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비판적 접근
1 장
귀납법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관해서는 아무도 그 진리를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신(神)들에 관해서도,
내가 언급하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연히 사람이 완벽한 진리를 말한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짜인 추측의 그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perfect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제노파네스(XENOPHANES)
이 소개의 장에서는 귀납법 문제가 현재의 글의 후속편인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보다 더 완벽하고 더 넓은 환경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나는 내가 의식하고 있는 귀납법의 보다 흥미로운 파문 모두를 토론할 것이다.
2절에서 나는 나의 지식론에 대하여 개괄하려고, 귀납법 문제를 다시 설명하려고, 그리고 귀납법 문제의 해결을 다시 진술하려고 노력한다. 이 해결이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을 지닌 견해들에 ㅡ 주로 형이상학적 견해들 ㅡ 대한 토론은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의 난제들.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자에 의한(Difficulties of Metaphysical Realism. By a Metaphysical Realist)’라고 제목이 붙은 16절까지 진행된다.
2장과 3장은 (17절에서 26절까지) 구획설정의 문제(the Problem of demarcation)와 ㅡ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 ㅡ 관련된다. (나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구획설정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구획설정의 문제와 구획설정에 대한 시험가능성 기준에 의한 구획설정 문제의 해결책이 철학의 경계선을 멀리 초월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3장은 (27절에서 32절까지) 입증의 문제(the problem of corroboration)와 관련되고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라는 전문적 용어의 도입과 관련된다. 과학철학에서 존재하는 문제 상황을 고려하여 나는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흥미롭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이유인즉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과학적 귀납법이 우리가 가설의 개연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광범위한 잘못된 믿음을 수정하기 때문이다.
1. 해외의 당혹에 처한 과학자.
내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약칭하여 L.d.F) 출판한지 약 1년 후인 1935년 가을, 런던에 처음 온지 오래되지 않아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 초대를 받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칸트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 내가 오랫동안 존경했는데, ‘경험주의의 한계(The Limits of Empiricism)’에 관한 논문을 읽었다. 우리의 경험적 지식이 귀납법에 의하여 습득되고 흄(Hume)의 비판력에 의하여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믿어서 러셀은 반대로 귀납법에 근거할 수 있는 어떤 귀납원칙을 상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 원칙이 채택되면 경험주의의 한계가 드러날 원칙. 러셀의 의견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1절에서, 옳던 그르던, 내가 칸트에게 귀속시켰던 의견과 거의 동일했다.
토론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기에 나는 경험주의는 진정으로 신뢰할지라도 ㅡ 러셀이 수용할 용의가 있었던 자체에 칸트식 한계를 부과하지 않는 경험주의 ㅡ 귀납법은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가 별로 없어서 모든 능력을 다해서 날카롭게 설명했던) 이 발표는 청중들에게 농담으로 수용되었는데 그들은 상냥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는 모든 문제는 과학적 지식이란 특히 엄정하거나 확실하거나 위엄 있는 종류의 지식이라는 그릇된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제안했다. 이 발표도 처음 발표와 동일한 반응을 받았다. ‘안다(know)’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고 내가 알 때마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진지하게 믿는다할지라도, 비가 내리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발표를 마쳤다. 말의 이런 의미에서 ‘지식’은 항상 ‘사실이고 확고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안다(to know)’는 게다가 우리의 지식이 사실이고 확고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과 같은 것은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은 과학적 노력의 결과들을 ‘과학적 지식’이라는 관습적 명칭을 붙이고자 우리가 결정한다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은 지식의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높은 등급의 확고함이나 확실성에 의하여 구분되는 종류는 특히 지식의 종류가 아니다. 반대로 과학적 비판의 높은 기준으로 측정되면 ‘과학적 지식’은 완벽한 짐작으로 항상 남았다 ㅡ 짐작이 비판과 실험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할지라도. (확률이라는 용어가 확률계산이라는 의미로, 예를 들어, 케인즈나 제프리즈[Jeffreys]에 의하여 용어에 부여된 형태로 사용된다면 과학적 지식은 심지어 ‘확률’의 긍정적 등급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과학적 지식은 짐작과 가설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하기만 하여도 우리는 귀납원칙이나 경험주의의 한계를 상정할 필요도 없이 귀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발표를 끝냈다.
나의 짧은 발표는 잘 수용되었는데 만족스러웠지만 몇 가지 잘못된 이유로 인하여 당혹스러웠다. 이유인즉 나의 발표는 과학에 대한 공격으로서,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과학에 대하여 다소 우월한 태도의 표현으로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함축적으로 대문자 S로 시작하는 과학과 과학의 발표를 복음서의 진리로서 기꺼이 수용하는 과학 헌신주의자들 중 몇몇을 공격했다. 그러나 물론 나는 러셀이, 과학에 대한 깊고도 비판적인 이해력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지녀서, 그런 헌신주의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문자 S를 지닌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내가 말한 것에 함축되어 있다할지라도, 나의 주요 요점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청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희망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소위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짐작이나 추측으로만 구성된다면 이 상정(想定)은 경험주의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귀납법의 문제를 ㅡ 칸트에 의하여 ‘흄(Hume)’의 문제로 지칭된 ㅡ 해결하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귀납원칙을 채택하여 그 원칙에 선험적 타당성을 귀속시키지 않고도. 왜냐하면 추측은 ‘관찰로부터 유도되지’ 않는다 이기 때문이다 (비록 추측이 물론 관찰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시될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귀납법에 대한 흄의 논리적 비판을 지체 없이 (그리고 러셀의 경험주의의 한계 없이) 수용하게 되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탐구를 지속하면서 귀납적 논리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심지어 확률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게 된다.
나의 요점인 이것은 실종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요점이 다른 것이 될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귀납적 방향으로 계속 생각한다면 ㅡ 게다가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ㅡ ‘나는 귀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와 같은 언급은 ‘나는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다’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나는 또한 말로써 ‘나는 과학의 위대성을 믿지만 과학의 방법이나 과정이 어떤 의미에서도 귀납적이라고 믿지 않는다’로 시작했더라면 더 잘 나의 의미를 전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과학(science)’대신에 ‘과학(Science)’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내가 직관과 관련된 어떤 원칙이나 직관주의, 혹은 아마도 어떤 형태의 과학적 권위주의를 지지하고 싶어 한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두 가지 ‘주의(isms)’를 방금 사용하고, 심지어 나를 가장 동정하는 철학자 친구들 몇 명에 의하여 철학을 ‘주의(isms)’와 관련하여 토론하는 나의 나쁜 버릇 때문에 내가 자주 꾸중을 들었다고 나는 아마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isms)’를 언급하지 않고도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설명할 수만 있고, 우리의 논증을 서술할 수만 있고, 그리고 끝장을 낼 수만 있다면 더 솔직할 것이라고 나는 인정한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다. 그러나 나의 당혹스러운 경험은 왜 이 방법이 항상 작동하지는 않는지를 예시한다. 우리가 완전히 열린 생각에 전념하는 적은 없다. 아무리 청중이 열린 생각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청중은 어쩔 수 없이, 비록 다만 잠재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연결된 이론들과 관점들, 그리고 심지어 세상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세상을 알려고 배우는 방법들에 대한 기대를 간직한다. 청중은 견해를 채택했다; 통상적으로 전형적인 견해들: ‘주의(isms)’.
우리들 대부분은, 특히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많은 숫자의 이론들을 의식적으로 지니고 있고 게다가 비판적인 검토를 거친 후에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론들을 논증에서 옹호하고 훌륭한 논증이 그 이론들에 반대하여 제기된다면 그 이론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소 무의식적이어서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이론들을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무비판적으로 지닌 이론들은 흔히 지속적으로 다른 이론들을 의식적으로 지니는 데 대한 가장 강력한 이유를 포함하고 있다. 경우가 그렇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려졌다: 베이컨은 그런 무의식적 상정(想定)을 우상으로서 그리고 편견으로서 묘사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대화 상대방에게 그 상대방이 지닌 특정 견해들이 그 상대방이 전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때때로 심지어 상호간에 충돌을 일으키는 이론들이나 관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함을 깨닫도록 자주 만든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파메니데스(Parmenides)가 ‘인간(mortals)’이 무비판적으로 지닌 망상적 견해에 대한 말한다. 가장 오래되고 더 흥미롭고 아마도 더 중요한 철학의 임무 중 한 가지 임무는 그런 ‘태도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고 그런 태도들이 포함하고 있는 이론들이나 견해들을 ㅡ 특히 무비판적으로 당연시 여겨지는 이론들이나 견해들 ㅡ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공동의 상정에 의하여, 공동의 선호에 의하여, 혹은 공동의 혐오에 의하여 연관된 관련 견해 덩어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흔히 발견된다. 분명히 이 태도들이나 관점들이나 견해 덩어리들에게 명칭을 부여하는 일이 흔히 편리하고 심지어 필요하다. 그래서 ‘주의(isms)’가 생긴다.
‘주의(isms)’가 현대 철학에서 유행을 탈피했다는 것, 그리고 주의나 유사한 명칭들을 사용하는 것은 나쁜 취향의 징표로 느껴진다는 것은, 이론들이나 태도들이나 견해 덩어리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유행을 탈피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유행, 특히 철학에서의 유행은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유행은 자체로 ‘주의(isms)’일뿐이기 ㅡ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주의(isms)’ ㅡ 때문에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귀납법과 관련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과 심지어 몇몇 과학자들은 귀납법이 일반상식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흔히 ‘귀납적 과정’으로 불리는 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거부될 수 없다고. 이것은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래 3절 참조). 그러나 우리는 아무튼 일반 상식적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철학자들은 탁자와 의자, 혹은 운석, 혹은 (기계 안이나 밖 양쪽에 있는) 혼령, 혹은 분석적 서술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매우 인내하며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과 ‘주의(isms)’에 대한 토론은 귀납적 과정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토론과 비교하여 철학에 거의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비판적으로 토론하겠다. 아마도 귀납적 과정이 ㅡ ‘귀납적 논리’ ㅡ 존재한다는 상정은 결국 편견이어서 정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단지 신화이자 그릇된 ‘주의(isms)’이다 (‘귀납법’).
귀납법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왜 ‘주의(isms)’가 유행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유인즉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주의(isms)’는 귀납법에 대한 위험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이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은 ㅡ 당신의 정신을 순화하라 ㅡ 순진했다. 그래서 귀납주의자들에게는 시선을 돌리거나 아니면 ‘주의(isms)’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더 나은 듯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수용된다면 분명히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이 이론들은 흔히 우리의 언어에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어휘뿐만 아니라 그 언어의 문법적 구조에도 포함된다. 이것은 내가 아는 바,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혀졌는데 당시 러셀은 많은 철학적 이론들이 ‘모든 명제는 주어-술어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도-유럽 언어의 문법적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정인 그릇된 상정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나중에 유사한 교설이 벤자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에 의하여 전개되었는데 그는 더욱 특히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우리의 언어에 의존함을 강조했다.
언어에 관한 이 사실들은 다음의 급진적인 결론을 옹호하는 데 때때로 사용된다.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우리 언어의 포로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포함되는 이론들과 (예를 들어 본질에 대한,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련해서가 아니면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ㅡ 예를 들어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ㅡ 우리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비판적 토론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서 실행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적 토론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ㅡ 감옥 안에 ㅡ 남을 것이다. 다른 구조의 새로운 언어를 ㅡ 본질적으로 우리의 옛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될 수 없는 언어 ㅡ 배움으로써만 그리하여 새로운 문화와의 충돌과 새로운 문화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아마도 더 큰 감옥인 또 다른 감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옥에 갇히는 교설에는 많은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 결과들은 과장되어 있다. 문화충돌로 야기되는 도움은 무한히 귀중할지라도, 우리는 때대로 문화충돌 없이도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비판적 노력을 통하여 우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벽 이것저것을 허무는 데 성공할 것이다. 러셀은 이 감옥의 벽 하나를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발견하여 의식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지적(知的)인 것이기 때문에 이 벽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벽들을 허무는 것에 해당한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주로 감옥의 벽에 대하여 우리가 지적(知的)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러셀의 발견과 감옥의 벽 하나를 결과적으로 허문 것이 그를 ㅡ 또는 우리를 ㅡ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낡은 벽 몇 개는 여전히 서있는데 바로 그 벽들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주어-술어 문법이 책임을 져야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벽의 파괴도 우리가 이제 탈출하여 열린 공간으로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다 넓은 감옥으로 (관계들의 언어라는 감옥) 탈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미리 부과된 한계 없이 보다 넓은 감옥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훨씬 더 넓은 또 다른 감옥으로 탈출함으로써 원칙적으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지적(知的)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 종신형은 감당할만한 선고일 뿐만 아니라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흥미진진한 기대를 여는 선고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적(知的) 삶에는 가치가 있는 임무.
지적(知的)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에 관한 몇 가지 완벽하게 유사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언어로써 뿐만 아니라 언어 내부에서의 전제나 이론이나 관점으로 구성된 다양한 체계로써 (그것들은 ‘전체 이데올로기[total ideologies]’로 지칭되었다) 감옥에 갇힐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비판도 할 수 없고 초월할 수도 없을 전제들. 이 모든 것들은 인정될 수 있다할지라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토론은 참석자들이 기본원칙에 합의하지 않거나 공통적인 배경이나 ‘개념적 구조(conceptual framework)’를 공유하지 않으면 결실을 맺을 수 없다고 흔히 언급된다.나는 그런 주장의 진실성을 부인한다. 토론이란 참석자들이
모든 요점에 관하여 합의를 한다면 토론이 참석자들에게 매우 만족스럽겠지만 덜 유쾌한 상황에서도 토론은 더 유용할 것이다.
이 다양한 믿음 체계를 의식하게 만들어 탐색적 검토 이후에 우리가 이용 가능한 가장 훌륭한 믿음 체계를 임시적으로 선택할 것이 철학적 비판의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전제로 구성된 일관적인 체계를, 다시 말해서 (귀납주의나, 실증주의나 직관주의와 같은) ‘접근방법’이나 ‘주의(isms)’를 이해하고, 검토하고, 비교하고, 그리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의 그 모임에서 내가 ‘귀납주의’라고 불렀던 접근방법이나 태도인,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해석을 나의 말에 부과하게 되어있던 태도를 분석하고 비판할 기회를 내가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해결책을 설명하려는 나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우할 모든 새로운 개념들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어떤 구조를 개발하는 경향을 지닌다; 통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주치는 새로운 개념을 심지어 자신들이 지닌 구조에 어울리는 언어로 번역한다. 철학이 지닌 가장 특징적인 임무 중 하나는, 필요하다면, 구조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수용되었든 아니든, 매우 많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그에 대한 비판이 불합리하거나 불성실하다고 느껴질 소신들을 공격하는 일이 필요해질 것이다. 구조 자체가 공격을 당할 때마다 그 구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그들 자신들이 채택한 구조의 내부에서 공격을 해석하여 논박하려고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조를 겨냥한 비판적 논증들을 그 구조에 어울리는 언어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 치명적 왜곡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주의(isms)’와 관련한 토론은 구조 자체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강조함으로써 어느 등급까지 이것을 감소시킬 것이다.
2. 비판적 접근방법: 귀납 문제에 대한 해결책
나는 소신을 신뢰하지 않는다(I do not believe in Belief).
E. M. 포스터(FORSTER)
I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의 모임 이후 경과한 여러 해 동안에 내 자신의 접근방법이자 내 자신의 구조가 다른 것들보다 더 오해를 받기 쉬울 것이라는 점과 ㅡ 내 자신의 접근방법이자 내 자신의 구조가 널리 수용되고 무의식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과 더 심각하게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점 ㅡ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나의 접근방식을 비이성주의, 회의주의, 혹은 상대주의의 어떤 형태와 동일시하여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나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의심하여 지식론에 대한 내 자신의 접근방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혁명적이며 그런 이유로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최근의 일이다. 이 의심은 내 자신의 접근방법과 철학에서의
문제 상황에 대하여 그 방법의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에서 나타났다; 나의 친구 W. W. 바틀리(Bartley), III세가 나에게 제안했던 방식. 그의 견해들은 본질적으로 두드러진다.그러나 그의 견해들은 나의 위치와
관련하여 어떤 위치가 거의 나타나게 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식에 관한 철학의 핵심적 문제는, 적어도 종교개혁 이후,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우리는 경쟁하는 이론들과 신념들이 지닌 두루 영향을 미치는 주장을 판정하여 평가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을 우리의 첫 번째 문제라고 부르겠다.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두 번째 문제를 유발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이나 신념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반대로 이 두 번째 문제는 몇 가지 다른 문제들과 섞여있다: 정당화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리고 더욱 특히: 이성적으로 우리의 이론들이나 신념들을 정당화하는 일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근거를 댐으로써 ㅡ 관찰의 도움과 같은 ‘긍정적 근거들’ (내가 명칭을 부여할 바와 같이); 다시 말해서, 이론들이나 신념들이 사실이라고 혹은 적어도 ‘개연적’이라고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간주하기 위한 근거들. 분명히 첫 번째 문제에서 두 번째 문제로 이전하는 것을 후원하는 언급되지 않고 분명히 무해한 전제가 있다: 이른바 경쟁하는 주장들 가운데서 어느 주장이 긍정적 근거들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고 어느 주장이 될 수 없는지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판정한다는 것.
이제 바틀리는 나의 접근방법이 첫 번째 문제는 해결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문제의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킨다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내가 두 번째 문제를 무관한 것으로서, 그리고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들을 잘못된 것으로서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첫 번째 문제에서 두 번째 문제로 이어지는 전제가 옳지 않은 것으로서 거부한다. 나는 (바틀리가 주장하는 바, 아마도 회의주의로 쫓겨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전 합리주의자들과 다르게) 우리가 지닌 이론들이나 신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긍정적인 정당화나 어떤 긍정적인 근거를 내놓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여하한 긍정적인 근거도 제시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우리가 그런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그런 근거를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이성적이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은 믿음지만 장점이 없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내가 ‘장점이 없는[without merit]’이라고 쓴 곳에 ‘근거가 없는[baseless]’이라는 단어를 막 쓰려던 참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가 내 자신의 접근방법 안에서 공격을 당하는 무의식적 전제에 의하여 얼마나 많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오직 장점이 결핍된 견해만 틀림없이 근거가 없다고 ㅡ 근거가 없거나 정당화되지 못하거나 지지를 못 받는다는 의미에서 근거가 없는 ㅡ 비판도 없이 전제된다. 반면 나의 견해로는 모든 견해들이 ㅡ 좋고 동시에 나쁜 ㅡ 이 중요한 의미에서 근거가 없고, 터무니없으며 정당화되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한다.)
나의 접근방법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한 정당화라는 핵심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ㅡ 항상 이해되었던 바와 같이 ㅡ 비합리주의자나 회의론자들의 해결책만큼 명백하게 부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데 타당한 긍정적인 근거들을 제공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 유사할지라도 틀림없이 그 문제와 날카롭게 구분되는 또 다른 세 번째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긍정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데서 회의론자 및 비이성주의자 양자 모두와 나는 다르다. 이 세 번째 문제는 한 가지 이론이 또 다른 이론에 비하여 선호될 수 있는지의 ㅡ 그리고 선호될 수 있다면 왜 ㅡ 문제이다. (나는 그 이론이 진리에 대하여 더 근접한 근사치라는 의미와 우리에게는 그 이론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추측할 근거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이론이 선호될 수 있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명백하게 긍정적이다. 우리는 자주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에 비해서 선호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 근거들은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지금까지 비판을 더 잘 견디었다는 것과 더 잘 견딘 방법을 지적하는 것에 놓여있다. 나는 그런 근거들을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지닌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제시되는 저 긍정적 근거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런 근거들을 비판적 근거들로 지칭하겠다.
비판적 근거들은 이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지금까지 비판을 견디어냈다는 사실은 그 이론이 실제로 참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한 여하한 근거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록 비판적 근거들이 이론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 근거들은 우리가 그 이론을 선호하는 것을 옹호하는 데 (그러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제안된 모든 다른 이론들이나 다른 이론들 몇 가지보다 그 이론을 사용하겠다고 우리가 결정하는 데. 그런 비판적 근거들은 물론 우리의 선호가 추측성 이상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비판적 근거들이 그 이론에 반대하여 말하거나 유망하게 제시되어 비판적 토론의 재개를 요구한다면 우리의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선호를 위하여 주어진 근거들은 물론 정당화로 (평범한 언어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비판된 의미로서는 정당화가 아니다. 우리의 선호는 우리의 토론과 관련된 현재 상태에 관해서만 ‘정당화’된다.
나중까지 이론들을 위한 선호 기준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연기하고 나는 이제 생겨난 새로운 문제 상황에 대한 바틀리의 견해를 제시하겠다. 그는, 고전적 정당화 문제에 부정적 해결책을 내놓은 후에 새로운 비판의 문제점인 내가 긍정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문제로 그 고전적 정당화 문제를 내가 대체했다고 말을 함으로써, 그 문제를 매우 두드러지게 기술한다.
정당화 문제로부터 비판의 문제로의 이 전환은, 바틀리가 제안하는 바, 근본적이다; 그리고 그 전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내가 포함된다) 정당화의 문제를 지식론의 핵심문제로서 수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오해를 낳는다.
이유인즉 바틀리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이나 신념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은 지식론의 겉으로 보이는 임무라고 모든 사람들이 전제했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모든 철학은 정당화주의적 철학이었다. 합리주의자들과 경험론자들과 칸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회의론자들과 비이성주의자들 또한 이런 전제를 공유했다. 회의론자들은, 우리는 우리의 이론이나 신념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여, 지식 탐구에 대하여 파산을 선고한다; 동일한 근본적인 수용 때문에 비이성주의자들이 근거를 찾는 ㅡ 다시 말해서, 이성적으로 타당한 논증들을 찾는 ㅡ 탐색에 대하여 파산을 선고하고 비이성적 출처에서 나오는 권위와 같은 권위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우리의 지식, 즉 더 정확하게 우리의 신념들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회의론자들과 비이성주의자들 모두는 정당화의, 혹은 긍정적 근거의 존재의 문제는 근본적이라고 전제한다: 그 사람들은 모두는 고전적 정당화주의자들이다.
바틀리는 나의 접근방법이 사실상 정당화주의와 전혀 다를지라도, 통상적으로 어떤 형태의 정당화주의로 오해되었다고 논평한다. 왜냐하면 내가 고전적 정당화 문제에, 이런 면에서 회의론자들과 비이성주의자들을 닮아서, 부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동시에 나는 고전적 문제를 제치고 회의론적도 아니고 비이성주의적도 아닌 해결책을 허용하는 새로운 핵심적 문제로 그 고전적 문제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새로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우리가 지닌 지식이 ㅡ 우리가 지닌 추측성 지식 ㅡ 성장할 것이라는, 그리고 그 지식이 이성을 이용함으로써 성장할 것이라는 견해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논증을 이용함으로써.
바틀리가 제시하는 바, 나의 위치는, 고전적 정당화의 문제가 핵심적 위치에서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문제가 무의미한 것으로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먼저 이해되지 않으면, 오해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화주의자에게는 이것이 보이기 매우 어렵다. 까닭인즉 정당화주의자는 흄(Hume)처럼 다음과 같이 논증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왜 당신은 사실과 관련한 특정 문제를 신뢰하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어떤 근거를 나에게 말해야 한다;...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믿음이 전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E. M. 포스터처럼 나는 신념을 믿지 않는다: 나는 신념에 관한 철학에 흥미가 없으며, 신념과 신념의 정당화, 혹은 근거, 혹은 합리성이 지식론의 주제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흄의 이 글에서 우리가 ‘신뢰한다(believe in)’는 말을 ‘관하여 이론이나 추측을 제안한다(propose a theory or a conjecture about’로 바꾸거나 ‘당신의 신념(your belief)’을 ‘당신의 추측(your conjecture)’로 바꾼다면 그의 선언은 힘을 잃는다. 이유인즉 자신들의 추측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듣고 충격을 받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foundation)’ 즉, 정당화를 지닌다는 것은 신념에게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측이나 가설에 대하여 요구해야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적어도 흄이 (나의 표현 ‘긍정적 근거에 의한 정당화’에 상응하는) ‘근거(found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에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예를 들어 ‘물리 이론의 근거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화주의적 말이거나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물리 이론들이란 추측이거나 가설들이어서 혁명적 변화에 종속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우리는 아마도 물리 이론들의 ‘근거’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ㅡ 물리 이론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신념에 대해서 그러한 바와 같이 ㅡ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가설을 제시하는 데 대한, 그리고 그 가설을 비판적 토론에 부치는 데 대한 어떤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당화하는 근거들이 아니라 ㅡ 더 비판이 가능하고 더 엄격하게 비판을 받은 이론들을 얻는 것과 같은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ㅡ 왜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을 제시하는지에 대한 설명들의 성격에 더 부합한다. 이 근거들과 그 근거들이 지닌 논리적 역할은 흄이 염두에 두었던 것들과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참이라면 우리가 해결하고자 원하는 문제를 해결할 것임을 (케플러 법칙들을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했던 뉴튼의 이론처럼) 지적함으로써 가설을 제시하는 데 대하여 완벽하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근거는 가설을 제공하여 그 가설이 우리의 비판적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추천하는 데 매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근거는 그 가설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한 근거는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근거는 심지어 그 가설을 임시적으로 수용하거나 심지어 그 가설을 선호하는 데 대한 근거도 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문제를 훨씬 더 잘 해결할 다른 가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II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흄의 인식론적 문제가 ㅡ 긍정적인 정당화 근거를 제시하는 문제 즉, 정당화의 문제 ㅡ 왜 우리가 또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한 이론을 선호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비판적 근거들을 제시하는 전혀 다른 설명의 문제의 의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이론들 중에서 어느 이론이 ㅡ 비교적으로 ㅡ 선호될 이론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가설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문제에 의하여 대체될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정당화주의자는 내가 실제로 한 문제를 또 다른 문제로 바꾸었다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우리가 또 다른 이론과 비교하여 한 이론을 선호하는 근거들’ 대신에 내가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더 낫다고 믿는 근거들’이라고 말했을 수 있다고 정당화주의자는 먼저 주장할 것이다. 이 요점이 언어적인 한 나는 기꺼이 그 요점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내가 신념들에 대하여 철학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할지라도 나는 단어들에 관하여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정당화주의자가 이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근거들’이, 가령 이 이론들 중 첫 번째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데 대한 근거들과 동일한 특징을 아마도 지니지 않음을 인정한다할지라도 정당화주의자는 여전히 그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근거들’이 ‘긍정적인 근거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근거들’이 어떤 이론의 ㅡ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이론이 두 번째 이론보다 더 낫다는 이론의 (그 이론이 지칭되는 바와 같이 ‘초이론[meta-theory]’) ㅡ 진리를 신뢰하는 데 대한 근거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주의자들은 내가 실제로 정당화 문제를 다른 문제로 뒤바꾸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정당화주의자는 자신이 인정한 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일 것이다. 먼저 A이론이 B이론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초이론과 A이론이 사실상 참이라고 (혹은 ‘개연적’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초이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초이론들 중 한 가지 초이론을 뒷받침하는 타당하거나 중대한 근거들로서 간주될지도 모르는 논증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경쟁하는 설명적 이론들이나 추측들을 (가령 물질의 구조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우리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추측 a가 추측 b보다, 심지어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다른 추측들보다 크게 우월하다고 말을 함으로써 상황을 공정하게 흔히 요약할 수 있다: 추측 a가 이것들 중 어떤 것보다 진리에 대하여 더 나은 근사치로 보인다고 말을 함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추측 a가 심지어 실제로 참일 것이라고 말을 함으로써).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추측 a가 이 분야에서 생산될 최고의 추측이라거나 추측 a가 실제로 참으로 보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초이론 중 하나는 우리 행하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를 공정하게 요약하는 것 이상을 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단지 부정적이고, 단지 비판적일 것이다; 반면 다른 초이론은 일반적으로 전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초이론이 우리가 지닌 신념이나 우리가 지닌 직관적 믿음의 현재 상태를 요약할지라도.)
두 번째로 다시 전통적 의미에서 또 다른 이론보다 한 가지 이론을 선호하는 것이 올바른 선호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규명하는 시도가 나에게는 없다. 정당화의 문제는 변화하지만은 않는다: 그 문제는 폐지된다. 초이론은 또한 긍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초이론은 추측성이다 ㅡ 그래서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III
더 중요한 반대론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정당화 문제를 또 다른 문제로 대체한 나의 주장은 회의론자들이나 비이성주의자들의 주장들과 다른 해결책들을 내놓았다는 나의 주장처럼 근거가 없다고 정당화주의자들은 말할지도 모르겠다. 후자(後者) 주장이 근거가 없음은 나의 답변이 상대주의와 실용주의 및 유사한 잘 알려진 관점들과 동일하거나 기껏해야 그 관점들의 변종으로 판명된다고 정당화주의자가 주장할 사실로부터 보일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한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그 이론이 어떤 이론보다 더 나은지 혹은 더 나쁜지의 문제로 우리가 대체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 나는 분명히 진리에 관하여 상대주의적 위치를 채택한다고 정당화주의자는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후자(後者) 질문은 이 이론들의 성공의 도움을 받아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내 자신을 실용주의자로서, 또는 아마도 심지어 규약주의자(conventionalist)로서 폭로한다 (정당화주의자는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반대론은 내가 주장하지 않는 정당화주의적 교설들이 나에게 속한다고 함축적으로 간주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더 나은지의 문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한 이론이 어떤 실용적 의미에서 또 다른 이론보다 더 성공적일 때마다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두 가지 요점 모두는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나의 자세는 이러하다. 나는 진리 탐색이 ㅡ 혹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인 이론 탐색 ㅡ 전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이성적 비판은 어느 이론이 사실이라는 그래서 그 이론이 고안되어 해결하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나은지의 문제로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한 이론이 지닌 진리를 위하여 타당한 근거들을 (긍정적인 근거들) 만들어낼 수 있는지의 문제를, 우리가 한 이론이 참인 것에 대항하는 혹은 한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들이 지닌 진리에 대항하는 타당한 근거들을 (비판적 근거들) 만들어낼 수 있는지의 문제로 나는 대체한다. 게다가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더 낫다거나 우월하다거나 기타 등등으로 기술하는 것은 그 이론이 진리에 더 근접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나는 주장한다.
진리는 ㅡ 절대적인 진리 ㅡ 우리의 목표로 남는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의 비판에 대한 함축적 기준으로 남는다: 거의 모든 비판은 비판을 당하는 이론을 반증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 (한 가지 중요한 예외는 한 이론이 관계가 없다는 것을 ㅡ 그 이론이 고안되어 해결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 ㅡ 밝히려고 시도하는 비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던 참인 이론을 실제로 우리가 발견했음을 밝히는 근거들을 (긍정적인 근거들) 우리가 제시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참인 이론을 (참이면서 관련이 있는 이론) 탐색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근거들을 ㅡ 다시 말해서 훌륭한 비판적 근거들 ㅡ 가질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진보했다는 것. 이유인즉 첫째로 특정 이론이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황에 따라서 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새로운 이론이 앞선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근접한다고 믿을 몇 가지 임시 근거들을 우리가 발견했을 것이다.
덜 추상적이 되기 위하여 나는 역사적 사례를 내놓겠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토론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자들 중에서 아무도 아이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 참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특수 상대성이 기껏해야 근사치가 될 따름이라고 (이유인즉 특수 상대성이 가속이 붙지 않은 운동에만 타당하기 때문에) 지적했다.그래서 그는 심층적 근사치인 일반
상대성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는 이 이론도 참일 수가 없고 단지 근사치임을 지적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더 나은 근사치를 탐구했다.아인슈타인의 태도에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흔적은 없다: 그는 진리를 연구했고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들을 ㅡ 비판적 근거들 ㅡ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 자신이 진리를 향하여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음을 보여주는 ㅡ 자신의 이론들이 이전 이론들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했음, 자신의 이론들이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근접했음 ㅡ 비판적 근거들을 제시했다.
이 사례는, 정당화 문제를 비판의 문제 갈음하면서 우리는 사실과 일치로서의 고전적 진리론이나 진리를 우리의 비판기준의 하나로 수용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다른 가치들은 우리가 지닌 문제, 그리고 설명력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내가 흔히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심지어 언제 진리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할지라도, 나는 규제적 개념(regulative idea)으로서의 절대적이거나 객관적 진리라는 고전적 개념을 유지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미치지 못할 기준으로서. 이 이룩된 변화는 진리의 개념에 관련되지 않지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여하한 주장과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어떤 이론이 지닌 진리를 확립하기에 충분하거나 심지어 매우 근접하게 충분한 논증이나 근거들을 사용할 수 있게 지니고 있다는 주장.
우리가 논증이나 근거를 이용하여 우리의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뒷받침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판적 사고에는 여전히 이론들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판적 토론의 결과로 우리의 이론들 가운데서 비판을 할 수 있고 차별을 할 수도 있다. 그런 토론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참인 이론과 거짓인 이론을 구분할 수 없다 (확신적으로, 혹은 거의 확신적으로) 할지라도 우리는 때때로 거짓 이론과 참일지도 모르는 이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이론에 대하여, 현재 우리의 비판적 토론 상태에 비추어 그 이론이 제출된 다른 이론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보인다고 흔히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흥미라는 관점에서 더 훌륭하게; 혹은 진리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에서 훌륭하게.
그리하여 나는 이성의 비판적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부정적인) 기능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이성적 추론은 통상적으로 생각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더 강력하고 덜 비효율적이라고 강조한다. 이성적 비판은 정말로 우리가 배우고 지식에서 성장하여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수단이다.
IV
바틀리의 간단한 설명과 ㅡ 정당화가 비-정당화적인 비판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다는 것 ㅡ 다양한 정당화주의적 철학에서 비판을 목표로 하지 않는 비판적 철학으로의 전환에 포함된 초점의 변화에 대한 그의 강조는 매우 계몽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독자들 또한 이득을 볼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바틀리의 설명을 제시하기로 결심했다. 바틀리의 설명은 왜 비판이라는 바로 그 개념이 정당화주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자주 오해를 받는지를 내가 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정당화주의 철학자들에게는 타당한 비판이라는 개념을 깎아내려 어떤 신념들을 정당화하려는 어떤 시도들의 무효함을 증명하는 좁은 임무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비록 나는 비이성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로, 여하한 이론이나 신념은 엄격하고도 탐구적인 이성적 비판에 부쳐질 것이고 또 부쳐져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이론이나 신념을 논박할 근거들을 ㅡ 이성적 논증들을 ㅡ 찾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바틀리의 설명은 또한 다양한 비이성주의자들이 이성주의와 우리들의 신념을 정당화하려는 이성주의적 시도에 반대하여 언급했던 것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상 나는 합리성을 지닌 태도를 구분하는 것은 단지 비판에 대한 개방이라고 제안했다.
비이성주의자들은 우리가 이성과 관찰을 제외한 ‘지식의 근원들’을 ㅡ 예를 들어 영감이나 동정적 이해 ㅡ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때 전적으로 옳다; 혹은 전통인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지식의 근원’이고 그리고 전통이 지닌 분명한 오류성 때문에 이성주의자들에 의하여 흔히 무시당한다.그러나
여하한 종류나 출처나 근원의 지식은 있으며 그런 지식은 이성적 비판을 초월하거나 이성적 비판으로부터 제외된다고 제안할 때 비이성주의자들은 위험스럽게 오류를 저지른다.
V
동등하게 오류를 저지르는 것은, 이성적 비판이란 어떤 비-증명가능한 추정에 또한 틀림없이 항상 근거하여 그 타당성이 본질적으로 이 추정에 관련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이성적 비판과 같은 처지라는 견해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위치 A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확립하기가 불가능한 위치 B와 관련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견해; 그리하여 B와 관련한 A에 대한 여하한 비판도 결정적이 ㅡ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물론 ㅡ 아닐 것이다.
이 논증의 개별적 구성요소 대부분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결론이 전혀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판에서 우리는 흔히 정당화될 수 없으면서 증명될 수 없는 추정들을 이용하여 연구를 함을 나는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판은 정말로 결정적이 아니다. 그러나 여하한 종류의 비-증명가능성으로 인하여 비판적 이성주의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판적 이성주의자의 비판적 논증은 ㅡ 그가 자신의 비판을 이용하여 비판중인 이론들과 꼭 마찬가지로 ㅡ 추측성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매우 간단하다. 정당화주의적 논증은, 긍정적 근거를 퇴행적으로 낳으며, 결국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는 근거에 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논증은 무한회귀[infinite regress]를 유발할 것이다.) 그래서 정당화주의자들은 그런 ‘궁극적 추정’은 틀림없이 어떤 의미에서 논증을 초월하여 비판될 수 없다고 통상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나의 접근방법에서 제공되는 비판적 비판인 비판은 여하한 의미에서도 궁극적이 아니다; 나의 비판들은 역시 비판에 개방되어 있다; 나의 비판들은 추측성이다. 우리는 나의 비판을 무한히 지속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나의 비판들은 재검토와 재고찰에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회귀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유인즉 어떤 것이라고 증명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확립하려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 추정을 할 필요가 없다. 무한회귀를 유발하여 토론의 궁극적 용어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만 증거나 정당화에 대한 요구이다.
이 반대의견과 관련된 것은 순전히 비판적인 방법은 ㅡ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긍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그만두는 방법 ㅡ ‘내재적(immanent)’ 형태의 비판에 자체를 한정해야 할 것이라는 근거로 불가능하다는 널리 수용되는 견해이다. 비판은 자체의 전제와 추정 모두를 그리고 그것들만을 채택함으로써 내부로부터 나온 이론을 공격한다면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cism)’이라고 지칭된다; 그리고 비판은 비판받는 이론에 낯선 전제들이나 추정들로부터 나아가 외부로부터 온 이론을 공격한다면 ‘초월적 비판(transcendent criticism)’으로 불린다. 그러나 내재적 비판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된다; 왜냐하면 내재적 비판은 비판받는 이론 내부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할 수만 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에 대항해서는 성공하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논리를 상정하거나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재적은 아닐 것이라고 심지어 언급된다: 모순을 불법화하는 논리.) 그래서 일관된 이론에 대한 모든 비판,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비판은 틀림없이 ‘초월적’이라는 결론이 이룩된다. 그곳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어떤 비판도 비결정적이거나 무효한 것으로서 항상 배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ㅡ 정말로 어떤 초월적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상정들이나 전제들에게 긍정적 정당화가 주어질 수 없다면 ㅡ 주장된다. 그래서 비판과 긍정적 정당화의 방법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듯이 보일 것이다.
