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저항의 섬, 제주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28. 07:35

                        저항의 섬, 제주

 

   2009년 1월 13일 아침 아내와 나는 제주로 향한다. 내심 겨울날씨 때문에 한라산 등반은 어려울 것이고 심지어 바닷가 휴양지의 날씨도 쌀쌀하고 음산할까봐 걱정이며, 돌아오는 항공편도 제대로 운항할지 의아하다. 벌써 내가 집을 떠나 여행이라고 다녀온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항공권과 숙박권도 공짜로 생기는 것이고, 내가 여행경비를 많이 부담하는 것도 아니요, 또 국내 경제사정이 나쁠 때 내가 가능한 한 많이 소비를 한다면 국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자위하면서 제주 여행을 감행하기로 한다.

   육지인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지났고, 미국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어 취임식이 일주일 정도 남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부동산 담보 과다 대출로 대출업체들이 흔들리면서 전 세계가 경제 불황기에 들었다. 더욱이 암담한 것은 이 미국 발 세계적 경기불황은 그 실체를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치유책도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2008년 말과 2009년 초에는 한국사회가 무너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렸다. 마이너스 성장, 부도기업체 폭증, 구조조정, 해고, 실업자, 미네르바.... 이런 단어들이 신문과 방송에서 회자되는 암울한 분위기이다.

   아내와 나는 제주공항에 내린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며 날씨가 춥다. 제주는 역시 바람이 많은 섬이고 늘 날씨가 흐렸다 개었다 하여 일본인들은 제주가 관광휴양지로서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다. 일본인의 질시가 배어있는 결론이라 할지라도 제주의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공항에서 제주광관책자를 얻고 11시쯤 성산포 부근 섭지코지의 피닉스 아일랜드에서 온 셔틀버스에 오른다. 피닉스 아일랜드는 우리에게 정해진 숙소다. 제주공항에서 1시간 정도 눈이 덮인 구릉지의 도로를 달려 숙소에 당도한다. 숙소는 화장실 욕조부터 이불에 이르기까지 매우 고급스럽다. 벽면에 걸린 박막 텔레비전과 몇 가지 집기를 빼고는 모두 외국제인 것 같다. 어느 기업체에서 외국인들을 초치하기 위하여 건설한 휴양지란다. 짐을 풀고 휴양지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본다. 해안가에 천주교 성당이 보여 멀리서 사진을 찍고 다가가니 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세트였다. 말끔한 도로를 따라 이곳저곳을 구경하는데 겨울인데도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외국인들이 설계했다는 건물도 보았지만 추위와 바람에 시달리다 숙소를 돌아오는 길에 부근의 슈퍼마켓에 들렀다. 콘도이지만 아침은 숙소에서 제공한다기에 점심과 저녁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라면도 사고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는데 나는 병에 담은 자리 젓갈을 발견한다. 원래 젓갈을 좋아하는 나였고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돔의 일종인 자리돔은 몸집이 작은데 젓갈로 만들어져 유명했다. 나는 자리젓을 구하려고 서울의 큰 백화점에도 찾아갔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얼른 만 원짜리 자리젓 한 병을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라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지은 쌀밥에 자리젓을 얹고 점심 겸 저녁을 먹는데 자리젓에서 너무 짜지만 매우 특이한 맛이 났다. 3박 4일 동안 자리젓으로 반찬을 삼아도 충분할 듯하다.

다음날 숙소에서 마련한 뷔페식 아침을 마치고 일찍 성산 일출봉을 향하여 택시에 오른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가 우리가 일출봉을 내려올 때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일출봉에서 내려와 아내와 나는 성산항으로 걸어간다. 일출봉을 뒤로하고 바닷길을 걸으니 바람은 차가우나 웃을 두툼하게 입어 별로 추운 줄 모른다. 일출봉 밑 해녀의 집 부근에서 일단의 여행객을 만났는데 중국어로 자기들끼리 의사소통한다. 나는 일출봉과 주변 경치를 사진기에 담으며 성산항에 도착한다. 바다건너 보이는 곳이 우도다. 성산항에서 잠수함을 타볼까 하다가 우도로 건너가는 표를 산다. 바다가 거칠다. 커다란 철제 도항선이 마구 흔들리고 단체로 온 학생들이 배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진다.

