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객관성과 비판
최근 몇 년 동안에 이루어진 나의 연구 중 많은 연구는, 주관론적인 입장들을 공격하거나 반격하면서, 객관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우선 내가 행동주의자가 아님을 그리고 내가 객관성을 옹호한다고 해서 심리학에서 “내성법(內省法: introspective methods)”을 부인하지 않음을 나는 분명히 해야겠다. 주관적인 경험들의, 정신적 상태들의, 지성의 그리고 정신들의 존재를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이것들이 극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주관적인 경험들에 대한 혹은 이 정신들에 대한 우리의 이론들이 다른 이론들만큼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이론에 의하여 나는, 논증될 수 있는 합리적인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이론을 의미하는데 선호하는 바,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이다: 단순히 우리의 주관적인 직관들을 매혹하지 않는 이론.
주관적인 경험들에 대하여 시험 가능한 몇 가지 단순한 법칙들의 사례로서 나는 아마도, 뮐러-리어 착시효과(Müller-Lyer illusion)와 같은 시각적 착시를 언급할 것이다. 흥미로운 시각적 착시가, 나의 친구 Edgar Tranekjaer Rasmussen에a 의하여 최근에 나에게 밝혀졌다: 흔들리는 추(pendulum)가 ㅡ 줄에 매달린 무게 ㅡ 한쪽 눈앞에 검은 유리를 놓고 관찰된다면 그 추는, 쌍안시(雙眼視: binocular vision)에서 수직면으로보다는 수평적 원둘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검은 유리가 다른 한쪽 눈앞에 놓이면, 그 추는 반대 방향으로 동일한 원둘레로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
이 경험들은 독립적인 주체들을 (부언하여, 추가 평면에 흔들리는 것을 알고 있고 본) 이용함으로써 시험될 수 있다. 그 경험들은 또한, 습관적으로 (그리고 시험적으로) 단안시(單眼視: monocular vision)만을 사용하는 주체들을 이용함으로써 시험될 수 있다: 그 주체들은 수평적 움직임을 보고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효과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이론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쌍안시(雙眼視: binocular vision)는, 공간적 거리들을 해석하는 우리의 핵심적인 암호해독 체계에 의하여 이용된다는 점 그리고 이 해석들은 몇몇 경우들에서 우리의 “나은 지식”과 독립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점. 그런 해석들은 미묘한 생물학적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인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런 해석들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매우 잘, 그리고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의 암호해독 체계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오작동될지도 모른다.
a 역주: 박중서 번역에 ‘에드가 트라네크제어 라스무센’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역자는 확인하지 못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들에 많은 미묘한 암호해독 및 해석 장치들이 ㅡ 다시 말해서 적응사례들이나 이론들 ㅡ 내장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들은 “타당한” (가령 그것들이 반드시 우리의 모든 경험들에 도입되기 때문에 “타당한”) 이론들의 특성을 띄지는 않지만, 특히 비상한 조건들에서 그것들이 오류들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추측들의 특성을 띤다. 이것의 결과는, 마흐(Mach)의 의미에서 감각들이나 “요소들(elements)”인 해석되지 않은 시각 자료들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모두는 이미 해석되고 암호가 해독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관적인 감지에a 대한 객관적인 이론이 구축될 것이다. 그 이론은, 평범한 감지를a 우리의 주관적인 지식의 주관적인 근원이나 주관적인 인식론적 토대로서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적응에 관한 특정 문제들을 생명체가 해결하는 생명체의 객관적인 업적으로서 기술하는 생물학적 이론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추측적으로, 특정될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접근방식이 행동주의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가 이해될 것이다.b 그리고 주관론에 관하여, 비록 여기서 제시된 접근방식으로 인하여 주관적 경험들이 (그리고 “알기[knowing]”나 “믿기[believing]”의 주관적 경험들) 주관론의 대상이 될지라도, 주관론이 이용하여 작동하는 이론들이나 추측들은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시험가능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객관론적 접근방식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인데, 그 접근방식을 위하여 나는 인식론, 양자물리학, 통계역학, 확률론,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역사학에서 싸우고 있었다.
아마도 객관론적 접근방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1) 객관적 문제들, (2) 객관적 업적들, 즉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 (3)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4) 비판으로 비판은,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의 형태로 객관적 지식을 전제한다.
(1) 문제에 의하여 우리가 곤혹감을 느낄지라도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열렬히 소망할지라도, 문제 자체는 객관적인 ㅡ 우리가 곤혹감을 느끼는 파리 그리고 그 파리를 우리가 없애려고 열렬히 소망할 것과 같이 ㅡ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문제라는 것, 그것이 현존하여 몇몇 사건들에서 역할을 수행할 것임은 추측들이다 (파리의 존재가 추측인 바와 꼭 마찬가지로).
(2)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통상적으로 시행착오에 의하여 발견되는데 객관적인 의미에서 업적이나 성공이다. 어떤 것이 업적이라는 것은 추측이고 그것은 논증될 수 있는 추측일 것이다. 업적이나 성공은 해결책처럼 항상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논증은 틀림없이 문제를 (추측된) 언급할 것이다.
(3)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업적들과 해결책들을, 업적에 대한 혹은 아는 것에 대한 혹은 믿음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들로부터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어떤 업적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그리하여 일반화된 의미에서 이론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업적이나 이론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세계에 ㅡ 정확하게, 문제들과 잠정적인 해결책들의 그리고 그 해결책들과 관련되는 비판적 논증들의 세계 ㅡ 속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적 이론들과 물리학적 이론들은 객관적인 의미의 이 지식 세계에 (“세계 3”) 속한다. 그 이론들은 그 이론들이 비판적으로 토론되는 다양한 상태들에서, 통상적으로 추측들이다.
(4) 비판은, 비유전적인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수준에서 자연선택이라는 작업을 계속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비판은, 정식화된 이론들이라는 형태로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리하여 의식적인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이다. 내가 추측하기에 이것이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주요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지닌 특성들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언어라고 추측한다 (심지어 음악과 같은 비언어적 예술들에서 인간의 업적들을 포함하여).
32. 귀납; 연역; 객관적인 진리
귀납이라는 허구에 관하여 그리고 귀납에 반대하는 나의 논증들 중 몇 가지 논증들에 관하여 여기서 몇 마디 말을 할 필요가 아마도 있다. 그리고 현재 그 허구의 가장 유행하는 형태들이, 귀납을 옹호될 수 없는 연역에 관한 주관론적 철학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나는 먼저 연역적 추론에 관한 객관적 이론에 관하여 그리고 객관적 진리이론에 관하여 다소 더 많이 말해야겠다.
나에게는 원래 이 자서전에서 타스키(Tarski)의 객관적 진리이론을 설명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20절에서 그 진리이론을 간략하게 서술한 이후에 나는, 내가 그 진리이론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미에서 특정 논리학자들이 그 진리이론을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는 몇 가지 증거들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그 진리이론은 반드시 연역적 추론과 허구적인 귀납적 추론의 근
본적인 차이점을 설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 차이점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다음 문제로써 시작하겠다.
어떤 서술이 (타스키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유의미한 문장[meaningful sentence]”) 사실들과 대응한다고 말함으로써 의미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 정말로, 언어에 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과 같은 것을 우리가 수용하지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Tractatus]에서 그랬던 바와 같이) 않는다면 우리는 서술과 사실의 대응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림이론은 절망적이고 정말로 충격적으로 잘못되어서 사실에 대한 서술의 대응을 설명할 전망이 없는 듯하다.
이것은, 소위 “진리의 대응 이론”에 의하여 나타나는 근본적인 문제로 언급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설명하는 이론에 의하여. 충분히 이해될 수 있게, 그 난제로 인하여 철학자들은, 대응이론이 틀림없이 허위거나 ㅡ 훨씬 더 나쁘게 ㅡ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분야에서 타스키의 철학적 업적은, 그가 이 결정을 뒤집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서술과 사실의 관계를 다루는 이론은 (a) 서술들과 (b) 사실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심사숙고함으로써 그는 매우 간단하게 그 결정을 뒤집었다. 서술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이론은a 서술들의 명칭들이나 서술들의 기술들(descriptions)과 아마도 “서술”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은 우리가 언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어떤 언어인 메타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들과 주장되는 사실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하여, 그 이론은 사실들의 명칭들이나 사실들의 기술들(descriptions) 그리고 아마도 “사실”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서술들과 동시에 사실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언어인 메타언어를 우리가 지니자마자, 서술과 사실의 대응에 관하여 주장하는 것이 쉬워진다; 이유인즉b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Gras”, "ist" 그리고 "grün" 이라는 세 단어로 구성되는 독일어로 된 서술은 잔디가 푸르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저 순서에서 사실들과 대응한다.
이것의 첫 번째 부분은 독일어 서술의 기술이다 (영어로 주어진 기술인데 영어는 여기서 우리의 메타언어로서 역할을 하고 부분적으로 독일어 단어들의 영어 인용 명칭들로 구성된다a);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주장되는) 사실인 (가능한) 사건들의 상태에 대한 기술을 (역시 영어로a 된) 담고 있다. 그래서 전체 서술은 대응을 주장한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X”가 언어 L에 속하는 어떤 서술의 영어a 명칭이나 영어a 기술을 축약하도록 하고, “x”는 X를 영어로a (L의 메타언어로서 역할을 하는) 번역한 것을 지적하도록 하라b;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히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영어로a, 다시 말해서 L의 메타언어로) 있다:
(+) 언어 L로 된 서술 X는 x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과 대응한다.
그리하여 어떤 서술과 (주장되는) 사실 사이의 대응에 관하여 합당한 메타언어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고, 심지어 진부하게C 가능하다. 그리하여 그 수수께끼는 풀린다: 대응은 어떤 서술과 어떤 사실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이나, 그림과 그려지는 장면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합당한 메타언어를 지니자마자, (+)의 도움을 받아서 사실들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기는 쉽기 때문이다.
사실들에 대한 대응을 그렇게 설명하자마자 우리는 “사실들에 대응한다”를 “(L로서) 참이다”에 의하여 대체할 수 있다. “참이다”는 어떤 서술에 대하여 참이라고 언급될 수 있는 메타언어적 술어이다. “참이다”에는 서술들의 메타언어적 명칭들이 ㅡ 예를 들어 인용 명칭들d ㅡ 선행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것은 “.... 이라는 것은 참이다”라는 표현과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눈(snow)은 빨갛다는 것은 참이다”와 같은 표현은 서술들의 메타언어적 술어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snow)은 빨갛다”가 그러한 것처럼 동일한 언어에 속하지만, 저 언어의 메타언어에는 속하지 않는다. 타스키가 얻은 결과의 예기치 않은 진부함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리”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진부함은 아마도 합당하게 예상되었을 것이다.
a 역주: ‘영어’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사용되었는데 박중서 번역에는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Let “X” abbreviate some English name, or some English
description, of a statement belonging to the language L, and let “x” indicate the
translation of X into English (which serve as a metalanguage of L)인데 박중서 번역에
“우선 ‘X’는 언어 L에 속하는 진술의 어떤 한국어 표기, 또는 어떤 한국어 서술이고, ‘x’는 X를
한국어(L의 메타언어로 사용되는)로 번역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자”로 번역되었다.
C 이 단어의 원어는 trivially인데 박중서 번역에 ‘간단하게’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인용 명칭들’의 원어 표현은 quotation names인데 박중서 번역에 ‘발음 표기처럼’으로
번역되었다.
대응 이론은, “잔디는 빨갛다”나 “잔디는 녹색이다”와 같은 구체적 서술들(specific statements)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지 않고 일반적인 논리
적 상황들의 기술들(descriptions)에 가장 중요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우리
는 이처럼 사물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어떤 추론이 성립한다면 전제들이 모두
참이라는 조건으로 결론은 틀림없이 참이다; 다시 말해서 전제들의 진리는 (그
전제들 모두가 참이라면) 변함없이 결론으로 전송된다; 결론의 허위성은 (결론이 허위라면) 적어도 전제들의 한 가지에 변함없이 재전송된다. (나는 이 법칙
들 각각을 “진리의 전송 법칙”과 “허위성의 재전송 법칙”으로 최초로 명명했다.)
이 법칙들은 연역 이론에 근본적이고 “진리”와 “참이다”라는 단어들을 (“사실들에 대한 대응”과 “사실들에 대응한다”라는 단어들로 대체될 수 있는) 여기서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전혀 불필요하지 않다.
타스키가 살려낸 진리에 대한 대응 이론은, 진리를 객관적으로서 간주하는 이론이다: 경험이나 믿음이나 저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라기보다는 이론들의 속성으로서 간주하는. 그 이론은 또한, 추정들의 (혹은 믿음들) 어떤 집합에 상대적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추정들의 집합에게 이 추정들이 참인지를 질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연역으로 선회한다. 연역적 추론은, 그 추론이 전제들에서 결론으로 변함없이 진리를 전송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성립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논리적 형태의 모든 추론들이 진리를 전송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것을 또한 설명할 수 있다: 반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연역적 추론은 성립한다. 여기서 반증은, 다음에서와 같이, 참인 전제들과 허위 결론을 지닌 동일한 형태의 추론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를 여기서 개의 이름으로 하라. 그러면 전제들 참이고 결론은 허위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반증이 있고 그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연역적 추론은, 진리처럼, 객관적이고 심지어 절대적이다. 객관성은 물론, 주어진 서술이 참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항상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주어진 추론이 성립하는지를 항상 발견할 수는 없다. “참”이라는 용어를 단지 객관적인 의미로만 사용할 것으로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가 참으로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서술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그런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잠재적으로 전지(全知)할 터인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괴델(Gödel)과 타스키(Tarski)의 연구에 따라서, 우리가 물론 참인 산술적 서술들의 무한집합들을 기술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심지어 산술적 서술들에 대한 진리의 일반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성립하는 추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동의할 것인데 그 경우에 우리는 많은 추론들에 대하여, 그 추론들이 성립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그 추론들이 항상 진리를 전송한다는 것) 증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성립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없다 ㅡ 심지어 우리 자신을 순전히 산술적인 서술들에 국한시킨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어떤 주어진 산술적 서술이 산술의 공리들(axioms)로부터 성립하여 귀결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립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 무한히 많은 추론의 규칙들을 (많은 등급들의 복잡성을 지닌a) 우리는 기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증이 존재하지 않음. 그리하여 귀납적 추론이 우리의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위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떤 추론의 성립을 확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추측에 ㅡ 다시 말해서, 직관에 의하여 ㅡ 우리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직관은 우리가 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흔히 우리를 오도한다. (이것은 명백하다; 과학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훌륭한 이론들보다는 나쁜 이론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논증의 도움을 받는 것과 동일하게 훌륭한 것인 양,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b
내가 강좌들에서 흔히 말한 바와 같이, 직관과 같은 것들이나 어떤 것이 자명하다는 느낌은 진리에 의하여 혹은 성립에 의하여 아마도 부분적으로 설명될지도 모르지만 역순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서술이나 추론이 참이거나 성립한다고 느낀다는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이유로만 그 서술은 참이지도 않고 그 추론을 성립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추론 혹은 판단 기능이 (또는 우리가 그것을 지칭한 여하한 것) 그렇게 조정되어서 상당히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참인 것을 수용하거나 판단하거나 믿는 것은 물론 인정될 수 있다c; 주로 의심의 여지없이 사물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하기 위하여
a 역주: 괄호 안의 원어 표현은 of many degrees of complexity인데 박중서 번역에 ‘다양한
복잡성을 지닌‘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thinking intuitively is something totally different from appealing to intuition as if this was as good as appealing to an argument.인데 박중서 번역에
‘직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직관에 호소하는 것(논증에 호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다)과는
전혀 다르다.’로 번역되었다.
c 역주: ‘물론 인정될 수 있다’의 원어 표현은 It can be admitted, of course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우리 내부로 장착된 몇 가지 성향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착시현상들로 인하여, 비교적 단순한 사례들 들면, 우리의 직관들이 다소 충동과 유사한 형태를 띨지라도 우리가 그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 없음이 밝혀진다.
그런 주관적인 감정들이나 직관들을, 진리나 성립이 주어진 결과로서 그리고 우리의 정상적인 조사들 중 몇 가지 조사들을 통과한 결과로서 우리가 설명할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 문제의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서술이나 이 추론을 믿기 때문에, 혹은 내가 그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혹은 그 반대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서술이 참이거나 이 추론이 성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논증들을 대신해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로 인하여 주관론적 철학자들은 도움을 받았다.
논리에서 순환성이 없다면 연역적 논리의 규칙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증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여전히 널리 믿어진다: 모든 논증들은 논리를 전제해야 한다는 견해. 인정되는 바와 같이, 사물들을 표현하는 이런 방식에 반대하여 많은 것이 언급될지라도 모든 논증들은 논리를 이용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든다면, 논리를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론의 몇 가지 규칙들을 이용하지 않고 우리가 그 규칙들의 타당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요컨대 연역이나 연역적 성립은, 객관적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객관적이다. 직관이나 믿음의 혹은 충동의 느낌은 아마도 때때로, 특정 추론들이 성립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성립은 객관적이어서, 심리학적 그리고 행동주의적 및 실용주의적 용어들로도 설명될 수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함으로써 이 태도를 종종 표현했다: “나는 믿음 철학자가 아니다.” 정말로 믿음들은, 객관적 의미에서 진리의 혹은 연역의 혹은 “지식”의 이론에 대하여 아주 무의미하다. 소위 “참된 믿음”이란 참인 이론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참인이지 아닌지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다. “합리적 믿음”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언급될 수 있다면, 비판적 논증들에 비추어 선호될 수 있는 것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다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그리고 비판적 논쟁과 관련한 객관적 상태의 문제이다.
귀납에 (혹은 귀납적 논리나, 귀납적 행태, 아니면 귀납에 의하거나 반복에 의해서 또는 “지시[instruction]”의한 학습) 관하여, 나는 흄(Hume)과 함께,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옳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귀납의 문제가 물론 해결된다.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인지와 같은 귀납의 문제들로 지칭될 남은 다른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의 견해로 전혀 흥미진진하지 않은데 역시 해결될 수 있다: 미래는 부분적으로 과거와 같고 부분적으로 전혀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다.)
흄(Hume)에 대하여 현재 가장 유행하는 답변은 무엇인가? 그 답변은, “성립한다(valid)”라는 단어가 “연역적으로 성립한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귀납은 물론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납적 논증들의 불성립으로 (연역적 의미에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이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추론에는 공통점이 많을지라도 ㅡ 두 가지 추론들 모두는 충분히 시험되고 습관적이고 상당히 직관적인 규칙들에 따라서 논증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ㅡ 많은 차이점들도 있다.
