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논리학, 물리학 및 역사에 대한 실재론적 견해
몇몇 현대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낯선 사람이고 자신이 만든 적이 없는 세상에서 두려워한다. 아마도 인간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들도 그렇고 심지어 식물들도 그렇다. 그것들도 자신들이 만든 적이 없는 세상인 물리-화학적 세상에 오래전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지라도, 이 생명체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변화시켰고, 그리고 정말로 자신들이 태어난 우주의 작은 구석을 개조했다. 아마도 이 변화들 중 가장 큰 변화는 식물들에 의하여 생겼다. 식물들은 지구의 전체 대기권의 화학적 구성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규모에서 다음은 산호초들과 섬들과 석회로 된 산맥들을 구축한 몇 가지 해양 동물들의 업적들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왔는데 사람은 삼림파괴에 의하여 사막의 확산에 기여함과 별도로, 뚜렷한 정도로 자신의 환경을 오랫동안 바꾸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몇 개의 피라미드들을 정말로 건설했다; 그러나 약 지난 세기동안만 사람은 암초들을 만드는 산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훨씬 더 최근에 사람은, 중요하게일지라도a, 미미하게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함유량을 증가시킴에 의하여 식물들의 작업을 망치기b 시작했다.c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 해양 동물들과 식물들에 의하여 이룩된 업적들에 비교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세상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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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16-20일 덴버 대학에서 열린 1차 국제 학술회의의 개막 연설에 근거함. W. 유어그로(Yourgrau) 및 A. D. 브렉(Breck) (공저), 물리학, 논리학 및 역사(Physics, Logic and History), 플레넘 출판사(Plenum Press), 1970년, 1-30쪽에 최초로 발표됨.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는 though significant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slightly를 포함하여 ‘미미하게 나마 의미 있게’로 변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undo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원상태로 돌리기’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에서 이한구 번역본은 역주를 붙여 최근의 지구 온난화 현상과 반대가 되는 견해라고 주장했는데 칼 포퍼경은 지구의 온난화를 인간의 환경파괴와 연관 짓기를 거부했고 다만 환경파괴가
인구증가와 관련되기 때문에 인구 통제를 문제로 삼았다.
변화시키지도 않았다.a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의 우리 구역에서 우리의 선배들이나 산소-생산하는 식물들이나 섬-구축하는 산호들에 의하여 이룩된 변화들만큼 위대한 변화들을 궁극적으로b 이룩하기를 약속하는 새로운 종류의 산물이나 인공물을 창조했다.c 이 새로운 산물들은 결정적으로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인데 우리의 신화들(神話들: myths), 우리의 관념들 그리고 특히 우리의 과학적 이론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이론들.
이 신화들(神話들: myths), 이 관념들 그리고 이론들을 인간 활동의 가장 특징적인 산물들 중 몇 가지 산물들로서 우리가 간주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도구들처럼, 그것들은 우리의 피부 외부에서 진화하는 기관들(器官들: organs)이다. 그것들은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인공물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특징적인 산물들 가운데서 특히 ‘인간의 지식’으로 지칭되는 것을 고려할 것이다; 우리가 ‘지식’이라는 단어를 객관적인 즉, 비개인적인 의미로 수용하는 곳에서는 그 단어가 저서에 담긴다고 언급될 것이다; 혹은 장서에 축적된다고; 혹은 대학에서 교육된다고.
인간의 지식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통상적으로 ‘지식’이라는 단어의 이 객관적 의미를 염두에 두겠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에 의하여 생산되는 지식을 벌들(bees)에 의하여 생산되는 꿀과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꿀은 벌들(bees)에 의하여 생산되고, 벌들(bees)에 의하여 비축되어 벌들(bees)에 의하여 소비된다; 그리고 꿀을 소지하는 개별적인 벌(bee)은 일반적으로 자체가 생산한 몫만을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꿀은, 전혀 생산하지 않은 수벌들에 의해서도 (벌들[bees]이 곰들[bears]이나 양봉업자들에게 잃을 저 비축된 꿈이라는 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소비된다. 더 많은 꿀을 생산하려는 자체의 능력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벌 각각은 꿀을 소비해야 하는데 그 꿀 중 얼마간은 통상적으로 다른 벌들(bees)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또한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은 사소한 차이점들은 있지만 산소-생산하는 식물들에게 그리고 이론-생산하는 인간에게 대체로 성립한다: 우리는 또한 이론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이론들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
들의 이론들을 소비해야 하는데 우리가 생산을 계속하려면 아마도 때때로 우
a 역주: 이 문장의 분사구문 compared with the changes achieved by marine animals and plants은 주문의 주어 we가 될 수 없으므로 잘못 쓰인 분사구문이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in tim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we have created a new kind of product or artifact which promises in time to work changes in our corner of the world as great as those worked by our predecessors, the oxygen-producing plants, or the island-building corals.인데 as great 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 changes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문장이다.
리 자신의 이론을 소비해야 한다.
여기서 ‘소비한다’는, 무엇보다도, 벌들(bees)의 경우에서처럼 ‘소화한다(digest)’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론들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혹은 우리 자신들에 의하여 생산된 이론들이건, 소비하는 것은 또한 그 이론들을 더 나은 이론들로 대체하고 위하여 그 이론들을 비판하고 그 이론들을 변경하고 그리고 흔히 심지어 그 이론들을 철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지식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작용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다시 물론,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을 의미한다.
우주의 역사에서 그리고 또한 지구상의 생명체 역사에서 그렇게 급진적으로 새로운 장(章)으로 인간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이 인간의 지식 성장인 우리의 이론들의 성장인 양 현재 보인다고 나는 제안한다.a 이 역사들 세 가지 모두는 ㅡ 우주의 역사, 지구상의 생명체의 역사, 그리고 인간과 인간 지식의 성장의 역사 ㅡ 물론 자체가 우리의 지식에 관한 장들(章들: chapters)이다. 결과적으로 이 장들(章들: chapters) 중 마지막 장(章: chapter)은 ㅡ 다시 말해서, 지식의 역사 ㅡ 지식에 관한 지식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 장(章: chapter)은, 적어도 함축적으로, 이론들에 관한 이론들로 그리고 특히 이론들이 성장하는 방식에 관한 이론들을 틀림없이 포함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주제 속으로 더 멀리 들어가기 전에, 이론들의 성장에 대한 기술(記述: description)로서 점점 더 유용한 것으로 내가 발견한 일반적인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도식을 제시하겠다. 그 도식은 다음과 같다:
P
여기서 ‘P’는 ‘문제(problem)’를 상징한다; ‘TT’는 ‘잠정적 이론(tentative theory)’을 상징한다; 그리고 ‘EE ’는 ‘(시도된) 오류-제거(error-
elimination)’를 상징하는데 특히 비판적 토론을 통해서이다. 나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도식은, 비판의 혹은 오류-제거의 결과가 잠정적 이론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suggest that it looks at present as if it is this growth of human knowledge, the growth of our theories, which turns our human history into a chapter so radically new in the history of the universe, and also in the history of life on earth.인데 it is ~ that ~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고 as if 다음에는 가정법 동사형이 오는데 직설법 동사를 썼으며 문장의 내용으로 보아 가정법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가 발생했다. 그리고 so 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 a chapter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으며 ‘제안한다’의 원어는 sugge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생각한다’로 번역되었다.
적용되어 통상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출현이 됨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혹은
정말로 몇 가지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 문제들은 해결되고 그 해결책들이 합당하게 검토된 이후에 흔히 옛 이론들보다 더 큰 깊이를 지닌 그리고 심지어 더 큰 풍요로움을a 지닌 새로운 문제들인 문제-자손들을 낳는 경향을 지닌다. 이것은 특히 물리 과학들에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P
P
나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도식은 다양한 방식들로 상술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도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함에 의하여:
TT
↗
P
↘
TT
이 형태에서 그 도식은,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로서 많을 이론들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잠정적 해결책들 각각을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함을 지적할 터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각각의 잠정적 해결책들이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새롭고 가장 흥미로운 새로운 문제를 약속하는 잠정적 해결책들을 추적할 것이다: 가령 새로운 문제인 P
이것은, 오류-제거가 단지 우리의 비판적 토론의 한 부분임을 보여준다: 경쟁하는 잠정적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많은 다양한 관점들에서 그 이론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것이다. 결정적인 요점은, 물론, 항상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이론은 얼마나 잘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가; 다시 말해서, P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ertilit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독창성’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nd all theories are tentativ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리고 가설적인 모든 이론들’로 번역되었다.
아무튼 우리가 이룩하고자 원하는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도식에 따르면, 진보성이 우리가 훌륭한 잠정적 이론에게 요구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에 의하여 도출된다: 우리의 토론으로 인하여, 이론이 우리가 해결하기를 원했던 문제에 실제로 어느 정도 중요했음이 밝혀졌다면 이론은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이 출현하는 문제들이 옛 문제들과 다르다면.
새로이 출현하는 문제들이 다르다면 우리가 그 다음에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로 나아갈 때 우리는 매우 많은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의 네 가지 요소 도식은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결책들의 ㅡ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이론들 ㅡ 출현을 기술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그 도식을, 출현이라는 인정되는 바와 같이 모호한 개념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ㅡ 합리적인 방식으로 출현을 말하려는 시도로서 ㅡ 제시하기를 원한다. 나는, 그 도식이 새로운 과학적 문제들 의 출현 및 결과적으로 새로운 과학 이론들의 출현에 뿐만 아니라 행위들의 새로운 형태들의 출현과 심지어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새로운 형태들의 출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싶다.
여러분에게 나는 사례를 제공하고 싶다. 가령 P
나의 도식에 따르면, 시도되는 오류-제거로 ㅡ 다시 말해서 생존을 위한 투쟁 ㅡ 새로운 문제의 형태로 제시되는 해결책들 각각의 내재적 약점이 밝혀질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문제는, 부모 생명체들과 그 생명체들의 후손은 서로 질식시키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문제는, 그 다음 차례에, 해결될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체들은 자신들의 후손을 흩어놓거나 퍼뜨리는 방법을 개발할 것이다; 혹은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문제는, 몇 가지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공동경제를 확립함에 의하여 해결될 것이다. 아마도 단세포 생명체에서 다세포 생명체들로의 전이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어떠하든, 오류-제거의 과정에 내재된 ‘생존이냐 사멸이냐’라는 다윈의 대안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을 것임을 나의 도식은 보여준다:a 오류-제거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However this may be, my schema show that there may be more than Darwin’s alternative, ‘survive or perish’, inherent in the process of error-elimination:인데 inherent 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 alternative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이다.