   나에게 섬이란 항상 갇힌 곳이다. 나는 어떤 섬에 가서도 적막과 고독과 절망 따위를 느낀다. 아직 내가 젊다는 의미일까? 제주에서 또 다른 섬인 우도에서 나는 또 고독을 느낀다. 성산항에서 출발한 배가 우도에 닿자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넘어온다. 도항선에서 내린 사람들은 허겁지겁 우도항에서 벗어나 우도를 일주하는 관광버스에 오른다. 작은 우도 관광버스는 관광객을 태우고 먼저 우도의 등대로 향한다. 버스운전사가 마이크를 머리에 달고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하며 운전한다. 우도의 등대는 상당히 높은 곳에 있고 따라서 바람이 매우 거세다. 우리는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작은 산을 온통 뒤덮은 묘지를 발견한다. 묘지마다 대부분 돌담을 둘러놓았는데 놓아기르는 말이나 소가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버스 운전사가 설명한다. 등대에서 내려와 뒤에 온 버스를 타고 우도를 일주하는데 등대 밑에서 다시 버스가 정차하고 15분가량 절벽을 둘러본다. 버스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우도산 땅콩이 작고 맛있어서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아내에게 땅콩 한 봉지를 사라고 말하여 아내와 나는 우도산 땅콩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해풍이 너무 거세 바닷가의 소나무가 높이 자라지 못하는 우도에서 땅콩 역시 크기가 작지만 맛은 좋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땅콩이라는 유전인자는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크기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바람에 맛이 농축된 것이 아닌지 나는 생각에 잠긴다. 다시 버스는 출발하여 우도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이발소를 지나서 세계에서도 드물다는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해변에 다다른다. 관광버스기사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우도에서 단 한 명뿐인 이발사는 우도 남자들의 머리를 모두 한 가지 스타일로 깎아버려 우도 남성의 머리는 한 가지 모양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 역시 섬은 단조롭다. 먼 이국에서 전쟁을 겪은 제대군인 한 명이 섬사람들의 머리를 같은 스타일로 깎는 섬 우도는 변화가 없어서 적막하고 고독한 곳이다. 다만 온통 현무암 투성이로 검은 돌 일색인 제주에서 - 물론 제주의 해수욕장에는 흰 모래밭이 많다 - 하얀 모래가 아닌 하얀 조개껍질로 된 우도 해변이 인상적이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김영갑 갤러리로 향한다. 아내는 반드시 그 사진작가의 전시실을 보고자 한다. 나는 처음 듣는 사진작가이다. 택시로 멀리 떨어진 김영갑 갤러리로 향하여 아내의 설명을 듣는다. 제주의 풍광에 미쳐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아내도 도망가고 마지막에는 루게릭병으로 사망하는데 사진을 현상할 곳이 없어 현지인의 마구간을 빌려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갤러리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들이 걸어놓은 사진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1957년 충청도 부여 출신으로 한양공고 졸업, 제주에서 15년간 촬영을 하다 사망한 사진작가다. 사진이 매우 이국적이다. 물론 제주는 육지와 비교하여 이국적이다. 열대식물이 가로수가 되는 땅이 제주이다. 갤러리의 한 편에서는 작가의 생전 인터뷰 모습이 비디오로 재생된다. 그의 글도 전시되어 있는데 “나는 제주에서 평화를 느낀다.”라는 구절이 나의 머리를 두드린다.

