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목 차
1.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1)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본성
(2) 용서는 왜 필요한가?
(3)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서 진보는 이룩된다.
(4) 독선성향의 동물학적 및 심리학적 발달
(5) 이성(理性)을 위하여
2. 진리를 알고 있다는 횡설수설
(1) 플라톤,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장광설
(2)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의 허상
(3) 지식인의 책무
(4)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
(5) 장광설과 민주주의
1.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1)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조건 용서하고 살 수는 없다.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돌부처나 무생물이 되라는 의미와 같다.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욕망과 그 욕망이 좌절되면서 발생하는 분노가 없다면 생명도, 에너지도 없는 무의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분노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하여, 무수한 진화 과정에서 우리에게 (덜 진화된 생명체에게도) 생겨난 감정이다. 다른 생명체가, 우리의 지리적, 또는 심리적 영역에 침범하거나, 우리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억누르려 할 때마다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분노는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마음을 불러온다.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짓밟혀서 마침내는 뭉개지고, 끝장이 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말인 ‘온유한 자가 세상을 계승하리라 (The meek shall inherit the world)’에 대하여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온유하면 나는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겠다.’고 말을 비꼰다. 나는 예수의 이 말을 ‘부드러운 사람이 오래 산다.’ 정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관찰은 예수의 경험적 서술에서도 보인다: ‘내가 돌아왔을 때 완악한 자들은 어디 있더냐?’ 부드럽게 살라는 이 명제는 도덕경(道德經)에도 여러 차례 보인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근육과 뼈가 굳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으로 몸과 정신을 부드럽게 푼다. 부드러운 삶이 바람직한 이유는 건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Scott Peck)은 주장한다. 그러나 부드럽게 살라는 명제는 부처님처럼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맹자의 주장처럼 선하지도 않고 순자의 주장처럼 악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악행도 저지르고, 공동생활을 위하여 자선도 베푸는 매우 복잡한 심리 상태를 가진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본성을 설명하여 프랑스 사회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는 인간 흉포함의 상상을 초월하여 잔인하지만, 평화시에는 부드럽고 관대한 인디언은 밤에 자기 오두막에 들어가기를 청하는 나그네를 돕기 위하여 굶주림을 참는다; 그러나 그 인디언은 손으로 아직 떨고 있는 자기 포로의 사지를 찢을 수 있다.
그리고 알렉시 드 토크빌과 칼 포퍼, 공자(孔子),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보통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여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강하고 명예롭게 되기를 원하도록 자극하는 평등에 관한 남자답고 합당한 열정이 있다. 이 열정은 비천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의 반열로 높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슴에는 평등에 대한 타락한 취향도 있어서 그 타락한 취향은 약한 자로 하여금 강한 사람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도록 강요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불평등보다 노예상태의 평등을 선호하도록 만든다.
내가 사람을 신뢰한다고 말하면, 내 뜻은 사람 그대로를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전적으로 이성적이라고 말할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지 그 반대 경우인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방법은 없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하늘보다 알기가 어렵다.”
인간성 중에서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불규칙성이었다. 나는 완전히 일관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가장 상반되는 특성이 한 사람에게 존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성격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는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어떻게 겉보기에 반대되는 특성이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가끔 의아해한다. 나는 자기들 희생할 줄 아는 범죄자와, 다정한 성격의 도둑들, 돈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창녀를 알고 있다. 내가 인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설명은, 인간의 신념이란 매우 본능적이어서 사람은 모두 독특하다는 것이다. 또 사람은 자기의 신념을 특별하게 여겨서,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고, 부자연스럽고, 옳지 못하다 할지라도 자기 행동은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서운 야수다. 우리는 이 야수를 문명이라고 부르는 길들인 상태에서만 알고 그러므로 이 야수의 진짜 성질이 가끔 터져 나올 때 충격을 받는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탄생한 이래 계속되어온 전쟁은 그 원인이 생존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생존을 위한 식량 쟁탈전이었다고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말한다. 생존을 위한 식량 쟁탈전으로 시작된 인류의 전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이념전쟁으로 변한다. 따라서 장자(莊子)에 기술(記述)된 ‘의(義)를 위해 전쟁을 그만둔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와 같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사랑만 실행하는 성자(聖者)는 드물며, 심지어 인도의 성자(聖者)로 추앙받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투사였다는 주장이 출현한다:
우리는 난폭한 싸움을 피하거나 적어도 억제하려고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기를 원하고, 실제로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 없는 사회란 비인간적이다. 그런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고 개미무리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가장 위대한 평화주의자는 가장 위대한 투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도 투사였다: 비폭력을 위한 투사.
(2) 용서는 왜 필요한가?
그러면 용서란 왜 필요한가? 볼테르의 말처럼 우리 모두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며,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은 불완전하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볼테르는 인간은 누구나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이란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때문에 서로 인내하고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용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오류성을 깨달은 필수적 결과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성이고 우리는 늘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 이것이 천부적 권리의 제일 중요한 원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형태의 부르기는 님이 아니고 동료로 고통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무리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그것은 상황의 본질과 일치하며,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이해로 다른 사람을 보게 만들고 모든 것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관용, 인내, 절제, 그리고 자비,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각자가 필요하고 우리 각자가 그러므로 빚지고 있다.
