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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6장 전체주의적 정의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2. 3. 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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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정치강령

 

 

6 : 전체주의적 정의(正義)

 

플라톤의 사회학을 분석하면 그의 정치강령은 쉽게 나타난다. 그의 근본적인 요구는 두 가지 공식 중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는 그가 주장하는 변화와 정지에 대한 이상주의적 이론에 대응하고, 둘째는 그의 자연주의에 대응한다. 이상주의적 공식은: 모든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켜라! 변화는 악이고 중지는 신성하다. 국가가 그 원형을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다시 말해서 도시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모든 변화는 중지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자연주의적 공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우리 선조들이 살던 원래 국가로,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설립되어 안정된 원시 국가로 돌아가라;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종족적 가부장제로, 소수의 현명한 자가 무지한 다수를 지배하는 자연적인 계급 지배로 돌아가라.

실제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강령의 모든 요소가 이 요구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요소들 자체가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안정된 계급 지배를 위한 조건에 관한 플라톤의 사회학적 교설들과 틀림없이 결합된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주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A) 엄격한 계급 구분; 다시 말해서 목자(牧者)와 파수 견으로 구성된 지배 계급은 인간 가축과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B) 국가의 운명과 지배 계급 운명의 동일시; 이 계급과 이 계급의 단결에서 독점적 이권; 그리고 이 단결에 복속하는, 이 계급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한 엄격한 규칙과 계급 구성원의 이권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집단화하기.

이 주요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들이 도출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C) 지배 계급은 군사적 덕행 및 훈련 같은 것을 독점하고, 무기를 휴대할 권한과 모든 종류의 교육받을 권리를 독점한다; 그러나 이 계급은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특히 돈을 버는 일로부터 제외된다.

(D) 지배 계급의 모든 지적(知的) 행위는 검열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주조하고 통일시키는 목적으로 지속적인 정치선전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 입법 그리고 종교에서의 모든 혁신은 금지되거나 억제되어야 한다.

(E) 국가는 자족적(self-sufficient)이어야 한다. 국가는 경제적 자급자족을 겨냥해야 한다; 그 까닭은 그렇지 않다면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거나 그들 스스로 상인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면 지배자들의 권력이 약화할 터이고, 지배자들 스스로 상인이 된다면 그들의 단결과 국가의 안정이 약화할 터이다.

이 강령은 전체주의적으로서 정당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강령은 틀림없이 역사주의적 사회학을 근거로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전체주의적이지도 않고 역사주의를 근거로 세워지지도 않은 요소인, 플라톤의 강령과 관계된 다른 특징은 없는가? ()과 미()를 향한 플라톤의 열정적인 욕망은 어떠한가, 또는 지혜와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떠한가? 현명한 자인 철학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자신이 만든 국가의 시민을 행복하고 도덕적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떠한가? 그리고 국가란 정의(正義: justice)를 바탕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심지어 플라톤을 비판하는 저술가들도 그의 정치강령은 시민들의 행복과 정의(正義: justice)의 지배라는 그의 목표에 의하여, 어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전체주의와 분명히 구별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철학은 자유 사상에 대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심한 공격이라는 크로스먼(Crossman)의 언급으로부터 그의 비판적 자세가 측정될 수 있는데, 플라톤의 계획은 그 안에서 모든 시민이 실제로 행복한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그가 여전히 믿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조드(Joad)인데, 그는 플라톤의 강령과 파시즘의 강령 사이의 유사성을 다소 길게 토론하지만, 플라톤이 주장하는 최고의 국가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내재하는 그런 행복을 이루기때문에, 그리고 이 국가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정의(正義)’라는 이념을 토대로 건설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의 정치강령이, 전체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기는커녕, 전체주의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 견해에 대한 반대의견들이 플라톤의 이상화를 선호하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편견에 근거한다고 나는 믿는다. 크로스먼이 이러한 경향을 지적하여 파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은 다음 진술로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플라톤은.. 자유 사상의 모든 원칙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반동자로서 완전히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실제 생활에서 격리되어 신()의 초월적 도시를 꿈꾸면서 높은 경지로 추앙되었다,.. ’ 그러나 크로스먼 자신은, 그렇게도 명백하게 폭로했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로우트(Grote)와 곰페르츠(Gomperz)국가(Republic)법률(Laws)에 있는 몇 가지 교설들의 반동적 특징을 지적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도 이 교설들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플라톤이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적대적 비판은 무시되었거나,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고, 혁명가들에 의하여 혁명가로 여겨지던 플라톤을 이해하여 평가하지 못했다고 해석되었다. 플라톤에 대한 이런 종류의 완전한 신뢰는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우세해서, 예를 들어 필드(Field)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라고 경고할 필요를 느낀다. 이것은 물론 매우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나 적어도 진보주의자로 만들려는 경향이 꽤 퍼지지 않는다면, 그 지적은 분명히 중요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필드 자신이 동일한 종류의 신뢰를 플라톤에게 보내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플라톤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새롭고 체제전복적인 조류를 강하게 반대하고있었다고 말을 이어갔을 때, 그는 확실히 플라톤이 증언하는 이 새로운 조류의 체제전복성을 너무 쉽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적들은 항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체제전복을 꾀한다고 비난해왔다. 그리고 거의 늘 그들은 정직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위대한 이상주의자를 이상화하는 일은 플라톤 글의 해석뿐만 아니라 번역에도 퍼져있다. 인도주의자가 틀림없이 말하는 것이라는 번역자의 견해와 맞지 않는 플라톤의 격렬한 언급들은 흔히 완화되거나 잘못 이해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플라톤 작품인 소위 공화국(Republic)’이라는 바로 제목의 번역에서 시작된다. 이 제목을 들을 때 우리의 처음 생각에 와 닿는 것은 저자가 혁명가가 아니면 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제목은 아주 단순히, 이런 연상과는 관계가 없이 그리스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영어 형태이고 그 단어를 적당한 영어로 번역하면 정치체제도시 국가혹은 국가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번역인 공화국은 플라톤이 반동적이었을 수가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틀림없이 기여했다.

()과 정의(正義), 그리고 언급된 다른 이념들에 대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의 정치적 요구가 순전히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이라는 나의 논지는 방어될 필요가 있다. 이 방어를 수행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 네 장에서 역사주의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고 언급된 윤리 이데아와, 그 이데아들이 플라톤의 정치적 요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집중하겠다. 이 장에서, 나는 정의의 이데아(Idea of Justice)를 검토할 것이다; 다음 세 장에서는 가장 현명한 자와 가장 우수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교설 및 진리, 지혜, () 그리고 미()의 이데아를 검토하겠다.

 

I

우리가 정의(正義)’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한 용어들이 항상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종류의 언어적 질문이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그 질문에 확정된 답변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특히 인도주의적인 일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α) 시민의 의무를 동등하게 분할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자유의 제한을 동등하게 짊어지는 것; (b) 법률 앞에서 시민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 물론 (c) 법률이 개별 시민이나 집단, 계층에 특혜도 불이익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d) 법원의 불편 부당성; 그리고 (e) 국민인 시민에게 제공될 이익의 (부담뿐만 아니라) 균등분배. 플라톤이 정의로써 이런 종류 어느 것을 의미했다면, 그의 강령이 순전히 전체주의적이라는 나의 주장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고 플라톤의 정치학이 수용될 수 있는 인도주의적 토대에 근거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정의로써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정의(正義: justice)’로써 플라톤은 무엇을 의미했던가? 나는 국가(Republic)에서 그가 올바르다라는 용어를 최상의 국가의 이익과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최상의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엄격한 계급 구분과 계급 지배를 유지함으로써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내가 옳다면, 플라톤의 정의 요구로 인하여 그의 정치강령은 전체주의 수준에 남는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하여 감동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정의(Justice)국가(Republic)의 핵심적인 화제이다; 사실상, ‘정의에 관하여(On Justice)’가 그 저서의 전통적인 부제(副題)이다. 정의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플라톤은 앞장에 언급된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먼저 국가에서 이 이데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다음에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플라톤의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빠르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 답변이 오직 4권에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답변에 이르는 고찰들은 이 장 후반에 더 자세하게 분석될 것이다. 간단히, 그 고찰들은 이러하다.

도시는 인간 본성과 인간 본성의 욕구 그리고 인간 본성의 한계를 근거로 세워진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 각자가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고 우리가 서술했고 반복해서 말한 것을 당신들은 기억할 것이다; , 자신의 본성이 자연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저 직업.’ 이것으로부터 플라톤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힘써야 한다고, 목수는 목수일에만 전념해야 하고, 제화공은 구두 만들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자연적인 직업을 바꾼다면 별로 해가 되가 않는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 (아니면 돈을 버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군인 계층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군인이 수호자 계층으로 그럴 자격 없이 들어간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음모는 도시의 멸망을 의미할 것이다.’ 무기휴대는 계급의 특권이어야 한다는 원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 주장으로부터 플라톤은 세 계급 내부의 변화나 상호 혼합은 틀림없이 불의라는, 그리하여 그 반대는 정의라는 최종 결론을 도출한다;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층까지 도시 속의 각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이것이 정의일 것이다.’ 이 결론은 잠시 뒤에 재확인되고 요약된다: ‘도시는 정의롭다.. 그 도시의 세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그러나 이 서술의 의미는, 플라톤이 정의를 계급 지배와 계급 특권의 원칙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원칙은 간단명료하게 국가란 지배자가 다스리고, 노동자가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의 일을 한다면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은, 위에서 분석된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진 평범한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반면, 플라톤은 계급 특권을 정의롭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차이점은 저것보다 더 나아간다.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 간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관계에 기초한 국가 전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반면, 우리는 정의를 개인들을 대함에서 어떤 종류의 평등을 의미한다. 국가는 만약 건강하고 강력하고 단합되면 정의롭다 ㅡ 안정된다.

 

II

그러나 혹시 플라톤이 옳지 않았을까? ‘정의는 그가 말하는 것을 혹시 의미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런 질문을 논의할 의도가 없다. 만약 누가 정의는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스리는 의미라고 믿는다면, 나는 불의를 환영할 것이라고 대답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말에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요구나, 우리가 채택하기로 결정한 정책을 구성하는 제안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 뒤에는,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에 대한 그의 요구와 그 계급 지배를 성사시키려는 그의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는 옳지 않을까?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이 단어를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부응하지 않을까? 혹시 그리스인들은 정의국가의 건강과 같은 전체론적인 것을 의미해서 플라톤으로부터, 법률 앞에서의 시민들의 평등과 같은 우리들이 가지는 현대적 정의 개념에 대한 전례를 기대한다는 것은 완전히 부당하고 비역사적이지 않을까? 이 질문은 정말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전체론적인 관념은, ‘로마인처럼 구체적으로 법률적이 아니라오히려 구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인전통적인 그리스 의견인 그리스적 천재성 특징이라는 주장이 대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 사실상, 그리스인들이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 자신의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용법과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먼저 대화편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국가[Republic]보다 앞선 저술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견해로서, 그리고 규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와도 일치하는 정의는 평등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말하는 플라톤 자신을 언급하겠다. 나아가 플라톤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것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부적으로 노예로 태어난다는 이론을 상술한, 평등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나는 인용하겠다. 그는 정의라는 용어에 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을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의로운 것의 화신으로 그가 기술하는 판사에 대하여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을 복원하는 것이 판사의 임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정의를 일종의 평등이다라고, 평등, 인간에게 한 부분으로 속하는것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심지어 정의에 대한 그리스어가 평등 분배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틀렸다). (‘정의시민들에게 전리품과 명예를 평등하게 배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법률[Laws]에서 플라톤의 견해와 일치하는데, 그 저술에는 전리품과 명예를 배당하는 데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이 ㅡ 숫자적, ‘산술적평등과 비례적평등 ㅡ 구분된다; 비례적 평등은 문제의 사람들이 지닌 덕행과 교육, 그리고 재산의 정도를 참고한다 ㅡ 그리고 그곳에서 이 비례적 평등은 정치적 정의로 언급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 원칙을 토론할 때, 그는 민주주의적 정의란 (비례적 평등과 구별되는) 산술적 평등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정의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인상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플라톤 이후에 고르기아스(Gorgias)법률(Laws)의 영향을 받아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기술한 것뿐만도 아니다; 그것은 더 정확히 말하여 정의라는 단어를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자 보편적이고 고대적인 표현이다.