제주에서 평화를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한국동란 이전까지 제주는 평화의 섬이 아니었다. 지금 충남 아산 인주면 밀두리에서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인주 미추홀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나는 안다. 그리고 많은 역사가들은 인주 미추홀을 현재 인천이라고 주장한다 - 개국한 비류백제와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비정되는 한강 남쪽에 도읍을 정한 온조백제는 형제가 세운 국가였지만, 비류백제가 교통이 불편한 서남해안의 섬을 다스리기 위하여 귀족을 파견한 것이 담로제도다. 담로제도는 일종의 봉건제도로 중앙의 귀족이 멀리 떨어진 섬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지방자치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중앙집권적 군현제도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제도다. 따라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절대왕정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봉건제도 즉, 담로제도를 상정(想定)한다. 먼저 비류백제가, 그 다음에는 온조백제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멸망한 후 지금 충청도 및 전라도에서 이주하여 부산과 제주도에서 뱃길로 망명한 곳이 일본이다.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Korean War)이라는 책 1권, 1장 4쪽에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일본은 봉건제도를 - 엄격한 의미에서, 유럽 핵심부(즉, 카롤링 왕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순수하고 고유한 봉건주의 -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The difference was that Japan had a feudal structure - in a strict sense, the only pure and indigenous feudalism outside the European (or Carolingian) heartland.”는 기술이 있다. 따라서 일본은 백제인들이 세운 나라다. 제주를 본관으로 하는 고, 부, 양씨는 백제의 귀족인 담로로 탐라국인 - 탐라는 담로를 의미한다 - 제주를 다스렸다. 제주는 백제의 영토였기에 신라가 탐라를 정벌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과 결혼한 소서노는 유리가 주몽의 후계자로 고구려의 왕이 되자 두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세우는데 다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천황가는 비류와 온조의 후손들이 이어가는 백제 혈통이다.

   제주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줄곧 중앙정부에 대하여 항거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항거정신은 지금 백제의 옛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남아있다. 어떻게 제주가 통일신라 이후 근본적으로 평화로울 수 있을까? 나와 아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제주 4. 3 사건이 제주의 방송국에서 언급되고 있었고, 제주 곳곳에 항일기념비가 보였다.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항일을 했다는 것일까? 한국방송인 KBS의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에 따르면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말에 일본 본토와 제주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25만 명의 관동군 중에서 7만 5천명을 제주에 배치하여 제주의 오름에 진지를 구축하고 결사항전을 획책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경 미국의 잠수함이 제주 해역에 나타나 일본의 군함뿐 아니라 민간배도 격침시켰고 공중에서는 B29 폭격기가 제주를 폭격했다는 당시 제주민의 증언도 한국방송의 프로그램 속에 있었다. 이런 것을 흔한 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가? 내가 주장하는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의심스러우면 김성호 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라는 책을 읽으시기 바란다. 우리 역사에 관하여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 역사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제주는 저항의 역사를 지닌 땅이다. 그래서 제주가 평화의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은 제주가 앞으로 평화의 섬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저항은 아마도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리라. 셍텍쥐베리의 명저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의 첫머리에 보면 대지는 인간에게 저항한다는 말이 나온다. 결코 대지는 인간에게 정복되기를 거부하며 인간에게 저항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란 대지를, 다시 말해서 자연을 정복하려는 노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정복되지 않는다. 아마도 자연이 인간에게 정복당하는 날에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모두 알아버려서 더 이상 인간의 편에서 탐구의 노력이 불필요한, 즉 인류의 역사가 중단되고 인류가 멸망하는 시기가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저항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저항이든 인간의 저항은 아마도 영원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6세기 프랑스 판사이자 저술가였던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에(Étienne de La Boétie)는 자신의 명저 자발적 복종론(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에서 “심지어 황소도 고삐를 매면 신음하고 새들도 새장에 넣으면 불평한다 Même les boeufs sous le poids du joug geignent, Et les oiseaux dans la cage se plaignent”고 - 언제가 전문을 읽겠다고 내가 작정했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책이다 - 썼다. 그런데 인간은 위협과 협박에, 심지어 가만히 있는 권력에도 저항은 제쳐두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가? 