인간의 실수는 고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생 동안 계속된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아직 발견된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능력이 없고 다만, 진리근사치를 발견하는 능력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우리 모두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혼자 도덕적인 체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실수에 대하여 비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간다. 즉,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서머셋 모옴이 관찰한 내용인 ‘또 사람은 자기의 신념을 특별하게 여겨서,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고, 부자연스럽고, 옳지 못하다 할지라도 자기 행동은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와 같이, 자기 생각에 빠진 ‘이념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나 ‘감정적인 동물’로 규정하는 것보다 ‘이념적인 동물’ 즉, 자신의 이념에 따라서 행동하는 동물로 설명함이 옳다는 다음 견해를 주시한다:
인간의 지성사(知性史)에는 흥미로운 면뿐만 아니라 우울한 면도 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지성사를, 악착같이 움켜쥐고 자주 고집과 광신(狂信)으로 결합된, 편견과 독단의 역사로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의 지성사를 종교나 종교와 유사한 광기에 취한 역사로서 묘사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경험한 파괴적인 커다란 전쟁의 대부분은 종교적이거나 이념적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되어야 한다. 아마도, 종교적 관용의 전형이었던 듯한 징기스칸의 전쟁이라는 두드러진 예외와 함께. 그러나 심지어 종교전쟁의 슬프고 우울한 모습에도, 보다 밝은 면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믿음을 위하여, 자기들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아이디어를 위하여, 살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인 동물로 보인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실수, 다시 말해서 사기성이 있는 실수는 이조 말 유학자 동무 이제마의 말로서 다시 증명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천 갈래 만 갈래 사기 칠 궁리만 해왔다. 그런데 사기 칠 때마다 낭패가 되었고 더욱 곤욕스럽고 더욱 비굴해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성(誠: 진실)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고 자경(自警)케 되었다. 자경이라 함은 내 몸을 돌이켜 성으로 돌아간다 함이나 그래도 사기 치고픈 마음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기를 반복할 때마다 더욱 잃는 것이 큼으로 결국 자경에 이르게 되는 것뿐이다. 지금 내 나이 쉰일곱이지만 아직도 사기 칠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자경케 되니, 진실로 이 사기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기 칠 마음을 품고 사기를 치는 것, 그것은 진짜 사기이다. 사기 칠 마음이 생기는데도 사기 치는데 까지 이르지 않고 성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곧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길이란 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맹자가 말하는 구기방심(求其放心)인 것이다. 구기방심이란 흩어지는 마음을 모은다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마음에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고 재화를 탐하고 권세를 탐하는 경향이 누구에게든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 중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지독한 욕심이 어느 한 방향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사기를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착 달라붙는 지독한 놈을 잘 극복하면 그 나머지 덤덤한 욕심들은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극복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곧 공자가 말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하는 것을 일컬음이다. 극기복례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동무 이제마의 말은 한 노인으로서 인생을 돌아보며 쓴 자성적(自省的)인 글로서 우선 그 솔직함이 두드러진다. 나이 쉰일곱에도 어쩔 수 없는 사기 치려는 마음을 고백(告白)한다는 것은 소위 예(禮)라는 유교적 형식주의, 즉 겉치레가 횡행하는 조선사회에서 상당한 손가락질을 감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제마가 여기서 말하는 예(禮)란 타인에 대한 성실(誠實)한 마음, 즉 거짓 없는 마음을 뜻한다. 이제마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심(詐心)은 나이를 먹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사기 치려는 마음, 즉 사심(詐心)은 왜 생기는 것일까? 칼 포퍼와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은 문명(文明)과 생활(生活)이 주는 스트레스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 이 사심(詐心)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살아가노라면 우리에게는 의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의무이자 책임인지도 모른다. 간혹 찾아오는 삶에 대한 당혹감과 의문점들이 우리들을 살고자 하는 맹목적(盲目的) 충동으로 몰아가고, 우리는 정당한 목적을 잃은 삶 속에서 사기를 치게 된다. 니체는 망상과 꿈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사기를 치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을 보존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지능은 모방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보인다; 그 이유는 이것이 더 약하고, 덜 강한 개인들이 자신들을 보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이 모방 기술은 최고점에 다다른다: 여기에 기만, 아첨, 거짓말과 속임수, 등 뒤에서 말하기, 폼 잡기, 빌려온 위엄 속에서 살기, 가면 쓰기, 전통의 가장(假裝), 남들과 자기 앞에서 연극하기 - 요컨대 단 하나의 허영 빛 주의를 끝없이 퍼덕거리는 것이 그리도 규칙이고 법률이어서 진리를 향한 솔직하고 순수한 충동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출현할까 보다 더 이해 불가능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깊이 망상과 꿈의 상(象)에 몰입해 있다; 그들의 눈은 단지 사물의 표면 위를 훑고 "형태"를 본다; 그들의 느낌은 어디에서도 진리 속으로 향하지 않고, 말하자면, 사물의 등에서 술래잡기 게임을 하면서,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만족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 안에서 용서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용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원칙을 무제한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무제한으로 그 원칙을 수용하면,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의견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그냥 밀고 나가는 독재자이다. 독재자는 강한 사람이다. 강한 인간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이다. 고집은 자신만을 위한 독선적 신념이다. 니체는 ‘강한 것이 이긴다: 그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보다 약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진보를 가능케 만드는 것은 정확히 보다 약한 성질이다’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이 두 가지 말을 연결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타락하는 사람들은 진보가 일어날 예정인 어느 곳에서나 가장 높은 중요성을 지닌다; 모든 위대한 진보는 부분적 쇠락(衰落)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성질들은 그 종(種)에 단단히 붙어있고; 보다 약한 성질들은 그 종을 더욱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3)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서 진보는 이룩된다.
