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넣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휴 로프팅(HUGH LOFTING), 의사 두리틀의 동물원
(Doctor Dolittle’s Zoo)
1. 전지(全知: Omniscience)와 오류가능성
내가 스무 살일 때 나는 비엔나에서, 성함이 아달베르트 퓌슈(Adalbert Pösch)인 나이 많은 캐비닛 장인의 수습생이 되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그와 함께 일했다. 그는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를 아주 닮았지만 매우 온화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내가 그의 신임을 얻은 이후 우리가 그의 작업실에 단둘이 있을 때, 그는 자주 자신의 고갈되지 않은 지식 축적에서 나오는 혜택을 나에게 주곤 했다. 한번은 그가 영원히 작동하는 기계의 다양한 모형들에 관하여 여러 해 동안 작업했다고 그는 나에게 말하고 명상에 잠기어 부언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그런 기계는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기계가 만들어지자마자 사람들은 다르게 말할 걸!” (“Da sag’s s’dass ma’ so was net mach’n kann; aber wann amal eina ein’s g’macht hat, dann wer’n s’schon anders red’n!”)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습관적인 일은 나에게 역사관련 질문을 하고 내가 답을 모른다고 판명되었을 때 그 자신이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인 내가 대학생이었을지라도 ㅡ 그가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실). “누가 톱부츠(Topboots)를 발명했는지 너 아니? 몰라? 그 사람은 30년 전쟁동안 프리트란트(Friedland)의 공작인 발렌슈타인(Wallenstein)이었어.”라고 그는 질문하곤 했다. 그 자신에 의하여 주어져서 그 자신에 의하여 의기양양하게 답변된 한두 가지 훨씬 더 어려운 질문들이 끝나고 나의 선생님은 겸손하지만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봐, 네가 알고 싶은 것 무엇이든 나에게 물어봐: 나는 모른 게 없어.” (“Da können S’ mi’ frag’n was Sie woll’n: Ich weiss alles.”)
나의 스승들 중 다른 스승들로부터보다 나의 사랑하는 전지한(全知한: omniscient) 스승 아달베르트 퓌슈(Adalbert Pösch)로부터 지식론에 관하여 내가 더 많을 것을 배웠다고 나는 믿는다. 나를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만들도록 그렇게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없다. 이유인즉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뿐만 아니라 내가 혹시 어느 때고 갈망할 지식은, 나의 무지가 무한함을 더 완벽하게 깨닫는 것만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나에게 가르친 사람은 나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인식론 분야에 속하던 이 생각들과 다른 생각들은, 내가 책상 제작 작업을 하는 동안 나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수많은 서랍들이 붙은 마호가니 층층서랍 30개라는 큰 주문을 받았다. 이 책상들 중 몇 개의 책상의 품질, 특히 그 책상들의 광택이 내가 인식론에 심취해서 심하게 영향을 받을까봐 나는 염려했다a. 이로 인하여 나의 스승과 또한 나는 내가 이런 종류의 일에 너무 무지하고 너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924년 10월에 나의 수습이 완료되자마자, 마호가니 책상을 만드는 것보다 더 수월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나는 결심했다. 1년 동안 나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사업에 종사했는데 나는 그 사업에 이전에 종사해서 매우 어려운 사업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공부하고 글쓰기에서 5년을 더 보내고 나는 결혼을 하고 교사로서 행복하게 정착했다. 이것이 1930년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내가 1934년 말에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발간한 이후 교사직에 다소 싫증이 났을지라도, 교사직을 넘어서는 직업적 야망들이 없었다. 그래서 1937년에 교사직을 버리고 전문적인 철학자가 될 기회를 내가 얻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매우 운이 좋다고 느꼈다. 나는 35세가 다 되었고 책상에서 작업하는 방법이라는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인식론에 여전히 몰두했다.b
2. 유년시절 기억들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곳을 ㅡ 나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곳은 1902년 7월 28일, 비엔나의 오버 장크트 파이트(Ober St Veit) 구역에 있는 히멜호프(Himmelhof)라는 곳이다 ㅡ 알고 있을지라도 자신의 지성적 삶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의 철학적 발전에 관한 한, 나는 그 발전의 초기 단계들 중 몇 단계들을 정말로c 기억한다. 그러나 그 단계들은 나의 정서적 및 도덕적 발전보다 틀림없이 더 늦게 시작되었다.
나의 태도가, 나 자신을 제외하고 무단히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느낌에 의하여 혹시 약화되었을지라도, 어린이로서 나는 다소 청교도적이었고 심지어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가장 초기 기억들 가운데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ear인데 시제로 보아 feared가 옳을 듯하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was almost thirty-five and I thought that I had now finally solved the problem of how to work on a writing desk and yet be preoccupied with epistemology.인데 박중서 번역에는 ‘나이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책상 앞에 앉아 인식론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그야말로 최고의 직업을 얻게 된 셈이었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동사 remember를 do로 강조했는데 박중서 번역에는 강조되지 않았다.
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한, 예를 들어 나의 사촌 에릭 쉬프(Eric Shiff)에 대한 찬탄의 느낌들이 있었는데 그는 나보다 한 살 많고 그의 정결함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그의 잘생긴 모습에 대하여 나는 크게 그를 찬탄했다; 그것들을 나는 중요하고 도달 불가능한 재능으로서 항상 간주했다.
우리는, 오늘날 아이들이 천성적으로 잔인하다고 언급되는 것을 흔히 듣는다. 나는 그 언급을 믿지 않는다. 나는 아이로서 아마도 미국인들이 “유약한 아이(softy)”로 지칭하는 아이였고 동정심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정서들 중 한 가지 정서였다. 동정심은 내가 최초로 사랑에 빠지는 경험의 주요 요소였는데 내가 네다섯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나는 유치원에 데려가 졌는데 그곳에는 눈이 먼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웃는 매력 그리고 그녀의 시각장애라는 비극 두 가지 모두에 의하여 나의 심장은 찢어졌다. 그것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비록 내가 그녀를 한 번만 그것도 한두 시간 동안만 보았을지라도 나는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나는 다시 유치원에 보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내가 당황했는지 알아챘다.
비엔나에서 보는 비참한 가난은 내가 여전히 어린 아이였을 때 나를 동요시킨 주요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였다 ㅡ 나의 정신을 거의 항상 차지할 정도로. 지금 서구 민주주의 체제들 중 한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은 금세기 초에 가난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지 못한다: 기아와 추위와 절망으로 고통을 당하는 남성들과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 그러나 아이들인 우리는 도울 수가 없었다. 동전 몇 푼을 얻어서 몇몇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만 우리는 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말한 적이 없을지라도, 나의 아버지가 이 상황에 관하여 중요한 일을 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여러 해가 지난 후였을 따름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숙자들을 위하여 주거지를 운영하고 있던 위원회 두 곳에서 일했다: 다른 위원회가 (프리메이슨[Freemason]은 아니다) 성인노숙자들과 노숙자 가족들을 위하여 커다란 제도를 세워서 운영하는 반면, 나의 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담당자로 있던 프리메이슨(Freemasons)의 숙박소는 고아들을 위한 숙소를 운영했다. (전자[前者] 제도의 ㅡ 노숙자 보호소(Asyl für Obdachlose) ㅡ 수용자 한 명은 초기에 비엔나에 머물던 아돌프 히틀러였다.)
나의 아버지가 수행하던 일들 중 이 일은, 늙은 황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프란츠 요셉 기사 작위를 (Ritter des Franz Josef Ordens) 수여했을 때, 기대하지 않은 인정을 받았는데 그 작위는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이기도 했다. 이유인즉 나의 아버지는 ㅡ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처럼 ㅡ 황제를 존경했을지라도, 존 스튜어트 밀 학파의 급진적인 진보주의자여서 전혀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freemason)으로서 나의 아버지는 심지어, 프란츠 요셉의 헝가리 정부에 의해서는 아닐지라도,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하여 당시 불법으로 선언된 한 협회의 회원이었다. 그리하여 프리메이슨들(freemasons)은 헝가리 국경을 넘어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지금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자주 만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입헌군주제일지라도, 자체의 의회들에 의하여 통치되지 않았다: 그 의회들에게는 두 명의 수상들이나 두 내각들을 해임하거나 해산할 권리가 없었는데 심지어 탄핵투표에 의해서도 해임하거나 해산할 권리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그런 비교가 조금이라고 가능하다면, 윌리엄과 메리(Mary) 통치하의 영국 의회보다 훨씬 더 약한 듯인 보였을 터이다. 견제와 균형은 없었고 엄격한 정치적 검열이 시행되었다; 예를 들어 탁월한 정치 풍자지 1903년(Anno 1903)은 나의 아버지가 지그문트 칼 프후루크(Siegmund Karl Pflug)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1904년 발간본에서 경찰에 의하여 압수되어 1918년까지 금서목록에 올라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이전 당시에는 차르 시대의 러시아 서쪽 유럽에는 진보주의의 분위기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도 퍼졌던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영구히 파괴된 것으로 지금 보이는 분위기. 비엔나 대학에는 정말로 탁월한 교수들이 많았는데 자유와 자주성을 많이 누렸다. 극장들도 그랬는데 극장들은 비엔나의 생활에 중요했다 ㅡ 거의 음악만큼 중요했다. 황제는 정당들과 거리를 두었고 어떤 정부와도 자신을 관련시키지 않았다. 정말로 황제는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에 의하여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8세에게 주어진 교훈을 거의 정확하게 따랐다.
3. 초기 영향
내가 양육된 환경은 결정적으로 책 중심이었다. 나의 아버지 지몬 지그문트 칼 포퍼(Simon Sigmund Carl Popper) 박사는, 자신의 두 형제들처럼, 비엔나 대학의 법학박사였다. 그에게는 커다란 서재가 있었는데 서책들이 도처에 있었다 ㅡ 식당은 예외였는데 식당에는 뵈젠도르퍼(Bösendorfer) 그랜드 피아노와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의 많은 악보들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ㅡ 그의 저서들을 나의 아버지는 갖고 있었고 발간되자마자 읽었다 ㅡ 동갑이었는데 법정변호사이자 사무변호사였다. 나의 어머니 예니 포퍼(Jenny Popper)에, 쉬프(Schiff) 가문, 대해서는 내가 음악에 관하여 말하게 될 때 더 많은 것을 말하겠다. 나의 아버지는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다. 내 자신이 피고이던 1924년 혹은 1925년에 단 한 번 나는 나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을 들었다. 그 사건은, 내 견해로, 명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에게 나를 변호하지 말라고 요청했는데 아버지가 고집을 꺾지 않자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변호에서 드러난 철저한 단순성, 명징성 그리고 성실성으로 인하여 나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에서 열심히 일했다. 나의 아버지는, 비엔나의 마지막 진보적 시장인 칼 그뤼블(Carl Grübl) 박사의 친구이자 동업자였으며 그의 법률 사무소를 인수하였다. 이 사무소는 성당의 (성 스테판 성당[Stephanskirche]) 중앙 출입구 맞은편에 있는 비엔나의 중심가에서 우리가 살던 큰 아파트의 한 부분이었다.2a 나의 아버지는 이 사무소에서 오랜 시간 일했지만 실제로 법률가보다는 학자가 더 어울렸다. 그분은 역사가였고 (그의 서재의 역사관련 장서는 상당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고 18 및 19세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분은 시(詩)를 썼으며 그리스 및 라틴 운문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분은 이 일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호라티우스[Horace]의 경쾌한 시 몇 편의 번역을 발견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그분의 특별한 재능은 유머를 가볍게 사용하는 강력한 유머 감각이었다.) 그분은 철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나는 그분이 소장했던 플라톤, 베이컨,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칸트, 쇼펜하우어 그리고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의 저서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테오도르 곰페르츠(Theodor Gomperz)에 의하여 편집된 J. S. 밀(Mill)의 독일어본 선집 (곰페르츠 저술의 그리스 사상가들[Greek Thinkers]을 그분은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키르케고르의 저술들, 니체와 오이켄(Eucken)의 저술들 대부분과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의 저술들; 프리츠 마우트너(Fritz Mauthner)의 언어 비판(Critique of Language)과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의 성과 인격(Geschlecht und Charakter) (두 가지 저서들 모두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다소 영향을 미쳤던 듯이 보인다); 그리고 다윈 저서들 대부분의 번역본들. (다윈과 쇼펜하우어의 사진이 그분의 서재에 걸려있었다.) 물론 그분의 서재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문예의 표준적인 저술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한 가지 관심사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저서들과 라살르(Lassalle),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의 주요 저서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비판자들의 주요 저서들도 가지고 있었다: 뵘-바베르크(Böhm-Bawerk), 칼 멩거(Carl Menger), 안톤 멩거(Anton Menger), P. A. 크로포트킨(Kropotkin)과 요세프 포퍼 린코이스(Josef Popper-Lynkeus) (나의 친조부의 출신지인 작은 마을 콜린[Kolin]에서 그가 태어났기 때문에 분명히 나의 먼 친척이 된다.) 그 서재에는 또한 평화주의자 저서들이 있었는데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프리드리히 빌헬름 푀스터[Friedrich Wilhelm Förster]와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의 저서들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저서들을 읽을 수 있기 오래전부터 저서들은 나의 삶의 한 부분이었다. 나에게 크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최초의 저서는, 내가 읽기를 배우기 직전에 나의 누이 두 명과 나에게 모친이 읽어준 것이었다. (나는 세 명의 자녀들 중 막내였다.) 그 저서는 독일어로 아름답게 번역된 책으로 (닐스홀게르손이 기러기와 함께 한 신기한 여행[Wunderbare Reise des Klein Nils Holgersson mit den Wildgänsen]; 영어본은 The Wonderful Adventures of Nils로 위대한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öf)가 어린이들을 위해서 쓴 책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이 책을 적어도 1년에 한 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나는 아마도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öf)가 쓴 모든 책을 한 번 이상 읽었다. 그녀의 최초 소설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Gösta Berling)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괄목할만할지라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다른 저서들 모두는 나에게는 걸작이다.
