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화와 지식의 나무
허버트 스펜서 강좌를 (Herbert Spencer Lecture) 개최해달라는 초청에 의하여 나는 크게 기뻤는데 커다란 용기와 독창성을 지닌 사상가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요구를 받은 영예 때문만은 아니었다a. 특별하게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나의 강좌를 위하여 ‘생물 과학들의 방법’과 같은 어떤 주제를 내가 혹시 선택할 결정을 해도 좋다는 이 강좌의 운영 위원회에서 내린 제안이었다. 이 제안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내가 알기로 그 개념들이 흥미롭고b 토론의 가치를 지녔을지라도 이런 격려를 내가 받지 못했다면 내가 공개적으로 제시하지 못했을 터인 몇 가지 개념들을 여기서 전개할 기회가 생긴다.
내가 여러분 앞에 제시할 의도를 지닌 모든 개념들은 생물학에서의 방법적 문제들과 관련된다. 이 강좌의 세 부분에 대한 나의 계획은 지식에 대한 일반론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로써 시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진화 이론과 관련되는 특정 방법론적 문제들로 선회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진화 이론 자체의 특정 부분들에 침범하거나, 더 정확하게는 잠깐 그 부분들을 다루는 것. 아주 정확하게, 나는 나의 강좌의 세 번째 부분에서 자연선택에 관한 다윈론이나 신-다윈(Neo-Darwinian)론의 기틀 내부에서 이 이론이 지금까지 애를 먹은 고전적인 난제들 중 몇 가지 난제들을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닌 나의 추측들 중 한 가지 추측을 나는 여러분 앞에 제시하겠다.
나는 이 난제들을 ‘고전적인’으로 지칭하는데 왜냐하면 허버트 스펜서가 (Herbert Spencer)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수용한 직후에 스펜서에 의하여 그리고 사무엘 버틀러가 (Samuel Butler) 그 이론을 거부한 직후에 버틀러(Butler)에 의하여 그 난제들이 일찍 발견되었고 간략하게 분석되었기 때문이다. 스펜서(Spenc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윈 자신은 이미 내가 언급하고 있는 난제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강좌를 위한 나의 프로그램은 지식에 대한 일반론에서부터 생물학의 방법들을 통과하여 진화 이론 자체에까지 펼쳐진다.a 이 프로그램은, 내가 걱정하는 바, 한 강좌를 위해서는 목표가 다소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추가적으로 여러분을 확신시키려는 나의 프로그램의 일부라면, 나의 입장은 정말로 극히 위험할 터이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들 중 어떤 주장이 지닌 진실을, 그리고 나의 강좌 마지막에 여러분에게 내가 제시할 나의 새로운 신-다윈적(New-Darwinian) 추측이 지닌 진실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도 확신시키려는 의도가 내게 없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유인즉 이 추측으로 인하여 우리가 진리에 다소 더 근접하는 데 혹시 도움받기를 내가 소망할지라도, 이 추측이 사실이라고 나는 감히 심지어 소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나는 그 추측은 사실을 포함하지 않음을 나는 우려한다. 그 추측은 틀림없이 최종적 진리도, 그 문제에 관한 전체 진리도 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내 자신이 확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여러분을 확신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을 다시 일으키기를 희망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렇게 하겠다. 그 문제들이 때때로 다소 식상해졌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진화론적 논란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찻잔 속의 폭풍’이라는 레이븐(Raven)교수의 비평에 대하여 내가 동의함을 내가 심지어 어떤 곳에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인원들에 대한 우리의 근접성을 다윈이 주장함에 의하여 제기된 폭풍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 기술(記述: description)은 아주 공정할지라도, 다윈적 논란에 의하여 제기된 다른b,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더 흥미진진한 이론적 문제들이 있다.
I. 문제들과 지식 성장에 관한 몇 가지 비평들
이제 나는 나의 강좌의 첫 번째 부분으로 선회한다: 지식에 관한 일반론.
지식론에 관한 몇 가지 비평들로써 내가 시작해야 한다고 내가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찰스 다윈과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제외하고 나는 그 이론에 관하여 거의 모든 사람과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부연하여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1933년 자신의 허버트 스펜서 강좌[Herbert Spencer Lecture]에서 설명했다.) 토론 중에 가장 중요한 요점은 관찰과 이론 사이의 관계이다. 이론은 ㅡ 적어도 어떤 기초적 이론이나 기대 ㅡ 항상 처음에 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이론이나 기대가 항상 관찰에 선행한다고; 그리고 관찰들이나 실험적 시험들의 근본적인 역할은, 우리의 이론들 중 몇 가지는 거짓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이론들을 만들어내라고 우리를 자극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항상 문제들로부터 ㅡ 실제적인 문제들로부터이거나 난제들에 부딪힌 이론으로부터 ㅡ 시작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가 문제와 직면하자마자,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것이다. 두 가지 종류들의 시도들에 의하여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상상하거나 추측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에 통상적으로 다소 허약한 우리의 상상을 비판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때때로 상상이나 추측은 우리의 비판과 우리의 실험적 시험들을 얼마 동안 견디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는 곧, 우리의 추측들이 반박될 수 있다는 것이나 우리의 추측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나 혹은 우리의 추측들이 우리의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해결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심지어 가장 뛰어난 해결책들도 ㅡ 가장 뛰어나고 가장 창의적인 정신이 수행하는 가장 엄격한 시험을 견디어낼 수 있는 해결책들 ㅡ 곧 새로운 난제들인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함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의 성장은 추측과 논박들을 통하여 옛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문제들로 나아간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 중에서 몇몇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문제들로부터 시작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는 개념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들은 틀림없이 관찰과 실험의 결과였다고 여러분은 여전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신성시된 개념이다. 모든 동물은 기대나 예상들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나는 주장하는데 그것들은 가설들로서 정식화된다; 일종의 가설적 지식.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 지식이 전적으로a 신뢰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어떤 정도의 타고난 지식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타고난 지식인 이 타고난 기대들은, 실망하게 되면, 우리의 첫 번째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리고 뒤따르는b 우리의 지식 성장은 그리하여 이전 지식의 교정들과 수정들로 내내 구성되는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관찰들이 기대들과 문제들에 틀림없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심지어, 분명히 관찰이 흔히 몇 가지 문제들에 ㅡ 예를 들어 어떤 기대를 좌절시키거나 어떤 이론을 반박하는 관찰로부터 출현하는 저 문제들 ㅡ 선행할지라도 논리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관찰이 모든 문제들에 선행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관찰이 모든 문제들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의 허락을 받고c 여러분 자신들을 실험 주체들로서 이용하여 내가 실행하고 싶은 한 가지 단순한 실험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나의 실험은 이곳저곳을 관찰하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협력하여 관찰하고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적어도 여러분 중 몇몇은 관찰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이 물으려는 강력한 충동을 느낄 것이라고 나는 우려한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관찰하기를 원하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반응이라면, 나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이유인즉 내가 예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관찰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마도 관찰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정확한 문제를 생각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윈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을 때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관찰은 틀림없이 어떤 견해를 찬성하거나 반대한다는 것을 누구도 틀림없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얼마나 이상한가d...’ [‘관찰하라!’도 (무엇을 지적하지 않고) ‘이 거미를 관찰하라!’도 명확한 명령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기대할 바와 같이, 이 거미가 기어 올라가는지 아니면 내려가는지를 관찰하라’는 충분히 명확할 터이다.]
물론 나는, 관찰이 기대나 가설 뒤에 온다는 나의 주장의 진실성을 여러분에게 확신시키겠다고 희망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은 항상 관찰로부터 시작한다는 신성시된 교설에 대하여 대안이 존재할 것임을 내가 여러분에게 밝힐 수 있었기를 나는 정말로a 희망한다.