연역과 귀납의 공통점의 생각되는 것은, 특히, 이와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연역의 성립은 타당하게 증명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이것이 논리에 의하여 논리를 증명하고 있을 터이고 그리하여 순환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순환적 논증은 사실상 우리의 견해들을 설명하여 우리의 믿음을 강화할 것이라고 언급된다. 귀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실이다. 귀납은 아마도 귀납적 정당화를 뛰어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에 관한 귀납적 추론은,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유용하고 도움이 된다. 게다가 연역의 이론과 귀납의 이론 두 가지 모두에서 직관이나 습관이나 규약이나 실용적 성공과 같은 것들이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것들은 틀림없이 도움을 준다.a
이 유행하는 견해를 비판하기 위하여 나는, 앞서 이 절에서 내가 말한 것을 반복한다: 연역적 추론은 반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립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비판적 시험이라는 방법이 있다: 연역에 관하여 제시된 규칙에 대하여 우리는 반증을 구축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우리가 성공한다면 추론이나 추론의 규칙은, 그것이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혹은 심지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성립한다고 믿어지든 아니든, 성립하지 않는다. (브로우베르[Brouwer]는 자신이 바로 이렇게 했다고 ㅡ 간접적인 증명들에 대하여 자신이 반증을 제시했다고 ㅡ 생각하여 이것들이 성립한다고 잘못 생각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왜냐하면 무한한 반증들만 존재하여 간접적 증명들이 유한한 모든 경우들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객관적인 시험들이 있고 많은 경우들에서 심지어 이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명들이 있기 때문에 심리학적 고찰들, 주관적인 신념들, 습관들 그리고 규약들은 쟁점에 완전히 무관하게 된다.
이제 귀납에 관한 상황은 어떠한가? 언제 귀납적 추론이 귀납적으로 “불건전(unsound)”한가 (“성립하지 않는[invalid]”과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제시된 유일한 답변은 이렇다: 귀납적 추론이 귀납적 행태에서 빈번한 실용적 실수들을 야기할 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하여 제시된 귀납적 추론의 모든 규칙은, 누군가가 그 규칙을 사용한다면, 그런 실용적인 실수들을 빈번하게 야기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여기서 요점은, 심지어 한 순간 동안에도 진지하게 생각될 수 있는, 제시된 적이 있는 귀납적 추론의 ㅡ 이론들이거나 보편법칙들을 낳은 추론 ㅡ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카르납은 동의하는 듯하다; 이유인즉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강좌에서 귀납적 추론의 사례를 제시하지 않고 연역적 추론의 사례를 제시한 것을 포퍼는 “흥미롭다”고 한다. 나의 개념으로 확률론적 (“귀납적”) 추론은 본질적으로 추론들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확률들을 할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대신에 확률을 할당하기 위한 원칙들의 사례들을 요구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합당한 것인데, 예상되었고 충족되었다.
그러나 카르납은, 모든 전칭명제들에게 확률 0을 할당하는 체계만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후 힌티카(Hintikka)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 0이 아닌 귀납적 확률을 전칭명제들에게 정말로 귀속시킨 이론체계들을 전개했을지라도, 이 체계들이 본질적으로 매우 빈약한 언어들에 국한된 듯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언어들로는 심지어 원시적인 자연과학도 정식화될 수 없을 터이다. 게다가 그 체계들은, 어느 때고 유한하게 많은 이론들이 이용 가능한 경우들에 국한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체계들이 놀라울 정도로 복잡해지는 것이 방지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법칙들은 ㅡ 실제로 항상 수 없이 많은 ㅡ, 그런 법칙들의 입증 등급들이 0보다 더 클지라도, 틀림없이 확률 0이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체계를 ㅡ 몇몇 법칙들에게, 가령, 0.7의 확률을 할당하는 체계 ㅡ 정말로 채택할지라도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 법칙에 귀납적 뒷받침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 체계로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체계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주로 자의적인) 새로운 체계에 ㅡ 누구의 체계이든 관계없이 ㅡ 따라서, 이 체계에 맞는 믿음의 느낌들을 우리가 원한다면 0.7의 믿음 등급을 지닌 법칙을 우리가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규칙은 왜 중요할 터인가 그리고, 그런 규칙이 중요하다면, 그런 규칙은 어떻게 비판될 수 있는가는 ㅡ 그런 규칙은 무엇을 배제하는가, 그리고 그런 규칙은 왜 보편법칙들에게 0 확률들을 할당하는 것에 대한 카르납과 내 자신의 논증들보다 선호되어야 하는가 ㅡ 말하기 어렵다.
합당한 귀납적 추론의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귀납론자인 넬슨 굿먼[Nelson Goodman]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듯하다a.) 내가 귀납적 문헌을 읽고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추출할 수 있는 최고의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일 터이다:
“미래는 과거와 그렇게 매우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실제로 수용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우리가 실재론자들이라면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 모두가 실재론자들이라고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것을 우리는 이론에서도 또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규칙은 워낙 모호해서 흥미롭지 않다. 그리고 그 규칙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은 너무 많이 전제하여 틀림없이 우리가 (그리하여 귀납적 규칙이) 모든 이론 형성에 앞서서 전제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전제한다; 이유인즉 그 규칙은 시간의 이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될 수 있었다. 이론 없는 관찰과 이론 없는 언어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물론 이론 없는 규칙이나 귀납의 원리가 있을 리 없다; 모든 이론들이 근거해야 하는 규칙이나 원리는 없다.
그리하여 귀납은 허구이다. “귀납적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률계산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 존재할지라도, 이 “일반화된 논리”가 (그렇게 지칭될 것과 같이) “귀납적 논리”의 체계라고 전제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
또한 귀납이 존재하는 않는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수 없다: 우리는 귀납 없이도 아주 잘 해나갈 듯이 보인다 ㅡ 대담한 추측들인 그리고 가능한 한 엄격하게 우리가 비판하고 시험하는 이론들을 사용하여, 그리고 우리가 지닌 만큼 많은 재능을 사용하여.
물론 이것이 훌륭한 관행이라면 ㅡ 성공적인 관행 ㅡ 그것은 귀납의 “귀납적으로 성립하는” 규칙이라고 굿먼(Goodman)과 다른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전체적인 요점은, 그것이 성공적이거나 믿음직하거나 기타 등등이기a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오류를 유발하게 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우리가 그 오류들을 조심하고 그 오류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필요성을 의식시킨다는 것이다.
33.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
1945년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출간한 이후 나의 아내는 이 저술이 나의 핵심적인 철학적 관심사들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지적했는데 이유인즉 정치철학을 위주로 하는 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상 서문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이렇게 부인함에 의해서도 또한 그 후 내가 나의 오래된 관심사들인 과학적 지식론으로 복귀함에 의해서도 만족하지 않았다. 나의 아내는,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가 오랫동안 구매될 수 없었고 당시쯤에는 거의 잊혔다고 나에게 지적했다; 게다가 나의 새로운 글들 속에서 그 저서의 결과들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저서가 영어로 번역되어야 함이 시급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아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여러 해를 통하여 나의 아내가 고집스럽게 상기시키지 않아서 나는 그 것을 묵혀두어야 했다b; 그렇다할지라도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가 출간되기 (1959년에) 까지는 14년이 걸렸고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독일어 재판본을 위해서는 또 7년이 걸렸다.
이 세월 동안에 나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자매판에서 사용하려고 내가 의도한 연구를 점점 더 많이 수행
a 역주: '기타 등등‘의 원어 표현은 or what not인데 박중서 번역은 ’그렇지 않아서‘이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 should have let it rest인데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의 미실행 의무를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서 should는 must로 써야 한다.
했다; 그리고 1952년경에 나는 이 저술이 1954년에 나오기를 희망하여 후기: 20년 후(Postscript: After Twenty Years)로 명명하기로 결심했다.
그 저술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영어) 원고와 함께 1956년에 출판사들에게 보내졌고 1957년 초에 나는 두
권 모두의 교정쇄들을 받았다. 교정은 악몽으로 변했다. 나는 겨우 첫 번째 저
술을 끝낼 수 있었는데 그 저술은 1959년에 출간되었고 당시 나는 두 눈을 수술 받았다. 그 후 나는 얼마 동안 다시 교정을 시작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후기(Postscript)는 (W. W. 바틀리[Bartley] 교수 편집) 한두 권의 초록을 제외하고 1982-3년에야 출간되었다. 그 저술은 물론 1957년 이래 학생들에 의하여 읽혔다.a
이 후기(Postscript)에서 나는,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토론된 주요 문제들과 해결책들을 검토하여 전개했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이론들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배척했음을 그리고 정당화를 비판에 의하여 대체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결코 어떤 이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적 논쟁의 상태를 고려하여 어떤 이론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때때로 “정당화”할 (한 가지 다른 의미에서) 수 있다; 이유인즉 어떤 이론이 경쟁 이론들보다 비판을 더 잘 견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비판자는 틀림없이 항상 자기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정당화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나의 답변은: 비판자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이유인즉 어떤 이론과 다른 어떤 흥미로운 이론 사이의 예기치 않은 모순에 대한 비판이 통상적으로 결정적은 아닐 터일지라도, 그가 그런 모순이 어떤 이론 내부에 혹은 그 이론과 다른 어떤 흥미로운 이론 사이에 존재함을 밝힐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이론을 중요하게 비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합리성에 대한 주장은 합리적인 정당화를 (어떤 사람들이 믿는 바에 대한)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논지는, 적어도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래 합리성은 합리적 비판을 (자기 자신의 이론에 대한 그리고 경쟁 이론들에 대한)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합리성이라는 이상을 추측성 지식의 성장과 연결한 반면, 전통적인 철학은 그 이상을 최종적이고 증명 가능한 지식과 (친[親]-종교적이든 반[反]-종교적이든: 종교가 주요 쟁점이었다) 연결했다. 이것 자체를 나는, 진리에 대하여 점점 더 좋은 근사치라는 혹은 증대하는 진리유사성이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과 연결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진리에 나은 근사치들인 이론들을 발견하기는 과학자들이 겨냥하는 것이다; 과학의 목표는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다. 이것에는 우리의 이론들의 내용 성장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 성장이 포함된다.
나의 지식론에 대한 재진술과 별도로, 후기(Postscript)에서 나의 목표들 중 한 가지 목표는,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실재론은 비판될 수 있거나 논증될 수 있는 입장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는 실재론자의 저서라는 것을 나는 강조했지만 당시 나는 실재론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형이상학적 입장이 시험될 수 없을지라도 아마도 합리적으로 비판될 수 있거나 논증될 수 있음을 내가 당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실재론자임을 고백했지만 이것은 믿음에 대한 고백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의 세상 안에 있는 규칙성들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내가 공유하고 그 믿음 없이는 실제적인 행동이 생각될 수 없는 믿음) 표현하는” 나의 한 가지 실재론적 논증에 관하여 서술했다.
1958년에 나는, “과학의 그리고 형이상학의 위상에 관하여(On the Status of Science and of Metaphysics)”라는 제목으로 (지금은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 실린) 후기(Postscript)에 부분적으로 근거하여 두 가지 대화문들을 발표했다. 두 번째 대화문에서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비판과 논쟁을 받기 쉬울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문제들을 ㅡ 아마도 낫거나 덜 훌륭한 해결책들에 노출된 문제들a ㅡ 해결하려는 시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나는 두 번째 대화문에서 다섯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들에 적용했다: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주관론), 비이성주의,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쇼펜하우어의), 그리고 허무주의(nihilism) (하이데거의 무[無]의 철학). 그리고 나는,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시도들로서 이것들을 배척하는 이유들을 제시했다.
후기(Postscript)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유사한 방식으로 비결정론, 실재론 그리고 객관론에 대하여 논증했다. 이 세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들이 양립할 수 있음을 밝히려고 나는 노력하여, 일종의 모형에 의하여 그 양립가능성을 밝히기 위하여, 성향들의 (잠재력들이나 장들[fields]와 같은) 그리고 특히 경향들의 실재를 우리가 추측한다고 나는 제안했다. (이것은, 확률에 대한 경향 해석을 선호하여 논증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저 장(章)의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에 대한 서술이고 평가였다; 간략한 역사관련 개괄의 도움을 받아서, 만족스러운 설명은 어때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개념들에서 시대를 내려오면서 변화들이 있었음을 나는 밝혔다. 이 개념들은 비판의 압력을 받아서 변했다. 그리하여 그 개념들은, 시험될 수는 없었다할지라도, 비판을 받을 수는 있었다. 그 개념들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이었다 ㅡ 사실상, 가장 큰 중요성을 띤 형이상학적 개념들.
나는 이것을, 다양한 “피타고라스 시절 이래 물리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에 관한 몇 가지 역사관련 언급들을 이용하여 예시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견해, 그리고 그 견해와 함께 성향들의 실재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확률에 대한 경향 해석에 근거하여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을 나는 제의했다. (이 견해는,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 진화와 관련해서도 또한 도움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이 전개사항들을 두 가지 이유들로서 보고했다.
(1)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 ㅡ 발견될 실재적인 세계가 있다는 견해 ㅡ,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에 의하여 미해결 상태로 남겨진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 해결되기 때문에.
(2) 자연선택 이론은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논증할 의도가 나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론이 현재 의문의 여지없이 이용 가능한 최고의 이론일지라도 그 이론은 아마도 다소 개선될 수 있다.
나는 요점 (1)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상으로 말하지 않겠다. 비판과 시험들을 경쟁 이론들보다 더 잘 견디어낸 어떤 과학적 이론의 형태로 된 진리에 대한 근사치를 우리가 발견했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에게 더 좋은 (혹은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실재론자들로서 우리는 그 이론을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참으로서 수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신뢰할 (그 이론이 진리라고 신뢰함을 의미할 터인) 필요가 없다.
(2)에 관하여 내가 37절에서 진화론을 토론하게 될 때 나는 더 많은 것을 말하겠다.
34. 물리학에 주관론과 싸우기: 양자역학과 경향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가 20세기에 미친 지성적 충격과 비교될 수 있는 지성적 충격을 지녔던 위대한 사람은 없다. 그는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과학철학 그리고 순수(혹은 사변)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ㅡ 단지 몇 명의 이름을 언급하여 ㅡ 아인슈타인, 보어(Bohr), 하이젠베르크, 윌리엄 제임스, 버트런드 러셀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흐는 위대한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인격을 지녔고 위대한 역사가였고 과학철학자였다. 생리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과학철학자로서, 그는 내가 지지하는 중요하고도 창의적인 많은 견해들을 지녔었다. 그는 예를 들어 지식론에서 그리고 심리학과 생리학 분야에서, 특히 감각 연구에서 진화론자였다. 그는 형이상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필요성을 물리학자를 위한 심지어 실험물리학자를 위한 주요 지표들로서 인정하고 심지어 강조할 정도로 충분히 관용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저서 열 이론의 원리들(Principles of the Theory of
Heat)에서 줄(Joule)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일반적인 (철학적) [마흐가 앞 쪽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지칭하는] 문제들에 관한 한,
줄(Joule)은 거의 침묵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곳에서, 그의 발언들은 마이어의 발언들과
아주 닮았다. 그리고 정말로, 모두 동일한 목표를 지닌 그런 포괄적인 실험적 연구들이 세상에 대하여 위대하고 철학적으로 매우 심오한 세계관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구절은, 마흐가 감각의 분석(The Analysis of Sensations)이라는 저서를 이전에 출간한 바와 같이 그만큼 더 괄목할만한데 그 저서에서 “나의 접근방식은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제거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반드시 감각들에서 표현된다”고 (혹은 감각자료들인 “Sinnesempfindungen”에서) 그는 서술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생물학적 접근방식이나 그의 관용은 우리 세기의 사상에 많은 충격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ㅡ 특히 원자물리학에 ㅡ 그의 감각 이론과 결합된 그의 반(反)-형이상학적 무관용이었다. 원자물리학자들의 새로운 세대에 미친 마흐의 영향이 그렇게 설득적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역사의 한 가지 역설이다. 이유인즉 그는 원자론과 물질의 “입자” 이론을 맹렬하게 반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인데 물질의 입자 이론을 그는, 버클리(Berkeley)처럼, 형이상학적으로서 간주했다.
마흐의 실증주의가 남긴 철학적 충격은 주로 젊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전달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부분적으로 마흐의 실증주의가 야기한 몇 가지 결과들을 충격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그 실증주의로부터 돌아섰다; 보어(Bohr), 파울리(Pauli)와 하이젠베르크가 포함된 뛰어난 물리학자들로 구성된 다음 세대가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포용한 결과들: 그들은 주관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철회는 너무 늦었다. 물리학은 주관론적 철학의 보루가 되었고 그 후 그런 상태로 남았다.
그러나 이 전개상황 배후에는, 양자역학 및 시간 이론과 연결된 두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엔트로피에 대한 주관적 이론이다.
양자역학의 발흥과 동시에 더 젊은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통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앙상블 이론이 (a theory of ensembles) 아니라 단일한 기본적인 입자들의 역학 이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다소 주저하다가 나도 이 견해를 수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통계역학처럼 양자역학이 확률론적 이론이라는 것을 또한 확신했다. 기본적인 입자들에 대한 역학 이론으로서 양자역학은 객관적인 면모를 지녔다. 확률론적인 이론으로서 양자역학은 주관적인 면모를 지녔다 (혹은 그들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은, 객관적 면모와 주관적 면모를 결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기본이론이었다. 그러한 것이 양자역학의 혁명적 특징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이것으로부터 다소 이탈했다. 아인슈타인에게 통계역학과 같은 확률론적 이론들은 극도로 흥미롭고 중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초기에 확률론적 이론들에 몇 가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은 기본 물리학 이론들도 아니었고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히려 주관적인 이론들로, 우리가 지닌 지식의 단편적 특성 때문에 우리가 도입해야 하는 이론들이었다. 이로부터 양자역학은, 자체의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이론이 아니라 미완성이라고 (자체의 통계적 특성으로 인하여 자체가 미완성 지식을 사용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객관적이거나 완성된 이론은 확률론적이지 않고 결정론적 이론일 터이라고 귀결된다.
이 두 가지 입장들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이 보일 것이다: 두 가지 입장들은, 확률론적이거나 통계적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주관적 지식이나 지식의 결핍을 이용한다고 전제한다.