인하여, 옛 문제와 동시에 잠정적 해결책과 특별히 관련된 새로운 문제들이 나
타날 것이다.
이어지는 것에서 나는 때때로 함축적일 뿐이지만 나의 도식을 이용하겠다; 그리고 나의 도식이 내가 희망하는 바, 합리적인 토론일 것 안에서 이 개념을 충분히 존중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내가 전제하면서 나는 출현을 언급하겠다. 나는 네 가지 제목들 아래에서 지식 성장의 몇 가지 모습들을 다루기를 제안한다:
1. 실재론과 다원론: 환원 대(對) 출현.
2. 역사에서의 다원론과 출현.
3. 물리학에서의 다원론과 주관론.
4. 논리학에서의 실재론.
1. 실재론과 다원론: 환원 대(對) 출현 인간은 과학 이론들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개념들도 ㅡ 예를 들어, 종교적이거나 시적(詩的) 신화들 혹은, 가령, 이야기들을 위한 줄거리들 ㅡ 만들어낸다.
과학 이론과 허구적 작품 사이의 특징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진실성과 허위성이 관련될지라도, 이야기에서의 기술들(記述들: descriptions)이 참이 아닌 반면 이론은 아마도 참일 것임이 특징적인 차이점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차이점은, 이론과 이야기는 다른 비판적 전통들 속에 고착되어 있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론과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전통적인 기준들에 (이 기준들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을지라도) 의하여 판단될 의도가 있다.
이론을 규정하는 것은, 이론이 과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앞선 잠정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에서 발생한 문제이거나 아니면 (혹시) 당시 제시된 이론의 작성자에 의하여 발견되지만 과학적 전통에 속하는 문제들과 해결책들의 영역 안에서 발견되는 문제.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인즉 과학적 전통은 그 후 현재 혹은 최근까지 과학적 실재론으로 지칭될 것에 의하여 규정되기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전통은 자체의 문제들에 대하여 참인 해결책들을 발견한다는 이상(理想: ideal)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사실들에 대응하는 해결책들.
사실들에 대응하는 이론들을 발견한다는 이 규제적인 이상(理想: ideal)으로 인하여 과학적 전통은 실재론적 전통이 된다: 그 이상(理想: ideal)로 인하여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론들의 세계와 이 이론들이 언급하는 사실들이 세계가 구분된다.
게다가 문제해결에 관한 비판적 방법들을 지닌 자연과학들과 사회과학들 중 몇 가지 역시, 특히 역사와 경제학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문제해결 및 사실 발견에서 (사실 발견에 의하여 나는, 물론, 사실들에 대응하는 서술들이나 이론들의 발견을 의미한다) 우리의 최고 노력들을 대변했다. 그리하여 이 과학들은, 대체로, 진리의 관점에서 최고의 서술들과 이론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사실들의 혹은 우리가 ‘실재’라고 지칭하는 것의 세상에 대하여 최고의 기술(記述: description)을 제시하는 것들.
이제 이 과학들 중 몇 가지 과학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특정 관계들을 바라보자.
예를 들어 물리학과 화학을 생각하라; 살아 있는 생명체를 포함하여 모든 물리적 물체들과 물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주장들을 펼치는 과학들.
물리학과 화학은 전혀 다르지는 않아서, 화학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화학이 매우 높은 온도들과 또한 아마도 매우 낮은 온도들에서는 적용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 물리학과 화학이 적용되는 것들의 종류에는 큰 차이점이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오랫동안 주장된 희망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바와 같이 사실이 된다할지라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닐 터이다.a
여기서 우리는 ‘환원(reduction)’이라는 실재적인 전형적 사례를 경험한다; 환원(reduction)에 의하여 나는 물론, 화학의 모든 발견사항들이 물리학의 원리들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그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환원이 매우 놀랍지는 않을 터일지라도 매우 큰 과학적 성공일 터이다. 그런 환원은 통합에서의 실행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함에서 실제적인 진보일 터이다.
이 환원이 완벽하게 실행되었다고 전제하자.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therefore would not be very surprising if the hopes, held for a long time that chemistry can be reduced to physics, were to come true, as indeed they seem to be doing.인데 의미상 가정법으로 쓰일 문장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가 또한 어느 날 모든 생물학적 과학들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킬 어떤 희망을 지닐 것이다.
이제 이것은,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킨 것보다 훨씬 큰 장엄한 성공일 터이다. 왜? 물리학과 화학이 적용되는 종류의 것들은 처음부터 실제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원자이론이 물리 이론인지 아니면 화학 이론인지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터인지를 생각하기만 하라. 사실상 오랫동안 원자이론은 두 가지 모두였다; 그리고 물리 이론과 화학 이론의 통합을 야기할 것이거나 아마도 야기한 연계를 제공하는 것은 이 공통적인 결합이다.a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 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 생명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종류의 물리적 및 생물학적 법칙들에 종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들과 살아 있지 않은 생명체 사이에는 첫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듯하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일시적이거나 중간적인b 단계들과 또한 중간적인b 체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환원이 아마도 어느 날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게다가, 지구상에서의 생명체의 기원에 관한 최근 잠정적인 이론들이 아마도 성공적으로 시험에 부쳐진다는 것과 우리가 아마도 살아 있는 원시적 생명체들을 인공적으로 만들 것임은 전혀 비개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도 완벽한 환원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것은, 화학자들이 무기적 및 유기적인 모든 종류의 화학물질들의 물리적 구조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 화학물질들의 화학적 구성을 이해하기 전에 그 화학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진다. 그리하여 심지어 순전히 물리적 수단에 의한 화학적 과정들의 통제 같은 것도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과 대등하지 않다. 환원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환원은 이론적 이해를 의미한다: 옛 분야에 의한 새로운 분야에 대한 이론적 관통.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수행하고 있던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도 무생물로부터 어떤 원시적인 형태들의 생명체를 창조하기 위한 과정을 발견할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것은 환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격려가 될 터이고 합당하게 그렇다.c 그러나 환원으로 가는 길은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it is ~ that ~의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ntermedi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직접적인’과 ‘매개적인’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dmittedly, this would be a tremendous encouragement to all
those who seek for a reduction, and rightly so.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당연히 이것은 환원을
아마도 여전히 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이 심지어 지나갈 수 없지 않을지를 알 수도 없을 터이다: 역학의 전기역학으로의 이론적 환원이나 그 반대 방향으로의 이론적 환원이 없는 듯이 보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물학의 물리학으로의 환원이 없을 것이다.
상황이,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자연적인 과정에 의하여 무생물 체계들로부터 유래할 것임과 다른 한편으로 물리학적 용어들로 가능한 생명체에 대한 이론적 이해하기가 없음이라면 우리는 아마도 생명체를 물리학적 물체들의 혹은 물질의 출현하는 속성으로서 말할 것이다.
이제 나는, 합리론자로서 세상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희망한다는 것과 환원을 원하고 희망한다는 것을 완전히 명확히 하기를 원한다. 동시에 가능한 환원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명은 물리적 물체들의 출현하는 속성이라고 상상될 수 있다.
여기서 나의a 요점은, 어떤 철학적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b 환원이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독단적인 입장을 선험적으로 채택하는 저 환원 신봉자들은 환원이 어느 때고 이룩된다면c 어느 정도 자신들의 승리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 다음에 이룩될 것은 틀림없이 항상 이루어졌기 때문이다;d 그리하여 그들의 승리는 사건들에 의하여 옳은 것으로e 증명된 흥미롭지 않은 승리일 따름일 것이다.
문제는 선험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성공적인 환원이 엄청난 발견일 터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이 요점을 매우 오랫동안 숙고했는데 왜냐하면 이 요점이 사다리의 다음 단계의 위치와 ㅡ 의식의 출현 ㅡ 관련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행동론자들’이나 ‘물리론자들’로 지칭되는 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신적 상태들이나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정신적 상태들이나 사건들에 관한 우리의 보고서들이 물리적 체계들로서의 우리 자신들에 관한 성찰들 및 보고서들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데 관하여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과 같은 선험적인 이유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탐구하고 올바르게 탐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자극이 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my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for some philosophical or other reas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런저런 철학적인 이유로’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should reduction ever be achiev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만약 여태껏 환원이 성취되어 왔다면’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what will then be achieved ought to have been achieved all the tim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왜냐하면 다음 성취될 것은 항상 달성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e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igh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바로’로 번역되었다.
생각한다:a 그것들은 이 체계들의 물리적 상태들에 관한 보고서들이다.
오늘 아침 여기에 오기로 된 두 명의 철학자들은 탁월한 논증들을 사용하여 그런 견해를 옹호했다. 그들은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과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이다. 그들의 견해들에 관하여 나는 몇 가지 비판적 언급들을 하고 싶다.
콰인(Quine)은 카르납(Carnap)과 파이글(Feigl)을 언급하여, 이론적 진보가 ‘... 대신에 특정 상호 관계적인 생리학적 생태들과 사건들을 가정함에 의하여 분명히 이룩될 수 있을 터인... 것만큼 물리적 행동 뒤에서... 특징적인 정신적인 상태들을... 가정함에 의하여 이룩될’ 수 있다면 ‘... 그 상태들에 대한 상세한 생리학적 설명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그 상태들을 인간 신체들의 상태들로서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신체적 상태들은 아무튼 존재한다; 다른 것들을 추가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한다.b
콰인(Quine)이 여기서 실재론자로서 말을 한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신체적 상태들은 아무튼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서 채택하고 있는 관점에서, 그는 내가 ‘과학적 실재론자’로 지칭할 사람이 아니다: 과학이, 여기서 혹은 과학이 혹시 어느 날 그런 것과 같이 환원을 이룩할지를 그는 기다려서 알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정신적 실체들이 이론을 위하여 필요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오캄의 면도날을 적용한다.
