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부
역사에 관하여
7
저서와 사상
최초 유럽 출간
저서들에 관하여 강의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아서 나는 기쁘다. 이것은, 저서들과 그리하여 장서들이 우리의 유럽 문명에서 그리고 아마도 인류 문명 전체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중요한 물리적 물체들이기 때문뿐만 아니라 나의 생애에서 저서들이 발휘한 ㅡ 그리고 여전히 발휘하는 ㅡ 지배적인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다섯 살이었을 때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öf)의 닐스의 신나는 모험(The Wonderful Adventures of Nils: Wunderbare Reise des klein Nils Holgersson mit den Wildgänsen)의 1권이 읽혀서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작품은 세 권이 녹색 책들로 막 출간되었다. 어떤 다른 저서도, 나 자신의 인격에 뿐만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 친구인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tz)의 인격에도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가 셀마 라게를뢰프 및 그의 저서들과 사랑에 빠진 반면, 콘라트는 기러기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처럼 나도 학교 교사가 되었다. 콘라트와 나 두 사람 모두는 우리의 사랑에 충실했다.
저 초기시절 이래 저서들은 나의 생애에서 심지어 음악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른 인간의 업적, 심지어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들이나 미술작품들도 모든 인간의 능력들을 초월하고 동시에 고전음악의 위대한 작품들처럼 그렇게 감동적이고 그렇게 기적적으로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서들은 문화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982년 11월 2일 비엔나의 고궁에서 (Hofburg) 당시 오스트리아 연방공화국 대통령이던 루돌프 키르크슐레거(Rudolf Kirchschläger)가 주최한 도서 전시회의 개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수행된 강좌. 멜리타 뮤(Melitta Mew)가 번역. (앞 문장은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역주)
나는 여기서, 우리가 요한 구텐베르크에게 (혹은 아마도 라우렌스 얀스존 코스터[Lauren Janszoon Coster]?a) 빚진 위대한 유럽의 혁명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의 인쇄 서적 발명은 인문주의적 운동의 그리고 종교개혁의, 과학 발흥의 그리고 종국적으로 민주주의의 주력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대신 나는, 더 국지화되었을지라도, 구텐베르크보다 2000년 앞서 그리스에서 시작된 매우 유사하고 내가 추측하기에 특수하게 우리 유럽 문명의 기원이었던 과정에 관하여 이야기하겠다.
그것은 그리스의 기적, 혹은 더 구체적으로 아테네의 기적으로 옳게 지칭되는 시대였다: 기원전 6세기 및 5세기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한 시기였다; 자유를 옹호함에 의하여 그리스 세계가 자유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된 시대; 페리클레스를 낳고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한 시대.
이와 같은 기적은 결코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것에 관하여 생각했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해서 나는, 설명의 한 부분인 틀림없이 매우 작은 부분이 ‘문화 충돌’로 명명된 것인 그리스와 동방 문화들의 충돌에 놓여있다고 제안한다. 아무튼 호머의 서사시들과 (그 주제는 문화 충돌이었다) 위대한 개념들 거의 모두는, 문화 충돌이 가장 강력하게 느껴졌던 소아시아 해안에 있던 동부 그리스 식민지들에서 출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도망치던 정치적 및 다른 피난민들에 의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양으로 이전되었다. 피타고라스,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아낙사고라스가 그런 피난민들이었다.
그러나 얼마 동안 그리스의 기적과 특히 아테네의 기적은 아마도 서술된 서적의, 서적 출간의 그리고 서적 시장의 출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ㅡ 틀림없이 매우 부분적으로만 ㅡ 설명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지녔다.
다양한 형태들로 서술하는 것은 매우 오랫동안 존속했고 이곳저곳 특히 동방에서, 밀랍과 진흙 및 유사한 재료들 위에 서술된 기록들이 매우 편리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발견될 수 있었다. 물론 종교적인 기록들도 있었다. 정말로 오랫동안 글쓰기가, 주로 공식 서류들을 위하여 종교적 서류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마도 필로스(Pylos)와 크노소스(Knossos)에서 상품과 다른 재산들의 목록들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상인들에 의하여 기록하기를 위하여 (서한들과 별도로) 이용되었다. 글쓰기는 또한 위대한 왕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데 이용되었다.
a 역주: Lauren은 Laurens의 오기인 듯하다.
내가 여기서 처음 전하고 있는 가설에 따르면, 특수하게 유럽적인 문화는 호의 작품들을 책의 형태로 출판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호머의 서사시들은 약 300년 동안 존속했다. 그러나 기원전 550년경 그 서
사시들은 수집되어 처음으로 필사되었고 일반인에게 판매용으로 제공되었다. 그 서사시들은 전문적인 암송가들이자 호머의 후손들이고 호머의 서사시 낭송자들에게만 전체로 잘 알려졌다. 글을 아는 노예들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수입된 파피루스 위에 손으로 많이 필사된 복사본들로 재생되어 그 서사시들은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서적 출판이었다. 그것은 아테네에서 발생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참주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의 조치에 의해서였다.
