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연역적 미국 교육 및 그 철학적 배경 (2013. 9월 17일 교정)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28. 08:02

연역적 미국 교육

그 철학적 배경

 

 

 

 

 

 

 

 

 

 

 

 

 

 

 

 

 

 

 

 

머리글

 

 

   교육은, 나아가 모든 사회적 담론과 심지어 개인 간의 대회조차도 진실이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진실이나 결론에 도달한 후에야 우리는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진실이나 결론에 도달함은 우리가 지닌 문제를 우리가 해결했거나 그 문제를 (상당히 정확하게, 혹은 철저하게)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문제를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할지라도 해결된 문제로부터 또 다른 문제가 어김없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끊임없이 발견하여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봉착한다.

   이 글은 교육 이전의 철학적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철학적 문제에서도 방법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연역법과 귀납법을 다룬다. 귀납법을 통하여 결론이나 진실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연역법을 통해서인가? 라는 문제는 인간의 사고(思考)가 시작된 이래, 즉 인간의 삶과 동시에 시작된 문제이리라. 그러나 어떤 접근방식으로 결론이나 진실에 도달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어서 많은 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여 일반인들로서는 명확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은 많은 학자들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귀납법의 허실을 살펴보고, 또 과감한 예언이나 예측이 요구되는 연역법을 살펴서 교실에서 교사가 학생을 지도할 때 어떤 접근방법으로 교수학습에 임해야 하는지, 나아가 사회 전반의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다루고자 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실효성의 전형(典型)이 되는 미국 교육의 핵심적 철학 및 그 실효성을 또한 이 글은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서양의 핵심사상이, 특히 영국과 미국의 문화를 이루고 있는 핵심적 사상이 무엇이기에 전 세계적으로 우세한지 못내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일생동안 이 문제에 매달린다하여도 내가 얻고자 하는 해답은 최종적으로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이 짧은 글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바는 내가 지닌 지식이 독자들의 비판을 거쳐 어떤 새로운 결론으로 향하는가를 알고자함 때문이다.

   나는 서양철학이나 과학의 역사가 비판의 역사라는 것, 특히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탈레스(Thales)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 철학이 피타고라스학파를 제외하면 항상 학파 내부에서조차도, 심지어 스승과 제자 간에서도 서로 이론을 내고 서로 비판을 하는 전통 속에서 발전하여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마케도니아와 로마를 거쳐 오늘날 유럽에 퍼졌으며, 나아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런드까지 이르렀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미국의 교육이 지닌 민주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理性主義的; rationalist)이며 비판적인 성향은 차치하고, 또 다른 특징이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우연히 미국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배리 맥로린(Barry McLaughlin) 교수의 논문을 읽다가 미국 주류 가정의 교육이 연역적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미국의 학교는 미국 주류 가정의 대화 양식을 강조하는 반면, 미국으로 이민하는 많은 아동은 귀납적 대화 방식에 익숙하다는 주장과 마주쳤다. 그렇다면 미국의 교육과 미국으로 이민하는 사람들의 교육방식을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대별할 수 있을까?

   나는 먼저 서양철학이나 과학의 역사에서 연역법과 귀납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연역법과 귀납법을 사용하여 진리나 진실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여 두 가지 방법에서 더 나은 것이 적어도 미국 주류 가정에서 시행되고, 나아가 미국의 학교가 강조하는 교육방법이라면 우리 교육이 교육적 방법론에서는 미국 교육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적으로 정보와 지식이 유통되어, 정보와 지식에 관한 한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에, 우리만의 교육 방식을, 더구나 우리 교육 방식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도 없이 강조한다면 우리 교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자괴감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이 글을 발표하면서 나는 독자들의 엄격한 비판을 요청한다. 독자들의 비판이 엄격할수록 나의 글은 더욱 객관적이 되고, 그리하여 더 오래 유효하리라. 다만, 이성주의적(理性主義的) 전통이 결코 강하지 않은 우리의 사회적 환경에서 이성적인 비판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나는 저어한다. 그렇다할지라도 많을수록 더 좋지만, 적다할지라도 이성적으로 엄격한 비판을 독자들로부터 나는 기대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우리 교육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끝으로 이 글은 평소 우리 교사들이 마주치는 교육이론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노력했으며, 원저자의 글을 번역하여 본문에 인용할 경우에는 초록색 글자를 사용하였다. 더 근본적인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문제를 취급함으로써 교육에 관한 전문화로부터 야기되는 편협함을 피하고 새로운 인식 틀로 교육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적인 교육활동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던 소위 자명한(自明한: self-evident) 교설들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2007년 8월 필자

 

 

 

 

 

 

 

 

 

 

 

 

 

 

 

 

 

 

 

 

 

 

 

 

 

 

 

 

 

 

 

 

 

 

 

 

 

 

        차 례

 

 

 

 

머리글

 

 

1. 귀납법 대(對) 연역법

 

2. 영미(英美)식 인식론과 독일식 인식론

 

3. 연역적 미국 교육의 사례

 

4. 지식은 어떻게 습득되는가?

 

5. 이론의 정보성 내용과 이론이 참일 확률

 

6. 본질주의(本質主義: Essentialism)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7. 역사주의라는 허구(虛構)

 

8. 유토피아적 사회공학과 점진적 사회공학

 

9. 폭력적 혁명이 정당화되는 경우

 

10. 미국 속의 개인주의

 

11. 민족주의 속의 폭력성과 우매함

 

12. 성악설(性惡說)인가 성선설(性善說)인가?

 

13. 맺음말

 

 

참고문헌

 

 

주석

 

 

 

 

 

 

 

 

 

 

 

 

 

 

 

 

 

 

 

 

 

 

 

 

 

 

 

 

 

 

 

 

1. 귀납법 대(對) 연역법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로 추론하는 것이 귀납법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모든 생물은 죽는다’로 추론하면 ‘모든 생물은 죽는다’라는 결론이나 진실을 우리가 귀납적으로 도출했다고 말한다. 반대로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대전제로 (일반적인 명제) 시작하여 ‘사람은 죽는다’라는 결론을 (구체적인 명제) 도출한다면 연역적으로 추론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귀납적인 교수학습 방법으로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모든 전쟁은 이념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념적 갈등은 무엇인가?’로 수업을 시작하기보다는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 북한이 남침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먼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교사의 귀납적 수업방식에 따라 답변을 하는데 문제는 학생들의 답변이 끝이 없다는 - 다시 말해서 무한소급 또는 무한회귀(infinite regress)를 유발한다는 - 것이다.

   북한이 남침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심지어 사망한 스탈린의 증언을 듣기까지 해야 하는데, 무한소급은 사람에게 어떤 답변도 주지 못한다. 비슷한 사례로 ‘새들의 색깔은 생태적 진화에 따라서 다양하다’라는 일반적 명제보다 - 다시 말해서 연역적 주장보다 - ‘백조는 희다’는 특수한 명제를 - 다시 말해서 귀납적 주장을 - 확인하여 그 진실성을 검증하려면 온 세상을 뒤져서 ‘백조는 희다’라는 말을 검증해야 하는데, 그런 검증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백조는 희다’라는 말에서 백조가 ‘어느 정도 흰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의 특징이나 분류기준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귀납적 추론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귀납적 추론은 논박의 기준은 될 수 있을지언정 - 우리가 감각을 사용하여 이론의 진위를 검증한다는 의미에서 - 이론을 구축하는 올바른 방법으로서는 수용될 수는 없다. 게다가 어느 지방에서 돌연변이로 검의 깃털을 지닌 백조를 - 아니, 흑조가 될지도 모른다 - 발견하여 조류학계에 보고한다 할지라도, 그 발견은 연역적 주장인 ‘새들의 색깔은 생태적 진화에 따라서 다양하다’와 비교하여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가치가 적다.

   귀납적 추론이 불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한히 풍요롭고, 따라서 그 세상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내는 이론은 세상의 무한한 모습을 기술(記述)해야 하기 때문에 - 게다가 그 무한한 모습들의 상호 관계까지 기술(記述)해야 한다 - 우리의 이론이 제한적이고 선택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 겨우 5% 정도만 그 특성을 인간이 알아냈다고 하고, 우주의 역사 속에서 지구의 역사,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겨우 찰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짧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아서 몸으로 소화하는 결함투성이고 협소한 감각-자료로 인하여, 그리고 무한한 모습을 지닌 우주와 지구의 생태계로 인하여 인간이 행하는 귀납적 탐구 활동은 멀리 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우리는 사실을 검증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우리가 검증하는 사실이나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어 오류를 지니지만, 우리가 다음 행동을 결정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개별적 사례를 관찰함으로 참된 지식(epistēmē)을 얻으려는 귀납적 과정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은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그리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글에서 발견된다. 이 세 사람의 철학자 모두는 인간이 지닌 모든 지식이 결국 억측이나 추측(doxa)에 지나지 않아서 진리나 참된 지식이 아님을 지적한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제신(諸神)이 납작코이고 검다고 말하지만

트라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제신(諸神)이 푸른 눈과 붉은 머리털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자신들의 신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려서

각각은 그래서 신들의 몸을, 각 종류, 자신과 비슷하게 구성하리라.

 

제신(諸神)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우고, 사물을 더 잘 알게 되리라...

이것들은 진리와 같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진리를 알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고; 제신(諸神)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연히 그가 궁극적 진리를 말한다 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그 까닭은 모든 것이 억측으로 짜인 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비록 신적(神的) 본질에 속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이나 특징에는 속하지 않는다... 기대되지 않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기대되지 않은 것을 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기대되지 않은 것이 탐지될 수 없어서, 접근될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을 본 것으로부터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진리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리투스는 또한 우리가 자연이나 자연현상으로부터 받는 감각-자료까지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러 ‘... 시각은 기만적이다’, ‘보이지 않는 조화가 보이는 조화보다 더 강력하다(Invisible harmony is stronger than visible), 혹은 ‘자연은 숨기기를 매우 좋아한다(Nature loves to hide)’라고 주장한다. 이 세 철학자의 귀납적 추론에 대한 불신은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이르러 불변하는 로고스인 ‘포괄적인 진실’과 기만적인 견해로 나뉘어 결국 전자(前者)는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나 이성주의(理性主義: rationalism)로 추앙받고, 후자(後者)는 경험주의(empiricism)나 감각주의(sensualism)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파메니데스는 이렇게 인간의 감각-자료를 공격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유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고(思考)를 거두라; 많이

시험된 버릇인 경험이 당신을 억제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당신의

멀어버린 눈이나 당신의 먹은 귀나 심지어 당신의 혀가 이런 방향으로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이성만으로, 내가 당신에게 증거로

여기서 설명한 흔히 쟁점이 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어느 때고 흔히 오류를 저지르는 감각-기관들의 혼합이 존재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지식은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 까닭은 이 두 가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과, 감각-기관들의 본성을 구성하는

혼합. 이 혼합에서 유행하는 것이 각각의 인간과 모두에게서

사고(思考)가 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감각-자료는 부정확하여 믿을 수 없어서 개별적 사례를 관찰함으로 참된 지식(epistēmē)을 얻으려는 귀납적 과정이 불가능할까? 첫째로 인간이 지닌 지식의 99%가 선험적(先驗的: a priori)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이 대부분 선험적이기 때문이 자연히 인간은 선험적 지식으로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둘째로 이런 인간의 상황인식은 유추의 과정을 통하여 두뇌의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작동으로 나타나는데, 그 프로그램은 단편적인 단서를 받아서 순간적으로 상황 전체를 - 상황 전체는 감각-자료를 받는 개인의 판단에 따른 전체적 상황일 따름이다 - 1차적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 1차적 판단은 과학적 시험을 통과하지 않거나 비판을 통과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연역법과 연역적 추론과, 연역적 교수학습법에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우선 연역적 추론은 과감한 상상과 예언을 요구하고, 그것들이 일반적인 명제를 구성한다. 연역적 추론에 과감한 상상과 예언이 필요한 까닭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은 선험적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그 지식에 따라서, 주관적 논증이라 할지라도, 논증을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인간은 자신이 지닌 지적 한계 때문에 논증은 과감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인간이 과감한 상상과 예언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 상상과 예언은 타인들의 시험과 실험, 그리고 비판에 의하여 수정될 수 있다.

   아울러 연역적 추론에는 - 연역적 추론이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례를, 즉 ‘북한이 남침한 이유가 무엇인가?’와 같이 나열성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 어떤 지식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모든 전쟁은 이념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념적 갈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가 학생들에게 한다면, 적어도 전쟁의 시원(始原)에 관해서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 단순히 군사적인 면만 아니고, 특수한 시점과 특수한 지점에만 관련해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 지식을 우리는 이미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소위 ‘전문적인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지, 그리하여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데, 전문적인 지식은 연역적 추론에 의한 지식이라기보다는 귀납적 추론으로 습득되는 지식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시원에 관해서 그런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을 우리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교사로서 다양한 정보를 기억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많은 학생들의 - 여기서 우리는 학급당 학생 수가 많을수록 교수학습은 지루하거나, 학습효과가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 지식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어차피 교수학습 과정을 통하여 교사가 학생들이 지닌 지식을 객관성을 기준으로 포괄적이고 통합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 다시, 여기서 교수학습 과정은 연역적 추론의 과정이 된다 - 학생들이 지닌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 통제가 없다면, 교수학습은 다시 ‘무한소급’이나 혼란에 - ‘무한소급’은 여기서 교사가 교수학습을 통제하지 않으면서 발생할 무한한 학생들의 답변을 의미하고, ‘혼란’은 그런 무한소급으로 인한 교수학습의 실패를 의미한다 - 빠지게 된다.)

    머리글에서 ‘우리는 문제를 끊임없이 발견하여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봉착한다’는 교설이 제기됨에 따르면, 연역적 추론 자체는 우리가 이론을 연역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우리의 이론이 도출하는 결론은 연역적으로 펼쳐지는데,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이론이 도출하는 결과가 시험됨으로써 이론 자체가 시험된다; 다시 말해서 이론을 합당하거나 경험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론체계를 연역적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어떤 이론에 대한 연역적 추론은 그 이론을 전개하는 합당한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론을 시험하여 반증하려고 노력하면 그 이론이 어떤 경우에는 비판과 시험이나 실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과학의 합리성은 이론을 연역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달려있다기보다는 새로운 이론을 시험 및 실험과 비판을 거쳐 골라내는 데에 달려있다.