읽기를 그리고 더 작은 정도로는 쓰기를 배우는 것은 물론 사람의 지적(知的) 발전에서 그 주요 사건들이다. 그것과 비교되는 게 없는데 왜냐하면 말하기를 배운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헬렌 켈러는 위대한 예외적 존재다) 때문이다. 나는 나의 최초 선생님인 엠마 골트베르거(Emma Goldberger)에게 영원히 감사하는데 그녀는 세 가지 R인 읽기와 쓰기와 산술을 나에게 가르쳤다. 그것들은 아동이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유일한 필수요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이것들을 배우기 위하여 심지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것들은 모두 환경이고, 읽기와 생각하기를 통한 학습이다.a
나의 부모님, 나는 첫 번째 학교 선생님 그리고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öf)와 별도로 나의 초기 지적(知的)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유명한 독일 민족주의의 창시 선조들 중 한 사람이었던 에른스트 모리츠 폰 아른트(Ernst Moritz von Arndt)의b 친척인 나의 평생 친구 아루트르 아른트(Arthur Arndt)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르투르 아른트는 열렬한 반(反)-민족주의자였다. 독일계였지만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약 20살 나보다 연상이었다 ㅡ 내가 1912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는 30이었다. 그는 리가 대학(The University of Riga)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실패로 끝난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동안 학생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면서 동시에 볼셰비키에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그 지도자들 중 몇몇을 그는 1905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사회주의의 예수회회원들로서, 다시 말해서, 심지어 그들 자신이 설득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들로서 묘사했는데 왜냐하면 목적이 위대하면 모든 수단들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c 아른트(Arndt)는 마르크스주의를 확신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당시까지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론가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내가 사회주의적 개념들을 매우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빈곤을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나는 느꼈다.a
아른트(Arndt)도,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의 제자들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인 그 회원들이 자신들을 “일원론자들(一元論者들: Monists)”이라고 불렀던 모임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나의 부친보다 훨씬 더 많이 관심을 가졌다). (유명한 미국 저널, 일원론자[一元論者: The Monist]와 연관이 있었는데 그 저널에 마흐[Mach]는 기고했다. 그들은 과학, 인식론과 오늘날 과학철학으로 지칭될 터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엔나의 일원론자들 가운데서 “반(半)-사회주의자”인 포퍼-린코이스(Popper-Lynkeus)에게는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는데b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가 포함되었다.
내가 읽은 (아마도 나의 친구 아른트[Arndt]의 영향을 받아서 ㅡ 나의 부친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주저했다) 사회주의에 관한 최초의 저서는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며(Looking Backward)였다. 내가 약 12살 때 나는 틀림없이 그 저서를 읽었고 그 저서는 나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아른트(Arndt)는 일원론자들이 마련한 일요일 산책으로 비엔나 숲으로 나를 데려갔는데 이 산책에서 그는 마르크시즘과 다윈론을 설명하고 토론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의 대부분은 나의 이해를 크게 벗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흥미진진했다.
일원론자들이 마련한 이 일요일 산책 중 한 산책은 1914년 6월 28일에 실시되었다. 저녁때쯤 우리가 비엔나의 교외에 접근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법정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었음을 우리는 들었다. 이 사건 후 약 일주일 후에 나의 어머니는 나와 나의 두 누나들을 여름휴가로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멀지 않은 한 마을인 알트-아우제(Alt-Aussee)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의 12번째 생일에,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denn es ist leider Krieg”) 나의 부친이 의도했던 바와 같이 나의 생일을 위하여 올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친의 편지를 나는 받았다. 이 편지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사이의 실제적인 선전포고 날에 도착했기 때문에 나의 부친은 전쟁이 오고 있다는 것
헌신짝처럼 내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로 번역되었다.
a 역주: 이 두 문장의 원문은 He found me very willing to listen to socialist ideas; nothing, I felt, could be more important than to end poverty.인데 박중서 번역에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사회주의적 주장을 내게 곧잘 들려주곤 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had a considerable following인데 박중서 번역에는 ‘명성을 얻었고“로 번역되었다.
을 깨달은 듯하다.
4.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나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전쟁 기간과 그 기간의 결과는 모든 면에서 나의 지적(知的) 발달에 결정적이었다. 그것들로 인하여 나는 수용된 견해들, 특히 정치적 견해들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었다.
물론 당시 전쟁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극소수다. 심지어 이전에는 전쟁 부추기와 거리가 먼 우리 모임의 회원들 중 몇몇이 참석한 귀청이 찢어질 듯한 애국주의 외침이 나라 전체를 통하여 일어났다. 나의 부친은 슬픔에 잠겨서 절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른트(Arndt)는 희망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적 혁명이 일어나기를 희망했다.
그 후 나는 자주 당시를 기억했다. 전쟁 이전에, 우리 모임의 많은 회원들은 결정적으로 평화주의적이고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적어도 매우 비판적인 정치이론들을 토론했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사이의 연합에 대하여 그리고 발칸반도 특히 세르비아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들이 별안간 바로 저 정책에 대한 지지자들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나는 이것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한다. 그것은 여론의 압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할된 충성심들이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두려움도 ㅡ 의견차이와 배반 사이에는 두드러진 구분선이 그어질 수 없기 때문에 전시에는 반대자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취해지는 폭력적인 조치들에 대한 두려움 ㅡ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크게 당황했다. 나는 물론, 독일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하여 알지 못했다: 어떻게 그 정당들의 국제주의가 붕괴되었는지. (이 사건들에 대한 놀라운 서술은 로제 마르텡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의 티보가 사람들[Les Thibaults]의 마지막 책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몇 주 동안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전쟁 선전의 영향을 받아서 나는 일반적인 분위기에 다소 감염이 되었다. 1914년 가을에 나는 “평화를 축하하며”라는 어리석은 시를 썼는데 그 시에서 오스트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이 공격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는 가정이 표현되었고 (나는 당시 “우리”가 공격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 시는 평화복원을 서술하여 축하했다. 그것은 그다지 호전적인 시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우리”가 공격을 받았다는 전제에 대하여 곧 아주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공격과 벨기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지독한 것이었다는 것과 거대한 선전기구가 그 공격들이 정당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음 나는 깨달았다. 1915-16년 겨울에 나는, ㅡ 의심할 바 없이 전쟁 이전의 사회주의적 선전의 영향을 받아서 ㅡ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명분은 나쁜 것이었음과 우리가 전쟁에서 질만 함을 (그리하여 내가 순진하게나마 논증한 바와 같이, 우리가 전쟁에서 패해야 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느 날, 틀림없이 1916년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나는 이 입장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잘 준비된 서술을 가지고 나의 부친에게 다가갔지만 나의 부친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을 적게 보였다. 나의 부친의 전쟁에 관한 그리고 전쟁의 결과에 관한 옳고 그름에 관하여 나보다 더 의심했다. 두 가지 양상들에서 나의 부친은 물론 옳았고 나는 분명히 그 양상들을 과도하게 단순화된 정도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친은 나의 견해들을 매우 진지하게 수용했고 긴 토론 끝에 나의 부친은 나의 견해들에 동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나의 친구 아른트(Arndt)도 그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충분히 나이가 든 나의 사촌들 모두는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장교들로서 싸우고 있었고 나의 친구들 중 많은 친구들도 그랬다. 나의 모친은 여름휴가로 우리들을 여전히 알프스로 데려갔고 1916년에 우리는 다시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에 ㅡ 이번에는 이슐(Ischl)인데 우리는 그곳에서 경사진 숲속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렸다 ㅡ 다시 갔다. 프로이트(Freud)의 누이인 로자 그라프(Rosa Graf)가 우리와 함께 갔는데 그녀는 나의 부모의 친구였다. 그녀의 아들 헤르만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을 따름이었는데 전선으로 파견되기 전에 마지막 휴가를 받고 군복차림으로 방문했다. 곧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의 모친의 슬픔은 ㅡ 그리고 프로이트가 총애하던 그녀의 누이의 슬픔 ㅡ 매우 컸다. 그로 인하여 나는, 전사하고 부상당하고 실종된 사람들의 저 충격적으로 긴 명단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곧 정치적인 쟁점들이 다시 출현했다. 옛 오스트리아는 다중 언어 국가였다: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남부 슬라브인(유고슬라비아인)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체코인, 슬라브인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탈주한다는 소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군법무관으로 활동하던 우리 가족의 친구 한 명은 범-슬라브 운동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했는데 그 운동을 그 군법무관은 직업적으로 연구해야 했고, 체코인들의 지도자였던 비엔나 대학과 프라하 대학 출신의 철학자이던 마사리크(Masaryk)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우리는, 체코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 전쟁포로들에 의하여 러시아에서 형성된 체코군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하여 지시된, 불충을 의심받는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사형선고들과 테러행위에 관한 소문을 우리는 당시 들었다.
5. 초기 철학적 문제: 무한성
언어의 오용으로부터 출현하는 수수께끼만이 아닌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 있다고 나는 오랫동안 믿었다. 이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은 유치할 정도로 명백하다. 아마도 내가 약 8살 아이였던 때 나는 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를 우연히 발견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떤 방법으로 나는 태양계와 우주의 (의심의 여지 없이, 뉴튼적 우주의) 무한성에 관하여 들었고 나는 걱정했다: 나는, 우주가 유한하다고 (이유인즉 그렇다면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상상할 수도 또한 우주가 무한하다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의 부친은, 나의 부친이 말하기를 그런 것들을 잘 설명하는 나의 형제들 중 한 명에서 내가 물어보라고 제안했다. 이 삼촌은 먼저 나에게, 계속되는 숫자들의 수열에 관하여 내가 골치를 썩이는지 물었다. 나는 골치를 썩이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는 나에게, 쌓아놓은 벽돌들을 상상하고 그 벽돌들에 한 개의 벽돌을 추가하고 다시 한 개를 추가하여 끝없이 계속하라고 요구했다; 그 벽돌 더미는 결코 우주 공간을 채우지 못할 터이다. 나는 그 답변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것이 매우 도움이 되는 답변이라고 다소 망설이면 동의했다. 물론 나는, 내가 여전히 느끼던 의혹을 정식화할 수 없었다: 그 의혹은, 잠재적 및 실제적인 무한성과 그 실제적인 무한성을 잠재적인 무한성으로 환원할 수 없음 사이의 차이점이었다. 그 문제는 물론 칸트가 품었던 첫 번째 이율 배반의 한 부분이었고 (공간 관련 부분) 그 문제는 (특히 시간 관련 부분이 추가된다면) 진지하고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철학적 문제이다 ㅡ 특히 우주는 유한 반경의 폐쇄 리만 공간이라고 밝힘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인슈타인의 희망들이 다소 포기되었기 때문에a. 물론 내가 걱정하던 것이 아마도 미해결된 문제라는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그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식하거나 혹시 너무 어리거나 너무 어리석은 반면 나의 삼촌과 같은 지식인은 틀림없이 이해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12살이거나 13살일 때인 훗날에 유래한 몇 가지b 유사한 문제들을 ㅡ 수수께끼는 아니고 진지한 문제들 ㅡ 기억한다; 예를 들어 다윈 이론에 의하여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생명의 시작이라는 문제와 생명은 화학적 과정일 따름이라는 문제 (나는 생명체들이 화염들이라는 이론을 선호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은, 어린이든 어른이든 다윈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피한 문제들이다. 실험적 연구가 그 문제들과 관련하여 실행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 문제들이 비철학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문제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고 (혹시 해소될 수 있을지라도) 자의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공식적으로 결정해서는 특히 안 된다.c
그런 문제들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는 오랫동안 동일했다. 나를 괴롭혔던 저 문제들 중 어떤 문제가 오래전에 풀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 적이 없다; 그 문제들 중 어떤 문제가 새로울 가능성이 있을 터이라고 나는 아주 생각할 수 없었다. 일원론의 세기(Das monistische Jahrhundert) (다시 말해서 The Century of Monism)라는 학술지의 훌륭한 편집자인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같은 사람들이 모든 답변을 알고 있을 터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난제들은 온전히 나의 제한된 이해력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6. 나의 첫 번째 철학적 실패: 본질주의의 문제
나의 지적(知的) 발전에 결정적이 된 최초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최초의 토론을 나는 기억한다. 그 문제는, 단어들과 단어들의 의미에 (혹은 단어들의 “참된 의미”) 중요성을 부여하는 태도를 내가 거부함으로 인하여 발생했다.
내가 틀림없이 15살이었던 때였다. 나의 부친은, 슈트린트베르크(Strindberg)의 자서전 여러 권들 중 몇 권을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자서전의 어떤 구절로 인하여 나의 부친과의 대화에서 내가 느끼기에 슈트린트베르크(Strindberg)의 태도들 중 반(反)-계몽주의적이었던 것을 내가 비판하게 되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정 단어들의 “참된” 의미들로부터 중요한 것을 도출하려는 그의 시도. 그러나 내가 나의 반대의견들을 강조하려고 했을 때 나의 요점을 나의 부친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정말로 충격을 받았음을 나는 기억한다. 그 문제는 나에게 분명하게 보였고 우리의 토론이 길게 계속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보였다. 우리가 그 토론을 밤늦게 끝냈을 때 내가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나는 깨달았다.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a 관하여 우리 사이에는 실제적인 괴리가 있었다. 이 토론 이후에 단어들과 단어들의 의미들에 관하여 결코 논쟁하지 않은 원칙을 내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각인시키려고 얼마나 강하게 노력했는지 나는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논쟁들은 피상적으로만 옳고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단순한 원칙이 잘 알려지고 널리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음을 나는 기억한다; 슈트린트베르크와 나의 부친 두 분은 이 문제들에서 틀림없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몇 년 후 나는, 내가 그들을 잘못 대했다는 것과 단어들에 있는 의미들 특히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거의 보편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나중에 “본질주의(essentialism)”로 지칭하게 된 태도는 여전히 널리 퍼져있고 내가 어린 학생으로서 느꼈던 낭패감은 나중에 빈번히 나에게 되돌아왔다.
