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과학자의 도덕적 책임
내가 토론할 예정인 주제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이 회의의 주관자들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관련된 중대한 문제들의 해결에 내가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많거나 적게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관하여 말해달라는 초청을 나는 수용했다. ‘과학자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우리의 주제는 핵전쟁과 생물무기 전쟁이라는 쟁점에 대한 일종의 완곡어법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더 넓은 쟁점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주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하겠다.
그 문제는, 최근 모든 과학과 정말로 모든 학습이 잠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경향을 띠었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최근 더 일반적이 되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이전에는 순수 과학자나 순수 학자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는 책임들을 넘어 오직 한 가지 책임만 ㅡ 즉, 진리 탐구 ㅡ 있었다. 그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과목의 성장을 촉진해야 했다. 내가 아는 한, 맥스웰에게는 자신의 방정식들의 적용에 관하여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헤르츠(Herz)도 헤르츠파(Herzian waves)에 관하여 염려하지 않았다. 이 행복한 상황은 과거의 일이다. 오늘날 모든 순수과학이 응용과학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순수학문도 그럴 것이다.
응용과학에서 도덕적 책임이라는 문제는 매우 오래된 문제이고 많은 다른 문제들처럼, 그 문제는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최초로 제기되었다. 그 주요 관념들 몇 가지가 새롭게 분석될 필요가 있을지라도 탁월한 문서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내가 비엔나대학을 졸업할 때 나 자신도, 틀림없이 역사적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나오는 선서를 했다. 히포크라테
이 논문은 1968년 9월 3일, 비엔나에서 열린 철학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Philosophy)의 ‘과학과 윤리: 과학자의 도덕적 책임(Science and Ethics: The Moral Responsibility of the Scientist)’이라는 특별 회의에서 강독된 간략한 연설의 수정본이다. 이 논문의 한 판본이 1969년 3월 Encounter에 발표되었고 수정본이 1971년 오슬로에서 Bulletin of Peace Proposals에 발표되었다. 논문은 현재 판본을 위하여 추가적으로 수정되었다. 나는 나의 친구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에게 원래 연설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크게 감사한다.
스의 선서 중 가장 흥미로운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은, 그것이 졸업 선서가 아니라 의사 직업의 수련의에 의한 선서라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그 선서는 학생이 처음 응용과학에 입문하면서 수행된다.
그 선서는 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수련의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깊은 개인적인 의무의 인정을 약속했다. 함축적으로 이 의무는 상호적인 것으로서 간주된다. 두 번째, 수련의는 자신의 의술전통 수행을 그리고 생명의 신성시라는 이념에 의하여 지배들 받는 그 전통의 높은 수준의 보존을 약속하고 그 수준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승할 것을 약속했다. 세 번째, 수련의는 어떤 집을 방문하든 자신은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만 그 집에 들어간다고 약속했고 자신의 시술 과정에서 자신에게 알려졌을 모든 것에 관하여 침묵할 것을 약속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한 많은 토론에서 수련의의 다시 말해서 학생의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수련의의 선서라는 사실을 나는 강조했다. 그러나 과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창조적인 과학자가 되자마자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 걱정하고, 그들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 쟁점들을 토론할 기회를 갖는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윤리적 토론들은 불행하게도 다소 추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 쟁점들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 기회를 우리가 잡아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나의 제안은, 우리 학생들과 협력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유사한, 현대적 형태의 약속을 우리가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 공식이 학생들에게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생들이 반대한다면, 그들의 관심은 그리하여 매우 환영을 받음이 밝혀질 터이고 그들은 대안적인 접근방식을 제시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틀림없이 받는다. 주요 목표는, 쟁점들의 중요성에 그들의 주목을 집중시켜 토론들을 유지하는 것일 터이다.
토론의 가능한 출발점으로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종류를 나는 아마도 지적할 것이다.
다양한 요점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하겠다. 그리하여 나의 아래 요점 1, 2 및 3은 위에 요약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부분들 2, 1 및 3에 개략적으로 대응할 터이다. 나는 또한, 그 선서의 주요 쟁점들이 혹시 다음 노선들을 다소 따라서 일반화될 것이라고 제안할 터이다.
1. 직업적인 책임. 진지한 모든 학생의 첫 번째 의무는 진리 탐구에 ㅡ 혹은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 탐구에 ㅡ 참여함에 의하여 지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다. 물론 심지어 가장 뛰어난 거장들처럼, 모든 학생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누구나 ㅡ 심지어 최고의 사상가들도 ㅡ 오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오류들을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고 틀림없이 격려를 받을지라도, 우리의 오류들을 관대하게 간주하려는 유혹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우리의 업적을 판단하는 높은 기준들의 설정과 힘든 노력에 의하여 이 기준을 부단히 높이는 의무 모두는 필수불가결하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특히 과학의 응용과 관련하여) 우리 지식의 유한성과 오류가능성 및 우리의 무지의 무한성을 부단히 상기시켜야 한다.