비판적 방법에 관한 좁은 시야와 비교적 비중요성에 대한 이 겉으로 보기에 합당한 관점은 오류이다. 그 관점은, 사고체계에 대한 모든 혹은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의 비판적 공격에서 이끌어가는 또 다른 사고체계를 채택한다는 올바른 관찰과 연결되는 듯하다. 비판이 정말로 자체의 근원이나 유도나 영감과 관련하여 ‘초월적’이 되는 경향이 있을지라도 이것은 비판이 그 용어의 논리적 의미에서 ‘초월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자기-비판적인 비판가는 자신의 비판이 지닌 초월적 근원의 흔적을 자신이 떨칠 수 없다면 자신의 비판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아마도 자신의 사고체계에 의하여 유도를 당할지라도 자기-비판적 비판가는 자신의 비판이 내재적이 ㅡ 그리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항하여 더 효과적이 ㅡ 될 때까지 자신의 비판을 변형시킬 것이다. 이유인즉 검토되고 있는 이론은 전제와 독단과 추측과 기타 등등의 체계일 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이론은 예를 들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나, 혹은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더 성공하지 못하는 것으로나, 혹은 해결될 문제를 단지 바꾸는 것, 기타 등등으로서 내재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내재적 비판은 심지어 일관된 이론 내부의 심각한 약점을 지적할 것이다. 모순 지적에 관하여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내재적 비판으로서 수용될 것인데 정확한 이유는 이론이 해결하기 시작한 문제는 앞선 이론들을 부인했던 것에 (예를 들어 실험의 결과) 대하여 일관된 설명을 내놓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판을 받는 이론을 자극하고 홀로 그 이론에 요점을 제공하는 문제 상황은, 논리적 원칙의 ㅡ 모순을 배척하는 하는 법칙과 같은 ㅡ 수용을 포함하고 (그리고 멀리 초월하고) 내재적 비판에 대하여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는 전제들이나 추정들을 항상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이론에 대한 설명을 유발하는 문제 상황이 어떤 관찰이나 실험을 설명하는 임무를 포함한다면, 다른 실험들이 그 이론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ㅡ 물론 그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실험들의 결과들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ㅡ 사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재적 비판은
가능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내재적 비판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초월적 비판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 이것은 경쟁하는 이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에 놓여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론이 약점을 보이지 않는 반면 한 이론이 약점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데에는 잘못이 없다. 반대로 이런 종류의 상호간 초월적 비판으로 인하여 결국 우리는 한 이론이 경쟁하는 이론보다 선호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선호될 수 있는 이유를 또한 말할 수 있다.
VI
내가 여기에서 기술한 비판적 접근방법은 거의 즉각적으로 흄(Hume)의 귀납법 문제에 (1739년)에 대하여 솔직한 해결책을 낳는다.
흄이 밝히려고 노력했던 것을 (내 견해로는 논리가 닿는 한 성공적이었다) 기억하자.
(i) 자연에는 모든 사람이 실제적으로 의지하는 무한한 (명백한) 규칙성들과,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과학자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많은 보편적 자연법칙들이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
(ii) 그는 귀납적 추론은 ㅡ 특이하고 관찰될 수 있는 경우들로부터 (그리고 그 경우들이 반복되는 사건으로부터) 규칙성들이나 법칙들과 같은 것으로의 추론 ㅡ 틀림없이 무효함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런 추론은 심지어 근접하게나, 부분적으로도 타당할 수가 없음을 밝히려고 그는 노력했다. 그런 추론은 심지어 개연적인 추론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추론은 틀림없이 오히려 전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아무리 관찰된 사례들의 숫자가 크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근거가 없는 상태로 항상 남는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알려진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으로, 혹은 경험된 것으로부터 경험되지 않은 것으로 (그리하여 예를 들어 과거로부터 미래로) 타당하게 추론할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자주 태양이 규칙적으로 뜨고 지는 것이 규칙적으로 관찰되었다 할지라도, 심지어 관찰된 사례의 최대 숫자도 내가 태양의 뜨고 짐에 대한 규칙성이나 법칙을 위한 긍정적 근거라고 불렀던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그 최대 숫자는 이 법칙을 세울 수도 없고 그 법칙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iii) 그는 경험에 의하여 제공되는 근거들을 제외하고 보편적 법칙에 대한 신념을 정당화하는 타당한 근거들이 있을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i)을 한 편으로 하고 (ii)를 다른 편으로 한 사이의 충돌은 흄의 문제인 귀납의 논리적 문제(the logical Problem of Induction)가 된다.
요점 (ii)와 (iii)은 다소 더 날카롭고도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재설명될 것이다.
(ii) 특이한 관찰서술로부터 보편적 자연법칙들로의, 그리하여 과학적 이론들로의 타당한 추론은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이 귀납법의 무효성 원칙이다.
(iii) 우리는 우리가 과학적 이론들을 채택하고 배척하는 것이 관찰과 경험의 결과에, 그리하여 특이한 관찰서술들에 의존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원칙이다.
이제 (i)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자. 그렇다면 귀납의 논리적 문제는 (ii)의 귀납법의 무효성 원칙과 (iii)인 경험주의 원칙 사이의 겉으로 보이는 충돌에 존재한다: 경험주의는 귀납법 없이는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지닐 수 없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흄은 (ii)와 (iii) 사이의 충돌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임을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ii)와 (iii)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하고 이성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충돌’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는 법칙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관찰로부터 ㅡ (iii)에 따라서 ㅡ 귀납법에 의하여 습득된다고 결정하여 그는, 귀납법이 이성적으로 무효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이성보다는 연상(association)에 (반복으로부터 생기는 ‘버릇[habit]’) 의존해야 함을 밝힌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도 (ii)와 (iii)을 수용하지만 나는 그것들로부터 반(反)-이성주의적인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는다. 나는 (ii)와 (iii)의 양립가능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ii)와 (iii)이 다음 원리 (iv)와도 일관적이라고 주장한다:
(iv)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을 우리가 채택하는 것과 배척하는 것이 우리의 비판적 추론에 ((iii)에 의하여 요구되는 바와 같이 관찰과 실험의 결과와 연계하여) 의존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비판적 이성주의의 원칙이다.
(i)과 (iv)가 일관적임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을 우리가 ‘채택하는 것’이 단지 임시적일 수 있음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과학적 이론들이 항상 짐작이나 추측이나 가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과학적 이론들은 진리를 자주 놓칠지라도 진리를 떠올리려는 희망으로 물론 제시된다. 과학적 이론들은 참이거나 거짓일 것이다. 과학적 이론들은 관찰에 의하여 시험될 것이고 (이 시험들을 점점 더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과학의 주요 임무이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배척될 것이다. 흄의 논증은 시험 가능성에 반대하여 말하지 않고 보편적 법칙이 관찰서술에 의하여 어긋나기 때문에 보편적 법칙을 배척하는 가능성에 반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는 제시된 법칙을 시험하는 일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관찰에 의하여 우리가 보편적 이론들을 확립하거나 정당화하거나 개연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보편적 이론에 대하여 긍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보편적 이론들은 짐작이나 추측으로 남는다 ㅡ 아마도 잘 시험된 보편적 이론들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그 보편적 이론들이 해결하는 문제들을 고찰하면 우리는 다른 이론들보다 그 보편적 이론을 선호하는 데 대하여 탁월한 근거들을 지닐 것이다 ㅡ 비록 단지 잠정적이고 임시적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은 흄이 지녔던 귀납법에 관한 논리적 문제에 완벽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해결책의 열쇠는, 심지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이론들과 심지어 실제로 참인 우리의 이론들도 항상 짐작이나 추측으로 남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이론들이 실제로 참이라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경험으로부터 알 수 없고 다른 자료로부터도 알 수 없다.
나의 해결책의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
(i) 실제과학과 이론과학 모두에서 이론들은 매우 중요하다는 견해의 수용.
(ii) 귀납법을 반대하는 흄의 논증 수용: 우리의 이론들을 신뢰하는 데 대하여 우리가 긍정적인 근거들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그 논증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러나 흄의 논증은, 우리의 이론들을 반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시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난제도 제공하지 않는다.)
(iii) 경험주의 원칙 수용: 과학적 이론들은 실험적이거나 관찰적 시험의 결과에 비추어 (비록 단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라 할지라도) 배척당하거나 채택된다.
(iv) 비판적 이성주의 수용: 과학적 이론들은 이성적 비판의 결과에 비추어 다른 알려진 이론들보다 더 낫거나 더 못한 것으로서 (비록 단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라 할지라도) 배척당하거나 채택된다.
이것이 흄의 문제에 ㅡ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 ㅡ 대한 나의 해결책을 간단하게 개괄한 것이다. 물론 그 문제에 대한 다른 설명들이 있었고 현재의 절에서 아직 충분히 분석되지 않은 문제의 부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아가 문제의 부분들과 표현들과 단계들 몇 가지를 통하여 그 문제를 추적하겠다. 이것들에 대한 분석으로 인하여 나는 여기서 설명된 바와 같은 귀납의 논리적 문제를 넘어 내가 귀납법 문제의 네 번째 혹은 형이상학적 단계로 나아간다.
귀납법 문제의 이 다양한 모습들을 추적하게 전에 우리에게는 먼저 논리적도 방법론적도 또 형이상학적도 아닌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소위 귀납법과 배움에 대한 ‘사실들(facts)’ 몇 가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3. 배움에 관한, 그리고 귀납적 방식에 관한 기록들과 함께, 소위 귀납적
과정에 대하여
1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귀납법을 신뢰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관찰의 반복에 의하여 배운다고 믿는 듯하다. 심지어 흄(Hume)도, 자연법칙은 귀납법에 의하여 확립될 수도 없고 ‘개연적’이 될 수도 없다는 자신의 위대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동물과 사람은 반복을 통하여 배운다고 단호하게 계속하여 믿었다: 반복에 의한 습관의 형성이나 습관의 강화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관찰을 통하여. 그래서 그는, 이성적으로 옹호될 수 없고 불합리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에 귀착된다할지라도, 귀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의존할만하다는 ㅡ 이성과 이성적 추론의 과정보다 아무튼 더 의존할만하고 유용하다는 ㅡ 이론을 옹호했다; 게다가 그리하여 ‘경험’은 관찰한 것을 (다소 수동적으로) 축적한 것의 불합리한 결과라는 이론.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나는 사실상 우리가 귀납적 추론을 도출하거나 지금 ‘귀납적 과정’으로 불리는 것을 사용하는 적이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오히려 시행착오라는, 추측과 논박이라는, 혹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에 의하여 규칙성을 우리는 항상 발견한다; 흄이 생각했던 것보다 규칙성의 발견을 훨씬 더 흥미롭게 만드는 방법.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우는 방법은 반복에 의하여 배우는 방법으로 잘못 이해되었다. ‘경험’은 관찰한 것들의 축적이나 연상보다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움을 통하여 습득된다. 경험은 능동적인 비판적 접근에 의하여 습득된다: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로 고안된 실험들이나 관찰들을 비판적으로 이용함로써 습득된다.
II
그리하여 나는 귀납법의 타당성이라는 논리적 문제에 대한 흄의 분석에 ㅡ 다시 말해서 귀납법의 무효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 ㅡ 동의하는 반면, 순전히 사실적 문제에 관하여 그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염려가 된다. 나는 우리가 정말로 사실상 귀납법에 의하여 진보한다는 주장이 순전히 신화라고, 그리고 이 주장되는 사실을 지지하여 주장되는 증거는 부분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부분적으로 사실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얻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의 사실관련 주장이 나의 논리적이거나 나의 방법론적이거나 나의 인식론적 교설과는 어떤 관련도 없음을 나는 서둘러 부언한다. 왜냐하면 사실관련이며 심리학적이고 역사적인 질문인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론들을 얻는가?’가, 매혹적일지라도 타당성과 관련된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나는 흄을 따른다. 정말로 이 두 가지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한 것은 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 문제들에 대하여 거의 반대가 되는 답변을 함으로써 그는 그 문제들이 완전히 구분된다는 것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흡연을 할 때 자신들의 최고 아이디어들을 얻는다고 알거나 그렇게 보인다; 다른 과학자들은 커피나 위스키를 마심으로써.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사람들은 관찰을 통하여 혹은 반복하는 관찰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얻을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가 귀납법에 의하여 진보하는 적이 없다는 나의 주장을 정말 기꺼이 완화해서는 안 된다: ‘적이 없다(never)’를 ‘거의 없다(hardly ever)’로 교체하자.
그러나 이렇게 양보를 하고서 나는, 흡연 중이거나 독서 중이거나 혹은 관찰 중이거나 아니면 심지어 우리가 취침 중에 이론이 우리에게 떠오르든 간에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고 설명하고 싶다: 이론의 논리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 이론은 훌륭한 이론인가 나쁜 이론인가? 다윈(Darwin)은 자신의 자연선택론을 맬서스(Malthus)의 저서를 읽으면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상당한 역사적 흥미를 지닌 요점이지만 다윈의 이론이 지닌 가치에 관한 질문과 어떤 관련도 없다: 설사 맬서스의 이론이 참이고 가장 강력한 증거에 의하여 증명된다하더라도, 다윈의 이론은 거짓이고 잘 증명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맬서스의 이론이 전혀 옹호될 수 없다할지라도, 다윈의 이론은 탁월할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당성의 문제와 (우리에게 귀납법에 의지할 근거가 있는지와 같은) 사실의 문제를 (우리가 실제로 귀납법에 의존하는지 혹은 ‘귀납적 과정’을 사용하는지; 혹은 이론이 실제로 귀납법에 의하여 만들어졌는지, 기타 등등과 같은) 날카롭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는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III
그 문제에 대하여 가장 유행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듯하다. 흄은 귀납법이 무효함을 발견하고는 ‘무효한(invalid)’이라는 단어를 ‘타당한 연역적 추론의 기준에 맞지 않는’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내가 보고하고 있는 견해에 따르면 흄이 발견한 것은 하찮은데 왜냐하면 귀납적 추론은 몇 가지 면에서 연역적 추론과 유사하고 다른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추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납적 추론의 기준이 모든 면에서 연역적 추론의 기준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분명하다. 귀납적 추론은 자체의 기준과 자체의 규범과 자체의 ‘과정’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귀납적 과정’ 혹은 ‘귀납적 추론’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되지 못할 것이다 ㅡ 다시 말해서 귀납적 추론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귀납적 추론이 ‘합당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가 아니다 ㅡ 다시 말해서 귀납적 추론의 합당한 기준과 일치해서는 안 된다는: 귀납적 추론은 귀납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이 이른바 귀납적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다른 철학파에 의하여 제시되는 두 가지 답변이 있다. 한 학파는 기준이란 확률계산의 법칙에 들어맞는 ‘개연적(probable)’ 추론의 원칙들이라고 가르친다. 나는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및 다른 곳에서 이 교설을 자세하게 논박하였고 이 후기에서 나중에 좀 심층적인 비판을 가하겠다. 다른 학파는 우리가 이 ‘귀납적 과정’에 관하여 말할 때 발생할 다양한 ‘귀납적 과정들’과 ‘개연적(probable)’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용례들을 우리가 주목하여 분류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연구의 결과들로 인하여 우리는 귀납적 타당성의 법칙이나 기준이나 규범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이 학파에 따르면 사실관련 ‘용례들’은 기준을 확립할 수 있다. 사실과 기준 사이에는 (‘사실의 문제[quid facti]’와 ‘법적용의 문제[quid juris]’의 문제 사이에) 더 이상 구분이 없다. 귀납의 타당성이나
‘정당화’에 관한 논리적 문제는 더 이상 없다. 이 학파에 따르면 우리는, 아마도 ‘정당화하다(justify)’의 몇 가지 실용적 의미에서를 제외하고 우리가 귀납적 과정이나 요리 과정이나 혹은 다른 과정의 이용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연역적 과정의 이용도 ‘정당화’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 과정의 성공을 통해서 정당화할 수 없다. 그리고 귀납적 과정은 귀납적 과정이나 혹은 다른 과정들처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이 유행하는 관점을 비판하기 전에 나는 그 관점이, 유행하는 언어로 번역된, 본질적으로 고대의 관점임을 지적하고 싶다. ‘사고의 법칙(the laws of thought)’이라는 고대의 표현은 연역적 추론의 원칙들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우리가 정말로 사실상 이런 방식을 생각한다는 ㅡ 혹은 우리가 사실상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요당한다거나 어떤 연역적 추론들이 불가피하거나 ‘필수적’임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한다는 ㅡ 심리학적 사실을 가리킴으로써를 제외하고, 연역적 논리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없다는 견해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었다.연역적 추론의 타당성이 그리하여 사실로 축소되자마자, 그 귀납적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추론을 했다거나 아마도 추론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 타당성이 동일하게 정당화할 필요가 없던 어떤 ‘귀납의 원리’나 몇 가지 ‘귀납적 추론의 원리들’을 수용하는 데로 길이 열렸다.
지금 유행하는 이 고대 이론의 번역본은 타당성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의 동일시를 위하여 전적으로 불합리한 심리학적 논증을 동등하게 불합리한 실용주의적이거나 행동주의적이거나 언어-분석적인 논증으로 갈음한다.
이 모든 술책들은 오래전에 흄과 칸트에 의하여 제거된 이론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일 따름이다; 그리고 현대의 부활주의자들은 이 위대한 사람들의 논증에 대응하거나 심지어 그 논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들의 저술을 함부로 다룬다. 타당성에는 성공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 순전히 독단주의이다. (뉴튼의 이론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과학적인 이론은 없었다. 성공이 우리가 지닌 유일한 관심사라면 아무도 뉴튼의 이론을 비판하지, 다시 말해서 뉴튼의 이론이 지닌 진리에 대한 문제를 재고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뉴튼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중요한 지적[知的] 혁명이 발생했다; 틀림없이 인식론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혁명.)
사고의 타당한 방식을 실제 사고와 일치시키는 일은 태곳적부터 반복적으로 시도되었다. 이 시도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해로운 시도는 이성과 실제를 동일시하는 헤겔의 철학이다. 귀납법의 최근 이론들은 헤겔의 시도를 부활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귀납이론들이 기준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소위 사실들은 전적으로 가상적이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무시될만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은 ㅡ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 ㅡ 그것들이 사실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귀납적 과정’의 존재를 부인하는 우리 모두가 틀렸다할지라도, 이 논쟁거리가 되는 ‘사실들’이 그 타당성이 심층적 토론에 개방되지 않는 추론의 기준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주의의 정점일 것이다. (그리고 설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증하는 기술이 ㅡ 그리고 그와 함께, 이성적인 철학적 사고라는 위대한 전통 ㅡ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사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체념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사실을 새로운 철학적 탁월함의 기준으로 승격시키려는 현재의 유행을 따르려는 마음은 더욱더 없다.)
IV
철학자들이 물론 귀납법과 ‘귀납적 과정’의 존재를 신뢰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니다.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심리학자들을 포함하여 ㅡ 특히 배움의 이론에 흥미를 갖는 심리학자들 ㅡ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귀납법과 ‘귀납적 과정’의 존재를 신뢰한다; 많은 생물학자들; 그리고 많은 물리학자들. 그 물리학자들에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는데 이유인즉 나는 이미 아인슈타인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론 배우기’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내가 ‘귀납적 방식(the inductive style)’이라고 지칭했던 것에 ㅡ 몇 가지 생물학 잡지에 여전히 크게 통용되는 글쓰기 방식 ㅡ 대하여 중요한 것을 말하겠다. (아래의 항목 X과 XI 참조.)
V
배움의 이론에 대하여 틀림없이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정말로 배운다. 나는 심지어, 흄과 다른 고전적 경험주의자와 함께, 모든 배움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움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라는 주장의 해석에 관해서는 나는 흄 및 다른 고전적 경험주의자들과 다르다. 반복이 배움의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그리고 또한 관찰이 경험을 습득하는 데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나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배움과 반복에 관하여 심각한 혼란의 근원은 모두 ‘배움’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 전혀 다른 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얻는 게 있으면서 세 가지 이상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임을 나는 의미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세 가지를 (1) 시행착오에 의한 (또는 추측과 논박에 의한) 배움; (2) 습관 형성에 의한 배움 (또는 고유한 반복에 의한 배움); 그리고 (3) 모방에 의한 (혹은 전통을 흡수함으로써의) 배움이라고 지칭하겠다. 세 종류 모두는 인간에게서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새로운 사실에 대한 배움과 같은 이론적 지식의 습득뿐만 아니라 재주의 습득에서 각각이 지닌 다양한 특징적 역할을 발휘한다.
(1) 이 세 가지 배움의 방법 중에서 첫 번째 방법인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 혹은 추측과 논박에 의한 방법만 유일하게 우리가 지닌 지식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그 방법만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배움’이다: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문제들을, 그리고 우리들이 지닌 새롭고 오래 된 문제들에 대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배움은 일을 하는 데 새로운 재주와 새로운 방식들의 발견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의 배우는 과정에서 기계적 반복은 (돌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의 기계적 반복처럼)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새로운 발견을 낳는 것은 우리가 지닌 감각에 대한 반복적인 충격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를 지속적으로 초조하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반복되고 다양한 시도들. 이 ‘반복되는’ 시도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과 우리는 동일한 시도가 우리에게 성공적으로 보일 때만 그리고 그 동일한 시도를 다시 완전히 시험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만 그 시도를 반복한다는 것은 여기서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서 가능하다면 다양한 상황 하에서 그 동일한 시도가 우리가 지닌 초조하게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성공적인 해결책을 변함없이 낳는다는 가설을 시험하려고.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은, 다양한 방식으로라 할지라도, 우연한 관찰(chance observation)로부터의 배움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관찰로부터의 배움을 포함한다. 체계적인 관찰은 우리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로부터, 혹은 우리가 시험하려고 노력하는 추측으로부터 항상 시작한다: 이것이 그 관찰을 체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체계적 측정을 통하여 어떤 한도를 결정하려고 우리가 노력하는 곳에도 기초를 이루는 가설이 ㅡ 우리의 측정 조건에서의 어떤 변화와 관련하여 변하지 않는 한도가 있다는 가설 ㅡ 있다. 의식적으로 제시되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전제되든 어떤 그런 가설이 없다면, 관찰은 체계적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우연한 관찰’은, 비록 발견을 하는 데 가장 발명적이 아닌 방식일지라도, 여전히 시행착오 방법의 사례이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우연한 관찰’의 모든 사례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지니게 된 어떤 추측이나 전제나 기대에 대한 반증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관찰’은 우리가 지나는 통로에 놓인 예기치 않은 돌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그 돌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ㅡ 혹은 더 정확하게 무의식적으로라 할지라도 우리는 통로가 평탄하리라고 정말로 기대했기 때문에 ㅡ 그 돌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하여 소위 ‘우연한 관찰’이나 ‘우연한 발견’은 ㅡ 다시 말해서 걸림돌 발견 ㅡ 우리가 힐끗 보고 생각할 것처럼 우연적이 아니다.
게다가 ‘우연한 발견’의 통상적 사례들 대부분은 귀납주의적 오해에 근거한다: 심지어 걸림돌 발견의 진짜 사례들은 드믄 듯하다. 아마도 닭 콜레라에 대한 파스퇴르의 최초 면역주사나 (1880년) 나프탈렌을 프탈산으로 변화시키는 데 (황산을 넣어 가열함으로써) 관한 수은의 촉매역할 발견이 진짜 사례임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사례들 중 많은 사례들은 진짜 사례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외르스테드(Oersted)는 몇 가지 전자기 상호작용을 필사적으로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뢴트겐(Roentgen)은 자신의 X-선 발견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광선을 찾고 있었다’ ㅡ 그가 형광막을 통하여 탐지하기를 희망했던 (적외선과 자외선의
경우에서처럼) 광선. (이것이 막이 그곳에 세워졌던 까닭이다.) 물론 크룩스관(Crookes tubes) 근처의 노출되지 않은 사진건판들(unexposed photographic plates)은 여러 차례 노출의 흔적을 ㅡ 기대와 반대로 ㅡ 보였고 그리하여 이것이 아마도 X-레이라는 진짜 ‘걸림돌 발견’을 쉽게 유발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된 사람들 모두는, 심지어 크룩스를 포함하여, 노출에서 나타나는 저 표시들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방사선에 관해서는 베크렐(Becquerel)이 의식적으로 새로운 광선을 탐색했다; 그리고 더욱 특히 우라늄염(uranium salts)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그는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에게서 나온 (그릇된) 가설에 의하여 오도되었다. 페니실린의 발견도 우연한 발견이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플레밍(Fleming)에 의하여 관찰된 살균 (혹은 세균 발육 저지) 효과의 종류는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서 심지어 ‘기대하지 않은 것(unexpected)’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래 X절 참조.) 게다가 플레밍은 심지어 자신의 발견 이전에 치료의 목적을 위한 이런 종류의 효과가 지닌 가능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동물에서도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은 원래 새로운 ‘지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재주로 귀결된다. 그러나 모든 재주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착오라는 요소는 시행착오의 방식 안에서 이런저런 기대의 절망 속에서 항상 명백해진다.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ㅡ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ㅡ 우리의 의식적인, 아마도 언어로 설명되는, 기대들로 구성된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시행착오로 습득되는 새로운 재주의 사례로서 우리는 피아노 연주나 자전거타기를 생각할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피아노 위에서 한 악절에 대한 최고의 운지법이나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이런 경우에 우리는 먼저 체계적인 시도들을 통하여 ㅡ 만족스럽지 못한 해결책들을 제거하거나 배척함으로써 (혹은 반증함으로써) ㅡ 의식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반복은 매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들은 여기서 (1)과 (2)로 구분된 배움의 종류에서 반복의 특징과 기능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두 번째 종류의 배움은 ㅡ 고유한 반복을 통한 습관 형성 (혹은 ‘기계적’ 반복을 통한) ㅡ 첫 번째 종류의 배움과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찾지 않고 시행착오에 의하여 이전에 발견된 (혹은 모방에 의하여 습득된; 아래 (3) 이하 참조) 해결책과 친숙해지려고 노력한다.
이 두 번째 종류의 배움이 첫 번째 종류의 배움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기 위하여 우리의 주요 사례들인 피아노로 특정 악절 연주하기를 배우는 사례와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지 않기를 배우는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다.
부단한 ‘연습’이 ㅡ 다시 말해서 반복뿐만 아니라 다소 ‘기계적인’ 반복 또한 ㅡ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것에서만큼 중요한 인간의 재주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운지법 같은 새로운 것을 연습을 통하여 발견하지 않는다. 시행착오로써 새로운 운지법을 배운 후에만, 다시 말해서 새로운 운지법을 문제에 대한 대안적 해결책과 비교하여 보다 적당하지 못한 해결책들을 배척한 후에야 우리는 새로운 운지법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기계적 반복이라는 기능은 ㅡ ‘연습’의 기능, 혹은 ‘암기식 배움’ ㅡ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발견된 것과 친숙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기계적 반복의 기능은 새로운 문제에 대하여 우리를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임시적 해결책들을 반복적으로 시험하는 기능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행동으로부터 의식의 요소를 가능한 한 멀리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문제가 ㅡ 예를 들어 악보와 손가락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문제 ㅡ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가 더 중요한 것에 ㅡ 음악적 아이디어, 악절의 표현 ㅡ 온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자전거타기를 (혹은 자동차 운전) 배움에서 ‘연습’이나 반복 고유의 기능도 동일하다: 비록 그 기능이 발견을 (어떻게 일들을 처리하는지에 대한 발견) 새로운 재주로 변환시킬지라도 발견이나 심지어 새로운 재주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특정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서 그 기능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정신을 교통 문제에 쏟게 한다.
모든 배움이 암기에 의한 배움이라는, 그리고 심지어 우리 지식의 성장은 기계적 반복을 통한 습관형성의 결과라는 귀납적 교설은 그러므로 오류이다. 그런 반복은 우리의 주목을 끌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반복에는 우리의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시계가 멈춘 것은 ‘들을’ 것이다.)
우리의 지식이 반복에 의하여 귀납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생각의 인기는 의심할 바 없이 (1)과 (2)의 두 가지 의미에서 배움을 뒤섞은 것에서 기인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 번째 종류의 배움을 ㅡ 모방에 의한 배움 ㅡ 간단하게 언급할 것이다. 모방에 의한 배움은 더 원시적이고 중요한 형태의 배움 중 한 가지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고도로 복잡한 배움의 본능적 토대와, 제안에 의하여 그리고 감정에 의하여 배움 안에서 펼쳐지는 역할은 배움의 다른 방식들에서보다 (비록 이 방식들이 물론 항상 현존한다고 할지라도) 더 명백하다. 우리의 토론에 중요한 것은 개별적 학습자의 관점에서, 모방에 의한 배움이 항상 전형적인 시행착오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혹은 어린 동물) 자신의 부모를 닮으려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노력하여 자신을 고치거나 보모에 의하여 고쳐진다. 이 시행착오의 과정은 모방적 과정의 처음이자 근본적인 과정을 구성한다. 그 과정은 그리하여 발견의 단계이다: 아이는 모방에 의하여 걷는 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시행착오에 의함을 의미한다. 그 단계는 물론 새로이 발견된 재주가 ‘연습’의 결과로서 무의식적으로 수행되어 습관이 되는 단계로 이어질 것이다.
VI
귀납주의자는 지식을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기대들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해석한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귀납주의자는 나아가 기대들을 반복의 결과인 연상에 의하여 연결된 관찰들의 기억으로서 해석한다. (귀납주의자는 반복되는 이전 경우에서 벨소리가 난 후에 음식이 도착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벨소리가 나면 개가 음식을 기대한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반대로 나는 새로운 기대들은 시행착오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가 문제를 경험하는 분야이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대를 수정할 수 있는 분야인 흥미의 분야에서 임시적 기대들을 형성한다. 새로 형성된 기대들이 성공적이라면, 그 기대들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석화(石化)될 것이고 (반복에 의하여), 우리는 그 특정 분야에서 점차 배울 수 없게 된다. 음식-얻기는 개의 행동이 보통 ‘유연한(plastic)’ 분야이다. 개는 이 분야에서 배울 수 있고 시행착오에 의하여, 기대와 반증에 의하여 규칙성들을 발견한다. 이런 방식으로 개는 또한 처음으로 벨소리가 날 때 음식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론을 형성한다; 후에 예상이나 기대는 반복에 의하여 습관적이나 화석화(化石化)가 될 것이다.
VII
여기에 제시된 견해는 연상 이론 및 조건반사 이론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아래 9절 참조). 이 관점들 중 첫 번째 관점은 단순한 연상 조건들, 즉 ‘자료(data)’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앞 문장의 원문은 The first of these works by assuming that simple terms of association or 'data' are 'given' to us인데 동사가 없는 문장으로 문법적 실수로 보인다. 역자) 이 전제는, 비록 우리가 복잡한 자극 상황에 대하여 잊고 자극들은 단순하다고 전제한다 할지라도, 순진하고 옹호될 수 없다. 이 이론들 중 두 번째 이론은, 그 이론이 단순한 자료나 조건들에 관하여 전제를 하지 않고 원래 (역시 고도로 복잡할) 기대들과 관련이 없는 (고도로 복잡할) 자극들이 어떻게 이 기대를 방출할 수 있는 신호가 될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한, 다르고 반대가 덜 가능하다. 이것은 문제로서 완벽하게 수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인 조건반사설은 수용될 수 없다. 조건반사설은, 조건반사가 구축되는 기초적인 비-복합적, 비-조건적 반사의 존재를 전제하고, 모든 배움은 반사의 조건화로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첫 번째이자 근본적 의미에의 배움은, 다시 말해서,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은 단순한 반사를 크게 초월하는 발명이나 창조적 행동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리고 발명과 행동의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여기서 ‘반사의 조건화’에 대하여 잘못 말한다는 것은 모든 배움, 심지어 발견과 발명도 반복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에 의한 배움이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보다 덜 근본적임을 (그리하여 또한 덜 기초적임) 보았다.
VIII
귀납주의자의 오류는 시행착오에 의한 배움과 암기에 의한 배움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데나 우리가 습관형성에 의하여 우리의 지식을 확대할 수 있다는 그의 후속적 전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우리 자신의 방해 없이도 외부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지나 관찰이나 감각-인상들이나 감각 ‘자료’의 형태로 된 지식에 대한 어떤 원자재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에 의하여 충분히 논박되는 옹호될 수 없는 심리학적 이론이다. 영화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지사진의 배열이지만 우리가 보거나 관찰하거나 감지하는 것은 움직임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령) 영화로 된 만화의 사진들만을 보고 있는 중임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움직임을 본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간단한 사실은, 보는 것이나 감지하는 것이나 관찰하는 것은 단지 시각적 자극들에 대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어떤 복잡한 상황들에 대한 반응이기도 한데 그런 상황들 속에서 자극들로 구성된 복합체들이나 배열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문제들과 우리의 두려움과 희망, 우리의 욕구와 만족, 우리의 기호(嗜好)와 혐오 또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반응은 ㅡ 다시 말해서 우리의 즉각적인 지각적 경험 ㅡ 이 모든 것에 의하여 그리고 또한 주로 우리의 이전 지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기대나 예상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데 우리의 기대나 예상은 우리의 반응에 대하여 일종의 도식적 구조를 제공한다.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확대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관찰이나 우리의 감지에 의하여 배운다면, 관찰이나 감지가 우리의 예상을 수정하고 예리하게 하고 고치고 그리고 흔히 반증하는데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배운다. 그리하여 귀납주의적 이론은 항상 피상적이다;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면 귀납주의가 순진하게 우리의 감각 ‘자료’로서 간주하는 것은 실제로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교환(give and take)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밝혀진다: 우리의 예상을 수정하거나 고치고 우리의 추측을 반증하는 과정인데 우리의 추측을 반증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확대하는 모든 종류의 배움에게 그렇게 특징적이다.
IX
고전적인 경험주의적 관점은 ㅡ 경험은 관찰의 반복을 통하여 배움으로부터 생긴다는 ㅡ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통상적으로 저항을 받고 흔히 분노의 대상이 되는 편견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철학체계이다. 편견으로 이루어진 이 철학체계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일반상식’의 일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 철학체계는, ‘경험’과 ‘경험으로부터의 배움’이 시행착오의 의미에서 매우 흔하고도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많은 조짐이 있기 때문에, 지성적이면서 다소 인위적인 철학체계로서 또한 기술될 것이다: ‘경험으로부터의 배움’은 매우 흔하게 ‘우리의 실수로부터의 배움’을 (‘암기에 의한 배움’이나 ‘관찰한 것들을 연상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ㅡ ‘감각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의미한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경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에 부여하는 이름이다.’
요컨대 실제로 ‘경험’이라는 단어의 평범하거나 흔하거나 일반적인 용법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와 다른 곳에서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된, 내 자신의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포함한다.이 이론에 따라서 경험은
궁극적 ‘지식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각자가 시행착오에 의하여 도달하는 오류 가능한 기대나 예상의 체계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험’의 일반적인 용법들에 대한 ㅡ 또는 어원에 대한 ㅡ 나의 언급은 나의 견해를 옹호하는 논증으로서의 의도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런 용법들에는 흔히 오도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상당히 충분한 이유 없이 상식으로부터 ㅡ 상식이 무엇을 의미하든 ㅡ 이탈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의 의도는 평범한 언어적 용법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경험에 관하여 귀납적 철학에 이끌려, ‘귀납적 과정’의 존재를 전제할 때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하지 못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X
많은 생물학자들이 지닌 귀납주의는 베이컨과 보일(Boyle), 레이우엔훅(Leeuwenhoek), 그리고 왕립 자연과학 협회의 초기로 돌아가서 전통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 전통의 배경에 있는 철학을 ㅡ 자연은 편견 없이 읽혀야 하는 열린 책이라는 믿음 ㅡ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마지막 절에서, 그리고 추축과 논박의 서문에서 훨씬 더 철저하게 개괄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귀납적 방식’이라고 불렀던 것에서처럼 ㅡ 지금쯤 물리학과 화학의 학술지로부터 거의 사라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몇 가지 생물학 학술지에서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인 자신의 연구물을 보고하는 특정 양식 ㅡ 귀납주의적 전통의 힘이 두드러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귀납적 방식을 고취하는 기본적 아이디어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 관찰을 신중하게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론화에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관찰을 쉽게 편향되게 하고 오염시킬 이론적 편견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귀납적 방식으로 쓰인 논문은 본질적으로 다음 구조를 지닌다:
(1) 귀납적 방식으로 쓰인 논문은 우리의 관찰에 대한 준비상태를 먼저 설명한다. 그 준비상태에는 예를 들어 사용되는 기구, 실험을 위한 기구의 준비, 그리고 관찰 대상물 준비와 같은 실험준비가 속한다.
(2) 논문의 주요 부분은 실험결과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순수한 기술(記述)로 구성된다: 측정을 포함하여 (있다면) 수행된 관찰들.
(3) 결과의 신뢰성에 대한 평가와 함께, 실험의 반복에 관한 혹은 개연적인 오류에 관한 보고서가 뒤따른다. (최근 이것은 통계적 작업을 포함할 것이다.)
(4) 선택적: 앞선 결과들과의 혹은 그 분야에서 다른 연구자들이 얻은 결과들과의 결과 비교.
(5) 역시 선택적: 미래의 관찰을 위한, 기구 개선에 대하여 바람직한 개선을 위한 그리고 새로운 측정들을 위한 제안.
(6) 논문은, 통상적으로 몇 행으로만 이루어지고 때때로 더 작게 인쇄되어 논문의 실험결과에 의하여 제안된 가설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짧은 종결부분으로 (역시 선택적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나는 이 요점들이 항상 엄격하게 지켜진다고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요점들은 생략될 것이고 다른 요점들이 추가될 것이다. 내가 정말로 제안하는 것은 젊은 생물학자들로 하여금 이것이 결과를 제시하는 합당한 방법이고 심지어 거장들에게도 이런 방법의 제시를 고수한다고 믿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귀납적 방식을 고취하는 아이디어는 ㅡ 관찰된 사실들을 엄격하게 고수하여 편향과 편견을 제외시키는 아이디어 ㅡ 칭찬을 받을만하다. 그리고 물론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이 칭찬을 받을만하고 분명히 안전한 아이디어 자체가 편견의 잘못된 결과이자 ㅡ 훨씬 더 나쁘게, 철학적 편견의 잘못된 결과 ㅡ 객관성에 대하여 틀린 이론의 잘못된 결과임을 알지 못한다. (객관성은 사심이 없고 편견이 없는 관찰의 결과가 아니다. 객관성과 또한 편향적이지 않은 관찰은, 관찰 보고서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비판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피하거나 억누를 수도 없고, 우리의 이론이 우리의 관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가설들로 인정하려고 노력할 수 있고 그 이론들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여 비판을 받도록 할 수도 있다.)
