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가오는 전쟁; 유대인 문제
내가 최악을 예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래에 기술된 비엔나에서 벌어진 큰 저격 사건 이후인 1927년 7월이었다: 중부 유럽의 민주주의적 보루들이 무너질 것 그리고 전체주의적 독일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시작할 것. 1929년쯤 서구의 정치가들 가운데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당시, 국외자였던 영국의 처칠만이 독일의 위협을 이해했음을 나는 깨달았다. 당시 나는, 전쟁이 몇 년 안에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틀렸었다: 상황 논리를 고려하면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모든 것이 훨씬 더 느리게 전개되었다.
분명히 나는 소란만 떨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력한 민주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남아있던 유일한 정당)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전체주의적 정당들에 대항하기에 무력함을 나는 깨달았다. 1929년부터 계속 나는 히틀러의 발흥을 예상했다; 히틀러에 의한 이런저런 형태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나는 예상했다; 그리고 나는 서구에 대한 전쟁을 예상했다. (서구에 대한 전쟁[The War against the West]은 아우렐 콜나이[Aurel Kolnai]에 의한 탁월한 저서의 제목이다.) 이 예상들 속에서 유태인 문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의 양친은 모두 유대 종교 속에서 태어났지만 자녀들이 태어나기 전에 개신교로 (루터) 세례를 받았다. 많이 생각한 다음에 나의 부친은, 압도적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에 살면 가능한 한 적게 죄를 짓는 ㅡ 동화되는 ㅡ 의무가 부여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된 유대교에 죄짓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반(反)-유대론을 두려워하는 비겁자로서 비난받는 것을 의미했다. 이 모든 것은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답은, 반(反)-유대론은 사악한 것이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 의하여 걱정의 대상이 될 것과 반(反)-유대론을 유발하지 않도록 모든 유대인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과제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정말로 섞였다: 동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의 인종적 출신 때문에 경멸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 출신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함으로써 대응해야 함은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인종적 자존심은, 인종적 증오에 의하여 유발되었을지라도,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틀렸다. 모든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사악하고 유대인의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오스트리아와 심지어 독일도 유대인들을 아주 잘 대우했다고 나는 믿는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확립된 몇 가지 장애물들이 있었을지라도, 거의 모든 권리들이 주었는데 특히 군대에서 그랬다. 완벽한 사회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대인들이 모든 면에서 동등하게 대접을 받았을 터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처럼 이 사회도 완벽함과 거리가 멀었다: 유대인들과 유대인 피를 가진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했을지라도, 그들은 모든 면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리가 합당하게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잘 대우를 받았다고 나는 믿는다. 천주교로 개종한 유대인 가족 일원이 심지어 대주교가 (알뮈츠의 콘[Kohn of Almütz] 대주교) 되었다: 인기 높은 반(反)-유대론을 이용하는 모함 때문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위치에서 1903년에 사퇴해야 했다. 대학교수들, 의료인들, 법률가들 가운데서 유대인들이나 유대인들의 피를 지닌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고, 공공연한 원한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만 이로 인하여 높아졌다.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공무원으로서 최고의 지위들에 오를 수 있었다.
언론은 많은 유대인들을 매료시킨 한 가지 직업이었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직업적 수준들을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a. 이 사람들 중 몇몇이 담당한 선정적인 언론의 종류는 여러 해 동안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ㅡ 문명화된 수준들을 옹호하려고 조바심하는 칼 크라수스(Karl Kraus) 같은 다른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 논쟁들에 의하여 발생한 혼란 때문에 논쟁자들이 유명해지지는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 가운데 뛰어난 유대인들이 또한 있었고, 그들이 지도자들로서 사악한 공격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상태의 고조에 기여했다.
분명히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토착” 주민들과 두드러지게 달리 보였다. 부유한 유대인들보다 가난한 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부유한 유대인들 중에서 얼마간은 전형적인 벼락부자들이었다.
부언하여 영국에서 반(反)-유대론이, 유대인들은 “대금업자들”이라는 (또는 한때 그랬다는) ㅡ 베니스의 상인에서나 디킨스(Dickens) 혹은 트롤로프(Trollope)의 작품에서와같이 ㅡ 개념과 연결되는 반면, 적어도 나치들의 발흥 이전에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을 나는 듣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인 로트쉴트(Rothschilds)와 같은 유대인 은행가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들이 우리가 영국 소설들에서 읽는 바와 같이 개인에게 사사로인 돈을 빌려주는 종류의 대금업에 종사한 적이 있다고 암시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반(反)-유대론은 기본적으로, 외국인들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향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민족주의당에 의해서 뿐만
a 역주: 이 문장의 뒤 절은 and quite a few of them certainly did little to raise professional
standards인데 박중서 번역에 ‘그 분야 종사자 가운데 전문성 면에서 수준 이하인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로 번역되었다.
아니라 로마 가톨릭당에 의해서도 이용당한 감정. 그리고 특징적으로 외국인들에 대한 이 비난받아 마땅한 혐오감은 (거의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태도) 많은 유대인 피를 가진 가족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구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유대인 피난민들이 비엔나로 들어왔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었다. 이 “동방 유대인들”은, 당시 그렇게 지칭된 바와 같이, 거의 유대인 강제거주 지역인 게토들로부터 곧장 왔고, 그들은 비엔나에 정착한 저 유대인들에 의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동화됨에 의한, 많은 정통 유대인들에 의한, 그리고 심지어 시온주의자들에 의한 혐오의 대상이었는데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과 관계가 별로 없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부끄러워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상황은 법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조금 감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상황은 사회적으로 악화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유와 평등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해될 수는 있지만 현명하지 못하게 정치와 언론에 뛰어들었다. 그들 대부분의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로 유대인들은 합류함으로써 그 정당들의 몰락에 불이 붙었다. 인기 있는 반(反)-유대론이 이곳저곳에서 많이 잠복해있는 상태에서 우연히 유대인 피를 지닌 훌륭한 사회주의자가 자신의 정당에 제공할 수 있었던 최고의 역할은, 그 정당 안에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임 아주 명백해 보였다. 기묘하게도 이 명백한 규칙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우파와 좌파 사이의 싸움은 거의 처음부터 일종의 차디찬 내전이었는데 반(反)-유대론의 기치 아래 점점 더 우파에 의하여 치러졌다. 비엔나 대학에서는 반(反)-유대론적 폭동이 빈번했고 교수들 사이에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다고 항의들이 항상 일어났다. 유대혈통은 지닌 사람은 대학교수가 되기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우파들 중 경쟁하는 정당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서로 더 열중했다.
적어도 1929년 이후에 내가 사회민주당의 패배를 예상한 다른 이유들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의 각주 몇 가지에서 발견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 이유들은 마르크시즘과 ㅡ 더욱 특히, 폭력을 적어도 위협으로 사용하는 정책과 (엥겔스에 의하여 언명된) ㅡ 관련되어 있었다.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1927년 7월 비엔나에서 몇십 명의 평화롭고 무장하지 않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구경꾼들에게 발포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나의 아내와 나는 (우리는 아직 결혼 전이었다) 그 장면을 믿지 못하고 목격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의 ㅡ 비록 그들이 좋은 의도로 행동했을지라도 ㅡ 정책이 무책임함과 동시에 자살적이었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히 보였다. (부언하여 프리츠 아들러[Fritz Adler]가 ㅡ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뒤엠[Duhem]을 번역한 사람이며 비엔나 최고의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아들 ㅡ 학살극이 끝나고 며칠 후인 1927년 7월에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같은 의견을 지고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6년 이상이 지나서야 사회민주당의 최종적인 자살행위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민주주의가 끝났다.
22. 이민: 영국과 뉴질랜드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은 비엔나를 멀리 넘어서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25년 후에 발간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보다 더 많은 언어들로 더 많이 검토되었고 심지어 영어로도 더 상세한 검토들이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유럽의 다양한 나라들로부터 많은 편지들을 그리고, 런던의 베드포드 대학(Bedford College)의 수잔 스테빙(Susan Stebbing) 교수로부터 온 초청을 포함하여 강연초청을 받았다. 나는 베드포드 대학에서 강연하기 위하여 1935년의 가을에 영국으로 왔다. 나 자신의 개념들에 관하여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나는 받았지만 당시 영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타스키의 업적들에 매우 큰 인상을 받아서 나는 대신 그 업적들을 나의 주제로 선택했다. 나의 첫 번째 강연은 “구문론 및 의미론”에 (타스키의 의미론) 관해서였으며 두 번째 강연은 타스키의 진리론에 관해서였다. 생물학자이자 생물철학자인 조지프 헨리 우저(Joseph Henry Woodger) 교수가 타스키의 연구에 흥미를 갖도록 내가 최초로 촉발한 것은 이 때였다고 나는 믿는다. 전부 합쳐서 나는 비엔나에는 짧게 체류하면서 1935년-36년 동안에 영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길게 체류했다. 나의 아내가 계속해서 교사직에 있으면서 가르치고 돈을 버는 반면, 나는 나의 교사직으로부터 무급휴직 상태였다.