이 증거를 참작하여, 국가(Republic)에 있는 전체론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인 정의에 대한 해석이 한 가지 혁신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반대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 플라톤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를 정의로운 것으로서 제시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결과는 경악스러운 것이었고 몇 가지 의문을 불러온다. 왜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정의가 일반적으로 평등을 의미하는데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개연성이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정의로운국가라고 사람들을 설득함으로써 그 국가를 정치적으로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단어들이 아니고 단어들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러한 시도는 그에게 가치가 있었을까? 물론 가치가 있었다; 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에게 자신이 솔직하게 정의를, 즉 독자들이 갈망하던 정의를 옹호한다고 설득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권위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정의 개념보다 그의 정의 개념이 더 진실하고 더 낫지 않은지 자문하기 시작한 평등주의자들과 개인주의자들 사이에 그는 의심과 혼동을 흩뿌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목표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하여 어떤 일이든 참아내고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힘을 쓸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인도주의적인 힘을 얻어내는 것, 혹은 적어도 평등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전체주의 신봉자들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가 국가(Republic)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 때문이다: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 때,.. 그의 용기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러나 사람이 불의를 당했다고 믿을 때, 그의 활기와 분노는 즉각 타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이 정의롭다고 믿는 편에 서서 싸울 때, 사람은 굶주림과 추위와 어떤 종류의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은 똑같이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거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양된 상태를 지속하여, 극복할 때까지 견디어내지 않는가?’

이것을 읽으면, 플라톤이 신념의 힘과 무엇보다도 정의에 대한 신념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국가(Republic)가 이 신념을 왜곡시키고, 정반대 신념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증거를 검토하면, 플라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 느껴진다. 평등주의는 그에게 최고의 적이어서 그는 평등주의를 파괴하려고 애를 썼다; 분명히 평등주의는 커다란 악이고 커다란 위험이라고 성실하게 믿으면서.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정직한 공격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감히 적에게 공개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나는 나아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겠다.

 

III

국가(Republic)는 아마도 정의에 관하여 저술된 저서 중에서 가장 자세한 해설서일 것이다. 그 저서는 정의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데, 자신에게 알려진 더 중요한 이론을 하나도 플라톤이 빼먹지 않았다고 우리를 믿도록 유도하는 그런 방식으로 검토한다. 사실상, 플라톤은 당시 견해 가운데서 정의를 추적하여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의를 새로 찾는 것이 필요했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당시 이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isonomy’) 견해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생략은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간과했거나 의도적으로 그 이론을 피한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국가(Republic)가 쓰인 정성을 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려면 적들의 이론을 플라톤이 분석해야 하는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매우 개연성이 적다. 그러나 당시 평등주의 이론이 받은 광범위한 인기를 고려할 때 이 가능성은 훨씬 더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개연적인 주장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는데 그 까닭은 플라톤이 평등주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국가(Republic)를 집필할 때 그 이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쉽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장 (2절에서)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나중에 (8절에서) 자세히 밝혀지는 바와 같이, 평등주의는 심지어 옹호되기조차 하는 앞선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국가(Republic) 어디에서도 평등주의의 장점과 단점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평등주의의 영향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라는 저서 자체가 평등주의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Republic)에서 평등주의는 매우 대중적인 민주주의적 신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평등주의는 조롱으로만 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듣는 평등주의에 대한 모든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설적 공격과 잘 어울리고, 정의가 논의의 주제가 아닌 곳에 가해지는 비아냥과 심술로 짜여진다. 정의와 관련된 평등주의 이론이 플라톤에 의하여 간과되었을 가능성은 그러므로 배제되며, 그가 자신의 이론과 완전히 반대로 영향력이 있는 이론에 대한 토론이 필수적임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역시 배제된다. 국가(Republic)에서 그의 침묵이 단지 몇 가지 농담에 (그가 그 농담들이 억압하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분명히 생각했을지라도) 의하여 깨진다는 사실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하기를 의식적으로 거절하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모든 중요한 이론이 검토되었다는 믿음을 각인시키는 플라톤의 방식이 어떻게 지적(知的) 솔직함의 기준과 일치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에서 배제한 이유가 틀림없이 자신이 그 선량함을 굳게 믿었던 대의명분에 철저히 몰입했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이 쟁점에서 플라톤이 실제로 계속 침묵을 지키는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플라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평등주의 운동은 그가 증오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였으며 국가(Republic)와 다른 나중 작품에서 그 자신의 이론이 대체로 새로운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라는 강력한 도전에 대한 답변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인도주의의 주요 원칙을 논의하고 대응하는 플라톤의의 전체주의 원칙과 대조하겠다.

정의와 관련된 인도주의적 이론은 세 가지 주요 요건, 즉 제안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α) 본래의 평등주의 원칙인데, 다시 말해서 천부적특권을 없애자는 제안이고, (b) 개인주의라는 일반원칙이며 (c)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정치적인 요건이나 제안에 대하여 정반대로 대응하는 플라톤의 원칙이 있는데, 이름하여 (α

) 천부적 특권의 원칙, (b

) 전체론이나 집단주의라는 일반원칙, 그리고 (c

)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은 개인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ㅡ 나는 이 세 가지 요점을 본 장의 4, 5, 그리고 6절을 할당하여 순서에 따라서 토론하겠다.

 

IV

원래의 평등주의란 국가의 시민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요건이다. 평등주의는 태생이나 가족관계, 혹은 재산이 사법관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는 시민들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권이 부여될지라도 천부적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평등주의적 원칙은 플라톤이 태어나기 몇 년 전,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하여 보전된 연설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에 의하여 훌륭하게 언명되었다. 10장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더 자세하게 인용될 것이지만 두 문장만 여기서 인용한다: ‘우리의 법률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동등한 정의를 제공하지만, 우리는 탁월함에 대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시민이 뛰어나면 그에게 공직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지만,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점에 대한 보상으로서이다; 그리고 가난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페리클레스는 말한다. 이 문장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예제도를 주저 없이 공격하는 위대한 평등주의 운동의 몇 가지 근본적 목표들을 표현한다. 페리클레스 자신의 세대에서, 이 운동을 대표한 사람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안티폰(Antiphon) 그리고 히피아스(Hippias)였는데, 그들 모두는 앞장에 인용되고, 헤로도토스(Herodotus) 또한 이 운동의 대표자였다. 플라톤의 세대에는, 이 운동이 알키다마스(Alcidamas)와 리코프론에(Lycophron) 의하여 대표되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위에 인용하였다; 또 다른 지지자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원칙은 물론 이 모든 것과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천부적 지도자를 위한 천부적 특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평등주의 원칙과 싸웠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자신의 요구를 확립했던가?

평등주의적 요건의 가장 유명한 언명들 몇 가지가 인상적이지만 의문스러운 천부적 권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그 대표적인 언명들 몇 가지가 자연적인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인간의 평등을 지적함에 의하여 이 요건들을 선호하여 논증했다는 것은 앞장서부터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그 주장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평등하고 다른 점에서는 불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규범적 요건은 이런 사실로부터 혹은 다른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논증이 모든 평등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용되지는 않았고, 그 한 사람으로서 페리클레스가 심지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플라톤은 자연주의가 평등주의 원리 내부에서 약점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고 그는 이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특정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 호소력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정치선전으로서 얻어지는 호소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당신의 하인과, 당신이 소유한 노예와, 동물과 다름없는 육체 노동자와 당신은 자연적으로 동등합니까? 이 질문은 웃긴다! 플라톤은 이 반응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천부적 평등 주장에 경멸과 조롱, 그리고 조소로 대항한 최초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자연주의적 주장을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적들에게 플라톤이 그 주장을 애써 귀속시키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대한 풍자인 메넥세노스(Menexenus)에서 플라톤은 평등법에 대한 주장과 천부적 평등에 대한 주장을 함께 연결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 체제의 기초는 탄생의 평등이다라고 그는 빈정거린다. ‘우리 모두는 형제다, 그리고 모두는 한 어머니의 자녀다;.. 그래서 탄생과 관련된 자연적인 평등으로 인하여 우리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을 갈망하도록 설득당한다.’

나중에 법률(Laws)에서, 플라톤은 평등주의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다음 공식으로 요약한다: ‘불평등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면 틀림없이 불평등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발전하여 평등한 사람에게는 평등을, 불평등한 사람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공식이 된다. 이 공식은, 평등주의에 대한 표준적 반대론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평등이란 사람들이 오직 평등하다면 뛰어날 터이지만,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평등하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불가능하다는 반대론. 표면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이 반대론은 실상 매우 비현실적인데, 그 까닭은 정치적 특권이란 인격의 자연스러운 차이점을 토대로 세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플라톤은 국가(Republic)를 저술할 때 이 반대론에 많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듯싶은데, 이유인즉 그가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론은 평등한 사람과 불평등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을 분배한다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한 곳에서만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언급을 제외하고 그는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하기보다는 평등주의를 잊는 것을 선호한다.

요약하여 플라톤은 평등주의 이론이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에 의하여 옹호되었기 때문에 그 이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적은 없지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그 이론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고 언급될 수 있다; 그는 평등주의 이론을 공격하였지만 솔직하게도 공개적으로도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반()-평등주의인 자신의 천부적 특권에 대한 원칙을 확립하려고 어떻게 노력했을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세 가지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데 두 주장은 주장이라고 할 것도 없다. 첫째 주장은, 국가에 대한 다른 세 가지 덕목이 검토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네 번째인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덕목이 틀림없이 정의라는 놀라운 언급이다. 이것이 주장으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나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주장으로 의미가 있음이 확실한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주로 이용하는 화자(話者)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미덕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하는지 아는가?’ 두 번째 주장은 더 흥미로운데 이유인즉 그 주장이, 자신의 반()-평등주의가 정의는 평등이라는 평범한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적인) 견해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 전부를 인용한다. 도시의 지배자는 또한 도시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고 논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닌 재판권의 목표가 아닌가?’ ㅡ 대화상대자인 글라우콘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일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인가?’ 그렇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속하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의라고 의견일치가 되겠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 우리가 지닌 정의에 대한 평범한 개념에 따라, 정의로운 재판권의 원칙임이 확립된다. 여기서 두 번째 논쟁은 끝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 (혹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 정의라는 결론을 초래하는 세 번째 주장에 (아래에서 분석될) 길을 내주는데 그 사회적 위치는 자기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제도와 관련된 사회적 위치이다 (혹은 직업).

이 두 번째 논증의 유일한 목적은, ‘정의란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회적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독자들이 다음 추론을 도출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나의 자리는 (혹은 나의 직업)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은 (혹은 내 직업을 수행하는 것) 정의롭다.’ 이것은 다음 주장과 거의 같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당신의 돈을 훔치겠다는 이 계획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계획을 유지하여 실행하는 것, 다시 말해서 당신의 돈을 훔치는 것은 정의롭다.’ 우리가 내리기를 플라톤이 바라는 결론은 자신의 것이라는 용어의 의미로 조잡스러운 재주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인즉 문제가, 정의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계급인 모든 것이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물로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양도될 수 없는 소유물로서도 취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은 그런 원칙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 원칙으로 인하여 공산주의로의 전이가 분명히 불가능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를 기르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이 조잡스러운 재주는, 아담(Adam)플라톤 자신의 정의에 대한 견해와 그 단어의 대중적.. 의미 사이의 접합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플라톤이 설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자신이 정의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려고 애를 쓰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주장은 훨씬 더 진지하다. 그 주장은 전체론이나 집단주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목적이라는 원칙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아래 5절과 6절에서 이렇게 분석되어 토론될 것이다.