당시 (1920년대 말) 토론된 유일한 확률에 대한 객관론적 해석이 빈도해석이었음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이것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벤[Venn], 폰 미제스[von Mises], 그리고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의하여 다양한 해석본들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내 자신에 의하여.) 이제 빈도이론가들은, 대량현상(mass phenomena)에 관한 객관적인 문제들과 상응하는 객관적인 답변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대량현상의 요소로서 단일한 사건의 확률을 우리가 말할 때마다 객관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광양자의 (光量子: photon) 방사와 같은 단일 사건과 관련하여 확률들이 우리의 무지를 평가할 따름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이유인즉 객관적 확률은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사건이 여러 번 반복된다면 평균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만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단일 사건 자체에 관하여 객관적인 통계적 확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따라서 그리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서, 주관론이 양자역학에 들어간 곳은 여기였다. 그리고 내가 확률에 대한 경향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주관론과 싸우려고 시도한 곳은 여기였다. 이것은 임시방편적인 도입이a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확률에 대한 빈도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논증들을 신중하게 수정한 결과였다.
주개념은, 경향들이 물리학적 실재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향들은 성향들에 대한 척도들이었다. 측정될 수 있는 물리학적 성향들은 (“잠재력들”) 장들(fields)의 이론에 의하여 물리학에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성향들을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들로서 간주한 선례가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향들을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들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비결정론에 관한 여지가 남았다.
경향들의 도입하여 해결하려고 의도된 종류의 해석 문제를 밝히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이 슈뢰딩거에게 보낸 편지를 토론하겠다. 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가 1935년에 발표한 잘 알려진 사고실험을 언급한다. 가이거 계수기의 도움을 받아서 폭탄을 격발시키기 위하여 슈뢰딩거는 어떤 방사능 물질을 배열하는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 배열은, 그 폭탄이 특정 시간간격 안에 폭발하거나 아니면 도화선이 끊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폭발 확률을 1/2로 하라. 고양이 한 마리를 폭탄 옆에 두면 그 고양이가 죽임을 당할 확률도 1/2일 것이라고 슈뢰딩거는 논증했다. 전체 배열은 아마도 양자역학을 통하여 기술될 것이고 이 기술에는 고양이에 대한 두 가지 상태들의 ㅡ 살은 상태와 죽은 상태 ㅡ 중첩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적 서술은 ㅡ 사이(ψ)-함수 ㅡ 실재적인 것을 서술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실재적인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양자역학이 주관적이고 미완성임을 이것이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사이(ψ)-함수를 완성된 서술로서 [그것에 의하여 서술되는 실재적인 물리적 과정에 대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문제의 순간에 고양이가 살아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음도 의미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상황이 관찰에 의하여 실현될 터이다.
우리가 이 견해를 [ψ-함수의 완성에 대한] 배척한다면, ψ-함수가 사태의 실재적 상태가 아니라 사태의 상태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지식의 총화를 서술한다고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듯한 보른[Born]의 해석이다.
그러나 나의 경향 해석을 수용하자마자 이 궁지는 사라지고 양자역학 다시 말해서 ψ-함수는, 사태에 대한 결정론적 상태는 아닐지라도, 사태의 실재적 상태를 ㅡ 실재적 성향 ㅡ 정말로 서술한다. 그리고 사태의 상태가 결정론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미완성을 가리킨다고 언급될 가능성이 높을지라도, 이 미완성은 이론의 ㅡ 서술의 ㅡ 오류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사태의 상태 자체에 대한 비결정성의 반영일 것이다.
슈뢰딩거는 항상, | ψ ψ* |가 실재 밀도와 같은 물리학적으로 실재적인 것을 서술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실재 자체는 비결정적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인식했다. 경향해석에 따르면 이 직관들은 전적으로 옳았다.
확률에 대한 경향이론과 그 이론이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데서 수행하는 역할을 나는 여기서 더 이상 토론하지 않겠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처음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나는 기억하는데 그로 인하여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낙망하지도 않았다. 그 후 상황이 매우 많이 변했고, 양자역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경멸적으로 나의 이론을 처음에 일축한 동일한 비판자들 (보어[Bohr] 옹호자들] 몇몇은 이제 그것은 모두 구식이고a 사실상 보어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지금 말한다.
내가 수학자이자 양자역학 역사가인 B. L. 판데르바르덴(van der Waerden)으로부터 1967년의 나의 논문 “‘관찰자’ 없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Without ‘The Observer’)에 관한 서신을 한 통 받았을 때, 나는 거의 40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에a 대하여 나 자신이 보상 이상의 것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 서신에서 그는 자신이 나의 논문의 13가지 논지들 모두에 그리고 또한 확률에 대한 나의 경향해석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말했다.
35. 볼츠만과 시간의 화살
주관론이 물리학으로 ㅡ 그리고 특히 시간과 엔트로피 이론으로 ㅡ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양자역학이 발흥하기 오래전이었다. 그 시작은, 19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한 명인 동시에 열성적이고 공격적인 실재론자이면서 객관론자였던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비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볼츠만과 마흐는 비엔나 대학에서 동료였다. 마흐가 1895년에 특별히 자신을 위하여 설립된 과학철학과의 과장으로 초빙되었을 때 볼츠만은 그곳에서 물리학 교수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그런 종류의 최초 과장이었다. 나중이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이 그 직위를 차지했고 그다음에는 빅토르 크라프트(Victor Kraft)였다. 1901년 마흐가 사임했을 때 볼츠만은 물리학과장의 직위를 유지하면서 그의 직위를 계승했다. 마흐는 볼츠만의 6년 선배였는데 대략 1906년 볼츠만이 사망할 때까지 비엔나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기간과 그 후 많은 세월 동안 마흐의 영향력은 부단히 증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물리학자였는데 볼츠만이 단연코 탁월하고 창조적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철학자들이었다. 마흐는 두 명의 철학자들의 초빙으로 철학자로서 비엔나에 왔다. (볼츠만은 슈테판[Stefan]의 뒤를 이어 물리학과장의 직위에 ㅡ 마흐가 희망했던 직위 ㅡ 초빙되었다. 철학과장에 대신 마흐를 부르는 생각은 당시 겨우 21살이던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자신의 부친을 통하여 조치를 취했다.) 볼츠만과 마흐의 철학적 장점들에 관해서 나는 솔직히 편파적이다. 볼츠만은 철학자로서 알려지지 않았고, 아주 최근까지 나도 그의 철학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나는 당연히 그의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보다 여전히 훨씬 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아마도 다른 어떤 철학에 대해서보다도 더 가깝게 나는 동의한다. 그리하여 나는 마흐보다 볼츠만을 크게 선호한다 ㅡ 물리학자 및 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으로서. 그러나 나는 마흐의 인격이 매우 매력적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감각의 분석”을 전적으로 반대할지라도, (주관적) 지식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생물학적 접근방식에 나는 동의한다.
볼츠만과 마흐 두 사람에게는 물리학자들 가운데서 추종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거의 치명적인 싸움을 벌였다. 그것은, 물리학의 연구 프로그램에 관한 그리고 “입자” 가설에 관한 싸움이었다; 다시 말해서, 원자론과 기체 및 열에 대한 분자 혹은 운동 이론에 관하여. 볼츠만은 원자론자였고 그는 원자론과 맥스웰의 열과 기체에 대한 운동 이론 모두를 옹호했다. 마흐는 이 “형이상학적” 가설들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설명적 가설들”을 배제하기를 희망했던 “현상론적 열역학”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는 “현상론적”이거나 “순전히 서술적인” 방법을 물리학 전체까지 확대하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 쟁점들에서 나의 심정은 전적으로 볼츠만의 편이다. 그러나 물리학에 대한 그의 우월한 통달과 우월한 철학에도 (나의 의견으로) 불구하고 볼츠만은 전투에서 졌음을 나는 인정해야겠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쟁점에 ㅡ 운동 이론으로부터 그가 도출한 열역학 제2 법칙의 대담한 확률론적 추론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볼츠만의 H-정리) ㅡ 관하여 그는 패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너무 대담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그의 추론은 직관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는 엔트로피를 무질서와 연결한다; 그는, 상자에 든 기체의 무질서 상태들이 질서 상태들보다 더 “개연적a”임을 (“개연적”의 완전히 훌륭하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설득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b 밝힌다. 그다음에 그는, 그 법칙에 따라 폐쇄된 체계에는 (갇힌 기체들) 점점 더 개연적인 상태들을 띠는 경향이 있다는 한 가지 일반적인 역학 법칙이 있다고 결론을 (그리고 이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내린다; 이것은, 질서 잡힌 체계들이 오래될수록 그 체계들은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 혹은 기체의 엔트로피에는 시간에 따라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에는 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형태로 그것은 불행하게도 틀렸다. 볼츠만은 처음에 자신의 H-정리를, 시간에 따른 무질서의 한 가지-방향 증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체르멜로(Zermelo)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폐쇄 체계는 (기체) 확정된 얼마간의 시간 이후에 이전에 있던 상태의 이웃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푸앵카레(Poincaré)가 이전에 증명했다 (그리고 볼츠만은 이 증명에 도전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모든 상태들은 (개략적으로) 영원히 재발하고 있다; 그리고 기체가 한번 질서 상태에 있었다면 그 기체는 시간이 얼마 지나면 그 상태로 복귀할 것이다. 따라서 엔트로피 증가와 연결되어 선호되는 시간 방향과 ㅡ “시간의 화살” ㅡ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
체르멜로의 반론은 내가 생각하기에 결정적이었다: 그 반론으로 인하여 볼츠만 자신의 견해가 크게 변했고, 통계역학과 열역학은 특히 1907년 (에렌페스트 부부[Ehrenfests]가 기고한 년도) 이후에 시간의 방향과 관련하여 엄격하게 대칭적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그것들은 그런 상태로 남았다. 상황은 다음과 같은 듯하다: 모든 폐쇄 체계는 (가령, 기체) 자체의 거의 모든 시간을 무질서 상태들에서 (평형 상태들) 보낸다. 평형으로부터 요동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요동들의 발생 빈도는 요동들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서 급격히 줄어든다. 그리하여 어떤 기체가 어떤 요동 상태에 (다시 말해서, 평형 상태보다 나은 질서 상태) 놓인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그 기체에는 평형에 (무질서) 더 가까운 상태가 개연적으로 선행했고 꼭 마찬가지로 개연적으로 후행할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기체의 미래를 예언하고 싶다면 우리는 엔트로피 증가를 예언할 수 있다 (높은 개연성으로a); 그리고 그 기체의 과거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유사한 소급언급(retrodiction)이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체르멜로와 동시에 열역학에서 혁명이 일어났음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체르멜로는 자주 불명예스러운 언급을 받거나 어떤 언급도 받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볼츠만은 체르멜로의 반론에 있는 심각성을 즉각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첫 번째 답변은, 체르멜로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체르멜로에 대한 볼츠만의 두 번째 답변과 동시에, 내가 커다란 비극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볼츠만이 주관론에 빠진 실수. 이유인즉 이 두 번째 답변에서,
(a) 볼츠만은 객관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그리고 또한 엔트로피는 이 화살의 방향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포기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핵심적인 요점 한 가지였던 것을 포기했다;
(b) 그는 아름답지만 황당한 우주론적 가설을 임시방편적으로 도입했다;
(c) 그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주관론적 이론을 도입했는데,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동어반복으로 환원시킨 이론이었다.
볼츠만의 두 번째 답변의 이 세 가지 요점들 사이의 관련성은 다음과 같이 제일 잘 설명될 수 있다.
(a) 시간에는 객관적으로 화살이 없다고, 방향이 없다고 전제함으로써 시간은 이런 측면에서 공간좌표와 꼭 같다고 전제함으로써 시작하자; 그리고 객관적인 “우주”는 시간의 두 가지 방향들과 관련하여 완전히 대칭적이라고 전제함으로써.
(b) 우주 전체가 열평형(heat equilibrium) (최대 무질서) 체계라고 (기체와 같은) 추가로 전제하자. 그런 우주에는 엔트로피의 (무질서) 요동들이 있을 것이다; 시공간의 영역들, 다시 말해서 얼마간의 질서가 있는 영역들. 낮은 엔트로피의 이 영역들은 매우 드물 것이다 ㅡ 엔트로피 계곡이 낮을수록 더 드물 것이다; 우리의 대칭 전제를 토대로, 그 계곡은 두 가지 시간 방향들 모두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높아지고 최고 엔트로피를 향해서 수평선을 이룰 것이다. 추가적으로 깊게 파인 엔트로피 계곡들의 측면들에서만 생명체가 가능하다고 전제하자; 그리고 변하는 엔트로피의 이 영역들을 “세계들(worlds)”라고 부르자.
(c) 이제 주관적으로 엔트로피 증가를 가리키면서 방향을 ㅡ 화살표 ㅡ 지닌 것으로서 시간 좌표를 우리가 (그리고 아마도 모든 동물들) 경험한다고 전제할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서 그 시간 좌표가 우리에게 연속적으로 혹은 순차적으로 우리에게 의식적이 됨을 의미한다.
(a)에서 (c)까지가 성립한다면, 분명히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시간에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 시간에 따라서. 동물들의 경험 안에서만 그리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안에서만a 시간이 화살표를 얻는다는 생물학적 가설을 토대로, 엔트로피 증가는 필수적인 법칙이 된다 ㅡ 그러나 주관적으로만 성립한다.
아래 도표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림 1 참조.)
그림 1
보기: time coordinate 시간 좌표 arrow of time for this stretch of time only 이 시간 펼침만에 관한 시간의 화살 Equilibrium level 평형 수준 Entropy curve determining the direction of time 시간 방향을 결정하는 엔트로피 곡선
위의 선은 시간 좌표이다; 아래 선은 엔트로피 요동을 가리킨다. 화살표는
생명체가 발생할 그리고 시간이 지적된 방향을 지닌 것으로서 경험될 영역들을 가리킨다.a
볼츠만은 ㅡ 그리고 슈뢰딩거 또한 ㅡ “미래” 쪽 방향은, 체르멜로에게 보낸 볼츠만의 두 번째 답신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음 인용문이 밝히는 바와 같이,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하여 정해질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그림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우주 전체가 현재 순간에 매우
비개연적인 상태에 있다고 우리가 전제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이 비개연적인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의 영겁의 세월들과 여기서 천랑성(Sirius)까지의 거리가, 우주 전체의
나이와 규모와 비교된다면, 극미하다고 우리가 전제하는 것. 전체적으로 열평형(thermal
equilibrium) 상태에 있고 그리하여 죽은 상태인 그런 우주 안에서 우리 은하계의
상대적으로 작은 영역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될 것이다; 저 시간의 “영겁들”의 상대적으로
짧은 펼침들 동안 열평형(thermal equilibrium)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영역들 (우리가
“세계들”로 지칭할). 이 세계들 가운데서 그 세계들의 상태의 [다시 말해서 엔트로피]
개연성들은 감소하는 만큼 자주 증가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주에서 시간의 두 가지
방향은, 공간에는 위와 아래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구분될 수 없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서 지구 중심 쪽 방향을 “아래”라고 지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시간의 특정 기간에 그런 세계에서 위치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시간의 “방향”을 덜
개연적인 상태에서 더 개연적인 상태로 (전자[前者]는 “과거”일 것이고 후자[後者]는
“미래”일 것이다) 나아가는 것으로서 정의할 수 있고, 이 정의에 의하여 [원문대로] 그는
나머지 우주로부터 소외된 자기 자신의 작은 영역이 “처음에는” 항상 비개연적인 상태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는 것은, 확정된 초기
상태에서 최종 상태까지 전체 우주의 단일방향적 변화를 촉발하지 않고 제2법칙의
성립과 각 개별적인 세계의 열 죽음(heat death)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유일한
방식이다.b
볼츠만의 개념은 자체의 대담성과 아름다움에서 충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a 그러나 나는, 적어도 실재론자로서 그 개념은 전혀 옹호될 수 없다고 또한 생각한다. 그 개념은 단일방향적 변화를 망상으로 낙인찍는다.b 이로 인하여 히로시마의 재앙은 망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 개념으로 인하여 우리의 세상이 망상이 되고 그와 함께 우리의 세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들이 망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 개념은 자멸적이다 (모든 관념론처럼). 볼츠만의 관념론적인 임시방편적 가설은 그의 실재론적이고 거의 열정적으로 유지된 반(反)-관념론적 철학과 그리고 알고자 하는 그의 열정적인 소망과 충돌한다.
그러나 볼츠만의 임시방편적 가설은 상당한 정도까지, 그 가설이 구조하고자 의도했던 물리학적 이론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역학적이고 통계학적전제들로부터 ㅡ 그의 H-정리 ㅡ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dS/dt ≥ 0) 도출하려는 그의 위대하고 대담한 시도가 완벽하게 실패하기 때문이다.c 그 시도는 그의 객관적인 시간 (다시 말해서, 그의 방향 없는 시간) 때문에 실패하는데 왜냐하면 그 시간에 대하여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만큼 자주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관적인 시간 (화살을 이용하는 시간)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정의(定義: definition)나 망상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운동적이거나 역학적이거나 통계적이거나 동력학적이나 기계적인 증거가 이 사실을 확립하지 못할 터이기 (혹은 확립하도록 요구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도로 인하여, 볼츠만이 체르멜로에 대항하여 옹호하려고 노력했던 물리학적 이론이 ㅡ 엔트로피의 운동 이론 ㅡ 파괴된다. 자신의 H-정리를 위하여 그가 자신의 실재론적a 철학을 희생했지만 허사였다.
종국적으로 그가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깨달았다고 그리고 1906년에 그가 우울증에 빠져 자살한 것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볼츠만의 관념론적이고 임시방편적인 가설에 있는 아름다움과 지성적 대담성을 내가 찬양할지라도, 지금은 나의 방법론의 의미에서 그 가설이 “대담하지” 않을 것으로 판명된다: 그 가설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지 않았으며, 그 가설은 내용-증가 중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 가설은 모든 내용에 파괴적이었다. (물론 평형과 요동의 이론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주석 256 참조.)
시간의 화살을 지닌, 비엔트로피적 물리 과정에 대한 나의 사례가 볼츠만의 관념론적인 임시방편적 가설을 파괴했음을 내가 깨달았을 때, 이것이 내가 유감스러워하지 않은 (비록 내가 볼츠만에게 매우 미안했을지라도) 이유였다. 나의 사례가 괄목할만 것을 ㅡ 순수물리학에 속하는 듯이 보였던 관념론을 위한 논증 ㅡ 파괴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슈뢰딩거와 달리, 나에게는 그런 논증들을 탐색하는 경향이 없었다; 그리고 슈뢰딩거처럼 주관론을 지지하는 양자이론의 사용을 내가 반대했기 때문에, 물리학에서 훨씬 더 오래된 주관론의 보루를 내가 공격할 수 있어서 나는 기뻤다. 그리고 나는, 볼츠만이 그 시도를 (아마도 결과들을 아닐지라도) 승인했을 터이라고 느꼈다.