이 방문 동안에 나는 베드포드 대학에서 두 번 강연했을 뿐만 아니라 임피어리얼 대학(Imperial College)의 수학 교수인 하이먼 레비(Hyman Levy)가 주선한 초청을 받고 그 대학에서 확률에 관하여 세 번 강의도 했다; 그리고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G. E. 무어[Moore]가 참석했고, 두 번째 강연에서는 미국 철학자인 C. H. 랭포드[Langford]가 참석했는데 그는 토론에서 탁월했다) 논문들 두 편을 강독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논문 한 편을 강독했는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앞서서 프레디 에이어(Freddie Ayer)가 나를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과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에게 소개했다. 나는 또한 런던정경대학(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s)에서 (L.S.E.) 개최된 하이에크(Hyek) 교수의 학술회의에서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에 관한 논문 한 편을 강독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경기순환연구소(the Institute for Trade Cycle Research)의 (Konjunkturforschung) 교수이자 소장이였던 비엔나에서 왔었지만, 나는 그를 런던정경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라이오넬 로빈스(Lionel Robbins)가 (지금은 로빈스 경[Lord Robbins]) 참석했고 미술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도 참석했다. 몇 년 후에 경제학자인 G. L. S. 쇄클(Shackle)도 자신이 참석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는 슈뢰딩거(Schrödinger)를 만나서 그와 긴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매우 불행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옥스퍼드 대학으로 왔는데 베를린에서 그는, 아마도 과학사에서 독특한 이론물리학을 위한 학술회의를 주재했다: 아인슈타인, 폰 라우에(von Laue), 플랑크 그리고 네른스트(Nernst)가 그 학술회의의 정규 회원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는 큰 후대를 받았다. 그는 물론 대가들의 학술회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쉬워했던 것은 학생들과 교수들 모두에게서 이론물리학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이었다.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공식들에 대한 나의 통계적 해석을 토론했다. 그는 흥미를 느꼈지만 심지어 양자역학의 위상에 관해서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코펜하겐 해석에 관하여 의심사항들을 표현했던 논문들의 별쇄본 몇 권을 나에게 주었다; 그가 그 해석과 ㅡ 다시 말해서, 보어의 “상보성”과 ㅡ 화해한 적이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슈뢰딩거는 자신이 아마도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독일을 떠날 때 자신의 반(反)-나치 태도를 숨기지 않았고 나치들이 오스트리아에서 권력을 잡으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6년 늦은 가을 그는 정말로 돌아갔다. 그라츠(Graz) 대학에서의 교수직이 비게 되었고 비엔나 대학에서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한스 티링(Hans Thirring)이 자신이 비엔나 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그라츠 대학으로 가겠다는 제안을 해서 슈뢰딩거가 비엔나 대학에서 교수직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라츠 대학으로 가서 그곳에서 약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이후 슈뢰딩거와 그의 아내 안네마리(Annemarie)는 위기일발로 도피했다. 그녀는 그들의 자동차를 이태리 국경 근처까지 몰고 가서 버렸다. 손가방만 들고 그들은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거의 무일푼으로 로마에 도착했는데 아일랜드 수상이던 데 발레라(De Valera)에게 전화했는데 수상은 우연히 당시 제네바에 있어서 슈뢰딩거에게 제네바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이태리-스위스 국경에서 그들은 이태리 경비병들의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 짐이 없었고 가진 돈이 1파운드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차에서 끌려 내려졌고 기차는 그들을 태우지 않고 국경 기차역을 떠났다. 결국 그들은 스위스로 가는 다음 기차에 탑승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슈뢰딩거가 더블린에 있는 고등학술 연구소(The 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의 수석교수가 된 이유였는데 그 연구소는 당시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에는 아직도 그런 연구소가 없다.)
내가 1936년에 방문하여 잘 기억하는 경험들 중 한 가지 경험은, 아마도 칸트 이후 최고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강연한 아리스토텔레스 학회(the Aristotelian Society)에 에이어(Ayer)가 나를 데려갔을 때였다.
러셀은 “경험론의 한계들(The Limits of Empiricism)”에 관한 논문을 강독 중이었다. 경험적 지식은 귀납에 의하여 습득된다고 전제하고 동시에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비판에 큰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러셀은, 다음 차례에서 귀납에 근거할 수 없는 어떤 귀납의 원칙을 우리가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원칙을 채택하면 경험론의 한계들이 표시되었다. 당시 나는 나의 저서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Grundprobleme)에서 그리고 더 개괄적으로는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정확하게 이 문제들을 칸트에게 귀속시켰고, 그리하여 러셀의 입장은 이런 면에서 칸트의 선험론과 동등하다고 나는 보았다.
강연 후에 토론회가 열렸고 에이어(Ayer)가 나에 발언하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그리고 러셀이 제안한 저 칸트의 한계들이 없는 경험론을 내가 신뢰할지라도 나는 귀납론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진술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주 더듬거리는 영어로써 가능한 한 간략하고 요점만으로 언명되었는데, 그 진술을 농담으로서 받아들이고 웃었던 것으로 보이는 청중들에 의하여 잘 받아들여졌다. 나의 두 번째 시도에서, 전체적인 문제는 과학적 지식이란 지식의 ㅡ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이 참이라는 그리하여 지식은 진리를 함의한다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지식 ㅡ 한 종류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적 지식”으로 부르는 것은 가설적이고, 확실하게 혹은 확률적으로 참인 것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말할 것도 없고, 흔히 참이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다시 청중들은 이것을 농담이나 역설로 받아들여서 그들은 웃고 박수를 쳤다. 그곳에 내가 이 견해들을 진지하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합당한 과정을 거쳐 그 견해들이 당연한 것으로서 널리 간주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던지 나는 의아하다.
내가 뉴질랜드의 대학의 (현재 캔터베리 대학[University of Canterbury]로 당시 불리던 바와 같이, Canterbury University College에서) 철학교수 구인 광고에 응모할 것을 제안한 사람은 우저(Woodger)였다. 어떤 사람이 ㅡ 아마도 하이에크(Hyek)였을 것이다 ㅡ 월터 애덤스(Walter Adams) 박사와 (나중에 런던 정경대학의 총장이 됨) 에스더 심슨(Esther Simpson) 양에게 나를 소개했는데 두 분은 함께 학술협조위원회(Academic Assistance Council)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위원회는 당시 독일에서 온 많은 피난 과학자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온 몇 분들을 돕기 시작했다.
1936년 7월에 한 회의에 참석하고 닐스 보어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런던을 떠나 코펜하겐으로 갔는데 ㅡ 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환송을 받았다 ㅡ 내가 18절에서 서술한 회의였다. 코펜하겐에서 나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히틀러의 독일을 경유하여. 11월 말에 나는, 학술협조위원회(Academic Assistance Council)의 월터 애덤스로부터 지원을 약속하는 편지 한 통과 함께 케임브리지 대학의 도덕학과들의 이름으로 나에게 학문적 후의를 제공하겠다는 편지를 A. C. 유잉(Ewing)으로부터 받았다; 그 후 곧, 1936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의하는 전보를 나는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이 제시한 후의에는 피난민을 위한다는 의도가 있는 반면, 이것은 정상적인 교수직이었다. 나와 아내는 케임브리지로 가는 것을 선호했을 터이지만 이 후의 제의가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뉴질랜드의 초청을 수락하고 학술협조위원회(Academic Assistance Council)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나를 대신하여 비엔나 학파의 프리츠 바이즈만(Fritz Waismann)을 초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 요청을 수용했다.
나의 아내와 나는 우리의 교사직에서 사직하고 한 달 안에 런던을 향하여 비엔나를 떠났다. 런던에서 5일 동안 머물고 우리는 뉴질랜드를 향하여 배를 탔는데 뉴질랜드의 학기가 시작되는 때에 꼭 맞추어 1937년 3월 첫째 주에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다.
히틀러로부터 도피한 오스트리아 피난민들에게 나의 도움이 곧 필요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까지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들을 시작되기까지 또다시 한 해가 지났다. 크라이스트처치의 한 위원회는 뉴질랜드에 입국하는 피난민들의 허가증들 얻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그리고 몇몇 피난민들은 런던 주재 뉴질랜드 고등판무관인 R. M 캠벨(Campbell) 박사의 활동 덕분에 강제수용소로부터 그리고 투옥으로부터 구조되었다.
23. 뉴질랜드에서의 초기 연구
우리는 뉴질랜드로 가기 전에 모두 합쳐 약 9개월 동안 영국에 머물렀고 그것은 계시와 영감의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정직과 품위 그리고 그들이 지닌 강력한 정치적 책임감으로 인하여 나는 최고의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내가 만난 대학교수들도 히틀러의 독일에 관하여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지녔고 희망적인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국제연맹의 이념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지로 인하여 호아레-라발 협정(Hoare-Laval plan)이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군사동맹을 막았을 개연성이 큰) 깨진 때 나는 영국에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영국 일반적인 의견의 폭증에 의하여 뒷받침된 행위로, 라인란트에 진입했을 때 나는 영국에 있었다. 나는 또한,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재무장 예산을 지지하여 연설하는 것을 들어서 그가 재무장관에 지나지 않고 그가 대항하여 무장하고 있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그가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스스로 안심하려고 애썼다. 민주주의는 ㅡ 심지어 영국의 민주주의도 ㅡ 전체주의와 싸우려고 고안된a 제도가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한 오직 한 사람만 ㅡ 윈스턴 처칠 ㅡ 분명히 있다는 것과 문자 그대로 아무도 그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함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상황은 유사했지만 다소 과장되어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영국인들처럼 그들은 품위가 있었고, 친절했으며 선의를 지녔다. 그러나 유럽대륙은 무한히 멀었다. 당시 뉴질랜드는 5주의 항해 거리나 떨어진 영국을 통해서만 세계와 접촉했다. 항공편이 없어서 사람들은 3개월 안에 편지답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뉴질랜드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그 모든 것은 잊혀졌다. 독일인들은 호감을 충분히 받았고 전쟁은 생각될 수 없었다.
뉴질랜드가 세계에서 최고로 잘 통치되고 가장 쉽게 통치되는 나라라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뉴질랜드는 연구하기에 뛰어나게 조용하고 유쾌한 분위기여서 나는 빠르게 안주하여 여러 달 동안 중단된 연구를 계속했다. 나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크게 나를 격려해준 몇 명의 친구들을 나는 얻었다. 물리화학자인 휴 파튼(Hugh Parton), 물리학자 프레데릭 화이트(Frederick White) 그리고 지질학자 봅 알랜(Bob Allan)이 먼저였다. 그 다음에 경제학자 콜린 심킨(Colin Simkin), 벌률가 알랜 리드(Alan Reed), 방사선물리학자 조지 로스(George Roth), 당시 고전과 영어 학도였던 마가레트 달질(Margaret Dalziel)이 뒤를 이었다. 더 멀리 남쪽 오타고(Otago)의 더니든(Dunedin)에는 철학자인 존 핀들리(John Findlay)와 신경생리학자 존 에클스(John Eccles)가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나는 먼저 확률론에 ㅡ 가르치는 것과 별도로 (철학과에서는 나 혼자만 교수였다) ㅡ 특히 확률계산에 대한 공리적 처리에 그리고 확률계산과 불대수 사이의 관계에 몰두했다; 그리고 나는 곧 논문 한 편을 끝냈는데 그 논문을 나는 최소한의 길이로 압축했다. 그 논문은 나중에 Mind에 발표되었다. 나는 이 연구를 여러 해 동안 계속했다: 내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 연구는 크게 대기상태였다.a 나는 또한 물리학을 조금 읽었고 양자이론에 관하여 추가적으로 생각했다. (다른 것들 가운데서 나는 Nature에서 우라늄 폭발 가능성에 관한 할반[Halban]과 졸리오[Joliot]과 코와르스키[Kowarski]의 흥미로우면서 당혹스러운 편지를, 동일한 주제에 관한 몇 통의 편지를 물리학리뷰[The Physical Review]에서 그리고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운영위원회 연보[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Regents of 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칼 K. 대로우[Karl K. Darrow]의 기고문을 읽었다.)
