며, 유명한 농구 선수와 야구 선수가 있다. 미국은 매우 독특한 흑인들의 특성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라틴 아메리카 인들의 문화까지도 ‘미국화’하는 포용력을 지녔다. 일본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전원일치의 합의를 도출하는 의사 결정 과정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전원일치 합의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지는 일본 안에서의 문제에 국한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자기 민족에게만 중요성을 부여하여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이다: 물론 나는 일본인들이 점차 미국의 영향으로 민족주의를 버리고 점차 세계인화 하는 과정을 주시하면서 전율마저 느낀다. 아니 이미 일본은 선진국으로, 그리고 민족주의에 더 이상 안주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로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중국도 중국인이라는 민족주의 때문에 세계인들에게 보편적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여,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의 영향으로 민주국가가 되어버린 일본도 현재 중국을 대단한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 12억의 중국 인구라 할지라도가 그 12억의 중국 인구가 정치적인 자유 없이 생활한다면 그들이 이룩하는 경제적인 부(富)도 보잘것없다. 정치적 자유가 없으면 인간의 정신상태란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낸 과학적 기술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발전도 합리적이 못하다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거대한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룩한 대만이 우리의 상대자로서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까닭은 민주화된 대만이 우리와 경쟁하며 서로 배울 것이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대만이 중국의 핵무기 앞에서도 큰소리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힘을 믿어서 만은 아니다: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룩되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만에 중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중국에 대만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세계의 민주국가들은 중국과 국교를 단절할 것이다. 자국민의 항의 때문에 중국과 국교를 단절하지 않고는 민주국가의 정치가들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모택동 자신이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하였다. 이 모택동의 말은 침략자 외에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합당한 이유 없이 전쟁을 먼저 일으킬 수 없는 미국의 문명을 정확히 파악한 통찰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는 다른 국가의 침략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공격하지 않는다. 아니, 공격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는 먼저 공격해서도 안 된다. 자국민들의 투표권에 의지하는 정치인들이 자유를 목숨만큼 사랑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는가? 미국정부는 베트남에서 자국민들의 항의에 의하여 철수하고, 존슨(Johnson) 대통령을 위시한 주전파들이 몰락하는 역사를 겪었다.

  중국의 12억 인구 중에서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과 홍콩과, 싱가포르,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망할까? 나는 공산당원을 빼고 거의 모든 중국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룩되고, 시민단체들이 부적격 국회의원 낙선 운동을 시작했을 때 중국에서 들려 온 첫 번째 이야기는 ‘한국이 부럽다. 중국은 아직 멀었다’였다. 심지어 일본 시민단체도 한국의 낙선운동을 배우러 오지 않았던가? 미국과 유럽, 일본은 아시아에서 거의 최초로 정권 교체를 이룩한 나라, 시민 단체들이 국회의원을 낙선시키는 나라,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나라, 한국을 존경의 눈초리로 본다.

아시아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민족주의는 이성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까닭은 민족주의란 이성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사회는 자유가 없는 계급사회이다. 이런 사회에는 이성이 지배하는 민주국가에서 빌려 온 모방성 과학기술이 횡행할 뿐이다. 일본은 미국의 과학기술을 모방했고 한국은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모방했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유럽이 아시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과학이라고 확신한다:

 

 

현대과학은 유럽에서 태어났으나 거주지는 전 세계이다. 지난 2세기 동안 길고도 혼란스러운 서구식 생활방식이 아시아 문명에 충격을 주었다. 동양의 현자(賢者)들은 자기들이 그리도 당연히 귀중하게 여기는 자기들 자신의 유산을 무절제하게 파괴하지 않고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해질 수 있는 규율 있는 생활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계속 찾아왔고 지금도 찾고 있다. 점점 더 서양이 매우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은 서양의 과학과 서양의 과학적 개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것은 나라에서 나라로 그리고 종족에서 종족으로 이성적 사회가 있는 어느 곳으로나 이전되어질 수 있다.

 

 

   민족주의는 약한 민족이 외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드는 집단주의이다. 따라서 이 집단주의는 외세와 대항하기 위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는 계급체제를 지니게 된다. 계급체제는 다른 말로 표현하여 관료주의가 되는데, 관료주의나 계급 체제에서는 상명하달(上命下達)이라는 비민주적 질서가 자리 잡아 경직된 정책을 만들어 강압적으로 수행한다. 일본의 집단지도체제, 한국의 패거리 정치, 중국의 공산당 지배체제 등은 모두 집단주의와 관료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집단주의에는 권리만 있고 책임이 거의 없다. 유럽의 학자들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일본정치를 지적한다. 뒤로는 ‘정경유착’으로 부패가 만연하고 정치적 문제가 생기면 집단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하는 책임자가 없는 일본정치를 비판한다. 집단주의에서는 책임질 일이 발생하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이미 위기가 발생하여 닥칠 때까지 경직된 관료체제 속에서는 무책임 때문에 교정과 개혁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경제평론가이자 사회철학자인 찰스 핸디(Charles Handy)의 주장대로 ‘권리만 강조하고 책임은 무시하는 사회는 그 시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공간을 남겨 놓는다.’

집단주의 사회를 지양하는 대안(代案)은 결국 시민들이 참가하는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는 감정보다는 이성(理性)을 중시하는 이성주의와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인주의를 기초로,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과학주의가 꽃필 수 있다. 대화가 무시되는 계급사회에서는 결코 과학 문명이 꽃피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란 자신이 살아온 생태적 지위(ecological niche)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지닌 지식 99%가 선험적이고 나머지 1%의 지식이 후천적이기 때문에 거의 절대적으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과학은 비판에 의하여 발전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성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가 믿는 바, 수학은 감각을 초월하여 이해 가능한 세계 뿐 아니라 외부의 진리와 정확한 진리를 믿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기하학은 정확한 원을 다루지만,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물체가 정확한 원인 경우는 없다; 아무리 우리가 컴퍼스를 세밀하게 쓴다 할지라도 불완전과 불규칙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모든 정밀한 사고(思考)는,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물체와 반대로, 이상(理想)에만 적용된다는 견해를 낳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고는 감각보다 더 고귀하며, 사고의 대상물은 감각적 지식의 대상물보다 더 실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진리에 대한 보편적이고, 인간의 영향이 배제된 기준에 대한 매력이라는 의미에서 이성은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다... 이성이 꽃피는 시대 뿐 아니라, 더욱이 이성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죽일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의 허황한 꿈으로서 무시당하고 거부되는 불행한 시대에서도.