   이제 우리는 교수학습에서 연역적 추론 과정을 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개별적 사례를 중시하는 귀납적 추론은 절대적으로 불필요한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인 눈이나 귀, 입, 코, 손, 머리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가? 아니다. 연역적 추론에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아니 전지전능한 사람이 없을 바에서,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인 사람의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Errare humanum est: To err is human]’) 연역적 추론에는 과감한 상상과 예언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추론에 대한 비판과 시험 및 실험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과감하게 상상과 예언을 내키는 대로 내뱉는다면 그것은 점쟁이와 무당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연역적 추론에 대한 비판과 시험 및 실험은 결국 귀납적으로 검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일반 명제를 연역적 방법으로 사람들이 구축한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감각을 사용하여, 그 연역적인 일반 명제가 포괄적으로 예언이나 예측하는 개별적 사례나 사실을 귀납적으로 검증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의 감각기관이 어떤 사실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에, 개인이나 단체가 상호비판을 통하여 연역적 추론의 결과는 물론 귀납적 추론의 결과 또한 비판하고 시험하고 실험해야 하는 당위성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비판과 시험 및 실험이 무인도에서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라면 객관성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이 하는 비판과 시험 및 실험을 이론은 통과하여야 함과 동시에, 그 이론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재생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상정(想定)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란 자신의 생태적 지위(ecological niche)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신이 살아온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고 우리로서는 그 근원을 추적하기 힘든 인간이 지닌 지식의 99%가 선험적(先驗的: a priori) 지식이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생태적 지위와 선험적 지식의 복합적 작용에 의하여, 생리적으로 비판적이어서 개혁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적어도 사람들의 비판은 자신과 상대방 모두의 소위 전통을, 그리고 자신의 행태나 이론이 아니라면 적어도 상대방의 행태나 이론을 향하게 된다. 게다가 어떤 사회에서든 크게는 정치적 자유, 작게는 사회 집단 내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비판은 억압된다. 그러므로 근세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민주주의를 경험한 동양과, 약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의 역사를 경험한 서양은 비판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철학이나 과학은 더 자유롭고 더 많은 비판으로 통하여 발전해온 역사가 아닐까? 동양인으로서, 서양의 이방인으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서양의 과학문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적어도 비판이 없는 서양의 과학문명을 우리가 상정(想定)한다면, 지금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미국사회의 치열한 논쟁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을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동양적 복종으로 더 이상 굽실거리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흡수하여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라고 선언하는 자신감은 무엇인가? 그리고 러셀이 동양의 대표적인 중국문명을 ‘보수적’으로, 반대로 서양문명을 ‘진보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우리의 정치제도는 다른 곳에서 시행되는 제도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웃 국가를 모방하려 하지 않고, 모범이 되려고 한다. 우리의 행정부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선호한다. 이것이 우리의 행정부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유이다’라고 주장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서양사회를 인류 최고의 사회로 규정하는 칼 포퍼의 인식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유럽은 조화롭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를 거쳤다; 아시아는 여전히 진실과 시(詩)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모르고, 자신의 신념이 개인의 관찰과 신중한 사고에서인지 환상에서 나왔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유럽은 학교에서의 이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니체(F. Nietzsche)는 어떤 근거로 주장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가야 한다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하면서 세계의 문명을 논하는 데 있어서 유럽국가들 및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이라 규정하고 터키,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반개화국이라 부르며, 아프리카 및 오스트레일리아 (아마도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전 원주민들이 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지칭하는 듯하다. - 필자 주) 등을 야만국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비판과 비판적 토론의 역사로, 이론은 최종적으로 참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과, 그리하여 비판과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우리가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깨달음의 역사로 이렇게 설명된다:

 

 

그리스 철학의 초기 역사는, 특히 탈레스에서부터 플라톤까지의 역사는

찬란한 이야기이다. 그 역사는 너무나 뛰어나서 사실이 아닐 정도다. 모든 세대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독창성과 깊이를 지닌 한 가지 새로운 우주론인 적어도 한 가지 새로운 철학을 발견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사람들은 독창성과 천재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들을 조금 밝히려고 노력할 수 있다. 고대인들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비밀이 전통이었다고 - 비판적 토론의 전통 - 제안한다.

... 내가 말한 변화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성적인 토론인 비판적 논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그런 상태로 제시되어, 공개적인 비판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비밀스런 아이디어 변경은, 있다고 할지라도, 거의 없다. 익명성 대신에 우리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 창안자들의 역사를 발견한다.

여기에 독특한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은 그리스 철학이 지닌 놀라운 자유 및 창조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전통의 발흥이다. 그것은 다양한 학파들 사이에서, 그리고 훨씬 더 놀랍게, 동일한 학파 안에서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거나 고취하는 전통이다. 그 까닭은 피타고라스학파 밖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교설의 보전에 몰두하는 학파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교설의 변경, 새로운 아이디어들, 교설의 수정, 그리고 스승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발견한다.

(파메니데스에게서 우리는, 초기에, 심지어 매우 두드러진 현상을 - 두 가지 교설을 제시하여, 하나는 자신이 참이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거짓으로서 자신이 기술[記述]하는 철학자의 현상 - 발견한다. 그러나 파메니데스는 거짓 교설을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거짓 교설을 인간이 지닌 망상적 견해에 대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아마도 최선의 설명으로서 -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설명 - 제공한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이 비판적 전통이 세워졌을까? 이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볼만한 문제이다. 이만큼은 확실하다: 이오니아의 전통을 엘레아에 가져왔던 제노파네스는 자신의 가르침이 순전히 추측성이라는, 그리고 더 잘 알 다른 사람들이 아마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사고(思考)의 자유인 이 새로운 비판적 태도에 관한 최초의 징표를 우리가 찾는다면, 우리는 탈레스에 대한 아낙시맨더의 비판으로 이끌려 간다. 여기에 매우 두드러진 사실이 있다: 아낙시맨더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척이고 7인의 현자의 한 사람인 이오니아학파의 창설자를 비판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낙시맨더는 탈레스보다 약 14살 아래여서, 틀림없이 자신의 스승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 자신의 비판과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개발했다. (그들은 서로 수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의 근원들 속에는 불화나, 언쟁이나, 결별의 흔적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자유에 관한 새로운 전통을 세운 사람은 - 스승과 제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기초로 - 그리하여 피타고라스학파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학파를 창설한 사람은 탈레스였음을 암시한다. 탈레스는 비판을 용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탈레스는 사람은 비판을 용인해야 한다는 전통을 창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탈레스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스승이 비판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지 않고 비판을 용인만 하는 사제 사이의 관계를 상상할 수 없다. 독단적 자세 속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제자가 독단을 (유명한 현자의 독단은 특히 그렇다) 감히 비판하여 자신의 비판을 소리 낸다는 것은 나에게 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스승인 탈레스가 비판을 고취했다고 - 아마도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아마도 비판적 의도 없이 제자들이 묻는 몇 가지 질문의 관련성에 의하여 충격을 받은 후에서야 - 가정하는 것은 나에게 더 쉽고 더 간단한 설명으로 보인다.

아무튼, 탈레스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제자들 사이에서 비판을 고취했다는 추측은, 스승의 교설을 향한 비판적 자세가 이오니아학파가 지닌 전통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 나는 탈레스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최초의 스승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물들을 보는 방법이다 - 사물이 존재한다고 내가 믿는 방법이다. 나의 가르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라.’ (이 비독단적인 자세를 탈레스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 ‘비역사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겨우 두 세대 후에 우리가 제노파네스가 남긴 단편[斷片] 글들에서 의식적이고 명백하게 형성된 유사한 자세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것이다.) 아무튼 이오니아학파가 여러 세대를 이어가면서 제자들이 스승들을 비판했던 최초의 학파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철학적 비판이라는 그리스 전통이 그 주요 근원을 이오니아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학파 교설만을 허용하는 독단적 전통과의 결별을, 그리고 그 독단적 전통의 자리에 모든 사람들이 비판적 토론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교설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전통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 혁신은, 거의 필연적으로, 진리를 보고 발견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은 최종적이 아니라 개선에 열려있다는 깨달음을 낳았다; 우리의 지식인 우리의 교설은 추측성이라는 깨달음; 우리의 지식인 우리의 교설은, 최종적이어서 확실한 진리들이라기보다는, 추측들과 가설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깨달음; 그래서 비판과 비판적 토론은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우리가 지닌 유일한 수단이라는 깨달음. 그리하여 그 깨달음은, 이성적인 과학적 자세를 창조한 전통인 대담한 추측과 자유로운 비판의 전통을, 그리고 그 전통과 함께 (물론 과학만이 아니라할지라도) 과학에 근거한 유일한 문명인 우리의 서구 문명을 창조한 전통을, 낳았다.

이 이성주의적 전통 속에서는 교설의 대담한 변경이 금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혁신은, 이전 혁신을 비판적으로 토론한 결과에 근거한다면, 고취되어서 성공으로서, 개선으로서 간주된다. 혁신의 바로 그 대담함이 찬양을 받는다; 그 까닭은 그 대담함이 비판적으로 검토되는 엄격함에 의하여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설의 변경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옛 이론들 및 혁신한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전통적으로 계승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아이디어의 역사에 대한 자료는 학파 전통의 일부가 된다.

내가 알기로 비판적, 즉 이성적 전통은 단지 한 번 창제되었다. 그 전통은, 아마도 확실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참된 지식(epistēmē)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의 발흥으로 (확실한 진리와 단순한 억측을 엘레아학파와 헤라클리투스가 구분한 것의 이후 상황) 인하여, 2-3세기 후에 실종되었다. 그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에,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재발견되어 의식적으로 부활되었다.

 

 

2. 영미(英美)식 인식론과 독일식 인식론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연역적 추론에 필요한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지식은 어떤 주장이나 이론, 또는 어떤 지식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 및 미국식 인식론과 (즉, 지식론) 독일식의 인식론은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 가지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을까? 나는 이 문제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거나 그 효율성을 인정받는 미국식 - 결국, 영국식과 대동소이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교수학습 방법을 이해하기 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영미식 인식론과 독일식 인식론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미국식 교육의 특징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에서의 나치즘 및 파시즘의 발흥과 이에 맞선 영국과 미국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근대 서양 인식론은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인간성 회복이라는 르네상스에서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탄생이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날 서양 문명을, 특히 과학 문명을 이룩하는 기초가 되는데, 인간에게는 하느님과 별도로 진리를 감지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이 있다는 인식론적 낙관론(epistemological optimism)을 기초로 한다. 이 인식론적 낙관론의 핵심적 교설은 진리는 명백하다(truth is manifest)인데, 다시 말해서 진리는 숨겨져 있을지 모르나 스스로 드러날 정도로 명백하여 사람들은 쉽게 진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안이한 인식론적 낙관론의 대표적 철학자는 베이컨(Bacon)과 데카르트(Descartes)였다. 그들은 인간이 지닌 지성을 이용하여 인간이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진리란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 인식론적 낙관론과 그 핵심적인 교설인 진리는 명백하다가 옳을 리가 없고,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진리발견과 지식습득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유럽대륙에서, 특히 독일에서 피히테(Fichte),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을 중심으로 이성과 논증을 무시한 독단적이고 관념론적인 낭만주의가 활개를 치는 동안, 영국에서는 실생활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Empiricism)가 자리를 잡는다. 베이컨(Bacon)의 경험주의 철학은 지식의 발전을 통하여 대중의 가난과 굶주림을 없애 사회복지를 실현하려는 인도주의적 목적을 지니는데, 결국 영국에서 시작되는 산업혁명의 정신적 배경을 이룬다. 이 경험을 중시하고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과학적 정신은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와 나중에는 영국 과학진흥협회(the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로 (그리고 훨씬 후에 미국 협회[American Association]) 구현되는데, 모두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철학을 근간으로 한다. (미국 과학 교사 협의회[National Science Teachers Association]는 STS[과학, 기술, 사회: Science, Technology, Society] 교수방법을 제시하는데 STS는 경험적 환경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수학습법으로 개별 학생에게 미치는 과학 및 기술의 영향을 강조한다.)

 

 

3. 연역적 미국 교육의 사례

 

   베이컨의 철학을 실생활에 기술적으로 적용하려는 영국과 미국의 문명이 배리 맥로린(Barry Mclaughlin) 캘리포니아 대학교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어떻게 미국 주류 가정의 연역법을 통한 교육 방식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미국 학교의 핵심적 교육 방식이 되었는지를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먼저 미국의 국부(國父)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경험주의적이자 실용주의적인 말을 소개한다:

 

 

비물질적 존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천사, 신(神)이 비물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신(神)이나 천사나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달리 추론할 수 없다... 꿈과 환상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는.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들이지만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내 자신을 괴롭히거나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만족하고 충분히 몰두한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과 미국 교육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적 사상은 항상 그 결과를 중시하므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그런 철학과 교육철학은 관념론이 빠지기 쉬운 사변적(思辨的) 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실험과 시험으로써 실증될 수 있는 이론 구축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론은 시행착오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거쳐 수정되거나 다른 이론에 의하여 갈음된다. 예를 들어 경제학에 수학이 도입되거나, 가치이론에 ‘주관적’ 즉, ‘심리학적’ 방법이 도입되고, 또 사회과학에 통계학이 도입되는 사례들이 실증적 이론구축이다. 경험이나 이론의 실용성을 중시함으로써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의 선정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선정된다. 그래서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을 채택하지 않는 사회과학은 그 결과가 공허할 따름이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역적 수업의 사례를 수업에 참관한 사람의 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콜로라도주 보울더시의 케이시(Casey) 중학교 도서실에서 열린 사회수업 참관기에 의하면 수업주제는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What is America?)였는데, 학생들에게 현장 경험으로 주어진 숙제는 이러했다: 미국에 관하여 너희들이 가르칠 수 있은 품목을 세 가지 가져올 것(Bring back any three items that you could use to teach about America). 다섯 가지 다른 인종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각각 한 가지 음식의 보기를 들라(List one food from each of five different ethnic restaurants). 미국 학생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광고탑으로부터 세 가지 다른 광고를 수집하거나 설명하라(Collect or describe three different posters from an advertising Kiosk that are of the most interest to the American students).

 

 

   이 참관기에서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라는 연역적 질문이 제시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질문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하여 숙제인 자료를 모으거나 이미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반추하면서 숙제로 가지고 온 자료로써 확인하거나 보충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이 수업과정은 먼저 개별적 사례를 관찰하는 귀납적 수업이 아니라, 먼저 미국의 모습을 (선험적으로) 과감하게 이론으로 세우고 개별적 사례로써 확인하는 연역적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메릴런드주의 리차드 몽고메리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세계사 수업에 대한 동일인의 참관기는 다음과 같다:

 

 

교사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주제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하고, 그 역사적 사실의 전개를 시종 질문을 통하여 수업을 진행하였다... 교사는 단 한번 교과서의 쪽수를 알리고 참고하도록 설명하였다. 교과서를 가진 학생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고, 중요하게 설명하지도 않아 거의 교과서를 참고하지 않았다... 교사는 판서를 하지 않고 거의 질문(25개 정도)으로 일관된 수업이었다.