나는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에 관하여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1919년에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을 저술하도록 나를 촉발한 것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시즘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는 하이에크의 학술회의에서 “역사주의의 빈곤”에 관하여 강연했는데 그 강연은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사회과학들의 방법들에 적용한 것을 포함했다 (혹은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개념들을 휴 파튼과 그리고 H. 라슨(Larsen) 박사와 토론했는데 라슨 박사는 당시 경제과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반대하여 출간한다는 것을 나는 매우 주저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여전 존재하던 유럽대륙에서 그들은 결국 여전히 독재에 저항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이었다. 당시 지배적인 상황에서 그들에 반대하는 어떤 저술도 출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느꼈다. 그들의 정책을 자살적인 것으로서 내가 간주했을지라도, 그들이 글 한편으로 개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었다: 비판을 출간하면 그들이 약해질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1938년 3월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왔다. 당시 오스트리아인들을 도와 도피시킬 시급한 필요가 있었다. 내가 1919년 이래 습득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내가 더 이상 덮어둘 수 없다고 나는 또한 느꼈다; 나는 “역사주의의 빈곤”을 출간 가능한 형태로 서술하기로 결심했다. 그 형태에서 나온 것이 다소 상보적인a 두 가지 저서들이었다: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그리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처음에 내가 다음과 같이 제목을 붙이려고 했던 것: “허위 예언자들: 플라톤ㅡ헤겔ㅡ마르크스[False Prophets: Plato-HegelㅡMarx]”).
24. 열린사회 겸 역사주의의 빈곤
원래 “역사주의”로 인하여 마르크시즘과 파시즘 모두가 얼마나 영감을 받았는지를 보다 면밀하게 밝혀서, 하이에크의 학술회의에서 내가 한 말을 (나의 친구 알프레트 브라운탈[Alfred Braunthal]의 브뤼셀 소재 자택에서 독일어로 행한) 나는 상세히 설명하고 출간될 수 있는 영어로 표현하려고 의도했다: 상당히 긴 논문이었지만 물론 한 권으로 쉽게 출판될 수 있었다.
내가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은 그 논문을 수용될 수 있는 영어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전에 몇 편을 썼지만 그것들은 언어적으로 매우 나빴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의 문체는 합당하게 가벼웠다 ㅡ 독일어 독자들에게; 그러나 나는, 글쓰기의 영어 수준들은 전혀 달랐고 독일어 수준들보다 훨씬 더 높음을 나는 발견했다. 예를 들어 독일어 독자들은 다음절어(多音節語: polysyllables)를 꺼리지 않는다. 영어로는 그 단어들 때문에 틀림없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간단한 오류들을 피하려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면, 우리가 그 오류들을 아무리 많이 인정할지라도 그런 더 높은 목표들은 훨씬 더 멀어진다.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글들 중 가장 무미건조한 글 중 하나다. 게다가 첫 장을 구성하는 10가지 절들을 내가 쓴 다음에 나의 전체 계획이 무너졌다: 본질주의에 관한 10절은, 나의 친구들을 너무나 당혹시켜서 나는 그 절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 상세설명으로부터 그리고 플라톤의 국가(Republic)의 전체주의적 경향들에 관하여 내가 언급한 몇 가지 비평들로부터 ㅡ 나의 친구들에 (특히 헨리 댄 브로드헤드[Henry Dan Broadhead]와 마가렛 달질[Magaret Dalziel])에 의하여 모호하다고 또한 생각된 비평들 ㅡ 계획도 없이 그리고 모든 계획들에 반하여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라는 참으로 의도되지 않은 결과물이 생겼다. 그 저술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후에 나는 그 저술을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에서 떼어내어 역사주의의 빈곤을 자체가 다소 원래 의도된 것으로 줄였다.
열린사회에 기여한 사소한 요인 한 가지 또한 있었다: 그리스 철학에의 “일신론과 다신론(the one and the many)”에 관한 몇 가지 시험문제들의 반(反 )-계몽주의 때문에 나는 격분해서 이 형이상학적 개념들과 연결된 정치적 경향들을 공표하고 싶었다.
열린사회가 역사주의의 빈곤으로부터 분리된 다음에, 나는 후자(後者)의 처음 세 가지 장(章)들을 끝냈다. 4장은 당시까지 개괄적인 형태로만 (내가 나중에 “상황논리”로 지칭한 것을 토론하지 않고) 존재했는데 열린사회의 플라톤 편의 1차 초안이 작성된 다음에 완성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저서들이 다소 혼란스러운 정도로 진행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부분적으로 나의 사고에서의 내부적 전개 상황들에 기인하지만 또한 히틀러-스탈린 협약과 전쟁의 실제 발발에 그리고 그 전쟁의 기묘한 과정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프랑스가 함락된 후에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이라고 나는 우려했다. 히틀러가 영국 대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나는 안도했지만 러시아가 붕괴할까봐 걱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이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전쟁들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이다a;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탱크들이 러시아에 침공함으로써 그리고 일본의 폭격기들인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패배했다.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나의 전쟁 노력이었다. 자유는 아마도 특히 마르크시즘과 대규모 “기획”이라는 (혹은 “통제정책[dirigism])” 이념의 갱신된 영향을 받고 다시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저서들은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념들에 대항하는 자유 옹호로서 그리고 역사주의적 미신들이 지닌 위험들에 대항하는 경고로서 의도되었다. 두 가지 저서들과 특히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중요한 저서) 정치철학에 관한 저서들로서 묘사될 것이다.
두 가지 저서 모두는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지식론으로부터 그리고, 지식론과 그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에 (“무엇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우리의 지식은 어떻게 확실한가?”) 관하여 우리가 지닌 흔히 무의식적인 견해들이 우리 자신들을 향한 그리고 정치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결정적이라는 나의 확신으로부터 생겼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우리의 지식이 시행과 오류제거를 통하여 성장한다는 것과, 그 지식의 과학 이전 성장 그리고 그 지식의 과학적 성장의 차이점은 과학적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을 의식적으로 탐색한다는 것임을 나는 밝히려고 노력했다: 비판적 방법을 의식적으로 채택함이 성장의 주요 도구가 된다. 이미 당시 비판적 방법은 ㅡ 혹은 비판적 접근 ㅡ 일반적으로 난제들이나 모순들과 그것들의 잠정적 해결책에 대한 탐색을 본질로 한다는 것과, 이 접근은 과학을 멀리 넘어서까지 운반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인식했던 듯이 보이는데 과학에 관하여 비판적인 시험들이 특징이다. 이유인즉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연구에서 나는 모순들을 해결하는 비판적인 ㅡ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변증법적’ ㅡ 방법을 2차적인 위치로 격하시켰는데 왜냐하면 내가 나의 견해들에 대하여 실용적인 방법론적 면모들을 개발하려는 시도들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출간 저서에서 나는 비판적인 길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 언급은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Die beiden Grundprbleme]에 관해서였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나는, 비판적 방법이 가능한 모든 곳에서 시험들을 그리고 가급적 실용적인 시험들을 이용할지라도 그 방법은 내가 비판적 혹은 합리적 태도로서 묘사한 것으로 일반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성(reason)”이나 “합리성(reasonableness)”의 최고 의미들 중 한 가지 의미는 비판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ㅡ 비판을 받을 자세와 자신을 비판하려는 열정 ㅡ 나는 논증했다; 그리고 나는, 합리성의 띤 이 비판적 태도가 가능한 한 멀리 확대되어야 한다고 논증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비판적 자세를 가능한 한 멀리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는, 에이드리언 코치(Adrienne Koch)에 의하여 그리고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에 의하여 나중에 지지를 받은 제안인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로 아마도 지칭될 것이다.
이 태도에 함축된 것은, 우리가 항상 불완전한 사회에서 틀림없이 살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심지어 매우 훌륭한 사람들도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또한 분명히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해서 우리가 자주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이유들 중 어떤 이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해결될 수 없는 가치들의 충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적 원칙들이 갈등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해결될 수 없는 많은 도덕적 문제들이 있다.
갈등 없는 인간 사회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사회는 친구들의a 사회가 아니라 개미들의 사회일 터이다. 그런 사회가 도달될 수 있을지라도, 그런 사회가 도달되면 파괴될 터인 그리하여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우리를 틀림없이 막는 가장 중요한 인간적 가치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틀림없이 갈등을 감소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미 여기서 우리는 가치들이나 원칙들의 충돌에 관한 사례를 경험한다. 이 사례로 인하여, 가치들이나 원칙들의 충돌이 열린사회를 위하여 귀중할 것이고 정말로 필수적일 것임이 또한 밝혀진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주요 논증들 중 한 가지 논증은 도덕적 상대론에 반대한다. 도덕적 가치들이나 원칙들이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그 가치들이나 원칙들이 무효가 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들이나 원칙들은 발견될 것이고 심지어b 창안될 것이다. 그 가치들과 원칙들은 특정 상황과 유관할 것이고 다른 상황들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 가치들과 원칙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이용 가능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용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대론과 완전히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여하한 가치들의 집합도 옹호될 수 있다는 교설과.
나의 지성적 자서전인 이것에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몇 가지 다른 철학적 개념들이 (그 개념들 중 몇 가지는 철학사와 관련되고 다른 개념들은 역사철학과 관련된다) 정말로 언급되어야 ㅡ 정말로 여기서 토론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ㅡ 한다. 그 개념들 중에는, 나의 반(反)-본질주의적 입장에 대한 최초의 상당히 포괄적인 설명과 내가 생각하기에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ic)도 아니고 관찰주의적(觀察主義的: observationalistic)도 아닌 반(反)-본질주의에 대한 최초의 서술이었던 것이 있다. 이 설명과 관련하여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에 대한 몇 가지 비판들이 포함되는데 비트겐슈타인을 논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거의 완전히 무시된 비판들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나는 또한 논리적 역설들과 정식화된 몇 가지 새로운 역설들에 관하여 서술했다.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그리고 더 일반적인 주권의 역설들(paradoxes of sovereignty)에 대한 그 역설들의 관련성을 나는 또한 토론했다.
