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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9장 타스키의 진리 이론에 관한 철학적 비평

이윤진이카루스 2019. 7. 4. 14:13

9. 타스키(Tarski)의 진리 이론에 관한 철학적 비평

 

1

 

과학과 철학에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대담한 추측들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가 지닌 다양한 경쟁하는 이론들에서 허위인 것에 대한 비판적 탐색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a

이것이, 37년 전인 19347월에 내가 비엔나학파(Vienna Circle)에 의하여 조직된 프라하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을 만났을 때, 나의 견해였다. 그러나 내가 당시 타스키(Tarski)로부터 그의 진리 이론을 배우기 전에 나의 지적(知的: intellectual) 양심은, 우리의 주요 관심은 진리 탐구라는 전제에 관하여 전혀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해야겠다. 나는 나의 저서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1934)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그 페이지 조판 교정쇄를 프라하에서 지니고 있다가 타스키(Tarski)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흥미를 느꼈는지 나는 의문이다); ‘지식에 대한 갈구와 진리 탐색은... 가장 강력한 과학적 발견의 동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리라는 개념에 관하여 불안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한다면 대신에 연역가능성과 유사한 논리적 관계들을 언급함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론에서 우리가 진리라는 개념의 사용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함에 의하여 내가 그 개념을 상식적이고 무해한 것으로서 옹호하려고 노력한 하나의 절 전체가 저 저서에 있다. 진리라는 개념에 관하여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물론, 이 개념이 몇몇 철학자들에 의하여 얼마동안 공격을 받았고 게다가 그 공격은 훌륭한 논증들이었다는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기보다는 대응 이론을 설명하는 난제였다:a 사실들에 대한 서술의 대응은 무엇일 수 있을 터인가? 게다가, 내가 결정적으로 그 견해를 주장한 적이 없을지라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고 내가 느낀 한 가지 견해가 있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견해는, 우리가 진리에 관하여 말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진리에 대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진리에 대한 기준의 부재(不在)가 진리라는 개념의 논리적 합법성에 반하는 논증으로서 사용될 수 없다는 나의 견해를 옹호할 수 없었다.

이 특정 불안에 내가 서술된 표현을 제시한 적이 없어서 나는 기쁜데 그 불안은 오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인식할 것처럼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진리는 그 중요성이나 합법성이 특정 경우들에서 자체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손상되는 유일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유사한 종류의 유명한 사례는 연역가능성이라는 개념이다: 많은 이론들과 관련하여 이론적 명제임을b 결정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정될 수 있는 이론인 결정 문제가 확실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이론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각각의 특정 경우에 주장되는 이론의 정리가 타당한 정리(定理: theorem)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기준이나 일반적인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정리가 이론에 의하여 제공되는 논리적 수단으로써 연역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 (이것이, ‘타당한 정리’, 타당한 추론과정’, 기타 등등의 용어들을 사용하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결정 불가능한 이론들에 대한 타당성이나 이론적 명제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성이나 이론적 명제라는 개념은 심지어 결정 불가능한 이론들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분명하다: 주장되는 정리는, 도출과정이 우리에 의하여 발견되었든 아니면 발견될 것이든 관계없이 그 정리에 대하여 타당한 도출과정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실제도 타당하다. 기준의 부재(不在)로 인하여 타당한 정리(定理)’라는 용어의 모호성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준의 부재(不在)는 이 경우에 그 도출과정들 중 어떤 도출과정이 주장되는 정리로 끝나는지 아닌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무한한 모든 타당한 도출과정들을 통하여 검토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우리에게 행운이 있어서 주장되는 정리에 대한 증명이나 반명을 우리가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행운이 없다면 그리하여 이론이 결정 절차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문제의 공식이 정리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

오늘날 이 모든 것은 거의 너무 하찮아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개념 예를 들어 진리라는 개념은, 어떤 대상이 저 개념의 영향을 받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결정하도록 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조건으로만 논리적으로 합법적이라고 믿는 철학자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하여 과학이론들에 관하여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없다는 나의 견해가, 진리 자체는 망상일 따름이다라는 견해를 나에게 귀속시키는 민첩하지만 완전히 오해를 낳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기고문이 1967년의 철학백과사전(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제3권에 있다. 동일한 백과사전(Encyclopedia)의 제2권에서, ‘개념은 자체의 적용을 위한 기준이 없다면 공허하다.’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속 글들에서 함축되어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용어에는 많은 의미들이 있지만 개념은 자체의 적용을 위한 기준이 없다면 공허하다.’라는 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내가 보기에 실증주의적 경향들의 바로 핵심을 표현한다. (그 개념은 흄[Hume]과 매우 가깝다.a) 실증주의의 이 해석이 수용된다면, 실증주의는 논리학의 현대적 발전에 의하여 특히 타스키(Tarski)의 진리 이론에 의하여 반박되는데 그 진리 이론은 정리(定理: theorem)를 포함한다: 충분히 풍요로운 언어와 관련해서,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정리(定理: theorem)는 물론, 한편으로는 스토아학파(Stoics)(그리고 나중에는 데카르트 학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론자들(Sceptics)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가장 흥미롭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적인 철학적 갈등이 논리학이나 메타논리학(metalogic)에 속하는 정리(定理: theorem)에 의하여 해결되었다고 언급될 드문 사례들 중 한 가지 사례를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례가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거나 인정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스키(Tarski)의 진리이론이 철학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부인하는 저 철학자들과 격론을 시작하는 것은 여기서 나의 의도가 아니다. 대신에 다음 것들이 타스키(Tarski)의 진리이론의 결과들이었다는 것을 내가 1935년에 알았을 때 나의 강력한 기쁨과 안도감을 나는 상기하고 싶다:a

 

(1) 이 개념은, 이전이 누구도 의문시하지 않았던 논리적 용어들로 정의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합당했다.