   다음날 우리는 제주시에서 개발한 올레(골목길이라는 의미란다)를 걷거나 한라산 등반을 계획한다. 한라산 등산은 겨울날씨와 관계가 깊으므로 우리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지만 눈이 오고 춥다는 말에 포기한다. 대신 우리는 아내가 태어난 월정리를 거쳐 만장굴을 구경하고 오후는 비워둔다. 6. 25 전쟁이 휴전에 이르는 동안 제주 월정리에서 태어난 아내는 부모가 이북에서 월남하여 제주로 피난함으로써 엉뚱한 곳이 고향이 된다. 북한의 거침없는 남진에 미국정부는 친 남한 성향을 지닌 북한주민을 부산과 제주, 심지어 일본으로 소개시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한국전에 개입한다. 육지에서 제주행 배편에 오른 아내의 가족들은 장모의 수완으로 돼지다리를 얻었는데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지인 피난민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가까이 다가오더란다. 전쟁과 굶주림은 늘 따라다니는 불행이고 인간은 역시 전쟁 속에서 더욱 살고자 염치를 불고하는 존재인 것이다. 제주의 해변마을 월정리에 도착한 아내의 가족들은 가지고 온 식량이 바닥나자 미군들이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미국은 피난민의 식량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량배급이란 역시 생명연장 정도의 수준이었던 모양으로 장모님은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바다에서 해산물을 건져 식탁에 올리면서 고생을 하셨단다. 월정리에서 아내는 지금도 남아있는 추억이 어린 교회 건물을 인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피난민들의 자취는 별로 없고 4. 3 사건 때 주민들의 피신처 역할을 한다고 경찰이 벌목해버린 해송 숲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과 집으로 변했다.

   월정리에서 일주도로로 한 정거장만 가면 만장굴로 가는 길 입구가 나타난다. 그 입구에서 만장굴까지는 3km인데 홀로 여행하는 젊은이가 커다란 배낭을 지고 버스에서 내리고 우리도 같이 내려서 만장굴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한다. 서울에서 휴일이면 6km 정도는 매일 걷고 있는 아내와 나는 그냥 만장굴을 향하여 걷는다. 홀로 여행하는 젊은이가 먼저 사라진 후 만장굴로 걸어가는 여행객은 우리밖에 없다. 가다가 힘들면 빈 택시라도 잡을 심정으로 텅 빈 길이어서 호젓한 포장도로를 우리는 걸어간다. 중간에 식당이 하나 있고 그 앞에 트럭을 세우고 제주도 감귤의 일종인 한라봉을 파는 상인을 만났는데, 우리는 그 상인에게 만장굴로 가는 버스나 택시가 있는지 물었다. 상인의 대답인즉, 제주도 여행객들은 임대한 자동차로 관광지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만장굴로 가는 버스도 빈 택시도 없단다. 그럼 그냥 걷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끔 소형 승합차가 오가는 3km를 걸어 만장굴에 도달한다. 만장굴의 길이는 약 1km이지만 아직도 그 길이는 계속되고 있어 미공개 구간이 있다. 만장굴 안내문에는 굴 안에서 동물을 잡거나 돌을 채취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빗물이 스며들어 기기묘묘한 종유석으로 동굴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고기도 살고... 이렇게 멋대로 생각하고 들어선 만장굴은 온통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마치 탄광의 막장을 연상시키는 검은 돌 동굴일 따름이다. 종유석 대신에 용암이 흐르고, 식어서 무너져 바닥에 쌓이고, 내리 흐르다 기둥으로 굳은 형태의 굴이었다. 나의 선입견은 또 나를 배신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또 실수를 저질렀다.

   인간은 선입견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인간이 지구에 태어난 이래 두뇌가 생겼고 그 두뇌 속에서 생각이나 선입견이 자랐다면 선입견은 인간의 역사와 같이 장구한 세월에 따라 발달한 것이어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 선입견을 떨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선입견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1차적 역할을 눈이 하는 것이고 오감을 통하여 인간의 오류를 확인함으로써 경험주의 철학이 태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입견이 포함된 예측과 그 예측을 오감을 통한 확인의 과정을 거치는 지식론이 연역적 지식론이며, 그와 반대로 개별적인 사례를 관찰하여 일반적 원리를 발견하는 지식론이 귀납적 지식론이 된다.