그러나 이 요점들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발견을 플라톤이 기술하기 전에, 플라톤이 써놓은 서문을 주지시키고 싶다. 그 서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것을 고려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긴 서문은 ㅡ 이것이 플라톤 자신이 서문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ㅡ 독자가 실제로 자신의 비판적 능력을 둔화시키려고 고안된 극적인 장치의 연출을 마주하고 있을 따름일 때, 계속되는 논쟁이 있다고 믿도록 만듦에 의하여 독자가 정의 발견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시도로 보인다.

수호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지혜를 발견하고 보조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용기를 발견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하겠다는 의도를 선언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발견할 두 가지 일이 남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절제와,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탐구의 주요 대상인 이름하여 정의라는 다른 것.’바로 그것이다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절제는 빼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항의하고 소크라테스는 거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혹은 불성실한 것’) 터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을 들어준다. 이 작은 논쟁은 정의를 다시 시작하는 데 독자를 대비하도록 만들고,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할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독자에게 암시하며, 글라우콘은 논쟁을 계속하면서 플라톤의 지적(知的) 솔직함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그리하여 독자는 지켜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에 절제를 토론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절제란 노동자에게 고유한 덕행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는 그가 주장하는 절제와 구별될 수 있는지의 많이 논의된 질문은 쉽게 답변될 수 있다. 정의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절제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ㅡ 다시 말해서 더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다. 자신의 배를 금수처럼 채우는 노동자들에게 어떤 다른 덕행이 고유한가?) 절제가 발견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마지막 원칙은 어떠한가? 분명히 그것은 정의일 것이다.’분명히 그렇지라고 글라우콘은 답변한다.

, 친애하는 글라우콘이여, 우리는 사냥꾼처럼 정의가 숨은 곳을 에워싸고 가까이서 지켜보아야 하네, 그리고 우리는 정의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멀리 가지 못하게 해야 하네: 이유인즉 분명히 정의는 이 장소 근처 어디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네. 자네는 잘 살펴서 그 장소를 찾는 게 좋겠어. 그리고 자네가 처음 발견하면 나에게 소리를 치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글라우콘은 독자처럼 물론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앞장을 서달라고 간청한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기도하세 그리고 나를 따라오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땅이 관목으로 덮여서 건너기 힘들고 어두워서 탐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 발견한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야지’. 그러나 무엇을 계속하나? 우리의 탐사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논쟁을? 그러나 우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것 속에는 의미란 조금도 없다라고 항의하는 대신에 글라우콘과 그와 함께 있는 순진한 독자는 순종적으로 대답한다: ‘그럼, 우리는 계속해야지.’ 이제 소크라테스는 무엇인가 보인다(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보고하며 흥분한다. ‘만세! 만세! 글라우콘! 길이 있는 것 같아! 이제 사냥감은 도망치지 못할 거야!’라고 그는 소리친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이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정말, 우리는 완전히 바보였어. 멀리서 우리가 찾던 것이 늘 우리 발밑에 있었다니! 그러고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이런 종류의 감탄사와 반복되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계속하는데 글라우콘이 독자의 느낌을 표현하며 끼어들어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묻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기술하고 있던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항상 말했다라고만 말하자, 글라우콘은 독자의 성급함을 표현하여 말한다: ‘서문이 좀 길군: 나는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는지 듣고 싶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때야 플라톤은 내가 개괄한 두 가지 주장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글라우콘의 마지막 언급은 플라톤 자신이 이 긴 서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비판적 능력을 잠재우고, 화려한 언어 불꽃놀이를 극적으로 펼쳐서 독자의 주목을 이 탁월한 대화편의 지적(知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 ㅡ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판명되었다 ㅡ 외에는 나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플라톤이 그 약점을 알고 있었고 그 약점을 숨기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V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문제는 평등과 불평등에 관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문제를 계속 논의하기 전에, 몇 가지 언어 사용에 대한 비평이 필요할 듯하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용어는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α) 집단주의의 반대로, 그리고 (b) 이타주의의 반대로 사용될 수 있다. 전자(前者)의 의미를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지만 후자(後者)에 대한 동의어는 몇 가지가 있어서 예를 들면 이기주의이기심이다. 이것이 다음에서 내가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α) 의미로만 사용하고 (b)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이기주의이기심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이다. 작은 표를 만들면 유용할 것이다:

(α) 개인주의(α') 집단주의의 반대이다.

(b) 이기주의(b') 이타주의의 반대이다

이제 이 네 가지 용어들은, 규범적 법칙들의 법전에 대하여 어떤 자세나 요건 혹은 결정이나 제안을 기술한다. 반드시 모호하겠지만 이 용어들은 사례에 의하여 쉽게 예시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현재 목표와 관련하여 충분히 정확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집단주의는 우리가 플라톤의 전체론을 논의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하기에 집단주의로써 시작하자. 우주이든, 도시이든, 종족이든, 인종이든, 혹은 다른 집단이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은 수단으로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앞장에서 몇 구절로 예시되었다. 이 구절 중 하나를 더욱 완벽하게 다시 인용하면: ‘부분은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전체를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전체는 당신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이 인용문은 전체론과 집단주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던 (구절의 서두에서 알려질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인용문이 지니는 강력한 매력을 전달한다. 그 매력은 다양한 감정, 예를 들어 집단이나 종족에 속하고자 하는 갈망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매력에 있는 한 가지 요인은, 이타주의를 찬성하는 도덕적 호소이자 이기심이나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적 호소이다. 당신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당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플라톤은 암시한다.

이제 내가 만든 작은 표를 한 번 보면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가 아니며, 또한 이타주의나 이타심과 동일하지도 않다. 집단적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 예를 들어 계급 이기주의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집단주의와 같은 것은 이기심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른 한편으로, ()-집단주의자,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자는 동시에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는 다른 개인을 돕기 위하여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 하나는 아마도 디킨스(Dickens) 것이다. 디킨스가 지녔던 이기심에 대한 열렬한 증오와 인간의 약점 모두를 지닌 개인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흥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력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무명의 집단들에 겨냥된다면, 지금 우리가 집단적 단체나 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또한 심지어 진실로 헌신적인 이타주의에 대한 혐오와도 연결된다. (나는 Bleak House에 나오는 공공의 의무에 헌신하는 부인인 젤리비[Jellyby] 부인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예시들로 인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의 의미가 충분히 명확하게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예시들로 인하여, 내가 만든 표의 어떤 용어도 다른 칸에 있는 두 용어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가지 결합이 가능하다).

이제 플라톤에게도,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에게도 이타적 개인주의가 (예를 들어 디킨스의 이타적 개인주의와 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플라톤에 따르면, 집단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이기주의이다; 그는 모든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고 모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다. 이것은 용어사용법의, 언어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네 가지 가능성 대신에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오늘날까지 윤리적 문제를 고찰함에서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개인주의를 공격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집단주의를 옹호하여, 그는 우리가 지닌 이타심이라는 인도주의적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 자신의 공격에서, 그는 모든 개인주의자를 이기적으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헌신할 수 없는 것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 공격은 플라톤에 의하여 우리가 지닌 의미로서의 개인주의를 겨냥, 다시 말해서 인간 개인의 권리를 겨냥한다 할지라도 물론 매우 다른 표적인 이기주의에 도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끊임없이 플라톤에 의하여,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다.

플라톤은 왜 개인주의를 공격하려고 했던가? 그는 자신의 포화로 개인주의를 겨냥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개인주의는 아마도 평등주의보다 새롭게 출현한 인도주의적 신념을 훨씬 더 많이 방어하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정말로 종족주의를 와해시키고 민주주의를 발흥시킨 위대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플라톤의 기괴한 사회학적 직감은, 그가 적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변함없이 적을 감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인주의는 정의에 관한 오래된 직감적 관념의 한 부분이었다. 정의란 플라톤이 설명할 바와 같이 국가의 건강과 화합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다루는 어떤 방식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사람에게 내재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에 의하여 강조된다고 기억될 것이다. 이 개인주의적 요소는 페리클레스 세대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페리클레스 자신은 법률은 동등한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그들의 개인적 분쟁에서보장해야 함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웃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결정한다면 그를 괴롭히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국가는 사람들을 풀어놓을 목적으로,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언급과 비교하라.) 페리클레스는 이 개인주의가 이타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 그리고 그의 연설은 행복하게 다재다능하고, 자주적으로자란 아테네 젊은이를 기술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결합되어, 우리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핵심적 원칙이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서는 말하지 너의 종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우리 문명에서 성장하여 그 문명을 자극하는 모든 윤리적 교설의 핵심이다. 개인주의는 또한, 예를 들어, 칸트의 중심적이고 실용적인 원칙이다 (‘항상 인간 개인이 목적임을 인식하라, 그리고 인간 개인을 당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만으로 이용하지 말라’).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서 그렇게 강력했던 다른 사상은 없었다.

플라톤은 이 교설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신분제도 국가에 대한 적을 옳게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어떤 다른 체제전복적인원칙보다도 개인주의를 증오했다. 이것을 훨씬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개인에 대한 정말로 놀라운 적대감이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적게 감지되는 법률(Laws)에서 두 구절을 나는 인용하겠다. 첫째 구절은 국가(Republic)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한데, 국가(Republic)아녀자와 재산의 공동체를 그 구절은 토론한다. 플라톤은 여기서 국가(Republic)에 나오는 국체를 국가의 최고 형태로 기술한다. 최고의 국가에서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모든 소유물은 공동 재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로부터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것을 근절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자연으로 인하여 사적이고 개인적이 된 것들조차도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이 된다. 우리의 눈과 귀와 손도 마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인 양 보고, 듣고, 행동하는 듯하다. 모든 사람은 칭찬하고 비난함에서 최고도로 의견일치를 이루도록 주조되고, 그들은 심지어 동일한 것에 대하여 동시에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모든 법률은 도시를 최고도로 단결시키기 위하여 완성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무도 방금 상술한 원칙보다 국가의 최고 우수성에 대하여 더 나은 기준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국가를, ‘신성하다와 국가의 모형혹은 형태혹은 원형으로, 다시 말해서 국가의 형상이나 이데아로 기술한다.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모든 영예로 감싸서 실현하려던 희망을 포기했을 때 표현된 국가(Republic)에 있는 플라톤 자신의 견해이다.

두 번째 구절은, 역시 법률(Laws)에서 나오는데, 아마도 훨씬 더 솔직하다. 강조하건대 그 구절은 주로 군사적 원정과 군사적 훈련을 다루지만 플라톤은 이 동일한 군국주의적 훈련이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 그리고 최초의 아동기부터고수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다른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자들 및 스파르타 숭배자들처럼, 플라톤은 군사 훈련이라는 최고로 중요한 의무는 심지어 평화 시에도 최우선이어야 하고, 그 의무가 모든 시민의 전체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유인즉 완전한 시민들과 (모두 군인이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바로 동물들도 자신의 전체 삶을 항구적이고 총동원 상태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술하는바, ‘모든 원칙 중에서 가장 큰 원칙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도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각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무엇이든 하려는 습관이 들어서는 안 된다, 열정에 의해서든 심지어 장난기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시와 평화 시에 ㅡ 지도자에게로 그는 자신의 눈을 돌리고 그 지도자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도 그는 지도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세수를 하거나 식사를 해야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오랜 습관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꿈을 꾸지 않는 것과 완전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삶은 총체적 공동체 속에서 영위될 것이다. 전쟁에서 구원과 승리를 확보하는 데 이것보다 우수하고 더 낫고 더 효과적인 법률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 시와, 초기 아동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무질서의 모든 흔적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삶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인간에게 종속당하는 야생 동물의 모든 삶으로부터도 무질서의 흔적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심한 말이다. 사람이 개인을 적대시하기에 이보다 더 진지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 증오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특정 경험인 감지되는 사물로 구성된 변화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그가 증오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증오했다. 정치 분야에서, 개인은 플라톤에게 사악한 사람 그 자체이다.