피시스트라투스의 주직업은 아테네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ㅡ 극도로 골치 아프고 힘든 과제. 취미로서 그는 서적 출판을 채택했던 듯이 보이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 영국 정부간행물 부서에 비견될 수 있는 국영 기업의 창시자이자 책임자가 되었다. 그 기업은 창시자보다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 기업이 남긴 문화적 결과들은 지속되었고 무한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테네에서 최초로 유럽의 서적이 도래함과 동시에 유럽의 최초 서적 시장이 생겨났다. 모든 사람이 호머를 읽었는데 그의 작품들은 유럽의 최초 입문서이자 최초의 경전이 되었다. 헤시오드, 핀다르, 아이스킬로스(Aeschylus) 그리고 다른 시인들이 뒤따랐다. 아테네인들은 읽기와 (오랫동안, 모든 읽기는 낭독을 의미했다) 쓰기를 배웠는데 특히 연설들과 서한들을 준비해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되었다. 저서들이 저술되었고 열성적인 아테네인들은 그 저서들을 사려고 몰려들었다. 이미 기원전 466년경 분명히 커다란 판본으로 최초의 과학적 출판이 이어졌다: 아낙사고라스의 방대한 작품 자연에 관하여(On Nature). (리시움[Lyceum]에 복사본이나 혹시 요약본이 있었고 아폴로도로스[Apollorodus]가 나중에 한 아테네의 도서관에서 복사본을 ㅡ 아마도 동일한 복사본 ㅡ 발견했던 듯이 보일지라도, 아낙시맨더의 작품은 분명히 출판된 적이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작품을 출간한 적이 없는데, 그의 작품은 아르테미스의 사원에 저장되어 있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스미르나(Smyrna) 부근의 클라조메네(Clazomenae) 출신의 정치적 피난민이었고 아테네서 자신의 작품을 썼다. 그 작품이 처음 출판되고 67년 후에 복사본들이 아테네에서 값싸게 팔려나갔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 작품은 1천 년 동안 살아남았다. 그 작품은 출판을 의도로 쓰인 최초의 저서였다고 나는 추측한다.
아낙사고라스의 자연에 관하여 이후 약 37년이 지나서 헤로도토스의 위대한 역사적 작품이, 저자 자신에 의하여 그 작품의 일부가 공개적으로 암송되면서a 아테네에서 출판되었다. 이것은, 2년 전에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헬라스의 학교(School of Hellas)’로서 언급했을 때 그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나의 가설은, 아테네에서 서책들이 판매될 수 있도록 함에 의하여 피시스트라투스는 그 문화적 혁명의 중요성에서 2천 년 지나서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시작된 문화적 혁명에 비견될 수 있는 문화적 혁명을 피시스트라투스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나의 가설은 검증될 수 없다. 인쇄된 저서는 서유럽 전체를 위하여 새로운 가치들과 기준들을 세웠다. 역사적인 유사성들은 결코 너무 진지하게 고려되어서는 안 될지라도, 그 유사성들은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가깝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저서가 출간된 이후에 아낙사고라스는, 갈릴레오가 2천 년 후에 당했던 것처럼, 불경죄로 기소를 당한다. 두 사람 모두는 목숨이 위험에 처했다. 몇몇 특수한 권력자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처형당하지는 않았다: 페리클레스와 교황 덕분에. 페리클레스의 (자신의 제자였던) 개입 덕분에 아낙사고라스는 처형당하지 않았지만 무거운 벌금을 내고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위대한 아테네인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도 또한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했는데 자신의 이전 스승인 아낙사고라스를 람프사코스(Lampsakos)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아낙사고라스는 몇 년 후 사망했다. 갈릴레오의 경우에, 교황과의 그의 개인적인 관계로 인하여 그는 처형에서 구조되었다; 그도 역시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귀양지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까지 아무도 아낙사고라스의 자연에 관하여와 같은 위험한 저서를 불태우거나 금지하는 개념을 떠올리지 못했던 듯이 보인다. 저서들은 여전히 아주 참신해서 법률적 금지의 대상들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저서의 저자에 대한 선풍적인 재판b 덕분에 아낙사고라스의 저서는 지역에서 인기도서가 되었다; 그리고 너무 추상적이지 않은 그 저서의 부분들은 도시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99년경 서적에 관한 관심은 쇠퇴했고 서적은 시장에서 헐값에 구매될 수 있었다 (갈릴레오의 저서는 금서목록에 등재되어 있는데 곧 희소가치를 얻어서 가격이 치솟은 반면).
플라톤은 틀림없이 그 저서와 그 저서가 지닌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그리고 특히, 호머의 영향력과 중요성)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시인들은 ㅡ 특히 호머인데 호머를 그는 흠모했다 ㅡ 시인들이 지닌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도시에서 추방되어
a 역주; ‘그 작품의 일부가 공개적으로 암송되면서’의 원어 표현은 by a public recitation of a part of it인데 박영태 번역은 ‘(저자는) 아낙사고라스 책 내용의 일부분을 공개적으로 인용했다’이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trial인데 박영태 번역은 ‘시도’이다.
야 한다고 제안하도록 자극을 받았다.
아낙사고라스의 저서의 운명에 관하여 내가 지닌 정보의 한 부분은, 플라톤의 저서이자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작품인 소크라테스의 변명(The Apology of Socrates)에서 유래한다. 그 저서에서 우리는, 문맹자들만 아낙사고라스의 저서의 내용을 알지 못했고 지식을 열성적으로 탐구하는 젊은이들은 ‘서적 시장에서 약 1드라크마에 어느 때고 복사본들을 살 수 있다’는 글을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이 지적하는 장소에 ㅡ ‘오케스트라 근처 (near the orchestra: ek tēs orchēstras) ㅡ 전문화된 책방들이 발견될 수 있었는지 나는 의심한다a. 더 개연적으로 다른 상품들을 (간식들이나 그와 같은 것들) 판매하는 외에 필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의 형태로 된 서책들을 또한 판매하던 상인들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역사가들은, 1드라크마가 문고본 한 권의 가격인 스털링 은화의 10펜스에 약간 못 미치는 것으로 ㅡ 1984년 가치로는 아마도 1이나 2파운드로 말하자 ㅡ 추산했다.
아낙사고라스의 작품은 적어도 두 가지, 아마도 세 가지 필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로 (‘책들’) 구성되었다. 플라톤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1드라크마는 이런 규모의 책에, 더구나 도시의 화제였던 책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낮은 가격이었다.