(2) 이 개념은, 자체에 대한 부정에 적용될 수 없었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명백하게 공허하지 않았다면, 모호하지 않게 정식화된 모든 (폐쇄된) 서술에 (보편론적이 아닌 언어로 된) 적용될 수 있었다.b

(3) 참인 문장으로부터 혹은 참인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모든 문장이 증명될 수 있게 참이었을지라도, 그 개념은 일반적인 기준과 연결되지 않았다.

(4) 참인 문장들의 집합은 연역적 이론체계였다, 그리고

(5) 고찰되는 언어가 충분히 풍요롭다면 그 이론체계는 결정 불가능한 연역적 이론체계였다. (이 결과와 연결하여, 타스키[Tarski]는 괴델[Gödel]을 언급했다.)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나는 19347월 프라하에서 최초로 타스키(Tarski)를 만났다. 내가 비엔나의 칼 멩거(Karl Menger) 학술회의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35년 초였는데 타스키(Tarski)와 괴델(Gödel)은 그 학술회의의 구성원들이었고 그 학술회의에서 나는 스콜렘(Skolem) 및 아브라함 월드(Abraham Wald)와 같은 훌륭한 사람들을 또한 만났다. 내가 타스키(Tarski)에게 그의 진리 이론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당시였고 그는 비엔나의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stead I wish to recall the intense joy and relief when I learned

in 1935 that the following were consequences of Tarski’s theory of truth.인데 when이라는

종속절이 주절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앞의 명사 the intense joy and relief를 수식하기 때문에 접속사 when이 아니라 관계대명사로 표현해야 한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at it was applicable to every unambiguously formulated (closed) statement (of any non-universalistic language), provided it was not applicable to its negation, and therefore obviously not vacuous, in spite of the fac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 개념이 그것의 부정에 적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명료하게 언명된 (닫힌) 모든 (보편적이지 않는 여하한 언어의) 진술에 적용할 수 있었으며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은 공허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번역되었다.

시민정원(Volksgarten)a에 있는 벤치에서 (잊히지 않은 벤치b) 아마도 20분의 강좌를 통하여 그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진리 개념에 관한 자신의 훌륭한 논문의 독일어 번역본 교정지들을 내가 보도록 했는데, 그 교정지들은 당시 철학연구(Studia Philosophica)의 편집자로부터 방금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는 말로 표현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나의 감사함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 타스키(Tarski)가 나보다 나이가 다소 많았을 따름이었을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당시에는 상당히 친한 관계였을지라도, 나는 그를 내가 철학에서 그를 나의 스승으로서 진정으로 간주할 수 있던 사람으로서 존경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많이 배운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와 혹시 의견을 달리할 지엽적인 요점들이 있다. 나는 항상 상식적 철학자였고 상식적 실재론자였다. 나의 태도는, 상식은 흔히 ㅡ 아마도 옳다는 것보다는 더 흔히 ㅡ 틀린다고 믿는 것이 상식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태도는, 상식이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비판에 의하여 발견하는 것뿐일지라도c 철학에서 우리가 상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실제 세계인 우주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나는 철학에서 모든 관념론, 실증주의, 혹은 심지어 중립주의도 철저히 반대했다. 나는, 실재론에 대한 타스키(Tarski)의 태도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낸 적이 없다. 그는 코타르빈스키(Kotarbinski)구체주의(reism)’에 의하여 그러나 비엔나 실증주의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진리 개념의 중립성을 강조했다.

내가 비판적인 상식적 실재론자이고 그리하여 내가 형이상학적이론을 믿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만을 그가 부인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한 면모인 내가 보기에 타스키(Tarski)의 진리 이론의 실재론적 면모였던 것에 나는 큰 관심을 가졌다.

타스키(Tarski)의 이론은,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그가 처음에 강조한 바와 같이, 진리는 사실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고전적 이론에 대한 상세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보기에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뒷받침한다. 타스키(Tarski)의 이론은, 동시에, 이 대응 이론에 대한 고전적 비판을 조금 복권시켜서 상세히 설명한 것이기도 한데 이유인즉 대응 이론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옳았던 정도를 언급하기a 때문이다. 이 후자(後者) 부분은, 본질적으로, 대상언어의 (L ) 의미론은 (L ) ㅡ 다시 말해서, ‘L 에서 참인이라는 개념을 정의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포함하는 메타언어 ㅡ 대상언어

(L )보다 본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야 (더 높은 등급을 지닌) 한다는 타스키(Tarski)의 교설에 의하여 해결된다.

대상언어 (L ),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체의 구문론과 더욱 특히 자체의 모든 표현들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명칭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L ), 이율배반이라는 위험 없이, 표시나 만족이나 진리와 같은 특별히 의미론적인 용어들을 포함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L )표현들의 명칭들을 이 표현들이 언급하는 사실들이나 대상들과 관련시키는 개념들.

