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I
양동이와 탐조등: 지식에 관한 두 가지 이론들
이 논문의 목적은, 자연과학들의 목적들과 방법들에 관하여 널리 믿어지는 견해를 비판하여 대안적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I
내가 검토할 것을 제안하는 견해에 대한 간략한 해설로써 나는 시작하겠는데 그 견해를 나는 ‘과학의 양동이 이론’으로 (혹은 ‘정신의 양동이 이론’) 부르겠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우리가 세상에 관하여 어떤 것을 알 수 있거나 말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지각들을 ㅡ 감각 경험들 ㅡ 경험해야 한다는 설득적인 교설이다. 그 교설은, 우리의 경험인 우리의 지식은 축적된 지각들로 구성된다는 (객관주의 경험론a: naїve empiricism) 아니면 흡수되고 정리되어 분류된 지각들로 구성된다는 (베이컨에 의하여, 그리고 더 근본적인 형태로 칸트에 의하여 옹호된 견해) 교설로부터 귀결된다.
ㅡㅡㅡㅡㅡㅡ
오스트리아의 티롤(Tyrol), 알프바흐(Alpbach)에서 1948년 8월에 열린 오스트리아 대학의 유럽
포럼에서 행한 (독일어로) 그리고 1949년, 지몬 모제르(Simon Moser)에 의하여 편집된 법칙과 실재(Gesetz und Wirklichkeit)에서 ‘자연법칙과 이론 체계(Naturgesetze und theoretische Systeme)’라는 제목으로 독일어로 최초로 발간된 강좌. 이전에 영어로 발간되지 않음. [이 번역에서 추가된 원문들은 꺽쇠괄호 안에 넣어졌거나 각주들에서 지적된다.]
논문은 본 저서에서 그리고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더 완전하게 전개된 개념들 중 많은 개념들에 앞서고(이 동사의 원어는 anticipat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논하고 있다’로 번역되었다: 역자) 게다가 논문은 내가 다른 곳에서 발표하지 않은 몇 가지 개념들을 포함한다. 그 개념들 대부분과 ‘정신의 양동이 이론’ 및 ‘과학의 [그리고 정신의] 탐조등 이론’은 나의 뉴질랜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에 최초로 언급된다. 나는 1946년에 런던정경대학의 Staff Club에서 (이한구 번역본에는 ‘’공개 토론회‘로 번역되었으나 역자는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지 못함: 역자) ‘정신의 양동이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한 가지 논문을 강독했다. 이 부록은 특히 현재 저서의 2장 및 5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a 역주: 이 경험론이나 경험주의는 통상적으로 ‘소박한 경험론’이나 ‘소박한 경험주의’로 번역되는데
경험에서 객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역자는 ‘객관주의 경험론’으로 번역했고 다음 쪽에 순수 경험론(pure empiricism)과 동의어로 쓰이는 듯하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이 과정에 관하여 다소 원시적인 개념들 지녔다.
원자들은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관통하는데 그 감각기관들에서 원자들은 지각들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시간이 지나면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스스로를 조합한다 [스스로-조합하는 조각그림처럼]. 그렇다면 이 견해에 따라서 우리의 정신은, 지각들과 지식이 축적되는 용기(容器: a container)를 ㅡ 일종의 양동이 ㅡ 닮는다. (베이컨은 지각들을, 끈기 있고 근면하게 수확되어야 하는 그리고 압착되면 순수한 지식의 포도주가 흘러나올 익고 제철인a 포도들’로서 언급한다.)
엄격한 경험론자들은 지식이 축적되는 이 과정을 가능한 한 우리가 간섭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참된 지식은, 우리가 우리의 지각들을 덧보태기와 혼합하기가 너무나 쉬운 저 편견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지식이다; 이것들만이 순전히b 경험들이다. 지식이 축적되는 과정을 우리가 방해하고 간섭하여 이렇게 추가사항들을 이행하면 결과는 오류이다. 칸트는 이 이론에 반대한다: 지각들이 항상 순수하다는 것을 부인하여, 우리의 경험은 흡수와 변형이라는 과정을 거친 결과라고 ㅡ 감각 지각들의 그리고 우리의 정신들에 보태지는 특정 구성요소들이 결합된 산물 ㅡ 그는 주장한다. 지각들은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양동이로 흘러드는 원료인데 양동이에서 그 원료는, 베이컨이 말하는 ‘순수한 경험의 포도주’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결국 변하기 위하여, 어떤 (자동적인) 처리과정을 ㅡ 소화(digestion)나 혹시 체계적인 분류와 유사한 것 ㅡ 겪는다; 아마도 발효된 포도주로 변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자.
이 두 가지 견해들 중 어느 것도, 내가 믿는바 경험을 습득하는 실제적 과정에 대해서나 탐구나 발견에서 이용되는 실제적 방법인 것에 대해서 합당한 그림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칸트의 견해는 아마도 그렇게 해석될 것이어서 순수 경험론이 내 자신의 견해에 근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 자신의 견해에 근접한다. 나는 물론, 경험이 없으면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개념은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인정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들이 ‘양
동이 이론’에 따라서 원료와 같은 것이 되는 것처럼, 지각들이 그런 것이 되어
그런 것으로부터 우리가 ‘경험’이나 ‘과학’을 구축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c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ripe, and in season which have to be gathered, patiently and industriously and from which if pressed, the pure wine of knowledge will flow인데 형용사구 ripe, and in season이 명사 grapes를 뒤에 수식하는 문법적 오류이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pure and simple인데 experience 뒤에 위치하고 이한구
번역본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경험을)’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주절 원문은 I nevertheless hold that perceptions do not constitute II
과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지각이라기보다는 관찰이다.a 그러나 관찰은, 우리가 강력하게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관찰은 지각이지만 계획되어 준비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관찰이 있지 [우리에게 감각 경험이 있을<have> 것과 같이] 않지만 우리는 관찰을 ‘한다(make).’ [항해사는b 심지어 관찰에 ‘몰두한다.’] 관찰에는 항상 특정 관심, 의문, 혹은 문제가 선행한다 ㅡ 요컨대 이론적인 것이 선행한다. 결국, 우리는 문제를 우리가 다음을 덧붙이는 가설이나 추측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그런가? 네인가 아니면 아니오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관찰에는 문제인 가설이 (혹은 우리가 그것을 지칭할 여하한 것) 선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아무튼 이론적이거나 사념적인 것에 의하여 우리에게 흥미를 부여할 것이 선행한다고. 이것이, 관찰들이 항상 선택적이고 관찰들이 선택의 원칙과 같은 것을 전제하는 이유이다.
이 요점들을 한층 더 상술하기 전에 나는, 생물학적 특성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을 여담으로서 소개하겠다. 그 언급들에는, 내가 나중에 제안하려고 의도하는 주요 주장을 위한 토대나 심지어 논증이 될 의도는 없을지라도 그 언급들은 아마도 그 주요 주장에 대한 반론들을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나중에 그 주요 주장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게 할 것이다.
