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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I부 VON DEN NEUESTEN...ZUSAMMENGESTOHLEN AUS VERSCHIEDENEM, DIESEM UND JENEN, 13장 내가 철학을 보는 방식

이윤진이카루스 2020. 12. 20. 19:19

III부 VON DEN NEUESTEN... ZUSAMMENGESTOHLEN AUS VERSHIEDENEM, DIESEM UND JENEN 13장 내가 철학을 보는 방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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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VON DEN NEUESTEN...

ZUSAMMENGESTOHLEN

AUS VERSCHIEDENEM,

DIESEM UND JENEN*

 

 

 

 

 

 

 

 

 

 

 

 

 

* 이 제목은 도용했다. 이 제목은, 베토벤에 의하여 현악 4중주의 악보에 다음과 같이 적힌 언급에서 유래한다: ‘viertes Quartett, von den Neuesten, für 2 Violinen, Bratsche und Violincell. Zusammengestohlen aus Verschiedenem, Diesem und Jenen.’ 벤토벤의 번역 불가능한 장난스러운 언급의 개략적인 번역은 다음과 같을 터이다: ‘최근 작곡들로부터 ㅡ 가장 다양한 작곡들로부터, 이것저것들로부터 ㅡ 도용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및 첼로를 위한 네 번째 4중주....’

 

 

13

 

내가 철학을 보는 방식

(프리츠 바이즈만[Fritz Waismann]으로부터 그리고 달에 착륙한 최초의 인간들 중 한 명으로부터

도용한)

 

 

 

I

 

고인이 된 나의 친구 프리드리히 바이즈만(Friedrich Waismann)의 유명하고 활기찬 논문은 내가 철학을 보는 방법이라는 제목을 지녔다. 이 논문에는 내가 칭찬하는 많은 것이 있다; 그리고 나의 접근방식이 그의 접근방식과 전혀 다를지라도, 그 논문에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점들이 있다.

프리츠 바이즈만(Fritz Waismann)과 그의 동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임을 그리고 철학은 그 사람들의 고유한 활동으로서 간주될 수 있음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논문에서 시도하는 것은, 사례들의 도움을 받아서 철학자의 현저한 특징과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다른 학문적 과목들과 비교된다면 철학의 현저한 특징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강단 철학자들의 관심사들과 활동들을 기술하려고, 그리고 과거에 철학자들이 수행한 것을 계속한다고 그들이 언급되는 의미를 기술하려고 그는 특히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바이즈만의 논문은, 이 학문적 활동들에 대한 개인적인 몰두의 그리고 심지어 흥분의 상당한 정도를 보여준

 

원래 번역자의 주석: 이 원문은 저자에 의하여 앙드레 메르시에(André Mercier)Maja Svilar 편집, 피터 랑(Peter Lang) 출판사, 철학자들 자신의 연구에 근거한 철학자들(Philosophers on Their Own Work), 3, 125-48쪽에, 베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및 라스베이거스, 최초 발표되었다. 이것은, C. J. 본템포(Bontempo) S. J. 오델(Odell) 편집, 미네르바의 부엉이(The Owl of Minerva), 맥그로힐(McGraw Hill) 출판사, 뉴욕, 1975, 41-55쪽에 최초로 발표된 영어본의 수정본이다.

.a 분명히 그 자신은, 이 특별한 철학자들의 무리라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철학자이고 이 다소 배타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하여 공유되는 어느 정도까지의 흥분을b 우리에게 전달하기를 분명히 그는 소망한다.

 

II

 

내가 철학을 보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철학자일지라도 모든 남자들과 모든 여자들이 철학자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강단 철학자들인 두드러지고 배타적인c 사람들의 무리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만, 그 사람들에 활동들에 대한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접근방법에 대한 바이즈만의 열정을 나는 전혀 공유하지 않는다. 반대로 강단 철학을 불신하는 저 사람들에 (나의 견해로 그들은 일종의 철학자들이다) 대하여 언급될 것이 많다고 나는 느낀다. 아무튼 검토되지 않고 언급된 적도 없는 어떤 관념의 영향력이 바이즈만의 탁월한 논문에 퍼지는데 그 관념을 나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나는,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지배층(elite)이라는 관념을 의미한다.

물론 나는, 진정으로 위대한 몇몇 철학자들이 있었고 여러 가지 면들에서 칭찬받을만할지라도 위대함을 놓쳤을 뿐인 소수의 철학자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강단 철학자에게 틀림없이 큰 중요성을 띨지라도, 그림이 위대한 화가들에게 의존하고 음악이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게다가 위대한 철학은 ㅡ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철학 ㅡ 강단 철학과 전문적인 모든 철학에 시기적으로 앞선다.