이 자세는 반()-인도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일지라도, 일관되게 이상화되었다. 이 자세는 인도적으로, 비이기적으로, 이타적으로,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었다. E. B. 잉글런드(England), 예를 들어, 법률(Laws)에서 나온 이 두 구절 중에 첫 구절을 이기심에 대한 열정적 비난이라고 부른다. 유사한 말이 바커(Barker)에 의하여 그가 플라톤의 정의 이론을 토론할 때 사용된다. 그는 플라톤의 목표가 이기심과 시민의 불화를 화합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익에 관한 옛 조화가.. 그래서 플라톤의 가르침 속에서 복원된다; 그러나 그 조화는 조화에 관한 의식적인 의미로 고양되었기 때문에 새롭고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한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러한 진술과 무수히 많은 비슷한 진술들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유인즉 이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은 반()-개인주의가 이타심과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동일시로 인하여 반()-인도주의적 정치선전의 성공적인 효과가 발생했고, 우리 시대까지 윤리 문제에 관한 사고가 혼란되었다는 나의 주장이 이런 이유로 예시된다. 그러나 이 동일시와 허장성세에 속아서 플라톤의 명성을 도덕에 대한 스승으로 추앙하고 플라톤의 윤리학이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 신앙에 가장 근접한다고 세상에 선언한 사람들이 전체주의를 향한, 그리고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체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 해석을 향한 길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험한 일인데 이유인즉 기독교가 전체주의적 이념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 종교재판은 다시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솔직한 사람들이, 플라톤이 지녔던 의도가 내보이는 인간애에 설득당하는 이유 몇 가지를 더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집단주의적 교설의 근거를 준비하면서 플라톤은 보통 경구나 속담을 (피타고라스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함으로써 시작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공유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기심이 없고, 고상하며 우수한 감정이다. 그렇게 기릴만한 전제에서 출발한 주장이 완전히 반()-인도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요점은, 플라톤의 대화편인 특히 그가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영향 하에 있던 국가(Republic) 이전에 쓰인 대화편에,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감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가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소크라테스의 교설을 언급한다. 분명히, 이 교설은 이타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의 집단주의 이론과 같은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에서, 불의는 특정 인간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반하는 행위이어서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지라도 집단만 그 행위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특징을 발견하지 못한다. 정의에 관한 이론은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이고, ‘소크라테스(여기서는 아마도 실제 소크라테스와 매우 닮았다) 내놓는 불의의 사례는 사람을 따귀를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혹은 살해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행위를 당하는 것이 그런 행위를 가하는 것보다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정말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매우 비슷하고, 정의에 대한 그의 교설은 페리클레스의 정신과 탁월하게 들어맞는다. (이것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10장에서 실행될 것이다.)

이제 국가(Republic), 그런 개인주의와 양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완전히 적대적으로 정의에 관한 새로운 교설을 전개한다. 그러나 독자는 플라톤이 여전히 고르기아스(Gorgias)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쉽게 믿을 것이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저술에서 제시된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교설을 플라톤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Republic)에서 소크라테스의 적들이 불의를 가하는 것이 좋고 유쾌하며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는 반론을 내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물론 모든 인도주의자는 그런 냉소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 면전에서 정의에 대한 그런 사악한 말을 내가 허용한다면 나는 죄를 지을까 두렵다 자신의 목적을 언명할 때, 그를 믿는 독자는 플라톤의 선의를 확신하고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기꺼이 따라간다.

플라톤이 주는 이 확신의 효과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냉소적이고도 이기적인 말을 따르고 그 말과 대조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많이 확산되는데, 트라시마코스는 최악의 정치 불량배로 그려진다. 동시에 독자는 개인주의를 트라시마코스의 견해와 동일시하고, 플라톤이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와중에 플라톤 시대의 모든 체제전복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트라시마코스 같은 개인주의적 도깨비에 (그의 모습과 볼셰비키 사상이라는 현대 집단주의적 도깨비 사이에는 큰 유사점이 있다) 놀라서 덜 분명하기 때문에 더 실재적이고 더 위험한 또 다른 형태의 야만성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플라톤이 개인의 힘이 옳다는 트라시마코스의 교설을, 국가의 안정과 힘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옳다는 똑같이 야만적인 교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요약한다. 자신의 급진적 집단주의 때문에, 플라톤은 사람들이 보통 정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부르는 문제들에, 다시 말해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항의성 주장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데조차 흥미를 갖지 못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주장을 국가의 주장에 조정하는 일에도 흥미가 갖지 않는다. 이유인즉 개인이 완전히 열등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국가 전체를 위하여 최선인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입법한다.. 이유인즉 내가 정당하게 개인의 이익을 가치의 열등한 수준에 두기 때문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는 오직 집단적 전체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고, 정의는 그에게 집단의 건강, 통합, 그리고 안정일 뿐이었다.

 

VI

지금까지 인도주의적 윤리로 인하여 정의에 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견해와 같은 것을 아직 개괄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이 전체주의적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이론을 개인의 윤리에 적용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과제 모두가 이제 시작될 것인데, 두 번째가 먼저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정의를 발견했다는 플라톤의 주장 중에서 세 번째 주장인 지금까지 겨우 대략적으로만 개괄된 주장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겠다. 여기에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있다:

자 당신이 나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목수가 구두 만들기를 시작하고 제화공이 목수일을 시작한다면 도시에 해롭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아니 별로요.’ 태생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나 돈을 버는 계층의 구성원이.. 군인 계층에 들어온다면; 아니면 군인이 수호자 계층에 그럴 가치도 없이 들어온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이런 종류의 비밀 음모는 도시의 몰락의 의미할 터인가?’ 매우 분명히 그렇지요.’ 우리의 도시에는 세 계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음모나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의 이전이 도시에 대한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그래서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하겠지?’ 틀림없이 그렇지요.’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자신의 도시에 대한 극악한 죄악은 불의라고 선언하겠지?’ 물론이지.’ 그렇다면 이것은 불의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도시 속에 있는 각 계층이 자기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급도, 이것은 정의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논증을 보면, (α) 엄격한 신분제도를 완화하면 도시가 틀림없이 붕괴한다는 사회학적 전제를 우리는 발견한다; (b)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을 불의라는 한 가지 주장의 변함없는 반복; 그리고 (c) 그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이제 여기서 사회적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 플라톤의 이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가 발생은 해로움이라고 그가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학적 전제 (α)를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해서만 중지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불의의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c)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것은 (b)이다; 플라톤의 주장을 일별하면 그의 사고 전체 흐름에는 다음 질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 해로운가? 그것은 해를 많이 끼치는가, 혹은 적게 끼치는가?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고 불의라고 그는 변함없이 되뇐다.

플라톤이 한 가지 궁극적 기준인 국가의 이익만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안다.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선량하고 덕행이며 정의롭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나쁘고 악하고 불의이다.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은 도덕적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행동은 부도덕하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도덕 법전은 엄격하게 공리주의적이다; 그것은 집단주의적이나 정치적인 공리주의이다. 도덕성에 대한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도덕성은 정치적 위생학일 뿐이다.

이것은 도덕성에 관한 집단주의적, 종족적, 전체주의적 이론이다: ‘나의 집단 이익에 속하는 것은 선량하다; 혹은 나의 종족에 속하는 것; 혹은 나의 국가에 속하는 것.’ 이 도덕성이 국제 관계에 대하여 함축하는 바는 알기 쉽다: 국가 자체는 어떤 행동을 해도, 국가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잘못일 수가 없다는 것; 국가가 자체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국가의 힘을 증강시킬 수 있다면, 국가는 자신의 백성에게 폭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를 공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국가의 비도덕성에 대한 명시적 인정과 결과적으로 국제 관계에서 도덕적 허무주의의 옹호인 이 추론은 헤겔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전체주의적 윤리의 관점에서, 집단적 공리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완전히 옳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덕행이다. 훈련이라는 군사적 덕행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그 시민의 덕행이다. 그리고 이 덕행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덕행 이론체계에서 정의가 담당하는 저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다. 그 까닭은 국가라는 커다란 시계태엽 속에 있는 톱니는 덕행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 톱니는 자신의 크기, 모양, , 기타 등등이라는 덕행으로 자신의 임무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톱니들은 올바른 장소에 각각 맞추어져서 그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첫 번째 형태의 덕행인 특정 임무를 위한 적합성은 톱니의 특정 임무에 맞추어 차별을 초래할 것이다. 어떤 톱니는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크기만 하다면 덕행을 갖출 것인데, 다시 말해서 들어맞는다; 다른 것들은 강하면; 다른 것들은 부드러우면 들어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는 덕행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전체의 덕행이 될 것이다: 적당하게 함께 맞추어지는 덕행 ㅡ 화합을 이루는 덕행. 이 보편적 덕행에게 플라톤은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과정은 완벽하게 일관적이어서 전체주의적 도덕성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정당화된다. 개인이 톱니에 지나지 않는다면, 윤리는 그 개인을 어떻게 전체에 맞추는가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플라톤이 말하는 전체주의의 진정성을 믿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른 나머지 계급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요건은 단호하지만, 그의 이상은 상층 계급이 노동 계급을 최대한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이상은 전체의 안정이다. 그러나 그가 착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유는 다시 순전히 공리주의적이다. 착취의 제한은 계급 지배를 안정시키는 데 이익이 된다. 수호자가 너무 많이 갖고자 한다면,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안정되고 안전한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에 의하여 도시의 모든 재산을 전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면, 분명히 그들은 헤시오도스(Hesiod), “절반은 전체보다 더 많다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알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급 특권을 제한하려는 이 경향도 상당히 흔한 전체주의의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전체주의는 비도덕적이지만 않다. 전체주의는 닫힌 사회의 ㅡ 집단의, 혹은 종족의 ㅡ 도덕성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집단적 이기심이다.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솔직하고 일관적인 것을 고려하면, 왜 그에게 앞의 두 가지 주장과 함께 긴 서문이 필요했던가? 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이 모든 불안감은 왜일까? (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이 불안감이 단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절들의 비합리적인 특징은 해명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플라톤의 집단적 태엽장치가 그 모든 황당무계함과 무의미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제시되었다면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플라톤은 자신이 부수려고 했던 힘의 도덕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는 감히 그 힘에 도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 힘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새로 출현한 인도주의가 갖는 도덕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냉소적이고도 의식적인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자신의 더 선량한 양심에 개인주의의 사악함을 설득하려는 비극적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받는 인상은 후자(後者)이며, 이 내부 갈등이 플라톤이 발휘하는 매력의 주요 비결이다. 플라톤이 새로운 이념에 의하여, 특히 위대한 개인주의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순교에 의하여 자신의 영혼의 깊은 곳까지 감동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의 지식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미치는 이 영향력에 대항하여, 항상 공개적은 아닐지라도, 싸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로 인하여 때때로 그가 주장하는 전체주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몇 가지 인도주의적인 관념을 발견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철학자들이 플라톤을 인도주의자로 대변할 수 있던 이유가 설명된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주장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인 자신의 세대에 처음으로 전개된 이론을 취급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잘못 취급하는 방식이다.