개별적인 사례를 관찰하여 나열하는 지식은 백과사전적 지식이라고 하며, 이런 지식의 원조는 고대 아테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우리 주변에서 마치 많은 사물이나 사례를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함으로써 지식을 심화하고 심지어 진리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백과사전적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지식에 접근할 수 없다. 검은 백조를 보았다는 개별적인 관찰사례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고, 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시공간적으로 확인 작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검은 백조를 발견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검은 색을 검다고 단정해야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다시 말해서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백과사전적 지식에서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철학자들은 이런 미궁을 무한소급 또는 무한회귀(infinite regress)라고 말한다. 무한소급에 빠진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가 없다. 인간이 행동을 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일시적이나마 결론을 내리지 않고 어떻게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생존하는 근본적인 양태는 일시적 지식을 바탕으로, 다시 말해서 기껏해야 진리근사치에 지나지 않는 지식을 통하여 행동하는 것이어서 당연히 인간의 행동에는 오류가 내재되어 있고 그 내재적 오류를 보다 진리에 접근시키기 위하여 인간 상호간의 비판이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사고와 행동이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서로 비판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동시에, 서로 인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모두 한계를 지닌 불쌍한 존재라는 면에서 서로 용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서양의 어떤 철학자는 인간관계가 우호적-적대적(friendly-hostile)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수순이성, 즉 순전히 사변적으로 지식이 얻어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이성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순수이성비판이라는 걸작을 썼다. 칸트와 반대로 피히테와 쉘링, 헤겔은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독일 관념철학의 주창자가 된다. 어떻게 인간이 경험을 도외시하고 순전히 생각만으로 완벽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가설을 검증하여 (일시적) 결론을 내리는 과학적 지식습득의 과정을 독일 관념주의 철학자들은 무시한다. 칸트는 특히 피히테의 논리에 적대적이었지만 칸트가 사망한 후 독일 관념주의 철학자들은 독일 최고의 철학자인 칸트의 명성을 도용하여 마치 칸트가 관념주의 철학의 시조인양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사고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하다고 칸트는 자신의 역저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주장한다. (칸트의 주장을 인용하면: 그러나 내가 아래에서 이해하는 바는 저서와 체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경험과 독립적으로 추구할 모든 지식에 관한 이성의 역할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은 일반적인 형이상학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결정할 것이고 - 원리에 철저히 따라서 - 형이상학의 근원과 범위와 한계를 결정할 것이다 Ich verstehe aber hierunter nicht eine Kritik der Bücher und Systeme, sondern die des Vernunftvermögens überhaupt, in Ansehung aller Erkenntnisse, zu denen sie,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streben mag, mithin die Entscheidung der Möglichkeit oder Unmöglichkeit einer Metaphysik überhaupt und die Bestimmung sowohl der Quellen, als des Umfanges und der Grenzen derselben, alles aber aus Prinzipien.) 그래서 진보를 위하여 “우리 시대는 실제로 모든 것이 복종해야 하는 비판의 시대 (Unser zeitalter ist das eigentliche Zeitalter der Kritik, der sich alles unterwerfen muβ)”라고 칸트는 선언한다. 절대군주가 군림하고 기독교가 거의 종교적 독재를 이루던 당시 칸트는 “모든 것이 비판의 대상”이라고 선언한다. 실제로 칸트는 프랑스 혁명을 찬양했으며 우리 모두 스스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는 주장을 폈다. 그리하여 칸트가 사망하자 독일인 모두가 애도했으며 칸트는 불멸의 철학자로 남았다. 특히 칸트는 독일 관념론의 시조가 아니라,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영국을 여행하면서 목격한 영국인의 개인주의적 사상을 - 개인주의는 반민주적인 플라톤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이기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인격과 사상을 중시하여 오히려 이기주의와 반대가 되는 사상이며 인본주의와 비슷하다 - 찬양하는 계몽주의의 최후 철학자로 남았다.