 

III

 

나 자신의 견해로, 전문적 철학은 너무 잘하지 못했다. 전문적인 철학은 apologia pro vita sua, 즉 자체의 생존을 도모할 시급한 필요에 놓여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Not only is all this very interesting, but Waismann's paper exhibits a considerable degree of personal engagement in these academic activities, and even of excitem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모든 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데, 이뿐 아니라 바이스만의 논문은 이러한 대학의 연구 활동들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정도로 참여했다는 내용과 심지어는 아주 흥미진진한 내용들을 보여준다. 이다.’

b 역주: ‘흥분의 원어는 excitem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흥미이다.

c 역주: ‘두드러지고 배타적인의 원어 표현은 ‘distinctive and exclusive’인데 박영태 번역은 다소 특별하게 전문가라 할 수 있는이다.

 

나 자신이 전문적인 철학자란 사실로 인하여 나에게 불리한 심각한 경우가

확립된다고 나는 심지어 느낀다. 나는 그것을 고발로서 느낀다. 나는 죄를 인정하고, 소크라테스처럼, 나의 변명을 제시해야겠다.

나는 플라톤의 저서 변명(Apology)을 언급하는데 왜냐하면 서술된 철학에 관한 모든 저술들 중에서 그 저서를 내가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그 저서가 대체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서 말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을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겸손하면서 겁을 먹지 않는 한 사람이 여기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변명은 매우 단순한다: 아마도 자신이 현명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제외하고, 현명하지 않다는 자신의 한계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은 특히 오만한 허풍에 대한 비판자이지만 자신의 동료 인간들에게는 친구이고 훌륭한 시민이라고.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일 뿐만 아니라 나의 견해로, 철학에 대한 인상적인 변명이다.

 

IV

 

그러나 철학을 고발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많은 철학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몇몇은 너무 잘하지 못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 네 명을 ㅡ 플라톤, (Hume),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 ㅡ 언급하겠다.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재능이 있었던 플라톤은, 내가 아는 바 혐오스럽고 정말로 지독한 견해를 인간의 생활과 관련하여 지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가장 큰 전문적인 철학파의 창시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감을 받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다른 작품들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The Apology of Socrates)을 저술했다.

그를 그리고 그 이후에 그렇게 많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을 괴롭힌 것은, 소크라테스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그가 지배층(elite)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철학의 왕국을 신뢰했다는 것. 정치가들은 현명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반면 플라톤은 현명한 사람들인 박식한 철학자들이 절대 통치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플라톤 이후 과대망상증이 철학자들이 지닌 가장 광범위한 직업적 질병이었다.) 게다가 법률(The Laws) 10권에서 종교재판에 영감을 준 제도를 플라톤이 창안했고 플라톤은 반체제 사람들의 영혼 치료를 위하여 집단수용소를 추천하는 지경까지 갔다.

데이비드 흄은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었고 아마도 소크라테스 다음으로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 잘 균형이 잡힌 사람이었으며 아주 겸손하고 합리적이고 합당하게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불행하고 그릇된 심리학적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 지녔던 두드러진 이성의 능력들을 불신하도록 그를 가르친 지식론에 의하여)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고노예가 되어야할 따름이어서 열정에 봉사하고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직책을 주장할 수 없다는 지독한 교설에 다다랐다. 열정 없이 위대한 것이 이룩된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흄의 서술에 바로 반대되는 것을 나는 신뢰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 저 제한된 합리성에 의하여 우리의 열정을 길들이는 것이 인류에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서 성인이었던 스피노자는 소크라테스 및 흄과 같이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었는데 흄과 정확하게 거의 반대가 되는 것을 가르쳤지만, 어느 정도 내가 한 사람으로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결정론자였고 (흄이 결정론자였던 것과 같이), 그에게 인간의 자유는 우리의 행위들을 진정으로 강요하는 원인들을 분명하고 뚜렷하며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만을 본질로 한다: ‘한 가지 효과는 열정인데 우리가 열정에 대하여 분명하고 뚜렷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그 효과는 열정이기를 멈춘다.’ 그 효과가 열정이라면 우리는 그 열정의 통제를 받고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열정에 대하여 분명하고 뚜렷한 관념을 지니자마자 우리는 그 열정에 의하여 여전히 결정되지만 우리는 열정을 우리가 지닌 이성의 한 부분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이것만이 자유라고 스피노자는 가르친다.