이 낭패감은, 나의 부친의 서재에 있던 철학 서적들 중 몇 가지 서적을 내가 읽으려고 시도했을 때, 처음 반복되었다. 슈트린트베르크와 나의 부친의 태도가 아주 일반적임을 나는 곧 발견했다. 이로 인하여 나에게는 매우 큰 난제들과 철학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다. 나의 부친은, 내가 스피노자를 시험 삼아 읽어야 한다고 (아마도 치료방법으로서) 제안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의 서한집(Letters)이 아니라 윤리학(Ethics) 및 데카르트에 따른 원리들(Principles According to Descartes)을 시험 삼아 읽었는데 두 저서 모두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내가 보기에 자의적이고 요점이 없고 문제 회피적인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하느님을 이론화하는 것을 일생 혐오하게 되었다. (신학은 신념의 부족 때문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장 매혹적인 과학이었던 기하학과 스피노자의 기하학적으로 엄밀함으로서(more geometrico) 사이의 유사성은 아주 피상적임을 나는 또한 느꼈다. 칸트는 달랐다. 순수이성비판(Critique)이 너무 난해함을 내가 발견했지만 그 저서가 실제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순수이성비판(Critique)의 두 번째 판본의 (베노 에르트만[Benno Erdmann]에 의한 판본) 서문을 읽으려고 시도한 (나는 많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틀림없이 매혹되었다) 후에 쪽을 열고 이율배반들을 기이하게 배열한 것에 감명을 받고 당혹했음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요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성은 자체를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함에 의하여 아마도 칸트가 (혹은 다른 사람) 의미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이율배반의 목차로부터 실제적인 문제들이 논증되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또한 서문으로부터 수학과 물리학이 이것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저 토론의 기초를 이루는 문제로 선회해야 하는데 그 토론이 나에게 미친 충격을 나는 아주 잘 기억한다. 그것은, 나의 동시대인들 대부분으로부터 나를 여전히 갈라놓는 문제이고, 철학자로서 나의 이후 삶에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길게 일탈할지라도 다소 상세하게 그 문제를 내가 검토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7. 본질주의에 대한 긴 일탈: 대부분의 동시대 철학자들로부터 나를 여전히 갈라놓은 것.
나는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이것을 일탈이라고 부른다. 먼저 이 절의 세 번째 문단에 있는 반(反)-본질주의에 대한 나의 언명은 틀림없이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편향적이다. 두 번째, 현재 절의 나중 부분들이, 나의 지적(知的) 발달 이야기를 (비록 이것이 무시되지는 않을지라도) 계속하는 데라기보다는 내가 설명하기에 일생이 걸렸던 문제를 토론하는 데 할당되기 때문이다.
다음 언명이 내가 15살일 때 나의 염두에 있었다고 나는 제시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절에서 내가 언급한 나의 부친과의 저 토론에서 내가 도달한 입장을 나는 지금 다음 방식으로 최고로 설명할 수 있다:
단어들과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에 관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로 결코 너 자신을 내몰지 말라. 진지하게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문제들과a 사실들에 대한 주장들이다: 이론들과 가설들; 이론들과 가설들이 풀어내는 문제들; 그리고 이론들과 가설들이 제기하는 문제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 충고 한 편을 나의 반(反)-본질주의 훈계로서 언급하겠다. 훨씬 훗날에 이루어질 것 같은 이론들과 가설들에 대한 언급과 별도로, 단어들과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에 대한 근심들과 논쟁들에 의하여 설치된 함정을 내가 처음 의식했을 때 내가 간직한 느낌들을 명확히 설명하는 것과 이 훈계는 동떨어질 리가 없다. 이것은 지적(知的) 지옥불에 떨어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언어적 문제들 위하여 실제적인 문제들을 포기하는 것.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내 자신의 생각들은, 철학자들이 충분히 최신 지식을 지니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은 특히 철학자들에게 틀림없이 잘 알려져 있다는 나의 우활하(迂闊하: naive)지만 확실한 믿음에 의하여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나는 나중에, 철학서적들을 더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문제를 ㅡ 단어들의 상대적인 비중요성 ㅡ 철학의 표준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믿음이 보편자들에 대한 고전적인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저 고전적 문제와 동일하지 않음을 네가 꽤 일찍 깨달았을지라도,
나는 그 문제를 고전적 문제의 변종으로서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이것은 실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questions of fact인데 박중서 번역에는 ‘사실과’로 번역되었다.
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보편자들의 문제와 그 문제의 역사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곧, 보편적인 단어들과 단어들이 지닌 의미라
는 (혹은 느낌이나 외연적 의미a) 고전적 문제의 배후에 더 깊고 더 중요한 문
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보편적인 법칙들과 그 법칙들의 진리
라는 문제; 다시 말해서, 규칙성들이라는 문제.
보편자들이라는 문제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마치 단어들의 혹은 언어 용법들의 문제인 양 다루어진다; 혹은 상황들에서의 유사성의 문제가 그 상황들이 우리의 언어적 상징성에서 유사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일치되는지의 문제인 양. 그러나 그 문제가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분명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유사한 상황들에 유사하게 반응하는 문제였다는 것.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반응들에는 생물학적으로 기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나 예상의 문제에 그리하여 규칙성들에 적응하는 문제에 다다른다.
이제 나의 생애를 통하여 나는, 철학자들이 “외부 세계”로 지칭하는 것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또한 그 반대 견해를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간주했다. 이것은, 내가 그 문제를 나 자신과 논쟁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예를 들어 “중립적 일원론”과 유사한 관념론적 입장들로써 실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실재론(實在論: realism)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나는, 보편자들이라는 문제의 문맥 안에서 이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라는 용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 반대되는 입장을 지적하기 위하여. 다소 오해를 야기하는 이 용법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을 저술할 때 (아마도 1935년, 그 저서 판본의 “본 저서의 내력” 참조)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 반대되는 여하한 (고전적인) 입장에 관한 그리고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에 관한 (그리고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후설의 “본질들에 대한 직감”에 관한) 명칭으로서 “본질주의(本質主義: essentialism)”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적어도 내가 이 명칭을 선택하기 10년 전에 나는, 나 자신의 문제가 보편자들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와 (그리고 그 문제의 생물학적 변종) 반대로 방법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나의 머리에 원래 각인시켰던 것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or sense, or denotation)인데 박중서 번역에는 ‘(또는 그 뜻, 또는 그 지칭)’으로 번역되었다.
은 또 다른 방식으로보다는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하고 나아가려는 훈계였다. 이것이, 내가 “본질주의(本質主義: essentialism)”와 “반-본질주의(反-本質主義: anti-essentialism)”라는 용어들을 만들어내기 오래전에, 나의 훈계에 특징적인 태도에 대하여 “방법론적 유명론(方法論的 唯名論: methodological
nominalism)”이라는 명칭을 이용함에 의하여 “방법론적”이라는 용어에 의하여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는 용어를 제한한 이유이다. (이제 나는 이 명칭이 다소 오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나의 태도를 어떤 잘 알려진 입장과 일치시키려는 혹은 적어도 나의 태도와 어떤 그런 입장 사이의 유사성들을 발견하려는 나의 시도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러나 고전적인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은 내가 수용한 적이 없는 입장이었다.)
1920년대 초반에, 이 개념들에 다소 영향을 미친 두 가지 토론들을 나는 겪었다. 첫 번째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이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와 가진 토론이었다. 폴라니(Karl Polanyi)는, 내가 “방법론적 유명론(方法論的 唯名論: methodological nominalism)”으로서 서술한 것은 자연과학들에 특징적이지만 사회과학들에는 특징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소 나중에 두 번째 토론은 엄청난 독창성과 박식함을a 지닌 사상가인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와 벌였는데 그는 나의 입장이 그 단어의 두 가지 의미들 모두에서 “실재론적”이라고 서술함에 의하여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제 나는, 폴라니(Polanyi)와 곰페르츠(Gomperz) 두 사람 모두가 옳았다고 믿는다. 언어표현 중시는 사회과학들에서 많은 형태들로 만연되었고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 반면 자연과학들은 주로 언어중시적 토론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폴라니(Polanyi)는 옳았다. 그러나 그것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사회적 관계들이 많은 방식들로 내가 보다 최근에 “세 번째 세계” 혹은 더 낫게 “세계 3”으로 지칭한 이론들의, 저서들의, 개념들의, 문제들의, 세계에 속한다고 이제 나는 말해야 한다7a. 플라톤 ㅡ 그 세계를 개념들의 세계로서 본 ㅡ 이래 주로 본질주의자들에 의하여 연구된 세계. “외부 세계‘를 신뢰하는 실재론자는 혼돈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mmense erudition인데 박중서 번역본에는 ‘지극히 열정적인’으로 번역되었다.
7a (교정쇄에서 추가됨) 나는 최근에,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의 제안을 받고 제1, 제2 그리고 제3 세계들로부터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3으로 용어사용법에서 변경했다. 나의 옛 용어사용법에 관하여, [1968년(r)] 및 [1968년(s)] 참조. 존(John) 경의 제안에 관하여, 그의 저서 실재 마주하기(Facing Reality) (뉴욕,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 슈프링거 출판사[Springer Verlag], 1970년) 참조. 그 제안은, 한두 가지 장소들을 제외하고, 너무 늦게 와서 현재 저서의 원문에 포함될 수 없었다. (1975년에 추가: 나는 이것을 어느 정도 수정했다.) 아래 주석 293과 또한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특히 P2장
참조.
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존재를 반드시 신뢰하기 때문에 곰페르츠(Gomperz)는 옳았다; 다시 말해서 규칙성들을 반드시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고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보다는 고전적 본질주의에 더 반감을 느꼈을지라도, 유사성들의 존재라는 문제들을 규칙성들에 대한 생물학적 적응이라는 문제로 대체하면
서 내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보다는 ”실재론“에 더 가깝다는 것을 나는 당시 깨닫지 못했다.
내가 이 문제들을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설명하기 위하여, “지식과 무지의 근원들에 관하여(On the Sources of Knowledge and Ignorance)”에 내가 처음으로 발표한 관념들의 도표를 이용하겠다.
관념들
다시 말해서
명칭들이나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서술들이나 명제들이나 이론들은
유의미할 참일
단어들로 주장들로
정식화될 것이고
그것들의
의미는 진리는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을 추론들을a
통하여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의 의미로 기초명제들의b 진리로
환원될 것이다 |
그것들의
의미를 진리를
이 수단들에 의하여 확립하려는 (환원하기보다는) 시도는
무한회귀(無限回歸: an infinite regress)를 야기한다 |
이 도표는 본질적으로 아주 무가치하다c: 왼편과 오른편 사이의 논리적 유추는 잘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그 유추는 나의 훈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데 나의 훈계는 이제 다음과 같이 재언명될 것이다.
이 도표의 왼편 및 오른편 사이의 완벽한 논리적 유추에도 불구하고, 오른편이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반면 왼쪽은 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의미 철학들과 언어 철학들이 (그 철학들이 단어들에 관련되는 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성(知性)에 관한 문제들에서, 갈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들은 참인 이론들이나 진리에 근접하는 ㅡ 아무튼 어떤 다른 (경쟁하는) 이론, 예를 들어 더 오래된 이론보다 진리에 더 가까운 ㅡ 이론들이다.
이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논증하려 할 것이다. 어느 이론이 참인지 새로운지 지성적(知性的)으로 중요한지는, 그 이론이 지닌 의미에 달렸다; 그리고 그 이론이 지닌 의미는 (그 의미가 문법적으로 모호하지 않게 언명된다면) 그 이론이 언명되는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의 함수이다. (수학에서와같이 여기서, 함수에는 논증들의 질서를 고려하려는 의도가 있다.d)
이론의 의미에 대한 이 견해는 거의 명백한 듯하다; 그 견해는 널리 믿어지고 흔히 무의식적으로 당연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에는 진실이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개략적인e 언명으로써 그 견해에 반론을 펴겠다.
이론과 (혹은 서술) 그 이론을 언명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 사이의 관계는, 서술된 단어들과 그 단어들을 서술함에서 사용된 문자들 사이의 관계와 몇 가지 양상들에서 비슷하다.
분명히 문자들에는, 단어들이 지니는 “의미”라는 의미에서 “의미”가 없다; 우리가 단어들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단어들이 지닌 의미를 감지하려면 우리가 문자들을 (다시 말해서, 어떤 다른 의미에서 문자들이 지닌 “의미”) 알아야 할지라도. 단어들과 서술들과 이론들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다.
문자들은 단어들을 언명하는 데서 순전히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a이거나 실용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나의 견해로, 이론들의 정식화에서 단어들은 또한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a이거나 실용적인 역할만을 한다. 그리하여 문자들과 단어들은 목적들에 (다양한 목적들) 대한 수단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지성적(知性的)으로 중요한 목적들은: 문제들의 언명이다;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이론들을 잠정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리고 경쟁하는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것. 비판적 토론은 제출된 이론들을, 고찰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로서 합리적이거나 지성적(知性的) 가치를 통하여 평가한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지닌 진리나 진리에 대한 근접성에 관하여 평가한다. 진리는, 이론들에 대한 비판에서 주요 규제적 원칙이다;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이론들이 지닌 능력은 별개의 것이다. (나의 저서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10장 참조.)
전혀 다른 용어들로 (1대[對]1로 번역될 수 없는 용어들b) 언명되는 두 가지 이론들 T 과 T 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동치임을 보여주는 몇 가지 탁월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T 과 T 가 동일한 이론에 대한 다른 언명들일 뿐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이론의 논리적 “의미”를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의 함수로서 간주하는 것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T 과 T 의 동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더 풍요로운 이론 T 를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 이론으로 T 과 T 모두가 번역될 수 있다. 사례들은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 projective geometry)의 다양한 공리화들(公理化들: axiomatizations)이다; 그리고 또한 양자역학의 입자 및 파동 형식론들인데 두 가지 모두를 연산자 언어로 변환함에 의하여 그와 동치가 확립될 수 있다.)
물론 한 가지 단어의 변경으로 인하여 한 가지 서술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음은 아주 명백하다; 한 가지 문자의 변경이 한 단어 의미를 그리고 그 단어로써 한 이론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ㅡ 가령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대한 해석에 흥미를 갖는 사람이 깨달을 것과 같이 ㅡ 꼭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사자들이나 인쇄자들의 실수들은, 치명적인 오해를 야기할지라도, 문맥을 숙고함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어떤 번역을 수행하는 그리고 그 번역에 관하여 생각한 모든 사람은, 흥미로운 원문에 대하여 문법적으로 올바르고 또한 거의 정확한 의미로의 번역 같은 것들이 없다는 것을 안다. 훌륭한 번역은 모두 원문의 해석이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a 원문에 대한 훌륭한 번역 모두는 틀림없이 이론적 재구성이라고 말하는 정도까지 심지어 가고 싶다. 그리하여 그 번역은 심지어 견해표명들을 포함할 것이다. 훌륭한 번역 모두는, 동시에, 틀림없이 가깝고b도 자유롭다. 부언하여, 순전히 이론적인 글을 번역하려는 시도에서 심미적 고려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오류이다. 이론의 내용은 제공하지만 특정 내부적 대칭들을 유발하지 못하는 번역이 아주 불만족스러울 것임을 알기 위하여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같은 것을 생각하기만 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 어떤 사람에게 이 번역이 주어진다면 그가, 저 대칭들을 발견한다면, 그 정리(定理: theorem)가 주로 심미적인 이유들 때문에 흥미로울지라도 자기가 어떤 정리를 발견했다고 즉, 자기 자신이 창의적인 기여를 수행했다고 옳게 느낄 정도까지 된다. (다소 유사하게, 제노파네스[Xenophanes]나 파메니데스[Parmenides]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나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운문 번역이, 다른 것들이 동등하다면 산문 번역보다 선호될 수 있다.)
