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끝없는 탐구, 11-20절

이윤진이카루스 2020. 7. 19. 20:52

11. 음악

 

이 모든 것에서 음악에 관한 사념들이, 특히 나의 수습생 시절 동안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음악은 나의 생애에서 압도적인 주제였다. 나의 모친은 매우 음악적이었다: 나의 모친의 피아노 연주는 아름다웠다. 음악은 가족들에서 흐르는 것이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로 큰 수수께끼였다. 유럽의 음악은 유전적인 근거를 가지기에는 너무 최근에 창안된 것이고 원시적인 음악은, 던스터불(Dunstable)과 두파이(Dufay)와 조스켕 데 프레(Josquin des Prés)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와 라수스(Lassus) 그리고 버드(Byrd) 이래 작곡된 음악을 매우 음악적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만큼 혐오하는 음악이다.

이것이 어떠하든, 나의 외가는 음악적이었다. 그것은 나의 외조모 가문인 슐레징어(Schlesinger) 가문을 통하여 내려왔을 것이다.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슐레징어 가문의 일원이었다. 나는 사실상, 특히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에서 그의 지도로 노래를 부른 다음에 그의 가문을 찬미하지 않았다.) 나의 외조부모인 쉬프(Schiff) 부부는 유명한 음악애호가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창립자들이었고 그 협회는 비엔나에 아름다운 음악클럽 공연장(Musikvereinsaal)을 건축했다. 나의 이모들 두 명은 모두 피아노 연주를 매우 잘했다. 큰 이모는 전문 피아노 연주가였는데 그분의 세 자녀들도 나의 다른 세 명의 외사촌들과 마찬가지로 유능한 음악가들이었다. 나의 외삼촌들 중 한 분은 여러 해 동안 뛰어난 4중주단에서 제1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린이로서 나는 몇 번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지만 나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 교습을 받지 않았고 피아노 연주를 즐겼지만 나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형편없었다 (나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한다). 17살이 되자 나는 루돌프 세르킨(Rudolf Serkin)을 만났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나의 생애를 통하여 나는, 몰아지경에서 그가 연주하는 곡에 완전히 빠져 필적할 수 없는 그의 연주 방식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로 남았다.

잠시 동안 1920년 가을과 아마도 1922년 사이 나는 나 자신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다른 것들과 수학, 물리학, 가구 제조 같이 나는 결국, 실제로 충분한 실력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바흐의 악곡들을 나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삼으면서 나의 생애를 통하여 나는 작곡을 조금 했지만 나의 작곡들에 장점들이 있다고 나 자신을 기만한 적은 없었다.

나는 음악 분야에서 항상 보수적이었다. 내가 브루크너(Bruckner)(특히 그의 마지막 교향곡 세 편) 브람스의 몇 곡 (레퀴엠[the Requiem]) 좋아하고 찬양했을지라도 슈베르트가 실제로 위대한 작곡가들의 마지막 작곡가라고 나는 느꼈다. 나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작곡가로서 보다는 니벨룽겐의 반지(the Ring)의 극본 단어들을 (솔직히 내가 웃기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었을 따름인) 극작한 사람으로서 훨씬 더 혐오했고 내가 바그너와 라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두 사람 모두가 열정적인a 음악가임을 완벽하게 이해했을지라도 나는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매우 혐오했다.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에는 현대를 위하여 개작된 피가로[Figaro]인 의도가 있음을 누구라고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사관련 의도가 잘못 구상된 것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어떻게 슈트라우스 같은 음악가가 심지어 잠시 동안이라도 이 의도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감각할 수 있을 터인가?) 그러나 말러(Mahler) 음악의 어떤 영향을 (지속되지 않은 영향) 그리고 말러가 쇤베르크(Schönberg)를 옹호했다는 사실의 영향을 받아서, 현대 음악을 알아서 좋아하게 되려고 실제로 내가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가 주재하는 개인연주협회(the Society of Private Perfomances["Verein für musikalische Privataufführungen]"]의 회원이 되었다. 그 협회는,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 안톤 폰 베베른(Anton von Webern) 그리고 라벨(Ravel)과 바르토크(Bartók) 그리고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와 같은 진보된(advanced)” 다른 현대 작곡가들의 작곡음악들을 주로 연주하였다. 잠시 동안 나는 쇤베르크의 제자인 에르빈 슈타인(Erwin Stein)의 제자가 되었지만 나는 그의 교습을 받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 협회의 연주회들에 관하여 그의 연습들을 다소 도왔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쇤베르크의 음악 중 몇 가지를 익숙하게 알게 되었는데 특히 실내교향곡(Kammersymphonies)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였다. 나는 또한 베베른의 예행연습에도 갔는데 특히 그의 관현악소품(Orchesterstücke)의 예행연습이었고 베르크(Berg)의 예행연습에도 갔다.

2년 후 나는, 중요한 것을 알게 내가 시작해야 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내가 당시 좋아한 일종의 음악에 관하여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약 1년 동안 매우 다른 음악파의 제자가 되었다: 비엔나 음악원(Vienna Konservatorium["Academy of Music"]에 있는 교회 음악부. 나는 내가 작곡한 푸가를 근거로 입학했다. 내가 앞에서 언급된 결심을 한 것은 그해 말엽이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ull-blooded인데 박중서 번역에 천부적인으로 번역되었다.

었다: 내가 음악가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없다는 결심. 그러나 이 모든 것으

로 인하여 고전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이 증폭되었고 위대한 옛 작곡가들에 대한 나의 무한한 찬사가 커졌다.a

음악과 좁은 의미에서의 나의 지성적 발전 사이의 관련성은, 음악에 대한 나의 관심으로부터 일생 나에게 영향을 미친 적어도 세 가지 개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 가지 개념은,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에 관한 나의 개념들과 그리고 독단들과 전통들의 중요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두 번째 개념은 두 가지 종류의 음악 작곡을 구분한 것인데 당시 나는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고 느꼈고 그 구분을 위하여 나 자신이 사용하려고 객관적

주관적이라는 용어들을 취했다. 세 번째 개념은, 음악에서의 그리고 일반적인 예술들에서 역사주의적 개념들이 지닌 빈곤한 지성과 파멸적인 힘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이제 이 세 가지 개념들을 토론하겠다.

 

12. 다성 음악(Polyphonic Music)의 발흥에 관한 사념들:

발견에 관한 심리학인가, 발견에 관한 논리인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서술할 사념들은, 앞에서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에 관하여 보도된 나의 사념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그 사념들은, 저 심리학적 개념들을 또 다른 분야에 적용하려는 나의 최초 시도들 중 한 가지 시도였다고 나는 믿는다; 나중에 그 시도들로 인하여 나는 그리스 과학의 발흥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 과학에 관한 개념들은 역사적으로 결실이 풍부했음을 나는 발견했다; 다성 음악(polyphonic music)에 관한 개념들은 역사적으로 잘못 생각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나중에 나는 음악사를, 철학 박사 시험을 위한 제2과목으로서 선택했는데 그리하여 그것들에서 뭔가가 있는지를 조사할 기회가 나에게 생길 터이어서 그랬지만 나는 완전히 실패해서 나는 곧 다른 문제들을 주목했다. 사실상 당시는 이 분야에서 내가 알고 있던 적이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들은 나중에 내가 칸트를 재해석하는 데 그리고 발견의 심리학에서 객관론적인 인식으로 다시 말해서, 발견의 논리학으로 나의 관심을 바꾸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나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다성 음악(polyphony)은 과학처럼 우리의 서구 문명에 고유한 것이다. (나는 대위법[counterpoint]뿐만 아니라 서구의 화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다성음악[polyphon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학과 달리 다성 음악은 그리스가 시발점으로 보이지 않지만 기원후 9세기와 15세기 사이에 출현한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음악은 아마도, 과학을 배제하지 않고, 우리 서구문명의 가장 전무후무하고 독창적이고 정말로 기적적인 업적이다.

사실들은 이런 듯이 보인다. 많은 선율적 가창이 춤곡, 민속음악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교회음악 있었다. 선율들은 교회에서 가창되는 바와 같이, 특히 느린 선율들 물론 때때로 병행8도들(parallel octaves)로 가창되었다. 선율들이 평행5도들(parallel fifths)(최저음[the bass]으로부터 계산되면 그렇지 않지만 8[octave]로 간주되면 또한 4도들[fourths]도 만드는) 또한 가창되었다는 보고서들이 있다. 이 노래 부르기의 방식은 (“다성 음악 양식[organum]”) 10세기부터 보고되어 아마도 더 일찍 존재했다. 단성 성가(plainsong)도 병행3도들(parallel thirds)에서 그리고/또는 평행6도들(parallel sixths)에서 (최저음에서 계산되어: “포부르동[fauxbourdon]”, “파버든(faburden)”) 가창되었다. 이것은, 반주나 심지어 장식음과 같은 것인 진짜 혁신으로 느껴졌던 듯이 보인다.

아마도 다음 단계였던 것은 (그 시발점들이 심지어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언급될지라도), 단성성가(plainsong) 선율이 변하지 않고 남아있던 반면 화성은 더 이상 평행3도들(parallel thirds)과 평행6도들(parallel sixths)로만 진행하지 않았던 듯하다는 것이다. 음표에 대한 음표의 역평행(antiparallel) 악장은 (대위법[punctus contra punctum, point counter point])은 당시 허용되어서 최저음에서 계산되어 3도들(thirds)6도들(sixths)뿐만 아니라 5도들(fifths)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리하여 이것들과 다른 화성들 중 몇 가지 화성들 사이에 4도들(fourths)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의 사념들에서 대위법의 발명인 이 마지막 단계를 나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 아주 확실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다성 음악을 낳은 단계였다.

다성 음악 양식(organum)은 당시 아마도, 교회음악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는 제외하고, 단성 선율(one-voice melody)에 대한 추가사항으로서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선율을 노래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집회의 다양한 화성 수준들로부터만 출현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a. 그리하여 그것은 종교적 관행으로 인하여 예기치 않게 생긴 결과, 즉 집회에서 응창(應唱: response)하면서 암송한 것이다. 집회에서 노래하면서 이런 종류의 오류들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영국성공회의 축제 응창(應唱: response)에서 테너에 정선율(cantus firmus)을 두고, 테너 대신에 최고 성부인 최고음역(treble)을 따르는 (8도로)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아무튼 엄격하게 병행하여 노래를 부른다면 다성 음악은 없다. 한 가지 이상의 화성이 있을 것이지만 한 가지 선율만 있다.

대위법 가창의 시작도 집회에서 일어난 오류들 때문이었다고 완벽하게 상상될 수 있다. 이유인즉 병행으로 가창하면 음표를 노래할 수 있는 것보다 높은 음표에 음성이 도달하게 될 터일 때, 그 음성은 아래 다음 성부가 부르는 음표까지 떨어졌을 것이고 그리하여 병행 cum punctob 움직이기보다는 대위(contra punctum)c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성 음악 양식(organum)이나 포부르동(fauxbourdon) 가창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것으로 인하여 11 음표 대위법에 대한 제1 기초법칙이 설명될 터이다: 반대악장(countermovement)d 결과가 단지 한 가지 8도나 5도나 3도나 6도가 (항상 최저음에서 계산되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이 대위법이 시작된 방식일지라도 대위법의 창안, 여기에 원래 혹은 근본 선율인 정선율(

 

a 역주: ‘가능성이 아주 크다의 원문 표현은 quite possible인데 박중서 번역에 가능성도 있다

번역되었다.

b 역주: 아래에 나오는 contra punctum의 반대말인 듯한데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알 수

없고, 박중서 번역에는 쿰 푼크토(음표와 함께)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표현은 박중서 번역에 콘트라 푼크툼(움표에 대해)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절에서 음악용어로 movement로 표현된 원어는 박중서 번역에 진행으로 번역되었고 이 경우에는 반진행으로 번역되었다.

 

旋律: the cantus firmus)과 함께 가창될 다소a 독립적인 두 번째 선율에 관

한 가능성이 있음을 최초로 깨달은 음악가에게서 틀림없이 기인한다. 그 가창 가능성은 다성 음악 양식(organum)이나 포부르동(fauxbourdon) 가창이 그랬던 바와 같이 정선율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대위법의 두 번째 기초법칙을 낳는다: 병행 8도들과 5도들은, 이것들이 독립적인 두 번째 선율의 의도된 효과를 파괴할 터이기 때문에 회피되어야 한다. 정말로 병행 8도들과 5도들은 의도하지 않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다성 음악 양식(organum) 효과를 야기하고 그리하여 두 번째 선율과 같은 것이 사라지게 만드는데 이유인즉 두 번째 성부는 (다성 음악 양식[organum] 가창에서와같이) 정선율(定旋律: the cantus firmus)을 강요할 따름일 터이기 때문이다. 병행 3도들과 6도들은 (fauxbourdon에서와 같이), 실제적인 반대악장(counter movement)(몇 가지 부분들과 관련하여) 의하여 상당히 곧b 선행되거나 후행된다면, 허용되는 단계들이다.

그리하여 기본 개념은 이렇다. 기본적이거나 주어진 선율인 정선율(the cantus firmus)은 두 번째 선율에 (혹은 대위법[counterpoint]) 한계들을 부과하지만 이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대위법은 (counterpoint) 마치 자유롭게 창안된 독립적인 선율인양 본질적으로 선율적이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다성 음악 양식(organum) 포부르동(fauxbourdon)과 달리 전혀 정선율(the cantus firmus)에 의존하지 않을지라도, 정선율(the cantus firmus)에 들어맞는 선율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대신 내가 이것과 관련하여 실행한 역사관련 추측을 사실상 허위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추가적 개념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했던 추측 설명하겠다. 그 추측은 이렇다.

그리스인들의 유산과 암브로시우스 대주교(Ambrose)와 교황 그레고리 1(Gregory the Great) 시대의 교회 음계들의 발전을 (그리고 모방대위법에 의한 작곡[canonization]c)을 고려하여, 교회 음악가들이 민요 창작들이 누렸던 자유와 동일한 자유를 누렸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다성 음악을 창안할 필요도 없었고 그 창안을 조장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내가 추측한 바는, 대위법이 대항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정선율(the cantus firmus)을 만들어낸 것은 교회 선율들에 대한 독단적 제한들인 그 선율들의 모방대위법에 의한 작곡(canonization)이었다는 것이다. 혼란 없이 창안적인 자유를 가능하게 한 것은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more or less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fairly soon인데 박중서 번역에 곧바로로 번역되었다.

c 역주: 모방대위법에 의한 작곡(canonization)은 박중서 번역에 정전화(正典化)’로 번역되었다.

체제와 질서, 그리고 규칙성을 제공한 확립된 정선율(the cantus firmus)이었다.

어떤 비-유럽적 음악에서 우리는, 확립된 선율들이 선율적인 변주곡들을 낳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을 나는 유사한 발전으로서 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추측에 따르면, 병행곡들로 가창되는 선율들의 전통이, 심지어 반대 악장에(a counter movement)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는 정선율(the cantus firmus)의 안정성과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새롭게 질서가 잡힌 세계라는 새로운 우주가 우리에게 열렸다.

이 우주의 가능성들이 어느 정도 탐구되자마자 대담한 시행들과 오류제거에 의하여 원래의 진짜 선율들은 교회에 의하여 수용되었는데, 없어도 무방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선율들이 원래 정선율(the cantus firmus)을 대신해서 작동하도록 창안될 수 있었는데 그 새로운 선율들 중 다른 것들은 아마도 단 한 가지 음악작곡에서만 이용되었던 반면 몇 가지는 당분간 전통적이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푸가의 주제처럼.