나 자신이 일종의 합리주의자일지라도 나는 이 가르침을, 합리주의의 옹호될 수 없고 위험한 형태로서 간주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정론을 신뢰하지 않고, 스피노자나 다른 어떤 사람이 결정론을 뒷받침하거나 인간의 자유와 (그리하여 상식과) 결정론의 화해를 뒷받침하여 강력한 논증들을 이룩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러나 전체는 아니다) 결정되어서 심지어 예언될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참일지라도,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철학자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두 번째, ‘열정에 의하여 스피노자가 의미하는 것이 지나치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참일지라도, 우리의 행위들의 동기들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합당하고 합리적인 관념을 형성할 수 없을 때마다 내가 인용한 그의 공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저렇게 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들에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을 다룸에서 합리적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라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그리고 스피노자 또한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목표가 우리가 어느 때고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칸트는 전문적인 철학자들 가운데서 칭송을 받을 수 있고 고도로 독창적인 희소한 사상가들 중 한 명인데, 이성을 거부한 흄의 문제와 스피노자의 결정론에a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노력들 모두에서 실패했다.

이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 몇몇이고 내가 많이 칭송하는 철학자들이다. 여러분은 내가 왜 철학에 관하여 사과해야 한다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V

 

나의 친구들인 프리츠 바이즈만,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 그리고 빅토르 크라프트(Victor Kraft)처럼 나는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비엔나 학파의 회원이었던 적이 없다; 사실상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는 나를 공식적인 반대파라고 지칭했다. 아마도 실증주의에 대하여 잘 알려진 나의 반론 때문에 나는 그 학파의 모임에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를 받아들였을 터인데 이유인즉 그 학파의 회원들 몇몇이 나의 친구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회원들 몇몇을 가장 칭송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영향을 받아서 그 학파는 반()형이상적 뿐만 아니라 반()-철학적이 또한 되었다. 그 학파의 지도자인 슐릭(Schlick), 철학은 이치에 맞게 말하는 적이 없고 무의미한 단어들만 내뱉는데 곧 사라질 것인 이유는 철학의 청중이 공허하고 장황한 비난에 싫증이 나서 사라졌음을 철학자들이 발견하기 때문이라 예언을 통하여 이것을 정식화했다.

바이즈만은 여러 해 동안 비트겐슈타인 및 슐릭과 의견을 같이했다. 철학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 내가 전향자의b 열정을 탐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너무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해야 했을지라도, 비엔나 학파에 반대하여 나는 철학과 심지어 형이상학을 항상 옹호했다. 이유인

 

a 역주: ‘결정론의 원어는 determinism인데 박영태 번역은 결론이다.

b 역주: ‘전향자에 대한 박영태 주석은 바이스만은 빈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 중에서 내가 한 명인데 다양한 등급들의 진지함

과 난해함을 지닌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고 그리고 이 문제들은 모두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믿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시급하고 진지한 철학적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할 필요가, 전문적 철학이나 강단 철학으로 지칭될 것에 대한 유일한 변명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학파는 진지한 철학적 문제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끝부분에 따르면, 철학의 표면적인 문제들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자체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신의 낱말들을 말하는 것으로부터 출현하는 사이비-문제들이다. 이 이론은, 참도 아니고 허위도 아니며 무의미한 사이비-명제들로서 논리적 역설들을 러셀이 해결함에 의하여 고무된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불편한 명제들이나 문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낙인을 찍는 현대의 철학적 기교를 초래했다.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철학적 오용에 의하여 야기되는 수수께끼들을 언급했다. 진지한 철학적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희망이 나에게 없다면 철학자인 것에 대한 핑계가 나에게 없을 터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을 위한 변명이 없을 터이다.

 

VI

 

이 절에서 내가 나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발견하는데, 철학의 특징으로서 흔히 간주되는 철학에 대한 특정 견해들과 특정 활동들을 나는 열거하겠다. 이 절은 내가 철학을 보지 않은 방식이라는 제목을 붙을 수 있을 터이다.

1. 나는 철학을, 언어적 수수께끼들에 대한 풀이로서 보지 않는다; 오해를 제거하는 것이 간혹 필수적인 사전 과제일지라도.

2. 일련의 예술적 작품들로서, 세상에 대한 두드러지고 독창적인 그림들로서, 혹은 세상을 묘사하는 영리하고 특수한a 방식들로서 나는 철학을 보지 않는다. 우리가 철학을 이런 방식을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위대한 철학자들에게 불의를 저지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심미적 노력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리한 체계들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그들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ㅡ 진짜 문제들에 대한 참된

 

a 역주: ‘특수한의 원어는 unusual인데 박영태 번역은 범상한이다.