마흐와 볼츠만에 대한 이야기는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기묘한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역사관련 유행들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행들은 어리석고 맹목적인데 특히 철학적 유행들이 그렇다; 그리고 역사가 우리의 심판관이 될 것이라고 믿음이 저것에 포함된다.
역사에 비추어 ㅡ 혹은 역사의 암흑에서 ㅡ 모든 사람이 물리학자로서 볼츠만의 탁월함을 수용할지라도, 수용된 모든 기준들에 따르면 볼츠만은 패배했다. 이유인즉 그는 자신이 주장한 H-정리의 위상을 설명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는 엔트로피 증가를 설명하지도 못했다. (대신, 그는 새로운 문제를 ㅡ 혹은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이비문제 ㅡ 야기했다: 시간의 화살은 엔트로피 증가의 결과인가?) 그는 또한 철학자로서도 패배했다. 그의 생애 후반을 통하여 마흐의 실증주의와 오스트발트(Ostwald)의 에너지학 모두는 반(反)-원자론적인데 매우 영향력이 커져서 볼츠만은 절망했다 (그의 기체론에 관한 강좌[Lectures on Gas Theory]가 밝히는 바와 같이). 압박감이 그런 정도여서 그는 자신감을 잃었고 원자들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는, 입자 가설이 아마도 다만 발견적 장치일 (물리적 실재에 관한 가설이라기보다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논쟁에서 전적으로 정중한 말이 [혹은 응수] 아니”었다는 (“ein nicht ganz ritterlicher polemuscher Zug”) 언급으로써 마흐가 대응했던 제안.
오늘날까지 볼츠만의 실재론과 객관론은 그 자신에 의해서도 역사에 의해서도 옳은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와 관련해서는 더 나쁘다.) 그가 옹호했던 원자론이, 통계적 요동들이라는 그의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자체의 최초로 커다란 승리를 얻었을지라도 (나는 1905년의 브라운 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언급하고 있다), 젊은 아인슈타인이 수용한 그리하여 아마도 양자역학을 창시한 사람들이 수용한 신조가 된 것은 마흐의 철학이었다 ㅡ 원자론을 최고로 반대한 사람의 철학a. 물론 물리학자로서, 그리고 특히 통계역학 창시자 두 명의 한 명으로서 볼츠만의 위대성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개념들이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그의 주관론적인 시간의 화살 이론과 연관되거나 (슈뢰딩거, 라이헨바흐, 그륀바움[Grünbaum]) 통계에 대한 그리고 그의 H-이론에 대한 주관론적 해석과 연관되는 (보른, 제인스[Jaynes]) 듯하다.b 역사의 여신(女神)은 ㅡ 우리의 심판관으로서 유서 깊은 ㅡ 여전히 장난을 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말했는데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시간의 화살이 주관적인 망상이라는 관념론적 이론을 어느 정도 밝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이 이론에 대항하는 싸움이 최근 여러 해 동안 나의 생각을 많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36. 주관론적 엔트로피 이론
주관론적 엔트로피 이론에 의하여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볼츠만의 이론이 아닌데 그 이론에서 시간의 화살은 주관적이지만 엔트로피는 객관적이다. 나는 오히려 원래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에게서 기인하는 이론을 의미하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어떤 체계의 엔트로피는, 그 엔트로피에 관한 우리의 정보가 감소할 때마다 증가하고 역순도 성립한다. 실라르드의 이론에 따르면, 정보나 지식의 습득은 엔트로피에서의 감소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제2법칙에 따라서 그 습득에는, 적어도 엔트로피에서 동등한 증가에 의하여 어떤 정도로든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이 논지에 직관적으로 만족스러운 ㅡ 특히 물론 주관론자에게 ㅡ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정보는 (혹은 “정보성 내용”), 사실상 내가 1934년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개연성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엔트로피는, 문제의 체계 상태에 대한 개연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 방정식들이 성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보 = 음엔트로피(negentropy);
엔트로피 = 정보의 결여 = 무지(nescience).
그러나 이 방정식들은 최대한으로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밝혀진 유일한 것은, 엔트로피와 정보의 결여는 개연성들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거나 개연성들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와 정보의 결여가 동일한 체계의 동일한 속성들에 대한 개연성들이라고 밝혀지지는 않았다.
엔트로피 증가에 대하여 가능하고 가장 단순한 경우들 중 한 가지 경우인 피스톤을 눌러서 기체를 팽창시키는 것을 고려하자. 피스톤이 중간에 있는 원통을 두자. (그림 2 참조.) 온조(溫槽: heat bath)에 의하여 원통이 항상 높은 온도로 유지되게 하여 열이 없어지면 즉각 대체되도록 하라. 피스톤을 오른쪽으로 밀어내는 기체가 왼쪽에 있어서 우리가 활동을 (무게 들어올리기) 얻을
그림 2
수 있다면, 기체의 엔트로피 증가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단순화를 위하여 기체가 한 가지 분자인 분자 M으로만 구성된다고 전제하라. (이 전제는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 ㅡ 실라르드[Szilard]나 브리루엥[Brillouin] ㅡ 가운데서 표준이어서 그것을 채택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나중에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토론될 것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정보의 상실에 대응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a. 이유인즉 기체의 팽창 이전에, 기체가 원통의 왼쪽 절반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체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자 M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팽창 이후에 그리고 기체가 자체의 활동을 마친 때 우리는 기체가 왼쪽 절반에 있는지 오른쪽 절반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피스톤이 지금 원통에서 멀리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정보성 내용은 분명히 많이 감소된다.
나는 물론 이것을 수용할 태세가 되어있다. 내가 수용할 태세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분자 M의 위치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가 음엔트로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는 정리를 확립하려고 실라르드가 시도하는 그의 더 일반적인 주장이다. 내가 우려하는 바, 이렇게 주장되는 정리를 나는 온전히 주관론적인 헛소리로서 간주한다.
실라르드의 주장은 관념화된 사고실험으로 구성된다; 그 주장은 ㅡ 내가 생각하기에, 다소 개선해서 ㅡ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기체가 ㅡ 다시 말해서, 하나의 분자 M ㅡ 원통 왼쪽 절반에 있다는 것을 순간 t에 우리가 안다고 전제하라. 그 다음에 이 순간에 피스톤을 원통의 중간으로 밀어서 (예를 들어 원통의 측면에 있는 구멍으로부터) 기체의 팽창이나 M의 운동량이 피스톤을 오른쪽으로 밀어서 무게를 들어 올릴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필요한 에너지는 분명히 온조(溫槽: heat bath)에 의하여 공급되었다. 필요했다가 실종된 음엔트로피는 우리의 지식에 의하여 공급되었다; 음엔트로피가 소진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팽창의 과정에 있고 오른쪽으로 피스톤이 움직이는 동안에 지식은 실종되었다; 피스톤이 원통의 오른쪽 끝에 다다를 때, M이 위치한 원통의 그 부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우리는 잃었다. 피스톤을 뒤로 밀어서 우리가 절차를 뒤집으면, 동일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리고 온조[溫槽: heat bath]에 추가되고) 동일한 양의 음엔트로피가a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나온다; 이유인즉 원통 왼편 절반에 기체가 ㅡ 혹은 M ㅡ 있다는 지식을 포함하여 우리가 시작한 상황으로 우리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라르드는, 지식과 음엔트로피가 서로 변환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M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측정을 분석하여 ㅡ 나의 견해로 허위 분석 ㅡ 그는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분석이 일반적으로 성립한다고 그는 제안할 뿐이고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반대하여 논증하지 않겠다. 더욱이 여기에 제시된 의견 제시로 인하여 그의 경우가 다소 강화된다고 ㅡ 아무튼 그 의견 제시로 인하여 그의 경우는 더 합당해진다 ㅡ 나는 생각한다.
이제 내가 비판할 차례이다. 실라르드의 목적이, 많은 분자들을 지닌 어떤 기체로써 라기보다는 단 하나의 분자 M으로써 작동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몇 개의 분자들로 구성된 기체가 있을지라도, 그 기체가 우연히 매우 음트로피적 상태에 있지 않다면 이 분자들의 위치들을 안다고 해도 우리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지식은 충분하지 않다); 가령, 분자들 대부분이 왼편에 있다면.b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이 객관적인 음엔트로피적 상태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지식이라기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올바른 순간에 피스톤을 밀어 넣는다면 우리는 다시c 이 객관적인 상태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실라르드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하나의 분자 M으로써 먼저 작동하자. 그러나 이 경우에 내가 주장하는 바, M의 위치에 관하여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피스톤을 원통 안으로 미는 것이다. M이 우연히 왼편에 있다면 피스톤은 오른편으로 밀릴 것이고 우리는 무게를 들 수 있다. 그리고 M이 오른편에 있다면 피스톤은 왼편으로 밀릴 것이고 우리는 또한 무게를 들 수 있다: 장치에 어떤 도구를 장착해서 그 도구가, 임박한 움직임이 가능한 두 가지 방향 중 어느 방향을 취할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 없이, 두 가지 경우들 어느 경우에도 무게를 드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엔트로피 증가를 균형 잡기 위하여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실라르드의 분석은 오류로 밝혀진다: 지식이 물리학에 침입하는 것에 대하여 그는 어떤 타당한 논증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실라르드의 사고실험에 관하여 그리고 또한 나의 사고실험에 관하여 다소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있다. 이유인즉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나의 이 특정 실험이 열역학의 제2 법칙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반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a
제2 법칙이 브라운 운동에 의하여 실제로 반증된다고 내가 정말로 믿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하나의 분자 M에 의하여 상징되는 한 가지 기체를 전제하는 것은 이상화(理想化: idealization)일 (중요하지 않을 터인) 뿐만 아니라, 기체가 객관적으로 부단히 최소 엔트로피 상태에 있다는 전제에 해당한다. 팽창된다할지라도 인식될 수 있는 원통의 하부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가정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기체이다; 이것이, 그 기체가 항상 피스톤의 한 편에서만 발견될 이유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피스톤 안의 날개(flap)를 가령 수평 위치로 돌려서 (그림 3 참조) 피스톤이 저항을 받지 않고 뒤로 중앙까지 밀밀 수 있는데, 중앙에서 날개(flap)는 자체의 작동 위치로 되돌려진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기체 전체가 ㅡ M 전체 ㅡ 피스톤의 한 편에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완전히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기체는 피스톤을 밀 것이다. 그러나
그림 3
사실상 기체 속에 두 개의 분자들이 있다고 전제하라; 그렇다면 이것들은 다른 편들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피스톤의 그 분자들에 의하여 밀리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의 분자 M만의 사용은 실라르드에 대한 나의 답변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함이 (그 사용이 실라르드의 주장에서 그렇게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밝혀지고 또한 한 개의 강력한 분자 M으로 구성된 한 가지 기체가 있을 수 있을 터이라면 그 기체는 정말로 제2 법칙을 위반할 터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제2 법칙이 본질적으로 통계적 효과를 기술하기 때문에 이것은 놀랍지 않다.
이 두 번째 사고실험을 ㅡ 두 개의 분자들에 관한 경우 ㅡ 더 면밀하게 바라보자. 두 개의 분자 모두가 원통의 왼편 절반에 있다는 정보로 인하여 우리는 정말로 날개(flap)을 닫고 그리하여 피스톤을 자체의 작동 위치에 놓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피스톤을 오른편으로 미는 것은, 두 개의 분자들 모두가 왼편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두 개의 분자의 운동량이다 ㅡ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기체가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나의 이 특수한 사고실험들로 인하여, 제2종 영구기관(a perpetual motion machine of the second order)이 가능하다고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안 바와 같이 하나의 분자 사용은 실라르드 자신의 사고실험에 본질적이기 때문에, 나의 사고실험으로 인하여 실라르드의 실험이 성립하지 않음이 밝혀지고 그리하여 제2 법칙에 대한 주관론적 해석을 이런 유형의 사고실험에 근거시키려는 실라르드의 시도가 성립하지 않음이 밝혀진다.
실라르드의 주장을 (나의 견해로 성립하지 않는) 근거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한 유사한 주장들을 근거로 구축된 체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어서 나는 우려한다a; 그래서 “엔트로피는 ㅡ 확률처럼 ㅡ 정보의 결여를 측정한다”는 그리고 실라르드의 기계처럼 기계들은 지식에 의하여 움직여질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계속해서 들을 것이다. 허풍과 엔트로피는, 대등한 양의 무지를 제공하는 몇몇 주관론자들이 주변에 있는 한, 지속적으로 생산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37.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다윈론
나는 항상 진화론에 극도로 관심을 가졌고 진화를 한 가지 사실로서 아주 기꺼이 수용한다. 다윈론에서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도 나는 매혹당했는데, 대부분의 진화론적 철학자들에게는 다소 인상을 받지 못했다; 훌륭한 한 사람이 예외인데, 다시 말해서 새뮤엘 버틀러(Samuel Butler)이다.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는 시행과 오류-제거에 의한, 다시 말해서 라마르크적 지시(instruction)라기보다는 다윈적인 선택(selection)에 의한 지식의 성장 이론을 담았다; 이 요점으로 (저 저서에서 내가 암시한) 인하여 물론 진화론에 대한 나의 흥미가 증대했다. 내가 말해야 할 것들 중 몇 가지는, 나의 방법론을 이용하려는 시도로부터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을 조명하려는 다윈론에 대한 그 시도의 유사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은, 진화론과 연결된 몇 가지 인식론적 문제들을 다루려는 나의 간략한 최초 시도들을 담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그런 문제들 다루었고, 슈뢰딩거가 얻은 결과들 중 몇 가지 결과들과 매우 유사한 결과들에 내가 도달했음을 나중에 내가 발견하고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1961년 “진화와 지식의 나무(Evolution and the Tree of Knowledge)”라는 제목으로 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허버트 스펜서 기념 강좌(the Herbert Spencer Memorial Lecture)를 제공했다. 이 강좌에서 내가 슈뢰딩거의 개념들을 다소 넘어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라마르크론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다윈론의 한계들을 ㅡ 지시(instruction)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연선택 ㅡ 엄격하게 지키는 반면, 다윈의 이론에 대한 사소한 개량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을 추가로 전개했다.
나는 또한 콤튼(Compton)280a 강좌에서 (1966년) 몇 가지 연관된 문제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다윈론의 과학적 위상이라는 문제. 내가 보기에 다윈론은 다음과 같이 라마르크론에 대하여 꼭 같이 동일한 관계에 있다:
귀납론에 대한 연역론,
반복에 의한 지시에 대한 선택,
정당화에 대한 비판적인 오류 제거.
이 표의 왼편에 있는 개념들의 논리적 옹호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다윈론에 (즉, 오른편의) 대한 일종의 논리적 설명이 확립된다. 그리하여 그 옹호 불가능성은 “거의 동어반복적”으로서 서술될 수 있을 터이다; 아니면 그 옹호 불가능성은 응용 논리로서 ㅡ 아무튼 응용 상황적 논리로서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ㅡ 서술될 수 있을 터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다윈 이론의 과학적 위상이라는 문제는 ㅡ 최고로 넓은 의미에서, 시행과 오류-제거의 이론 ㅡ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나는, 다윈론은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은 아니지만,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이라는 ㅡ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이론들을 위하여 가능한 기초구조 ㅡ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론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나는 다윈론을 내가 “상황적 논리”라고 지칭하는 것의 적용으로서 또한 간주한다. 상황적 논리로서의 다윈론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제한된 가변성을 지닌 실체들이 있는 제한된 불변성의 기초구조인 세계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변종에 의하여 만들어진 실체들 중 몇 가지는 (기초구조의 상황에 “맞아 떨어지는” 것들), 다른 것들이 (상황과 충돌하는 것들) 제거될 것인 반면, “생존할” 것이다.
이것에, 생명체가 혹은 더욱 특히 자기-생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 가능한 몸체들이 있을 수 있는 특별한 기초구조의 존재라는 ㅡ 아마도 희귀하고 고도로 개별적인 상황의 집합 ㅡ 전제를 추가하라. 그렇다면 시행과 오류-제거라는, 혹은 다윈론이라는 개념이 적용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거의 논리적으로 필수적이 되는 상황이 주어진다. 이것은, 생명체의 기초구조나 근원이 필수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체가 가능할 터이지만 생명체를 낳는 시행이 발생하지 않거나 생명체를 낳은 모든 저 시행들이 제거된 기초구조가 있을 것이다. (후자[後者]는 단순히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발생할지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혹시 파괴될 한 가지 이상의 방식들이 있다.) 의미되는 바는, 생명체를 허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생명체가 시작된다면 이 전체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다윈적 개념은 상황적 논리의 한 가지 개념이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윈의 이론이 성공적일 터임은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이론은 매우 특별하고 아마도 심지어 유일무이한 상황이다. 그러나 심지어 생명체가 없는 상황에서도 다원적 선택은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 수 있다: 비교적 안정적인 (문제의 상황에서) 원자핵들에는 안정적이지 못한 원자핵들보다 더 풍부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화합물들에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다윈론이 생명체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극도로 비개연적이어서 왜 생명이 시작되었는지를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통계적 설명은, 최종적으로, 매우 높은 확률들로써 틀림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높은 확률들이, 이용가능한 시간이 엄청나기 때문에 높아진 낮은 확률들일 뿐이라면 (볼츠만의 “설명”에서처럼; 35절의 주석 260에 대한 원문a 참조) 이런 방식으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설명이 생명의 근원에 적용될 수 있다고 추측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생명과 생명의 기초구조가 우리의 “상황”을 구성한다고 전제되자마자, 상황적 논리로서의 다윈론에 대한 견해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윈론에 관하여 다윈론이 다른 것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상황적 논리에 대한 다윈론의 밀접한 유사성은, 상황적 논리를 다윈이 정식화하는 데 본질적인 거의 동어반복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다윈론이 거둔 거대한 성공의 일부이고 지금까지 진지한 경쟁 이론이 나서지 않은 사실의 일부이다.
상황적 논리로서 다윈의 이론을 보는 견해가 수용될 수 있다면, 지식의 성장에 관한 나의 이론과 다윈론 사이의 기묘한 유사성을 우리는 설명할 수 있을 터이다: 두 가지 이론들 모두는 상황적 논리에 대한 경우들일 터이다. 지식에 대한 의식적인 과학적인 접근에서 ㅡ 잠정적인 추측들에 대한 의식적인 비판과 이 추측들에 선택압력을 의식적으로 증대시키는 것 (그 추측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ㅡ 새롭고 특별한 요소는, 결과적으로 서술적이고 논증적인 언어의 출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 서술들이 비판될 수 있는 서술적 언어의 출현.