귀납적 방식의 사례로서 나는 여기서 알렉잔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페니실린 발견을 보고했던 고전적 논문을 언급할 것이다.
그 논문은 박테리아를 박멸하는 어떤 세력이 박테리아 배양균을 우연히 침공하는 것을 그가 관찰한 것을 기술한다. 그 논문은 관찰에 대한, 실제로 발생한 것에 대한 기술이다; 그리고 그 논문이 물론 이런 종류의 일은 기대되지 않았거나 처음 발생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 논문의 귀납적 방식은 무고한 독자들에게 (예를 들어 철학자) 페니실린에 의한 박테리아 배양균에 대한 침공이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랬다) 그 침공이 기대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들은 이 인상이 오류일 것임을 밝힌다. 적어도 메치니코프(Metchnikov) (1845-1916) 이래 ‘항체(antibodies)’에 ㅡ 다시 말해서 위험한 박테리아의 성장을 먹어치우거나 파괴하거나 막는 세포나 분자들이나 다른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세력 ㅡ 대한 이론들이 세균학자들에 의하여 부단히 토론되었다. 알렉잔더 플레밍의 박테리아를 죽이는 곰팡이는 미생물 배양균 위에 우연히 정착하는 것이 관찰된 첫 번째 곰팡이가 또한 아니었다. 정말로 세균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들이 사람 안에서 박테리아를 죽이는 강력한 수단을 어느 날 발견할 것을 오랫동안 희망했다. 1924년에 싱클레어 루이스(Sinclair Lewis)가 매우 훌륭한 소설인 애로우스미스(Arrowsmith)를 발표했는데 그 소설 속에서 플레밍의 논문에서 기술된 것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소설의 세균학적 부분들은 폴 드 크뤼프[Paul de Kruif] 박사와 공동으로 저술되었는데 폴 드 크뤼프 박사는 나중에 세균 사냥꾼들[Microbe Hunters]이라는 과학적 발견의 방법들에 대하여 매우 훌륭한 분석을 또한 포함하는 인기 있고 매우 읽기 좋은 세균학의 역사서로 유명해졌다.)
정말로 많은 유사한 사건들이 당시에 알려졌고 겉보기에 페니실린과 유사한 많은 물질들이 당시에 알려졌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물질들 중에 의학적 목적에 부합될 것이 있는지의 여부였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적합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크게 필요했던 유능한 화학자의 협조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플레밍의 발견 후 10년 만에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와 그의 협조자들은 페니실린이 지닌 놀라운 치유력을 발견하여 플레밍의 추측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놀라운 치유력도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가 (1854-1915) 어떤 그런 강력한 물질을 발견하고자 희망하여 황약품들(sulphur drugs)이 에를리히의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플레밍의 발견을 실제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발견은 자신이 하고 있던 일과 기술할 가치가 있던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던 위대한 발견가의 업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관찰한 자체의 항생제적 특질을 지닌 곰팡이가 독소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기대되었고 희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기대는 플레밍과 플로리(Florey) 팀 모두의 업적에 동기를 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기 논문들 속에서 이 동기들과 희망들과 기대들과 관련된 서술을 헛되이 찾는다; 그 논문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문제들에 관한 서술. 자체에 관한 발간물이 지닌 귀납적 방식 때문에 추측에 근거한 희망들과 예상들은 통상적으로 글로서보다는 구두 전통을 통하여 생물학자들 사이에 계승된다. 아무튼 그런 이론적 추측을 토론하는 논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생물학 학술지는 거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학술지가 수용되는 귀납적 방식의 규칙들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XI
귀납적 방식에 대한 비판은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제안하지 않으면 불완전할 것이다. 과학자는 물론 자신이 합당하다고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이 얻은 결과들을 자유롭게 제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논리를 다루는 학생은, 회피할 충분한 이유들이 없다면 과학자들이 채택해야 한다고 충고를 크게 들을 일종의 일반적인 보고서를 비판을 위하여 또한 자유롭게 제출해야 한다. 나의 계획에 따라서 표준 실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작성되어야 한다:
(1)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 ㅡ 혹은 문제가 잘 알려져 있다고 전제되면 문제에 대한 그리고 그 문제의 해설에 대한 명확한 설명. 보고서 작성자는 문제 상황을 어떤 선임자에 의하여 개괄된 바처럼 수용하는지 혹은 자신이 문제를 다르게 보는지를 또한 밝혀야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보고서 작성자에게는 항상 변하는 문제 상황을 자신에게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명백히 하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2) 문제와 관련하여 연관된 가설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 (그리고 실험들이 가설들에 대한 평가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를 표시하는, 가설들과 관련하여 실험들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
(3) 보고서 작성자가 제안하거나 토론하거나 실험적으로 시험하려는 가설에 (혹은 가설들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서술.
(4) 실험들과 실험 결과들에 대한 기술.
(5) 평가: 문제 상황들이 변했는지; 그리고 변했다면 어떻게 변했는지.
(6) 보고서로부터 발생한 추가 작업에 대한 제안.
이 요점들은, 과학의 과정에 대한 나의 견해가 채택된다면, 상당히 분명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과 같은 방식을 채택하는 보고서 작성자는 거의 없다: 귀납주의적 전통이 너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논문은 다양한 과학에서 문제 상황 내부에서의 자기 위치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매일 점점 더 시급해지고 있다. 출판물의 엄청난 증가는, 인근 분야들 안에서 과학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접촉의 감소와 함께, 이론적 문제들과 이론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을 이전 보다 더욱 중요하게 만드는 과학의 세분화를 낳았다. 왜냐하면 이론들이 과학의 좌표 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XII
존재하지 않는 귀납적 과정을 믿는 귀납주의자를 확신시키지는 않을 것 같을지라도 귀납주의자가 위험을 각오하고 무시하는 사실들에 대한 대안적 해석들이 있음을 적어도 보여주어야 하는 몇 가지 근거들을 나는 언급했다; 귀납적 과정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도전을 받을 것임을; 그리고 귀납적 과정들에 대한 몇 가지 겉으로 보이는 사례들이 있다 할지라도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그 사례들이 자체의 논리적 구조가 완전히 다른 방법에 대한 사례들임이 밝혀질 것이다: 시행착오의 방법.
그리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귀납법이나 귀납적 과정들에 대하여 주장되는 사실의 도움이나 이 사실을 기준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들도 논증을 대신해서 수용될 수 없다: 귀납법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이론들이나 우리의 신념들을 정당화하려는 귀납주의자는 귀납법에 대하여 합리적인 정당화를 부여하는 임무를 피할 수 없다.
XIII
반복에 의한 귀납 방법에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행착오의 방법은 ㅡ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방법 ㅡ 순전히 비판적이고 선택적이다. 베이컨이나 밀[Mill]과 함께 이론이 지닌 대안 모두를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이론을 정당화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잘못 전제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정당화주의자나 귀납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시험되지 않은 대안들의 숫자는 항상 무한하여생각하지 못한
가능성들이 항상 있다.) 귀납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정당화주의자들이다 (2절의 의미에서).
흄은 귀납법이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귀납법의 자체가 지닌 종류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귀납법은, 비록 비이성적으로만 일지라도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귀납법이 지닌 고도의 신뢰성을 통하여 실제로 자체를 정당화한다. 현대 귀납주의자들은 또한 귀납법이 비록 연역법과 분명하게 다를지라도 자체가 지닌 종류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귀납법은 실제고 자체를 정당화하여 자체의 기준을 세운다: 귀납법은 스스로-입증하고, 스스로-진실성을 증명한다. 귀납법에서 사실들과 기준들은 신(神)에게서 그러한 것처럼 화해한다. 흄과 현대적 관점 사이의 논리적 차이점은 그리하여 다소 주저하여 회의적인 신자(信者)와 독단적 유신론자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합리성과 ㅡ 다시 말해서 비판 ㅡ 사실과 기준이라는 이원론은 우리가 정당화주의를 포기하면 쉽게 구조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반복에 의한 귀납과 시행착오의 혹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방법 사이의 논리적 차이를 또한 인식하게 된다.
귀납적 과정을 믿는 사람들은 나와 한 가지 것을 공유한다: 우리 둘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실들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들이 합리성에 대한 몇 가지 기준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데서 흄과 다르다. 그러나 귀납법을 믿는 사람들이 사실들은 ㅡ 혹은 자신들이 사실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ㅡ 스스로-진실성을 증명하여 귀납적 합리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준을 창조한다고 믿는 반면, 대체로 (내가 생각하기에 비판의 기준, 다시 말해서 논리적 기준인) 합리적 기준이 우리의 과정을 결정할 것 같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귀납법도 없고 정당화도 없고 단지 비판과 배척만 있다고 이성과 논리가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과학적 발견에 관한 저 사실들이 시행착오의 과정으로서 해석될 수 ㅡ 더 잘 해설될 수 ㅡ 있는지를 아는 것이 훌륭한 생각이다.
4. 귀납법의 네 가지 문제들.
위 2절에 주어진 흄이 지녔던 귀납법의 문제에 대한 설명은 내가 믿는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문제의 다양한 면을 꺼내는 그 문제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어서 그 문제를 토론하는 다양한 단계들로서 간주될 것이다.
현재의 절에서 나에게는 네 가지 그런 단계를 구분하려는 의도가 있다:
(1) 2절에 주어진 설명에 대한 다소 다른 변종 설명. 그 설명은 러셀의 도전으로서 불릴 것이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서 설명될 것이다: ‘미치광이와 과학자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구획설정의 문제’와 다시 말해서 과학 이론들의 경험적 특징에 대하여 합당한 규명을 발견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 소위 ‘합리적 믿음의 문제’.
(3) 우리는 미래에 관하여 추론들을 도출할 것이다 혹은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인지의 문제; 흄 자신이 귀납의 문제로부터 충분히 구분하지 못한 문제. 나는 그 문제를 ‘내일에 관한 흄의 문제’라고 부를 것이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은 모두 논리적이거나 인식론적이거나 방법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나는 이 절에서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지 않음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논리적 특징에서 세 번째 문제와 분명히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문제와 매우 다른 네 번째 단계를 구분할 것이다. 그 단계는 다음과 같이 불릴 것이다:
(4) ‘내일의 문제에 관한 형이상학적 단계’ 혹은 ‘귀납법 문제의 네 번째 혹은 형이상학적 단계’. 문제의 이 네 번째 단계에 대한 토론은 5절에서 실행될 것이다. 현재 절에서 나는 처음 세 단계를 토론하는 데 내 자신을 국한시키겠다.
I
버트런드 러셀은 칸트 이래 흄의 귀납법 문제가 지닌 전체 힘을 느낀 최초의 철학자였다. 칸트는, 흄이 옳다면 보편적 특성을 지닌 지식은 ㅡ 그리하여 그가 생각하는 바, 과학적 지식은 ㅡ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러나 수학과 훨씬 더 중요하게는 뉴튼 역학의 사례가 우리가 실제로 정말로 어떤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칸트는 철학의 핵심적 문제는 어떤 과학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왜 흄이 틀렸는지를 설명하는 것.
러셀은,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이 칸트의 해결책과 상당히 다르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유사하게 이해했다. (예를 들어 역학법칙들은 단순히 개연적인 지식으로서, 확실한 수학지식과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기술함으로써 러셀은 칸트가 토론했던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를 더 확대시켰다.)
귀납법은 러셀에 의하여 여러 곳에서 상세하게 토론된다; 먼저 내가 믿는 바, 그의 비할 데가 없는 저서 철학의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에서 (1912년). 이 얇지만 위대한 저서에서 그는 흄을 문제를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서 언급하지는 않는 반면 그의 저서 서양 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에서 (1946년) 언급한다. 서양 철학사의 흄에 대한 장에서 그는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타당한 추론을 도출할 수 없다는 데서 흄이 옳다면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소위 과학적이라는 이론은, 아무리 임의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론만큼 훌륭하게 ㅡ 혹은 정당화 가능하게 ㅡ 되는데 이유인즉 정당화될 수 있는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짐작은 너의 짐작만큼 훌륭하다’는 표현은 과학적 방법을 과학적 방법의 유일한 원칙으로 지배할 것이다. 그리하여 흄이 옳다면 ‘온전한 정신과 정신 이상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을’ 테고 미친 사람의 강박
관념과 망상은 위대한 과학자의 이론이나 발견만큼 합리적일 것이다.
러셀의 이 도전에 대하여 간단하고도 실제로 완벽한 답변이 2절의 토론에 함축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과학적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 사실상 망상들이 참이라는 주장만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자의 이론 더 낫다는 ㅡ 관찰에 의하여 더 잘 뒷받침이 된다는 다소 좁은 의미에서조차 ㅡ 주장을 옹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론 사이에서 관찰이 다른 한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반면 한 이론을 부인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관찰은 결정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흄의 논증은 우리가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추론을 도출하지 않을 것임을 확립하지 않는다: 흄의 논증은 우리가 반증하는 추론들을 도출하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우리가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확인하는 추론을 도출하지 않을 것임을 확립할 따름이다: (‘이것은 검은 백조다’)라는 관찰서술의 진실성으로부터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이론의 허위성으로의 추론은 연역적으로 완벽하게 타당할 수 있다.
문제에 대한 러셀의 도전적 설명이라는 이 해결책이 어떻게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아직도 토론될 문제의 첫 번째 단계를 두 번째 단계나 세 번째 단계와 혼동함으로써는 제외하고) 나는 알지 못한다. 러셀은 흄이 옳다면 과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할 때, 흄의 논증이 관찰로부터 이론으로의 반증하는 추론들이 지닌 무효성을 밝히지 않는다는 최고로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을 따름이었던 듯하다. 러셀의 제안은 잘 확립된 지식으로서의 (scientiα, epistēmē) 과학이라는 칸트의 견해에 들어맞지만 가설적이고 추측적인 것으로서의 과학 이론들이라는 러셀 자신의 관점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상 많은 구절에서 러셀은 귀납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과학의 방법을 기술한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논리는 전과 같이 가능성들에 대한 방해물이 되는 대신에, 무분별한 상식에 닫힌 무한히 많은 대안들을 제시하고 동시에 결정이 가능한 곳에서, 논리가 우리의 선택을 위하여 제공하는 많은 세상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임무를 경험에게 남기기 때문에 상상력에 대한 위대한 해방자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구절 안의 핵심 단어들은 아마도 ‘결정이 가능한 곳에서’라는 것이다: 러셀이 이 글을 썼을 때 그는, 결정이 가능한 곳에서 ‘무한히 많은 대안들’ 중 하나를 위한 긍정적 결정이라기보다는 ‘무한히 많은 대안들’중 몇 가지를 배척하는 것으로서만 결정이 가능할 것임을 그가 알았다는 데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는 그것이 전형적이거나 심지어 유일한 경우임을 알지 못했다; 혹은 이 사실이 흄이 지녔던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문제에 대한 이 해결책에는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추가되어야 한다: 특히 이론들이 결정적인 실험을 허용한다면 관찰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 가운데서 어느 이론이 더 나은지를 관찰만이 항상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관찰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역시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 이론이 지닌 장점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다. 그런 토론은 두 가지 이론이 해결하기로 되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 이론들이 설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그 이론들이 설명하는지; 그 이론들이 문제를, 예를 들어 시험 불가능한 전제만을 위함으로써 문제의 방향을 바꾸지만 않는지; 그 이론들이 시험 가능한지, 그리고 그 이론들이 얼마나 잘 시험될 수 있는지.
이 문제들은 (내가 ‘구획설정의 문제[the problem of demarcation]’로 부르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아래 다음 2장, 17절에서 26절 사이에서 토론된다)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우 다른 가치를 지닌 두 가지 이론과 마주치는 일과, 우리의 관찰이 비록 매우 다른 이유들 때문이라 할지라도 그 두 가지 이론과 동등하게 양립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이론을 엄격하게 시험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론과 양립할 수 있고, 다른 한 가지 이론은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ㅡ 이유인즉 모든 관찰이 그 이론과 양립할 수 있으므로 ㅡ 다른 한 가지 이론과 양립할 수 있다. (첫 번째 이론은 뉴튼, 가령, 케플러의 이론으로 모든 행성은, 아마도 그의 세계 조화[World Harmony] 이론과 결합하여 타원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론은 모든 행성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어서 신[神]들이라는 플라톤의 이론이 될 것이다.)
그 두 가지 이론이 지닌 설명적 가치와 시험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후에만 우리는 그 두 가지 이론에 대하여 그 이론들이 실제로 서로 경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론들이, 한 가지 이론에 대하여 불리하게 판정하여 다른 이론이 ‘더 낫다’는 것을 밝힐 결정적인 관찰 시험에 부쳐질 수 있는지를 말을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관찰 시험을 포함하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고찰된 모든 다른 이론들보다 진리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이론을 가진다고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결국 말할 것이다.
II
그런 방식으로 러셀의 도전은 응수되었고 우리는 귀납법 문제의 첫 번째 단계를 다루었다.
우리가 다루는 두 번째 문제로서 일컬어지는 바와 같이, ‘이성적 믿음의 문제(problem of rational belief)’는 내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 문제보다 덜 근본적이고 덜 흥미롭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발생한다.
관찰이 때때로 우리가 ‘훌륭한’ 이론들과 ‘나쁜’ 이론들을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과 도움을 주는 방식을 밝히는 데 논리적 어려움이 없음을 우리가 인정한다 할지라도, 과학의 신뢰가능성에 대한 혹은 과학의 결과를 ㅡ 관찰에 의하여 잘 시험된 이론들을 ㅡ 신뢰한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훌륭한 이론에는 그 이론이 지금까지 반증을 피했다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쉬움과 모든 과학적 이론들은 추측적임을 우리가 인정한다 할지라도, 과학에는 엄청난 양의 긍정적 지식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이 위치의 ㅡ 과학에 대한 다소 제한된 종류의 이 믿음 ㅡ 합당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흄이 옳다고 인정할까?
이것은 새로운 과제이다. 그 과제가 첫 번째 문제보다 덜 근본적이고 덜 흥미롭다는 나의 견해는 믿음과 관련된 철학에 대한 나의 제한적인 흥미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나의 견해는 또한 그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실제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과제 즉, 문제의 두 번째 단계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는 과학적 이론들이 지닌 추측성 특징에 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전제하겠다: 우리의 과학적 이론들은 증거와 토론의 결과에 의하여 아무리 ‘성공적’이고 잘 ‘뒷받침되었다’고 할지라도 불확실한 상태로 남고, 어떤 종류의 변화가 필요하게 될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뉴튼의 역학을 기억하라!)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과학과 과학적 이론에 대한 ‘이성적 믿음’을 이야기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특정 이론의 진실성을 신뢰하는 것이 이성적이라고 말할 의도는 없다고 나는 전제하겠다. 그 요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적 믿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시험을 포함하여 엄격한 비판을 견디어낸 한 과학 이론들이 지닌 소위 진리유사성(혹은 ‘박진성’)(truthlikeness[or verisimilitude])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옳든 그르던) 뉴튼의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참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들이, 더 나은 이론들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good approximations)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을 이성적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역학법칙이 (혹은 역학법칙이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별안간 변했음을 (‘내일의 문제’를 연구하며 아래 III 및 IV 절에서 더 자세히 토론될 가능성) 우리가 내일 발견할 것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이성적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우리는 새로 관찰된 규칙성들뿐만 아니라 옛 규칙성들도 설명하는 문제에 틀림없이 봉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a) 특정 상황에서 충분한 근사치로서, 옛 이론이 나올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하는 것, 그리고 (b) 어떤 상황이 (초기 상황) 변화를 야기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이
접근방법은 대체된 이론의 부활을 근사치로서 보장하는데 사실주의와 과학의 방법에 의하여 요구된다. 단순히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제출하고 그 변화를 기록하는 일은 기적들을 수용하는 것, 이성적 설명 추구를 포기하는 것, 그리하여 과학의 임무를 ㅡ 합리성을 ㅡ 포기하는 것에 해당될 것이다.
이 고찰들은 잘 입증된 과학의 결과들이 보이는 진리유사성에 대한 믿음이 (역학법칙과 같은 것들) 정말로 이성적이고, 그 결과들이 대체된 다음에도 그렇게 남을 것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것은 등급들(degrees)이 가능한 믿음이다.
우리는 두 가지 다른 범위나 등급의 규모를 구분해야 한다: 이론이 지닌 진리유사성의 등급, 그리고 특정 이론이 (특정 등급의) 진리유사성을 이룩했다는 우리 믿음이 지닌 합리성의 등급.
나는 이 두 가지 등급 중에서 첫 번째를 ‘박진성의 등급(degree of verisimilitude)’으로 두 번째를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으로 불렀다. 두 가지 이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다시 말해서 아마도 확률이론을 제외하고) 숫자적 평가를 유발하지 않고도, 박진성이나 입증과 관련하여 비교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등급들은 ‘비교적’이다.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철저하게 비판을 받고 시험을 받아서 그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의 입증 등급이 다른 이론의 입증 등급보다 더 크다는 결과를 낳는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번째 이론보다 첫 번째 이론이 진리에 더 나은 근사치라고 믿을 근거를 가질 것이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대하여 그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잠재적으로 낫다고 말하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특정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 이론을 진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로서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과 과학의 결과가 지닌 합리성은 ㅡ 그리하여 과학과 과학의 결과에 대한 ‘믿음’이 지닌 합리성 ㅡ 그 합리성의 진보와, 새로운 이론들이 지닌 상대적 장점들에 대하여 항상 새롭게 시작되는 토론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 합리성은 귀납주의자들이 믿는 바와 같이 뒷받침하는 관찰의 축적으로부터 발생하는 이론들에 대한 소위 진보적 강화(progressive consolidation) (혹은 증가하는 확률)보다는 이론들에 대한 진보적 타도(progressive overthrow)와 관련되어 있다.
수백 가지의 사례 중에서 한 가지 사례가 이것을 예시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오늘날 태양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을 믿는다 ㅡ 그리고 믿을 근거를 지니고 있다 (케플러와 뉴튼에 의하여 수정된 바와 같이): 위성을 동반하여 태양의 주위를 거의 타원형으로 움직이는 행성의 특정 배열을 믿는다. 그러나 이 이론의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대한 우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확신컨대 우린 그 이론이 지닌 완벽한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모형일 따름이고 그리하여 지나친-단순화와 근사치이기로 되어 있다 ㅡ 그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수정을 필요로 하고 아마도 보데의 법칙[Bode's law]이 지닌 타당성의 근사치를 설명할 어떤 심층적인 혁명적 설명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로 시작하여 여러 세기동안 축적된 관찰적 증거의 이야기를 언급한다는 것은, 그 모형의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대하여 우리가 지닌 강력한 근거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신화들로서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설명해야 하는 전통들을 (태양이 자체의 통로에서 주저하는 것에 대한 호머의 보고서 혹은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만든 것과 같은 것들)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관찰보고서는 고도로 선택적이고 이 선택은 미리 생각된 아이디어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이 지닌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대하여 우리가 지닌 실제적 근거들은 훨씬 더 강력하다. 그 근거들은, 새로운 태양이 매일 탄생한다는 헤라클리투스의 가설이나 데모크리투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와 프톨레미의 우주론을 간과하지 않고 아낙시맨더(Anaximander)이래 태양계에 대한 모든 이론들을, 관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포함하여,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이야기에 놓여있다. 그것은 튀코(Tycho)에 의한 관찰의 축적이라기보다 케플러와 데카르트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한 많은 추측을 비판적으로 배척하는 것으로 뉴튼의 역학과 뉴튼의 역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뉴튼의 역학과 그 역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인하여 결국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향하여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믿음, 이러한 선호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가 유발한 결과에 근거하기 때문에 합당하다; 그리고 한 이론에 대한 선호는 그 이론이 논증될 수 있고 그 이론이 탐구적인 비판적 논증을 ㅡ 그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그 이론이 참도 아니고 진리에 더 가깝지도 않다는 것을 밝히는 독창적인 시도들 ㅡ 견디어낼 수 있다면, ‘합당하다(reasonable)’고 불릴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진 최고 의미의 ‘합당하다’이다.
위에 기술된 의미에서 믿음의 합당성은, 시간 및 문화적 전통과 함께 변하고 제한된 범위까지는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와 함께 변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논증, 새로운 비판적 아이디어들은 믿음에 대한 합당성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실험이 같은 일을 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는 한 이론의 다른 이론에 대한 우월성에 관하여 매우 분명할 수 있다. 그 상태는 한 이론의 허위성에 대해서 또한 매우 분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런 분명한 평가들이 장기적이고 완벽한 비판적 토론의 결과였을 때, 그런 평가들은 과거에 동등하게 나중 토론들은 견디어 냈다: 두 가지 이론에 대한 상대적 평가가 뒤바뀌는 것과 분명히 배척된 이론들이 부활하는 것은 현저하게 드물었다. (뉴튼의 광입자설은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광자론에 의하여 부활된 것이 어떤 의미에서 아니다: 뉴튼의 광입자설은 전달과 전파의 이론이다; 광자론은 방출과 흡수의 문제를 충족시키려고 고안되었는데 전파의 문제에서 파동설에 굴복한다.) 이것과 반대로 ‘귀납적 증거’에 근거한 주장이 뒤바뀌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흔하여 귀납법에 반대하는 귀납적 증거와 같은 것이 있다. (모든 백조는 희다는 거짓 서술뿐만 아니라 의학적 미신을 포함하여 모든 미신도 또한 거대한 양의 귀납적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비판적 평가가 뒤바뀌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훌륭한 비판적 논증들은 자체의 힘을 지닌다 ㅡ 정말로 그 논증들이 발견되지 않은 편견들을 이용하여 혹은 허위이거나 잘못 해석된 관찰적 증거를 이용하여 펼쳐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판적 평가 중 많은 평가들이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최고 이론들이 대체되었을 때도 그 이론들은 그렇게 평가를 받을 때에는 이용 가능한 최고의 이론이었다는 판단을 우리가 뒤집은 적이 드물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비판적 방법이 과거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최고의 이론이 미래에도 최고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들은 우리들에게 너무 어렵게 되거나 우리의 지성이 퇴보할지도 모른다. 결국 교육을 잘 받은 수천 명의 과학자들 가운데서 극소수만 과학과 관련하여 더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에 기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극소수마저 없다면 과학은 침체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 가지 편견들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유행성 세부사항에 대한 숭배나 정밀에 대한 숭배가 우리를 압도하여 명징성과 단순성과 진리를 찾으려는 우리의 연구를 방해할 것이다. 과학에는 왕도가 없다; 성공을 보장하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지식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데 그런 지식론은 너무 많이 설명하고 너무 많이 예측한다.
더 나은 이론에 대한 이 선택은 더 나은 증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증인들과 만날 때, 우리는 그 증인들을 교차질문하려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고, 관련 세부사항들을 검토하고 또 반대로 검토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증인 중 한 증인을 선호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ㅡ 이성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모든 증언이 심지어 관찰에 국한될 때도 선택적이기 (모든 사고처럼) 때문에 비록 우리가 모든 증인은, 최고의 증인을 배제하지 않고도 다소 편향적이라고 전제하여도 ‘전체 진실을 그리고 진실만을(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이라는 이상은 엄밀히 말해서 도달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새로운 비판적 논증들이나 새로운 증거에 비추어 증인들 중 한 증인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개괄하여 나의 이론이 귀납 문제의 두 번째 단계에 던지는 ‘긍정적’ 기여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면을 또한 강조하는 데 필요하다.
우리가 뉴튼에 의하여 수정된 상태의 코페르니쿠스 모형이 프톨레미의 모형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합당하게 믿을지라도, 어떻게 가까운지를 말할 방법이 없다: 설령 우리가 박진성에 대한 측정 기준을 정의(定義)할 수 있을지라도 (거의 흥미롭지 못한 경우들에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ㅡ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ㅡ 그 기준을 적용할 수 없으리라. 태양계에 대한 우리의 현재 아이디어들이 진리에 가깝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고 그 아이디어들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토론이 그렇게 믿을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토론이 한 유일한 일은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진보했음을 믿을 충분한 근거들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닌 현재의 아이디어 중 몇 가지가 다른 대안들보다 더 진리와 유사하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이 그 위대한 돌파구였다 할지라도 태양이 우주의, 심지어 우리 은하계의 중심이라고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정당화할 수 없고 또 그 이론들이 참이라는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 이론들이 진리에 가깝다는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 이론에 대한 선호를 ㅡ 때때로 매우 강력한 선호 ㅡ 우리가 행한 토론의 현재 결과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
과학의 방법은 이성적이다:과학의 방법은 우리가 지닌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이 낳은 결과들을 수용하는 것이 이성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그 결과들에 고정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디에서 우리가 실망할지를 우리는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실용적 목적들을 위하여 과학의 결과들에 의존하는 것이 합당하거나 이성적이다. 왜냐하면 실행은 항상 선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 또는 저런 방식으로 행동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물론 행동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과학적 이론을 실제 행동의 토대로서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한, 그것은 또 다른 이론보다는 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할 위치에 있는 곳에서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 중에서, 시험을 포함하여 장기적인 비판적 토론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일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요점이 전개되어야 한다. 믿음은 실제 행동에서 많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행동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믿는 동물이다. 이론가는 이론가의 자격으로서 믿음 없이 일을 할 수 없다. 이론가에게 최대의 박진성을 지닌 듯한 이론은 신뢰할 이론이 아니라 추가 진보를 위하여 중요한 이론이다. 그 이론은 또한 이론가가 추가로 비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골라낼 이론이기도 하다.
물론 심지어 이론가도 이론가의 자격으로서 행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론가는 자신의 문제들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론가가 그렇게 하는 한, 그도 역시 믿음에 의하여 ㅡ 동시에 의심에 의하여 ㅡ 영향을 받을 것이다.
III
귀납 문제의 세 번째 단계는 내가 생각하기에 두 번째 문제보다 훨씬 덜 근본적이다. 첫 번째 단계는 방법에 ㅡ 어떻게 훌륭하고 나쁜 이론들을 구분하는가? ㅡ 관한 시급하고 실제적인 문제였다. 두 번째 단계는 덜 중요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시급했다. 왜냐하면 ‘믿는다(believe)’라는 어떤 평범한 의미에서 우리가 과학의 결과들을 정말로 믿고, ‘타당하다(reasonable)’라는 어떤 평범한 의미에서 이 믿음은 타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결책이 지닌 논리적 틀 속에서 어떻게 이 사실들이 설명될 수 있는지 즉시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다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세 번째 단계인 내가 지칭하는 바, ‘내일에 관한 문제’는 내가 보기에 우리가 처음 두 단계에 관한 명징성에 도달하지마자 전형적인 철학적 혼동이다 (정말로 그 단계가 형이상학적 네 번째 단계와 혼동되지 않는다면). 물론 흄이나 러셀과 같은 귀납주의자들은 그 단계가 내가 귀납의 문제로 불렀던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고 심지어 그 단계는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우월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비-귀납적 해결책의 본질적 부분은 문제의 첫 번째 단계가 지닌 근본적 특징과 문제의 세 번째 단계가 지닌 열등한 특징을 인식하는 데 정확하게 놓여있다. 우리는 문제의 세 번째 단계를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임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로서 혹은 ‘자연법칙들이 내일에도 지속적으로 타당할 것임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로서 설명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도 솔직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미래가 과거와 같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반대로 미래가 많은 면에서 ㅡ 정말로 귀납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연의 획일성(uniformity of nature)”의 보기들로서 언급될 거의 모든 면에서 ㅡ 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한 근거가 나에게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일용할 빵은 독으로 변할 것이다 (맥각병[麥角病: ergot]으로 인한 프랑스의 다수 중독 사례를 기억하라); 공기는 공기로 호흡하는 사람들을 질식시킬지도 모른다 (함부르크의 공기 독가스화[the air poisonings in Hamburg]를 기억하라); 그리고 우리의 가장 훌륭하고 우리가 가장 믿는 친구들이 치명적인 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전체주의적 사회들을 기억하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이 답변이, 첫 번째 질문이 의미하는 것이 두 번째 질문에 (‘자연법칙들이 내일에도 지속적으로 타당할 것임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의하여 더 명백하게 진술되었기 때문에, 요점에 맞지 않는다고 언급된다면 나의 답변은 다시 그리고 강조하여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오늘 자연의 법칙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내일 반증된 추측으로서 간주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사실상 이것은 맥각병으로 인한 다수 중독보다 더 빈번한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답변은 다시 요점에 맞지 않는다고 언급될 것이다; 던져진 질문은 반증될 가설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인 진짜 자연법칙들인 진짜 자연의 규칙성들과 그 규칙성들이 변할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하찮다. 자연에는 모든 종류의 변화가 있다; 그러나 소위 자연법칙은 변화들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 대한 서술이다; 그래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로 변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릇된 추측을 한 것이다: 그것은 다만 자연법칙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바, 귀납주의자들은 이 답변에 만족하지 않으며, 문제의 세 번째 단계인 내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귀납주의자들의 의혹은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에 관한 나의 견해 몇 가지와 연결되어 있다 (아래 IV장 참조). 입증의 등급을 요약된 보고서만으로서, 또는 비판적 토론의 완벽성에 대한 그리고 이론이 거치려고 제출된 시험들의 엄격성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이론이 지금까지 비판과 시험들을 견디어낸 정도에 대한 평가로서 나는 흔히 기술했다.
때때로 나는 입증의 등급을 또한 문제의 이론이 ‘시험들을 견디어냄으로써 생존하는 자체의 적합성을 증명할 수 있었던’ 등급으로서 또한 기술했다.그러나 그런 구절의 문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것이 나는 이론이 지닌 엄격한 시험들로부터 생존하는 과거의 적합성에 대한 보고서일 뿐임을 의미했다: 시험으로부터 생존함으로써 시험으로부터 생존하는 자체의 적합성을 밝히는 것이 (동물이건 이론이건) 미래의 시험 모두나 대부분이나 여하한 시험으로부터 생존하는 적합성을 보여주었다고 나는 다윈처럼 전제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론이란 아무리 잘 시험되었다 할지라도 내일 반증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는다 ㅡ 특히 어떤 사람이 그 이론을 반증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특히 그 사람이 그 이론의 시험에 관하여 새로운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나 입증의 등급이 이론의 과거 업적에 대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귀납법 문제가 내일의 문제라는 형태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론의 입증 등급이 ㅡ 다시 말해서 이론의 과거 업적 ㅡ 그 이론의 미래 업적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결정하지 않는가? 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은, 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과거 업적을 토대로 미래의 시험들로부터 생존할 성향을 이론에게 그릇되게 부여하지 않는가?
내 편에서의 그런 부여가 내 이론의 실패에 해당될 것이라는 데 나는 동의한다: 그것은 귀납적 추론일 것이다. 나에게는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진전된 논증들을 어느 정도라도 초월할 필요가 없다.
요점은 이렇다. 나는 고도로 입증된 이론이 특별하게 미래의 시험들로부터 생존할 것 같거나 생존할 개연성이 있거나 기타 등등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고도로 입증된 이론이 덜 입증된 이론보다 더 그렇다고도 나는 믿지 않는다. 반대로 이론이 생존하는 개연성은 다른 요인들 가운데서 과학의 그 특정 분야에서 진보 속도에, 혹은 다른 말로, 연구자들이 그 특정 분야에 지닌 흥미에 그리고 새로운 시험을 고안하려는 연구자들의 노력에 주로 달려있으리라. 그러나 진보 속도는 비판과 시험의 기준이 매우 높은 분야에서만 ㅡ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고도로 입증된 이론들을 가진 분야에서 ㅡ 매우 클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고도로 입증된 이론이 통상적으로 덜 입증된 이론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론의 기대수명은 그 이론의 입증 등급과 비례하여 혹은 그 이론이 지닌 시험들로부터 생존하는 과거의 힘과 비례하여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태양이 내일 뜰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나의 예측을 운동법칙들에 근거하지 않는가? 그것들이 위에서 자세하게 토론된 바와 같이, 이용 가능한 최고의 법칙들이기 때문에 나는 물론 그렇게 한다. 심지어 내가 이론적 의혹을 지닌 곳에서도 나는 나의 행동의 근거를 (내가 행동을 ㅡ 다시 말해서 선택을 ㅡ 해야 한다면) 이용 가능한 최고의 이론을 선택하는 데 두겠다. 그리하여 나는 내일 태양이 뜨는 데 내기를 걸 (내기는 실제적 행동이다)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미래의 비판으로부터 생존하거나, 가령, 비록 입증의 등급이 덜하다 할지라도 (또는 입증의 등급이 덜하게 보일지라도) 신경접합부 전달에 관하여 이용 가능한 최고의 이론보다 더 오래 비판으로부터 생존하는 뉴튼 (혹은 아인슈타인) 역학의 법칙에 내기를 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는 않는다. 실제적 행동들에 (이 이론들에 의하여 수행된 예측들에 내기를 거는 것과 같은) 관하여, 최고의 이론이 잘 시험되었다면 나는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 실제적 행동의 근거를 그 분야에서 최고인 이론에 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문제는 또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이론의 생존 문제는 그 이론이 지닌 역사적 운명과 관련된 문제이어서 과학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측을 위하여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이론의 적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연관되어 있지만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론들이 죽었다 ㅡ 다시 말해서 반증되었다 ㅡ 할지라도 그 이론들이 손아귀에 있는 목표를 위하여 충분히 훌륭한 근사치라면 우리는 흔히 이론들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이론의 부활에 내기를 거는 것을 거부함과 결합하여 한 가지 이론을 적용하는 데 내기를 걸 나의 각오에는 모순점이 없다.
잘 입증된 이론의 부활에 내기 거는 것에 대한 나의 거부는 과거의 생존으로부터 미래의 생존으로 내가 귀납적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IV
그러나 나는 과거의 업적으로부터 미래의 업적으로 실제로 귀납적 결론들을 도출하지 않는가? 러셀은 ‘우리의 과거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운동의 법칙이 작동에서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근거는 그 법칙들이 지금까지 작동했다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옳지 않는가?