이 모든 것은 여러 해 동안 발전한 사유들에 대한 재료를 나에게 제공했다. 나는 이 사고들 중 몇 가지 사유들을 개략적으로 전달하겠다.

 

 

II

 

타스키(Tarski)의 이론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진리가 사실들에 대한 대응이라면, 잠시 동안 진리라는 단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에 서술들이 기술하는 사실들에 대한 서술들의 대응을 말하기만 하자.

내가 생각하기에 타스키(Tarski) 이전의 모든 진리에 대한 대응 이론들을 그렇게 의심스럽게 만든 것은 이 대응을 발견하는 것이나 설명하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불가능성이었다;b 심지어 대응 이론의 상식적이고 실재론적 특징 때문에만 그 이론을 귀중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의심스러운.

이제 대담해지자, 그리고 사실들에 대응하는 서술들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자. 이 상황을 다루는 이론은 틀림없이, (1) 어떤 언어로 된 서술들을 언급할 수 있는데 그 언어를 우리는 조사 중인 언어나 대상언어라고 부르고, (2) 사실들과 주장되는a 사실들을 언급할 수 있다.

(1) 서술들을 언급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서술들의 명칭들, 예를 들어, 서술들의 인용 명칭들(quotation names)이나 기술적 명칭들(descriptive names)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것은, 대응 이론은 메타언어로 정식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조사 중인 어떤 대상언어로 된 표현들을 우리가 토론하거나 그 표현에 관하여 언급할 수 있는 언어.

 

(2)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b 사실들에 대한 기술들(descriptions)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메타언어로 우리가 대상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저 모든 사실들을 우리는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메타언어는 대상언어들로 된 서술들의 번역들을 지녀야 하거나, 메타언어는 대상언어를 자체의 부분으로서 포함해야 한다 (충실한 번역들의 존재라는 불쾌한 문제를 피하는 방법).

 

그리하여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대응을 다루고 그리하여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다루는 이론은, 통상적인 논리적 단어들과 별도로 세 가지 유형들의 표현들을 그 이론이 사용할 수 있는b 메타언어로 정식화되어야 함을 우리는 발견한다:

 

(1) 서술들의 명칭들: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언어로 된 언어적 표현들의; 그 명칭들은 저 대상언어의 형태론(morphology)’이나 구문론의 일부이다.

 

(2) 저 대상언어로 토론 중인 사실들을 (-사실들을 포함하여) 기술하는 서술들; 다시 말해서, 대상언어를 메타언어로 번역하는 것들. (번역의 함정들을 피하기 위하여, 대상언어는 이미 암시된 바와 같이 메타언어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3) 이 두 가지 근본적인 표현의 유형들에 덧붙여, 세 번째 유형이 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표현의 종류들의 술어들을 그리고 그 종류들 사이의 관계들을 표시하는 용어들인데 예를 들어 X는 사실들에 대응한다.’와 같은 술어들이나 y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X는 사실들에 대응한다.’와 같은 관계들. (이 마지막 종류의 용어는 의미론적이고, 그 용어가 언급하는 대상언어보다 더 높은 단계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용하여 대응 이론을 정식화할 수 있는 언어와 관련하여 세 가지 거의 명백한 최소 요건들이다.

이 세 가지 최소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언어를 타스키(Tarski)의미론적 메타언어라고 지칭했다.

나는, 타스키(Tarski)가 이 세 가지 최소 요건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또한 (3)에서 언급된 술어들이나 관계들이 표현들을 사실들의 세계와 관련시키는데 본질적으로 대상언어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능가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업적의 위대함과 대담함을 본다.

우리가 표현들의 세 가지 범주들을 쓸 수 있게 되자마자, 의미론적 메타언어로 우리가

 

p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P가 사실들에 대응한다와

 

같은 주장들을 할 수 있음은 분명한데 그에 의하여 우리는, ‘P와 같은 대문자 이탤릭체가 저 대상언어적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서술들의 메타언어적 명칭들을 의미하는 변수들이라고 전제하며 그 변수의 메타언어적 번역들p와 같은 대응하는 소문자 이탤릭체에 의하여 표시된다.

타스키(Tarski)의 진리이론을 가르치면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진리에 관해서라기보다는 사실들에 대한 대흥에 관하여 말한다면 문제들이 나에게 그리고 적어도 나의 제자들 중 몇몇에게 더 쉬워질 터임을 나는 발견했고 또한 우리의 사례들 가운데서 대상언어들로 된 허위a 서술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인하여 문제들이 더 쉬워진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독일어를 우리의 대상언어로 그리고 영어를 우리의 메타언어로 생각하고, ‘달은 (Mond: Moon) 초록 치즈로 만들어진다(Der Mond besteht aus grünen Käse).라는 독일어 문장이 달은 초록 치즈로 만들어진다(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라고 기억하자. 이 허위 서술들을 생각하여, 우리는 물론 참인 의미론적 주장을 구축할 수 있다:

‘“달은 (Mond: Moon) 초록 치즈로 만들어진다(Der Mond besteht aus grünen Käse).는 독일어 서술은 달이 (the moon) 초록 치즈로 구성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한다.’