III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것도, 특정 자극들에 반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반응들은 특수하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생명체에게 (그리고 각각의 생명체 유형에게) 가능한 반응들의 숫자는 제한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는 어떤 가능한 반응들의 내재적 집합이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려는 의향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의향들의 집합은 생명체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변하거나 (부분적으로 아마도 감각 인상들이나 지각들의 영향을 받아서) 불변상태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어떠하든, 생명체의 생애의 어느 순간에 그 생명체에게는 그런 반응하려는 가능성들과 의향들의 집합이 부여되고a 이 집합은 자체의 [일시적인] 내재적 상태로 지칭될 것이 된다고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b.
이 생명체의 내재적 상태에, 그 생명체가 자체의 외부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의존할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다양한 자극들이 동일한 반응들을 야기할 것인 반면 물리적으로 동일한 자극들이 다양한 시기들에서 다양한 반응들을 낳을 이유이다.
생명체가 지닌 반응하려는 의향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변한다는 조건으로만c, 그리고 이 변화들이 생명체의 상태 안의 내재적인 [발전관련] 변화들에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변화하는 외부적 환경의 상태에도 또한 의존한다고 전제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 우리는 생명체가 ‘경험으로부터 배운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생명체는 경험으로부터 배운다고 말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가 배우는 과정을, 양동이 이론이 그렇게 간주할 터와 같이 지나간 지각들에 의하여 뒤에 남겨진 (배열되거나 분류되거나 연결된) 기억 흔적들의 축적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체가 지닌 반응하려는 의향들에서 특정 종류의 변화나 수정(修正: modification)으로서 우리는 간주할 것이다.
반응하려는 생명체의 의향에서 이 수정들(修正들: modifications)에는 배움의 과정들을 구성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그 수정들(修正들: modifications)은 ‘기대(期待: expectation)’라는 중요한 개념과 그리고 또한 ‘좌절된 기대’라는 중요한 개념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는 기대를 반응하려는 의향으로서 혹은 반응을 위한 준비로서 규정할 것인데, 그것은 앞으로 발생할 환경의 상태에 적응된다 [혹은 그 상태를 예측한다]. 이 규정하기는, 기대를 의식의 상태들을 통하여 기술하려는 규정하기보다 더 합당한 듯이 보인다; 이유인즉 우리의 기대들 중 많은 기대들이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될 때만 우리가 그 기대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례는, 우리가 가는 통로에서 예기치 못한 계단과 조우하는 것이 될 터이다: 우리가 평평한 평면을 조우하기로 기대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도록 만들 것은 그 계단에 대한 예기치 못함이다.a 그런 좌절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체계를 어쩔 수 없이 고치게 된다. 배움의 과정은 주로 그런 교정들에 (corrections)에 놓인다; 다시 말해서, 특정 [좌절된] 기대들의 제거에.
IV
이제 관찰의 문제로 돌아가자. 관찰은 항상 어떤 기대들의 체계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이 기대들은 의문들의 형태로 정식화될 수 있다; 그래서 관찰은, 그렇게 정식화되는 기대들에 대하여 확인하거나 교정하는 답변을 얻는 데 이용될 것이다.
의문이나 가설이 틀림없이 관찰에 선행한다는 나의 주장은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였을 것이다b. 그러나 우리는 이제, 기대들이 ㅡ 다시 말해서, 반응하려는 의향들 ㅡ 틀림없이 모든 관찰에 그리고 정말로 모든 지각에 선행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전혀 역설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유인즉 지각들과 관찰들은 분명히 내재적이 아닌 반면 반응하려는 특정 의향들이나 경향들은 모든 생명체들에게서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각들과 훨씬 더 많게는 관찰들이 반응하려는 우리의 의향들이나 경향들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지라도, 몇 가지 그런 의향들이나 경향들은 틀림없이 물론 먼저 존재하거나 수정될 수 없을 터이다.
이 생물학적 심사숙고들은c 내가 행동론적 입장을 수용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지각들, 관찰들 그리고 다른 의식적 상태들이 발생하나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들이 양동이 이론에 따라서 수행하기로 예상되는 역할과 매우 다른 역할을 그것들에게 할당한다.d 또한 이 생물학적 심사숙고들은c 어떤 의미에서도 나의 논증들이 근거할 전제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이 논증들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을 향하여 도움이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다음 심사숙고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인데 그 심사숙고들은 이 생물학적 심사숙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it is ~ that ~의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b 역주: 이 문장의 주절동사는 may have seem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보인다’로 해석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eflec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반사작용들’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에서 표현된 a role very different from the one they are supposed to play
according to the bucket theory에서 very different이하의 형용사구는 명사 a role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이다.
고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우리의 과학 이전 혹은 과학적 발전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는, 내가 통상적으로 ‘기대들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s)’으로 지칭한 것의 중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나는, 우리가 지닌 기대들이 잠재의식적거나 의식적이든 아니면 혹시 심지어 어떤 언어로 명시적으로 서술되든, 그 기대들의 총계를 의미한다. 동물들과 아기들에게도, 의심의 여지없이 가령 그 기대들의 지평이 상당한 정도까지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이나 가설들로 구성되는 과학자보다 낮은 수준의 의식에 근거할지라도, 자기들의 다양하고 다른 기대들의 지평들이 또한 있다.
기대들의 다양한 지평들은 그것들이 더 의식적이거나 덜 의식적임에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내용에서도 물론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경우들에서 기대들의 지평은 참고 틀의 역할을 한다: 단지 이 틀에서 그들의 위치만 우리의 경험들과 행위들 및 관찰들에 의미나 중요성을 부여한다.a
관찰들은, 더욱 특히, 이 틀 내부에 매우 고유한 기능을 지닌다. 관찰들은, 기대들 중 어떤 기대들과 충돌한다면, 특정 상황 하에서 심지어 틀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관찰들은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지평에 포탄과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포탄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전체 지평을 재구축하거나 재건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기대들을 교정해서 그 기대들을 일관적인 전체와 같은 것으로 다시 맞추어 넣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지평이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되거나 재구축된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 진화에서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피해를 입은 지평의 저 부분들이 수리되어 재건축되는 반면, 포탄에 의하여 포격당하지 않은 저 기대들은 어떤 방식으로 지평에 통합되는 단계. 이것은, 피해를 입히는 관찰들이 더 이상 파괴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나머지와 통합되는 방식으로 틀림없이 수행된다. 우리가 이 재건축에서 성공한다면, 통상적으로 저 관찰되는 사건들에 [파괴인 문제를 만들어 낸] 대한 설명으로서 알려진 것을 우리는 만들어 낸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는 관찰과 다른 한편에서는 기대들이나 이론들의 지평 사이의 시간적 관계라는 문제에 관하여, 이전 기대들의 지평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운 설명을 시도하는 데 자극이 된 저 관찰들이 새로운 설명이나 새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ly their setting in this frame confers meaning or significance on our experiences, actions, and observ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우리의 경험들, 행동들 및 관찰들에 의미와 뜻을 부여하는 것은 이런 틀에 예상들을 맞춤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운 가설에 일반적으로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관찰들이 일반적으로 기대들이나 가설들에 선행한다고 말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각 관찰에는 기대들이나 가설들이 선행한다; 더욱 특히 저 관찰들에게 중요성을 부여하는 기대들의 지평을 구성하는 저 기대들이;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실재적인 관찰들의 위상을 얻는다.