혹시 옹호될 수 없는 이 역사관련 추측에 따르면,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도록 필수적인 구조나 더 정확하게 필수적인 발판을 제공한 것은 그리하여 한편의 독단론인 그레고리 선율들의 (Gregorian melodies) 모방대위법에 의한 작곡(canonization)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또한 언명했다: 그 독단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미지의 세계의 그리고 아마도 본질적으로 심지어 다소 혼란스러운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질서가 없는 곳에서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필요한 좌표들의 체계가 생긴다. 그리하여 음악적 및 과학적 창조는 이만큼 공통적인 듯이 보인다: 규칙성들이나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현존하는 규칙성들을 탐색하면서 세상을 탐구하며 미지의 세계로 우리가 따라 들어가는 인공적 통로로서 독단이나 신화(神話: myth)의 이용. 그리고 몇 가지 이정표들을 발견하거나 세우자마자, 천체의 음악에 대한 신화(神話: myth)에서가 아니라면 고대에는 꿈도 꾸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잡는 새로운 방식들인 탐구와 창조의 새로운 양식들이자 새로운 좌표들을 시도함에 의하여 우리는 나아간다.

정말로 위대한 음악 작품은 (위대한 과학적 이론처럼) 혼란에 부과된 우주이다 심지어 작품을 창조한 사람에게도 그 작품에 녹여진 고갈될 수 없는 긴장들과 조화들에서. 이것은 케플러(Kepler)에 의하여 천상의 음악에게 헌정된 구절에서 탁월한 통찰력으로서 서술되었다:

 

그리하여 하늘의 움직임들은, 들을 수 있고 음성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속적인

조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움직임들은, 자체의 결의를 지닌 당김음이나

(syncopations) 계류음(suspensions)과 같은 불협화음들의 (그 불협화음들에 의하여

인간은 자연의 상응하는 불협화음들을 모방한다) 긴장을 통하여 움직여 안전하고 미리

결정된 closuresb 도달하여 각각은 여섯 성부로 구성된 화음과 같은 6 terma

포함한다. 그리고 이 기호들에 의하여 그 움직임들은 시간의 방대함을 구분하고 명시한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창조주의 유원인인 인간에 의하여 마침내

발견된 몇 가지 부분들에서 조화롭게 함께 가창하기에 대한 규칙들보다 더 크게

고귀하거나 더 많이 고귀한 놀라운 일은 없다; 그리하여, 많은 성부들의 능란한 교향곡을

통하여 인간은 실제로 한 시간의 짧은 부분에서 세계의 전체적인 시간적 영속성에 대한

전망을 떠올린다; 그리고 하느님의 메아리인 음악을 통하여 향유되는 황홀경에 대한 가장

달콤한 느낌에서 인간은 틀림없이 창조자 하느님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경험하는 만족에

거의 도달한다.

 

여기에, 가구 제작자로서 나의 수습생 시절 동안 나의 주의를 흩어놓았던 그리고 저 책상들에 대한 나의 작업을 방해한 몇 가지 더 많은 개념들이 있었다. 그 당시는 내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Critique) 초판본을 반복해서 읽고 있던 때였다. 나는 곧, 그의 핵심적인 개념이 과학이론들은 사람이 만든

것임과 우리는 그 이론들을 세상에 부과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으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 이것을 나 자신의 개념들과 연결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것에 도달했다.

우리의 이론들은 원시적 신화들(myths)로 시작하여 과학의 이론들로 진화하는데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정말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론들을 세상에 부과하려고 정말로 노력하여 그 이론들이 허위일지라도 (대부분의 종교적 신화들뿐만 아니라 뉴튼의 이론도 또한 허위인 듯이 보이는 것과 같은데 뉴튼의 이론을 칸트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 이론에 독단적으로 매달릴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은 매달려야 할지라도 이론들이 없으면 우리는 심지어 시작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우리에게는 의존하여 나아갈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그 이론들을 향하여 보다 비판적인 태도를 채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배웠다면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실망한 곳에서 더 좋은 이론에 의하여 그 이론들을 대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고의 과학적이거나 비판적 단계가 출현할 것인데 그 단계에는 반드시 무비판적인 단계가 선행한다.

지식이,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모방이나 인상(impression)일 수 없다고 칸트가 말했을 때 칸트는 옳았다고 나는 느꼈다. 지식은 유전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선험적이라고 칸트가 믿은 것은 옳았지만 어떤 지식도 선험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완전히a 틀렸다.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의 창안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들은 잘못 생각된 상상들, 대담한 추측들로 가설들에 지나지 않을지도b 모른다. 이것들로부터 우리는 세계를 창조한다: 실재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적인 세계를 잡으려고 시도하는 우리 자신의 그물들.

이러하다면 내가 원래 발견의 심리학으로 간주한 것에는 논리적 토대가 있었다: 논리적 근거들 때문에,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었다.

 

13. 두 가지 종류의 음악

 

당시 내가 느끼기에 사소한 지성적 발견이었던 것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심지어 앞 절과 10절에서 서술된 발견의 심리학에 대한 나의 흥미가 치솟기 전인 1920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음악에 대한 나의 흥미였다.a 이 발견으로 인하여 나중에 나는 철학으로 생각하는 나의 방식들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궁극적으로 나는 세계 2와 세계 3을 구분하게 되었는데 그 세계들은 나의 노년의 철학에 그런 역할을 수행하였다. 처음에 그 구분은 바흐 음악과 베토벤 음악 사이의 혹은 그들이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들의 차이점에 대한 해석의 형태를 띠었다. 이 특정 해석이 바흐와 베토벤 사이의 차이점을 크게 과장했다고 내가 나중에 생각했을지라도 나의 개념에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 지성적 발견의 근원이 두 명의 위대한 작곡가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그 근원이 당시 나에게 떠오른 형태로 나는 그 근원을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나는, 나의 비평들이 그들이나 다른 작곡가들을 공정하게 대한다거나 나의 비평들이 음악에 관하여 서술된 좋고 나쁜 많은 것들에 새로운 사항을 추가한다고 제안하고 싶지 않다: 나의 비평들은 본질적으로 자서전적이다.

나에게 그 발견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바흐와 베토벤 모두를 사랑했다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성들도 또한 사랑했는데 그들의 개성은 그들의 음악을 통하여 보일 수 있다고 나는 느꼈다. (모차르트에 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의 매력 뒤에는 측정 불가능한 것이 있다.) 바흐와 베토벤의 작품에 대한 바흐와 베토벤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는 것과 바흐를 우리의 모형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베토벤을 향하여 이 태도를 우리가 채택하는 것은 전혀b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 불현듯 떠오른 어느 날 충격이 다가왔다.

베토벤은 음악을 자기-표현의 도구로 만들었다고 나는 느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이것은 생활을 이어가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1802106일의 그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ngenstädter Testament]에서 이것이 암시된다고 나는 믿는다.) 피델리오(Fidelio)보다 더 감동적인 작품은 없다; 인간의 신념과 인간의 소망과 인간의 비밀스런 꿈과 절망에 대항하는 인간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더 감동적인 표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의 순수성, 그의 극적인 능력, 그의 독특한 창조적 재능으로 인하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방식들로 작곡할 수 있었다고 나는 느꼈다. 베토벤의 방식들을 이상(理想)이나 표준이나 모형으로 만들려는 시도보다 음악에 더 큰 위험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was ~ that ~의 강조구문인데 박중서 번역에 강조구문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quite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내가 객관적주관적이라는 용어들을 도입한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들의 작곡들을 향한 바흐와 베토벤의 두 가지 구별되는 태도들을 구분하려는 목적이었다.a 이 용어들은 잘 선택된 것은 아닐 것이고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그 용어들은 철학자에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1905, 바흐에 관한 그의 탁월한 저서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들을 사용한 것을 발견하고 나는 기뻤다. 내가 생각하기에 객관적 및 주관적 접근방식이나 태도 사이의 대조는, 특히 우리 자신의 연구와 관련하여 결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식론에 관한 나의 견해들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Epistemology Without a Knowing Subject]”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On the Objective Mind]”관찰자 없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without The Observer]”와 같은 나의 보다 최근 논문들 중 몇 가지 논문의 제목들을 참조.)

이제 나는, “객관적주관적음악이나 예술에 관하여 말할 때 (오늘날까지 나 자신에게만 그리고 혹시 몇몇 친구들에게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겠다. 나의 초기 개념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간혹, 당시 내가 할 수 없었던 언명들을 사용하겠다.

나는 아마도 널리 수용되는 예술론에 대한 비판으로써 시작해야겠다: 예술은 자기-표현이나 예술가의 개성 표현이나 혹시 예술가가 지닌 감정들의 표현이라는 이론. (크로체[Croce]와 콜링우드[Collingwood]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두 명이다. 나 자신의 반[]-본질주의적 견해는, “예술은 무엇인가?”와 같은 무엇인가? 질문들은 결코 진정한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대한 나의 주요 비판은 간단하다: 예술에 대한 표현주의적 이론은 공허하다. 이유인즉 사람이나 동물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내부적 상태의, 감정들의, 그리고 개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인간 언어와 동물 언어들에 대하여 사소하면서 참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자가 걷는 방식, 사람이 기침하거나 코를 푸는 방식, 사람이나 사자가 당신을 바라보거나 무시하는 방식에도 성립한다. 그것은, 새가 둥지를 짓는, 거미가 자기의 거미줄을 치는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집을 짓는 방식들에도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술의 특징이 아니다. 동일한 이유 때문에 언어에 관한 표현주의적이거나 감정적인 이론들은 사소하고, 정보가 없어서 소용이 없다.65a

나는 물론 무엇인가? 질문인 예술은 무엇인가?”에 답변할 것을 제안하지 않지만, 예술작품을 흥미롭거나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표현과 전혀 다르다고 나는 정말로 제안한다a. 심리학적 관점에서 간주되어 예술가에게 필요한 특정 능력들이 있는데 그 능력들을 우리는 창조적 상상력, 혹시 유희성, 기호(嗜好)b 그리고 다소 중요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서 서술할 것이다. 작품은 예술가에게 틀림없이 모든 것이고, 작품은 틀림없이 그의 개성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측면일 뿐이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중요성이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먼저 몇 가지 부정적인 것들을 말하고 싶다.

큰 독창성 없이도 위대한 예술작품들이 있을 수 있다. 예술가가 독창적이거나 다르게되기를 (아마도 장난스러운 방식에서를 제외하고) 주로 의도한 위대한 예술작품을 있을 수가 없다. 참된 예술가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독창성은 신들(gods)의 선물이다 순진성처럼 독창성은 요구한다고 주어지지도 않고 추구한다고 획득되지도 않는다. 진지하게 독창적이나 달라지려고 노력하면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면 예술작품의 완전성(integrity)”으로 지칭된 것이 틀림없이 방해를 받는다.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하찮은 개인적 야망들을 작품에 쏟아부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 야망들을 자신의 작품을 돕는 데 이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가는 자신이 수행하는 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성장할 것이다. 일종의 정보교류(feedback)에 의하여 예술가는, 예술가를 만들어내는 장인정신과 다른 능력들을 얻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을 남겼던 바흐와 베토벤 사이의 차이점이었던 것을 지적할 것이다: 바흐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기 자신을 잊는데 그는 자기 작품의 하인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개성을 자신의 작품에 각인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는, 베토벤이 의식하는 것처럼, 간혹 자신과 심지어 자신의 기분상태를 표현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그들 두 분을 음악을 향한 두 가지 반대 태도들을 대변하는 분들로서 보았던 것은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바흐는 연주되는 통주저음(通奏低音: continuo)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지시사항을 불러줄 때 이렇게 말했다: “통주저음은, 하느님의 영광과 정신에 허용된 기쁨을 위한 듣기 좋은 화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음악처럼 그것의 과 목적인(final cause)은 결코 하느님의 영광과 정신의 위안 외에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주지되지 않을 때, 실제로 음악은 없고 지옥 같은 포효와 달각거리는 소리가 있다.”

음악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바흐는 음악의 목적인(final cause)으로부터 소음 내는 것을 제외하고 싶어 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바흐로부터의 나의 인용문을 고려하여,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차이점은 종교 예술과 세속 예술 사이의 차이점이 아님을 나는 철저하게 분명히 해야겠다.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Mass in D)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 곡에는 심장으로부터 그것은 다시 심장으로 가기를(From the heart may it again go to the heart) (“Vom Herzen möge es wider zu Herzen gehen”)”로 헌정된다. 이 차이점을 내가 강조할지라도, 정서적 내용이나 음악의 정서적 충격을 부인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또한 언급되어야 한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같은 오라토리오는 강력한 정서들을 묘사하고 그리하여 공감에 의하여 강력한 정서들을 아마도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Mass in D)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불러일으킨다. 작곡자 또한 이 정서들을 느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가 먼저 자신의 음악에서 당시 표현한 정서적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창안한 음악이 틀림없이 자신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작품을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버렸을 터이다) 작곡가는 그 정서들을 느꼈다고 나는 제안한다.

바흐와 베토벤 사이의 차이점에는 자체의 특징적인 전문적 양상들이 있다. 예를 들어 셈여림 요소의 (강하게[forte] [] 여리게[piano]) 구조적 역할이 다르다. 물론 바흐에게 셈여림 요소들이 있다. 협주곡들에는 총주에서 (總奏: tutti) 독주(獨奏: solo)로의 변환들이 있다. 마태 수난곡에는 바라밤(Barrabam)!”이라는 외침이 있다. 바흐는 흔히 고도로 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셈여림의 놀라운 일들과 대조들이 발생할지라도, 그것들로 인하여 작곡의 구조가 중요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상당히 긴 악절들이, 셈여림의 주요 대조들 없이, 나타난다. 모차르트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가령 베토벤의 열정(Appassionata)에 대해서는 그렇게 언급될 수 없는데 거기서 셈여림의 대조들은 화성적 대조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모든 인간적 감정들과 열정들이 말을 한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공포와 희망,... 무한히 많은 미묘한 어조들로”; 그리고 그는 감정 표현 및 공명(共鳴: resonance)의 이론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서술했다: “모든 음악이 우리의 심장을 건드리는 방식은... 음악이 우리가 지닌 가장 심오한 본질에서 나오는 모든 충동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일반적인 쇼펜하우어의 음악 및 예술 이론이, 그에 따르면 우리가 지닌 가장 심오한 본질우리가 지닌 의지 객관적인 세계의 본질이기 때문에 또한 객관적이라는 이유로만 주관론을 피한다고 (조금이라도)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음악으로 복귀한다.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바흐의 인벤션(Inventions)과 그 자신이 지은 다소 긴 제목 쪽을 바라보자. 그 제목 쪽에서 그는 피아노 연주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음을 분명히 한다. 그 사람들은 두세 성부들(parts)로써 분명하게... 그리고 선율적인 방법으로 연주하는 방법을 그들이 배울 것이라고 그는 장담하고, 그 사람들은 자극을 받아 창조적이 되어 그리하여 추가적으로 작곡의 최초a 기호(嗜好)를 얻을것이다. 여기서 음악은 사례들로부터 습득될 수 있다. 음악가는, 말하자면, 바흐를 만나면서 성장할 수 있다. 음악가는 규율을 배우지만a 음악가는 또한 자신의 음악적 악상들을 사용하도록 격려를 받고 음악가에게는 그 악상들이 어떻게 분명하고 능숙하게 향상될 수 있는지가 밝혀진다. 음악가가 지닌 악상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발전할 것이다. 작품을 통하여 음악가는, 과학자처럼, 시행착오에 의하여 배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성장함에 따라서 그의 음악적 판단과 기호(嗜好)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그의 창조적인 상상력조차도 또한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은 노력, 근면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헌신에 의존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민감성에 그리고 자기-비판에 의존할 것이다. 예술가와 그의 작품 사이에는 일방적인 주기보다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신의 개성 표출에 지나지 않는 끊임없는 주고-받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위대한 음악과 일반적인 위대한 예술에는 심오한 정서적 충동이 없을 것이라고 내가 결코 제안하고 있지 않음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그리고 음악가는 자신이 작성하고 있거나 연주하는 것에 의하여 깊이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지닌 정서적 충동을 수용한다는 것은 물론, 음악적 표현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닌데 음악적 표현주의는 음악에 관한 한 가지 이론이다 (특정 음악적 관행들을 야기한 이론). 그 이론은, 내가 생각하기에,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닌 정서들과 다른 한편으로서 음악 그리고 일반적인 예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론이다.