아무튼 번역이 충분히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번역이 나쁠지라도 난해한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가지 언어들이 다른 구조를 지닌다면c 몇몇 이론들은 거의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가 그렇게 아름답게 밝힌 바와 같이12a). 물론 언어들이 가령 라틴어와 그리스어만큼 밀접하게 관련된다면, 몇 가지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들 도입하여 충분히 번역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서 정교한 설명들이 틀림없이 대신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정확한 언어나 언어에서 정확성이라는 개념은 아주
잘못 생각된 듯하다. 우리가 “정확성”을 개념들의 도표에 (위 참조) 들인다면 그것은 왼편에 표시될 터이다 (왜냐하면 서술의 언어적 정확성은 정말로 사용되는 단어들의 정확성에 전적으로a 의존할 터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에서 그것과 유사한 것은 아마도 “확실성(certainty)”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도표가 그렇게 구축되어서 오른편에 있는 개념들이 모두 귀중하기 때문에 나는 이 두 가지 개념들을 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성과 확실성은 모두 허위 이상들(理想들: ideals)이다. 그것들은 도달하기가 불가능하고, 그리하여 그것들이 무비판적으로 지침들로서 수용된다면 위험스러울 정도로 오해를 낳는다. 정확성 추구는 확실성 추구와 유사하여 두 가지 모두 배척되어야 한다.
가령 예측이나 심지어 언명의 정확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때때로 매우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제안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가 정말로 제안하는 것은, 정확성 자체를 위하여 ㅡ 특히 언어적 정확성 ㅡ 정확성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항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통상적으로 명징성이b 실종되고 흔히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예비적 조치들에 대하여 시간과 노력이 낭비되기 때문인데 이유인즉 그 예비적 조치들은 주제의 실제적인 진전에 의하여 우회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 상황에 의하여 필요한 것보다 더 정확해지려고 결코 애써서는 안 된다.
나는 아마도 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할 것이다. 명징성의b 증가는 본질적으로 지성적(知性的) 가치를 띤다; 정확성이나 정밀성의 증가에는 어떤 확정된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가치가 있을 따름이다 ㅡ 그곳에서 목적은 통상적으로, 문제 상황에 (예를 들어 우리의 측정들의 정확성을 증가시킨다는 조건으로만 구분될 수 있는, 예측들을 낳는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을 구분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하여 필요해지는 시험가능성이나 비판가능성의 증가이다.
이 견해들이, 많은 동시대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함축적으로 믿어지는 견해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은 명백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확성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수학과 물리학이 정밀과학들로서 간주된 시대로부터 유래한다. 과학자들과 또한 과학적 경향을 지닌 철학자들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아마도 풍요성이 정확성으로부터 일종의 부산물로서 출현할 터라고 소망했기 때문에, 이 “정확성”을 충족시키거나 능가하는 것이 거의 자기들의 의무라고 느꼈다.a 그러나 풍요성은 정확성의 결과가 아니라 아무도 이전에 보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본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발견한 결과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대 철학사에 관한 나의 언급들을 이 일탈의 끝부분까지 미루고 서술이나 이론이 지닌 의미나 중요성이라는 문제로 다시 선회하겠다.
단어들에 관하여 결코 논쟁하지 않는다는 나 자신의 훈계를 염두에 두고 단어가 지닌 “의미”라는 의미들이 있을 것이어서 이론의 의미가, 이론을 매우 명시적으로 정식화하는 데서 사용되는 단어들의 의미에 전적으로 달렸다는 것을 나는 매우 기꺼이 인정한다 (말하자면, 어깨를 으쓱하며). (아마도 프레게[Frege]가 말하는 많은 것이 그가 말하는 “의미”와 반대로 말할지라도, 그 “의미”는 그것들 중 하나이다.b) 또한 통상적으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단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가 존재하여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것이 일반적으로 전혀 참이 아닐지라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을 흥미롭거나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ㅡ 우리가 어떤 이론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ㅡ 다른 어떤 것이다. 그 개념을, 단지 직관적이고 아마도 다소 불분명한 정도로 표현하면, 이론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우세한c 문제 상황에 대한 이론의 관계: 앞선 그리고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그 이론의 관계: 현존하는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문제들을 제안하는 이론이 지닌 능력. 다시 말해서, 이런 의미에서 이론이 지닌 의미나 중요성은, 물론 이 문맥들의 중요성이 반대로 다양한 이론들과 문제들과 그리고 그것들이 구성되는 문제 상황들에 의존한다할지라도, 매우 포괄적인 문맥들의 의존한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y felt it to be almost a duty to live up to, or to emulate, this
"exactness", perhaps hoping that fertility would emerge from exactness as a kind of by-product.인데 박중서 번역에 “그들은 이러한 ‘정밀성’을 추구하는 것, 혹은 모방하는 것이 일종의
사명이라고 여겼으며, 어쩌면 그러한 정밀성으로부터 일종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독창성이 대두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Perhaps Frege’s “sense” is one of them, though much that he
says speaks against this.인데 박중서 번역에 “아마도 프레게의 ‘뜻(센스)’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의 경우에는 이에 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지만.”으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revailing인데 박중서 번역에 ‘당면한’으로 번역되었다.
한 이론의 중요성이라는 이 표면적으로 모호한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전
체론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개념이 상당한 정도까지 순전히 논리적인 용어들
로 ㅡ 서술이나 이론의 내용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ㅡ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주로 두 가지 직관적으로 매우 다르지만 논리적으로 거의 동일한 내용에 대한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나는 그 개념들을 때때로 “논리적 내용” 및 “정보적 내용”으로 지칭했다; 후자(後者)의 특별한 경우를 나는 또한 “경험적 내용”으로 지칭했다.
서술이나 이론이 지닌 논리적 내용은, 타스키(Tarski)가 서술이나 이론이 지닌 “결론 집합”으로 지칭한 것과 동일시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의 서술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모든 (동어반복적이 아닌) 결론들의 집합.
정보적 내용에 (내가 그것을 지칭한 바와 같이) 우리는, 서술들이나 이론들이 우리에게 “그 서술들이나 이론들이 많이 금지할수록” 혹은 배제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직관적인 개념을 고려해야 한다. 이 직관적 개념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보였을 정보적 내용의 정의(定義: definition)가 발생한다: 이론이 지닌 정보적 내용은, 이론과 양립될 수 없는 서술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 집합의 원소들과 논리적 내용의 원소들이 일-대(對)-일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즉각 알려질 것이다: 집합들 중 한 집합에 있는 모든 원소에 대하여 다른 집합에 대응하는 원소, 즉 그 원소에 대한 부정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론에 있는 논리적 강도(强度: strength)나 힘이나 정보의 양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때마다 그 이론이 지닌 논리적 내용이나 정보적 내용이 틀림없이 모두 증가하거나 감소함을 발견한다. 이로 인하여 두 가지 개념들 모두가 매우 유사함이 밝혀진다: 한 가지에 관하여 언급될 수 있는 것과 나머지 한 가지에 관하여 언급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1-대(對)-1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이로 인하여 정보적 내용이라는 나의 정의(定義: definition)는 아주 터무니없지 않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예를 들어 논리적 내용에 대하여 다음 변환의 규칙(rule of transitivity)이 성립한다: b가 ɑ의 내용의 원소이고 c가 b의 내용의 원소라면 c는 ɑ의 내용의 원소이기도 하다. 물론 정보적 내용에 대하여 상응하는 규칙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이처럼 단순한 변환 규칙이 아니다.
게다가 여하한 (동어반복적이 아닌) 서술의 ㅡ 가령, 한 가지 이론 t ㅡ 내용은 무한하다. 이유인즉 서술들 ɑ, b, c의 무한한 목록이 있도록 하고 그 서술들은 짝을 지으면 모순이 되고 개별적으로는 t를 함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t들에 대하여, ɑ: “행성들의 숫자는 0이다”, b: “행성들의 숫자는 1이다” 같은 것, 등등이 합당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t나 ɑ 아니면 두 가지 모두”라는 서술은 t로부터 연역될 수 있고 그리하여 t의 논리적 내용에 속한다; 그리고 b와 목록에 있는 여하한 다른 서술에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ɑ, b, c,...,에 관한 우리의 전제들로부터, “t나 ɑ 아니면 두 가지 모두”, “t나 b 아니면 두 가지 모두”라는 수열에 대한 서술들의 쌍은 상호 연역될 수 없을 따름임이 밝혀진다; 다시 말해서, 이 서술들 중 어떤 서술도 다른 서술을 함유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t의 논리적 내용은 틀림없이 무한하다.
동어반복적이 아닌 이론의 논리적 내용에 관한 이 기초적인 결과는 물론 잘 알려져 있다. 그 논증은, 논리적인 (배타적이지 않은) “혹은”을 이용하는 가치 없는 연산에 근거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t를 약하게 만드는 무가치한 방법의 결과들인 “t나 ɑ 아니면 두 가지 모두”와 같은 저 서술들에 순전히 의존하여 내용의 무한성이 완전히 무가치한 일인지를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정보적 내용을 통하여, 문제가 보이는 것처럼 아주 무가치하지는 않다는 것이 즉각 분명해진다.
이유인즉 고찰되는 이론을 뉴튼의 중력이론으로 하라; 그 이론을 N으로 부르라. 그렇다면 N과 양립될 수 없는 서술이나 이론은 N의 정보적 내용에 속할 것이다. 이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E라고 명명하자. 두 이론이 서로 양립될 수 없기 때문에, 각 이론은 다른 이론의 정보적 내용에 속한다; 각 이론은 다른 이론을 배제하거나 금지한다.
이로 인하여, 한 가지 이론 t의 정보적 내용이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전혀 무가치하지 않은 정도로 무한함이 밝혀진다: t와 양립될 수 없는 이론과 그리하여 어느 날 t를 대체할 (가령, 어떤 결정적인 실험이 t와 반대가 되는 결정을 내린 다음에) 어떤 미래 이론은 분명히 t의 정보적 내용에 속한다. 그러나 꼭 마찬가지로 분명히, 우리는 이 이론들을 미리 알 수도 없고 구축할 수도 없다: 뉴튼은 아인슈타인이나 아인슈타인의 후계자들을 미리 알 수 없었다.
물론 다소 덜 직관적일지라도, 논리적 내용에 관하여 정확하게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기는 지금 쉽다: E가 N의 정보적 내용에 속하기 때문에, 비(非)-E는 N의 논리적 내용에 속한다: 비(非)-E는 N에 의하여 수반되는데, E가 발견되기 전에 분명히 뉴튼이나 다른 사람에게 또한 알려질 수 없었던 사실이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이 흥미로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흔히 기술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어떤 이론을 제시하거나 어떤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또한 그 이론에 있는 논리적 함의들을 제시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으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저 서술들을.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방금 안 바와 같이, 절망적인 과제이다: 이론의 정보적 내용에 속하며 예견될 수 없는 무가치하지 않은 서술들이 무한히 많고, 그 이론의 논리적 내용에 속하며 정확하게 대응하는 서술들이 무한히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이론이 함의하는 모든 것들이나 그 이론의 완벽한 중요성을 결코 알 거나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논리적 내용에 관한 한, 놀라운 결과이다; 정보적 내용에 대해서 이것이 다소 자연스러운 것으로 판명될지라도. (내가 그것을 여러 해 동안 강의를 하면서 언급했지만, 나는 그것이 인쇄물로 서술된 것을 겨우 한 번만 보았다.)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로 인하여, 어떤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항상 끝없는 과제임이 그리고 이론들은 원칙적으로 점점 더 잘 이해될 수 있음이 밝혀진다. 그로 인하여 또한, 우리가 어떤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이 현존하는 저 문제들과 우리가 특정 순간의 “문제 상황”이라고 지칭할 것인 현존하는 이론들에 대한 그 이론의 논리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임이 밝혀진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또한 앞을 내다보려고 시도한다a: 우리는 우리의 이론에 의하여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a 그러나 그 과제는 무한하여 결코 완성될 리가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앞에서 말하는 정식화가 “단지 직관적이고 아마도 다소 불분명”하다는 것은 이제 설명될 수 있음이 밝혀진다. 이론이 지닌 내용의 무가치하지 않은 무한성으로 인하여, 내가 여기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론의 중요성이 부분적으로 논리적이고 부분적으로 역사 관련 문제로 변환된다. 후자(後者)는, 이론의 내용에 관하여 우세한b 문제 상황에 비추어 특정 시간에 발견된 것에 의존한다: 말하자면c 그것은 이 역사관련 문제 상황을 이론의 논리적 내용에 투사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론을 이론이 지닌 내용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단어들의 여하한 집합이 지닌 의미보다는 다른 이론들에 대한 이론의 관계들에 더 의존하게 만드는 이론이 “의미하는 것”의 (혹은 “중요성”) 적어도 한 가지 의미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들은, 생애 동안 나의 반(反)-본질주의적 훈계로부터 ㅡ 그 자체로 6절에서 서술된 토론의 결과였던 ㅡ 출현한 더 중요한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이다. 한 가지 추가적 결과는, 아주 간단하게, 단어들이나 개념들이나 의미들에서의 정확성 추구는 헛수고라는 깨달음이다. “이 주전자의 가격” 그리고 “30 페니”와 같은 개념들은 통상적으로, 그것들이 사용되는 문제 맥락에 대하여 충분히 정확할지라도 정확한 개념과 같은 것은 (가령, 프레게[Frege]의 의미에서)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30 페니”는 사회적이거나 경제적 개념으로서 매우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 개념은 오늘날 그 개념이 지닌 것과 몇 년 전에는 다른 의미를 지녔었다.)