 

 

5.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와 언어

 

   인간이 이성(理性)을 통하여 묘사하고 비판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언어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은 언어의 발명과 함께 도약의 시기를 맞는데, 그 까닭은 인간이 동물에서 벗어나는 시점이 언어의 발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언어를 이렇게 설명된다:

 

 

생명과 의식(意識)이 지금까지 한 가장 새로운 행동은, 내가 상상하건대, 인간 언어의 발명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인류의 탄생을 불러왔다. 인간 언어는 단순히 자기-표현에만 특징을 두지 않으며, 신호에만도 아니다: 동물들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 언어는 상징사용만도 아니다. 상징사용 또한, 그리고 심지어 의식(儀式)도 동물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의식발달(意識發達)로 이어진 그 위대한 단계는 묘사적 진술의 발명이다: 사실에 일치하거나 그렇지 못하는 사건의 객관적 상태를 묘사하는 진술의; 다시 말해서, 사실이거나 거짓일 진술의. 이 기능은 인간 언어 내부의 전례가 없는 특징이다. 여기에 동물언어와 다른 점이 놓여있다. 아마도 우리는 벌들의 언어에 대하여 아마 과학자들이 벌을 오도(誤導)할 때를 제외하고 그들의 의사소통이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만적(欺瞞的) 표시는 동물 가운데서도 또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나비의 날개는 눈의 모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만이 논쟁적 주장으로써 자기들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검토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이 언어의 네 번째 기능인 논쟁적 기능이다. 묘사적 인간 언어의 발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인 발전적 발명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비판의 발명이다. 비판의 발명은 의식적 선택, 이론의 자연 선택 대신에 이론들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물론(唯物論)이 스스로를 초월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선택도 스스로를 초월한다고. 비판의 발명은 진실한 진술과 거짓 진술을 포함하는 언어의 발달을 야기한다. 그래서 이 언어는 비판의 발명, 비판의 출현, 그리고 그것으로써 새로운 선택의 단계를 야기한다: 자연선택은 비판적 문화 선택에 의하여 증폭되고 부분적으로 따라 잡힌다. 후자(後者)는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에 대한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추적을 허용한다: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의식적으로 발견하여 제거할 수 있고, 우리는 의식적으로 한 이론이 다른 이론에 열등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결정적인 요점이다. 이곳에서 소위 나에게 주어진 제목 속에서 ‘지식’이 시작된다: 인간의 지식이다. 이성적 비판인, 진리탐구행위 안에서의 비판 없이 지식은 없다. 동물에게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없다. 물론 그들은 모든 종류의 것을 알고 있다 - 개는 자기 주인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과 가장 중요한 종류의 지식인 과학적 지식은 이성적 비판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러므로 결정적인 단계, 사실이거나 거짓된 진술의 발명에 의존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제안하는 바, 인간문화의 기초를 놓는 단계이다.

 

문화도약과 인간이 의사소통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조금 상술(詳述)하겠다. 실제로, 문화도약은 또한 언어적 도약이다. 전통 속에서의 빠르고 축적되는 변화율은 사회적으로 습득되고, 저장되고, 빼내고, 공유되는 정보의 양에서의 발달을 의미한다. 후자(後者)를 기리지 않고 전자(前者)를 기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언어는 기억이 개인과 세대보다 더 오래 남는 매체이다. 그러나 인간 언어는 단지 수동적 반복만이 아니다. 인간 언어는 또한 문화적 진보가 일상생활에 부과하는 점점 복잡한 사회활동 만들기에서 능동적인 도구적 힘이다. 언어 능력은 공간과 시간에서 멀리 떨어진 상황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위하여 규칙을 세밀하게 만드는 일을 가능케 한다.

 

 

   물론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그리고 인간 언어의 불완전함은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 그 까닭은 인간 자체가 영원히 불완전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언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를 통한, 그리고 기타 미술이나 음악을 통한 인간의 묘사적 능력은 비판에 의하여 발전한다. 즉, 비판은 곧 우리가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어 힘은 정말로 놀랍다: ‘우리 언어는 완전하지 않지만 놀랄 정도로 훌륭하다. 놀랄 정도로 강력하다. 우리 언어의 결점은 점점 더 세밀한 도구인, 점점 더 세밀한 외부 침투적 도구를 발명하는 수학자들에 의하여 부단히 다루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가 늘 불완전하다는 것, 현실에 대한 우리의 묘사가 늘 불완전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 누가 완전한 지식을 얻으리라고 기대하는가? - 이 근본적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점점 더 발달하고, 현실을 묘사하는 데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불평할 것이 없으며 매우 경탄할 만하고 찬양할 만하며, 특히 인간이 실제로 이 믿을 수 없이 강력한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에 놀랄 만한 것이 많다.’

 

 

6. 이성주의 교육

 

   이성주의 때문에 유럽대륙에서 과학이 시작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성주의로 시작되어 발전하는 유럽대륙의 과학은 그 기원을 고대 아테네에 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있었던 많은 철학자들은 실제로 과학자들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를 제외한 이 철학자들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희랍 철학자들이 새로운 전통 - 신화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지는 전통, 신화를 토론하는 전통; 신화를 말할 뿐 아니라 듣는 사람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 전통 - 만든 것이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그러므로 듣는 사람이 자기들 보다 더 나은 설명을 아마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자기 차례에는 듣는 사람이 신화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君師父一體 )’ 따위의 허황한 주장은 아테네에 없었다. 오늘날 한국 땅에 임금 따위는 없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교사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더구나 학생들은 대중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손쉽게 얻기 때문에 스승의 권위는 설 자리를 잃는다. 국가주의에 의하여 국가가 원하는 국민을 교육을 통하여 양성하려는 기도는, 과학탐구와 과학발전이라는 보편성 추구에 의하여 갈음된다. 국가의 미래가 젊은 세대에 달려 있다고 외치는 잘못된 교육을 사상가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미래가 젊은 세대에 달려 있고, 그래서 아이들의 생각이 개인적 취향에 따라서 주조됨을 허용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 전체주의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이익을 자유의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귀중한 형태인, 다시 말해서 지적(知的)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가볍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교육자와 교사에 관련된 자유방임’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 정책이 국가 관리들에게 사고를 틀에 부어 만들고 과학 교육을 통제하는 전체적인 힘을 부여하여 국가의 권위로 의심스러운 전문가의 권위를 옹호하고 권위적인 원칙인 관습적인 교육 행위로 과학을 망치는, 그리하여 과학적 연구 정신을 - 진리를 소유했다는 믿음에 반대되는,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 - 파괴하는 권위적인 정책보다 무한히 우수하다고 믿는다.

 

교육자는 없다. 사색가로서, 사람은 자기-교육에 대해서만 말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는 사람에게 행하는 실험이거나, 새로운 인격을, 그 새로운 인격이 무엇이든 간에, 널리 퍼져있는 버릇이나 관습에 일치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원칙을 겨냥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러므로, 사색가에게는 가치 없는 것 - 과감하게 솔직한 사람이 우리의 천적이라고 부르는 부모와 교사의 작품 - 이다. 어느 날, 세상의 의견으로 한 사람이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사색가의 임무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제 그의 도움을 부를 시간이 왔다 - 교육자로서가 아니고 스스로를 교육하여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위 글에서 칼 포퍼는 교육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는 교육행정을 반대하면서도 소위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학생들의 탐구정신을 말살되는 국가정책 위주의 교육보다는 차라리 자유방임 교육이 낫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니체는 관습에 치중, 인격을 말살하여 교육하는 교사와 부모를 학생들의 적(敵)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소위 고등교육이라는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을 플라톤이 창안하였는데 이 고등교육의 목적은 스파르타의 교육을 본받아 천편일률적이어서 마치 강제 수용소에 넣고 세뇌교육을 하는 것과 같다고 칼 포퍼는 주장한다.