음악과 인간이 지닌 정서들 사이의 관계는 몇 가지 매우 다양한 방식들로 간주될 수 있다. 최초이고 가장 창조적인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은, 시인이나 음악가의 신적(神的: divine) 광기나 신적(神的: divine) 광분에서 드러나는 신적(神的: divine) 영감에 관한 이론이다: 예술가는 사악한 정령(精靈: spirit)이라기보다는 유순한 정령(精靈: spirit)일지라도, 정령(精靈: spirit)에게 사로잡힌다. 이 견해에 대한 고전적 언명은 플라톤의 이온(Ion) 편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이 언명하는 견해들은 다면적(多面的)이고 형체가 없는 몇 가지 두드러진b 이론들이다. 정말로 플라톤의 논법은 체계적 탐구를 위한 토대로서 사용될 것이다:

(1) 시인이나 음악가가 만들어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신들(gods), 특히 뮤즈들(Muses)로부터의 전갈이나 시혜이다. 시인이나 음악가는 뮤즈들(Muses)이 통하여 말하는 도구일 따름이다; 시인이나 음악가는 신()의 대변자일 뿐이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은 고의로 시인들 중 가장 야비한 자들을 통하여 노래들 중 가장 훌륭한 노래들을 불렀다”.

(2) 신적(神的: divine) 정령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창조를 하거나 공연을 하거나) 열광적으로, 다시 말해서,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흥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공감적 공명(共鳴: resonance)의 과정에 의하여 청중에게 전달된다. (플라톤은 그것을 자석과 비교한다.)

(3) 시인이나 공연자가 시를 짓거나 암송할 때 그는 깊이 감동을 받고 정말로 ([]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전갈에 사로잡힌다; 예를 들어, 그가 서술하는 장면들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의 감정적 상태만이라기보다는 작품이 그의 청중에게 유사한 감정들을 유도한다.

(4) 우리는, 훈련이나 공부에 의하여 습득되는 단순한 공예나 기량이나 기예와 신적(神的: divine) 영감을 구분해야한다; 후자(後者)을 통해서만 시인이나 음악가를 만들어진다.

이 견해들을 전개하면서 플라톤은 결코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는 겉으로는 진지하면서 농담조로 말한다. 특히 한 가지 농담은 중요하고 아주 재미있다. 음유시인은 신이 들 때, (예를 들어,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지라도 겁에 질려 떨 때) 분명히 완전히 발광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하여 음유시인 이온(Ion)은 이렇게 답변한다: “바로 그렇다: 나의 무대에서 그들을 내가 지켜볼 때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우는지와 어떻게 그들이 경외에 사로잡힌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야야 한다; 이유인즉 그들이 울면 나는 내가 받는 돈 때문에 웃을 것이고 그들이 웃으면 나는 내가 잃을 돈 때문에 나는 울 것이다.” 분명히 청중들의 반응에 의하여 음유시인의 행동을 조절하기 위하여 자신의 청중들을 살펴보는 동안 이 세속적이고 발광과는 동떨어진 고민들에 의하여 음유시인이 사로잡힌다면 청중들에게 남기는 음유시인의 커다란 영향력이 전적으로 그의 성실성에 다시 말해서, 그가 완전히 그리고 진정으로 신()이 들려 미쳤음에 달렸다고 그가 제안할 (이온[Ion]이 바로 그 장소에서 제안하는 바와 같이) 때 그가 진지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플라톤은 원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농담은 전형적인 자기-언급적 거의 역설적인 자기-언급 이다.) 사실상 플라톤은, 어떤 지식이나 기량도 (가령, 자신의 청중을 매혹하는) 정직하지 못한 속임수나 기만일 터이라고 강력하게 암시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지식이나 재주가 틀림없이 신적(神的: divine) 전갈을 방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음유시인은 (혹은 시인이나 음악가) 적어도 간혹, 신들에게 (gods) 진정으로 영감을 받는다기보다는 능숙한 사기꾼이라고 암시한다.

나는, 현대 예술론을 표현으로서 (내가 거부하는 이론) 도출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론들에 대한 나의 목록 (1)에서 (4)까지를 이제 이용하겠다. 나의 주요 주장은, 우리가 영감과 광분의 이론을 수용하지만 그 이론에 있는 신적(神的: divine) 근원을 버린다면 예술은 자기-표현이나 더 정확하게 자기-영감과 감정의 표현 및 소통이라는 현대적 이론에 우리가 즉각 도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적 이론은 일종의 하느님이 없는 신학이다 신들(gods)의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가의 숨겨진 본성이나 본질을 지닌: 예술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부여한다.

분명히 이 주관론적 이론은, 요점 (3)을 틀림없이 버리거나 적어도 최소화한다: 예술가와 그의 청중은 예술작품에 의하여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는다는 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3), 예술과 감정들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정확한 이론으로 보인다. (3), 시나 음악이 정서적 중요성을 지닌 장면들을 서술하거나 묘사하거나 극화할 것이라고 그리고 시나 음악이 심지어 감정들과 같은 것들을 서술하거나 묘사할 것이라고 믿는 객관적인 이론이다. (이것은 예술이 중요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임은 이 이론에 의하여 함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라.)

예술과 감정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객관론적 이론은 앞 절에서 인용된 케플러의 글귀에서 감지될 것이다.

그 이론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발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이론은 틀림없이 바흐와 모차르트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 음악에는 감정들을 고취하는 그리고 감정들을 위무하는 (자장가처럼)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부언하여, 예를 들어 국가(Republic)에서 그리고 또한 법률(Laws)에서 설명되어 플라톤의 이론과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다: 몇몇 종류의 음악은 인간을 용감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다른 음악들은 인간을 겁쟁이로 변모시킬지도 모른다; 조금도 과장 없이, 음악의 힘을 과장하는 이론.

나의 객관론적 이론에 (자기-표현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표현이 철저하게 사소함을 강조하는) 따라서 작곡자가 지닌 감정들의 실제로 흥미로운 기능은, 그 감정들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객관적인) 작품의 성공이나 합당성이나 충동을 시험하는 데 이용되리라는 것이다: 작곡가는 자신을 일종의 시험 몸체로서 이용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반응해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그 작품을 수정하거나 다시 쓸 (베토벤이 자주 그랬듯이) 것이다; 아니면 그는 그 작품을 심지어 완전히 버릴 것이다.a (작품이 주로 감정적이든 아니든 작곡가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창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훌륭한 기호(嗜好)” 이용할 것이다: 그것은 시행착오 방식의 또 다른 적용이다.)

플라톤의 이론 (4)는 자체의 비신학적 형태에서, 작품의 성실성은 예술가의 자기-비판에서보다는 예술가가 지닌 영감의 진실성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객관론적 이론과 양립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론 (4)와 같은 표현주의적 견해는 수사학(rhetoric)과 시학적 이론의 고전적 전통이 되었다고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나에 알려준다. 그 견해는 심지어 감정들에 대한 성공적인 서술이나 묘사는, 예술가에게 가능한 감정들의 깊이에 달렸다고 제안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리고 음악과 예술에 대한 현대 표현주의적 이론을 낳은 것은, 순수한 자기-표현이 아닌 것을 허위로 연기하는불성실로서 간주하는 플라톤의 (4)의 세속화된 형태인 이 의심스러운 마지막 견해였을 가능성이 컸다.

요약하면; (1), (2) 그리고 (4)는 신들(gods) 없이, 예술에 관한 그리고 감정들에 대한 예술의 관계에 관한 주관론적이거나 표현주의적 이론의 언명으로서 간주될 것이고 (3)은 이 관계에 대한 객관론적 이론의 부분적 언명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 객관론적 이론에 따라서, 작품에 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음악가의 감정들이라기보다는 음악가의 감정들에 주로 책임을 지는 것은 작품이다.a

음악에 대한 객관론적 견해로 이제 선회하면, (3)은 감정들에 대한 음악의 관계에만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충분할 리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감정들은 예술을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하거나 심지어 주요한 것이 아니다. 음악가는, 마태 수난곡에서처럼, 감정들을 묘사하여 우리의 공감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많은 다른 문제들이 있다. (이것은 건축과 같은 예술에서 명백한데 건축에는 해결될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문제들이 항상 있다b.) 푸가를 작곡하면서 작곡가의 문제는, 흥미로운 주제와 대비되는 대위법을 발견하여 그 다음에 이 재료를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를 이끌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적합성이나 균형에 대한 훈련된 감각일 것이다. 결과는 여전히 감동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은, 묘사된 감정에 라기 보다는 적합성의 혼란 가까이에서 출현하는 우주의 감각에 근거할 것이다. 바흐의 인벤션(Inventions)중 몇 가지에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인데 그것들이 지닌 문제는 작곡에 대한, 음악적 문제 해결에 대한 첫 번째 취향을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유사하게 미뉴에트나 3중주를 작곡하는 과제는 음악가에게 확실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자체가 반쯤 완성된 특정 모음곡(suite)에 맞아야 한다는 요건에 의하여 더 특수하게 될 것이다. 음악가를 음악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으로서 보는 것은 물론, 그를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 (하찮게도,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몰두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과 매우 다르다.

 

나는, 객관론적 및 주관론적인 음악이라는 두 가지 이론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합리적으로d 분명한 개념을 제시하여 그 이론들을, 내가 두 가지 음악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ccording to this objectivist theory it is the work which is mainly responsible for the emotions of the musician rather than the other way round.인데

박중서 번역에 이러한 객관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움악가의 감정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을 지닌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작품이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해결될 실용적이 전문적인 문제들이 항상 있다의 원어 표현은 there are always practical and technical problems to be solved인데 박중서 번역에 항상 실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trivially인데 박중서 번역에 대개는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reasonably인데 박중서 번역에 비교적으로 번역되었다.

 

모두를 사랑할지라도 당시 내가 보기에 매우 달랐던 두 가지 종류의 음악과

바흐의 음악과 베토벤의 음악 관련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람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견해의 구분은 나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 구분으로 인하여, 내가 약 17세 혹은 18세였던 때부터 세

상에 대한 나의 견해들의 색깔이 변했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

 

14. 예술에서의, 특히 음악에서의 진보론

 

베토벤이 음악에서 표현주의의 발흥에 책임이 있다고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틀림없이 완벽하지 정당하지는 않았다.a 의심할 바 없이 베토벤은 낭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자신의 느낌들이나 자신의 변덕들을 표현하기만 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비망록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이 9번 교향곡에 대한 비망록과 환상합창곡(choral fantasy)을 비교하면 밝혀질 것과 같이, 악상을 설명하여 단순화하려고 노력하면서 악상에 대하여 연달아 바꾸어 해석하여 그는 자주 매우 열심히 작업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닌 격정적인 개성의 간접적인 영향과 자신을 능가하려는b 시도들로 인하여 음악에서 쇠퇴가 발생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쇠퇴는 주로 음악의 표현주의적 이론들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동등하게 해로운 다른 신조들과 그 신조들 가운데서 몇몇 반()-표현주의적 신조들이 없다고 나는 이제 주장하지 않을 터인데 그 신조들은 음열주의(音列主義: serialism)에서부터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형식주의적 실험들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들과 특히 ()-”운동들은 주로, 내가 이 절에서 그리고 특히 진보를 향한 역사주의적 태도로부터 토론할 저 역사주의라는 유형으로부터 귀결된다.

물론 특정 새로운 가능성들이 발견될 것이고 또한 새로운 문제들이 발견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에는 진보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음악에서 대위법과 같은 발명들로 인하여 새로운 가능성들과 문제들이 거의 무한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한 순전히 기술적인(技術的: technological) 발전이 (예를 들어 특정 악기들에서)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릴지라도,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매체에서의 변화들로 인하여 문제들이 만들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제거될 것이다.) 상상컨대 심지어 음악적 지식이 성장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자신의 위대한 선배들 모두를 발견하여 통달하는 것 진보가 있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이 음악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뉴튼보다 더 위대한 물리학자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는 뉴턴의 기법을 완벽하게 통달했다; 음악 분야에서 유사한 관계가 존재했던 적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 모차르트도 그것에 근접했을 것인데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고 슈베르트는 그것에 근접하지도 못했다. 새로이 성취된 가능성들이 옛 가능성들을 죽일 위험은 또한 항상 있다: 셈여림 효과들, 불협화음 혹은 심지어 전조(轉調: modulation), 너무 자유롭게 사용된다면, 대위법의 명백함이 감소하는 효과들까지, 가령, 옛 방식들이 암시될 정도까지 우리의 감수성을 둔화시킬 것이다.

혁신으로 인한 가능성들의 상실은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리하여 대위법으로 인하여 단선율적(單線律的: monodic) 그리고 특히 리듬 효과들이 상실될 위협에 처해서 대위법적 음악은 자체의 복잡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에는 몇 가지 유익한 효과들이a 있었음과 게다가, 바흐가 포함된 대위법의 위대한 달인들 중 몇몇은 서창(敍唱: Recitatives)과 아리아와 단선율적(單線律的: monodic) 대안들을 대위법적 작곡과 연결하여 생기는 세밀함들과 대비들에 가장 큰 흥미를 가졌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최근 작곡가들은 창조성이 덜했다. (쇤베르크[Schöberg], 불협화음들의 맥락에서 화음들은 신중하게 준비되고b 도입되어 아마도 심지어 용해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의 옛 기능들이 상실됨을 의미했다.c)

음악에, 내가 역사주의적으로 지칭했던 (1935년이나 그 무렵) 진보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리하여 작품의 주요 악당 노릇을 했다고 내가 여전히 믿는 사람은 바그너(Wagner)였다. 그는 또한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천래라는 무비판적이고 거의 신경질적인 개념을 후원했다: 자기 시대의 정신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시대에 앞서는천재; 몇몇 진보한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되는 지도자.

나의 주장은, 자기-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교설은 자기-중심적 태도들과 과대망상증을 쉽게 야기할 것일 때 진지하게 고찰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악하지는 않을지라도 하찮고 멍청하고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는 틀림없이 자신의 시대에 앞선다는 교설로 인하여, 예술의 세계는 거의 전체적으로 허위이고 사악하며, 예술의 가치들과 관계가 없는 평가들에 노출된다.

지성적으로 두 가지 이론들 모두는 그렇게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첫 번째 이론은, 순전히 지성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심지어 예술 자체를 더 자세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하찮고 뒤죽박죽인 것으로서 묵살될 수 있다. 두 번째 이론은 예술은 자신의 시대에 앞서 천재의 표현이라는 이론 천재들 시대의 예술에 대한 많은 후원자들에 의하여 진정으로 완전히 이해되는 천재들에 대한 무수한 사례들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들 대부분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많은 위대한 음악들도 그러했다. 바흐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에게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시대에 앞서지 않았다 (아마도 델레만[Telemann]이 앞섰던 것처럼): 그의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Carl Phillip Emanuel)은 그가 구식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습관적으로 늙은 트집쟁이(The Old Fusspot)”라고 (“der alte Zopf”) 불렀다. 모차르트는 가난 속에서 죽었을지라도 유럽 전체를 통하여 평가를 받았다. 예외는 아마도 슈베르트인데 비엔나에서 비교적 작은 친구들의 동아리에 의해서만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그도 그가 요절했을 때 더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베토벤이 자신의 동시대인들에 의하여 평가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의 성공은 주로 행운의 문제라고 나는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다 (10절의 주석 4748 사이의 원문 참조a). 그 성공은 장점과 상호관련 사항이 없고, 삶의 모든 분야들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장점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과학들이나 예술들에서도 또한 발생했다고 기대될 수 있을 따름이다.

선구적인 위대한 예술가들과 동시에 예술이 진보한다는 이론은 허구일 따름이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선전기구들을 동원하여 정당이나 교파를 거의 닮은 패거리나 압력단체들의 형성되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바그너 앞에 패거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그너주의자들과 완전히 같은 것은 (나중에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없었다: 압력단

, 정당, 의식을 치르는 교회. 그러나 니체가 완전히 더 낫게 그것을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에 관하여 더 많이 말하지 않겠다.