‘무엇이 먼저 오는가, 가설(H)인가 아니면 관찰(O)인가?’라는 질문은 물론 다음과 같은 저 다른 유명한 질문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무엇이 먼저 오는가, 닭(H)인가 아니면 달걀(O)인가?’ 두 가지 질문 모두가 해결 가능하다. 양동이 이론은, [달걀(O)의 원시적 형태인 단세포 생명체가 닭(H)에 앞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관찰(O)이 항상 모든 가설(H)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이유인즉 양동이 이론은 후자(後者)를 관찰로부터 일반화나 연계나 분류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우리는 이제, 특정 가설을 반박하는 관찰이 새로운 (그리고 그리하여 시간적으로 나중의) 가설을 자극할지라도 가설이 (혹은 기대나 이론이나 우리가 지칭한 여하한 것) 관찰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더욱 특히, 과학적 가설들의 형성에 적용된다. 이유인즉 우리의 가설들로부터 우리가 어떤 종류의 관찰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목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할지를. 그리하여 우리의 안내자가 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관찰적 결과들로 인도하는 것은 가설이다.
이것이, 내가 ‘탐조등 이론(searchlight theory)’으로 (‘양동이 이론[bucket theory]’과 대조적으로) 지칭한 견해이다. [탐조등 이론에 따르면, 관찰은 가설들에 부차적이다.] 관찰들은, 그러나, 우리가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가설이 겪어야 하는 시험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설이 검토를 통과하지 못하면, 가설이 우리의 관찰들에 의하여 오류로 판정된다면b 우리는 새로운 가설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이 경우에 새로운 가설은, 옛 가설에 대하여 오류판정이나 배척을 야기한 저 관찰들 뒤에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들을 흥미롭고 유관하게c 만든 것과 첫 번째 사례에서 관찰들을 우리가 전적으로 떠맡도록 만든 것은, 앞선 옛 [그리고 이제 배척된] 가설이다.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it is ~ that ~의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b 역주: 이 문장에는 두 개의 종속절이 등장하는데 뒤의 종속절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eleva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적절하게끔’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우리가 지닌 기대들의 지평에 관한 과학 이전의a 보수작업이 직접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서 분명히 보인다. 과학은 무(無)로부터 시작되는b 적이 없다; 과학은 전제들 없이 결코 기술될 수 없다; 이유인즉 모든 순간에 과학은 기대들의 지평을 ㅡ 말하자면, 어제의 기대들의 지평 ㅡ 상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어제의 과학을 기초로 건설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과학은 어제의 탐조등의 결과이다]; 그리고 어제의 과학은, 차례에 따라, 그 전날의 과학에 근거한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과학적 이론들은 과학 이전의 신화들(神話들: myths)을 근거로 건설되고 그 신화들은, 자기들의 차례에서, 훨씬 더 오래된 기대들에 근거한다. 개체 발생적으로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생명체의 발전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리하여 신생아가 지닌 기대들의 상태로 회귀한다; 계통 발생적으로 (인류인 종[種]의 진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단세포 생명체들이 지닌 기대들의 상태에 다다른다. (여기에는 사악한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라는 위험이 없다 ㅡ 모든 생명체는 어떤 기대들의 지평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c.) 말하자면d,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단지 한 단계만 있다.
이제 이것이 과학이 진화하는 방식이라면, 과학 이전에서 과학으로의 천이를 표시하는 특징적인 단계는 무엇이라고 언급될 수 있는가?
V
과학적 방법과 같은 것의 최초 진화 시작들은, 약 기원전 6 및 5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진화에서 무엇이 새로운가? 전통적인 신화들(神話들: myths)은 동양에서 왔고 내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개념들에 대한 결정적인 제안들 중에서 많은 제안들을 제공했는데, 새로운 개념들은 전통적인 신화들(神話들: myths)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바빌로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에는, 그리고 또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사이에는 ㅡ 정말로 우주론적 신화들(神話들: myths)을 창안하는 모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re-scientific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전-과학적’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starts from scratc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가정들 없이는... 기술될 수’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종속적의 원문은 if for no other reason than that every organism is born with
some horizon of expect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모든 개체 유기체가 예상들의 어떤 지평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로 번역되었다.
d 이 표현의 원어는 as it we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사실상’으로 번역되었다.
든 민족들 사이에서로 보일 터이다 ㅡ 사물들의 시작을 다루는 그리고 우주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여 설명하려는 설화들이 언급된다. 이 설화들은 전통이 되고 특별한 학파들에게 보존된다. 그 전통은 흔히 사제들이나 약종상들인 어떤 분리되거나 선택된 계급을 보존하는 데 있는데 그들은 그 전통을 배타적으로 방어한다. 이야기들은 겨우 조금씩 변한다 ㅡ 주로 그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다루면서 부정확함을 통하여, 오해들을 통하여 그리고 때때로 예언가들이나 시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신화들(神話들: myths)의 축적과정을 통하여.
그리스 철학에서 새로운 것인 이 모든 것에 추가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보다 ‘과학적인’ 것에 의한 신화들의 대체에 놓여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신화들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놓여있다. 그 다음에 그 신화들의 특징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이 새로운 태도의 결과일 따름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태도는 비판적 태도이다. 교설을 [전체 관심이, 주장되는 전통의 보존에 놓여있는] 독단적으로 계속 다루는 것 대신에a 우리는 그 교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들이 그 교설에 관하여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교설의 신뢰 가치를 의심한다: 그 교설의 진실성을.
의심과 비판은 틀림없이 이 단계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의심과 비판이 이제 차례에 따라 학파 전통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은 중요성을 띤 전통이 전통적인 독단의 보존을 대체한다: 전통적인 이론 대신에 ㅡ 신화(神話: myth) 대신에 ㅡ 우리는 이론을 (자체가 처음에는 신화들 이상이 아닌) 비판하는 전통을 발견한다. 관찰이 증인으로서 소환되는 것은 이 비판적 토론의 과정에서뿐이다.
탈레스(Thales)의 제자였던 아낙시맨더(Anaximander)가 그의 스승의 이론으로부터 명시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기하는 이론을 발전시킨 것과 아낙시맨더(Anaximander)의 제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가 그의 스승의 교설로부터 꼭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분기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리가 없다. 유일한 설명은, 학파의 창립자 자신이 제자들에게 자기의 이론을 비판하라고 도전한 것과 그 제자들은 스승의 이 새로운 비판적 태도를 새로운 전통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 될 듯하다.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In the place of a dogmatic handling on of the doctrine [in which the whole interest lies in the preservation of the authentic tradi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교설을 전수받은 [본래의 전통을 보존하는 데 전체 관심을 쏟는] 독단적인 사람 대신에’로 번역되었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단지 한 번만 발생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초기 피타고라스학파는 거의 틀림없이 낡은 종류의 학파였다: 그 학파의 전통은 비판적 태도를 포용하지 않고 스승의 교설을 보전하는 과제에 국한된다. 나중에 피타고라스학파의 경직성을 풀어서 비판적인 철학적 및 과학적 방법을 야기한 길을 닦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오니아인들의 비판적인 학파의 영향이었을 따름이다.a
고대 그리스 철학의 비판적 태도는 제노파네스(Xenophanes)의 유명한 구절에 의하여 가장 잘 예시될 수 있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가 손을 지니고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람들처럼 조각할 수 있다면, 말들은 자신들의 신들(神들: gods)을
말들처럼 그릴 것이다; 그리고 소는 소처럼; 그리고 각각은 그리하여
신들(神들: gods)의 신체들은, 각 종류를 자신의 닮음으로 형성할 것이다.