2. 학생. 그는 전통과 공동체에 속하여 그는, 진리 탐구에 기여했고 기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는 또한, 자유롭고 관대하게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나누어준 모든 스승에게 충심을 발휘해야 한다. 동시에 그에게는, 자신의 스승들과 동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에게 비판적일 의무가 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그에게는 지식적 오만을 경계할 의무와 유행성 지식에 굴복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3. 가장 중요한 충심. 이것을 학생은 스승 덕분으로 치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동료의 덕분으로 치부하지도 않으며 ㅡ 의사가 자신의 최고 충심을 자신의 환자들에게 부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ㅡ 인류의 덕분으로 치부한다. 학생은, 모든 종류의 학업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들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단히 인식해야 하고 그가 자신이 얻은 결과들이 응용되기를 원치 않을지라도, 자신이 얻은 결과들의 가능한 위험성과 가능한 오용을 예견하여 경계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언의 매우 잠정적인 재진술이고 기껏해야 재개된 토론에 대한 제안이어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화제에 부수적일 뿐이라고 나는 강조해야겠다. 그러나 내가 전통과 전통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수정의 필요를 신뢰하기 때문에 나는 이 실용적인 제안으로써 시작했다. 우리가 우리의 주요 쟁점에 관하여 할 수 있는 희소한 것들 중 한 가지 것은 모든 과학자들에게서 그들의 책임의식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 가지 요점이 언급되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들의 현재 (1968년) 위기와 연관될 것이다. 그 요점은 이렇다. 점점 더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해지고 결과적으로 점점 더 많은 철학박사 학생들이 기술자로서만 훈련을 받는다. 흔히 그들은 측정 기술에서만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하여 자신들이 하고 있는 측정들에 의하여 어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을 용서될 수 없고 무책임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나는 그 상황에서, 학문적 스승의 편에서의 일종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파기를 본다. 이유인즉 스승의 과제는 학생을 전통으로 초치하여, 지식의 성장을 통하여 출현하는 문제들을 그리고 나중에 모든 추가적 성장을 고취하고 그 성장에 동기를 부여하는 새로운 커다란 문제들을 그에게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심지어 아름다운 전통도 오용될 수 있다는 것과 그 선서를 자신의 직업적 동료들에 대한 특별한 윤리적 의무를 설정하는 것으로서 해석함에 의하여 그 선서가 오용되었거나 오해되었던 것을 나는 물론 안다. 다시 말해서 그 선서는 일종의 협동조합 도덕성으로서 해석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인식에서 많이 필요한 진보로 우리를 이끌기를 내가 소망하는 것은, 정확하게 윤리와 예절(‘직업윤리’) 사이의 일종의 격차와 같은 쟁점들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다. 나의 소망은 소박하다: 그런 토론들에 의하여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들 중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수정에 집중하는 토론으로 인하여, 고통 경감의 우선순위와 같은 근본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여러 해 전, 고통이 회피될 수 있는 한 공공정책과 관련한 의제가 먼저 고통을 피하는 방법과 수단을 발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했다. 이것은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과 대비되어, 예방될 수 있는 고통의 경감은 공공정책의 문제인 반면 주로 행복은 개인적인 행동에 맡겨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나는 제안했다. 나는 또한, 적어도 몇몇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행복을 말할 때 불행의 최소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물론 고통의 최소화가 최고의 도덕적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 적이 없다. 사실상 나는, 단 하나의 보편적으로 유효한 최고의 도덕적 원칙과 같은 것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다. 반대로, 공공정책의 문제들에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우선순위들 재고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선순위의 목록 작성에서 행복보다는 예방될 수 있는 고통이 우리의 주요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했다. 아마도 영원히는 아니다: 예방될 수 있는 고통의 경감이 오늘날보다 덜 중요한 때가 올 것이다.