   이렇게 국가적 목표를 위하여 학생들의 정신을 마비시키어 과학정신을 없애는 교육행위는 유교가 시작된 이래 동아시아에서 시행되고 있는 비과학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비이성적인 교육행태이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틈만 나면 서양문화에 심취하고 서양사회로 나아가려는 원인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 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패싸움과 왕따 만들기에 물들고 고등학교에서는 포악한 자가 판치는 폭력교실과 폭력학교가 되는 것이다. 선생들은 알고도 모른 체, 학생들은 심지어 제지하는 선생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한창 젊은 아이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엉터리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학습내용을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그 아이들을 사회생활에 참여시켜 사회를 알게 만들려면 우리에게 건실한 사회가 존재하는가?

   이성주의는 강압을 배격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스승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시행되는 것이 이성주의교육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대로 학생들이 독립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학생들을 존중하는 것이 아테네에서 시작된 이성주의 교육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정치적인 무기로서의 교육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하면, 우리는 독립적인 견해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신적 습관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제도로서의 교육은 몇 가지 견해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습관을 형성하고 지식을 제한하려고 애쓴다.’

 

 

7. 문명충돌과 제국주의

 

   나는 앵글로 색슨의 문명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국의 인도 및 아프리카 식민지지배와 중국의 아편전쟁을 들어 비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결점 없이 완전하지는 않다. 영국은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으며, 프랑스와 미국은 월남전에서 패했다. 미국은 워터게이트라는 정치 스캔들을 겪었다. 유럽 대륙은 십자군 원정으로 수많은 유태인과 아랍인을 학살했으며, 서로 전쟁을 일으켜 유럽 대륙은 근세까지 평화가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땅에는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만약 갈등 없는 평온한 사회라면 그것은 히틀러 독재나, 진시황의 독재와 같은 정치체제이다; 겉으로만 잘 굴러가는 듯 보이는.

   유럽대륙의 전쟁은 결국 이성주의를 보다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이 휩쓸고 간 다음에 이념을 위한 전쟁이란 쓸모없는 파괴이므로 결국 서로간의 생활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성주의가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명충돌이란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장점도 있다.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빼면 교통을 방해하는 험한 지형이 없는 유럽대륙에서 전쟁의 결과로 이성주의가 꽃피었다는 사실은 이상할 게 없다. 유럽에서 이성주의가 탄생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된다:

 

 

계몽주의 철학은 이 자유로운 개인 의견에 대한 높은 존중을 존 로크(John Locke)의 철학으로부터 채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기를, 영국과 대륙의 종교전쟁 및 갈등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세 번의 전쟁은 마침내 종교적 관용의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그 개념은 (예를 들어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하여) 자주 주장되는 것처럼 부정적 개념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공포로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려는 노력이 희망 없는 일이라는 피로함과 인정(認定)의 표현만은 아니다. 반대로, 종교적 관용이란 강요된 종교적 순응은 가치 없으며, 단지 자유롭게 수용된 종교만 가치 있다는 긍정적 통찰의 산물이다. 이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정직한 믿음을 존중하도록, 그리고 개인과 그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설득한다. 그것은 마침내 계몽주의의 최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말로 인간 위엄의 인정으로 통한다.

 

 

   위 글에서 여러분은 계몽주의(Enlightenment)라는 단어를 보았다. 그러나 많은 동양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제국주의와 연결하여, 식민지 국민을 세뇌하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은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는 사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그 영어 의미가 나타내는 바와 같이, 스스로 깨닫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다시 말해서 서구인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을 이념이나 문화를 보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계몽주의라는 단어는 타동사의 의미보다는 자동사의 의미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 작가 볼테르(Voltaire)가 영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영국인들의 개인주의적 생활을 찬양하여 붙인 이름으로, 유럽대륙 사람들도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여 행동하자는 주의이다:

 

 

칸트의 철학과 그의 역사철학은 독일에서 낡고, 헤겔과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대체되는 것으로 흔히 간주된다. 이것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탁월한 지적 및 도덕적 위상 때문이다; 그 까닭은 칸트 업적의 위대함이 보잘것없던 후계자에게는 눈에 가시여서 피히테와 나중에는 헤겔이 칸트는 단지 자신들의 선두주자 중 한 명일뿐이라고 세계를 설득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반대로 칸트는 낭만주의 운동의 전체, 특히 피히테의 확고한 반대자였다: 칸트는 사실상 많이 매도당한 운동인 계몽주의의 마지막이자 위대한 옹호자였다. ‘계몽주의라 무엇인가?’(1785)라는 중요한 논문에서 칸트는 이렇게 썼다:

 

계몽주의란 인간이 스스로 부과한 보호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 보호 상태는 외부의 지도 없이 인간 자신의 지능을

사용하려는 인간능력의 부족 때문에 생긴다. 그러한 보호 상태가

지성부족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려는 용기나 결심이 없기 때문이라면 나는 ‘스스로 부과한’

[또는 유죄의]라고 부른다. Sapere aude! 당신 자신의 지성을

용감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구호이다.

 

칸트의 논문 중에서 이 글귀는 계몽주의의 핵심 아이디어가 그에게는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이 지식을 통한 자신의 해방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아이디어는 칸트에게는 일생동안 임무이자 지침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필요한 지능을 소유한 모든 사람에게는 영감으로 작용한다고 그는 확신했지만, 그는 우리가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이나, 주로 지적인 다른 훈련을 인간 삶의 전체 의미나 목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실제로 칸트에게는 순수이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낭만주의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사람이란 순전히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깨닫는데 그들의 암시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지식이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것도 아니요 가장 고상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인간이 지닌 목적의 다양성을 믿었던 다원주의자였다; 그리고 다원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는 열린사회 즉, ‘용감히 자유인이 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자주를 존중하라; 그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책임지는 믿음을, 특히 이 믿음이 자신의 믿음과 크게 다르다면, 존중하는데 있기 때문이다’라는 자신의 금언에 합치될 다원사회를 믿었다. 그러나 자신의 다원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적 자기교육이나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에서 철학적인 관점에서 필수적인 임무를 보았다; 지금 이곳에서 항상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임무. 그 이유는 지식의 성장을 통해서만 인간의 정신은 속박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우상과, 피할 수 있는 오류에 의한 속박상태. 그래서 삶의 의미를 분명히 대표하지는 않지만 자기계발의 임무는, 칸트가 생각하기에 삶의 의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유럽대륙과는 반대로 험한 산맥과 사막, 바다로 서로 분리된 아시아 국가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문명충돌을 일으키기에는 비교적 지리적 조건이 나쁘다. 따라서 아시아 국가가 서로 또는 구미의 국가에 의하여 문명충돌을 당하는 경우는 해상교통이 크게 발달하는 근세이후이다. 이 문명충돌은 소위 서세동점(西勢東占)이라는 표현으로 과학문명을 앞세우고 동양으로 밀려오는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중국과 인도의 문명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서양문명의 충격을 전쟁보다 더한 충격으로 그리고 있다:

 

 

지리地理의 구역을 달리하며, 문명의 원소를 달리하며, 그 원소의 발육을 달리하며, 그 발육의 정도를 달리하는 특수하고 전혀 다른 것特殊異別을 만났으며, 게다가 아주 가깝고 서로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민에게 그것이 새롭고 신기한 것은 물론, 그 모든 것들이事事物物 보아서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고, 들어서 괴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아주 뜨거운 불로써 아주 차가운 물을 접하는 것과 같아서 인간人의 정신에 파란波瀾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깊은 곳에까지 들어와 완전히 뒤집어놓은顚覆回旋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럽문명 또한 그 역사 속에서 외부 문명에 굴복한 적이 있다. 그 굴복의 역사는 몽고족과 훈족에 의한 침략으로 유럽이 정복당한 사실(史實)이다. 그러나 몽고군이나 훈족이 우수해서, 다시 말해서 유럽문명이 본질적으로 약해서 유럽이 패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온 유럽이 기독교라는 사슬에 묶여 유럽 스스로 함정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들에 의하여 계급사회가 출현하고 시민들이 억압을 받으며 방황하고 있을 때 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침략한다. 결국 독재 사회는 외침이나 내부 혁명에 의하여 몰락한다는 프랑스 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관찰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몽고군이 침략했던 유럽의 역사를 니체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육과 비교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밑금은 필자가 그음):

 

 

학교는 정확한 사고, 신중한 판단, 그리고 일관적인 결론을 가르치기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학교는 이러한 일들에 적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나 내버려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종교이다. 학교는 나중에 사람의 불명확함, 버릇, 그리고 필요가 너무 팽팽한 사고의 활을 느슨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의 영향이 닿는 한, 학교는 사람에게서 필수적이고 독특한 것을 집행하여야 한다: “이성과 과학, 인간의 가장 높은 능력” - 그렇게 괴테는 적어도 판단한다. 위대한 과학자 폰 바어(von Baer)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자기들이 믿는 것에 대한 이유를 대는 그들의 훈련된 능력 - 후자(後者)가 완전히 할 수 없는 것에서 본다. 유럽은 조화롭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를 거쳤다; 아시아는 여전히 진실과 시(詩)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모르고, 자신의 신념이 개인의 관찰과 신중한 사고에서인지 환상에서 나왔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유럽은 학교에서의 이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아시아의 한 조각과 부록에 되는 과정에 있었다 - 유럽이 그리스인들에게 빚진 과학적 감각을 잃어버림으로써.

 

 

   한국인들은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지배 때문이라고 회자(膾炙)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 식민지에 대한 반감이 한국인 일반대중 속에서 얼마나 절실하고,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나는 의심한다. 이조시대부터 계속된 양반이라는 엘리트 계층에 의하여 수탈을 당하여 온 일반백성들이 단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애국심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일본에 대항했을까? 그들은 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거대한 정세변화보다는 토지 수탈정책이라는 식민지 정책에만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들이 아니었을까? 임오군란과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던가? 미국 시카고 대학의 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일단의 한국인 매국노들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저항했다”라고 썼다. 나는 이 커밍스 교수의 말에서 양반이라는 지배계층 때문에 나라를 잃은 조선 백성들이 절망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한반도에는 고조선 시대에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다. 중국이 설치했던 한사군에 대하여 오늘날 항의하는 한국인은 없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대마도는 백제의 식민지였고 일본 땅 전체가 백제의 식민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함으로서 경기 및 호남지역에서 퇴각하여 부산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 땅으로 간 백제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니까.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탐라국인 제주도를 정벌한다. 왜 정벌해야 했을까? 신라가 탐라국을 정벌했다는 역사기록은 탐라가 신라의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탐라는 백제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흥안령산맥을 넘어 정벌을 성공시켰고, 백제는 지금의 베트남에까지 뻗치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가 중국 땅에 건설하였던 신라방도 일종의 식민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래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문명국가는 제국이었다.’라는 칼 포퍼의 역사진술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식민지 지배 자체는 우리 모두가 거부하고 대항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지만, 영국의 식민지 지배와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그 성격이 다르다. 우선 식민지 지배의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홍콩과 싱가포르, 나아가 미국의 통치를 받고 지금까지 미국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와 정치, 사회를 구현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자는 영국과 미국이 공산주의 소련과 중국을 포위하는 정책을 태평양에서 썼기 때문에 홍콩과, 싱가포르, 일본, 한국이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번창했다고 설명한다. 또 영국과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동아시아에서 여러 국가들을 자기 영향 하에 둘 목적으로 그들 국가의 경제 개발을 도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의 자원으로 도움 받지 않고도 최소한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아마 러시아도 자원부국이라는 면에서 미국과 거의 대등한 위상을 지닐 것이다.) 미국인들은 유럽 및 기타 선진국들과 문화적 결속이 끊어질 것을 두려워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떤 다른 국가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주의 국가와 냉전이 치열하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일본열도만 지키고 한반도에서 철수하여도 아시아대륙의 공산주의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패전국인 일본만 지배하면서 태평양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50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이 발표한 ‘애치슨라인’은 한반도를 제외한 일본열도를 극동에서 미국의 방어선으로 설정하는 미국의 대 공산권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의회의 야당도 파병에 동의하고 참전하여 거의 한국전쟁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도취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미국의 힘이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정복하여 자국민으로 하여금 총독을 세워 다스리는 로마제국이나 일본제국과 판이하게 다르다. 로마제국의 다스림은 오히려 독일이나 일본, 이태리로 구성된 2차 세계대전에서 동맹을 맺었던 파시스트 국가인 소위 추축국의 식민지 지배와 유사하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신이 로마인들과 비교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국가 간 동맹을 도모하는 아테네의 특성을 지닌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다시피, 아테네의 식민지 정책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자유롭고 민주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정책의 특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이래 영국보다도 더 자유를 추구하는 국가가 되는 반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영연방이라는 형태로 식민지에 대한 직접지배를 지양하게 된다. 또 간디를 주인공으로 한 인도인들이 독립투쟁에 의하여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정말 그럴까? 나에게는 인도의 식민지 지배를 규탄하는 많은 영국의원들의 연설내용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의 독립을 영국이 ‘허용했다’고 말한다.