이제 나의 주장에 따라서 우리의 지식이 성장하는 방법인 이 추측과 논박의 방법을 다소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우리는 문제인 난제로부터 출발한다고 나는 말한다. 그 문제는 실제적이거나 이론적일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문제와 마주칠 때 그 문제가 무엇이건, 우리는 분명히 그 문제에 관하여 많을 것을 알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제가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의 모호한 개념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당한 해결책을 산출할 수 있는가? 분명히 우리는 산출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문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부적당한 해결책을 산출함에 의하여, 그리고 그 해결책을 비판함에 의하여. 이 방법에 의해서만 우리는 문제를 이해하게 될 수 있다. 이유인즉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지닌 난제들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가 지닌 난제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이유를 ㅡ 더 명백한 해결책들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ㅡ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더 명백한 해결책들을 산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들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그 해결책들을 비판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문제에 익숙하게 되고, ㅡ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들과 더 새로운 상상들을 산출할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고 항상 전제하면 ㅡ 나쁜 해결책들로부터 더 나은 해결책들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문제 다루기’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길게 그리고 충분히 집중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면, 어떤 종류의 상상이나 추측이나 가설이 단지 문제의 요점을 놓치기 때문에 그 상상이나 추측이나 가설이 전혀 충분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어떤 종류의 요건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의하여 충족되어 할 터인지를 우리가 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 문제를 아는 것인 이해하기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하위-문제들인 문제의 분파들과 그 문제의 다른 문제들과의 관련성을 알기 시작한다. (새로이 추측된 해결책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부쳐져야 하고 아마도 심지어 발표되어야 하는 것은 다만 이 단계에서 이다.a)
이제 우리가 이 분석을 고찰한다면, 그 분석이 우리의 공식에 들어맞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데 그 공식은, 지식의 진보가 추측들과 그 추측들을 반박하려는 비판적 시도들로써 옛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문제들로 향한다고 서술했다. 이유인즉 심지어 문제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과정도 이 공식에 따라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에서 우리의 잠정적인 해결책이 토론되어 비판된다; 모든 사람은 그 해결책에서 결점을 발견하여 그 해결책을 반박하려고 노력하며, 이 노력들의 결과가 무엇이건 우리는 이 시도들로부터 틀림없이 배울 것이다. 우리의 친구들에 대한, 혹은 우리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성공하면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내재한 난제들에 관하여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을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즉, 우리의 가설이 그 사람들의 비판을 견딜 수 있다면b 다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가설과 그 가설의 합당성과 그 가설이 야기하는 파문들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가설이 살아남는다면, 혹은 적어도 그 가설이 비판에 직면하여 자체와 경쟁하는 가설들보다 더 잘 한다면 그 가설은 현재의 과학적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서 일시적이고 잠정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지식 성장이 다윈이 ‘자연선택’으로 지칭한 것을 밀접하게 닮은 과정의 결과라고 말함에 의하여 표현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설들의 자연선택: 우리의 지식은 매순간, 생존을 위한 자신들의 투쟁에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only at this stage that a new conjectured solution should
be submitted to others, and perhaps even publish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새롭게 추측된 어떤 해결이 다른 문제들, 어쩌면 심지어 공표된 문제들에 관한 비판에 붙여져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단계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nd if even our most acute critics do not succeed, if our
hypothesis is able to resist their criticis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리고 심지어 가장 예리한 우리의 비판들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즉 우리의 가설이 그 비판에 견딜 수 있다면,’으로 번역되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음에 의하여 자신들의 (상대적) 적합성을 보여준 저 가설들로 구성된다; 적합지 못한 저 가설들을 제거하는 경쟁적 투쟁.
이 해석은 동물 지식인 과학 이전 지식에 그리고 과학적 지식에 적용될 것이다. 과학적 지식에 고유한 것은 이것이다: 생존투쟁은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에 의하여 더 어렵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동물 지식과 과학 이전의 지식이 주로 부적합한 가설들 지닌 사람들의 제거를 통하여 성장하는 반면,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잘못된 믿음들이 우리 자신의 제거를 야기하지 전에 그런 믿음들을 제거하면서 우리 대신에 우리의 이론들이 사멸하도록 흔히 만든다.
그 상황에 대한 이 서술에는 실제로 지식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기술할 의도가 있다. 그 서술은 물론 은유들을 이용할지라도 은유적으로 의도되지는 않는다. 내가 제시하고 싶은 지식론은 주로 다윈의 지식 성장론이다.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지식 성장은 항상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제거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잠정적 해결책들에서 합당성에 근접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이 인간적 수준에 출현했다. 이것이 한눈에 보이도록하기 위하여, 나는 진화 나무를 지식 성장의 나무로 지칭될 것과 대조하겠다.
진화 나무는 공통 줄기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가지들로 성장한다. 그것은 가계도와 같다: 공통 줄기는, 우리의 공통 단세포 조상들인 모든 생명체들의 조상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가지들은 이후 발전들을 대변하는데, 그 발전들 중 많은 발전들은 스펜서(Spencer)의 용어사용법을 이용하면 고도로 전문화된 형태로 ‘차별화되어’ 그 형태들 각각은 ‘통합되어’ 자체의 특별한 난제들인 자체의 생존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도구들이나 연장들의 진화 나무는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그 나무는 아마도 돌과 막대기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전문화된 문제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 나무는 거대한 숫자의 고도로 전문화된 형태들로 가지를 쳤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 성장하는 진화 나무들을 우리의 성장하는 지식 구조와 비교한다면, 성장하는 인간 지식의 나무에는 완전히 다른 구조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응용된 지식의 성장은 도구들이나 다른 연장들의 성장과 매우 유사하다: 점점 더 다르고 전문화된 응용들이 있다. 그러나 순수한 지식은 (혹은 때때로 지칭되는 바와 같이, ‘근본적인 탐구’)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 지식은, 이 증가하는 전문화와 차별화와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성장한다. 허버트 스펜서가 (Herbert Spencer) 인식한 바와 같이, 그 지식은 주로 통일된 이론들로의 증가하는 통합을 향한 경향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 경향은, 뉴튼이 갈릴레오의 지상의 역학을 케플러의 천제 운동론과 결합시켰을 때 매우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경향은 그 후 내내 지속되었다.
우리가 진화 나무을 언급했을 때 우리는, 물론 시간의 방향이 위를 가리킨다고 ㅡ 나무가 자라는 방향 ㅡ 전제했다. 동일한 시간의 위쪽 방향을 전제하여, 아래로 라기 보다는 공중으로 성장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위 높은 곳에서 하나의 공통 줄기로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 수없이 많은 뿌리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우리는 틀림없이 지식의 나무를 묘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 지식의 성장의 진화적 구조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혹은 인간 도구들이나 응용 지식의 진화 나무의 진화적 구조와 거의 반대가 된다.
이 순수 지식 나무의 통합적 성장은 이제 설명되어야 한다. 그 성장은 순수 지식을 우리가 추구하는 데서 우리의 고유한 목표가 ㅡ 사물들을 설명함에 의하여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목표 ㅡ 내는 결과이다. 그리고 그 성장은, 게다가, 우리가 사태들을 기술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술들의 진실성에 관하여 논증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언어의 존재가 내는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술들을 비판하게 하는.
순수 지식을 추구함에서 우리의 목표는, 아주 단순하게, 어떻게-질문들(how-questions)과 왜-질문들(why-questions)을 이해하고 답변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설명을 제공함에 의하여 답변되는 질문들이다. 그리하여 순수 지식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설명의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은 실제적 문제들에서 유래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빈곤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실행될 수 있는가?’라는 실제적인 문제는 ‘사람들은 왜 가난한가?’라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문제를 낳았고, 그곳에서 임금과 물가의 이론 및 기타 등등을 낳았다; 다시 말해서, 순수 경제이론인데 그 이론은 물론 부단히 자체의 새로운 문제들을 낳는다. 이런 전개상황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이 ㅡ 그리고 특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ㅡ 증가하고, 우리의 지식이 성장할 때 그 문제들이 항상 그러한 바와 같이, 차별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적 이론 자체는, 스펜서(Spencer)에 의하여 최초로 기술된 저 통합적 성장을 밝혔다.a
생물학으로부터 유사한 보기를 들자면, 우리에게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과 싸우는 가장 시급한 실제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역 행위로부터 우리는 면역이론으로 그리고 이곳에서 항체형성 이론으로 ㅡ 자체가 지닌 문제들의 깊이 때문에 그리고 자체가 지닌 문제들의 증가력 때문에 유명한 순수 생물학의 분야b ㅡ 우리는 움직인다.
설명에 관한 문제들은 설명적 이론들 제시함에 의하여 해결된다; 그리고 설명적 이론은, 그 이론이 사실들과 본질적으로 맞지 않거나 양립될 수 없거나 혹은 어떤 다른 지식과c 양립될 수 없음을 밝힘에 의하여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은, 우리가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참인 이론들이라고 ㅡ 사실들에 부합하는 이론들 ㅡ 전제한다. 합리적 비판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실들과 부합으로서의 진리라는 이 개념이라고 나는 믿는다.d 통일된 이론으로써 설명하려는 우리의 호기심인 우리의 열정이 보편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사실과 함께, 진리에 더 근접하려는 우리의 목표는 지식 나무의 통합적 성장을 설명한다.
도구들에 관한 진화 나무와 순수 지식에 관한 진화 나무의 차이점을 지적함에서, 나는 추가적으로 인간 지식은 우리의 생존투쟁에서 도구로서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현재 그렇게 유행하는 견해에 대한 반박과 같은 것을 제시하기를 희망한다. 제시된 요점은, 내가 추측과 논박의 방법에 관하여 그리고 최적 가설의 생존에 관하여 말한 것을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지 말라는 경고로서 이용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요점은 내가 말할 것과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유인즉 나는, 최적 가설이 항상 우리 자신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가설이라고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최적 가설은 그 가설이 고안되어 해결하려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그리고 경쟁하는 가설들보다 비판을 더 잘 견디어내는 가설이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의 문제가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the explanatory theory itself has shown that integrative growth first described by Spencer.인데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다.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설명적 이론 자체는 스펜서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던 그런 통합적인 성장임을 보여주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 field of pure biology famous for the depth of its problems, and for the power of its problems to multiply인데 famous이하의 형용사구가 앞의
명사들 뒤에서 수식할 수 없다. 관계대명사절로 표현해야 하는 문법적 오류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knowledg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론’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에서는 it is ~ that ~의 강조구문으로 that이 which로 쓰였는데 문법적
오류이다.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라면 ㅡ 순전히 이론적인 설명을 발견하는 문제 ㅡ 비판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진리라는 개념 혹은 진리에 더 근접한다는 개념에 의하여 규제될 것이다.