이 귀납적 관점은 자체의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틀렸다.
먼저 우리는 운동의 법칙이 작동하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운동의 법칙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고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ㅡ 어떤 사건들을 설명하려고 ㅡ 발명되었다. 그 법칙들이 성공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덜 성공적인 경쟁하는 법칙들보다 그 법칙들에 의존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 새로운 이론을, 새로운 운동 이론 한 조를 제시하여 그 이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옛 이론이 해결하고 통과한 모든 시험들을 통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결정적인 시험들을 제시하기도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결정적인 시험들은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남아있던 옛 법칙들로부터 이탈을 우리게 제시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그 후 한 번 이상 발생했다 ㅡ 사실상 러셀의 저서가 발간되고 일 년 안에 한 번. 러셀이 ‘운동의 법칙’으로 로렌츠의 불변량[a Lorentz invariant set]을 의미했다고 나는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심지어 그가 저술하기 전에 발생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지금까지 작동했던’ 저 운동의 법칙들은 ‘작동 상태로’ 남아있지 않아서 그 법칙들이 작동 상태로 남아있음을 기대할 근거가 없었는데 이유인즉 우리가 지닌 현재의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 법칙들이 ‘작동 중’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셀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저 다른 운동법칙들이었다면 ㅡ 우리가 상정하건대 과거에 작동했던 운동의 사실적 법칙들 ㅡ 우리는 그 법칙들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리고 여전히 현재도 알려지지 않았다) 귀납적 추론은 ㅡ 자체의 과거 작동으로부터 자체의 미래 작동으로의 귀납적 추론은 ㅡ 이 알려지지 않은 법칙들에 근거할 수 없다고 강조해야 한다.
물론 어떤 사실적 법칙들이 실제로 과거에 작동했었다면 (그 법칙들이 실제로 과거에 작동했었다고 내가 믿는 바와 같이) 그 법칙들은 미래에도 계속해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귀납법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불변의 법칙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변화들을 설명한다는 그리고 모든 장소에서 항상 ‘작동하지’ 않는 ㅡ 다시 말해서 타당하지 않은 ㅡ 것을 진실한 (혹은 사실적) 법칙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러셀의 말을 더 자유롭게 해석해서 ‘태양이 내일도 떠오르는 것이 목격될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근거는 태양이 과거에도 떠오른 것이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지속적으로 회전할 것이라고 믿는 근거는, 우리의 관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지구가 과거에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한 언급이 운동의 법칙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타당할 것이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제시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분명히 효력이 없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선택적인 관찰들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신념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되는 적이 없다는 사실과 전혀 별도로). 왜냐하면 과거의 운동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이론들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은 러셀의 설명이 아니라 그가 표현하는 (확률에 대한 그의 다양한 언급을 포함하여) 감상이다. 우리가 물리이론이라고 부르는 특정 추측들의 진리를 (혹은 확률) 신뢰할 근거는 없을 따름이다; 한 가지 이론을 다른 이론들에 대하여 (확률이 아닌) 더 나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서 선호하는 근거들은 있을지라도. 이것은 큰 영향을 미친다.
V
귀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면서 성공하지 못했던 저 잘 알려진 난제들이 몇 가지 합당한 변화와 함께 나의 이론 안에서도 틀림없이 나타남을 밝히려고 노력한다면, 공정하고도 합리적인 논증 방식을 적용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 귀납주의자들에게 관한 한 가지 난제는, 가령 1950년까지 오직 검은 까마귀들만을 관찰하고 사람들은 ‘1970년 이전 모든 까마귀는 검었고 1970년 이후 까마귀들은 흴 것이다’라는 법칙보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법칙을 선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법칙 모두는 이용 가능한 관찰 증거들을 동등하게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히’ 두 번째 법칙보다 첫 번째 법칙을 선호한다고 일컬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제 동일한 문제가 추측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나의 이론 안에 다음과 같이 틀림없이 나타난다고 생각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목격한 두세 마리의 까마귀가 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는 설명을 원하여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떠올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든 까마귀는 1970년까지 검다는 경쟁하는 가설을 제시한다; 혹은 우리의 법칙은 오직 전칭명제만을 (‘1970년’은 개별적 명칭인 반면) 포함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세 번째 가설을 ㅡ (흰) 개기일식 동안에 촬영된 까마귀들을 제외하고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ㅡ 제시한다.
세 가지 가설 모든가 동등하게 증거와 잘 연계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왜 나는 두 번째 가설과 세 번째 가설보다 첫 번째 가설을 선호하느냐고 나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답변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론이 연결, 의존을 주장하는데 그 연결, 의존은 설명되어야 할 것이란 점이다: 왜냐하면 특정 날짜에 설명되지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기적을 수용하는 것에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 절 II 참조.) 오직 이것으로 인하여 두
가지 이론은 첫 번째 이론보다 열등하다. 게다가 우리가 지닌 새들의 색깔에 관한 과학적 이론들은, 개별 목적이 아닐 문제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몇 가지 잘 입증된 이론들과 (유전학의) 충돌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드는 특징을 지닌다. 단지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이와 같은 경우에 나의 선호를 설명하는 데서 어떤 어려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논증에 대한 나의 주요 반대의견은 전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지닌 모든 가설들은 추측이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추측을 ㅡ 심지어 우리들 대부분에게 완전히 어리석게 보일 추측들도 ㅡ 제시한다.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대담하고 비관습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아이디어들을 흔히 대면함으로써 이 자유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 아이디어들은 심각하게 고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는 진지하게 고찰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 가지는 첫 인상과는 반대로 언젠가 올바른 방향으로의 움직임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록 한 이론을 터무니없다고 선험적으로 배척하는 모든 과학자들이 위험을 감수한다 할지라도 그런 위험을 피할 길이 없다; 모든 새로운 추측의 제시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그 제시를 진지하게 수용할지 아니면 배척할 것인지의 결정 또한 위험하다. 귀납주의자들과 반대로 나는 주어진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한 가지 (귀납적으로 결정된) 이론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경쟁하는 이론들이 다수라는 ㅡ 물론 우리는 그 다수를 비판을 통하여 감소시키려고 노력한다 ㅡ 생각은 나의 방법론에 필수적이다.
그런 다수가 귀납주의자들을 당혹시킬지도 모르는 반면, 나에게는 전혀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
실제로 더 분명하게 ‘터무니없는’ 추측들은 비판을 통하여 제거될 것이다; 시험이 불가능하거나 덜 시험 가능한 것으로서; 자의적이거나 개별 목적인 것으로서; 구실도 없이 불필요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만족스러운 설명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아이디어들과 충돌하는 것으로서: 다소 모호하지만, 과학이론들처럼, 시행착오를 통하여 발전하는 아이디어들: 훌륭한 설명의 ‘모양’에 (기계적, 전기적, 통계적, 기타 등등) 대한 아이디어들. 물론 그런 고찰들로 인하여 우리는 때때로 훌륭한 이론을 배척할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의 하나이다; 그것은 과학이 지닌 추측성 특징의 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조류에 관한 달 이론을 잘못 배척했는데 이유인즉 (내가 다른 곳에서 제안한 바와 같이)아무도 점성술을 관찰하여
논박하거나 심지어 점성술이 ‘근거한’ 엄청난 양의 귀납적 증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가 나쁜 취향이라고 올바르게 느꼈던 것은 별들의 ‘영향력’에 대한 점성술적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다른 사례들은 유럽 대륙에서 뉴튼의 중력이론을 일찍 배척한 것이고 영국에서 영(Young)이 입자설을 반증할 때까지 뉴튼의 권위의 영향을 받아 호이겐스(Huygens)의 빛 파동설을 일찍 배척한 것이다.
그리하여 방법론자의 임무가 사실에 들어맞는 엉터리없는 이론들의 터무니없음을 설명하여 그 이론들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근거를 내놓는 것이라는 믿음은 순진하다: 우리는 자기들의 이론이 (그리고 자신들이) 인정을 받고 생존하는 것을 위하여 싸우는 일을 과학자들에 맡겨야 한다. 게다가 그 믿음은 귀납적 믿음이다. 한 이론을 수용하는 데 대하여 유일하게 충분한 근거는 과거의 관찰에 의하여 그 이론이 뒷받침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납주의자는, 매력이 없는 많은 이론들 모두가 가장 매력적인 이론만큼 과거의 관찰들에 의하여 똑같이 잘 뒷받침된다고 주장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면 분명히 당황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고도로 설명력을 지닌 이론이 어떤 이유 때문에서든지 (갈릴레오의 달과 관련되지 않은 이론이 자신에게 보였던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매력적이고 희망이 있는 듯이 보인다면, 심지어 내부의 난제들에 직면해서도 그리고 심지어 분명한 경험적 반증에 직면해서도 그가 그 이론을 고수하여 너무 일찍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옳다; 그는 결국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지적(知的) 노력이 비판을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클수록 그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더 많이 배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수정하는지를 즉각 알지 못하는 탁월한 아이디어들을 우리가 잃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독단론과 완고함이 필요하다.
과학의 비판적 방식 안에는 심지어 미친 비주류를 위한 장소와 기능이 있다. 대학들이 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을 생산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더 수수하고 더 진보적인 목표에 ㅡ 돌팔이와 학자 혹은 과학자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을 생산하는 목표 ㅡ 만족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예전에 글을 썼다.나는 L. E. J. 브로우베르(Brouwer)에 의하여 즉각
바로잡혔는데 그는 심지어 이 문구도 교수들이 흔히 외부인을 멸시하는 진보적이지 못한 우월감을 고취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진보적이 아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과학에는 심지어 돌팔이를 위한 공간도 있다고 지적하여, 이런 종류의 차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올바르게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개기월식 동안에 촬영된 까마귀를 제외하고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이론과 같은 모든 이론을 비난하는 데 대하여 방법론적인 근거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이론을 쉽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성들의 각거리 몇 가지가 다소 다른 것으로 밝혀질 때 개기일식 동안에 촬영된 항성들을 제외하고 황도 십이궁도(Zodiac) 지역에서 항성의 무리들은 항상 동일한 상대적 각거리들을 보인다는 아인슈타인의 법칙에 반대하여 우리는 선험적 근거들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사진술이 무엇인지 갈릴레오가 알았더라면 그는 이 아인슈타인의 법칙이 불쾌한 점성술적 풍미를 지녔다고 쉽게 느꼈을 것이다.
VI
지금까지 우리의 토론은 논리적이거나 방법론적이거나 인식론적이었다. 우리의 토론은 내가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 당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나 정당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왜 경쟁하는 추측들에 비하여 이 추측을 선호하는가? 당신의 선호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갈음했다고 말함으로써 요약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 ‘나는 알지 못한다’인 반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통상적으로 더 잘 입증된 이론에 대한 우리의 선호는, 물론 시험 결과에 대한 우리의 토론을 포함하여 우리의 비판적 토론에 사용된 저 논증들에 의하여 이성적으로 옹호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들은 자체의 입증의 등급이 요약 보고서를 제공하도록 의도된 논증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는 풀렸다.
물론 귀납법 문제의 모습이나 단계로 일컬어질 많은 문제들이 남는다; 그리고 그 문제들 중 몇 가지는 논리적 문제들일 것이다. 남은 주요 문제는 ㅡ 나는 그 문제를 귀납 문제의 네 번째 단계라고 부른다 ㅡ 그 문제가 지닌 이미 토론된 문제들과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다른 특징을 지닌다.
5. 그 문제의 네 번째 단계가 형이상학적인 이유.
문제의 네 번째 단계는 형이상학적이다. 그 단계에 포함된 도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알고 있다. 흄은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알고 있다: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은 이런저런 정도로 의심할 바 없이 관찰된 규칙성들에 근거한다: 낮과 밤의 변화, 계절의 변화, 그리고 유사한 경험들에 근거한다. 그리하여 흄은 틀림없이 틀렸다. 당신은 왜 그가 틀렸는지 밝힐 수 있는가? 밝힐 수 없다면 당신은 당신의 문제를 풀지 못했다.
나는 비록 이 도전정신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도전정신에 진심으로 동조한다.
처음에 우리는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는 주장을 해석하는 몇 가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있다:
(1) 자연의 불변하는 규칙성들을 기술하는 적어도 한 가지 참인 전칭명제가 (현재) 있다.
(2) 자연의 불변하는 규칙성들을 기술하는 (아직 표현되었든 아니든) 어떤 가능한 전칭명제는 참이다.
(3) 자연에는 규칙성들이 (표현된 적이 있든, 또는 표현될 수 있든 혹은 아니든) 존재한다.
이 모든 주장들은 흄의 귀납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 그 주장들과 관련된 문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다 ㅡ 게다가 몇 가지 다양한 면에서.
첫째로, 흄이 밝힌 것은 우리가 ‘모든 백조는 희다’와 같은 보편적 법칙을 흰 백조에 관한 아무리 많은 관찰들로부터 (혹은 관찰 서술들)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목록화된 서술들(1-3)은 보편적이 아니다: 그 서술들은 단칭 존재언명들(singular existential statements)이다. 그러므로 그런 단칭 존재언명이 관찰이나 아마도 우리의 경험에 대한 숙고에 어떻게 연역적으로 관련되는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의 주장은 ㅡ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 ㅡ 존재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특정한 물리법칙을 언급하지 않고 적어도 한 가지의 그런 법칙이 참이라고 주장할 따름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특정한 물리법칙을 가리키어 다음과 같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법칙은 현재의 설명과 해석에서 참이다: 나는 그 법칙이 반증되지 않거나 수정되지 않거나 조건적으로만 타당한 것으로서 인정되지 않거나 어떤 한계 안에서만 타당한 것으로서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동시에 적어도 우리의 현재 물리 철학체계의 법칙들 중 몇 가지가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나는 그 법칙들 중 많은 법칙들이, 우리가 더 낮은 수준의 보편성에 놓인 법칙들을 포함한다면, 참이라고 심지어 말하겠다.
둘째로, 우리의 주장은 적어도 처음 두 가지 해석에서도 물리학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장은 물리학의 (혹은 아마도 일반적인 과학의) 이론들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주장이 물리학의 메타 이론(meta-theory)에 속한다고 말을 함으로써 표현될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타스키[Tarski]가 물리과학의 ‘의미론[semantics]’이라고 부른 것에 속한다.) 과학의 서술들은 비-언어적 대상에 관한 것인 반면, 우리의 주장은 그리하여 언어적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은 우리가 어떤 다른 언어에 (‘대상언어[object language]’)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언어에 (‘메타-언어[meta-language]’)에 속하고 그 다른 언어는 (‘대상언어[object language]’) 반대로 세상을 언급한다. ‘어떤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는 서술은 세상에 관한 추측인 동시에 또한 자연법칙들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다. 흄이 지녔던 원래 문제가 자연법칙과 어떤 관찰성 경험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관련된 반면, 우리가 지닌 새로운 문제는 자연법칙들에 관한 해설들과 관찰성 경험들에 관한 해설들 (혹은 숙고) 사이의 논리적이거나 다른 방식의 관계에 관련되어 있다.
적어도 한 가지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는 우리의 주장이, 내가 방금 말한 것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학에 속한다는 것은 여기서 반대의견에 직면할지도 모르겠다. 자연법칙들이 과학에 속한다는 주장은 아마도 타당할 것이고, α가 자연법칙이라면 ‘α는 참이다’가 α로부터 귀결되고 (타스키의 ‘참[true]’이라는 정의에 따라서) ‘α는 참이다’와 ‘α는 자연법칙이다’로부터 우리는 물론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를 얻는다. 나는 다음과 같은 도출의 옳음을 인정한다: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는 정말로 과학적인 법칙으로부터 귀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학적 법칙은 추측성이기 때문에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는 서술은 따라서 참일 필요는 없다; 그 서술은 법칙 α의 추측성 특징
을 계승한다. 동시에 그 서술은 과학적 법칙으로부터 귀결됨으로써만 과학적 특징을 획득하지는 않는다: 시험이 불가능하여 과학적이지 않는 서술들은 시험 가능한 서술로부터 하찮게 귀결된다. 그리고 특히 ‘참인 과학적 (혹은 시험 가능한) 보편적 법칙이 있다’는 서술은 따라서 시험 불가능하다. 물론 그 서술은 우리가 방금 본 바와 같이, 과학적 법칙의 어떤 (추측성) 주장으로부터 귀결된다.
이 도출의 흥미를 또한 약화시키는 또 다른 문제는 우리의 과학적 토론에서 과학적 추측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논증들은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는 추측을 뒷받침하여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증들은 한 가지 법칙이나 또 다른 법칙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뒷받침할 따름이고 그 법칙들 중 하나가 참이라는 견해를 확립하거나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의 주장에 대한 세 번째 해석에서 (내가 주로 여기서 관심을 갖는 해석) 우리의 주장은 형이상학적 특징을 띤다 ㅡ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이라는 용어의 많은 관습적 의미 중 몇 가지에서, 그리고 그 용어가 ‘논리적(logical)’이나 ‘방법론적이나(methodological)’이나 ‘인식론적(epistemological)’과 구별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순전히 방법론적인 주장들과 달리, 그리고 또한 순전히 메타 언어적 주장들과 달리, 그러나 과학 자체의 추측들과 같이, 우리의 주장은 세상에 관한 추측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참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상이 완전히 혼란스럽지 않고 말하자면 어떤 구조적 규칙성들을 ‘붙박이로(built-in)’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것이다. 그래서 그 주장은 세상의 구조 이론에, 일종의 일반적 우주론에 속한다: 그 주장은 형이상학적 우주론에 관한 추측이다.
분명히 우리의 추측은, 존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없다; 그 주장은 반증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주장은 검증될 수도 없는데 이유인즉 법칙들은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이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라는 용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주장을 ‘형이상학적(metaphysical)’으로 기술할 것이다. (6절과 비교하라.)그리고 반증될
수도 없고 검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은 실증주의자들의 의미에서 아마도 또한 ‘형이상학적’이다.
우리의 주장은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의 전통적 의미에서도 또한 ‘형이상학적’인데 이유인즉 우리의 주장이 형이상학의 특징으로서 간주될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예를 들어 보편적 인과 원칙과 동일한 종류의 주제를 다루는데 그 원칙의 한 가지 가능한 공식화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에 대하여 참인 보편적 법칙들과, 문제의 사건을 기술하는 서술이 추론될 수 있는 참인 초기 조건들이 존재한다.’ 이것 또한 세상과 세상의 구조에 대한 주장이다.
우리 주장에 대하여 가능한 형이상학적 해석이 무엇이든,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주로 지식의 방법론이나 지식이론에 속한다는 것이 반대의견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참인 법칙을 탐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찾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탐구에서 그런 법칙들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는 방법론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비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매우 잘 찾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것도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정하지 않거나 추정하지 않거나 전제하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 가지 법칙을 시험할 때 우리는 그 법칙에 대한 반대사례를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반대사례의 존재를 상정하지도 않고 추정하지도 않고 전제하지도 않는다. 정말로 반대사례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험하고 있는 법칙은 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를 추정하거나 상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을 것이다 ㅡ 그리고 정말로 의심할 바 없이 믿는다. 그리고 아마도 이 믿음은 우리가 참인 법칙들을 탐구하는 데서 심리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심지어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방법론적인 전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믿음은 심리학적 믿음이 될 뿐일 것이다.
그런데 나도 이 믿음을 지니고 있고, 그 믿음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대안보다도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믿음을 이해하는 ㅡ 그리고 평가하는 ㅡ 최고의 방법은 그 믿음을 세상의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추측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 문제로 선회하기 전에, 그러나, 또 다른 다소 방법론적인 반대의견이 있다 (이 문장의 원문은 Before turning to this metaphysical issue, however, there is another more or less methodological objection인데 분사구문 Before turning to this metaphysical issue는 Before we turn to this metaphysical issue로 표현하여 주절의 가주어 there와 다른 주어 we를 표시해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역자); 위에 언급된 보편적 인과율과의 연결을 역시 이용하는 반대의견.
많은 철학자들은 보편적 인과율이 (또는 ‘자연의 균일성[Uniformity of Nature]’인데 아마도 훨씬 더 모호한 문구이다) 지닌 진리 문제가 흄의 문제와 대등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인과율이 자체의 타당성이 귀납적 추론을 타당하게 만들 귀납법의 원리로서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철저하게 오류이다. 그 제안은 아인슈타인 이전 시절에는 아마도 변명될 수 있었지만 그 후 그렇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이래 귀납적 원리는 ㅡ 귀납적 추론 자체를 타당하게 만들 원리 ㅡ 존재할 수 없음이 틀림없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뉴튼의 이론만큼 잘 확인된 이론이 거짓으로 밝혀질 것이라면 분명히 심지어 최고의 귀납적 증거도 이론의 진리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귀납적 추론을 도출하는 것을 허용할 어떤 귀납적 원리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귀납적 원리는 문제의 귀납적 원리에 맞추어 귀납된 이론의 첫 번째 반증에 의하여 반증될 것이다.
그러나 흄의 문제에 대하여 타당한 귀납 원리의 형태로 된 긍정적 해결책이 존재할 수 없다면, 보편적 인과율은 ㅡ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ㅡ 타당한 귀납 원리일 수가 없다. 동일한 결과가 보다 직접적으로 논증될 것이다: 보편적 인과율은 참일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적 진보를 이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ㅡ 아마도 이유인즉 초기 조건들이 매우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 조건들이 실제로 심지어 비슷하게도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거나 보편적 인과율이 지닌 복잡성 때문이거나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리하여 보편적 인과율은 참이라하더라도 방법론적인 의미를 띠지 않을 것이다. ‘자연법칙을 탐구하라’는 의미 있고도 중요한 방법론적 규칙은 보편적 인과율로부터 귀결되지 않는다. 또한 이 명령에 맞추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이 약속되지도 않는다.
보편적 인과율에 방법론적 의미가 없다면,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훨씬 더 약한 주장인 ‘자연에는 규칙성들이 존재한다’가 ㅡ 자체의 타당성이 우리가 지닌 문제의 네 번째 단계에서 질문되는 주장 ㅡ 또한 직접적인 방법론적 의미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연에 규칙성들이 있음을 우리가 확실하게 안다고 할지라도 귀납법에 반대하는 흄의 논증들은 타당할 것이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수백만 번의 관찰도 모든 사람이 영어를 말한다는 것을 확립하지 않을 것이다: 표본이 지닌 요소들에 대한 어떤 관찰 절차도 우리가 공정한 표본을 마주대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불변하는 규칙들이 없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 할지라도 ㅡ 모든 분명한 법칙들에게 반대사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ㅡ 시행착오라는 비판적 방법을 통하여 그렇게 궁극적으로 비이성적인 세상을 가능한 한 멀리 합리화하려고 노력하는 데는 여전이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형이상학적 문제는 주로 학문적이어서 우리가 해결한 논리적이자 방법론적인 문제들과는 특징에서 전혀 다르다. 우리가 지닌 문제의 네 번째 즉, 형이상학적 단계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인식론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흄의 귀납법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는 나의 주장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에 대한 해결책은 나의 주장을 확립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귀납법에 반대하는 흄의 논리적 논증은, 자연에는 규칙성들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형이상학적 주장과 즉각적으로 관계가 없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에 반대하여 ㅡ 그러나 그의 논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ㅡ 우리가 이 형이상학적 주장을 옹호해야 할 것임은 철저하게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그의 형이상학을 반대하여.
이제 우리는 귀납의 네 번째 단계 즉, 형이상학적 단계를 보다 명백하게 다시 설명하는 위치에 왔다. 우리는 그 단계가 내일의 문제의 한 모습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규칙성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참인 자연법칙들이 있다는 형이상학적 추측이 자체에 대하여 알려진 대안들보다 더 나아서 믿는 것이 합당한 추측이라고 동의했다 (나는 동의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논증될 수 있다: α가 그런 법칙이라면 α는 미래에도 ㅡ 가령 내일 ㅡ 계속해서 적용되거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흄과 의견을 같이한다면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의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에 비추어 한 가지 과학적 추측은 또 다른 과학적 추측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흄이 옳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왜 이 형이상학적 추측을 믿는 것이 다른 대안적 추측들을 믿는 것보다 더 합리적임을 우리는 수용해야 할까? 예를 들어 모든 분명한 규칙성들이 서서히 변해서는 안 되는가? 나의 앞선 논증은 그 논증이 방법론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적용될 수 없는 듯하다: 과학의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나의 앞선 논증은 왜 알려진 규칙성들 안에서의 변화가 새로운 (추측된) 법칙들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되어야 할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른 의문들과 대면했다. 우리의 의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전에 생각되었든 아니든 모든 규칙성들이 실패하기 때문에 왜 과학과 과학의 방법은 내일 철저하게 실패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이것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과학과 과학의 방법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변화가 내일 일어난다 할지라도 참으로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작동할 적어도 한 가지 규칙성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합당한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은 우리를 얼마동안 점령할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나는 ‘내일’이나 ‘미래’와 같은 시간적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순진한지를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런 설명은 한 가지 규칙성을 당연한 것으로 순진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시간의 순서.
사실상 ‘미래는 과거를 닮을까?’와 같은 모든 설명은, 직감적으로 ‘자연스럽지’만 고도로 의심스러운 시간론(theory of time)을 무비판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순진하게도 근거한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주장되고 표현되고, 단어들로써 명시적으로 처음 설명한 사람들 중 뉴튼이 한 사람이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론이었다: ‘절대적이고 참이고 수학적인 시간은, 스스로, 그리고 자체의 특성으로부터, 외부적인 것에 관련 없이 균일하게 흐른다.’
귀납법 문제를 시간적 용어로 (‘미래’나 ‘내일’) 설명하는 사람들은 이것이나 시간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유사한 이론을, 자체의 문제성 특징을 인식하지 못한 듯이 보이면서,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래나 내일 지금까지 타당한 규칙성들과 다른 규칙성들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연 법칙들이 변할지를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래나 내일이 자연법칙들에서의 변화로부터 독립적으로 올 것이라는 이론이 생겨난다. 그래서 그들은 발생하는 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연법칙들에서의 변화로부터 독립적인 시간의 흐름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확하게 뉴튼이 기술하려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들은 뉴튼보다 더 순진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공식화하면서 어떤 자연법칙들이 ㅡ 절대 시간의 흐름의 법칙들 ㅡ 흄의 의심에서 제외됨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자신들을 경험주의자이자 귀납주의자들로 믿을지라도 그들은 칸트와 함께 이 시간의 법칙들이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전제한다.
이 관점은 다음과 같은 방향을 따르는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대등하다. 시간이 (그리고 아마도 공간이) 있고, 자연의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발생한다. 세상은 사건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며 (헤라클리투스가 최초로 깨달은 바와 같이)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시간 안에 (그리고
아마도 공간 안에) 놓인다.
이 우주론은 라이프니츠(Leibniz)와 버클리(Berkeley)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는데 버클리는 독립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관련설(relational theory of time and space)을 제안했다. 시간은 사건들 사이에서 타당한 관계들을 (이전[before]; 이후[after]; 동시적[simultaneous]와 같은) 배열하는 체계로서 간주되었다; 그리고 공간은 사물들 사이에서 타당한 관계들을 배열하는 체계로서. 세상은 여기서 다시 사건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자체의 존재가 한 사건이 존재하는 조건인 한 가지 시간 안에 놓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건들의 총체만, 그 사건들의 시간적 관계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시간’은 이 시간적 관계들의 추상적 체계에 대한 이름인 한 가지 단어일 뿐이다. 이 보다 정교한 관점은 아마도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점은 심지어 아인슈타인 이전에 과학에서 상당히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6. 형이상학적 문제.
보편적 인과의 형이상학적 원리는 내가 신뢰하지 않는 원리이다.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나는 이 후기의 II권에서 토론될 더 강력한 ‘과학적’ 결정론의 원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훨씬 더 약한 원리인 ‘적어도 한 가지 참인 자연법칙이 있다’를 정말로 신뢰한다. 나는 그 원리를 지지하여 다양한 논증들을 개괄할 것이다. 그 후에 나는 내가 채택하자고 제안하는 형이상학적 위치에서의 난제들 중 몇 가지를 주목할 것이다.
먼저 2절과 4절에 주어진 문제의 첫 번째 단계에 대한 나의 답변을 다시 고찰하자. 나는 그곳에서 과학적 이론들은 참일지도 참이 아닐지도 모르는 짐작이나 추측임과, 우리는 이론에 대하여 그 이론이 참이라 할지라도 그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지금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그 이론이 참이어서는 안 되는 근거가 아니다. 그 사실은 믿음을 유보하는 근거이겠지만 틀림없이 불신의 근거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론이 거짓이라고 믿는 근거는 아니다.
우리는 4절에 주어진 세 번째 단계에 대한 답변을 이제 다시 고찰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새로운 논증들에 비추어 우리의 생각을 바꿀 각오가 되어 있다면 철저하게 토론되어 잘 시험된 이론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 (그리하여 신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경험적 증거에 비추어.
어느 정도까지 이 말은 문제의 네 번째 단계를 또한 해결한다. 왜냐하면 서술을 신뢰한다는 것과 서술의 진실성을 신뢰한다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스키[Tarski]의 이론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토론되어 잘 시험된 자엽법칙이 존재한다면 참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상당한 숫자의 철저하게 토론되어 잘 시험된 자연법칙들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한 가지 참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음에 대한 정말로 경험적인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이 답변은 아직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우리가 최초로 공식화하면서 흄에 대한 언급은 이 불만족에 대한 근거의 실마리를 아마도 포함하고 있다: 흄은, 공언된 관념론자가 아니라면,
물리적 세상의 실제성에 관한 적어도 회의론자였다. 그의 회의론은 귀납법에 관한 그의 견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법칙들에 의하여 배열된 물리적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지닌 힘을 인정했지만 이 믿음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질문의 네 번째 단계가 다음과 같았어야 함을 제시한다: ‘나는 우리가 실제적 세상에, 그리고 법칙들의 형태로 우리에게 출현하는 어떤 종류의 구조적 질서를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합당하다는 것을 당신은 밝힐 수 있는가?’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와 관련된 문제인데 물리적 물체들의 존재를 강조한다기보다 법칙들의 존재를 강조하는 형태를 띤다. 왜냐하면 물리적 물체들이란 유일하게 그 물체들의 (상대적) 영원성을 보장하는 세상의 법칙-같은 구조의 모습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 물체들의 존재가 (그 존재에 관하여 흄은 매우 회의적이다) 객관적인 물리적 규칙성들의 존재를 유발함을 의미한다. (16절과 비교하라.)
7. 형이상학적 사실주의.
형이상학에 관한 파멸적 두려움은... 철학화 하는 현대 경험주의자들의 질병[이다]....
이 두려움은 예를 들어 한 ‘물체’를 한 ‘묶음의 특질들’로서 ㅡ 우리 감각의 원재료
가운데서 발견될 것으로 추정되는 ‘특질들’ ㅡ 해석하는 동기인 듯하다... 반대로
어떤 위험한 종류의 형이상학이 물리적 물체에 (또는 물리적 대상) 대한 생각을,
그 물체에 합당한 시공구조와 함께, 자주적 개념으로서 그 체계에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ㅡ 앨버트 아인슈타인 ㅡ
다행히도, 혹은 아마도 불행히도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ㅡ 적어도 아인슈타인이 언급하는 ‘위험한 종류’의 형이상학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 후기 또한 그런 책이 아니다. (79절의 두 번째 문단과 4 및 28절의 말미와 비교하라.)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를 신뢰한다.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제시된 해결책을 중 어떤 해결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도 이용되지 않는다. (이것에서 나의 방법은, 버클리와 흄에서부터 가령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이르며 자신들의 인식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관점들을 사용하는 관념론자들의 통상적 관행과 다르다.) 나의 방법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가 주장하는 것의 한 주장이 아니며 또한 나의 방법은 추정의 역할을 어디에서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방법은 그 책에 매우 많다. 나의 방법은 우리의 진리탐구에 요점을 부여하는 일종의 배경을 형성한다. 이성적 토론은, 다시 말해서 진리에 근접하려는 관심을 지닌 비판적 논증은 우리가 발견을 우리의 임무로 만드는 세상인 객관적 실제 없이는 무의미할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거나 주로 알려지지 않은 실제: 우리의 지적(知的) 창의력과 용기와 솔직성에 대한 도전. 과학적 발견의 논리 안에는 사실주의와의 타협이 없고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관찰을 통해서만 세상을 안다는 견해와의 ㅡ 우리가 알거나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의 관찰 경험들이라는 교설을 그렇게 쉽게 낳는 견해 ㅡ 타협도 없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V장과 비교하라.)
과학적 발견의 논리라는 저서에 퍼져있는 주로 함축적이라 할지라도 강력한 이 사실주의는 내가 어느 정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 중 한 가지 모습이다. 그 사실주의는 자체를 이 후기와 연결하는 자체의 모습들 중 하나이도 한데 후기 각권은 지식에 대한 주관주의적이거나 관념론적인 접근방법들 한두 가지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여기와 다음 9개의 절에서, 단지 개괄적으로라 할지라도, 특히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몇 가지 방식에서 과학의 (혹은 1절에서 설명된 의미로 ‘과학적 지식’의) 구조 및 위상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그런 상태로 토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16절까지 이 토론에 몰두할 것이다.
베이컨에서 흄과 밀(Mill)과 러셀에 이른 경험주의 철학자들의 의도는 실제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다. 아마도 버클리를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철저한 사실주의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관주의적 인식론은 그들의 사실주의적 의도와 충돌했다. 감각경험에 세상에 관한 우리의 이론들을 시험하거나 검토하는 중요하지만 제한적인 힘을 귀속시키는 대신에 이 인식론자들은 ‘모든 지식이 감각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이론’을지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출된다(is derived)’를 ‘귀납적으로 도출된다(is inductively derived)’나 훨씬 더 흔히, ‘시작된다(originates)’와 등치했다. 그들은 인식론 학자들의 흥미를 틀림없이 일깨우는 것은 아이디어들의 출처가 아니라 이론들이 지닌 진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론이 지닌 진리나 허위성의 문제는 분명히 이론이 우리에게 제출된 후에 ㅡ 다시 말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이후에 ㅡ 발생할 따름이라는 것과 그 이론의 출처에 관한 경로는 그 이론이 지닌 진리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나는 천둥은 무거운 구름들이 충돌해서 생기는 소음이며 번개는 그 구름들의 마찰 때문에 생기는 매우 뜨거운 불꽃임을 당연히 여기는 티롤 산맥[Tyrolese mountains] 속에 사는 늙은 농부를 잘 기억한다. 이 솔직한 이론의 역사적 출처가 현대 기상학자들이 채택한 더 정교한 이론의 역사적 출처보다 틀림없이 덜 의심스럽다는 ㅡ 다시 말해서 귀납적 모형에 더 가깝다는 ㅡ 데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은 감각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경험주의 철학자의 믿음은 모든 지식은 틀림없이 우리의 현재 감각경험의 지식이거나 (흄의 ‘인상의 개념[ideas of impressions]’) 우리의 과거 감각경험의 지식 (흄의 ‘숙고의 개념[ideas of reflection]’) 중 하나이라는 견해를 필연적으로 낳는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된다. 이 주관적인 토대 위에는 어떤 객관적인 이론도 세워질 수 없다: 세상은 나의 생각의, 나의 꿈의 총체가 된다.
세상이 나의 꿈이라는 교설은 ㅡ 다시 말해서 관념론 교설 ㅡ 반증될 수 없다. 그 교설은 모든 반증을 꿈으로서 해석함으로써 모든 반증을 다룬다 (심리분석이 모든 비판을 그 비판으로 심리 분석함으로써 다룰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론에 대한 반증불가능성이 그 이론을 선호하는 요점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은 오류다. 반증불가능성은 장점이 아니라 악덕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사실주의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실주의 또한 반증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에 대한 반증은 관념론자의 꿈일 뿐이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있던 동안에 우리가 꿈을 꾸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보여줄 깨어남일 것이라고 관념론자는 꿈을 꾼다. 그러나 논증으로서 이것은 심지어 사실주의를 반증하는 경향조차 없다. 깨어나서 우리가 꿈을 꾸고 있었음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가 현실로부터 꿈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것일 뿐이다.) 관념론에 대한 반증불가능성으로부터 사실주의에 대한 증명불가능성이 귀결되고 역순도 가능하다. 두 가지 이론 모두 증명될 수 없고 (그리하여 인공적이다) 또한 반증불가능하다: 두 가지 이론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나 두 이론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거짓이고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는 참이다. 물론 우리가 2 + 3 = 5를 안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이것을 ‘알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증명 가능한 지식의 의미에서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또한 시험 가능한 ‘과학적 지식’의 의미에서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 불합리하다거나 터무니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더 많거나 더 강력한 (비결정적이라 할지라도) 논증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사실적 지식이란 없다.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를 뒷받침하는 긍정적 논증들을 더 완벽하게 고찰하기 전에 나는 먼저 몇 가지 부정적인 논증들을 토론하겠다: 그 논증들은 관념론을 비판함으로써 사실주의를 뒷받침한다.
주관적이거나 관념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관념론의 가장 강력한 형태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다. 관념론을 옹호하는 인식론적 논증은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 자신의 경험이고 내 자신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다른 정신들에 관해서는 나는 직접적인 것을 알 수 없다. 사실상 다른 정신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몸에 대한 나의 지식에 틀림없이 의존할 것이다: 우리는 몸에서 분리된 정신에 대해서는 경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 몸이 나의 꿈의 부분들일 뿐이라면 다른 정신들은 틀림없이 훨씬 더 그러하다.
다른 정신들에 대한 문제는 최근에 주로 인식론적 용어로 끝없이 토론되었다. 내가 이 토론기록들을 모두 읽지는 못했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정신들의 존재에 대한 나의 단순한 논증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용되었다는 것은 (비록 나의 논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용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만족한다 ㅡ 아마도 나는 이런 종류의 탐구에서는 논증이 결정적일 수 없음을 나는 항상 기억하기 때문에.