그러나 오캄이나 다른 사람이 혹시 역기서 필연성에 의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누가 알겠는가? 정신적 실체들이나, 혹은 더 낫게, 정신적 상태들이 존재한다면 ㅡ 그리고 내 자신은 그것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ㅡ 정신적 상태들을 가정하는 것이 그 상태들에 대하여 참인 설명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느 날 물리적 상태들로 환원된다면 이것은 엄청난 성공일 것이다.a 그러나 우리 자신을 물리적 물체들과 그 물체들의 행태에 국한시키는 단순한 방법에 의하여 정신적 상태들 없이 물체들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함에만 의하여 그 상태들의 존재를 우리가 거부한다면 성공은 없을 것이다.
나의 논증을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유물론적이거나 물리주의적인 특징을 지닌 철학적 사념들은 매우 흥미롭고 심지어 성공적인 과학적 환원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념들은 틀림없이 솔직하게 잠정적인 이론들이다 (파이글[Feigl]의 이론들이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러나 몇몇 물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들을 잠정적이 아니라 물리주의적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는 제안들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제안들이 의심할 바 없이 편리하기 때문에 그 제안들에는 자기들이 선호하는 많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몸-정신 문제와 같이 불편한 문제들은 정말로 매우 편리하게 사라진다. 그리하여 이 물리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은 사이비-문제들로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모든 화학적 상태들과 그 상태들과 연관된 문제들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을 터이라고 답변할 터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분명히 물리적이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상세하게 명시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터이다: 수행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었던 유일한 것은 각각의 화학적 상태와 상호관련적인 어떤 물리적 상태의 존재b를 상정하는 것이었다고.c
그런 제안을 일반적으로 채택함으로 인하여 화학의 물리학으로의 상세한 환원을 찾지 않는 태도가 생겼을 터임은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런 채택으로 인하여 몸-정신 문제와 같은 문제가 ㅡ 화학에 대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들은 If mental entities or, better, mental states should existㅡand I myself do not doubt that they do existㅡthen positing mental states is necessary for any true explanation of them; and should they one day be reduced to physical states, then this will be a tremendous success.인데 조건절들에서 모두 가정법이 쓰이고 주절들에서는 직설법이 쓰여서 문법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existen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at all that we needed to do was to postulate the existence of some physical state correlative to each chemical state.인데 형용사구 correlative to each chemical state가 앞의 명사 the existence of some physical state을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가 발생했다.
물리학의 관계라는 문제 ㅡ 해체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 해결은 언어적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재적 세계에 관하여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을 터이다.a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나는, 실재론은 틀림없이 적어도 잠정적으로 다원론적이라고 그리고 실재론자들은 틀림없이 다음 다원론적인 공준들(公準들: postulates)을 지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다다른다:
우리는 사실적 문제들을 언어적으로 해결하거나 해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문제들에 관하면 말하는 것을 거절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방법에 의하여.b 반대로, 우리는 적어도 우선 다원론자들이어야 한다: 몸-정신 문제가 어떤 사람들에게 보일 것과 같이 난제들이 해결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먼저 난제들을 강조해야 한다.
그 다음에 과학적 환원을 통하여 우리가 몇몇 실체들을 환원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들에 의하여 그렇게 하고 이해함에서 얻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자.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터이다: 아무튼 환원을 시도하기 전에 모든 경우에서 출현에 관한 논증들을 상세하게 고안하자.
이 절에서 개진된 고려사항들을 요약하여 더 분명하게 만들면: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잘 진행되고 있는데,
훌륭한 과학적 설명의 모든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진정한 과학적 환원의 전형적인 경우로서 기술될 것이다.
‘훌륭한’ 혹은 ‘과학적’ 환원은, 커다란 중요성을 띤 많은 것을 우리가 배우는 과정이다. 환원될 분야에 관한 이론들을 (이 경우에는 화학) 우리는 이해하여 설명하는 것을 배우고, 환원하는 이론들의 (이 경우에는 물리학) 힘에 관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을지라도 화학의 물리학으로의 환원은 완벽하게 성공적일 것임이 상상될 수 있다. 덜 개연적일지라도, 생리학을 포함하여 생물학의 물리학으로의 그리고 심리학의 생리학으로의 그리하여 물리학으로의 훌륭한 환원들을 우리가 어느 날 경험할 것임도 또한 상상될 수 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as a consequence we should not have learned anything about the real world.인데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의 미실현 의무를 나타내는 형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would not have learned로 써야 할 것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e must beware of solving, or dissolving, factual problems linguistically; that is, by the all too simple method of refusing to talk about the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는 언어적으로 사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했는지 아니면 해체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그 문제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너무나 단순한 방법에 의해 그렇게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나는 나쁜 환원이나 임시방편적인 환원을, 오직 언어적인 방책들에 의한a 환원 방법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정신적 상태들을 상정함에 의하여 (임시 방편적으로 상정함에 의해서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이전에 설명한 행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생리학적 상태들의 존재를 임시방편적으로 상정한다고 제안하는 물리주의의 방법. 혹은 달리 표현하여, 내가 슈뢰딩거(Schrödinger) 방정식을 이해한다고 내가 지금 느낌을 내가 보고할 때 나는 나의 생리학적 상태들 중 한 가지 생리학적 상태를 보고한다고 말하는 언어적 방책에 의한.
이 두 번째 종류의 환원이나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이용은 나쁜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문제를 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임레 라커토스(Imre Lakatos)의 효과가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생생한 용어사용법으로, 그것은 ‘퇴행적인 문제 전환(degenerating problemb shift)’의 극악한 경우이다; 그리고 그 경우는 훌륭한 환원이나 출현에 대한 연구를 막거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막는다.
이 극악한 방법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우리가 환원하기를 희망하는 분야에 관하여 가능한 한 많이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분야가 환원에 저항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몇 경우들에서, 그 분야가 환원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논증들이 우리에게 심지어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진정한 출현의 사례를 경험할 것이다.
나는 아마도 다음 언급으로써 행동주의에 (특히 언어적 행동주의) 관한 퇴행적 문제 전환에 관한 나의 비평들을 끝낼 것이다.
행동주의자들과 유물론자들은 반(反)-관념론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c, 버클리(Berkeley)의 ‘존재하는 것 = 감지되는 것(esse = percipi)’이나
존재함 = 관찰될 수 있음(to be = to be observable)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따르면, ‘존재함(to be)’은 ‘물질적임(to be material)’으로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by merely linguistic devic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merely가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b 역주: 단어 problem의 번역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ight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분명하게’로 번역되었다.
‘시공간에서 물체로서 행동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클리(Berkeley)의 등식을 다소 다른 언어적 형태로 표현할지라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등식을 정말로 고수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존재함 = 관찰됨(to be = to be observed)
아니면 혹시
존재함 = 지각됨(to be = to be perceived).
이유인즉 그들은, 관찰될 수 있는 저 물체들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관찰을 이론들에 비춘 해석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관찰될 수 있는’으로 부르는 것은 상당히 구식이고 원초적인 이론에 비추어 관찰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비록 내가 상식을 강력하게 지지할지라도, 나는 과학으로부터 배움에 의하여 상식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또한 지지한다. 아무튼, 관념론과 현상론과 실증주의를 야기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철학이다 (혹은 낡은 과학);a 혹은 유물론과 행동주의, 아니면 다른 형태의 반(反)-다원론을 야기하는 것은.
2. 역사에서의 다원론과 출현
나는 우주의 역사에 관하지 말하지 않겠고 다만 지구상의 생명체의 역사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하겠다.
매우 유망한 출발이, 생명체가 지구상에 출현한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을 향하여 최근에 시작된 듯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혹시 어떤 주요한 성공을 곧 기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현, 심지어 실험적 출현에 관하여 낙관적인 반면, 나는b 환원에 관해서 매우 회의적으로 경도된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생명체의 진화에 관한 나의 사고들 중 특정 사고들에 기인한다.
내가 보기에 진화 과정들이나 주요 진화적 변화들은 역사 과정들이나 주요 역사적 변화들만큼 예측 불가능하다. 하이젠베르크의 세상에 대한 비결정론적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it is ~ that ~의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b 역주: 이 주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견해보다 세상에 대한 다소 더 급진적인 비결정론적 견해에 내가 강력하게 경도되기 때문이 나는 이 견해를 믿는다: 나의 비결정론은, 심지어 고전물리학도 비결정론적이라는 주장을 포함하며 그리하여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비결정론이나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의 비결정론을 더 닮았다. 그리고 진화는 부단히 변하는 조건들이나 문제 상황들 하에서 주로 확률론적으로 나아간다고 그리고 더 성공이든 덜 성공적이든 아니면 심지어 완전히 실패적이든a 모든 잠정적인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 상황을 야기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생명의 과정들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향한 부단하고도 광범위한 진보를 막지는 않을지라도 그런 이해뿐만 아니라 완벽한 환원을 저애한다. (이 논증은, 보어[Bohr]가 자신의 상보성이라는 개념을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 적용한 것과 ㅡ 내가 보기에 정말로 매우 약한 논증 ㅡ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절에서 주로 인간의 역사에 관하여, 인류의 이야기에 관하여 말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크게 주로 우리의 지식의 ㅡ 세상에 관한 우리의 이론들의 ㅡ 역사이고, 물론 이 산물들의 반향들에 관한 역사인데 그 산물들은 우리들이 만들어내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추가 생산물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의 산물들 중 이 이론적 산물들을 향하여 우리가 물리주의적이거나 유물론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지식의 객관적 의미에 대한 나의 강조가 ㅡ 장서들에 수집된 저서들에 포함된 것으로서 그리고 대학들에서 가르쳐지는 것으로서 이론들에 대한 나의 강조 ㅡ 이론들에 대한 물리주의적 혹은 유물론적 해석에 내가 동의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마도 의심스러울 것이다; 나는, 언어를 물리적 대상들로 ㅡ 소리들, 인쇄된 문자들 ㅡ 구성되는 것으로서 보는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떤 특징적인 종류의 물리적 행태로써 이 소리들과 문자들에 반응하도록 조건이 주어지거나 의향이 주어진 것으로 보는 해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임시방편적 환원들을 고취하는 것보다 나의 의도로부터 더 먼 것은 없다.b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지식에 대한 주관론적이거나 개성주의적 견해와 방금 내가 개괄하려고 노력한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unsuccessfu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성공하든’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nothing is further from my intention than to encourage as hoc reduction of this kin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나는 이런 종류의 임시방편적인 환원들을 격려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고자 의도하지 않는다.’로 번역되었다.