 

 

   이 세계사 수업 역시 주제만 교사가 정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필요하다면 증거를 들어) 발표하는 연역적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 철학이 연역적 교육방법으로 변하여 미국의 주류 가정과 학교에서 자리 잡는 또 다른 사례는 미국과학진흥회(AAAS: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가 미국 과학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보고한 내용의 일부로, ‘현재의 과학교과서와 교수방법은 종종 실제로, 도움과는 거리가 먼 채, 과학소양으로서의 발전을 방해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질문 탐험보다는 답 익히기, 비판적 사고 노력보다는 기억을, 맥락 이해보다는 정보조각이나 덩어리를, 논쟁보다는 암송을, 행동 대신에 읽기이다’라고 주장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하여 미국의 과학교육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다음과 같이 변한다:

 

 

수월성 추구 → 과학교양 추구

 

객관주의 철학 → 구성주의 철학

 

분과적 교재 → 통합적 교재

 

학문의 구조 중시 → 맥락과 연결 중시

 

획일적 수업 → 리얼타임식 수업

 

 

 

(구성주의란 객관적이고 항존적인 지식의 실재를 거부하고, 유용한 지식은 ‘지금’ ‘현재’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이론인데, 항존적인 지식의 실재를 거부했다는 의미는 인간이 참된 지식 즉, epistēmē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고대 아테네 철학자 제노파네스, 헤라클리투스, 데모크리투스 그리고 파메니데스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구성주의에서는 ‘맥락 속에서 특수하게 구성되어 지는 지식’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학습자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탄생한다. 아울러 수월성 추구가 과학교양 중심으로, 분과적 교재가 통합적 교재로, 학문의 구조 중시가 맥락과 연결 중시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획일적 수업이 리얼타임식 수업으로 전환되는 것은 항존적인 지식의 실재를 거부함과 동시에 전문화로부터 초래되는 지식의 편협성을 탈피하여 다양한 분야로부터 지식이 도출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198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 교육이 귀납적 방식에서 연역적 방식으로 전환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의 경험주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나 과학사의 전통적 흐름인, (1) 이론 → (2) 시험, 실험, 비판 → (3) 새로운 이론의 과정을 밟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철학자나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이 시험이나 실험, 혹은 비판되는 과정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독일의 관념론적 낭만주의와 달리 경험주의는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객관적’ 결과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헤겔]의 사변적 방법이 진지하게 수용되었다는 것은 당시 독일 자연과학의 후진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새로운 결과를, 올바른 결과를 위하여 경험으로 확인되는 시험, 실험, 비판은 허용되고 심지어 고취되어 이론에서 결과로 순환되는 연역적 과학이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이 목적하는 바는 칸트에게서 구체적으로 주장되는 이론과 현상의 일치인 사실주의(realism)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론을 만들어 자연에게 부과함으로써 우리의 이론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알아낸다는 사실주의가 과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철학적 및 과학적 사고는 미국 교육에서 진보주의 교육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교육 운동이다.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운동은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적 교육 모형인,

 

(1) 문제 인식(Become aware of the problem) ⟶

 

(2) 문제 정의(定義)(Define the problem) ⟶

 

(3) 문제 해결을 위한 가설 제의(Propose hypotheses to solve it) ⟶

 

(4) 과거의 경험에 비춘 가설의 결과 평가(Evaluate the consequences of the hypotheses from one's past experience) ⟶

 

(5) 최적 해답 시험(Test the most likely solution)

 

유사한 과정으로, 학습자들이 과학자의 탐구 과정을 따라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문제 해결과정은 칼 포퍼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과정인 P[문제1]TT[임시 이론] → EE[오류 제거] → P[문제2]와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진보주의 운동의 배경에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실제 생활과 같은 활동에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교설이 있다. 이러한 교설을 배경으로 진보주의 교육은 읽기와 연습뿐만 아니라, 학습자의 실제 생활에 중심이 되는 실제 세상에 대한 경험과 활동을 제공하고자 하는데 이 교육 운동의 구호는 ‘행동하면서 배우라(Learn by Doing)’이다. 나는 이런 과학의 진보와 지식의 성장 과정이 현재 크게는 유럽대륙과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작게는 미국에서 연역적 방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실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4. 지식은 어떻게 습득되는가?

 

   근대 인식론은 이마누엘 칸트(I. Kant)에게서 시작된다. 칸트는 당시 유럽대륙을 강타했던 뉴튼의 이론에 매혹되었다. 칸트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물론 알 수 없었고, 인류가 역사 이래 알 수 없었던 우주의 비밀을 뉴튼이 풀었다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칸트는 ‘순수한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다시 말해서 뉴튼은 어떻게 그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알아냈을까?’라는 물음에 집착했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은 아이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수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뉴튼의 이론 또한 이전 과학자들의 이론과 마찬가지 추측에, 그러나 탁월한 근사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칸트가 고민했던 문제는 사이비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칸트가 지녔던 의문은 ‘어떻게 성공적인 추측을 할 수 있는가?’나 ‘어떻게 탁월한 근사치를 이론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론체계를 만들어내고, 그 이론체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이론체계는 과학이 되려면 실제로 세상에서 작동하는지 작동하지 않는지의 실험이나 시험, 혹은 비판을 거쳐야만 한다. 우리가 만든 이론체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는 어쩔 수 없이 주관성이 개입된다 할지라도, 그 이론체계를 객관적으로, 그리하여 과학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실험과 시험이 필요하고 타인의 비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과학이나 철학적 체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 다시 말해서, 귀납적 추론의 과정이나 직감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 이룩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결국 그 체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여하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인식론적 문제에 답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언하여 사람이 어떤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이미 정해진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고찰하여 여하한 방법론적 접근도 허용되는데, 다만 만들어진 체계가 설명력을 지나고 나아가 실험이나 시험, 그리고 비판을 통과해야 과학적 특성을 지닌다고 우리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는 방식을 - 즉, 학생으로 하여금 진실이나 결정에 이르는 합당한 방식을 -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연역법과 귀납법을 굳이 서로 대조하고 있다.

   그러면 교사가 학생들과 협력하여 발견해야 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로 우리가 다시 칸트에게로 돌아가면, 우리는 가설을 만들어서 자연과 직면하고 그 가설을 자연에 부쳐서 자연의 대답을 듣게 된다.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우리는 이론을 관찰로부터 도출하기 위하여 - 다시, 귀납적 추론이다 - 관찰로써 시작해야 한다는 베이컨의 낭설을 논박했던 과학의 역사를 명료하게 보았다:

 

 

갈릴레오가 자신이 선택한 중력으로 기울어진 평면에서 공을 굴렸을 때; 그리고 토리첼리(Torricelli)가 자신이 알려진 높이의 물기둥의 무게와 동등하게 미리 계산된 무게를 지탱하도록 공기를 마련했을 때;... 그 때 모든 자연 철학자들에게는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우리가 지닌 이성이 자체의 의도에 따라서 창조하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자연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자연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도하도록 만들기보다는, 자연에게 강요하여 우리의 질문에 답변하도록 만들어야 함을. 그 까닭은 미래 고안된 계획 없이 수행된 순전히 우발적 관찰은... 법칙으로써 연결된 수 없기 때문이다 - 법칙은 이성이 탐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부과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론은 사실과 일치해야 참으로서 판정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사실은 언어와 실재의 공동 작품과 같은 것이다; 사실은 기술적(記述的) 서술에 의하여 고정된 실재이다. 사실은 원본과는 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원본뿐만 아니라 선택의 원리들과 다른 추상 방법들에 의하여도 (그 방법들에 의하여 새로운 언어가 결정된다) 결정되어, 원본 책으로부터 나온 추상이다. 새로운 언어적 수단은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기술(記述)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도로, 그 수단은 심지어 새로운 종류의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이 사실들은 그 사실들을 기술(記述)하기 위하여 필수적이었던 새로운 수단이 창안되기 전에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면 이런 과학적 사상은 동양에서 태동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중국에서 과학적 사상의 태동을 엿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국의 과학적 사상을 비판하는 중국인 철학자는 유감스럽게도 그 사상이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사상은 순자(荀子)에게서 유래하는데 ‘천명을 제어하는 편’인 제천명(制天命) 편에서 우리는 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사상은 자연계나 인간세상에서 필연성의 존재를 승인하면서 사람의 힘으로 그 필연성을 좌우하여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인간의 능동성을 강조하여 자연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한다는 칸트의 사고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하여 ‘천지에 관직을 부여하고 만물을 사역시킨다(官天地而役萬物)’는 표현으로 인위적 행위가 강조된다.

   학문적 업적에 대하여 실험과 시험, 그리고 비판이 그 업적을 객관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을 주목하면서, 나는 여기서 우리 교육에서 학생들의 비판적 견해를 고취하거나 적어도 수용하는 관행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한다.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거의 모든 학파가 자신들의 학설을 내세우면서, 그 학설을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은 어떠한가?: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문명 속에서 우리는 종교적 및 우주론적 가르침을 발견한다, 그리고 많은 사회 속에서 우리는 학파들을 발견한다. 이제 학파들, 특히 원시 학파들 모두는 특징적인 구조와 기능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판적 토론의 장(場)이 되기는커녕 그 학파들은 정해진 교설을 전하여, 그 교설을 순전하고 변함없이 보전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업으로 한다. 전통과 학파 설립자인 최초 스승의 교설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이 학파의 과제이고, 이 목적을 향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그 교설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학파는 새로운 생각을 수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이단이어서 분열을 낳는다; 그 학파의 회원이 그 교설을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그 회원은 이단자로서 추방된다. 그러나 대개 이단자는 자신의 교설이 학파 설립자의 진정한 교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심지어 교설 창안자도 자신이 새로운 교설을 도입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곡해되었던 진실한 정설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교설의 모든 변경은 - 발생한다면 -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변경이다. 그러한 교설 변경은 모두 스승의 진정한 교훈들의, 스승 자신의 말의, 스승 자신의 의미의, 스승 자신이 지닌 의도의 재서술(再敍述)로서 제시된다.

이런 종류의 학파에서 우리가 아이디어의 역사나 심지어 그 역사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까닭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새로운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스승에게로 돌려진다. 우리가 아마도 재구성하는 유일한 것은 분열의 역사와, 아마도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특정 교설들을 방어하는 역사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학파에는 이성적 토론이 있을 수 없다. 반대자와 이단자들에 대항하는, 혹은 경쟁 학파에 대항하는 논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로 교설이 옹호되는 것은 논증이라기보다는 주장과 독단과 비난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서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격려하고 수용해야 한다. 더구나 학설이나 학파의 독단성에 덧붙여 우리에게 비판이 필요하다는 논증은, 우리는 실패를 알 수 있지만 성공을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효할 수 있다. 등산가가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등산가 자신이 스스로 쉽게 알 수 있지만, 자신이 정상에 도달했는지는 - 즉, 최종적 진리에 다다랐는지 -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등산가가 급경사에서 돌아서야 한다면 그는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실에 도달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등산가가 지도에 따라 정확한 등산로를 따랐다면 - 급경사가 나타날 때까지 - 그 사실은 과학 이론에서 논리의 일관성을 의미하지만 결국 그 이론은 실패하여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반면, 등산가의 지도에 등산로가 정확하지 못하다면 처음부터 등산이 불가능하여 과학 이론에서는 논리의 불일치, 즉 모순을 의미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 과학이론은 오류로 판명된다.

 

 

5. 이론의 정보성 내용과 이론이 참일 확률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이론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수록, 그 이론이 참일 확률을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수학습에서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교사들이 다시 고찰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이론이 담고 있는 정보성 내용과 그 이론이 참일 확률의 관계를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이론을 만들거나 도입하여 그 이론을 시험하거나 실험하거나, 혹은 적용함에서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서술 a를 ‘금요일에는 비가 올 것이다’로 하고, 서술 b를 ‘토요일은 맑은 것이다’로 하자. 그러면 서술 ab는 ‘금요일에는 비가 올 것이고 토요일에는 맑을 것이다’가 된다. 이 서술 ab의 정보성 내용은 서술 a보다 크고 서술 b보다도 크다. 즉, 이 정보성 내용 세 가지를 서로 크기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1) 정보성 내용(a) < 정보성 내용 (ab) > 정보성 내용 (b)

 

 

그러나 이 서술들이 참일 확률 관계는 정보성 내용의 관계와 정반대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금요일에 비가 오고 토요일에 맑을’ 확률은 ‘금요일에 비가 올 것이다’나 ‘토요일에 맑을 것이다’ 두 서술 어느 것의 확률보다도 낮다. 이 확률 관계를 도식으로 표시하면, (2) 확률(a) > 확률(ab) < 확률(b)가 된다.

 

 

   이 두 가지 도식을 해석하면, ‘내용이 증가할수록 확률은 감소하고, 반대로 내용이 감소하면 확률이 증가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므로 ‘지식의 증가가, 증가하는 내용을 지닌 이론을 사용하여 우리가 일을 해나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감소하는 확률을 지닌 이론을 사용하여 (확률 계산법의 의미에서) 우리가 일을 해나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가 지식의 발전이나 성장이라면 높은 확률은 (확률 계산법의 의미에서) 우리의 목표가 또한 될 수 없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이 문제를 다른 철학자의 말로 표현하면, ‘일반 법칙이 참이라면 특별한 경우는 틀림없이 역시 참이기 때문에, 일반 법칙의 확률이 특별한 경우의 확률보다 분명히 작고, 반면 특별한 경우는 일반 법칙이 참이 아니어도 참일지도 모른다’데 우리는 ab를 각각 특별한 경우로, ab를 일반 법칙으로 대입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 결론은 귀납법과 관련하여서도 중요성을 띠는데, 이론이 정보를 많은 전달할수록 그 이론이 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귀납법을 통하여 - 다시 말해서 관찰성 서술을 통하여 - 사람들은 우리는 고도의 확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백조는 희다’라는 관찰성 서술은, 우리가 무한히 관찰하여 궁극적으로 그 서술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흰 백조를 사람들이 관찰한다고 하여서 그 서술이 참일 확률이 무한히 증가하여 1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귀납적 추론은, 흰 백조와 희지 않은 백조를 번갈아 우리가 발견한다 할지라도, 경험에 의하여 검증될 수도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론으로부터 야기되는 의문은, ‘그렇다면 과학에서 이론이 담고 있는 예측은 무엇인가?’ 즉, ‘이론이 참일 확률이 낮을수록 그 이론의 정보성 내용이 많아진다면, 그 내용이 어떻게 사실에 맞는 예측이 될 수 있는가?’라는 - 뉴튼의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행성의 움직임을 어떻게 예측하는가? - 의문이다. 여기서는 확률 계산법에 따른 확률의 개념이 아니라, 진리에 근접한다거나 진리와 유사하다는 소위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나 진리유사성(truthlikeness)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 개념들은 확률 계산법에 의한 확률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론의 정보성 내용이 전체적으로 진리에 근접하거나 진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론을 실제로 자연이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식 (1)과 (2)에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나 지식의 성장을 도모한다면 확률 계산법의 따른 이론의 확률이 낮음을 목표로 하여야 하는데, 낮은 확률이란 곧 반증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도의 반증가능성이나 고도의 논박가능성이나 고도의 시험가능성은 - 이론이 시험될 수 있는 높은 가능성 - 과학의 목표이자 고도의 정보성 내용이 겨냥하는 목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론을 타당하게 만들고자 이론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면 그 목표는 그 이론이 얼마나 시험될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시험가능성(testability) 즉, 확률의 반대가 되는 그 이론이 지닌 비개연성(非蓋然性: improbability)이 된다. 그러므로 이론은 엄격한 시험이나 비판을 통과할수록 입증도(立證度: corroborability)가 높아져서 그 이론에 대한 신뢰도가 증가한다.