나는, 개인 연주회를 위한 쇤베르크 협회(Schönberg's Society for Private Performance) 안의 가까운 거리에서 이것들을 보았다. 쇤베르크는, 그렇게 많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바그너주의자로서 시작했다. 얼마 지나서 그의 문제와 그의 동아리의 많은 회원들의 문제는, 그들 중 한 명이 강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떻게 우리는 바그너를 대체할 수 있는가?” 혹은 심지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안에 남은 바그너의 잔재들을 대체할 수 있는가?”가 되었다. 훨씬 나중에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보다 앞설 수 있는가? 그리고 심지어 부단히 우리 자신들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의 시대에 앞서려는 의지는 음악에 대한 공헌과 관계가 없고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헌신과 관계가 없다고 느낀다.

안톤 폰 베베른(Anton von Webern)은 이것에서 예외였다. 그는 헌신적인 음악가였고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표현이라는 철학적 교설 속에서 양육되었고 그 교설의 진리를 의심한 적이 없다. 그는 한 번 나에게 그가 자신의 관현악소품(Orchesterstücke)을 어떻게 썼는지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소리들을 듣기만 하고 그 소리들을 적었다; 그리고 소리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을 때 그는 멈추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극도로 짧은 것에 대한 설명이었다. 아무도 그의 마음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겸손한a 작곡들에는 많은 음악이 발견되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을 쓰려는 야망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야망은 정말로, 많은 위대한 작품들이 자신의 작품을 잘 만들려는 야망 외에는 어떤 야망도 없이 만들어졌을지라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는 그리고 가능하면 너무 일찍 이해되지 않을 작품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a 쓰려는 야망은, 많은 예술 비평가들이 이 태도를 조성하여 이 태도를 대중화할지라도, 예술과 관련이 없다.

유행은 많은 다른 분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 불가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예술에 대한 거장일 뿐만 아니라 독창성이라는 재능으로 축복받은 저 희귀한 예술가들이 유행을 따르려고 조바심하지 않고 유행의 선도자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나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도 음악에서 새로운 유행이나 양식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실행한 사람은 재능과 매력을 지니고 잘-훈련을 받은 음악가였던 그리고 위대한 거장들보다 창안적 독창성이 덜한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였다. 이것은, 원시주의(primitivism)원시주의가 단순성에 대한 선호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동기화될 것이라 할지라도 유행을 포함하여 모든 유행들에 대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최고로 현명한 언급들 가운데서 한 가지 언급은 아마도 그의 가장 독창적인 언급을 아닐지라도 다음과 같다: “모든 예술에서... 단순성은 본질적이다; 적어도 단순성을 무시하면 항상 위험해진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우리가 특히 위대한 작곡자들의 주제들에서 발견하는 종류의 단순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후궁으로부터의 유괴(Seraglio)에서 우리가 이해할 바와 같이, 최종적인 결과는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요제프 황제에게 그 안에는 하나의 음표도 너무 많이 들어있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여전히 답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행이 불가피할지라도, 그리고 새로운 양식들이 출현할지라도 우리는 유행이 되려는 시도들을 경멸해야 한다. “현대주의(modernism)”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자신의 시대에 앞서고 미래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of the Future)(바그너가 쓴 수필의 제목) 생산하려고 새롭거나 달라지려는 소망 예술가가 귀중히 여겨야 하고 창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들과 관련이 없다.

예술에서 역사주의는 오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역사주의를 도처에서 발견한다. 심지어 철학에서도 우리는, 철학화하는 혹은 새로운 건반에서의a 철학(Philosophy in a New Key)”라는 새로운 양식에 마치 문제가 되는 것이 연주되는 선율이라기보다는 건반인양, 그리고 건반이 낡았는지 새 것인지가 중요한 양 대하여 듣는다.

물론 나는, 새로운 것을 말하려 애쓰는 것에 대하여 예술가나 음악가를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많은 현대음악가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위대한 음악을 위대한 거장들과 그들의 기적적인 작품들로,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것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 대학에서의 마지막 몇 년

 

1925년 내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때, 비엔나 시는 교육학 재단(the Pedagogic Institute)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 재단은 비엔나 대학과 다소 느슨하게 연결될 예정이었다. 그 재단은 자율적일 예정이었지만 학생들은 그 재단에서 개최하는 강좌들에 추가하여 비엔나 대학에서 강좌들에 출석할 예정이었다. 비엔나 대학 강좌들 중 몇몇 강좌들은 (심리학과 같이) 재단에 의하여 필수강좌가 되었고 다른 강좌들은 학생들의 선택에 맡겨졌다. 새로운 재단의 목적은, 비엔나에서 당시 진행 중이던 초중등학교의 개혁을 촉진하고 뒷받침하는 것이었고 몇몇 사회일꾼들이 학생들로서 입학되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나의 일생 친구들 중 몇몇도 프리츠 콜프(Fritz Kolb)가 있었는데 2차대전후 파키스탄에서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했고 로베르트 람메르(Robert Lammer)가 있었고 그들 두 명과 나는 매혹적인 많은 토론들을 즐겼다 그들 중에 속했다.

이것은, 사회일꾼으로서의 짧은 기간 지나면 우리가 우리의 일을 포기해야 함을 (실업구제나 여하한 종류의 소득도 없이) 나의 경우에 미국인 학생들을 간혹 지도하는 것을 제외하고 의미했다. 그러나 버려진 아이들과 함께 한 우리의 경험으로 인하여 우리들 중 몇몇이 우리가 엄청난 양으로 흡수해야 했던 교육 이론들에 대하여 회의적이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학교개혁에 열성적이었고 공부에도 열정을 쏟았다. 이 교육 이론들은 주로 미국으로부터 (존 듀이) 그리고 독일로부터 (게오르크 케르쉔슈타이너[Georg Kerschensteiner]) 수입되었다.

개인적이고 지성적인 관점에서 재단에서 보낸 세월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내를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동료 학생

 

a 역주: 이 문단에서 건반의 원어는 key인데 박중서 번역에 음조로 번역되었다.

들 중 한 명이었고 나의 작품에 대한 가장 엄격한 평가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나의 작품에 대한 그녀의 역할은 적어도 나 자신의 역할만큼 열성적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없었다면 나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전혀 이룩되지 않았을 터이다.

교육학 재단에서 내가 지낸 많은 연도는 공부하는, 읽고 쓰는 그러나 출간하지는 않는 해였다. 그 연도들은 내가 학문적으로 가르치는 (전적으로 비공식적인) 최초의 연도들이었다. 이 연도들을 통하여 나는 동료들의 무리에게 학술회의들을 개최했다. 당시 나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그 학술회의들은 훌륭했다. 그 학술회의들 중 몇몇은 매우 비형식적이었고 걷거나 스키를 타거나 다뉴브강에 있는 섬에서 하루를 보내며 개최되었다. 그 재단에서 가르치는 교사들로부터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비엔나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칼 뷜러(Karl Bühler)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교육학 재단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에 참석했지만, 그는 그 재단에서 가르치지 않았고 직위도 지니지 않았다.)

학술회의들에 추가하여 나는 수업을 개최하여 또한 전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무수히 많은 시험들 중 몇 가지 시험들을 나의 동료 학생들이 대비하도록 했는데 그 시험들 가운데 뷜러(Bühler) 교수가 출제하는 심리학 시험들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이들이 자신이 출제한 시험에서 최고로 준비가 잘 된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대학교수와 나눈 나의 최초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뷜러(Bühler) 교수는 겨우 최근에 심리학을 가르치도록 비엔나로 초빙되었고 당시 아동의 정신적 발달(The Mental Development of the Child)에 관한 자신의 저서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한 최초의 형태(Gestalt) 심리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나의 미래 발전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했던 것은 언어가 지닌 세 가지 수준들이나 기능들이라는 이론이었다 (주석 78에서 이미 언급된): 표현적 기능(Kundgabefunktion), 신호적 혹은 방출적 기능(Auslösefunktion) 그리고 더 높은 수준에서 서술적 기능(Darstellungsfunktion). 세 번째 기능은 인간 언어만의 특징이고 간혹 심지어 인간 언어로부터 (감탄사들에서와 같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은 인간과 동물언어들에 공통적이고 항상 출현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이론은 많은 이유들 때문에 나에게 중요해졌다. 이 이론으로 인하여, 예술이 자기-표현이라는 이론의 공허함에 대한 나의 견해가 확인되었다. 이 이론으로 인하여 나는 나중에, 이 두 가지 기능들이 모든 언어들 심지어 동물 언어들에도 하찮게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은 의사소통이라는 (다시 말해서, 방출) 이론이 똑같이 공허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 이론으로 인하여 나는 나의 객관론적접근방식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론으로 인하여 몇 년 후에 뷜러가 주장하는 세 가지 기능들에 내가 논증적 기능으로 지칭한 것을 추가하게 되었다. 언어의 논증적 기능은, 내가 그 기능을 모든 비판적 사고의 토대로서 간주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해졌다.

내가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 교수를 만난 것은 교육학 재단에서 내가 2년째 일할 때였고 그에 대하여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소개했다.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는 테오도르 곰페르츠(Theodor

Gomperz)(그리스 사상가들[Greek Thinkers]의 저술가이자 존 스튜어트 밀의 친구이면서 번역가) 아들이었다. 자신의 부친처럼 그도 탁월한 그리스에 관한 학자였고 또한 인식론에 큰 흥미를 지녔다. 그는 내가 만난 두 번째 전문적 철학자였을 뿐이고 첫 번째 대학의 철학교수였다. 이전에 나는 율리우스 크라프트(Julius Kraft)(하노버 출신으로 나의 먼 친척이자 레오나르트 넬존[Leonard Nelson]의 제자) 만났는데 나중에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철학과 사회학 교사가 되었다; 그와 나의 우정은 1960년 그가 사망했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율리우스 크라프트는, 레오나르트 넬존처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였으며, 흔히 새벽 시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의 토론회들 중 약 절반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에 집중되었다. 다른 절반은 지식론과 관련되었다: 주로 칸트의 소위 초월적 연역(transcendental deduction)” (내가 논점-선취로서a 간주한), 이율배반에 대한 그의 해결책 그리고 넬존의 지식론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the Theory of Knowledge)”. 이것들에 관하여 우리는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 싸움은 1926년에서 1956까지 계속되었고 그가 1960년에 요절하기 몇 년 전까지 우리는 합의에 가까운 것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우리는 상당히 일찍 동의했다.

하인리히 곰페르츠는 항상 나를 인내심으로 대했다. 그는 신랄하고a 비판적이라는 평판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는, 브렌타노(Brentano)나 마흐(Mach)와 같은 자신의 유명한 동료들 중 몇몇에 관하여 이야기들을 할 때, 매우 재치를 보일 수 있었다. 그는 때때로 나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고 나에게 말을 시켰다. 통상적으로 나는 원고의 몇 부분들을 읽으라고 그에게 주었지만 그는 비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말해야 하는 것에 비판을 한 적이 없지만 그는, 나 자신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견해들 및 저서들이나 기사들을 아주 자주b 나에게 주지시켰다. 내가 몇 년 후에 나의 최초 저서의 원고를 (당시 미발간인 아래 16절 참조) 그에게 줄 때까지 내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그는 지적한 적이 없다. 그는 그 후 (193212월에) 나에게 매우 감사하는c 편지를 보냈는데 내가 서술한 것에 관하여 내가 받은 최초의 편지였다.

나는 그의 저서 모두를 읽었는데 그 저서들은 역사관련 접근에서 뛰어났다: 그는 역사관련 문제를,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서 후설(Husserl)(어떤 방법으로든 대화들로)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에 이르기까지 그 문제의 모든 변천들을 통하여 추적할 수 있었는데 오토 바이닝거를 그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거의 천재로 간주했다.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당시 그는 정신분석을 신뢰했고 심지어 그는 Imagod 기고했다.

내가 곰페르츠와 토론한 문제들은 지식이나 발견에 관한 심리학에 속했다; 내가 그 문제들을 발견의 논리에 관한 문제들로 바꾸고 있었던 것은 이 기간 동안이었다. 나는 곰페르츠의 심리학주의를 포함해서 여하한 심리학주의적접근방식에 점점 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곰페르츠 자신은 심리학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다시 빠져들었다. 실재적인 세상이 있다는 그리고 지식의 문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발견하는지의 문제라는 나의 신념인 나의 실재론을 내가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주로 그와 함께 한 이 토론들에서였다. 우리가 그 세상에 관하여 논증하기를 원하는 경우 우리가 감각 경험들로부터 (혹은 심지어 그의 이론이 요구했던 바와 같이 우리의 느낌들a) 시작한다면 우리는 심리학주의,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주의 심지어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라는 함정에 모두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한 견해들 빠지게 마련이라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적 책무에 관한 나의 감각으로 인하여 나는, 그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지성인의 배반임을 그리고 우리가 실재적 문제들에 써야 할 시간의 오용 알게 되었다.

심리학적 실험실에 내가 드나든 이래 나는 몇 가지 실험들을 실행했는데 그 실험들로 인하여 나는 곧 감각 자료들과b 단순한개념들이나 인상들 그리고 다른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가공적인 것이었다 원자론을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 아래 참조) 물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변환시키려는 잘못된 시도들에 근거한 가공적인 것들. 형태 심리학 지지자들은 유사하게 비판적인 견해들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견해들이 본질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나의 견해들이 오스발트 퀼페(Oswald Külpe)와 그의 학파, 특히 뷜러(Bühler) 오토 젤츠(Otto Selz) 견해들과 유사함을 나는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가 인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잠정적c 해결책들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오토 젤츠에 의하여 내가 발견한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이 이미 발견되었다는d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심리학으로부터 이탈하는 사소한 동기들 중 한 가지 동기가 생겼다는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몇 년 동안 헌신한 발견과 사고의 심리학을 포기하는 과정은 다음 통찰에서 정점을 이루며 길었다. 연상심리학(聯想心理學: association psychology)로크, 버클리(Berkeley) 그리고 흄(Hume)의 심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어-술어 논리학을 심리학적 용어들로 변환한 것일 뿐임을 나는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서술들을 다룬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용어들a 그 용어들을 연결하여 결합시키는 계사(繫辭: copula)”가 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들로 변화시키면, 사고는 사람이라는 그리고 죽음이라는 개념들연합(associated)”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로크를 읽기만하면 된다: 그의 주요 전제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타당성이고, 그리고 그 논리학이 우리의 주관적 및 심리학적 사고과정들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술어 논리학은 매우 원시적인 것이다. (그 논리학은 우활한[迂闊: naive] 집합이론의 작은 부분집합과 어수선하게 섞인 불대수[Boolean algebra]의 작은 부분집합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틀림없이 그것을 경험심리학으로서 여전히 오해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한 가지 추가적 단계에 의하여, 의심스러운 논리적 교설을 소위 경험심리학으로 변환시키는 기제(機制: mechanism)가 여전히 작동 중이며 심지어 뷜러(Bühler)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에게도 그 심리학의 위험성들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밝혀졌다.