이 이론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정치적 요건이나 정치적 제안에 관한 언어(5III절과 비교하라) 사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본질주의적인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그 실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주의적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정치적 의무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국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국가 활동의 합법적 목표로서 우리는 무엇을 고려하라고 제안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근본적인 정치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우리는 국가 없이, 다시 말해서 무정부로 사는 것보다는 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살기를 선호하는가? 우리가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것은 공학자(technologist)가 정치적 제도를 구축하거나 재구축할 수 있기 전에 답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질문이다. 이유인즉 그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특정 제도가 그 기능에 잘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인도주의자의 답변은: 내가 국가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보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나 자신의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보호를 요구한다. 나는 더 큰 주먹이나 더 큰 총을 가진 사람들에게 좌지우지 당하며 살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다. 나는 공격과 방어의 차이점이 인정되기를 바라고 방어는 국가의 조직된 힘에 의하여 지원되기를 바란다. (방어는 현재 상황[status quo]의 방어이고 제시된 원칙은 이것에 해당한다 ㅡ 현재 상황[status quo], 그 개정을 위한 법률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 법률에 의해서만이나 화해에 의해서만 혹은 중재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 하지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정될 수 없다는 것.) 나는 나 자신의 행동 자유가 국가에 의하여 다소 축소되는 것을 볼 각오가 철저히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내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조건으로 남아있는 자유에 대한 보호를 내가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공격에 대하여 국가가 방어해주기를 내가 원한다면, 공격할 나의 자유를 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국가의 근본적 목적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시민들을 해치지 않는 저 자유의 보호를 나는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제한하여야 하고, 자유를 공평하게 제한하는 것을 이룩하기에 필요한 것 이상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것이 인도주의자와 평등주의자, 개인주의자의 요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공학자가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상당히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에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요구이다.

이와 같은 목표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많은 반대의견이 제기되었다. 일단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정되면 자유에 대한 전체 원칙이 무너진다, 그리고 어떤 제한이 필요하고 어떤 제한이 무분별한지는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권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혼동에서 비롯된다. 그 반대의견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목표를 실현하는 길에 놓인 몇 가지 중요한 전문적 난제와 혼동한다. 자유의 보호가 국가의 의무인 저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시민에게 남겨질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렵다. 그러나 저 한계를 근접하게 결정함과 같은 과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민주국가들의 존재에 의해서 증명된다. 사실상, 이와 같은 근접적인 결정 과정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그것은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난제는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를 변경하도록 강요할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는, 간단히 진술되어, 국가는 범죄, 즉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결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 자유가 끝나고 범죄가 시작되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전체 반대의견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자유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먹을 마음대로 어떤 방향으로든 휘두를 수 있다고 항의하는 악당에 대하여 판사가 당신이 주먹을 휘두르는 자유는 당신 이웃의 코의 위치에 의하여 제한된다라고 현명하게 대답했다는 일화에 의하여 답변된다.

내가 여기서 개괄한 국가에 대한 견해는 보호주의라고 불릴는지도 모르겠다. ‘보호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자유와 반대되는 경향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은 보호주의로 특정 산업 이익을 경쟁에서 보호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덕주의자는 보호주의로 국가 관리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도덕적 보호 장치를 세워야 한다는 요구를 의미한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적 이론이 이런 경향 어느 것과도 관련되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이론의 한 가지라 할지라도, 그 보호주의라는 이름이 자유주의적이지만 엄격한 무간섭 정책(흔히, 그러나 완전히 올바르지 못하게, ‘자유방임[laissez faire]이라 불린다)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국가간섭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종류의 자유도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분명히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교육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태만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그리고 국가가 모든 교육시설이 모든 사람에게 이용될 수 있도록 감독해야 한다면 어느 정도의 국가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 국가 너무 많이 통제하면 자유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데 그 까닭은 국가의 지나친 통제가 세뇌 교육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 제한이라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는 틀에 박힌 공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항상 어중간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환영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정치적 문제가 지니는 자극과 이런 종류의 정치적 갈등이 없으면 자유를 위하여 싸우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곧 사라질 터이고, 그와 함께, 그들의 자유도 사라질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유와 안전, 즉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는 안전 사이에서 주장되는 충돌은 환상으로 판명된다. 이유인즉 자유란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유 시민에 의하여 통제되는 국가만이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합당한 안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진술되면, 국가에 대한 보호주의적 이론에는 역사주의나 본질주의의 요소가 없다. 그 이론은, 개인과 보호주의적 목적을 결합하여 국가가 시작되었다거나, 역사에서 어떤 실제적인 국가도 이런 목적에 따라서 통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론은 국가의 본성에 관하여, 혹은 자유의 천부적 권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론은 국가가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론은 정치적인 요구, 더 정확하게, 특정 정책을 채택하라는 제안을 언명한다. 그러나 국가가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결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술하는 많은 규약주의자들이, 비록 그들이 어설프고 기만적인 언어로 ㅡ 역사주의의 언어 ㅡ 이 요구를 표현했을지라도, 바로 그 요구를 표현할 의도를 지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요구를 표현하는 비슷한 기만적인 방식은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국가의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국가란 상호간의 보호를 위한 결사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이론들은 진지하게 토론되기 전에, 말하자면 정치적 행동을 위한 요구나 제안이라는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적 특징으로만 이루어지는 끝없는 토론이 불가피하다.

그런 바뀜의 한 가지 사례는 이렇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버크(Burke)와 많은 현대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재론되었다. 이 비판은 보호주의가 국가의 임무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란 (버크의 말을 사용하면) ‘다른 존경으로 고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란 일시적이고 멸망하는 본성을 지닌 조악한 동물적 생존에만 굴종하는 것들에서의 협력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합리적인 목적으로 결속된 것보다 더 높고 고상한 것으로 언급된다;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다.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높은 임무를 지니고 있다. 국가에게는 도덕적 임무가 있다. ‘덕행을 보호하는 것이 그 이름에 걸맞은 국가가 하는 일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가 이 비판을 정치적 요구의 언어로 변환시키면, 우리는 보호주의에 대한 이 비판자들이 두 가지 것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들은 국가를 숭배의 대상물로 만들고 싶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소망에 반대하여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종교적 문제이다; 그리고 국가 숭배자들은 스스로 어떻게 그들의 신조를 그들이 지닌 다른 종교적 믿음, 예를 들어 10계명의 1계명과 화해시킬지를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요구는 정치적이다. 실제로, 이 요구는 국가의 관리가 시민들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은 권력을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삶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법성인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의 영역이 고유한 도덕성을 희생하여 증가되어야 한다는 요구인데 그 고유한 도덕의 영역은 국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정에 의하여 ㅡ 우리의 양심에 의하여 ㅡ 강제되는 영역이다. 그러한 요구나 제안은 합리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제기하는 사람은 분명히 이것이 개인이 지닌 도덕적 책임의 종말이며,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터임을 알지 못한다고 그런 요구에 반대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개인적인 의무가, 종족주의적 금기와 개인의 전체주의적 무책임으로 대체될 터이다. 이 태도 전체에 반대하여, 개인주의자는 국가의 도덕성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평균 시민의 도덕성보다 상당히 낮은 경향을 띠어서 국가가 국민의 도덕성을 억제하는 것보다 그 반대상황으로 국민의 도덕성이 국가를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자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현존하는 민주국가는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사회공학에서 매우 큰 업적을 냈다고 틀림없이 언급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다른 개인들이 저지르는 많은 형태의 범죄와 공격이 실제로 억제되었거나 많이 감소되었으며, 법정은 이해관계가 얽힌 어려운 소송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의를 다루었다. 이런 방식이 국제 범죄나 국제 분쟁까지 확대되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민들의 평화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시민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집행기관은 공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국제 범죄를 억제하는 공학적 문제는, 그 문제가 솔직하고 합리적으로 다루어지자마자, 실제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가 분명하게 제시되면, 사람들을 지역적 규모와 세계적 규모 양쪽에서 보호기관이 필요하다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가 숭배자는 계속해서 국가를 숭배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제도 공학자가 국가 내부의 기능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국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라.

 

VII

이제 이 운동의 연혁으로 돌아가면,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이론은 처음에 고르기아스(Gorgias)의 제자인 소피스트 리코프론(Lycophron)에 의하여 제시된 듯하다. 그는 (역시 고르기아스의 제자인 알키다마스[Alcidamas]처럼) 천부적 특권 이론을 공격한 최초인 한 사람이었다고 이미 언급되었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이론을 그가 믿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기록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코프론이 보호주의 이론을 시작했음을 매우 개연적인 방식으로 리코프론에 관하여 말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의 후계자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명료함으로 리코프론이 그 이론을 언명했음을 우리는 안다.

리코프론은 국가의 법률을 사람이 서로에게 정의를 확신시키는 공식 계약으로서 간주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국가의 법률에는 시민을 선량하거나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리코프론이, 국가가 범죄 예방을 위한 협동적 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국가를 불의의 행동에 대항하여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그리고 시민들의 평화로운 교류, 특히 교역을 허용하는 위한) 도구로서 간주했다고 그는 부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는, 리코프론이 자신의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서 다시 말해서 사회계약에 근거한 국가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서 설명했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반대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국가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유인즉 리코프론은 국가의 본질적 목적이 시민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코프론이 평등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보호주의에 대한 요구를 채택하여 공학적 관점에서 이 목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했음을 의미한다.

이 형태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사회계약이라는 전통적인 역사주의 이론이 직면하는 반대 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다. 예를 들어 바커(Barker)에 의하여 계약 이론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하여 하나하나 충족되었다 흔히 설명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커의 요점들을 검토하면 그 요점들은 리코프론의 이론을 확실히 충족시키지 못함이 밝혀질 것인데, 리코프론을 바커는 나중에 계약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의 초기 형태를 세웠을 개연성이 있는 창시자로 본다 (이 요점에서 나는 바커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다). 바커의 요점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α) 역사적으로 계약은 없었다; (b) 국가는 역사적으로 설립되지 않았다; (c) 법률은 규약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 우세한 힘, 아마도 본능, 기타 등등에서 출현한다; 법률은 법전이 되기 전에 관습이었다; (d) 법률의 힘은 제재에, 법을 집행하는 국가의 보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을 지키려는 개인의 각오에, 즉 개인이 지닌 도덕적 의지에 있다.

반대 이론 (α), (b) 그리고 (c)는 본질적으로 상당히 옳다고 인정되는데 (몇 가지 계약이 있었다 할지라도) 오직 그 역사주의적 형태에서만 그 이론과 관련되고 리코프론의 설명과의 무관함이 즉각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반대 이론들을 고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반대 이론 (d)는 정밀한 고찰을 받을 만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공격받은 그 이론은 다른 이론보다 의지’, 아니 개인의 결정을 더 강조한다; 실제로, ‘계약이라는 단어는 자유의지에 의한 합의를 의미한다; 그 단어는 아마도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법률의 힘은 개인이 법을 수용하고 지키겠다는 각오에 있음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d)가 계약 이론에 대한 반대 이론이 될 수 있을까? 유일한 설명은, 바커가 계약이란 개인의 도덕적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기적인 의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이 해석은 플라톤의 비판과 일치할 개연성이 더 짙다. 그러나 사람은 보호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이기적일 필요가 없다. 보호는 자기보호를 의미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험에 든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며 더 작은 정도로 (혹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할 것이다. 보호주의의 근본적인 관념은: 강한 자의 위협으로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라 이다. 이 요구는 약한 자에 의하여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 강한 자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한 요구라고 제시하는 것은 최소한도로 말해서도 기만적인 것이다.

리코프론의 보호주의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반대로부터 자유롭다. 그 보호주의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인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호주의를 강탈당했다. 그 보호주의는 후세대들에까지 다음과 같이 왜곡된 형태로 전해졌다; 사회계약에서 국가의 기원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론으로서; 혹은 국가의 진정한 본질은 규약이라는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본질주의적 이론으로서; 그리고 인간이 지닌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본성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이기심의 이론으로서.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권위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영향 때문이다.