프레게(Frege)의 견해는 다르다; 이유인즉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는... 대상에 대하여 그 대상이 개념의 영향을 받는지 아닌지를 모호하지 않게 결정해야 한다... 은유를 이용하여 우리는 말할 것이다: 개념에는 예리한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절대적 정확성이 정의된 개념에 요구되기 위하여 그런 정확성은 먼저 정의하는 개념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정의되지 않거나 원초적인 용어들에게 요구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우리의 정의되지 않거나 원초적인 용어들에는 전통적인 의미가 (결코 매우 정확하지 않은) 있거나 그 용어들이 소위 “함축적인 정의들”에 의하여 ㅡ다시 말해서 그 용어들이 이론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통하여 ㅡ 도입되기 때문이다. 그 용어들을 도입하는 이 마지막 방법은a ㅡ 그 용어들이 “도입”되어야 한다면 ㅡ 최선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개념들의 의미가 이론의 의미에 의존하게 되고 대부분의 이론들은 한 가지 이상의 방식들로 해석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함축적으로 정의된 개념들과 그리하여 그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명시적으로 정의되는 모든 개념들은 “모호할”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모호하게 된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모호한 다양한 해석들은 (사영기하학의 점들과 직선들과 같은) 완벽하게 구분될 것이다.a
이것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모호하지 않은” 개념들이나 “예리한 경계선들”을 지닌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분히 확립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열역학 법칙들에 관한 클리포드 A. 트루스델(Clifford A. Truesdell)의 언급과 같은 언급에 놀랄 필요가 없다:“모든 물리학자는 제1 법칙과 제2 법칙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지만... 두 명의 물리학자들은b 그 법칙들에 관하여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용어들의 선택은 어떤 이론의 공리들(公理들: axioms)의 선택이 그런 것처럼 주로 자의적임을 안다. 프레게(Frege)는 이 요점에 관하여 적어도 1892년에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단순한 것에는 합당한 정의(定義: definition)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용어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단순한 개념의 ㅡ
“개념”의 개념 ㅡ 사례로 간주한 것은 그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사례는 그 후 “집합”의 사례로 발전해서 지금은 그 사례를 모호하지 않거나 단순하다고 지칭하는 사람이 없을 터이다.
아무튼 헛수고는 (개념들의 목록의 왼편에 대한 관심을 나는 의미한다) 정말로c 계속되었다.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저술할 때 나는 단어들의 의미들을 추구하는 것은 막 끝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낙관론자였다: 단어들의 의미 추구는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철학의 과제는 의미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점점 더 널리 서술되었고, 이것은 주로 단어들에 있는 의미들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서술의 의미는 적어도 그 서술에 대한 가장 명시적이고 모호하지 않은 언명에서도, 그 서술에 쓰인 단어들의 의미에 의존한다는 (혹은 그 의미의 함수라는) 함축적으로 수용되는 독단을a 진지하게 의문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영국 언어 분석가들에게도 그리고 철학의 과제가 “개념들을 설명하는 행위”라는 다시 말해서 개념들을 정확히 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함에서 카르납(Carnap)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동등하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는 행위”나 “설명되거”나 “정확한” 개념과 같은 것은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더 큰 명징성이 요구된다면, 혹은 의미를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하여 더 큰 정확성이 요구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더 분명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훈계에 비추어 이 질문에 대한 주요 답변은: 명징성이나 정확성을 증대시키려는 움직임은 틀림없이 임시방편적이거나 “단편적”이다. 명징성의 결여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다면, 더 정확한 “개념적 틀”을 세우는 새롭고 더 단단한 토대들을 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발생했거나 당신이 예견할 수 있는 저 오해들을 피할 목적으로 당신의 언명들을 임시방편적으로 재언명하라. 그리고 당신이 오해를 받을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항상 기억하라: 당신을 오해하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더 큰 정확성이 요구된다면 해결될 문제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정확성이 요구된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만 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제들을 취급함에서 장래 이용을 위한 무기고를 준비한다는 강력한 희망으로 당신의 개념들이나 언명들을 더 정확하게 만들려고 미리 애쓰지 말라. 그것들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론이 진화하면 모든 당신의 노력들이 우회될지도 모른다. 나중에 필요하게 될 지성적(知性的: intellectual) 무기들은 누군가가 축적해 두고 있는 무기들과 매우 다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문제 발견 (움직이는 물체들에 대한 전기역학에서의 비대칭들) 이전에, 아인슈타인의 “분석”을 우연히 발견하지 못할 터임은 거의 확실하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조작적 분석[operational analysis]”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여전히 인기 있는 견해를 내가 지지한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그렇지 않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1957년(h)]* 그리고 후속 판본들, II권의 20쪽 참조.)
필요성이 발생하는 대로 명징성이나 정확성이라는 문제들을 다루는 임시방편적 방법은 아마도, 그 방법을 분석과 구분하기 위하여 투석(透析: dialysis)으로 명명될 것이다: 언어분석과 같은 것은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미래 사용을 위한 무기고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개념과 구분하기 위하여. 투석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정의(定義: definition)나 상세설명이나 언어분석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투석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문제들은 새로운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들로 인하여, 때때로 우리가 새로운 구분들을 실행해야 할 ㅡ 다루고 있는 목표를 위하여, 임시방편적으로 ㅡ 필요가 있을 것이다.a
이 긴 일탈로 인하여 나는 나의 주제부터 벗어났는데 나는 이제 그 주제로 돌아가겠다.
8. 결정적인 년도: 마르크시즘; 과학과 사이비과학
내가 상당한 기간 동안 강력하게 느꼈던 것을 매우 분명하게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오랜 병마로 고통을 받던 때인 아마도 1917년인 전쟁의 마지막 지독한 몇 년 동안이었다:b 우리의 유명한 중등학교들에서 (“김나지움[Gymnasium]”과 ㅡ 말하기 끔찍하지만 ㅡ “레알김나지움(Realgymnasium)”으로 불리는) 우리의 스승들이 잘 교육을 받고 학교들을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을지라도, 우리는 충격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 우리의 스승들의 가르침 중 많은 가르침이 극단적으로 지루했다는 것이
ㅡ 많은 시간들 게다가 절망적으로 고문을 가하는 시간들 ㅡ 나에게 새롭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면역이 들었다: 그 이래 나는 지루함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가 학습과 관련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학교에서 우리는 적발되기 쉬웠다: 우리는 집중하도록 강요당했다. 나중에 교사가 지루하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들로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흥미롭고 참으로 고무적인 스승님을 경험한 단 한 가지 과목이 있었다. 그 과목은 수학이었고 담당교사의 성함은 필립 프로이트(Philipp Freud)였다 (그분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친척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개월 이상을 병을 앓은 후에 내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 심지어 수학에서도 나의 반은 진도를 나가지 못했음을 나는 발견했다. 이로 인하여 나는 계몽되었다a: 그로 인하여 나는 학교를 떠나려고 열심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 1차 세계대전의 결과, 기근, 비엔나에서의 굶주림으로 인한 폭동들과 통제 불가능한 물가상승이 자주 서술되었다. 그것들은 내가 성장한 세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끝난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냉혹하고 격렬한 내전 기간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16살이 넘었고 그 변혁으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변혁을 고취하게 되었다. 나는 1918년 말에 학교를 떠나서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처음에 청강생이었던 비엔나 대학에 등록했는데 1922년까지 입학시험을 (“마투라[Matura]”)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나는 청강생이 되었었다. 장학금은 없었지만 대학 등록금이 아주 소액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어떤 강좌 과정도 들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격변은 아닐지라도 격변의 시대였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선포에 즈음하여 의회 건물로 통하는 계단의 꼭대기에 모인 임시정부 구성원들에게 군인들이 총질할 때 나는 충분히 가까이서 총탄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 경험으로 인하여 나는 자유에 관한 논문을 썼다.) 먹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입을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 대부분은 민간용으로 버려져서 개조된 군복만을 입을 수 있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진지하게 취업을 생각하지 않았다 ㅡ 취업 자리가 없었다 (아마도 은행에서만 빼고; 그러나 상업계에서의 취업에 대한 생각은 나의 머리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우리는 취업을 위하여 공부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was an eye-opener인데 박중서 번역에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어서’로 번역되었다.
것이 아니라 공부를 위한 공부를 했다. 우리는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를 토론했다.
세 가지 주요 정당들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반(反)-사회주의적 정당 두 곳인 독일 민족주의자들 (당시 세 가지 주요 정당들 중 가장 작고 나중
에 나치들에게 흡수된)a 그리고 반(反)-사회주의적이었을지라도 자체를 “기독교적” 및 “사회적”으로 (christlich-sozial) 지칭한 사실상 로마교회의 정당 (오스트리아에는 다수의 로마가톨릭신자들이 있었다). 그 다음에 작은 공산당이 있었다. 나는 중등학교의 사회주의 학생연합의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의 회원이 되어 그들의 모임에 나갔다. 나는 사회주의 대학생들의 모임에도 나갔다. 이 모임들에서 연사들은 때때로 사회민주당에 그리고 때때로 공산당에 속했다. 그들이 지닌 마르크스주의적 신념들은 당시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땅하게, 전쟁의 공포를 길게 이야기했다.b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전쟁을 종식시킴에 의하여 러시아에서 자신들의 평화주의를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평화는 자신들이 주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저 특정 시기에 그들은 평화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들의 정치선전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반대했다.c 주로 나의 친구 아른트(Arndt)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나에게 말할 바 때문에 나는 한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의심했다. 그러나 1919년 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선전에 의하여 전향했다. 약 2~3개월 동안 나는 공산주의자로 자처했다.
나는 곧 환멸을 겪을 수 있었다. 내가 공산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그리고 내가 곧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된 사건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 사건은 나의 17살 생일 바로 전에 발생했다. 비엔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고 비엔나 중부 경찰서에서 구금되어 있던 몇몇 공산주의자들의 탈주를 도우려고 했던 비무장 젊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총격이 발생했다. 젊은 사회주의자가 공산주의자 노동자들 몇 명이 살해되었다. 나는 경찰의 잔인성에 공포와 충격을 받았지만 나 자신에 의해서도 공포와 충격을 받았다. 이유인즉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 비극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의 한 부분이 있다고 ㅡ 적어도 원칙적으로 ㅡ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도래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계급투쟁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 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혁명으로 인하여 몇몇 희생자들이 생길지라도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사회주의적 혁명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저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ㅡ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의 한 부분. 당시 나는 그런 계산이 “과학”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을지를 자문했다. 전체 경험과 특히 이 문제로 인하여 나는 일생 혐오감을 느꼈다.
공산주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신조이다. 공산주의는 지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역사 관련 발전 법칙들에 대한 지식. 나는 덜 폭력적이고 더 공정한 세상인 더 나은 세상을 여전 희망했지만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지 ㅡ 내가 생각했던 것이 혹시 가식이 아니었는지 ㅡ 의심했다. 나는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읽었지만 내가 실제로 그것을 이해했던가? 우리가 다소 멀리 떨어진 목적에 의하여 그 수단을 정당화하는 신조를 수용하기 이전에 우리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바와 같이 나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는가?
내가 복잡한 이론을 다소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이론과 관행에서 오류였던 것을 실제로 상당히 주지했음을 자인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억눌렀다 ㅡ 부분적으로 나의 친구들에 대한 우정 때문에, 부분적으로 “명분”에 대한 충심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점점 더 자신을 깊이 빠지게 만드는 행동방식이a 있었기 때문에: 무가치한 요점에 관하여 우리가 우리의 지성적 양심을 희생하자마자 우리는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b; 자신에게 명분의 근본적인 선함을 확신시킴에 의하여 우리는 자기-희생을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데, 그 명분의 선함은 요구되는 작은 도덕적이거나 지성적 타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도덕적이거나 지성적인 모든 희생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우리는 추가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명분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지성적인 투자를 기꺼이 지지하게 된다. 그것은 돈을 낭비하고 좋다고 또 낭비하는 것과 같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a mechanism인데 박중서 번역에 ‘공산주의 특유의 메커니즘’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주절 원문은 one does not wish to give in too easily인데 박중서 번역에 ‘더
이상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이 행동방식이 나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알았고 그래서 나는 공포에 질렸다. 나는 그 행동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특히 나의 공산주의자a 친구들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하
여 나는 나중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터인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위험한 신조를 무비판적으로, 독단적으로 수용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인하여 나는 먼저 회의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나는, 겨우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모든 합리주의에 반발했다. (내가 나중에 발견한 바와 같이, 이것은 실망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전형적인 반발이다.)
내가 17살이 되었을 때쯤 나는 반(反)-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그 신조의 독단적인 특징과 그 신조의 불가해한 지성적 오만을 깨달았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독단을 위하여 혹은 아마도 실현불가능으로 판명될 꿈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의무로 만드는 일종의 지식을 사칭하는 것은 지독한 일이었다. 그것은 특히 읽고 사고할 수 있는 지식인에게 나빴다. 그런 함정에 빠진 것은 지독하게 암울한 일이었다.
내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자마자,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있던 결함들과 허점들과 모순들이 명백해졌다. 그 이론의 핵심적인 요점을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및 독재와 관련하여 생각하라: 프롤레타리아가 누구였는가?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 공산주의자들을 다수가 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공장노동자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다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작은 소수였고 분명히 그것은 다른 곳에서도 동일했다.