여기서 진리에 관하여 말하면서, 나는 우리의 목표가 참인 이론들이나 적어도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근접한 이론들을 발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a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설명적 이론들 중 어떤 이론에 관해서도 그 이론들이 참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적인 이론은 항상 미래의 것들에 대한 대담한 기대들이다. 그 이론은 시험될 수 있고 비판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이론은 참으로 밝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연적’이라는 단어를 확률계산을 충족시키는 많은 의미들 중 한 가지 의미로 생각한다면 그 이론은 ‘개연적’으로 (다시 말해서, 그 이론에 대한 부정보다 더 개연적인) 어느 때고 밝혀질 수 없다.
이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이유인즉 우리가 합리적 비판의 기술(技術:art)과 참인 설명은 사실들에 부합하는 설명이라는 규제적 개념을 얻었다할지라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 성장에 관한 근본적인 절차는 추측과 논박인 부적합한 설명들의 제거라는 절차로 남는다; 그리고 유한한 숫자의 그런 설명들 제거한다고 해서 생존하는 가능한b 설명들의 무한성이 감소될 수 없기 때문에, 아메바가 실수를 저지를 것과 꼭 같이 아인슈타인도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나 개연성을 우리의 이론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 진리나 진리에 대한 근사치와 같은 기준들의 사용은 우리의 비판 안에서만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론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배척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론을 자체의 선행 이론들이나 경쟁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보다 진리에 덜 가까운 근사치인 것으로서 배척할 것이다.
나는 혹시 내가 말하고 있던 것을 두 가지 간략한 주장들의 형태로 종합할 것이다.
(i)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peaking here of truth, I wish to make clear that our aim is to find true theories or at least theories which are nearer to the truth than the theories which are known to us at prese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지금 진리에 관해 말할 때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목표가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이론들을 발견하기보다는 참인 이론들 내지 진리에 더 근접하는 이론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surviving possibl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생존 가능한’으로 번역되었다.
(ii)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비판하여 우리의 비판을 가장 잘 견디어내는 것으로 보이는
그리고 가장 큰 설명력을 지닌 우리의 이론들을 잠정적으로 채택할 수 있다.
이것으로 나의 강좌의 첫 번째 부분이 끝난다.
2. 생물학에서의, 그리고 특히 진화 이론에서의 방법들에 관한 언급
나의 강좌의 두 번째 부분에서 ㅡ 세 번째 부분을 위한 여백을 만들기 위하여 내가 심각하게 잘라내어야 했던 ㅡ 생물학의 문제들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을 간략하게 토론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나는 두 가지 일반적인 주장들로써 시작하겠다.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이렇다.
(1) 어떤 사람이 과학적 방법을, 과학에서 성공을 낳는 방식으로서 생각한다면, 그는 실망할 것이다.a 성공에는 왕도가 없다.
나의 두 번째 주장은 이렇다.
(2) 과학적 방법이나 그 과학적 방법을 과학적 결과들을 정당화하는 방법으로서 어떤 사람이 생각한다면 그는 또한 실망할 것이다.b 과학적 결과는 정당화될 수 없다. 과학적 결과는 비판되고 시험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결과가 모든 이 비판과 시험하기 이후에 자체와 경쟁하는 결과들보다 더 낫고 더 흥미롭고 더 강력하고 더 유망하게 보이고 진리에 더 나은 근사치로 보인다는 것보다 그 결과를 지지하여 더 많은 것이 언급될 수 없다.
이 두 가지 의도적으로 낙담시키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보다 긍정적인 것이 언급될 것이다. 성공의 비결과 같은 것이 있고, 나는 그것을 밝히겠다. 그것은 이렇다.
여러분의 연구들 중 어떤 단계에서 여러분의 문제에 관하여 가능한 한 많이 확신하고c, 그 문제가 변하여 더 분명해지는 정도를 지켜보라. 여러분이 지지하는 다양한 이론들에 관하여 가능한 한 많이 확신하고c, 이론들 대부분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f anyone should think of scientific method as a way which leads to success in science, he will be disappointed.인데 가정법으로 서술된 문장이다. 문장의 의미상 가정법으로 서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should를 제거하거나 가정법으로 써야 한다면 주절은 he would be disappointed로 써야 한다.
b 역주: 이 문장도 위의 역주 a처럼 가정법으로 쓰였지만 If가 생략되어 Should가 문두에 왔다. 역시 가정법으로 쓸 필요가 없는 문장이고 가정법으로 써야 한다면 주절 he will also be disappointed는 he would also be disappointed로 써야 한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clea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분명히 하라’나 ‘명료히 하라’로 번역되었다.
거의 확실하게 거짓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이론들을 지지하거나 그 이론들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식하라. 여러분이 지지하고 있는 이론
들을 정식화해서 비판하려고 반복해서 시도하라. 그리고 대안 이론들을 ㅡ 여러분에게 불가피해 보이는 저 이론들에게 심지어 대안적인 ㅡ 구축하려고 노력하라; 이유인즉 이런 방식으로만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지하는 이론들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 여러분에 유일하게 가능한 이론으로서 보일
때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이 이론도 그리고 이 이론이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녔던 문제도 이해하지 못한 징표로서 생각하라. 그리고 여러분의 실험들을 항상 이론에 대한 시험들로서 ㅡ 그 이론에서 결점을 발견하려는, 그리고 그 이론을 전복하려는 시도로서 ㅡ 간주하라. 실험이나 관찰이 어떤 이론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인다면, 실험이나 관찰이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어떤 대안 이론을 ㅡ 아마도 여러분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대안 이론 ㅡ 약화시키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이론들을 반박하여 대체하는 것이 여러분의 야망이 되도록 하라: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이론들을 옹호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 이론들을 반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또한, 비판에 대하여 이론을 훌륭히 방어하는 것은 생산적인 토론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이론을 옹호함에 의해서만 그 이론이 지닌 힘과 그 이론을 겨냥한 비판의 힘을 우리가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어떤 이론을 그 이론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 표현하여 저 형태로만 그 이론에 반대하여 논증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을 토론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내가 기술한 세상에 관한 발견이나 배움의 과정은, 피터 메더워 경(Sir Peter Medawar)의 리스 강좌(Reith Lectures)에서 설명되고 사용된 구분을 사용하여, 훈육적(instructive)이라기보다는 환기적(喚起的: evocative)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우리의 환경에 의하여 훈육됨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환경에 의하여 도전을 받음을 통하여a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 관하여 배운다: 우리의 반응들은 (그리고 그 반응들 가운데서 우리의 기대들이나 예상들이나 추측들) 우리의 환경에 의하여 환기되고b, 우리는 우리의 성공적이지 못한 반응들을 제거함을 통하여 배운다 ㅡ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배운다. 이런 종류의 환기적(喚起的: evocative) 방법은, 그러나, 훈육을 모방하거나 모의실험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관찰로부터 출발함에 의하여 그리고 귀납에 의하여 나아감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획득한 것인 양 보일 것이다. 훈육적 과정을 모의실험 하는 진화의 환기적(喚起的: evocative) 과정이라는 이 개념은 다윈론의 특징이고 여기서 이어지는 것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윈의 자연선택론 발견은 흔히 뉴튼(Newton)의 인력이론 발견과 비교되었다. 이것은 오류이다. 뉴튼(Newton)은, 물리적 우주의 상호작용과 결과적인 행태를 기술할 의도가 있는a 보편적 법칙들의 집합을 정식화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런 보편적 법칙들을 제안하지 않았다. 다윈적 진화 법칙들은 없다. 사실상, 진화에 관한 보편적 법칙들을 ㅡ ‘차별화’ 및 ‘통합’의 법칙들 ㅡ 정식화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였다. 내가 지적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이것들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고 전적으로 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호하고, 뉴튼(Newton)의 법칙들과 비교하여 그것들은 거의 경험적 내용이 없다. (다윈 자신은 스펜서[Spencer]의 법칙들이 흥미롭지b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한 우리의 그림에 미친 다윈의 혁명적 영향은 뉴튼(Newton)의 혁명적 영향만큼 심오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그만큼 컸다. 이유인즉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순전히 물리학적 용어들로 세상 안의 의도 및 목적의 존재를 설명함에 의하여 목적론을 인과론으로 환원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함을 밝혔기 때문이다.
다윈이 우리에게 밝힌 것은, 자연선택의 기제(機制: mechanism)가 창조자의 행위들과 창조자의 목적 및 의도를 원칙적으로 모의 시험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기제(機制: mechanism)가 목적이나 목표를 겨냥한 합리적인 인간 행위를 모의 시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생물학적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다윈은, 우리 모두가 ㅡ 심지어 모든 설명은 인과적이어야 한다고 우연히 믿는 우리들 중 저 사람들도c ㅡ 완전히 자유롭게 생물학에서 목적론적 설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유인즉 그가 밝힌 것은 정확하게, 원칙적으로 어떤 특정 목적론적 설명도 어느 날 인과적 설명으로 환원되거나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는 intend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고 ‘기술하고자’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intere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중요하지’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those of u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번역되었다.