신화(神話), 특히 민족의 기원을 기술(記述)하는 신화는 영웅의 탄생을 알린다. 신화 속의 영웅은 특정 민족의 시조로 추앙되고 그 영웅이 이룩한 영웅적 업적은 사람들의 염두에 오랫동안 남는다. 그 민족적 영웅은 주로 전쟁과 정복을 통하여 민족의 보존과 영광을 성취한다. 따라서 당연히 민족의 영웅 신화에는 경쟁, 즉 전쟁에서의 승리가 관건이다. 아테네의 헤라클리투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전쟁이 찬미의 대상이고 전쟁의 결과가 항상 정의롭다면, 전쟁의 속성이 파괴와 살인이므로 인간의 문명이 존재할 수 없고, 인류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 찬양과 영웅 숭배는 원시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는 것이지 문명세계에서는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명은 전쟁과 영웅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력과 소시민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이라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아마도 인간에게는 영웅적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니체에 의하여 그렇게 인간에게 무감각하고 냉혹하게 묘사되는 자연은 우리 인간이 감히 정복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나약한 태도를 보인다면,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이라는 다윈(Darwin)의 이론에 의하여 인간은 자연에 순종하거나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여 자연에 의하여 ‘선택을 당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문명에서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자연에 대하여 수동적인 동물들처럼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급급하고 때로는 자연재해에 의하여 멸종당하기도 하는 동물의 한 종(種)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과는 반대로 아마도 ‘인간선택’으로 불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성을 강조할, 다시 말해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자연을 개척하고 정복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이론을 채택하여야 한다. 그런 이론은 이렇게 사실(史實)을 인용하며 전개된다:
다윈의 주장은 보통 잔인한 이론으로 간주된다: 다윈의 이론은 ‘피 묻은 이빨과 발톱의 자연’을 묘사한다. 즉, 자연이 우리와 모든 생명체에게 무서운 위협을 가하는 설명 말이다. 그러나 그 설명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넓히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다윈의 견해를 부정할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태초의 세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태초의 세포이다. 세포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첫째는 죽음이요, 둘째는 세포분열이며, 셋째는 세포결합, 즉 다른 세포와의 연합인데 항상 세포분열로 이어진다. 분열이나 결합은 죽음이 아니다. 그것들은 번식이며, 살아있는 한 세포가 똑 같은 세포 둘로 변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현재도 생존해 있는 모든 생명체는 태초의 세포가 분열한 결과이다. '이빨과 발톱'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자연 대신에, 나는 한 작은 생명체가 수십 억 년 동안 살아오면서 세계를 정복하고 개선하는데 성공한 일을 본다. 그러므로 생명체와 환경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면 생명체가 승리했다. 그러나 누가 그 사실을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온 세상과 '사회'가 사악하다는 신화를 믿는다. 마치 과거에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들이 하이데거와 히틀러, 그리고 전쟁을 믿었듯이.
(4) 독선성향의 동물학적 및 심리학적 발달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독재자를 당연히 추방하는 제도가 고대 아테네의 도편추방제도이다. 지식이 많다는 이유로, 국가에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기타 어떤 이유로도 독재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재나 독선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가진 속성 중의 하나이다.