 

해답을 ㅡ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철학사를 본질적으로 진리 탐구 역사

의 한 부분으로서 보아서, 아름다움이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중요할지라도 철학에 대하여 순전히 심미적인 견해를 나는 배격한다.

나는 지성적인 대담성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는 지성적인 겁쟁이와 진리 탐구자가 동시에 될 수 없다. 진리 추구자는 대담하게 현명해져야 한다 ㅡ 그는 사상의 분야에서 대담한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3. 나는 철학 체계들의 긴 역사를, 모든 가능한 관념들이 시험되고a 진리가 부산물로서 아마도 명백해질 지성적 건축물들 중의 한 가지 건축물로서 보지 않는다. 과거의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자들 모두는 그의 철학 체계가 아마도 탁월했을지라도 진리로 향하는 길에서 한 단계가 아님을 확신했다면 그 체계를 버렸을 터임을 (그가 그렇게 했어야 했던 것처럼b) 우리가 잠깐 의심한다면 우리가 그 철학자들에게 불의를 가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부연하여c, 피히테나 헤겔을 진정한 철학자들로서 내가 간주하지 않는 이유이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4. 나는 철학을, 개념들이나 단어들이나 언어들을 설명하거나 분석하거나 혹은 해석하려는시도로서 보지 않는다.

개념들과 단어들은 명제들과, 추측들 및 이론들을 언명하기d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개념들이나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참일 리가 없다; 그것들은 인간의 기술적이고 논증적인 언어에 도움을 줄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의미들을 분석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흥미롭고 중요한 진리들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참인 이론들의 추구.

5. 나는 철학을, 영리해지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보지 않는다.

6. 나는 철학을, 일종의 치유책인 (비트겐슈타인) 사람들이 철학적인 곤경들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 활동으로 보지 않는다. 나의 생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나중 저술에서) 병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파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병에서 탈출할 수 없는 파리에게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두드러진 자화상을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였다 ㅡ 프로이트가 프로이트의 경우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7. 나는 철학을, 사물들을 더 정밀하게 혹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의 연구로서 보지 않는다. 정밀성과 정확성은 본질적으로 지성적 가치들이 아니어

 

a 역주: ‘시험되()’의 원어 표현은 tried out인데 박영태 번역은 시도되()’이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as he should have don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부연하여의 원어는 incidentally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연하게도이다.

d 역주: ‘언명하기의 원어는 formulat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형성하기이다.

 

, 당장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에 의하여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정밀하거나 정

확하려고 결코 노력해서는 안 된다.

8. 따라서 나는 철학을, 조만간 나타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토대들이나 개념적인 체제를 제공하려는 시도로서 보지 않는다. 존 로크는 그렇게 했다; 그는 윤리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어서, 개념적인 예비단계들을 먼저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고찰했다.

그의 저서 인간오성론(Essay)은 이 예비단계들로 구성되고, 영국 철학은 그 후 (흄의 정치적 논문들 몇 편들과 같이 매우 드문 예외들과 있지만) 이 예비단계들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9. 나는 또한 철학을, 시대정신의 표현으로서 보지 않는다. 이것은 헤겔의 관념이었는데 비판에 견디지 못한다. 과학에 유행들이 있는 것과 같이, 철학에 유행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 탐구자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유행을 불신할 것이고 심지어 유행과 싸울 것이다.

 

VII

 

남녀 모두는 철학자들이다. 그들이 철학적인 문제들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아무튼 그들에게는 철학적인 편견들이 있다. 이 편견들 대부분은, 그들이 당연시하는 이론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성적 환경으로부터 혹은 전통으로부터 그 편견들을 흡수했다.

이 이론들은 의식적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론들이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위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생애 전체에 대하여 커다란 중요성을 지닐지라도 비판적 검토 없이 그 이론들이 유지된다면 의미에서 그 이론들은 편견들이다.

이 광범위하고 영향력이 있는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문적인 철학의 존재를 위한 변명이다.a

이것들과 같은 이론들은 모든 과학의 그리고 모든 철학의 불안정한 출발점이다.b 모든 철학은, 무비판적인 상식에 대하여 의심스럽고 흔히 해로운 견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an apology for the existence of professional philosophy that men are needed to examine critically these widespread and influential theories.인데 박영태 번역은 널리 만연되고 영향력이 있는 이러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전문적인 철학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변론이 된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ories like these are the insecure staring point of all science and of all philosophy.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와 같은 이론들이 모든 과학과 모든 철학에 대해 안정된 튼튼한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이다.