나의 논증은 이렇다. 내가 바흐의 음악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창조하지 않았음을 나는 안다; 내가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보티첼리의 그림을 창조하지 않았음을. 그와 같은 일은 내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철저히 확신한다: 나는 그런 능력을 나의 내부에 지니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내가 바흐를 모방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특히 잘 알고 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바흐의 창조력을 더 인정하게 되었다.) 일리아드나 지옥(Inferno)이나 템페스트(Tempest)와 같은 것을 쓸 상상력이 나에게는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가능하다면 평범한 만화를 그리거나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거나 내가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귀납법의 정당화에 관한 책들 몇 권을 저술할 나의 능력은 훨씬 더 떨어진다. 그러나 유아론적 가설에 관하여 이 모든 창작물은 내 자신이 꿈을 꾼 창작물일 것이다. 그 창작물들은 나의 상상물의 소산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정신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만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리가 없음을 나는 안다.
논증은 물론 비결정적이다. 나는 아마도 나의 꿈에서 내 자신을 과소평가할 (동시에 내 자신을 과대평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의 범주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은 나를 완벽하게 만족시킨다.
나의 논증은 물론 한정되고 불완전한 정신은 자체로부터 신(神)의 개념을 창조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논증과 다소 유사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논증이 더 확신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논증과의 유추는 물리적 세상으로의 간단한 확장을 의미한다. 내가 내 자신의 상상력으로부터 스위스의 산이나 빙하처럼 또는 심지어 나의 정원의 꽃 몇 송이과 나무 몇 그루처럼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우리의 세상이 내가 만들지 않은 세상임을 알고 있다.
나는 이 논증이 나를 만족시킨다는 것을 반복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마도 나는 그 논증이 실제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정신들이나 물리적 물체들의 실제성을 의심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정말로 이 논증에 대하여 내가 생각할 때 유아론이 (혹은 더 일반적으로 다른 정신들의 존재에 대한 의심) 인식론의 형태라기보다는 과대망상의 형태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유아론과, ‘다른 정신들’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다른 형태의 관념론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그만큼하자. 여기에 제시된 논증과 같은 논증들 때문에 버클리(Berkeley)가 유아론자가 될 수 없었음은 내가 보기에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신(神)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더불어 다른 정신들이 있다는, 그리고 우리가 많이 장관인 것인 우리의 경험의 세상을 감지하도록 만든 것은 신(神)이었다는 견해에 도달했다.
버클리가 번역하는 관념론은 다른 관념론만큼 반증불가능하고 자체를 추천할 것이 없다. 심지어 인식론적 논증은 유아론적 주장을 선호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신(神)이나 다른 인간 정신들과 같은 감지되지 않는 실체들이 인정되자마자 인식론적 논증의 도움을 받는 것은 더 이상 확신을 주지 못함이 분명하다 (이 문장의 원문은 Even assuming that the epistemological argument favours the solipsistic thesis, it is clear that the appeal to the epistemological argument can no longer be convincing once realities are admitted which are not perceived, such as God and other human minds인데 분사구문 Even assuming that the epistemological argument favours the solipsistic thesis의 주어가 주문장의 [가]주어 it일 수 없기 때문에 분사구문을 쓰지 않고 종속절로 주어를 표시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Even because we assume that the epistemological argument favours the solipsistic thesis로 종속절을 구성해야 한다. 문법적인 오류이다. 역자). 인식론적 관념론과 기독교를 절충하려는 버클리의 시도는, 사실상 두 가지 모두를 해치는, 겉으로 보이는 화해를 유발한다. (인간에 의해서 가 아니라 하느님의 즉각적인 행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이 더 이상 그리스도에게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는 피해를 입는다.)
이 논증들 중 어떤 논증도 틀림없이 필요가 없다. 사실주의는 그렇게 분명하게 참이어서 심지어 여기에 제시된 것과 같은 솔직한 논증도 조금 불쾌할 따름이다. 내가 혐오하는 버릇 조금을 나에게 상기시키는 어떤 진부함이 사실주의 주위에 있다: 실제적 문제없이 철학화하는 진부함.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은 동일한 종교를 지니고, 합리적인 사람은 그 종교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다.’나의 논증을 계속하는 것은 이 현명한 말의
후반부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관념론자들이 사실상 실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불공평할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우리가 지닌 지식에 대한 (긍정적인) ‘정당화’이어서 그들은 함정에 빠졌다: 사실주의를 ‘정당화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자신들 스스로의 발견에 빠졌다 W. W. 바틀리(Bartley) III세가 나에게 지적한 바에 따르면 긍정적인 ‘정당화’ 프로그램 전체를 무효한 것으로서 배척하고 그 프로그램을 비판의 프로그램을 갈음하는 관점으로부터 관념론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위 2절을 참조하라.) 나는 이 경고를 수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적 철학자들 가운데서, 사실주의가 참이라 할지라도 사실주의가 거짓이라면 우리가 관념론자들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관념론자들이 의미하는 바에서 우리가 사실주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요점을 누가 강조했던가? 게다가 결과적으로 사실주의에 대한 ‘정당화하기’의 불가능성은 사실주의가 지닌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상황이 문제의 논리적 구조를 규정짓기 때문에 그 논리적 구조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ㅡ 혹은 정말로 유사한 논증을 ㅡ 사실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으로서 사용한다는 것이 분명히 완벽하게 무효임을 그들 중 누가 명백히 했던가?
관념론자들과 감각주의자들의 논증이 지닌 울화통 터지는 진부함은 그들이 자신들의 정당화주의적 프로그램이 지닌 내재적인 논리적 한계들을 보지 못한 결과이다. 그들은 심지어 사실주의를 정당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증거가 사실주의의 부정에 대한 정당화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나의 논증은 유아론과 버클리식 관념론뿐만 아니라 이 질병의 모든 다른 형태들에게도 (내가 그것들을 아는 한), 내가 다음 절에서 밝힐 것과 같이, 특히 다양한 형태의 실증주의와 현상주의 및 또한 소위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버트런드 러셀의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에게도 적용된다.
러셀이 얼마나 관념론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는 자신이 사실주의로 선회한 후에 자신의 느낌을 기술한 아름다운 글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나 신학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 상식이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실적이라 생각했다.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느낌을 지니고 우리 자신이 풀은 녹색이고 태양과 별들은 아무도 인식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납법을 신뢰하는 사람이면서 러셀은 자신의 인식론이 자신이 원하는 장점을 실제로 낳지 못함을 발견했다. ‘지식이론에는 어떤 본질적인 주관성이 있다; 지식이론은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나는 아는가?”라고 물어서 불가피하게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식이론의 자료는 자기중심적이고 그 자료를 확충하는 초기단계들도 그러하다. 나는 지금까지 초기단계들을 초월하지 못해서 사실적으로 내가 지금 주관적인 것보다 관점에서 더 주관적인 듯했다.’이 구절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 구절이 사실주의적
목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밝히는 솔직성 때문이며 또한 그 구절이 근본적인 실수의 장소를 밝히는 명백성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이 추측 작품임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러셀의 근본적인 질문인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나는 알까?’는 잘못 표현된 것으로 밝혀지는데 왜냐하면 이 질문은 지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내 구타를 벌써 그만두었어?’ 그 질문은 나는 정말로 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귀납법은 타당하다고 전제한다. ‘내가 추측하는 것을 나는 어떻게 (혹은 왜) 추측하지?’와 같은 추측과 관련된 겉보기에 유사한 질문은 실제로 전혀 유사하지 않다: 이 질문은 심리학적이다: 그 질문에는 인식론적 충격이 없다. 그러므로 러셀의 질문에 대하여 합당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추측들에 대해서는 내가 추측하는 것을 어떻게 혹은 왜 추측하는지 신경 쓰지 말라. 나는 나의 추측들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나는 가능하다면 그 추측들을 더 낳은 추측들로 갈음하기 위하여 그 추측들이 비판을 받기를 매우 갈망한다. 그리고 나만큼 당신도 나의 추측들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느낀다면 나는 당신이 무자비하게 나의 추측을 비판함으로써 나를 도와주기를 희망한다.’
지식에 대한 생각을 추측 작품에 대한 생각으로 갈음하는 순간 지식론에서 겉보기에 ‘본질적인 주관성’은 사라진다. 아마도 어떤 지식은 (epistēmē?) 주관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ㅡ 내가 안전하게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ㅡ 본질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추측들은, 그것과 반대로, 제안이고 그런 상태로 다른 사람의 반대-제안과 마주칠 것이다. 우리가 의미하는 바로서 추측들의 주관적인 토대라는 문제는 (‘처음에 나의 감각에 들지 않았던 것은 나의 정신에 없다’) 제기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제안과 이성적 비판으로 구성된 주고-받기의 상호주관성의 분야로 움직여 들어간다.
그리하여 러셀의 근본적인 문제는 추측으로써 다시 공식화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문맥에서) 그가 강조하는 최초 사람이 될 지식의 가설적 특징으로써. 그리하여 여기에 인용된 글을 발간하기 8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서 내가 러셀의 논문에 답변했을 때 이것을 나의 핵심적 요점으로서 표현하여 나는 옳았다고 생각한다. (1절을 참조하라.)
이미 인용된 글에 뒤이어 러셀은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적 문제를 또 심각하게 조사할 여가를 갖는다면, 나는 경험으로부터 물리학의 세상으로의 추론들을 분석하려고 시도할 것인데 그 추론들이 타당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참이라면 어떤 추론 원칙들이 그 추론들을 타당하게 만들 것인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그리하여 러셀은 칸트가 ‘초월적’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을 채택할 준비가 되어있다: 과학적 지식을 사실로서 수용하는 방법, 그리고 어떻게 이 사실이 가능한지를 설명할 원칙들을 요구하는 방법.
결과는 (러셀의 저서 인간의 지식, 그 지식의 규모 그리고 그 지식의 한계[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Its Limits], 1948년에 주어진) 예언될 수 있었다 ㅡ 사실상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서의 나의 발언에 의하여 그 결과를 올바르게 진단했다. 그 결과는 귀납적 원리를 ㅡ 혹은 귀납적 추론의 몇 가지 규칙들을 ㅡ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수용한 귀납법 이론이었다. 러셀의 선험적 추론과 칸트의 선험적 추론 사이의 차이점은 러셀이 자신의 귀납적 원리를 개연적 추론의 원칙들로서 공식화한 것에 주로 놓여있다.
러셀이 방금 인용된 구절에서 기술한 (초월적) 방법은 그의 주관주의적 접근방식을 포기한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물리학의 세계’를 인식론이 설명해야 하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러셀에게도 주관적인 방법은 아마도 기대되는 것만큼 본질적은 아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방법이 나중에 포기된다면 주관적인 방법이 첫 번째 단계들을 통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러셀 자신의 분석은 주관적인 토대가 러셀 자신이 세우고 싶어 하는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를 뒷받침할 수 없다고는 것과 다른 ㅡ 비-주관적인 ㅡ 방법들이 이 목적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다른 방법들로 인하여 우리는 러셀의 선험적 추론이나 칸트의 선험적 추론에 관련될 필요가 없다. 그 다른 방법들이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철학과의, 특히 물리적 세상의 실제성을 의문시하는 버클리와 흄의 형이상학과의 결별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방법들로 인하여 우리는 경험주의와 ㅡ 종합적인 원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확립될 수 없다는 교설과 ㅡ 결별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든 ‘과학적 지식’의 가설적 특징과 모든 이성적 토론의 비판적 특징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우리는 경험주의와 형이상학적 사실주의 두 가지를 결합시킬 수 있다.
8. 흄의 형이상학. ‘중립적’ 일원론.
흄은 러셀처럼 자신의 주관적 지식론으로 인하여, 논리를 근거로 형이상학적 결과들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느꼈을지라도, 심지어 한 시간 동안도 자신이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결과들에 도달했던 투철한 사실주의자였다. 그는 실제적인 물체들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비록 실제로 불가피했다 할지라도, 비이성적인 것으로서 경멸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로 이 역설을 ㅡ 그가 자신의 정신 속에서 관찰했던 ㅡ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이 역설로부터 발생하는 당혹은 이 부서진 외양들을’ ㅡ 다시 말해서 몸체에 대하여 방해를 받은 그의 감지들 ㅡ ‘지속적인 존재라는 허구를 통하여 통합하려는 경향을 낳는다...’라고 그는 쓴다. 그의
구불구불한 논증을 (인성론 i권, iv부, ii절) 읽는 사람은 그가 처음에 그렇게도 확신하여 ‘나의 체계’로서 선언하는 것의 최종적 결과들에 대한 그의 실망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심지어 난국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그는
자신을 또 다른 단계로 움직이게 만들 수 없음을 ㅡ 심지어 역설들도 역설들을 초월하도록 ‘정신’을 자극하지 않음을 ㅡ 발견하고는 그는 그 절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서술한다: ‘태만과 부주의만이 우리에게 치료약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분명하고도 솔직한 사상가가, 자신의 주관주의적 지식론이 장점을 낳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그 지식론에 파멸적 타격에 해당하는 것을 가했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흄이 실제로 자신의 이론을 파괴한 이후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그의 반응은, 러셀과 프레게(Frege)의 이론에서 러셀이 발견했던 모순을 프레게에게 알리는 러셀의 편지에 대한 프레게의 반응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프레게에게 편지를 썼는데 프레게는 매우 엄숙하게 “산술이 비틀거리다(die Arithmetik ist in's Schwanken geraten)”라고 답신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기에 비틀거리며 무너지려고 위협하던 것은 프레게의 산술 이론이 아니라 산술 자체였다.
흄의 ‘체계’로 인하여 흄은 관념론에 몰두하게 되었다: 물리적 몸체들에 대한 ㅡ 혹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ㅡ 믿음은 그에게 불가피한 ‘상상의 허구’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몸체들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들은 정신에 의하여 형성된 [개념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버클리와 견해를 같이하고 가장 신중한 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그러나 물리적 몸체들은 그리하여 아이디어 뭉치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흄 자신의 정신을 포함하여 정신들도 또한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 우리가 정신(mind)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양한 지각들(perceptions)의 무더기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허위적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단순성과 일치성이 주어지기로 된.’라고
가르침으로써 대담하게 버클리의 견해들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흄의 존재론은 많이 모방되었으나 모방자 누구도 그의 철학체계가 지닌 아름다운 단순성을 완벽하게 이룩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에 대한 ㅡ 가령 다섯 명의 철학자가 참석한 토론회에 대한 ㅡ 다음 도표로써 편리하게 예시될 것이다 (다음 쪽 참조):
작은 원들은 몸체들에 대한 일별로서 혹은 기초적인 인상이나 지각으로서 혹은 ‘감각-자료’로서 혹은 우리의 기억 속의 감각-자료들의 흔적이나 반영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그것들은 흄의 이론에 따라서 우리 우주의 원자재를 구성한다.눈에 보이는 물리적 몸체들 각각을 구성하는 지각 무더기
각각은 그 무더기들이 다양한 정신들에게 나타나면서 자체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함하는 수직 칸에 의하여 여기서 재현된다. 토론참가자들의 정신들 각각을 구성하는 지각 무더기 각각은 각 정신에게 나타나면서 다양한 몸체들의 모습들을 포함하는 수평선에 의하여 재현된다.
흄의 우주의 재료들 즉, 요소들은 다양한 정신에 속하는 다양한 몸체들의 지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철학체계(system)’는 의심할 바 없이 관념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흄의 철학체계와 거의 동일한 철학체계들은 ㅡ 마흐(Mach)나 러셀이나 라이헨바흐(Reichenbach)의 철학체계와 같은 철학체계들 ㅡ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의 철학체계로 기술되었는데 거기에서 ‘중립적’이라는 단어는 ‘사실주의와 관념론의 중간으로서 중립적’을 (혹은 아마도 유물론과 정신주의의 중간으로서) 의미할 의도가 있으며, 그리고 거기서 ‘일원론’은 우주의 원소가 (혹은 우주의 원소들의 특징) 모두 한 가지 종류임을 표시하려는 의도가 있다: 감각들(sensations)이나 인상들(impressions).
내가 이해하는 한, 흄의 관념론과 ‘중립적’ 일원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렇다. 어떻게 다양한 무더기들이 묶여있는지 질문을 받고 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으리라: 아이디어들을 연상함으로써. ‘중립적 일원론’은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혹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혹은 버트런드
러셀)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 무더기들은 두 종류의 자연법칙에 의하여 묶여있다: 심리학적 법칙들에 의한 수평적 무더기들 (연상의 법칙의 포함하여)과 물리적 법칙들에 의한 수직적 무더기들. 다시 말해서 물리적 몸체들은 물리법칙을 준수하는 저 무더기들인 반면 정신들은 심리학적 법칙들에 복종하는 저 무더기들이다. 원소들 자체는 몸체들의 원소들인 동시에 정신들의 원소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하여 중립적이다.’
독자들이 예상할 것처럼 나는 이 교설을 수용할 수 없다. 소위 ‘중립적’ 원소들은 단지 지각들일 ㅡ 우리의 눈이나 우리의 귀를 닫음으로써 사라지게 만들어질 것 ㅡ 뿐이다. 주관적 시각 감각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라지는 반면, 물리적 몸체들은, 물리법칙들에 의하여 규정되는 바와 같이, 이런 방식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중립적’ 일원론은 관념론의 한 가지 형태이다; 그리고 이 교설이 ‘중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관념론자들에게가 ㅡ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에 완벽하게 물든 철학자에게 ㅡ 유일하다.
그리하여 나는 관념론과 함께 ‘중립적 일원론’을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의 한 부분으로서 배척한다.
9.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이 실패하는 이유.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은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실패한다. 먼저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은 모든 지식이 주관적이라고 ㅡ 우리는 아는 주체인 아는 사람이 없으면 지식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고 ㅡ 순진하게 전제한다. 두 번째로 전통적으로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은 잘못 생각된다. 나는 ‘내가 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를 (러셀의 공식화에서; 7절의 주석 7 참조) 그 문제에 대하여 함축된 순진한 경험주의적 답변인 ‘관찰이나 감각-경험으로부터’와 함께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나는 과학적 지식이란 틀림없이 나의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ㅡ ‘과학에는 알려진’ 수 천 가지의 지식이 있지만 나에게는 알려진 게 없다 (비록 내가 틀림없이 그 지식을 알고자 갈망할지라도) ㅡ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리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나는 틀림없이 기대한다) 이 사실만도 틀림없이 과학적 지식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론을 배척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심지어 내 자신이 우연히 소유하게 된 과학적이자 상식적인 지식의 저 조그만 조각들도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이라는 미리 생각된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 지식의 조각들 중 전적으로 내 자신의 경험의 결과인 것은 없다. 오히려 그 지식의 조각들은 주로 내가 부분적으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특정 전통들을 (예를 들어 특정 저서들을 읽음으로써) 흡수한 결과들이다. 그래서 그 지식의 조각들이 특정 전통들을 흡수함으로써 또한 야기되는 나의 형이상학적 믿음들과 (가령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신념들) 밀접한 관련이 없는 것과 같이 내 자신의 관찰성 경험과도 밀접한 관계가 없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이 전통들 몇 가지에 대한 내 자신의 비판은 내가 안다고 믿는 것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한 가지 전통 내부의 혹은 다른 전통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거의 항상 자극을 받는다. (그 비판은 한 가지 전통과 내 자신의 관찰성 경험 사의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자극을 받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 비판은 사람들 자신의 관찰로써 전통적 이론을 실제로 반증하려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은 나의 지식과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나의 지식인 것은 ㅡ 나의 상식이나 나의 과학적 지식 ㅡ 주로 내가 전통을 흡수한 결과이며 (나는 희망한다) 어떤 비판적 사고의 결과이다.
물론 거의 ‘나의 지식’으로 또한 지칭될지도 모르는 제 3의 종류의 지식이 있다: 나는 어디에서 내가 잉크병을 찾아야 하는지 혹은 내 방의 문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나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늦게 조치한다면 나의 구두끈이 끊어질 성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개인적 지식’이란 용어가 붙을지도 모르는) 이런 종류의 지식은, 내 자신의 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에, 전통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지식은 그리하여 주관주의적 이론에 의하여 예상되는 종류의 것에 매우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개인적인 지식’조차도 그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지식은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ㅡ 잉크병, 구두끈, 기차역에 대한; 우리가 전통을 흡수함으로써 배워야 하는 것들 ㅡ 상식적 지식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관찰과 우리의 눈과 귀는 이 흡수과정에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흡수하는 것은 주관주의적 이론에 의하여 기대되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인데 주관주의적 이론은 내가 나의 지식으로부터 그리고 더욱이 나의 관찰성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기를 원한다.
주관주의자는 자기가 기대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유전적으로 내가 언급하는 과정들에 앞선다고 답변하기 쉽다. 주관주의자는, 내가 전통을 흡수하기 시작하기 전에 내가 관찰성 경험에 의하여 세상에 관하여 틀림없이 많이 배운다고 말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나는, 주관주의자처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의 주장에 대한 관찰성 토대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의 답변은 순전히 편견과 상상력 부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과학은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많은 곤충들이 많은 ‘타고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ㅡ 어떤 곤충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타고난 반응을 특정 분야에서 배우고 수정할 수 없다고 ㅡ 생각할 매우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곤충들이 자신들의 감각들을 사용하여 이전에 보지 않고도 특정 물체들을 (먹이나 잠재적 배필) ‘인식’한다고 생각할. 그러나 어떤 곤충들에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 포유류와 사람에게도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내재적 전통이나 ‘본능’과 같은 것을 지니고 태어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우리는 흔히 오도할지라도). 사실상 주관주의적 답변은 경험주의적 신화(神話)의 한 부분이다.
주관주의자의 다음 답변은 다음과 같기 쉽다: 곤충들과 인간들이 본능적 종류의 타고난 지식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지식은 틀림없이 여전히 이런저런 정도로 관찰성 경험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이전 세대의 경험.
두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이 답변은 이전 답변보다 더 옹호될 수 없다. 먼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답변은 논점(論點)을 변경할 것이다. 두 번째로 그 답변이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ㅡ 아무튼 그 답변은 현재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이 수용하는 견해와 충돌한다.
내가 내놓은 두 가지 요점 중 첫 번째 요점에 관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경험주의가 아니라 주관주의적 경험주의로 보다 정확하게는 ‘내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로 시작하고 나의 모든 지식은 나의 주관적인 관찰성 경험까지 추적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ㅡ 우리가 선조들의 (혹은 다른 사람의) 경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 ㅡ 인정되자마나 주관주의적 이론은 붕괴한다. 왜냐하면 ‘지식’이 그렇다면 상호-주관적인 것으로 인정될 것이고 이 상호-주관적인 지식은 그렇다면 나의 주관적 지식에 유전적으로 앞선다고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나의 주관적 지식이 상호-주관적 지식에 논리적으로 앞설 수 없음을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증명한다.)
두 번째 요점에 관하여, 그 답변은 다윈적 답변에 반대가 되어 본질적으로 라마르크적이다; 왜냐하면 그 답변에는, 우리에게 타고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마지막 수단으로 틀림없이 여전히 개인적으로 습득된 관찰성 경험의 결과라는 견해에 대한 방어로서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연히 라마르크 이론을 많이 동정하게 된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이론은 현재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선호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튼 지식이론은 (경험주의적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선험적 토대와 같은 것을 근거로 라마르크 이론과 같은 추측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
주관주의자들은 ‘지식’이라는 단어가 지닌 모호성 몇 가지에 의하여 흔히 오도된다. ‘지식’은 분명히 ‘나는 알고 있다’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지식’이 단지 알려진 ㅡ 사람들에게 알려진 ㅡ 것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분명히 부적당하다. 대수표(logarithmic table)를 포함하고 있는 책을 생각하라. 그런 표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그 표를 계산하는, 그 표를 배열하는, 그 표를 인쇄하는 방법) 사람들이 있고 그 표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가령 어떤 사람들이 구구표의 시작을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는 ‘지식’을 ㅡ 객관적 지식 ㅡ 대표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나 부분적 답변들: 매우 유용한 정보. 그리고 이 지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편찬자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지식은 단지 이용될 수 있다: 그 지식은 편집자와 발행자를 신뢰할 각오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거기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그 경우는 모든 과학적 이론에도 유사하다: 이론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ㅡ 정보를 발견한 사람이나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들 모두 알지 못하는 ㅡ 다량의 정보를 잠재적으로 혹은 배열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이론은 선택될 수 있고 정보는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우 특별한 상황에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이 객관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지식은 연구될 수 있고, 흡수될 수 있고, 이용될 수 있고 적용될 수 있다. 동일한 과학적 지식이 독단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수용되거나 배척될 수 있다. 그 지식은 열렬하게 신뢰를 받을 수 있거나 혹은 위험한 짐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 갈라지는 많은 주관적 견해들이 있고 전통들에 반응하는 많은 방식들이 있다.
객관적 지식을, 혹은 객관적 지식 한 가지를 사용하는 한 방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관적 신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방법은 ㅡ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주관적 지식에 이른 방법 ㅡ 주관적 지식에서 객관적 지식에 이르는 방법보다 훨씬 더 자주 수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에 관한 주관주의적 이론은 오직 주관적 지식만 있다거나 (저서는 사용자의 정신 속에서 지식을 구성할 저 연상 작용들을 일깨울 수 있는 종류의 물리적 몸체일 뿐이라거나) 혹은 적어도 객관적 지식은 ㅡ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다면 ㅡ 어떤 주관적 지식의 기록이나 그 지식으로부터의 유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객관적 지식이 항상 인간의 행동들로부터,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지식에 비추어 취해진 조치들로부터 직접적으로나 혹은 간접적으로 생겨날지라도, 객관적 지식은 흔히 이전에 주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계산에서 변함없이 그렇다 (계산을 하는 사람에 관한 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상응하는 주관적 신념을 형성하기 전에 결과가 어떤 물리적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미적분학을 창안한 사람들이 희미한 개념은 지니고 있었다할지라도, 실제로 미적분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창안자들은 거의 마술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자신들의 계산으로부터 습득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구축한 지식기계가 매우 잘 작동한다는 ㅡ 항상은 아닐지라도 대체적으로 ㅡ 것이었다.)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객관적 지식을 ㅡ 과학 ㅡ 사회적 제도로서, 혹은 사회적 제도의 조합이나 구조로서 간주할 수 있음이 알려질 것이다.
다른 사회제도들처럼 객관적 지식은 주로 의도되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예견되지 않은 인간 행동들의 결과이다 (베이컨에게는 실례지만). 확실히 객관적 지식은 호기심에 ㅡ 자신들의 주관적 지식을 증가시키려는 소망 ㅡ 의하여 영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ㅡ 다시 말해서 객관적 지식의 ㅡ 성장에 기여하고자 하는 소망에 의하여 훨씬 더 영감을 받기도 하는 과학자들의 주로 제도화된 협력과 경쟁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자란다. (객관적 지식에 제공된 많은 위대한 기여는 오류에 놓여 있고 이 오류들을 탐지하는 데 놓여 있다.)
기여들이 어떻게 제공되고 시험되고 수용되고 배척되는지에 대한 연구; 기여들의 가설적 자격에 대한; 기여들에 적용되는 전통적 기준들에 대한, 그리고 이 기준들의 개선에 대한 연구 ㅡ 이 연구가 지식이론의 ㅡ 다시 말해서 객관적 지식이론 -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익한 부분이다.
물론 나에게는 주관적인 지식 같은 것이 없다거나 주관적인 지식이 객관적인 지식의 성장에 중요하지 않다고 제안할 의도는 없다: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이 없다면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지식 사이의 연결은, 내가 적시한 바와 같이, 전혀 간단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관적 지식 이론을 또한 갖는 것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론은 과학의 논리나 인식론의 한 부분이 아니라 경험적 과학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적 지식의 화제는 어떤 사람이 지닌 지식의 ㅡ 우리가 ‘나는 그것이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표현하는 저 주관적 경험들의 ㅡ 성장이자 발전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들은 심리학적 ㅡ 내가 생각하기 더욱 흥미롭게 ㅡ 일반적인 생물학적 연구의 대상일 될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지식과 활동을 생물학적 현상들로 간주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신의 환경과 환경적 변화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현상들이 행하는 역학을 고찰해야 한다: 임박한 사건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동물들과 심지어 식물들도 월동에 대하여, 가령 순전히 본능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대비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할 이것과 다른 것들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나는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 모두는 짐작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달력을 참고하고 석탄 상인에게 주문을 함으로써 월동에 대비한다. 몇몇 다른 사람들은 석유 연소를 연구하여 새롭고, 더 안전하고 더 경제적인 형태의 석유 버너를 발명함으로써 월동에 대비한다.
가설의 심리학적이거나 생물학적 유사체는 사건에 대한 기대 혹은 예상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이 기대나 예상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것이다. 그것은 생명체가 어떤 특정 종류의 상황에 반응하여 행동하거나 대응하려는 준비상태에 달려있다. 그것은 어떤 의향들의 (부분적) 활성화에 달려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27절, 특히 99쪽을 참조하는데 그곳에 지식의 의향적 특징이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무의식적 기대들이 의식적이 될 방식의 고전적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 (‘나는 여기에 계단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는 시계가 멈추는 것을 듣기 (‘시계가 째깍거리는 것을 내가 들었음을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시계가 멈추었을 때 나는 들었다’). 우리의 생명체는 어떤 사건들을 무의식적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우리의 기대들이 어긋나거나 반증된 다음에만 우리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이 의향적 준비상태는 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참인 생물학적 유사체인 듯하다.
동물 생명체에서 특정 종류의 자극에 대하여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의향들은 부분적으로 타고난다. 나의 주장은, 그런 의향들이 습득되는 한 그런 의향들은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되자마자 그리고 특히 또한 실패와 성공의 영향을 받고서 (아마도 고통스럽고 유쾌한 감정과 결합되어) ‘창조적’이고 발전하여 변하는 타고난 의향들의 교정들이라는 것이다; 자극에 의하여 방출되는 행동들과 반응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생물학적 목표를 지향한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체는 자신의 타고난 의향적 지식을 발전시킨다: 생명체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학습한다.
이것이, 상속에 의해서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다윈의 추측을 믿는다면), 전통에 의하여 상속될 습득된 지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지식은 또한 변화한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타고난 지식의 생존은 다시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여기에 제시된 설명은 흄의 설명과 대비되어야 하는데 흄의 설명은 인식론학자들 가운데서 여전히 인기가 높다: 우리가 사실상 관찰의 반복을 통하여 학습한다는 견해.
반복은 정말로 배우는 과정에서 한 가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학습’이다. (3절 참조.) 우리가 기술을 (자전거타기, 피아노치기, 새로운 언어 말하기) 배운다면 반복에 의한 학습이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이 멈추는 곳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두 가지 과정이 한 가지 과정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은 이렇다: 모든 새로운 지식, 우리가 지닌 의향들에 대한 모든 근본적 교정, 모든 발견들은 시행착오의 결과들이다. 반복은 새로 습득된 지식에 대하여 우리를 친숙하게 만들 따름이다 ㅡ 반복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잊게 만들고, 우리가 우리의 대응책을 습득하는 방식을 잊게 만들고 특히 시행착오 기간 동안에 극복해야 할 난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내가 인식하는 한 학습과정에 관한 이론가들은 ‘학습’에 관한 두 가지 의미 사이의 격차에 대하여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주관적 지식이론은 ㅡ 우리의 주관적 지식의 성장에 관한 ㅡ 시행착오보다는 반복을 학습의 주요 도구라고 간주할 때 치명적인 오류를 저질렀다. (위 3절 참고. 이 오류는 확률에 관한 모든 주관적 이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의 2부 참조.)
관찰 그리고 우리가 지닌 감각의 증거를 통한 학습에 관하여, 여기서 개괄된 이론은 전통적인 경험주의와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전통적 이론은, 우리에게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지식에 의하여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 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에게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관찰이나 감각 경험의 ‘결과’라는, 또는 지식은 항상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들어온다’는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견해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타고난 의향적 지식과 별개로 우리의 지식은 자극의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영향을 받아서 정말로 발전한다. 그러나 자극은 우리의 의향적 옷을 입고서 수많은 새로운 발전을 방출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단지 계기로서 행동한다. 관찰도 유사하다. 관찰은 우리의 기대, 우리의 가설, 우리의 이론의 문맥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지식이 지각이나 관찰의 축적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전적으로 신화이다 ㅡ 아마도 현대에 가장 널리 믿어지는 신화. 그 전통적 견해는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진 사람보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지식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반증된다: 분명히 우리의 감각이 경험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지적(知的)으로 결정적이라면 이 가장 중요한 감각의 결여는 가장 중대한 지적(知的) 결핍을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헬렌 켈러라는 훌륭한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렇지 않다.
전통적인 경험주의는 정신을 은유의 도움을 받아 관찰을 통하여 기록될 백지상태로서 ㅡ 잘 닦인 칠판이나 노출되지 않은 사진판과 같은 것 ㅡ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이 이론은, 내가 ‘정신의 양동이 이론’이라고 불렀는데 정신을 양동이로 그리고 감각을 양동이가 서서히 관찰을 통하여 채워질 수 있는 깔때기로서 간주한다. 이 관찰들의 합계가 (혹은 아마도 정돈되거나 소화된 합계) ‘우리의 지식’이다.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오류다.
모든 고등생명체에게는 말하자면 두 가지 면이 있다: 고등생명체의 타고난 구조, 고등생명체가 지닌 행동하고 대응하는 의향, 고등생명체의 ‘반응’이 하나이고 반응을 받아들이는 고등생명체의 도구, 고등생명체의 ‘감성’이 나머지 하나이다. 전통적 경험주의가 지식을 감성의 영역 안에 위치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반면 나의 견해는 지식을 생명체의 활동과 반응의 영역 안에 위치시킨다.
이 변화는 폭넓은 결과를 지닌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관찰은 (혹은 ‘감각’이나 ‘감각-자료’, 기타 등등) ‘지식의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베이컨의 ‘포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관찰은 지식의 원자재가 아니다. 반대로 관찰은 항상 이전의 의향적 지식을 예상한다. 관찰은 종을 울리는 자극의 결과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자극은 우리가 지닌 기대나 예상의 체계와 관련하여 종을 울릴 수 있도록 하여 관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틀림없이 의미가 있다. 종은 ㅡ 또는 다시 말하여 관심, 자극에 대응하려는 의향, 자극이 의미 있는 것으로 판명되리라는 기대 ㅡ 이전에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거나 아니면 자극은 주시되지 않은 채 지나갈 것이다: 자극은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찰은 의향적 준비상태를, 다시 말해서 의향적 지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관찰이 의향적 변화를 방출할지라도 ㅡ 특히 관찰이 우리의 기대에 반한다면 ㅡ 관찰은 우리의 주관적 지식을 구성하는 의향체계의 부분이나 구성요소가 도저히 될 수 없다: 관찰은 주관적 지식과 유사하지 않고 (관찰이 야기하는 결과들이 주관적 지식과 유사할지 모를지라도) 일의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리하여 ‘조건반사’를 바라보는 통상적 방식은 완전히 오류다. 실험이 하는 일은 ‘종소리를 개의 침 흘리기와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험은 자신의 음식물을 확보하려는 개의 노력과 결합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반응들은, 명백한 이유 때문에, 동물의 가장 창조적인 의향체계 중 한 체계를 구성한다: 매우 다른 상황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해야 하는 동물은 이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어야 한다. 먹을거리 확보는 그리하여 학습을 위하여 미리 의향화된 분야이다: 창조성 자체는 타고난 것이다. 그리하여 개는 쉽게 새로운 기대를 ㅡ 사실상 새로운 이론 ㅡ 형성할 것이다: 개는 종이 자신의 저녁식사를 알린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전부다. 의향이 먼저 덜 창조적인 곳이나 혹은 동물의 결정적인 관심이 포함되지 않은 곳에서, 조건반사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전통적 경험주의는 우리가 세상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우리의 감각경험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도출하거나 꺼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 견해가 ㅡ 정신의 양동이 이론 ㅡ 무비판적으로 고수된다면 귀납법의 정당화는 불가능하다는 흄의 발견이 틀림없이 비이성주의를 초래한다. 흄의 발견은 예를 들어 물리적 몸체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이라는 결론을 틀림없이 초래한다. 그리고 정말로 물리적 몸체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처럼 물리적 몸체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편견이다 ㅡ 그러나 비판적으로 검토될 편견이다. 과거 100년 동안에 걸쳐 펼쳐지는 이 추측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결과로서 우리는 몸체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제 알고 있다 ㅡ 예를 들어 몸체들은 과정이라는 것 (헤라클리투스[Heraclitus]가 예견한 바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들을 시험함으로써 우리의 지식을 학습하고 확대한다; 반복을 통한 귀납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심지어 규칙성에 대한 우리의 ‘동물적 신념’도 반복의 결과는 아니다. 그 신념은 규칙성들을 기대하는 (반복의 자극에 의하여 혹은 단 한 가지 사건의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될) 타고난 의향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나의 감각을 통하여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배우는가?’라는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이라는 문제는 잘못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원인들이 나로 하여금 몸의 존재를 믿도록 유도할까?’라는 흄의 질문은흄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답변될 수 있다. 개가
으르렁거리거나, 물거나, 좋아하는 것을 개가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흄이 생각했던 의미에서 최고의 정도로 우리가 강력하게 대응하는 저 물체들이다 ㅡ 그 물체들에 대항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싸우거나 그 물체들을 우리가 먹거나 그 물체들에 의하여 우리는 박살날 것이다. 그 물체들에 대한 믿음은 그 물체들이 잠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취급하는 타고난 의향에서 나온다. 그것은 비록 틀림없이 자체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자극을 필요로 할지라도 타고난 믿음이다. 이 믿음의, 이 편견의 ‘원인들’은 그런 것이다 ㅡ 혹은 그렇게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그 원인들은 이유가 아니다.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편견을 비판하기 ㅡ 우리의 편견을 추측으로서 취급하기 ㅡ 시작할 때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몸체들’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우리가 흄의 문제를 초래한 주관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할 때 또 다른 종류의 이유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흄의 지식론 문제와 같은 지식론 문제를 믿음이 지각과 연상으로부터 나타난다는 방식의, 혹은 칼라패치(colour patches)나 물체들이나 기타 등등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의 조사를 통하여 틀림없이 답변할 수 있다는 독단적 전제는 관념론의 대부분의 형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윈이후 100년이 지나서도 철학자들이 인식론의 문제를, 우리 지식의 근원을 감각-자료나 지각과 관련하여 (혹은 우리가 지각을 토론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종류들과 관련하여) 또는 검은 까마귀나 흰 백조의 ‘관찰’을 ‘반복한’ 숫자와 관련하여, 순진하게도 지속적으로 토론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의 배경에 있는 가장 깊은 동기는 소위 우리의 ‘지식’ 중 많은 지식이 불확실하다는 깨달음과 (그리하여 실제로 ‘지식’이 아니다), 확고함으로부터 출발하려는 소망이다: 확고한 토대로부터, 혹은 적어도 우리가 지닌 가장 확고한 토대로부터. 어떤 것을 본 경험과 (혹은 데카르트와 함께 의심하는 경험)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은 자체를 자연적인 출발점으로서 제시하는 듯하다. 주관주의자들은 이 ‘자료들’을 토대로 지식이라는 ㅡ 과학적 지식 ㅡ 건물이 세워질 수 있다고 무비판적으로 전제했다. 그리나 이 전제는 옳지 않다. 설사 우리가 자료들 자체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할지라도 이 ‘자료들’을 토대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은 ‘자료들’은 없다; 해석되지 않고 단지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자료는 없다; 아무것도 근거로 수용될 수 없다. 우리의 지식 모두는 우리들의 이론들로 우리의 기대에 비추어진 해석이어서 이런 정도나 저런 정도로 가설적이다.