   독일 관념론과 반대로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철학이 영국과 미국에서 만개하여 시험을 통하여 인간이 내놓는 지식의 진위를 가리는 실용주의적 이념이 산업혁명을 낳았고 나아가 서구문명의 주류를 형성했다고 단언한다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실용적인 결과로 지식의 진위를 결정한다고 하면 결국 시험에 따른 비판이 중시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형이상학적 주장에 대한 비판은 두말할 것도 없고 과학적 주장에서도 역시 이론을 시험하는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과학적 이론에 대한 온도, 습도, 기타 시험조건에 대한 비판은 영속적으로 오류교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에서 비판의 문화가 자라고 심지어 형이상학적 이론인 민주주의가 정착하여 발전할 수 있던 것 또한 비판의 힘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시대가 비판의 시대라고 선언하는 칸트의 걸작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것은 1781년, 지금부터 약 230년 전의 일인데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현무암 동굴에 지나지 않는 만장굴을 나오니 오후 1시경이다. 욕심이 났다. 일단 제주시로 갔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일주를 하든지 아니면 아침에 눈 때문에 1100도로에 차량통제가 실시된다고 했는데 혹시 지금 날씨로 보아 차량통제가 해제되었다면 버스로 영실까지 가서 서너 시간이 걸리는 한라산 등반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00도로는 제주에서 가장 높은 한라선 중턱을 가로지르는 도로이며 1100고지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영실에서 내린다면 가장 짧은 시간에 한라산까지 등반이 가능하다고 광관안내서에 기록되어 있다. 만장굴 입구까지 다시 걸어서 나와 일주도로에서 버스를 타고 운전기사에게 1100도로로 버스가 운행하는지 물었더니 서슴없이 운행한다고 한다. 우리는 제주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1100도로를 거쳐 중문으로 가는 버스표를 구매한다. 매표소 직원을 표를 판매하면서 버스가 운행할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며 버스가 한라산 중턱에서 돌아올 수 있다고 애매한 말을 한다.

   제주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국밥을 시켜 우리는 추위에 언 몸을 녹인다. 오전에 걸어서 만장굴을 왕복하고 다시 제주시에 도달하여 돼지고기를 넣은 국밥으로 점심을 먹으니 몸의 상태가 최적이 된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가 타고 여행할 버스의 기사에게 물으니 1100도로로 중문으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아내가 지쳤기 때문에 영실에서 한라산 등반을 불가능하여 그냥 중문까지 버스로 여행한 후 거기서 서귀포로 가서 일주도로를 통하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곧 한라산 중턱을 오르는데 잠시 뒤에 귀가 멍멍하여 고산증세가 시작되고, 출발할 때 없던 눈이 금방 도로에서 보이고 나무에도 보이더니 눈의 세상이 펼쳐졌다. 한라산으로 상당히 올라갔을 때 온 산과 나무와 오름에 눈으로 덮이고 버스길가 또한 눈이 수북이 쌓였다. 아내는 설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영실에 도착하여 버스는 등산객 여러 명을 태우고 다시 1100도로로 나와 중문에 도달한다. 겨울철 1100도로변에서 썰매장이 많아 썰매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고 한라산 등산객들도 많은데 그들 모두 중문에서 내리고 버스는 다시 1100도로를 타고 제주시로 돌아갔다.

