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용어는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α) 집단주의의 반대로, 그리고 (b) 이타주의의 반대로 사용될 수 있다. 전자(前者)의 의미를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지만 후자(後者)에 대한 동의어는 몇 가지가 있어서 예를 들면 ‘이기주의’나 ‘이기심’이다. 이것이 다음에서 내가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α) 의미로만 사용하고 (b)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이기주의’나 ‘이기심’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이다. 작은 표를 만들면 유용할 것이다:
(α) 개인주의는 (α') 집단주의의 반대이다.
(b) 이기주의는 (b') 이타주의의 반대이다
이제 이 네 가지 용어들은, 규범적 법칙들의 법전에 대하여 어떤 자세나 요건 혹은 결정이나 제안을 기술한다. 반드시 모호하겠지만 이 용어들은 사례에 의하여 쉽게 예시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현재 목표와 관련하여 충분히 정확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집단주의는 우리가 플라톤의 전체론을 논의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하기에 집단주의로써 시작하자. 우주이든, 도시이든, 종족이든, 인종이든, 혹은 다른 집단이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은 수단으로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앞장에서 몇 구절로 예시되었다. 이 구절 중 하나를 더욱 완벽하게 다시 인용하면: ‘부분은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전체를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전체는 당신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이 인용문은 전체론과 집단주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던 (구절의 서두에서 알려질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인용문이 지니는 강력한 매력을 전달한다. 그 매력은 다양한 감정, 예를 들어 집단이나 종족에 속하고자 하는 갈망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매력에 있는 한 가지 요인은, 이타주의를 찬성하는 도덕적 호소이자 이기심이나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적 호소이다. 당신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당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플라톤은 암시한다.
이제 내가 만든 작은 표를 한 번 보면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가 아니며, 또한 이타주의나 이타심과 동일하지도 않다. 집단적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 예를 들어 계급 이기주의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집단주의와 같은 것은 이기심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른 한편으로, 반(反)-집단주의자,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자는 동시에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는 다른 개인을 돕기 위하여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 하나는 아마도 디킨즈(Dickens)일 것이다. 디킨즈가 지녔던 이기심에 대한 열렬한 증오와 인간의 약점 모두를 지닌 개인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흥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력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무명의 집단들에 겨냥된다면, 지금 우리가 집단적 단체나 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또한 심지어 진실로 헌신적인 이타주의에 대한 혐오와도 연결된다. (나는 Bleak House에 나오는 ‘공공의 의무에 헌신하는 부인’인 젤리비[Jellyby] 부인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예시들로 인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의 의미가 충분히 명확하게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예시들로 인하여, 내가 만든 표의 어떤 용어도 다른 칸에 있는 두 용어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가지 결합이 가능하다).
이제 플라톤에게도,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에게도 이타적 개인주의가 (예를 들어 디킨즈의 이타적 개인주의와 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플라톤에 따르면, 집단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이기주의이다; 그는 모든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고 모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다. 이것은 용어사용법의, 언어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네 가지 가능성 대신에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오늘날까지 윤리적 문제를 고찰함에서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개인주의를 공격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집단주의를 옹호하여, 그는 우리가 지닌 이타심이라는 인도주의적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 자신의 공격에서, 그는 모든 개인주의자를 이기적으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헌신할 수 없는 것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 공격은 플라톤에 의하여 우리가 지닌 의미로서의 개인주의를 겨냥, 다시 말해서 인간 개인의 권리를 겨냥한다 할지라도 물론 매우 다른 표적인 이기주의에 도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끊임없이 플라톤의 의하여,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다.
플라톤은 왜 개인주의를 공격하려고 했던가? 그는 자신의 포화로 개인주의를 겨냥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개인주의는 아마도 평등주의보다 새롭게 출현한 인도주의적 신념을 훨씬 더 많이 방어하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정말로 종족주의를 와해시키고 민주주의를 발흥시킨 위대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플라톤의 기괴한 사회학적 직감은, 그가 적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변함없이 적을 감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인주의는 정의에 관한 오래된 직감적 관념의 한 부분이었다. 정의란 플라톤이 설명할 바와 같이 국가의 건강과 화합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다루는 어떤 방식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사람에게 내재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에 의하여 강조된다고 기억될 것이다. 이 개인주의적 요소는 페리클레스 세대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페리클레스 자신은 법률은 동등한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그들의 개인적 분쟁에서’ 보장해야 함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웃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결정한다면 그를 괴롭히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국가는 ‘사람들을 풀어놓을 목적으로,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언급과 비교하라.) 페리클레스는 이 개인주의가 이타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 그리고 그의 연설은 ‘행복하게 다재다능하고, 자주적으로’ 자란 아테네 젊은이를 기술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결합되어, 우리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핵심적 원칙이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서는 말하지 ‘너의 종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우리 문명에서 성장하여 그 문명을 자극하는 모든 윤리적 교설의 핵심이다. 개인주의는 또한, 예를 들어, 칸트의 중심적이고 실용적인 원칙이다 (‘항상 인간 개인이 목적임을 인식하라, 그리고 인간 개인을 당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만으로 이용하지 말라’).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서 그렇게 강력했던 다른 사상은 없었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971년, 100~102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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