방대한 문헌 한 편이,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에 기여한 바가 없는데, 역사관련 설명에 대한 나의 개념들을 잘못 비판하여 나왔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12절에서 내가 “인과적 설명”이나 연역적 설명으로 지칭한 것을 나는 토론했는데, 혹시 조금 모호할지라도 (초기조건과 보편법칙을 J. S. 밀[Mill]이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토론은 내가 알지 못한 채 J. S. 밀(Mil)에 의하여 선행되었다a. 내가 브뤼셀에서 처음으로 “역사주의 빈곤”을 강독했을 나의 이전 제자인 칼 힐페르딩(Karl Hilferding) 박사가 그 토론에 흥미로운 기여를 했는데 철학자 칼 헴펠(Karl Hempel)과 파울 오펜하임(Paul Oppenheim)도 또한 기여했다: 힐페르딩은,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12절에 대하여 역사 관련 설명에 관하여 나의 몇몇 언급들이 지녔던 관계를 지적했다. (이 언급들은 결국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1957년(g)] 판본의 143-46쪽들이 되었다. 힐페르딩의 토론은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근거했는데 지금은 [1957년(g)]의 122-24쪽과 133쪽에 있는 몇 가지 요점들을 들춰냈다; 설명과 예측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역사 관련 설명들에서 많이 사용되는 보편법칙들의 사소함과 부분적으로 연결되는 요점들: 이 법칙들은, 맥락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만a, 통상적으로 흥미롭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이 특정 분석을 역사관련 설명에 대하여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하지 않았고, 내가 중요한 것으로서 정말로 간주한 것이 성숙하는 데 몇 년이 더 걸렸다. 그것은 합리성의 (혹은 “합리성 원리” 혹은 “영위법[零位法: zero method]” 혹은 “상황의 논리”) 문제였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그 하찮은 주장은 ㅡ 잘못 이해된 형태로 ㅡ 방대한 문헌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상황 분석이라는 문제의 훨씬 더 중요한 면모는 내가 1938년에 역사주의의 빈곤에 처음으로 추가했고 나중에 열린사회의 그 적들의 14장에서 다소 더 완벽하게 설명했는데 내가 이전에 “영위법(零位法: zero method)”으로 지칭한 것으로부터 전개되었다. 여기서 주요점은, 다른 이론적 사회과학들에 적용될 수 있도록 경제이론의 (한계효용설[限界效用說]: marginal utility theory) 방법을 일반화하려는 시도였다. 내가 나중에 정식화를 하면서 이 방법은, 특히 제도적 상황을 포함하여 사회적 상황의 모형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그 제도적 상황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행동이 지닌 합리성을 (영의 성품[零의 性品]: zero character) 설명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런 모형들은 그렇다면 사회과학들의 시험 가능한 가설들이다; 그리고 “단칭인” 저 모형들은, 더욱 특히, 역사와 관련된 (원칙적으로 시험 가능한) 단칭 가설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마도 추상적 사회에 관한 이론을 언급할 것인데 그 이론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미국 판본에 처음으로 추가되었다.
나에게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전환점을 표시하는데, 이유인즉 그 저서로 인하여 어느 정도까지 역사적 연구의 방법들에 관하여 글을 쓸 구실을 나에게 제공한 역사를 (다소 사변적인 역사) 내가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철학사에 관하여 미출간 연구를 다소 수행했지만 이것이 내가 최초로 출간한 실적이었다. 이것은 과장하지 않고 몇 가지 새로운 역사 관련 문제들을 ㅡ 사실상 그 문제들에 대한 난처한 상황 ㅡ 제기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권은 내가 플라톤의 마술(The Spell of Plato)로 명명했는데,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역사주의의 빈곤의 10절이 확장되면서 유래했다. 이 확장된 글의 초고에는 플라톤의 전체주의에 관한, 그의 역사주의적 쇠퇴나 퇴행 이론에 대한 그 전체주의의 연관성에 관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몇 가지 문단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국가(Republic), 정치가(Statesman), 고르기아스(Gorgias) 및 법률(Laws)에 관한 몇 가지 서적들을 내가 앞서서 읽은 것에 그리고 나의 중등학교 시절 이래 많은 사랑을 받은 저서인 테오도르 곰페르츠의 그리스 사상가들(Greek Thinkers)에 근거를 두었다. 이 문단들에 대한 나의 뉴질랜드 친구들의 부정적인 반응들로 인하여 결국 플라톤의 마술 그리고 그와 함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저술되었다. 이유인즉 그로 인하여 나는 근거들에 대한 연구로 되돌아갔는데 왜냐하면 나의 견해에 대하여 나는 완전한 증거를 제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플라톤을 매우 집중해서 다시 읽었다; 나는 딜스(Diels), 그로우트(Grote) (그의 의견이 나의 의견과 본질적으로 동일함을 나는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대한 다른 많은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의 저서를 읽었다. (더 자세한 언급들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주로 내가 뉴질랜드에서 구한 저서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전쟁 동안에는 나의 목적들을 위하여 해외로부터 저서들을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전쟁이 끝난 후에 알아낸 바, 2권이 1935년에 발간되었을지라도 나는 예를 들어 로엡(Loeb)판 국가(Republic)을 (쇼리[Shorey]의 번역) 얻을 수 없었다. 내가 나중에 발견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그것이 단연코 최고의 번역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얻을 수 있던 번역본들은 아주 만족스럽지 못해서, 아담(Adam)의 탁월한 판본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매우 빈약한 그리스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번역을 시작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학교 문법책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그리스어 실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번역들에 내가 소모한 많은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로부터 결과가 없을 것이었다: 합리적으로 효과적인 영어로 개념을 분명하게 만들기를 내가 원한다면, 라틴어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독일어로부터도 번역들을 반복해서 내가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을 이전에 나는 발견했다. 나의 번역들에서 나는 편향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 번역들은 편향적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에 관해서는 편향되지 않은 번역이 없고, 없을 수도 없다고 나는 제안한다. 쇼리(Shorey)의 번역은 해이한a 편향이 없는 극소수의 번역 중 한 번역인데 왜냐하면 그가, 개략적으로 내가 플라톤의 정치학을 배척한 동일한 의미에서 그 정치학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주의의 빈곤을 Mind지에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그리고 1943년 2월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완성한 직후 (그 저서는 여러 번 다시 서술되었다) 나는 출간을 위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그 저서는 역경 속에서 저술되었다; 장서들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서 나는 이용 가능한 저서들에만 맞추어야 했다. 나의 가르치는 과제는 필사적일 정도로 무거웠고, 대학 당국은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난제들을 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했다. 뉴질랜드에 체재하는 동안 어떤 것도 출간하지 말라고 그리고 연구에 쓰이는 시간은, 내가 급여를 받는 강사로서 근무하는 시간에서 도둑질한 것이라는 말을 나는 들었다. 상황이 그러해서 뉴질랜드에 나의 친구들의 도덕적 지지가 없었더라면 나는 생존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원고를 보낸 미국에 있던 저 친구들의 반응은 지독한 타격이었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는 대신에 그들은 한 유명한 권위자에게 비평을 간청했는데 그는 나의 저서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아니다) 무관하므로 출판사에 보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판정했다.
거의 1년이 지나서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독한 절망에 빠졌을 때 나는 우연히 나의 친구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영국 주소를 얻었는데 그와 전쟁 동안에 나는 접촉이 끊어졌다. 매우 관대하게 자신의 도움을 제공한 하이에크(Hayek)와 (내가 평생 몇 번만 그를 만났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감히 수고를 끼치지 못했다) 함께, 그는 출판사를 찾아냈다. 두 사람 모두 그 저서에 관하여 매우 고무적인 편지를 보냈다. 안도감이 엄청났다. 이 두 사람들이 나의 생명을 구했다고 나는 느꼈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느낀다.
25. 뉴질랜드에서의 다른 연구
이것이 내가 뉴질랜드에서 수행한 유일한 연구는 아니었다. 나는 논리학에서 몇 가지 연구를 또한 수행했고 ㅡ 사실상 나는 스스로 지금은 “자연연역(natural deduction)”으로 지칭되는 것을 창안했다 ㅡ 과학사에서의 연구를 포함하여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했고 많은 강의를 했다. 후자(後者) 연구는 주로 발견에 관한 나의 개념들을 실제적 발견들에 적용하는 것을 본질로 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채워진 세상이라는 파메니데스적 이론과 같은 그릇된 이론들의 엄청난 역사적 중요성이 나 자신에게 명백해지도록 또한 노력했다.
뉴질랜드에서 나는, 뉴질랜드 왕립협회의 크라이스트처치 지사와 더니든(Dunedin) 의과대학에서 과학의 비귀납론적 방법들에 관하여 강의했다. 이 강의들은 에클스(Eccles) 교수에 (나중에 존 에클스 경[Sir John]) 의하여 시작되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의 나의 마지막 두 해 동안 나는 캔터베리 대학 과학부의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점심시간 강좌들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오늘날 나는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극도로 즐거웠다. 나중에 나는 전 세계 도처에서 이 과정들에 참석했던 이전 사람들을 만났는데 자신들의 눈을 뜨게 내가 만들었다고 나에게 확언한 과학자들이었다 ㅡ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매우 성공한 과학자들 몇 명이 있었다.
대학 당국자들 몇몇이 나의 연구에 보인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뉴질랜드를 많이 좋아했으며 나는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 생각이었다. 1945년 초에 나는 시드니 대학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외국인을 교수로 임명한 것에 관하여 호주에서는 몇몇 신문이 비판을 제기했고 의회에서는 몇 가지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다는 전보를 보내고 교수직을 거절했다. 그 후 곧 ㅡ 유럽에서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ㅡ 런던정경대학에서 머물면서 런던대학의 부교수직을 제공하고 역사주의의 빈곤을 Economica지에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하이에크(Hayek)에 의하여 서명된 전보를 나는 받았는데 그는 Economica지의 편집담당이었다. 하이에크가 나의 생명을 다시 한 번 구했다는 나는 느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뉴질랜드를 떠나려고 조바심했다.
26.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내가 뉴질랜드를 떠날 때 전시 상황이 여전히 지배적이어서 우리가 탄 배는 케이프 혼(Cape Horn)으로 회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것은 환상적으로 그리고 잊을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우리는 1946년 1월 초에 영국에 도착했으면 나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직무를 시작했다.
런던정경대학은 당시 방금 전쟁이 끝난 후에 탁월한 교육기관이었다. 그 대학은 직원들 모두가 서로 알고 있을 정도로 매우 작았다. 직원들은 숫자가 작았지만 뛰어났고 학생들도 그랬다. 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ㅡ 내가 나중에 런던정경대학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학과들 ㅡ 열성적이고 성숙하고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다; 그리고 그들은 교수에게 도전했다. 이 학생들 가운데 영국 해군장교였던 존 왓킨스(John Watkins)가 있었는데 런던정경대학에서 나의 후임자가 되었다.