유물론적이거나 물리주의적 견해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면, 나는 후자(後者)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강조하건대 양자택일이 아니다.
개념들의 역사는, 개념들이 논리적이거나 그 용어가 선호된다면 변증법적 문맥들로 출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친다.
P
같은 나의 다양한 도식들은 정말로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에 대한 개선들과 합리화들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 도식들은 전적으로 합리적 비판이라는 고전적인 논리적 연구법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합리화들인데 그 연구법은 소위 모순율(矛盾律: law of contradictions)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모순들은 우리가 그 모순들을 발견할 때마다 제거되어야 한다는 요건에. 과학적 수준에서의 비판적 오류-제거는 모순들에 대한 의식적인 탐색을a 통하여 나아간다.
그리하여 역사 그리고 특히 개념들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개념들과 그 개념들의 객관적인 논리적 (혹은 변증법적) 관계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개념들에 관한 역사의 장(章)을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개념들의 환원이 언젠가 성공적일 수 있을 터로 생각할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어떤 환원 가능성에 반대하여 논증하기보다는 우리가 환원을 통한 실체들의 가능한 제거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전에 출현하는 실체들(entia)에 대한 인정을 찬성하여 그리고 이 출현하는 실체들(entia)을 인식하여 기술할 필요를 찬성하여 논증하는 것을 나의 과제로서 수용한다.
이론들의 출현하는 특성을 찬성하는 나의 주요 논증들 중 한 가지 논증을 나는 다른 곳에서 제시했다. 나의 논증은, 진정한 과학적 지식의 성장과 같은 것이 있다는 추측에 의존한다; 혹은 실제적인 용어들로, 내일이나 일 년 후에 지금까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중요한 이론들을 우리가 제안하여 시험할 것이라는 추측. 이런 의미에서의 지식 성장이 있다면 그 지식의 성장은 과학적 수단에 의하여 예측될 수 없다. 이유인즉 과학적 수단에 의하여 내일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을 오늘 그렇게 예측할 수 있을 터인 사람은 그 발견들을 오늘 할 수 있을 터이고 그것은 지식의 성장에는 끝이 있을 것임을 의미할 터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측불가능성은 원칙적으로 출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요점으로 항상 간주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나의 논증은 아무튼a, 지식의 성장이 원칙적으로 틀림없이 예측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객관적인 의미에서 이론들이나 지식의 출현하는 특징을 찬성하는 다른 논증들이 있다. 이론들은 그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혹은 그 이론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매우 인기 있고 매우 단순한 견해에 반대하여 나는 한두 가지 논증만을 언급하겠다. (이 정신적 상태들이 그 다음에 차례에 따라서 혹시 물리적 상태들로 환원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추가적으로 토론되지 않을 것이다.)
자체의 객관적이거나 논리적 의미에서의 이론이 그 이론을 믿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로 환원될 것이라는 개념은, 통상적으로 이론은 사고(思考: thought)일 따름이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착오이다: 그것은 ‘사고(思考: thought)’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단어의 주관적 의미에서, ‘사고(思考: thought)’라는 단어는 정신적 경험이나 정신적 과정을 기술한다. 그러나 두 가지 정신적 경험들이나 과정들은, 서로에 대하여 인과적 관계들일지라도, 서로에게 논리적 관계들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부처(Buddha)의 특정 개념들이 쇼펜하우어의 특정 개념들과 일치한다고 혹은 부처(Buddha)의 그 개념들이 니체의 특정 개념들과 모순이 된다고 내가 말한다면, 이 사람들의 정신적 사고-과정들에 관해서나 그 사고-과정들의 상호관계들에 관하여 내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특정 개념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내가 말한다면, 니체의 특정 사고-과정들이 그가 쇼펜하우어를 독서함에 의하여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나는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고-과정들이라는 세계와 사고-과정들의 산물들이라는 세계인 이 두 가지 다른 세계들이 실제로 있다. 전자(前者)가 인과적 관계들에 있는 것인 반면 후자(後者)는 논리적 관계들에 있다. 특정 이론들이 양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논리적 사실이어서, 누군가가 이 양립불가능성을 알아챘거나 이해했는지 아닌지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성립한다. 이 순전히 객관적인 논리적 관계들은, 내가 객관적 의미에서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t any r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적어도’로 번역되었다.
이론들이나 지식으로 지칭한 실체들의 특징이다. 이것은 또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매우 흔히 그 이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튼 막스 보른(Max Born)이 슈뢰딩거 방정식(Schrödinger equation)에 자신의 통계적 해석을 부여하기 전까지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그 방정식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마도 역설 없이도 논증될 것이다; 혹은 케플러의 면적법칙이 케플러에 의하여 합당하게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케플러는 그 법칙을 혐오했던 듯이 보인다.
사실상 이론 이해하기는 무한한 과제와 같은 것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몇 가지 이론들을 매우 잘 이해할지라도, 이론은 완벽하게 이해되는 적이 없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이론 이해하기에는 정말로 인간의 개성 이해하기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지닌 의향들의 체계를 상당히 잘 알거나 이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몇 가지 다른 상황들에서 어떻게 행동할 터인지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히 다양한 가능한 상황들이 무한히 많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지닌 의향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듯이 보이지 않는다. 이론들도 유사하다: 한 가지 이론에 대하여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지닌 논리적 결과들을 모두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무한하다: 이론이 혹시 적용될 무한히 다양한 무한히 많은 상황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론이 지닌 논리적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이 관련될; 그리고 이 상황들 중 많은 상황들은 생각된 적이 없다; 그 상황들에 관한 가능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을 만든 사람도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어떤 사람도 이론에 내재한 모든 가능성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a 이것은 다시, 이론은 자체의 논리적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ㅡ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인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대상 ㅡ 보여준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산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나 꿀이 벌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벌에 의하여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역설적이지 않은 것과 같이 이론들과 개념들은 우리의 산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역설적이지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means that nobody, neither its creator nor anybody who has tried to grasp it, can have a full understanding of all the possibilities inherent in a theory;인데 주절이 긍정이고 종속절이 부정으로 순서가 뒤바뀌었다. 그리고 문맥상 its와 it은 각각 a theory의 소유격 대명사와 대명사인데 앞 문장의 단수 명사는 possibility이므로 문장의 일관성이 없다.
않다.
그리하여 이론들이나 개념들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ㅡ 그리고 모든 인간의 역사는 주로 우리의 이론들이나 개념들의 역사라는 견해에 대하여 훌륭한 경우가 이룩될 수 있을 터이다 ㅡ 틀림없이 우리 모두는 다원론자들이 된다. 이유인즉 역사학자에게,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문제 상황들 속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용하여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개념들인 그들이 이해하고 비판하고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개념들을 생산해내는 사람들.
개념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개념들에 일종의 생명이 (저것은 물론 은유이다)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개념들이 오해될 수 있고 배척될 수 있고 잊힐 수 있다는 것; 개념들이 다시 주장될 수 있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은유 없이 우리는, 개념들은 사람의 사고(思考: thought)나 믿음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a 개념들은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배척될지라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플라톤과 헤겔이 회상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들(Ideas)’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은 구상들(conceptions)이나 관념들(notions)이었다; 헤겔이 말하는 관념들은 변증법적으로 스스로-변하는 구상들(conceptions)이나 관념들(notions)이었다. 내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발견하는 개념들은 전혀 구상들(conceptions)이나 관념들(notions)이 아니다. 그 개념들은 단어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들이나 명제들에 부합한다.
플라톤과 헤겔에 반대하여 나는 세상에 관한 잠정적 이론들을 ㅡ 다시 말해서, 가설들의 논리적 결론들과 함께 가설들 ㅡ 개념들의 세상의 가장 중요한 시민들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그 잠정적 이론들이 지닌 기묘하게 비-시간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그 이론들이 영원하게 되고 그리하여 생성되어 변화에 그리고 부패에 종속되는 것들보다 더 실재적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플라톤이 그렇게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않는다. 반대로, 변하여 사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첫눈에 보기에 실재적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망상도, 망상으로서, 실재적인 망상이다.
이것은 시간이라는 그리고 변화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역사가는, 시간과 변화가 망상들이라는 교설을 수용할 수 없다고 나는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ithout metaphor, however, we can say that they are not identical with any man’s thought, or belief;인데 주절 we can say가 긍정문, that절이 부정문으로 뒤바뀐 표현이다.
생각한다; 파메니데스(Parmenides), 바일(Weyl) 그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와 같은 몇몇 위대한 물리학자들 및 철학자들에 의하여 지지되는 교설. 발생인 사건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어떤 변화를 포함한다.
역사가가 살고 있는 다원론적 우주는, 개별적인 삶들을 살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자녀들을 낳고 그 자녀들에 관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고 소망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지만 항상 이론화하면서 흔히 행복뿐만 아니라 진리도 추구하는 개별적인 사람들 있다는 것a ㅡ 이 다원론적인 우주가 하나나 또 다른 종류의 일원론으로 성공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 ㅡ 이것은 내가 보기에 비개연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나의 요점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의 다원성을 인정한 이후에만 우리가 진지하게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적용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콰인(Quine)의 아름다운 정식화를 뒤집으면, 플라톤의 수염이 충분히 거세어 많은 실체들에 의하여 엉킨다는 조건으로만 우리가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사용할 가치가 있을 수 있다.b 면도칼의 날이 이 힘들 일을 위하여 사용됨에서 무디어질 것임은 기대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3. 물리학에서의 실재론과 주관론
물리학자들이 주관론이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는 현대물리학에는 두 가지 중요한 분야들이 있다: 볼츠만(Boltzmann)의 시간 방향에 관한 주관성 이론, 그리고 관찰되는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간섭까지 더 낮은 한계를 결정하는 것으로서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공식들에 대한 해석.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을 설명하도록 의도된 몇 가지 상상적 사고실험들(思考實驗들: thought experiments)에 관찰자를 끌어들였을 때, 주체의 혹은 관찰자의 또 다른 간섭이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인슈타인 자신에 의하여 관찰자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추방당했던 분야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요점을 토론하지 않겠고 또한, 시간과 변화는 인간의 망상들이라고 말하려고 노력함에서 시간과 변화가 다른 것으로 조금도 환원되지 않은 (그리고 내가 추측하는바, 환원에 순응적이 아닌a) 매우 실재적인 망상들임을 망각하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 이론도 토론하지 않겠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토론하지 않겠는데 왜냐하면 단지 최근에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이젠베르크 공식들과 그 공식들에 대한 해석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 공식들은 통상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도출된다; 예를 들어 바일(Weyl)에 의한 흥미로운 추론과정과 보른(Born)에 의한 또 다른 다소 복잡한 추론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b 사실상 에너지에 관한 하이젠베르크의 공식은 파동역학에도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에게는 교환관계들(commutation relations)이 (힐[Hill]에 따르면 그 공식들의 추론과정과 관련해서 불충분한) 필요하지 않다. 그 하이젠베르크의 공식은 1925-6년의 혁명적인 새로운 양자역학에 의존하지 않을 따름이지만 1900년의 플랑크(Planck)의 옛 양자가설에서 직접적으로 귀결된다:
(1) E = hv.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즉각적으로
(2) △E = h △v를
얻는다.