 

VIII

플라톤이 리코프론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유인즉 그가 (매우 개연적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리코프론의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이론은 처음에는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나중에는 국가(Republic)에서 언급되는 이론과 쉽게 일치될 수 있다. (두 저작 어디에서도 플라톤은 그 창시자를 언급하지 않는데 플라톤의 적이 살아있을 때 플라톤에 의하여 자주 채택된 태도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 이론은 국가(Republic)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Trasymachus)처럼 윤리적 허무주의자인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상술된다. 국가(Republic)에서는, 그 이론이 글라우콘(Glaucon)에 의하여 상술된다. 어느 경우에도 화자(話者)는 자신이 제시하는 이론에 대하여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두 구절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 다시 말해서 정의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한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마치 그 이론의 논리적 전제가 반드시 이기적이며 심지어 허무주의적인 양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견해가, 불의를 저지르고 싶지만 저지르기에는 너무 약한 사람들과 그러므로 강한 사람도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옹호되는 양; 그 이론의 유일하게 필요한 전제는 범죄, 즉 불의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요구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공정하지 못한 제시.

지금까지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나오는 두 구절은 평행선인데 그 평행선은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두 구절 사이에는 비평가들이 간과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은 이것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는 그 이론이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이론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가 소크라테스를 또한 반대하기 때문에 보호주의 이론은 암시적으로 플라톤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된다. 그리고 정말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허무주의자 칼리클레스에 반대하여 그 이론의 몇 가지 특징을 옹호하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국가(Republic)에서 동일한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칼리클레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상술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글라우콘에 의하여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은 허무주의적으로서 제시되고, 소크라테스는 이기심에 관한 이 사악한 교설을 파괴하여 승리하는 영웅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있는 경향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 그 구절들은 사실상 완전히 바뀐 얼굴을 드러낸다. 칼리클레스의 적대적 제시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의 경향은 보호주의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국가(Republic)는 보호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여기에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발췌된 칼리클레스의 말이 있다: ‘법률은 주로 약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람들 다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법률을..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혹시 이길 강한 사람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 그리고 그들이 불의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이웃을 이기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등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평등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한다고 나는 말하겠다.’ 우리가 이 설명을 보며 칼리클레스의 공개적 조롱과 적의에서 기인하는 것을 제거하면, 우리는 리코프론의 이론이 지닌 모든 요소를 발견하다: 평등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불의에 대한 보호. 심지어 강한 자에 대한 언급과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하고 있는 약한 자에 대한 언급은, 풍자만화의 요소가 참작된다면, 보호주의적 관점에 정말로 잘 들어맞는다. 리코프론의 교설이, 국가가 약한 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주장인 물론 결코 수치스럽지 않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은 조금도 비개연적이지 않다. (이 요구가 어느 날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표현된다: ‘온유한 자들만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칼리클레스 자신은 보호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강자의 천부적권리를 지지한다. 소크라테스가 칼리클레스를 반대하는 논쟁에서 보호주의를 구원하러 왔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보호주의를 자신의 핵심적 논지와 ㅡ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ㅡ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최근 말하던 바와 같이, 많은 의견들이 정의는 평등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 ‘.. 규약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스럽고, 정의는 평등이라고 확인한다.’ (그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강력하게 반[]-민주주의적인 몇 가지 경향을 또한 드러낸다. 그에 대한 설명은, 플라톤이 고르기아스[Gorgias]를 저술할 당시 자신의 전체주의적 이론을 아직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심정은 이미 반[]-민주주의적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누구라도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가 둘 다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진짜로 설명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국가(Republic)로 방향을 선회하면, 그 저작에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를 논리적으로는 더 엄격하지만 윤리적으로는 변함없는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대한 해석으로 제시한다; 글라우콘은 말한다, ‘나의 주제는 정의의 기원이며 그 기원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인가이다. 어떤 사람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가하는 것이 천성적으로 탁월한 일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불의를 당하는 나쁨은, 불의를 가하는 바람직함을 많이 능가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를 것이고 물론 불의를 당하기도 할 것이어서 그들은 두 가지를 충분히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불의를 물리칠 정도나 불의 가하기를 즐길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계약을 맺어서 상호간에 아무도 불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거나 불의를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면 더욱 이롭다고 결정한다. 이것이 법률이 설정되었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론에 따른 정의의 본성이자 기원이다.’

그 합리적 내용에 관한 한, 이것은 분명히 동일한 이론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재현되는 방식 또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의 칼리클레스의 말과 세부적으로 닮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이제 보호주의 이론은, 그 이론이 냉소적인 이기심에 근거한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더 이상 옹호되지 못한다; 그 반대이다. 우리가 지닌 인도주의적 감정, 우리가 지닌 도덕적 분노는 이미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의하여 일깨워져 우리를 보호주의의 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 이론은 그 인도주의적 특징이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밝혀졌는데, 플라톤에 의하여 반()-인도주의적으로 보이고, 정말로, 불의를 저지르고도 안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불의란 훌륭한 것이라는 혐오스럽고 전혀 신빙성이 없는 교설의 결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저 없이 이 요점을 강조한다. 인용된 구절이 확장되어 이어지면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에 관한 소위 필수적인 가정(假定)이나 전제를 더 자세하게 상술한다. 그가 언급하는 이것들 중에는, 예를 들어,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라는 견해; 단지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약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가 확립된다는 견해; 그리고 시민 개인에게는 범죄로 이루어지는 삶이 매우 이로울 터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은 제시된 이론을 글라우콘이 진짜 해석했다고 명시적으로 확언한다. 이런 방식에 의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독자 대부분과 아무튼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여기에 전개된 보호주의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무자비하고 냉소적인 이기심과 동일하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개인주의의 모든 형태는 똑같은 것, 즉 이기심과 같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설득한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적들, 그리고 특히 계약 이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카르네아데스(Carneades)에서부터 홉스(Hobbes)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가 주장하는 치명적인 역사주의적 제시뿐만 아니라 자시들의 이론적 근거가 윤리적 허무주의라는 플라톤의 확신 또한 채택했다.

이제 그 이론에서 주장되는 이기적 근거에 대한 상술은 플라톤이 보호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한 전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술이 차지하는 공간을 고려할 때, 그가 더 훌륭한 주장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말을 아끼는 버릇이 아니라 그가 그런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우리는 안심하고 전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주의는 우리가 지닌 도덕적 감정의 도움을 받아서 ㅡ 정의 관념에 반하는, 그리고 정당함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느낌에 반하는 공개적 모욕으로서 ㅡ 일축되어야 했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의 교설에 대한 위험한 적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 인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조의 대표이기도 한 이론,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게는 소중했던 모든 것에 대한 주적(主敵)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교묘하다; 그 방식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의하여 그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방식이 내가 보기에 속임수라고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평하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공격당한 이론에는, 불의는 사악하다 다시 말해서 불의는 예방되어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부도덕한 어떤 전제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 이론이 이기심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이론이 도출되는 허무주의적 이론과 동일하지 않고, 반대되는 것으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국가(Republic)와 이후 저작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을 짓누르고, 전체주의적인 도덕 이론을 전개함에 의하여 종족주의의 주장을 재설립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새로이 출현한 인도주의적 도덕성에 강한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이는 대신에, 그는 심지어 평등주의를 토론하기조차 회피했다. 그리고 천부적으로 우수한 주인 인종의 전체주의적 계급 통치라는 대의명분에서 인도주의적 감정의 지지를 그는 성공적으로 받았으며 그 감정의 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 계급 특권은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정의의 본질이다. 결국, 이 주장은 정의가 국가의 힘과 건강, 그리고 안정에 유용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다음과 같은 현대 전체주의 정의(定義)와 매우 유사한 주장: 정의(Right), 나의 국가나 나의 계급 혹은 나의 정당의 힘에 유용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이야기 전체가 아니다. 계급 특권에 대한 강조에 의하여,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정치 이론의 핵심에 놓는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가장 현명한 자, 가장 훌륭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였다. 이 탁월한 답변으로 인하여 그가 주장하는 이론의 특징이 수정되지 않는가?

 

 

 

주석 플라톤의 정치강령

 

 

6 : 전체주의적 정의(正義)

 

플라톤의 사회학을 분석하면 그의 정치강령은 쉽게 나타난다. 그의 근본적인 요구는 두 가지 공식 중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는 그가 주장하는 변화와 정지에 대한 이상주의적 이론에 대응하고, 둘째는 그의 자연주의에 대응한다. 이상주의적 공식은: 모든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켜라! 변화는 악이고 중지는 신성하다. 국가가 그 원형을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다시 말해서 도시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모든 변화는 중지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자연주의적 공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우리 선조들이 살던 원래 국가로,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설립되어 안정된 원시 국가로 돌아가라;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종족적 가부장제로, 소수의 현명한 자가 무지한 다수를 지배하는 자연적인 계급 지배로 돌아가라.

실제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강령의 모든 요소가 이 요구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요소들 자체가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안정된 계급 지배를 위한 조건에 관한 플라톤의 사회학적 교설들과 틀림없이 결합된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주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A) 엄격한 계급 구분; 다시 말해서 목자(牧者)와 파수 견으로 구성된 지배 계급은 인간 가축과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B) 국가의 운명과 지배 계급 운명의 동일시; 이 계급과 이 계급의 단결에서 독점적 이권; 그리고 이 단결에 복속하는, 이 계급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한 엄격한 규칙과 계급 구성원의 이권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집단화하기.

이 주요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들이 도출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C) 지배 계급은 군사적 덕행 및 훈련 같은 것을 독점하고, 무기를 휴대할 권한과 모든 종류의 교육받을 권리를 독점한다; 그러나 이 계급은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특히 돈을 버는 일로부터 제외된다.

(D) 지배 계급의 모든 지적(知的) 행위는 검열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주조하고 통일시키는 목적으로 지속적인 정치선전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 입법 그리고 종교에서의 모든 혁신은 금지되거나 억제되어야 한다.

(E) 국가는 자족적(self-sufficient)이어야 한다. 국가는 경제적 자급자족을 겨냥해야 한다; 그 까닭은 그렇지 않다면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거나 그들 스스로 상인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면 지배자들의 권력이 약화할 터이고, 지배자들 스스로 상인이 된다면 그들의 단결과 국가의 안정이 약화할 터이다.

이 강령은 전체주의적으로서 정당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강령은 틀림없이 역사주의적 사회학을 근거로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전체주의적이지도 않고 역사주의를 근거로 세워지지도 않은 요소인, 플라톤의 강령과 관계된 다른 특징은 없는가? ()과 미()를 향한 플라톤의 열정적인 욕망은 어떠한가, 또는 지혜와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떠한가? 현명한 자인 철학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자신이 만든 국가의 시민을 행복하고 도덕적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떠한가? 그리고 국가란 정의(正義: justice)를 바탕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심지어 플라톤을 비판하는 저술가들도 그의 정치강령은 시민들의 행복과 정의(正義: justice)의 지배라는 그의 목표에 의하여, 어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전체주의와 분명히 구별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철학은 자유 사상에 대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심한 공격이라는 크로스먼(Crossman)의 언급으로부터 그의 비판적 자세가 측정될 수 있는데, 플라톤의 계획은 그 안에서 모든 시민이 실제로 행복한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그가 여전히 믿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조드(Joad)인데, 그는 플라톤의 강령과 파시즘의 강령 사이의 유사성을 다소 길게 토론하지만, 플라톤이 주장하는 최고의 국가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내재하는 그런 행복을 이루기때문에, 그리고 이 국가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정의(正義)’라는 이념을 토대로 건설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의 정치강령이, 전체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기는커녕, 전체주의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 견해에 대한 반대의견들이 플라톤의 이상화를 선호하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편견에 근거한다고 나는 믿는다. 크로스먼이 이러한 경향을 지적하여 파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은 다음 진술로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플라톤은.. 자유 사상의 모든 원칙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반동자로서 완전히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실제 생활에서 격리되어 신()의 초월적 도시를 꿈꾸면서 높은 경지로 추앙되었다,.. ’ 그러나 크로스먼 자신은, 그렇게도 명백하게 폭로했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로우트(Grote)와 곰페르츠(Gomperz)국가(Republic)법률(Laws)에 있는 몇 가지 교설들의 반동적 특징을 지적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도 이 교설들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플라톤이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적대적 비판은 무시되었거나,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고, 혁명가들에 의하여 혁명가로 여겨지던 플라톤을 이해하여 평가하지 못했다고 해석되었다. 플라톤에 대한 이런 종류의 완전한 신뢰는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우세해서, 예를 들어 필드(Field)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라고 경고할 필요를 느낀다. 이것은 물론 매우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나 적어도 진보주의자로 만들려는 경향이 꽤 퍼지지 않는다면, 그 지적은 분명히 중요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필드 자신이 동일한 종류의 신뢰를 플라톤에게 보내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플라톤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새롭고 체제전복적인 조류를 강하게 반대하고있었다고 말을 이어갔을 때, 그는 확실히 플라톤이 증언하는 이 새로운 조류의 체제전복성을 너무 쉽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적들은 항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체제전복을 꾀한다고 비난해왔다. 그리고 거의 늘 그들은 정직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위대한 이상주의자를 이상화하는 일은 플라톤 글의 해석뿐만 아니라 번역에도 퍼져있다. 인도주의자가 틀림없이 말하는 것이라는 번역자의 견해와 맞지 않는 플라톤의 격렬한 언급들은 흔히 완화되거나 잘못 이해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플라톤 작품인 소위 공화국(Republic)’이라는 바로 제목의 번역에서 시작된다. 이 제목을 들을 때 우리의 처음 생각에 와 닿는 것은 저자가 혁명가가 아니면 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제목은 아주 단순히, 이런 연상과는 관계가 없이 그리스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영어 형태이고 그 단어를 적당한 영어로 번역하면 정치체제도시 국가혹은 국가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번역인 공화국은 플라톤이 반동적이었을 수가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틀림없이 기여했다.