   이론에 대하여 시험 목표나 비판 목표가 적용되는 사례를 서양 과학사에서 찾아보면, 케플러(Kepler)와 갈릴레오(Galileo)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고 더 시험이 잘 될 수 있는 뉴튼의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어 갈음되었고 프레넬(Fresnel)의 이론과 패러데이(Faraday)의 이론은 맥스웰(Maxwell)의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고 갈음되었으며 뉴튼의 이론과 맥스웰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고 갈음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 과학적 진보는 - 다시 말해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나 성장은 - 더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어서 논리적으로 덜 개연적인 - 다시 말해서, 확률이 낮은 - 이론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6. 본질주의(本質主義: Essentialism)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본질주의(Essentialism)는 - 혹은 방법론적 본질주의(methodological essentialism)로 불리기도 한다 - 플라톤을 스승으로 하여 그의 학설을 신봉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증거가 전제에서 시작되어,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당연히 참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제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면,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추종자들은 새로운 전제를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그 새로운 전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전제가 필요하여, 결국 논리학에서 말하는 무한소급(infinite regress)을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소급을 피하기 위하여 명백한 사실로 증거가 필요 없는 전제를 도입하여 ‘기본 전제(basic premises)’라고 불렀다:

 

 

우리가 이 기본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당연시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 과학적 지식 전체는 기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고 우리가 기본 전제에 관한 백과사전적 명세표를 얻을 수 있다면 과학적 지식 전체가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 기본 전제를 얻는가?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앎으로써만 사물을 알 수 있다. 사물을 아는 것은 그 본질을 아는 것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썼다. 그에 따르면, ‘기본 전제’란 사물의 본질을 묘사하는 서술(敍述)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서술이란 바로 그가 정의(定義)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거에 관한 기본 전제는’ 정의(定義)이다.

 

 

   그러므로 정의(定義)가 중요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定義)하는 공식이 사물의 본질이나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궁극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조’를 ‘희다’고 정의(定義)했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흰 색깔을 백조에 맞추어 ‘희다’고 정의(定義)해야 하는지, 그리고 희지 않은 백조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역시 무한소급에 빠지거나 증명이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정의(定義)를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로 다루는 본질주의는 귀납법과 마찬가지로 붕괴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명백한 사실로서 증거가 필요 없는 전제’인 ‘기본 전제’에 오류가 없음을 알 수 있는가? 즉,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기본 전제’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는 밝힐 수 있는가?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에게로 갈 수 있을 따름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오류도 저지르지 않는 지적 직감(知的 直感: intellectual intuition)의 도움을 받아서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직감(直感: intuition)이라는 문제만을 가지고 우리는 사람이 지니는 - 아무리 순수한 직감이라 할지라도 - 직감이 항상 옳아서 어떤 과학적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시인(詩人)도 직감으로 시(詩)의 주제를 파악하여 시(詩)를 쓰며, 과학자도 연구 과정에서 자신의 직감을 사용하여 연구방향을 결정하기도, 수정하기도 한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직감을 사용하여 행동하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감에 따라서 행동했을 때, 얼마나 많은 경우에서 옳았던가? 설사 직감에 따른 행동이 옳다고 하여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그 직감은 일시적이었으며, 부분적으로라도 수정되어야 했던가? 이 문제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답변은 위에 언급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인 제노파네스, 헤라클리투스, 데모크리투스, 그리고 파메니데스에게서 나오며, 그들 모두는 인간이 지닌 감각-자료를 불신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지식을 위하여 정의(定義)에 집착했기 때문에 백과사전식으로 많은 정의(定義)를,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지식을 나열함으로써 과학은 진보하고 지식은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본질주의는 장광설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논쟁에 대한, 다시 말해서 이성(理性)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학풍고집과 신비주의, 그리고 이성에 대한 절망, 이것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플라톤의 공개적인 반역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이성에 반대하는 은밀한 반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본질주의와 정의(定義)의 이론은 최초로 제시되었을 때, 특히 소크라테스의 오랜 동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았는데 그의 비판은 매우 타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반대는 불행히도 패퇴 당했다. 인류의 지적(知的) 발달에 관련된 이 패배의 결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본질주의적 관점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널리 유행하고, 사람들이 극복하기 몹시 힘든 폐해를 낳았다. 과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고, 오늘날 북한의 평양에는 2000만권의 장서를 지닌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와 평양의 도서관이 그 많은 장서를 지님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자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란 늘 문제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지식에 의하여 실험이나 시험이 되고, 비판을 받아 수정되거나 폐기되어 새로운 이론에 의하여 갈음된다면, 알렉산드리아와 평양에서 어떤 새로운 과학 이론이 출현하였다는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주의적 관점은 이렇게 전개된다:

 

 

..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유용하게 토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는 무익한 논쟁 대부분은 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각자가 자신의 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반대자가 그 말들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가 우선 용어를 정의(定義)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이로운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우리는 정치선전이 (현대판 수사학) 성공하기 위하여 주로 용어의 의미를 혼동시키는 데 의존하는 것을 관찰하기 위하여 일간신문을 읽기만 하면 된다. 정치가들이 법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면, 그들은 대중적 인기 대부분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들의 연설은 짧아질 것이며, 그들의 불화는 순전히 언어적임이 밝혀질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대로 ‘정치가들이 법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定義)해야 한다면... 그들의 연설이 짧아질 것’인가? 비트겐슈타인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하려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한소급에 이르러 결국 정치가들의 연설은 짧아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길어져서 장광설에 이르고 마침내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논쟁하는 상대방이 동일한 단어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언어적 혼란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동일한 논제를 가지고 2명 이상의 사람들이나 상대방이 토론을 하거나 논증, 논쟁을 한다면 단어의 의미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 오해를 막기 위하여 배경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 배경지식은 상대방이 모두 이해하고 동의하는 선에서 설정되어 토론이나 논증, 논쟁의 기본 틀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기본 틀 안에서 -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이해하고 동의하는 단어의 정의(定義)를 토대로 하여 - 대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배경지식에 등장하는 단어의 정의(定義)는 본질주의적 정의(定義)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본질주의적으로 단어의 정의(定義)를 궁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토론이나 논증, 논쟁에 필요한 정도의 단어 정의(定義)만으로 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토론이나 논증, 논쟁을 진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를 개념이 충분히 이해되는 선에서 배경지식으로 환원시킨다는 의미는, 부언하여, 단칭명제 속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궁구하는 본질주의적이고 귀납적인 사고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토론이나 논증, 논쟁을 진행한다는 의미는 단어의 의미라는 본질주의적이고 귀납적인 사고로부터, 과감한 선택과 결정이라는 - 단어의 의미를 궁극적인 아닌 방식으로 선택하고 정의(定義)한다는 의미에서 - 연역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부언하여, 우리는 단어를 궁극적으로 정의(定義)할 수 없기 때문에 단어가 지니는 애매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 토론이나 논증, 논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단어의 애매성은 당장에 그 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명백하게 정의(定義)될 수 있다 - 과학의 진보와 지식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지식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방식은 흔히 단어를 왼쪽에 두고 오른쪽의 정의(定義)하는 방식은 취한다. 다시 말해서 ‘강아지는 어린 개이다’라는 말에서 강아지라는 단어를 ‘어린 개’라고 서술하여 정의(定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의(定義)하는 것이 오류라면, 반대로 ‘정의(定義)’하면 어떨까? 다시 말해서 ‘어린 강아지’를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는가? 라고 물으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명칭 붙이는 것을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고 - 혹은 방법론적 유명론(methodological nominalism) - 부른다.

   유명론은 이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유명론에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이다. 그러나 유명론은 무한소급에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 ‘어린 개가 있다. 이름을 무엇으로 붙여서 편하게 대화를 편하게 할까?’나 ‘여기 전자파가 발생하는 장(場: field)을 나는 발견했다. 무엇이라고 이름 짓고 논증을 계속할까?’와 같은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유명론적 접근방식은 설명을 길게 해야 하는, 다시 말해서 이론의 정보성 내용이 길어지는, ‘불편함’에도 불구하여 서양 과학사에서 사실상 과학적 진보를 낳았다. 유명론은 이름에 관심이 없다. 유명론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관심을 쏟는다. 그리하여 유명론은 서양 과학사에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던 반면, 본질주의는 과학에 기여하기는커녕 철학과 과학에서 장광설과 독자 현혹이라는 미신에 머무르면서 나아가 지식을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목적에 반인도주의적 독단으로 맞섰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동시성(同時性: simultaneity)을 연구하면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직감적으로 자명(自明)한 이론적 가정 - 즉, 언어의 용어 - 때문에 사실의 문제를 분석하지 못하고 거짓 가정에 매달렸음을 알았다:

 

 

심지어 용어가 문제를 일으키는 곳에서도,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동시성(simultaneity)’처럼, 그것은 의미가 정밀하지 못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용어에 너무 적은 의미보다는 너무 많은 의미나 너무 ‘정밀한’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하는 어떤 직감적 이론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동시성 분석에서 발견한 것은, 동시적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 물리학자들은 무한 속도의 신호가 있다면 도전 받을 수 없었을 거짓 가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오류는 물리학자들이 무의미한 짓을 했다거나 그들의 의미가 모호했다거나 용어가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그 직감적 자명성(自明性) 때문에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론적 가정을 제거하면 과학에서 나타났던 난제가 제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용어의 의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론의 사실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와 반대로 방법론적 본질주의는 단어나 용어를 정의(定義)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했다는 독단에 빠진다. 지적 직감(知的 直感: intellectual intuition)을 통하여 사물의 본체이자 실체인 이데아를 파악한다는 플라톤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위하여 용어나 단어의 정의(定義)에 집착함으로써 백과사전적 지식을 참된 지식으로 오해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중세에는 이 본질주의적 과학지식론이 풍미한다. 칸트가 신(神)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본질주의적 시도를 비판하자, 모든 이성적 논증과 증거를 거부하고 원리를 선언하는 독단주의인 낭만주의가 독일에서 판을 치게 되어 피히테(Fichte)와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의 비이성적 독단이 성행하게 되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이 시대를 ‘거짓의 시대’로 규정하고 비판에 나선다:

 

 

정직의 특성, 의문을 독자와 함께 떠맡는 정신은 이전 모든 철학자의 작품에 스며있는데 여기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소위 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독자를 가르치려하지 않고 독자를 현혹시키려고 한다.

 

 

7. 역사주의(Historicism)라는 허구(虛構)

 

   역사주의(Historicism)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미래의 역사를 예언할 수 있는 역사적 법칙을 - 그것도 철칙이다 -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흔히 유토피아주의와 연계된다. 대표적인 역사주의적 주장을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의 서문에서 찾아보자:

 

 

사회가 자체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자연법칙을 발견했을 때, 사회는 사회진보의 자연적인 단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펜을 움직여 그 단계를 세상으로부터 떨쳐낼 수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만큼을 할 수 있다: 사회는 산고(産苦)를 줄여서 경감할 수는 있다.

 

 

   이 마르크스의 판단에서 우리는 철저한 운명론이나 인간의 무기력을 찾을 수는 없지만, 사회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자연법칙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다가오는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인간이 방해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역사적 흐름에 관한 기이한 형태의 운명론을 주장한다.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인간이 운영하는 사회에서 순전히 일출이나 일몰,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법칙이 존재하거나 그 자연법칙을 인간이 발견할 수는 없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언어나 문화가 인간과 전혀 다른 - 아마도 동식물의 의사소통을 우리가 의미하는 ‘언어’로 기술(記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동식물과 무기물의 세상에서 발견되는 ‘자연적인’ 법칙을 인간사회의 법칙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Feuerbach)에 관한 논문에서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요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능동적으로 촉구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운명론에 모순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생활의 일관성이란 일반적으로 특정 문화적 기간이나 역사적 기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일반화 방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공(時空)을 통하여 일관성이 일사불란하게 유효하다고 상정(想定)해서는 안 된다고 역사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회 법칙은 - 실제적인 사회 법칙이 있다면 - 일관성에 근거한 평범한 일반화와는 다소 다른 구조를 틀림없이 가진다. 실제적인 사회 법칙은 ‘일반적으로’ 유효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 사회 법칙이, 인간 역사 기간의 부분이라기보다는 인간 역사 기간 전체를 포함하여, 인류 역사 전체에 적용됨을 의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간을 초월하여 유효한 사회적인 일관성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사회에 대하여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법칙은 틀림없이 연속적인 기간을 연결하는 법칙이다. 그 법칙들은 틀림없이 한 기간에서 다른 기간으로의 이전을 결정하는 역사적 발전에 관한 법칙이다.

   이 역사주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포기한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미래의 역사를 알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과거의 역사가 전개되어 온 과정이 미래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이미 정해진 미래의 역사 전개 과정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숙명처럼 미래를 맞이하고 수동적으로 그 미래의 역사를 수용하기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라도,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이 역사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소위 지식인들에 의하여 주장되었고, 그리하여 인류의 진보가 애초부터 불가능함을 예언하여 인류가 좌절하고, 타락하고, 폭력에 의지하도록 만드는 데에 주인공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주의에 중독된 많은 사람들은 작금에 이르기까지 그 독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역사주의적 교설에 중독되어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양 그 교설을 인용하여 설파하고 있다.

    역사주의는 집단주의(collectivism)를 배경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주의의 배경이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아닌 집단주의라는 사실은 집단적 최면을 이용하여 정치적 의도를 지닌 사람들이 그 집단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용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주의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주제로 민족을, 인종주의를 내세우는 파시즘을, 경제적 계급을 내세우는 마르크시즘을 표방한다. 그리고 구약을 통해서 유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택된 민족이라는 역사주의적 집단주의를 제외하면, 파시즘과 마르크시즘은 헤겔(Hegel)로부터 유래하는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추종한다.