 

들로부터 틀림없이 출발한다.a 그 철학의 목표는 계몽되고 비판적인 상식에 도달하는 것이다:b 진리에 더 근접한 견해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삶에 덜 해로운 영향을 미치면서.

 

VIII

 

나는 광범위한 철학적 편견들의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실제로 나쁜 (혹은 우리가 크게 혐오하는) 중요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는, 삶에 대하여 매우 영향력이 큰 철학적 견해가 있다; 그런 일을 의도적으로 수행한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다. 이 견해는 매우 오래되었다. 호머의 작품에서 신들(gods)의 질투와 분노는, 트로이 앞의 들판에서 그리고 트로이 자체에게 발생한 지독한 것들 대부분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오디세이의 잘못된 모험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던 것은 포세이든이었다. 나중에 기독교 사상에서 악행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악마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vulgar Marxism)에서 사회주의의 도래와 지구상에서 천국 건설을 막는 것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의 음모이다.

전쟁, 빈곤 및 실업을 어떤 사악한 의도의 결과인 어떤 흉악한 고의의 결과로서 보는 이론은 상식의 일부이지만 그 이론은 무비판적이다. 나는 이 무비판적인 상식론을 사회음모론으로 지칭했다. (우리는 아마도 그 이론을 심지어 세계음모론으로 지칭할지도 모르겠다: 제우스의 번개를 생각하라.) 그 이론은 광범위하게 믿어지고, 속죄양들을 찾는 형태로 그 이론은 많은 정치적 싸움을 고취하여 가장 무서운 고통을 만들어냈다.

사회음모론에 있는 한 가지 양상은, 사회음모론이 실제로 음모들을c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음모들은 자체의 목적들을 달성하지 못함이 밝혀진다. 레닌은 음모론을 믿었는데 음모를 꾸몄고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레닌의 목표들은 러시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목표들을 이탈리아에서나 독일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음모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사회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음모를 꾸몄다.

 

a 역주: 이 문장에서 의심스럽()’틀림없이 출발한다의 원어 표현은 dubiousmust start인데 박영태 번역은 분명하지 않()’분명히 출발했을 것이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앞부분에는 원문에 없는 그런데가 박영태 번역에 추가되었다.

c 역주: ‘음모들의 원어는 conspiracies인데 박영태 번역은 공동 모략들이다.

 

사회음모론의 오류들에 주목하면, 철학에 관하여 아마도 제한적이지만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은 기여가 이루어질 것이다.a 게다가 이 기여로 인하여, 사회에 대하여 인간 행위들의 비의도적인 결과의 중요성 발견과 같은 그리고 우리 행위들이 야기하는 비의도적인 결과들을 초래하는 저 사회적 관계들을 발견하는 것을, 이론 사회과학들의 목표로서 우리가 간주한다는 제안과 같은 추가적인 기여들이 생긴다.

전쟁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라.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의 위상을 지닌 비판적인 철학자도b, 심리학적인 동기들에 의하여 ㅡ 인간의 공격성에 의하여 ㅡ 우리가 전쟁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공격성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현대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쟁들이 개인적인 공격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공격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고취되었다는 것을 러셀이 알지 못해서 나는 놀란다. 그 전쟁들은 어떤 음모의 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고취된 이념적인 전쟁들이었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어떤 객관적인 상황에 의하여 고취된 두려움의 결과로서 발생한 전쟁들이었다. 한 가지 사례는, 군비경쟁과 그것에서부터 전쟁을 초래하는 공격에 대한 상호간의 두려움이다; 아마도 전쟁과 공격을 적대시했던 심지어 러셀이 러시아가 곧 수소폭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옳게) 잠시 동안 추천한 것과 같은 예방적 전쟁을 초래하는 공격. (아무도 그 폭탄을 원하지 않았다; 그 폭탄의 제조를 초래한 것은 히틀러가 그 폭탄을 독점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철학적 편견에 관한 한 가지 다른 사례를 고려하라. 사람의 견해는 자신의 자기-이익에 의하여 항상 결정된다는 편견이 있다. 이 교설은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는 흄의 교설의 타락한 형태로서 기술될 것인) 통상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지c 않는다 (이것은 흄에 의하여 수행되었는데 그는 자기 자신이 지닌 이성의 능력을 포함하여 우리가 지닌 이성의 능력과 관련하여 겸손과 회의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교설은 통상적으로 다른 동료에게 ㅡ 그의 견해가 우리 자신의 견해와 다른 ㅡ 적용될 뿐이다. 이 교설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견해들에 반대가 되는 견해들을 우리가 인내하여 경청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견해들을 다른 동료의 이익들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기 때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may perhaps be a modest but not quite insignificant contribution to philosophy to draw attention to the mistakes of the conspiracy theory of society.인데 박영태 번역은 사회 음모론이 범하는 오류들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은, 아마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 하나의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이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Even a critical philosopher of the status of Bertrand Russell‘인데 박영태 번역은 심지어 버트런트 러셀의 상황을 비판하는 철학자조차도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지의 원어 표현은 is (not) applied to oneself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이다.