마르크스의 논증의 핵심을 내가 파악했다고 내가 확신하기까지 나는 몇 년을 공부했다. 그것은, 다음 도덕적 법칙에 함축적으로 호소함과 결합하여, 역사 관련 예언으로 구성된다: 불가피한 것이 실현되도록 도우라! 심지어 당시에도 나에게는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비판을 출판할 의도가 없었는데 이유인즉 오스트리아에서의 반(反)-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나빴기 때문이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반(反)-마르크스주의는 나중에 파시스트로 명명된 저 권위주의적인 운동들과 매우 근사하게 동일했다. 물론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했다. 그러나 내가 서술한 것을 출판할 의도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6년 후인 1935년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권의 서적이 ㅡ 역사주의의 빈곤(The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communist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Poverty of Historicism)과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ㅡ 1935년과 1943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당시에 (틀림없이 1919년이나 1920년) 나를 구역질나게 만든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나의 마르크스주의자 친구들과 동료 학생들 중 몇몇이 보여준 지성적 건방짐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자 계급의 미래 지도자들임을 거의 당연시했다. 내가 알고 있던 바, 그들에게는 지성적으로 자격이랄 게 없었다. 그들이 주장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조금 안다는 것이었다 ㅡ 심지어 완벽한 지식이 아니고, 틀림없이 비판적인 지식이 아닐지라도. 육체노동자의 삶에 관하여 그들 대부분은 내가 지닌 지식보다 지식이 적었다. (나는 적어도 공장에서 전쟁 동안 몇 개월 일했다.) 나는 그 태도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가 크게 특권을 누렸다고 ㅡ 정말로 자격 없이 그렇게 ㅡ 내가 느껴서 나는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또한 정당 정치에서 영향력을 결코 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실제로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몇 번 시도했다. 콘크리트로 굳은 도로 표면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곡괭이로 파내기 위하여 필요한 체력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에 나의 두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나의 마지막 시도는 캐비넷 제작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지 않았지만 문제는 나의 흥미를 끈 특정 사변적 개념들이 나의 작업에 끼어든 것이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얼마나 비엔나의 노동자들의 위대한 운동을 ㅡ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의하여 지도되는 ㅡ 찬양했는지 말할 장소이다 ㅡ 그들의 사회 민주주의적 지도자들이 지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를 치명적으로 오류인 것으로서 내가 간주했을지라도. 그들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임무에 대하여 놀라운 신념을 불어넣을 수 있었는데 그 신념은 다름 아닌 그들이 믿는 바, 인류의 해방이었다. 사회 민주주의적 운동이 주로 무신론적이었을지라도 (자신들을 종교 사회주의자들로서 서술하는 작고도 찬양 받을만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운동 전체는 열렬한 종교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신념으로서 서술될 수 있을 따름인 것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을 해방하고 그리하여 인류를 해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내도록. 노동자들의 제한된 여유 시간에 젊고 늙은 많은 노동자들이 공개강좌나 “인민대학(Volkshochschulen)”의 한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기-개발에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자녀 교육에도 그리고 주택개량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칭찬 받을만한 프로그램이었다.a 아마도 간간히 우월감 표시를 드러내는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술 대신 산행을, 스윙음악(swing) 대신 고전음악을, 모험소설 대신 진지한 저서들을 찾았다. 이 활동들 모두는 평화로웠고 파시즘과 잠재적인 내전의 분위기에서도 계속되었다b; 그리고 또한 매우 불행하게도,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적 방식들을 포기하고 폭력을 사용하라는 노동자 지도자들로부터 나오는 반복적이고 혼잡한 위협들의 ㅡ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호한 태도에서 나온 유산 ㅡ 분위기에서도. 이 위대한 운동과 그 운동이 파시즘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파괴됨에 의하여 몇몇 영국과 미국의 관찰자들에게 (예를 들어, G. E. R. 게디[Gedye]) 깊은 인상이 남았다.
심지어 내가 마르크시즘을 배척한 이후에도 나는 몇 년 동안 사회주의자로 남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자유와 결합된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일 터이다. 이유인즉 평등한 사회에서 겸손하고,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아름다운 꿈으로만 인식하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자유가 평등보다 더 중요한다는 것; 평등을 이룩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자유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자유가 실종되면 자유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심지어 평등도 없을 것이라는 것.
마르크시즘과 조우한 것은 나의 지성적 발전에서 주요 사건들 중 한 가지 사건이었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내가 잊은 적이 없는 몇 가지 교훈들을 나는 배웠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소크라테스의 말인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의 지혜를 나는 배웠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나는 오류가능주의자가 되었고 지성적인 겸손이라는 가치가 나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나는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의 차이점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조우와 비교되어,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적 심리학”과 그리고 프로이트적 심리분석과의 ㅡ 다소 동시대적이었던 (그것 모두는 1919년에 출현했다) ㅡ 나의 조우의 다소 유사한 형태는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 연도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일이 한 사람의 지성적 발전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이유인즉 동시에 나는 아인슈타인에 관하여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나의 사고는 지배적인 영향을 ㅡ 종국적으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영향 ㅡ 받았다. 1919년 5월에 아인슈타인의 일월식에 대한 예측들은 두 단체의 영국 원정대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시험되었다. 이 시험들과 동시에 새로운 중력이론과 새로운 우주론이, 단순한 가능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뉴튼 이론에 대한 실제적인 향상으로서도 ㅡ 진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 ㅡ 별안간 나타났다.a
아인슈타인은 비엔나에서 강좌를 열었는데 그 강좌에 나는 참석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만을 기억한다. 이것은 완전히 나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뉴튼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역학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리들로서 나란히 수용되는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역학의 과학(The Science of Mechanics)에서 마흐(Mach)도, 거기서 그는 뉴튼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는데, 뉴튼의 법칙들을 ㅡ 관성의 법칙을 포함하는데 그 법칙에 관하여 그는 새롭고 매혹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ㅡ 유지했다. 그리고 그가 비-뉴튼적 이론의 가능성을 정말로b 고려했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시작할 수 있기 이전에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기다려야 할 터라고 그는 생각했고 그 새로운 경험은 아마도, 우리 자신의 태양계에서 발견될 수 있을 터인 것보다 더 빠르고 더 복잡한 운동들을 포함하는 우주의 영역들에 관한 물리적이거나 천문학적인 지식으로 나올 것이다. 헤르츠(Herz)의 역학도, 자체의 표현에서 제외하고, 뉴튼의 역학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았다.
뉴튼의 이론에 있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전제는 물론, 해왕성의 발견에서 정점을 이루며 자체의 결과가 믿을 수 없는 성공이었다. 뉴튼의 이론이 반복적으로 자체가 설명하기 시작한 경험적 재료를 수정했기 때문에 (내가 나중에 설명한 것과 같이) 그 성공은 그렇게 인상적이었다.c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경험들을 기다리지 않고도 실제적인 대안이자 더 좋은 이론으로 보였던 것을 창안하는 데 성공했다. 뉴튼 자신처럼, 그는 우리 태양계 내부의 (그리고 또한 외부의) 새로운 효과들을 예측했다. 그리고 이 예측들 중 몇 가지 예측들은 시험되었을 때 당시 성공적으로 증명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뛰어난 수학도였던 나의 친구 막스 엘슈타인(Max Elstein)에 의하여 이 개념들을 소개받았는데 그는 1922년에 2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실증주의자가 아니었고 (아인슈타인이 당시와 그 후 몇 년 동안 그랬던 것과 같이) 그리하여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객관적인 면모들을 강조했다: 장-이론적(field-theoretical) 접근방식; 전기역학과 역학 그리고 그것들의 새로운 연계; 그리고 새로운 우주론이라는 ㅡ 확정적이지만 무한한 우주 ㅡ 놀라운 개념. 그 개념이 뉴튼 이론을 매우 훌륭한 근사치로서 격하시켰다는 것을, 아인슈타인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주요 논증들 중 하나의 논증으로서 간주했다는 사실을 그는 나에게 주지시켰다a; 또한, 자신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나은 근사치라고 확신했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훨씬 더 일반적인 이론을 향한 한 단계로서 간주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아가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심지어 일식 관찰 이전에 아인슈타인의 이론보다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론이 제시된 저서를 (공간, 시간, 물질b[Raum, Zeit, Materie], 1918년) 이미 발간했다는 사실.
의심의 여지 없이 아인슈타인은, 또 다른 문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할 때, 이 모든 것을 그리고 특히 자기 자신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리 이론이 보다 포괄적인 이론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켜야 한다는 것보다 물리 이론을 위하여 더 공평한 운명은 있을 리 없을 터이고 그 포괄적인 이론 안에서 물리 이론은 제한하는 경우로서 계속 살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자신의 이론이 특정 시험들에서 실패한다면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서 자신이 간주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 자신의 명백한 서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중력 포텐셜(gravitational potential)에서 기인하는 스펙트럼선들의 적색편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들러(Adler)의 독단적인 태도와 전혀 다른 태도가 여기에 있었고 그들의 추종자들과 태도와 훨씬 다른 태도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예언들과의 일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론이 전혀 확립되지 않을 터인 결정적인 실험들을 찾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강조한 바와 같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론은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질 터인 반면.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진정한 과학적 태도였다. 그 태도는, 자체가 가장 좋아하는 이론들에 대한 “검증들”을 발견했다고 부단히 주장하는 독단적 태도와 전혀 달랐다.
그리하여 나는 1919년 말경에, 과학적인 태도는 비판적인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 비판적인 태도는 검증들이 아니라 결정적인 시험들을 찾았다; 시험들로 인하여 이론이 확립될 수 없을 터일지라도 시험되는 이론을 반증할 수 있을 터인 시험들.
9. 초기 연구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월이 나의 친구들 대부분에게 그리고 또한 나 자신에게 혹독했을지라도, 고무적인 시간이었다. 우리가 행복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전망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우리는, 내전이 때때로 심각하게 발발하면서 만연하는 매우 가난한 나라에서 살았다. 우리는 자주 절망했고 용기를 잃었으며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고 있었고 우리의 정신은 능동적이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독서에 탐닉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논쟁을 벌이고, 우리의 견해를 바꾸고,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거르고, 사고하고. 우리는 음악을 들었고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의 산들로 도보여행을 했으며 더 좋고 더 건강하고 더 단순하고 더 정직한 세계를 꿈꿨다.
1919-20년 겨울 동안 나는 집을 떠나 학생들에 의하여 극도로 원시적인 학생기숙사로 개조된 이전 군병원의 미사용처에 살게 되었다. 나는 독립하고 싶었고 나는 나의 부친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나의 부친은 환갑이 훨씬 지났고 전쟁 이후의 극심한 통화팽창 속에서 자신이 저축한 것을 모두 잃었다. 나의 양친은 내가 집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을 터이다.
나는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의 어린이 진료소에서 무보수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당시 거의 무보수로 다른 비정규적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들 중 어떤 일은 힘들었다 (도로건설). 그러나 나는 몇몇 미국 대학생들을 지도했는데 그들은 매우 마음이 넓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없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았고 나는 흡연도 하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때때로 얻기 어려운 유일한 필수품들은 음악회 입장권들이었다. 입장권들은 값이 쌌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면),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지출되는 돈이었다.
대학에서 나는 다양한 과목들에서 강좌들을 시험 삼아 들었다: 역사, 문학, 심리학, 철학 그리고 심지어 약학대학에서의 강좌들. 그러나 나는 곧, 수학과 이론물리학 강좌들을 제외하고, 강좌 듣기를 포기했다. 당시 대학에는 매우 유명한 교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저서를 읽는 것이 그들의 강좌를 듣는 것보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경험이었다. (학술회의들은 고학년생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나는 또한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과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를 싸우다시피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수학과만 실제로 매혹적인 강좌들을 제공했다. 당시 교수들은 비르팅거(Wirtinger), 푸르트벵글러(Furtwängler) 그리고 한스 한(Hans Hahn)이었다. 세분 모두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창조적인 수학자들이었다. 비르팅거(Wirtinger)는, 수학과 소문에 따르면 세분 중 가장 뛰어난 천재로 간주되었는데, 내가 따라가기 어려웠다. 푸르트벵글러(Furtwängler)는 그의 담당과목들에 (대수학과 수이론) 관한 명징성과 정통함에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한스 한(Hans Hahn)으로부터 대부분을 배웠다. 그의 강좌들은, 내가 다시 또 만나보지 못한 일종의 완벽성에 도달했다. 강좌 각각이 예술작품이었다: 논리적 구조에서 극적이었다; 한마디 말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다; 완벽한 명징성을 지녔다; 그리고 아름답고 문명화된 언어로 전달되었다. 주제와 때때로 토론되는 문제들은 흥미로운 역사적 개괄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모든 것이 바로 완벽함 때문에 다소 냉담했지만 모든 것에 생명력이 있었다.
또한 도첸트 헬리(Dozent Helly) 교수가 계셨는데 그는 확률이론에 관하여 강의했고 그로부터 나는 리하르트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나중에 잠깐 동안 매우 젊고 매력적인 교수 쿠르트 라이데마이스터(Kurt Reidemeister)가 독일에서 왔다; 나는 텐서 대수(tensor algebra)에 관한 그의 강의들에 출석했다. 이 사람들 모두는 ㅡ 아마도 라이데마이스터(Reidemeister)는 제외되는데 그는 강의 중 질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ㅡ 반(半)은 신(神)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무한히 멀리 있었다. 교수들과 철학박사 논문을 쓸 자격이 없는 학생들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들과 알고지낼 욕심도 없었고 장래에 그럴 욕심도 없었다. 나중에 내가 틀림없이 한(Hahn), 헬리(Helly), 폰 미제스(von Mises) 그리고 한스 티링(Hans Thirring)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리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았고 한스 티링은 이론물리학을 가르쳤다.
나는 단지 배우고 싶었고 수학에서 우리가 진리의 기준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배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느꼈기에. 수학은 거대하고 어려운 과목이었고 전문적인 수학자가 되는 것을 내가 생각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곧 실망했을 터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다. 내가 미래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어느 날 젊은이들이 지루함 없이 배울 수 있을 터이어서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문제들을 토론하도록 자극을 받을 터인 학교를 설립한 것을 나는 꿈꿨다; 제시되지 않은 질문들에 대한 원하지 않는 답변들을 들을 필요가 없을 터인 학교; 사람들이 시험에 합격할 목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학교.
나는 1922년에 내가 학교에 다녔더라면 합격했을 것보다 1년 늦게 “입학시험(matura)”에 합격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실험은 내가 “잃어버린” 1년의 가치가 있었다. 이제 나는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2년 후 나는 교육대학에서 두 번째 “입학시험(matura)”에 합격했는데 그로 인하여 나는 초등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캐비넷 제조를 배우는 동안 나는 이 시험을 치렀다. (나중에 나는 수학, 물리학 그리고 화학 중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했다.) 그러나 교직 자리가 없어서 캐비넷 제조자 훈련을 마친 다음에 내가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활동가가 (Horterzieher) 되었다.
이 시기 초에 나는 과학이론들과 (아인슈타인의 과학이론들과 같은) 사이비과학 이론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들러의 이론들과 같은) 사이의 구획설정에 관한 나의 개념들을 추가로 전개했다. 이론이나 서술을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몇몇 가능한 사건들의 발생을 제외하거나 배제하는 ㅡ 이 사건들의 발생을 예방하거나 금지하는 ㅡ 것임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이론이 많이 금지할수록 그 이론은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준다.
이 개념이, 이론이 지닌 “정보성 내용”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후자(後者) 개념을a 매우 간략하게 포함할지라도, 나는 당시에 이 정도를 넘어 전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에 대한 독단적 사고의 관계라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나의 흥미를 끈 것은, 독단적 사고는 내가 과학 이전의 사고로 간주했는데 비판적 사고가 가능하려면 필요한 한 단계라는 개념이었다. 비판적 사고에는 자체에 앞서서 비판할 것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틀림없이 독단적 사고의 결과이다.
여기서 나는 구획설정이라는 문제와 나의 해결책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더 하겠다.