대상언어로 된 허위 서술들의 이용은, 그러나, 매우 사소한 요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실들에 (진리 대신에) 대한 대응을 말하는 것은 몇몇 연구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듯하다. 그로 인하여 그 연구자들은, 소문자 이탤릭체 변수 p를 대신하고 있는 서술이 어떤 사실(혹은 어떤 주장된 사실) 대한 메타언어적 서술이라는 것과 왜 틀림없이 그런지를 더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 이유도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a 다시 말해서, 대상언어로 또한 기술된 어떤 사태에 대한 메타언어적 기술(記述: description).

 

 

III

 

진리에 관한 타스키(Tarski)의 유명한 논문의 두 번째 문단에 그의 주장이 있는데, 진리를 정의함에서 그에게는 의미론적인 (다시 말해서, 언어적 표현들을 표현되는 것들에 연계시키는) 개념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족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그가 진리를 정의하고 그리고 전자(前者) 개념은 분명히 의미론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타스키[Tarski] 자신에 의하여 그의 논문 논리학, 의미론 그리고 메타수학b[Logic, Semantics,

Metamathematics], 401, xv의 첫 번째 문단에 그렇게 열거된다), 심지어 신중한 독자가 처음에 다소 당황할지라도 당연할 것이다c. 그 당황에 대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어떤 주제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는 충분히 풍요로운 모든 언어는, (타스키[Tarski]가 밝힌 바와 같이) 일관적인 언어는 자체의 의미론을 정의하는 수단을 포함하지 않을 것인 반면, 자체의 형태론이나 구문론을 포함할 것이다 (타스키[Tarski]와 괴델[Gödel]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발견된 결과들에 따라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타스키(Tarski)의 정의(定義)을 위하여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론적 메타언어가 그 의미론을 포함하는 대상언어보다 더 높은 단계인 의미론적 메타언어이다. 그러나 대상언어와 관련하여 의미론적 용어들인 저 용어들은 메타언어와 같은 것 내부에서 그 메타언어의 다른 형태론적이거나 구문론적인 용어들과 동일한 위상을 지닐 것이다. 그리하여 대상언어 L 의 의미론은 더 높은 단계 메타언어의 (가령, L ) 구문론의 한 부분일 것이다: -형태론적이거나 비-구문론적인 특징을 지닌 용어들은 L 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것은, L 의 의미론을 L 의 구문론으로 환원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요점은 일반적인 철학적 관심사인데, 의미론적 용어들이 의심스럽게 여겨지기 때문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특징을 지닌 용어들을 수용된 종류의 용어들로 환원하는 것이 우리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L 의 의미론에 속하는 용어들을 L 의 비-의미론적 용어들로 환원하는 데서 타스키(Tarski)의 업적으로 인하여 의심과 관련된 모든 근거들이 제거된다.

(의심스럽지 않은) 확립된 범주들을 토대로 한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의심스러운) 용어들의 범주를 우리가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에서 드문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이 환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의심스러운 용어의 명예를 구출하는 행위로 복권행위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정의들(定義: definitions)과 환원가능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특별하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서 간주한다. 우리가 어떤 용어를 정의할 수 없을지라도, 그 용어를 정의되지 않은 용어로서 우리가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 몇몇 정의되지 않은 용어들의 사용은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데 이유인즉 정의되는 모든 용어는 틀림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몇몇 정의되지 않은 용어들의 도움을 받아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로, 타스키(Tarski)의 연구를 철학적으로 그렇게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진리를 정의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그의 성공적인 기술(記述: description)이 아니라 그가 진리에 관한 대응 이론을 복권시킨 것과 대상언어와 동시에 그 언어의 구문론보다 더 풍요로운 의미론적 메타언어에 대한 필수적인 필요성을 우리가 이해하자마자 그 대응 이론에 도사리고 있는 난제가 더 이상 없다는 중명이다.a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원시적인 의미론적 용어들을 신중하게 피함으로써 대신에 그 용어들로써 시작할 것임은 (R. M. 마틴[Martin]에 의해서 실행된 바와 같이) 충분히 분명하다. 사실들에 대한 대응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의미론적 이론을 우리는 이룩할 터이다. 그러나 특별히 의미론적 용어들이 없는 의미론적 메타언어를 제공하는 타스키(Tarski)의 이론이 없었다면, 의미론적 용어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의심은 극복되지 않았을 터이다.b

 

 

IV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나는 실재론자이다. 나는, 칸트의 관념론과 같은 관념론은 그 관념론이 모든 우리의 이론들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이론들을 자연의 세계에 부과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정도까지 옹호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인간이 만든 이론들이 참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실재적인 사실들이 의존한다고 믿는 데서 실재론자이다; 매우 드믄 예외들을 제외하고, 강조하여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닐 실재적인 사실들. 우리 인간이 만드는 이론들은 실재적 사실들과 충돌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탐구함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조정하거나 그 이론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타스키(Tarski)의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진리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론을 또한, 참인 서술들이 대응하는 이론으로서 실재를 정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재적이 아닌 (주장되는) 사실들로부터 (다시 말해서, -사실들로부터) 실재적인 사실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인 (주장되는) 사실들을 우리는 구분할 것이다. 혹은 보다 명시적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초록 치즈로 구성되는 달(moon)과 같이 주장되는 사실은 그것을 기술하는 서술이 ㅡ 이 경우에는 달은 초록 치즈로 만들어진다.’는 서술 ㅡ 이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실재적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장되는 사실은 실재적인 사실이 아니다 (혹은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기를 선호한다면,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타스키(Tarski)로 인하여 우리가 진리라는 용어를 참인 서술들의 (혹은 문장들) 집합에 의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바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실재라는 용어를 실재적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용어로 대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실재의 개념도 또한 정의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물론, 타스키[Tarski]의 연구에서 언어들의 등급이라는 문제들과 유사한,a 언어들의 등급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의 논리학, 의미론, 메타수학[Logic, Semantics, Metamathematics]268-77, 그의 후기를 특히 참조.) 이것에는, ‘진리라는 용어가 이런저런 의미에서 실재라는 용어보다 더 기초적이라고 제안할 의도가 없다: 나는 조바심하며 그런 제안을 배척하는데 그런 제안이 지닌 관념론적 속성 때문이다. 나는, ‘진리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또는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것을 실재에 대한 대응으로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실재진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정의하는 것도 동등하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가 실재론자이기 때문에, 나는 실재의 개념이 다른 이유로 공허하거나 의심스럽지 않다고 나 자신에게 다시 확신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진리의 개념보다 조금도 공허하거나 의심스럽지 않다고.b