 

문에 그 견해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합리적인 토

론이 불가능해진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인 사물들에 관하여

진리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관심이 악화된다. ‘이 문제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의 자리에,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단연코 덜 중요한 또 다른 질문이 놓인다: ‘당신의 자기-이익은a 무엇인가, 숨겨진 당신의 동기들은 무엇인가?’ 이 교설은, 우리 자신의 견해들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을 막고 이 교설은 우리가 지닌 공통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통합인 인류 통합의 와해를 초래한다.

유사한 철학적 편견은, 현재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합리적 토론은 근본적인 것들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해로운 교설은, 근본적인 것들에 관한 합리적이거나 비판적인 토론이 불가능함을 암시하고 이 해로운 교설은 이전에 토론된 교설들의 결과들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을 초래한다.

이 교설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믿어지지만 이 교설들은, 많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였던 철학의 한 분야에 속한다: 지식론.

 

IX

 

내가 지식론을 보는 바와 같이, 지식론의 문제들은 바로 철학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무비판적이거나 대중적인 상식적 철학 그리고 강단 철학 모두의 핵심이다. 그 문제들은 심지어 윤리학 이론에도 결정적이다 (자크 모노[Jacques Monod]가 최근에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와 같이).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철학의 다른 영역들에서처럼 여기서 주요 문제는 인식론적 낙관론인식론적 비관론사이의 갈등이다. 우리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이 우리는 알 수 있는가? 인식론적 낙관론자는 인간 지식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반면, 인식론적 비관론자는 진정한 지식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고 믿는다.

상식의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는 상식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상식은 우리가 지닌 유일하게 가능한 출발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상식을 근거로 안전한 지식의 건축물을 세우려고 우리가 시도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상식을 비판해서 상식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상식적인 실재론자이다; 나는 물질의 실재성을 (그것이 실재적[real]’이라는 단어가 표시하기로 의도된 것의

 

a 역주: ‘자기-이익의 원어는 self-interest인데 박영태 번역은 관심이다.

 

바로 그 원형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신뢰한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이 용어가 (a) 물질을 본질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그리고 (b) 비물질적인 힘의 장(fields of forces)의 실재와 물론 인간 정신의 실재나 의식의 실재를 부인하는 신조를 또한 표시한다는 사실이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을 유물론자로 지칭할 터이다.

물질과 (‘세계 1’) 정신 (‘세계 2’) 모두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에서 나는 상식을 따르고, 다른 것들, 특히 인간 정신의 산물들이 또한 존재한다고 나는 제안하는데 그 산물들은 우리의 과학적 추측들과 이론들 및 문제들을 (‘세계 3’)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상식적 다원론자이다. 나는 이 입장이 비판을 받고 더 건전한 입장에 의하여 대체되기를 매우 바라지만 그 입장에 반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비판적 논증들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부언하여, 나는 다원론을 여기서 기술된 윤리학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다원론적 실재론에 반대하여 개진된 모든 논증들은, 결국, 상식적 지식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것에 근거하는 것인데 그 수용을 나는 상식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서 간주한다.

상식이 지식이라는 이론은, 그 이론이 지식을 확실한 지식과 동일시하는 한, 고도로 낙관론적이다; 추측성인 모든 것은 실제로 지식이 아니라고 그 이론은b 주장한다. 나는 이 논증을 단지 언어적이라고 무시한다. ‘지식이라는 용어가, 나에게 알려진 모든 언어들에서, 확실성이라는 어감을 지닌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과학은 가설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저 기초들 위에 안전한 지식의 구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이용 가능한 가장 확실하거나 기본적인 지식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관찰적 지식) 출발하는 상식적 프로그램은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부언하여 그 프로그램은 실재성에 관하여 비상식적인 두 가지 견해들을 초래하는데 그 견해들은 서로 직접적으로 모순을 이룬다.