이것은 비판적인 도전만이 아니다 ㅡ 이것은 비판적 방법론을 완전히 인식하고 터득하여 내놓은 서술이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과학에서 새로운 것이 되는 것과 과학의 특징인 것은 비판의 전통이다.a 다른 한편으로 내가 보기에 과학이 스스로 정하는 과제와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설명] 과학이 이용하는 주요 개념들은 과학 이전의 신화 제작으로부터 부단히 계승된다.
VI
과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 질문으로써 나는 생물학적 및 역사관련 추세들에 대한 예비적 검토를 마감했고 이제 나는 과학 자체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 온다.
과학의 과제는 부분적으로 이론적이고 ㅡ 설명 ㅡ 부분적으로 실천적이다 ㅡ 예측과 전문적b 적용. 나는, 이 두 가지 목표들이 어느 정도 동일한 활동의 두 가지 다른 모습들임을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나는 먼저 설명이라는 개념을 검토하겠다.
a 역주: 이 문장에서 it was/is ~ that ~의 강조구문이 it was/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technic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기술적’으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흔히, 설명은 미지의 것을 알려진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언급되
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듣지 못한다. 아무튼 설명에 대한 이 개념은, 과학에서 설명을 실제로 사용되는 데 이용된 적이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저런 때 설명의 어떤 종류들이 이용되어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수용되었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가 과학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실제적 이용에서 설명에 대한 매우 다른 개념을 발견한다.
나는 오늘 오전 철학 세미나에서 이 역사에 (나는 설명이라는 개념의 역사가 아니라 설명의 실행에 관한 역사를 의미한다) 대하여 짧게 개괄했다. 불행히도, 시간 때문에 나는 이 문제를 여기서 상세하게 다시 다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일반적인 결과를 언급해야겠다. 과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많은 다양한 방법들과 설명의 종류들이 수용 가능한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에 한 가지 모습이 공통적으로 있다: 설명의 다양한 방법들 모두는 논리적 연역으로 구성된다; 그 결론이 피설명항(explicandum)인 ㅡ 설명되는 것에 대한 서술 ㅡ 그리고 그 전제들이 설명항(explicans)으로 [법칙과 조건들을 설명하는 서술] 구성되는 연역. 과학의 역사적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변화들은, 설명항(explicans)의 특징에 (설명항이 직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 설명항은 자명한 것일 수 있다는 것, 기타 등등) 대한 특정 함축적인 요건들을 소리 없이 포기한 것에 놓여있다. 그 결정적인 중요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특정 다른 요건들과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요건들; 특히 [전제들과 그리하여 설명의 바로 핵심을 형성하는] 설명항(explicans)의 독립적인 시험가능성에 대한 요건.
그리하여 설명은 항상 설명항(explicans)으로 지칭되는 특정 전제들로부터 피설명항(explicandum)을 연역하는 것이다.
여기에 단지 예시를 할 목적을 위한 다소 끔찍한 보기가 있다.
죽은 쥐 한 마리가 발견되었고 우리는 그 쥐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하여 피설명항(explicandum)은 다음과 같이 서술될 것이다: ‘이 쥐는 여기서 최근에 죽었다.’ 이 피설명항(explicandum)은 확정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ㅡ 사실은 우리 앞에 완벽한 실제로 놓인다. 우리가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몇 가지 추측적이거나 가설적인 설명들을 경쟁시켜야 한다 (탐정소설들의 작가들이 하는 것처럼);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미지의 혹은 아무튼 덜 알려진 것을 도입하는 설명들. 그런 가설은, 예를 들어, 쥐가 쥐약을 많이 먹어 죽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먼저 피설명항(explicandum)이 연역될 수 있는 설명항(explicans)을 우리가 정식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 가설로서 유용하다; 두 번째, 그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독립적인 시험들을 ㅡ 피설명항(explicandum)이 참인지 아닌지와 전적으로 독립적인 설명항(explicans)에 대한 시험들 ㅡ 제안한다.
이제 설명항(explicans)은 ㅡ 우리의 가설인 ㅡ ‘이 쥐는 많은 양의 쥐약을 지닌 어떤 미끼를 먹었다’는 문장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데 이유인즉 이 서술만으로 우리가 피설명항(explicandum)을 타당하게 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전제들을 ㅡ 보편적 법칙들과 초기 조건들 ㅡ 설명항(explicans)으로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보편적 법칙은 아마도 이와 같이 표현될 것이다: ‘쥐가 적어도 8그램의 쥐약을 먹으면 쥐는 5분 내로 죽을 것이다.’ (단칭) 초기 조건은 (단칭 서술인) 아마도 이럴 것이다: ‘이 쥐는 적어도 5분 이상 전에 적어도 8그램의 쥐약을 먹었다.’ 이 두 가지 전제들 함께로부터 이제 우리는 정말로, 이 쥐가 최근에 죽었다고 [다시 말해서, 우리의 피설명항<explicandum>] 연역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다소 명백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들 중 한 가지 주장을 ㅡ 즉, 내가 ‘초기 조건들’로 [개별적인 경우에 속하는 조건들] 지칭한 것은 독립적으로는 설명으로서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항상 일반적인 법칙 또한 필요하다는 주장 ㅡ 고려하라. 이제 이 주장은 전혀 명백하지 않다; 반대로 그 주장의 진실성은 흔히 인정되지 않는다. 쥐약의 효과들에 관한 보편적 법칙의 명시적 서술이 추가되지 않을지라도 ‘이 쥐는 쥐약을 먹었다’와 같은 언급을 쥐의 죽음을 설명하기에 완전히 충분한 것으로서 여러분 대부분이 수용하고 싶어 할 터인지 나는 심지어 의심한다. 그러나 ‘쥐약’으로 불리는 저 많은 화학약품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또한 여하한 쥐도) 1주일 동안 특별히 건강하고 앞으로 행복하게 그리고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느낄 것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고 잠시 동안 상상하라. 이와 같은 보편적인 법칙이 타당하다면 ‘이 쥐는 쥐약을 먹었다’와 같은 서술이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서 여전히 수용될 수 있을 터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단칭 초기 조건들만을 이용하는 설명은 불완전할 터이라는 그리고 이 보편적 법칙이 몇 가지 경우들에서 잘 알려져서 마치 불필요한 양 생략될지라도 그 외에도 적어도 한 가지 보편적 법칙이 필요하다는 흔히 간과되는 중요한 결과에 우리는 그리하여 도달한다.