그런 언어의 출현으로 인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아마도 생명 자체만큼 비개연적인, 고도로 비개연적이고 혹시 유일무이한 상황을 대면할 터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고려하면, 추측과 반증이라는 의식적인 절차를 통한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지식의 성장 이론이 “거의” 논리적으로 뒤따른다: 그 이론은 다원론의 일부뿐만 아니라 상황의 일부가 된다.
다윈론 자체에 관하여, “신(新)-다윈론”이나 “현대적 종합(The Modern Synthesis)”과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에 의하여) 같이 다양한 명칭들로 지칭되는 이 이론의 현대적 형태들로서 내가 “다윈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나는 이제 설명해야겠다. 그 용어는 본질적으로 다음 전제들이나 추측들로 구성되는데, 그것들에 대하여 나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1) 지구상의 매우 다양한 형태들의 생명체는 매우 희귀한 형태들로부터, 아마도 심지어 단일 유기체로부터 시작된다: 진화 역사인 진화의 나무가 있다.
(2) 이것을 설명하는 진화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은 주로 다음 가설들로 구성된다.
(a) 유전: 자손은 부모 생명체들을 상당히a 충실하게 재생한다.
(b) 변종: (아마도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작은” 변종들이 있다. 이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적”이고 유전적인 돌연변이들이다.
(c) 자연선택: 변종들뿐만 아니라 유전 물질 전체가 제거에 의하여 제어되는 다양한 작동기제들(mechanisms)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는 “작은” 돌연변이들만 확산되는 것을 허용하는 작동기제들이 있다; “커다란” 돌연변이들은
a 역주: ‘상당히’의 원어는 fairly인데 박중서 번역은 ‘비교적’이다.
(“희망에 찬a 괴물들”) 통상적으로 치명적이고 그리하여 제거된다.
(d) 변종가능성: 어떤 의미에서 변종들은 ㅡ 다양한 경쟁자들의 출현 ㅡ 명백한 이유들 때문에 선택에 선행할지라도, 변종가능성이 ㅡ 변종의 범위 ㅡ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어됨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예를 들어, 변종들의 규모뿐만 아니라 빈도와 관련하여. 유전과 변종에 관한 유전자 이론은, 다른 유전자들의 변종가능성을 제어하는 특별한 유전자들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층구조에, 혹은 아마도 훨씬 더 복잡한 상호작용 구조들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복잡성들을 우려해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복잡성들은 거기에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택론적 관점에서, 유전을 제어하는
유전자 암호방식과 같은 것 자체가 선택의 초기 산물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고도로 정교한 산물이라고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전제 (1)과 (2)는, 내가 생각하기에 다윈론에 필수적이다 (몇몇 규칙성들이 장착된, 변화하는 환경에 관한 몇몇 전제들과 함께). 다음 요점 (3)은 요점 (2)에 관하는 나의 심사숙고이다.
(3) “보수적인” 원리 (a)와 (d) 그리고 내가 독단적 사고라고 지칭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음이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b)와 (c) 그리고 내가 비판적 사고로 지칭한 것 사이에도 그렇다.
이제 나는, 내가 다윈론을 형이상학적으로서 그리고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간주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싶다.
다윈론은,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다윈론이 시험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언젠가 어떤 행성 위에서 조건 (a)와 (b)를 충족시키는 생명체를 우리가 발견한다면 (c)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결국 풍요롭게 다양한 두드러진b 형태들을 낳을 것이라고 다윈론은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윈론은 이만큼 주장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지구상의 세 가지 종들이 지닌 유전자 조직과 유사한 유전자 조직을 지닌 정확하게 세 가지 종류의 박테리아로 구성된 생명체를 우리가 화성에서 발견한다고 전제하라. 다윈론은 반증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세 가지 종들은, 많은 변종들 가운데서 생존하기 위해 충분히 잘 적응된 유일한 형태들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종만 있어도 (혹은 어떤 종도 없어도) 우리는 동일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윈론은 실제로 다양성의 진화를 예측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윈론은 실제로 다양성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기껏해야 다윈론은 “유리한 조건”에서의 다양성의 진화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한 조건
a 역주: ‘희망에 찬’의 원어는 hopeful인데 박중서 번역은 ‘쓸 만한’이다.
b 역주: ‘두드러진’의 원어는 distinct인데 박중서 번역은 ‘개별적’이다.
이 무엇인지를 일반적인 용어들로 기술하는 것은 ㅡ 그 조건이 존재하여 다양한 형태들이 출현할 것임을 제외하고 ㅡ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이론을 거의 최고의 상태에서 ㅡ 거의 그 이론을 가장 시험 가능한 형태로 ㅡ 수용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 이론이 매우 다양한 형태들의 생명체를 “거의 예측한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 분야들에서 그 이론이 지닌 예측적이거나 설명적인 힘은 훨씬 더 절망적이다. “적응”을 고려하라. 첫눈에 보기에 자연선택이 그것을 설명하는 듯이 보이고 어느 정도 설명한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지금 살아있는 종(種: species)이 자체의 환경에 적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동어반복적이다. 종(種: species)이 적응하지 못한다면 자연선택에 의하여 그 종이 제거되었을 터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말로 우리는 “적응”과 “선택”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유사하게 어떤 종(種: species)이 제거되었다면 그 종은 틀림없이 환경에 잘못 적응했다.a 적응이나 적합성은 현대 진화론자들에 의하여 생존 가치로서 정의(定義: defined)되고 생존에서 실제적인 성공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취약한 이론을 시험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극도로 귀중하다. 그 이론 없이, 다윈 이래 우리의 지식이 성장한 바와 같이 어떻게 우리의 지식이 성장할 수 있을 터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령 페니실린에 적응된 박테리아로써 실험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함에서, 우리가 자연선택 이론에 의하여 크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분명하다. 그 이론이 형이상학적일지라도, 그 이론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실용적인 연구들을 많이 설명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페니실린으로 감염된 환경과 같은) 대한 적응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다: 그것은 적응의 작동기제가 존재함을 암시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심지어 활동 중인 작동기제를 상세하게 연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모든 것을 수행하는 지금까지 유일한 이론이다.
이것은 물론, 다윈론이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된 이유이다. 다윈론의 적응 이론은, 확신을 주는 최초의 비(非)-신학적 이론이었다; 그리고 유신론(有神論)은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나쁜데 이유인즉 유신론이, 궁극적인 설명에 도달되었다는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이제 다윈론이 동일한 인상을 풍긴다는 정도까지, 다윈론은 적응에 대한 유신론적 견해보다 그렇게 훨씬 더 좋지 않다; 그리하여 다윈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라 형이상적임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다윈론의 과학관련 가치는 매우 큰데, 특히 다윈론이 비판되어 개선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그렇다.
위의 요점 (1)과 (2)에서 언명된 바와 같이, 이제 다윈론의 연구 프로그램을 더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먼저, (2)가 다시 말해서 다윈의 진화론에 매우 다양한 형태들의 생명체의 지구상 진화를 설명하는 충분한 설명력이 없을지라도, 그 진화론은 그 진화를 틀림없이 암시하고 그리하여 그 진화를 주시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진화론은 틀림없이, 그런 진화가 발생한다면 그 진화는 점진적일 것임을 정말로 예측한다.
점진적임에 대한 중대한 예측은 중요하고 그 예측은 (2)(a)-(2)(c)로부터 즉각 귀결된다; 그리고 (a)와 (b)와 적어도 (c)에 의하여 예측되는 돌연변이들의 작음은 실험적으로 잘 뒷받침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상세하게 알려진다.
그리하여 점진적임은, 논리적 관점에서, 그 이론의 핵심적인 예측이다. (내가 보기에 점진적임은 그 이론의 유일한 예측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형태들의 유전적 토대에서의 변화들이 점진적이라면, 그 변화들은 ㅡ 적어도 “원칙적으로” ㅡ 그 이론에 의하여 설명된다; 이유인즉 그 이론은 작은 변화들 각각이 돌연변이에 기인하여 발생함을 정말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인 설명”은, 우리가 물리학에서 요구하는 유형의 설명과 매우 다른 것이다. 특정 일식을 예측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 일식을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특정 진화적 변화를 (아마도 한 가지 종[種: species] 내부에서 유전자 개체군 안의 특정 변화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작은 변화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몇 가지 중간 단계들이 있었다 ㅡ 연구를 위한 중요한 암시: 연구 프로그램.
게다가 그 이론은 우연적인 돌연변이들을 그리하여 우연적인 변화들을 예측한다. 그 이론에 의하여 “방향”이 지적된다면 그 방향은, 격세유전 돌연변이들이 비교적 빈번할 것이라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작위-행보(random-walk) 유형의 진화적 연쇄들을 기대해야한다. (무작위 행보는, 예를 들어, 걸음마다 자신의 다음 행보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하여 룰렛바퀴[roulette wheel]를 참고하는 사람에 의하여 서술되는 행로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출현한다. 무작위 행보들은 진보 나무에서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떠한가? 그 질문은, “정향진화적(定向進化的) 추세들”로서 때때로 지칭되는 바와 같이 그 추세들을 다윈론이 설명할 수 있다면, 답변될 터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방향”으로의 진화적 변화들의 연쇄들 (무작위적이 아닌 행보들). 슈뢰딩거와 워딩튼(Waddington) 그리고 특히 알리스터 하디 경(Sir Alister Hardy)과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이 정향진화적 추세들에 대한 다윈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했고 나도 또한 예를 들어 나의 스펜서(Spencer) 강좌에서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다.
아마도 정향진화를 설명할, 다윈론의 풍요로움에 대한 나의 제안들은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다.
(A) 내부의 선택압력으로부터 나는 외부의 혹은 환경적 선택압력을 구분한다. 내부의 선택압력은 생명체 자체에서 유래하고, 내가 추측하는 바, 생명체가 선호하는 것들이 물론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여 변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 선호하는 것들로부터 (혹은 “목표들”) 유래한다.
(B) 다양한 유전자들의 집단들이 있다고 나는 전제한다: 주로 신체 구조를 제어하는 집단들이 있는데 나는 그 집단들을 α-유전자들로 지칭하겠다; 주로 행위를 제어하는 집단들을 b-유전자들로 지칭하겠다. 중간 유전자들을 (혼합 기능들을 지닌 유전자들을 포함해서) 나는 여기서 고려사항에서 제외하겠다 (그 유전자들이 존재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b-유전자들은 다시 p-유전자들과 (선호사항들이나 “목표들”을 제어하는) s-유전자들로 (기량들을 제어하는) 유사하게 세분될 것이다.
몇몇 생명체들은 외부의 선택압력을 받고 유전자들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b-유전자들을 발전시켜서 그로 인하여 그 생명체가 특정 변화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나는 나아가 전제한다. 행위 변화의 범위는 유전적 b-구조에 의하여 어떤 정도로 제어될 것이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b-구조에 의한 행위가 너무 엄격하게 결정되지 않으면 그 행위는 유전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유전자 변화가능성의 범위에 대하여 너무 엄격하지 않은 유전적 결정만큼 성공적으로 판명될 것이다. (위 (2)(d) 참조.) 그리하여 유전적으로 결정된 범위나 정보비축 내부에서의 비유전적 변화들을 의미하면서 우리는 행위의 “순전히 행위적” 변화들이나 행위의 변종들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유전적으로 고정되었거나 결정된 행위적 변화들과 대조시킬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특정 환경적 변화들이 새로운 문제들을 그리하여 새로운 선호사항들이나 목표들의 채택을 (예를 들어, 특정 유형들의 음식물이 사라졌기 때문에) 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선호사항들이나 목표들은 처음에 새로운 잠정적 행위들의 형태로 (b-유전자들에 의하여 허용되지만 고정되지 않은)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은 잠정적으로 유전적 변화 없이 자신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순전히 행위적이고 잠정적인 변화는, 성공적이라면, 새로운 생태적 장소의 채택이나 발견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변화로 인하여, 그 유전적 p-구조가 (다시 말해서, 개체들이 지닌 본능적인 선호사항들이나 “목표들”) 선호사항들에 대한 새로운 행위적 유형을 다소 기대하거나 고정시키는 개체들이 선호될 것이다. 이 단계는 결정인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유인즉 이제, 새로운 선호사항들에 따르는 기량 구조에서의 (s-구조) 저 변화들이 선호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호되는 음식물을 얻기 위한 기량들.
이제 나는, s-구조가 변한 다음에만 α-구조에서의 특정 변화들이 선호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기량들을 선호하는 신체적 구조에서의 저 변화들. 이 경우들에서 내부의 선택압력은 “지향(指向: directed)”될 것이고 그리하여 일종의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가 생길 것이다.
이 내부의 선택 작동구조에 대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이 도식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p → s → α.
다시 말해서 선호 구조와 그 구조의 변종들이, 기량 구조의 선택과 그 선택의 변종들을 제어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순전히 신체 구조의 선택과 그 선택의 변종들을 제어한다.
그러나 이 연쇄는 순환적일 것이다: 새로운 신체 구조는 다시, 선호의 변화들을 선호하고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다윈이 “성적(性的: sexual) 선택”으로 지칭한 것은, 여기서 설명된 관점에서, 내가 서술한 내부 선택압력의 특별한 경우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선호사항들로써 시작하는 순환이라는 특별한 경우. 내부의 선택압력이 비교적 환경에 대한 나쁜 적응을 야기할 것임은 특징적이다.a 다윈 이래 이것은 자주 주목되었고, 어떤 두드러진 부적응 사례들을 (공작새 꼬리의 과시와 같은 생존 관점에서 부적응 사례들) 설명하려는 희망은, 자신의 “성적(性的: sexual) 선택” 이론을 다윈이 도입하기 위한 주요 동기들 중 하나이다. 원래 선호사항은 잘 적응되었을 것이지만, 내부의 선택압력 및 변화된 신체 구조로부터 변화된 선호사항들로의 정보교환(feedback)이 (α에서 p로) 행위적 형태들(의식들[儀式들: rites])과 신체적 형태들 두 가지를 과장된 형태들로 만들어낼 것이다.
비성적(非性的: nonsexual) 선택의 사례로서 나는 딱따구리를 언급할 것이다. 합당하게 추정하면 이 특수화는,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characteristic that internal selection pressure may lead to
comparatively bad adjustment to the environment.인데 박중서 번역은 ‘그 특징은 내적 선택압력이
환경에 대한 비교적 나쁜 적응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이다.’이다
p → s라는
도식에 따라서 유전적 행위 변화들을 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기량들을 야기한 새로운 먹이들에 대한 미각의 변화로써 (선호사항들)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신체적 변화들은 마지막에 일어났던 듯이 보인다. 자체의 미각과 기량에서 변화들을 겪지 않고 자체의 부리와 혀에서 신체적 변화들을 겪는 조류는 자연선택에 의하여 빠르게 제거된다고 기대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역순은 그렇지 않다a. (유사하게, 그리고 명백함이 못지않게: 새로운 기량을 지녔지만, 새로운 기량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선호사항들을 지니지 못한 새는 이익들을 보지 못할 터이다.)
물론 단계마다 많은 정보교환(feedback)이 있을 것이다: p → s는, 지적된 바와 같이 α가 s와 p 모두에게 돌이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보교환(feedback)을 산출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s는 유전적 변화들을 포함하여 p와 동일한 방향으로 추가적인 변화들을 선호할 것이다.) 더 과장된 형태들과 의식들(儀式들: rituals)의 주원인이 되는 것은 이 정보교환(feedback)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것이다.
그 문제를 또 다른 사례로서 설명하기 위하여, 특정 상황에서 외부의 선택압력이 크기를 선호한다고 전제하라. 그렇다면 동일한 압력은 크기에 대한 성적(性的: sexual) 선호에 또한 우호적일 것이다: 선호사항들은, 먹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외부 압력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p-유전인자들이 생기자마자 새로운 순환 전체가 세워질 것이다: 정향진화(定向進化: orthogenesis)를 촉발시키는 것은 p-돌연변이들이다.
이로 인하여 상호강화(mutual reinforcement)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가 생긴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기량 구조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신체적 구조에 대한 선호나 목표 구조에서 1차적인 계층적 제어가 있다a;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 구조들 사이의 일종의 2차적인 상호작용이나 정보교환(feedback)이 또한 있다. 상호강화의 이 계층적 체계가,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선호나 목표에서 제어가 주로 전체 계층구조 도처에서 하위 제어들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사례들이 이 두 가지 개념들 모두를 예시할 것이다. 내가 “선호 구조”나 “목표 구조”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유전적 변화들을 (돌연변이들), “기량 구조”에서의 유전적 변화들과 “신체 구조”에서의 유전적 변화들로부터 우리가 구분한다면, 목표 구조와 신체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하여 다음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a) 신체 구조에 대한 목표 구조의 돌연변이들의 행동: 딱따구리의 경우에서와 같이 미각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 먹이 획득과 유관한 신체 구조는 변하지 않은 채 남을 것인데 그 경우에 그 종(種: species)은 자연선택에 의하여 제거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특수한 기량들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니면 그 종(種: species)은 눈(eye)과 같은 기관과 유사한 새로운 신체적 특수화를 발전시킴에 의하여 적응할 것이다: 종(種:species)이 보는 것에 (목표 구조) 더 강력한 관심을 갖게 되면, 눈(eye)의 구조 향상을 선호하는 돌연변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b) 목표 구조에 대한 신체 구조의 돌연변이들의 행위: 먹이 획득과 유관한 신체 구조가 변할 때, 먹이와 관련된 목표 구조는 자연선택에 의하여 고착되거나 굳어지는 위험에 처하고 그로 인하여 다시 추가적인 신체적 특수화가 발생할 것이다. 눈(eye)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신체 구조의 향상을 위한 선호적 돌연변이로 인하여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예리하게 증가할 것이다 (이것은 반대 효과에도 유사하다).