아마도 그 낮은 가격은, 지역의 역사에 의하여 설명될 것이다. 스파르타와 27년 동안 전쟁을 벌인 이후에 아테네는, 8개월 만에 아테네 전체 시민의 12분의 1을 살해하고 그들을 재산을 몰수한 30명의 참주들로서 알려진 꼭두각시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많은 시민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와서 피레우스(Piraeus) 전투에서 30명의 참주들을 격퇴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 플라톤의 변명은 이 사건 후 곧장 발생한 장면을 기술한다. 당시 나쁜 세월에서 가난에 처한 몇몇 가족들이 어떨 수 없이 자신들의 책들을 팔아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책들이 더 많이 저술되어 시장으로 반입되었다. 8권으로 21년 동안의 전쟁을 기록하는 투키디데스의 방대한b 작품, 이소크라테스(Isocrates)의 작품 그리고 플라톤의 거대한 작품 모두는 이것에 대한 증거이다.
아낙사고라스의 저서는 지속적으로 읽혔는데 이유인즉 그 저서가 출간되고 거의 1천 년이 지닌 기원후 529년 아테네에서 적어도 복사본 한 권이 존재했고 여전히 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에 아테네에 있던 이단적인 철학 학교
a 역주: ‘의심한다’의 원어는 doubt인데 박영태 번역은 ‘생각한다’이다.
b 역주: ‘방대한’의 원어는 great인데 박영태 번역은 ‘위대한’이다. 저자 포퍼는 투키디데스의 저서를 훌륭한 역사서로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파르타 편에서 역사를 기술했다고 그 저서를 폄하한다.
들은 기독교 황제인 유스티아누스의 칙령에 의하여 폐쇄되었고 아낙사고라스의 방대한 저서는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학자들이 그 저서의 내용을 재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단편적인 글들이 전체 저서로 조합되기에는 불충분했을지라도, 다른 책들에서 인용되거나 토론된 구절들이 재구축될 수 있었다. 이 저서의 내용들에 대하여 그리고 전체적으로 아낙사고라스의 사고에 대하여 탁월한 전문가이자 복원자로 내가 간주하는 펠릭스 M. 클레브(Felix M. Cleve) 교수가, 기원전 492년에 아낙사고라스가 서방으로 ㅡ 아테네로 ㅡ 도피해야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도, 비엔나에서 서방으로 ㅡ 뉴욕으로 ㅡ 도망쳐야 했던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저서가 그 저서의 저자보다 1천 년을 더 오래 존속했음을 안다. 아낙사고라스의 경우에, 그의 저서에 표현된 사고들인 그 저서의 지성적 내용은 1500년을 더 존속했다. 거기에 한 저서의 막대한 문화적 중요성의 한 부분이 놓인다. 우리 시대에 재구축된 사고 내용(thought content)은, 아낙사고라스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속된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과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어떤 저서에서 발견되는 객관적인 사고 내용이, 그 저서를 귀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내용은, 흔히 믿어지는 바와 같이, 저자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것인 주관적인 사고의 표현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기술되어, 객관적인 내용은 힘든 정신적 노력의 결과이자 정신적 활동의 결과로 반복적으로 방금a 서술된 것을 거부하거나 개선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활동의 결과로 인간 정신의 객관적인 산물이다. 이것이 발생할 때마다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 정신적 활동 그리고 객관적인 사고 내용 사이에는 일종의 정보교환(feedback)이 있다. 저자는 서술된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로부터, 자신의 개념들을 언명하려는 자신의 시도들로부터 그리고 특히 그의 실수들로부터 많을 것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저서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는 저자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그 사고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해되려고 우리가 사고들을 출간을 목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할 때 사고들은 비판되어 개선될 수 있다.
구술되는 문장이나 서술되는 문장이 주관적인 사고의 표현이라는 피상적이고 기만적인 이론은 파멸적인 결과들을 낳았다: 그 이론은 표현주의를 불러왔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개성이나 감정들의 표현이라는 것
a 역주: ‘방금’의 원어는 just인데 문맥상 불필요한 단어인 듯하다.
이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된다. 많은 작곡가들과 미술가들은 이 이론을 신뢰한다; 그리고 이 신뢰가 예술을 타락시키고 거의 파괴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양치질이나 하품을 포함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개성의 그리고 우리의 감정들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 이론은 사소하고 무의지해진다.
실제로 훌륭한 예술가는, 자신의 정신을 열어놓고 그나 다른 예술가들이 피할 수 없는 오류들과 실패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작품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력들로부터도 배우려는 예리한a 학습자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기-비판적이어서 자신들의 작품을 객관적인 것으로서 간주했다.
하이든이 자신의 작품인 천지창조(Creation)가 옛 비엔나 대학의 강당에서 초연되었을 때 듣고 논물을 터트리면 ‘내가 이것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충분히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분은 내가 여기서 무궁무진한 주제를 간략하게 언급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 주제는 피시스트라투스 훨씬 이전에 호머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던 그리스 예술의 ㅡ 그리기, 회화, 조각 ㅡ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호머의 작품이 특히 아테네에서 출간된 이후에 예술은 먼저 표상적이고 예시적인 형태로 그리고 나중에는 일종의 이상화된 자연주의 쪽으로 두드러진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사고들인 사고 내용의 엄청난 중요성을 예시한다. 그 사고들은 내가 세계 3으로 지칭한 것을 형성한다. 세계 1을 나는 물질적인 것들의 세계로 지칭하는데 물리학에 의하여 그리고 천문학에 의하여, 화학에 의하여 그리고 생물학에 의하여 기술되는 세계이다b. 나는 세계 2를, ㅡ 주관적인 의미에서 ㅡ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들과 우리의 희망들 및 목표들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우리의 의기양양과 우리의 사고 과정들의 세계라고 부른다; 심리학이 기술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세계. 그리고 나는 세계 3을, 인간 정신의 산물들인 우리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으로 구술되든 서술되든 우리 인간의 언어인 우리의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의 세계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또한 기술과 예술의 세계. 그렇게 세 가지 세계들 구분함에서 나는 용어사용법만 도입했다. 그것은 심지어 새로운 용어사용법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이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우리의 정신이자 우리의 사고
a 역주: ‘예리한’의 원어는 keen인데 박영태 번역은 ‘영리한’이다.
b 역주: ‘물리학에 의하여 그리고 천문학에 의하여, 화학에 의하여 그리고 생물학에 의하여 기술되는 세계이다’는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이자 우리의 느낌인 우리의 정신적 세계가 다른 두 가지 세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저 세계 3과의 상호작용 및 정보교환(feedback)에 의하여 발전한다는 논지이다; 언어의 세계, 서술의 세계와 우리의 사고들의 객관적인 내용의 세계; 저서들의 세계들과 또한 예술의 세계; 우리의 사회제도들의 세계, 문화의 세계.