이유인즉 뷜러가 수용하고 크게 칭찬했던 퀼페(Külpe)논리학(Logic)에서, 논증들이 복잡한 판단들로서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오류인)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판단하기와 논증하기 사이에는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추가적 결과로서 언어의 서술적 기능 (“판단들에 상응하는) 그리고 논증적 기능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뷜러는, 그것들이 자신이 이미 구분한 언어의 세 가지 기능들로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뷜러가 말하는 표현적 기능은, 자극을 받을 수신자가 없을지라도 동물과 사람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의사소통 기능들로부터 구분될 수 있었다. 표현적 및 의사소통 기능들은 함께, 뷜러가 말하는 서술적 기능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동물이나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을 서술하지 않고도 두려움을 (예를 들어)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술적 기능은 (뷜러에 따르면 고등 기능이고 인간에게만 예외적인) 논증적 기능으로부터 분명히 구분될 수 있음을 나는 당시 발견했는데 왜냐하면 서술적이지만 논증적은 아닌 지도와 같은 언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언하여 이로 인하여 지도와 과학이론 사이의 유추는 특히 불행한 유추가 된다. 이론들은 본질적으로 서술들의 논증적인 이론체계들이다: 이론들이 지닌 요점은, 이론들이 연역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지도는 논증적이 아니다. 물론 모든 이론은, 지도처럼, 모든 이론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서술적 언어처럼, 모든 이론이 의사소통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서술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표현적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의사소통자의 상태에 대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컴퓨터에도 발생할 것이다.) 그리하여 논리에서의 오류가 심리학에서의 오류를 야기하는 두 번째 경우가 있었다; 이 특정 경우에 인간 언어의 이용과 업적의 기초를 이루는 언어적 의향에 관한 그리고 본질적인 생물학적 요구에 관한 심리학.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주관적인 사고과정에 대한 연구에 앞서서 논리연구가 우선함이 나에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나는 당시 수용된 심리학적 이론들 중 많은 이론들을 크게 의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조건반사 이론이 오류임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조건반사와 같은 것은 없다. 파블로프가 말하는 개는 음식획득 분야에서 (본질적으로 유동적인[plastic]” 혹은 다시 말해서 시행착오에 의한 탐구에 좌우되는 분야)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는 것으로서 그리고 임박한 사건들에 대한 기대들이나 예상들을 날조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이것을 조건부여(conditioning)”로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되는 반사가 아니라 그것은 기대하는 것에 대한 발견이다 (아마도 가짜 발견). 그리하여 심지어 파블로프가 얻은 표면적으로 경험적인 결과들과 벡테레프(Bechterev)의 반사학(反射學: Reflexology) 현대 학습이론이 낳은 결과들 대부분이 이것에 비추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체가 발견한 것들을 잘못 이해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유인즉 반사학와 조건부여 이론은, 신경학적 용어들로 바뀐 연상심리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8년에 나는, 사고와 발견의 심리학에 관하여 여러 해 동안 연구한 결과였을지라도, 내가 최종적으로 심리학에서 방향을 돌린 철학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나는 심리학적 연구를 끝내지 못한 채 내버려두었다a; 나는 심지어 내가 쓴 것들 대부분의 상당한 복사본을 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의 심리학에서의 방법 문제에 관하여(On the Problem of Method in the Psychology of Thinking)”라는 논문은, 지금은 방법에 대한 나의 전환을 의미할지라도 나의 심리학적 저술에 대한 방법론적 서론으로서만 원래 의도된 일종의 성급한 막판 사건이었다.

나는 나의 논문에 대하여 나쁜 느낌을 가졌고 나는 심지어 다시 그 논문에 눈길을 준 적도 없다. 나는 내가 치른 두 가지 엄격한시험들에 (“Rigorosum이 철학박사를 위한 공개 구두시험들의 명칭이었다b) 대하여서도 나쁜 느낌을 가졌는데 한 가지 시험은 음악의 역사에 관해서이고 나머지 한 가지 시험은 철학과 심리학에 관해서였다. 뷜러(Bühler)는 이전에 나에게 심리학 시험을 출제했는데, 이 분야에서 어떤 질문도 나에게 던지지 않았지만 논리학 및 과학의 논리에 관한 나의 생각들을 말하도록 나를 격려했다. 슐릭(Schlick)은 주로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 나에게 질문했는데 나는 라이프니츠(Leibniz)에 대하여 답변을 아주 잘하지 못해서 시험에 떨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최고 점수인 전원일치 우수평가(einstimmig mit Auszeichnung)를 받고 내가 두 가지 시험들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물론 안심했고 행복했지만 내가 불합격했어야 한다는 느낌을 내가 극복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6. 지식론: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

1928년에 나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9년에 나는 (하급)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 이 자격시험을 위하여 나는 기하학에서 공리학의 문제들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한 장(: chapter)도 포함했다. 내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올바르게 추측하여 나의 초기 개념들이 만족스럽게 된 것은 겨우 나의 철학박사 시험이 끝난 다음이었다. 베이컨(Bacon) 이래 지배했던 그릇된 과학 이론이 자연과학들은 귀납적 과학들이라는 것과 귀납은 반복된 관찰들이나 실험들에 의하여 이론들을 확립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는 것 그렇게 깊이 자리를 잡은 이유를 나는 이해했다. 이유는 과학자들이,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자신들의 활동들을 확정해야 했다는 것과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구획설정 기준으로서 베이컨으로부터 귀납적 방법을 계승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자들은, 신뢰성에서 종교의 뿌리들과 비견될 수 있는 지식의 뿌리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이론들을 정당화하려고 조바심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해 동안 더 나은 구획설정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시험가능성이나 오류판정 가능성.

그리하여 구획설정에 관하여 문제에 빠지지 않고도 나는 귀납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시행착오라는 방법에 관하여 내가 얻은 결과들을, 연역적 방법론에 의하여 전체 귀납적 방법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나는 적용할 수 있었다. 이론들이 지닌 연역적 결론들에 대한 오류판정이나 반증을 통하여 이론들을 오류판정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분명히 연역적인 추론이었다 (후건부정[後件否定: modus tollens]). 이 견해는, 과학이론들은 오류로 판정되지 않을지라도 영원히 가설들이나 추측들로 남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과학적 방법에 관한 전체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와 함께 과학적 진보라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진보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이론들을 항상 더 큰 내용을 지닌 이론들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러나 이론은 많이 말할수록 더 많이 배제하거나 금지하고 그 이론을 오류로 판정한 기회들은 더 커진다. 그리하여 더 큰 내용을 지닌 이론은,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이다. 이 고찰로 인하여, 과학적 진보는 관찰의 축적을 본질로 한다고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덜 훌륭한 이론들을 뒤엎고 더 나은 이론들에 의하여, 특히 더 내용이 큰 이론들에 의하여 그 이론들을 대체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판명되는 이론이 탄생했다. 그리하여 이론들 사이에는 경쟁이 일종의 다윈적 생존경쟁 있었다.

물론 추측이나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론들에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귀납의 방법에 의한 정당화는 특히 필요 없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합당한 묘사를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들을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경쟁하는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을 다른 이론들보다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를 때때로 제시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하기 쉬웠고, 고도로 일관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마흐적(Machian) 실증주의자들과 비엔나 학파의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던 것과 매우 달랐다. 나는, 1926년 아니면 1927년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신문 기고문에서 그 다음에 그가 사회민주주의당 청년 모임에서 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비엔나 학파에 대하여 들었다. (이것은 내가 참석한 유일한 정당 모임이었다; 내가 1919년이나 1920년 이래 노이라트를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정당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비엔나 학파의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동호회의 프로그램 인쇄물을 읽었다; 특히 나의 스승이었던 수학자 한스 한(Hans Hahn)이 마련한 소책자a. 게다가 나는 나의 철학박사 논문을 쓰기 몇 년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를 읽었고 카르납(Carnap)의 저서들은 발간되는 대로 읽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이라기보다는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 기준을 찾고 있었던 것이 내가 보기에 분명했다. 그리고 나의 구획설정 기준은 그들의 구획설정 기준보다 더 낫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 또한 분명했다. 이유인즉 무엇보다도 그들은,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헛소리인 순전히 횡설수설로 만든 기준을 찾으려고 애를 썼고 형이상적 개념들은 흔히 과학적 개념들의 선두주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기준은 문제를 야기하기 마련이었다. 두 번째, 유의미 대() 무의미에 의하여 구획설정을 하면 문제가 변경될 따름이었다. 비엔나 학파가 인정한 바와 같이, 그 학파는 또 다른 기준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냈는데 의미와 의미결여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이것에 관하여 그들은 검증가능성을 채택했는데 검증가능성은, 관찰서술들에 의한 증명가능성과 동일한 것으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귀납론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하여 존중되던 기준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귀납이라는 개념과 검증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실제로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이론에 따르면, 과학은 귀납적이 아니었다; 귀납은 흄(Hume)에 의하여 산산조각 난 허구였다. (추가적이고 덜 흥미로운 요점은, 나중에 에이어[Ayer]에 의하여 인정되었는데, 검증가능성을 구획설정 기준으로 삼는 것은 철저히 터무니없다는 것이었다: 이론이 검증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에 횡설수설이라고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 터인가? 이론이 검증될 수 있을 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그 이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해될 수 있는 이론이 철저한 횡설수설일 수 있을 터인가?)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나는, 그들이 지녔던 주요 문제들 모두에 대하여 그들이 지녔던 것보다 내가 더 나은 답변들을 더 일관적인 답변들 지녔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요점은, 그들이 실증주의자들이어서 버클리-마흐(Berkeley-Mach) 전통 속에서 인식론적 관념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관념론자들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중립적

일원론자들(neutral monists)”로 묘사했다. 그러나 내 견해로 이것은 관념론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일 그리고 카르납의 저서들에서 관념론은 (혹은 그가 지칭한 바와 같이, 방법론적 유아론[方法論的 唯我論: methodological solipsism]) 일종의 작동하는 가설로서 상당히 공개적으로 수용되었다 뿐이었다.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들을 상당히 상세하게 연구하면서 나는 이 쟁점들에 관하여 많은 글을 썼다 (발표하지 않고). 내가 도달한 관점에서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는, 내가 이 개념들을 설명할 수 있었던 단 한 명을 알고 있었고 그는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였다. 나의 요점들 중 한 가지와 과학이론들은 항상 가설들이나 추측들로 남는다는 것 관련하여 그는 알렉시스 마이농(Alexis Meinong)

전제에 관하여(On Assumptions)(Über Annahmen) 나에게 언급했는데 그 저서는 심리학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과학이론들은 참이라고 함축적으로 전제하기도 함을 후설(Husserl)이 자신의 저서 논리적 탐구(Logical Investigations)에서 (Logische Untersuchungen, 1900, 1901) 그랬던 바와 같이 나는 발견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론들은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가설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수용하기에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배적인 견해는, 아직까지 가설들은 증명되지 않은 이론들이라는 것과 이론들은 증명되거나 확립된 가설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모든 이론들이 지닌 가설적 특징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그 이론들에는 어떤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믿었다; 이론들이 참으로 밝혀질 수 없을지라도 그 이론들의 진리는 틀림없이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요점인 모든 과학이론들의 가설적 특징은, 내 생각에 아인슈타인의 혁명이 낳은 상당히 흔한 결과였는데 그 혁명으로 인하여 뉴튼의 이론과 같은 심지어 시험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론도 진리의 근사치인 가설 이상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역론에 이론들은 가설적-연역적 이론체계들이라는 것과 과학의 방법은 귀납적이 아니라는 견해 대한 나의 지지와 관련하여 곰페르츠(Gomperz), 비엔나 학파의 일원이자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 형태(The Basic Forms of Scientific Method)에 관한 책의 저자였던 빅토르 크라프트(Victor Kraft) 교수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저서는, 실제로 과학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한 매우 귀중한 기술이었고 적어도 이 방법들 중 몇 가지는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임을 가설적-연역적 밝혔다. 곰페르츠는 빅토르 크라프트를 (율리우스 크라프트[Julius Kraft]와 친척관계가 아니다) 나에게 소개해서 나는 그를 비엔나 대학 근처에 있는 시민공원(Volksgarten)에서 몇 차례 만났다. 빅토르 크라프트는 내가 만난 최초의 비엔나 학파 일원이었다 (칠젤[Zilsel]을 빼면 그러한데, 파이글[Feigl] 따르면 그는 회원이 아니었다). 그는 그 학파에 대한 나의 비판들을 기꺼이 경청했다 내가 나중에 만난 회원들 대부분보다 더 경청했다. 그러나 그 학파의 철학은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철학과 표현형식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가 예언했을 때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나는 기억한다. 이 예언은 사실로 나타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철학의 과제가 개념들에 대한 해설이라는 계획성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a

1929년이나 1930년에 (1930년에 나는 마침내 중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나는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이라는 또 다른 비엔나 학파 회원을 만났다. 그 만남은 나의 외삼촌이자 비엔나 대학의 통계 및 경제학 교수인 발터 쉬프(Walter Schiff)에 의하여 마련되었는데 그는 나의 철학적 관심사들을 알고 있었고 내 생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이전에 율리우스 크라프트, 곰페르츠 그리고 빅토르 크라프트에 의하여 밝혀진 관심사에서 어떤 고무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논문들을 (출간되지 않은) 많이 썼음을 그들이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 중 누구도 나의 개념들을 출간하라고 격려하지 않았다. 곰페르츠는 정말로, 여하한 철학적 개념들을 출간하는 것은 절망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나에게 각인시켰다.a (시대가 변했다.) 이것은, 과학의 방법들에 관한 빅토르 크라프트의 탁월한 저서가 특별 기금의 지원을 받고서만 발간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파이글은 우리의 철야 모임에서, 나의 개념들이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중요함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서책의 형태로 그 개념들을 출간도 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책을 저술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떠오른 적이 없다. 문제들에 대한 흥미 때문에만 나는 나의 개념들을 발전시켰고, 그다음에 명료성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비판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에 그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스스로 적어놓았다. 당시 나는 내 자신을 정통파가 아닌 칸트주의자로서 그리고 실재론자로서 간주했다. 우리의 이론들은 실재에 의하여 우리에게 각인된다기보다는 우리의 정신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생산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다는 것을 나는 관념론에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류판정이 실재와의 정면충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강조했다. 본질적인 물체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교설을 나는 우리가 생산하는 이론들의 영구적인 가설적 특징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또한 해석했다. 나는 또한 내 자신을 윤리학에서 칸트주의자로서 간주했다. 그리고 당시 나는 비엔나 학파에 대한 나의 비판이 칸트를 읽은 그리고 칸트의 요점들 몇 가지를 이해한 결과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헤르베르트 파이글로부터 격려가 없었다면 내가 저술을 해야 했을 것 같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b 책을 쓴다는 것은 나의 생활방식에도 맞지 않았고 나 자신을 향한 나의 태도에도 맞지 않았다. 나에게 흥미로운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지 나에게는 확신이 없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파이글이 미국으로 떠난 후 아무도 나를 격려하지 않았다. 곰페르츠는, 파이글과의 흥미진진한 만남 이야기를 내가 전했는데, 분명하게 의기를 꺾었고 나의 부친도 그랬는데 나의 부친은 그런 상황 모두로 인하여 내가 언론인이 될까 우려했다. 나의 아내도 그 생각에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와 스키 타러 가거나 산행하기를 우리 모두 매우 즐겼던 일들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저술을 시작하자마자 아내는 타자를 독학하여 그 후 내가 쓴 모든 것을 여러 번 타이프로 작성했다. (나는 항상 타이프를 칠 때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이 수정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쓴 책은 두 가지 문제들과 귀납의 문제와 구획설정의 문제 그 문제들의 상호관계에 집중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의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제목을 (윤리학에 대한 두 가지 근본 문제들[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 참고하여 지식론에 대한 두 가지 근본 문제들(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로 정했다.

몇 장()이 타이프로 작성되자마자 나는 나의 친구이자 교육학 재단에서 한 때 동료였던 로베르트 람메르(Robert Lammer)에게 시험 삼아 주었다.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독자였다: 그는 자신이 아주 분명하지 않다고 보는 내가 남긴 모든 요점, 논증에서의 모든 공백과 모든 미진한 곳을 찾았다. 나는 나의 최초 초안을 상당히 빨리 썼지만 람메르의 집요한 비판으로부터 내가 배운 덕분에 나는 다시는 무엇이든 빨리 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또한, 충분히 분명하지 않게 내가 쓴 것이 비판을 받는다면 결코 옹호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양심적인 독자가 분명하지 않은 글귀를 발견한다면, 그 글귀는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분명히 하고 단순하게 하면서 서술하고 다시 서술하는 습관을 얻었다. 나는 이 습관을 거의 전적으로 로베르트 람메르에게서 얻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어깨 너머로 지켜보면서 분명하지 않은 글귀들을 부단히 나에게 지적하는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쓴다.

 

긍정과 부정이 뒤바뀌었고,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의 미실현 의무를 표현하는 동사형식이기 때문에 이 문장에서 적절한 동사형식이 아니다. 또한 it is unlikely도 시제가 현재인데 부적절하다.

는 물론, 우리가 모든 가능한 오해들을 결코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몇몇 오해들을 피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람메르를 통하여 나는 초기에, 비엔나 대학의 라듐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실험물리학자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를 만났다. 우리에게는 많은 공동 관심사들이 (음악이 한 가지였다) 있었고 그는 나를 많이 격려해주었다. 그는

또한 나를 프리츠 바이즈만(Fritz Waisman)에게 소개했는데 바이즈만은, 비엔나 학파가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동의했던 유명한 의미의 기준을 의미에 대한 검정가능성 기준 최초로 정식화했다. 바이즈만은 나의 비판에 큰 흥미를 보였다. 말하자면 그 학파의 후광을 형성한 핵심적무리들 중 몇 무리들에서 그 학파의 견해들을 비판하는 몇 가지 논문들을 낭독하도록 내가 최초로 초대를 받은 것은 그의 조치를 통해서라고 나는 믿는다.