인과적 설명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설명될 것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대한 업적이었을지라도, 그 표현은 원칙적으로 매우 중요한 제약이라고 우리는 부언해야 한다. 다윈도 어떤 다윈론자도 지금까지 단일한
생명체나 단일한 기관(器官: organ)의 적응적 진화에 관하여 실제적인 인과적 설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밝혀진 유일한 것은 ㅡ 그리고 이것은 매우 많은 것이다 ㅡ 그런 설명들이 아마도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설명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점).
다윈론을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 생물학에서 목적론적 설명들이 신학적 설명들과 꼭 마찬가지로 나쁘다거나 거의 그만큼 나쁘다고 믿는 많은 생물학자들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울 것이라 말할 필요가 나에게 없다. 그들의 영향력은 충분히 강력해서 찰스 쉐링튼 경(Sir Charles Sherrington)과 같은 사람은 매우 변명적인 기분에서, ‘우리가 특정 유형-반사운동(type-reflex)의 즉각적인 목적을 적응된 행위로서 토론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반사운동에 관한 연구로부터 합당한 이익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윈론의 더 명백한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ㅡ 그러나 나의 강좌의 세 번째 부분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점 ㅡ 자체의 행태에서 자체의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는 강력한 경향이나 의향이나 성향을 보이는 생명체만이 사실상 생존할 것 같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런 의향에는 모든 생명체들의 유전적 구조의 한 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향은 모든 생명체들의 행태에서 그리고 모두는 아닐지라도 그 생명체들의 조직의 많은 것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다만 원칙적으로일지라도, 자연선택에 의한 목적론을 모의 실험함뿐만 아니라 설명함을 의미한다.
유사하게 우리는, 라마르크론(Lamarckism) 그리고 특히 기관들(器官들: organs)은 그 기관들의 사용의 영향을 받아서 진화하고 그 기관들의 미사용의 영향을 받아서 퇴화한다는 교설은 J. M. 볼드윈(Baldwin)에 (프린스턴 대학 철학자) 의한 [워딩튼<Waddington>과 심슨<Simpson>에 의한] 그리고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에 의한 자연선택을 통하여 어떤 의미에서 설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설명 방법은 더욱 발전되어, 내가 보기에, 나의 강좌의 세 번째 부분에서 내가 제시할 예정인 가설에서 상당히 확대되어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 방법을 분석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볼드윈(Baldwin)과 [워딩튼<Waddington>, 심슨<Simpson>,] 슈뢰딩거(Schrödinger)가 밝힌 것은 훈육에 의한 라마르크적(Lamarckian) 진화가 어떻게 자연선택에 의한 다윈적 진화에 의하여 모의 시험될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것은, 물리학에도 존재하는 설명의 유형이다. 간략한 보기는, 우리의 행성계의 모든 행성들이 다소 유사한 평면들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처음에는 칸트에 의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라플라스(Laplace)에 의하여 제시된 가설일 터인데 그 평면들은 태양 주위의 동일한 방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성운 가설(Nebular Hypothesis)’은 (스펜서[Spencer]가 통상적으로 그 가설을 지칭했던 바와 같이) 회전하는 성운을 전형적인 초기상황으로 전제하는데 그 성운 밖으로 행성들이 응축의 (혹은 스펜서[Spencer]에 따르면, 차별화와 통합의) 과정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 이론은, 의식적으로 고안된 배열로 처음에 보일 것을 설명하거나 모의 시험한다. [칸트와 라플라스<Laplace>의 성운 가설은 아마도, ‘생존’ 유형의 가설에 의하여 확충되거나 혹시 심지어 대체될 것이라고 여기서 언급될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넓게 분기하는 평면들에서 움직이는 혹은 같지 않은 방향들로 부분적으로 움직이는 행성계는 우리의 행성계와 같은 행성계보다 몇 가지 규모 순서들에 의하여 덜 안정적일 터이다; 그리하여 덜 안정적인 행성계와 마주칠 작은 개연성만 있다.] 물리학으로부터의 또 다른 보기는 다음 보기일 터이다: 뉴튼의 중력이론은 거리를 두고 작동하는 인력들로써 작용한다a. [G. L. 르 사주<Le Sage>는 1782년에 거리를 둔 뉴튼적 작동을 모의 시험함에 의하여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 이론에는 인력들이 없고 단지 다른 물체들을 밀치는 물체들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밀치기들도 인력들도 없는 설명적 이론체계가 어떻게 뉴튼적 이론체계를 모의 시험할 것인지를 밝힌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제 모의 시험된 설명은 ㅡ 다시 말해서, 뉴튼(Newton)의 이론 ㅡ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서 기술될 것임은 중요하다. 자연선택 이론은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간다. 어떤 특정 경우에서 자연선택 이론은 단순화된 모형-상황으로부터 ㅡ 특정 환경적 조건에 있는 특정 종들(species)로 구성되는 상황 ㅡ 시작하여 그 이론은 왜 이 상황에서 특정 돌연변이들이 생존가치를 지닐 터인지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라마르크론이 그렇게 보이는 바와 같이 허위일지라도 그 이론은 다윈론에 대한 최초의 근사치로서 다윈론자들에 의하여 존중되어야 한다.
다윈론의 실제 난제는, 첫눈에 보기에 믿을 수 없이 큰 숫자의 매우 작은 단계들에 의하여 우리의 눈들(eyes)의 진보처럼 목표-지향적으로 보일 진화를 설명하는 잘-알려진 문제이다; 이유인즉 다윈론에 따르면, 이 단계들 각각은 순전히 우연적인 돌연변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독립적인 우연한 돌연변이들 모두가 틀림없이 생존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a [이것은 특히 로렌츠의<Lorenzian> 유전된 행위에 관하여 사실이다.] ‘볼드윈 효과(The Baldwin effect’)는 ㅡ 다시 말해서, 라마르크론을 모의 시험하는 순전히 다윈적b 발전 이론 ㅡ 내가 보기에 그런 발전들의 설명을 향한 중요한 단계이다.
그 난제를 분명하게 본 최초인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였다고 나는 믿는데 그는 다음 질문에서 그 난제를 요약했다: ‘행운인가 교활함인가?’로 여기서는 ‘우연인가 고의인가?’를 의미한다. 베르그송(Bergson)의 창조 진화의 체계도 이 난제에 관한 비평으로서 유사하게 간주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생명의 약동(élan vital)은, 첫눈에 보기에 목표-지향적인 변화들을 유발하거나 통제할 모든 것에 그가 부여한 명칭일 따름이다. 이 유형에 대한 물활론적(物活論的: animistic)이거나 활력론적(活力論的: vitalistic)인 설명은 물론 임시방편적이어서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을 더 나은 것으로 환원하고 ㅡ 다윈이 목적론적 설명은 모의 시험될 수 있음을 밝혔을 때 다윈이 그랬던 바와 같이 ㅡ 그리하여 그 설명이 진리에 대한 혹은 적어도 더 옹호 가능한c 이론에 대한 근사치였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나는 이 강좌의 세 번째 부분에서 그런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자연선택 이론의 논리적 형태에 한 마디 말이 추가될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어서 나는 여기서 그 주제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틀림없이 좋아했다.a 그러나 나는 한두 가지 요점을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선택 이론은 역사가 있는 이론이다: 그 이론은 상황을 구축하여, 저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가 그 존재를 설명하고 싶어 하는 저 일들이 정말로 발생하기 쉽다.
그것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 다윈의 이론은 일반화된 역사관련 설명이다. 이것은, 상황이 독특하기보다는 전형적일 것으로 예상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상황에 대하여 단순화된 모형을 구축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a.
나는 혹시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 내가 다윈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이 ㅡ 개별적인 동물이나 식물이 생존할 더 나은 기회들이라는 의미에서 더 나은 적응을 야기한 유전적 변화들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 ㅡ 최근에 쇠퇴를 겪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크게 주로 유행하는 수학적 정확성의 추구에서, 그리고 실제적인 생존을 (개체군에서의 유전인자나 어떤 다른 유전적 단위의) 통하여 생존가치를 통계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숫자들의 증가라는 의미에서의 생존이나 성공은, 두 가지 구분 가능한 상황들 중 한 가지에 기인할 것이다. 종(種: species)은, 가령, 자체의 속도나 자체의 이빨들이나 자체의 재주나 자체의 지능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성공하거나 번성할 것이다; 아니면 종(種: species)은 자체의 생식력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만 성공하거나 번성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유전적 요인들이나 비성장 기간의 단축에 의존하는 생식력의 충분한 증가는 가령 재주나 지능의 증가와 동일하거나 그 증가보다 더 큰 생존가치를 가질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생식 비율들에서 일반적인 증가를 초월하는 그리고 가장 생식적인 종들을 제외한 모든 종들의 제거를 초월하는 것을 자연선택이 틀림없이 생산해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려울 것이다.b [생식율과 사망률을 결정하는 과정들과 관련된 많은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인데 예를 들어, 종<種>의 생태학적 조건들, 다른 종들<種들>과 상호작용 그리고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개체군들과의 균형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떠할지라도, 혹시 종(種)의 생식 가치를 (종[種]의 출산율) 종(種)의 전체적인 개체군 증가로부터 (종[種]의 생존 비율) 차감함에 의하여 어떤 종(種)의 개별적인 생명체들의 적응 성공을 측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상당한 난제들을 극복하는 일이 틀림없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어 종(種) A가 종(種) B보다 더 낮은 출산율을 지닐지라도 그 개체군들이 동등하게 증가한다면 종(種) A가 종(種) B보다 더 잘 적응되었다고 (라마르크의 그리고 다윈의 의미에서) 지칭할 것은 나는 제안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종(種) A의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평균적으로 종(種) B의 개별적인 구성원들보다 생존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혹은 종(種) A의 개별적인 구성원들이 종(種) B의 개별적인 구성원들보다 그들의 환경에 더 잘 적응된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와 같은 어떤 구분이 없다면 (그리고 구분에는 정교한 통계적 토대가 주어질 수 있을 터이다a) 우리는 라마르크와 다윈이 지녔던 원래 문제들을, 그리고 특히 다윈 이론이 지닌 설명력을 ㅡ 그 이론이 지닌, 라마르크적인 특징의 진화를 모의 시험하는 자연선택에 의하여 적응과 목적-같은 발전사항들을 설명하는 힘 ㅡ 더 이상 보지 못하기 쉽다.