   현재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원래 소수의 종족으로 나뉘어 서로 싸움질하며 살아가던 황무지였다. 유럽인들은 노예사냥이라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서로 다른 종족을 한 나라로 모아 들였다. 다시 말하면 야만의 땅을 야만스런 짓을 해 가면서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애썼다. 노예사냥은 유럽인들이 지고 갈 역사적 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야만의 땅을 현대화한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유럽에 의한 아프리카 식민지화를 이렇게 기술(記述)한다:

 

 

기원 후 500년, 서 아프리카의 봉건 왕국은 - 가나(Ghana), 말리(Mali), 상헤이(Sanghay) - 로마가 유럽에 전해준 기술과 공학이라는 유산으로부터 사하라 사막에 의하여 단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유럽의 봉건 왕국과 매우 유사했다. 결과적으로, 거대한 사하라사막은 유럽의 과학과 상업을 부흥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한 아랍의 영향이 남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았다. 지중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배로 무역과 전쟁을 수행하여 해상강국이 된 반면, 사하라 남쪽의 검의 피부를 지닌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는데 주로 몰두하여 해상모험에 대한 동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최초의 포르투갈의 배들이 15세기에 기니아(Guinea) 만(灣)에 도착했을 때, 그 배들은 항구를 지배할 수 있었고 향후 500년 동안 아프리카의 운명을 막아버렸다. 금광을 다 파먹은 다음, 아프리카의 유럽인들은 유럽의 옷감과 화기(火器)와 교환하기 위하여 노예사냥에 눈을 돌렸다. 이것은 더 많은 전쟁과 반란, 그리고 동질적인 봉건국가의 해체를 불러와서, 아프리카 정치발달을 저애하고 내륙의 방대한 지역을, 대서양 건너편의 설탕, 면화, 그리고 담배 농장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길러진 인간 생산물이 주산물이던 무인지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노예무역의 종식과 함께,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아프리카인들이 농사를 짓고 탄광에서 일하도록 강요했다. 그 동안, 식민지 당국은 종족 전쟁을 부추기고 아프리카의 교육을 가능한 한 가장 초보적인 수준으로 제한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정치적 독립을 성취한 후에 세계시장에서 그들이 경쟁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 산업 기반설비를 식민지가 개발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아프리카를 복종적이고 퇴보적으로 만드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들이 다음 세기 말이 되기 전에 그들 자신이 지닌 단 하나의 발전된 산업사회를 건설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들은 인종적 열등아가 아니고 초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식민주의가 그렇게 지속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의심한다면,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생각해보라. 16세기에 이 두 섬 문명은 농업에 기반을 둔 봉건국가의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이 서구로부터 수입품으로 서적, 특히 무기를 만드는 방법과 철로를 건설하고 화공약품을 만드는 책만을 받아들이고 유럽의 무역업자와 선교사에게 문을 닫은 반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각자의 유럽인 주인들과 300년 동안 밀접하게 접촉한 다음, 일본은 극동에서 가장 발달한 산업 강국으로 자기들의 위상을 잡을 수 있었던 반면, 인도네시아는 20세기에 발달하지 못하고, 과잉 인구에 가난에 찌든 무능력자로 나타났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고려되어야 할 다른 요인이 있지만 인종은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 글에서 저자 마빈 해리스는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인종적 특성이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인도네시아와 일본이 산업화에 실패하고 성공하는 데는 다른 요인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유럽이 로마에서 과학과 공학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마빈 해리스의 부정확한 진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서구문명의 모태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이다. 니체도 이 문제를 아테네와 연결시키지만 유럽의 과학은 아테네의 철학과 과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여하간 마빈 해리스의 이 말은 현대문명의 발상지가 유럽이라는 점을 고백한다.

   그리고 기원 후 500년에 서 아프리카에 유럽의 봉건국가와 매우 흡사한 가나, 말리, 상헤이 등의 봉건왕국이 있었다는 주장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우선 유럽에서 봉건국가가 성립하는 때는 중세이기 때문에 기원 후 500년이 지나서이다. 봉건국가는 정치권력의 분배라는 이유 때문에 성립하는 관계로, 제국적인 특성의 한 부분이다. 아프리카에 기원 후 500년경 제국적인 성격을 갖는 국가가 세워질 수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마빈 해리스가 지적하는 봉건왕국 가나, 말리, 상헤이는 기껏해야 종족국가 혹은 민족국가로 보인다.

   일본은 한국과 만주를 점령하여 식민지화하면서 철도를 비롯한 산업 기간설비를 만들었다. 그 이유는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식민지의 원자재를 일본으로 가져가거나 일본내부의 산업발전을 돕기 위한 운송 및 생산설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설비는 결국 일본이 다른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전략적 정책의 일환으로 건설한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산업 기간설비를 건설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아프리카의 자원을 운반하고, 가공하거나 생산하는 설비가 당연히 현지에 필요하지 않겠는가? 설사 자원을 항구에서 유럽으로 운반하여 가공하여 생산하였다 하여도 아프리카 내륙의 자원을 항구까지 운반하기 위한 철도 및 도로가 필요하지 않은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기간산업 설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그 이유는 밀림 때문에 철로나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 불가능했거나 말라리아 따위의 열대성 질병이 유럽인들의 활동을 저지했던 것은 아닐까?

   식민지 교육을 최소한의 수준에 머물게 하여 식민지인들을 단순노동에만 써먹을 수 있으면 된다는 정책은 일본이 한국에서 취한 교육정책과 흡사하다. 그러나 같은 한자 권에 속한 일본이 조선인의 교육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실은 차별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알파벳을 사용하는 유럽인들이 문화적으로 동질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프리카인들을 초등교육만 시키고 노동현장에 투입하거나 노예로 팔아먹은 것은 차별정책 외에 어떤 불가피한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시 그 사실은 아프리카에는 문자기 없었고 따라서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예무역이 폐지되고 노예해방이 있은 후에 문자가 없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식민주의자들의 국가로 가서 그 문자와 문화를 배우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사회발전에 기여했던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마빈 해리스의 이 글에서 내가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일본과 인도네시아의 비교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에 근대의 산업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반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어서 현대화의 가능성을 상실하였다는 마빈 해리스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일본은 한국에 식민지를 세우면서 한국인의 열등성을 역사적으로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려고 소위 식민지사관을 만들어낸다. 그 식민지사관의 백미가 한국은 역대로 중국에 기대어 살면서 중국에게 문화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예속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일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일본 역시 중국의 문화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얕보기 시작한 것은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물밀듯 동양으로 밀려오는 유럽의 산업문명을 받아들인 후이다.

   일본은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문맹률이라는 면에서 문자 없이 지내온 인도네시아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설명하면, 인도네시아는 아프리카와 유사한 문맹국가인 반면, 일본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도(神道)라는 종교적 전통이 있으면서, 한자를 모태로 한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운 지방에서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은 부족들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모여 사는 인도네시아와 기원 후 397년에 중앙정부가 들어선 일본은 완전히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기원 후 396년 대군을 이끌고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정벌하며, 전쟁에 패한 비류 및 온조 백제인들은 호남지방과 남해안을 따라 부산에 도착하여 도해하여 일본의 기내지방에서 국가를 수립한다.) 그 후 일본은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서구의 열강들이 중국을 식민지화하는데 몰두하는 바람에 식민지라는 비극을 피하게 되는데, 마빈 해리스의 주장대로 일본 스스로가 서구의 무역업자와 선교사에게 문을 걸어 잠근 것이 아니라 - 메이지 유신 이후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됨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서로 설명될 수 있다 - 역사 속의 우연이 일본이 서구세력에 의하여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연대기의 시간으로는 일본의 진보가 빨랐을는지 모르지만, 세계시간으로는 늦었다. 일본은, 실제적이고 상징적 의미 모두에서, 19세기 세계 짜임새의 적게 남은 틈새 속에서, 일본의 문을 두드리는 새로 발흥한 산업 강대국들과 동시에 발달하였다. 한 동안 이 열강들은 일본에게 긴 시선을 보냈으나 주로 중국에 그들의 눈을 두었다 ㅡ 그리하여 일본이 자기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숨 쉴 틈”을 제공하였다.