 

 

V

 

나 자신과 같이 세련되지 못한 철학자에게도 이해하기 쉬운 타스키(Tarski)의 저 더 오래된 이론들 가운데 그의 이론체계들 계산이 있다. 내가 옳게 기억한다면 타스키(Tarski)가 이론체계들 계산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완료한 때인 1935년에 나는 파리에 있었다. 나는 그 논문에 가장 큰 흥미를 가졌다.

나는, 진리에 관한 타스키(Tarski)의 논문이 지닌 더 명백한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을 이론체계들 계산에 관한 그의 논문과 연계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언급되는 언어들이 보편론적이a 아니라고 전제되는 매우 하찮은 다음 정리들(定理: theorems)을 즉각 얻는다.

정리(定理: theorem). 어떤 언어의 참인 서술들로 구성되는 집합 T, 타스키(Tarski)의 이론체계들의 계산이라는 의미에서 연역적 이론체계이다. 그것은 완벽하다.

연역적 이론체계로서, T는 결론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체의 논리적 결론들인 집합 Cn(T)와 동일하다 (T = Cn(T)). 그것은, T에 속하지 않는 서술이 T에 첨가된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집합은 비일관적이라는 의미에서 완벽한 이론체계이다.

정리(定理: theorem). 충분히 풍요로운 언어로 된 참인 서술들의 집합은, 타스키(Tarski)의 이론체계들의 계산이라는 의미에서 공리화될 수 없는 연역적 이론체계이다.

이 두 가지 정리들(定理: theorems)은 전적으로 하찮으며, 뒤이어지는 것에서 문제의 언어들이 이 정리들(定理: theorems) 중 두 번째 정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히 풍요롭다고 전제될 것이다.

이제 나는 서술 α참인 내용이란 개념인 새로운 개념을 소개한다.

정의(定義: definition). 주어진 서술 α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참인 서술들의 집합은 α진리 내용으로 지칭된다. 그것은 연역적 이론체계이다.

정리(定理: theorem). 참인 서술 α의 진리 내용은 공리화될 수 있는 이론체계 A = A이다; 허위 서술 α의 진리 내용은 연역적 이론체계b A A인데 그곳에서 A , 문제의 대상언어가 충분히 풍요롭다면, 공리화될 수 없다.

이 정의(定義: definition), 그리고 이 정리(定理: theorem)는 일반화될 것이다: 타스키(Tarski)의 연역적 이론체계들의 계산은 서술들의 계산의 일반화로서 간주될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서술 (혹은 논리적으로 대등한 서술들의 집합) α에 대하여 (유한하게) 공리화될 수 있는 이론체계 A가 대응하여

 

A = Cn(A) = Cn({α})이고

 

역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 공리화될 수 있는 연역적 이론체계 A에게 서술 (혹은 논리적으로 대등한 서술들의 집합) α가 대응한다. 그러나 공리화될 수 없는 연역적 이론체계들이나 결론 집합들이 또한 있어서, 그것들이 결론 집합인 서술들이나 서술들의 유한집합이 없기 때문에 서술들로부터 결론 집합이나 연역적 이론체계들로의 아니면 서술들의 계산으로부터 이론체계들의 계산으로의 전이는 일반화로 기술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일반적으로, 모든 결론 집합들이나 연역적 이론체계들 A에 대하여 A의 진리내용인 A 를 얻는다. 이것은, A가 참인 서술들로만 구성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A와 동일하고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A의 하위 이론체계a이다: 분명히, A 는 집합 AT의 곱집합이거나 교집합b이다. α의 혹은 A진리 내용 A 에 대응하며 α의 혹은 A허위 내용으로도 지칭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지의 문제가 질문될 것이다. 제기되는 명백한 제안은, 연역적 이론체계 A에 속하는 모든 허위 서술들의 집합을 A의 허위 내용으로서C 정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은, 우리가 내용이라는 용어를 연역적 이론체계결론 집합의 세 번째 동의어로서 사용한다면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이)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이유인즉 이 집합은 허위 서술들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예상되는데 연역적 이론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연역적 이론체계 A는 참인 서술들을 ㅡ 사실상 무한한 그 서술들 ㅡ 포함하며 그리하여 A에 속하는 허위 서술들로만 구성되는 집합은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술 α나 결론 집합 결론 집합 A의 허위 내용 A 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위하여, 우리는 B가 주어진 A상대적 내용이라는 개념의 의존할 것인데 그 개념은 타스키적(Tarskian) 연역적 이론체계 즉, A = Cn(A)라는 (절대적d) 내용의 일반화로서 도입될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을 설명하겠는데, 어떤 가능한 직관적 비판을 고려하여 나는 내용 척도라는 개념도 도입하겠다. 마지막에, 진리 내용에 대한 그리고 허위 내용에 대한 척도들이라는 개념인 진리의 근사치 혹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도 도입하겠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ubsyste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부분집합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mee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교집합으로 번역되어 그대로 따랐으나

역자는 사전을 통하여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없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as the falsity content of A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A의 거짓 내용 A로서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강조되지 않았다.