오늘날 전쟁예방이 공공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일반인들의 동의에 의하여 말하겠다. 과학자든 학자든 시민이든 단순히 인간이든 우리 모두가 전쟁 종식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 및 파괴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관련해서도 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이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사건들의 가장 황당한 양상들 중 한 가지 양상은 폭력 숭배라는 것이 아주 명백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오락산업의 가장 무서운 양상들 중 한 가지 양상이, 무해하다고 주장되는 서부극과 범죄 이야기에서 잔인성일 뿐인 것에 이르기까지 폭력에 대한 끊임없는 선전임을 우리 모두는 안다. 이 선전이 심지어 진정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에게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음을 (혁명적 폭력 숭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보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과 현재의 베트남 비극도 인간의 공격성을 통하여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적어도 오늘날 전쟁위험은 공격에 맞서려는 필요성에서, 그리고 공격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이것들은, 멍청함과 지식적 유연성의 결여 및 혹시 과대망상증과 결합되어, 우리 손아귀에 있는 엄청난 파괴 수단이 존재함에서 위험의 주요 근원이 되는 경향을 띤다.
우리의 자유를 잃는 (나중에 궁극적으로 전쟁을 초래할 터인 잃음) 위험인 독재체제를 막는 문제만, 위급 시에, 전쟁을 예방하는 문제와 경쟁할 ㅡ 때때로 우리의 결심을 어렵게 만들 경쟁 ㅡ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하여 모든 군사적 연구로부터 철수하여 일방적인 군축을 포함하여 여하한 대가를 치르고도 군축을 전파하는 것이 과학자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상황은 전혀 저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핵전쟁이 지금까지 상호 파괴의 위험에 의하여 억지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지금까지 억지책은 억지에서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방적인 군축을 지지해야 한다고 내가 믿지 않는 이유이다. 일본이 핵무기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핵무기들을 사용했다. 군비경쟁에서 우리가 경쟁 국가들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자탄을 일본에 투하했어야 했는지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핵폭탄의 사용을 찬성했던 과학자들은 책임감이 큰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틀렸던 곳은, 관련된 더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이 ㅡ 투하된다면 ㅡ 전함들의 집결지와 같은 순전히 군사적 목표물에 투하되어야 한다고 그들이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집결지들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들과 같은 결정들은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 쉽지만, 참가하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어떤 결정이 궁극적으로 고통의 양을 줄일 터인지에 관하여 결심하는 것은 지독하다. 궁극적 결정에 책임이 있는 정치가들이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에 대한 피위임자들로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여러분이나 내가 정치인이 되지 않는 이유일 테지만, 여러분이나 내가 태만하게 판단을 정치인들에게 넘기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일부인 일반적인 관여로부터 완전히 뒤로 빠질 수는 없다: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실천되어야 하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실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의롭거나 방어적인 전쟁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 공격자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항상 수월하지는 않을지라도, 공격과 방어 사이의 차이점이 있는 세계가 있다. 오늘날 스위스나 스웨덴이 공격적인 전쟁을 시작할 터이라고 누가 믿는가? 1914년 7월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한 것은 세르비아였다고 혹은 1939년 11월 30일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은 핀란드였다고, 그 반대라기보다는, 누가 잠시라도 믿을 수 있는가? 혹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국가가 공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는 과학자는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심지어 정의로운 전쟁도 완전히 통제 불능상태에 빠질 수 있어서 내가 보기에 양편 모두에서 전쟁범죄가 없는 전쟁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리하여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시민처럼 과학자는 지독한 도덕적 난관에 봉착하고 아무도 그에게 충고를 제시할 수도 없으며 그의 책임을 수용할 수 없다.
한 가지 요점이 분명해질 수 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조직한 사람들은 다양한 연합국들의 법무관들이었는데, 그 재판으로 인하여 전쟁범죄의 위상이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특정 명령이 거부되어야 하는지 혹은 거부되지 말아야 하는지의 질문과 관련하여 모든 인간의 양심이 최종심임을 인정되었다. 이제 이 동일한 정치가들과 법무관들이 이유를 묻지 않고 어떤 명령에도 복종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목표로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자유는, 우리가 느끼기에 복종하면 범죄일 터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위치할 지독한 상황을 이해하고, 양심적 반대자가 과학자이든 군인이든 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모든 충성스러운 정치가의 불가피한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미국에서 양심적 반대자와 관련한 현재 입법 문제는, 양심적 반대를 주장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양심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되는 전쟁이 미국 방위를 위함을 자신들이 알 수 있다면 미국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느낄 터이지만 베트남에서는 양심적으로 싸울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히 그런 도덕적 고찰은, 양심적 반대에 대한 현재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 속하는 도덕적 고찰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항상 그러한 바와 같이 여기서도 나는, 양편 중 한편으로부터의 안이한 구호보다는 관련된 쟁점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신뢰한다.