이 요점을 요약하면. 설명은 다음 종류의 연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다:
보기: Universal Law 보편적 법칙 Premisses 전제들
Specific Initial Conditions 특수한 초기 조건들
(constituting the Explicans 설명항인)
Explicandum 피설명항a Conclusion 결론
VII
그러나 이런 구조를 지닌 모든 설명들이 만족스러운가? 예를 들어 우리가 든 보기는 (쥐약을 언급하여 쥐의 죽음을 설명하는) 만족스러운 설명인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시험들을 하면 쥐가 무엇 때문에 죽어든, 그것은 쥐약이 아니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어떤 친구가 우리의 설명을 의심하여 ‘이 쥐가 독약을 먹었다는 것은 너는 어떻게 아는가?’라고 물으면, ‘쥐가 죽은 것을 보았는데 너는 어떻게 그것을 의심할 수 있냐?’라고 답변하는 것은 분명히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우리가 어떤 가설을 지지하여 서술할 여하한 이유도 피설명항(Explicandum)과 다르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피설명항(Explicandum) 자체를 증거로서 제출할 수 있을 따름이라면, 우리의 설명이 순환적이어서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을 우리는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쥐의 위장에 남아있는 내용물을 분석해라 그러면 너는 다량의 독극물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예측이 (새로운 ㅡ 다시 말해서, 피설명항[Explicandum]만에 의해서는 수반되지 않는) 참으로 판명된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설명이 상당히 훌륭한 가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것을 추가해야겠다. 이유인즉 의심하는 우리의 친구가
a 역주:
보편적인 법칙이 지닌 진실성을 또한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인정한다, 이 쥐가 어떤 화학약품을 먹었다; 그러나 왜 쥐는 그 화학약품 때문에 틀림없이 죽었는가?a’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는 이렇게 말해서은 안 된다: ‘그러나 너는 쥐가 죽은 것이 보이지 않냐? 이 화학약품을 먹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저것이 너에게 보여줄 따름이야.’ 이유인즉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설명은 다시 순환적이어서 불만족스럽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설명을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피설명항(Explicandum)과 독립적인 경우들을 시험하는 보편적인 법칙들을 제출해야 할 터이다.b
이것으로써 설명의 형식적인 도식에 대한 나의 분석은 끝난 것으로 간주될 것이지만 나는 내가 개괄한 일반적인 도식에 몇 가지 추가적인 언급들과 분석들을 추가하겠다.
먼저,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들에 관한 논평. 단칭 초기 조건들에 의하여 기술되는 사태는 ‘원인’으로 지칭될 수 있고 피설명항(explicandum)에 의하여 기술되는 사태는 ‘결과’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용어들이 그 용어들의 역사에서 유래하는 연상들(聯想들: associations)에 의하여 방해를 받을지라도 더 잘 회피된다고 느낀다.c 우리가 여전히 그 용어들의 사용을 원한다면, 그 용어들이 이론이나 보편적 법칙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논리적 연결인 것은 이론이나 법칙이어서d ‘A는 B의 원인이다’라는 서술은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틀림없이 분석된다: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시험된, 그리고 특수한 상황에 관해서 독립적으로 시험된 기술 A와 결합하여 또 다른 특수한 상황에 관한 기술 B를 우리가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는 이론 T가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그런 논리적 연결의 존재가 바로 이 용어들의 사용에서 상정된
다는 것은 흄[Hume]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간과되었다.)
VIII
과학의 과제는 순전히 이론적 설명들을 탐색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a 그 과제에는 자체의 실천적인 측면들이 또한 있다: 전문적인 적용들뿐만 아니라 예측-하기. 이것들 두 가지 모두는, 우리가 설명을 분석하기 위하여 도입한 동일한 논리적 도식으로써 분석될 수 있다.
(1) 예측들의 도출. 설명 탐색에서a 피설명항(explicandum)이 주어지고 ㅡ 혹은 알려지고 ㅡ 합당한 설명항(explicans)이 발견되어야 하는 반면, 예측들의 도출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이론이 주어지거나 알려진 것으로 전제되며 (아마도 문헌들로부터) 특수한 초기 조건들도 그러하다 (그 초기 조건들은 논평에b 의하여 알려지거나 알려진 것으로 전제된다). 발견되도록 남는 것은 논리적 결론들이다: 논평b으로부터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특정 논리적 결론들. 이것들이 예측들이다. 이 경우에 예측 P는 우리의 논리적 도식에서 피설명항(explicandum) E를 대신한다.
(2) 전문적 적용(Technical application). 시방서(示方書: specifications) 목록에 적힌 특정 실천적인 요건들에 부합해야 하는 교량 건설의 과제를 고려하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방서 S인데 시방서 S는 요구되는 특정 사태를 ㅡ 건설될 교량 ㅡ 기술한다. (S는 발주자의 시방서이고 건축가의 시방서 이전에 주어져 건축가의 시방서와 구별된다.) 우리에게는, 추가적으로, 관련된 물리적 이론들이 (특정 상식과 경험에 근거한 규칙들을d 포함하여) 주어진다. 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적으로 실현될 그리고 이론과 함께 그 초기 조건들로부터 시방서가 연역될 특성을 지닌 특정 초기 조건들이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S는 우리의 논리적 도식에서 E를 대신한다.
이로 인하여 논리적 관점에서 과학적 이론들과 관련한 예측들 도출과 전문적 적용 두 가지 모두가 어떻게 과학적 설명과 관련한 기본적 도식의 전도(顚倒: inversion)일 따름으로 간주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우리의 도식 이용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그 이용은 또한 우리의 설명항(explicans)을 시험하는 절차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절차를 시험하는 것은, 설명항(explicans)으로부터 예측 P를 도출하는 것에 그리고 그 예측을 실제적이고 관찰될 수 있는 상황과 비교하는 것에 놓인다. 예측이 관찰된 상황에 부합하지 않으면, 설명항(explicans)은 허위로 밝혀진다; 그것은 오류로 판정된다. 이 경우에 허위인 것이 보편적인 이론인지 아니면 초기 조건들이 실제적 상황에 대응하지 않는 상황을 기술하는지 ㅡ 그리하여 초기 조건들이 허위인지 ㅡ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물론, 이론과 동시에 초기 조건들이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예측이 오류로 판정되면 설명항(explicans)이 허위일 것임이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역순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측의 ‘검증(檢證: verification)’을 설명항(explicans)이나 심지어 설명항(explicans)의 한 부분을a ‘검증하는 것(verifying)’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고 심각한 오해를 낳는다. 이유인즉 참인 예측이, 허위인 설명항(explicans)으로부터 쉽게 타당하게 연역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측에 대한 모든 ‘검증’을 설명항(explicans)에 대한 실제적인 입증(立證: corroboration)과 같은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심지어 완전한 오해를 낳는다: ‘기대되지 않은’ [검토 중인 이론이 없는] 예측들에 대한 그런 ‘검증들’만이 설명항(explicans)에 대한 그래서 이론에 대한 입증들(corroborations)로서 간주될 것이라는 말하는 것이 더 옳을 터이다. 이것은, 예측을 관찰들과 비교함이 아마도 설명항(explicans)을 시험하려는 진지한 시도로서 ㅡ 설명항(explicans)을 반증하려는 진지한 시도 ㅡ 간주된다는 조건으로만 어떤 이론을 입증하는 데 예측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모험적인’] 예측은 ‘이론에 대한 시험에 유관한’으로 지칭될 것이다. 결국 학생이 통과하는 시험이 충분히 엄격하다는 조건으로만 시험을 통과하면 학생의 자질들에 대한 개념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과 심지어 가장 약한 학생도 쉽게 통과할 시험이 고안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명백하다.a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우리의 논리적 도식b으로 인하여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론적 설명이라는 과제와 역사관련 설명이라는 과제들 사이의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다.
