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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 서문, 1956년 -

이윤진이카루스 2011. 8. 2. 00:05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이 만큼 확실하다: 살면서 위대한 과학적 혁명에 참여하는 것보다 위대한 발전이 가능한 정신을 형성하기 위해 더 잘 적응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이 이익을 자연스럽게 제공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과학이 위대한 변화를 겪었던 저 시대의 글들을 읽음으로써 자신들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그 이익을 확보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가장 반대가 되는 이론체계의 글들을 읽는 것, 그 글들의 숨겨진 진리를 추출하는 것, 이 반대가 되는 이론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의문에 답변하는 것, 한 이론체계의 주요 이론들을 다른 이론체계로 이전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아무리 권유해도 지나칠 수 없는 실습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의 좁은 견해에서 가능한 한 독립적이 됨으로써 그 노고에 의하여 분명히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

 

수학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인간의 언어가 지금까지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들을 지니고 있다고 자신들을 과찬할지도 모른다. 수학자들로 하여금 이 개념들을 상징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합당한 단어들로 표현하려고 노력을 하도록 만들어서 그들이 성공한다면, 수학자들은 우리 문외한들에게 지속적인 의무를 지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히 말하건대, 과학자들은 또한 스스로 그 과정동안에 매우 많이 계몽된 것을 발견하여 심지어 상징으로 표현된 개념들이 등식으로부터 탈출하여 수학자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갔는지를 의심할 것이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서문, 1956년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에 관하여

 

          그러나 사실상, 그것을 본 것으로부터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깊은 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일반적으로 나의 학생들에게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함으로써 나는 과학적 방법에 관한 강의를 시작한다. 내가 적어도 얼마간 내가 영연방 안에서 이 존재하지 않는 과목에 대한 유일한 교수이었음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고 부언한다.

나의 과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에서이고 나는 그 몇 가지를 언급하겠다.

먼저 나의 과목은 일반적인 과목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목 문제는 없다; 지식의 - 혹은 더 정확하게는 탐구의 - 분야는 없다: 오직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충동만 있다. 식물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은 (혹은 가령, 물리화학이나 전자화학) 단지 행정적 단위라고 나는 주장한다. 대학의 행정가들은 아무튼 어려운 직분을 지니고 있어서 몇 가지 명칭이 부여된 과목들이 있는데 그 과목들에는 이 과목들에서의 전문가들로 채워질 의자가 붙어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근무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편의이다. 과목들은 학생들에게도 또한 편의라고 언급되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진지한 학생들도 과목이라는 신화에 의하여 오도당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오도하는 것을 그 사람의 편의라고 말하기를 주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과목에 대하여 이 만큼만 하자. 그러나 과학적 방법은 몇 가지 다른 존재하지 않는 과목들보다 훨씬 덜 존재하는 데서 다소 기묘한 위치를 점유한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과목의 창시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그리고 데카르트와 그들의 계승자 대부분은, 예를 들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후 다소 더 회의적인 시대에는, 참된 이론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되지는 않았다면 적어도 어떤 주어진 가설이 참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방법론자들이 있었다; 혹은 (훨씬 더 회의적으로) 어떤 주어진 가설이 적어도 확인될 수 있는 정도까지 ‘개연적’인지.

이 세 가지 의미에서 과학적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여:

(1) 과학적 이론을 발견하는 방법은 없다.

(2) 과학적 가설이 지닌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은 없다, 다시 말해서

검증의 방법은 없다.

(3) 가설이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개연적’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없다.

과학적인 방법과 같은 것은 없다고 그렇게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나는 서둘러 나의 대담을 시작하고 우리는 바빠진다. 왜냐하면 1년이란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과목의 수박겉핥기 작업에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리고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나는 이성주의자이다. 이성주의자로써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논증을 함으로써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을 나는 의미한다. (이성주의자는 사람이 전적으로나 주로 이성적이라는 그릇된 이론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다른 사람들과 논증하는 함’으로써 나는, 더욱 특히,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비판을 초대하기; 그리고 그 비판으로부터 배우기. 논증의 기술은 싸우는 기술의 고유한 형태이다 - 칼을 대신해서 말로, 그리고 세상에 관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흥미로 고무되어.

