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고대 그리스 문명과 기독교

이윤진이카루스 2021. 9. 1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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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문명과 기독교

 

현대 세계의 과학과 문학이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하는 반면 유럽의 종교는 그 근원에서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것이라고 때때로 주장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대비가 너무 강력하게 서술된다. 그리스는 과학과 문학 못지않게 종교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생애를 기록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내 십자가 처형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나서 마가(Mark)가 펜을 들고 서술했는데 그가 자신의 영혼을 새로운 매혹으로 채웠던 자신의 스승이자 예언자의 생애 과정을 추적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난(Passion)과 부활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신성하고 예정된 인물로서, 유대 경전에 예언된 메시아로서 기적에 대한 예수의 많은 증거를 암송함으로써 예수를 증거했다는 것인데 그는 세상을 심판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가르침의 전개를 연대기 순으로 추적하거나 주어진 연도나 월이나 일주일이나 일(day) 동안 그의 삶을 재구성할 수 없다.

윤리적 가르침의 귀중한 단편들이 복음서들에 그리고 산재하는 언급들에 담겨있는데 그것 중 몇 가지는 겨우 최근에 이집트에 있는 땅에 묻힌 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에 기독교의 전파는, 기독교적 삶만 완벽하다는 신념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이 발현되었다는 믿음에서 기인했다. 사도들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메시아적 권위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사도들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고 회개를 설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하여 그들 세대의 많은 사람과 공동으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었으며 예수는 세례를 받은 분으로 하늘의 아들이며 최후의 심판 날 이전에 인류를 올바름으로 소환하기 위하여 보내졌다고 믿었다.

초기 사도들은 그리하여 당시 영원한 보편적 교회를 꿈꾸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가까웠고 선택된 자들의 숫자는 반드시 작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유대 성전들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데 만족했다.

타르소 출신의 바울(Paul of Tarsus)은 기독교를 비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디아스포라(Diaspora) 당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골로새서나 에베소서는, 정말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바와 같이 그가 그리스 종교의 우화들과 신비들에 익숙하다는 것과 그가 그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그리스로부터 자신들의 문화를 도출한 비유대인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가 좁은 유대인 동포애와 더 넓은 그리스 동포애 모두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서쪽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도시 인구들에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직접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을지라도, 유대인의 광신주의를 지닌 기독교들이 박해를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을 점령했다는 신념에 그가 별안간 도달했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의미가 적었다. 이 타오르는 신앙으로 인하여 그의 웅변에 날개가 달렸다. 그의 선교 여행에서 그가 여행한 곳마다 그는 개종자들을 만들어, 신앙과 자기-희생 및 애정으로 결속된 남녀 기독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들을 세웠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살로니카(Salonika), 아테네, 코린트 그리고 로마에서 설교했는데 모든 곳에서 그는 유대율법을 자유롭게 다룸에 의하여 그리고 이교도 사회의 당시 신앙에 그는 두드러진 대비를 제공함에 의하여 강력한 영혼적 흥분상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열렬한 천재성의 강력한 충격을 받아서 작은 유대교 교파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서기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자체의 호소력에서 그렇게 크고 인간적인 신앙이 되어서 어떤 유럽 인종이 아무리 무례하고 잔인할지라도 그 신앙의 영혼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2세기경 지중해 연안의 주요 항구 마을들과 많은 고지대의 마을들 또한 작은 기독교도 무리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그리고 심지어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그들을 박해의 대상으로 골라낸 기원후 65년에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인정되었고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들과 흔히 혼동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유대인들과 공유했다. 그들은 믿음과 행동이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따로 살았는데 그 원칙들에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이전에 삶의 불결함에 기뻐했고 지금은 순결함을 사랑한다; 또한 마술을 이용했고 지금은 선하고 독생자인 하느님에게 헌신한다; 우리는 돈과 소유물이라는 재원을 다른 것보다 사랑했고 지금은 실제로 가진 것을 나누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우리는 서로 증오하고 서로 죽였으며 또 다른 인종인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래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우리의 적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고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는 서술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 세계와 그렇게 두드러지게 분리되어 있었던 반면,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인류 역사의 반전으로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에 의하여 지정된 인류 역사의 실천으로서 간주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힘의 근원이었다. 기독교 옹호자들은 동등하게, 유대교 성경에서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서 그리고 그리스 무녀 시빌레(sibyl)의 예언에서 그들의 신앙에 대한 권위를 기꺼이 찾았다. 기독교교회가 세상의 추방자들에게 구원을 제공한 반면, 현명한 자들의 근거에 관하여 현명한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도전했으며 망설이지 않고 고대인들의 사상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기독교교회의 성공 비결들 중 한 가지 비결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근원에 관해서나 그 복음서가 서술된 환경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나은 의견은 2세기 초기에 에베소에서 장로인 요한에 의하여 그 복음서가 구성된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탁월한 성서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현재 상태보다 전혀 다른 것일 터이다. 그 성서가 성 바울에 의하여, 아마도 또한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이 계승한 신앙의 진실들에 대한 증거를 진화시킨 박식한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필로는, 플라톤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어서 그 아테네 사상가의 고양된 가르침을 유대교나 기독교 교서들과 조화시키는 유쾌한 과제에 몰두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긴 반열에서 최초의 사람이었다. 거의 13세기 동안 서양에서 기독교회의 신학은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지식의 장애 시대가 뒤를 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적이고 물리학적인 글들은 스페인의 아랍인들을 통하여 복원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이교도적인 과학에 직면했고 기독교 관념론은 경험에 근거한 철학에 직면했다. 심지어 파리 대학(the Paris University)에 있는 박사들이 범신론으로 희롱하여 천지창조에 대한 정통 견해에 도전했을 때 고민의 순간과 기본원칙들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이 있었다. 두 명의 위대한 도미니크회 박사들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활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톨릭교회라는 마차에 묶어서 상황을 복원시켰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고상하고,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원초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모든 동양 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그리스적이 아니었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최고 사상들과 연옥과 속죄에 대한,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고통에 대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신적(神的: divine) 중재자에 대한 그리고 죄인들은 아마도 죄의 사함을 받고 이후 그의 구원을 확신 받는 어떤 신성한 의식에 대한 저 대중적인 관념들과 거의 동일하게 가장 유사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신앙이 유럽을 정복했을지는 의심스러운데 그것들은 당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그리스 문명이 우세하던 지중해 연안의 저 넓은 지역에 걸쳐서 근엄한 종교적 의식의 토대였다.

H.A.L. 피셔(Fisher), ‘유럽사(History of Europe)’, 49~53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