나는 뉴질랜드로부터 많은 미해결 문제들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사회과학들의 방법을 포함하여 부분적으로 순전히 논리적이고 부분적으로 방법의 문제들이었다; 이제 사회과학부에 속했기 때문에 후자(後者) 문제들에는, 자연과학들에서의 방법의 문제들에 앞서서 나에 대하여 청구권이 있다고 ㅡ 당분간 ㅡ 나는 느꼈다. 그러나 사회과학들에는 이론적 자연과학들과 동일한 매력이 나에게는 없었다.a 사실상 나를 매료시킨 유일한 이론사회과학은 경제학이었다. 그러나 나에 앞선 많은 사람들처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그 과학들의 관점에서 비교하는 데 나는 흥미를 느꼈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내가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수행한 연구의 연속이었다.
내가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토론한 개념들 중 한 가지 개념은 예언된 사건에 미치는 예언의 영향력이었다. 나는 이것을 “오이디푸스 효과(Oedipus effect)”로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 신탁(神託: oracle)이, 자체의 예언을 이룩하는 연속적인 사건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정신분석가들에 대한 언급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환자들이 꾸는 바로 그 꿈들이 흔히 그 꿈을 분석하는 사람들이 지닌 이론들에 의하여 왜곡된다는 것을 프로이트[Freud] 자신이 인정했을지라도, 기묘하게 이 사실에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는 그 꿈들을 “강요하는 꿈들[obliging dreams]”로b 불렀다.) 잠시 동안 나는, 오이디푸스 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으로부터 분리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물학에서도 또한 ㅡ 심지어 분자생물학에서도 ㅡ 기대된 것을 야기하는 데 기대들이 흔히 어떤 역할을 한다. 아무튼 이것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는 표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이라는 생각을 내가 반박함으로써 나의 논문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에서의 비결정론(Indeterminism in Quantum Physics and Classical Physics)”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내가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 나의 첫 번째 논문은, 1946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와 정신학회(Mind Association)가 공동으로 개최한 “논리학과 산술의 계산들은 왜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가(Why are the Calculuses of Logic and Arithmetic Applicable to Reality)?”라는 학술회의에 기고해달라는 매우 친절한 초청으로부터 출현했다.a 그것은 흥미로운 모임이었고 나는 영국 철학자들, 특히 상당한 관심을 지녔던 라일(Ryle)에게서 최고의 친절함으로 환대를 받았다. 사실상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나의 기대들을 크게 뛰어넘어서, 영국에서 잘 수용되었다; 심지어 나의 저서를 증오했던 어느 플라톤주의자도, “거의 모든 문장이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ㅡ 물론 안이한 공감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한 ㅡ 나의 저서에 있는 “개념들의 풍요성”에 관하여 논평했다.
그러나 나의 사고방식, 나의 관심들 그리고 나의 문제들이 많은 영국 철학자들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왜 그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몇몇 경우들에서 그것은 아마도 과학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경우들에서 그것은 아마도 실증주의를 향한 그리고 언어철학을 향한 나의 비판적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조우하게 되는데 그 조우에 관하여 나는 아주 다양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1946-47년 학기 초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도덕학 클럽의 비서로부터 어떤 “철학적 수수께끼(philosophical puzzle)”에 논문 한 편을 강연해달라는 초청을 나는 받았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이었다는 것과 그것 배후에는, 철학에는 진짜 문제들이 없고 언어학적 수수께끼들만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논지가 있다는 것임은 물론 분명했다. 이 논지가 내가 아주 혐오하는 논지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철학적 문제들은 있는가?”에 관하여 강연하기로 결심했다. 그 비서에 의하여 “어떤 철학적 수수께끼”를 서술하는 논문을 강독해달라는 요청에 나의 놀람을 표현함으로써 나는 나의 논문을 (1946년 10월 26일 킹스 칼리지의 R. B. 브레이스웨이트[Braithwaite] 방에서 강독된)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부인함으로써 초청장을 쓴 누구도 진정한 철학적 문제에 의하여 야기된 논쟁에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편을 들었음을 지적했다.
이것에는, 나의 주제에 대한 도전적이고 다소 경박한 소개로서만의 의도가 있었음은 내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펄쩍 뛰면서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 화가 났다: “비서는 정확하게 자기가 지시를 받은 대로 행동했다. 그는 나 자신의 지시를 근거로 행동했다.” 나는 이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러나 밝혀진 바와 같이, 적어도 청중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을 칭송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것을 주목하고 결과적으로 비서에 대한 엄중한 불평이자 농담의 의도가 있던 나의 비평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의사록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비서 또한 그랬는데 의사록에 그는 그 사건을 각주를 붙여 보고한다: “이것이 클럽의 초청 형식이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이 없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철학자가 아닐 터이라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혹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많은 아니면 혹시 모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 없이, 옹호될 수 없는 해결책들을 채택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철학자가 되는 것에 정당성이 주어진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펄쩍 뛰어 나를 제지하고 수수께끼들과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상세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합당했던 어는 순간에 나는 그의 말에 끼어들어 다음과 같은 철학적 문제들에 관하여 내가 준비한 목록을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사물들을 아는가?, 우리는 귀납에 의하여 우리의 지식을 습득하는가? 이것들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이라고 배척했다. 그러자 나는 그가 수학적으로서 배척한 문제인, 잠재적이거나 혹시 심지어 실제적인 무한성들이 존재하는지의 문제를 언급했다. (이 배척 사실은 의사록에 등재되었다.) 그 다음에 나는 도덕적 문제들과 도덕적 규칙들의 성립 문제를 언급했다. 그 시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난롯가에 앉아서 자신의 주장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때때로 자신이 사용한 부지깽이를 신경질적으로 놀리고 있었는데 나에게 도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덕적 규칙의 사례를 제시하시오!”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부지깽이로 강사들을 위협하지 않는 것.” 그러자 비트겐슈타인은 화를 내면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문을 큰 소리를 내며 닫고 거칠게 방을 나갔다.
나는 정말로 매우 미안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도발하여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이 없다는 견해를 옹호하기를 그리고 이 쟁점을 근거로 그와 싸우기를 바라서 내가 케임브리지에 갔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를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나에게는 결코 없었다; 그래서 그가 농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농담을 하고 있었다고 그가 아마도 정말로 느꼈다는 것을 그리고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그것이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나의 문제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루기를 원했을지라도, 나는 진지했다 ㅡ 아마도 비트겐슈타인 자신보다 더 진지했는데 왜냐하면 결국 그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떠난 다음에 우리는 매우 유쾌한 토론을 경험했는데 그 토론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주요 강연자들 중 한 분이었다. 그리고 브레이스 웨이트(Braithwaite)는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모든 사람의 말을 제지하는 방식으로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제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칭찬했다 (아마도 의심스러운 칭찬).
다음날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의 나의 객실에는 학생 두 명이 서로 마주보고 앉았는데 남학생은 책을 읽고 있었고 여학생은 좌파 신문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그 여학생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칼 포퍼라는 이 사람은 누구지?” 남학생이 이렇게 답변했다: “그 사람에 대하여 들어본 적 없어.” 명성이 그 정도였다. (내가 나중에 알아낸 바와 같이, 그 신문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공격이 실렸다.)
도덕학 클럽의 모임은 거의 즉각적으로 무절제한 소문들의 대상이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내가 부지깽이를 들고 싸움질을 벌였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묻는 편지 한 통을 뉴질랜드로부터 받았다. 정곡을 찔렀고 소문들은 과장이 심하지 않았으며 크게 심하지 않았다.a
그 사건은 부분적으로 나의 습관에 기인할 수 있는데, 특정 청중들에게 수용될 수 없다고 내가 예상하는 내 견해들의 몇 가지 결론들을 내가 전개하려는 어떤 장소에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벌어진다. 이유인즉 강연에 관해서는 오직 한 가지 구실만 있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도전하는 것. 그것은 강연이 저서보다 나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것이, 내가 실행한 바와 같이 나의 주제를 선택한 이유이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과의 사이에 벌어진 이 논란은 근본적인 것들이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Nearer home the stories were less exaggerated, but not much.
인데 박중서 번역에 ‘그래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소문이 비교적 덜 과장된 편이지만, 그래도 과장이
없진 않았다.’로 번역되었다.
철학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 문제들 몇 가지를 내가 해결했다고.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백 년이나 된 철학적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결책이 가장 간절한 듯이 보인다.” 많은 철학자들의 견해, 특히 비트겐슈타인파의 견해는 어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철학적이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해결된 문제에 대한 추악한 소문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다.a 이 모든 것은 낡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실제적인 문제가 다루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고. 그리고 결국 이 해결책은 틀림없이 모두 틀렸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자주 이와 같은 태도가, 지나치게 동의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당시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비실재적인 인식론들로 장난을 치는 영국 철학자들의 경향이었다: 현상주의, 실증주의, 버클리적 혹은 흄적(Humean) 혹은 마흐적(Machian) 관념론(“중립적 일원론)”, 감각주의(sensationalism), 실용주의 ㅡ 철학자들의 이 노리개들은 당시 여전히 실재론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6년 동안 지속된 잔인한 전쟁 이후에 이 태도는 놀라웠고 그 태도는 조금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역사주의적 표현을 이용하여) 나는 느꼈다. 그리하여 1946-47년에 옥스퍼드에서 논문을 발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현상주의, 실증주의, 관념론 그리고 주관론에 대한 반박(A Refutation of Phenomenalism, Positivism, Idealism, and Subjectivism)”이라는 제목으로 나는 한 논문을 강연했다. 토론회에서 내가 공격한 견해들에 대한 옹호가 너무나 약해서 그 옹호는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 승리의 과실은 (만약 있다면) 일상언어에 관한 철학자들이 거두어들였는데 왜냐하면 언어철학이 곧 상식을 지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상식과 실재론을 고수하려는 그 철학의 시도들은, 나의 견해로 일상-언어 철학의 단연코 최고의 모습이다. 그러나 상식은, 흔히 옳을지라도 (그리고 특히 자체의 실재론에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상식이 틀렸을 때 실제로 사물들이 흥미롭게 된다. 이것들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계몽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는 경우들이다. 그것들은, 일상언어의 용법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 경우들이기도 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일상언어 그리고 그 언어와 함께 일상언어의 철학은 보수적이다. 그러나 지성(知性: intellects)에 관한 문제들에서 (아마도 예술이나 정치와 반대로) 보수주의가 가장 창조적이지 못하고 가장 진부하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된다: “인간의 합리성은, 원칙의 문제들에서 그가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 적이 없다는 것을 본질로 한다; 평판이 난 공리들(公理들: axioms)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당연히 여기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한다.”