우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닌 동물이라는 사실과, 동물적 생존이 위협받는 어린 시절에 부모들의 보호에 의하여 독선성향이 커진다. 태어난 아기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사는 아이의 정신적 발달보다는 건강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얼마간의 독선이 허용된다. 어린 시절의 독선이 형성되는 과정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저술가인 스콧 펙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기가 자기 팔과 다리를 움직일 때, 세계가 돈다. 아기가 배가 고프면, 세계가 배고프다. 아기가 자기 엄마가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아기가 움직이는 것 같다. 자기 엄마가 노래를 부르면, 아기는 자신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아기는 아기침대, 방과 자기 부모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없다. 생명체와 무생물이 똑 같다. 나와 당신 사이에는 아직 구별이 없다. 아기와 세계는 하나다. 경계선과 구분이 없다. 정체가 없다. 그러나 경험으로 아이는 자신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 말하자면, 세상의 나머지와 분리된 존재로서. 아이가 배고프면, 엄마는 늘 먹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가 장난을 치면, 엄마는 늘 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그 경우에 자기 엄마의 명령이 아닌 자기 소망의 경험을 한다. 아이의 의지는 자기 엄마의 행동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경험된다. “나”에 대한 느낌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아기와 엄마 사이의 이 상호관계는 아이의 정체감이 자라기 시작하는 토대로 믿어진다. 아기와 엄마 사이의 상호작용이 완전히 방해를 받으면 - 예를 들어 엄마가 없거나, 만족스러운 엄마를 대신하는 사람이 없거나 엄마 자신의 정신적 질환 때문에 엄마가 완전히 돌보지 않거나 흥미가 없을 때 - 그 때에 아기는 정체감이 가장 기본적 방식에서 완전히 결함이 있는 아이나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아기가 자기 자신이지 우주의 의지가 되지 않겠다는 자기 의지를 인식할 때, 아기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 다른 구별을 하기 시작한다. 아기가 움직임을 의도하면, 그 팔은 자기 눈앞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아기침대나 천장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기 팔과 자기 의지는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자기 팔이 자기 것이고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이런 방식으로, 인생의 최초 5 년 동안,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누가 아닌지,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원칙을 배운다. 우리의 최초 1년 말 경에는 우리는 이것이 내 팔, 내 다리, 내 머리, 내 혀, 내 눈, 그리고 심지어 내 관점, 내 목소리, 내 사고, 내 배앓이, 그리고 나의 느낌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크기와 육체적 한계를 안다. 이 한계는 우리의 경계선이다. 우리 생각 내부에 있는 이 한계들의 지식은 자아경계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이다. 자아경계의 발달은 어린 시절을 통하여 청년기와 심지어 어른시기로 계속되는 과정이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경계는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이다. 예를 들어, 두 살과 세 살 사이의 나이는 대표적으로 아이가 자기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때이다. 이 때 전에는 아이가 자기 소망이 반드시 자기 엄마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라도, 아이는 여전히 자기 소망이 엄마의 명령일 것이라는 가능성과 자기의 소망이 엄마의 명령이어야 한다는 느낌에 매달린다. 두 살배기가 보통 자기 부모, 형제와 가족 애완동물에게 마치 그것들이 자기 자신의 개인 군대의 부하인양 독재자와 전재자처럼 행동하려 하고, 그것들이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할 때 왕의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이 희망과 느낌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이 나이를 “미운 두 살”이라고 말한다.
(5) 이성(理性)을 위하여
그러나 부모는 언젠가는 아이들 곁을 떠나고, 아이들도 분가(分家)하여 자기들만의 삶을 꾸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권력이나 재산에 집착하기보다는 이성과 영혼의 발전을 이룩해야 하는 인간의 길이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여러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여러분을 욕망과 소망 덩어리 이상이 되게 하는 것; 여러분을 자주적인 개인으로 만들고, 여러분 자신이 목적이라고 주장하도록 자격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이성(理性)이다’라고 주장하며, 칸트는 ‘이러한 완성을 위하여 애쓰는 것이, 그러나 (일생 동안에) 그 완성에 도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그리고 이 의무에 따르는 것은 그러므로 단지 계속적인 진보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완전한 이성이나 완숙한 영혼을 가지기는 무엇보다도 어렵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표현하는 것일 옳다. 그래서 스콧 펙은 ‘죽을 때까지 세상과 진리에 대한 이해를 확충하고 재해석해가면서 현실의 신비를 계속 연구하는 사람은 소수이다’라고 말하고, 니체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경우에 위안이 온다: 그런 고통은 산고(産苦)이다. 나비는 고치로부터 나가기를 원한다, 고치를 찢고, 부셔서 연다: 그리고 나서 나비는 자유의 영역인 낯선 빛에 의하여 눈이 보이지 않고 당황한다. 인류가 자신을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최초의 시도가 행하여지는 것은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서 이다 - 그런 사람은 얼마나 적은가!’라고 탄식한다.
쇼펜하우어의 주장대로 이 세상의 인간이 모두 불완전하고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하고, 니체의 주장대로 인간은 사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인간에 대한 전면전을 포기하고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용서만으로는 독재자는 생겨나기 마련이어서 사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법이 존재한다. 서로의 사이와 행위를 규제하는 법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홉스(Hobbes)의 주장, ‘같은 벌집 속의 벌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벌들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없다; 그리고 벌들은 정부를 비판하는데 이성을 쓰지 않는다. 벌들의 합의는 자연스럽지만 인간의 합의는 약속에 의하여 인위적일 뿐이다’처럼 인간은 합의에 의하여 법을 만든다.
중세의 종교개혁은 사회에서 가장 성스럽다는 성직자들의 부패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버트런드 러셀은 성직자들의 부패를 이렇게 설명하며, 니체는 인간이 가진 적은 이성(理性)이나마 종교에 모두 던져버리는 행위를 경계한다:
많은 유명한 기독교 성직자들은,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고 다른 쾌락들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 집착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권력 집착은 성직자들을 허울 좋은 종교를 위하여 지독한 잔인과 박해로 몰고 갔다.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은 이 소용돌이가 이성적(理性的)이며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서있다. 오류(誤謬)! 우리가 아는 유일한 이성적인 것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적은 이성(理性)을 많이 써야하며 사람이 자신을, 가령, '섭리'에게 버릴 때, 상황은 늘 파멸적이다.