VI

 

타스키(Tarski)는 더 큰 연역적 이론체계들이나 결론 집합들을 그리고 더 작은 연역적 이론체계들이나 결론 집합들을 언급한다. 정말로 연역적 이론체계들의 (어떤 주어진 언어로 구성되는) 집합은 포함 관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배열되는데 그 포함 관계는 연역가능성 관계와 일치한다. 이론체계들의 계산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타스키(Tarski)가 행한 다음 언급은 결론 집합이나 내용이나 연역적 이론체계의 상대화에 대한 실마리로 사용될 것이다: ‘... 연역적 이론체계들 가운데는 한 가지 매우 작은a 이론체계가 존재하는데, 다시 말해서, 모든 다른 연역적 이론체계들의 하위 이론체계이다. 그 이론체계는 Cn(0)이라는 이론체계인데 공집합의 결론들의 집합이다. 이 이론체계는 여기서 L에 의하여 간략하게 표시될 것인데, 논리적으로 타당한 모든 문장들의 집합으로서 (혹은, 더 일반적으로, 우리의... 조사 대상인 연역적 이론의 구축을 수행할 때 처음부터 우리가 참으로 인정하는 모든 저 문장들의 집합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0 이론체계인 L외에 어떤 이론체계를 우리가 ... 구축을 수행할b 처음부터 우리가 참으로 인정하는 모든 저 문장들의 집합으로서이용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전처럼 우리가 관심을 갖는 연역적 이론체계를 변수 A로 그리고 우리가 처음부터 참으로 인정하는 모든 저 문장들의 집합변항 B로 표시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Cn(A, B)

 

타스키(Tarski)가 말하는 Cn(A)의 상대화로 서술할 수 있는데 이것은 B = L = Cn(0)일 때 다음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된다:

 

Cn(A) = Cn(A, L).

 

타스키(Tarski)Cn(A)’대신에 A를 쓰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Cn(A, B)에 대한 약자로서 A, B를 쓸 수 있다. 그렇다면 타스키(Tarski)로부터 인용된 구절은 다음을 암시한다:

 

정의(定義: definition): A, B = Cn(A, B) = Cn(A+B) - Cn(B).

 

이것은 분명히 다음으로 귀결된다:

 

정리(定理: theorem). A = Cn(A) = A, L = Cn(A, L) = Cn(A+L) -Cn(L).

 

서술하기의 상대적 방식에 우리 자신을 국한시키면 우리는 진리 내용에 관하여

 

A = A , L = Cn((A.T)+L) -Cn(L)

 

얻고 허위 내용에 관하여

 

A = A, A = Cn(A+A ) -Cn(A ) = Cn(A) -Cn(A )

 

얻는데 그것은 허위 내용 A , 그 확대가 A의 모든 허위 서술들의 집합과 일치하는 (원래 제안된 바와 같이) 상대적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VII

 

허위 내용 A 를 상대적 내용 A, A 로서 제안한 정의(定義: definition)에 반대하여 다음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이 정의(定義: definition), 타스키(Tarski)가 가장 작거나 0인 연역적 이론체계로 생각하는 그에게서 유래하는 인용구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뒷받침된다a.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정리(定理: theorem)

 

A = A, L = Cn(A+L) -Cn(L)에서,

 

우리는 0이라는 단어를 너무 문자 그대로 생각하고 있다: L‘-Cn(L)’이라는 우리의 표현을 고려하여 우리의 정의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 비었거나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집합으로서 라기보다는 척도 0의 집합으로서 수용되어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This definition is intuitively backed by a quotation from Tarski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이런 정의는 직관적으로 다시 타르스키에서의 인용으로 돌아가는데

번역되었다.

야 함을 이제 우리는 아는데 왜냐하면 그 집합은 차감되었기 (그래서 A의 비-논리적 서술들만 남는데 그것은 의도되지 않았다) 때문이다.

우리가 이 반론을 진지하게 수용하든 아니든, Cn(A)이나 Cn(A, B)라는 내용이나 결론 집합 자체 대신에 ct(A)ct(A, B)라는 내용의 척도로써 연산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 반론은 사라진다.

1934, 타스키(Tarski)는 스테판 마주르키에비치(Stephen Mazurkiewicz)에게서 기인하는 연역적 이론체계 B가 주어진 연역적 이론체계 A의 상대적 확률 계산의 공리화로 프라하 회의의 주의를 이끌었는데, 그 공리화는 타스키(Tarski)의 이론체계들 계산에 근거했다. 그런 공리화는, 이 특정 함수인 확률 함수

 

p(A, B)

 

감소하는 상대적 내용에 비례하여 증가할지라도, 연역적 이론체계들이나 내용들 A, B, C,...에 대한 척도 함수를 도입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상대적 내용의 증감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감소하는

 

정의(定義: definition): ct(A, B) = 1 p(A, B)

 

같은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한 내용 척도의 도입을 암시한다. (다른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물론 가능하지만 이것이 가장 간단하고 가장 명백한 정의[定義: definition]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 결과들에 대응하는

 

ct(L) = 0

ct(A ) = 1 p(A. T, L) = 1 p(A. T)

ct(A ) = 1 p(A, A )

 

즉각 얻는다.