27. 영국에서의 초기 연구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러한 것처럼, 나도 슬픔과 큰 서러움을 알았지만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온 이래 내가 철학자로서 불행한 시간을 보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나는 자주 해결 불가능한 난제들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문제들을 발견하는 데에서, 그 문제들과 씨름하는 데에서, 그리고 얼마간 진보를 이룩하는 데에서 매우 행복했다. 이것이, 최고의 삶이거나 최고의 삶이라고 나는 느꼈다.a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삶으로서 추천하는 관조만 하는 삶보다 (신성한 자기-관조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것이 무한히 나은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것은 완벽하게 안식이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의미에서 어떤 삶도 완벽하게 자족적인(autark)일 수가 없을지라도, 이것은 매우 자족적이었다 ㅡ 플라톤의 의미에서 자족적인(autark). 나의 아내도 나도 런던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에 우리가 버킹엄셔(Buckinghamshire)의 펜(Penn)으로 이사한 이후 나는 최고로 행복한 철학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의 연구에서 큰 도움을 내가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지성적 발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정보교환(feedback)이 또한 있다: 많은 행복의 커다란 근원들 중 한 가지 근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믿기 어려운 세상의 새로운 모습을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믿기 어려운 역할을 이곳저곳에서 일별하는 것이다.
우리가 버킹엄셔로 이사하기 전에 나의 주요 연구는 “자연 연역(natural deduction)”에 관해서였다. 나는 그것을 뉴질랜드에서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나의 논리학 강좌를 듣던 제자 한 명인 피터 먼즈(Peter Munz)가 (지금은 빅토리아 대학[Victoria University]의 역사 교수) 한 가지 논증을 이해하고 탁월하고도 독립적으로 전개하여 나에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자연 연역에 관한 문제들을 집합이론가인 폴 버네이즈(Paul Bernays)에게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에게 한번 말했다. (타스키[Tarski]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중요한 개념들을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어서 나는 그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버트 베스[Evert Beth]는 그것에 다소 실제적인 흥미를 보였다.) 그것은 매우 기초적이지만 기묘하게 아름답기도 한 ㅡ 내가 이전에 알던 논리적 이론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균형 잡힌 ㅡ 이론이었다.
이 탐구들을 고취시킨 일반적인 관심은 타스키의 논문 “논리적 결론의 개념에 관하여(On the Concept of Logical Consequence)”에서 유래했는데, 1935년 가을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는 그가 그 논문을 강독하는 것을 들었다. 이 논문과 특히 그 논문에 표현된 특정 의심사항들로 인하여 나는 두 가지 문제들에 도달했다: (1) 진리나 연역 가능성, 다시 말해서 진리의 전달이나 허위의 재전달을 통하여 논리를 정식화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2) 그 기능이 연역가능성을 (진리 전달) 통하여 완벽하게a 기술될 수 있는 상징들로서, 대상언어의 논리적 상수들(constants)을 특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이 문제들로부터,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나의 시도들로부터 많은 다른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몇 년 동안 노력한 후에 그 실수가 심각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리고 그 실수를 교정하면서 내가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들에 도달했을지라도, 내가 저지른 그 실수를 발견하고 나는 포기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나는 발표한 적이 없다.
국제 의미론학회 회의(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Significs)에 초대를 받아서 프리츠 바이즈만(Fritz Waismann)과 나는 1946년에 네덜란드로 여행했다. 이것은, 몇 년 동안 지속된 네덜란드와의 밀접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전에 나는 영국에서 물리학자 J. 클라이[Clay]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을 읽었고 나는 그와 많은 견해들을 공유했다.) 내가 수학에 대한 직관주의적 해석의 창시자인 브로우베르(Brouwer)와 헤이팅(Heyting) 및 그의 수제자인a 심리학자이자 방법론학자였던 A. D. 드 그루트(De Groot) 그리고 유스투스(Justus)와 헤르만 메이어(Herman Meijer) 형제를 만난 것은 이 때였다. 유스투스는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큰 관심을 갖고 거의 즉시 그 저서를 처음 네덜란드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949년에 나는 런던대학에서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감사표시로 나는 이 과목이 왜 존재하지 않는지를 ㅡ 몇몇 다른 존재하지 않는 과목들보다 훨씬 더 존재하지 않았다 ㅡ 설명함으로써 자주 과학적 방법에 관한 나의 강의들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강의를 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나는 강의 자료들을 반복해서 사용한 적이 없다.)
당시 영국에서 초기에 내가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은 곰브리치, 하이에크, 메더워(Medawar) 그리고 로빈스(Robbins)로부터였다 ㅡ 그들은 철학자들이 아니었다; 테렌스 허친슨(Terence Hutchinson)이 있었는데 그는 경제학의 방법들을 잘 이해하고 글을 썼다. 내가 영국에서 슈뢰딩거를 다시 만났고 티롤(Tyrol) 지역의 알파크(Alpbach)에서 아르투르 마르흐(Arthur March)와 여러 차례 훌륭한 만남을 가졌고 취리히에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와 한 차례 훌륭한 만남을 가졌지만, 내가 당시 가장 갈구하던 것은 물리학자와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28. 미국 첫 방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
1949년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윌리엄 제임스 강좌(William James Lectures)에서 강연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나의 첫 번째 미국 방문이 이루어졌고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도널드 윌리엄스(Donald Williams) 교수가 보낸 기대하지 않은 초청장을 나는 읽고 나는 무슨 착오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요제프 포퍼-린코이스(Joseph Popper-Lynkeus)라고 믿어져 초청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세 가지 연구를 수행 중이었다: 자연 연역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 확률의 다양한 공리화들(axiomatizations); 그리고 사회과학의 방법론. 8이나 10가지 강좌들로 구성된 과정에 들어맞는 듯이 보였던 유일한 주제는 이것들 중 마지막 것이어서 나는 “자연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연구(The Study of Nature and of Society)”를 강좌들의 제목으로 선정했다.
우리는 1950년 2월에 배를 타고 떠났다.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들 중에서 내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콰인(Quine)뿐이었다. 당시 나는 C. I. 루이스(Lewis), 도널드 윌리엄스(Donald Williams) 그리고 모튼 화이트(Morton White)도 역시 만났다. 나는 또한 1936년 이래로 처음 옛 친구들 몇 명을 만났다: 수학자 파울 보슈안(Paul Boschan),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 (그는 탁월한 물리학자 퍼시 브리지먼[Percy Bridgman]에게 나를 소개했는데 나는 그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율리우스 크라프트(Julius Kraft), 리하르트 폰 미제스,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 아브라함 발트(Abraham Wald) 그리고 빅토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 나는 또한 고트프리트 폰 하베르레르(Gottfried von Haberler)를 처음 만났는데 내가 나중에 하이에크로부터 들은 바와 같이, 분명히 나의 방법론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a 과학역사가들인 조지 사튼(Gorge Sarton)과 I. 버나드 코언(Bernard Cohen); 하버드 대학 총장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James Bryant Conant).
아마도 내가 미국에 대한 다소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미국이 마음에 들었다. 1950년에 자유의 느낌인 개인적인 독립심의 느낌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알던 가장 자유로운 국가인 뉴질랜드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이 때는 매카시즘(McCarthysm)의 ㅡ 지금쯤 절반은 잊힌 반(反)-공산주의 운동가인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의 ㅡ 초기 시절이었지만 일반적인 분위기로 판단하여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also met, for the first time, Gottfried von Haberler who, as I later heard from Hayek, had apparently been the first economist to become interested in my theory of method;인데 선행사가 고유명사인 경우에 관계대명사절은 제한적 용법으로 쓰이지 않고 계속적 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문장의 오류이다.
이 운동은 공포를 근거로 번성했는데 결국 자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버트런드 러셀과 이것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혹시 사태가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게 여기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항상 틀렸다: 독재는 어디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우리의 미국 방문에서 가장 크고 가장 지속적인 충격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발생했다. 나는 프린스턴 대학에 초대를 받아서 훨씬 더 긴 논문의 요약판인 “양자역학에서의 그리고 고전물리학에서의 비결정론(Indeterminism in Quantum Physics and in Classical Physics)”에 관한 논문 한편을 한 학술회의에서 강독했다. 토론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동의하는 말을 몇 마디 했고 보어(Bohr)는,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의 도움을 받아서 논증하여 양자역학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새롭고 고전물리학에서의 상황과 전혀 비교될 수 없다고 상세하게 (우리 둘만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말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나의 강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나는, 내가 받은 최고의 칭찬으로서 간주한다.
나는 처음에 폴 오펜하임(Paul Oppenheim)을 통하여 우리가 머물던 그의 집에서 나의 강독 이전에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것을 내가 매우 망설였지만, 그는 내가 다시 오도록 만들었다. 합해서 나는 그를 세 번 만났다. 우리의 대화의 주요 화제는 비결정론이었다. 나는 그의 결정론을 그가 포기하도록 설득했는데 그 결정론은, 변화는 인간의 망상이거나 매우 망상에 근접한다는 4-차원적 파메니데스의 덩어리 우주에 해당했다. (이것이 자신의 견해라는 데 그는 동의했고, 그 견해를 토론하는 동안 나는 그를 “파메니데스”라고 불렀다.)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시간 속에서 변화와 진정한 승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실재적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존하는 시간조각들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연속적으로 떠오른다는 이론에 의하여 해명될 수 없었다; 이유인즉 이런 종류의 “의식 속으로의 떠오름”에는 정확하게, 이론이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저 변화들의 승계와 동일한 특징이a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다소 명백한 생물학적 논증들을 끝어들였다: 생명체의 진화와 생명체들 특히 고등동물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은, 시간이 또 다른 (이방성[異方性: anisotropic]) 공간좌표인 양 시간을 해석하는 여하한 이론을 토대로 실제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 결국 우리는 공간좌표들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간좌표들이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좌표들을 실체화하는 것을 경계해야a 한다; 공간좌표들은 거의 전체적으로 자의적인 구축물들이다. 그렇다면 왜 시간좌표를 ㅡ 틀림없이 우리의 관성체계에 합당한 시간좌표 ㅡ 실재적으로서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서, 다시 말해서, 변화가 불가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여하한 것과 (우리의 움직임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은 제외하고) 독립적으로서 우리는 경험해야 하는가?b
시간과 변화라는 실재는 내가 보기에 실재론의 핵심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슈뢰딩거와 괴델[Gödel] 같은 실재론을 관념론적으로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렇게 간주되었다.)