2. 진리를 알고 있다는 횡설수설
(1) 플라톤,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장광설
둘째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소위 심오한 지식을 가진 양 온갖 큰소리를 치는 자들이다. 역사적으로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을 시작으로 헤겔의 역사철학,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따위가 대표적인 큰소리이다. 플라톤은 당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이후 가장 현명한 자로 손꼽히던 자이고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아테네 시민들이 민주혁명의 기치를 들자 플라톤이 한 말이 ‘철인왕(哲人王: philosopher king)’이다. 즉,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칼 포퍼는 폭로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대륙의 귀족들이 전전긍긍할 때 프러시아의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3세의 어용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아부하던 헤겔이 내놓은 것이 정-반-합이라는 역사철학이다. 이 헤겔이 주장하는 역사철학의 핵심적인 의미는 역사란 정(正: thesis)이 나타나면, 그에 반대하는 반(反: antithesis)이 나타나고 그 둘이 합(synthesis)을 이루어 발전해 나간다는 뜻이다. 칼 포퍼는 20 - 20 = 40?라고 물으며 헤겔의 이론을 반박한다. 그러나 이 헤겔의 주장은 많은 지식인의 머리를 마비시켜, 한 번 헤겔주의자가 되면 영원히 헤겔주의자가 된다는 (Once a Hegelian, always a Hegelian) 무서운 이성마비를 낳는다. 지금도 ‘한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이다’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헤겔을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비판한다:
헤겔은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독일 문학에서 파멸적인,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해서, 기가 막히고 흑사병 같은 영향을 끼쳤다. 이 영향과 강력하게 기회마다 싸우는 일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침묵한다면, 누가 말하겠는가?
그 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언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이 세상에서 몰락한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최근의 역사이다. 이런 사이비 지식인들은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하여 엉터리없는 이론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죽인다. 이런 지식인들이 주로 하는 말이 위대한 민족이니, 역사적 사건이니, 세계 최고의 무엇이니,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하면서 떠드는 장광설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이 진리를 알고 있어서 민족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세상의 최고 가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회에서 만연하는 ‘목소리 큰 자들’은 바로 모든 국민이 경계해야 할 지식인들이다. 이 지식인들의 특징은 항상 민족과 민주주의를 들고 나오지만 자세히 보면 큰소리 뒤에는 음험한 자기 이익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이들이 노리는 것은 권력자에게 잘 보여 한 자리 하자는 수작 아니면, 큰 소리로 협박과 감언이설을 동시에 사용하여 권력을 쥐거나 이익을 보자는 속셈이다. 노(魯)나라의 원헌(原憲)과 칼 포퍼도 이런 자들을 성토한다:
대저 세상(世上)의 평판(評判)이 좋기를 바라면서 행동하고 작당(作黨)하여 벗이 되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학문을 하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의 이익(利益)을 좇으며 인의(仁義)를 내건 채 나쁜 짓을 일삼고 수레나 말을 장식하는 일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우리가 지적(知的) 정직함을 이룩하려고 열심히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비극에 대하여 우리, 지식인들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가장 고집스러운 반[反] 지성주의가 아마도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미지의 미래로 향하는 길에서, 인류를 도울 생각도 없고, 도울 능력도 없는 ‘지식인들’ 몇몇은 인류를 과거로 몰아가려고 획책했다. 새로운 길을 열 수가 없어서, 그 지식인들은 자유를 뒤엎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고취하는, 간단하고도 평범한 인자함을 버렸으며,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 혐오가와 토론 혐오가였기 때문에, 평등에 반기를 들고 자기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이 더 필요했다.
(2)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의 허상
무슨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방이 이해 가능하도록 명확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심오한 지식이란 그 지식을 지닌 사람 자신도 잘 모르고 떠드는 경우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표현의 애매모호함은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매우 나쁜 징조이다: 그 이유는 십중팔구는 그 애매모호함이 불투명한 사고에서 나오고, 그 불투명한 사고는 자체의 원래 부조화, 즉 거짓된 사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고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 사고는 즉각 명료함을 찾게 되고 명료해진다; 그리고 분명하게 생각한 것은 그에 알맞은 표현을 쉽게 발견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고는 늘 명확하고, 이해 가능하며 분명한 말로 표현된다. 어렵고, 모호하고, 복잡하고, 애매한 대화를 엮어 가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실제로 모른다: 그들은 사고를 향하여 몸부림치고 있을 뿐인 것에 대한 희미한 의식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 그러나, 흔히 그들은 자기들이 실제로 말할 게 없다는 것을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기를 또한 원한다.
이들의 음험한 속셈을 경계하고 지적하는 일이 민주시민의 임무이다. 민주시민으로서 그런 의지와 지식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오지 않는다. 이런 사이비 지식인들과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내가 여러 사람들 보다 더 현명하다고 알려진다면, 그것은 이것에서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 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자신은 아는 게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테네 철학자들이 델피의 신전에 가서 온 그리스에서 누가 가장 현명하냐고 물었더니 신탁의 대답이 소크라테스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현명하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항상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배울수록 점점 더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이 가진 지식의 99%가 후천적(귀납적) 지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칸트의 주장은 우리는 1%의 선천적(연역적)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서 99%의 지식을 후천적(귀납적)으로 배우면서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칼 포퍼는 이 설명을 거꾸로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99%의 선천적(연역적)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서 1%의 후천적(귀납적) 지식을 얻게 된다고 칼 포퍼는 주장한다. 물론, 1%의 귀납적 지식은 심한 비판을 거쳐서 과학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지만 인간이 1%의 귀납적 지식을 개발한다는 것도 무엇보다도 어렵다.