조화로운 분해능 원리(the principle of harmonic resolving power),
(3) △v ≈ 1/△t를
이용함에 의하여 우리는 (2)와 (3)으로부터
(4) △E ≈ h/△t를
얻는데 이것은 즉각
(5) △E△t ≈ h를
낳는다; 다시 말해서, 하이젠베르크의 소위 불확정성 공식들의 한 가지a 형태이다.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위치 및 운동량에 관한 하이젠베르크 공식을 두에인b의 원리(Duane’s principle)로부터 (플랑크[Planck]의 원리 대한 그 유사성이 최근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에 의하여 강조된) 얻는다. 그것은
(6) △p
서술될 것이다.
란데(Landé)에 의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것이다: 공간c 주기성 △q
(6)으로부터 우리는 즉각
a 역주: ‘한 가지’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고유명사는 이한구 번역본에 ’듀앙‘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pa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7) △p
얻는데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공식들의 또 다른 형태이다.
플랑크(Planck)의 이론이 통계적 이론임을 고려하여, 내가 30여 년 전에 제시한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은 통계적 분산관계들로서 매우 자연스럽게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식 △p
이제, 그런 주장은 어떻게 시험될 수 있는가? 고정된 개폐기 개방 △
기술된 종류의 실험들은 모든 물리 시험실들에서 매일 수행된다. 그러나 그 실험들로 인하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해석은 반박되는데 왜냐하면 측정들이 (그 측정들에 근거한 예측들은 아닐지라도c) 이 해석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런 측정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했지만 그는 우리가 그 측정들에게 의미를 부여할지 혹은 말지는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거나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언급 이후에 측정들은 보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서 무시되었다. 그러나 측정들은 무의미하지 않은데 이유인즉 측정들에는 확정된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측정들은 문제의 바로 그 공식들에 대한 시험들이다; 다시 말해서, 분산관계들로서의a 불확정성 공식들에 대한.
그리하여 양자역학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혹은 보어(Bohr)의 주관론적 해석을 수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양자역학은 통계적 이론인데 왜냐하면 양자역학이 해결하는 문제들이 ㅡ 예를 들어, 분광강도들(spectral intensities) ㅡ 통계적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비-인과적 특징을 철학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여기서는 없다.
통계적 이론들을 결정론적b 이론들로 환원하는 것의 불가능성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이론들의 양립불가능성이라기보다는), 그러나,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결과들을 낳는 논증들이 란데(Landé)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매우 다른 논증들이 내 자신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요약하여, 모든 물리학의 실재론적이고 객관론적인 특징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현대 물리학에서 관찰하는 주체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은 그 주체가 뉴튼의 역학이나 맥스웰(Maxwell)의 전기장 이론에서 수행한 역할과 전혀 다르지 않다: 관찰자는, 본질적으로, 이론을 시험하는 사람이다. 이것 때문에 그에게는 많은 다른 이론들, 경쟁하는 이론들 그리고 보조적 이론들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관찰자들이라기보다는 사색가들임을 보여준다.
4. 물리학에서의 실재론
나는 논리학을 일종의 놀이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논리학에 관한 소위 양자택일적 체계들에 관하여 알고 있고 내 자신이 실제로 한 가지를 창안했지만 논리학에 관한 양자택일적 체계들은 매우 다른 관점에서 토론될 수 있다. 우리는 아마도, 어떤 논리학을 채택할 것인지는 선택이나 규약의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이론은 간략하게 이렇다. 나는 논리학을 환원 이론이나 추론가능성의 이론,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지칭하기로 결정하는 모든 것으로 간주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qua로서만 강조되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분산관계로서’로 강조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deterministic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결정적’으로 번역되었다.
추론가능성이나 환원은, 본질적으로, 진리의 전송(the transmission of truth)과 허위의 재전송(the retransmission of falsity)을 포함한다: 타당한 추론에서는 진리가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 전송된다. 이것은 특히 소위 ‘증명들(proofs)’에서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허위는 결론으로부터 (적어도) 전제들 중 한 가지 전제로 또한 재전송되고, 이것은 반증들이나 논박들에서 그리고 특히 비판적 토론들에서 사용된다.
우리에게는 전제들과 결론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결론이 허위임을 밝히고 추론이 타당하다고 전제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전제들 중 한 가지 전제가 틀림없이 허위임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논리학이 비판적 토론에서 부단히 사용되는 방식인데 이유인즉 비판적 토론에서 어떤 것이 어떤 주장과 부합하지 않음을 우리는 밝히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비판은 반대-비판에 의하여 타당하게 답변될지도 모른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1) 비판은 매우 중요한 방법론적 방안이다; 그리고 (2) ‘나는 당신의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의 논리는 당신에게는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른 논리를 더 좋아하고, 나의 논리에 따라서 이 비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함에 의하여 당신이 비판에 답변한다면, 당신은 비판적 토론의 방식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점.
이제 나는 논리의 두 가지 주요 용도들을 구분해야겠는데, 즉 (1) 논증적 과학들에서의 ㅡ 다시 말해서, 수학적 과학들 ㅡ 논리의 용도와 (2) 경험 과학들에서의 논리의 용도.
경험과학들에서는 논리가 거의 배타적으로 비판적으로 사용되는 ㅡ 허위의 재전송을 위하여 ㅡ 반면, 논증적 과학들에서 논리는 주로 증명들을 위하여 ㅡ 진리의 전송을 위하여 ㅡ 사용된다. 물론 응용수학도 합류하지만 응용수학에서 우리는 함축적으로 순수수학의 증명들을 이용하지만 경험과학들에서 수학의 역할은 몇 가지 국면들에서 의심스럽다. (이 결과에 대한 슈워츠[Schwartz]의 탁월한 논문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경험과학들에서는 논리가 주로 비판을 위하여 이용된다; 다시 말해서, 논박을 위하여. (나의 도식 P
이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우리가 비판적 문맥에서 논리를 이용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매우 강력한 논리, 말하자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a 논리를 이용해야 한다; 이유인즉 우리는 우리의 비판이 엄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판이 엄격하게 되어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벽한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무기를 이용해야 한다. 무기 사용 모두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나치게 비판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면 우리는 반대-비판에 의하여 답변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벽하거나 고전적이거나 2값인 논리(two-valued logic)를 이용해야 (경험과학들에서) 한다. 우리가 그 논리를 이용하지 않고 후퇴하여 어떤 더 약한 논리를 ㅡ 가령, 직관론적 논리나 어떤 3값 논리 (양자이론과 관련하여 라이헨바흐[Reichenbach]가 제안한 바와 같이) ㅡ 이용한다면, 우리는 충분히b 비판적이 아니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것은, 덴마크의 상황에서 뭔가 부패했다c는 (내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경우에는 코펜하겐 해석으로의 양자이론인) 징조이다.
이제 대조적으로 증명들(proofs)을 살펴보자. 모든 수학자는, 최소한의 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정리(定理: theorem)를 증명하는 데 상당한 관심이 놓인다는 것을 안다. 필요 이상으로 강력한 수단을 이용하는 증명은 수학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여, 증명에서 이용되어야 하는 가장 약한 전제들이나 최소한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일이 항상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최소한의 전제들이 증명에서 이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증명이 충분할 ㅡ 다시 말해서 타당할 ㅡ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증명이 필수적이기를 원한다. 이것은 내가 수용하는 바, 다소 정교한 견해이다. 정교하지 못한 수학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보다 정교한 수학에서 우리는 정리(定理: theorem)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엇이 필수적인지를 우리는 실제로 알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고전적 논리학의 종합보다 더 약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수학적 정리들(定理들: theorems)을 증명할 수 있다면d, 이것은 수학적 관점에서 극도로 흥미롭다. 그리하여 증명 이론에서 우리는 가능하면 우리의
a 역주: ‘가장 강력한’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enoug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너무’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something is rotten in the state of Denmark인데 섹스피어의 햄릿에서 유래하는 대사로 덴마크에 부패한 상황이 있다는 의미이다.
d 역주: 이 종속절 원문은 So if one can prove mathematical theorems with methods weaker than the full battery of classical logic인데 weaker 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 methods을 뒤에서 수식하므로 문법에 맞지 않는다.
고전적 논리를 약화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우리는 예를 들어 직관론적
논리학이나, 실증 논리학과 같은 어떤 다른 더 약한 논리학을 도입하여 논리학 전체를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나 멀리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조사할 수 있다.