(1) 나에게 먼저 떠오른 것과 같이, 구획설정이라는 문제는 형이상학으로부터 과학을 구획설정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이비과학으로부터 과학을 구획설정으로 구분하는 문제이다. 당시 나는 형이상학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나의 “구획설정의 기준”을 형이상학까지 확대한 것은 나중의 일일 뿐이다.
(2) 1919년의 나의 주요 개념을 이랬다. 누군가가 과학이론을 제시한다면 그는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바와 같이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 나는 나의 이론이 옹호될 수 없다고 인정할 터인가?” 다시 말해서, 상상 가능한 어떤 사실들을 나는 나의 이론에 대한 반증들이나 오류판정들로 수용할 터인가?
(3)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자기들이 사회학 과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학파들의 심리분석가들이 상상 가능한 여하한 사건을 자신들의 이론들에 대한 검증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과 함께, 시도되었지만 반증으로서 성공하지 못한 반증들만 “검증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나는 다다랐다.b
(4) 나는 여전히 (2)를 지지한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나는 어떤 이론에 대한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혹은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 개념을 잠정적으로 도입했다. 비판에 대항하여 모든 이론은 “면역처리 될(immunized)” (이 탁월한 용어는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에게서 유래한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곧장 발견했다. 우리가 그런 면역처리를 허용한다면, 모든 이론은 오류로 판정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면역처리들을 배제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모든 면역처리들을, 심지어 임시방편적인 보조적 가설들을 도입한 모든 면역처리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또한 깨달았다. 예를 들어 천왕성의 관찰된 움직임은 아마도 뉴튼 이론에 대한 오류판정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대신 외부 행성에 대한 보조적 가설이 임시방편적으로 도입되어 그 이론을 면역처리 했다. 이것은 다행으로 판명되었다; 이유인즉 그 보조적 가설은, 시험하기가 어려울지라도, 시험될 수 있어서 그 가설은 시험들을 성공적으로 견디어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의 독단은 심지어 과학에서도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말해서 오류판정 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은 매우 예리한 기준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 후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이 문제를 매우 충실하게 다루었다. 나는
시험가능성의 등급들(degrees of testability)을 도입했고 이것들은 내용과 (내용의 등급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내용의 증가는, 우리가 어떤 보조가설을 잠정적으로 채택해야 하는지 채택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1934년의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분명하게 서술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전설들이 나의 견해들에 관하여 전파되었다. (그 전설들은 여전히 전파된다.) 먼저 내가 오류판정 가능성을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라기보다는 의미 기준으로 도입했다는 것. 두 번째 면역처리는 항상 가능함을 내가 알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론들은 모두 오류판정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이론도 “오류판정 가능한”으로서 서술될 수 없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내가 간과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이 얻은 결과들은, 이 전설들에서, 나의 접근방식을 배척하는 데 대한 이유들로 둔갑했다.
(5) 일종의 요약으로서, 사례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론체계들의 다양한 유형들이 어떻게 시험가능성과 (혹은 오류판정 가능성) 면역처리 절차들에 관련되는지 밝히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a) 순전히 실존적 특징을 지닌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특히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토론된) 있다.
(b) 프로이트, 아들러(Adler)와 융(Jung)의 정신분석적 이론들과 같은 혹은
(충분히 모호한) 점성술적 학문과 같은 이론들이 있다.
(a)와 (b)는 오류로 판정될 수도 없고 시험될 수도 없다.
(c) “모든 백조들은 희다”나 지구중심적인 “행성들을 제외한 모든 별들은 원운동을 한다”와 같이 우리가 아마도 “세련되지 못한” 이론들로 지칭할 것들이 있다. 케플러의 법칙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 법칙들이 많은 의미들에서 고도로 정교하다할지라도a). 오류판정이 물론 회피될 수 있을지라도 그 이론들은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면역처리는 항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 회피는 통상적으로 솔직하지 못할 터이다: 그 회피는, 가령, 검은 백조는 백조였다 혹은 검은 백조는 검었다를 부인하는 것을 필수적인 부분으로 지닐 터이다; 혹은 비-케플러적 행성은 행성이다를 부인하는 것.
(d) 마르크시즘의 경우는 흥미롭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에서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이론이 러시아 혁명 동안에 발생한 사건들에 의하여 반증된 것으로서 우리는 간주할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혁명적인 변화들은 말하자면 바닥에서 시작된다: 생산수단이 먼저 변하고 그다음에 생산에 관한 사회적 조건들이 그다음에는 정치권력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념적인 신념들인데 그 신념들은 마지막에 변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서 정치권력이 먼저 변했고 그다음에 이념이 (독재와 전화[電化: Electrification]) 상부에서부터 사회적 조건들과 생산수단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오류판정을 회피하려는 마르크스 이론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추가적 공격으로부터 그 이론이 면역처리가 되고 그 이론은, “경제적 동기”와 계급투쟁이 사회생활에 퍼진다고 우리에 알려주는 통속-마르크스주의적 (혹은 사회분석적) 이론으로 변하게 되었다.
(e)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들과 같이 보다 추상적인 이론들이 있다. 그 이론들은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ㅡ 가령, 예측된 섭동들(攝動들: perturbations)을 발견하지 못함에 의해서나 혹시 태양 일식 관찰들을 대체하는 레이더 시험들의 부정적 결과들에 의하여. 그러나 그 이론들의 경우에 첫 인상으로 나타나는 오류판정은 회피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흥미롭지 못한 면역처리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천왕성-해왕성 종류의 경우에서와 같이 시험될 수 있는 보조 가설들의 도입에 의하여 이론체계의 경험적 내용이 ㅡ 원래 이론에 보조가설을 덧붙여 구성되는 ㅡ 원래 이론의 경험적 내용보다 더 커지는. 우리는 이것을 정보적 내용의 증가로서 ㅡ 우리의 지식에서 증가의 경우로서 ㅡ 간주할 것이다. 물론 회피적인, 면역처리 하는 움직임들일 따름인 보조가설들이 또한 있다. 그 보조가설들은 내용을 감소시킨다. 이 모든 것은, 내용을 감소시키는 책동들을 (혹은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의 언어사용법으로 “퇴행적 문제 변환들[degenerating problem shifts]”을) 감수하지 못하는 방법론적 규칙을 암시한다.
10. 두 번째 일탈: 독단적 및 비판적 사고; 귀납 없이 학습하기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동물심리학 분야에서 탁월한 이론을 세운 분인데 그 이론을 그는 “각인(刻印: imprinting)”으로 부른다. 그것은, 어린 동물들에게는 확고부동한 결론들로 도약하는a 선천적인 작동장치(mechanism)가 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새로 태어난 새끼거위는 자체가 목격한 최초로 움직이는 물체를 자체의 “어미”로서 받아들인다. 이 작동장치는, 새끼거위에게는 다소 위험할지라도, 정상적인 상황들에서 잘 적응된다. (이 작동장치는, 우리가 로렌츠로부터 배우는 바와 같이, 선택된 양부모에게도 또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들에서는 성공적인 작동장치이다; 그리고
완전히 정상적이 아닌 어떤 상황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렌츠의 “각인”에 관한 다음 요점들이 중요하다:
(1) 그것은 관찰에 의한 학습의 과정이다 ㅡ 유일한 과정은 아니다.
(2) 관찰의 자극 하에서 해결되는 문제는 타고난다; 다시 말해서 새끼거위는 자체의 어미를 찾도록 유전적으로 조건이 주어진다: 새끼거위는 자체의 어미를 보리라 기대한다.
(3)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이나 기대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나거나 유전적으로 조건이 주어진다: 그 이론이나 기대는 실제적인 관찰을 멀리 넘어서는데, 실제적인 관찰은 (말하자면) 주로 생명체에서 수행되는 이론을 방출하거나 촉발할 따름이다.
(4) 학습 과정은, 특정 시간의 양이 (짧은 시간) 걸리겠지만, 반복적이 아니고 흔히 생명체의 편에서 어떤 활동이나 “노력”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그 과정은 정상적으로 조우되는 상황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황을 포함한다. 그런 반복적이지 않은 학습 과정들에 대하여 나는, 그 과정들이 “비귀납적”이라고 말하겠는데 반복을 “귀납”의 특징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학습의 이론은 지시적[instructive] 학습으로 라마르크적[Lamarckian]인 반면, 비반복적인 학습의 이론은 선택적[selective]이나 다윈적[Darwinian]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언어사용법과 관련된다: 누군가가 각인(imprinting)을 귀납적 과정으로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나는 나의 용어사용법을 바꿔야 할 뿐이다.
(5) 관찰 자체는 자물쇠에서 열쇠를 돌리는 것과 같은 역할만 한다. 관찰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고도로 복잡한 결과가 거의 완벽하게 사전에 형성된다.
(6) 각인(imprinting)은 학습의 비가역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각인은 수정이나 개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내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알텐베르크[Altenberg]에서 소년으로서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 우리에게는 공동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을지라도) 1922년에 나는 그의 이론들에 대하여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여기서 각인(imprinting) 이론을 나 자신의 추측을 설명하는 수단으로서만 이용하겠는데 나 자신의 추측은 유사하지만 달랐다. 나의 추측은 동물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C. 로이드 모건[Lloyd Morgan]에게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H. S. 제닝스[Jennings]에서는 더 많이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인간들, 특히 어린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추측은 이랬다.
대부분의 (혹은 아마도 모든) 학습 과정들은 이론 형성을 본질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기대들의 형성을. 이론이나 추측의 형성에는 항상 “독단적”이고 흔히 “비판적” 단계가 있다. 이 독단적 단계에는, 각인(imprinting)과 함께, 특징 (2)와 (4) 그리고 때때로 (1)과 (5)도 있지만 보통 (6)은 없다. 비판적 단계는, 기대들이 실망이나 반증으로 끝나서 압력을 받아 독단적 이론을 포기하는 것을 그리고 다른 독단들을 시험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때때로 독단이 아주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서 어떤 절망이 와도 그 독단이 흔들릴 수 없는 것을 나는 주목했다. 이 경우에 ㅡ 비록 이 경우만일지라도 ㅡ 독단적인 이론은 각인(imprinting)에 근접하는데 각인(imprinting)에 관하여 (6)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나는 (6)을 일종의 신경증적 정신착란으로서 간주하고 싶었다 (내가 신경증에 흥미가 없었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시작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발견의 심리학이었다.) (6)을 향한 이 태도로 인하여,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마도 각인(imprinting)과 관련이 있을지라도 각인과 달랐음이 밝혀진다.
이론a 형성에 관한 이 방법을 나는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 방법으로서 간주했다. 그러나 내가 이론적 독단의 형성을 “시행”으로 명명했을 때, 나는 무작위적인 시행을 의미하지 않았다.
시행과 착오의 과정에서 시행들의 무작위성이라는 (혹은 그 반대) 문제를 고찰하면 다소 흥미롭다. 간단한 산술적 사례들 들자: 그 구구단을 우리가 암기하지 못하는 어떤 수에 (가령, 74856) 의한 나눗셈은 통상적으로 시행착오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행들이 무작위임을 의미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7과 8에 대한 구구단을 우리가 정말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무작위로 선택하는 방법에 의하여 10개의 자리수 0, 1,... 9중 하나를 나누기 위하여 그리고 실수의 경우에 동일한 무작위 절차에 의하여 나머지 9개의 숫자들 중 하나를 (오류 숫자는 제외되고) 나누기 위하여 컴퓨터를 프로그램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보다 체계적인 절차보다 열등할 터이다: 적어도 우리는, 선택된 숫자가 너무 작기 때문에 혹은 그 숫자가 너무 크기 때문에 컴퓨터의 최초 시행이 오류인지를 컴퓨터가 의식하도록 만들어서 두 번째 선택을 위한 숫자들의 범위를 줄여야 한다.
이 사례에 무작위라는 개념이 원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긴 나눗셈에서의 모든 단계에는 잘 정의(定義)된 가능성들의 (한 자리 숫자들) 집합으로부터 수행되는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의 동물학적 사례들 대부분에서 가능한 반응들의 (여하한 정도의 복잡성을 띤) 범위나 집합은 사전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 범위의 원소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률들을 그 원소들에 귀속시킬 수 없지만 명확한 의미에서 우리가 무작위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터이다.
그리하여 얼마간의 재능으로써 무작위 개념이 적용될지도 모르는 고도로 인위적인 조건들을 (쥐를 실험하기 위한 미로) 우리가 구축할지라도, 시행착오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혹은 보통 무작위적인 시행들로써 작동한다는 개념을 우리는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그 개념의 적용가능성만으로는 물론, 시행들이 사실상 무작위적이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컴퓨터는 숫자들을 선택하는 더 체계적인 방법을 이롭게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미로를 달리는 쥐는 또한 무작위적이 아닌 원칙들에 근거하여 움직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행착오의 방법이 적응의 문제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에 (가령, 미로에) 적용되는 여하한 경우에, 시행들은 통상적으로 문제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거나 문제에 의하여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다; 또한 시행들은 행운의 우연이 아니라면 문제의 (알려지지 않은) 해결책을 예상할 수 없다. D. T. 캠벨(Campbell)의 용어사용법으로, 시행들은 틀림없이 “맹목적”이라고 (나는 아마도 시행들이 틀림없이 “문제의 해결에 맹목적”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시행 ㅡ 독단에 상응하는 ㅡ 이후에 그 시행이 운 좋은 추측이었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시행으로부터가 아니라 오류 제거 방식인 비판적 방식으로부터이다; 다시 말해서 시행이 제거되는 것을 당분간 피할 정도로, 다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히 성공적이었는지a.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들은, 문제가 요구하는 것들에 항상 전적으로 맹목적인 것을 아니다: 문제로 인하여 흔히, 시행들이 선택되는 범위가 (한 자리 숫자들의 범위와 같은) 결정된다. 이것은 다비트 카츠(David Katz)에 의하여 잘 서술된다: “굶주린 동물은 환경을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양분한다. 도망치는 동물은 도피하는 길과 은신처를 본다.” 게다가 문제는 시도들이 성공하는 데 따라서 다소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범위가 좁혀질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경우들도, 특히 인간의 수준에서 또한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전제된 범위의 한계들을 타개하는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들. 이 경우들은, 범위의 선택 자체가 시도일 것임을 (무의식적인 추측) 그리고 비판적 사고는 특정 시행이나 추측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깊은 추측으로서 서술될 것을 ㅡ “가능한 모든 시행들”의 범위라는 전제 ㅡ 본질로 삼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 사고의 많은 경우들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창조적 사고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문제에 대한 흥미의 강도(剛度: intensity)와 별도로, 덜 창조적인 사고가 자신의 시행들을 선택하는 범위의 한계들을 타개하는 ㅡ 혹은 범위를 변화시키는b ㅡ 능력이다. 이 능력은 분명히 비판적 능력인데 비판적 상상력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그 능력은 흔히 문화충돌의 결과, 다시 말해서, 개념들 사이의 혹은 개념들로 이루어진 체제들(frameworks) 사이의 충돌 결과이다. 그런 충돌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상상력의 일반적인 한계들을 타개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급들은, 창조적 사고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과학적 발견에 대하여 심리적 이론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그들이 찾는 것은 성공적인 사고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사고에 대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은 충족될 수 없다고, 그리고 그 요구는 창조적 사고에 대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공은 많은 것들에 ㅡ 예를 들어 행운에 ㅡ 좌우된다. 성공은 유망한 문제를 만나는 것에 좌우될 것이다. 성공은 기대되지 않은 것에 좌우된다. 성공은, 최신 유행에 따르는 것과 자신의 개념들을 산출하는 것 사이에서 사람의 시간을 운 좋게a 나누는 것과 같은 것들에 좌우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창조적”이거나 “발명적” 사고에 필수적인 것은 고도로 비판적인 사고와 어떤 문제에 대한 강력한 흥미의 (그리하여 반복적으로 시도하려는 결심) 결합이다; 심지어 비판력이 떨어지는 사고에 대하여 시도들이 (추측들) 선택되는 범위의 한계들을 결정하는 저 가정들(presuppositions)을 공격하는 결기와의 결합; 지금까지 의심받지 않은 오류의 근원들을 우리가 알게 만드는 상상적 자유와의 결합: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가능한 편견들인 지금까지 의심받지 않은 오류의 근원들.