이론가는 보편적 법칙들을 발견하여 시험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 법칙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이론가는 다양한 특수 초기 조건들뿐만 아니라 가장 다양한 종류들의 다른 법칙들을 (그 법칙들 중 많은 법칙들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이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가는, 특정 확정된 특수한 시간-공간적 영역들에서의 사태들에 대한 기술들을 ㅡ 내가 특수한 초기 조건들로 지칭한 것 ㅡ 발견하는 데 그리고 그 기술들이 지닌 합당성이나 정확성을 시험하거나 조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이런 종류의 시험하기에서 그는, 다른 특수한 초기 조건들에 덧붙여, 통상적으로 자신이 그 보편적 법칙들 이용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기대들의 지평에 속하는 모든 종류들의 보편적 법칙들을 ㅡ 통상적으로 다소 명백한 보편적 법칙들 ㅡ 이용한다. 이것에서 그는 이론가를 닮는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점은 매우 뚜렷하다: 그 차이점은 그들이 지닌 다양한 관심들이나 문제들에 놓여있다: 각자가 난제인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의 차이에.]
논리적 도식으로 [우리의 이전 도식들과 유사한] 이론가의 절차는 다음 방식으로 재현될 것이다:
P
여기서
역사학자의 절차는 다음 도식에 의하여 재현될 것이다:
I
P
여기서 I
P
우리의 도식들 두 가지 모두는, 물론, 고도로 이념화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다.
IX
앞에서 나는, 설명에 있는 보편적 법칙들과 설명에 있는 이론이 피설명항(explicandum)과a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설명이 만족스러울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만족스러운 이론도 항상, 그 이론을 우리가 제시하도록 당초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설명항(explicans)에b 포함된 것 이상의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만족스러운 이론들은, 원리의 문제로서, 그 이론들을 낳은 경험적 사례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론들은,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순환적인 설명을 낳을 따름이다.
a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강조되지 않았다.
b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피설명항’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실증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으로a 경험론적인 [또는
귀납론적인] 경향들과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는 방법론적 원리를 경험한다. 그것은, 모든 객관주의적a 경험론자들의 우상들로 남았던 [베이컨 이래 항상] ‘주어진’ 관찰들로부터 나온 저 신중한 일반화들이라기보다는 가능하면 새로운 관찰들의 영역들을 가능케 하는 대담한 가설들을 우리가 감히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원리이다.
설명들을 제시하거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논리적 상황을 야기하는 것) 예측들 및 다른 적용들을 위한 이론적 토대들을 마련하는 것이 과학의 과제라는 우리의 견해 ㅡ 이 견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이 시험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방법론적 요건에 다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가능성의 등급들이 있다. 어떤 이론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잘 시험될 수 있다. 우리가 점점 더 잘 시험될 수 있는 이론들을 방법론적으로 요구하기와 겨냥하기를 강화한다면, 과거에 이루어진 그 방법론적 원칙의 [무의식적] 채택이 과학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많은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터인 방법론적 원칙에 ㅡ 혹은 과학의 과제에 대한 서술 ㅡ 우리는 다다른다: 그 원칙은 그 사건들을, 과학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향한 단계들로서 설명할 터이다. (동시에 그 원칙은, 과학에서 무엇이 진보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과학의 과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서술해줄 것이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다른 인간 활동들과 ㅡ 특히 예술과 음악 ㅡ 대조적으로 과학에는 진보와 같은 것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론들에 있는 시험가능성의 등급들을 분석하고 비교하면, 이론의 시험가능성은 그 이론에 있는 확고함이나 정확함의 등급에 비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이론에 있는 보편성의 등급에 비례해서 증가함이 밝혀진다.
상황은 상당히 간단하다. 이론이 지닌 보편성의 등급에 따라, 이론이 예측들을 수행할 수 있는 저 사건들의 범위 증가와 그리하여 가능한 오류판정들의 영역 증가가 또한 병행한다.b 그러나 더 쉽게 반증되는 이론은 동시에 더 잘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이다.
우리가 확고함이나 정확함의 등급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유사한 상황을 발견한다. 정확한 서술은 모호한 서술보다 더 쉽게 반박될 수 있고 그리하여 정확한 서술은 더 잘 시험될 수 있다. 이 고찰로 인하여,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시험가능성의 등급을 증가시킨다는 우리의 원리를 통하여 질적인a 서술들은 가능하면 계측적인a 서술들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는 요건을 우리는 또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들 시험하기에서 측정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을 우리는 또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적 진보 과정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을 규정하거나 이론들의 형성을 규정하는 특징으로서 이용되어서는 [흔히 그렇게 이용되듯이] 안 되는 방책이다.b 이유인즉 측정 절차들은 과학들 중 몇 가지 과학들의 발전에서 상당히 늦은 단계에서만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그리고 그 절차들이 심지어 지금도 과학들 모두에서 이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모든 측정은 이론적 전제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X
나의 분석을 예시하는 데 이용될, 과학에서 유래하는 훌륭한 사례는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으로부터 뉴튼의 이론으로의 전이(轉移: transition)이다.
이 전이(轉移: transition)가 귀납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과 뉴튼의 이론은 저 두 가지 앞선 이론들의 일반화와 같은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은, 뉴튼의 이론이 그 두 가지 이론을 반박한다는 부인될 수 없는 [그리고 중요한]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그리하여 케플러의 법칙들은 뉴튼의 법칙들로 부터 연역될 수 없다 [케플러의 법칙들이 그렇게 연역될 수 있다고 그리고 심지어 뉴튼의 법칙들이 케플러의 법칙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고 흔히 주장되었을지
정도에 따라 사건들의 영역에서 어떤 증가가 병행한다. 그 이론은 그런 사건들에 대한 예측들을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반증들의 영역 또한 만들어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각각 qualitative와 quantitative인데 후자의 경우 ‘(수학적으로) 계측될
수 있는’의 의미인 듯하고 이한구 번역본에는 각각 ‘질적인’과 ‘양적인’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this way we can also explain the part played by measurement in the testing of theories; it is a device which becomes increasingly important in the course of scientific progress, but which should not be used [as it often is] as a characterizing feature of science, or the formation of theories, in gener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또한 이론들을 시험하는 데 계측이 수행한 역할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과학적 진전 과정에 점차 중요하게 된 방책이긴 하지만, 그러나 [종종 그랬듯이] 과학을 규정하는 일반적인 특징이나 이론들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로 번역되었다.