 

1. 비물질론 (버클리[Berkeley], , 마흐[Mach])

2. 행동주의적 유물론 (왓슨[Watson], 스키너[Skinner])

 

이것들에서 첫 번째 것은 물질의 실재성을 부인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지식의 확실하고 안전한 토대가 우리 자신의 지각 경험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a 역주: 이 문장의 주어인 그 이론은 박영태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리고 이것들은 영원히 비물질적으로 남는다.

두 번째 견해는 정신의 (그리고 부언하여, 인간의 자유의) 존재를 부인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인간의 행동으로 그 행동은 모든 면에서 동물을 행동과 (그 행동이 넓고 중요한 분야인 언어적 행동를 포함하는 것을 제외하고)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론들 모두는, 실재가 상식이라는 이론에 대한 전통적이지만 무효한 비판을 낳고 그 비판은 상식이 지식이라는 무효한 이론에 근거한다. 이 이론들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 아니라 해롭다: 내가 우는 아이를 달래고 싶어 할지라도, 몇 가지 성가신 지각들을 (나 자신의 혹은 당신의) 중지시키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아이의 행동을 바꾸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혹은 아이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아니지, 나의 동기들은 다르다 ㅡ 증명될 수 없고 도출될 수 없지만 인간적이다.

비물질론은 (자체의 기원이,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토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ㅡ 물론 바물질론자가 아니었던 ㅡ 주장에서 기인하는)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동시에 19세기 초에 정점에 이르렀지만 이제 자체의 영향력을 잃었다. 비물질론은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다.

행동주의는 ㅡ 정신의 존재에 대한 부인 ㅡ 현재 크게 유행한다. 행동주의가 관찰을 열정적으로 칭찬할지라도, 모든 인간적인 경험에 공개적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윤리적 이론이 사실상 도출될 수 없을지라도 행동주의는 자체의 이론으로부터 윤리적으로 지독한 이론을 ㅡ 조건화 이론 ㅡ도출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자크 모노[Jacques Monod]는 이 요점을 올바르게 강조했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또한 참조하라.) 이 유행은, 그 이론의 옹호불가능성을 내가 밝히려고 노력한 상식이 지식이라는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에 근거하는데 자체의 영향력을 어느 날 잃을 것이라고 소망될 수 있다.

 

X

 

내가 철학을 보는 바와 같이, 철학은 과학들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정말로 결코 분리될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서구의 과학 모두는, 세계 질서인 우주에 관한 그리스의 철학적 사념에서 나온 자손이다. 모든 과학자들과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조상은 호머, 헤시오드(Hesiod)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다. 그들에게 핵심적인 것은 우주의 구조 및,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내가 바라보는 바, 모든 철학에 결정적인 문제) 포함하여, 이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이다. 그리고 심지어 과학들이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후에도, 철학적 탐구의 특징으로서 남은 것은 과학들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고 과학들이 발견한 것과 과학들의 방법들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다. 뉴튼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가장 위대한 지성적 혁명을 표시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 저서는, 2천 년에 걸친 꿈의 성취를 표시한다; 그 저서는 과학의 성숙을,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과학이 떨어져나감을 표시한다. 뉴튼 자신은,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철학자로 남았다; 그리고 그는 비판적 사상가이자 연구자로 남았고 자신의 이론들에 대하여 의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벤틀리(Bentley)에게 보낸 편지에서 (1693225일자) 자신의 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을 포함한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중력이 틀림없이 물질에 선천적이고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는 것은, 그리하여 한 물체가 또 다른 물체에게 원격으로 영향을 미치는데...나에게는 크게 터무니없는 일이어서 철학적인 문제들에서 유능한 사고 능력을 지닌 사람은 그 터무니없는 일에 빠지는 일이a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회의론과 신비주의에 도달한 것은 그 자신의 원격작용 이론 때문이었다. 우주의 무한하게 먼 영역들 모두가 즉각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동일한 것이 모든 영역들에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기 ㅡ 하느님이 도처에 존재하기 ㅡ 때문이라고 그는 추론했다. 그리하여 뉴튼이 자신의 신비적인 이론에 따라서 우주는 하느님의 감각중추(sensorium)라는 이론에 도달한 것은 이 원격작용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그 이론으로 과학을 초월했고,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철학 및 사변적인 종교를 결합한 이론. 우리는, 아인슈타인도 유사하게 동기를 부여받았음을 안다.