(창조적 사고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들 대부분은 상당히 불모상태라는 ㅡ 아니면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이라는 ㅡ 것이 나의 견해이다.47a 이유인즉 비판적 사고나 오류제거는 심리학적 용어들로 보다 논리학적 용어들로 더 잘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행”이나 새로이 형성된 “독단”이나 새로운 “기대”는 주로, 특수한 문제들을 낳는 선천적인 욕구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대들을 형성하려는 (어떤 특수한 분야들에서인데 그 분야들은 자체로 몇 가지 다른 욕구들과 관련된다) 선천적인 욕구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 좌절된 이전 기대들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물론, 시행들이나 독단들의 형성에서 존재하는 개인적인 재간이라는 요소가 또한 있을 것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재간이나 상상력은 오류제거라는 비판적 과정에서 자체의 주요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정신의 최고 업적들 중 하나인 위대한 이론들 대부분은 앞선 독단들에 비판이 덧붙여진 산물이다.
독단 형성과 관련하여 나에 먼저 분명해진 것은, 아이들에게는 ㅡ 특히 작은 아이들 ㅡ 그들 주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규칙성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음식물을 위한 것과 사랑받는 것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정해진 일상을 위하고 정해진 기대들을 위한 환경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구조적인 불변자들을 (“물체들”은 발견될 수 있는 그런 불변자들이다) 위한 것이기도 한 선천적인 욕구가 있었다. 이 유아적인 독단주의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에 의하여 관찰되었다: “헨리와 존은 여전히 매일 해리엣과 집시들의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었고 에마(Emma)가 원래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특이하게 이야기를 바꾸면 여전히 악착같이 [에마]를 바로 잡아 주고... 있었다.” 특히 더 나이를 먹은 아이들에게는 변화를 즐기는 면이 있었지만 주로 한정된 범위나 기대의 틀 안에서였다. 예를 들어 놀이들이 이런 종류였다; 그리고 놀이의 규칙들은 (불변자들) 흔히 관찰만에 의해서는 학습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나의 주안점은, 사고의 독단적인 사고방식은 규칙성들에 대한 선천적인 요구에 그리고 발견에 대한 선천적인 작동장치들(mechanisms)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규칙성들을 탐색하도록 만드는 작동장치들. 그래서 나의 주장들 중 한 가지 주장은, 우리가 “유전과 환경”에 관하여 유창하게 말한다면 유전의 압도적인 역할을 ㅡ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체의 객관적인 환경의 (생태적 지위) 측면들이 동물의 주관적이거나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환경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주로 결정하는 ㅡ 우리는 과소평가하기 쉽다.
나는 학습 과정의 세 가지 주요 유형들을 구분했는데 그 유형들의 첫 번째 유형은 근본적인 것이었다:
(1) 발견의 의미에서의 학습: (비판적인) 오류제거에 의하여 제어되는 이론들이나 기대들의 혹은 규칙적인 행태의 (독단적) 형성,
(2) 모방에 의한 학습. 이것은 (1)의 특별한 경우로서 해석될 수 있다.
(3) 악기 연주나 자동차 운전 학습에서처럼 “반복”이나 “연습”에 의한 학습. 여기서 나의 주장은, (a) 진정한 “반복”은 없고 더 정확하게 (b) 오류제거를 (이론 형성에 뒤따르는) 통한 변화와 (c) 특정 행위들이나 반응들을 자동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그 행위들이나 반응들이 생리학적 수준으로만 가라앉도록 그리고 주의하지 않고도 수행되도록 허용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성들과 규칙들을 발견하기 위한 선천적인 의향들이나 욕구의 중요성은, 많이 연구된 과정인 어린이의 언어 학습인 많이 연구되었던 과정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일종의 모방에 의한 학습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초기 과정이 시행과 비판적인 오류제거의 과정이라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비판적인 오류제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발전에서의 본질적인 의향들과 요구들의 힘은, 자신들의 청력 상실로 인하여 자신들의 사교적 환경에서 말을 하는 상황에 정상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서 제일 잘 보일 수 있다. 가장 확신적인 경우들은 아마도 로라 브리지먼(Laura Bridgman)처럼 ㅡ 혹은 헬렌 켈러인데 그녀에 대하여 나는 나중에 들었을 따름이다 ㅡ 청력손상과 동시에 시력을 잃은 어린이들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경우들에도 우리는 사교적인 접촉들을 발견하고 ㅡ 헬렌 켈러는 자신의 스승과의 접촉 ㅡ 우리는 모방도 또한 발견한다. 그러나 심지어 헬렌 켈러가 스승이 그녀의 손에 쓴 철자를 모방한 것은, 그 의사소통적 기능이 심지어 개(dog)에 의해서도 이해될 수 있고 반응될 수 있는 소리들인 긴 기간에 걸쳐 들려준 소리들을 평범한 어린이가 모방하는 것과 동떨어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들로 인하여, 언어습득에 중요한 환경적 요소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게다가 어린이의 언어습득은 거의 전적으로 모방에 의한 학습의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지닌 다양한 생물학적 양상들을 숙고하면 유전적 요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조지프 처치(Joseph Church)의 다음 언급에 나는 동의한다: “유아기에 발생하는 변화의 어떤 부분이 육체적 성숙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성숙은 경험에 대하여 순환적인 정보적(feedback) 관계에 있음을 ㅡ 생명체가 수행하고 느끼고 그 성숙에 대하여 수행한 것들 ㅡ 우리는 안다. 이것은 성숙의 역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숙을 미리 운명이 정해진 생물학적 특징들의 단순한 만개로서 간주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출하는 신호들과 그 신호들을 수용하는 경험보다 유전적으로 확립된 성숙 과정이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고 주장하여 처치(Church)와 의견을 달리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만개”를 자극하기 위하여 이것의 어떤 최소한도가 필요할지라도, “물(water)”라고 철자된 단어가 헬렌 켈러가 손으로 느낄 수 있어서 그녀가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을 의미했음을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은 (처치[Church]에 의하여 언급되지 않은) “각인(imprinting)”과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차이점들도 많다. 유사점은, 그녀에게 일어난 지워질 수 없는 각인(imprinting)과 단 한 번의 경험이 억압된 의향들과 욕구들을 방출한 방식이었다. 명백한 차이점은, 경험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개방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녀가 언어에 숙달하게 된 엄청난 변화의 범위였다.
이것에 비추어 나는 다음과 같은 처치(Church)의 언급이 합당한지 의심한다: “아기의 ‘걷기 작동장치(walking mechanism)’가 만개했기 때문에 아기가 걷는 것이 아니라, 걷기가 가능한 행동방식이 되는 일종의 공간지향을 아기가 성취하기 때문에 걷는다.” 내가 보기에 헬렌 켈러의 경우에 그녀 스승의 손가락이 건드리면 물(water)을 표시했음을 발견하기 전에 그리고 그 스승의 특정 손가락 건드림이 표시적이거나 참고적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그녀가 도약하기 전에 언어적 공간에는 지향이 없었거나 아무튼 극도로 희소했다. 그곳에 틀림없이 있었던 것은, 신호들을 해석하려는 결기이자 의향이자 욕구였다; 그리고 모방에 의하여, 시행착오의 방법에 의하여 (비무작위적 시행들과 철자 오류들을 비판적으로 제거함에 의하여) 이 신호들을 배우려는 욕구이자 결기.
이 분야에서 협동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선천적인 의향들이 틀림없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고, 동정하고, 움직임들을 모방하고, 모방된 움직임들을 제어하여 수정하려는 의향; 그 움직임들을 이용하려는 그리고 그 움직임들의 도움을 받아서 의사소통하려는 의향; 언어에 반응하려는 의향; 명령들, 요청들, 훈계들, 경고들을 수신하려는 의향; 기술적인(記述的인: descriptive) 서술들을 해석하여 그런 서술들을 생성하려는 의향. 헬렌 켈러의 경우에 (정상적인 어린이들의 경우와 반대로) 현실에 대하여 그녀가 받은 정보 대부분은 언어를 통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우리가 아마도 “소문”으로 지칭할 것을, 경험과 그리고 심지어 그녀 자신의 상상과 당분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동일한 기호적 암호를 통하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언어습득의 사례로 인하여, 비판적 단계가 뒤따르는 독단적 단계로 구성되는 나의 자연스러운 배열의 도식은 너무 간단한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언어습득에는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 점차 소멸되는 수정하려는 (다시 말해서, 오류를 제거하려고 신축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선천적인 의향이 있다. “생쥐들(mice)”이라고 말하기 배운 다음에 어린이는 “집(house)”의 복수형으로 “hice"를 사용할 때 규칙성들을 발견하려는 의향이 작동하고 있다. 어린이는 곧, 아마도 어른이 내놓는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을 수정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습득에는 언어구조가 경직되는 ㅡ 아마도 위 3 (c)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자동화“의 영향을 받아서 ㅡ 한 단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언어습득을, 그 사례로부터 모방이 시행과 오류제거 방식의 특별한 경우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례로서만 사용했다. 그것은 또한 한편으로는 독단적인 이론 형성, 기대 형성이나 행태적 규칙성들의 형성의 단계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의 단계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사례이다.
그러나 비판적 단계가 이어지는 독단적인 단계라는 이론이 너무 간단할지라도, 중요한 것이 ㅡ 기대, 행태의 규칙성 ㅡ 형성되어 오류제거가 그것을 다루기 시작할 수 있는 단계인 앞선 독단적 단계가 없으면 비판적 단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견해로 인하여 나는, 흄(Hume)이 심지어 논리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귀납을 배척한 이후에도 집착한 이론인 귀납에 의한 학습에 대한 심리학적 이론을 나는 배척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습관에 관한 흄[Hume]의 견해들에 대하여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로 인하여 나는 또한, 편향되지 않은 관찰 같은 것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관찰은, (적어도 모호하게 추측된 어떤 규칙을 발견하거나 조사하려는) 목표를 지닌 활동이다; 문제들에 의하여 그리고 기대들의 맥락에 (내가 나중에 그 맥락을 “기대들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으로 지칭한 바와 같이) 의하여 영향을 받는 활동. 수동적 경험과 같은 것은 없다; 각인된 개념들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각인된 연상 작용은 없다. 경험은 생명체가 능동적으로 탐사한 결과로, 규칙성들이나 불변자들을 탐색한 결과이다. 이해관계들과 기대들의 그리하여 규칙성들이나 “법칙들”의 맥락에서를 제외하고 지각(知覺: perception)과 같은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나는, 추측이나 가설이 틀림없이 관찰이나 지각에 선행한다는 견해에 다다랐다: 우리에게는 선천적인 기대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능동적인 탐사에 몰두한 동안 통상적으로 우리가 반응하는 자극들에 의하여 활성화되는, 잠재적인 기대들의 형태로 된 잠재적인 선천적 지식이 있다. 모든 학습은, 어떤 이전 지식을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어떤 선천적인 지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모든 학습은 그 이전 지식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내가 1921년과 1926년 사이에 잠정적으로 그리고 조악한 용어사용법으로 설명한 것이 이 심리학적 이론이었다. 캐비넷 제작자 수습공 동안 나를 매혹시켜 정신을 빼앗은 것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형성에 대한 이 이론이었다.
나의 지성적 편력에 관한 기묘한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이것이다. 당시 나는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 사이의 대조에 관심을 가졌을지라도, 독단적 사고를 과학 이전 단계로서 (그리고 독단적 사고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는 “비과학적인 것”으로서) 내가 간주했을지라도 그리고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연계할 수 있음을 내가 깨달았을지라도 이 모든 것과 귀납이라는 문제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a 못했다. 반복에 의한 귀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복에 의하여 새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단순한 발견에 의하여 귀납이라는 문제를 내가 해결했다고 나는 믿었을지라도, 여러 해 동안 이 두 가지 문제들은 나의 정신의 다른 (그리고 그것은 거의 물샐 틈 없는 듯이 보인다) 부분에서 살았다: 과학의 귀납적 방법으로 주장되는 것은 (독단적인) 시행과 (비판에 의한) 오류제거의 방식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했는데 그 방식은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 모든 생명체들이 발견한 방식이었다.
물론 나는, 이 두 가지 문제들 모두에 ㅡ 구획설정의 문제, 귀납의 문제 ㅡ 대한 나의 해결책들이 동일한 개념을 사용했음을 인식했다: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의 분리라는 개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문제들은 전혀 다른 듯이 나에게 보였다; 구획설정에는 다윈적 선택과 유사점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야 겨우 나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귀납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구획설정의 문제를 잘못 해결함으로부터 ㅡ 사이비과학으로부터 과학을 고양시킨 것은 참이고 안전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을 발견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그리고 이 방법은 귀납의 방법이라는 그릇된 (실증주의적) 믿음으로부터 ㅡ 출현했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 이상의 방법들에서 틀린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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