부연하여 ‘직관론적 논리학’이라는 용어는 명칭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용어는 브로우베르(Brouwer)에 의하여 창안되어 헤이팅(Heyting)에 의하여 정식화된 고전적 논리학의 매우 흥미롭고도 다소 약화된 형태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나는 브로우베르-헤이팅(Brouwer-Heyting) 논리를 선호하여 중요한 것을 말하고 싶을지라도, 나는 분명히 직관론으로 지칭되는 철학적 이론을 선호하여 뭔가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철학이나 논리학이나 다른 곳에서 직관의 권위를 어떤 의미에서도 내가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a 잠시동안 브로우베르식(Brouwerian) 논리를 차치하고, 직관론은 직관들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뢰될 수 있다는 교설이라고 우리는 혹시 말할 것이다. 이것에 반대하여 나는, 직관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직관들은 통상적으로 비판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직관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브로우베르식(Brouwerian)이나 소위 ‘직관론적 논리학’은, 현재 토론의 관점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논리학이 고전적 논리학의 한 부분이고b 진정한 부분이면 약화된 형태일 따름이기c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직관론적 논리의 관점에서 타당한 모든 추론은 고전적 논리학의 관점에서도 또한 타당한데 반면 그 반대 경우는 타당하지 않다: 우리는, 고전적 논리학에서 타당하게 도출될 것이지만 직관론적 논리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추론들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내가 직관론적 논리를 이용하여 어떤 정리(定理: theorem)를 (지금까지 고전적인 방법들에 의해서만 증명된) 증명할 수 있다면 나는 실제적인 수학적 발견을 이룩했다; 이유인즉 수학적 발견들은 새로운 정리들(定理들: theorems)에 대하여 새로운 증명들을 발견하는 데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발견들은 또한 옛 정리들(定理들: theorems)에 대하여 새로운 증명들을 발견하는 데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정리(定理: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 trust it will not be supposed that I am in any sense defending the authority of intuition in philosophy or logic or anywhere else.인데 주절이 긍정이고 종속절이 부정으로 쓰여 문장을 올바로 쓰자면 주절이 부정문이고 종속절은 긍정으로 쓰여야 한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는 a part인데 part가 형용사의 수식을 받지 않으면 부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ju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theorem)에 대한 어떤 증명이 옛 증명보다 더 약한 방법을 시용한다면, 그
증명은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더 강력한 방법을 이용하는 증명을 더 강력한 이유 때문에a 쉽게 이용할 수 있게 우리는 항상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약한 증명을 발견하면 실제로 수학적 업적이 된다.
그러므로 직관론적 논리는 수학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접근방식인데 왜냐하면 그 논리가 감소된 논리적 수단을 이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수학적 정리들(定理들: theorems)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직관론적 논리에는 추가적인 장점이 있다: 우리는, 그 논리에서 소위 ‘배중률(排中律: law of excluded middle)’이 (배중률이 이론체계에 대해서 박식한 공식일지라도) 증명 불가능함을 밝힐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여하한 이론체계에서 어떤 박식한 공식이 증명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이론체계가 틀림없이 일관적임을 밝힐 수 있다.b 일반적으로 말해서, 더 약한 논리적 방법을 우리가 이용할수록, 불일치의 위험은 ㅡ 모순이 도출될 위험 ㅡ 더 적어진다.c 그러므로 직관론적 논리는, 우리의 논증들이 일관적인 것을 그리고 우리가 숨겨진 불일치들이나 역설들이나 이율배반들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더 확실하게 만드는 시도로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런 약화된 논리와 같은 것이 얼마나 안전한지는, 내가 지금 다루기를 원하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논리는 적어도 전체 고전적 논리학보다 다소 더 안전하다. 그 논리가 항상 안전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것이 나의 요점은 아니다. 나의 요점은 이렇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증명하거나 확립하고 싶으면, 여러분은 약한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ㅡ 다시 말해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ㅡ 우리는 강력한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아마도, ‘이보시요, 나는 심지어 약한 방법을 이용해서 당신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심지어 직관론적 논리 전체를 이용할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합리주의자에게는 여하한 비판도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다 ㅡ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 fortiori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생략강화 삼단논법(a fortiori)’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e can also show that if in any system whatsoever some well-informed formula is not demonstrable, then the system must be consiste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또한 사람들은 만일 어떤 체계가 적합한 어떤 공식도 증명할 수 없다면, 그 체계가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줄 수 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Generally speaking, the weaker the logical means we use, the less is the danger of inconsistenciesㅡthe danger that a contradiction is derivabl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적 수단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모순에 빠질 위험, 즉 어떤 모순이 도출될 수 있는 위험은 그만큼 적어진다.’로 번역되었다.
합리주의자가 비판을 비판함에 의하여 그 비판에 답변할지라도.
이제 이 합리주의적 견해는 논리에 대한 실재적인 견해이다. 먼저, 그 견해가 논리학을, 내가 실재론적 사건임을 논증하려고 노력한 자연과학들의 방법론과 부분적으로 관련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이자 이것은 매우
특별한 요점인데 그 견해가 논리적 추론을 진리 전송이나 허위 재-전송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견해는 진리라는 개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업적들 중에서 조금도 하찮지 않은 것은, 두 가지 개념들을 논리학에 도입함에 의하여 그가 실제로 논리학을 매우 크게 실재론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주장할 터이다. 첫 번째 개념은, 논리적 결과는 진리 전송이라는 (볼차노[Bolzano]가 부분적으로 앞선) 개념이다. 두 번째 개념은, 진리 대응 이론의 복권인 진리는 사실들과의 대응일 뿐이라는 개념의 복권이라고 나는 말할 터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콰인(Quine)으로부터 다소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타스키(Tarski)의 개념들 중 이 개념이 상대론을 파괴시키는 것으로서 틀림없이 해석된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진리론이 진리에 대한 ‘절대론적’ 이론이라는 타스키(Tarski)의 주장이 옳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요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매우 오래된 이야기를 그 이야기에 다소 새로운 요점을 붙여서 이야기하겠다. 그 옛 이야기는 진리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이론들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요점은 그 이야기로부터 ‘진리’라는 단어를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가 여기서 단어들이나 언어적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을 다루고 있다는 겉모습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거를 위하여 어떤 예비적 토론이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이론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이론은 대응 이론인데 진리는 사실들과의 대응이라는 이론이고 혹은 더 정확하게 그 이론을 표현하면, 서술이 사실들과 대응한다면 혹은 서술이 사실들을 합당하게 기술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그 서술이 참이라는 이론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타스키(Tarski)가 복권시킨 이론이다. 두 번째 이론은 소위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이다: 서술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나머지와 정합한다(coheres)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으로 간주된다. 세 번째 이론은, 진리는 실용적인 유용성 즉, 실용적인 쓸모라는 것이다.
이제,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에는, 내가 두 가지만 언급할 모든 종류의 해석들이 있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의 믿음들과의 정합(整合: coherence)인데 더 정확하게는, 주어진 서술은 그 서술이 우리가 지닌 믿음들의 나머지와 정합한다(coheres)면 참이다. 이것은 내가 알기에 다소 당혹스러운데 왜냐하면 잘 알려진 이유들 때문에 나는 믿음들을 논리학에 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피터[Peter]가 p를 믿고 p와 q가 상호 연역될 수 있다면, 피터[Peter]는 논리적으로 q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p와 q가 상호 연역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할 지도 몰라서 그는 사실상 q를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의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특정 주어진 서술은 우리가 그 서술이 참인지 참이 아닌지를 알지로 못하는데 그 서술이 우리가 이전에 수용한 서술들과 정합한다(coheres)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으로서 수용될 수 있다. 이 해석에는, 우리의 지식을 완전하게 보수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고착된’ 지식은 전복될 수 없다.
실용적 유용성 이론은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들에서의 이론들과 관련된 문제와 특별하게 관련된다. 그 이론은, 물리학적 이론이 시험들 및 다른 적용들에서 실용적으로 유용하거나 성공적이라면 그 이론을 참으로서 우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속임수와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나의 속임수는 이것에 놓여있다. 나는 곧바로, 이 논문의 바로 끝 가까이까지 진리를 언급하는 것을 멈추겠다. 나는 더 이상 ‘진리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겠다.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나의 주요 이유는, ‘무엇인가(What is)?’나 ‘무엇들인가(What are)?’이나 혹은 다시 말해서 모든 언어와 관련되거나 정의(定義)와 관련된 질문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내가 믿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What is)?’나 ‘무엇들인가(What are)?’ 질문들을 나는 사이비-질문들로 간주한다; 그 질문들은 모두가 그렇게 사이비로 보이지 않지만 그 질문들 모두는 사이비-질문들이라고 나는 정말로a 생각한다. ‘삶은 무엇인가?’나 ‘물질은 무엇인가?’나 ‘정신은 무엇인가?’나 ‘논리학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질문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는 생각한다. 그 질문들은 전형적으로 비생산적인 질문들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또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버려야 하는 나의 첫 번째 이유를 (방금 언급된) 사람들은 ‘반(反)-본질주의’로 지칭할지도 모른다. 나의 두 번째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do로 동사를 강조하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이유는 훨씬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단어들의 의미를 토론하는 것을
전염병처럼 완전히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어들의 의미를 토론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a 철학에서 가장 선호되는b 놀이이다: 철학자들은, 단어들과 그 단어들의 의미가 중요하여 철학의 특별한 관심사라는 개념에 중독된 듯이 보인다.
나는 여러분의 편의를 위하여 여기서 다시 ㅡ 다음 쪽에ㅡ 내가 이전에 이용한 도표를 제시하겠다. (위 124쪽 참조.)
왼쪽에 단어들이나 개념들과 그것들의 의미들이 있고 오른쪽에 서술들이나 명제들과 그것들의 진리가 있다.
관념들 다시 말해서
명칭들이나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서술들이나 명제들이나 이론들은
유의미할 참일
단어들로 주장들로
정식화될 것이고
그것들의
의미는 진리는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을 추론들을c
통하여
정의되지 않은(undefined) 개념들의 의미로d 기초명제들의 진리로d
환원될 것이다 |
그것들의
의미를 진리를
이 수단들에 의하여 확립하려는 (환원하기보다는) 시도는
무한회귀(無限回歸: an infinite regress)를 야기한다 |
이제 나는 이 분야에서의 일생동안 경험에 의하여 우리가 도표의 왼편에서 도망쳐서 오른편을 고수하라고 배웠다. 우리는 항상 주장들을, 이론들은 그리고 진리의 문제를 고수해야 한다. 우리는 언어적 문제들이나 의미와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past and prese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avouri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인기 있는’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deriv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도출들’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각각 대명사 tha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관련된 문제들에 연루되어서는 결코 안 되고 단어들에 관심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실제로 이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혹시
저것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의미들에 흥미가 없다;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용어사용법을 수용하겠다.’ 이것으로 인하여 결코 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어들에 관하여 논쟁을 벌여서는 결코 안 되고 용어사용법에 관한 문제들에 연루되어서도 결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개념들을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피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갖는 것인 우리가 지닌 실제적인 문제들은 사실과 관련된 문제들이거나 다시 말해서, 이론들과 이론들이 지닌 진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론들과 그 이론들이 어떻게 비판적 토론을 견디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의 비판적 토론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의하여 통제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에게는 이제 ‘진리’라는 단어를 이용하려는 것을 중단하려는 의도가 있다. 우리의 문제는 더 이상 다음과 같지 않다: 진리는 대응인가? 진리는 정합(整合: coherence)인가? 진리는 유용함(usefulness)인가? 이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지닌 실제적인 문제를 정식화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닌 문제는, 대응 이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가 주장을 했다는 것을 지적함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정식화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서술과 사실 사이에는 대응과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들의 핵심적 주장이다. 이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혹은 이 개념이 정의[定義] 불가능하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그것은 정의[定義]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견해로, 부언하여 중요하지 않다).a 달리 표현하여, 전체 문제는 대응에 관한 의심들이나 회의 때문에 발생한다: 서술과 사실 사이에 대응과 같은 것이 있는지. 이 의심들이 진지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분명하다 (특히 거짓말쟁의 역설을 고려하면).