라도]: 다양한 행성들의 질량들은 태양의 질량과 비교되어 무시될 있다고 [허위로] 전제함에 의하여, 케플러의 법칙들은 단지 근사치로 뉴튼의 법칙들로부
터 획득된다. 유사하게, 자유 낙하하는 물체들에 대한 갈릴레오의 법칙도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반대로, 그 갈릴레오의 법칙은 뉴튼의 법칙과 모순이 된다. 모든 낙하들의 전체 길이는 지구의 반경과 비교되어 무시될 수 있다는 [허위] 전제를 만듦에 의해서만, 우리는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갈릴레오의 법칙을 근사치로 얻을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물론, 뉴튼의 이론은 귀납에 [혹은 연역] 의하여 얻어지는 일반화일리가 없음이 그러나 옛 이론들에 대한 오류판정으로 가는 길을 조명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설임이 밝혀진다:a 새로운 가설은, 새로운 가설에 따라 옛 이론들이 훌륭한 근사치들을b 낳지 못하는 저 영역들로 향하는 길을 조명하여 가리킬 수 있다. (케플러의 경우에 이것은 섭동 이론의 영역이고, 갈릴레오의 경우에 이것은 가변가속도[variable accelerations] 이론인데, 왜냐하면 뉴튼에 따라서 중력 가속도들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변하기 때문이다.)
뉴튼의 이론이 케플러의 법칙들과 갈릴레오의 법칙들의 결합만을 이룩했더라면 그 이론은 이 법칙들에 대한 순환적 설명이었을 따름이고 그리하여 설명으로서 불만족스러웠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이 지닌 설명력과 사람들을 확신시키는 힘은 바로, 두 가지 옛 이론들과 양립될 수 없었던 [성공적인] 예측들로 우리를 이끈, 독립적인 시험들로 향하는 길을 비추는 자체의 힘을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지닌다.c 그것은 새로운 경험적 발견들로 향하는 길이었다.
뉴튼의 이론은, 낮은 등급의 보편성을 띤 특정 옛 이론들을 설명하려는 시도의 사례인데, 이 옛 이론들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통합뿐만 아니라 동시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shows, of course, that Newton’s theory cannot be a generalization obtained by induction [or deduction] but that it is a new hypothesis which can irradiate the way to the falsification of the old theories:인데 강조구문의 which는 that의 오기이고 접속사 but은 and로 대체함이 옳을 듯하고, 이한구 번역본에 ‘이것은 물론 뉴턴의 이론이 귀납이나 [연역]에 의하여 얻어진 어떤 일반화일 수 없고, 오히려 옛 이론들을 반증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새로운 가설임을 보여준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good approxim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진리에 가까운 근삿값’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d이 문장의 원문은 Yet its power of illumination and its power of convincing people consisted just in its power to throw light on the way to independent tests, leading us
to [successful] predictions which were incompatible with the two older theori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그러나 그것의 설명력과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은 독립적인 실험을 하는 방식을 발견하도록
하는 힘에 있다. 그 힘은 우리가 옛날의 두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성공적인] 예측들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그 이론들에 대한 오류판정을 (그래서 그 이론들이 그 영역 안에서 훌륭한 근사치로서 타당한, 영역을 제한하거나 결정함에 의하여 그 이론들에 대한 수정
을) 야기한다a. 아마도 더욱 흔히 발생하는 경우는 이것이다: 옛 이론이 처음에 오류로 판정된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이 나중에, 옛 이론의 실패뿐만 아니라 그 이론의 부분적 성공을 설명하려는 시도로서, 출현한다.
XI
설명의 개념에 (혹은 더 정확하게 실행) 관한 나의 분석과 관련하여 추가적 요점이 중요한 듯하다. 데카르트로부터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맥스웰(Maxwell)까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새롭게 발견되는 모든 관계들을 역학적 모형들로써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물리적 물체들을 ㅡ ‘중간 규모의 물리적 물체들’의 영역에 속하는 물체들 ㅡ 다룸으로부터 우리가 익숙해지는 밀치기나 압력의 법칙들로 그 관계들을b 환원하려고 그들은 노력했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모든 과학들을 위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그는 심지어, 밀치기나 압력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모형들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국한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튼의 이론이 성공함으로써 자체의 최초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 패배는 (뉴튼과 뉴튼의 세대에 심각한 고통이었던) 곧 잊히고 중력적인 인력이 밀치기 및 압력과 동등한 관계들로 그 프로그램 속으로 수용되었다. 맥스웰(Maxwell) 또한 처음에는 에테르(ether)라는 역학적 모형의 형태로 자신의 전자기장(電磁氣場: electromagnetic field) 이론을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시도를 포기했다. 이로써, 역학적 모형은 자체의 중요성을 잃었다; 원래 에테르(ether)라는 역학적 모형을 기술할 의도였던 방정식들만 남았다. [그 방정식들은 에테르<ether>가 지닌 특정 비-역학적 속성들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었다.]
역학적 이론에서 추상적 이론으로의 이 전이(轉移: transition)와 동시에, 실제로 설명적 이론들은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이론들에게 전혀 요구되지 않는 단계가 과학의 진화에서 도달되었다; 우리는, 그림들과 같은 도표들이 획득될 수 있다면 그것들에 의하여 [혹은 ‘그려질 수 있는’ 혹은 ‘시각화될 수 있는’ 역학적 모형들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이론들을 이용하여 연구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이론들을 낳는다; 혹은 달리, 이것들이 획득될 수 없다면, 우리는 ‘추상적인’ 수학적 이론들을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 분석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이용하여 연구할 준비가 되어있다.
설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분석은 물론 어떤 특정 그림이나 모형의 실패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분석은, 그 분석이 역학적 및 다른 모형들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추상적 이론들의 모든 종류들에 적용된다.a 사실상 모형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이미 시험된 [전형적인 초기 조건들이나 전형적인 구조의 발생에 ㅡ 다시 말해서, 더 좁은 의미에서의 모형 ㅡ 관한 전제들과 함께] 옛 법칙들을 통하여 새로운 법칙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일 뿐이다. 모형들은 흔히 이론들의 확대나 설명에서 중요한 역할들 한다;b
그러나 옛 이론적 전제들의 분위기 속에서의 새로운 모형을 새로운 모형으로부터 ㅡ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이론적 전제들을 지닌 이론체계로부터 ㅡ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다.a
XII
이 강좌의 첫머리에서 여러분에게 믿기 어렵거나 심지어 역설적으로 보였을 나의 정식화들 중 몇 가지 정식화들이 이제 덜 그렇게 보일 것을 나는 희망한다.