()과 정의(正義), 그리고 언급된 다른 이념들에 대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의 정치적 요구가 순전히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이라는 나의 논지는 방어될 필요가 있다. 이 방어를 수행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 네 장에서 역사주의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고 언급된 윤리 이데아와, 그 이데아들이 플라톤의 정치적 요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집중하겠다. 이 장에서, 나는 정의의 이데아(Idea of Justice)를 검토할 것이다; 다음 세 장에서는 가장 현명한 자와 가장 우수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교설 및 진리, 지혜, () 그리고 미()의 이데아를 검토하겠다.

 

I

우리가 정의(正義)’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한 용어들이 항상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종류의 언어적 질문이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그 질문에 확정된 답변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특히 인도주의적인 일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α) 시민의 의무를 동등하게 분할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자유의 제한을 동등하게 짊어지는 것; (b) 법률 앞에서 시민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 물론 (c) 법률이 개별 시민이나 집단, 계층에 특혜도 불이익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d) 법원의 불편 부당성; 그리고 (e) 국민인 시민에게 제공될 이익의 (부담뿐만 아니라) 균등분배. 플라톤이 정의로써 이런 종류 어느 것을 의미했다면, 그의 강령이 순전히 전체주의적이라는 나의 주장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고 플라톤의 정치학이 수용될 수 있는 인도주의적 토대에 근거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정의로써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정의(正義: justice)’로써 플라톤은 무엇을 의미했던가? 나는 국가(Republic)에서 그가 올바르다라는 용어를 최상의 국가의 이익과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최상의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엄격한 계급 구분과 계급 지배를 유지함으로써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내가 옳다면, 플라톤의 정의 요구로 인하여 그의 정치강령은 전체주의 수준에 남는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하여 감동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정의(Justice)국가(Republic)의 핵심적인 화제이다; 사실상, ‘정의에 관하여(On Justice)’가 그 저서의 전통적인 부제(副題)이다. 정의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플라톤은 앞장에 언급된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먼저 국가에서 이 이데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다음에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플라톤의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빠르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 답변이 오직 4권에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답변에 이르는 고찰들은 이 장 후반에 더 자세하게 분석될 것이다. 간단히, 그 고찰들은 이러하다.

도시는 인간 본성과 인간 본성의 욕구 그리고 인간 본성의 한계를 근거로 세워진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 각자가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고 우리가 서술했고 반복해서 말한 것을 당신들은 기억할 것이다; , 자신의 본성이 자연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저 직업.’ 이것으로부터 플라톤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힘써야 한다고, 목수는 목수일에만 전념해야 하고, 제화공은 구두 만들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자연적인 직업을 바꾼다면 별로 해가 되가 않는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 (아니면 돈을 버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군인 계층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군인이 수호자 계층으로 그럴 자격 없이 들어간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음모는 도시의 멸망을 의미할 것이다.’ 무기휴대는 계급의 특권이어야 한다는 원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 주장으로부터 플라톤은 세 계급 내부의 변화나 상호 혼합은 틀림없이 불의라는, 그리하여 그 반대는 정의라는 최종 결론을 도출한다;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층까지 도시 속의 각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이것이 정의일 것이다.’ 이 결론은 잠시 뒤에 재확인되고 요약된다: ‘도시는 정의롭다.. 그 도시의 세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그러나 이 서술의 의미는, 플라톤이 정의를 계급 지배와 계급 특권의 원칙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원칙은 간단명료하게 국가란 지배자가 다스리고, 노동자가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의 일을 한다면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은, 위에서 분석된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진 평범한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반면, 플라톤은 계급 특권을 정의롭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차이점은 저것보다 더 나아간다.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 간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관계에 기초한 국가 전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반면, 우리는 정의를 개인들을 대함에서 어떤 종류의 평등을 의미한다. 국가는 만약 건강하고 강력하고 단합되면 정의롭다 ㅡ 안정된다.

 

II

그러나 혹시 플라톤이 옳지 않았을까? ‘정의는 그가 말하는 것을 혹시 의미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런 질문을 논의할 의도가 없다. 만약 누가 정의는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스리는 의미라고 믿는다면, 나는 불의를 환영할 것이라고 대답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말에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요구나, 우리가 채택하기로 결정한 정책을 구성하는 제안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 뒤에는,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에 대한 그의 요구와 그 계급 지배를 성사시키려는 그의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는 옳지 않을까?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이 단어를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부응하지 않을까? 혹시 그리스인들은 정의국가의 건강과 같은 전체론적인 것을 의미해서 플라톤으로부터, 법률 앞에서의 시민들의 평등과 같은 우리들이 가지는 현대적 정의 개념에 대한 전례를 기대한다는 것은 완전히 부당하고 비역사적이지 않을까? 이 질문은 정말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전체론적인 관념은, ‘로마인처럼 구체적으로 법률적이 아니라오히려 구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인전통적인 그리스 의견인 그리스적 천재성 특징이라는 주장이 대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 사실상, 그리스인들이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 자신의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용법과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먼저 대화편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국가[Republic]보다 앞선 저술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견해로서, 그리고 규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와도 일치하는 정의는 평등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말하는 플라톤 자신을 언급하겠다. 나아가 플라톤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것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부적으로 노예로 태어난다는 이론을 상술한, 평등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나는 인용하겠다. 그는 정의라는 용어에 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을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의로운 것의 화신으로 그가 기술하는 판사에 대하여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을 복원하는 것이 판사의 임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정의를 일종의 평등이다라고, 평등, 인간에게 한 부분으로 속하는것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심지어 정의에 대한 그리스어가 평등 분배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틀렸다). (‘정의시민들에게 전리품과 명예를 평등하게 배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법률[Laws]에서 플라톤의 견해와 일치하는데, 그 저술에는 전리품과 명예를 배당하는 데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이 ㅡ 숫자적, ‘산술적평등과 비례적평등 ㅡ 구분된다; 비례적 평등은 문제의 사람들이 지닌 덕행과 교육, 그리고 재산의 정도를 참고한다 ㅡ 그리고 그곳에서 이 비례적 평등은 정치적 정의로 언급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 원칙을 토론할 때, 그는 민주주의적 정의란 (비례적 평등과 구별되는) 산술적 평등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정의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인상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플라톤 이후에 고르기아스(Gorgias)법률(Laws)의 영향을 받아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기술한 것뿐만도 아니다; 그것은 더 정확히 말하여 정의라는 단어를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자 보편적이고 고대적인 표현이다.

이 증거를 참작하여, 국가(Republic)에 있는 전체론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인 정의에 대한 해석이 한 가지 혁신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반대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 플라톤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를 정의로운 것으로서 제시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결과는 경악스러운 것이었고 몇 가지 의문을 불러온다. 왜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정의가 일반적으로 평등을 의미하는데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개연성이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정의로운국가라고 사람들을 설득함으로써 그 국가를 정치적으로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단어들이 아니고 단어들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러한 시도는 그에게 가치가 있었을까? 물론 가치가 있었다; 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에게 자신이 솔직하게 정의를, 즉 독자들이 갈망하던 정의를 옹호한다고 설득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권위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정의 개념보다 그의 정의 개념이 더 진실하고 더 낫지 않은지 자문하기 시작한 평등주의자들과 개인주의자들 사이에 그는 의심과 혼동을 흩뿌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목표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하여 어떤 일이든 참아내고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힘을 쓸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인도주의적인 힘을 얻어내는 것, 혹은 적어도 평등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전체주의 신봉자들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가 국가(Republic)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 때문이다: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 때,.. 그의 용기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러나 사람이 불의를 당했다고 믿을 때, 그의 활기와 분노는 즉각 타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이 정의롭다고 믿는 편에 서서 싸울 때, 사람은 굶주림과 추위와 어떤 종류의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은 똑같이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거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양된 상태를 지속하여, 극복할 때까지 견디어내지 않는가?’

이것을 읽으면, 플라톤이 신념의 힘과 무엇보다도 정의에 대한 신념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국가(Republic)가 이 신념을 왜곡시키고, 정반대 신념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증거를 검토하면, 플라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 느껴진다. 평등주의는 그에게 최고의 적이어서 그는 평등주의를 파괴하려고 애를 썼다; 분명히 평등주의는 커다란 악이고 커다란 위험이라고 성실하게 믿으면서.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정직한 공격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감히 적에게 공개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나는 나아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겠다.

 

III

국가(Republic)는 아마도 정의에 관하여 저술된 저서 중에서 가장 자세한 해설서일 것이다. 그 저서는 정의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데, 자신에게 알려진 더 중요한 이론을 하나도 플라톤이 빼먹지 않았다고 우리를 믿도록 유도하는 그런 방식으로 검토한다. 사실상, 플라톤은 당시 견해 가운데서 정의를 추적하여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의를 새로 찾는 것이 필요했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당시 이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isonomy’) 견해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생략은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간과했거나 의도적으로 그 이론을 피한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국가(Republic)가 쓰인 정성을 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려면 적들의 이론을 플라톤이 분석해야 하는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매우 개연성이 적다. 그러나 당시 평등주의 이론이 받은 광범위한 인기를 고려할 때 이 가능성은 훨씬 더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개연적인 주장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는데 그 까닭은 플라톤이 평등주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국가(Republic)를 집필할 때 그 이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쉽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장 (2절에서)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나중에 (8절에서) 자세히 밝혀지는 바와 같이, 평등주의는 심지어 옹호되기조차 하는 앞선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국가(Republic) 어디에서도 평등주의의 장점과 단점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평등주의의 영향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라는 저서 자체가 평등주의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Republic)에서 평등주의는 매우 대중적인 민주주의적 신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평등주의는 조롱으로만 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듣는 평등주의에 대한 모든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설적 공격과 잘 어울리고, 정의가 논의의 주제가 아닌 곳에 가해지는 비아냥과 심술로 짜여진다. 정의와 관련된 평등주의 이론이 플라톤에 의하여 간과되었을 가능성은 그러므로 배제되며, 그가 자신의 이론과 완전히 반대로 영향력이 있는 이론에 대한 토론이 필수적임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역시 배제된다. 국가(Republic)에서 그의 침묵이 단지 몇 가지 농담에 (그가 그 농담들이 억압하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분명히 생각했을지라도) 의하여 깨진다는 사실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하기를 의식적으로 거절하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모든 중요한 이론이 검토되었다는 믿음을 각인시키는 플라톤의 방식이 어떻게 지적(知的) 솔직함의 기준과 일치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에서 배제한 이유가 틀림없이 자신이 그 선량함을 굳게 믿었던 대의명분에 철저히 몰입했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이 쟁점에서 플라톤이 실제로 계속 침묵을 지키는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플라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평등주의 운동은 그가 증오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였으며 국가(Republic)와 다른 나중 작품에서 그 자신의 이론이 대체로 새로운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라는 강력한 도전에 대한 답변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인도주의의 주요 원칙을 논의하고 대응하는 플라톤의의 전체주의 원칙과 대조하겠다.