정보교환(feedback)의, 특히 저서들의 세계와 우리의 정신적 경험들의 세계 사이의 정보교환(feedback)의 강력한 역할이라는 논지는 중요하다. 그런 객관적인 내용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특히 인간적인 우리의 언어를 발명했다는 것에서 거의 전적으로 혜택을 입는다. 우리의 놀라운 지구에서의 생명체의 진화 역사에서 처음으로, 언어 발명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이 존재함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사고 내용을 대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의하여, 우리가 그 대상들을 비판하는 것이 ㅡ 그래서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는 것 ㅡ 가능해졌다.
글쓰기의 발견은 다음 단계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단계는 저서의 발명 그리고 저서들 사이의 비판적 경쟁의 발명이었다.
피시스트라투스가 호머의 작품에 대하여 일종의 국가 독점체제를 세우려고 의도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왜냐하면 동방에 이전에 저서들의 독점체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아마도 사사로운 출판업자들로부터의 경쟁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유럽 과학과 우리의 유럽 문화의 진보를 출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견지명이 그에게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고: 여기서 부록으로 이어지는 강좌와 그 강좌에 이어지는 주석들은 동일한 주제를 전개하여 그 주제를 다소 확대한다.
지중해 역사의 조금-알려진 장(章)에
관한 7장의 부록
소장님, 여러분, 카탈로니아 국제상(Catalonia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하는 최초의 사람으로 선정된 것은 커다란 명예와 커다란 경험이다: 상(賞)을 수여하는 재단이 카탈로니아에게는 분명한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띠는, 새롭게 설립된 상(賞). 나는 이제 수행할 두 가지 과제들을 가지고 여러분 앞에 서 있다. 첫 번째 과제는, 나와 나의 연구가 이런 명예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함에 의하여 나에게 그렇게 큰 명예를 부여함에 대하여 카탈로니아 자치정부와 카탈로니아 지중해 연구소와 연구소의 소장 및 직원들과 연구소의 자문위원회 및 모든 관련된 분들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를 전하는 과제는 이행하기 쉽다; 이유인즉 내가 크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서 다음과 같이 내가 말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의 연구를 여러분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아량에 감사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엄숙한 수상식을 준비하면서 쏟은 모든 일과 모든 노력 그리고 모든 시간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또한, 이 훌륭한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기에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탈로니아 시민들에게 나의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의 두 번째 과제는 훨씬 더 어렵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연설하는 나의 과제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여러분에게 합당한 답변과 같은 것을 짧은 강연에서 내가 수행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내가 이 강연을 준비할 때, 나는 이 부적당함을 무겁게 느꼈다; 그리고 나는 주제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과학적 지식론과 같은 추상적인 주제에 관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야 하는가? 혹은 민주주의에 관하여?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여러분이 내가 평가하는 것만큼 완전히 여러분이 평가할 것이어서 민주주의에 관하여 여러분에 내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여러분의 지중해 연구소를 기리기 위하여 지중해에 관하여 흥미로운 것을 내가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중해에 관하여 나는 아는 게 없거나 매우 적다. 그래서 훌륭한 연사가 아니면서 자신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사람들 앞에 선 87세의 노인으로 ㅡ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501명의 엄격한 아테네의 판사들 앞에 선 소크라테스와 다소 비슷한 ㅡ 여러분 앞에
원래 번역자의 주석: 이 강좌는 저자가 카탈로니아 국제상을 수상할 때인 1989년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영어 원문은 저자에 의한 것이다.
선 나 자신을 나의 정신적 눈으로 그려보았다.
내가 고심하면 그만큼 왔을 때 나는 별안간 나의 강좌의 주제가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아테네의 기적과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원’. 이것은 합당한 주제였는데 이유인즉 그것이 그리스의 기적, 그리고 나중에 지중해의 기적인 지중해 문명의 기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주제와 지중해 문명이라는 주제를 결합하는 주제이어서 그로 인하여 나 자신이 기여한 ㅡ 내가 이전에 전체적으로 전개하지 않은 기여 ㅡ 주제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강의하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문명은 본질적으로 지중해 문명인데 그리스인들로부터 유래한다. 이 문명은,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까지 태어났고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의 기적은 어마어마하다a. 여기서 우리는 기원전 600년 경에 솔론(Solon)으로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몇 가지 평화로운 정치적b 혁명들을 경험한다. 착취당하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부채를 탕감함에 의하여 그리고 아테네 시민이 자신의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될 수 있음을 금지함에 의하여 솔론은 아테네를 구했다. 그것은 시민들의 자유를 보전하려고 고안된 최초의 헌법이었으며, 자유는 확보되는 것이 없고 항상 위협을 받음을 아테네의 역사가 충분히 분명하게 밝힐지라도 그것은 잊힌 적이 없다c.
솔론은 위대한 정치가만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아테네 시인이었으면 그는 자신의 목표들을 자신의 운문에서 설명했다. 그는 ‘eunomia’ 즉, ‘훌륭한 정부’에 대하여 말했으면 그는 이것을 시민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의 균형을 잡는 것으로서 설명했다. 헌법이 윤리적이고 인도주의적 목표로써 형성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초였고 적어도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은 쇼펜하우어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태로 표현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윤리적 본질이었다: Neminem laede imo omnes, quantum potes, juva! 다시 말해서: 아무도 해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모든 사람을 도우라!