   헤라클리투스가 살던 당시 그리스는 종족적 귀족계급이 민주세력에 굴복하여 혁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리투스는 에페서스(Ephesus)의 제정일치 왕가의 왕위 계승자였지만 형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그 후 헤라클리투스는 민주혁명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입장에 서지만 패배한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을 변한다’라는 역사주의적 교설을 내놓는데, 이 교설의 문제점은 ‘변화’를 과잉 강조하는 것이다. 찬 것이 따뜻하게 되고 따뜻한 것이 차게 되면서, 변화하는 물체는 본래의 속성을 잃고 반대 속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물이라기보다는 한 상태에서 반대 상태로 변화하는 이전과정이므로, 죽음과 삶이 같고 깨어있음과 잠이 든 상태가 같고 젊음이 늙음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때문에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을 결국 같은 것이라는 철학이 탄생한다. 이 철학을 헤겔이 받아들여 변증법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헤라클리투스는 역사적 판단을 도덕적 판단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러 전쟁의 결과는 항상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王)이다. 전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사람으로 나타나서 후자(後者)를 노예로 만들고 전자(前者)를 주인으로 만든다... 사람은 전쟁은 보편적이며, 정의(正義: justice)는 - 소송 - 갈등이며, 모든 것은 갈등과 필연을 통하여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헤라클리투스처럼 플라톤도 왕족의 피를 받았다. 아테네가 민주혁명의 와중에 놓였을 때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의 민주세력을 압살하는 데에 앞장섰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그의 삼촌인 크리티아스(Critias)와 카르미데스(Charmides)도 악명 높은 30명의 참주 중 중심적 위치에 있었는데 플라톤의 모계에 속했다. 그는 아테네의 민주혁명 시대를 겪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목적도 없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나는 현기증과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플라톤은 역사주의자자 선배인 헤라클리투스가 했던 바와 꼭 마찬가지로 역사적 발전법칙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요약했다. 귀족주의자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변화는, 당연히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보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이상적인 국가는 변화가 없어서 타락이나 부패, 그리고 퇴보 또한 없는 국가이며 그 국가는 정체된 국가이다. 플라톤은 이 쇠퇴와 몰락이라는 역사주의적 법칙을 페르시아 제국의 쇠퇴와 몰락에 적용해서 급기야는 제국과 문명의 역사,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쇠퇴와 몰락의 역사로 만들어 민주주의를 유약하고 퇴영적이라고 묘사했으며,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저서 ‘서양의 몰락’ 또한 플라톤의 주장에 기초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직접적으로 역사주의를 주창한 바가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몰두했던 백과사전식 본질주의로부터 세 가지 역사주의적 원칙이 발생한다:

 

 

(1)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할 때만, 그리고 국가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 ‘숨겨진, 개발되지 않은 본질’에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관한 어떤 것이든 알게 될 수 있다. 이 원칙은 나중에 무엇보다도 역사주의적 방식의 채택을 낳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주의 방식을 적용함으로써만, 사회 변화를 연구하여 사회적 실체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이든 습득할 수 있다는 원칙의 채택... (2) 변화는, 개발되지 않은 본질 속에 숨은 것을 폭로함으로써, 처음부터 변화하는 물체에 갖추어져 있던 본질, 잠재성, 씨앗을 나타나게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원칙은 역사적 운명이나 피할 수 없는 본질적 운명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념을 낳는다... (3) 현실적이거나 실제적이 되기 위해서, 본질은 변화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 원칙은 나중에, 헤겔에게서 다음과 같은 형식을 띠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 잠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존재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데아가 실제화 되는 것은 활동에 의해서만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로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확실히 매우 겸손한 소망이다), 나는 ‘나의 개성을 주장’해야 한다. 여전히 다소 인기가 있는 이 이론은, 헤겔이 분명하게 보는 바와 같이, 노예제도에 대한 새로운 정당화를 야기한다. 그 까닭은 자기주장이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어느 사람의 관계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모든 관계는 그러므로 주인과 노예, 지배와 복종의 근본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고 헤겔은 지적했다. 각자는 자신을 주장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본성과 용기와 자신의 독립을 보존하는 일반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노예상태로 떨어져야 한다. 개인 관계에 대한 이 매력적인 이론은, 물론, 헤겔의 국제 관계 이론 속에서도 대등한 것을 가지고 있다. 민족은 역사의 무대(Stage of History)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민족의 의무이다.

 

 

   헤겔에 이르러 역사주의는 국가를 통하여 발현된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대륙으로 퍼져갈 때, 프러시아의 절대군주 빌헬름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프랑스 혁명의 물결을 막을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헤겔은 빌헬름 프리드리히 3세 황제를 위하여 기꺼이 국가의 영광을 고취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찬양하던 칸트(Kant)와 반대로, 헤겔은 국가 간의 전쟁을 찬양하며 프러시아 국가주의의 최초 공식 철학자가 된다. 헤겔과 헤겔의 제자를 후원하는 독일이라는 국가는 헤겔의 제자들에 의하여 중등교육이 지배를 당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지금도 독일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통제하는 대학만 존재한다. 국가를 신성한 이데아로 보는 헤겔의 플라톤주의적 국가지상주의는 자신의 말로 이렇게 표현된다: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바와 같이 신성한 이데아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국가를 지구상의 신성이 발현된 것으로 숭배해야 하고,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가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무한히 더 어렵다고 생각해야 한다... 국가는 세상을 통하여 하느님이 걷는 것이다... 국가는 유기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의식(意識)과 사고(思考)는 완벽한 국가에 귀속된다. 국가는 자신의 의지를 안다... 국가는 실제이다 ; 그리고.. 진정한 실제가 필요하다, 실제적인 것은 영원히 필요하다... 국가는..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국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구현화된 도덕적 삶이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그의 변증법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가 즐겨 우리 자신의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사회적 유산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무리인 민족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산물일 뿐이다. 이 발전은 변증법적으로 진행한다. 첫째로 정론(正論: thesis)이 제시되고, 정론은 비판을 불러온다, 정론은 그 반대인 반론(反論: antithesis)을 주장하는 상대방에 의하여 부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견해들의 싸움에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반대되는 것의 통합이자 타협이며 화해인 종합(synthesis)이 나온다. 종합은 두 가지의 반대되는 견해를 자신의 요소로 환원하여 그것들을 부정하고 고양하여 보존한다. 그리고 종합이 이룩되면 전체 과정은 지금까지 도달한 더 높은 수준에서 반복된다. 이것이, 요컨대, 헤겔이 ‘변증법적 3총사’라고 불렀던 진보의 3박자 리듬이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나 고진감래(苦盡甘來) 따위의 인간 삶의 어떤 경향을 묘사하는 것과 유사할 뿐이다. 지금까지 어떤 역사도 역사적 도식에 의하여 변함없이 발전해왔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어떤 면에서 진보하다가 퇴보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역사적 법칙을 도입하여 역사주의적으로 미래의 역사를 예언하는 방법은 없다. 더욱이 헤겔의 변증법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헤겔이 반론(反論: antithesis)을 진보를 위한 필수요건으로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정론(正論: thesis)에 반대가 되는 반론이, 그것도 지속적으로 진보를 한 요건으로 으로서 제시된다는 것은 정선(精選)되고 엄선된, 요컨대, 시험과 실험 및 비판을 거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이론이 아니라 이미 이론에 (正論: thesis)이라는 오류가 필수요건으로 도입됨으로써, 우리의 과학은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이 헤겔의 변증법은 도덕과 윤리에 적용하여도 그 결과는 참담하다. 선(善)이 진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정의(正義)가 이룩되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악(惡)인 반론(反論: antithesis)을 도입해야 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부언하여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우리는 선(善)과 정의(正義)를 위하여 악(惡)과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악(惡)을 부추겨 선(善)이나 정의(正義)와 싸우도록 만들어야 우리는 진보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도 끊임없이.

   헤겔의 영향력은 여전히 도덕과 사회철학 및 정치학에서 매우 강력하다. 정치학에서, 보수 중도파와 파시스트 극우파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극좌파, 모두가 자기들의 정치철학을 헤겔에게 의존한다. 좌파는 헤겔의 역사주의적 도식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전쟁을 계급전쟁으로 바꾸고, 극우파는 국가의 전쟁을 종족 전쟁으로 바꾸지만, 양쪽 모두 다소 의식적으로 헤겔을 추종한다. 현대 사상사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파시즘과 마르크시즘이 헤겔 철학을 모태로 하여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은 헤겔 철학이 지니는 집단적 최면의 효과를 반증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럽과 미국은 자유와 예속이라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인류의 역사에서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조차 이런 집단주의적 역사주의에서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첫째, 그들은 의문을 잘못 설정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누가 지배해야 하는가? 혹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현명한 자라고 답변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은 후대로 내려가면서 필연적으로 잘못된 답변을 유발한다. 루소는 다수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국가가 다스려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치자의 정치권력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와 감시의 대상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적 이념은 이미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에서 실행되고 있었는데, 한 가지 보기는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30년경에 말하는 바, ‘소수가 정책을 낼지라도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판단할 수 있다’이고 또 다른 보기는 독재의 가능성이 엿보이면 그 정치가를 아테네로부터 추방한 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cism)이다.

   둘째, 사람들은 철학이란 마치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학문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소위 헤겔 철학은 이런 면에서 아무 뜻도 없는 횡설수설이나 장광설을 마치 심오한 진리가 담긴 철학인양 내뱉고, 일반인들은 그 무의미한 말에 숨어있는 깊은 진리를 찾아내려고 자신의 지성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헤겔과 개인적으로 친교를 맺었고 ‘미친놈의 혓바닥이지 두뇌는 아닌 것과 같은 것’이라는 섹스피어의 말을 헤겔 철학의 특징으로 제시했는데, 그 거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탁월한 묘사를 했다: ‘헤겔은, 존재하는 권력에 의하여 위에서부터 임명된 증명된 위대한 철학자로서, 어리석고 무미건조하며 구역질나고 무식한 사기꾼이었는데, 그는 완전히 미친 황당한 헛소리를 휘갈겨 써서 만들어내는 데서 오만의 극치에 도달했다. 이 헛소리는 고용된 추종자들에 의하여 불멸의 지혜로 시끄럽게 선포되었으며 그런 상태로 모든 바보들에 의하여 기꺼이 수용되었는데 그 바보들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찬양의 합창에 참가했다. 권력자가 헤겔에게 제공한 광범위한 정신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헤겔은 한 세대를 지적으로 타락시킬 수 있었다.’

 

 

   셋째, 지식을 통하여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사람들인 소크라테스, 칸트,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했던 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헤겔과 피히테, 쉘링과 같은 많은 소위 지식인들이 지식을 통하여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타인을 그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남을 지배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도구로 지식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투스가 한 말에 관해서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것에 대한 느낌 때문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미덕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데 놓여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작은 우주이다... 우리는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훌륭하다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잘못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빈곤은, 자유가 노예 상태보다 나은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정치나 전제정치에서 생겨난다고 주장되는 번영보다 낫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나라에 속하는데, 그 까닭은 위대한 영혼의 집은 전 세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과학자의 이 말은 또한 그로부터 유래한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느니 단 하나의 인과법칙을 발견하겠다!’) 이들은 이성을 도외시하고 민주주의 압살에 앞장섰으며, 기꺼이 폭력의 도움을 받아 사리사욕을 충족시켰다.

넷째, 진리를 궁극적으로 탐색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추종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 사람들이 ‘코를 잡혀 쉽게 끌려갔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우리가 이 현상을 아직도 생성 중인 문명, 즉 인간의 진보가 아직도 진행 중인 인간의 세상 때문이라고 기술(記述)한다면, 그 진보를 촉진하여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부과된다. 그 책무는, 물론, 몽매라는 굴레를 쓰고 예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식을 통한 해방으로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무를 위하여 우리는 ‘가능한 한 분명히 말하고 간략하게 말하는 방법’을 - 오캄의 면도칼(Ockam's Razor)이라는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 -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고 간략하게 밝힘으로써, 심오한 진리가 자신의 견해에 숨어있는 양 횡설수설을 포장하고 미화함을 피하여 타인이 자신의 견해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하여야 상호간에 지식의 진보가 이룩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역사에서 역사적 발전 법칙을 찾아 미래의 역사를 예언하려는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우리가 역사에서 인간이나 인간사회에 관한 다른 일관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인간과 인간이 지닌 목표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가 인간과 인간이 지닌 목표의 산물이며 점점 그렇게 될 것임 또한 사실이다. 주요 문제는: 인간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어느 모습이 강조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과 견해는 주로 우리가 받은 교육에 근거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과 견해가 전통과 이전 세대가 행하는 교육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에게는 비판의식도 없을 것이고 우리 스스로 보고 배우는 능력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비판을 할 수 있는 기능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 오류를 지적하고 수정하여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데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 역사의 특정 분야에서 우리가 비록 퇴보나 정체를 경험한다할지라도 -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아테네 정복에 의하여 퇴보한 것과, 중세의 타락한 기독교를 우리는 예시할 수 있다 - 우리는 역사가 전체적으로 퇴보한다거나 적어도 정체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런 결론과는 반대로, 인류의 역사가 발전한다는 역사적 법칙은 없을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발전했다고 우리가 판단한다면 더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를 다시 고찰해야 한다. 무자비한 자연에 의하여 선택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인간이라는 다윈의 주장이 타당한가? 태고에서부터 단세포 생물로 시작인 생명체가 오늘날에도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면서 생존에 성공하여 번식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자연 앞에 수동적인 생명체라는 개념 대신에, 자연을 능동적으로 개척하여 자신의 생태에 알맞게 개조하여 삶의 지평을 넓혔던 지구상의 생명체를 우리는 자연과 투쟁에서 승리한 존재로서 인정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활동에 비관적인 사람들은 환경오염이라는 문제를 제시하며 생명체의 진화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활동에서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던 사례를 역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가? 생명체 모두가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는 과정을 거쳐서 진화한다는 명제를 우리가 다시 기억한다면, 생명체의 활동에 대하여 우리는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

   인간 생활과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과거나 현재에서 변하지 않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일관성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일관성은 미래에도 변함없이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의 사회생활에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활은 미래에 많이 변할 것이지만 변치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역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적 역사 법칙과는 다른 사회학적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사회학적 일관성을 사회과학에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과학이 야기하는 비현실적인 판단을 배제하는 방법을 목표로 하는 기술적(technological) 사회과학을 생각할 수 있다. 기술적 사회과학은 역사주의에 반대하지만, 역사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은 기술적 사회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회발전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기술적 사회과학은 사회제도의 구축에 제한을 가하는 다양한 법칙을 추구하거나, 다른 일관성을 (역사주의자들은 그런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추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미래 역사를 낙관하는 역사주의는 없을까? 다시 말해서 과거의 역사 전개 상황을 고찰하여 현재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도 퇴보나 정체보다는 발전을 향하여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주의자는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부정적이다. 역사주의도 인간이 지닌 이성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인정한다. 역사주의 또한 인간의 소망과 의지와 사고(思考)와 꿈과 이성과 지식과 관심과 열정, 그리고 두려움도 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역사주의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역사주의는 사람들의 꿈이나 사람들의 이성이 구축하는 것이 계획에 따라서 야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할 뿐이다. 역사의 주류와 일치하는 그런 계획만이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의 주류를 관찰하여 현재와 미래의 역사 주류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거나 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헤라클리투스와 플라톤은 민주혁명의 와중에서 자신들이 누렸던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경험을 사회변화라는 법칙으로 이론화하였다. 헤겔은 대학교수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목적으로 프러시아 절대군주가 요구하는 프랑스 혁명의 열기를 막기 위하여 헤라클리투스와 플라톤의 이론을 빌려 절대군주제와 군국주의적 국가론을 옹호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가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역사주의자 모두가 지닌 공통점 한 가지는 비관론으로부터의 출발이다. 그것도 매우 처절한 비관론이다.

   비관론자는 이성을 포기한 사람이다. 비관론자들인 역사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역사주의는 자신들이 발견한 역사적 법칙을 사람들에게 던지고 수용하던지 거부하던지 둘 중 한 가지 선택을 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성적 토론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그들이 자신의 역사주의적 주장을 철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이성을 저버린 비관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간의 이성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인정한다면, 역사적 예언에 따라서 이성적 행동이 선택하여 따라야 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이 역사주의적인 (과학적) 이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역사주의는 더 이성적인 세상을 만들 능력을 인간의 이성에 거부하기 때문에 미래를 낙관하며 그 미래에 이성적 처방을 내놓을 수 있는 역사주의는 없다.