 

 

   이제 서구세력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적지 않은 국민이 문자를 알고 있으며, 강력한 중앙정부가 있는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일본은 빠른 속도로 산업 강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세계열강에 편입하게 된 일본이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식민지를 지배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으로 연합국에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 경험이 없었고, 민주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당시의 일본을 군국주의 일본 또는 제국주의 일본이라고 부른다:

 

 

현대화를 목표로 그리고 산업화를 수단으로, 상상하고 서둘러 새로운 경제를 탄생시키며 야심적인 어머니가 자기 영재 자식을 밀듯이 그 경제를 계속적으로 밀었던 것은 국가였다. 그리고 그 자식은 자라서 자신의 자원을 개발할지라도, 이 강요된 양육에 의하여 부과된 기형(畸形)을 극복하지 못했다.

 

방어적인 일본의 산업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당하다면, 우리는 또한 일본의 방어적인 식민지주의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경험에서, 또한, 시기와 환경이 중요했다. 일본 개발의 시작이 세계의 거대한 강대국과 비교하여 늦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일본의 대만과 한국 식민지화가 그렇게 늦었다. 일본은 세기가 변하는 아시아에서 동아시아 내륙에서 일본의 영역을 조각하려고 노력함에서 유럽의 열강들과 별로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수 백 년의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과 미국 같은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국내적으로는 반제국주의적 반대 압력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해외에서는 태동하는 민족주의의 압력을 느끼기 시작하는 근대적인 세계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일본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과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한국을 일본이 병합한 몇 년 안에, 일본은 식민지에서 자주적 결정을 요구하는 윌슨 대통령의 이상적인 압력과 더욱 엄청난 레닌주의적 제국주의의 분석과, 식민지화된 민족들에 대한 볼셰비키 지원 양쪽에 직면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다소 빠르게,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 내의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특별히) 시대착오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주의의 시대착오는 일본이 현대 세계에 들어온 사대착오를 별도로 하고는 설명 불가능하다. 일본은 국내적으로는 자원이 부족하고, 그러한 행동이 서구의 발전한 산업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추가사항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영토획득을 추구했다.

 

두 번째 독특하고, 연관되어 있으며 아마도 보다 두드러진 일본 제국주의의 특징은 일본 자체에 대한 식민지역의 근접성이었다. 일본의 측면적 팽창, 즉 “너비에서의 발달”은 다른 적당한 지역들 (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 대부분이 점령되었거나 점령 불가능했기 때문이고 약하고 비틀거리는 러시아가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래서 일본은 자신의 근접 이웃을 식민지화하는 유일한 세계 강국이 되었다. 일본은 넓은 지역에 퍼진 제국들보다 비교우위를 제공하면서 본국 가까이서 자기의 힘을 최대화할 수 있었다. 일본은 국경선이 이미 잘 정립된 (가령, 아프리카와는 달리) 지역에서 지리적 영역, 또는 단위를 조성할 수 있었다. 근접성은, 일본인처럼 외부에 관심 없고 동질의 민족에게는 특히 중요한, 대도시 시민들이 조국 가까이에 정착시키는 것을 또한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근접성은 시장 관계에서의 교환시간이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 바닷길보다는 철도로 특별히 빠르게 될 정도로 전체적인 협력과 식민지를 중심지에 묶는 가능성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8. 영미(英美)의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정책은 - 엄격하게 말해서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자국민을 이민시키는 식민지를 미국은 가지고 있지 않다 - 이들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삼권분립이 엄격하게 시행되고 언론의 자유를 통하여 행정부의 정책이 국민들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되고 감시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제국주의적 특징이 어찌 여과되지 않은 채 방종으로 흐를 수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는 관용과 인내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우리가 상정(想定)한다면, 그런 사회가 경영하는 식민지 또한 그런 토대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회는 식민지 국민을 민주주의로 이끌어 간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앵글로 색슨 사회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 사회가 지닌 제국주의적 특색 또한 민주주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모든 사람이 천황의 지배를 받는, 일본 민족이 가장 우수하고 그 다음에는 하등인간인 식민지 국민이 존재하는 계급주의의 지배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국민을 동물로 취급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수 십 만을 죽인 남경학살에 대해서도 뻔뻔스러운 것은 이해 가능하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보다 못한 동물들인 불필요한 중국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독일사회에서 반란의 음모를 꾸민다고 유태인들을 가스실에서 집단학살한 히틀러나 일본 엘리트주의자들이나 차이점이 없다. 일본 문화를 연구하여 그 정수를 파헤친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인들의 당시 사고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이 이번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한 그 전제는 미국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은 국제 정세를 다르게 규정했다. 미국은 추축국(樞軸國-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 이탈리아, 독일)의 침략행위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일본, 이탈리아, 독일의 3국은 그 정복행위에 의해 불법적으로 국제평화를 침해했다. 추축국이 권력을 장악한 곳이 만주국이든, 이디오피아이든, 폴란드이든 그것은 그들이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사악한 진로로 나아갔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공존공영(共存共榮), 또는 자유기업을 위한 [문호개방(門戶開放)]이라는 국제간의 규역(규약?-필자)에 대한 죄를 범한 것이다. 일본은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각국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세계에 무정부상태가 계속된다. 일본을 계층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참으로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위치[所]’를 갖는 필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국내의 통일과 평화를 달성하였고, 폭도를 진압하였으며, 도로와 전력ㆍ철강 산업 등을 건설하였고, 또 공표된 숫자에 의하면, 공립학교에서는 청소년의 99.5%가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전제에 따르면 뒤처진 아우, 중국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은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세계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어서 [자기네의 알맞은 위치]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나라는 하나의 국제적 계층조직 속에 제각기 포섭되어서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다음 장에 이와 같이 계층제도에 높은 가치를 둔 것이, 일본문화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만들어내기에 알맞은 하나의 환상이었다. 일본으로서 불행한 것은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나라들이 그 이상을 일본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일본에서조차 일본은 ‘대동아’의 이상이 도덕적으로 거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1930년대에, 광신적 군국주의자이며 한때 육군 대신이었던 아라키[荒木]대장은 [전 일본 민족에게 호소]라는 팜플렛 속에서 “일본의 참된 사명은 황도(皇道)를 사해의 끝까지 홍포(弘布)하고 선양(宣揚)하는 데에 있다. 힘의 부족은 우리의 근심거리가 아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물질적인 일에 마음쓸 필요가 있는가?”라고 썼던 것이다.