이후 2천 년이 넘어서 발생한 미국혁명처럼, 솔론의 혁명은 시민들을 자유만을 염두에 두었다: 구매된 야만인 노예들의 노예 상태는 두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간과되었다.
a 역주: ‘어마어마하다’의 원어 표현은 stagger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많은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헤쳐 나가면서 발전했다’이다.
b 역주: ‘정치적’은 원어가 political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그것은 잊힌 적이 없다’의 원어 표현은 it was never forgotten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솔론 이후에, 아테네의 정치는 결코 안정되지 못했다. 몇몇 주요 가문들이
권력 투쟁을 벌였고 몇 번 성공하지 못한 시도 끝에 솔론의 친척인 피시스트라투스가 자신을 아테네의 군주 즉, 참주로 옹립했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아티카 외곽에 위치한 은광들에서 나왔고 그는 자신의 재산을 주로 문화적 목적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사용했다. 그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많이 건설했고 축제들을 만들어냈는데 특히 극장에서의 축제들이었다; 아테네에서의 비극 공연들을 도입한 것은 그의 덕택이다. 그리고 우리가 키케로부터 아는 바와 같이, 호머의 작품인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를 조직을 만들어 서술했는데 그 작품은 이전에 구전의 형태로 존재했을 뿐으로 보인다.
이것이 아주 지대한 결과들을 낳은 행위였다는 것이 나의 강좌의 요지이다; 이것이 우리 문명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띤 사건이었다는 것.
내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저술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아테네의 기적은 나를 매혹시킨 문제였다. 그 기적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은 문제이다. 아테네에서 우리의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무엇이었나? 무엇으로 인하여 아테네인들은 예술과 문학, 비극, 철학, 과학과 민주주의 모두를 1백 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창조할 수 있었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 답변을 냈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완전히 불충분한 답변이었다. 그 답변은 문화 충돌이었다. 두 가지 이상의 문화들이 접촉할 때, 그렇게 오랫동안 당연시된 사람들의 방식들과 관습들이 ‘자연스럽지’ 않고 유일하게 가능한 것들도 아니고 신들(gods)에 의하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한 부분도 아님을 사람들은 깨닫는다. 그들은 문화가 인간과 인간 역사의 작품임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로 인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의 세계가 열린다: 그로 인하여 창문이 열리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학적 법칙이고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것은 틀림없이 그리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말로 일리아드에서, 게다가 오디세이에서는 훨씬 더 많은데 호머의 주제들 중 한 가지 주제는 바로 이 문화 충돌에 관한 이 주제이다. 그리고 문화 충돌은 물론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y)의 주제이다. 그리스 문명에 대한 문화 충돌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포기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아테네의 기적과 같은 기적은 설명될 수 없다고 나는 느꼈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기적은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 호머의 작품들을 서술하는 것이 틀림없이 큰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그 기적은 그 서술에 의하여 특히 설명될 수 없다.a 저서들, 정말로 훌륭한 저서들이 이전에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 서술되었는데 아테네의 기적과 비견될 수 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플라톤이 쓴 자신의 판사들 앞에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of Socrates Before His Judges)을 ㅡ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 작품 ㅡ 다시 읽었다. 그리고 많이 토론된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나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구절 [26 D-E]는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에 번성하는 책 시장으로 아무튼 고서들이 (아낙사고라스의 저서 자연에 관하여[On Nature]와 같은) 정규적으로 팔리고 그 고서들이 매우 저렴하게 구매될 수 있었던 시장이 있었음 암시한다. 옛 희곡의 탁월한 거장이었던 유폴리스(Eupolis)는 심지어 50년 전의 책 시장에 대하여 말한다 [폴룩스의 오노마스티콘의 단편 글 IX, 47에서; VII, 211 참조]. 이제 그런 시장은 언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나? 그것은 분명했다: 피시스트라투스가 호머의 작품들을 필사시킨 후에만이었다.
서서히 이 사건의 전체 중요성이 나에게 떠올랐다: 그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호머의 작품의 필사되기 전에 저서들이 있었지만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되는 대중적인 저서들이 아니었다: 저서들은 심지어 존재했던 곳에서도 매우 희귀했고 상업적으로 복사되어 유통되지 않았지만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저술된 저서처럼) 사제들의 감시를 받으며 신성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호머의 작품이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든 사람이 호머의 작품을 읽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작품을 암송했거나 적어도 호머 작품의 구절들을 암송했다. 호머는 최초의 공공 연예인이었다! 우리가 다시 플라톤으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주로 아테네에서의 경우였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법률(Laws)에서 스파르타와 크레타가 문학적 흥미가 없다고 풍자하는 반면 자신의 저서 국가(Republic)에서 위험한 연예활동에 관하여 불평한다: 스파르타에서 호머의 이름을 알려졌다고 ㅡ 알려지기만 ㅡ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호머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아테네에서 호머가 크게 성공함으로 인하여 상업적인 서적 출판과 같은 것이 생겼다: 책들은 글을 아는 노예들의 무리들에게 낭독되었고 그 노예들은 그 책들을 파피루스 위에 적었음을 우리는 안다; 파피루스 장들이 수집되어 두루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Least of all cant it be explained by the writing down of the works of Homer, although this certainly had great influence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리스인의 기적은 호메로스 작품들에 대한 필사에 의해 아주 극히 조그마한 부분만 설명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필사는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진다.’이다.
마리들 즉 ‘서적들’이 되었고 그것들이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불린 시
장에서 팔렸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가장 간단한 가설은, 부자였던 피시스트라투스 자신이 호머의 작품을 편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복사시켜서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기묘한 우연에 의하여 나는 약 6년a 전에, 피시스트라투스가 여전히 아테네에서 통치하고 있던 해에 이집트에서 아테네로 최초이자 상당히 많은 파피루스 수출이 시작되었다고 적힌 보고서를 우연히 발견했다.