내가 아인슈타인을 방문했을 때, 쉴프(Schilpp)가 편집한 생존하는 철학자들의 장서(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에서 아인슈타인 편이 막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간과 변화라는 실재에 반대하여 아인슈타인의 두 가지 상대성 이론들로부터 나온 논증들을 이용한 당시 유명한 괴델(Gödel)의 기고문을 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저 책에서 강력하게 실재론을 지지하고 나왔다. 그리고 분명히 괴델의 관념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답변에서, 괴델의 우주론적 방정식들에 대한 해결책들은 아마도 “물리학적 근거들을 토대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가능한 한 강력하게, 시간에 대한 관념론적a 견해에 대항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나의 확신을 아인슈타인-파메니데스에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또한, 관념론적a 견해가 결정론 및 비결정론 모두와 양립될 수 있을지라도 “열린” 우주를 ㅡ 과거와 현재가 정말로 미래에 엄격한 제한들을 가할지라도, 미래가 어떤 의미에서도 과거나 현재에 포함되지 않는 우주 ㅡ 지지하여 분명한 태도가 취해져야 함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상식을 너누 쉽게 포기하려는 우리의 이론들에 의하여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 매우 강력한 논증들이 (가령 괴델의 논증과 같은) 실재론에 반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느 날 혹시 어쩔 수 없이 실재론을 포기할 것임을 내가 그랬던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이 기꺼이 인정한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실재론을 (그 실재론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들이 상식에 근거했던)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에 관하여 그리고 비결정론에 (다시 말해서, 물리학의 불완전성) 관하여, 실재론에 관한 상황과 상황이 정확하게 비슷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신학적 용어들로 사물들을 표현하는 그 자신의 방식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이 태초부터 모든 것을 세상에 집어넣기를 원했다면 하느님은 변화가 없는, 생명체들과 진화가 없는 그리고 인간과 변화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없는 우주를 창조했을 터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심지어 하느님에 의해서도 기대되지 않은 사건들이 있는 살아있는 우주는 죽은 우주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 입장으로 인하여, 양자역학이 완벽하다는 보어의 주장을 향한 그의 비판적 자세가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분명히 하려고 나는 또한 노력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의 문제들을 더 멀리 밀고 나갈 수 있다고 그리고 일반적인 과학은 미완성으로 (이런저런 의미에서) 판명되기 쉽다고 제안하는 한 가지 입장이었다.
이유인즉 우리는 항상 왜-질문들을 계속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뉴튼이 자신의 이론을 진리라고 믿었을지라도 자신의 이론이 궁극적인 설명을 제시한다고 믿지 않아서 그는 원격작용에 대하여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역학적 밀치기(mechanical push)가 (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에서의 작용) 궁극적이라고 믿지 않아서 그는 반발력(repulsive forces)을 통한 설명을 요구했다; 나중에 물질에 대한 전기적(electrical) 이론에 의하여 주어진 설명. 설명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우리는 항상 또 다른 왜-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왜-질문은, 옛 이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수정하는 한 가지 새로운 이론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물리학의 진화가 끝없는 수정과, 더 나은 근사치의 과정일 것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이론들이 참일 따름이기 때문에 그 이론들이 더 이상 수정에 좌우되지 않는 단계에 우리가 도달할지라도 그 이론들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을 터이다 ㅡ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 터이다. 이유인즉 괴델의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定理)가 유효할 터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수학적 배경을 고려하면, 주어진 (형식화된) 이론에서 결정될 수 없을 터인 문제들에 답변하기 위하여 기껏해야 그렇게 참인 이론들의 무한수열이 필요할 터이다.a
그런 고찰들로 인하여 객관적인 물리적 세상의 불완전함이나 비결정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런 고찰들로 인하여 우리의 노력들에 있는 본질적인 불완전성이 밝혀질 따름이다.204a 그러나 그 고찰들로 인하여, 물리적 세상은 결정론적이라는 견해를 과학이 진정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단계에 과학이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조금이라도 가능할지라도) 또한 밝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상식의 판단을b 수용해서는 ㅡ 적어도 이 논증들이 반증될 때까지 ㅡ 안 되는가?
이것이, 내가 아인슈타인-파메니데스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한 논증의 요지이다. 이것 외에도 조작주의a, 실증주의와 실증주의자들과 그들이 지닌 형이상학에 대한 기묘한 두려움, 검증 대(對) 오류판정, 오류판정 가능성 그리고 단순성과 같은 문제들을 더 간략하게 우리는 또한 토론했다. 단순성에 관한 나의 제안들이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더 단순한 이론은 사건들의 가능한 상태들을 배제하는, 자체가 지닌 더 큰 능력 때문에 선호된다는 것을 당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음을 아인슈타인이 생각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는 놀랐다; 다시 말해서, 더 간단한 이론이 지닌 더 나은 시험가능성.
우리가 토론한 또 다른 주제는 보어(Bohr)와 상보성이었다 ㅡ 전날 밤 보어가 토론회에 기여한 뒤 피할 수 없는 주제;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쉴프(Schilpp)의 저서에서 자신이 지적한 것을 가장 강력한 용어들로 반복했다: 최대한으로 노력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보어가 상보성에 의하여 의미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
원자폭탄 이론의 사소함에 관한, 한 명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견해에서 기인하는, 아인슈타인의 신랄한 비평들 몇 가지를 나는 기억하는데, 러더포드(Ruderford)가 원자력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다소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아마도 이 비평들은 그가 원자폭탄과 그 폭탄에 포함된 모든 것을 혐오해서 다소 변질되었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진심으로 말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본질적으로 옳았다.
아인슈타인의 개성이 남긴 인상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인상은, 사람들이 그에게 즉각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함으로써 기술될 것이다.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솔직성, 그의 친절, 그의 훌륭한 감각, 그의 지혜 그리고 거의 어린애 같은 그의 단순성을 함축적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이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평가를 받고 그렇게 큰 명예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미국을 위하여 의미심장했다.
프린스턴 대학을 방문한 동안 나는 쿠르트 괴델을 다시 만나서 아인슈타인 편에 대한 그의 기고문과 물리학에 대하여 그의 불완전성 정리가 지닌 가능한 중요성의 몇몇 측면들을 그와 토론했다.
우리가 버킹엄셔의 펜(Penn)으로 이사한 것은 미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였는데 펜(Penn)은 당시 조용하고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었다. 여기서 나는 이전에 연구한 것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29. 문제들과 이론들
유명한 “변증법적 3단계(dialectic triad)” (정[thesis]: 반[antithesis]: 합[synthesis])을 시행 및 착오-제거 방식의 한 가지 형태로서 해석함으로써 그 3단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1937년에 이미, 모든 과학적 토론들은 문제 (P )으로써 시작한다고 나는 제안했는데 그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종류의 잠정적 해결책을 ㅡ 잠정적 이론(TT) ㅡ 제시한다; 이 잠정적 이론은 그다음에 오류제거 (EE)를 시도하면서 비판된다; 그리고 변증법의 경우에서처럼, 이 과정은 재개된다: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비판적 수정으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들이(P ) 생긴다.
나중에 나는 이것은 다음 도식으로 축약했다:
P → TT → EE → P 인데
내가 강의에서 자주 사용한 도식이다.
과학은 문제들로 시작하여 문제들로 끝난다고 말함으로써 나는 이 도식을 즐겨 요약했다. 그러나 나는 이 요약에 관하여 항상 염려했는데 이유인즉 모든 과학적 문제들은, 자기 차례에서, 이론적 맥락에서 출현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과학적 문제는 이론에 잠긴다. 그래서 우리가 여하한 장소에서도 그 도식을 시작할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TT 으로 시작하여 TT 로 끝낼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EE 으로 시작하여 EE 로 끝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이론적 발전이 시작되는 것은 흔히 어떤 실용적 문제로부터라고 부언했다; 그리고 실용적인 문제들을 언명하면 불가피하게 이론이 나타날지라도 실용적 문제 자체는 “느껴질” 따름일 것이다: 실용적 문제는 “언어 이전”일 것이다; 우리는 ㅡ 혹은 아메바 ㅡ 추위나 어떤 다른 짜증을 느낄지 모르고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나 아메바는, 짜증을 없애기 위하여, 잠정적인 행동들을 ㅡ 아마도 이론적인 행동들 ㅡ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인가, 문제인가 이론인가?”라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실상 나는 그 문제가 예기치 않게 생산적이고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
이유인즉 실용적인 문제들은,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든 아메바든 생명체는 어떤 기대나 어떤 다른 구조를 (가령, 어떤 기관[器官: organ])을 진화시킴으로써 이전에 자체의 환경에 적응하였음을 (아마도 부적당하게)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적응은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에 대한 의식 이전의 형태이다; 그리고 어떤 실용적인 문제도 이런 종류의 어떤 적응과 상관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실용적인 문제들에는 본질적으로 이론들이 스며든다.
사실상 우리는, 예기치 않게 흥미로운 결론들을 낳는 결과에 도달한다: 첫 번째 이론과 ㅡ 다시 말해서 문제들에 대한 첫 번째 잠정적인 해결책들 ㅡ 첫 번째 문제들은 틀림없이 어떤 방식으로 함께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추가적인 결론들을 낳는다:
유기체적 구조들과 문제들은 함께 출현한다. 혹은 달리 표현하여, 유기체적
구조들은 문제-해결 구조들일 뿐만 아니라 이론-함유적이다.
나중에 (특히 아래, 이 자서전의 37절에서) 나는 생물학과 진화이론으로 복귀하겠다. 여기서 나는, 정식화되고 이론적인 문제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느껴지는” 문제들이자 실용적인 문제들이기도 한 문제들의 다양한 구분들을 둘러싼 몇 가지 미묘한 쟁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따름이다.
이 쟁점들 가운데는 다음 쟁점들이 있다.
(1) 정식화된 문제와 정식화된 (잠정적) 해결책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논리적 관계로서 간주될 것이다.
(2) 그러나 “느껴지는” 문제와 (혹은 실용적인 문제) 해결책 사이의 관계는 생물학의 근본적인 관계이다. 그 관계는, 개별적인 생명체들의 행태를 기술함에서 혹은 종(種: species)이나 문(門: phylum)의 진화이론에서 중요할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ㅡ 아마도 모든 문제들 ㅡ “생존 문제들”이상으로 그 문제들은 바로 특정 상황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이다.)
(3) 문제들과 해결책들 사이의 관계는 분명히, 개별적인 생명체들 특히 인간 생명체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과학의 역사와 같은 지성적 노력의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역사는 틀림없이 문제 상황들에 관한 역사라고 나는 제안한다.
(4) 다른 한편으로 이 관계는 우주의 비생명체적 진화의 혹은 우주의 비생명체적 부분들의 역사에서 (가령, 별들의 진화의 역사에서 혹은 안정요소들[stable elements]이나 안정화합물들[stable compounds]의 “생존” 역사 그리고 결과적으로 희귀한 불안정요소들이나 불안정화합물들의 “생존” 역사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매우 다른 요점이 또한 어느 정도 중요하다.