 

이 반물질주의적 편향으로부터 천황에 대한 태도에 이르는, 전쟁중의 일본인의 행동에 관한 이러한 모든 중요한 문제는,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본토 일본인들에게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밖의 특히 일본군에 관련있는 몇 개의 태도가 있었다. 그 하나는 일본군의 병력소모에 대한 태도였다. 일본의 라디오는, 미 해군이 타이완 앞바다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한 조오지 S. 맥케인(George S. McCain) 제독에게 훈장을 수여했을 때, 그것을 매우 의외로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방송을 했는데, 그것은 미국인의 태도와는 매우 큰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령부의 조오지 S. 맥케인이 훈장을 받은 공적 이유는 그가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니미츠통신의 주장에 의하면, 그가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므로 그것을 이유로 함이 당연한데,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중략) 맥케인 제독의 서훈(敍勳) 이유로 내세운 사실은 그가 두 척의 손상된 미국군함을 잘 구조하고 호송하여 무사히 기지까지 몰고 왔다는 점이었다. 이 보도의 중요성은 그것이 조작된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에 있다. (중략) 우리들은 맥케인 제독이 두 척의 군함을 구조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들 국민 제군이 알아두어야 할 점은 미국에서는 파괴된 배를 구조하면 훈장이 주어진다는 사실인 것이다.

 

미국인은 모든 구조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 대한 모든 원조에 감동한다. 용감한 행위는, 만일 그것이 ‘손상된’ 인간을 구한다면. 한층 더 영웅적인 행위로 된다. 일본인의 용기는 그러한 구조를 배척한다. 우리의 B-29나 전투기에 준비된 구명구조차도 일본인에게서 ‘비겁’이라는 비판을 일으켰다. 신문도 라디오도 되풀이하여 이 사실을 화제에 올렸다. 죽느냐 사느냐의 위험을 조용히 감수하는 것이 깨끗한 태도이지, 위험예방책을 취하는 것은 가치없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부상자나 말라리아 환자의 경우에도 나타났다. 그러한 군인은 이른바 파손된 폐물이었다. 그리하여 의료시설은 극도로 불충분하며, 심지어 전투력의 유지에서조차도 그러했다. 때가 지남에 따라, 모든 분야의 보급난 때문에 의료설비의 결핍은 극도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의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이 그 위에 부채질 하였다. 일본병사들은 죽음, 그것이 정신의 승리이며, 우리들 미국인같이 충분히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폭격기의 구명도구와 같이 영웅적 행위를 해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과 같다. 첫째, 보통생활에 있어서, 일본인은 미국인처럼 자주 의사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익숙해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다른 복리수단보다는 차라리 부상자를 동정하는 것에 특히 많은 관심을 드러내며, 평화 시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방문해 온 여행자조차 이 점에 대해 거론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전쟁중의 일본군에게는 부상자를 포화 속에서 구출하여 응급치료를 할 수 있도록 훈련된 구조반이 없었다. 또 전선의 임시수용소, 후방의 야전병원, 거기에다 멀리 떨어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요양할 수 있는 대규모의 병원이라는 의료시설이 없었다. 의료품의 보급에 대한 배려는 개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위급한 경우 입원 환자는 다만 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특히 뉴기니아나 필리핀에서, 일본군은 종종 병원의 어떤 지점에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될 궁지에 몰렸다. 또 기회가 아직 있는 동안에도, 부상자를 후송한다는 전례가 없었다. 단지 부대의 소위 ‘계획적 철수’가 행해질 때라든지, 적이 점점 점령해 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어떤 조치가 강구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조치하는 것은 주임 군의관이 퇴거하기 직전에 입원환자를 사살하든가, 아니면 환자 스스로 수류탄으로 자살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부상자에 대한 태도가 그들 동포를 취급하는 방법의 기초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 그들의 미군포로 취급방법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일본인은 포로에 대해서만 아니라 그들 동포에 대해서도 학대하는 죄를 범했다. 전 필리핀 군의감 해롤드 W. 글래틀리(Harold W. Glattly) 대령은 포로로서 3년간 타이완에 억류된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미군포로 쪽이 일본병사들보다 더 좋은 의료조처를 받았다. 포로수용소에 있던 연합국 측의 군의관들은 그들의 포로들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 쪽에는 의사란 한 사람도 없었다. 얼마동안 일본군의 치료를 담당한 유일한 의무요원은 병장이었고, 그 후 그는 상사가 되었다.” 대령이 일본군의관을 본 것은 1년에 한두 번이었다.

 

 

   위 글은 미국인과 일본인들의 사고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계인들을 자기들이 전횡적으로 정해놓은 질서 속으로 분리해서 집어넣으려는 환상 속의 일본인들. 인간성마저 상실한 자기 군인들에 대한 대우. 인간의 생명보다도 천황이라는 ‘인간’을 정점으로 한 황당한 이념의 구현을 위하여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일본인들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식민지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우리가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서에서도 미국, 아니 서구식 인본주의와 일본의 종족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어떤 논리를 구하여 일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연합국이 추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중국대륙에서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찾아간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선생이 쓴 “돌베게”와 “장정”을 보면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원들이 서로 자기주장만 하고, 파벌 만들어서 서로 싸우느라고 정신없었다. 장준하 선생은 그런 상해임시정부의 꼴을 보고 넌더리를 낸다. 김구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힘으로 얻은 독립이 아니니, 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했다.

   김일성이 지휘한 독립군이 벌인 주요 전투 중의 하나인 보천보 전투는 일종의 게릴라전으로 보아야 한다. 보천보 전투의 결과는 서너 명의 일본경찰이 사망한 소규모 항일전투에 불과했다. 홍범도, 김좌진 등의 대일항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국과 미국에 의한 한국해방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군으로 만주와 남양군도, 버마 전선에서 싸운 한국인은 연 3 백만으로 나는 듣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우방국인가, 적국인가? 우방국이면 왜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한국인들을 경계하고 군정을 실시했겠는가?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이 독립을 요구하자 미국은 독립을 허용했다. 승리에 도취한 미국인의 관용만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다음에 정치적 혼란은 끊이지 않는다. 김구를 위시한 많은 정치가들이 암살당하고 독재와 부정부패는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영국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시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다’라고 썼다. 한마디로 한국은 쓰레기통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을 3 단계로 구분했는데 이런 한국적 상황은 두 번째 단계인 반개상태에 해당된다: 둘째 단계, 농업의 도道가 크게 열려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갖추어지고, 집을 짓고 도읍都邑을 세워 그 겉모습은 버젓한 국가一國이지만, 그 내실을 보면 부족한 것이 대단히 많다, 문학이 번창하나 실학實學에 힘쓰는 자가 적고, 인간 교제에서는 시의猜疑ㆍ질투嫉妬하는 마음이 깊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논할 때에는 의문을 발하고 미심쩍은 점을 캐묻는 용기가 없다. 세세한 것을 모방하는 데는 능하지만, 새롭게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부工夫가 부족하며, 옛것을 닦을 줄은 알지만 옛것을 고칠 줄은 모른다. 인간의 교제에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에 압도당해서 규칙의 몸체體를 이루지 못했다. 그것을 가리켜 반개라 한다. 아직 문명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런 반개 상태의 문명에 당시 터키, 아시아, 일본이 속한다고 평가한다.) 이런 한국에서 국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다. 6ㆍ25 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철군하겠다고 위협하여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온 천하에 알려졌다고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는 밝힌다. 여기서 앵글로 색슨 문명에 대한 한 가지 평가를 들어보자:

 

 

예언자인 척 하지 말라는 의무에 대하여 독일 철학자들은 특히 심하게 죄를 지었다. 그들은 우주와 삶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보일 수 있는 예언자로서, 종교개혁자 같은 것으로서 보이기로 기대되었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그렇게 했다. 다른 곳에서 같이 이곳에서, 끊임없는 수요는, 불행히도 공급을 만들어 낸다. 예언자와 지도자는 요구되었다; 예언자와 지도자는 발견되었다. 이 반응이 만든 것은, 특히 독일어로, 거의 믿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이러한 것들은 영국에서 인기가 덜하다. 내가 두 언어의 문학 속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영국을 향한 나의 감탄은 무한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계몽주의가 볼테르의 편지 영국 민족에 관하여와 함께 유럽대륙에 영국의 지적(知的) 합리성을 이전하려는 시도와 함께 시작된 것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 - 영국 지적 환경의 그 삭막함, 그것은 영국의 물리적 환경과 기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이 삭막함, 이 합리성은 자기 동료에 대한 존경이다; 사람은 동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팔려고 하지 않으며 동료에게 아이디어를 강요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독일 영토에서는 상황이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그 곳에서는 모든 지식인이 자기가 세상의 궁극적 비밀 모두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 곳에서는 철학자 뿐 아니라 경제학자, 의사, 특히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또한 종교 설립자가 된다. 이 두 가지 자세, 계몽주의 추종자의 자세와 스스로 지정한 예언자의 자세를 구별하는 특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이다. 계몽주의 추종자는 가능한 한 간단히 말하는 반면: 그는 이해되기를 원한다, 예언은 깊이, 어둡게, 거만스럽게 말한다. 이러한 면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다. 사람이 그와 의견이 일치할 수 없을 때도, 사람은 늘 그를 감탄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늘 분명하고, 간단하고, 강하게 말한다.

 

 

   나는 위 글을 인용하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예언을 마구 퍼부어 대는 인간들이 많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한 예를 들어 21세기는 노자 도덕경과 금강경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 한국이 21세기 아시아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도대체 어떻게 이들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가? 한국 사회는 예언을 용인하는 사회인가, 경제만 발전하면 선진국이 되는가, 야만적인 예언이 횡행하는 국가가 과연 경제가 발전시킬 수 있으며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

   아직도 우리는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용산의 미 8군은 미국이 한반도에 발휘하는 힘의 상징이다. 국방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한국은 역사 이래 이렇게 다른 문명에 심한 의존도를 보였던 적은 없다. 가장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재미동포의 숫자는 다른 국가의 동포 숫자에 비하여 가장 많다.

   우리는 6ㆍ25 한국 전쟁에서 미국 군인들이 양민을 학살한 노근리 사건에 대하여 미국에 항의해야 한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을 보는 미국인들의 관점과 한국인들의 관점은 매우 다르다. 나는 여기에서 서양적 관점과 한국적 관점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한다. 물론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람들은 죄 없는 양민이다. 그러나 그 전에 양민으로 위장한 북한 세력이 미군들을 습격했던 것이다. 양민을 가장한 북한세력이 무방비상태인 미군들에게 접근하여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동소총을 난사하였던 일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비전투원이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적군포로는 석방된다. 포로는 죄가 없다는 서구식 인본주의의 발상 때문이다. 그러나 비전투원이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행위는 미국인들에게 비겁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은 게릴라전을 증오한다.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지적하고자하는 점은 미국이 김구 선생조차도 테러리스트로 본다는 사실이다; 의열단을 뒤에서 지휘한 테러리스트로.

   미국인들은 양민이 갑자기 전투원으로 둔갑하여 자기 동료들을 죽이는 상황을 매우 비겁한 행동으로 보고 분개했다. 그래서 미군 지휘관들이 양민 사살을 명령한 듯 보인다. 두말할 것 없이 이 사건은 충분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할 미군들의 실수이다. 그러나 미군들이 고의적으로 양민 학살을 했는지, 즉 양민인지 알고도 총질을 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이 사건은 당시 총질을 하였던 미군병사의 증언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그 미군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미군의 조직체계를 생각할 때, 왜 미군병사들이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 명령을 내린 상관들은 침묵하고 있다. 직접 명령을 내린 상관의 윗선에서 해명이 없다. 나는 노근리 문제와 관련하여 사살 명령 하달자나, 사살을 결정한 지휘부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에도 미국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가 하나, 둘이겠는가? 우리는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를 철저히 조사해야 하지만 그 조사가 아전인수격으로 행하여져서는 안 된다. 객관적인 정황이 충분히 설명되어야 하며 미국인들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이 충분히 토론되어야 한다.

 

 

9. 맺는말

 

   한국은 미국과 많은 현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안들이 지난 세월 표출되지 않고 그냥 묵인되어왔다는 것은 한국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달라지면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커지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볼 여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국내외 사람들의 글이 과거와 비교하여 큰 저항 없이 한국 내에서 수용된다. 한국인들의 정신이 그만큼 성숙했다고 나는 진단한다.

   우리가 미국인들 포함하여 서구인들 대할 때 그들의 핵심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내가 만난 많은 서구인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충분히 동양사회를 연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한 영국인은 ‘team spirit’은 자기들이 이해하는 현상이지만 ‘group spirit’은 터무니없다는 말을 나에게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만난 미국인 화이트는 한국인 아내와 일생을 보낸 당시 약 54세의 컴퓨터 기술자로 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근무하여 아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 아내가, ‘이제까지 당신을 위하여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며 살았다. 이제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라고 말하자 다니던 회사를 기꺼이 그만두고 아내를 따라 호남지방으로 갔다. 그는 지금 지방의 소도시에서 학원영어강사를 하며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아시아인들은 모두 왕이 되려고 한다.’ 얼마나 매서운 비판인가? 계급사회를 질타하는 말이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지도자와 회담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가 나의 뇌리에 맴돈다. 김정일 위원장이 한반도가 통일된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기대 밖이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은 한반도를 침략한 적이 - 러시아, 중국, 일본과는 반대로 -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북한의 핵개발과 실험 사태에 대하여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경고라는 -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한 중국정부의 원조 중단에 항의하는 경고 - 견해를 내었다.

   나의 글이 서구인들을, 특히 앵글로 색슨 계통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울러 나의 글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기꺼이 참고하겠다; 물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론이어야 하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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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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