 

XI

 

a 역주: ‘크게 터무니없는 일이어서 철학적인 문제들에서 유능한 사고 능력을 지닌 사람은 그 터무니없는 일에 빠지는 일이의 원어 표현은 so great an absurdity that (I believe) no man who has in philosophical matters a competent faculty of thinking can ever fall into it인데 박영태 번역은 철학적인 문제들에서 상당한 사유의 능력을 가지 어떠한 사람도 중력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이다.

 

강단 철학에는 자체의 자연적이고 정말로 자체의 유일한 위치를a 지니는, 몇 가지 매우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철학에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예를 들어, 수리논리학(mathematical logic), 더 일반적으로, 수리철학(philosophy of mathematics). 우리 세기에 이 분야들에서 이룩된 놀라운 진보에 의하여 나는 큰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강단 철학에 관한 한, 버클리(Berkeley)세세한 철학자들(minutes philosophers)’로 지칭한 것의 영향력에 나는 우려한다. 비판은 틀림없이 철학의 생명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부사항에 몰두하는 것을b 피해야 한다. 우주론에 관한, 인간 지식에 관한, 윤리학에 관한 그리고 정치철학에 관한 커다란 문제들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진지하고 헌신적인 시도를 하지 않고 세세한 요점들에 대하여 세세하게 비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치명적이다. 어떤 노력을 들이면 혹시 오해되거나 잘못 해석될 인쇄된 구절은, 또 다른 비판적인 철학 논문의 서술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히 훌륭한 것처럼 거의 보인다. 학풍고집(Scholasticism)이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에서, 넘쳐난다;c 위대한 관념들 모두는 단어들의 홍수에 익사한다. 동시에 특정 오만이나 무례가 ㅡ 예전에는d 철학적 문헌에 드물었는데 ㅡ 학술지들의 많은 편집인들에 의하여 사상과 독창성의 대담성에 대한 증거로서 수용되는 듯이 보인다.

모든 지성인이 자신이 처한 특권적 입장을 경계하는 것이 지성인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지식인에게는, 가능한 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교양 있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인류를 에워싼 커다란 문제들을 결코 잊지 않고 새롭고 대담하지만 인내하는 사상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얼마나 지식이 없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소크라테스적 겸손을 요구하는 의무. 세세한 문제들을 지닌 그런 철학자들에 반대하여, 철학의 주요 과제는 우주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아는 능력들 및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능력들을 포함하여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a 역주: ‘자연적이고...자체의 유일한 위치를 지니는의 원어 표현은 natural and...their only place인데 박영태 번역은 당연하면서도...독보적으로 논의되는이다.

b 역주: ‘세부사항에 몰두하는 것의 원어는 hairsplitt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사소한 내용을 꼬치꼬치 따지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cholasticism, in the worst sense of the term, abounds;인데 박영태 번역은 스콜라 철학은 이 학파의 명칭에 대하여 아주 나쁜 의미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이다

d 역주: ‘예전에는의 원어는 onc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XII

 

나는 아마도 다소 결정적으로 비-강단적인 철학으로써 마쳐야 할 것이다.

달에 처음 착륙한 일에 참여한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은, 자신이 귀환할 때

간단하고 현명한 언급을 했다고 믿어진다 (나는 나의 기억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나는 나의 시대에 많은 행성들을 보았지만 매번 지구를 나에게 달라.’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지혜일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지혜다. 우리가 이 훌륭하면서도 작은 행성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ㅡ 혹은 왜 생명체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우리 행성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는지 ㅡ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에게는 그것에 놀라고 그것에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 우주에는 물질이 거의 비어있다; 그리고 물질이 있는 곳에는 그 물질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태로 도처에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없다. 생명체를 지닌 다른 행성들이 많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에서 무작위로 한 곳을 선택한다면 저곳에서 생명을 지닌 물체를 발견할 가능성은 (우리가 지닌 현재 의심스러운 우주론에 근거로 계산되면) 0이거나 거의 0일 것이다. 그래서 생명체에게는 아무튼 희귀한 것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귀중하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마도 생각을 하지 않아서 생명을 싸구려로 다룬다; 혹은 아마도 우리의 이 아름다운 지구가, 의심의 여지 없이, 다소 지나치게 인구과잉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정도로 모든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철학자들이다. 생명이 끝나기 때문에 생명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대 논증이 아마도 또한 제기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생명에 끝이 없다면, 생명에는 가치가 없을 터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가치를 우리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부분적으로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상존하는 위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