피시스트라투스가 호머 작품을 공개적으로 암송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새로 편집된 책들의 유통을 시작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그 책들이 인기를 얻자 다른 출판사들이 나타났다.
다른 시인들이 쓴 운문들과 비극들 및 희극들이 수집되어 뒤를 이었다. 이것을 중 어떤 것도 출판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이 아테네에서 확립된 관행이 되고 아고라(Agora)에서 서적 시장이 (biblionia) 제도로 확립되자마자 저런 의도로 저술된 책들이 뒤를 이었다. 출간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저술된 최초의 책은 아낙사고라스의 방대한 자연에 관하여(On Nature)였다고 나는 추측한다. 리시움(Lyceum)에 복사본 한 권이 ㅡ 아마도 요약본 ㅡ 있었고 아폴로도러스(Apollodorus)가 나중에 아테네의 한 도서관에서 복사본 한 권을 ㅡ 아마도 동일한 복사본 ㅡ 발견한 듯이 보일지라도, 아낙시맨더의 작품은 출판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적어도 지중해 지역에서 호머의 작품들의 출판이 최초이고 실제로 출판의 발명이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로 인하여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테네의 경전이 된 것뿐만 아니다 ㅡ 그로 인하여 호머의 일리아드는 최초의 교재, 최초의 초급독본, 최초의 쓰기 책, 최초의 소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아테네인들을 글자를 해득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혁명을 ㅡ 피시스트라투스의 아들 히피아스를 아테네로부터 추방한 것, 그리고 헌법 제정 ㅡ 확립하기 위하여 이것이 고도로 중요했다는 것은, 이 최초의 출판 이후 약 50년 만에 설립된 민주주의의 특징적인 제도들 중 한 가지 제도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나는 도편추방 제도를 의미한다. 이유인즉 한편으로는 이 제도가, 시민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을 ㅡ 시민이 질그릇 조각 위에 자신이 생각하기에 위험스럽게 인기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명한 시민의 이름을 쓸 수 있었다는 것 ㅡ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 사람들은, 아테네인들이 독재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이었다.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six years인데 박영태 번역은 ‘60년)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편추방 제도는, 아테네인들이 적어도 참주 히피아스를 추방한 이후 첫 세기 동안 독재 예방을 자신들의 민주주주의의 핵심적인 문제로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개념은, 도편추방 제도가 추방을 처벌로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추방됨에 의하여 시민은 자신의 명예를 온전히 유지했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정말로 아테네에 남아있을 그의 권리를 제외하고 모든 권리들을 유지했다. 그가 재소환될 수 있었을지라도 그는 이 권리를 처음에는 10년 동안 그리고 나중에는 5년 동안 잃었다. 어떤 의미에서 추방은 찬사였는데 왜냐하면 도편추방은 어떤 시민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민주주의에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도력을 많이 칭찬할지라도 특정 지도자 없이도 틀림없이 우리가 해나갈 수 있다;a 그렇지 않으면 그 지도자가 우리의 주인이 되기에, 이것을 피하는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주요 과제이다. 도편추방은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알려진 최초의 경우는 기원전 488년이었고 마지막 경우는 기원전 417년이었다. 모든 경우들은 추방된 위대한 사람들에 비극적이었다. 그 기간은, 아테네 비극의 걸작들의 기간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와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기간과 거의 일치하는데 에우리피데스는 나중에 스스로 추방을 선택했다b.
그리하여 유럽에서의 최초 출판은 호머 작품의 출판이었고 이 다행스러운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 사람들이 호머와 호머 작품의 영웅들을 사랑하게 되고 대중들이 글을 배우고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더 많은 일을 이룩했다. 호머는 물론 이전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화병 그림들은 얼마 동안 그의 작품을 예시한 것들이었다. 많은 조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호머 자신은 그렇게 많은 생생하고 흥미로운 장면들을 단어들로 상세하고 실재적으로 묘사한 사람이었고,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로 인하여 조각가들과 화가들이 자신들의 다른 매체에서 자극을 받고 그를 본받았다. 그리고 호머의 원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자극은 훨씬 더 커졌다. 그래서 읽기 능력이 예술에 미친 영향은 부인될 수 없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nobody was irreplaceable in a democracy, and much as we admire leadership, we must be able to do without any particular leader;인데 박영태 번역은 ‘민주 정치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도자를 찬양하고 싶을지라도 우리는 어떤 특정한 개인 지도자를 내세우지 않고 찬양할 수 있어야만 한다.’이다.
b 역주: ‘에우리피데스는 나중에 스스로 추방을 선택했다’의 원어 표현은 who later banished himself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다. 아테네의 비극작가들에게 미친 호머 작품의 주제들의 영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비극작가들이 호머의 주제가 아닌 주제들을 사용하는 희소한 경우들에서도 그 비극작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청중이 익숙하다고 전제될 수 있는 주제들을 계속해서 선택했다. 그래서 서적 시장이 미친 문화적 영향력은 막대했다고 나는 정말로 주장할 수 있다. 아테네의 문화적 기적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시장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증들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실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훨씬 더 큰 규모로 서적들의 출판이라는 발명을 되풀이한 위대한 발명은, 피시스트라투스가 서적 출판을 발명한 이후 2000년에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서적 인쇄가 발명된 것이었다. 그 발명이 북유럽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인쇄술을 습득한 인쇄업자들 대부분이 지중해 남쪽으로 ㅡ 이탈리아로 ㅡ 인쇄술을 가져온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쇄업자들은, 문예부흥(Renaissance)으로 불린 저 위대한 새로운 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문예부흥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명 전체를 바꾼 새로운 인본주의적 학문의 발전과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포함했다.