왕도이건 다른 것이건, 필연적으로 특수한 사실들의 ‘주어진’ 집합으로부터 보편적 법칙에 다다르는 길은 없다. 우리가 ‘법칙들’로 지칭하는 것은, 항상 이론들의 [사실상, 기대들의 전체 지평의b] 어떤 더 큰 체계의 한 부분을c 형성하는 그리고 그리하여 소외되어서는d 결코 시험될 수 없는 가설들이나 추측들이다. 과학의 진보는 시험들, 오류들 제거 그리고 이전 시험들 및 오류들의 과정에서 습득된 경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추가 시험들을, 필수적인 부분으로 지닌다. 어떤 특정 이론도 어느 때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으로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론은, 이 이론이 지금은 아무리 잘 입증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문제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어떤 과학 이론도 신성불가침이 아니고 비판을 초월하지도 못한다. 이 사실은, 특히 지난 세기 동안에 우리가 특정 역학적 이론들에 대한 흔히 반복되고 참으로 탁월한 입증들에 의하여 우리가 인상을 받았을 때, 자주 망각되었는데 그 입증들은 종국적으로 의심할 바 없이 참으로서 간주되게 되었다. 이번 세기에 들어온 이래 물리학의 폭풍적인 발전은 우리에게 더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항상 새로운 시험들에 부치는 것이 과학자의 과제라는 것과 어떤 이론도 최종적이라고 선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험하기는, 이론이 시험되어 그 이론을 다른 이론들과 뿐만 아니라 초기 조건들의 모든 가능한 종류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t is necessary to distinguish a new model in a setting of old
theoretical assumptions from a new theoryㅡthat is, from a new system of theoretical
assump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그렇지만 옛날의 이론적 가정들을 정립하는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이론인 이론적인 가정들의 새로운 체계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꺽쇠괄호 안의 내용은 이한구 번역본에 ‘어떤 더 큰 체계의’의 뒤에 삽입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 part인데 part가 명사로 형용사의 수식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부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d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n isol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독립적으로’로 번역되었다.
과 결합하고 나서 결과로 생기는 예측들을 실재와 비교함에 의하여, 나아간다. 이것이 좌절한 기대들인 반증들을 야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다시 구축해야한다.
우리가 예전에 이용하여 기꺼이 실재에 접근했던 기대들 중 몇 가지 기대들이 좌절되면서 그 좌절은 이 절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좌절은, 장애물을 만지거나 장애물과 충돌하여 장애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시각장애인의 경험과 비교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실재’와 접촉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추정들에 대한 오류판정을 통해서이다.a 우리가 실재로부터 얻는 저 ‘긍정적’ 경험을 홀로 담당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들을 발견하여 제거하는 것이다.b
보충적인 가설들로써 [주전원들<周轉圓들: epicycles>에 관한 보충적인 가설들처럼] 오류로 판정된 이론을 구출하는 것은 물론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들에서 진보의 방식이 아니다. 오류판정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사실들에 대하여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할 것 같은 새로운 이론들을 탐구하는 것이다.c 최종적인 선언이 경험들을 오류로 판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정신들을 폐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학은 최종적인 선언을 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경험들로부터 배우는 데 관심을 갖는다;d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데.
특별히 명확하게 과학 이론들에 대한 오류판정 가능성을 겨냥하는, 과학 이론들을 정식화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과학 이론들을, 예를 들어 ‘에너지가 물리 체계의 또 다른 부분에서 발생하는 변화들을 보상하지 않고 그 체계의 한 부분에서 에너지가 변하는 폐쇄된 물리e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열역학 제1법칙) 같은 금지들(prohibitions)의 [혹은 부정적 존재 서술들] 형태로 정식화할 수 있다. 혹은, ‘100% 효율적인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2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through the falsification of our suppositions that we actually get in touch with ‘realit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그 실망은 우리가 실제로 ‘실재’와 접촉하고 있다는 우리의 가정들에 대한 반증 때문에 일어난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the discovery and elimination of our errors which alone constitute that ‘positive’ experience which we gain from reality.인데 It is ~ that ~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고 이한구 번역본에 “그것은 우리의 오류들에 대한 발견과 제거인데, 그 오류들만이 오적 우리가 실제로부터 얻는 ‘실증적인’ 경험을 규정한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에서도 search of가 search for로 잘못 쓰였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cience is not interested in having the last word if this means shutting off our minds from falsifying experiences, but rather in learning from our experienc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과학은 경험들을 반증함에서 우리의 마음들을 제외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닌지의 마지막 결정을 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실수들에서 배우는 데 관심을 쏟는다.’로 번역되었다.
e 이 단어의 원어는 physic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법칙). 전칭 명제들과 부정적 존재 서술들은 논리적으로 대등함이 밝혀질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모든 보편적 법칙들을 지적된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이 가
능하다; 다시 말해서, 금지들(prohibitions)로서. 그러나 이것들은 기술자들에게만 의도된 금지들(prohibitions)이지 과학자들에게 의도된 것들은 아니다. 금지들(prohibitions)은 기술자가 자신의 에너지들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아갈지를 기술자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과학자에게 금지들(prohibitions)은 시험하라는 그리고 반증하라는 도전이다; 금지들(prohibitions)로 인하여 과학자를, 그 사태들의 존재를 금지들(prohibitions) 자체들이 금지하거나 부인하는 저 사태들을 발견하라는 자극을 받는다.a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과학을 인간 정신의 훌륭한 모험으로서 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 모험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들을 창안하는 것이고, 경험을 조명하는 그 이론들의 능력을 지치지 않고 검토하는 것이다. 과학적 진보에 관한 원칙들은 매우 간단하다. 그 원칙들은, 과학적 명제들이나 이론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확실성을 [혹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심지어 높은 등급의 ‘확률’을] 이룩할 것이라는 고대의 개념을 (과학과 마술의 그리고 과학자와 마술사의 결합으로부터 도출되는 개념) 우리가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과학자의 목적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엄격한 시험들에 부쳐질 수 있는 [그리하여 언제나 새로운 경험들로 우리를 인도하고 그 새로운 이론들을 우리를 위하여 설명하는] 점점 더 향상되는 이론들을 발견하는 [혹은 점점 더 강력한 탐조등들을 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이론들이 틀림없이 반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이 진보하는 것은 그 이론들에 대한 반증의 통해서이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y stimulate him to try to discover those states of affairs
whose existence they prohibit, or deny.인데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they stimulate him to try to discover the other states of whose existence is not yet prohibited or denied by them이나 ‘금지들로 인하여 과학자는, 그 존재가 금지들에 의하여 아직 금지되지도 부인되지도 않은, 다른 사태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라는 자극을 받는다.’ 다른 문장으로 표현함이 더 좋을 듯하다.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부록 I 양동이와 탐조등.hwp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주의의 빈곤 서문 (0) | 2019.07.21 |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부록 2 보충 논평들 (0) | 2019.07.16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9장 타스키의 진리 이론에 관한 철학적 비평 (0) | 2019.07.04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8장 논리학, 물리학 및 역사에 대한 실재론적 접근 (0) | 2019.06.18 |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7장 진화와 지식의 나무 (0) | 2019.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