(5) 가령 어떤 생명체가 문제 P 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고 우리가 말할 때마다, 우리는 다소 위태로운 역사관련 추측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역사관련 추측일지라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역사관련이나 생물학적 이론들에 비추어 제시되지 않는다. 그 추측은 가령 역사관련 문제 P(P )을 해결하려는 시도인데 그 문제는, 추측에 의하여 문제의 생명체에게 귀속되는 문제 P 과 완전히 구별된다. 그리하여 과학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P(P )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케플러와 같은 과학자는 자신이 P 을 풀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케플러는 P 혹은 또 다른 문제를 풀었나? 실제적인 문제 상황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P(P )에 대한 해결책은 정말로, 케플러가 자신이 풀었다고 믿었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일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바와 같이) 터이다.
동물 수준에서 어느 과학자가 개별적인 동물이나 종(種: species)에 (가령 페니실린으로 처리된 미생물) 대하여, 그 동물이나 종에게 닥친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가령, 페니실린 저항력이 생김) 그 동물이나 종이 도달했다고 추측하는지는 물론 항상 추측성이다 ㅡ 사실상 그것은 고도로 이론적인 구축이다. 그런 자의적 자리매김은 은유적으로, 심지어 의인화(擬人化: anthropomorphic)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환경적 상황이 그러해서 종(種: species)이 (혹은 생명체들의 개체군) 특정 방식으로 변하지 (아마도 자체의 유전자 개체군의 분포에서의 변화에 의하여) 않는다면 문제에 빠질 것이라는 추측을 서술할 따름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하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문제들을 정식화한다는 것이 어려운 과제임을 그리고 우리가 이 과제에서 흔히 실패함을 알고 있다. 문제들은, 시험 치르기에서처럼 정말로 미리 만들어진 어떤 문제로 인하여 우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쉽게 발견되지도 서술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시험관은 자신의 문제를 잘 언명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를 언명하는 문제가 ㅡ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언명될 문제인지의 문제 ㅡ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하여 문제들, 심지어 실용적인 문제들도 항상 이론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들은,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인 해결책들로서 그리고 문제 상황들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오해들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토론된 문제들과 이론들 사이의 관계들은 “문제”와 “이론”이라는 단어들의 관계들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용법들이나 개념들을 토론하지 않았다. 내가 토론한 것은 문제들과 이론들 ㅡ 특히 문제들에 선행하는 저 이론들 ㅡ 사이의 관계들이었다; 이론들로부터 혹은 이론들과 동시에a 발생하는 저 문제들; 그리고 특정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인 해결책들인 저 이론들.
30. 슈뢰딩거와의 논쟁들
슈뢰딩거가 런던에 온다고 나에게 알려서 내가 그의 친구 한 명의 마구간을 개조한 집에서 그를 만난 것은 1947년 아니면 1948년이었다. 그 후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편지들을 통하여 그리고 런던 나중에는 더블린과 티롤(Tyrol) 지방의 알파크(Alpach)와 비엔나에서 상당히 규칙적으로 접촉했다.
1960년에 나는 비엔나에서 입원했고 그도 너무 아파서 병문안을 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아내 안네마리(Annemarie) 슈뢰딩거가 매일 나에게 병문안을 왔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파스퇴르가스(Pasteurgasse)에 있는 그들의 아파트로 그들을 방문했다. 그것은 내가 그를 본 마지막 만남이었다.
우리의 관계들은 다소 거칠었다. 그를 아는 어떤 사람도 이것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관하여 격렬하게 의견이 갈렸다. 원래 나는, 그가 볼츠만을 칭찬하는 것과 함께 그가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믿지 않을 것을 거의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어느 날 (대략 1954년 아니면 1955년) 내가 당시 통상적으로 “중립적 일원론”으로 지칭되던 마흐의 견해를 비판했을 때 ㅡ 마
a 역주: ‘혹은 이론들과 동시에’의 원어 표현은 or with theories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흐의 의도들과 반대로 이 교설이 관념론의 한 가지 형태라는 데 우리 둘이 동의했을지라도 ㅡ 우리들이 겪은 가장 격렬한 충돌이 시작되었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관념론을 쇼펜하우어로부터 흡수했다. 그러나 나는, 볼츠만이 혹독하게 말했고 예를 들어 철학자로 자처한 적이 없는 처칠이 탁월한 반대 논증들을 펼쳤던 철학인 이 철학의 약점을 그가 보기를 나는 기대했다. 슈뢰딩거가 그런 감각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견해들을 “우리의 모든 지식은... 전적으로 즉각적인a 감각 감지에 의존한다”로서 표현했을 때 나는 훨씬 더 놀랐다.
나의 논문 “시간의 화살”에 관하여 우리는 또 달리 격렬하게 충돌했는데 그 논문에서 엔트로피가 물리적 과정들과 연결되든 말든 비가역적인 물리적 과정들의 존재를 나는 주장했다. 전형적인 경우는, 팽창하는 지구 광선파장이나 입자들을 무한으로 (뉴튼 공간의) 보내는 과정이다 (외파[外破: explosion]과 같은). 반대의 경우는 ㅡ 무한으로부터 수축되는 가간섭성 지구 파(可干涉性 地球 波: a coherent spherical wave)가 (혹은 무한으로부터의 내파[內破: implosion]) 발생할 수 없다 ㅡ 그런 일이 빛 전파에 관한 혹은 운동에 관한b 보편법칙들에 의하여 배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초기조건들을 실현하기에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할 터이기 때문이다.c
슈뢰딩거는 볼츠만의 이론을 구조하려고 노력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논문들을 썼는데, 볼츠만의 이론에 따르면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은 시간 방향을 완전히 결정했다 (혹은 이 방향을 “정의[定義]했다” ㅡ 그러나 이것에 관하여 잊어버리자). 내가 제안한 방법과 같은 방법이 있다면 이 이론이 붕괴할 터이라고 그는 주장했는데, 내가 제안한 방법에 의하여 우리는 엔트로피 증가와 독립적으로 시간의 화살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 우리의 의견을 일치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말해달라고 내가 그에게 요구했을 때, 슈뢰딩거는 물리학에 가장 아름다운 이론을 ㅡ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지닌 이론 ㅡ 감정도 없이 파괴했다고 나를 비판했다; 어떤 철학자도 감히 해치지 못할 이론.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이 그런 이론을 공격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건방지다고 그는 느꼈다. 정신과 물질(Mind and Matter)에 새로운 구절을 삽입함에 (괄호 속에) 의하여 그는 이것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이것에는 물리학자의 방법론에 관한 중요한 결론이 있다. 물리학자는 독립적으로 시간의 화살을 결정하는 어떤 것도 도입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면 볼츠만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붕괴한다.” 슈뢰딩거가 열정에 휩쓸렸다고 나는 여전히 느낀다: 물리학자나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시간의 화살을 결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슈뢰딩거가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 이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결론이 이것에 있다면, 좋든 싫든 그는 볼츠만-슈뢰딩거 이론의 붕괴와 그 이론에 근거한 관념론의 붕괴를 위한 논증을 수용해야 한다. 슈뢰딩거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 것은 ㅡ 그가 또 다른 출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면 ㅡ 틀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의 논지에 ㅡ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지 않았다지만 그는 그 논지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ㅡ 관한 또 다른 충돌은 그의 아름다운 저서 생명은 무엇인가(What is Life)?에 있다. 이것은 천재의 저서인데 특히 “유전적 암호문(The Hereditary Code-Script)”이라는 제목의 짧은 절에서 그러한데 그 절은 바로 자체의 제목이 생물학적 이론들 중 가장 중요한 이론 한 가지를 담고 있다. 정말로 그 저서는 기적이다: 교양이 있는 비과학자들을 위하여 쓰여서도 그 저서는 새롭고 선구적인 과학적 개념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저서는 자체의 주요 질문인 “생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내가 보기에 완전히 명백하게 틀린 제안을 담고 있다. 6장에는 “생명체의 특징은 무엇인가? 언제 물질 한 조각이 살아있다고 언급되는가?”라는 단어들로 시작되는 절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슈뢰딩거는 다음 절의 제목에서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이 절의 첫 번째 문장은, “생명체가 그렇게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것은 ‘평형’이라는 무기력 상태로 급격히 쇠퇴하는 것을 피함에 의해서이다...”라고 쓰여 있다. 통계적 엔트로피 이론을 개괄적으로 토론한 후에,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통계적 이론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체의 탁월한 능력을 표현할 것인가, 그 능력에 의하여 생명체는 열역학적 평형으로의 (죽음) 쇠퇴를 늦추는데? 우리는 이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한 줄기 음 엔트로피를 끌어들여a, ‘그것은 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그리고 그는 부언한다: “그리하여 상당히 높은 질서의 수준에서 (상당히 낮은 엔트로피의 수준) 생명체가 정지된 상태로 자체를 유지하는 장치는b, 실제로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질서를 지속적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본질로 한다.”
지금은 인정되는 바와 같이 생명체들은 모두 이렇게 한다. 그러나 생명체에, 즉 유기체들에 특징적인 것이 이것이라는 슈뢰딩거의 논지를 나는 부인했고 여전히 부인한다; 이유인즉 그것은 모든 증기기관에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기름보일러와 모든 자동태엽시계는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질서를 빨아들인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질문에 대한 슈뢰딩거의 답변은 옳을 리가 없다: 음 엔트로피를 먹고사는 것은 “생명체의 특징”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슈뢰딩거와 다른 나의 의견들 중 몇 가지 의견들에 관하여 서술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한 번 이상 우리의 관점들이 최종적 갈라짐으로 보였던 모든 우리의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돌아와 우리의 토론들을 ㅡ 다른 물리학자와 내가 벌인 어떤 토론보다도 더 흥미롭고 틀림없이 더 자극적인 토론들 ㅡ 재개했다. 우리가 토론한 주제들은, 내가 얼마간 연구하려던 주제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저 탁월한 저서에서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내 자신이 남의 도움 없이 그 질문을 다시 제기할 용기가 나에게 생겼다 (비록 내가 무엇인가?라는 형태의 질문을 피하고 노력했지만).
이 자서전의 나머지 부분에서,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는 곳에서 내가 역사관련 비평들을 낼지라도 사건들에 관해서라기보다는 개념들에 관하여 보고할 의도가 나에게 있다. 내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나의 후기 세월 동안에 내가 다룬 그리고 내가 여전히 다루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과 문제들의 탐구이다. 그것들 중 몇 가지는, 내가 슈뢰딩거와 토론하는 커다란 행운을 경험했던 문제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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