그 학파 자체는 목요일 저녁마다 모임을 갖는 슐릭(Schlick)의 개인적인 학술회의였다고 나는 이해했다. 회원들은 슐릭이 합류하도록 초빙한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초대를 받은 적이 없고 초대를 요청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빅토르 크라프트의 아파트에서 혹은 에드가 칠젤의 아파트에서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 만나는 다른 모임들이 있었다; 그리고 칼 멩거(Karl Menger)의 유명한 수학 토론회(mathematisches Colloquium)도 있었다. 이 모임들 중 몇몇은 그 존재에 대하여 나는 심지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비엔나 학파의 핵심적인 교설들에 대하여 비판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내가 나의 최초 논문을 낭독한 것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에드가 칠젤의 아파트에서였다. 나는 아직도 당시 무대공포증을 기억한다.

저 초기 대담들 중 몇몇 대담에서 나는 확률이론과 관련된 문제들을 토론했다. 당시 존재하던 모든 해석들 가운데서 빈도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은 것을 나는 발견했고, 그 해석에 대한 리하르트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의 형태가 가장 만족스러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특히 우리가 확률에 관한 서술들은 가설들이라는 견해에서 바라보면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난제들이 있었다.a 그리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그 서술들은 시험될 수 있는가? 나는 이것과 몇 가지 부수적인 문제들을 토론하려고 시도했고, 그 후 항상 나는 그 문제들을 다루면서 다양하게 개선했다. (몇몇 개선사항들은 아직도 출간되지 않았다.)

비엔나 학파의 몇몇 회원들은, 그 회원들 몇몇이 이 모임들에 참석했는데, 이 요점들을 그들과 개인적으로 토론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그들 중에는 한스 한(Hans Hahn)이 있었는데 그는 그의 강좌들을 통하여 나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고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와 리하르트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가 있었다 (그들은 비엔나를 자주 방문했다). 이론물리학자였던 한스 티링(Hans Thirring)은 자신의 학술회의에서 연설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칼 멩거(Karl Menger)는 자신의 토론회의 회원이 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자신의 차원 이론을 시험가능성의 등급들을 비교하는 데 적용하려고 내가 시도해야 한다고 나에게 제안한 사람은 칼 멩거였다 (그에게 나는 그 요점에 관하여 충고를 요청했다).

1932년 초기에 당시 내가 지식이론의 두 가지 근본적 문제들(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1권으로서 간주하던 것을 나는 완료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주로 비엔나 학파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서 그리고 그들의 교설들에 대한 수정으로서 구상되었다; 여러 절들이(sections) 또한 칸트와 프리스(Fries)에 대한 비판에 할애되었다. 그 책은 여전히 출간되지 않았는데 먼저 파이글이 읽었고 그다음에 비엔나 학파의 카르납, 슐릭, 프랑크(Frank), (Hahn), 노이라트(Neurath) 그리고 다른 회원들이 읽었다; 그리고 곰페르츠도 읽었다.

슐릭과 프랑크는 그 책을, 자신들이 편집인이었던 과학적 세계 이해를 위한 총서(Schriften zur wissenschaftlichen Weltauffassung) 시리즈에 발간하도록 1933년에 수용했다. (이것은 대부분이 비엔나 학파의 회원들에 의하여 저술된 저서 시리즈였다.) 그러나 출판사인 슈프링거(Springer), 그 책이 근본적으로 축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책이 수용될 때쯤 나는 2권의 대부분을 집필했다. 이것은, 나의 저술의 개요 정도가 출판사가 발간하려던 쪽수 내부에 실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슐릭과 프랑크의 동의하에 나는 두 권의 축소판으로 구성된 새로운 원고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길다고 출판사가 반환했다. 출판사는 표준 크기의 종이 최고 15매를 (250) 고집했다. 최종 축소판은 최종적으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로 출간되었다 나의 외삼촌 발터 쉬프(Walter Schiff)에 의하여 마련되었는데 나의 삼촌은 원문의 약 절반을 무참하게 잘라냈다. 분명하고 명시적이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후에 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여기서, 나의 최초 발간 저서가 된 저 개요의 개요를 제시할 수 없다.a 그러나 내가 언급할 한두 가지 요점들이 있다. 그 저서에는 지식이론을 제공하려는 그리고 동시에 방법에 과학의 방법 관한 논문이 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그 조합은, 인간의 지식을 우리의 이론들과 우리의 이론들이자 우리의 가설들이며 우리의 추측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의 지성적 활동들의 산물로서. 물론 지식을 보는 다른 방식이 있다: 우리는 지식을 생명체의 주관적 상태인 주관적 정신상태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식을 서술들의 체계로서 취급하는 것을 토론에 부쳐진 이론들 선택했다. 이 의미에서 지식객관적이다; 그리고 그런 지식은 가설적이거나 추측성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식을 보게 되자 나는 흄(Hume)이 지녔던 귀납의 문제를 다시 언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객관적인 재언명에서 귀납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믿음들의 혹은 우리들의 믿음들에 대한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단칭명제들과 (“관찰될 수 있는단일한 사실들에 대한 서술들) 전칭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의 문제이다.

이런 형태로, 귀납의 문제는 해결이 가능해진다: 전칭명제들이 단칭명제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기 때문에 귀납은 없다. 그러나 전칭명제들은, 관찰될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한 서술들과 충돌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단칭명제들에 의하여 반박될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우리의 이론들이 시험에 부쳐지기 전에 우리는 객관적인 의미에서 더 좋은그리고 더 나쁜이론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더 좋은 이론들은 더 큰 내용과 더 큰 설명력을 (두 가지 모두 우리가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문제들에 상대적이다) 지닌 이론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또한 더 좋은 시험 가능한 이론들이라고 나는 밝혔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시험들을 견딘다면 더 잘 시험된 이론들이다.

귀납의 문제에 대한 이 해결책으로 인하여 시행착오 방식이자 과학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인 비판적 방법에 대한 분석이 발생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을 저질렀는지 탐지하기 위하여, 대담한 가설들을 제시하여 그 가설들을 가장 엄격한 비판에 부치는 방법.

이 방법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문제들로써 시작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 상황에 빠져있음을 항상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문제를 선택한다. 해결책은 항상 잠정적인데 이론이자 가설인 추측을 본질로 삼는다. 경쟁하는 다양한 이론들은, 그 이론들이 지닌 결점들을 탐지하기 위하여 비교되고 비판적으로 토론된다; 그리고 항상 변하고 항상 미결정적인 비판적 토론의 결과들은 당시의 과학(the science of the day)”으로 지칭될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귀납은 없다: 반증이나 오류판정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실들로부터 이론들로 결코 논증할 수 없다. 과학에 대한 이 견해는 다윈적인 것으로서, 선택적인 것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대조적으로 우리가 귀납에 의하여 나아간다고 주장하는, 혹은 검증(오류판정이라기보다는)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이론들은 라마르크적(Lamarckian)이다: 그 이론들은, 환경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환경에 의한 지시(instruction)를 강조한다.

귀납의 문제에 대하여 제시된 해결책은 더 오래된 문제를 우리가 지닌 믿음들의 합리성이라는 문제 해결하는 방법을 또한 밝힌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것이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주장은 아니었을지라도). 이유인즉 우리는 먼저 믿음이라는 개념을 행위라는 개념으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들이 (혹은 미행위들[inactions]), 비판적인 과학적 토론과 관련하여 당시 우세하던 상태에 따라서 수행된다면, “합리적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비판적보다 합리적에 대하여 더 좋은 동의어는 없다. (믿음은 물론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믿음을 유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래 주석 226과 비교하라.)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널리 오해를 받았다. 나의 저서인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들(Replies to my Critics)에서 그 해결책에 관하여 더 많을 것을 말할 의도가 나에게 있다.109a

 

17. 누가 논리실증주의를 죽였는가?

 

109a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들(Replies)13 14절 참조.

논리실증주의는 그래서 죽었다, 혹은 철학적 운동이 항상 죽게 되는

것만큼 죽었다.

존 패스모어(JOHN PASSMORE)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가 시작된 방식 때문에, 그 저서는 1934년 말에 발간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 결과를 낳았다. 출간되지 않는 1932년의 그 저서에 앞선 저술과 1933Erkenntnis의 편집자들에 보낸 나의 간략한 서한도 그러했다. 그 후 나의 입장은 비엔나 학파의 주요 회원들에 의하여 널리 토론되었고 게다가 그 저서는 프랑크(Frank)와 슐릭(Schlick)에 의하여 편집된 주로 실증주의적인 시리즈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이 모습은 몇 가지 기묘한 결과들을 낳았다. 한 가지 결과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로서 1959년에 영어로 번역될 때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철학자들이 (J. R. 와인버그[Weinberg]와 같은 극소수의 예외와 함께) 나를 논리실증주의자로서 혹은 기껏해야 검증가능성을 오류판정가능성으로 대체하여 반발하는 논리실증주의자로서 간주했던 듯이 보인다. 심지어 몇몇 논리실증주의자들 자신들도, 그 저서가 이 시리즈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고, 나를 비판자보다는 동맹자로 보기를 선호했다.113a 그들은 몇 가지 양보와 가급적이면 상호간의 양보들 언어적 계략들을 이용하여 나의 비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내가 검증가능성 대신에 오류판정가능성을 유의미성의 기준으로서 대체하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다.a) 그리고 내가 나의 공격을 반복하지 않았기 (논리실증주의와 싸우는 것은 전혀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때문에 논리실증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느끼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리고 심지어 이후에 이 양보들과 작은 조정들의 방법을 계속 사용한 저서들과 논문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쯤 논리실증주의는 실제로 죽은 지 몇 년 되었다.

오늘날 논리실증주의가 죽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될 질문이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 혹은, 더 정확하게, “누가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패스모어의 탁월한 역사관련 항목도 [주석 110에서 인용된] 이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책임을 인정해야 할까봐 나는 우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의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의도는, 내가 보기에 몇 가지 근본적인 오류들이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패스모어는 논리실증주의가 해체된 것은 극복 불가능한 내부적 난제들 때문이라고 올바르게 여겼다. 이 난제들 대부분은 나의 강연들과 토론들, 그리고 특히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지적되었다.114a 비엔나 학파의 몇몇 회원들은 변화를 이룩해야 할 필요성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씨앗들이 뿌려졌다. 그 씨앗들로 인하여,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엔나 학파가 주장하는 교설들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비엔나 학파가 자체의 교설들보다 먼저 와해되었다. 비엔나 학파는 탁월한 조직이었다. 정말로 그 학파는, 논리학과 수학의 토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분야에서 위대한 혁신자들 중 두 명인 쿠르트 괴델(Kurt Gödel)과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을 매혹시키고, 1급 수학자들과 과학자들과 긴밀하게 협동하여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독특한 학술 모임이었다. 비엔나 학파의 와해는 매우 심각한 손실이었다.b 개인적으로 나는 그 학파의 회원들 몇몇에게, 특히 헤르베르트 파이글과 빅토르 크라프트와 칼 멩거에게 필립 프랑크와 모리츠 슐릭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의 저술을 수용했다 감사해야 한다. 다시, 내가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교정쇄를 지니고 19348월 프라하 회의에서 처음으로 타스키를 만난 것은 간접적으로 비엔나 학파를 통해서였다; 1934-35년 비엔나에서; 그리고 다시 19359월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타스키로부터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도 나를 비엔나 학파로 크게 이끈 것은 과학적 태도혹은 내가 지금 그것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합리적 태도였다. 이것은 카르납의 첫 번째 주요 저서인 세계의 논리적 구조(Der logische Aufbau der Welt)의 초판본 서문의 마지막 세 문단들에서 카르납에 의하여 아름답게 서술되었다. 내가 카르납에게 동의하지 않는 많은 것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세 문단들에는 내가 오류로서 간주하는 것들이 있다: 이유인즉 대부분의 철학적 이론체계들에 관하여 우울하게 만드는” (“niederdrückend”) 것이 있다는 데 내가 동의할지라도,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 그 이론체계들의 다수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을 제거는 것은 한 가지 오류이고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것들은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라고 나는 느낀다. 그러나 특히 정당화에 대한 카르납의 반복된 요구가 내가 생각하기에 심각한 오류이었을지라도 (그리고 여전히 오류이다), 그런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거의 무의미하다. 이유인즉 카르납은 여기서 합리성을, 더 큰 지성적 책임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나아가는 방식으로부터 그리고 철학자들의 이 우울하게 만드는 방식들과 대비하여 배우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철학자들이 최소한의 합리적이거나 비판적인 논증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신들의 가식적인 지혜와 지식 사칭의 방식들.

내가 여전히 비엔나 학파와 그 학파의 정신적 지주인 버트런드 러셀과 아주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계몽의 태도인 이 일반적인 태도에서 그리고 철학에 대한 불행히도 철학이 현재 상태인 것 그리고 철학이 되어야 하는 상태에 대한 이 비판적 견해에서이다. 이로 인하여 아마도 내가 카르납과 같은 비엔나 학파의 회원들에 의하여, 내가 그 회원들 중 한 명으로 생각되는 그래서 그들과 나의 차이점들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물론 나에게는 이 차이점들을 지나치게 강조할 의도가 없었다.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쓸 때 나는 실증주의자 친구들과 실증주의자 적들에게 도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지는 않았다. 1932년 여름 티롤(Tyrol)에서 카르납, 파이글 그리고 내가 만났을 때 카르납은 나의 저서 지식론에 대한 두 가지 근본 문제(Grundprobleme)의 미발간 초판본을 읽었고 그 후 곧 인식(Erkenntnis)프로토콜 명제에 관하여(Über Protokollsätze)”라는 기고문을 발표해서 내가 놀랐는데 그 기고문에서 그는 나의 견해들 몇 가지에 관하여 충분히 인정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그가 당시 나의 절차라고 (“Verfahren B”) 지칭한 것을 지식론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최고로 간주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간주하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상황을 요약했다. 이 절차는 모든 명제들, 심지어 시험 서술들 자체들을 이론에 흡수된 것인 가설적이거나 추측적인 것으로서 간주하는 절차이자 물리학에서 명제들을 시험하는 연역적 절차였다. 카르납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이 견해를 고수했고 헴펠(Hempel)도 그랬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대하여 카르납과 헴펠이 검토하여 극도로 승인한 것은 희망적인 징조들이었고 그래서 또 다른 방식으로는 라이헨바흐(Reichenbach)와 노이라트(Neurath)에 의한 공격들도 그러했다.

이 절의 초입에서 패스모어의 글을 내가 언급했기 때문에, 비엔나 학파의 그리고 논리실증주의의 해체에 대한 궁극적 원인으로 내가 간주하는 것은 그 학파의 교설에 있던 중대한 오류들이 (그 오류들 중 많은 오류들을 나는 지적했다) 아니라 커다란 문제들에 대한 흥미가 쇠퇴라고 나는 여기서 아마도 말할 것이다: 세부사항들(“수수께끼들) 몰두 그리고 특히 단어들이 지닌 의미들에 몰두; 요컨대 그 학파가 지녔던 편협한 학풍 고집. 이것은, 영국과 미국에서 그 학파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18. 실재론과 양자이론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 몇몇 사람들에게는 비엔나 학파에 대한 비판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저서의 주요 목표들은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인간 지식론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지식을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Hume)과 밀(Mill)과 마흐(Mach)에게 내려오기까지a,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결정된 것으로서 생각했다. 심지어 흄(Hume)도 자신을 회의론자로서 생각하고 사회과학들을 혁명하려고 소망하여 인성론(Treatise)을 저술했는데, 인간의 지식을 인간의 습관들과 거의 동일시했다. 인간의 지식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것; 쥴리우스 시저가 암살당했다는 것; 잔디는 녹색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지 못했다. 흥미롭던 것은 지식의 성장이었던 발견 문제가 있는 지식이었다.