이 의심들이 없다면 정합(整合: coherence) 이론을 그리고 실용적인 유용성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하여 논증할 것이 없다는 것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y say that this concept is meaningless (or that it is undefinable, which, incidentally, in my opinion does not matter, since definitions do not matt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괄호 안의 원문이 (혹은 내친김에 말한다면, 정의들을 문제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정의할 수 없다고)로 번역되었다.
또한 전적으로 분명하다. 실용적 유용성과 예측력과 같은 문제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들에 대한 대응 이론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자기-일관성보다 분명히 훨씬 더 중요할 터이고 물론 또한 이전 ‘지식’과의 (또는 ‘믿음’) 정합(整合: coherence)보다 훨씬 더 중요할 터이다;a 이유인즉 어떤 이론이 사실들과 대응하지만 어떤 이전 지식과 정합하지(整合하지: cohere) 않는다면, 이 이전 지식은 폐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사실들에 대한 이론의 대응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실들과 대응하는 이론은 통상적으로 매우 유용할 것임은 분명하다; 사실들과 대응하지 못하는 이론보다 이론으로서 더 유용할 것임은. (다른 한편으로, 사실들에 대응하지 않는 이론에 매달리는 것은 법정에서 선 범죄자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유용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들은 그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누구에게 유용한?’이라는 의문을 의미한다.)
과학철학으로서의 실용주의를 나는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용주의가 중요한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이론에 어떤 응용이 있는지, 이론에는 예를 들어 예측력이 있는지의 문제. 이론의 실제 적용(praxis)은b 내가 어느 곳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이론가에게는 자극과 동시에 제어로서 무한한 가치가 있다: 이론의 실제 적용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안하기 때문에 자극이고, 우리가 우리의 상상에서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론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개념들에서 길을 잃는다면 우리를 합리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제어이다. 이 모든 것은 인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적 입장은, 서술이나 이론이 사실들과 대응하거나 대웅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다면 실재론적 입장에 의하여 대체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대응 이론은, 정합이론과 실용주의적 이론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정말로c 암시할지라도 그 이론들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정합이론과 실용주의적 이론은 대응 이론의 불가능성이나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should there exist something like the correspondence of a theory to the facts, then this would obviously be more important than mere self-consistency, and certainly also much more important coherence with any earlier ‘knowledge’ (or ‘belief’);인데 가정법으로 쓰인 문장으로 문맥상 가정법으로 표현할 수 없고 가정법에 obviously라는 부사를 쓸 수 없다.
b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실천’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does로서 동사를 강조하는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무의미함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진리’라는 단어를 언급하거나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지 않고도 우리는, 이 전체 토론의 핵심적인 문제가 ‘진리’를 정의하는(定義하는: defining)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다음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사실들에 대응하는 혹은 사실들에 대응하지 않는 서술이나 이론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대응에 관하여 말하는 가능성에 관한 의심들 배후에는 다양한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우선, 이 대응 개념으로부터 출현하는 역설들이나 이율배반들이 있다. 두 번째, 서술과 사실 사이의 대응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하려는 셀 수 없이 많은 실패한 시도들이 있다. 슐릭(Schlick)의 시도가 있는데 그는, 언어적 서술과 사실 사이의 일-대-일 관계에 의하여 대응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독특함에 의하여. 그가 말하기를 서술은, 일-대-일 관계로 혹은 독특한 관계로 세상의 사실들과 부합한다면 참이거나 사실들에 대응한다: 비-대응이나 ‘허위’는 모호성과 동일하다.a 물론 이것은 수용될 수 없는 견해인데 이유인즉 많은 모호하거나 애매한 서술들이 (‘미국의 어떤 곳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다’와 같은) 사실들에 대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순도 성립하는데, 사실들에 대응하는 모든 전칭명제들이나 이론은 많은 사실들에 대응하여 일-대-일 관계가 없다.
게다가, 사실들에 대응하지 못하는 어떤 서술이 전적으로 애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인자는 애매하지 않게,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주장에는 모호성이 없다; 그러나 그 주장은 사실들과 대응하지 않는다. 분명히, 대응을 설명하려는 슐릭(Schlick)의 시도는 불발에 그친다. 또 다른 더욱 나쁜 시도는 비트겐슈타인의 시도이다. 명제는 실재에 대한 그림이라고 그리고 대응은 축음기의 홈과 그 홈이 내는 소리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와 매우 유사한 관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제안했다: 일종의 사실들과 서술들 사이의 투사적(投射的: projective) 관계. 이 견해를 옹호할 수 없음은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우리는, 리빙스턴(Livingston)이 ‘안녕하시오?’라고 물은 흑인 추장에게 통역에 의하여 소개되는 유명한 리빙스턴(Livingston)의 이야기를 상기한다. 흑인 추장은 한 마디로 대답했는데 통역은 추장의 슬픔들에 대한 긴 이야기의 형태로 10분 동안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리빙스턴(Livingston)은 추장이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었고 그러자 추장은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역은 한 마디의 말로 그것을 통역했다: ‘아니오.’
물론 이 이야기는 날조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날조되기를 잘했다; 그 이야기는 언어의 투사(投射: projection) 이론이 지닌 취약성을 예시하는데 특히 서술과 사실 사이의 대응 이론으로서 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이 이론을 정식화한 후에 실재에 대한 언어의 관계를 토론하는 것이나 언어를 조금이라도 토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언어는 언어에 의하여 토론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것은, 단어들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야이다.a ‘그것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단어들의 실패를 지적하는 그가 가장 선호하는 표현이다.b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를 더 깊이 조사하려는, 혹은 언어를 더 깊이 또는 서술들을 더 깊이 연구하려는 시도는 따라서 무의미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저서 서문에서 ‘여기에 상술된 사념들의 진리는 내가 보기에 공격을 받을 수 없고 확정적이다’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내 말을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들을 [논리철학논고<Tractatus>의 명제들]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언어에 관한 말은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다른 것들과 별도로, 특히 자신의 투사(投射: projection) 이론을 언급한다. 자신을 저서를 읽는 사람들이,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것이라는 그의 언급은 그리하여 대응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상 대응 이론에 대하여 말한 것, 즉 서술과 사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재적인 쟁점으로 돌아온다. 그 쟁점은 이렇다: 옹호될 수 있는 대응 이론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는 서술과 사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제 나의 주장은, 타스키(Tarski)가 대응 이론을 복권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업적이고 이것은 위대한 철학적 업적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타스키(Tarski)의 업적에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s a field in which words fail u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을 못하는 장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shows itself’is his favourite expression to indicate the failure of word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것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말할 수 없음을 가리키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한 표현이다.‘로 번역되었다.
것이 있음이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예를 들어, 맥스 블랙[Max Black]에
의하여)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대응 이론의 복권에 대한 실마리는, 타스키(Tarski)에 의하여 이행된 매우 단순하고도 명백한 관찰이다.a 다시 말해서, 내가 서술 S와 사실 F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기를 원하면, 나는 내가 두 가지 모두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언어로 그렇게 해야 한다: S와 같은 서술들, 그리고 F와 같은 사실들. 이것은 무서울 정도로 하찮게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정적이다. 그것은, 대응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말하는 언어는 서술들을 언급하고 사실들을 기술하기에 필요한 수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나에게 있어서 그 언어가 서술들을 언급함과 동시에b 사실들을 기술할 수 있다면, 이 언어로 ㅡ 메타언어(metalanguage) ㅡ 나는 우리가 알게 될 것과 같이 어려움 없이 서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메타언어는, 우리가 이용하여 어떤 다른 언어에 관하여 말하는 언어이다. 예를 들어, 영어c로 쓰인 독일어c 문법은 독일어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영어를 메타언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메타언어로 (이 경우에는 영어) 말하는 언어는 통상적으로 ‘대상언어(object language)’로 (이 경우에는 독일어) 지칭된다. 메타언어에 관하여 특징적인 것은, 메타언어가 대상언어의 (메타언어적인) 단어들의 그리고 서술들의 명칭들과 (메타언어적인) 술어들도 포함한다는 것인데 ‘명사(대상언어의)’나 ‘동사(대상언어의)’나 ‘서술(대상언어의)’같은 것이다. 메타언어가 우리의 목적에 충분할 수 있다면, 메타언어는 타스키(Tarski)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상언어가 말할 수 있는 적어도 모든 저 사실들에 관하여 말하기에 필요한 통상적인 수단을 또한 틀림없이 포함한다.d
이 모든 것은, 독일어에 (조사 중인 대상언어로서)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영어를 우리의 메타언어로서 사용한다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영어 메타언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할 수 있을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key to the rehabilitation of the correspondence theory is very simple and obvious observation made by Tarski.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타르스키는 매우 간결하면서 분명한 견해를 대응이론의 복원에 대한 실마리로 만들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and로 강조되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강조되지 않았다.
c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영어가 한국어로, 독일어가 영어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에는 the usual means necessary to speak about at least all those facts about which the object language can speak라는 necessary로 시작되는 형용사구가 들어가 있는데 명사 the usual means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이다.
것이다:
‘풀은 녹색이다(Das Gras ist grün)’이라는 단어들은 독일어의 서술을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풀은 녹색이다(Das Gras ist grün)’이라는 독일어 서술이 기술하는 사실을 우리의 (영어) 메타언어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풀은 녹색이다(grass is green)이라고 말함에 의하여 영어로 이 사실을 기술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실들에 대한 대상 언어로 된 서술의 대응에 관하여 메타언어로 서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할 수 있다: ‘풀은 녹색이다(Das Gras ist grün)’이라는 독일어 서술은, 풀이 녹색이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한다. (혹은: ‘... 풀은 녹색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조건으로만.’)