사실주의가 참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정확하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ㅡ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다소, 상식으로서 과학에 의하여 정제되어 우리에게 그렇다고 말하는 것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s exactly what we should expect if realism is true ㅡ if the world around us is, more or less, as common sense, refined by science, tells us that it is인데 동사 tells의 주어가 분명하지 않다. 의미상으로는 This나 the world around us가 동사 tells의 주어인데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이다. 역자). 사실주의가 참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동물들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내가 묘사한 시행착오 사건만 될 수 있다. 사실주의가 참이라면, 세상의 실제에 대한 그리고 물리법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타당한 추론에 의하여 증명이 가능해 질 수 없거나 확고하거나 ‘합리적’으로 밝혀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사실주의가 옳다면 우리는 추측성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니려고 희망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기적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추측 추구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내가 과거 300년 동안의 기적적인 성공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사실주의가 참이라면 세상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세울 안전한 주관적인 토대를 발견한다는 주관주의적 이론의 목표는 ㅡ 그리고 세상의 실제에 대한 믿음의 완전한 이유들 ㅡ 실현될 수 없고 정말로 비합리적인 목표이다.
그리하여 사실주의는 우리에게 왜 우리의 지식상황이 반드시 불안정한지를 설명한다. 다른 한 편으로 어떤 형태의 사실주의가 참이라면 무슨 일이든 발생할 것이다 ㅡ 그리하여 아마도, 발생하지 않는 것도 또한 발생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주의는 두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중에서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다. 사실주의는 논리적 이유들을 선호한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여하한 설명력도 부재한 것으로 판명된다.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을 배척하면서 우리는 관념론에 찬성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나 동기 중 하나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건의 실제성에 반대하는 흄의 회의적 논증들을 토론해야 한다.
10. 수수께끼 없는 세상.
지식의 주관적 이론은 ㅡ 내 자신의 ‘자기중심적(egocentric)’ 지각적 경험으로부터 물리적 세상을 건설하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ㅡ 불필요하면서 불가능하게 어려운 임무를 자체에게 부과했다. 이것이 그 이론이 항상 어떤 종류의 관념론에 빠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관념론을 매력이 없게 만드는 것은 정확하게 관념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치명적인 용이함이다. 왜냐하면 관념론은 정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ㅡ 모든 문제를 비움으로써.
한 가지 전형적인 사례는 몸-정신 문제를 ㅡ 우리의 정신적 상태에 대하여 엄청나게 복잡한 생리적 영향들이라는 (가령 약물의) 문제와 반대로 우리의 생리적 상태에 대한 정신적 영향들이라는 (가령 위험요소들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 ㅡ 관념론자가 (혹은 중립적 일원론자) 해결하는 것이다. 관념론은, 중립적 일원론을 포함하는 그 모든 형태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순식간에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을 허용하여 그 문제가 사라진다. 내 자신의 몸체를 포함하여 모든 몸체들이 지각 덩어리일 뿐이라면 물리적 세상에서의 변화들 또한 일반적으로 정신적 세상의 변화일 것이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것이다: 그리하여 상호관계들이 있을 것이다 (상호관계들의 세밀한 법칙들은 귀납법에 의하여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주관주의와 관념론에 비추어 ㅡ 혹은 아마도 주관주의와 관념론이 유발하는 어둠 속에서 ㅡ 사라지는 또 다른 문제는 물질의 문제이다. 이것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문제들 중 한 문제이다. 그것은 변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변화는 변화 동안에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는 어떤 것을 전제하는 듯하다. 이로 인하여 헤라클리투스와 헤겔은 반대되는 것이 동일하다는 이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레우키푸스(Leucippus)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모든 변화는 움직임에 놓여있다는 더 중요한 이론에 ㅡ 파괴될 수 없는 물질 입자, 움직임은 별도로 하고 어떤 변화에도 종속되지 않는 원자들의 ㅡ 다다른다.
이것은 분명하고도 중요한 변화와 물질이론이었다: 물질은 움직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변화 동안에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는 존재였다. 이 변화이론이나 이 물질이론은 물론 최종적이 아니다. 레우키푸스와 데모크리투스 시대 이래, 그리고 더욱 특히 데카르트 이래 ㅡ 라이프니츠(Leibniz), 보스코비치(Boscovich), 패러데이(Faraday)와 함께 ㅡ 물질이론은 물질 자체의 구조 이론으로 발전했다; 과학적 및 철학적 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章) 중 하나를 형성하는 발전. (후기 III권의 20절 참조.)
그러나 주관주의적 인식론이 이 모든 것에게 말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대상을 그 대상의 연속적인 변화에서 차츰 추적한다면 사고의 부드러운 전진으로 인하여 우리는 일치성을 연속성에 부여할 수 있다’고 흄은 서술한다; ‘우리가 상당한 변화가 일어난 후에 대상의 상황을 비교하면 사고의 진보가 부서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제시된다: 그 모순을 조정하기 위하여 상상력은 알려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인 체하기 쉽고 상상력은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이 모든 변화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상상력은 본질이나... 물질이라고 부른다.’
본질이나 물질이론은 흄의 다소 난해한 구절에 이해 가능하게 기술되며 그 이론의 변화이론과의 연관성은 명백하게 지적된다; 그러나 변화이론은 ‘상상력’의 이해될 수 없는 허구로서 배척된다. (이 초자연적 문제해결[deus ex mαchinα]이 정신에 속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아이디어 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아이디어들은 이해될 수 없다. 흄이 이 모순으로써 근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하다.) 게다가 그 구절은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은 동일하게 상상력이 만든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매우 일관되게 지적한다; 관찰되지 않는 대상들은 관찰되는 현상들 사이에 허구적 추가사항이다;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은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게서 기인하는 현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중간현상(interphenomena)’이다 (아래 13절 참조).
이 본질이나 물질의 ‘이해될 수 없는 허구’는 흄에 따르면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하여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흄이 다음과 같이 삼단논법으로 논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각을 제외하여 물체에 대하여 완벽한 아이디어가 없다. 본질은 지각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본질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그래서 그는 이로부터 한층 더 나아가
본질에 관한 여하한 질문도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 저 질문에 답변하는 무슨 가능성이 있는가?’
그리하여 물질의 문제는 (그리고 그 문제와 함께 물질구조의 문제) 전형적인 선험적 토대를 근거로 무의미한 것으로서 배척된다. 흄은 여기서 버클리를 따랐는데 버클리는 원자론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배척했고
차례대로 그는 마흐에 의하여 계승된다.
과학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한 문제가 될 운명이었던 것을 이렇게 배척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버클리와 흄과 마흐의 세계에서는 진지한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실증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는 단지 표면이다 ㅡ 그 세계에는 깊이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지각들과 그 지각들이 우리 기억에서 반영된 것들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숨겨진 것이 없기 때문에 발견할 것이 없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발견할 것이 없고 배울 것이 없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수수께끼가 없는 세계이다.
그리하여 흄의 겉보기에 매우 회의적인 인식론은, 베이컨의 인식론처럼, 자연은 펼쳐진 책이라는 그리고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을 초래한다; 아이디어만 있기 때문에 수수께끼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귀납적 추론의 무효성에 대한 흄의 증거가 그렇게 드물게 진지하게 고찰되는 (인과성에 대한 그의 비판과 반대가 되게) 이유를 설명한다. 자연이 펼쳐진 책이라면 우리에게는 귀납적 논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연상이나 습관으로써 우리는 무효하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텐데.
흄은 이와 같은 비평이 자신의 저서에 대한 엄혹한 비판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유인즉 만약 진리가 조금이라도 인간 능력 안에 있다면, 그 진리가 틀림없이 매우 깊어서 심오하게 놓여있을 것임은 확실하다’고 그는 서술하며 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매우 쉽고 명백하다면 그것에 반대하는 강력한 추정으로 여길 텐데.’
그러나 이 구절은 단어의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토론들을 언급할 따름인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글에서 흄이 자신의 인간본성에 대한 철학이 모든 (합당한) 지식에 지름길을 제공할 자신의 희망을 분명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철학이 자연의 책을 우리를 위하여 연다는 희망. ‘모든 과학이... 인간본성에 대하여... 관련성을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그는 서술한다. ‘... 심지어 수학, 자연철학, 그리고 자연종교도 어느 정도 인간의 과학에 의존한다....여기에 그렇다면 유일한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으로부터 우리는 성공을 희망할 수 있다... 지루한 꾸물거리는 방법을 떠나서, 그 지루한 꾸물거리는 방법을 우리가 지금까지 따랐다, 그리고 때때로 변경에 있는 성이나 마을을 점유하는 대신 이 과학의 수도나 핵심으로 직접, 인간본성 자체로 행진하여 올라가기 위하여; 한 때 인간본성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모든 곳에서 쉬운 승리를 희망할 것이다.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저 모든 과학에 대한 우리의 정복을 확대할 것이다....’.
이 구절은 흄 자신이, 우리가 델피의 원칙이자 소크라테스의 원칙인 ‘너의 자신을 알라’의 도움을 받아 실수를 추방하자마자 진리는 명백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표시하는 듯하다. (그 원칙이 지금은 당신은 ‘자아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음을 알라가 되었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흄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무슨 인상으로부터 이 아이디어가 도출될 수 있을까?’이기 때문이다.
귀납법의 타당성에 대한 흄의 부인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그의 공격의 논리적인 면을 대표하는 반면, 물질적인 것에 대한 흄의 공격은 형이상학적 모습의, 말하자면 보편적 법칙에 대한 그의 공격의 한 부분이다. 나는 그의 형이상학적이자 인식론적인 논증들이 그의 논리적 논증들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의 형이상학적이자 인식론적인 논증들은 과학자들의 사실주의에 (혹은 유물론에) 반대하는 버클리의 인식론적이자 언어학적인 논증들과 거의 동일하게 강력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버클리와 그의 현대 후계자들에게로 방향을 선회한다.
11. 이론과 이론적 개념들의 위상.
흄의 이론과 중립적 일원론자들의 이론은 세상이 지각들과 그 지각들의 반영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이것들이 정신과 물리적 몸에 덩어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덩어리들을 묶는가?
흄에 따르면 연상의 법칙이 지각을 정신 속으로 묶어 넣는다; 그리고 물리적 인과법칙이 습관에 지나지 않는 한 물리적 법칙은 또한 지각들을 몸속으로 묶어 넣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렇다면, 아이디어 너머에는 일종의 실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이디어들의 연상 법칙 혹은 아이디어들이 연상하는 경향.
‘중립적’ 일원론에 따르면 심리학 법칙과 물리학 법칙들은 아이디어들을 묶는다. 이것은 반대로 두 종류로 구성된다. 먼저 자연의 법칙들이 있는데 현상들을 관찰함으로써 그리고 습관이나 반복을 통한 단순한 일반화에 의하여 귀납법으로써 습득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더 추상적인 과학적 이론들이, 특히 뉴튼의 물리이론들이 있다. 그 이론들의 위상은 무엇인가? 그 이론들은 우리가 관찰한 것들을 설명하는가? 윌리엄 제임스와 에른스트 마흐 두 사람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버클리의 답변을 채택했다.
버클리의 견해로 과학이론들은 임박한 현상들에 대한 계산과 예언을 위한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론들은 세상이나 세상의 모습을 기술하지 않는다. 과학이론들은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뉴튼의 이론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힘’, ‘중력’, 그리고 ‘인력’과 같은 단어들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불가사의한 개념들이다. 뉴튼의 이론은 설명적인 이론이 아니라 단지 수학자의 허구이자 수학자의 속임수이다. 뉴튼의 이론이 어떤 것도 기술하지 않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리가 없다 ㅡ 뉴튼의 이론은 자체의 예언적 목적이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유용하거나 무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버클리는 이런 종류의 무의미하지만 유용한 속임수에 대하여 수학자의 편리를 위하여 고안된 ‘수학적 가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베이컨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서 표현하는 바와 같이 ‘계산을 축약하고 쉽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상정된’.
나는 버클리의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도구주의적 견해에 그리고 또한 버클리의 의미론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견해는 ‘물질’이나 ‘본질’, ‘미립자’나 ‘원자’와 같은 단어들을, 그리고 게다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뉴튼의 이론에 사용된 거의 모든 단어들을 무의미한 상징의 범주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아무도 버클리 이전에 그리고 버클리 이후에, 의미에 관하여 관찰주의적 혹은 현상주의적 이론에 따라서 모든 과학적 개념들은 틀림없이 의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을 아는 데 버클리만큼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적 개념들은, 버클리의 의미에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적 개념들은 지각이나 관찰이나 현상들을 나타내지도 않고 지각이나 관찰이나 현상의 도움을 받아서 혹은 지각이나 관찰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여하한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정의(定義)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과학적 개념들은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설립될’ 수 없다.(또한 그 개념들은 ‘사용 중에 정의’될 수
없다.)
이것이 버클리의 참으로 위대한 발견인데 그에 의하여 과학적 용어들과 이론들의 무의미함의 증거로서 해석된다. 나는 그것을 의미에 관한 관찰주의적이나 현상주의적인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서 해석한다.
정말로 ‘불가사의하다’는 버클리의 의미에서 모든 우리의 과학적 개념들은 불가사의하다: 그 개념들은 보이지 않고 보일 수 없는 세상의 보이지 않고 정말로 보일 수 없는 구조적 특질을 기술하곤 했다.그러나 이것은
이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공식화된 이론들이 ‘불가사의하다’거나 ‘형이상학적’이라거나 ‘비-경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론들은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 지닐 가능성이 높다. 나는 ‘불가사의한’ 과학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정확한 이유는, 관련된 개념들이나 단어들의 경험적이거나 비-경험적 특징에 대하여 주장되는 어떤 기준보다 그 이론들을 이용하여 더 효과적인 비-과학적 이론들을 내가 발견하도록 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을 내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버클리의 과학이론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데로 선회하여 나는 아마도 먼저 버클리가 이론의 개념들에 대한 자신의 비판에서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추상적 일반적인 아이디어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그가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는 평범한 언어 대부분의 술어들이 또한 그의 의미에서 추상적임을 깨닫지 못했다. 버클리 자신은, 언어를 사용할 때, 추상적인 용어들을 부단히 사용한다. 그리하여 그가 예를 들어 ‘현대적 불신의 성장’에 대한 분석가(Analyst)의 취지에서처럼 ‘불신(infidelity)’에 대하여 말하는 (믿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곳에서 ‘신앙이 없는 자(infidel)’라는 단어로써 자신이 싫어하는 (그리고 가령 특정 관찰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자신의 동료들의 증가하는 모임을 지정할 의도는 그에게 분명히 없으나 그는 그 단어를 이 사람들에 대한 진정으로 추상적인 특질의 명칭으로서 사용한다. 평범한 언어에서 보편적 용어들은 구체적 사물들의 구체적 모임들에 의하여 공유된 (우리가 ‘탁자’나 ‘개[dog]’와 같은 그런 단어들을 고려하여 아마도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일반적인 명칭일 뿐만 아니라 그 보편적 용어들은 ‘구리’, ‘수정’, ‘사과’, ‘음식’, ‘독약’ 혹은 ‘화폐’처럼 정확하게 버클리의 의미에서 ‘추상적인’ 사물들의 구조적이거 관계적이거나 ‘의향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모든 보편적 개념들은 이론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보편적 개념들 중 어떤 개념들은 시험될 수 있을지라도 속속들이 시험될 수는 없다 (그리고 검증될 수도 없다). ‘여기에 물 한 잔이 있다’는 서술은 무한하고 무진장한 시험에 ㅡ 예를 들어 화학적 시험들 ㅡ 노출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물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자체의 법칙-같은 행동에 의하여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25절 말미 참조). 그리하여 ‘물’은 모든 다른 보편적 개념처럼 의향적이다. 심지어 ‘붉은색(red)’도 의향적인데 왜냐하면 ‘붉은색의 이 표면’이 이 표면은 붉은 빛을 반사하는 의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비-의향적인 보편적 개념과 같은 것들이 없다는 사실은 카르납[Carnap]의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 제안된 의향들을 비-의향적인 관찰 가능한 특질들로 ‘축소하는’ 프로그램을 부수적으로 무효화한다. 결과적으로 뉴튼의 뉴튼의 역학뿐만 아니라 평범한 언어로 된 대부분의 서술들은 버클리의 의미에서 무의미한 것으로서 기술되어야 할 텐데 이유인즉 ‘잔(glass)’,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분명하게 ‘물(water)’은 평범한 언어에 속한다할지라도 진짜 보편적 개념들이어서 버클리의 의미에서 추상적인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평범한 언어로 된 가장 흔한 보편적 용어들은 많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이론들을 포함한다. 두드러진 사례들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들인데 분명히 어떤 원시적 문화에서는 ㅡ 그 용어들이 역시 포함하는 형이상학적 인과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ㅡ 경험적 이론을 포함한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가 되는 것’의 특징이나 ‘아들이 되는 것’의 특징은 버클리의 의미에서 ‘태양에 의하여 중력으로 이끌리는 것’의 특징보다 더 잘 지각될 수 없다. (다시 우리는 버클리의 관념론이 그의 기독교와 충돌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유는 전과 동일하다: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은 기독교에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뉴튼의 역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언어로 된 평범한 서술들 사이의 차이점이 ㅡ 만약 그런 차이점이 있다면 ㅡ 단지 정도(程度)의 문제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버클리의 이론의 종말을 의미한다. 먼저, 단어들의 유의미함이나 무의미함이 정도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어에 아무리 적더라도 의미가 있다면 그 단어에는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자연법칙을 포함하여 평범한 언어로 된 서술들이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이유로 참이거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제 동일한 것이 뉴튼의 이론과 같은 과학적 이론들에 적용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이론들은 도구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기술적(記述的) 서술이다. 과학적 이론들은 세상에 관한 진정한 추측들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주의적 관점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과학적 이론이나 자연법칙은 (비록 우리가 확신을 할 수 없다할지라도) 참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나아가 우리는 참인 자연법칙의 존재를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교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경험적 논증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ㅡ 5절, 특히 6절에서 우리가 그랬던 바와 같이.
나는 사실주의자가 물질적 물체들에 대한 흄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흄의 관념론적 논증들이 지닌 약점은 틀림없이 사실주의의 진실성을 확립하지 않는다.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사실주의적 해석에 관한 버클리의 공격은 내가 보기에 물리적 물체들에 대한 그와 흄의 공격보다 더 흥미롭고 미묘하다 (비록 내가 개인적으로 버클리의 언어학적 논증들에 의해서보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흄의 방식에 더 매혹 당할지라도): 많은 것이 버클리의 이 공격으로부터 습득될 수 있다. 그리고 버클리의 논증들이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버클리의 이 공격이 쉽게 거부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은 도구로서의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그의 해석을 반증하지는 않는다. 도구주의는 설사 버클리의 도구주의를 선호하는 기발한 논증들이 옹호될 수 없다할지라도 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특정 형태의 도구주의가 1927년 이래 새로운 종류의 정설이 되었기 때문에 (후기 III권 참조), 버클리의 논증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런 상태의 도구주의를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지식의 주관주의적 이론에 대한 우리의 비판적 토론을 떠나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갈 것이다: 과학의 이론.
12.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 도구주의와 귀납법의 문제.
내가 생각하기에 비록 버클리에게 형세를 역전시키는 데, 그리고 그의 도구주의에 대한 증거를 그의 의미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할지라도 나는 그런 상태로의 도구주의의 교설을 지금까지 반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버클리의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구주의로써 나는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이나 혹은 슈뢰딩어의 과학이론과 같은 과학이론이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기 (특히 측정) 위한 추론의 도구 그리고 다른 실용적 적용들의 도구이자 도구만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교설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욱 특히 과학적 이론은 세상이 구조에 대한 진정한 추측으로서, 혹은 우리 세상의 어떤 모습들을 기술하는 진정한 시도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설. 도구주의적 교설은 과학적 이론들이 다소 유용하여 다소 효율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구주의적 교설은 과학적 이론들이, 기술적(記述的) 서술들처럼,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음을 부인한다.
도구주의와 관련된 전체 문제는 ‘다만(nothing but)’이라는 단어 주위에서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과학적 이론들은 세상에 관한 진정한 추측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들이 예언을 위한 추론이나 다른 적용들의 도구로서 또한 간주될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그 이름 아래서는 아니라할지라도
특정 형태의 도구주의를 토론했다. 그 도구주의는 슐릭(Schlick)에 의하여 토론되고 슐릭에 의하여 비트겐슈타인에게 귀속되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4절, 주석 4 및 7, 그리고 원문 참조.) 이 형태의 도구주의는 과학적 이론들은 무의미하다는 버클리의 교설과 일치하는 한 버클리의 도구주의와 비슷하다. (슐릭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들은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도구주의와 다소 연관된 교설은 과학적 이론들 안에서 경험에 의해서 시험될 추측들보다는 유용한 규약들을 보는 푸앵카레[Poincaré]와 뒤엠[Duhem]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이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이 교설을 또한 어느 정도 상세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나는 규약주의를 현재 장(章)에서 고찰할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현재 토론은, 몇 가지를 변경하여, 규약주의를 적용할 것이다.)
나는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른 곳에서 간략하게 개괄했다. 그러나 그 주제는 현재의 문맥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비판을 다소 더 전체적으로 전개하겠다.
나의 비판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응용과학과 기술에서 ‘계산규칙(computation rules)이 (내가 그것들을 지칭하자고 제안하는 바와 같이) 많이 이용된다. 그런 계산규칙의 사례들은 항해에서 사용되는 규칙들과 도표들이거나 사진술에서 노출 횟수를 계산하는 데 (노출계[exposure meter]를 구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용되는 규칙들 및 도표들이다. 이 계산규칙들은 정말로 다만 도구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계산규칙들은 세상에 대한 정보성 기술이라기보다는 유용한 도구로서 의도되었고 구매되어서 판매된다.
이제 도구주의가 참이라면 모든 과학적 이론들은 다만 계산규칙이다. 결과적으로 뉴튼의 역학과 같은 소위 순수과학과, 우리가 응용과학 및 공학 도처에서 조우하는 저 기술적(技術的)인 계산 규칙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론과 다만 기술적(技術的)인 계산규칙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도구주의가 이 계산규칙들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는 반면, 도구주의는 이 차이점들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도구주의자에게 이론가들이 자신의 접근방법이 지닌 고유한 특징을 밝히기 위하여 언급할 것을 도구주의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허용할 번역규칙과 같은 것을 확립함으로써 나의 논증들은 반박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구주의에 대한 그런 옹호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도구주의적 주장에서 내용을 비워서 도구주의적 주장으로부터 현재 도구주의적 주장이 지니고 있는 흥밋거리를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태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도구주의자는 궁극적인 실용적 목적들에 대한 자신의 범위가 상당히 분명하게 제한된다고 정말로 상정한다. 도구주의자는 모든 것이 어느 날 자신의 주장으로부터 내용을 비우지 않고도 아마도 어떤 목적에 부합될 것이라는 견해를 그다지 잘 수용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가는 이론이 지닌 미래의 유용성에 대한 고찰과 전혀 독립적으로 이론이 본질적으로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론가의 접근방법과 도구주의자의 접근방법 사이의, 그리고 이론들과 계산규칙들 사이의 차이점을 조명할 열 가지 요점을 언급하겠다.
(1) 이론들이 지닌 논리적 구조는 계산규칙들이 지닌 논리적 구조와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론적 체계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은 두 가지 이상의 계산규칙들의 체계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과 다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론들과 다른 한편으로 계산규칙들 사이의 관계들은 대칭적이 아니다.
이 요점을 완벽하게 토론하지 않으면, 이론들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된다고 추측으로 주장되는 추론적 체계들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계산규칙들은 도표형식으로 제시되어 제한된 실용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다. 선박들의 속도를 늦추는 데 유용한 항해법칙들은 속도가 빠른 항공기에게는 무용할 것이다. 계산규칙들은 (예를 들어 항해에 관한) 어떤 이론도 계산규칙들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론에 (예를 들어 뉴튼의 이론) 근거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아직 결정적이 아니다: 이론들 자체는 미화(美化)된 계산규칙들과 같은 것들이라고 ㅡ 더 특별한 계산규칙들을 작성하는 데 사용되는 초-규칙(超-規則: super-rules)들 ㅡ 여전히 언급될지도 모른다.
(2) 계산규칙들은 자체의 유용성을 이유로만 선택된다. 이론들은 거짓으로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계산목적으로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뉴튼의 이론이나, 뉴튼의 이론을 맥스웰(Maxwell)의 (헤르츠[Hertz]의) 무선전파 이론과 결합한 것이 반증되었다고 상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에서 사용되는 계산규칙들이 (항해 레이더를 포함하여) 두 가지 이론 모두에 지속적으로 근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전혀 없다.
(3) 이론들을 시험하면서 우리는 그 이론들을 반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도구들을 시험하면서 우리는 도구들이 지닌 적용가능성의 한계를 알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한 이론을 반증한다면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이론을 찾는다. 그러나 도구는 자체의 적용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런 한계 발견을 기대한다. 항공기의 기체(機體)가 ‘시험되어 파괴로 이어진다’면 우리가 그 기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우리가 그 기체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기체가 지닌 적용가능성의 한계가 또 다른 기체가 지닌 적용가능성의 한계보다 좁다는 이유로 그 기체를 배척하겠지만 단지 그 기체가 그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이 이유만으로 보편적 이론을 배척할 것인 반면) 그 기체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4) 이론의 적용은 시험으로서 간주될 것이고 기대되는 결과들을 산출하지 못하면 그 이론이 배척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계산규칙들과 다른 도구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여하한 결함으로 인하여 (가령 항공기 비행에서 전통적인 비행규칙들의 결함) 우리는 그 규칙들이 특정 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이론적 추측을 배척할 것이지만 그 규칙들은 다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이용될 것이다. (외바퀴 손수레는 트랙터와 나란히 계속 존재할 것이다.)
(5) 한편으로 점점 더 일반적인 이론들을 향하는 분명한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점점 더 전문화된 도구들을 (컴퓨터를 포함하여) 향한 분명한 경향이 있다. 두 번째 경향은 도구주의와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다: 실용적 관점에서 우리는 당장 해야 할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매우 편리한 도구들을 원한다. 그리하여 이론가의 관심과 목표는 컴퓨터 기술자의 관심과 목표와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6) 한 가지 흥미로운 경우는 우리 앞에 예견될 수 있는 실용적 적용에 관한 한 현재 구분이 불가능한 두 가지 이론들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경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구들과 계산규칙들은 주어진 적용분야 때문에 고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구주의자는, ‘적용의 편의’와 같은 다른 것들이 동등하기 때문에 두 가지 이론들이 그 분야에서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두 가지 이론들이 동등하게 유용하다고 말하게 되어 있다. 이론가는 다르게 생각한다: 두 가지 이론들이 논리적으로 다르면, 이론가는 두 가지 이론들이 다른 결과를 낳을 적용 분야를 발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ㅡ 아무도 이전에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할지라도. 이론가는 그 경우에 두 가지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실험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경험 분야들이 이론에 의하여 개척될 것이다 ㅡ 아무도 이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들. 이론이 지닌 이 탐구적 (그리고 지적[知的]) 기능은, 이론들은 탐구도구들이라고 (탐구자의 선박이나 현미경처럼) 말을 함으로써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탐구될 실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 실제는 참으로든 거짓으로든 기술될 수 있다 ㅡ 이것이 정확히 버클리적 도구주의자가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도구주의는 또한 형이상학적 사실주의, 그리고 심지어 유물론과도 결합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버클리적 도구주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론들이 실제를 기술한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로써 기술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이론들을 포함하는 우리들의 도구들로써 다소 성공적으로 작동될 본질적인 물체들이 ㅡ 심지어 본질적인 물질적 물체들 ㅡ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7)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그 차이점이, 겉으로 보기에, 도구주의자들에 의하여 인정될 수 없는 두 가지 형태의 예언을 (혹은 ‘예언’이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중요하게 구분하는 데에 다다른다. 한 가지 형태는, 가령, 다음 일식이나 월식에 대한 예언이다 ㅡ 일식이나 월식의 시간, 볼 수 있는 지역, 기타 등등, 혹은 멘델의 육종 실험에서 다양한 색깔을 지닌 콩의 숫자에 대한 예언: 일반적으로 말해서 알려진 종류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 다른 한 가지 형태는 새로운 이론이 짜이기 전에 심각하게 고려된 적이 없는 종류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능성을 우리가, 말하자면, 이론으로부터 배우는 사건. 이 두 번째 종류의 사례들은 일식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예언들이다; 혹은 질량의 에너지 변환에 관한 그의 예언들이다. 이런 종류의 예언들은 흔히 예언자 스스로가 놀라면서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나타나는데 예언자의 유일한 발명은 당시 존재하던 이론이 지닌 난점들 몇 가지를 제거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종류의 예언들은 새롭고 의심되지 않은 사실의 세상을 ㅡ 혹은 아마도 우리의 예전 세상이 지닌 새로운 모습들을 파헤친다; 그래서 고민 없이 이 상황을 도구주의적 참고 틀에 맞추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8) 결정적인 질문은 물론 이론이, 자체의 도구적 능력을 뛰어넘어, 정보성 내용을 담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 이다. 이전 요점에 비추어 이것은 부인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론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사건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이론은 틀림없이 이 사건들을 우리에게 기술할 수가 있기 (실제로 이론이 그러한 바와 같이)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논증들이 더 많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우리 태양계의 (근사치) 구조를 기술한다는 것을 오늘날 누가 부인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편집한 사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대하여 도구주의적 해석을 제안했던 오시안더(Osiander)의 제안에 근거하면, 이것은 벨라르미노 추기경(Cardinal Bellarmino)에 의하여, 프란시스 베이컨에 의하여, 그리고 버클리 주교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이 사람들이 부인한 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는 기술적(記述的)이거나 정보성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9) 이론들은 계산규칙들과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경험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가지 사례는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와 오토 프리슈(Otto Frisch)가 한(Hahn)의 관찰을 우라늄 분열로서 해석한 것이다. 프리슈가 매우 무거운 핵이 분열할 것이라 예언한 핵의 물방울 이론을 주창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물론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프리슈가 중성자 방출과 재탈환의 문제를 간과한 이유를 또한 설명할 것이다: 그 문제는 물방울 이론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 과학의 변경(邊境)에서 발생했던 것은 평범한 생활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경험을 부단히 해석한다. 나쁜 맛이나 냄새는 썩은 달걀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차량의 미끄러짐(skid)은 ㅡ 전적으로 이론적 용어 ㅡ 타이어와 도로 사이의 불충분한 마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특이하고 위험한 자동차의 움직임을 설명하거나 혹은 해석한다. (이것은 평범한 언어와 이론적 언어 사이의 분할선이 ㅡ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ㅡ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사례이다.)
(10) 예언은 버클리 이래 줄곧 도구주의자들에 의하여 과학이 지닌 주요 실용적 임무 중의 한 가지 임무로서 간주되었다. 예언의 실용적 가치는 명백하여 도구주의로 하여금 자체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론가들은 예언이 외부로부터 과학에 부여된 임무라고 전제하지 않고도 과학에 관한 예언의 중요성을 자신들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이론가에게 예언들은 예언들이 이론에 대한 관계 때문에 거의 예외적으로 중요하다; 이론가가 참인 이론들을 찾는 데 흥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언들이 시험으로서 역할을 하여 거짓 이론들을 제거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위에 언급된 두 번째 종류의 예언은 ㅡ 지금까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건에 대한 예언 ㅡ 우리에게 이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새로움뿐만 아니라 옛 이론에 대한 어느 정도 그 이론의 우월성과 그리하여 어느 정도의 이룩된 진보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새로운 이론이 어느 날 틀림없이 배척된다 할지라도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경험적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열 가지 요점 모두는 확고한 도구주의자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위의 열 가지 요점들이 도구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하는 듯하다.
도구주의적 관점을 채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납법의 문제는 사라진다. 도구에는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없다. 결과적으로 도구를 고안하거나 개선하는 데 사용되는 과정이나 기술에 관한 타당성의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귀납법의 문제는 참, 거짓, 그리고 타당성의 문제에 관련될 따름이다.
도구주의는 틀림없이 많은 것을 귀납법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체하려는 소망에 빚지고 있다. 버클리는 단순한 일반화와 관련된 귀납법을 ㅡ 가령 특정 종류의 구름이 비를 불러온다는 것 ㅡ 신뢰했다; 그러나 그는 ‘불가사의한’ 이론은 ㅡ 뉴튼의 이론이나 원자론과 같은 ㅡ 귀납법의 결과일리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불가사의한’ 이론들이 성공적이라면 유용한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것은 그에게 난제를 초래하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한 버클리의 해결책은 거의 잊혔지만 마흐(Mach)에 의하여 다시 발견되었는데 마흐는 예언을 위한 경제적 요약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푸앵카레(Poincarē)와 뒤엠(Duhem)에 의하여 재발견되었는데 그들은 이론들은 규약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J. S. 밀(Mill), 비트겐슈타인과 슐릭(Schlick)에 (그리고 나중에는 라일[Ryle]에) 의하여 재발견되었는데 그들은 이론들이 진짜 명제들이 아니라 그 기능이 추론의 법칙들로서 ㅡ 진짜 관찰 서술들을 다른 진짜 관찰 서술들로 (다시 말해서, 예언들로) 변환시키기 위한 규칙들로서 ㅡ 역할을 하기로 된 사이비-명제들이라고 말했다.
버클리, 마흐, 푸앵카레 그리고 뒤엠 모두는 낮은 질서의 보편성을 지닌 간단한 일반화들은 귀납법에 근거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더 추상적인 이론들은 귀납법에 근거할리가 없음을 알았다. 흄은 귀납법, 심지어 간단한 일반화들에 대한 귀납법들이 무효이어서 정당화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함으로써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사실로 생각했던 것을 ㅡ 사람들과 동물들이 (연상이나 버릇의 영향을 받아서), 아무리 귀납법들을 정당화 하려는 시도가 틀림없이 무효일지라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될 귀납적 추리들을 만든다는 것 ㅡ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흄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귀납적 과정들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라고 (심지어 낮은-수준의 귀납적 과정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귀납적 과정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신화라고 나는 주장한다.버클리,
푸앵카레, 그리고 뒤엠은 관찰로부터 귀납법을 통하여 뉴튼의 이론과 같은 추상적이거나 높은-수준의 이론을 얻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올바르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면에서 높은-수준과 낮은-수준의 법칙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법칙들은 귀납적 일반화라기보다는 유용한 발명품들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견해는 물론 모든 법칙들이 발명품들이지만, 시험될 수 있는 세상의 구조에 대한 진짜 추측들이라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낮은-수준의 가설들은 높은-수준의 설명적 이론들만큼 추상적은 아니다. 그러나 낮은-수준의 가설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다.
이제 밀(Mill)과 비트겐슈타인과 슐릭에게서 기인하는 제안으로 우리가 보편적 법칙들이나 이론들을 진짜 서술들이라기보다는 추론의 규칙들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으로 선회하자.
그 제안은 다음과 같이 상술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발이 두 개다’와 같은 전칭명제를 생각하라. 그 서술이 출현하여 ㅡ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서술을 전제로서, 혹은 ‘억압된(suppressed)’ 전제로서 묵시적으로 사용한다면 ㅡ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단칭명제로부터 ‘소크라테스는 두 발이 달렸다’라는 결론을 추론할 것이다. 이제 단지 단칭명제들만이 ‘유의미’하다는 전제를 하자; 혹은 더 정확하게, 이런저런 이유로 전칭명제가 아니라 우리가 단지 단칭명제들에만 흥미를 갖는다는 (가령 단지 단칭명제들만 경험적 사실들을 기술하기 때문에) 더 약한 전제를 하자. 우리는 그럴 경우에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에서부터 ‘소크라테스는 두 발이 달렸다’라는 변환이나 추론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발이 두 개다’라는 전칭명제에 대한 전체 관심은 그 관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한 가지 단칭명제에서 다른 단칭명제로 전환하게 된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칭명제가 ‘보편적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든 ‘보편적 사실’에 대한 주장으로서보다는 우리에게 이 전환을 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서, 혹은 특정 추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전칭명제를 해석할 것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전칭명제들을 특정 추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혹은 특정 추론규칙들에 대등한 것으로서 간주할 것이다: 한 가지 이상의 전제로부터 나아가는 타당한 추론을 우리가 가질 때마다 우리가 어떤 전제라도 (참이라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도록 허용하는 (타당한) 규칙으로서 해석할 것임은 논리학의 간단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다’가 참이라면 ‘모든 사람은 발이 두 개다’에서 ‘소크라테스는 발이 두 개다’로의 추론을 타당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유사하게 ‘모든 사람은 발이 두 개다’가 참이라면 ‘x는 사람이다’에서 ‘x는 발이 두 개다’로의 추론을 타당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전칭명제가 본질적으로 추론의 규칙이거나 추론의 규칙에 지나지 않음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명제들에 대하여 그 명제들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고 말하거나 추론들에 대하여 추론들이나 추론들의 규칙들에 대하여 추론들이나 추론들의 규칙들이 타당이거나 무효일 수 있다고 말하기를 동의하자. (우리는 그것들이 진리를 보존하고 있으면 타당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그런 것이어서 전제가 지닌 진리들이 결론이 지닌 진리를 보장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수학, 과학, 평범한 영어의 언어를 포함하는 모든 통상적인 언어에서 ‘x는 사람이다’에서 ‘x는 발이 두 개다’로 변환이 사실적으로 진리를 보존하고 있다면 (혹은 우리가 말할 바와 같이, ‘사실적으로 타당하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모든 사람은 발이 두 개다’와 같은 전칭명제는 사실적으로 참이다. 게다가 전칭명제는 상응하는 추론이나 추론의 규칙이 논리적으로 진리를 보존하거나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논리적으로 참일 (혹은 ‘분석적’) 것이다.