우리가 지식이론을 발견의 이론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면, 과학적 발견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지식성장에 관한 이론은, 특히 물리학의 성장에 관해서 그리고 물리학에서 견해들의 충돌에 관해서 말할 것을 지녀야 한다.

헤르베르트 파이글의 격려를 받고 내가 나의 저서를 쓰기 시작한 때 (1930) 현대물리학은 혼란에 빠졌다. 양자역학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1925년에 창시되었다; 그러나 주요 돌파구가 마련된 것을 외부인들이 깨닫기까지 전문적인 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시작부터 불화와 혼란이 일었다. 두 명의 탁월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보어(Bohr)는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는데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1927Solvay 회합에서 철저했던 바와 같이 1955년 아인슈타인이 사망할 때까지 철저했다.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보어가 이겼다는 거짓 이야기가 널리 수용된다; 그리고 창조적 물리학자들 다수는 보어를 지지하여 이 허구적 이야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탁월한 물리학자들인 드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는 보어의 견해들에 (나중에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으로 지칭된)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독립적 노선들로 나아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코펜하겐 학파로부터 몇몇 이탈자들이 나타났는데 특히 봄(Bohm), 붕게(Bunge), 란데(Landé), 마지노(Margenau)와 비지에(Vigier)였다.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그들은 소수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의견불일치가 정통 코펜하겐 학파 안에서도 또한 감지될 수 있다. 이 정통파 회원들은, 자신들의 견해들에 내재한 난제들을 주지하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의견불일치를 주지하지 못하여 아무튼 그 의견불일치를 우려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는 외부인들 눈에는 매우 두드러진다.

너무나 피상적이지만 이 모든 언급들로 인하여, 당시 새로운 양자이론으로 자주 지칭되던 양자역학을 내가 처음 이해하려고 시도했을 때 느낀 당혹감이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나는 저서들과 기고문들을 통하여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나의 어려움에 관하여 종종 내가 함께 이야기한 유일한 물리학자는 나의 친구인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였다. 나는 그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는 그 이론이 이해될 수 있는지 적어도 평범한 인간들에 의하여 의심했다.

그 이론에 대한 보른(Born)의 통계적 해석의 중요성을 내가 깨달았을 때 나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보른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슈뢰딩거의 독창적인 해석이 심미학적으로 그리고 물질에 대한 설명으로서 나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그 이론이 옹호될 수 없다는 것과 보른의 해석이 고도로 성공적이라는 것을 내가 수용하자마자 나는 후자(後者)를 고수했고 그리하여 보른의 해석이 수용된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공식들에 대한 해석을 지지할 수 있을 터인지 당혹스러웠다. 양자역학이 통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도 그러함은 분명하게 보였다: 그 공식들은 산포 관계들(scatter relations)로서, 다시 말해서, 양자역학적 실험들의 수열에 대한 통계적 산포의 하위 한계들이나 그 수열의 동질성의 상위 한계들을 서술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a 이 견해는 지금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실험들 집합의 결과들 산포와 입자들 집합의 산포를 원래 내가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a 것을 나는 분명히 해야한다; “형식적으로 단칭인서술들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내가 발견했을지라도, 그 문제는 경향들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완벽하게 정리되었을 따름이다.)

양자역학의 두 번째 문제는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라는 유명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1934년에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동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능한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 해결책이 옳다고 인정했다. 제시된 해결책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 발생하는 확률들은 상대확률들(relative probabilities)이었음이 (혹은 조건확률들[conditional probabilities]) 본질적으로 지적된다.

두 번째 문제는, 아마도 나의 고찰들의 핵심적 요점인 것과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이라는 문제들로 추적될 수 있다는 추측인데 확신이 되었다 연결된다.

해결된 세 번째 문제는, 상태의 준비와 측정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나의 토론이 전적으로 옳았고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했을지라도, 특정 사고실험에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77절에서) 관하여 심각한 오류를 나는 저질렀다. 나는 이 오류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몇 가지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음을 나는 당시 알지 못했고, 나의 오류로 인하여 나의 무능이 증명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인슈타인이 저지른 오류들에 대하여 들은 것은 코펜하겐 과학철학 총회가 끝난 1936년 코펜하겐에서였다. 이론물리학자인 빅토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의 조치로 시작하여, 나는 닐스 보어에 의하여 그의 연구소에서 토론을 위해 며칠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전에 폰 바이체커(von Weizsäcker)와 하이젠베르크에 대항하여 나의 사고실험을 옹호했는데 그들의 논증들에 의하여 나는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했고 아인슈타인에 대항해서도 나는 나의 사고실험을 옹호했는데 그의 논증들에 의하여 나는 정말로 나는 확신했다.a 나는 그 문제를 티링(Thirring)과 토론했고 슈뢰딩거와 토론했는데 (옥스퍼드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양자역학에 관하여 대단히 불편하고 아무도 실제로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아인슈타인과 나눈 토론들에 그가 나중에 쉴프(Schilpp)의 저서, 아인슈타인 편에서 기술한 동일한 토론들 대하여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패배주의적 심정에 빠졌다. 보어의 말에 따라서 아인슈타인도 나처럼 오류를 저질렀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패배감을 느껴서 보어의 인격에서 나오는 엄청난 충격을 제어할 수 없었다. (당시 보어는 어떤 정도로도 저항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파속의 붕괴에 대한 나의 설명을 여전히 옹호했지만 나는 무너졌다. 바이스코프는 나의 설명을 기꺼이 수용하는 듯이 보였지만, 보어는 자신의 상보성 이론을 너무 열심히 설명하는 데 빠져서 나의 설명을 설득하려는 나의 허약한 노력들을 주시하지 않아서 나는 가르치기보다는 배우는 데 만족하여 요점을 밀고나가지 않았다. 보어의 친절, 탁월함 그리고 열정에 압도적인 인상을 받고 나는 떠나왔다; 나는 또한,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b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상보성을 내가 이해했다고 나는 확신할 수 없어서, 비록 분명히 몇몇 사람들은 상보성을 이해했다고 확신했을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상보성을 이해하는지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나에게 말한 바와 같이, 이 의심은 아인슈타인도 그리고 슈뢰딩거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나는 이해하기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어는 어떤 면에서, 양자역학은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고전물리학만 이해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체념하고, 양자역학은 부분적으로만 그리하여 고전물리학을 매개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c 한다고. 이 이해하기의 한 부분은 고전적인 파동 모습(wave picture)”을 통해서 이룩되었고 또 한 부분은 고전적인 입자 모습(particle picture)”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이 두 가지 그림들은 양립될 수 없어서, 보어가 상보적(complementary)으로 지칭한 것이었다. 그 이론을 더 충분하거나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려는 희망이a 없었다; 그래서 요구되었던 것은, 더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보어의 이론이, 이해하기가 이룩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매우 편협한 견해에 근거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어는 이해하기를 그림들과 모형들을 통하여 일종의 시각화를 통하여 생각했던 듯이 보였다. 이것은 너무 편협하다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전개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림들 이해하기가 아니라 이론의 논리적 힘을 이해하기 이다; 이론이 지닌 설명력과, 관련 문제들에 대한 그리고 다른 이론들에 대한 이론이 지닌 관계. 나는 강연들을 통하여 여러 해에 걸쳐서 이 견해를 전개했는데 처음은 내가 생각하기에 알프바흐(Alpbach)에서였고 (1948) 프린스턴에서 (1950), 케임브리지에서의 양자역학에 관한 한 강좌에서 (1953년이나 1954), 미니애폴리스에서 (1962) 그리고 나중에 다시 프린스턴에서 (1963),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 (물론 런던 또한). 그 견해는, 개괄적일 따름일지라도, 몇 가지 나의 나중 논문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양자물리학에 관하여 나는 여러 해 동안 크게 낙심한 상태에 빠졌다. 나는 나의 그릇된 사고실험을 극복할 수 없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저지른 오류들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을지라도 내가 거기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두었다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1948년이나 1949년에 양자역학에 관한 그의 저서를 내가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인용한 양자물리학자인 아르투르 마르흐(Arthur March)와 몇 번 토론을 거친 후에만 나는 새로운 용기와 같은 것을 지니고 그 문제로 복귀했다.

나는 옛 논증들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하여 다음 결론에 도달했다:

(A)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문제.

(1) 결정론에 반대하는 특별히 양자역학적 논증과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양자역학은 통계적 이론이고 일견 결정론적 이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역학이 일견 결정론적인 이론과 양립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욱 특히, 이 소위 불가능성에 대한 소위 숨은 변수들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유명한 증명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그리고 더 최근에는 존 S. [John S. Bell]에 의한 더 직접적인 방법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1934년에 도달한 입장은, 양자물리학에서 결정론이 양자역학과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정론이 반증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번 이상 내 생각을 바꾸었다.

일견a 결정론적 이론의 존재가 정말로 양자역학의 결과들과 형식적으로 양립될 수 있음을 밝히는 모형이 1951년에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이 증명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개념들은 드 브로이[de Broglie]에 의하여 먼저 제시되었다b.)

(2) 다른 한편으로 결정론이 물리학에서 토대를 지닌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립하는 근거가 전혀 없다; C. S. 퍼스(Peirce), 프란츠 엑스너(Franz Exner), 슈뢰딩거, 그리고 폰 노이만(von Neumann)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상 그 주장에 반대하는 강력한 이유들이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뉴튼 역학의 결정론적 특징은 비결정론과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게다가 일견a 결정론적인 이론들을, 비결정론적이고 확률론적인 미시이론들(microtheories)을 근거로, 거시이론들(macrotheories)로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반면 그 반대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자명하지 않은 확률론적 결론들은 확률론적인 전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될 (그리하여 설명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란데[Landé]의 몇 가지 매우 흥미로운 논증들이 틀림없이 참고된다.)

(B) 확률.

양자역학에서 우리에게는

(1) 물리학적이고 객관적인 (혹은 실재론적인”);

(2) 통계학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확률 가설들을 만들어내는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게다가.

(3) 이 가설들은 단일한 경우들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4) 이 가설들은 실험방식에 상대적이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이 모든 요건들을 충족시킨 확률계산에 대한 형식주의적해석을 전개했다. 그 후 나는 이것을, “경향해석에 의하여 대체하면서, 개선했다.

(C) 양자이론

(1) 실재론. “입자-파동(wavicles)”(입자--파동[wave-cum-particles])이나 유사한 비고전적 실체들에 대하여 나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을지라도, 전자 등등이 입자들일 뿐이라는 고전적이고 우활[迂闊]하고 실재론적인 견해로 부터 이탈할 어떤 이유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국지화될 수 있고 운동량을 지닌다는 견해. (물론 그 이론을 전향적으로 전개하면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2) 하이젠베르크의 소위 불확정성 원리는 특정 공식들을 잘못 해석한 것인데 그 공식들은 통계적 산포(statistical scatter)를 주장한다.

(3)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들은 측정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의 측정에 대한 양자이론의 전체가 오해들로 포장됨을 암시한다. 하이젠베르크 공식들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 따라 금지된측정들은, 내가 얻은 결과들에 따라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공식들을 실험하기 위해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산포 관계들은 양자역학적 체계들의 준비 상태들과 관련이 있다. 어떤 상태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항상 (짝을 이루는) 산포를 도입한다.139a

(4) 양자이론에 고유하게 필요한 것은 (단계-의존적인) 확률들의 간섭이다. 우리가 이것을 궁극적인 것으로서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로 보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을 콤프튼(Compton)이 결정적으로 시험한 것에 여전히 반대하는 반면, 듀안(Duane)은 파동역학 오래 전인 1923년에 새로운 양자 규칙을 만들어냈는데 그 규칙은, 에너지와 관련되는 플랑크(Planck) 규칙의 운동량을 참고한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운동량의 정량화(定量化: quantification)를 위한 듀안의 규칙은 광양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입자들에게도 (란데에 의하여 강조된 바와 같이) 적용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규칙은 입자 간섭을 합리적으로 (오직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으로일지라도) 설명한다. 란데는, 파동역학의 정량적 간섭 규칙들이 단순한 추가적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나아가 논증했다.

(5) 그리하여 많은 철학적 유령들이 이제 추방될 수 있고, 주체나 정신이 원자의 세상 속으로 침입한다는 저 많은 엄청난 철학적 주장들은 이제 배척될 수 있다. 이 침입은 확률계산에 대한 전통적인 주관론적 오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설명될 수 있다.

 

19. 객관성과 물리학

 

앞 절에서 나는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그리고 그 저서로부터 출현한 나중 저술의 몇 가지 면모들을 강조했는데 그것들은 실증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심지어 양자이론에 관한 나의 견해들에서도 부수적인 역할을 했다. 내가 아인슈타인의 실증주의를 배척했기 때문에 나는 하이젠베르크의 초기 실증주의에 대하여 면역이 생겼다고 나는 생각한다.a

이전에 (8, 주석 3132 사이의 원문에서) 내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막스 엘슈타인(Max Elstein)에 의하여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소개받았다. 그는 관찰적 관점을 강조도 비판도 하지 않았지만 특별 이론의 문제를 (내가 염려하는 바, 통상적인 비역사적 방식으로 마이클슨[Michelson]과 몰리[Morley]의 실험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로서b) 내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는 나와 함께 민코프스키(Minkowski)가 제시한 해결책의 형태를 토론했다. 내가 진지하게 상대성에 대하여 조작주의적 접근방식을 취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이 조치였을 것이다: 우리는, “관찰자를 주목하지 않고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을 실재론자로서 읽을 수 있다; 혹은 대안적으로, 관찰자와 관찰자가 하는 것들을 항상 다루면서 우리는 그것을 실증주의자나 조작주의자로서 읽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독단적인 실증주의자이자 조작주의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는 나중에 이 해석을 배척했다: 그는 1950년에 나에게, 자신은 이것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오류이기에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 오류는 그의 인기 저서인 상대성: 특수 및 일반 이론(Relativity: The Special and the General Theory)에서 정말로 진지한 형태를 띠었다. 거기 22쪽에서 (독일어 원본에서는 14쪽 이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자가 이 요점에 관하여 완벽하게 확신할 때까지 더 멀리 나아가지 말 것을 나는 독자에게 요구하고 싶다.” 그 요점은 개괄적으로, “동시성은 틀림없이 정의(定義)는데 그리고 조작적 방법으로 정의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내가 동시성에 대한 서술에 의미를 부착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내 자신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달리 표현하여 어떤 용어는 조작적으로 틀림없이 정의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용어는 무의미하다.144a (여기에, 요약하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고 매우 독단적인 형태로 비엔나 학파에 의하여 나중에 전개된 실증주의가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의 상황은, 단지, 관성계(inertial system)(혹은 정태계[靜態系: stationary system]”) 대하여 사건들은 뉴튼의 이론서와 꼭 마찬가지로 동시적이거나 동시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이행법칙(移行法則: transitivity law)(Tr) 성립한다:

(Tr) 관성계에서, 사건 αb와 동시적이고 bc와 동시적이라면 αc와 동시적이다.

그러나 αb가 동시적인 체계가 bc가 동시적인 체계와 동일하지 않다면, (Tr)은 세 가지 떨어진 사건들의 사건발생 시간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Tr), 몇 가지 사건들이 다른 체계들에서 다시 말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체계들에서 시간배열이 되는 떨어진 사건들에 대하여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두 가지 (관성) 체계들에 관하여 광속의 불변이라는 원리 다시 말해서 우리가 로렌츠변환(Lorentz Transformation)을 연역하도록 허용하는 원리의 결과이다.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로렌츠변환은, 다양한 (관성) 체계들에서 만들어지는 사건들의 시간배열들에 (Tr)의 적용함과 양립될 수 없다고 경고하기 위함을 제외하고, 심지어 동시성을 언급한 필요가 없다.

조작주의를 여기서 도입할 이유가 없고 조작주의를 강조할 이유는 훨씬 더 없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적어도 상대성에 관한 자신의 논물을 쓸 때 마이클슨(Michelson)의 실험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는 광속의 불변에 대하여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했을 뿐이다.