이것은 매우 하찮다. 그러나 다음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주장에서 ‘풀은 녹색이다(Das Gras ist grün)’이라는 단어들은 인용부호 안에 표현되어 독일어 서술의 메타언어적 (다시 말해서, 영어) 명칭으로서 기능한다; 다른 한편으로 ‘풀은 녹색이다(grass is green)’이라는 영어 단어들은 인용부호들 없이 위의 우리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그 단어들은 서술에 대한 명칭으로서 기능하지 않고 단지 사실에 (혹은 주장되는 사실) 대한 기술로서 기능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주장이 (독일어) 서술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사실은, 물론 영어인 우리의 메타언어로 기술되거나 언급될지라도, 독일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다: 우리가 사실에a 관하여 말하기를 원하면 우리에게는 물론 어떤 언어가 필요할지라도, 사실은 비-언어적이고, 사실은 실재적인 세상에 대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메타언어적 주장이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게 서술되는 상황 하에서 특정 (독일어) 서술이 특정 사실에 (실재적 세상에 대한 사실인 비-언어적 사실) 대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독일어 대상언어를 다른 언어로b ㅡ 심지어 영어로 ㅡ 대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메타언어적 주장을 할 수 있다:
‘풀은 녹색이다(Grass is green)’이라는 영어 서술은, 풀이 녹색이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대명사 it인데 ‘사실’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어떤 언어’를 의미하는지 불확실하다.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것’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by any other인데 by any other one으로 표현함이 옳을 듯하다.
이것은 훨씬 더 하찮은 듯이 보인다. 그러는 이것은 부인될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서술이 사실들과 대응한다는 조건들을 표현하다는 것 또한 부인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S’를 대상언어로 된 서술의 (메타언어적) 명칭으로 하고 ‘f’를 S가 기술하는 (예상되는) 사실 F를 기술하는 메타언어의 표현에 대한 약어로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메타언어적 주장을 할 수 있다:
대상언어도 된 서술 S는, f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한다. (혹은: f임이 사실이라면....)
‘S’가 여기서 어떤 서술의 메타언어적 명칭인 반면, ‘f’는 명칭이 아니라 특정 사실을 (우리가 ‘F’로 지칭할 수 있는 사실) 기술하는 메타언어로 된 표현의 약어임을 주목하라.
타스키(Tarski)가 한 일은, 서술 S와 사실 F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술 S에 관하여 말할 수 있고 동시에 사실 F를 서술할 수 있는 언어가 (메타언어) 우리에게 필요함을 발견한 것이었다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전자[前者]에 관하여 우리는 명칭 ‘S’를 이용하여, 후자[後者]에 관하여 우리는 F를 서술하거나 기술하는 메타언어적 표현 ‘f’를 이용하여 말한다.)
이 발견의 중요성은, 어떤 사실이나 사실들에 대한 어떤 서술의 대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의 유의미함에 대한 모든 의심을 쫓아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되자마자, 우리는 물론 ‘사실과 대응한다’라는 단어들을 ‘참이다’라는 단어들로 대체할 수 있다.a
타스키(Tarski)는, 이것과 별도로, 일관적인 정식화된 이론체계에 대하여 진리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제시하는 (대응 이론의 의미에서) 방법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주요 업적이 아니다. 그의 주요 업적은 대응에 (그리고 진리) 관한 이야기를 복권시킨 것이다. 부연하여,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런 이야기가 역설들을 야기할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이 역설들을 피할 수 있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그는 진리에 관하여 평범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정말로 역설들을 피할 수 있는지를 또한 밝혔다.
사실들에 대한 서술들의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우리가 ‘진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결정하자마자, 실제로 ‘진리’라는 단어에 관하여 추가될 중요한
a 역주: 이 문장에서 “‘사실과 대응한다’라는 단어들”과 “‘참이다’라는 단어들”이라는 표현은 이한구 번역본에 뒤바뀌었다.
것은 없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사실들에 대한 저 대응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평범한 언어로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정합(整合: coherence)이나 실용적인 유용성이라기보다는 대응이라는 점. 증인에게 진리를 그리고 진리만을 말할 것을 훈계하는 판사는, 그 증인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이 유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그 판사는 증인에게 진리를 그리고 진리만을 말하고 훈계하지 판사는 ‘우리가 당신에 요구하는 유일한 것은 당신이 모순들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그 말은 판사가 대응 이론 신봉자라면 말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판사가 증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법원에서 사용되는 것으로서의 ‘진리’의 평범한 의미는, 의심의 여지없이, 대응이다. 그러나 나의 주요 요점은, 이것이 사후생각(afterthought)로서 게다가 중요하지 않은 사후생각으로서 간주될 것이라는 점이다.a 이유인즉 누군가가 ‘아닙니다, 평범한 언어로 “진리”는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b라고 말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과 논쟁을 벌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어사용법에 관하여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할 터이다: 나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의미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용어사용법을 기꺼이 사용할 터이다: 이것이, 내가 기꺼이 논쟁을 벌일 터인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어들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을 거절할 터이다.
그러나 나는, 진리에 관한 대응 이론이 실재론적인 이론임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으로 인하여 구별이 생기는데 그 구별은 이론과 이론이 기술하는 사실들 사이의 실재론적인 구별이다; 그리고 그 이론으로 인하여, 어떤 이론이 참이거나 허위라고 혹은 이론이 사실들과 대응하여 이론을 사실들과 연관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론과 다른 실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c 이것이 주요한 것이다; 그것이 실재론자에게는 주요 요점이다. 실재론자는, 이론이 사실들과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my main point is that this may be regarded as an afterthought, and as an unimportant afterthough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그렇지만 나의 주된 논점은 이것이 추가적 표현으로 또한 중요하지 않은 보족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인용부호 안의 원문은 ‘No, in ordinary language, “truth” is used in a different sens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일상 언어로 ’‘진리’란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allows us to speak of a reality different from the theory.인데 different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 a reality를 수식할 수 없는 문장의 오류이다.
대응하는지 아닌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이론 및 이 사실들에 관하여 자신의 이론과 다른 실재나 사실들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으면 그것을 ‘실재’라고 부르지 말과 그냥 그것을 ‘사실들’이라고 부르라) 그리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가 사실들과 비교할 수 있는 실재나 사실들 모두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a 물론 비교는 항상 극도로 어렵다.
타스키(Tarski)이 이론에 관한 마지막 한 마디 말. 그 이론의 전체 목표는 흔히 잘못 이해된다: 그 이론에는 진리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잘못 상정된다. 이유인즉 정합(整合: coherence)에 그런 의도가 있고 실용적인 유용성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진리에 관한 진지한 이론은 주어진 서술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강화한다.
타스키(Tarski)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정의(定義: definition)으로부터 많을 것들을 증명했다.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는, 충분히 강력한 언어에는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여 수학적이거나 물리학적인 이론들을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언어에는) 진리에 대한 기준이 있을 리가 없음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서, 대응에 대한 기준이 없다: 어떤 명제가 참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진리 개념을 형성할 언어들과 관련하여 결정될 수 없다. 그리하여 진리 개념은 주로 규제적인 개념의 역할을 한다. 그 개념은 우리가, 진리나 대응과 같은 것이 있다는 진실을 찾는 데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b 그 개념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혹은 우리가 진리를 발견했다할지라도 그 진리를 우리가 발견했음을 확신하는 것에 대한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기준은 없어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기준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진리라는 개념이 복권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이것은 타스키(Tarski)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하여 실재론적 전망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realist wants to have both a theory and the reality or the facts (don’t call it ‘reality’ if you don’t like it, just call it ‘the facts’) which are different from his theory about these facts, and which he can somehow or other compare with facts, in order to find out whether or not it corresponds to the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실재론자는 어떤 이론과 실재 내지 사실(당신이 실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실재’라 부르지 않고 그저 ‘사실’이라고 부르는) 모두를 갖고자 한다. 그런데 사실들은 이런 사실들에 관한 실재론자의 이론과 다르다. 또한 실재론자는 이론이 사실들과 대응하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사실들을 비교할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helps us in our search for truth that we know there is something like truth or corresponden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그것은 진리를 위한 우리의 탐구에서 진리나 대응과 같은 것이 있는지를 우리가 알도록 도와준다.’로 번역되었고 원문의 단어 for는 of의 오기이다. 원서에는 in search of가 항상 in search for로 잘못 표기된다.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기준과 심지어 이론의 허위성을 완벽하게 확신할 수단이 없을지라도, 이론이 참임을 발견하는 것보다 이론이 허위임을 발견하는 것이 더 쉽다 (내가 어느 곳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심지어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론들 대부분이 ㅡ 심지어 우리의 최고 이론들 ㅡ 엄격히 말해서 허위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이유인즉 그 이론들은 사실들을 과도하게-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위 추측은 진리에 더 가깝거나 덜 가까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에 대한 근접이라는, 혹은 진리에 대한 더 낫거나 덜 훌륭한 근사치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다시 말해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에. 이 개념이,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진리라는 개념을 타스키(Tarski)가 복권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 개념이 복권될 수 있음을 나는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주로 두 가지 타스키적(Tarskian) 개념들을 사용했다. 하나는 진리 개념이다. 나머지 하나는 논리적 결론이라는 개념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추측의 논리적 결론들의 집합이나 추측의 내용이라는 개념.a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라는 혹은 진리 근사치라는 개념을 논리에 포함시킴에 의하여 우리는 논리를 훨씬 더 ‘실재적’으로 만든다. 이유인즉 그 개념은 이제, 한 가지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사실들에 ㅡ 실재적 세상에 대한 사실들 ㅡ 더 잘 대응하는 정도에 관하여 말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실재론자로서 나는 논리를, 우리가 참이고 고도로 정보적인 이론들 찾는 데 ㅡ 혹은 적어도 우리의 더 오래된 이론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사실들에 더 잘 대응하는 새로운 이론들을 찾는 데 ㅡ 비판의 도구로서 (증명의 도구라기보다는) 간주한다. 그리고 나는 비판을 그 다음에, 사실들의 세상에 관하여 우리의 지식 성장을 증진하는 데 우리의 주요 도구로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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