이 등가성(等價性) 때문에 우리가 전칭명제들을 추론으로 ‘설명한다’면 ㅡ 아마도 우리가 추론의 규칙들이 전칭명제들보다 철학적 혼란이나 수수께끼들을 유발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가 추론의 규칙들로써 전칭면제들을 갈음하는 제안을 하고 싶지 않다면 ㅡ 아무 것도 습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전칭명제들을 회피하거나 포기하고 전칭명제들을 추론의 규칙들로 갈음하는 제안에 해당될 것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전칭명제들이 발생하지 않고 추론의 규칙들에 의하여 갈음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제안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언어는 어렵지 않게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언어는 평범한 언어가 아니라 자체의 문법이 전칭명제들의 사용을 금지하는 한 인공적 언어일 것이다. 그 언어로 된 모든 명제들은 단칭적일 것이고 그리하여 그 명제들은 (트락타투스[Tractatus]의 의미에서) 원자명제들(atomic statements)의 진리-기능들(truth-functions)이 되어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전칭명제들을 삭제함으로써 귀납법의 문제는 아마도 사라진 듯이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공적 언어는 틀림없이 많은 공리주의적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언어를 구축할 가능성과 그 언어를 실제로 구축하여 채택하는 것 모두는 문제들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것들은 어떤 것도 명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전칭명제들을 추론규칙들로써 갈음하려는 제안은 사이비ㅡ해결책들을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판단하여, 곧 추방되지 않을 새로운 철학적 혼란과 복잡함을 야기했다.
전칭명제들과 추론 규칙들의 등가성 때문에 그 제안이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전칭명제들이 지닌 진리의 문제를 상응하는 추론규칙들이 지닌 타당성의 문제로 갈음하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가 다른 한 가지 문제와 정확하게 대등하기 때문에 이 갈음에는 어떤 소득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갈음을 제시한 철학자들은 틀림없이 문제에 관하여 혼동했던 듯하다. 그 철학자들은 소득도 해결책도 없는 곳에서 소득이나 해결책을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훨씬 더 나쁘다.
오직 논리적 혹은 분석적 추론규칙들을 사용하는 것이 관습적이다. 모든 전칭명제들은 추론규칙들로써 간주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하여 함축적으로 모든 전칭명제들을 분석적으로서 수용하라는 격려를 받는다. (이것은 급진적 형태의 규약주의를 채택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IV장과 VII장 참조.) 오직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추론규칙들을 사용하는 관습은 평범한 수학이나 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추론규칙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의문시하지 않고 추론규칙들의 타당성에 의존하여 추론규칙들을 무의식적이고 묵시적으로 사용한다: 문제시되는 추론규칙과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추론규칙이 지닌 타당성을 거의
의문시하지 않으며, 추론규칙들을 실험적 시험에 부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안되는 바와 같이, 모든 전칭명제들을 추론규칙들로서 해석하려면 우리는 틀림없이 이 추론규칙들을 전칭명제들처럼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틀림없이 추론규칙들을 반증하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시험해야 한다 ㅡ 우리가 과학의 비판적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제안을 옹호했던 철학자들은 이 결과들을 주목하지 못했던 듯하다. 과학적 법칙들을 분석적으로서 간주하면서 그 철학자들은 규약주의에 근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자들 가운데는 규약주의를 반대하는 탁월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칭명제들이 추론의 규칙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제안에 의하여 야기된 혼란을 적시한다.
보다 최근에는 귀납법 문제를 향한 새로운 태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귀납법이 정말로 신화(神話)일 것이라는, 그래서 귀납법 문제는 정말로 귀납법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해결될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철학자들 사이에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철학자들은 많은 과학자들이 자기들이 귀납적 추론들을 하고 있다고 ㅡ 자기들이 자신들이 관찰한 결과들을 일반화함으로써 법칙들을 얻는다고 ㅡ 주장하는 사실에 의하여 감명을 받는다.
이 두 가지 재료로부터 다음 이론이 도출된다. 과학자들은 정말로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귀납적 추론들’로 지칭될 것을 수행한다 ㅡ 각각에서 자체의 고유한 방법이자 과정에 따라서. 그러나 이 ‘귀납적 추론들’은 추론들로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귀납적 추론들을 이행하는 것은 사례에 의하여 가르쳐지는 재주일 뿐이고 과학적 실습에서 습득된다. 재주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귀납법의 문제는 ㅡ 귀납법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인 ㅡ 사라진다. 요컨대 귀납적 추론은 신화(神話)이다: 귀납적 과정이나 귀납적 기교만 존재한다 (사실상 매우 다양한 그런 과정이나 기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귀납법 문제’를 초래할 수 없다.
이 이론에는 도구주의자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제공할 것이 없다. 그리고 도구주의자에게도 이 이론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과학적 이론들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귀납법 문제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어떤 정도로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구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과학적 이론들을 가설이나 추측으로서 ㅡ 우리가 참인 이론들을 탐구하는 데 대한 임시적 결과로서 ㅡ 간주하는 우리들은, 소용이 없는 다수의 귀납적 과정들이 있다는 언급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귀납법 문제가 지닌 난제들을 증가시킬 따름이다. 대조적으로 귀납적 과정 따위는 없다는 언급은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시험할 풍부한 과정들은 ㅡ 모두 연역적 논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분석될 과정들 ㅡ 있다 할지라도) 귀납법 문제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어 귀납법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13. 과학 대(對) 도구주의.
도구주의자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들은 실제적 발견일 리가 없다: 과학적 이론들은 도구들이다. 과학은 도구를 만드는 활동이다 ㅡ 미화(美化)된 배관작업. (현상의 세상에서는, 수수께끼가 없는 세상에서는 실제적인 과학적 발견을 위한 장소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도구주의 철학은 실제적인 철학적 발견으로 밝혀진다: 도구주의 철학은 과학의 참된 특징을 ㅡ 과학의 모습 배후에 있는 실제 ㅡ 밝히고 베일을 벗긴다. 도구주의 철학은 과학적 이론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과학적 이론들은, 겉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현상의 세상 뒤에 있는 세상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과학적 이론들은 철학적 분석에 의하여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밝혀진다. (그리고 ‘위대한 과학자들’은 철학적 분석에 의하여 미화[美化]된 배관공으로서 밝혀진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도구주의의 경향은 반(反)-이성주의적이다. 도구주의의 경향은 인간의 이성이 우리 세상의 어떤 비밀도 발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4000년 전에 알았던 것보다 오늘날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증가하지 않았다: 사실들을 다루는 우리의 솜씨만, 그리고 도구를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우리의 지식만 증가했다. 도구주의에 따르면 과학적 혁명은 없다: 오직 산업혁명만 있다. 과학에는 진리가 없다: 용도만 있다. 과학은 우리의 정신을 계몽할 수 없다: 과학은 우리는 배를 채울 수 있을 따름이다.
버클리 주교에게서 그런 관점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버클리는 자신이 그런 관점들을 과학과 ‘자유로운 생각’의 공격을 막아 종교를 방어하려는 희망으로 발표했음을 분명히 했다; 이성은 하느님의 계시로 도움을 받지 않고도 현상의 세상 배후에 있는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막아. 그러나 이 도구주의적 관점들에 대한 지지를 과학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진영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다소 놀랍다.
도구주의를 지지하는 과학 찬양자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사례는 라이헨바흐(Reichenbach)이다. 버클리 주교의 충성에 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만큼 라이헨바흐의 충성에 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라이헨바흐는 반대 진영에 있다. 그는 과학 가르치기를 신뢰한다. ‘철학자는 자연이 양자 물리학자가 기술하는 대로일 가능성이 높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기술이 참인지는 경험적 과학의 문제이다’라고 기술한다.라이헨바흐의 근본적인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흄의 사실주의적 신념들과 러셀의 사실주의적 신념들에 대해서만큼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라이헨바흐는 - ‘중립적’ 일원론자처럼 - 자신의 물리학 분석이 철학적으로 중립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한다. ‘인과성이 선험적이고 관찰될 수 없는 것들에까지 확대된다고, 그리고 관찰될 수 없는 것들의 인과적 태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양자역학을 특정 철학적 교설의 관점으로부터 판단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에 동일하다. 양자역학의 논리적 위상에 관하여 중립적 용어들로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이 가능성을 그는 자신의 탐구에서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탐구는 여하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전제 없이 완료되었다’고 그는 기술한다.그러나 그는 사실상 중립적 일원론자들보다 더 중립적이지 않다:
그는 지식의 주관적 이론을 함축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버클리적이거나 흄적인 관념론자이다; 그리고 버클리적 도구주의자처럼 그는 물리학 자체보다 물리학에 의하여 취급되는 대상들에 관하여 더 잘 정보를 얻는다. 왜냐하면 양자물리학에 대한 그의 전체 분석이, 내가 쳐다보고 있는 중인 창문 밖 이 나무처럼 관찰되는 현상과 그에 의하여 ‘사이현상(interphenomena)’이라고 불리는 내가 이 문장을 적기 위하여 나의 시선을 떨어뜨린 후의 동일한 나무와 같은 이 현상 사이의 보간법(補間法: interpolations)의 구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무를 보지 않는 동안에 나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관찰되지 않는 대상을 관찰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삽입(보간)한다; 그리고 우리가 삽입된 대상을 그런 방식으로 선정하여 그 대상으로 인하여 우리는 관찰된 대상과 관찰되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인과성에 대한... 공준(公準: postulate)을 완료한다....’고 라이헨바흐는 기술한다.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가 이 공준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관찰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다른 기술들에 도달한다. 이 기술들은 거짓이 아니다... 통상적인 언어는, 그 언어에 따라서 관찰이 중단될 때 대상은 지속되는데, 이 조합 가운데서 한 가지 기술을 골라냄으로써 구축된다; 이 평범한 기술이나 평범한 체계는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되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인과성의 공준에 의하여 결정된다. 공준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단순화하는 데 이용하는 규칙이다.’
이제 이 교설을 잠시 동안 고찰하자. 라이헨바흐가 말하는 것은 - 그리고 그의 저서와 기고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 이렇다. 우리가 관찰들 사이에 보간(삽입)하는 대상들은 다소 자의적으로 선택되거나 ‘선정된’다. ‘평범한 체계’는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인과율이 동일하게 남아있는 그런 방식으로 대상들을 선정하는 데 놓여있다. 그러나 ‘평범한’ 선택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공준을 자유롭게 채택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단순화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범한’ 선택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공준’은 규약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라이헨바흐는 다음 사례를 이용한다: ‘... 우리는 관찰되지 않은 나무가 두 그루의 나무로 분리된다고 전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기술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는,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에 관한 한 우리가 우리의 인과율을 변경시켜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나무를 관찰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나무의 그림자를 관찰할지도 모르게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그루의 나무가 (관찰되지 않을 때 두 그루로 분리된) ‘단지 하나의 그림자를 낳았다’고 틀림없이 전제해야 한다.
그런 전제들은 분명히 어설플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평범한 체계’를, 다시 말해서,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되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인과성의 공준’을 채택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단순화하기’ 위하여 평범한 체계를 채택한다.
이 견해에 반대하여, 나는 우리가 시선을 돌린다면 나무가 분리되는 것과 우리가 다시 보면 나무가 다시-모이는 것이 물리학의 법칙을 분명히 위반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우 큰 힘, 가속, 에너지 소모, 기타 등등을 포함할 (물리학에 따르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시선을 돌릴 때 나무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물리학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물리학에 따르면 나무는 또한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물질의 파괴를 포함할 것이고 따라서 핵폭발의 특징인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헨바흐가 ‘평범한’ 전제가 ㅡ 그 전제에 따라 관찰되지 않은 나무가 관찰되는 양 행동한다 ㅡ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지’만 ‘우리의 언어를 단순화하는’ 장치일 따름이라고 말할 때, 그는 물리학의 분명하고도 명백한 선언들이 실제로 단순화하는 장치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들에게 밝힌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공준들’을 채택할 것을 결정할 것이라고 그가 주장할 때 (물론 그 공준들이 현상들이나 관찰들에 관한 한 동일한 결과들을 낳는다면) 그는 버클리 및 마흐(Mach)와 함께 물리 이론들은 현상들을 기술하여 예언하기 위한 도구들일 따름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리하여 라이헨바흐는 자신의 주관주의적 지식 이론에 의하여 자신이 혐오하는 위치로 유도된다: 철학자는 물리학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거나 더 잘 알 것이라는 믿음으로; 철학이 물리학의 선언들을 수정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라이헨바흐의 이 관념론적 위치는 양자이론이 지닌 문제들에 대한 그의 해결책에 필수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왜냐하면 그가 내놓은 결과는 이러하기 때문이다. 양자이론으로는 ‘사이현상에 대한 정의(定義)를 인과성에 관한 공준들이 충족되는 방식으로 내놓는 것이 불가능’하다.그리하여
양자이론에 따르면 ‘사이현상에 대한 모든 기술의 집합은 평범한 체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라이헨바흐는 이 결과를, 그 결과에 대하여 그는 증거를 제공했다고 주장하는데, ‘변칙의 원리(the principle of anomaly)’라고 불렀다 (혹은 때때로 ‘인과적 변칙의 원리[the principle of causal anomaly]’).
이제 관념론적 관점으로부터, 이것은 정말로 결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이론은 상품을 배달한다. 양자이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관찰을 올바르게 계산할 수 있다. 참으로 양자이론은 우리가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을 평범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을 소개하는 평범한 방식이 여하한 경우에도 편의와 언어적 단순성의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부정적 결과가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나에게는 이 후기의 III권에서 양자물리학을 내 자신의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문제를 토론할 의도가 있다 (부수적으로 라이헨바흐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여기서 나는 단지 라이헨바흐의 해결책이 내가 보기에 너무 천박하기 때문에 모든 관념론적 해결책들만큼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이용된 인상적인 수학적 및 논리적 도구에도 불구하고 라이헨바흐의 해결책은 고질병을 앓는다: 라이헨바흐의 해결책은 치명적으로 쉽다. 왜냐하면 그 해결책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형식주의(formalism)가 상품을 배달한다. 다른 무엇을 당신은 원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가? 그러나 그것은 쉽다: 그것은 현상을 예언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도구를 이해하는 것은 도구가 어떻게 구축되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면 ㅡ 예를 들어 당신이 원자나 전자나 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알고자 원한다면 ㅡ 관찰되지 않은 존재들이 (원자나 전자나 광자 같은 것들) 우리 자신의 편의만을 위하여 소개된 사이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틀림없이 잊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질문은 실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심지어 형이상학적 사이비-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라이헨바흐가 실제로 말한 것에 대한 의역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풍자한 글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가 산출한 결과와 그의 태도를 (보어[Bohr]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태도와 유사한) 공정하게 표현한 것이다. 아무튼 나의 표현이 초점을 맞추고자 의도한 요점은 라이헨바흐의 주관적 관념론이고, ‘사실주의의 언어’로 또한 표현될 것은 실수나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산출한 결과들이 지닌 본질적인 성분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두 번째 사례는 카르납(Carnap)이다. 라이헨바흐의 경우에서처럼 아무도 과학에 대한 카르납의 충정이 지닌 성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그의 초기에는, 특히 세상의 논리적 구조(Der Logische Aufbau der Welt)에서 카르납은 개인의 주관적 감각-경험의 토대에 근거하여 과학의 세상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에 의하여 ‘물리주의(Physicalism)’로 전향했다. 자신의 거작에서 ㅡ 확률에 관한 논리적 토대(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ㅡ 그는 과학적 귀납법에 대하여 확률적 이론을 전개한다. 이 이론은, 나의 견해에서 올바른 (과학적 발견의 논리, 80절 참고), 무한한 우주에서 보편적 법칙의 논리적 확률은 심지어 가장 호의적인 경험적 증거를 토대로 해서도 항상 0일 것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카르납은 불행하게도 법칙의 검증 등급을 법칙의 논리적 확률과 동일시한다. 그는 그리하여 여하한 법칙의 (수용되든 거부되든) 검증 등급이 틀림없이 또한 0이라는 원치 않는 결과를 얻는다. 그리하여 어떤 법칙도 검증될 수 없다. 이 결과로 인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574쪽): ‘법칙들은 예측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가?’ 그의 답변은 법칙들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법칙들은 과학을 위하여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증은 도구주의를 초월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도구주의자들처럼 카르납은 여기서 과학의 유일한 기능은 예측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도구주의자들처럼 그는 법칙들은 이 목적으로 위한 ‘효율적인 도구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법칙들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의 논증은 법칙들이 완전히 불필요함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법칙들의 사용이 예측을 하는 데 필수적이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에 의하여 서술되는 이 법칙들이 고도의 검증 등급을 지니고 있지 않다할지라도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기타 등등에... 관한 저술에서 보편적 법칙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물론 편의적이다, 이 법칙들은... 실용적 생활에서 필요한 저 고도로 검증된 단칭 예측들을 발견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 역할을 한다.’라고 서술한다.
물론 보편적 법칙들은 카르납의 이론에서 서술들이다; 그러나 보편적 법칙들이 검증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과학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ㅡ 보편적 법칙들이 ‘예측을 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들’이라 할지라도 ㅡ 카르납의 귀납법 이론으로 인하여 카르납이 라이헨바흐의 견해와 매우 유사한 견해에 이르렀음은 분명하다: 단지 가능한 관찰들에 대한 단칭명제들만 실제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법칙들의 위상은 단지 자체의 유일한 기능이 법칙들은 효율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불필요한 예측도구들이라는 검증 불가능한 서술들의 위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저술의 앞부분에서 카르납이 채택한 매우 다른 태도를 고찰하면 (193쪽의 아인슈타인과 내 자신에 대한 그의 언급을 나는 특히 염두에 두는데 그 언급은 그의 의도가 이론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이 결과들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 결과들은 그가 묵시적으로 귀납주의적 인식론을 수용한 비의도적 결과들이다.
이 후기의 나중 책에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그리고 더욱 특히 양자물리학에 대한 주관주의적, 귀납주의적, 그리고 도구주의적 해석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불행한 부분의 심층적 사례들을 만날 것이다.
14. 도구주의 대(對) 과학
이제 우리는 지식의 주관적 이론에 대한 토론을 끝낼 것이다. 형이상학적 사실주의가 지닌 합리성에 대한 문제는 흄의 회의적 태도와 관련하여 (6절 말미에) 제기되었다. 흄과 그의 후계자들의 지식에 관한 주관적 이론을 우리가 검토하여 이 이론에서는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의 합리성에 대항하는 진지한 논증이 발견될 수 없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물리적 몸체들의 실제는 우리가 실행하는 거의 모든 상식적 서술에서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자연에 대한 법칙들의 존재를 수반한다: 그리하여 과학의 모든 선언은 사실주의를 암시한다. 이 논증들로 인하여, 이 견해가 입증될 수도 없고 반증될 수도 없어서 형이상학적이라 할지라도, 자연에 관하여 참인 법칙들이 있다고 믿는 것은 합리적이 된다. 흄의 회의론과 그의 추종자들의 회의론을 우리들이 토론하면서 이 논증들에 대항하여 여하한 무게라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거짓 독단만 ㅡ 정신 속에 (혹은 나의 언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이전에 나의 감각에 들었던 것만을 반영할 수 있다는 ㅡ 발견했다. 그 독단을 추적하면서 우리는 심지어 역설을 포함하여 흄에 의하여 그렇게 솔직하게 기술된 일련의 비의도적이고 수용 불가능한 결과들을 발견했다.
아마도 우리가 발견한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자신들이 산출한 결과들을 향한 이 학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지닌 태도였다. 자신의 산술이론에서 역설과 마주치자 산술은 위태롭다고 믿었던 프레게(Frege)처럼, 버클리와 흄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가 위태롭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화학을 찬양하는 동안 그들의 과학철학은 필연적으로 과학이 위태롭다는 견해에 상응하는 결과로 그들을 인도한다. 그들에게는 과학자들이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간주하는 것인 법칙들의 발견은 속임수이나 규칙들의
변형에 지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완전히 효율적인 담화방법일지라도 불필요할 뿐이다.
이 비의도적인 결과들은 그 결과들을 유발하는 지식이론들에 대한 그렇게 많은 논박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경쟁하는 이론들을 겨냥한 여하한 비판도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약점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접근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비의도적인 결과들이나 불합리한 결과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나의 접근방식에 따르면 상식적인 견해들이 비판을 견디어낸다면 그 견해들을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과학은 비판과 동시에 상식과 동시에 상상력으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나는 물질적 물체들의 실제를 그리하여 물질의 실제를 상식적으로 신뢰한다. 나는 그렇지만 ‘유물론자’는 아니다; 이유인즉 나는 정신을 믿을 뿐만 아니라 나는 물질이 궁극적이고 설명될 수 없다는 교설이 비판을 견디어냈다고 믿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그
교설은 게다가 무미건조하고 창조적이지 못한 교설이다. 어느 날 우리가 물질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면 ㅡ 가령, 힘이나 경향의 장(場)에서 간섭[disturbance]으로서 ㅡ 심지어 오늘날 몇몇 ‘심령론자들[spiritualists]’이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물질을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일식이나 월식, 혹은 천둥이나 원자폭탄을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이 비실제적이거나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자동차나 치즈조각이 자동차나 치즈조각이 아닌 부분들의 구조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는 자동차나 치즈조각이 환상임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심지어 러셀 자신도 물질의 구조를 설명함으로써 물리학이 물질이 환상임을 증명한 것처럼 말한다.)
물론 나의 이론 중 몇 가지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이론에 대한 이 ‘옳지 않은’ 결과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적 믿음들로 간주되는 부인(否認)의 모든 특징이다. 그리하여 입증보다는 반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이 나에 대하여 ‘옳지 않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옳지 않다고 슐릭(Schlick)은 말했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틀리기보다는 옳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슐릭의 심리학적 논증과 논쟁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도 옳기를 선호한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신을 수정하거나,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수정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내가 올바르고 싶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논증들에서 결함을 탐지하려고,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의 논증들을 비판하려고, 내 자신의 논증들을 반증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시험들은 우리가 진리에 더 근접하여 허위를 피하고 싶다는 바로 그 이유로 시도된 반증들이다: 우리는 올바르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슐릭처럼 내가 긍정적이거나 뒷받침하는 논증들을 (반증과 반대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이 불평은 귀납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 우리가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추구한다는 것은 귀납법과 입증의 주개념이다. 이 철학적이거나 방법론적인 아이디어에 나는 정말로 동의하지 않는다: 뒷받침하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들은 통상적으로 너무 하찮아서 경험할 가치가 없다; 그 사례들은 요구만 하면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사례들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무게를 지닐 수 있는 뒷받침은 반증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이론을 반증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정교한 시험들에 의존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과학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대중적인 견해를 부인하는 나의 노력이 옳지 않다고 ㅡ 정말로 새롭고 역설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불성실한 노력이 아니라면 ㅡ 또한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대중적인 철학의 ㅡ 지식에 관한 귀납주의적 이론의 ㅡ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 견해에 대한 부인(否認)은 이 대중적인 이론의 결과들이 야기하는 상식과의 충돌보다 훨씬 덜 옳지 않다. 게다가 대중적인 귀납주의가 지닌 주요 교설들은 심지어 뉴튼의 이론도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참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될 때 포기되어야 한다.
나는 상식이나 과학과 충돌하는 내 자신의 이론이 야기하는 결과들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수용된 철학적 교설들과의 많은 충돌을 발견했을지라도, 그 사람들에 의하여 내 자신의 이론이 야기하는 충돌이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지식에 관한 주관주의적 이론과 그 이론과 함께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은 상식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그리고 이성적 전통과도 또한 충돌한다. 그 이론은 그것들을 배척한다 ㅡ 비록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 이론이 그것들을 배척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이론은 그것들에 의하여 배척당한다.
이것으로써 나는 관념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에 대한 나의 비판을 끝마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실주의를 지지하고 사실주의를 비판하면서 사실주의에 관한 것을 언급해야 한다.
15. 과학의 목표
물리이론 자체가 제한적인 경우로서 살아가는 보다 포괄적인 이론을
소개하는 방법을 지적해야 하는 것보다 더 공정한 운명이 물리이론에
배당될 수 없을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지금까지 나는 주로 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사실주의를 지지하여 논증했다. 이제 나는 다음 절에서 나아가 사실주의가 지닌 난제 몇 가지를 지적하기 전에 사실주의를 지지하는 몇 가지 긍정적인 논증들을 제시하겠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긍정적 논증들은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발간한 이래 (다시 말해서 1934년 이래) 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문제를 보다 체계적으로 취급했다: 나는 과학적 활동의 목표에 관한 몇 가지 제안으로써 시작하여 과학의 방법들에 관하여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을 ㅡ 과학의 역사에 관한 많은 비평을 포함하여 ㅡ 이 제안으로부터 도출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을 그 제안을 설명하고 사실주의의 문제에 대한 그 제안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데 국한시키겠다.
과학적 활동의 ‘목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마도 다소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분명히 다양한 과학자들이 다양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고 과학 자체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목표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에 대하여 말할 때 과학적 활동에 대하여 특징적인 것이 있다고 우리는 다소 분명하게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과학적 활동이 이성적 활동과 상당히 닮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적 활동은 틀림없이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목표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설명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고 제안한다. 다른 서술들인 설명적 서술들이 그 단어의 보다 좁은 의미에서 ‘설명’을 형성하는 반면 (피설명항의 설명항[explicans of the explicandum]), 설명으로써 (혹은 인과적 설명) 그 중 한 가지 서술이 설명될 사건들의 상태를 기술하는 한 가지 서술 집합을 의미하게 된다 (피설명항[the explicandum]).
우리는 통상적으로 피설명항이 참으로 다소 잘 알려져 있거나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전제되는 것을 수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상상적으로 밝혀질 사건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비행접시들이 그런 경우를 대표할 것이다: 필요한 설명은 비행접시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비행접시들에 관한 보고서들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접시가 존재한다면 그 보고서들에 대한 심층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설명항은 우리 연구의 대상인데 통상적으로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설명항은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설명은 발견일 때마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의한 알려진 것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설명항은 만족스럽게 되기 위하여 (만족스러움은 등급의 문제일 것이다)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로 설명항은 논리적으로 피설명항을 수반해야 한다. 두 번째로 설명항은 일반적으로 참으로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참이어야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설명항은 거짓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ㅡ 심지어 가장 비판적인 검토를 거친 후에도 거짓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설명항이 참으로 알려지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그럴 것과 같이) 설명항을 지지하는 독립적인 증거가 틀림없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설명항은 독립적으로 틀림없이 시험될 수 있다; 그리고 설명항이 독립적 시험이 지닌 더 큰 엄격성에서 살아남을수록 그만큼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독립적’이라는 표현을 내가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그 반대 표현인 ‘특수 목적을 위한(ad hoc)’과 (극단적인 경우에) ‘순환적인(circular)’과 함께 설명해야 한다.
α를 참으로 알려진 피설명항으로 하자. α가 α 자체로부터 싱겁게 귀결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α를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경우에 설명항이 참이고 피설명항이 설명항으로부터 도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할지라도, 이것이 매우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종류의 설명들이 지닌 순환성 때문에 이런 종류의 설명들을 배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순환성의 종류는 정도(程度)의 문제이다. 다음 대화를 고찰하라: ‘오늘 왜 바다가 그렇게 거친가?’ ㅡ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이 노했기 때문이다.’ ㅡ ‘무슨 증거로써 당신은 바다의 신 넵튠이 노했다는 당신의 서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가?’ ‘오, 당신은 어떻게 파도가 매우 높은지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바다의 신 넵튠이 노했을 때 바다는 항상 거칠지 않은가?’ 이 설명은 (완벽하게 순환적인 설명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설명항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피설명항 자체이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밝혀진다.이런 종류의 거의 순환적이거나
특수 목적을 위한(ad hoc) 설명이 고도로 불만족스럽다는 느낌과, 이런 종류의 설명들은 회피되어야 한다는 상응하는 요건은 내가 믿는 바, 과학의 발전에서 주요 세력의 하나이다: 불만족은 비판적이거나 이성적 접근방식의 최초 과실의 하나이다.
설명항이 특수 목적을 위하지(ad hoc) 않으려면 설명항은 내용에서 풍요로워야 한다: 설명항은 다양한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을 낳아야 하는데, 그 결과들 가운데서 특히 피설명항과 다른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을 낳아야 한다. 내가 독립적 시험이나 독립적 증거에 대하여 언급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이 다른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이다.
이 비평들이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설명항이라는 직감적 개념을 다소 설명하는 데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라 할지라도, 그 비평들은 여전히 만족스러우면서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설명을 규정하기에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α가 우리의 피설명항이라면 ㅡ α를 다시 ‘오늘 바다가 거칠다’로 하라 ㅡ 비록 설명항이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결과들을 낳는다할지라도 완벽하게 특수 목적을 위한(ad hoc) 고도로 불만족스러운 설명항을 우리는 항상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이 결과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령, ‘이 자두는 즙이 많다’와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b를 그것들의 접속사로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α와 b의 접속사를 설명항으로서 수용할 수 있다: 그 접속사는 지금까지 서술된 우리의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지만 그 접속사는 특수 목적을 위한(ad hoc) 것이어서 직감적으로 철저히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설명들이 자연에 관한 보편적 법칙들을 사용할 것을 (초기 조건들에 의하여 보충되어) 우리가 요구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독립적, 즉 특수 목적을 위하지(ad hoc) 않은 설명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로 전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에 관한 보편적 법칙들은 풍요로운 내용을 지닌 서술들일지도 몰라서 그 법칙들이 언제 어디서나 독립적으로 시험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법칙들이 설명들로서 사용된다면 그 법칙들로 인하여 우리가 피설명항을 재생 가능한 효과의 사례로서 해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법칙들은 특수 목적을 위하지(ad hoc)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험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반증 가능한 보편적 법칙들에 국한시킨다는 조건으로만 참이다. 구획설정과 반증가능성의 기준의 문제가 들어오는 것은 여기이다.
‘무슨 종류의 설명이 만족스러울 것인가?’의 질문은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유발한다: 시험가능하고 반증 가능한 보편적 법칙들과 초기 조건들에 의한 설명. 이런 종류의 설명은 이 법칙들이 고도로 시험 가능할수록 그리고 그 법칙들이 잘 시험되었을수록 더 만족스럽게 된다. (이것은 초기 조건에도 또한 적용된다.)
이런 방식으로, 만족스러운 설명들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는 추측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설명들이 지닌 시험가능성의 범위를 향상시킴으로써, 다시 말해서 더 잘 시험될 수 있는 설명들로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설명들이 지닌 만족의 범위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으로 진보한다; 이것은 ㅡ 과학적 발견의 논리, VI장과 VIII장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ㅡ 항상 더 풍요로운 내용을 지닌, 더 놓은 등급의 보편성과 더 높은 등급의 정밀성을 지닌 이론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론적 과학의 역사 및 실제적 관행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또 다른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면, 자연의 법칙과 같이 지금까지 설명항으로서 수용된 것을 설명하는 것 또한 과학의 목표일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의 임무는 부단히 스스로 쇄신한다. 우리는 점점 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지닌 설명들로 나아가면서 영원히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ㅡ 정말로 우리가 궁극적 설명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설명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궁극적 설명들이 존재하는가? 내가 ‘본질주의’로 지칭했던 교설은 과학이 본질과 관련된 궁극적인 설명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한다:우리가 사물의 행태를 사물의 본질과 관련하여 ㅡ 사물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하여 ㅡ 설명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질문이 제기될 수 없다 (아마도 본질의 창조자에 관한 신학적 질문을 제외하고).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자신이 물리학을, 그가 가르치는 외연인 물리적 몸체의 본질에 관하여 설명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몇몇 뉴튼주의자들은, 로저 코츠(Roger Cotes)를 추종하여 물질의 본질은 물질의 관성 및 다른 물질을 끌어들이는 물질의 힘이어서 뉴튼의 이론은 모든 물질이 지닌 이 본질적인 속성들로부터 도출되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뉴튼 자신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프린키피아(Principia)의 말미에 있는 일반적인 기록(Scholium Generale)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중력 자체에 대한 궁극적이거나 본질적인 인과적 설명에 관한 가설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중력으로써 현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중력 자체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자의적으로 [또는 특수 목적을 위하여] 가설을 발명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 설명에 대한 교설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 교설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도구주의자들이었다: 도구주의자들은 과학이론들을 설명력이 없이 예측하는 도구로서만 해석했다. 나는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째 가능성이, 내가 지칭하는 바, ‘세 번째 견해’가 있다. 그 견해는 ㅡ ‘수정된(modified)’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ㅡ ‘수정된 본질주의(modified essentialism)’로 잘 기술되었다.
내가 지지하는 이 ‘세 번째 견해’는 본질주의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수정한다. 먼저 나는 궁극적 설명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 나는 모든 설명이 보다 높은 보편성을 지닌 이론에 의하여 더 설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설명은 있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떤 설명도 본질에 대한 자기-설명적 기술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 의하여 제안된 바와 같이 몸체에 대한 본질주의적 정의[定義]처럼). 두 번째로 나는 모든 무엇인가?(what is?)라는 질문들을 거부한다: 물체가 무엇인가, 물체의 본질이 무엇인가 혹은 물체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주의에 특징적인 모든 하나의 물체에는 반드시 그 물체의 현재의 상태를 유발하여 그 물체가 행동하는 바와 같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내재적 본성이나 원리인 (포도주 속에 있는 포도주의 기[氣]와 같은) 본질이 있다는 견해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물활론적인(animistic) 견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견해로 인하여 본질주의자들은 (뉴튼처럼) 중력과 같은 관계적 속성을 피하고 선험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지는 근거를 토대로 만족스러운 설명은 틀림없이 내재적 속성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관계적 속성들과 반대로) 믿게 되었다. 본질주의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정은 이렇다. 우리는 물활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리고 플라톤과는 반대가 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특징적인) 이 물체의 행태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도움이 청해질 것은 각각의 개별적이거나 단수적 물체 안에 내재하는 본질적 속성들이라는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왜 다양한 개별적 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의 질문을 완벽하게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물체들의 본질들이 동일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왜 다양한 물체들이 있는 만큼 많은 다양한 본질들이 없는 것일까?
플라톤은 후손들은 개별적 물체들과 같아서 동일한 원초적 ‘형상(Form)’의 복사판인데 그 형상은 그리하여 다양한 개별적 물체들의 ‘외부의’ 그리고 ‘이전의’ 그리고 그 물체들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말을 함으로써 정확하게 이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지금까지 유사함에 대하여 더 나은 이론을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가 두 명의 남자나 새와 물고기나 두 개의 침대나 두 대의 자동차나 두 가지 언어나 혹은 두 가지 법률적 절차의 유사함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근원의 도움을 청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유사성을 주로 유전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체계를 만든다면 그 체계는 역사주의적 철학이 되기 쉽다. 플라톤의 해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 해석은 심지어 해답의 암시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자연에 관한 보편적 법칙들을 통한 설명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정확하게 이 마지막 (플라톤적) 문제에 해답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개별적 물체들과 모든 단수적 사실들이 이 법칙들에 종속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는) 그 법칙들은 그리하여 개별적 물체들 혹은 단수적 사실이나 사건들의 규칙성이나 유사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단수적 물체들에 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법칙들은 세상 밖의 플라톤적 이데아들이 아니다.) 자연 법칙들은 오히려 자연의 ㅡ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의 ㅡ 숨겨진 구조적 속성들에 대한 (추측성) 기술들로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내 자신의 견해(‘세 번째 견해’)와 본질주의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 우리의 보편적 법칙들로써 우리가 세상의 궁극적 본질을 기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세상 구조 속으로, 혹은, 우리가 혹시 말할 것과 같이, 점점 더 본질적이거나 점점 더 깊은 세상의 속성들 속으로 우리가 점점 더 깊이 조사하려고 노력할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다 높은 등급의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추측성 이론을 통하여 어떤 추측성 법칙이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비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론을 반증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우리는 중요한 발견을 한다. 왜냐하면 이 반증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반증들은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이 우리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질지라도, 우리의 이론들이 우리 자신의 발명품일지라도 그 이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관한 진정한 주장들이라고 반증들은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왜냐하면 반증들은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정된 본질주의’는, 내가 믿는 바, 자연 법칙들의 논리적 형태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때 도움이 된다. 그 본질주의는 우리가 지닌 법칙들이나 이론들이 틀림없이 보편적이어야 함을,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시공적(時空的) 영역들에 관하여 주장들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본질주의는, 더구나, 우리의 이론들이 세상의 구조적이거나 관계적 속성들에 관하여 주장들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설명적 이론에 의하여 기술된 속성들은, 이런 혹은 저런 의미에서, 설명될 속성들보다 더 깊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두 가지 아이디어들은 ㅡ 우리의 세상이 지닌 구조적이거나 관계적 속성들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론의 깊이에 대한 아이디어 ㅡ 설명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특정 개별적인 물체들의 법칙-같은 행태를 그 물체들의 구조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계를 몇 번 분해한 다음에 다시 조립한 후에 시계의 작동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시계의 구조와, 시계의 작동 방식을 시계의 구조의 결과로서 이해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이 과정을 다소 더 가까이 관찰한다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구조적 설명에서 우리가 항상 설명될 것과는 다른 (그리고 이것보다 ‘더 깊은’) 어떤 법칙-같은 행태를 예상한다. 예를 들어 시계의 경우에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은 시계의 태엽과 침의 규칙적 움직임이다. 우리는 시계를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조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품들이 엄격하고 (다시 말해서 그 부품들이 자체의 기하학적 형태와 ‘외연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부품들이 관통될 수 없다고 ㅡ (다시 말해서 한 부품이, 말하자면, 다른 부품을 통하여 움직이는 대신에 그 부품들이 서로 밀어붙인다고 ㅡ 한 부품이 다른 부품의 길에 끼어든다면) 또한 전제해야 한다. 특정 물리적 물체들의 엄격성과 관통불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법칙-같은 이 속성들은 반대로 다시 구조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예를 들어 추측되었던 바, 이런 형태의 몸체의 물질적 구조를 구성하는 원자의 격자로써. 그러나 이 두 번째 설명에서 특정 부분들이 ㅡ 원자들 ㅡ 격자구조로 배열되었다고 추측할 뿐만 아니라, 덧붙여 우리는 인력과 반발의 특정 법칙들이 원자들 사이에서 타당하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것들은 반대로 원자 이하의 입자들과 기타 등등의 행태를 지배하는 법칙들과 함께 원자들의 원자 이하 구조에 의하여 더 설명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들은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을 서술한다’는 물론 모호한 은유에 의하여 표현될 것이다.(그 은유는 어떠한 수준에서든 설명하는 것은 구조일 뿐만 아니라 법칙들이기도 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모호하다; 그러나 그 은유는 허용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여하한 수준에서도 법칙들은 구조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설명되고 또한 어떤 수준에서 구조와 법칙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ㅡ 법칙들이 특정 종류의 구조를 세상에 부과한다는 것과 법칙들이 그 구조에 대한 기술들로서 대안적으로 해석될 것이라는 것 ㅡ 적어도 상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면, 물질의
장[場]이론에 의하여 겨냥된 듯하다.) 구조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만큼 하자.