나는 논증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하여 논증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현대의 이론을 믿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논증자들의 배경이 다양할수록 논증이 더 유용하다고 믿는다. 심지어 시작하는 데 공통의 언어조차 필요없다: 바벨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바벨탑을 건설했을 것이다. 다양성은 비판적 논증을 유용하게 만든다. 논증에서 참석자들이 공유해야 하는 유일한 것들은 알고자 하는 소망, 다른 참석자의 견해를 엄혹하게 비판함으로써 - 다른 참석자의 견해에 주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석 - 그리고 그 참석자가 답변하는 것을 듣고 다른 참석자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나는 소위 과학적 방법은 이런 종류의 비판이라고 믿는다. 과학적 이론들은 비판될 수 있다는 데서, 그리고 비판에 비추어 수정에 개방되어 있다는 데서만 신화로부터 구분된다. 과학적 이론들은 검증될 수도 확률화될 수도 없다.

나의 비판적 - 혹은 여러분이 선호한다면, 나의 이단적(異端的) - 태도는 물론 나의 동료 철학자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여러분은 자신이 속한 대대가 보조를 맞추지 못함을 발견한 군인의 (물론 그 군인 자신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부단히 그런 재미난 위치에 놓여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는 매우 운이 좋은데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대대의 다른 병사 소수가 나와 보조를 맞출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나는 철학적 원칙을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대대의 충분한 구성원들이 나와 그리고 구성원들 서로가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나는 전적으로 만족한다.

나를 보조를 맞추지 않게 하고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들 중에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유행: 나는 과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유행, 사조, 경향 혹은 학파를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상 나는 인류의 역사가 유행하는 철학적이자 종교적 질병들이 창궐한 역사로서 잘 기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유행은 단지 한 가지 진지한 기능을 지닐 수 있을 따름이다 - 비판을 환기시키는 기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움이라는 공동 재산의 이성주의적 전통을, 그리고 이 전통을 보존하려는 화급한 요구를 정말로 신뢰한다.

(2) 물리학에 대하여 서투른 흉내내기: 소위 ‘방법들’을 - 측정과 ‘관찰로부터의 귀납’ - 실행함으로써 물리학을 서투르게 흉내를 내려는, 물리학 외부 분야에서 행하여지는 시도를 나는 혐오한다. 과목에는 수학이 있는 만큼 과목에 많은 과학이 있다거나 과목에 측정이나 ‘정밀’이 있는 만큼 과목에 과학이 있다는 교설은 완벽한 오해에 근거한다. 반대로 다음 경구가 모든 과학에 유효하다: 손 안에 있는 문제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밀을 목표로 하지 말라.

그리하여 나는 정밀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성과 명징성이 본질적으로 가치라고 믿지만 정밀이나 정확이 본질적으로 가치라고 믿지 않는다. 명징성과 정밀은 다르고 때때로 심지어 양립할 수 없는 목표이다. 나는 흔히 ‘정확한 용어사용법’이라고 지칭되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정의(定義: definitions)를 신뢰하지 않으며정의가 정확성을 증가시킨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정확성과 관련된 가식적인 용어사용법과 사이비-정확성을 특히 혐오한다. 언급될 수 있는 것은 항상 점점 더 간단하고 명징하게 언급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3) 전문가의 권위: 나는 전문성과 전문가를 믿지 않는다. 전문가를 너무 존경함으로써 우리는 배움이라는 공동 재산, 이성주의적 전통, 그리고 과학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과학에는 - 혹은 철학에는 - 유일한 한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와 대면하고 그 문제가 지닌 아름다움을 보고 문제와 사랑에 빠지는 것; 문제와 결혼하는 것, 죽음이 당신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문제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 당신이 또 다르고 훨씬 더 매혹적인 문제를 대면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당신이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나 당신이 해답을 얻는다할지라도 여러분은 환호를 지르며 아마도 어렵지만 매혹적인 문제아들로 구성된 전체 가족의 존재를 발견할 것인데 그들의 복지를 위하여 여러분은 목표를 지니고 당신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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