 

 

8. 유토피아적 사회공학(Utopian Social Engineering)과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Engineering)

 

   나는 위에서 역사주의를 다루면서 역사주의가 흔히 유토피아주의와 연계됨을 지적하였다. 유토피아주의는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를 지구상에 건설하려는 기도를 의미한다. 역사주의자들과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모두는 ‘사회’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회가 지닌 역사적 경향을 결정함으로써, 혹은 ‘자신들의 시대의 요구’를 진단함으로써. 그래서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사회를 개조하는데 그 개조 목적이 유토피아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고, 사회적 전통을 통째로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통하여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획책한다. 따라서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시행할 때 사회는 혁명에 휩싸이고 전통적 가치나 제도는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다. 이런 사회적 혁명은 멀리는 러시아혁명에서, 가깝게는 5.16 군사혁명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러시아혁명과 군국주의식 교육받은 군인들이 주동이 된 우리나라의 5.16 군사쿠데타에서 발견되는 폭력은 노동자의 세상을 만든다는 대의(大義)로, 그리고 근대화를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거나 묵인되었다.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폭력 없이 시행될 수 없다.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계들 때문에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전체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폭력은 대규모이고, 유토피아를 지구상에 건설하려는 청사진이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폭력은 지속적이다.

   역사주의가 유토피아주의와 연계되는 특징적인 경우는 플라톤과 마르크스이다. 아테네의 민주혁명에서 자신의 귀족지위를 상실한 비관론자가 되어 모든 변화는 - 혹은 거의 모든 변화 - 부패라고 믿었다. 변화가 부패라는 것은 플라톤에게 역사적 발전의 법칙이 되었고, 플라톤은 자신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사용하여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낙관론자였는데 아마도 역사주의적 도덕론을 추종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은 정체된 사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발전하거나 ‘역동적인(dynamic)’ 사회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 협박을 모르는 이상적인 유토피아에서 정점을 이루는 발전을 예언했고, 그 발전을 촉진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했다: 국가는 쇠퇴하고,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자유롭게 협력하여, 각자의 욕구는 충족된다.

   역사주의와 유토피아주의가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은 전체론(holism)인데, 전체론은 다양한 사회생활의 모습을 발전시키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전체적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역사주의자들과 유토피아주의자들에게 개인이란 흔히 집단에 속하는 부속물이거나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집단의 가장 기초적 구성원이 개인이라고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면 사회발전에 관한 전체론적 접근방식은 무모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역사주의자들과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사회발전을 전체적으로 기획하기 때문에 점진적 사회개혁에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쉽게 전체론을 선택하며, 그 전체론으로부터 개성을 존중하는 민주이념이 아니라 권력의 집중화를 요구하여 개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 발생한다. 둘째로 역사주의적 전체론은, 이론과학과 반대로, 추상적인 일반법칙보다는 구체적인 개별 사건과 개별적인 인물을 다룬다고 올바른 주장을 펴지만, 역사조차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선택된 대상물의 일부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전체론에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기록된 모든 역사는 전체 역사의 일부이며, 그 기록 또한 불완전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회적 유기체 전체를 대표하는 전체론적 의미에서의 역사는 있을 수가 없다.

   유토피아적 사회공학과는 반대로,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은 기계기술자가 이미 존재하는 기계를 고쳐서 운용하는 것처럼, 사회제도를 고안하고 기존 사회제도를 재구축하여 운용하는 데에 역점을 둔다.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주적 사회공학가는 기존 사회제도를 철저히 파괴하는 화포청소(畵布淸掃: canvas cleaning)를 먼저 시행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청사진에 따라서 백지(白紙: tabula rasa)가 되어버린 말끔한 사회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반면, 점진적 사회공학가는 대부분의 사회제도가 인간행동의 비의도적 결과로서 ‘성장’했지만 소수의 사회제도만이 의식적으로 고안된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점진적 사회공학가는 사회제도를 ‘기능적(functional)’이거나 ‘도구적(instrumental)’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무오류의 사회제도는 구축될 수 없고, 오히려 사회제도는 끊임없이 실험되어 개조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물론 점진적 사회공학가도 사회적 복지와 같은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理想)을 간직할 수 있다. 다만 점진적 사회공학가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회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작은 조정과 조절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고자 노력한다.

 

 

9. 폭력적 혁명이 정당화되는 경우

 

   위 8장에서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 야기하는 혁명적 사회개혁의 폐해를 우리는 살펴보았다. 사회적 전체론에 의하여 개인과 개성을 무시되고, 전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은 그 폭력에 의하여 사회적 목적이 이루지지도 않거니와 그 후유증 또한 오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맴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 아닌 점진적 사회공학을 선택하여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점진적 사회공학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혁명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혁명적 사회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소규모이고 순차적인 점진적 사회개혁에 동의한다면, 역사적으로 결코 드물지 않았던 - 드물다고 하여도 그 사회적 대가는 막대했다 - 정치지도자에 의한 폭압적 정부의 출현을 어떻게 막거나 극복할 수 있을까?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 즉 독재정부가 폭력적 혁명에 의해서라도 전복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먼저 사람들은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번영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출현하였던 박정희 정권으로 통하여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여 장기집권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근대화라는 구호였기 때문이며, 그 구호를 구현하는 방법은 부강한 국가였다. 근대화라는 쿠데타 세력의 구호에 국민들이 동의했고, 따라서 군사 쿠데타를 국민들이 승인했다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적어도 박정희의 집권 이전까지는 근대화되지 않은 국가였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데모크리투스의 말, ‘민주주의의 빈곤은, 자유가 노예 상태보다 나은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정치나 전제정치에서 생겨난다고 주장되는 번영보다 낫다’는 말을 다시 인용하면, 데모크리투스는 귀족정치나 전제정치에서 번영이 생긴다는 주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 창세기 25장에 기록된 배고픈 형 에사오가 동생 야곱에게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고 장자 상속권 팔아넘기는 사건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경멸해서도 안 되고 불콩죽 한 그릇을 받고 팔아서도 안 된다 (창세기 25:34); 가능한 최고의 생산성을 얻으려고 자유를 팔아서도 안 되고, 심지어 자유를 희생하여 효율성을 사는 일이 가능하다할지라도 자유를 팔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박정희 시대의 번영은 일부 기업가들과 독재정치에 가담한 사람들이나 향유하는 것이었고, 일반국민들은 되풀이되는 정치선전에 의하여 번영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을 뿐, 그 번영은 국가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고 국민들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독재자의 영구집권을 경험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근대화의 모습을 보고 느끼기 시작했는데, 기술집약적인 중공업이 아니라 고급기술을 선진국에서 사와서 사용해야 하는 노동집약적인 중공업이었을 뿐이다. 빈곤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연구해온 199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하버드대학 경제학교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이렇게 말한다:

 

 

덜 강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수준에서, 동아시아의 호황기에 사태가 좋아지고 함께 기울 때는 인도네시아와 남한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들의 목소리가 억압당했음을 알았다. 동일한 일이 기업과 정부운영에서의 투명성 요구에서도 일어났다. 그 후 민주주의는 아시아에서 별안간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고 다행히도 핵심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위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과 지식의 발전 방식을, 따라서 사회의 진보가 이룩되는 방식에서 비판을 필수적 요소로서 간주했는데, 독재정치의 특징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정치라는 것이어서 사회의 진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재정치에서 국가적 번영이 나타난다할지라도 그 번영은 길지 않으며, 국민의 일부에게 편중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국민은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국가의 권력을 독재의 수준으로 증폭시키기 때문에 배척되어야 한다. 다시 아마르티아 센은 말한다:

 

 

두 번째, 민주주의는 약자들이 받는 정치적 보호를 확대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통치자들은 사람들이 지닐지도 모르는 요구, 좌절, 불평의 표현을 들어야 한다. 물론 어떤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그러지 않아도 될 때 아무튼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복수정당에 대한 선거와 열린 정치적 토론과 자유로운 언론 및 기타 등등을 통하여 통치자가 경청하도록 보장할 수 있다. 이것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 하나이다. 한 가지 이유로, 기근이 발생한 후에 선거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또한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할 때 민주주의 국가의 행정부는 언론과 국회의 비판이나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근은 식민지나 외부 통치자들에 의해서나 (예를 들어 영국 식민지인 인도와 아일랜드) 일당독재 정권에 의해서나 (예를 들어 1930년대의 소련이나, 1958-61의 중국이나, 1970년대의 캄보디아, 혹은 오늘날의 북한) 혹은 군사독재자들에 의해서 (예를 들어 최근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와 수단) 다스려지는 국가에 국한되었다.

 

 

   우선 폭압적 정부, 다시 말해서 비민주적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칼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언명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본가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상태를 폭력적 혁명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자본가조차도 자본주의 속의 경쟁 원리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인간의 능동성보다는 수동성이 강조되어 사회적 환경에서 탈출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수동적으로 따라야 하는 일종의 운명론을 다시 목격하고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관점을 재확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형태를 다양하게 정의(定義)하거나 설명하지만 결국 우리는 두 가지 정부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예를 들어 총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부와, 성공적인 혁명을 통해서가 아니면 피지배자들이 정권교체를 할 수 없는 - 즉, 대부분의 경우에 정권교체를 전혀 할 수 없는 - 정부. 전자(前者)를 우리는 보통 민주적 정부, 또는 민주주의라 부르고 후자(後者)를 독재 정부, 또는 독재정치라고 부른다. 소위 독재정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합법적으로 정권교체가 가능하지만 정부에 의하여 법률적 절차가 무시되는 경우에도 그 정부는 폭력적 수단에 의하여 교체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독재정치와 더불어, 그런 경우에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국가의 민주적 전통이 취약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10. 미국 속의 개인주의

 

   중국 철학의 최고 권위서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덕경(道德經)은 통치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처신을 전하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기세춘(奇世春) 선생의 저서 노자 강의를 읽고 도덕경의 당시 중국 사회를 풍미하던 유교에 반대하는, 다시 말해서 군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패도가 아니라 왕도를 권유하던 터무니없는 사상가들에 반대하던 일단의 반체제적이고 민중적인 세력이 자신들의 사상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라는 주장을 읽었는데 내가 읽은 다른 도덕경에 비하여 설득력이 높았다. 그런데 도덕경에 있는 많은 유명한 글귀 중에서 통치에 관한 구절이 있는데, 이렇게 통치의 종류를 구분하여 밝힌다:

 

 

가장 훌륭한 것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모르는 것,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것,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太上, 不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중국의 고전 도덕경은 최고의 통치를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정치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경이 규정하는 최고의 통치란 백성들이나 국민들이 통치자를 의식하지 않고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태평성대를 지칭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태평성대가 중국 고대 요순(堯舜)시대에만 있었다고 사람들은 기린다. 과연 전설의 시대인 중국의 요순시대가 태평성대였을까? 거의 야만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이전의 시대가 공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상적인 시대였을까? 많은 사람들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스스로 양보할 정도로 정치권력에 무심했던 통치자의 모습을 지적하며 평화롭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문자 이전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는 신화(神話)가 난무하는 시대를 야만의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니체(F. Nietzsche)는 호머 이전의 그리스를 ‘그리스인들의 삶에서 경쟁이 없으면 즉각 호머 이전의 파괴하려는 증오와 욕망이라는 지독한 야만의 지옥이 나타난다’고 말하여 ‘야만의 지옥’이라고 규정한다. 중국인 철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은 요(堯)가 순(舜)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 선양(禪讓)한 것을 이렇게 비판한다:

 

 

선양이라는 제도는 결코 유가의 독창적 주장이 아니라 원시사회 또는 미개민족 중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원시적 민주주의이며... 요(堯)⦁순(舜)의 선양이라는 그처럼 원시적이고 낙후된 장난감은 대단키나 하겠는가!... 그러한 장난감이 생겨난 이유는 옛날의 생활이 대단히 어려웠고 제왕이 된 사람이 누린 생활도 문지기조차 없었기에 어떤 사람이라도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이니...

 

 

   그런데 184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사회를 세밀하게 살피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책을 저술하였던 프랑스 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정치권력이 느껴지지 않는 미국사회를 이렇게 기술(記述)한다:

 

 

미국을 여행하는 유럽 여행객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부, 즉 행정부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의 부재이다. 성문법은 미국에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 성문법이 매일 시행됨을 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움직일지라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사회적 기계를 지시하는 손은 보이지 않는다.

 

 

   토크빌의 이 관찰은 도덕경(道德經)이 의미하는 최고의 통치인 ‘가장 훌륭한 것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모르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도덕경 어디에도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 반면, 성인(聖人)이라는 개념은 여러 번 등장한다. 도덕경이 추구하는 성인(聖人)은 결국 통치자를 의미하고 그 통치자는 한 사람으로 도(道)에 따라서 통치할 뿐이다. 그리고 한 명의 통치자인 왕은 볼테르(Voltaire)의 주장대로 ‘운이 좋은 군인’이었을 따름이라면 성인(聖人)일 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도덕경이 주장하는 최고의 1인 통치는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을 방문한 토크빌은 왕들이 다스리던 유럽대륙과는 전혀 다른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통치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 즉, 통치자가 보이지 않는 정치로 이해한다. (미국의 통치는 절대군주가 없지만 권력의 분산을 통하여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플라톤에 의하여 이기주의로 매도되었던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라는 말은 사실상 개인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개인주의는 너와 내가 개인으로서 모두 중요하다는 사상으로 플라톤이 의미하는 이기주의는 정반대가 된다. 개인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 박애주의나 인도주의에 아주 가깝다. 이 개인주의라는 말을 토크빌은 자신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처음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토크빌은 미국을 여행한 후 처음으로 개인주의라는 사회적 관행을 발견하고 명칭을 붙인다. 그리고 그는 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대조한다:

 

 

개인주의는 신기한 표현인데, 그 표현을 신기한 개념이 낳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기심(selfishness)에만 익숙했다. 이기심은 자신에 대한 열정적이고 과장된 사랑인데, 그로 인하여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과 연계시키고 세상의 모든 것보다 자신을 선호하게 된다. 개인주의는 성숙되고 조용한 감정인데,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동료들 무리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친구들과 뒤로 물러서게 만들어, 그렇게 자기 자신의 작은 동아리를 형성한 다음에 그는 기꺼이 사회를 전체적으로 내버려둔다. 이기심은 맹목적인 본능에서 유래한다; 개인주의는 타락한 감정으로부터가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출현한다... 개인주의는 처음에 공공 생활의 미덕을 약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결국 개인주의는 다른 모든 것을 공격하고 파괴하여 종국에는 철저한 이기심에 흡수된다.