나는 이 매우 엄중한 쟁점들을 토론하는데, 그 쟁점들을 해결하거나 그 쟁점들에 관하여 매우 새로운 것을 말할 나의 능력을 내가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그 쟁점들이 회피되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의 도덕적 책임은, 전쟁이나 군비와 관련한 그의 책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고인이 된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고된다: ‘우리 과학자들은 요즘 오만의 벼랑 끝이 서있다. 우리는 죄악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최근의 쟁점이 아니다. 지식은 힘이다라고 말함에 의하여 베이컨이 과학을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을 때, 그도 역시 오만의 벼랑 끝에 서있었다. 그에게 많은 지식이나 많은 힘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힘을 원했기 때문에 그는 지식을 원했다 ㅡ 혹은 적어도 그는 자신이 그렇다는 인상을 풍겼다.
나의 경험에 의하여 권력에는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는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액튼 경(Lord Acton)의 말이 입증될지라도, 나에게는 일반적인 권력의 사악함에 관하여 철학화할 의도가 없다. 과학에 관한 한, 과학을 자신의 권력 증대의 수단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죄악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유혹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는 우리가 아는 게 얼마나 없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또한 우리가 이룩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저 극소수의 추가사항들 중 최고의 추가사항들로 인하여, 우리가 지닌 무지의 새로운 대륙 전체가 열렸다는 정확한 사실에 의하여 그 추가사항들의 의미가 밝혀졌다는 것이 이 유혹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이다.
사회과학자들에게는 여기서 특정 책임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연구들이 종종 권력의 이용과 오용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정되어야 하는 사회과학자의 도덕적 의무 중 한 가지 의무는, 그가 권력의 도구 특히 어느 날 자유를 위험에 빠뜨릴 권력의 도구를 발견한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그 위험들을 경고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반대-조치들의 발견에 또한 헌신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사실상 대부분의 과학자들, 적어도 창조적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매우 귀중하게 여긴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 대부분은, 과학기술전문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대중매체에 의하여 조작되는 사회라는 바로 그 관념을 증오한다. 그들 대부분은, 이 과학기술에 내재된 위험들이 전체주의의 위험들과 비견될 수 있다고 동의할 터이다. 그리나 우리가 전체주의와 싸우기 위하여 핵폭탄을 구축했을지라도, 대량 조작의 위험과 싸우는 수단들을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과제로서 간주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러나 언론검열이나 유사한 자유의 제한 없이 이 방향으로 많은 것이 이룩되어야 하고 이룩될 수 있을 터임은 내가 생각하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시민의 책임이나 다른 인간의 책임 및 다른 과학자의 책임과 같은 것이 있는지는 의문시될 수 있을 터이다. 답변은, 모든 사람이 특별한 힘이나 특별한 지식을 지닌 분야에서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주로 과학자들만 자신들이 발견한 것의 영향력을 측정할 수 있다. 비전문가와 그리하여 정치인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새로운 무기들에 대해서와 같이 많은 농산물을 증산하기 위한 새로운 화학제품들 같은 것에도 해당된다. 과거의 귀족의 의무(noblesse oblige)와 꼭 마찬가지로 지금은 메르시에(Mercier) 교수가 표현한 바와 같이, 지식인의 의무(sagesse oblige)이다: 의무가 만들어지는 때는 지식에 대한 잠재적 접근이다. 오직 과학자들만, 예를 들어, 인구 증가의 위험이나 석유 생산품의 소비 증가의 위험이나 원자력 폐기물에 내재하고 그리하여 심지어 평화를 위한 원자력 이용에 내재한 위험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식하는가? 그들 중 몇몇 인식하지만, 내가 보기에 흔히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아마도 몇몇은 너무 바쁘다. 다른 과학자들은 아마도 너무 무신경하다. 이런저런 정도로 우리의 부주의한 일반적인 과학기술적 진보가 초래하는 의도하지 않은 반향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듯이 보인다. 적용 가능성들은 매우 흥미로운 듯하다. 과학기술적 진보로 인하여 항상 우리가 더 행복한지를 많은 사람들의 질문하지만, 얼마나 많은 예방될 수 있는 고통이 의도되지 않지만 과학기술적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가 되는지를 알아내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로 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우리의 행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라는 의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흔히 예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결과들은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과학자가 과학의 응용에 불가분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자 역시 자신의 업적이 초래하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을 가능한 한 멀리 예견하는 것과 바로 시작부터 우리가 예방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에 타인의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것이 그의 특별한 책임 중 한 가지 책임으로 간주해야 한다.
주석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신 건강과 정신 질환 (0) | 2021.09.18 |
---|---|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7장 역사철학에 대한 다원론적 접근 (0) | 2021.09.04 |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5장 철학과 물리학 (0) | 2021.08.13 |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4장 과학 - 문제, 목표, 책임 (0) | 2021.08.07 |
이론구조의 신화, 과학과 합리성을 옹호하여 3장 부록 1974년 프랑크푸르트학파 (0) | 202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