그 어려움의 증거가 과학적 발견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책을 읽고, 연구를 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하여도 겨우 1%의 귀납적 지식에 도달한 단계이며, 앞으로 혹독하다 싶을 정도의 비판과 실험이 남아있다. 그리고 설사 1%의 귀납적 지식이 비판과 실험을 거쳐서 실증되었다 하여도 역시 인간의 상상일 뿐 진리는 아니다. 즉, 언제라도 반증될 가능성을 지닌 가설을 벗어날 수가 없다:
두 번째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그렇게 많이 안다는 것에 반대하는 데 첨가되어야 하는데, 이렇다: 거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 업적과 동시에, 과학적 문제에 대한 모든 가설적 해결과 동시에, 미해결 문제의 숫자와 그 미해결 문제의 난이도가 늘어난다. 실제로, 그 미해결 문제는 해결책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 우리의 가설에 의한 지식이 유한한 반면, 우리의 무지(無知)는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다: 미해결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진정한 과학자에게는, 세상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에서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칸트보다 훨씬 더 나아가겠다. 나는 가령 모든 생명체의 지식 99%가 선천적이며 우리의 생화학적 몸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칸트에 의하여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후천적(귀납적)이고 "자료"라고 생각된 99%의 지식이 실제로 후천적(귀납적)이 아니고 선천적(연역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감각은 우리 질문에 대하여 (칸트 자신이 보았듯이) 단지 긍정과 부정의 대답으로만 우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천적(연역적)으로 상상하고 묻는 질문과 때로는 매우 정교한 질문들. 게다가, 심지어 감각으로 하는 긍정과 부정의 대답도 우리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 우리가 선천적(연역적)으로 미리 상상한 개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그 대답들은 자주 잘못 해석된다.
지식 및 감정과 함께 하는, 사람의 눈과 감각을 강한 안개 속에 감싸는 건방짐은, 그러므로 특성상 지식 그 자체를 가장 아부하는 평가를 지님으로써 존재의 가치에 대하여 인간을 기만한다. 지식의 가장 보편적인 효과는 기만이다; 그러나 지식의 가장 특수한 효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이제 우리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도덕경에 나오는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과 ‘모르면서 안다고 하면 병(病)’이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3) 지식인의 책무
소크라테스의 솔직함을 ‘지적 정직(知的 正直: intellectual honesty)’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 전체를 통하여 가장 현명했던 지식인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모든 지식인들이 본받아야 하는 전형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정치가들이란 현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얼마나 조금 알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플라톤은 현명한 자, 박식한 철학자가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플라톤 이후 항상, 과대망상증이 철학자들에게 가장 널리 퍼진 직업병이었다.) 게다가, 법률 10권에서 플라톤은 종교재판을 고무했던 제도를 발명하고 반대자들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한 집단 수용소를 권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칼 포퍼는 말한다.
플라톤의 생각과 히틀러, 스탈린의 생각은 별로 차이가 없다. 미래를 예언하는 많은 철학자들은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는 ‘직업병’ 환자가 아닌가? 점쟁이나 예언가는 돌팔이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언을 찰스 핸디와 칼 포퍼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예언자들이란,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아무도 미래를 예언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예언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이 진실을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성 예언이 사실이 될지 아닐지는 방법의 문제도 아니고 지혜나 직관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우연의 문제이다. 이 예언은 자의적이고, 우연하며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그 예언들 중 어느 것이나 강력한 선전 효과를 거둘 것이다.
역사주의 발달을 추적하면서, 나는, 우리 지적(知的) 지도자들 중에 매우 널리 퍼져있는, 역사적 예언이라는 위험한 버릇이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창시자(創始者) 무리 내부에 속하여서 역사의 과정을 예언하는 특별한 힘을 소유한다는 것은 늘 매력적이다. 게다가, 지적 지도자들이란 그런 능력으로 재능이 있고 그런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존경받는 사회신분을 상실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때때로 역사주의적 믿음을 가지는 심하고 아마도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천년 왕국의 도래를 예언하는 예언가들은 깊이 자리한 불만감을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그 꿈 없이는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정말로 줄 것이다.
지구상에서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천국이 실현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은, 천국을 결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은 고귀한 것이라는 칼 포퍼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도덕경은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많은 지혜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위험한 구절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 (나는 도덕경이 결국은 통치자를 위한 통치철학서라고 생각한다). 위험한 구절은 예를 들어 도덕경 5 장에 있는 ‘성인(聖人)도 편애하지 않는다(또는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취급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성경에 있는 ‘창자에 냄새나는 것을 가진 인간들’이라는 부분과 상통하는 말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칼 포퍼는 ‘하느님이 사람을 닮았을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을 닮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편애하지 않고 (또는 인자하지 않고) 백성을 제사용 풀 강아지로 취급할 수 있는 성인(聖人)’은 누구인가?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취급하여 마구 대하고 심지어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히틀러인가, 모택동인가, 징기스칸인가, 나폴레옹인가, 자칭 ‘우주의 보물’인 한국인인가? 칸트는 이 문제를 ‘항상 모든 사람을 그 자제로 목적으로 여기고 그를 당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 말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면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사회를 위하여 하여야 하는 모범적인 태도는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장광설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왔다면, 올바른 지식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모든 지식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책임이 있다. 지식인에게는 공부를 할 특권과 기회가 있다. 그 보상으로 지식인은 자기가 공부한 결과를 가능한 한 간단하고, 명확하고, 겸손하게 자기 동료 인간(이나 ‘사회에’) 제시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 가장 무거운 죄악 - 동료 인간들에게 맞대고 자기를 위대한 예언자로 내세우고 그들을 현혹하는 철학으로 겁주려고 시도하는 짓이다.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말을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공부해야 한다.