 

   이 관찰에서 토크빌은 개인주의가 민주주의에서 발생함을 적시하지만 민주주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간파하지 못한다. 토크빌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에까지 전파된 개인주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잘못된 판단’이나 ‘종국에는 철저한 이기심에 흡수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되기보다는 다르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양한 소양을 쌓고 그 소양에 따라서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11. 민족주의 속의 폭력성과 우매함

 

   헤겔이 강조하는 국가로부터 민족주의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는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민족주의는 인간이 지닌 종족적 본능, 그리고 그 본능이 발휘하는 열정을 오도하여 피(血)로 맺어진 인간관계에 호소한다. 따라서 민족주의 안에는 이성(理性)이 발휘되기 이전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감정만 존재한다. 민족주의는, 열린사회와 제국주의와 그리고 세계주의(cosmopolitanism)와 평등주의와 싸우는 닫힌 사회의 종족적 차별주의이다. 이 민족주의가 신(神)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거나 특권이 주어질 때 소위 구약의 유태인처럼, 천황을 신(神)으로 모시는 일본인들처럼 여성과 타 민족에게 배타적이고 잔혹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가 탄생하면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구상의 제국주의는 서양에서는 아테네를 시발점으로, 중동에서는 수메르를 시작으로, 중국에서는 고대 국가 하(夏), 은(殷), 주(周)를 통하여 현대까지 오랫동안 존재하는 정치적 실체였다:

 

 

알렉산더의 제국과 함께, 진정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행에서 영원히, 그리고 정치이론에서 오랫동안 사라진다. 알렉산더에서 시작하여 계속,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문명국가는 무한히 혼합된 지역의 인구를 포함하는 제국이었다. 유럽문명과 그 문명에 속하는 모든 정치단위는 그 후 계속해서 국제적으로, 즉 정확하게 말해서 종족 혼합적으로 남았다. (알렉산더가 우리로부터 떨어진 만큼 다시 알렉산더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수메르 제국은 최초의 국제적 문명을 이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민족주의가 반민주주의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헤겔과 피히테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모든 국가의 영토가 한 만족이 거주하는 영토와 일치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인 민족주의가 종교를 초월하거나, 민주주의와 상관이 없거나 동등한 신조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 불가능하다. 왜 한국의 불교도가 스리랑카의 독실한 불교도보다 한국인 범죄자를 두둔해야 하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가 프랑스의 평범한 시민보다 한국인 군국주의자의 편이 되어야 하는가?

   이 민족주의가 희석되어 승화되는 과정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그런 과정이 있다면, 아시아 지역이 서로 판연히 다르다. 그렇게 지역에 따라서 민족주의가 변하는 과정이 다른 까닭은 지리적 원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지리적 원인 때문에 민족주의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에서 서로 다른 전개 양상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는 근거가 허약한 주장일 뿐이다. 어떤 민족이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특성을 발전시킨다면 그 특성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은 대개 다른 민족에게서 나오거나, 다른 민족의 문화적 특성에 비추어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고찰함으로써 발휘될 수 있다:

 

 

민족국가란 민족주의자들이 꿈꾸는 이른바 ‘민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국경선을 가진 나라에 오랫동안 정착한 동질적인 인종무리들이 없거나, 거의 없다. 인종적 및 언어적 무리들 (방언도 자주 언어적 장애물과 동일하다)은 모든 곳에서 밀접하게 서로 혼합되어있다. 마사리크의 체코슬라바키아는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을 토대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슬로바크 족은 그 원칙의 이름으로 체코 족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같은 원칙의 이름으로, 그 나라는 독일 소수민족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민족무리에 대한 압박은 큰 악이다; 그러나 민족자결도 합당한 해결책이 아니다. 게다가, 영국, 미국, 캐나다, 그리고 스위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민족성 원칙을 위반하는 국가의 분명한 네 가지 본보기이다. 그 국경선을 한 정착무리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대신에, 각각의 나라는 다양한 인종무리를 연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족주의라는 종교는 강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가 도덕적으로 옳으며 실제로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죽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알고 있다; 공산주의자들만큼 잘못 알고 있다. 민족성의 원칙이 옳다고 믿는 것보다 더 증오와 잔인성과 무의미한 고통을 만들어낸 신념은 거의 없다...

 

 

   여기서 미국의 페리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도찰했을 때 일본의 막부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인순고식(因循姑息)적으로 정권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페리(Mathew C. Perry)제독의 함대에 대항하려는 모습과, 내국인들이 미국인들과 내통할까봐 걱정하는 막부의 모습,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기꺼이 협조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후쿠자와에 따르면, 계속 권력 쪽에 편중되었던 저울天秤(천칭)에 변화를 안겨준 것은 페리(Mathew C. Perry, 1794~1858)의 내항來航과 개항開港이었다. 외국에 대한 바쿠후의 인순고식因循姑息적 대응이 정권의 약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버렸다. “세상 사상들은 비로소 정부의 처치處置를 보고 그 어리석고 약함을 알게 되었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과 접촉해서 그 말을 듣거나, 혹은 서양 책洋書를 읽거나 아니면 번역서를 보는 것이 점점 더 규모가 커져서 귀신과 같은 정부라 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1853년(嘉永 6) 6월 페리(Perry)가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도착하여 필모어(Fillmore)대통령의 국서(國書)를 전달하면서 개항(開港)을 요구하자 바쿠후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한편으로는 사태를 조정(朝廷)에 알리고 에도(江戶)에 있는 다이묘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국가의 커다란 하나의 사건”<國家之一大事, this national crisis> “아주 어려운 일”<不容易筋, extremely troublesome matter>에 대하여 거국적인 협력을 요청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래 국내를 통제하기 위해 금지하고 있던 오백 코쿠(石) 이상의 조선(造船) 및 대포 주조를 비로소 허용하면서 모든 한에 군비강화를 촉구했다. 그리고 다급한 나머지 급기야 스스로도 에도만(灣) 방비대책을 강구했지만, 국내적 생산력 및 낮은 기술수준은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당시의 국방 상황에 대해 타카시마 슈우한(高島秋帆, 1798~1866)은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전국에 있는 화약으로 겨우 1년 정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무기만이 아니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 최소한 4 . 5년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초석(硝石, nitrate)은 물론이고 식량도 상당히 많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3년간 버틸 수 있는 무기와 음식을 비축하고 있는 영주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嘉永 6年 10月, 「高島秋帆上書」]. 게다가 그런 슈우한 자신이 이미 포술(包術}을 급속히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혐의를 입어 투옥된[天保 13年(1842)] 사실이 말해주듯이, 그런 근대적 생산 및 기술의 생장(生長)을 집요하게 막았던 것은 “옛날 중국에서 오랑캐를 어루만지는 방식이나 일본을 지켜주는 카미카제(神風)에도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먼저 적의 상황을 자세하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西洋事情御答書」)라는 식견을 가지고 있던 와타나베 카잔(渡邊華山, 1793~1841)이나 타카노 쵸오에이(高野長英, 1804~50) 등의 란가쿠샤(蘭學者, scholars of Dutch Learning)를 체포했던 것과 같은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소견”(井蛙管見)[華山,「愼機論」]의 쇄국의식이 아니었던가. 1850년(嘉永 3)에 이르러서도 사쿠마 쇼오잔(佐久間象山)의 “오랑캐들의 풍속을 제어하는 데는 오랑캐들의 사정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으며, 오랑캐들의 사정을 아는데 있어서는 오랑캐들의 말에 능통하는 것보다 긴요한 것이 없습니다. ......... 바다의 방어<海防>는 천하의 일입니다. ......... 천하의 사람들에게 모두 저들의 사정을 알리는데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오랑캐들의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반적으로 오랑캐들의 책을 읽히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전을 간행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일본어-화란어 사전의 간행 요청을 끝내 기각시키는 등, 바쿠후는 국민들을 외국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려는 방침을 계속 유지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쿠후의 페리대책자문에 응한 여러 다이묘오(大名) 내지 한(藩) 사무라이들의 상소문이 거의 대부분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명망이 일세를 풍미했던 미토(水戶)의 영주 나리아키(齊昭, 1800~60)조차도 “전함과 대포는 직접 맞붙어 싸우면서 승부를 가리는데 불편하다. 그래서 설령 그런 오랑캐들이 일단 해변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상륙할 수 없다면, 그 욕심을 드러낼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건장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창과 칼로서 무장시켜, 기회를 틈타고 변화에 응하게 하고 또 우리들의 장점으로 저들의 단점을 제압하게 하고, 옆에서 갑작스레 뛰쳐나가기도 하고 적의 뒤로 돌아가 차단시키거나 하면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죽기로 싸운다면 오랑캐들을 물리치는 일은 마치 이 손바닥안에 있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라고 하여, 저들의 전함 대포에 대응하는데 있어 “신의 나라(神國) 일본의 장기(長技)”인 칼과 창으로 맞서려고 했다. 그외에 당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주장들도 오랑캐를 막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 정도 사람의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또 사쿠마 쇼오잔은 “일본의 권위와 위엄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도 바로 지금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큰 변혁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지금 나라안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서로 화합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면 대체 나라 안팎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라는 식으로 탄식하고 있다. 그리고 요코이 쇼오난(橫井小楠, 1809~69)은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또 기계가 갖추어져 있지도 않은데 전쟁을 치르게 되면 백번을 싸우더라도 모두 패배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라고 근심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쿠후 내지 바쿠후와 친근한 관계에 있던 한슈(藩主)들이 개항 요구에 응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염려했던 것은 “이같은 굴욕을 받아들이고 또 바쿠후의 힘과 위엄(武德)이 쇠약해졌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면, 다른 나라는 차치해두고라도 전국의 크고 작은 다이묘오들까지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나라들 다스리는 정치도 결코 이전과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사태가 아시카가(足利)씨가 통치(統治)하던 시대의 말기 상황처럼 될까봐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嘉永 6年 8월 7日 松平慶永 「對幕府上書」)라고 하고, 또 “이들을 힘으로 물리치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고서 행여 너무 관대하고 미약한 조치를 취하기라도 하게 되면, 아래 사람들은 위에서 정말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간악한 백성들이 바쿠후의 위광(威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다른 마음을 품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라를 유지하고 또 다이묘오들과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게 될런지도 모릅니다”(德川齊昭, 前揭 上書)라고 한 것처럼, 바쿠후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일어날 제후 내지 일반 백성들의 반역이었다. 봉건권력은 외부를 두려워하기 보다 먼저 내부를 경계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외부를 두려워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순수<純> 피치자로서의 서민에 대해서는 바쿠후.한을 통털어 봉건 지배자 일반의 깊은 의구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위에서 본 나리아키처럼) 일찌기 1842년(天保 13) 로오쥬우(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가 아편전쟁에서 칭(淸)나라가 맥없이 패배하는 것에 자극받아 1825년(文政 8)의「무이념타불령(無二念打拂令)」을 완화했을(이른바 「天保薪水令」) 때, 그것에 반대하여 강경한 양이론을 바쿠후에 진언했다. 그런데 그 논거는 오로지 “나라안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기는 하지만, 거칠기는 어부(漁夫)들이 가장 심합니다. 이제 오랑캐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행여 그들이 바다에서 오랑캐들과 접촉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 그 명령을 폐기하신다면 무역(貿易)의 간악함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얼마동안은 을유(乙酉)의 명령(1825년의 無二念打拂令)/ 지은이)에 따라 순박한 백성들을 온전한 통치 하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점에서 찾았다. 이런 우민관(愚民觀)에 기초한 서민들에 대한 불신, 그리고 외국세력과의 결탁에 대한 의혹이 대외관계가 밀접하게 되어 감에 따라 어떻게 지배층에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 당시의 문헌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치 그와 같은 불신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일부 상인들은 준엄한 단속망을 뚫고서 외국 선박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확실히 타카시마 슈우한이 “이윤에 눈이 멀게 되는 상인들은 언제나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해서 엄한 형벌을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행실을 바꾸려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떤 일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이윤을 위해서 적들과 더불어 과연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고 지적한 것(앞의 상소문)과 같은 그런 내면적인 긍지를 갖지 못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은 천민 근성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리아키가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우민관(愚民觀)이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파렴치함이야말로 상인들을 가치질서의 최하위에 위치하게 한 봉건체제 및 도덕에 의해 반사적(反射的)으로 생겨난 부산물에 다름아니었다. 일반 서민들의 경우 종래 모든 정치적 능동성을 부정당하고 오로지 통치의 객체로서 사생활의 좁은 부분으로 내몰려온 그들에게서 갑작스레 국민적 책임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1964년(元治 元年) 8월 솔선해서 양이(攘夷)를 실행했던 쵸오슈우(長州) 한이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아 무력하게 시모노세키(馬關)의 포대(砲台)를 점령당하는 비운(悲運)에 처했을 때, 서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당시 영국 군함에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목격했던 어네스트 사토우(E. Satow)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작업하고 있는 부대에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스스로 자진하여 대포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여러 가지로 귀찮게 했던 장난감들을 철거하는 것을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 위에서의 국민에 대한 불신과 아래에서의 정치적 무관심은 이리하여 서로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년간에 걸친 봉건적 관계가 가져다 준 참혹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요코이 쇼오난이 1860년(萬延 元年) “일본 전국의 형세는 어떤 통일된 통제체제 없이 여러 조각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1853년 페리가 일본에 와서 일본을 정부가 없는(無政事) 그런 국가라고 꿰뚫어본 것을 보면 역시 매우 뛰어난 직관과 통찰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꺼리고 피하는 것(忌諱)을 무릅쓰고서 감히 논해본다면, 바쿠후가 제후들을 대하는 초기의 제도는 그 병력을 소모시키려는 것이었다. 산킨코오타이(參覲交代)를 비롯해, 각각 영지의 크기에 비례하여 건물을 짓는데 협조하게 했으며, 바쿠후의 영지와 산에서 화재 훈련 및 검문소의 수비들을 하게 했으며, 또 근래에 이르러서는 변경지역을 지키게 하는 등 온갖 사역(使役)을 다 시켰는데, 그 부담이 결국에는 각 한(藩)의 피폐한 백성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또 금.은.화폐로부터 제반 제도에 이르기까지 포고하고 시행하는 이른바 권부<覇府>의 막강한 권력<覇柄>에 의해 토쿠가와 가문만의 편리를 도모하는 사적인 운영으로 인해 결코 천하를 편안하게 만들지 못했으며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정치.교육<政敎>을 시행해본 적이 없다. 페리가 정부가 없는 그런 국가라고 한 것도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國是三論」)라고 단정했을 때, 그는 그야말로 토쿠가와 봉건제 260년간의 지배를 일괄적으로 정리요약했던 것이다.

 

 

   아시아는 유럽과 비교하여 자연적인 국경선이 명확하다. 아시아의 국경선은 강이나 바다, 산맥과 사막을 기준으로 대체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교통을 배경으로 민족주의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과, 이민자들의 국가인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유럽은 처음부터 여러 민족이 뒤섞여서 국경 쉽게 바뀔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유럽 평원에서 생존한다. (그런 유럽의 역사를 알고 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그치지 않는 대륙이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은 실수나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운다.’는 명제를 유럽대륙에 적용한다면 민족 간의 기나긴 적대적 행위 기간을 통하여 결국 민족 간의 적대적 행위는 무용하다는 깨달음에 유럽인들은 도달했다. 따라서 유럽인들과 그 유럽인들이 건립한 국가인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지닌 다원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고취조차 하지 않는가? (유네스코를 통하여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의도를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정책으로 우리는 불 수 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민족주의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동북아시아 국가인 한국과 중국에는 민족주의가 아직도 건재하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건재한 민족주의를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찾아본다. 근세조선의 모습을 그린 유명한 이 소설은 토속적이며 외세에 저항적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정치적 주제는 민족주의이다. 삼강오륜이 국가윤리로서 백성을 지배하는 이조시대에 양반과 하층백성인 서민과 종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흉년에 겉보리 몇 말을 주고받은 농토로 거부가 되어버린 최참판댁을 위주로 살아가는 소작인들과 종들의 갈등은 주로 음모와 폭력으로 계급적 갈등을 겪는다.