개괄된 이론에 의하면, 진화로 인하여 어떻게 생명체의 “고등” 형태들로 지칭될 것이 생기는지의 문제에 대한 해답과 같은 것이 시사된다.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다원론은 그런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다원론은 기껏해야 적응의 정도에서의 향상과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틀림없이 적어도 인간만큼 잘 적응된다.a 아무튼 박테리아는 더 길게 존재해서 박테리아가 인간보다 더 오래 생존할 것이라고 우려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생명체의 고등 형태들과 동일시될 것은 행위적으로 더 풍요로운 선호 구조이다 ㅡ 더 큰 범위의 선호 구조; 그리고 선호 구조가 내가 그것들에 귀속시키는 선두적인 역할을 지닌다면 (대체로), 고등 형태들을 향한 진화는 이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도 제시될 것이다: 고등 형태들은 p → s → α라는 기본적인 계층구조를 통하여 출현하는데 다시 말해서, 선호 구조가 주도권을 쥘 때마다 그리고 그런 조건이라면 그렇다. 과도한 특수화를 포함하여 정체(停滯: stagnation)와 복귀돌연변이(reversion)는, 이 기본적 계층구조 안에서의 정보교환(feedback)에서 전도(顚倒: inversion)가 일어난 결과이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종들(種들: species)의 분리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마도 많은 해답들 가운데서 하나) 가능하다고 시사되기도 한다. 그 문제는 이렇다: 독립적인 돌연변이들은, 새로운 종(種: species)을 야기하는 게 아니라 종(種: species)의 유전자 집합에서 변화를 야기할 따름이라고 기대될 것이다.b 그리하여 새로운 종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하여 국지적 분리가 틀림없이 요구된다. 보통 우리는 지리적 분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지리적 분리는 새로운 행위의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새로운 생태적 장소의 채택에서 기인하는 분리의 특별한 경우로서만 간주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생태적 장소에 ㅡ 특정 유형의 장소 ㅡ 대한 선호가 유전이 되면, 상호교배가 생리학적으로 여전히 가능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그 교배가 그치기에 충분한 국지적 분리가 생길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종들(種들: species)은 동일한 지리적 영역에 ㅡ 이 영역이, 특정 아프리카 연체동물들에 대한 경우들로 보이는 바와 같이, 맹그로브 나무의 규모일 뿐이라 할지라도 ㅡ 사는 반면 아마도 분리할 것이다. 성적(性的: sexual) 선택에도 유사한 결과들이 생길 것이다.
정향진화 추세들 배후에 있는 가능한 유전적 작동구조들에 대한 서술은, 위에 개괄된 바와 같이, 전형적인 상황적 분석이다. 다시 말해서, 개발된 구조들이 상황 논리의 방법들을 모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 구조들은 생존 가치를 지닐 것이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진화론에 관한 또 다른 제안은, “생존 가치”라는 개념과 또한 목적론과 관련된다. 이 개념들은 문제 해결을 통하여 훨씬 더 분명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생명체와 모든 종은 부단히 멸종의 위협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 위협은, 그 생명체와 모든 종이 해결해야 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의 형태를 띤다. 이 구체적인 문제들 중 많은 문제들은 생존 문제들과 같은 것은 아니다. 훌륭한 둥지를 발견하는 문제는, 새끼 새들에게는 생존 문제로 변할지 모르지만, 한 쌍의 새들에게는 생존 문제가 되지 않고도 그 새들에게 구체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종은, 당장 그 특정 새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해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문제들은 생존에 의해서기보다는 선호사항들, 특히 본능적인 선호사항들에 의하여 제기되고 문제의 본능들이 (p-유전자들) 틀림없이 외부의 선택압력을 받고 진화했을지라도 그 선호사항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통상적으로 생존 문제들이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생명체들을 목적-추구하는 것으로서보다는 문제-해결하는 것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이 낫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것들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내가 “구름과 시계에 대하여(Of Clouds and Clocks)”에서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창발하는 진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ㅡ 물론 “원칙적으로” ㅡ 것이다.
생명의 근원과 문제들의 근원은 동시적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것은, 생물학이 화학으로 나아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기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어느 날 무생물들로부터 생명체들을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개연적이라고a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물론 본질적으로 (환원론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아주 흥미진진할 터일지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생물학이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환원될” 수 있음이 확립되지 않을 터이다. 이유인즉 이것으로 인하여 문제들의 출현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이 확립되지 않을 ㅡ 물리학적 수단으로 화합물을 생성하는 능력에 의하여 화학결합(chemical bond)에 대한 물리학적 이론이나 심지어 그런 이론의 존재가 확립되지 않는 것과 같이 ㅡ 터이기 때문이다.b
나의 입장은 그리하여, 환원불가능성과 창발을 옹호하는 입장으로서 서술될 것이고 나의 입장은 아마도 다음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물리학적 과정과 상세하게 상관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는, 혹은 물리화학적c 용어들로 점진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은 없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어떤 물리화학적b 이론도 새로운 문제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물리화학적c 과정과 같은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최소 작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least action) 즉,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와 같이 물리학에서 변분 원리들(變分 原理들: variational principles)은d 아마도 유사하지만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유신론적[有神論的] 방법은 하느님을 유사한 목적들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시도한다.)
(2) 이 추측이 옹호될 수 있다면 이 추측으로 인하여 몇 가지 구별들이 생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서로 구분해야 한다:
물리학적 문제 = 물리학자의 문제
생물학적 문제 = 생물학자의 문제
생명체의 문제 = 다음과 같은 문제: 어떻게 나는 생존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변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적응할 수 있는가?
인공적인 문제 = 다음과 같은 문제: 어떻게 우리는 쓰레기를 통제하는가?
이 구분들로부터 우리는 다음 논지에 도달한다:
생명체들이 지닌 문제들은 물리학적이 아니다: 그 문제들은 물리학적 물체들도 아니고 물리학적 법칙들도 아니며 물리학적 사실들도 아니다. 그 문제들은 특수한 생물학적 실재들이다; 그 문제들은, 그 존재가 생물학적 효과들의 원인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이다.
(3) 특정 물리학적 물체들이 자체의 번식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제하라: 그 물체들이, 번식할 수 있다고; 화학적으로 (또는 심지어 기능적으로) 비본질적일 사소한 결점들을 지니고, 정확하게 혹은, 결정체들(crystals)처럼 번식할 수 있
다고. 그러나 그 물체들은 아마도, 적응하지 못한다면, “생존해 있지” (완벽한 의미에서) 않을 것이다: 그 물체에게는 이것을 이룩하기 위하여 번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변화가능성이 필요하다.
(4) 그 문제의 “본질”은 문제해결하기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용어는 여기서 진지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물리적 “신체들”로 (더 정확하게, 과정들) 구성된다. 이것을 다양한 종들(species)은, 자연선택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번식뿐만 아니라 변종의 방법에 의하여 “배웠”는데 변종 자체는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학습되었다a. 이 회귀(回歸: regress)는 반드시 무한한 것이 아니다 ㅡ 정말로, 그 회귀는 창발(emergence)과 관련하여 상당히 확정된 어떤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버틀러(Butler) 및 베르그송과 같은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이론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직관에서는 옳았다. 생명력(“교활함: cunning”)은 물론 정말로 존재한다 ㅡ 그러나 생명력은 반대로,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산물인 선택의 산물이다.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정말로 선호사항들이다. 그러나 선구적인 역할은 라마르크적이 아니라 다윈적이다.
나의 이론에서 선호사항들에 (성향들이기 때문에 경향들로부터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은) 대한 이 강조는 분명히 순전히 “객관적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선호사항들이 의식적이라고 전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선호사항들은
a 역주: ‘변종 자체는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학습되었다’의 원어 표현은 which itself has been
learned by the same method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고 which의 선행사가 변종만인지 ‘번식
뿐만 아니라 변종’인지 알 수 없다.
의식적이 될지도 모른다; 처음에 내가 추측하는 바, 행복의 상태와 괴로움의
상태들이라는 (쾌락과 고통) 형태들로.
그리하여 나의 접근방식으로 인하여, 의식적 상태들의 창발에 대한 설명을 객관적인 생물학적 용어들로 요구하는 연구 프로그램이 거의 반드시 발생한다.
6년 후에 이 절(節)을 다시 읽고292a 어떻게 순전히 선택론적인 이론이 (볼드윈[Baldwin]과 로이드 모건[Lloyd Morgan]의 “유기체 선택” 이론),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는 라마르크적 교설에 양보하지 않고 라마르크(Lamark)나 버틀러(Butler)나 베르그송에 의하여 강조된 진화의 특정 직관적 양상들을 정당화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더 단순하고 더 분명하게 제시할 또 다른 요약의 필요성을 나는 느낀다. (유기체 선택의 내력에 대해서 특히 알리스터 하디 경[Sir Alister Hardy]의 훌륭한 저서, 살아있는 흐름[The Living Stream] 참조.292b)
첫눈에 보면 다윈론은 (라마르크론과 반대로) 개별적인 생명체의 적응적 행위 혁신들에 (선호들, 소망들, 선택들) 진화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상은 피상적이다. 개별적인 생명체에 의한 모든 행위 혁신으로 인하여 저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환경 사이의 관계가 변한다: 그것은, 생명체가 새로운 생태학적 장소를 채택하거나 심지어 창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태학적 장소는, 선택된 장소를 위하여 선택하는 선택압력들의 새로운 집합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생명체는, 자체의 행위와 선호에 의하여, 자체와 자체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선택압력을 부분적으로 선택한다. 그리하여 생명체는, 진화가 채택할a 과정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로운 행위 방식의 혹은 새로운 기대의 (또는 “이론”) 채택은 새로운 진화의 통로를 트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윈론과 라마르크론 사이의 차이점은, 버틀러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행운과 교활함 사이의 차이점이 아니다: 다윈과 선택을 선호하면서 우리는 교활함을 배척하지 않는다.
38. 세계 3 혹은 제3 세계
292a 원문의 현재 및 다음 문단들은 (그리고 대응하는 주석들) 1975년에 삽입되었다.
292b 알리스터 하디 경, 살아있는 흐름 (위 주석 288과 비교하라), 특히 강좌 VI 및 VII 참조. 또한
W. H. 소프(Thorpe), “서식지 선택의 진화적 중요성(The Evolutionary Significance of Habitat Selection)”, 동물 생태학 저널(The Journal of Animal Ecology), 14 (1945년), 67-70 (앞에서도
쪽수를 의미하는 p가 누락된 듯하다: 역자) 참조.
a 역주: ‘진화가 채택할’의 원어 표현은 evolution will adopt인데 박중서 번역은 ‘진화가 채택될’이다.
자신의 과학론(Wissenschaftslehre)에서 볼차노(Bolzano)는, 어떤 인간이 진리들을 생각하거나 파악하는 저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과 대조적으로 “본질적인 진리들”을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본질적인 명제들”을 말했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참이든 허위이든 명제들을 파악하는.
본질적인 명제들과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에 대한 볼차노의 구분은 항상 내가 보기에 최고의 중요성을 띠었다. 본질적인 명제들은 서로 논리적인 관계들에 놓일 수 있다: 한 가지 명제는 또 다른 명제로부터 귀결될 수 있고 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있거나 양립될 수 없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은 심리학적 관계들에만 놓일 수 있다.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
은 우리를 혼란시킬 수 있거나 우리를 위로할 수 있고 우리에게 몇 가지 경험 들을 회상시킬 수 있거나 우리에게 특정 기대들을 제안할 수 있다;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은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어떤 계획된 조치를 실행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종류의 관계들은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의 사고 과정들은 또 다른 사람의 사고 과정들을 부정할 수 없고 또한 자기 자신의 사고 과정들을 어떤 다른 때에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고들의 내용들은 ㅡ 즉, 본질적인 명제들 ㅡ 물론 또 다른 사람의 사고들의 내용들을 부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내용들이나 본질적인 명제들은 심리학적 관계들에 놓일 수 없다: 내용들 혹은 본질적인 명제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고들과 사고 과정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고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세계들”에 속한다.
우리가 “물체들”의 ㅡ 물리적 대상들의 ㅡ 세계를 제1 세계로 부르고 주관적인 경험의 (사고 과정들과 같은) 세계를 제2 세계로 부른다면, 본질적인 세계를 제3 세계로 우리는 부를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세 가지 세계들을,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 3”으로 부르기를 선호한다; 프레게는 후자[後者]를 때때로 “제3 영역[third realm]”으로 불렀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세계들의 위상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ㅡ 그 세계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세계 3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 2로 그리고 혹시 세계 2가 세계 1로 “환원될” 것인지와 같은 문제들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ㅡ 우선 그 세계들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극도로 중요한 듯하다. (우리의 구분이 너무 선명하다면, 이것은 후속 비판에 의하여 드러날 것이다.)
현재, 분명해져야 하는 것은 세계 2와 세계 3의 구분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들에 직면할 것이고 그 논증을 다루어야 한다.
내가 잘 아는 그림을 내가 생각할 때, 그 그림을 환기하여 “나의 정신적 눈(eye) 앞에 그 그림을 놓는” 데 필요한 어떤 노력이 있을 것이다. 나는 (a) 실재적인 그림, (b) 상상하기의 과정으로 노력을 포함한다, 그리고 (c) 다소 성공적인 결과, 다시 말해서 상상된 그림을 구분할 수 있다. 분명히, 상상된 그림 (c)는 (b)와 꼭 마찬가지로 세계 3이라기보다는 세계 2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관하여 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과 아주 유사한 것들을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간 t에서의 그 그림에 대한 나의 인상은 시간 t에서의 나의 인상과 그리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명제와 양립될 수 없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 “그림에서 그려진 남자의 머리와 어깨들만 보인다.” 게다가 상상된 그림은, 상상하기 과정의 내용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고 내용 및 사고 과정과 유사하다.a 그러나 상상된 인상이 세계 2에 속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터인가?; 그 인상이 정신적이고 정말로 상상하기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이 논증은 내가 보기에 타당하고 아주 중요하다: 사고 과정 안에서, 사고 과정의 내용이 파악된 바와 같이 사고 과정의 내용으로 (또는 사고나 세계 3의 대상) 혹시 지칭될 몇몇 부분들이 구분될 것임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정신적 과정과 사고 내용을 (프레게가 그렇게 지칭한 바와 같이) 자체의 논리적 혹은 세계 3 의미에서 구분하는 것이 중요함을 내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b
나는 개인적으로 모호한 시각적 상상들만 경험한다; 내가 분명하고 상세하고 생생한 그림을 나의 정신 앞에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은 통상적으로 어려울 뿐이다. (음악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더 정확하게 나는 도식을 통하여, 특정 사고 “노선”을 추구하는 성향들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내가 막 몇 가지 개념들을 적어놓으려고 할 때 단어들을 통하여 매우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것을 이해했어”라는, 나는 어떤 생각을 분명하게 파악했어라는 믿음에서 나 자신이 흔히 틀렸음을 나는 발견한다: 그것을 적으려고 시도할 때 내가 그것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음을 나는 발견할 것이다. 이 “그것”, 내가 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ll this is analogous to the thought content and the process of
thinking.인데 박중서 번역은 ‘이 모든 것은 사고 내용과 사고 과정 간의 관계와 유사하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t is precisely for this reason that I find it important to
distinguish between the mental process and the thought content (as Frege called it) in its
logical or world 3 sense.인데 박중서 번역은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정신 작용과 논리적 또는 세게 3의 의미에서의 사고 내용 (프레게가 일컬은 바의) 간의 구분이 중요함을 발견한 것이다.’이다.
것을 적어놓거나 아무튼 그것을 언어로 매우 분명하게 언명해서 내가 그것을
다양한 측면들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기 이전에는 내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파악했다고 나는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이것인 이 “그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사고이고 내가 파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세계 3 대상이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객관적인 사고들을 비판할 수 있고 그 사고들에 관하여 논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사고들을 ㅡ 다시 말해서, 이론들 ㅡ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그 사고들을 다소 영구적인 (특히 언어적으로) 형태로 정식화해야 한다. 서술된 형
태는 구술 형태보다 선호될 수 있을 것이고 인쇄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순히 사고의 정식화와 ㅡ 사고는 더 정확하게 잘 정식화될 수 있거나 그렇게 잘 정식화될 수 없다 ㅡ 본질적인 사고의 논리적인 측면들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론에 있는 진리; 혹은 그 이론과 경쟁하는 이론들에 있는 박진성(迫眞性: truthlikeness)과 비교되는 그 이론에 있는 박진성; 혹은 특정 다른 이론들에 대한 그 이론의 양립가능성.a
내가 이 단계에 도달하자마자, 나의 세계 3을 명제들 외의 거주자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명제들이나 이론들에 추가하여 문제들과 논증들, 특히 비판적 논증들 또한 데려왔다. 이유인즉 이론들은, 이론들이 아마도 해결할 문제들을 목표로 항상 토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서들과 학술지들은 특히 이론을 전개하여 토론한다면 전형적인 세계 3 대상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저서의 물리적 형태는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세계 3 존재로부터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실종된” 모든 저서들, 그 저서들의 영향력 그리고 그 저서들에 대한 탐색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빈번하게 심지어 논증의 정식화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의미에서나 세계 3 의미에서, 내용들이다.
과학에 흥미를 갖는 모든 사람은 틀림없이 세계 3 대상들에 흥미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물리학자는 주로 세계 1 대상들에게 ㅡ 가령, 결정체들과 X-선들 ㅡ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곧장 그들은 틀림없이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들에 그리하여 세계3 대상들에 얼마나 많을 것이 의존하는지 깨닫는다. 유사하게 과학역사가나 과학에 관
심을 갖는 철학자는 틀림없이 주로 세계 3 대상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인
a 역주: ‘그리고 이론에 있는 진리 ~ 양립가능성.’의 원어 표현은 its truth; or its truthlikeness
in comparison with some of its competitors; or its compatibility with certain other theories.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정되는 바와 같이, 그는 세계 3 이론들과 세계 2 사고 과정들 사이의 관계에 또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후자(後者)는 주로 이론들에 대한, 다시 말해서, 세계 3에 속하는 대상들에 대한 자체의 관계에서 그의 관심을 끌 것이다.
이 세계 3 대상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무엇인가? 혹은 화려함이 덜한 언어를 사용하여, 문제들과 이론들과 논증들은 탁자들과 의자들처럼 “실재적”인가? 40여 년 전 잠재적으로 탁자들과 의자들의 실재성을 신뢰한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형상과 이데아의 ㅡ 개념들과 그 개념들의 의미들이나 본질들의 ㅡ
실재성을 신뢰한 플라톤의 의미에서도 내가 실재론자라고 하인리히 곰페르츠가 경고했을 때 나는 그 제안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개념들 도표의 왼편을 (위 7절 참조) 내가 말하는 세계 3의 구성원들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비판적 논증들이 있는 세계 3과 관련하여 나는 실재론자가 되었다.
볼차노는 자신의 본질적인 명제들이 지닌 존재론적 위상에 관하여 의심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프레게는 관념론자였거나 그것에 매우 가까웠던 듯하다. 볼차노처럼 나도 오랫동안 의심했고, 세계 3의 구성원들이 실재적이라는 결론에 내가 도달할 때까지 나는 세계 3에 관하여 어떤 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정말로, 물리적 탁자들과 의자들만큼 다소 실재적인.