이것은, 서술 α진리 유사성이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이 그 서술의 진리 내용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그 서술의 허위 내용에 비례하여 감소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몇 가지 방식들로 수행될 수 있다.

가장 명백한 방식은, ct(A ) -ct(A )A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척도로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토론하지 않을 이유들 때문에, 어떤 정상화하는 요인들에 의하여 곱해진 이 차이점에 의하여, 선호적으로 다음에 의하여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vs(A)를 정의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다소 선호될 수 있는 듯하다:

 

1/(p(A ,L) + p(A,A )) = 1/(2 -ct(A ) -ct(A )).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다음을 얻는데:

 

정의(定義: definition): vs(A) = (ct(A ) -ct(A ))/(2 -ct(A ) -ct(A )),

 

이것은 물론 p-기호로 또한 서술될 수 있다:

 

vs(A) = (p(A,A ) -p(A ,L))/(p(A,A )+p(A ,L)).

 

이것은 -1 vs(A) +1,

그리고 특히 vs(L) = 0

낳는데, 다시 말해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에 (이것은 내용이나 확률의 결핍에 의하여 측정된다) 의하여 이룩될 저 종류의 진리에 대한 근사치가 아니라, 점점 더 큰 진리 내용을 통하여 전체 진리에 대한 접근을 측정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진리보다 더 합당한 과학의 ㅡ 특히 자연과학들의 ㅡ 목표라고 나는 제안한다. 먼저, L = L 일지라도 L이 과학의 목표를 상징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우리가 허위라고 생각하는 이론들의 진리 내용이 그 이론들의 허위 내용을 충분히 능가한다면 우리는 그 이론들의 다른 이론들보다, 심지어 L과 같은 참인 이론들보다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절들(sections)에서 우리가 터무니없이 말하는 우려 없이 진리에 대한 더 나은 혹은 더 나쁜 근사치들인 이론들을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을 얻기 위하여 나는 타스키(Tarski)의 진리 이론을 그의 이론체계들 계산과 결합하는 프로그램을 개괄했을 따름이다. 나는 물론, 진리라는 개념에 대한 기준이 있다고 제안하지 않는 바와 같이 이 개념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기준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중 몇몇은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 자신),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참이 아니지만 그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진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라고 추측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과 같은 것들을 때때로 말하고 싶어 한다. 훌륭한 양심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연과학들에 방법론에 대한 주요 필수적 사항이다.

 

 

부록

 

 

타스키(Tarski)의 진리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 관한 주석

 

진리에 개념에 관한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타스키(Tarski)는 진리라는 개념을, 혹은 더 정확하게, ‘x는 참인 서술이다 (언어 L로 된)’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을 기술한다. 그 방법은 처음에 집합 계산의 언어에 적용되지만, 몇 가지 경험적 이론들의 정식화를 허용할 터인 언어들을 포함하여 많은 다양한 (정식화된) 언어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의 방법을 규정하는 것은, ‘참인 서술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만족의 관계에 대한, 혹은 더 정확하게, ‘무한수열 f는 서술-함수 X를 충족한다는 표현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 충족 관계는, 진리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위하여 결정적이라는 (그리고 충족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서 진리의 정의[定義: definition]로의 단계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그 관계 자체로 인하여 흥미를 띤다a. 현재의 주석은, 만족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서, 무한수열들 대신에 유한수열들을 이용하는 문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이론을 경험과학들에 적용하는 관점에서 그리고 교훈적인 관점에서도, 필수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타스키(Tarski) 자신은, 무한수열들 대신에 변하는 길이를 지닌 유한수열들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들을 개략적으로 토론한다. 그러나 그는, 이 양자택일적 방법들에는 특정 불이익들b이 있고 지적한다. 그 양자택일적 방법들 중 두 번째 방법에는 공수열(空數列: empty sequence)’이나 길이 0인 수열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 그 방법이 진리의 정의(定義: definition)(정의[定義: Definition] 23 [195]] 야기하는 한 특정 인공성(人工性: artificiality)’이라는 (eine gewisse Küstlichkeit) 불이익이 있는 반면, 첫 번째 방법은 충족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서 (정의[定義: Definition] 22) 상당한 [혹은 다소 심각한’] 난제들을 (ziemlich bedeudtenden Komplikationen) 야기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내가 이 주석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타스키(Tarski)의 절차의 상대적으로 사소한 변환으로 인하여 우리는 타스키(Tarski)가 염두에 두고 있던 난제들이나 인공성들(人工性: artificialities)(예를 들어 공수열들[空數列: empty sequences])에 포함되지 않은 유한수열들로써 연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인하여 타스키(Tarski)의 정의(定義: Definition) 22의 조건 (δ)라는 매우 자연스러운 절차를 우리는 보전할 수 (그리하여 고찰되는 서술-함수의 자유 변수들의 숫자와 대등한 어느 정도의 관계들을 ㅡ 혹은 속성들을 ㅡ 도입하는 우회를 피할 수a) 있다. 타스키(Tarski)의 방법에 대한 나의 변형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타스키(Tarski), 이 변형이 아니라 상당한 불이익들이 있는 다른 변형들을 언급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아마도 작은 개선사항일 것을 기술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사물들의 유한수열의 자리 수 n이라는 (혹은 n번째 자리) 개념 먼저 그리고 두 번째 유한수열 f길이라는 다시 말해서 f의 자리들의 숫자 중 가장 큰 자리 숫자와 동일한 f의 자리들의 숫자라는 (기호들로, Np(f)) 개념을 그리고 다양한 유한수열들의 길이와 관련된 그 수열들의 비교라는 개념을 비공식적으로 언급함이 유용하다. 사물은 수열에서 특정 자리를 ㅡ 가령, n번째 ㅡ 점유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문제의a 수열의 [n번째 개체이거나] n번째 사물이거나 n번째 항으로 기술될 것이라고 우리는 세 번째로 언급할 것이다. 동일한 것이 수열의 다양한 자리들에서 그리고 또한 다양한 수열들에서 발생할 것임이 주목되어야 한다.