   양반에 의하여 백성과 천민에 대한 천시와 가혹행위로 점철된 이 소설의 초기부분은 아무리 선비적인 관념을 높이 보아, 최참판 가의 윤씨 부인과 그 아들 최치수, 또 하나뿐인 윤 씨 부인의 손녀 최서희가 동네에 물질적 혜택을 베풀고 소작인들의 생계를 돌보아 준다하여도 최 씨 가가 평사리에서 영원히 부유하고 존귀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 토지에서 일본인 오가다는 일본 민족주의의 폭력성을 이렇게 폭로한다:

 

 

인간의 총체는 인류가 아닌가, 민족은 부분이다. 인간의 비극은 인류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도 인류의 비극이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생존을 저애하고 압박하는 것은 죄악이며, 근본적으로 부조리다. 이런 말 하는 나를 이상주의자라 흔히들 비웃지만, 하지만 염치없는 이기주의를 어찌 옳다 하겠느냐. 애국, 애족만 내세우면 범죄도 해소되는 그 기만을 수긍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민족을 부정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민족주의를 부정했을 뿐이야.... 인간의 생명과 존엄은 본질적으로 어느 누구도 침해하고 억압할 권리는 없어. 사회주의 유물론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는 일본의 보수파들, 그들이야말로 알고 보면 철저한 유물론자 아니겠느냐? 신도니 황도니 그것 다 허울에 불과한 거야....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질수록 추악해지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 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하여 사람들은 얼굴 없는 하수인, 동물적인 광란에도 수치심 죄의식이 없게 된다. 군중은 강력하지만 군중 속의 개인들은 무책임하고 방종하다. 권력이 그것을 조종할 때 권력은 인간의 부정적인 면 포악한 속성을 식지(食指)가 움직이는 곳으로 풀어주고 사냥해온 물소의 고기 한 점 던져주면서 국수주의의, 애국애족의 이리를 만드는 거지. 박애주의다, 평등이다, 그 밖의 수없이 많은 슬로건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는 극장 앞의 영화 프로 같은 게야. 사실 우리는 조선을 동정하기 앞서 우리 자신을 동정해야 하며 약자에게 포악할 자유만이 허용되는, 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오가다의 말을 통하여 박경리 씨는 일본의 과거 침략의 배경을 일본 민족주의, 국수주의, 군국주의로 본다. 그리고 일본의 국수주의는 결국 팽창정책으로 나타나며, 이 팽창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 군국주의이다. 일본의 국수주의는 일본의 민족주의적 본질을 굳게 지키는 것을 넘어서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여 군국주의적인 제국주의가 된다. ‘민족은 역사의 무대(Stage of History)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헤겔의 국가주의적 파시즘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가다의 주장처럼 민족주의 속의 ‘군중은 강력하지만 군중 속의 개인들은 무책임하고 방종하다’가 아니고 마루야마 마사오의 저서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정부와 새뮤얼 버틀러의 표현처럼 ‘코를 잡혀 쉽게 끌려갔기’ 때문에 파시스트적 자국정부에 순종했던 일본국민들이었다.

   박경리 씨는 일본의 야만적 세력이 물러가고 다시 이조의 선비적 정신문명이 꽃피는 역사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씨조선의 정치제도는 절대왕정이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소위 ‘선비’라는 양반층이 왕과 세력다툼을 벌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급사회를 구축한 귀족정치체제였다. 우리는 소위 ‘선비’라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조의 양반정치에 저항했던 수많은 ‘민란’을 볼 수 있으며, 그 저항을 묘사한 소설도, ‘홍길동전’, ‘춘향전’에서부터 ‘임거정’에 이르기까지 많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시카고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통적인 한국정부는 거의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반대였다. 이조는 경제에서 주로 수입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책임을 졌지만 항상 넉넉하기보다는 적정수준이어서, 잉여수입을 경제성장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이조는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중국정권이나, 주임무가 단기간의 정권유지나 적응이었던 다른 관료적 정권과 비견될 수 있었다. 이조의 제도는 시간을 두고 적대적인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적은 변화와, 고정된 상태의 독재적인 경제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사소한 조절에서 적응적이었고, 심지어 신축적이었다. 옛 한국정부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어서 사회와 관련하여 매우 강력했다고 묘사하는 최근의 연구와 반대로, 제임스 펄레이스(James Palais)는 이 정부가 토지귀족들이 두드러지는 사회에 의하여 지배당하여, 허약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겉으로 중앙집권적 독재구조는 귀족권력의 실제를 가린 겉모습이었을 뿐이다.” 귀족계급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힘을 이용했다; 이것은 일본의 병탄 바로 전 해까지 일어났다. 한국에서 귀족계급과 국가는 이용 가능한 잉여자원을 두고 경쟁했는데, 후자가 자주 패배했다. 관료구조는 귀족들의 요구에 적응했으며, 따라서 보통 강력한 정부에게 있는 자율성과 징수능력이 부족했다. 그 대신에 전통적인 한국이 가졌던 것은 강력한 계급구조로, 중앙정부의 침투를 저지하는 능력에서 “진짜 중세의 귀족계급”을 거의 닮은 “귀족신분과 사적인 토지소유권의 혼합”이었다. 이조는 인내하면서 비교적 제한된 부(富)의 총화를 놓고 귀족계급과 패배하는 전쟁을 치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조는 공공분야와 민간분야 사이의 현대적 구분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국가 전체의 성장을 위하여 부(富)의 축적을 장려하려고 공공분야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대신에 농업적 수축과 유사한, 현존하는 자원으로부터 더 많이 얻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거나, 현존하는 자원으로부터 더 많이 얻는 그 노력을 배가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수축활동이 있었다.

이조는, 그러므로, 심장부에서는 강력했지만 지방에는 약하고 가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토지계급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농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국가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 지배는 불완전했다; 연합은 무지러질 수 있었고, 그래서 농민반란은 재발하는 현상이었다. 19세기말에, 이 국가는 일본이든 서구국가든 신흥 산업 강국의 침략에 대응하는데 완전히 무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이곳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대신 강조되어야할 것은 토지귀족들이 국가를 자기지배를 영속화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에 성공한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지닌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런 귀족주의적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란 무엇이었을까? 왕권과 대립하면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를 이용하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선비적 정신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박경리 씨의 주장처럼 그런 선비적 정신이 꽃피는 역사가 다시 도래하기를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직도 건재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유럽인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떨까?: ‘당신들도 수많은 전쟁을 겪은 후에야 민족주의를 포기할 것이오.’ 우리가 민족주의를 포기하는 방식이 전쟁을 통해서 민족주의의 무익함을 인식하기가 아니라면, 결국 유럽인과 미국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민족주의란 무의미한 독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미래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변할까, 아니 민족주의는 영원히 강력한 이념으로 살아남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에게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족주의의 불꽃이 세계 곳곳에서 맹렬히 타오를 때 - 민족해방운동이 에티오피아와 필리핀과 같은 곳에서 확산될 때, 카리브 해의 작은 섬 도미니카(Dominica)나 남태평양의 작은 섬 피지(Fiji)가 자신의 국가를 선포하고 국제연합에 대표단을 파견할 때 - 고도 산업사회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민족이 흥성하는 대신에 옛 민족들이 분해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제 3 물결이 지구를 가로질러 굉음을 내자, 민족-국가들은 - 제 2 물결 시대의 주요 정치적 단위 - 위와 아래로부터 억센 압력으로 조임을 당하고 있다.

한 무리의 힘은 정치권력을 민족-국가로부터 민족 아래의 지역이나 무리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다른 힘들은 국가로부터 초국가적 대행기관이나 조직으로 권력을 이전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을 일별하면 알려지듯이, 합쳐서 그들은 고도산업사회의 분열을 이끌어내어 더 작고 힘이 약한 단위로 만들고 있다.

 

‘국가’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인 결정적인 수십 년의 세계를 맞이하는 가장 정서적이고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고, 어떤 기능들이 지방화 하거나 세계화하는 것보다는 그 기능들에 대하여 국가적 통제를 유지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맹목적 종족주의와 민족주의는 양쪽 모두 위험하고 퇴행적이다. 그리고 종족이나 신(神)이 부여한 우수성의 개념에 연결될 때, 그것들은 폭력과 압제를 낳는다.

 

 

 

12. 성악설(性惡說)인가 성선설(性善說)인가?

 

   성악설이 옳은가, 성선설이 바른가? 라는 문제는 오랜 세월을 두고 논란거리였다. 순자(荀子)는 ‘성악(性惡) 편’에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순자는 ‘유효(儒效) 편’에서 ‘본성은 우리가 만들 수 없지만, 그러나 변화시킬 수는 있다’고 주장하여 악한 인간의 본성이 인위에 의하여 선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보았을 때 주로 인간을 순수하게 동물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그리고 식욕과 성욕과 같은 욕망을 지녔으며, 이러한 정욕을 발전하게끔 만든다면 쟁탈이나 폭력만이 일어나서 동물과 차별이 완전히 없어진다고 생각하였다. 반드시 인간의 정욕과 본성을 감화하고 인도하는 예의와 사법(師法)이 있어야 비로소 사양함을 알게 되고 문화가 생긴다.

   인간의 본성을 악(惡)하다고 결론을 내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폭력밖에 없다. 악한 인간의 본성을 순치시키기 위하여 또 다른 악(惡)인 폭력을 수단으로 우리는 교육을 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조성한 문명이란 악(惡)을 토대로 하여 이룩된 것인가? 노예나 다름없는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사당하며 이룩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가?

   성악(性惡)에서 악(惡)을 ‘오’로 읽으면 ‘오’는 ‘불완전한’의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성오설(性惡說)이 되는데, 그 의미는 ‘인간의 본성은 불완전하다’나 ‘인간의 본성은 어리석다’로 해석될 수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한다. 인간이 지식은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어서 결국 인간은 어리석다면, 교사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자각하고 학생의 어리석음을 또한 전제해야 한다. 부언하여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라는 전제로 우리가 교육은 한다면 당연히 관용이 교육의 배경을 이룰 수밖에 없다. 학습자에 대한 관용이 교육의 배경을 이루고, 우리가 교육에서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교사들의 길은 반복되는 이성적 설득의 길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학생들에게 이성적으로 말해야 한다.

   서양에도 성악설과 성선설은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의 지적(知的) 발달이 우리의 도덕적 발달을 능가했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성악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선량하지만 무지하다’는 주장은 성선설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선설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지하다’라는 전제에서 우리는 지식을 확대할 의무를 느낀다. 지식을 확대하는 방법은 이미 지적되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거에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저지른 죄악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 죄악의 총화를 산출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인간의 무지로 인하여 저질러진 죄악의 특성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상 저지른 죄악은 과욕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과대하게 욕심을 부렸다. (우리 시대의 주요 고통은 - 그리고 나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 우리가 지닌 도덕적 사악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흔히 오도된 도덕적 열정에 기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개선하려는 고민에 기인한다. 우리의 전쟁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전쟁이다; 그 전쟁들은 더 나은 세상을 세우려는 방법에 대하여 싸우는 이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그리고 분명히 지나치게 간단한 우리의 도덕적 원칙을 우리가 적용해야 한다고 느끼는 복잡한 인간적 및 정치적 상황에 적용하기가 흔히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도덕적 열정은 흔히 오도된다.) 과욕은 희생을 불러온다. 자신의 희생은 물론 타인의 희생도 과욕은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떤 인간도 대의(大義)를 위하여 희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인이 다중을 위하여, 아니 소수를 위하여 희생될 수 있다는 주장은 소수가 다수를 위하여, 또는 다수가 소수를 위하여 대의(大義) 때문에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는 낳는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대의(大義)라는 이름으로 발생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학살행위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사랑하기에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사람을 화형에 처한 마녀사냥 같은 행위를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 저질러졌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위대한 독재자들은 공포와 희망과 편견과 질시와 심지어 증오를 이용하지만, 주로 도덕성에 호소한다. 도덕성에 호소함으로써 그 독재자들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독재자들은 민족을 도덕과 동일시하여 국민들에게 제시한다. 플라톤과 같은 독재자들은 현명함을 도덕으로 내세워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광을,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를 도덕성으로 삼아, 국민들의 복종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도 신뢰하지 않는 도덕성이라는 염불을 외우면서 인간의 선량함을 터무니없이 강조한다. 그것이 독재자들이 지닌 힘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대의(大義)에 대해서도 물론 도덕성과 사랑에 대해서도 이성(理性)과 함께, 어떤 대의(大義)를 위해서도, 어떤 도덕성을 위해서도, 어떤 사랑을 위해서도 특정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는 원칙이 필요하다.

 

 

13. 맺음말

 

   우리 교육이 귀납적 방식을 지향하고, 반대로 미국을 포함한 서양의 교육이 연역적이라면 어느 교육이 우수한지 밝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교사들은 연역적 교육을 위하여 새로운 연역적 교육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가령 전 교과목에 걸쳐 교사들은 연역적 수업방식을 개발하여야 하는데, 그 작업이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유명론적 학습을 우리가 지향한다면 어떤 교육적 시공(時空)에서 어떤 인위적 행위를 통하여 - 주로, 연역적 방법이 되겠지만 - 진실이나 결정에 이를 것인지를 우리 교사가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명론적 학습방법은 한 가지 방법론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학습이나 탐구에서 목적하는 바는, 결국, 이론을 사실과 일치시키는, 다시 말해서, 사건이나 현상에 부합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사실성[realism]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사의 연구 과제에서 발생하는 것은 과감한 예측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서, 교사가 학생보다 앞서서 전문화라는 좁은 지평에서 벗어나 어떤 발견이 이룩될지 알 수 없는 새로운 교육적 시공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사도 학생도 무엇을 발견할지 알 수 없는 시공에서 교수학습에 임한다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을 불러온다. 첫째는 교사가 학생들의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하여 기존 이론이나 교설을 시험하거나 실험하거나 비판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의 진보를, 지식의 성장을 이룩해야 한다. 두 번째로 교사가 교수학습을 준비함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기존 이론이나 교설을 소개함에서, 그 이론이나 교설이 답변하고자 했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이론이나 교설은 당시 이론 창시자나 교설 주창자가 지녔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따라서 이론이나 교설이 답변하고자 했던 역사적 문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이론이나 교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이론이나 교설을 시험하거나 실험하거나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나 지식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두 번째 조건으로 인하여 교사는 실로 많은 연구 활동을 하지 않으면 교수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아직도 단편적인 관찰에 의하여 그 관찰을 기초로 한 서술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다면 우리의 교육은 암울하다. 그런 교육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하여 개혁하려는 의지와 더불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난관과 긴 연구 활동이 필요한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지니거나 미덕을 지니도록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지만, 우리는 제한적으로나마 사람들이 이성적이 되도록 가르치는 방법은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연역적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비판과 귀납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하도록 한다면 학생들은 통찰력을 지니고 미덕도 지니며, 이성적(理性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의 교육은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통하여 진정으로 올바른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500여년의 연역적 추론과 비판이라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서양 철학사 및 과학사의 전통을 이해한 미국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내려야 하는 결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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