이것은, 내가 ‘아테네의 기적’으로 별칭을 붙인 운동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훨씬 더 큰 판본에 근거한 운동이었다. 1500년에 알두스(Aldus)는 복사본들의 판본 1천부를 인쇄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 새로운 혁명의 근원이었던 인쇄된 판본들의 규모였다. 그러나 그 외에는 가령 기원전 500년 아테네에서 시작되어 지중해에 걸쳐 퍼진 것과 우리 시대인 1500년에 피렌체나 베니스에서 발생한 것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인본주의적 학자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의 정신을 재개하기를 원했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그렇게 하는 데 그들이 성공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아테네에서처럼 그리고 나중에는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지인 마그나 그라이키아(Graecia Magna)에서처럼 ㅡ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에서이지만 진정으로 지중해 전역에 걸쳐서 ㅡ 과학적 및 특히 우주론적 사고가 이 운동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코만디노(Commandino)와 같은 문예부흥 수학자들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파푸스(Pappus)와 프톨레미(Ptolemy) 그러나 또한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의 실종된 업적들을 성공적으로 다시 알아냈는데 그로 인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갈릴레오와 케플러와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탄생했다. 우리 자신의 문명이 최초의 과학적 문명으로서 올바르게 기술된다면, 그것은 모두 지중해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내가 제안하는 바, 아테네의 서적 출판과 아테네의 서적 시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아랍인들을 기여를 심하게 무시했는데 아랍인들은 지중해에 인도의 숫자체계를 가져왔다. 그들이 지중해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제공했지만 더 많이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제공한 만큼 이익을 받았다.
여러분, 나는 잘 알려진 ㅡ 한 가지 작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기여를 제외하고 잘 알려진 ㅡ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시 말했다: 서적들에 의하여, 특히 바로 처음부터 출판된 서적들에 의하여 수행된 결정적인 역할. 우리의 문명은 정말로 책에 열중하는 문명이다: 우리 문명의 전통성과 독창성, 그 문명의 진지함과 지성적 책임감, 그 문명의 전대미문의 상상력과 그 문명의 창조성, 그 문명의 자유에 대한 이해와 자유에 대한 그 문명의 경계심 ㅡ 이 모든 것은 서적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의존한다. 단기적인 유행, 매체들과 컴퓨터들이 서적들에 대한 우리의 밀접한 개인적인 애착을 망치거나 심지어 헐겁게 하지 않기를!
그러나 아무리 서적들이 우리의 문명에 중요할지라도, 나는 서적들로써 그치고 싶지 않다. 문명은 문명화된 남녀들로, 훌륭한 삶과 문명화된 삶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저서들과 우리의 문명이 기여해야 하는 것은 이 목표이다. 저서들과 우리의 문명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나는 믿는다.
참석하여 주신 데 대해 나는 감사드리고 경청해주셔서 나는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주석
아낙스고라스와 그와 관련된 날짜에 대한 논란이 많은 문제에 관하여, 펠리스 M. 클레브(Felix M. Cleve),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의 거장들(The Giants of Pre-Socratic Greek Philosophy[philosophy는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역자]), 2판본, 마르티누스 니호프(Martinus Nijhoff) 출판사, 헤이그, 1969년, 특히 170쪽 이하 참조; 또한 D. 오브라이언(O'Brien), 그리스 연구지(Journal of Hellenic Studies), 1968년, 93-113쪽. 다른 날짜에 대하여 찰스 H. 칸(Charles H. Kahn), 아낙시맨더(Anaximander), 2판본,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 뉴욕, 1964년, 특히 164쪽 이하 참조. 아낙시맨더의 저서에 관해서는 칸(Kahn), 전게서 및 올로프 기곤(Olof Gigon), 그리스 철학의 기원(Der Ursprung der griechischen Philosophie), 바젤, 1945년 참조; 또한 W. K. C. 거스리(Guthrie), 그리스 철학사(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I권,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1962년. 아낙사고라스의 저서에 관하여, 딜즈-크란츠(Diels-Kranz),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단편글(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5판본, 1964년에서 수집된 구절들 참조; 특히 플라톤, 변명(Apology), 26 D-E. 문예와 음악에 대한 검열을 제안한 플라톤에 관하여,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5판본의 9쇄, 루틀리쥐(Routledge) 출판사, 런던, 1991년, I권, 4장, 주석 39-41 및 원문 참조. 미술에 미친 호머의 영향에 관하여, E. H. 곰브리치(Gombrich), 예술과 망상(Art and Illusion), 5판본의 4쇄, 파이든 출판사(Phaidon Press), 런던, 1986년, IV장, 4 참조. 세계 1, 세계 2, 세계 3에 관하여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루틀리쥐(Routledge) 출판사, 런던, 1992년, 38-44절; 칼 포퍼,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 7판본,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91년; 그리고 K. R. 포퍼와 J. C. 에클스(Eccles) 공저, 자아와 자아의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스프링거 인터내셔널(Springer International) 출판사; 또한 루틀리쥐(Routledge) 출판사, 1984년 참조. 나의 세계 3 이론에 대한 앞선 이론들에 대하여, 베르나르트 볼차노(Bernard Bolzano), 과학론(Wissenschaftslehre), 줄츠바흐(Sulzbach) 1837년 (롤프 조지[Rolf George]에 의한 영어 초록, 과학론[Theory of Science], 블랙웰[Blackwell] 출판사, 옥스퍼드, 1972년);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 세계관 이론(Weltanschauungslehre), II권, 전반부, 오이겐 디에더리흐스(Eugen Diederichs) 출판사, 예나 1908년; 칼 뷜러(Karl Bühler), 언어론(Sprachtheorie), 구스타프 피셔(Gustav Fischer) 출판사, 예나 1934년; 고트로프 프레게(Gottlob Frege), '사상(Der Gedanke)', 독일 관념론 철학에 관한 논문(Beiträge zur Philosophie des deutschen Idealismus), I권, 1918년 참조 (1918년은 박영태 번역에는 1968년이다: 역자).