나의 강좌의 두 번째 부분을 끝내기 위하여 나는,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내가 귀납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흄(Hume)은, 내가 결론적으로b 생각하는 바, 귀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성립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지라도 귀납은 동물들과 사람들이 의하여 보편적으로 실행된다고 여전히c 믿었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은, 예상들이나 기대들이나 이론들을 선택하는 방법에 의하여 ㅡ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에 의해서인데 그 방법이 귀납을 모의 시험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흔히 귀납으로 간주되었다 ㅡ 우리가 나아간다는 것이다. 귀납이라는 신성시된 신화는 생물학적 사고에서 많은 독단을 야기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신화는 또한 흔히 ‘안락의 자 과학자들’로 ㅡ 다시 말해서, 이론가들 ㅡ 지칭되는 것에 대한 비난을 야기
했다.d 그러나 안락의자들e에게는 잘못된 것이 없다. 안락의자들은e 케플러, 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the distinction could be given an elaborate statistical basi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또한 그 구별이 어떤 정교한 통계적 기초로 제공될 수 없다면’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conclusive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stil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has also led to the denunciation of what are often called ‘armchair scientists’ㅡthat is to say, theoreticians.인데 what은 those who로 써야 할 것이다.
튼, 맥스웰(Maxwell),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충실하게 뒷받침했다; 보어(Bohr),
파울리(Pauli), 드 브로이(de Broglie),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디랙(Dirac); 그
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물리적 및 생물학적 사색들 모두에서 슈뢰딩거(Schrödinger).
나는 감정으로써 말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심지어 안락의자 생물학자가 아
니라 더 나쁜 것이기 ㅡ 안락의자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 ㅡ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도 그랬는데 그의 이름을, 내가 자유롭게 인정하는 바와 같이, 나는 여기서 생물학적 사색의 분야에서 내 자신의 그릇된 행위들에 대한 은폐로서 파렴치하게 이용하고 있다.
3. 추측: ‘유전적 이원론’
이제 나는 나의 강좌의 세 번째이자 주요 부분으로 ㅡ 추측이나 가설이 비판을 견디어낸다면, 정통파 신-다윈적 (혹은 여러분이 선호한다면, ‘새로운 종합’) 틀 안에서 엄격하게 머물지라도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강화할 추측이나 이론의 제시 ㅡ 온다.
나의 추측은 물론 일반화된 역사관련 가설이다: 나의 추측은, 자연선택이 우리가 그 선택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하기를 희망하는 결과들을 혹시 낳을 전형적인 상황의 구축에 놓여있다. 나의 추측의 도움에 의하여 해결될 문제는,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 대(對) 우연적이고 독립적인 돌연변이라는 ㅡ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의 행운인가 교활함인가의 문제 ㅡ 오래된 문제이다. 그 문제는, 눈(eye)과 같은 복잡한 기관이 어떻게 독립적인 돌연변이들의 순전히 우연한 협동으로부터 어느 때고 후속적으로 생길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난제로부터 출현한다.
개괄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그 진화로 인하여 우리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 생명체들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생명체들에게서 ㅡ그 생명체들은 아마도 몇 가지 매우 하등인 생명체들을 포함할 것이다 ㅡ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두드러진 부분들을 다소 뚜렷하게 구분할 것이라는 가설에 놓여있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등동물들의 중추신경계와 같은 행동 제어 부분과 감각기관들과 사지들을 지탱하는 구조들과 함께 그 감각기관들과 사지들과 같은 실행 부분.
이것이 개략적으로, 나의 추측이 전제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이 두 가지
e 역주: 이 단어들은 원어는 각각 armchairs 및 그 대명사 they이 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관념적인 과학자들’로 번역되었다.
부분들 중 한 가지 부분에서의 돌연변이성 변화들은 항상은 아닐지라도 통상
적으로 다른 부분에서의 돌연변이성 변화들과 독립적일 것이라는 정통적인 신
-다윈적 전제와 연결될 것이다.
이 상황적 가설은, 정신-몸 이원론을 강력하게 닮은 이원론을 상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은 물활론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들뿐만 아니라 기계론적 유물론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들과 양립 가능하다. 이유인즉 내가 주장하는 이원론적 가설에 의하여 요구되는 유일한 것은 ㅡ 내가 아마도 ‘유전적 이원론’으로 기술할 ㅡ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명하고 싶은 경우들에서, 음식을 찾고 위험들을 피하고 모방에 의하여 재주들을 습득하고 기타 등등을 하는 자기-보존과 관련된 특정 계승된 의향들이나 성향들과 같은 의향들이나 성향들은, 감각기관들을 포함하는 신체의 기관들(器官들: organs) 중 어떤 기관(器官: organ)에도 통상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도입하지 않는 돌연변이들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될 것인데 언급된 의향들이나 성향들을 유전적으로 지닌 저 기관들(器官들: organs)은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외된다.
이 가설의 결론들을 설명하기 전에, 나는 유전적 이원론이라는 가설이 허위일 것이라고 즉각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eye)의 배아적 발전을 통제하는 유전자들이 (혹은 유전을 통제하는 이 단위들을 대체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내재적인 시각적 호기심을 ㅡ 충분한 빛이 있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황들에서 우리의 눈들(eyes)을 가능한 한 많이 이용하는 우리의 의향이나 성향 ㅡ 통제하는 유전자들과 항상 동일한 유전자들이라면, 그 가설은 허위일 터이다. 혹은 그것을 다소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눈(eyes)이나 우리의 귀나, 손이나 발, 기타 등등을 이용하려는 우리의 내재적 경향은 우리가 눈과 귀와 손과 발과 기타 등등을 우리가 지니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유전에 의하여 항상 전달된다면 나의 이원론적 가설은 허위일 터이다.a 기관(器官: organ)을 소유하는 것과 기관(器官: organ)을 사용하는 것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이 완전히 오류라면 ㅡ 예를 들어 소유와 사용이,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동일한 실재인 것에서 유래하는 두 가지 다른 추상들일 따름이라면 ㅡ 나의 이원론적 가설을 허위일 터이다. 이것이 유전적 일원론으로서 혹은 일원론적 가설로서 그렇다는 전제를 나는 언급하겠다.
a 역주: 이 문장의 종속절의 동사는 is transmitted로 직설법 현재로 쓰이고 주절은 would be로
가정법 현재로 쓰여서 문법적 시제의 일관성이 없다.
나의 이원론적 가설이 완전히 전개되어서 지금까지 토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어도 내가 아는 바, 토론되지 않았다) 책임이 있는 것은 이 유전적
일원론과 같은 것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a 일원론적 가설의 수용은 아마도, 진화 이론의 주요 문제가 종(種: species)의 기원을 ㅡ 다시 말해서, 행동하려는 특정 유형들의 행위나 성향들의 근원이라기보다는 동물들 및 식물들이 지닌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차별화의 근원을 ㅡ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선호되었다.
이것이 어떨지라도, 이제 나는 기계적 모형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이원론적 가설의 작용을 토론하겠다. 더욱 정확하게, 나는 발전하는 생명체 대신에 자동제어장치(servo-mechanism)를 ㅡ 기계 ㅡ 대체하겠다. 그렇게 하기 전에, 나의 추측은 이 모형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과 나의 추측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생명체들이 기계들이라는 견해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하고 싶다. 나아가, 나의 모형은 이론의 모든 관련 요소들과 관련된 기계적 유사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의 모형은 돌연변이들이나 다른 유전적 변화들을 야기하는 것과 관련된 기제(機制: mechanism)를 포함하지 않는데 이유는 이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모형을 자동조종 장치에 의하여 조정되는 항공기로 ㅡ 예를 들어 전투기 ㅡ 간주한다. 그 항공기는 어떤 정확한 목표들과 관련하여 제작된다고 우리는 전제하여 자동조종 장치에는 몇 가지 내장된 반응들이 장착되는데 그 반응들은 더 약한 적을 공격하라는, 공격과 방어에서 우군을 지원하라는, 더 강력한 적으로부터 도망치라는, 기타 등등의 ‘지시들’에 해당한다. 이 ‘지시들’이 의존하는 자동조종 장치의 기계적 부분들은, 내가 나의 모형의 목표-구조(aim-structure)로 지칭할 물리적 토대이다.