저서들에 그리고 다른 서술된 것들에 관한 한 아무도 이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탁자들이나 의자들처럼,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히기 위해서일지라도,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이것은 충분히 쉬운 듯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론들은 어떠한가? 그 이론들이 탁자들이나 의자들만큼 완전히 “실재적” 아니라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우선 그 유물론적 출발점에 따라서 탁자들과 의자, 들(stones)과 오렌지와 같은 물리적 물체들만이 “실재적”으로 지칭될 수 있는 유물론적 출발점을 나는 수용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그 용어의 범위를 근본적으로 거의 확대하기 마련이다: 가스들과 전류는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들을 “실재적”으로 지칭해서는 안 되는가? 자기장(磁氣場: the field of a magnet)은 쇳가루에 의하여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어떤 종류의 실재성인 그런 익숙한 현상이 틀림없이 헤르츠의 (혹은 맥스웰의) 파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영상들을 우리는 “실재적”으로 지칭해야 하는가? 나는 우리가 그렇게 지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다양한 카메라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영상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 영상들은, 독립적인 증인들처럼,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영상들은, 전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송되는 고도로 복잡하고 “추상적인” 정보들을 텔레비전이 해독하는 과정의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암호화된 “추상적인” 정보들을 “실재적”으로 불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정보들은 해독될 수 있고 해독의 결과는 “실재적”이다.
이제 우리는 아마도 본질적 이론으로부터 ㅡ 가령 저서에 암호화되어 우리가 그 저서를 읽을 때 우리 자신에 의하여 해독되는 추상적인 정보 ㅡ 더 이상 전혀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제시된 모든 사례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탁자 및 의자처럼 (그리고 우리는 사진 필름을 추가할 것이다) 물리적 물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리고 물리적 물체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는 실재적으로 기꺼이 지칭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물체들의 세상은, 맥스웰 및 헤르츠의 이론들과 같은 이론들의 내용에 의하여 크게 변했다; 다시 말해서 세계 3 대상들에 의하여. 그리하여 이 대상들은 “실재적”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두 가지 반론들이 틀림없이 제기된다. (1) 우리의 물리적 세계는, 본질적인 이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저서들에 그리고 다른 곳에 그 이론들이 물리적으로 통합됨에 의하여 변했다; 그리고 저서들은 세계 1에 속한다. (2) 우리의 물리적 세계는, 본질적인 이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이론들을 이해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 이론들을 파악함에 의하여 변했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 상태들에 의하여, 세계 2 대상들에 의하여.
나는 두 가지 반론들 모두를 수용하지만 (1)에 대하여 변화는 저서들의 물리적 측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저서들이 어떤 정도로든 정보이자 정보적a 내용이자 본질적인 이론을 “지녔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발생했다고 나는 답변한다. (2)에 대응하여, 나는 (2)를 훨씬 더 중요한 반론으로 간주하는데 세계 1과 세계 3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세계들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세계 2를 통해서임을 나는 심지어 수용한다.a
내가 심신 문제로 선회할 밝혀질 것과 같이 이것은 중요한 요점이다.
그것은, 세계 1과 세계 2가 상호작용할 수 있고 세계 2와 세계 3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 1과 세계 3은, 세계 2에 의하여 수행되는 중개적 상호작용이 없으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세계 2만 세계 1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라도, 세계 3은 세계 2에 미치는 자체의 영향력 때문에 세계 1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상, 이론을 저서에 ㅡ 그리하여 물리적인 대상에 ㅡ “포함시키는 것”은 이것의 사례이다. 읽히기 위하여, 저서에게는 인간 정신의, 다시 말해서 세계 2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서에는 본질적인 이론이 또한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가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이 이론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론은 항상 있고 다른 사람이 그 이론을 파악하여 나를 고쳐줄지 모른다. 그것은 쉽게b 의견차이의 경우는 아닐 것이지만 실재적이고 틀림없는 실수의 ㅡ 이론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함 ㅡ 경우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이론 창시자에게도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심지어 아인슈타인에게도 한 번 이상 발생했다.)
여기서 이것들과 관련된 주제들에 관한 나의 논문 몇 편들에서, (부분적인) 세계 3의 자주성으로서 내가 기술한 한 측면을 나는 간략하게 언급했다. 이것에 의하여, 우리가 이론을 만들어낼지라도 의도되지 않은 그리고 예기치 않은 결과들이 있을 것임을 (그리고 훌륭한 이론에는 항상 있을 것이다) 나는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연수들을 혹은, 가령, 자연수들의 연속에서 끝없이 진행하는 방법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들(prime numbers)의 존재는 (그리고 최대소수는 없다는 유클리드의 정리의 타당성)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곳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발명한 것들 중 저 발명의 의도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a 소수들(prime numbers)이나 제곱수들(square numbers)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과 같은 것들은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추가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세계 3 자체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이 정도까지 그것은 “자주적”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자주성의 문제와 다소 관련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세계 3의 영원성이라는 문제이다. 모호하지 않게 언명된 명제가 지금 참이라면 그 명제는 영원히 참이고 항상 참이었다: 진리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허위도 그렇다). 모순성이나 양립가능성과 같은 논리적 관계들 또한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훨씬 더 명백하게 그렇다.
플라톤이 자기가 주장하는 형상과 이데아의 세계에 관하여 제안한 바와 같이, 세계 3 전체를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에 쉬울 터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는 이론을 창안하는 적이 없고 항상 이론을 발견한다고 전제할 필요만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몇 가지 작은 조각들을 발견하는 세상인, 생명체가 출현하기 이전에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이후에 존재하고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세계 3이 있을 터이다.
이것은 가능한 견해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견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견해는 세계 3의 존재론적 위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견해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유인즉 그 견해로 인하여 우리가 세계 3 대상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라도 그 견해는, 이 대상들을 발견함에서 우리가 그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지 혹은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따름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ㅡ 특히 우리가 그 대상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ㅡ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견해는 플라톤적이거나 네오-플라톤적인 직관주의와 많은 난제들을 야기한다. 이유인즉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견해는, 세계 3 대상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의 위상이 틀림없이 이 대상들에 의하여 공유된다는 오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견해를 ㅡ 놀라울 정도로 유익하다고 내가 발견한 견해 ㅡ 제안
a 역주: 앞의 두 문장의 원문은 And it is a necessary consequence: we cannot get around
it.인데 박중서 번역은 ‘즉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이다.
한다, 나는 세계 3을 본질적으로 인간 정신의 산물인 것으로서 간주한다. 세계 3 대상들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다. 이 대상들에 의도되지 않고 예기치 않은 결과들을 야기하는 자체의 본질적이고 자주적인 법칙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들 모두에게 그런 결과들이 있다는 규칙인 더 일반적인 규칙의 사례일 (매우 흥미로운 사례일지라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세계 3을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는 그 충격들이 우리의 물리적 환경이 미치는 충격들만큼 크거나 그보다 더 큰 산물로서 바라본다. 모든 인간의 활동들에는 일종의 정보교환(feedback)이 있다: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또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더 정확하게 나는, 문제들과 이론들과 비판적 논증들로 구성되는 세계 3을 인간 언어의 진화 결과들 중 한 가지 결과로서 그리고 이 진화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간주한다.
이것은, 진리의 그리고 논리적 관계들의 영원성과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세계 3의 실재성이 이해가능하게 된다. 세계 3은 다른 인간의 산물들만큼 실재적이고 암호체계만큼 ㅡ 언어 ㅡ 실재적이다; 대학이나 경찰과 같은 사회제도만큼 실재적이다 (혹은 아마도a 그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다).
그리고 세계 3에는 내력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들의 내력이다; 그 개념들의 발견 내력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그 개념들을 창안했는지의 내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떻게 그 개념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개념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다시 그 개념들에게 반응했는지.
이렇게 세계 3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세계 3을, 인간을 동물로 간주하는 진화론의 범위 안에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세계 3에 대한 선구자들로서 간주할 동물의 산물들이 (둥지들과 같은) 있다.
그리고 세계 3은 궁극적으로 또 다른 방향으로의 일반화를 시사한다.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비판적 논증들의 세계를 특별한 경우로서, 좁은 의미의 세계 3으로서 혹은 세계 3의 논리적이거나 지성적 영역으로서 우리는 간주할 것이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세계 3은, 도구와 제도와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 정신의 모든 산물들을 포함한다.
1960년에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열린 나의 학술회의에서 나는 세계 3에 대한 이 견해와 그 내력에 관하여 처음 강연했다. (최초의 출간: 1968년
a 역주: ‘아마도’의 원어는 perhaps인데 박중서 번역에 누락되었다.
(s).)
39. 심신 문제와 세계 3
내가 항상 데카르트적 이원론자였다고 (우리가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 적이 없을지라도)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원론자가 아닐지라도 나는 틀림없이 일원론보다는 다원론으로 더 기울었다. 정신적 경험의 혹은 정신적 상태의 혹은 의식 상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적어도 고압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혹은 정신적 상태가 통상적으로 신체 상태와, 특히 생리학적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됨을 부인하는 것. 그러나 정신적 상태는 생명체의 진화 산물이라는 것과 그 상태를 생물학보다는 물리학과 연결해도 소득이 없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듯하다.
내가 처음 심신 문제와 마주했을 때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문제는 가망이 없는 문제라고 느꼈다. 심리학은, 자아와 자아의 경험들에 관한 과학으로서, 프로이트에게 실례지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왓슨(Watson)의 행동주의는 이 사태에 대하여 매우 이해 가능한 반응이었고 그 행동주의에는 방법적 이점들이 ㅡ 자기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부인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이론들처럼 ㅡ 있었다. 철학적 논지로서 그 행동주의는, 반증 불가능이었을지라도, 분명히 틀렸다. 치통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을 정말로 겪는다는 것과 도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단어들로 우리가 정말로 겪는다는 것; 우리가 다소 흥미롭고 주의 깊게 저서를 읽을 수 있다는 것 ㅡ 이 모든 것은 쉽게 부인될지라도 내가 보기에 분명히 참이다; 그리고 분명히 증명될 수 없을지라도 극도로 중요하다. 우리가 신체화된(embodied) 자아들이나 정신들이나 영혼들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 또한 전적으로 명백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들과 (혹은 생리학적 상태들) 우리의 정신들 (혹은 정신적 상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심신 문제들을 정식화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알 수 있던 한, 그 문제를 해결에 근접시키려고 어떤 일을 수행할 가망이 없었다.
슐릭의 인식론(Erkenntniskehre)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인식론들 이래 나를 매혹시킨 최초의 심신 관계에 대한 토론을 나는 발견했다. 그 토론은 아름답게 명료했고 그 토론은 상당히 상세하게 전개되었다. 그 심신 관계는 헤르베르트 파이글에 의하여 탁월하게 토론되었고 추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이 매혹적임을 내가 발견했지만 그 이론에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아마도 비판을 통해서를 제외하고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룩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문제 전체가 어떤 “언어적 혼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견해들을 비판함에 의하여. (의심 없이 우리는, 세계에 관하여 말함에서 혼란에 빠짐을 통하여 때때로 스스로 문제들은 야기한다; 그러나 세계 자체가 왜 실제로 어려운 비밀들 몇 가지를, 아마도 심지어 해결 불가능한 그런 비밀들을 숨겨서는 안 되는가? 수수께끼들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수수께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어가 정말로 한 가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의식은a 언어 이전이라고 추측될지라도 내가 자아의 완벽한 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특수하게 인간적이고 언어에 의존한다고 추측될 것이라고. 그러나 이 개념은 내가 보기에, 앞 절에서 기술된 바와 같이 볼차노의 견해들 중 특정 견해들을 (내가 나중에 발견한 바와 같이, 프레게의 견해들 또한) 내가 “제3 세계”나 “세계 3”으로 지칭한 것으로 전개하기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계 3의 도움을 받는다면 심신 문제는 완벽하게 전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떠오른 것은 당시였을 따름이다. 이유인즉 세계 3은, 적어도 의식의 주관적인 상태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아에 대해서 객관적 이론의 ㅡ 생물학적 이론 ㅡ 기초들을 발전시키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혹시 심신 문제에 관하여 언급해야 하는 모든 새로운 것들은, 세계 3에 관한 나의 견해들과 관련된다.
심신 문제는 여전히, 의식 상태들과 신체 상태들 사이에서 가능한 다양한 관계들을 (일체성, 평행성[parallelism], 상호작용) 통하여 통상적으로 관찰되고 토론되는 듯하다. 나 자신이 상호작용론자이기 때문에, 문제의 한 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혹시 토론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 토론이 실행될 가치가 있는지 나는 늘 의심한다. 그 토론 대신에 그 문제에 대한 생물학적 그리고 심지어 진화론적 접근방식을 제안한다.
내가 37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진화론의 이론적 능력이나 설명 능력을 나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적 문제에 대한 진화론적 접근방식이 불가피하다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가망이 없는 문제 상황에서는 우리가 심지어 지푸라기라도 감사하는 심정으로 잡으려고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 고도로 발전한 신체 기관이라고 완전히 우활하게(迂闊하게: naively) 간주할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감각기관에 관하여 아마도 자문할 것과 같이 감각기관이 생명체의 가족에 무엇을 기여하는지 자문할 것을 나는 우선 제안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내가 묵살하라고 제안하는 전형적인 답변이 쉽게 이용될 수 있게 존재한다. 그 답변은, 우리의 의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사물들을 보고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목적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눈과 다른 감각기관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답변을 묵살한다. 의식이 보는 것이나 감지하는 것과 그렇게 널리 동일시되는 것은 지식에 대한 관찰주의적 접근방식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대신에 우리가 인간 정신을 무엇보다도 인간의 세계 3의 대상들을 산출하는 그리고 그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 기관으로서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간주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 정신을 본질적으로 인간 언어의 창조자로서 간주할 것을 내가 제안하는데 인간 언어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소질은 (앞에서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타고난다; 그리고 이론들의, 비판적 논증들의 그리고 오류들, 신화들, 이야기들, 재치들, 도구들 그리고 예술작품과 같은 많은 것들의 창조자로서.
이 혼합된 것에 질서를 도입하는 것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고 아마도 우리의 시간을 들일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무엇이 왔는지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언어였다고 그리고 언어는, 사람에게 그 이용이 타고난 혹은 더 정확하게 유전적으로 근거한 유일한 신체외적(身體外的: exosomatic) 도구와 관련된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 추측은 내가 보기에, 시험하기가 당연히 어려울지라도, 약간의 설명력을 지닌다a. 서술적 언어의 출현은 인간 상상력의, 인간 창의성의 그리하여 세계 3 창발에 관한 인간 능력의 근간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유인즉 도구로서의 서술적 언어의 첫 번째 (그리고 거의 인간만의) 기능은, 참인 서술인 참인 보고서들을 위하여 배타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전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다음에 거짓말들을 위하여, “이야기하기”를 위하여 언어가 사용될 수 있는 시점이 왔다.b 이것은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단계로, 언어를 정말로 서술적으로 그리고 정말로 인간답게 만든 단계였다. 이것은 설명적 종류의 이야기하기인 신화 만들기를 야기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보고서들과 서술들에 대한 비판적인 정밀분석을c 그리하여 과학을 야기했다고; 상상적인 허구와, 내가 제안하는 바d, 예술을 ㅡ 그림들의 형태로 된 이야기하기를 ㅡ 낳았다고.
이것이 어떠하든 내가 옳다면, 인간 정신의 생리학적 토대는 아마도 언어 중추에서 탐색될 것이다; 그리고 뇌의 좌우 뇌에 한 가지 언어 제어 중추만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중추는 제어 중추들의 계층구조에서 가장 높은 구조일 것이다. (의식의 위치라는 데카르트의 문제를, 그리고 그 위치가 틀림없이 송과선[松科腺: pineal gland]이라는 아마도 틀린 추측으로 심지어 데카르트를 이끌었던 논증의 한 부분을, 재생시키려고 나는 여기서 의식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 이론은 아마도 분리된 뇌를 이용하여 실험하여 시험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간 정신이자 인간의 세계 3이고 인간의 자아의 특징으로 보이는 고도로 조직된 저 상태들로부터 일반적인 “의식”의 상태들을 우리가 구분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동물들도 의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류 뇌전도검사계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전형적인 꿈과 같은 수면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이 추측은 시험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동물들에게는 자아가 없다고 추측한다.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으로 지칭될 바와 같이 그 의식에 관한 나의 핵심적인 제안은, 세계 3이 세계 2의 산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특수하게 인간적인 세계 2는 ㅡ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 ㅡ 이론 만들기의 정보교환(feedback) 산물이라는 것이다.
의식과 같은 것은 (의식의 하위 형태에서) 서술적 언어가 출현하여 조직되는 것보다 이전에 출현하여 조직되는 듯하다. 아무튼 개성들은 동물들 가운데서 출현하고, 다른 개성들에 대한 일종의 지식이나 이해가 특히 몇몇 고등 사회적 동물들에서 출현한다. (개[dogs]는 인간의 개성들에 대하여 심지어 직관적인 이해력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은 언어를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발전한 이후에만, 그리고 공간에서의 또 특히 시간에서의 우리의 신체 확대를 우리가 의식하게 된 이후에만: 잠 속에서 우리의 의식에 대한 규칙적인 방해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a 우리가 확신하여 ㅡ 자는 동안에 ㅡ 우리 신체의 그리하여 우리 자아의 지속성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이후에만.
그리하여 심신 문제는 적어도 두 가지 완전히 구분되는 문제들로 나뉜다: 생리학적 상태들과 의식의 특정 상태들 사이의 매우 밀접한 관계라는 문제와, 자아의 출현 및 신체에 대한 자아의 관계라는 매우 다른 문제. 내가 제안하는 바, 언어와 세계 3 대상들 그리고 그 대상들에 대한 자아의 의존을 고려함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자아의 출현이라는 문제이다. 자아의 의식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살아있는 물체들과 살아있지 않은 물체들의 구분을 그리하여 생명의 주요 특징들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을 포함한다; 또한 어떤 정도로든 의식이 구비된 신체들과 구비되지 않은 다른 것들의 구분을 포함한다. 자아의 의식은 미래에 대한 자아의 투사를 또한 포함한다: 아동이 마침내 어른으로 자라면서 다소 의식적으로 기대하는 것; 그리고 과거에 얼마 동안 존재했다는 의식. 그리하여 자아의 의식은, 탄생에 대한 그리고 혹시 심지어 죽음에 대한 이론의 소유를 전제하는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고도로 발전된 서술적 언어를 ㅡ 이 세계 3의 생산을 야기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3으로부터 정보교환(feedback)을 통하여 수정되기도
한 ㅡ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나 심신 문제는 내가 보기에, 의식의 상태들이라는 문제와 자아의 문제라는 이 두 가지 하위 문제들에 의하여 끝나지 않는다.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은, 성향적 형태로, 어른들한테 항상 현존할지라도, 이 성향들이 항상 활성화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흔히 강력하게 능동적인 정신 상태에 놓이고 동시에, 순간적으로 통지를 받으면 항상 우리 자신을 숙고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망각한다.