설명이 필요한 두 번째 개념은 ‘깊이(depth)’의 개념이다. 그 개념은 내가 생각하기에 철저한 논리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은 우리의 직감을 안내한다. (이것은 수학에서도 그렇다: 공리[公理]가 제시되면 수학의 모든 정리[定理]들은 논리적으로 대등하고, 그러나 논리적 분석에 민감하지 않은 ‘깊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과학이론의 ‘깊이’는 그 이론의 단순성과 그리하여 그 이론의 내용이 지닌 풍요로움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깊이는 그 내용이 0으로 생각될 수학적 정리의 깊이와 관련된다.) 두 가지 구성요소가 필요한 듯하다: 풍요로운 내용과, 기술된 사건의 상태가 지닌 어떤 일관성이나 밀집성 (또는 ‘유기체 상태[organicity]’). 비록 직감적으로 상당히 공정할지라도 매우 어려워서 분석할 수 없고, 사건의 속성을 축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들과 대조적으로 본질주의자들이 본질에 대하여 말할 때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은 이 후자(後者) 구성요소이다. 나는 우리가 여기서 직감적 개념을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제안된 특정 이론의 경우에 그 이론에 대한 흥미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이론의 내용이 지닌 풍요로움이어서 그 이론이 지닌 시험가능성의 등급이기 때문이고 그 이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실제 시험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방법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론의 깊이, 이론의 일관성, 그리고 심지어 이론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직감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안내자나 자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나 혹은 깊이의 등급에 관하여 충분한 조건과 같은 것이 있는 듯하고 그것은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나는 과학의 역사로부터 사례의 도움을 받아 이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겠다.
뉴튼의 역학이 갈릴레오의 지구물리학과 케플러의 천체물리학의 통합을 이록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뉴튼의 역학은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법칙들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고 흔히 언급되며 뉴튼의 역학은 그 법칙들로부터 엄격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심지어 주장되었다.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논리적 관점에서 뉴튼의 이론은 엄격히 말해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 모두와 반대가 된다 (우리가 뉴튼의 이론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자마자, 이 후자[後者] 이론들이 물론 근사치로서 획득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이유 때문이 연역법으로든 귀납법으로든 뉴튼의 이론을 갈릴레오의 이론이나 케플러의 이론으로부터 혹은 두 이론 모두로부터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연역적 추론도 귀납적 추론도 일관적인 전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이 전제와 반대가 되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귀납법에 반대하는 매우 강력한 논증으로 간주한다.
나는 이제 뉴튼의 이론과 그의 선배들의 이론들 사이의 모순들을 간단하게 지적할 것이다. 갈릴레오는 던져진 돌이나 발사체가 일정한 가속으로 직선으로 움직일 때 자유낙하의 경우를 제외하고 포물선을 그린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토론에서 공기의 저항을 무시한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이 두 가지 주장 모두는 두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거짓이다. 첫 번째 주장은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수직이나 평행으로 발사된) 같은 장거리 발사체의 비행경로가 심지어 개략적으로도 포물선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다; 그 발사체의 비행경로는 타원형일 것이다. 발사체의 비행 거리 합계가 지구의 반경과 비교하여 무시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런 발사체의 비행경로는 개략적으로 포물선이 된다. 이 요점은 뉴튼 자신이 프린키피아(Principia)와 그의 대중판본 세계의 체제(The System of World)에서 지적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 요점을 다음 그림의 도움을 받아서 예시한다.
뉴튼의 그림은 발사체의 속도가 증가한다면 그 발사체의 속도와 함께 발사체의 비행거리가 증가한다면 그 속도는 ‘마침내 지구의 한계들을 초과하여... 지구에 접촉하지 않고 우주로 날아갈’ 것이라는 그의 서술을 예시한다. 그리고 뉴튼의 그림은 케플러의 타원을 모든 부분에서 개략적으로 기술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발사체는 포물선 위라기보다는 무한한 이심률(離心率: eccentricity)을 지닌 타원형을 따라서 움직인다. 물론 충분히 짧은 발사에서는 포물선이 탁월한 근사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물선에 실제로 거짓인 초기 조건을 (그리고 부수적으로 완전히 터무니없는 결과들을 야기하기 때문에 뉴튼의 이론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조건) 덧붙여 지구의 반경이 무한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면 포물선 궤적은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엄밀하게 추론될 수 없다. 이 전제가 거짓으로 알려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따라 우리가 포물선을 틀림없이 획득하는 갈릴레오의 법칙과 대조적으로 항상 타원형을 얻는다.
정확하게 유사한 논리적 상황이 가속 상수의 존재를 주장하는 갈릴레오 법칙의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가속은 일정하지 않다: 그 속도는 그 물체가 인력의 중심부로 더 가까이 접근한다는 사실 때문에 낙하하는 동안에 항상 증가한다. 물체가 큰 높이로부터 떨어진다면 그 높이가 지구의 반경과 비교하여 무시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물론 무시될 수 있다할지라도 이 효과는 매우 크다. 이 경우에 우리가 지구의 반경이 무한하다는 (혹은 낙하의 높이가 0) 거짓 전제를 다시 도입한다면 우리는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갈릴레오의 이론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지적한 모순들은 장거리 미사일들에게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이것들에게 우리는 뉴튼의 이론을 적용할 것이지만 (물론 공기저항에 관한 수정치들과 함께) 갈릴레오의 이론은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이론은 뉴튼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짓 결과들을 야기할 따름이다.
케플러의 법칙들에 관해서도 상황은 유사하다. 뉴튼의 이론에서 우리가 혹성들 사이의 상호간 인력을 참작한다면 케플러의 법칙들이 개괄적으로 타당할 따름이라는 ㅡ 다시 말해서 엄밀하게 무효하다는 ㅡ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두 가지 이론 사이에는 이 다소 명백한 모순보다 더 많은 근본적인 모순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적들에 대한 양보로서 우리가 혹성들 사이의 상호간 인력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은, 뉴튼 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특별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근사치 이상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질량이 모든 동등하거나, 동등하지 않다면 태양의 질량과 비교하여 무시될 수 있는 혹성들에.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은 두 개의 혹성 중에서 다른 하나가 매우 무거운 반면 하나가 매우 가볍다면 두 개의 혹성에게 근사하게 조차도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칙이 갈릴레오의 법칙이 그러한 것과 정확하게 같은 정도로 뉴튼의 이론과 반대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쉽게 밝혀질 수 있다. 뉴튼의 이론은 두 개의 물체 체제에게 ㅡ 두 개의 혹성 체제 ㅡ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이 흔히 ‘케플러의 법칙’으로 지칭하는 법칙을 산출한다. 이른바 이 ‘케플러의 법칙’은
질량이라면 합당한 측정 단위를 선택하여 우리는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다음을 도출할 수 있는데
(1)
여기서 α는 두 물체 사이의 평균 거리이고 T는 한 번 공전하는 시간이다. 이제 케플러 자신의 세 번째 법칙은
(2)
주장하는데 다시 말해서 태양계의 모든 혹성들에게 동일한 상수이다. 우리 이 법칙을 (1)
우리는 (1)로부터 (2)를 얻는다; 또는 이것이 실제로 거짓이라면 (목성은 가장 작은 혹성보다 수천 배 크기 때문에 정말로 사실인 바와 같이) 혹성들의 질량은 태양의 질량과 비교하여 모두 0이고 우리는 모든 혹성에 대하여
거짓일 뿐만 아니라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다. (질량이 0인 물체는 뉴튼의 운동법칙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혹성들 사이의 상호적 인력에 관하여 완전히 잊는다할지라도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 (2)는 공식적으로 (1)을 산출하는 뉴튼의 이론과 반대가 된다.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로부터 그 이론들을 뉴튼의 이론과 같은 보다 일반적으로 타당한 이론을 통하여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가 심지어 어떻게 이 이론들이 조정되어야 할 것일지에 ㅡ 어떤 (거짓) 전제들이 채택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어떤 조건들이 요구되어야 할 것인지 ㅡ 대하여 최소한의 암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뉴튼의 이론을 소유한 다음에야 옛 이론들이 뉴튼의 이론에 대한 근사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근사치인지를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이 뉴튼 이론이 낳은 어떤 특별한 결과들에 대하여 우수한 근사치라 할지라도 뉴튼의 이론은 다른 두 이론의 관점에서 자체가 낳은 결과들에 대한 근사치라고 언급될 수 없다고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이 사실을 간단하여 표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논리는 이 이론들로부터 뉴튼의 역학으로의 단계를 도저히 밟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오직 재능만이 이런 단계를 밟을 수 있다. 그런
단계가 실행되자마자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낳은 결과들은 새로운 이론을 입증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귀납법의 불가능성에 관심을 가진다기보다는 깊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사례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뉴튼의 이론은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을 통합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 두 가지 이론의 결합이기는커녕 ㅡ 뉴튼의 이론에 대한 피설명항의 역할을 하는 ㅡ 뉴튼의 이론은 두 가지 이론을 설명하면서 교정한다. 원래의 설명적 임무는 초기 결과들에 대한 추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는 수행되었는데 이 초기 결과들을 추론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초기 결과들 대신에 더 나은 것을 추론함으로써 수행되었다: 옛 결과들을 낳은 특별한 상황 하에서 숫자적으로 옛 결과들과 매우 가깝고 동시에 그 옛 결과들을 수정하는 새로운 결과들. 그리하여 옛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새로운 이론을 입증하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수정사항들은 반대로 시험될 것이다 ㅡ 그리고 아마도 반증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입증될 것이다. 내가 개괄한 논리적 상황에 의하여 강력하게 산출되는 것은 새로운 이론이 도저히 특수 목적을 위하거나 순환적일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체의 피설명항을 반복하기는커녕 새로운 이론은 그 피설명항과 반대가 되어 수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심지어 피설명항 자체에 대한 증거가 새로운 이론의 독립적 증거가 된다. (부수적으로 이 분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ㅡ 과학적 발견의 논리, 57절의 방향과 유사한 방향을 따라서 ㅡ 계량적 이론의, 그리고 측정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석은 그리하여 측정과 정밀을 궁극적이고도 축소될 수 없는 가치들로서 수용하는 오류를 우리가 피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경험적 과학에서 더 높은 등급의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이론이 더 낡은 이론을 수정함으로써 어떤 낡은 이론을 성공적으로 설명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보다 더 깊이 관통했다는 확실한 징표라고 제안한다. 새로운 이론이, 새로운 이론이 지닌 제한요인들의 합당한 가치들에 대하여, 옛 이론을 개략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는 (보어[Bohr]를 따라서) ‘상응의 원칙(principle of correspondence)’으로 지칭될 것이다.
이 요구에 대한 충족은 내가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깊이에 대한 충분한 조건이다. 그것이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이, 이런 의미에서, 프레스넬(Fresnel)의 빛의 파동론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깊이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다른 의미에서이다: ‘양극화된 빛의 진동 방향에 대한 옛 의문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두 개의 매체 사이의 경계선들에 대한 경계선 조건에 관한 난제들은 그 이론의 바로 그 토대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특수 목적을 위한 가설들은 하강하는 빛의 파동을 제거하는 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빛 압력은 방열론에서도 그렇게 중요하고 겨우 최근에 실험적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이론의 결과들 중 한 결과로서 도출될 수 있었다.’이 탁월한 구절은
그 구절 안에서 아인슈타인이 맥스웰 이론의 주요 업적 몇 가지를 개괄하여 프레스넬의 이론과 비교하는데, 나의 분석이 다루지 못한 깊이에 대한 다른 충분한 조건들이 있다는 지적으로서 고려될 것이다.
과학의 임무는 내가 제안했던 바, 만족스러운 설명들을 발견하는 것인데 우리가 사실주의자가 아니라면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족스러운 이론은 특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ㅡ 독립적인 증거라는 생각 ㅡ 발견이라는, 설명의 더 깊은 수준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이해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발견할 것이 있다는 생각 없이는; 그리고 비판적으로 토론할 것이 있다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론 내부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를 전제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또한 우리는 직감적인 종류의 도움을 제외하고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로부터 어떤 도움도 도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학의 목표가 설명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운 설명은 매우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고 매우 엄격하게 시험되는 설명일 것이라는 말을 우리가 듣자마자, 우리가 방법론자로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모두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목표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ㅡ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의 도움을 받고도 주장할 수 없고 그 도움 없이도 주장할 수 없는데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는 우리에게 단지 어떤 직감적 격려,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지 어떤 종류의 확신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방법론을 이성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전제되거나 추측된 과학의 목표에 의존한다고 언급될지라도, 그 취급은 세상에 대한 참인 구조적 이론은 (만약 있다면) 인간의 언어로 서술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이고 매우 개연적인 거짓 전제에는 틀림없이 의존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그림이 진리 가까이에 온다면 ㅡ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과 같은 것이 있다면 ㅡ 우주의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조건들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종류의 구조적 법칙들의 발견을 ㅡ 그리고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의 습득 ㅡ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주의 거의 모든 지역들이 혼란스러운 방사선으로 가득 차있고 나머지 모두는 동일하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물질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의 목표로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 기묘한 사실은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3절의 주석 1에 대한 원문 참조). 그러나 우리가 그 목표에 실제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을 심층적 격려를 얻지 못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은 우리가 그 목표를 추구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 사실은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로부터 유래하는 것도 아니오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유래하지도 않는다.
✡ 15절에 대한 부록 1980년
(1) 앞 절은 위에 지적된 바와 같이 1957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그 절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아이작 뉴튼과 막스 보른(Max Born)과 같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뉴튼의 이론이 귀납적 논증이나 연역적 논증을 통하여 케플러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논박을 포함하고 있다.
처음 이 절을 내가 썼을 때 나는 뉴튼의 이론이 귀납법의 결과라는 역사적 신화(神話)에 대한 반증을 많이 강조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가 20년 앞서서 귀납이론을 파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귀납법 옹호자들로부터 여전히 유출되는 모든 저항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충분히 낙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통용되던 카르납의 확률론적 귀납이론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정말로 비판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그 이론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그가 귀납법을 옹호했던 마지막 형태는 그가 자신의 대작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옹호될 수 없는 저서인 확률의 논리적 토대[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에서 전개했던 유명한 이론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후부터 귀납주의자들은 다소 자신감을 얻었다; 부분적으로 내가 더 이상 그들의 논증에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들의 논증 모두는 나의 초기 글의 다양한 부분에서 분명히 논박되었다. 나는 그 문제가 오래전에 해결되어서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법에 반대하는 그만큼 더 흥미로운 논증 중 하나로 앞 절에서 함축된 논증을 매우 간단하게 여기서 반복하는 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귀납법으로써 나는, 몇 가지 경험적 (단칭이거나 특칭) 전제들이 주어지면 논리적 확실성이나 ‘확률’을 (이 용어가 확률계산에서 사용되는 의미로) 지닌 보편적 이론인 보편적 결론을 낳는다는 논증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서 다시 서술하고 싶은 귀납법에 반대하는 논증은 매우 간단하다:
뉴튼의 이론과 같은 많은 이론들은 귀납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는데 위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그 이론들이 주장하는 (부분적) 귀납적 전제들과 실제로 불일치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귀납법은 여하한 중요한 의미에서도 붕괴한다. 비-확률론적인 귀납법에 대해서는 그만큼만 하자.
확률론적인 귀납적 논증에 관하여: 확률계산에 따라서 우리에게 몇 가지 일관된 귀납적 전제들이 주어진다면 그 전제들과 일치하지 않는 추론된 결론은 이 전제들과 관련하여 단지 0의 확률을 가질 수 있다.
(3) 뉴튼의 이론은 분명히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에 크게 빚지고 있다; 매우 그러하므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들은 뉴튼에 의하여 자신의 이론의 (부분적) 귀납적 전제들로서 간주되었다.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물체 이론은 가속 상수인 상수 g를 포함하고 있다.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a) 끌어들이는 물체의 (갈릴레오의 경우에는 지구) 질량에 그리고 (b) 질량의 핵심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의존하여 g가 상수가 아니가 변수라는 것이 귀결된다.
그리하여 갈릴레오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지구의 표면에 가까운 자유 낙하하는 물체들만을 고려하여 그 물체들 모두가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매우 근사하게 동일한 거리를 지닌다는 전제 하에 우리 g가 상수로 보이는 (오류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케플러의 법칙들에 대한 상황도 밀접하게 유사하다.
하나가 매우 무겁고 나머지 하나가 무시될 정도로 가벼운 두 개의 물체들 각자의 체계에 대하여 우리는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들을 도출하여 그 법칙들을 그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케플러가 태양과 몇 개의 혹성들로 구성된 다수의 물체 체계에 대한 자신의 법칙들을 공식화한 이래, 뉴튼 이론의 관점에서 그 법칙들은 효력이 없다. 그리하여 케플러의 법칙들은 뉴튼 이론이 지닌 전체들의 전체적 체계나 부분적 체계를 (귀납적이거나 연역적) 구성할 수 없었다.
케플러의 이론이나 갈릴레오의 이론으로부터 뉴튼 이론의 귀납적이거나 연역적 도출에 대해서는 그 만큼만 하자.
(4) 물론 뉴튼의 이론이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뉴튼 이론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성공이었다: 다시 말해서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이론이 뉴튼의 어떤 단순화 하는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거짓인)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소위 귀납적 전제들이 엄밀하게 말해서 이른바 귀납적 결론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 귀납적 추론이나 귀납적인 확률논적 관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크게 오해를 낳는다.
(5) 이런 종류의 상황은 과학의 역사에서 전형적이다. 뉴튼의 중력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경우에 대한 매우 유사하고도 중요한 사례이다.
(6) 내가 알기에 지금까지 특히 통용되는 귀납적 확률론적 이론들 중 어떤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논증에는 진지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았다.
16.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의 난제들.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자에 의한.
적어도 이 위치가 지닌 난제들을 언급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사실주의라는 논제를 떠난다는 것을 잘못될 일일 것이다. 이 난제들을 중대하다. 내가 보기에 그 난제들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부과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제들은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사실주의에 대한 나의 신뢰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난제들은 내가 사실주의에 대한 나의 신뢰를 지지할 수 있는 문제들 및 논증들과, 말하자면, 다른 수준 위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덜 이성적인 수준이다 ㅡ 논증들이 그 위에서 다소 모호해져서 덜 다루어질 수 있는 수준.
뉴튼은 자신의 조금 떨어진 행동 이론에 의하여 우주는 하느님의 감각중추라는 믿음으로 이끌려갔다. 그 논증은 의심할 바 없이 다소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논증에는 눈과 마주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난제가 매우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거리는 엄청나다. 조금 떨어진 행동은 중력적 효과가, 하느님처럼, 전 세계에 편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뉴튼은 아인슈타인처럼 조금 떨어진 행동을 자연의 역학이 지닌 속성으로서 수용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느꼈고 그 수수께끼를 하느님의 탓을 돌렸다.
아인슈타인은 중력 간섭을 빛의 속도로 퍼지도록 만드는 자신의 이론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거나 해결한 듯이 보인다. 이 해결책은 특히 마지막 절의 우리의 토론 관점에서 고도로 만족스럽다: 그 해결책은 빛과 중력 이론의 가능한 통합을 가리키고, 빛과 중력의 간섭을 우주의, 우리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을 ㅡ 장(場)의 속성 ㅡ 통하여 해석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뉴튼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의 이 구조적 속성들 자체가 어떠하냐? 이기 때문이다. 그 속성들은 우리가 믿기에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적어도
은유적으로 세상에 대하여 마치 그 세상이 수정이나 풍선이나 아니면 아마도 기계와 같이 사물인양 말한다. 그러나 현재의 물리 이론에 따르면 수정이나 풍선이나 기계의 구조적 속성들은 그것들의 부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들은 빛의 속도에 이르고 빛의 속도를 포함하여 유한한 속도를 포함한다. 상호작용들을 수정들을 제 형태로 유지시킨다; 상호작용들은 풍선 속의 가스 압력을 결정한다; 상호작용들은 기계를 결합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 법칙들에 의하여 기술하는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은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그 속성들은 모든 상호작용의 토대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없는 듯하다. 그 속성들은 ㅡ 이것은 그 속성들이 지닌 가장 깊은 특징이다 ㅡ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통하여 동일하다: 그 속성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래서 뉴튼의 문제는 다시 출현한다.
게다가 우리가 언급한 다양한 물체들의 구조들은 법칙들을 통하여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법칙이 설명한다기보다는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덜 심각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깊은 법칙들을 통하여 법칙들을 ㅡ 그리하여 세상의 구조를 ㅡ 설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극적 설명이라는 본질적 이론을 포기한 것은 도움이 된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은유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킬 장소일 따름이다; ‘우리 세상의 구조’는 법칙들이 기술하는 것을 상상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도록 고안된 은유일 따름이라는 것을; 그 은유는 어느 곳에서 붕괴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은유가 정말로 붕괴할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만족스럽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은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뉴튼의 난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내가 믿는 바, 우리는 자연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바, 우리는 아인슈타인 이래 아마도 훨씬 더 관통될 수 없게 된 수수께끼로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에 따라서 초광속으로는 어떤 효과도 퍼질 수 없다고 가설화하는 자연의 법칙들 자체가 세상의 편재하는 구조적 동질성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주 팽창론은 여기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0의 순간으로부터 1초 (또는 1초의 한 부분) 내에 세상의 반경이 많은 광년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 (이 경우에 우리가 ‘열의 평형[thermal equilibrium]’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명백해 보인다.)
ㅡ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이용하여 ㅡ ‘세상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 신비스럽다’고 흔히 언급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토론은 세상이 어떠한가가 ㅡ 세상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혹은 세상의 엄청나게 먼 지역들이 모두 동일한 구조적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ㅡ 우리가 신비스럽다(mystical)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 한다면 원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서 ‘신비스럽다(mystical)’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무튼 사실주의자가 자신이 빠져있는 것으로 발견하는 곤경인 듯하다. 사실주의자는 이것으로부터의 출구를 ㅡ 그가 이 수수께끼를 세상의 절대적인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로 환원시킬 설명 ㅡ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Kant)와 함께 그는 우리의 지성이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단지 법칙-같은 연결들이 생각될 수 있다고’.사실주의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 견해들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세상이 있다면 왜 그 세상은 법칙에 의하여 통제되는 생각될 수 있는 세상이어야 ㅡ 어떤 지성에는 이해될 수 있는 세상 ㅡ 하는지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생명체에 의하여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난제에 대한 어떤 심층적 예시가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꽁트(Comte)와 밀(Mill)의 용어를 채택할 것인데 그들은 두 종류의 법칙이나 규칙성을 ㅡ 상속의 규칙성과 공존의 규칙성 ㅡ 구분한다. 상속법들은 시간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저 ‘인과적’ 법칙들로 예를 들어 체계의 상태의 변화들을(가속과 같은) 결정하는 법칙들이다. 공존의 법칙들은 예를 들어 동물이나 분자나 원자의 해부학적이거나 구조적 규칙성을 기술하는 법칙들이다.
이제 동물이나 분자나 심지어 원자의 공존에 대한 구조적 법칙들은 원칙적으로 ‘인과적’ 법칙들로 ㅡ 그에 따라서 이 구조들이 생산되어 얼마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저 인과적 법칙들 ㅡ 축소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예를 들어 공명 이론(the theory of resonance)의 도움을 받아 분자의 안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구성하는 부분들의 인과적 상호작용의 상태를.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전자전하(電子電荷)나 전자질량의 절대적 불변성과 같은 그러한 구조적 법칙들이나 공존의 법칙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기초적 입자들의 속성들에 대한 절대적 질적 및 수량적 정체. 이것들은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없는 듯하다: 일반상대성에 따르면 그 거리가 몇 광년으로서 측정될 동시적 전자전하 사이에는 균등하게 하는 상호작용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느 날 우리는 아마도 전자들과 다른 기초적 입자들의 평형 상태를 우리가 분자의 평형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과 분명히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 방식으로 도출하여 설명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인과적 ‘상속법들’에 ㅡ 가령 이산 수용액의 스펙트럼(a spectrum of discrete solutions)을 결정하는 장방정식(場方程式: field equations) ㅡ 관하여.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상속법과 공존의 법칙 사이의 이원론을 후자(後者)를 전자(前者)로 축소함으로써 초월했음을 의미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방대한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전자들이,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동일한 전하(電荷)를 절대적으로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의 ㅡ 구조적 법칙 ㅡ 설명 불가능성에 대하여 걱정하는 대신에 우리의 방대한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전자전하(電子電荷)의 일체성을 결정하는 동일한 법칙들에 의하여 통제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제 우리는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조적 사실은 ㅡ 비록 다르게 표현된다 할지라도 분명히 전과 동일한데 ㅡ 언제나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희망을 절대적으로 분명하게 초월하는듯한데 이유인즉 여하한 인과적 설명도 틀림없이 그 보편적 타당성을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법칙들과 꼭 같은 법칙들에 관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간을 (그리고 시간) 통한 우리의 인과적 법칙들이 지닌 보편성이나 불변성을 주장하는 것은 구조적 규칙성을 ㅡ 인과적 법칙이나 계승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공존의 규칙성 ㅡ 주장하는 것에 해당된다. 정말로, 우리가 계승법에 대하여 말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공존적 계승을 포함하여 모든 계승은 동일한 규칙성, 동일한 구조를 보인다고 말할 의도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의 구조적 동질성이 ‘더 깊은’ 설명에 저항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을 한 번 더 안다: 그 동질성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수수께끼가 세상은 일종의 논리적 필연성에 의하여 지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을 논리로 축소하려는 희망은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고 역겹다. 또한 나는 그 수수께끼가 관념론에 의하여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형태로의 관념론과 특히 규약주의(conventionalism)와 도구주의 모두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들은 분명히 참이 아닌 듯이 보여서 거짓 해결책들 통하여, 특히 그 거짓 해결책들이 천박하다면, 수수께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것보다 수수께끼와 대면하는 것이 더 낫다.
칸트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ㅡ 우리의 이성은 자연이라는 열린 책에서 법칙들을 읽지 않고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는 ㅡ 참고하라,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 참이다;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어서 우리는 경험적 사실들을 우리의 이론들과 (혹은 아마도 우리의 무의식적인 기대들과) 관련하여 이 사실들을 해석하지 않고는 기술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가 믿었던 바와 같이, 뉴튼의 이론과 같은 자연의 법칙들이, 우리가 그 법칙들을 우리가 논박을 위하여 도움을 청해야 할 저 매우 경험적인 사실들에게 부과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타당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우리의 지성이 적어도 임시적으로 대안적 이론들을 형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의 지성이 사실들을 이 새로운 이론들 각각을 통하여 대안적으로 재해석할 것임을; 이 이론들의 경쟁 속에서 우리가 그 이론들의 깊이를 재고 우리의 시험을 포함하여 우리가 행하는 비판의 결과의 무게를 재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진리에 더 근접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칸트의 인식론은 그 인식론 자체가 단지 좁은 한계 안에서만 고도로 성공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또한 논박당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정신적 도구로, 심리적이고 아마도 생리적 소화 시스템을 제공받는다고 칸트는 믿었는데 그 시스템으로 인하여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의 감각에 도달하는 자극들을 소화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자극들을 소화하고 완전히 이해하고 흡수함으로써 우리가 그 시스템의 구조적 특징들을 그 자극들에게 부과한다고 칸트는 믿었다; 다시 말해서 그 시스템은 세상에 관하여 선험적으로 타당한 진리들을 야기하는 자극들에게 우리의 정신을 각인하는 것이다. 이제 그런 유전적으로 선험적인 진리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기묘하게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체의 세상을 그 물체들과 관련하여 해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 물체들의 주관적 특징을 쉽게 인식하게 되어 그 물체들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취급한다. 이 칸트적 방법의 탁월한 사례는 어떤 규칙적이고도 불가피한 시각적 망상에 의하여 제공된다. 또 다른 사례는 색깔의 순서에 의하여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빨간색은 초록색보다 오렌지, 노랑, 자주 그리고 푸른색에 더 유사하다고 경험하는 사실에 의하여; 노랑은 푸른색보다 초록색과 빨강색에 더 유사하다고; 기타 등등.... 이것들은 선험적 진리들이다: 우리가 정말로 색깔들을 감지한다는 ㅡ 우리가 색맹이 아니라는 ㅡ 사실은 경험적인 사실일 것이다; 우리의 색깔 감지 방법은 빨강-파랑 및 노랑-초록 요소보다는 빨강-초록 및 노랑-파랑 요소에 근거한다는 것도 역시 경험적 사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감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파장[wave-lengths]을 위하여 색깔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 색깔들을 보자마자 그 색깔들은 이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관계들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으로 배열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천부적인 칸트식 심리-생리적인 소화 방법이다. 우리의 생리는 이 유사성들을 설명한다. 우리는 빨강-초록 및 노랑-파랑의 요소의 도움을 받아서 본다; 그리고 그것들 중 한 가지가 없다면 우리는 색맹이 ㅡ 빨강-초록이거나 노랑-파랑 색명 ㅡ 된다. 빨강은 생리학적으로 초록과 섞이지 않고 또한 노랑은 파랑과 섞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색깔들은 반대 색깔들이 된다. 다른 색깔들은 섞일 수 있고 한 가지 색깔은 색조에 의하여 다른 색깔로 변할 수 있는데 이유인즉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독립적으로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에 관하여 옳았다. 그러나 요점은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밝혀진다. 색깔들 사이의 이 선험적으로 타당한 관계에 의하여 오도되어 상응하는 법칙들을 자연에, 색깔이 있는 사물의 세상에 부과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빨간 사물들이, 물리적으로 고찰되어, 초록색 사물들에 대해서보다 노랑이나 파랑색 사물들에 대하여 더 큰 친화력을 지닌다고도 믿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될 자연의 법칙들이 ㅡ 물론 우리 자신의 심리학과 생리학의 법칙들을 제외하고 ㅡ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소화적인 정신적 기구의 이 법칙들은, 우리가 감지하는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들이 되기로 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에 의하여 세상에 부과된다.
시각적 착각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실제적인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유사하게 생리적으로 설립된 것이라고 아마도 추측될 것이다. 그리나 이 경우에 생리적 구조와 그 구조로부터 발생하는 믿음은 (우리가 추측하는 바, 두 가지 모두 긴 진화와 적응의 결과일 것이다) 비판을 견디고 다른 이론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구조와 그 믿음은 영화에서와 같이 ㅡ 특히 만화에서 ㅡ 우리는 정말로 오도할 때, 그것들은 성인들을 유도하여 우리가 앞에 사물의 세상들을 두고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칸트와 흄이 또한 생각했던 바와 같이) 우리의 심리나 생리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닌 ‘인간의 본성’이나 우리가 지닌 정신적 소화 장치에 희생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우리 정신의 포로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우리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는 칸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유롭다.
유사한 고찰이 사회적 무리의 가치판단, 믿음 그리고 독단을 수용하는 경향과 같은 인간 굴레의 다른 형태에 적용된다. 이 경향은 강력하고 또한 생리적 토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향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처음에 아마도 문화충돌이나 전환의 자극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는 탐구적이고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의 습관을 발전시킬 것이다. 이성적 토론과 비판적 사고는 세상을 해석하는 보다 더 원시적인 체계와 같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향하여 묶인 틀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감옥을 부수는 ㅡ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ㅡ 수단이다.
흄은 근본적인 인간의 소신들이 인간이 초월할 수 없고 복종하기로 된 비이성적으로 습득된 습관일 따름이라고 가르쳤다. 칸트는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이 비관적 개념에게 낙관적인 방향을 부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비관적 개념을 수용했다. 경험과 관련된 객관적인 세상이 (심지어 감지의 수준에서 자체의 역할을 하는) 우리가 지닌 경험하는 지성에 의하여 형성된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관한 우리의 소신들이 객관적으로 참이고 이성적일 수 있다고 칸트는 가르쳤다: 비록 그 소신들이 아마도 습관들로 기술될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이성이 우리의 감각이나 우리의 연상만큼 그 소신들의 형성에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 소신들은 습관만은 아니었다. 이런 사고의 방향이 좀 더 발전하면 지식의 성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소신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데 놓여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주목된다; 흄과 칸트가 상상했던 정도까지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소신들에게 묶여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 그것은 또한 흄과 칸트 두 사람 모두가 부분적으로 옳았음을 입증한다. 흄은 우리가 지닌 소신들의 타당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어서 옳았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소신들 중 몇 가지를 우리가 초월했다는 사실에 (그 사실은 우리가 다른 소신들을 초월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의하여 밝혀진다. 그러나 비록 칸트가 위대한 비판가였다고 할지라도 정확히 비판을 통하여 우리가 지닌 소신들을 초월하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중요성을 간과한 데서 그는 틀렸다. 그리고 칸트는 흄에 반대하여 이성적 추론이 우리의 소신들을 ㅡ 심지어 우리의 습관적 소신들을 ㅡ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고 지적하는 데서 옳았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성장에 관한 중요성을 지적하는 데서 그리고 지식의 성장은 그 성장에 전제되어야 하는 이론적 틀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치는 데서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 틀이 반대로 도저히 초월될 수 없어서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은 데서 틀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마도 헤겔이 틀 또한 성장에 종속되어 초월될 수 있다고 지적한 데서 (우리가 그의 모호한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옳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틀과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개념이나 소신들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능동적인 비판이나 우리의 모순이나 반증 발견이 아니라 이 개념들이 스스로 초월하여 이 개념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이성적 비판에 의존하기보다는 우리가 진화하는 개념들에 의존한다고 제안하는 데서 (다시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는 틀렸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비판은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틀에 의존하여 다시 상대주의를 ㅡ 역사적 상대주의 ㅡ 낳는다.
이 인간 굴레의 철학은 칸트 이후의 지식론에 기묘한 환상을 발휘했다. (그 철학은 이성주의와 진보주의의 쇠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흄을
수정하기 위하여 칸트가 했던 모든 노력이 소신에 대한 우리의 습관들은 ㅡ 우리의 가치판단, 우리의 태도, 우리의 독단,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경험의 세상 ㅡ 우리의 역사적 기간이나 우리의 사회적 무리에 달려있다는 교설에 (헤겔, 마르크스) 의하여 해체되었다. 현대 사회과학의 손에서 매우 유행하게 된 이 교설은 물론 우리가 그 교설에 특별히 깊은 인식론적 중요성을 귀속시키지 않는다면 참이다. 우리가 양육과 소신과 지식과 기대에 의존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이 굴레로부터 우리 자신을 서서히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해방의 과정에는, 지식의 성장에는 자연적인 한계가 없다. 우리의 지적 족쇄를 깨고 탈출할 수 있음을 부인한다는 것을 물론 가능하다: 우리가 2천 년 전의 사람들보다 우리의 편견의 틀에 의하여 덜 묶여있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기만한다고 ㅡ 틀과 유행은 변했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그 힘은 변하지 않았다고 ㅡ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제에 대하여 유행하는 이 견해가 논박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 견해는 거짓일 따름이다. 문예부흥 이래 비판적 태도가 매우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인간굴레에 대한 이 철학의 특별한 형태는 언어적 상대주의로 벤자민 리 워프(Benjamin Lee Worf)에 의하여 매우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우리의 현 문맥에서는 그 형태가 우리의 인간 언어들이 자체의 구조 속에 소신과 이론들과 기대들은 우리가 이 이념적 족쇄로부터 비판에 의하여 부수고 나올 수 없을 정도까지 포함시킬 것이라는 견해로서 설명될 것인데 왜냐하면 비판은 항상 언어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에서 복수인 ‘언어들’의 사용은 이 굴레들을 어떻게 부수고 나오는지를 가리킨다: 그 굴레들은 우리가 아마도 생각할 것과 같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데 이유인즉 인간이 또 다른 언어로써 (문화 충돌) 한 언어나 신념 체계를 비판함으로써 서로들 해방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워프나 다른 사람이 신념 조합들의 통약불가능성을 증명했다고 (또는 모든 주장들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이 다른 근본적인 신념들의 조합에 상대적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워프의 매혹적인 분석에 이끌려, 모든 언어들이 공통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이, 그 언어들이 언어적 확산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는 저 상호비판의 방법에 의하여 틀림없이 발견될 수 없는 신념들의 공통집합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 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는 항상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들을 간직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보다 간단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간혹 이런저런 방법으로써 (혹은 전혀 방법 없이) 우리가 지닌 편견들 중 몇 가지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비판을 통하여 그 편견들을 제거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것은 아마도 느리지만 끝없는 이 지적(知的) 해방의 과정이 비판적 사고와 이성적 토론의 관행에 의하여 가속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성적 토론은, 그러나, 우리의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는 게임만으로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적 토론은 실제적 문제없이, 객관적 진리 탐구 없이, 우리가 스스로 세우는 발견의 임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발견될 실제 ㅡ 구조적인 보편적 법칙들에 의하여 설명될 실제 ㅡ 없이.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문제로, 그리고 뉴튼의 문제로 회귀한다. 관념론은 쉬운 출구를 제공하지만 심지어 칸트의 형태로도 관념론은 확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 사실주의자들은 난제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난제를 직면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내가 7절에서 나의 좌우명으로 선택한 아인슈타인의 글귀에 격려를 받아서 내가 7절에서 시작한 형이상학적 토론을 끝낸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나는 또한 귀납법 문제의 ‘네 번째 단계’를 ㅡ 형이상학적 단계 ㅡ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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