타스키(Tarski)처럼, 나는 f ’, ‘f ’, ... ‘f ’, ‘f ’, ... ‘f 을 수열 f의 첫 번째, 두 번째, i번째, k번째 ... n번째 자리를 점유하는 사물들의 명칭들로서 사용한다. 나는, 내가 P y를 변수 v 와 관련한 표현 y의 보편화 [혹은 보편적 수량화] 명칭으로서 사용하는 것을 [인쇄상의 이유들 때문에] 제외하고 타스키(Tarski)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기호법을 사용한다a. 타스키(Tarski)의 정의 (11) v 는 서술-함수 x에서 발생한다는 정의가 덧붙여진다고 전제된다 ㅡ전혀 타스키(Tarski)의 방법들을 넘어서지 않는 그리고 사실상 타스키(Tarski) 자신의 용법에 함축된 전제.

이제 우리는 나아가 타스키(Tarski)의 정의(定義: Definition) 22[193] 대체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비적 정의(定義: Definition) 22a 및 타스키(Tarski) 자신의 정의에 대응하는 정의(定義: Definition) 22b라는 두 가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에 의하여 대체할 것이다.

 

정의(定義: Definition) 22a

사물들의 유한수열 f,

 

모든 자연수 n

 

대하여 v x에서 발생한다면 f의 자리들의 숫자는 적어도 n과 적어도 동등하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다시 말해서 NP(f) n) 서술-함수 x(혹은 x와 관련하여 충분한 길이를b 지닌) 합당하b.

 

정의(定義: Definition) 22b

수열 f

f가 사물들의 유한수열이고 x는 서술-함수이며

(1) fx에 합당하고,

(2) x는 다음 네 가지 조건들 중 한 가지 조건에 순응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서술-함수 x를 충족한다:

 

(α) 자연수들 ίk가 존재하여 x = ι 그리고 f f 이다.

(β) 서술-함수 y가 존재하여 x = 그리고 fy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γ) 두 가지 서술-함수들인 yz가 존재하여 x = y + z 그리고 f y z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δ) 자연수 k와 서술-함수 y가 존재하여

(a) x = P y,

(b) 길이가 f와 동등한 모든 유한수열 g, g가 다음 조건에 순응한다면,

y를 충족시킨다: 모든 자연수 n에 대하여, nf의 자리숫자이고 n k라면

g = f .

타스키(Tarski)의 정의(定義: Definition) 23[193] 이제 다음 두 가지

동치인 정의들 중 한 가지 정의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정의(定義: Definition) 23+

(a) x가 서술이고 (x As) (b) x에 합당한 사물들의 모든 유한수열이 x를 충족시킨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x참인 서술이다 (다시 말해서 x

W ).

 

정의(定義: Definition) 23++

(a) x가 서술이고 (x As) (b) x를 충족시키는 적어도 사물들의 한 가지 수열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x참인 서술이다 (다시 말해서 xW ).

23++라는 정식화에는 수열을 합당성을 언급할 필요가 없음이 주목될 것이다. 나아가 23++에서가 아니라 23+에서 (정확하게 타스키[Tarski]의 정의에 대응하는) 조건 (α)x는 서술-함수이다에 의하여 대체될 것이고 그리하여 자유로운 변수들을 지닌 서술-함수들을, 예를 들어, 함수 ι 를 포함함에 의하여 특정 일반화를 이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allgemeingültige [‘모든 개별적인 영역에서 옳은’]) 서술-함수들.

유사한 방식으로, 23++는 함수들로 확대된다면 충족될 수 있는 (erfüllbare) 서술-함수라는 개념을 낳는다.

나는, 성취a[혹은 충족a] 정의를 경험적 이론에게 (적어도 부분적으로 정식화된), 그리고 특히 그런 이론의 수량화되지 않은 서술-함수들에 적용함에서 그 정의, 다시 말해서 정의(定義: Definition) 22b는 주로 무한수열들을 피함 덕분에 직관적인 관점에서 완벽하게 자연스러운듯이 보인다고 말함에 의하여 나는 끝맺음을 하겠다.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9. 타스키의 진리 이론에 관한 철학적 비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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