자의식이 아닌 강력한 정신적 활동의 이 상태는 특히 지성적이거나 예술적 작업에서 도달된다: 문제나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에서; 혹은 소설에 몰두하여 작업하면서 즐김에서 혹은 아마도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체스 게임을 함에서.305a
그런 상태들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ㅡ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었다는 영원한 징표a. 최고로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몰입하는 것은 세계 3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이거나 그 대상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305a (1975에 추가됨.) A. D. 드 그루트(De Groot)의 가장 흥미로운 저서, 체스에서의 사고와 선택
(Thought and Choice in Chess) (헤이그: Mouton 출판사, 1965년; 뉴욕: Basic Books, 1966년)
참조.
a 역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었다는 영원한 징표’의 원어 표현은 always indication that we
have forgotten ourselves인데 박중서 번역은 ‘항상 우리가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지적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이다.
오렌지색의 둥근 밴드를 감지하는 것보다a 이것이 훨씬 더 흥미롭고 특징
적인 정신 상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만이 그것을 이룩할지라도, 예를 들어 사냥하는 동물들에게서 혹은 위험에서 도망치려는 동물들에게서 우리가 유사한 몰두 상태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물의 정신과 인간의 정신 모두가 그들의 생물학적 목표들에 가장 잘 도움을 주는 것은 과제나 문제에 관한 높은 집중의 이 단계들에서라는 추측이 제기된다. 보다 한가한 의식의 순간들에는 정신 기관이 정말로 단지 놀고 있거나 쉬고 있거나 건강을 회복하고 있거나 혹은 한 마디로, 몰두하는 기간을 위하여 대비하거나 에너지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자기-관찰에서 가령 강력하게 생각하기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매우 흔히 발견하는
것은b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에 관한 자체의 고유한 몰두 능력들을 지닌, 자체의 언어적 능력을 지닌, 자체의 기대와 창안성과 상상력을 지닌 이와 같은 기관(器官: organ)을 정
신적 업적들이 요구한다는 것은, 이제 내가 보기에 분명하다; 그리고 잠정적
수용과 배척에 대한 자체의 능력들을 지닌. 이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는 신체적 기관이 있는 듯하지 않다; 의식처럼 다른 것이 필요했고, 정신을 위한 건축
재료의 한 부분으로서 틀림없이 사용되었던 듯이 보인다.c 틀림없이, 한 부분으로서만: 많은 정신적 활동들은 무의식적이다; 많은 것이 성향적이고 많은 것이 다만 생리적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의 생리적이고 “자동적인” 것 (가령 피아노 연주나 자동차 운전에서) 중 많은 것은, 발견하는 정신의 ㅡ 어려운 문제에 당면한 정신 ㅡ 매우 특징적인 저 의식적인 몰두로써 우리에 의하여 이전에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 인하여, 고등 생명체들의 식구들 안에서 정신의 필수불가결함이 선호하여 언급되고, 그리고 또한 아마도 새로운 과제들을 위하여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하여 해결된 문제들과 “학습된” 상황들을 다시 신체 속으로 가라앉게 할 필요가 옹호된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분명히 상호작용론적이다: 신체의 다양한 기관들 사이 그리고 이 기관들과 정신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
a 역주: ‘오렌지색의 둥근 밴드를 감지하는 것’의 원어 표현은 the perception of a round
patch of orange colour인데 색맹 검사표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적 탐구를 의미하는
듯하다. 박중서 번역은 ‘오렌지색의 둥근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b 역주: ‘매우 흔히 발견하는 것’의 원어 표현은 only too often catch (ourselves idling)인데
박중서 번역은 ‘너무 많이 빈둥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seems that something different, like consciousness, was
needed, and had to be used as a part of the building material for the mind.인데 박중서
번역은 ‘즉 의식과 마찬가지로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며, 반드시 정신을 북돋우는 자재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어야 한다.’이다.
서 세계 3과의 상호작용에는 정신이 관련되는 단계들에서 정신이 항상 필요하다고 ㅡ 말하고 읽고 쓰는 학습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암호화와 암호해독의 더 기계적인 작업의 큰 부분이, 감각기관들의 경우에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생리체계에 의하여 인수될지라도 ㅡ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개괄된 객관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접근방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심신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여 볼 수 있다. 그 접근방식은 동물 심리학 분야에서 어떤 새로운 연구, 특히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의 연구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진화론적 인식론에 관한 D. T. 캠벨(Campbell)의 개념들 중 몇 가지 개념들과 그리고 슈뢰딩거의 개념들 중 몇 가지 개념들과 밀접한 관련성이 또한 있다.
40. 사실들의 세계에서 가치들의 위치
이 절의 제목은, 탁월한 심리학자이자 훌륭한 인물인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의 저서 제목과 가깝다. 그의 저서 첫 장에 수록된 그의 문제 언명은 칭찬을 받을 정도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감동적이기도 함을 나는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저서가 서술된 시대를 기억하는 저 사람들만 감동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의 세계에서 가치들의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쾰러 자신의 해결책에 실망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 가치들은 이 사실들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을 터인가? 그의 주장에 의하여, 형태심리학이 이 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쾰러는, 가치들에 관하여 서술하고 싶어 하는 과학자들이 없고 과학적 훈련을 받은 철학자들이 왜 없는지 매우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유는 단지, 가치들에 관한 이야기의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무의미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무의미한 이야기를, 그게 아니라면, 무의미한 이야기와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만을 만들어낸다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려한다. 우리가 대담해져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려는 쾰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이 우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듯하다. 적어도 거의 무한한 문헌이 있는 윤리 이론의 분야에서 (나는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of Socrates) (윤리이론이 부차적 역할을 수행하는), 칸트의 저서 몇 편 특히 도덕 형이상학의 토대(Foundations of the Metaphysic of Morals) (크게 성공적이지는 않은) 그리고 칸트의 엄격주의(rigorism)를 재치 있게 비판하는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의 애가조의 2행연구시들(二行聯句詩들: couplets)을 제외하고 훌륭하고 두드러진 것을 읽을 것을 나는 기억할 수 없다. 혹시 나는 이 목록에,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Two Fundamental Problems of Ethics)을 추가할 것이다. 플라톤의 변명 그리고 칸트에 대한 쉴러의 매혹적인 반론(reductio)을 제외하고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자체의 목적 성취와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나는, 가치들이 문제들과 함께 출현한다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겠다; 가치들은 문제들 없이 존재할 수 없을 터이라는 것 이상을; 그리고 가치들이나 문제들이 흔히 사실들에 속하거나 사실들과 관련될지라도 가치들이나 문제들은 사실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달리 사실들로부터 획득될 수도 없다는 것 이상을. 문제들에 관한 한, 우리가 어떤 사람을 (혹은 어떤 동물을) 쳐다보면서 그가 (혹은 그 동물이) 저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혹은 그 동물은)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우리는 추측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문제는, 가령 어떤 다른 문제에 대한 혹은 시도된 몇 가지 해결책들에 대한 자체의 관계들에서 비판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에 그 사람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역사관련 추측만 세계 3에 속한다; 두 번째의 경우에 문제 자체는 세계 3의 거주자들 중 한 가지로서 간주될 것이다. 상황은 가치들에 관해서도 비슷하다. 사물이나 개념이나 이론이나 접근방식은a, 저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자체의 가치가 의식적으로 인정되든 아니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면서 혹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객관적으로 귀중하다고 추측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추측이 언명되어 토론에 부쳐진다면, 그 추측은 세계 3에 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가 (특정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가치들에 대한 그리고 다른 문제들에 대한 자체의 관계들에서 창조되거나 발견되어 토론될 것이다; 이 전혀 다른 경우에 그 가치 역시 세계 3의 거주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에 생명체가 없는 물리적 세계가 있었다고 우리가 올바르게 전제한다면, 이 세계는 문제들이 없고 그리하여 가치들이 없는 세계였을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치들은 의식과 동시에만 세계에 들어온다고 흔히 제안되었다. 이것은 나의 견해가 아니다. 가치들은 생명체와 동시에 세계에 들어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의식 없는 생명체가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심지어 동물들과 사람들에게도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유인즉 꿈을 꾸지 않은 수면과 같은 것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식 없이도 또한 객관적인 가치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종류의 가치들이 있다: 생명체에 의하여, 무의식적인 문제들에 의하여 창조되는 가치들 그리고 이전 해결책들을 토대로 더 잘 혹은
덜 잘 이해될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인간 정신에 의하여 창조되는 가치들.
이것이, 사실들의 세계 안에서 가치들과 관련하여 내가 보는 위치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문제들과 전통들의 세계 3에서의 위치이고 이것이 사실들의 세계의 ㅡ 세계 1 사실들 세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생성되는 사실들의 세계의 ㅡ 한 부분이다. 가치들의 세계는 가치가 없는 사실들의 세계를 ㅡ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a 사실들의 세계 ㅡ 초월한다.
내가 보는 바의 세계 3의 가장 내부의 핵심은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비판의 세계이다. 가치들이 이 핵심에 속하지 않을지라도, 이 핵심은 가치들에 의하여 지배된다: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그리고 그 진리의 성장에 대한 가치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다른 가치들을 우리의 세계 3에 수용해야할지라도 이 인간의 지성적 세계 3 도처에 이 가치가 최고의 가치로 남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유인즉 제시되는 모든 가치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치라는 것은 참인가? 그리고 이것이 가치들의 계층구조에서 자체의 합당한 위상을 지닌다는 것은 참인가: 친절이 정의보다 더 높은 가치라는 것 혹은 심지어 정의와 비견될 수 있다는 것은 참인가? (그리하여 나는 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ㅡ 지식의 나무에서 먹은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ㅡ 완전히 반대한다.)
우리는 인간의 세계 3이라는 개념을 일반화하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세계 3은, 우리의 지성의 산물들로부터 출현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과 함께 그 산물들뿐만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a 우리 정신의 산물들 또한 포함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들. 심지어 우리의 지성의 산물들인 이론들도 신화들에 대한 비판의 결과인데 신화들이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들이다: 이론들은 신화들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또한 사실과 허구 혹은 진리와 허위의 구분을 발견하지 못하면 비판도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이것이. 신화들과 허구들이 세계 3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가 개념들 몇 가지를 쏟아 넣는 그리고 비판의 (단순히 지성적 비판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결과를 포함하는, 예술 그리고 사실상 모든 인간의 산물들을 우리가 포함하게 된다. 우리가 선배들의 개념들을 흡수하고 비판하여 우리 자신을 형성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과 제자들, 우리의 전통들과 제도를, 우리의 생활방식들, 우리의 목적들과 우리의 목표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 정신의 산물들일지라도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들과 관련이 있을지라도b 이것들에는 ㅡ 우리의 결과물 ㅡ 객관적인 측면도 또한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은 동시대 철학의 중대한 오류 중의 하나이다. 이론이 또 다른 이론과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없을 것이라는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삶의 한 가지 방식은 삶의 또 다른 방식과 양립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양립불가능성들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 양립불가능성들은 객관적으로 그곳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들과 우리의 목표들은, 우리의 이론들처럼, 경쟁할 것이고 비판적으로 비교되어 토론될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접근방식 특히 주관적인 지식이론은, 마치 세계 3 대상들이 인식 주체의 단순한 발화들(發話들: utterances)이나 표현들인 양, 그 대상들을 ㅡ 심지어 문제들과 이론들과 비판적 논증들과 같이 더 좁은 의미에서의 대상들도 ㅡ 다룬다. 이 접근방식은 예술에 관한 표현주의적 이론과 아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이 접근방식은 사람의 작품을 유일하게 혹은 주로 자신의 내부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그 접근방식은 자기-표현을 목표로서 간주한다.
인간의 작품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 견해를 매우 다른 견해로 대체하려고 나는 시도하고 있다. 세계 3이 우리로부터 시작됨을 인정하면서 나는, 그 세계의 상당한 자주성과 우리에게 미치는 그 세계의 측정 불가능한 충격들
a 역주: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원어 표현은 in a much wider sense인데 박중서 번역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이다.
b 역주: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들과 관련이 있을지라도’의 원어 표현은 they bear upon our subjective experiences인데 박중서 번역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이다.
을 나는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들, 우리의 정신들은 그 세계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은 세계 3 안에 거주한다.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사고와
활동이라는 관행인 우리의 합리성은 세계 3과의 상호작용 덕분이다. 우리의 정신적 성장은 그 세계의 덕택이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에 대한, 우리의 작품과 그 작품이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그 세계 덕택이다.
표현주의적 견해는, 우리의 재능과 우리의 재주들과 아마도 우리의 양육과 그리하여 “우리의 전체 인격”이 우리가 수행하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재능과 흥미로운 인격들이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결과는 좋거나 나쁘다.
이것에 반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과제이고 우리의 작품이며 우리의 문
제들이고 우리의 세계 3 사이의 주고-받기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에게 미치는 이 세계의 영향에; 정보교환(feedback)에 의존하는데 정보교환은 우리가 실행한 것을 비판함에 의하여 확충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재능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그 행위의 객관적인 결과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우리가 수행한 작업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ㅡ 다시 말해서 그 작품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ㅡ 그리고 그 작업을 더 잘 하려는 시도를 통해서이다.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관계처럼, 우리의 이론들과 궁극적으로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작업의 관계도 같다a: 우리의 산물들은 그 산물들의 제조자들로부터 주로 독립적이 된다. 우리의 자녀들과 이론들에게 우리가 전했던 것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더 많은 지식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무지라는 늪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계 3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세계 3과의 상호작용에서만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 자신이 된다는 나의 추측이 옳다면 우리 모두가 조금이라도 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특히 개념들과 싸우면서 자신이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s with our children, so with our theories, and ultimately with
all the work we do인데 박중서 번역은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이론들과 함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한 모든 작품들과 함께’이다.
후기
이 저서의 발행인에 의하여 짧은 후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나는 받았고, 내가 원래 1969년에 저서를 썼을 때 그리고 내가 최고로 행복한 철학자라고 서술했을 때 (126쪽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여전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지의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질문은 나의 낙관론인 우리가 훌륭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나의 믿음과 관련된다. 나의 이 믿음은 더 강력해졌을 뿐이다. 우리 서구 사회에서 많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서구 사회가 역사상 최고의 사회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잘못된 것은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적 세상이 일종의 지옥이라는 지배적인 종교적 신념을 나는 의미한다. 이 종교는 지성인들에 의하여, 특히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는 그리고 뉴스 매체에 종사하는 지성인들에 의하여 퍼진다. 파멸과 암울이 거의 경쟁하는 상태다: 사람들이 우리의 서구 사회를 급진적으로 비난할수록, 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기회가 (그리고 아마도 그 기회 속에서 지도적 역할을 실행하는) 더 커지는 듯하다.
우리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파멸에 처했다는 이 정치선전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는 그리고 과학의 예언 능력 덕분에 마르크스주의적 신조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신념인데 많은 지성인들에 의하여 공유된다. 공산주의 승리의 불가피성으로 인하여, 군사력에 의하여 서양은 중단될 수 없는 공산주의 전파에 저항하려고 ㅡ 물론 헛되이! ㅡ 하기보다는 항복하기만 해야 한다고 암시된다. 그래서 핵전쟁에 홀로 책임을 질 터인 것은 서양이다. 이런 방식으로 서양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적 천국의 도래를 막으려는 무의미한 시도에서 세계를 위협하는 지독한 괴물로 보인다.
지성인들이 진보적이라는 것을 옳다; 그러나 진보는 이룩하기가 쉽지 않고 단순한 진보론은 쉽게 잘못된 결정들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그 진보론은 위험하다. 진보적 프로그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로 선회함으로써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반증됨을 발견함으로써,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지성인들은 훨씬 더 급진적이 되었다. 이유인즉 마르크스주의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본주의” (다시 말해서. 비-마르크스주의) 국가들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항을 비난한다면, 자신들이 자신들의 마르크스주의적 신조들 유지할 수 있음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소련이 자체의 많은 자원들을 군비에 소비하도록 강요한 것은 이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 및 유토피아적 급진론의 꿈과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서양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폭력 지지와 서양에서 현재 산업주의와 관련되는 자유는 전체주의의 숨겨진 형태이고 그리하여 공개된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훨씬 더 악랄하다는 주장에 대한 지지가 발생했다. 이것이, 내가 1919년에 처음 마주친 서양 공산주의자들에게 특징적인 현대적 형태의 정치적 교서이다: “사태가 나빠질수록 상황이 더 나아진다”는 (공산주의의 기회를 위하여) 정책.
내가 보기에 러시아인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단 한 가지만 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국민에게, 국민이 최상의 사회에서 산다고 말한다.
우리 서구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우리 삶을 다른 사회에서의 삶과 진지하게 비교할 준비가 된 사람은, 유럽과 북미에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최상이고 최고로 공정한 사회를 우리가 경험한다는 데 어쩔 수 없이 동의할 것이다. 식량부족이나 주택부족으로 큰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 위한 기회들이 무한히 더 많기도 하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다채로운 방식들로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능성이 풍부하게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성적인 비판을 경청한 준비가 되어있고 우리 사회의 향상을 위하여 합리적인 제안들이 제시된다면 우리가 틀림없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의 사회는 개혁에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를 개혁하고자 열성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악한 세상에 산다는 허구를 위한 정치선전이 이어졌다.
당신들의 눈을 뜨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가 얼마나 행운인지 보라!
1986년 5월
마르크스주의 대한 후기(後記), 1992년
첫 번째 후기가 이제 6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나의 저서 출판인이 새로운 판본을 위하여 두 번째 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너무 오래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은 모두 사망했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 몇몇도 사망했으며 심지어 나의 최고 제자들 몇몇도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한 이유가 없다. 나는 살아있고 다만 그것뿐일지라도 나의 연구를 여전히 계속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나의 연구는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 관하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들이 지난 몇 년 동안에 일어났다. 소련이 붕괴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ㅡ 그리고 지금까지 주요한 재앙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럽 문명을 거의 파괴한 1차 세계대전의 이전 상황들과 함께, 나의 생애에서 가장 희망찬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소련 공산주의는 끝났고, 그와 함께 인류에 대한 가장 큰 핵 위협이 끝났다. 그러므로 즐겁게 지내자. 그리고 위협이 어떤 새로운 형태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하자: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그리고 군축을 하고 좌와 우라는 극한대립을 ㅡ 핵 위협의 결과였던 마르크스주의 유산의 일부 ㅡ 폐기하자.
이제 평화롭게 살려고 그리고 우리의 책무를 즐기려고 노력하자.
켄리(Kenley),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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