그러나 많은 탁월한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조작주의에 의하여 큰 인상을 받았는데 그 조작주의를 그들은 상대성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 (아인슈타인 자신을 오랫동안 그렇게 한 바와 같이). 그리하여 조작주의가 하이젠베르크의 1925년 논문에 대한, 그리고 전자 통로라는 혹은 전자에 대한 고전적인 위치--운동량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는 그의 널리 수용된 제안에 대한, 영감이 되었다.

나로서는 여기에, 나의 실재론적 인식론을, 양자-역학적 형식론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주관론적 해석의 비판에 적용함에 의하여, 그 인식론을 시험할 이유가 있었다. 보어(Bohr)에 관하여 나는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이젠베르크보다 덜 명시적이었으며 그리고 그가 혹시 믿지 않는 견해들로써 그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을 내가 주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작주의적 프로그램을 토대로 새로운 양자역학을 세운 것은 하이젠베르크였고 그 성공으로 인하여 이론물리학자들 다수가 실증주의로 그리고 조작주의로 변신하는 것은 하이젠베르크 때문이었다.

 

20. 진리; 확률; 입증

 

탐구의 논리(Logik der Foschung)가 출간될 즈음에 내가 추가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세 가지 문제들이 있다고 나는 느꼈다: 진리, 확률, 그리고 이론들이 지닌 내용과 관련하여 이론들을 자체에 대한 입증과 비교하기.

허위라는 다시 말해서 비진리라는 개념과 그리하여, 암시에 의한, 진리라는 개념이 탐구의 논리(Logik der Foschung)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을지라도, 나는 그 개념을 아주 우활하게(迂闊하게: naively) 사용하였고 84절에서만 “‘진리입증이라는 개념들의 사용에 관한 언급(Remarks Concerning the Use of the Concepts 'True' and 'Corroborated')”이라는 (Bemerkungen über den Gebrauch der Begriffe "wahr" und "bewährt")제목으로 토론했다.a 당시 나는 타스키(Tarski)의 저술이나 두 가지 종류의 메타언어적 이론들의 (한 가지 이론은 카르납에 의하여 구문론[syntax]”으로 지칭되었고 나머지 한 가지 이론은 타스키에 의하여 의미론[semantics]”으로 지칭되어 나중에 Marja Kokoszy skab 의하여 매우 분명하게 구분된) 구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진리와 입증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한, 나의 견해들은 비엔나 학파에서 다시 말해서, 카르납처럼 타스키의 진리 이론을 수용한 그 학파의 회원들 다소 표준이 되었다.

1935년에 타스키가 나에게 진리 개념에 대한 자신의 정의(定義: definition)을 설명했을 때 (비엔나에 있는 시민정원[Volksgarten]에서) 그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가 마침내 많이 폄훼를 당한 진리 대응 이론을 회복시켰음을 나는 깨달았는데 그 이론이 항구적인 진리에 대한 상식적 개념이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것에 관하여 나는 나중에 주로, 타스키가 연구한 것을 내가 분명하게 이해하려고 고심했다. 실제로 그가 진리를 정의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는 매우 단순한 형식언어에 대하여 그렇게 했고, 다른 형식화된 언어들의 무리에 대하여 진리를 정의하는 방법들을 개괄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도입하는 근본적으로 대등한 다른 방법들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리적으로(公理的으로: axiomatically); 그리하여 진리가 공리적으로 아니면 정의에 의하여 도입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근본적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모든 정확한 방법들은 형식화된 언어들에 국한되어, 타스키가 밝힌 바와 같이, 일상언어에는 적용될 리가 없었다 (그 언어가 지닌 보편주의적특징 때문에). 그러나 일상적인 담화에서 조금 신중하게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그리고 그 개념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방법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결국, 대상언어와 (의미론적인) 메타언어의 서술들에 관하여 그리고 사실들에 관하여 우리가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언어 구분을 우리가 이해하자마자 서술이 사실과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는 큰 어려움이 없음을 밝힌 것이 타스키의 업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 32절 참조.)

많은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확률은 우리에게 문제들을 던졌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다루어진 근본적인 문제는, 물리학에서 확률서술들의 시험가능성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나의 일반적인 인식론에 대한 중요한 도전으로서 간주하였고 이 인식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면서 내가 생각하기 임시방편적인 전제가 아닌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했다. 이론적 서술에 대한 어떤 시험도 최종적이거나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과, 경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는 비판을 피하지 말고 반증들을 수용하라고 (너무 쉽게는 아닐지라도) 우리에 알려주는 몇 가지 방법론적 규칙들을 고수하는 개념이 그것이었다. 이 규칙들에는 본질적으로 다소 융통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반증 수용은 가설의 잠정적 채택과 거의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그것은 추측의 수용이다.

두 번째 문제는 확률서술에 대하여 가능한 해석들의 다양성이고 이 문제는, 나의 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그러나 특징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다른 문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한 가지 문제는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리학에서 확률서술의 위상이라는 문제에 해당되는); 나머지 한 문제는 이론들이 지닌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률서술에 대한 문제를 그 문제에 대하여 가장 일반화된 형태로 공략할 수 있기 위하여, 확률계산을 위한 공리체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목표를 위하여서도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제시된, 입증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확률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입증의 특정 직관적 면모들로 인하여 입증을 확률계산의 의미에서의 확률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149a (아래 주석 155에서 159 사이의 원문 또한 참조.)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확률이라는 개념에는 가능한 많은 해석들이 있음을 지적했고 물리과학들에서 리하르트 폰 미제스

(Richard von Mises)에 의하여 제시된 것과 같은 빈도 이론만 수용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했다. (나중에 경향 해석을 도입함에 의하여 나는 이 견해를 수정했고 폰 미제스가 그 수정에 동의했을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경향 서술들은 여전히 빈도들에 의하여 시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한수열들로써 연산하는 알려진 모든 빈도 이론들에 대하여, 몇 가지 사소한 반론들과 별도로 나에게는 한 가지 전문적인 주요 반론이 있었다. 그 반론은 이렇다.

아무리 길더라도 0들의 그리고 1들의 (혹은 0들만의 아니면 1들만의) 여하한 유한수열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열의 길이를 n으로 하면 그 길이는 수십억이 될 것이다. n + 첫 번째 항에서부터 무한 무작위 수열로써 (“collective”a) 계속하라. 그러면 결합 수열에 관하여, 어떤 말단(endpiece)(어떤 m n + 1로부터 계속) 성질들이 중요한데 이유인즉 그 수열의 말단이 폰 미제스의 요건들을 충족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수열은 그 요건들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수열을 판단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 수열의 절편(the initial segment)경험적 수열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는 이 문제를, 폰 미제스와 헬리(Helly)와 그리고 한스 한(Hans Hahn)(다른 많은 사람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물론 동의했다; 그러나 폰 미제스는 그 문제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수열은 그가 그 수열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collective” (: sphere)와 같은 이상적인 수학적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경험적 (: sphere)”는 개략적인 근사치일 따름일 수 있다.

나는 이상적인 수학적 구(: sphere)와 경험적 구(: sphere)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 무작위 수열과 (“collective”) 무한 경험적 수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모형으로서 기꺼이 수용했다. 그러나 나는, 폰 미제스의 의미에서 유한수열이 collective에 대한 개략적인 근사치로서 언급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의미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상적이지만 덜 추상적인 것을 구

 

149a (1975년에 추가됨.) 특히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959(a)]와 후속 판본들, 396

이하의 요점 4에서 6까지 참조. (= 탐구의 논리[L.d.F.] [1966(e)], 349쪽 이하의 요점 4에서 6까지.)

a 역주: 박중서 번역에 집산으로 번역되었으나 정확하게 국어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알 수 없음.

축하기 시작했다: 바로 처음부터 무작위 성질을 지닌 이상적인 무한 무작위

수열, 그리하여 길이 n을 지닌 모든 유한 절편은 가능한 한 이상적으로 무작위였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그런 수열의 구축을 개괄했지만 이 구축으로 인하여 실제로 (a) 유한 경험적 수열과 비교될 수 있는 이상적인 무한수열이라는 문제를; (b) 폰 미제스의 (비구조적인[noncontructive]) 무작위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 대신에 이용될 수 있는 수학적 수열을 구축하는 문제를; 그리고 (c) 이제 이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a 한계의 존재에 대한 폰 미제스의 공준(公準: postulate)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당시 나는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혹은 다시 표현하여, 나의 구축으로 인하여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제시된 해결책들 몇 가지가 대체되었다는 것을 나는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내가 제시한 이상화된 무작위 수열들은 폰 미제스의 의미에서의 “collectives”가 아니었다: collectives가 무작위에 관한 모든 통계적 시험들을 통과했을지라도, 확정된 수학적 구축물들이었다: collectives의 지속은, 구축 방법을 아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수학적으로 예언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폰 미제스는, “collective”가 예언 불가능할 것을 요구했다 (“도박 체계의 배제 원리[principle of the excluded gambling system]). 이 포괄적인b 요구에는, collective의 어떤 사례도 구축될 수 없다는 불행한 결과가 있어서 그 요구의 일관성에 대한 구조적 증명이 불가능했다. 이 난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론, 그 요구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일관성에 (혹은 존재) 대한 증명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완화는 무엇이었나?

이것은 흥미롭지만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핵심적 문제는 자의적인 길이를 지닌 유한 무작위 같은 그리하여 이상적인 무한 무작위 수열들로 확장될 수 있는 수열들의 구축이었다.

1935년 초 나는 비엔나 학파의 핵심적 모임들 중 한 모임에서 이것에 관하여 강연했고 그 후 나는 칼 멩거에 의하여 그의 유명한 수학 토론회(mathematisches Colloquium)에서 강연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매우 선택된 약 30명의 사람들의 모임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쿠르트 괴델(Kurt Gödel), 알프레드 타스키 그리고 아브라함 발트(Abraham Wald)가 있었다; 그리고 멩거에 따르면,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확률과 통계학 분야에서 발트의 관심을 고취한 도구가 되었는데 그 분야에서 발트는 대단히 유명했다. 멩거는 발트에 대한 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그 사건을 기술한다:

당시 발트의 향후 삶과 업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판명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비엔나 시민인 철학자 칼 포퍼는... 무작위 수열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하려고 그리하여 collectives에 대한 폰 미제스의 정의가 지닌 명백한 결점들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내가 포퍼의 개념들에 대한 반()전문적인 설명을 들은 (슐릭의 철학 학파에서) 후에, 나는 수학 토론회(Mathematical Colloquium)에 그 중요한 주제를 아주 상세하게 제출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발트는 크게 흥미를 느꼈고 결과적으로 collectives라는 개념의 일관성에 관한 그의 완벽한 논문이 이루어졌다... 그는 collectives에 대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저 개념의 이중적 상대화에 근거시켰다.

 

멩거는 나아가, collective에 대한 발트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그가 기술한 것을 규정하여 결론을 내린다:

 

발트의 상대화가 collectives에 대한 원래 무제한적인 (그러나 작동될 수 없는) 개념을 제한할지라도, 그 상대화는 코플런드(Copeland)와 포퍼와 라이헨바흐가 말하는 불규칙성 요건들보다 훨씬 취약하다. 사실상 그 상대화는 이 요건들을 특별한 경우들로서 수용한다.

 

이것은 정말 사실이고 나는, 폰 미제스의 요구들을 최소한으로 완화하는 문제를 발트가 탁월하게 해결한 데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발트에게 지적할 기회를 가졌던 바와 같이 그것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01로서 동등한 확률들을 지닌 발트-collective”는 수십억의 0들로 구성된 블록으로써 여전히 시작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무작위는 한계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문제일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나의 업적으로 인하여 원하는 길이로 구성되는 몇몇 무작위 수열들의 말하자면 몇몇 매우 특별한 모형들의 구축이 허용될 뿐인 반면, 발트의 업적은 모든 무한 수열들의 집합을 collectivesnoncollectives로 나누기 위하여 일반적인 방법을 제공했다. 그러나 여하한 길이를 지닌 주어진 여하한 유한수열도 발트의 의미에서 collectivenoncollective가 되도록 그렇게 항상 지속될 수 있었다. (코플런드, 라이헨바흐, 처치[Church]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립했다.)

나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이, 철학적으로 완전히 만족스럽게 보일지라도, 일반화됨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더 흥미롭게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발트의 방법이 이 목적으로 위하여 이용될 수 있다고 나는 오랫동안 느꼈다. 나는 그 문제를 발트와 토론했는데, 그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나는 그와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려운 시기였다: 우리들 모두는, 세상의 다른 지역으로 이민하기 전에, 그 문제로 복귀하지 못했다.

확률과 밀접하게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서술이나 이론의 내용(그 내용의 척도에) 관한 문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서술의 확률은 서술의 내용과 반비례함을 그리고 그리하여 그 확률은 내용에 대한 척도를 구축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음을 밝혔다. (내용에 대한 그런 척도는, 서술이 우연의 게임에 관해서가 혹은 어떤 통계에 관해서가 아니라면, 기껏해야 상대적일 터이다.)

이로 인하여,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들 가운데서 적어도 두 가지가 크게 중요하다고 제시된다: (1) 동전던지기나 장막에 전자가 도달하기와 같은 (단칭) 사건들의 확률을 우리가 말하도록 허용하는 해석; 그리고 (2) 서술들이나 명제들의, 특히 추측들의 (다양한 보편성 등급들을 지닌), 확률. 이 두 번째 해석은, 입증 등급이 확률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도 또한.

내가 말하는 입증의 등급에 관하여, 시험들의 엄격성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이론이 자체의 시험들을 통과한 혹은 통과하지 못한 방식에 대한 보고서를 그 개념은 짧은 공식으로 요약한다: 비판적 정신으로 시도된 반증들 실시된 시험들만 틀림없이 중요하다. 그런 시험들에 합격함에 의하여 이론은 자체의 능력자체가 지닌 생존 적합성증명할 것이다. 물론 그 이론은, 자체가 살아남은 저 시험들에서 자체가 살아남기에 적합함을 증명할 뿐이다; 생명체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적합성은 불행하게도 실제적인 생존을 의미할 뿐이고 과거의 실적은 전혀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이론의 입증 등급을 과거 실적의 품질에 관한 비판적 보고서로서만 간주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간주한다): 그 입증 등급은 미래의 실적을 예언하는 데 사용될 수 없을 터이다. (이론, 물론, 미래 사건들을 우리가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론의 입증 등급에는 시간 지표가 있었다: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특정 단계에서 우리는 이론의 입증 등급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일 터이다. 몇몇 경우들에서 과거의 토론들에 비추어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이론들의 상대적 장점들을 우리가 평가하고 싶으면 이론의 입증 등급은 매우 훌륭한 지침을 제공했다. 한 가지 이론이나 또 다른 이론을 토대로 행동할 필요에 직면했을 때, 경쟁하는 이론들보다 더 잘 비판을 당시까지 견디어 낸 저 이론을 그런 이론이 있었다면 토대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a: 비판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합리성이라는 개념보다 나은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시 말해서, 진리라는 규제적 개념의 관점에서 경쟁하는 이론들의 장점들의 토론하는 비판. 따라서 이론의 입증 등급은 실천에 대한 합리적 지침이다. 우리가 이론을 정당화할 수는 다시 말해서, 이론이 지닌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 없을지라도 우리는 때때로 또 다른 이론에 우선하여 한 가지 이론을 정당하게 선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이론이 지닌 입증 등급이 더 크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지닌 입증 등급이 더 크다는 것을 밝힘에 의하여 나는 그 이론이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에) 뉴튼의 이론보다 선호될 수 있음을 나는 매우 간단하게 밝힐 수 있었다.

입증 등급에 관한 결정적인 요점은, 그 등급이 시험의 엄격성에 비례하여 증가했기 때문에 높은 등급의 시험가능성이나 내용을 지닌 이론들에게만 그 등급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입증 등급이 개연성보다는 비개연성a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입증 등급을 확률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록 입증 등급이 비개연성이b 그러한 것처럼 확률을 통하여 정의될 수 있었을지라도).

이 모든 문제들은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전개되거나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 문제들에 관하여 수행될 더 많은 것이 있다고 그리고 확률계산의 공리화(axiomatization)가 내가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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