추가 언급 (1992년)
1. 피시스트라투스의 호머 판본에 관한 키케로(Cicero)의 보고서는, 피시스트라투스와 그의 문화적 활동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듯한 모든 것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집트가 파피루스를 아테네에 수출한 것에 의하여 입증된다.
2. 피시스트라투스와 호머 작품의 최초 출판 때와 (기원전 550년) 이때부터 계속해서, 상당한 양의 파피루스가 이집트로부터 아테네로 수출되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은, 기원전 11세기이래, 파라오들이 독점적으로 통제했다. 이것은, 이집트 연구학자들이 이 수출에 관하여 알게 된 방식이다.)
3. 호머의 작품을 최초로 출판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저서들을 포함한 글로 서술된 재료들이 통상적으로 낭독되었다. 서한들이 그렇게 낭독되었고 (이소크라테스[Isocrates]로부터 나타나는 바와 같이) 낭독이 항상 적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설들은 서술에 의하여 준비된 것들과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로 분류되었다: 첫 번째 유형에 관해서는 이소크라테스가 주요 권위자들 중 한 명이었다; 두 번째 유형에 관해서는 알키다마스(Alcidamas)였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 또한 참조.) 저서들은 낭독되었거나 심지어 대중 앞에서 암송되었다 (헤로도토스 작품의 경우에서처럼). 이것들 모두는 logoi로 불렸다. 호머의 작품이 처음 출판된 이후 900년 만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으로 성 암브로시오(St Ambrose)가 묵독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설명하는 바. 그로 인하여 그는 성 암브로시오에게 종교적 곤경에 빠진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 못했다. (고백록[Confessions]의 VI권 참조.)
4. Biblos와 byblos는 얼마동안 파피루스(papyrus)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헤로도토스는 몇 번 ‘책’ 대신에, 다시 말해서, 더 큰 작품의 일부를 형성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대신에 byblos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용법은 수용되는 데 시간이 걸렸던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450년 이래 아테네에 서적 시장이 존재했을지라도 판매 가능한 단위로서의 서적이라는 개념은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글로 서술된 원문들이, 묵독이 보편적으로 실행되는 기교가 되기 이전에 여러 세기 동안 일반적으로 낭독되었다 (위 요점 3 참조). 글로 서술된 초기 원문들은 운문 (솔론, 호머), 법률들, 극본들, 대사들, 서한들이었다. 글로 서술된 의사소통은 구어 의사소통보다 열등한 대체물로서 흔히 간주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아낙스고라스의 저서가 그 저서를 출판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서술된 최초의 저서라는 나의 가설과 관련이 있다. 심지어 플라톤도, 그가 말할 수 있었던 최고의 것들은 자신의 저술들 속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서술에 의하여 사람의 개념들을 완벽하게 소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문법은 구어적 전통에 의하여 살았던 불문법에 열등하다고. 저서가 판매 가능한 재산으로서 서서히 수용됨에 의하여, 호머의 저서와 같은 저서들의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도시로부터 금지하기를 그가 고려하는) 정치적인 위험을 깨달은 플라톤이 왜 분서(焚書)를 말하지 않는지 이해하는 데 우리는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낙사고라스의 저서가 불태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 IX, 52는 프로타고라스의 작품들이 아테네에서 압수당했고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고 보고한다. 다소 늦은 이 보고서는 내가 보기에 플라톤의 변명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다른 근원들에 있는 많은 구절들과도 양립될 수 없다. 게다가 디오게네스에 의하여 보고된 사건은 기원전 411년경 발생했을 터인데 당시 플라톤은 16살이었다. 그 사건은 서적검열을 위한 그의 제안들에 흔적들을 남겼을 터이다.
6. 몇몇 학자들은 1드라크마라는 낮은 가격으로부터, 아낙스고라스의 저서가 (플라톤의 저서 변명보다 30년 훨씬 이전에 분명히 출간된) 얇은 저서였다고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희귀 서적의 경우에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저서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저서가 얇은 책이었다는 것과 양립되지 않는다. 그 저서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 천문학과 기상학을 담고있었다; 세상의 기원과 물질 구조의 기원에 관한 이론; 무엇보다도 분자들에 관한 그리고 물질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다소 동질적인 다양한 실체들에 (물, 금속들과 같은; 머리털, 살[flesh], 뼈, 기타 등등과 같은 살아있는 생물체들에서의 실체) 관한 이론. 무한한 분할 가능성 이론은, 극도로 미묘한데, 무한한 숫자들의 동치에 (분할에 의하여 야기되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그것들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가산[可算: enumerable]’) 관한 언급들을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은) 담고 있었다; 19세기까지 (볼차노와 칸토어[Cantor]) 아마도 재발견되지 않은 결과. 그것은 분명히 두꺼운 책이었고 플라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헐값에 팔렸다. 이것에 대한 가장 개연적인 설명은, 원본이 방대했다는 것이다.
7. 서적 시장만이 출판을 허용한다. 그러나 출판 시설들로 인하여, 아테네로 저술가들이 많이 몰렸음이 그리고 우리가 지금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설명할 터이다.
8. 아테네에서의 서적 시장의 시작과 출판 및 ‘문학’의 시작을 내가 이렇게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너무 늙어서 문제들의 전체 범위를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몇 년 전 내가 나의 개념들을 그레고리 블라스토스(Gregory Vlastos)에게 ㅡ 그 개념들에 관하여 내가 말한 유일한 고전학자 ㅡ 언급했을 때 그는 매혹되었고 모든 것이 그에게는 새롭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다루어야 할 전혀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그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격려에도 불구하고’의 원어 표현은 in spite of his encouragem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가 고무되었지만’이다: 역주) 그 주제와 관련된 현존하는 저서들 중 어떤 저서도 나는 심지어 발견할 수 없었다. 수행될 많은 연구들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제시할 수 있었던 가설들로 인하여 몇몇 고전학자들이 비판하고 추가적으로 발전하도록 자극 받기를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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