덧붙여, 자동조종 장치 안에는 내가 그 자동조종 장치의 기술-구조(skill-structure)로 지칭할 거의 물리적인 토대가 장착된다. 이것은 안정화 기제들(stabilization mechanisms)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적들과 우군들을 확인하여 구분하기 위한 탐지기들을 해석하기 위한 기제들(機制들: mechanisms); 조종 제어들; 목표 제어들; 기타 등등. 목표-구조와 기술-구조는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다. 함께 그 구조들은 자동조종 장치의 핵심 성향 구조 혹은, 여러분이 좋아한다면, 자동조종 장치의 ‘정신’으로 지칭할 것을 내가 제안하는 것을 구성한다. 물리적 체계는 ㅡ 자동조종 장치를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it is ~ that ~ 강조구문이 it is ~ which ~로 잘못 쓰였다.
대신해서 저 구체화하는 ‘지시들’을 포함하여 개폐기들, 전선들, 판막이들, 건전지들, 기타 등등 ㅡ 자체의 핵심 성향 구조의 혹은 자체의 ‘정신’의 물리적 토대로서 기술될 것이다. 나는 다음에서 이 물리적 체계를 단지 ‘자동조종 장치’로 지칭하겠다.
그런 자동제어장치(servo-mechanism)에 시행착오에 의하여 ‘학습하는’ ㅡ 예를 들어 자체의 기술들 중 몇 가지 기술들을 향상시키는 ㅡ 특정 성향들을 장착시키는 것이 또한 가능함이 알려진다. 우리는 우선 이 요점을 무시할 것이
다. 대신에, 목표-구조와 기술-구조가 엄격하여 항공기의 엔진 출력a과 같은 항공기의 실행 기관들(器官들: organs)에 정확하게 맞추어진다고 우리는 먼저 전제한다.
이제 우리의 전투기가 우연한 돌연변이들에 종속될지라도 재생될 수 있다고 ㅡ 자기-재생적인지 아니면 그 전투기의 다양한 물리적 부분들을 복제하는 공장에 의하여 재생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ㅡ 전제하고 가능한 돌연변이들을 네 가지 등급들로 묶자.
(1) 자동조종 장치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들.
(2) 자동조종 장치에 의하여 제어되는 어떤 기관(器官: organ)에 ㅡ 가령 방향타나 엔진 ㅡ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들.
(3) 자동조종 장치의 제어를 받지 않는 자기-규제적인 기관(器官: organ)에 ㅡ 가령, 엔진의 온도를 규제하는 독립적인 온도계 ㅡ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들.
(4) 두 가지 이상의 기관들(器官들: organs)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들.
이와 같은 복잡한 생물체에서는 거의 모든 우연한 돌연변이들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고 대부분은 심지어 치명적일 것임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그 돌연변이들은 그리하여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거될 것이라고 우리는 전제한다. 이것은 한 가지 이상의 기관(器官: organ)에 ㅡ 가령 자동조종 장치와 동시에b 또 다른 기관(器官: organ) ㅡ 영향을 미치는 우연한 돌연변이들과 관련된 특별한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ow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and로 강조되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와’로 번역되면서 강조되지 않았다.
힘에게 성립할 것이다a. 그런 돌연변이들은 선호될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런
돌연변이들이 혹시 선호될 수 있거나 심지어 보완적일 가능성은 틀림없이 0이
다.
이것은, 나의 이원론적 가설과 일원론적 가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들 중 한 가지 차이점이다. 일원론적 가설에 따르면, 어떤 기관(器官: organ)의 선호 가능한 돌연변이, 가령 엔진들 중 한 엔진의 출력 증가는 항상 선호되어 이용될 것이고 특별히 다른 의미가 없다. 선호될 수 있는 돌연변이는 비개연적이지만 그 돌연변이의 개연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가설에 따르면, 기관(器官: organ)의 선호 가능한 변화는,
많은 경우들에서, b 잠재적으로만 선호될 수 있을 터이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하여c, 향상이 이용되어야 할 터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용은 아마도 핵심 성향 구조에서의 보완적인 우연한 변화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독립적이자 보완적 모두일 터인 두 가지 그런 우연한 변화들의 개연성은 틀림없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첫눈에 보기에 이원론적인 모형은 순전히 선택론적인 이론의 난제들을 증가시킬 따름으로 보일 것이고, 이것이 대부분의 다윈론자들이 암묵적으로 일원론적인 가설을 채택한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제 보기를 들어보면. 어떤 돌연변이가 모든 엔진들에 더 큰 출력을 부여하여 항공기가 더 빨리 비행할 것이라고 말하자. 이것은 틀림없이 적을 공격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도망치는 것과 관련해서도 모두 선호 가능한 것으로서 고려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항공기의 목표-구조로 인하여 자동조종 장치가 증가된 힘과 속도를 완벽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항공기의 기술-구조는 옛 엔진-출력과 최고 속도에 맞추어질 것이다.d 혹은 다시 말해서, 기술-수행 기제(機制: mechanism)의 상세한 반응들은 옛 엔진들과 옛 속도에 맞추어질 것이다;d 그리고 항공기의 기술을 향상시킨다는 의미에서 자동조종 장치가 ‘학습’할 수 없다고 우리가 전제했기 때문에 속도는 항공기에게 너무 빠를 것이어서 나의 이원론적인 가설에 따라서 항공기는 추락
a 역주: 이 부분의 원래 표현은 will hol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더욱 확실하게 적용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 부분에 ‘그 개체에 대해서는’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 원문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To make a differenc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떤 효과를 내기 위해’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두 가지 문장의 동사부분은 will be adjusted인데 의미상 과거를 의미하기 때문에 may/must have been adjusted로 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 또한 달라진다.
할a 것이다. 유전적 일원론은 다른 한편으로, 증가된 엔진 출력으로써 증가된 기술이 자동적으로 오는데 왜냐하면 증가된 기술은 동일한 것의 또 다른 모습일 따름이기 ㅡ 우리는 유전적 목표들 때문에b 기관(器官: organ)과 그 기관(器官: organ)의 이용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 따라서 ㅡ 때문이다.
여러분은 우리의 네 가지 돌연변이적 변화 가능성들을 기억할 것이다:
(1) 자동조종 장치의 구조 변화.
(2) 자동조종 장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제어되는 기관(器官: organ)의
변화.
(3) 자기-제어 체계의 변화.
(4)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기관(器官: organ)의 변화.
경우 (4)는 ㅡ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이상의 기관(器官: organ)의 변화는 ㅡ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선호 가능한 변화들이 너무 비개연적이기 때문에 이원론적 및 일원론적 가설 양쪽 모두에 의하여 무시될 것이다.
경우 (3)은 ㅡ 다시 말해서, 자기-제어 기관(器官: organ)의 변화는 ㅡ 그 기관(器官: organ)이 우리의 이원론적 가설이 다시 적용되어야 하는 작은 이원론적 하위-체계이거나 아니면 일원론적 가설이 성립하는 그리하여 통상적인 가설에 따라서 발전하는 자기-제어 기관(器官: organ)이라고 언급함에 의하여 여기서 다루질 것이다.c
경우 (2)는 ㅡ 다시 말해서, 자동조종 장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제어되는 기관(器官: organ)의 변화는 ㅡ 돌연변이와 같은 것이 일원론적 가설의 관점에서 선호될 수 있을 터이라도 우리의 증가된 엔진 출력과 속도에 관한 보기가 밝히는 바와 같이, 선호될 수 없기 쉽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유전된 핵심 성향 구조에서의 돌연변이성 변화들에 관한 경우인 경우 (1)이 남는다. 나의 주장은, 이 구조에서의 선호 가능한 변화들이 특별한 난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표-구조에서의 선호 가능한 돌연변이로 인하여 이전보다 더 큰 숫자의 경우들에서 항공기가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cras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부서질’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for genetic purpos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유전적인 관점에서는’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at is, change of a self-controlling organㅡmay be dealt with here by remarking that a self-controlling organ is either a small dualistic sub-system to which our dualistic hypothesis has to be applied again, or else one for which the monistic hypothesis holds, and which develops in accordance with the usual theory.인데 one을 자기-제어 기관의 대명사로 해석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대명사인지 알 수 없다.
적으로부터 도주하게 될 것이다; 또는 아마도 반대 성향이 (다시 말해서, 더 큰 숫자의 경우들에서 적을 공격하는 성향) 선호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더 선호 가능한지를 우리가 모를지라도, 우리의 전제에 따라서, 자연선택이 알아낼 것이다.