가능한 한 간단하고 분명히, 그리고 겸손하게 말하는 법을 최대한으로 항상 배우고, 너무 심오하여 분명하고 간단히 표현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질병처럼 피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믿기에, 과학자들의 가장 중대하고도 시급한 사회적 의무 중의 하나다. 아마도 가장 큰 책임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의무가 열린사회 및 민주주의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칼 포퍼는 이 글에서 ‘가능한 한 간단하고 분명히, 그리고 겸손하게 말하는 법을 최대한으로 항상 배우고, 너무 심오하여 분명하고 간단히 표현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질병처럼 피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이 의무가 열린사회 및 민주주의의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4)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한히 변화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달려간다. 이 변화를 예언하고자 고대 사람들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동양에서는 주역이라는 미신이 판치고, 서양에서는 예언자가 판치지만 그들의 예언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 변화의 문제를 아테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제기한 이래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된다. ‘헤라클리투스는 어느 곳에서 모든 것은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아무 것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리고 현존하는 것들을 강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당신은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창조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세상은 변하는데 인간은 변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영원히 자기들의 특권을 누리고 살고 싶어 한다. 기득권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세상을 비난하고, 자기의 운명을 저주한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에 매달려 산다. 인간은 자기는 변하지 않고 세상보고 변하라고 외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 그 결과는 정신병이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이나마 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이 정신병이 심각한 경우와 약한 경우는 구별되며,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신병을 고칠 수 있다.
도덕경에는 배우는 길은 매일 쌓아 가는 것이고 도(道)의 길은 매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경의 이 말은 인간이 원숙해져 가면서 보다 큰 배움을 길을 가고, 그러므로 지금까지 배웠던 잡다한 이야기를 잊으라는 의미이다. 또 영원한 진리는 인간으로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론은 항상 임시적이며 더 나은 이론에 의하여 갈음된다는 칼 포퍼 경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늙어 가면서 인간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우리는 고집스럽게 움켜쥐었던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고 내일은 또 다른 세상이 밝아 온다. 이 고집의 문제, 정신병의 문제를 변하는 세상을 그리는 지도에 비교하며, 스콧 펙은 정확하게 진단하고 칼 포퍼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과학자가 지니고자 노력한다고 확보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들이 서로 비판함으로써 확보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지도는 작고 세밀하지 못하다, 그들의 세계관은 좁고 잘못되어 있다. 중년 말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력을 포기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가 완전하고 세계관은 옳다고 (실제로, 심지어 성스럽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정보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마치 그들은 지친 것 같다... 그러나 지도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움 없이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지도가 정확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지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끊임없이 변한다. 빙산이 오고, 빙산이 간다. 문화가 오고, 문화가 간다. 너무 기술이 적다, 너무 기술이 많다. 훨씬 더 극적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부단히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리가 아이들이었을 때, 우리는 의존하고, 무력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강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병이 들거나 늙어 약한 나이에는 우리는 다시 무력하고 의존하게 된다. 우리에게 돌보는 아이들이 있을 때, 세상은 아이들이 없을 때와는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아기를 기를 때, 세상은 청소년을 기를 때와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가난할 때, 세상은 부유할 때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매일 현실의 본질에 대하여 새로운 정보로 공격을 받는다. 우리가 이 정보를 흡수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지도를 수정해야 하고, 때로는 충분한 새 정보가 축적되었을 때 매우 중요한 수정을 해야 한다. 수정을 하는 과정은, 특히 중요한 수정은, 고통스럽다, 때때로 매우 심하게 고통스럽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인류 질병의 근원이 놓여 있다. 사람이 겉으로는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지도, 효과 있는 세계관을 개발하기 위하여 오래,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그리고 나서 그 관점이 틀렸고 그 지도가 주로 다시 그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하는 새로운 정보와 직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필요한 고통스러운 노력은 충격적이고 거의 압도적이다. 매우 흔히, 그리고 보통 의식적으로 우리가 하는 짓는, 새로운 정보를 무시하는 것이다. 자주 이 무시하는 행동은 수동적이 훨씬 넘는다. 우리는 새로운 정보가 거짓이고, 위험하고, 이단적이고, 악마의 작품으로 비난한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며, 심지어 그 정보를 우리의 현실관에 맞추기 위하여 세상을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지도를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은 새로운 현실을 파괴하려고 노력할는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그러한 사람은 우선 낡은 세계관을 수정하고 고치는데 필요했을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결국 낡은 세계관을 방어하는데 쓸 것이다. 우리의 국가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들을 형성했던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가졌던 인간들이다. 무슨 지도를 히틀러는 따랐으며, 그 지도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미국의 지도자들은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하고, 유지하는데 어떤 지도를 따랐는가? 분명히 그것은 그들의 세대를 이어 받았던 세대의 지도와는 매우 다른 지도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객관성은 과학과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가 ‘객관적’이 되려는 노력에서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으며 많은 과학자들의 다정하면서도 적대적인 협력에 의하여 생긴다는 사실과 함께,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인 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 장광설과 민주주의