   우리는 중문에서 서귀포쪽으로 걷다가 버스를 세웠다. 버스기사는 서귀포시에서 성산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고 안내한다. 제주섬의 남쪽 서귀포에서 북동쪽 성산을 거처 다시 북쪽 제주시로 향하는 일주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날이 저물었다. 성산포로 오는 길에는 감귤나무가 가로수를 이룰 정도로 감귤이 흔한 길도 우리는 보았다. 제주 섬을 일주하는 버스에는 제주 할머니들이 많이 탑승한다. 아내는 제주 여인들, 특히 할머니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설명한다. 제주의 남성들은 고깃배를 타고 나고 바다에서 죽은 일이 흔하기 때문에 제주의 여성들이 남성들을 떠받든다고 한다. 또한 제주 섬 자체가 옛적부터 가난한 섬이라 여성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척박한 땅에 밭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유배의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역시 고단했다. 장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월정리에 목격한 제주 여인들의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 누더기였다고 한다. 그런 제주 여인들의 생활에서 특이한 점은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생겨도 각자 밥을 지어먹고 아들내외가 낳은 손자 손녀를 할머니가 돌보는 경우는 없단다. 역시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려면 비록 부모 자식 사이라 할지라도 독립적으로 생활하여 생존율을 높이려는 고육책이 아닐지. 그리고 멀리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담로라는 정치제도에 따라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권리조차 가장이 가족에게 위임하는 전통이 아닐지.

   제주를 일주하는 완행버스는 내릴 사람이 있고 타는 사람이 있으면 정류장마다 선다. 그러고 정류장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 중에는 할머니들이 많다. 이 할머니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우리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목격한 특이한 점을 비교적 젊은 버스운전기사들이 할머니들에게 나무라듯이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다. 역시 버스운전기사들의 말을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버스 통로에 서있으면 위험하다든지, 내릴 정류장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든지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꾸중(?)을 듣는 할머니들의 태도가 매우 순종적이었다. 한 할머니는 “여기서 내릴 꺼우다”라고 강조하면서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음을 지적하면서 역시 어떻게 걸어서 지나친 버스정류장까지 가라는 것인가라는 원망이 말투에 묻어났지만 젊은 운전기사가 내비치는 무언의 냉대(?)도 순응하는 듯하다. 남자가 바다에 빠져죽는 일이 다반사여서 여자가 많은 섬인 제주도에서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를 존중하는 제주 할머니의 태도가 드러난다. 그리고 제주 할머니를 꾸짖듯 말하는 제주 버스기사들의 말투에 잔인한 자연에 대항하여 그리고 냉대하는 육지 사람들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항거한 사람들 사이의 투박한 애정이 스며있는 것은 아닐까? “할머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소? 정신 차리고 민첩하게 살아야 생명을 보존하지 않겠소?”와 같은 의미로 제주 사람들은 서로를 꾸짖고 격려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어둠이 내린 숙소에 제주의 어둠을 가득 묻히고 우리는 돌아왔다. 내일은 마지막 날이다. 벌써 서울을 떠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아이들이 제대로 식사나 챙겨먹는지 불안한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아내와 나는 내일 오후에 예약된 비행기 앞당겨 좌석을 얻을 수 있는지 내일 아침에 전화로 확인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든다. 11개 정도로 개발된 제주의 걷는 길인 올레는 하나를 답사하는데 적어도 5시간에서 8, 9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반나절 행보로는 무리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2009. 1. 16일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항공사로 전화를 건다. 예상은 하고 있지만 겨울철은 여행의 계절이 아니기 때문에 항공편의 좌석은 여유롭다. 숙소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한다. 제주공항에서 아내는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선물할 과자와 갈치를 사고 나는 다시 자리젓갈이 포함된 젓갈류를 구매한다. 제주상공을 이륙한 항공기가 남해안에 이르자 구름이 장관을 이루고 그 구름 아래로 육지가 또 구경거리다. 나는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50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공기가 탁하고 사람과 차량으로 복작거리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후기: 집에 돌아와서 며칠 후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인상적인 말은 “부유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나라는 오래 갈 수 없다 (A nation cannot last long which favors the prosperous)”는 말이었는데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별로 인용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정치가들의 말을 별로 믿지 않으며, 차라리 최고의 인간은 정치가가 되지 않으며 최악의 인간이 정치가라는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약한 자가 서로 힘을 합쳐 강한 자의 횡포로부터 스스로 보호를 받고자 국가를 만들지 않는다면 국가가 왜 필요한가라고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나는 기억한다.

저항의_섬,_제주-icarus500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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