기술들과 관련해서도 유사하다. 인간 조종사는 자신의 항공기의 구조를 변경하지 않고도 자신의 기술을 향상시킬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나머지 구조에서 보완적 변화들 없이도 자동조종 장치의 기술-구조에서의 선호 가능한 돌연변이들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물론 선호될 수 있는 돌연변이들은 항상 비개연적이다. 그러나 인간 조종사가 자신의 항공기를 개조하지 않고도 추락함 없이 새로운 목표들을 채택하여 새로운 기술들을 발전시킬 것임을 우리는 정
말로 안다a; 그리고 이 새로운 목표들과 새로운 기술들 중 몇 가지들은 가령 자기-보전의 관점에서 선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동조종 장치의b 상응하는 새로운 목표들과 기술들이 생존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 첫 번째 결과들에 다다른다: 제어하는 핵심 성향 구조와 제어되는 실행 구조가 정확하게 균형을 이루는 이원론적 생명체로부터 우리가 시작한다면, 핵심 성향 구조의 돌연변이들은 제어되는 실행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돌연변이들보다 (심지어 잠재적으로 선호될 수 있는 돌연변이들c) 다소 덜 치명적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다다르는 두 번째이자 주요한 결과는 이렇다. 새로운 목표나 경향이나 의향, 혹은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행동 방식이 핵심 성향 구조에서 진화하자마자, 이 사실은 자연선택의 효과들에 영향을 미쳐서 이전에 선호될 수 없던 (잠재적으로 선호될 수 있었을지라도) 돌연변이들이 새로이 확립된 경향을 뒷받침한다면 그 돌연변이들은 실제로 선호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실행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진화가 저 경향이나 목표에 의하여 지향될 것임을 그리고 그리하여 ‘목표-지향적’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두 가지 종류의 핵심 성향 구조의 선호 가능한 돌연변이를 고찰함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을 예시할 것이다: 아마도 포괄적인 목표들이나 기술들로 지칭될 것이 향상되는 종류들과 목표들이나 기술들이 전문화되는 종류들.
첫 번째 종류의 보기들은, 생명체가 지닌 어떤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a 역주: 이 부분의 동사는 do know로 강조형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강조로 번역되지 않았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of the automatic pilo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자동 조종 장치에’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서 실행 기관들을 수식하는 것으로 번역되었다.
목표나 경향이나 소원을 도입하는 돌연변이와 같이 간접적으로만 선호될 수 있는 목표들을 도입하는 돌연변이들이다. 이제 이와 같은 돌연변이가 확립되자마자, 기술-구조를 보다 신축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돌연변이가 더욱 선호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술-구조의 그런 돌연변이들에 의하여 생명체는 아마도, 시행착오에 의하여 자체의 기술을 향상시킨다는 의미에서, ‘학습하는’ 성향을 습득할 것이다.
게다가, 더 신축적인 핵심 성향 구조를 우리가 획득하자마자 더 큰 속도와 같이 그렇지 않다면a 치명적인 실행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돌연변이들이 이전에는 선호될 수 없었다할지라도 극도로 선호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핵심 구조의 돌연변이들이 지휘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 구조의 변화들에 의하여 이전에 확립된 일반적인 경향들에 들어맞는 실행 기관들의 저 돌연변이들만 보존될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변화에 관해서도 유사한 것이 언급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핵심 구조의 전문화하는 변화들에 관하여. 환경에서의 변화들로 인하여 목표-구조의 협소화가 선호될b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종류의 식량만 ㅡ 아마도 원래 많이 선호되지 않는 한 가지 종류 ㅡ 쉽게 획득될 수 있다면, 미각의 변화는 (다시 말해서, 목표-구조의 변화) 고도로 선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목표의 변화는 식량을 얻는 데 자체의 기술들에 관해서와 자체가 지닌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형태에 관해서와 같이 전체 생명체의 전문화를 야기할 것이다. 예를 들면, 반대 방향이라기보다는 딱따구리가 자체의 미각들과 자체의 먹는 습관들을 바꾸기 시작한 이후에 선택에 의하여 딱따구리의 전문화된 부리와 혀가 발전했음을 이 이론은 암시할 터이다. 딱따구리가 자체의 미각과 기술을 변경하기 이전에 자체의 부리와 혀를 발전시켰다면, 그 변화는 치명적이었을 터이라고 정말로 우리는 말할 것이다: 딱따구리는 자체의 새로운 기관들(器官들: organs)로써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터이다.
아니면 고전적인 라마르크적(Lamarckian) 보기를 ㅡ 기린 ㅡ 생각하라: 기린의 성향들이나 먹는 습관들은 나의 이론에 따라서 자체의 목 이전에c 틀림없이 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긴 목은 생존 가치를 지니지 못했을 터이다.
이제 나는 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 이론이 지닌 설명력에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otherwis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avo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촉진할’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서 강조되지 않았다.
관하며 몇 마디 말을 해야 하겠다.
그것을 개략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주장하는 이원론적 가설로 인하여 우리는 모의 시험되는 라마르크론뿐만 아니라 모의 시험되는 활력론(活力論: vitalism)과 물활론(物活論: animism) 또한 원칙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또 그리하여 나의 이원론적 가설은 이 이론들을 최초의 근사치들로서 ‘설명한다.’ 그리하여 나의 이원론적 가설로 인하여 원칙적으로 우리는 확정된 방향으로 이끄는 많은 단계들에 의하여 눈(eye)과 같은 복잡한 기관(器官: organ)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 그 방향은 정말로, 활력론자들(活力論者들: vitalists)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신-같은 경향에 의하여 ㅡ 눈(eye)을 이용하는 경향이나 소망을 발전시킬 그리고 눈으로부터 수용된 자극들을 해석하는 데서 기술을 발전시킬 생명체의 목표-구조나 기술-구조에 의하여 ㅡ 결정될 것이다.
동시에, 일원론적 가설이 항상 허위일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진화의 과정에서 생명체들의 유전적 기제(機制: mechanism)에서 다소 일원론적이 아니면 이원론적인 다양한 생명체들이 발전할 것이다.a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아마도 표면적으로 목표-지향적인 진화적 변화들의 발생들 중 적어도 몇 가지 발생들을 설명할 것이다 ㅡ 덜 목표-지향적인 다른 변화들은, 우리가 유전적으로 일원론적인 구조들의 발전에 직면했다고 전제함에 의하여 설명될 것인 반면.
여기는 아마도, 나의 추측에 대한 표면적인b 반박인 어느 경우에 의하여 ㅡ 그리고 이 경우가 왜 그렇게 당혹스러웠는지를 스스로 분명히 하려고 시도함에 의하여 ㅡ 당혹해짐을 통하여 내가 유전적 이원론이라는 나의 추측에 다다랐음을 고백하는 장소이다. 그것은 유명한 날개가 두 개인 초파리인 초파리(drosophila)의 날개 4개의 돌연변이(tetraptera)의 경우였다. 그 경우와 관련하여 나를 당혹시킨 것은 이렇다: 날개 4개의 돌연변이는 왜 추락하지 않았는가? 그 돌연변이는 어떻게 자체의 날개 네 개를 사용하는 기술을 지닐 수 있었는가? 아마도 이 경우는 정말로 나의 추측을 실제로 반박한다. 그러나 이 경우가 나의 추측을 반박하지 않을 개연성이 더 높다. (아마도 그 곤충의 날개-구조는 주로 자기-규제적이거나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인 동물의 일원론적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may be that, in the course of evolution, different kinds of organisms develop which are to a greater or lesser extent either monistic or dualistic in their genetic mechanis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것은 진화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기체들이 발달시킨 것일 수 있는데, 그 유기체들은 자신들의 유전적 기제에서 정도가 크든 작든 일원적이거나 이원적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prima facie인데 저자는 이 표현을 이탤릭체로 쓰는데 여기서 이탤릭체로 표시하지 않았다.
부분이다; 아니면 혹시 그 돌연변이는 격세유전이고 ㅡ 정말로 그 돌연변이가
그걸 것으로 예상되는 바와 같이 ㅡ 네 개의 날개 사용과 관련되는, 목표-구
조는 아닐지라도, 기술-구조가 네 개의 날개로부터 두 개의 날개로의 더 오래되고 아마도 점진적인 변화로부터 격세 유전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경우에 관하여 걱정하는 것과 별도로, 나는 주로 인간의, 인간 언어의, 그리고 인간 지식 나무의 진화에 대한 고찰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받았다.
유전적 이원론을 선호하는 한 가지 강력한 요점만으로써 결론을 내리면: 동물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타고난 복잡한 행동의 ㅡ 많은 기관들(器官
들: organs)의 상당히 기술적이고 고도록 전문화되고 고도로 협력적인a 사용을 포함하는 행동 ㅡ 존재를 밝혔다. 이 행동이 그 행동에 참여하는 많은 기관들(器官들: organs)의 해부학적 구조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b 어렵다.
이것과 일원론적 가설에 반대하는 다른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주장하는 이원론적 가설이 매우 쉽게 시험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설이 시험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시험들이 진지하게 토론되기 전에, 그 가설은 그 가설이 일관적인지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참이라면 그 가설이 해결하려고 출발한 문제들을 해결하는지, 그리고 그 가설을 단순화함에 의하여, 그리고 그 가설을 예리하게 만듦에 의하여 그 가설이 향상될 수 있는지. 지금 나는 그 가설을 가능한 생각의 방향으로만 제시한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들은 highly co-ordinat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통합된’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if not impossibl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가능하다면’으로 번역되었다.
부록
희망찬 행동적 괴물
위 강좌는 10년 전인 1961년에 열렸다. 그 강좌의 개념들 중 몇 가지 개념들은 ㅡ 행동적 돌연변이들의 선봉 이론a ㅡ ‘구름과 시계에 관하여’에서 추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진화론에 강력한 흥미를 느낄지라도 나는 진화론의 어느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전문가는 스펜서 강좌(Spencer Lecture)를 책으로 발간하지 말라면서 나를 낙담시켰다b.