장광설은 민주주의의 적(敵)이다. 장광설은 늘 폭력과 살인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다. 이성이 무시되는 사회, 비판이 없는 사회는 항상 큰소리치는 자들이 활개를 치며 특권을 누린다. 민주주의는 특권의 가지려는 자들의 세상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링컨의 주장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아니다. 공산주의 정권도 링컨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한다. 민주주의는 특권을 가진 자가 없고, 정당한 법의 지배가 유지되는 세상이다.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연설이다:
법은 그들의 개인적인 분쟁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동등한 정의를 부여하지만, 우리는 우수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한 시민이 탁월하면,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탁월함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요구받으며; 가난은 문제되지 않는다...우리는 국가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을, 무해(無害)한 게 아니고 쓸모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몇몇 사람만이 정책을 입안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토론을 정치적인 행동 과정에서 장애물로서 여기지 않고 현명하게 행동하는데 대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여긴다... 우리는 행복이란 자유와 용기의 결과임을 믿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페리클레스의 연설에서 독특한 것은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탁월함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요구받으며’라는 부분과 ‘몇몇 사람만이 정책을 입안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라는 구절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은 특권을 받는 게 아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만이 정책을 입안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비판적 토론이다. 이 자유로운 토론이 바로 민주주의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따라서 아테네인들은 전쟁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토론을 통하여 얼마든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협력에 의하여 발달하여 왔다. 인간이 건설한 문명은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비판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소수의 인간들이 마구 휘둘러댄 혀와 칼은 문명을 거부하는, 문명을 파괴하는 반문명적인 인간의 발악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준비가 늘 되어 있어야 한다. 알 수없는 큰 소리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비판해야 한다. 헤겔을 비판했던 쇼펜하우어의 주장대로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말하겠는가?’ 만약 우리가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에 다가올 암울한 세상에서 신음할 뿐이며, 못난 조상이라는 비난을 후세로부터 면치 못할 것이다. 칼 포퍼의 주장대로:
위대한 사람들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 과거의 위대한 지도자 중 몇 명은 자유와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을 지지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거의 도전 받은 바가 없고, 문명을 방어하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오도하고 분열시킨다. 우리가 우리 지적 유산의 일부로 인정되는 일부를 솔직하게 비판하는데 주저한다면, 이 비극적이고 아마도 치명적인 분열의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다. 우리가 그 지적 유산의 부분을 비판하는데 주저함으로써, 우리는 지적 유산 전부를 파괴하는데 일조를 할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문명을 허황한 주장으로 현혹하거나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용해서도 안 된다.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대로 ‘위대한 인간을 칭찬하는 일은 항상 옳았지만, 이해하는 일은 항상 잘못되었고, 그것이 위대한 인물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역사에서도 위대한 인물을 찾아 헤매고 그의 말을 신봉하는 태도를 우리가 가진다면, 우리는 이성(理性)을 포기하고, 노예의 근성을 여전히 지니게 된다. 역사는 퇴보할 것이다. 세상은 인간의 전쟁과 굶주림, 신음 소리로 넘쳐날 것이다. 칼 포퍼의 주장대로 세상은 ‘무한히 아름답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가는 인류의 유산에 조그만 보탬으로 기여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우리는 지녀야 한다, 그리고 용서가 없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운명과 장광설이 초래하는 이성파괴(理性破壞)와 그에 따른 폭력의 지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서로 성장하면서 반성으로 자신을 초월하는 일은 어떤 직업, 어떤 분야에서도 가능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가능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몫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버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몫 이상을 항상 받기 때문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인류의 유산에 참여하고, 그 유산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조그만 공헌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큰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볼테르가 내놓은 용서하라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볼테르도 흔한 어리석음인 용서하지 않는 어리석음은 지당히도 용서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말로, 용서가 끝나는 곳은 이 곳이다. 우리가 불인(不仁)에게 용서받을 권리를 부여하면, 우리는 용서를 파괴하고 입헌 국가를 파괴한다. 그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불인(不仁) 외에도 우리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 다른 어리석음이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들로 하여금 최신 유행을 따르도록 만드는 어리석음이다;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모호하고 위엄 있는 스타일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몹시 신랄하게 비난했던 심오한 스타일의 어리석음 (예를 들어, 마술사의 계산표). 허풍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이 스타일, 허풍과 모호한 말로 된 이 스타일, 이런 방식의 글은 더 이상 찬양되어서도 안 되고, 지식인에 의하여 용서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지적(知的)으로 무책임하다. 그것은 건강한 상식을 파괴한다; 그것은 이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상대주의로 묘사되어왔던 철학을 가능케 한다; 모든 주장은 지적(知的)으로 다소 동등하게 변호 가능하다는 주장과 동일한 철학. 무엇이든지 통한다! 그래서 상대주의 주장은 무질서를, 무법을 낳는다; 그리고 폭력의 지배를 야기한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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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874)
On Truth and Lie in an Extra-Moral Sense
Mixed Opinions and Maxims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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