그러나 저 세월 모두를 통하여 (1) 목표들과 선호들, (2) 기술들, 그리고 (3) 해부학적 실행 도구들에 관한 유전적 토대들의 구분은 내가 느낀 바, 다윈적 유형의 진화론에 대한 중대한 기여로 보인다. 내가 ‘유전적 이원론’으로 지칭한 (그리고 ‘유전적 다원론’으로 지칭했어야 한) 것은 내가 보기에 유전적 추세들 즉,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에 대하여 설명을 제시했다.
내가 ‘유전적 이원론’으로 지칭한 것은 내가 보기에 리처드 B. 골드슈미트(Richard B. Goldschmidt)가 자신의 유명한 ‘희망찬 괴물’이라는 형태로 제시한 이론에 대한 개선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이론들을 비교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골드슈미트(Goldschmidt)는 (1878년-1958년) 1940년에 진화의 물질적 토대(The Material Basis of Evolution)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그 저서에서 그는, 다윈의 많은 작은 변종들이 많은 커다란 난제들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먼저, 돌연변이들이 발생한다할지라도 평균적인 개체군으로 복귀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모든 선택 실험들에서 경험되는 특정 확정된 한계들을 초월하여 변화들을 이룩함이라는 커다란 난제가 있다: 더 멀리 나아가려는 시도는 불임과 멸종을 거의 변함없이 야기한다.
두 가지 논증 모두는, 극소수의 원래 살아있는 형태들로부터 ㅡ 아마도 심지어 단지 하나의 살아있는 형태 ㅡ 나온 다윈적 진화론에게 난제들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이론인데c 그 실재에 관해서는 많은 양의 경험적 증거가 있는 현상이다.
정통적인 설명은, 거대한 시간의 시기들로 인하여 작은 변종들이 축적될 수 있었다는 것과 지리학적 격리가 특히 자주 평균적인 개체군의 재확립을 막는다는 것이다. 골드슈미트(Goldschmidt)는 이 개념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연선택이라는 개념과 결별하지 않고 모든 진화적 변화는 매우 많은 숫자의 매우 작은 변종들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과 그는 결별했다. 그는 때때로 커다란 돌연변이들이 발생하는데 그 돌연변이들은 통상적으로 치명적이어서 제거되지만 그 돌연변이들 중 몇 가지는 살아남는다고 전제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양한 생명의 형태들 사이의 진정한 차이점들과 동시에 사촌관계의 명백한 특징 모두를 설명했다. 커다란 돌연변이들을 그는 ‘희망찬 괴물들’로서 기술했다. 그 이론에는 자체의 매력적인 면이 있다: 괴물들은 때때로 정말로 발생한다. 그러나 커다란 난제들이 있다. 통상적으로 그런 돌연변이들은 치명적일 터이고 (생명체는 너무 세밀하게 균형이 잡혀서 갑작스러운 우연적인 커다란 변화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돌연변이들이 치명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원래 형태로 복귀할 개연성이 매우 크다.
나는 항상 골드슈미트(Goldschmidt)의 이론들에 매우 흥미를 지녀서, 골드슈미트(Goldschmidt)의 ‘희망찬 괴물들’을 I. 라커토스(Lakatos)에게 주지시켰는데 라커토스(Lakatos)는 자신의 글 ‘증거들과 반박들(Proofs and Refutations)’에서 그 이론들을 언급했다.
노먼 맥베드(Norman Macbeth)가 새롭게 저술한 다윈 다시 시험되다(Darwin Retried)라는 비판적 저서를 읽을 때 아마도 골드슈미트(Goldschmidt)의 ‘희망찬 괴물들’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킬 시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떠오른 것은 겨우 며칠 전이었다.
골드슈미트(Goldschmidt) 자신은 주로, 아마도 배타적으로는 아닐지라도, 해부학적 괴물들을 ㅡ 자신들의 부모들과 무시될 수 없거나 심지어 급격한 구조적 종류의 차이점들을 지닌 생명체들 ㅡ 생각했다. 우리가 행태적 혹은 행동학적a 괴물들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자신들의 부모들과 다른 그 차이점들이 주로 자신들의 일탈적인 행태에 놓인 생명체들.
물론 이 행태에는 자체의 유전적 토대가 있다. 그러나 그 유전적 토대는, 아마도 생명체가 자체의 환경적 자극에 반응하는 순간적인 생리학적 상태에만 혹은 아마도 특이한 자극들의 결합에 혹은 아마도 행동하려는 의향에서의 유전적 변종에 의존하여, 행태적 반응에 특정 범위를 허용하는 듯이 보인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새롭고 괴물스러운 행태는 관찰 가능한 해부학적 새로움 없이 나타날 수 있고 정말로 나타난다a. 그 새로움은, 신경계의 특정 부분에 제한된 어떤 변화에 자체의 물질적 토대를 지닐 것이지만, 이 변화는 상처나 어떤 다른 사고의 결과일 수 있어서 유전적으로 결정될 필요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 새로움은 행태에 특별히 책임이 있는 유전체계의 저 부분에서의 진정한 유전적 돌연변이에 기인할 개연성이 높다; 해부학적 구조에서의 총체적 변화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돌연변이. 궁극적으로 행태의 새로움은 환경적 상황에서의 ㅡ 생명체의 생태학에서의 ㅡ 실제적인 새로움에 기인할 것이다.
이 경우들 각각에서, 행태적 괴물은 자체의 행태에서 자체의 부모들로부터 급격하게 일탈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탈이 치명적이어야 하는 즉각적인 이유는 없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괴물스러운 행태는 생명체의 균형을 뒤엎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아니면 그 행태는 생명체에게 반드시 치명적은 아닌 방식으로 생명체를 뒤엎을지도 모른다 (나의 필기 종이 위로 나는 파리가 잉크에 다리들을 적시어 그 다리들을 깨끗하게 하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처럼). 행태의 새로움 그리고 행태의 괴물스러움은 (골드슈미트[Goldschmidt]의 의미에서) 그리하여 해부학 구조적 괴물스러움보다 훨씬 덜 치명적이기 쉽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선택을 통하여 괴물스러운 행태는 해부학 구조적 변종들의 제거에 가장 큰 충격을 미칠 것이다.
눈(eye)에 관한 유명한 사례를 들면, 빛-감응 지점들을 (이미 존재하는) 이용하는 새로운 행태는 그 지점들의 선택적 가치를 크게 증진시킬 것인데 그 가치는 이전에 아마도 무시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성공적으로 유전적으로 고착될 것이고 눈(eye)의 정향진화적(定向進化的: orthogenetic) 진화에서 주요 요소가 될 것이다; 심지어 눈(eye)의 해부학적 구조에서의 가장 작은 개선들도, 생명체의 목표-구조와 기술-구조가 그 요소를 충분히 이용한다면, 선택적으로 귀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행태적 괴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다윈론의 한 가지 변종을 제출한다. 행태적 새로움은, 성공적이라면, 나중에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ㅡ 다시 말해서, 이 행태적 새로움들을 이용하고 그리하여 부분적으로 미리 결정된 방향으로 선택 압력을 행사하도록 작동하는 ㅡ 저 생태학적 안식처들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do appea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동사의 강조 없이 ‘나타나거나’로 번역되었다.
의 선택을 불러온다: 유전적으로 가능한 어떤 미결정 목표에, 예를 들어 새로운 종류의 먹이에 대한 미각이나 피부의 빛-감응 부위들을 이용하는 즐거움에 의하여 결정되는 방향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골드슈미트(Goldschmidt)의 주요 문제였던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를 이해할 것이다.
심지어 젊은이들의 장난기와 같은 생명체들의 속성들도, 행태적 괴물스러움이 ㅡ 다시 말해서, 변화가능성a 더하기 가능한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 ㅡ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목표-구조의 변화들에 (유전적 변화들, 혹은 심지어 유전적으로 미결정된 변화들) 의하여 그리고 두 번째 방향으로 유전적으로 근거된 해부학적 구조의 변화들에 걸친 기술-구조에서의 변화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흔히) 주요 역할이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해부학적 구조는 주로 단지 서서히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의 변화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목표-구조와 기술-구조에서의 변화들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목표-구조와 기술-구조의 우위성을 확립하는 유전 장치의 진화는 아마도, 원칙적으로, 다윈적 방향들에서 설명될 것이다.
희망찬 행태적 괴물들이라는 이 다윈적 이론은 라마르크론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의 활물론(活物論: vitalism) 또한 ‘모의 시험한다’는 것이 보일 것이다.
(1974년 추가: 이 장에서 토론된 견해들과 유사한 견해들의 역사에 대한 탁월한 제시 및 탐사와 관련하여, 알리스터 하디 경[Sir Alister Hardy], 살아있는 흐름[The Living Stream], 콜린스[Collins], 1965년, 특히 강좌 VI, VII 및 VIII를 참조하는데, 그곳에서 제임스 허튼[James Hutton]부터 (1797년 사망) 계속해서 앞선 문헌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발견될 것이다. 또한 에른스트 마이르[Ernst Mayr], 동물종과 진화[Animal Species and Evolution], 벨크냅 출판사[Belknap Press], 캠브리지, 매사추세츠, 및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런던, 1963년, 특히 604쪽 이하와 611쪽 참조.)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variabilit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변양’으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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