정의와 관련된 인도주의적 이론은 세 가지 주요 요건, 즉 제안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α) 본래의 평등주의 원칙인데, 다시 말해서 천부적특권을 없애자는 제안이고, (b) 개인주의라는 일반원칙이며 (c)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정치적인 요건이나 제안에 대하여 정반대로 대응하는 플라톤의 원칙이 있는데, 이름하여 (α

) 천부적 특권의 원칙, (b

) 전체론이나 집단주의라는 일반원칙, 그리고 (c

)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은 개인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ㅡ 나는 이 세 가지 요점을 본 장의 4, 5, 그리고 6절을 할당하여 순서에 따라서 토론하겠다.

 

IV

원래의 평등주의란 국가의 시민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요건이다. 평등주의는 태생이나 가족관계, 혹은 재산이 사법관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는 시민들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권이 부여될지라도 천부적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평등주의적 원칙은 플라톤이 태어나기 몇 년 전,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하여 보전된 연설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에 의하여 훌륭하게 언명되었다. 10장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더 자세하게 인용될 것이지만 두 문장만 여기서 인용한다: ‘우리의 법률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동등한 정의를 제공하지만, 우리는 탁월함에 대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시민이 뛰어나면 그에게 공직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지만,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점에 대한 보상으로서이다; 그리고 가난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페리클레스는 말한다. 이 문장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예제도를 주저 없이 공격하는 위대한 평등주의 운동의 몇 가지 근본적 목표들을 표현한다. 페리클레스 자신의 세대에서, 이 운동을 대표한 사람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안티폰(Antiphon) 그리고 히피아스(Hippias)였는데, 그들 모두는 앞장에 인용되고, 헤로도토스(Herodotus) 또한 이 운동의 대표자였다. 플라톤의 세대에는, 이 운동이 알키다마스(Alcidamas)와 리코프론에(Lycophron) 의하여 대표되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위에 인용하였다; 또 다른 지지자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원칙은 물론 이 모든 것과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천부적 지도자를 위한 천부적 특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평등주의 원칙과 싸웠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자신의 요구를 확립했던가?

평등주의적 요건의 가장 유명한 언명들 몇 가지가 인상적이지만 의문스러운 천부적 권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그 대표적인 언명들 몇 가지가 자연적인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인간의 평등을 지적함에 의하여 이 요건들을 선호하여 논증했다는 것은 앞장서부터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그 주장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평등하고 다른 점에서는 불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규범적 요건은 이런 사실로부터 혹은 다른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논증이 모든 평등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용되지는 않았고, 그 한 사람으로서 페리클레스가 심지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플라톤은 자연주의가 평등주의 원리 내부에서 약점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고 그는 이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특정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 호소력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정치선전으로서 얻어지는 호소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당신의 하인과, 당신이 소유한 노예와, 동물과 다름없는 육체 노동자와 당신은 자연적으로 동등합니까? 이 질문은 웃긴다! 플라톤은 이 반응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천부적 평등 주장에 경멸과 조롱, 그리고 조소로 대항한 최초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자연주의적 주장을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적들에게 플라톤이 그 주장을 애써 귀속시키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대한 풍자인 메넥세노스(Menexenus)에서 플라톤은 평등법에 대한 주장과 천부적 평등에 대한 주장을 함께 연결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 체제의 기초는 탄생의 평등이다라고 그는 빈정거린다. ‘우리 모두는 형제다, 그리고 모두는 한 어머니의 자녀다;.. 그래서 탄생과 관련된 자연적인 평등으로 인하여 우리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을 갈망하도록 설득당한다.’

나중에 법률(Laws)에서, 플라톤은 평등주의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다음 공식으로 요약한다: ‘불평등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면 틀림없이 불평등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발전하여 평등한 사람에게는 평등을, 불평등한 사람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공식이 된다. 이 공식은, 평등주의에 대한 표준적 반대론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평등이란 사람들이 오직 평등하다면 뛰어날 터이지만,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평등하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불가능하다는 반대론. 표면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이 반대론은 실상 매우 비현실적인데, 그 까닭은 정치적 특권이란 인격의 자연스러운 차이점을 토대로 세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플라톤은 국가(Republic)를 저술할 때 이 반대론에 많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듯싶은데, 이유인즉 그가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론은 평등한 사람과 불평등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을 분배한다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한 곳에서만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언급을 제외하고 그는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하기보다는 평등주의를 잊는 것을 선호한다.

요약하여 플라톤은 평등주의 이론이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에 의하여 옹호되었기 때문에 그 이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적은 없지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그 이론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고 언급될 수 있다; 그는 평등주의 이론을 공격하였지만 솔직하게도 공개적으로도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반()-평등주의인 자신의 천부적 특권에 대한 원칙을 확립하려고 어떻게 노력했을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세 가지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데 두 주장은 주장이라고 할 것도 없다. 첫째 주장은, 국가에 대한 다른 세 가지 덕목이 검토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네 번째인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덕목이 틀림없이 정의라는 놀라운 언급이다. 이것이 주장으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나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주장으로 의미가 있음이 확실한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주로 이용하는 화자(話者)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미덕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하는지 아는가?’ 두 번째 주장은 더 흥미로운데 이유인즉 그 주장이, 자신의 반()-평등주의가 정의는 평등이라는 평범한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적인) 견해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 전부를 인용한다. 도시의 지배자는 또한 도시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고 논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닌 재판권의 목표가 아닌가?’ ㅡ 대화상대자인 글라우콘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일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인가?’ 그렇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속하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의라고 의견일치가 되겠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 우리가 지닌 정의에 대한 평범한 개념에 따라, 정의로운 재판권의 원칙임이 확립된다. 여기서 두 번째 논쟁은 끝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 (혹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 정의라는 결론을 초래하는 세 번째 주장에 (아래에서 분석될) 길을 내주는데 그 사회적 위치는 자기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제도와 관련된 사회적 위치이다 (혹은 직업).

이 두 번째 논증의 유일한 목적은, ‘정의란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회적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독자들이 다음 추론을 도출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나의 자리는 (혹은 나의 직업)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은 (혹은 내 직업을 수행하는 것) 정의롭다.’ 이것은 다음 주장과 거의 같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당신의 돈을 훔치겠다는 이 계획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계획을 유지하여 실행하는 것, 다시 말해서 당신의 돈을 훔치는 것은 정의롭다.’ 우리가 내리기를 플라톤이 바라는 결론은 자신의 것이라는 용어의 의미로 조잡스러운 재주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인즉 문제가, 정의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계급인 모든 것이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물로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양도될 수 없는 소유물로서도 취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은 그런 원칙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 원칙으로 인하여 공산주의로의 전이가 분명히 불가능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를 기르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이 조잡스러운 재주는, 아담(Adam)플라톤 자신의 정의에 대한 견해와 그 단어의 대중적.. 의미 사이의 접합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플라톤이 설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자신이 정의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려고 애를 쓰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주장은 훨씬 더 진지하다. 그 주장은 전체론이나 집단주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목적이라는 원칙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아래 5절과 6절에서 이렇게 분석되어 토론될 것이다.

그러나 이 요점들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발견을 플라톤이 기술하기 전에, 플라톤이 써놓은 서문을 주지시키고 싶다. 그 서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것을 고려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긴 서문은 ㅡ 이것이 플라톤 자신이 서문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ㅡ 독자가 실제로 자신의 비판적 능력을 둔화시키려고 고안된 극적인 장치의 연출을 마주하고 있을 따름일 때, 계속되는 논쟁이 있다고 믿도록 만듦에 의하여 독자가 정의 발견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시도로 보인다.

수호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지혜를 발견하고 보조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용기를 발견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하겠다는 의도를 선언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발견할 두 가지 일이 남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절제와,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탐구의 주요 대상인 이름하여 정의라는 다른 것.’바로 그것이다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절제는 빼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항의하고 소크라테스는 거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혹은 불성실한 것’) 터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을 들어준다. 이 작은 논쟁은 정의를 다시 시작하는 데 독자를 대비하도록 만들고,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할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독자에게 암시하며, 글라우콘은 논쟁을 계속하면서 플라톤의 지적(知的) 솔직함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그리하여 독자는 지켜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에 절제를 토론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절제란 노동자에게 고유한 덕행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는 그가 주장하는 절제와 구별될 수 있는지의 많이 논의된 질문은 쉽게 답변될 수 있다. 정의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절제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ㅡ 다시 말해서 더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다. 자신의 배를 금수처럼 채우는 노동자들에게 어떤 다른 덕행이 고유한가?) 절제가 발견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마지막 원칙은 어떠한가? 분명히 그것은 정의일 것이다.’분명히 그렇지라고 글라우콘은 답변한다.

, 친애하는 글라우콘이여, 우리는 사냥꾼처럼 정의가 숨은 곳을 에워싸고 가까이서 지켜보아야 하네, 그리고 우리는 정의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멀리 가지 못하게 해야 하네: 이유인즉 분명히 정의는 이 장소 근처 어디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네. 자네는 잘 살펴서 그 장소를 찾는 게 좋겠어. 그리고 자네가 처음 발견하면 나에게 소리를 치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글라우콘은 독자처럼 물론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앞장을 서달라고 간청한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기도하세 그리고 나를 따라오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땅이 관목으로 덮여서 건너기 힘들고 어두워서 탐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 발견한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야지’. 그러나 무엇을 계속하나? 우리의 탐사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논쟁을? 그러나 우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것 속에는 의미란 조금도 없다라고 항의하는 대신에 글라우콘과 그와 함께 있는 순진한 독자는 순종적으로 대답한다: ‘그럼, 우리는 계속해야지.’ 이제 소크라테스는 무엇인가 보인다(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보고하며 흥분한다. ‘만세! 만세! 글라우콘! 길이 있는 것 같아! 이제 사냥감은 도망치지 못할 거야!’라고 그는 소리친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이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정말, 우리는 완전히 바보였어. 멀리서 우리가 찾던 것이 늘 우리 발밑에 있었다니! 그러고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이런 종류의 감탄사와 반복되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계속하는데 글라우콘이 독자의 느낌을 표현하며 끼어들어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묻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기술하고 있던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항상 말했다라고만 말하자, 글라우콘은 독자의 성급함을 표현하여 말한다: ‘서문이 좀 길군: 나는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는지 듣고 싶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때야 플라톤은 내가 개괄한 두 가지 주장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글라우콘의 마지막 언급은 플라톤 자신이 이 긴 서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비판적 능력을 잠재우고, 화려한 언어 불꽃놀이를 극적으로 펼쳐서 독자의 주목을 이 탁월한 대화편의 지적(知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 ㅡ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판명되었다 ㅡ 외에는 나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플라톤이 그 약점을 알고 있었고 그 약점을 숨기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V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문제는 평등과 불평등에 관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문제를 계속 논의하기 전에, 몇 가지 언어 사용에 대한 비평이 필요할 듯하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용어는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α) 집단주의의 반대로, 그리고 (b) 이타주의의 반대로 사용될 수 있다. 전자(前者)의 의미를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지만 후자(後者)에 대한 동의어는 몇 가지가 있어서 예를 들면 이기주의이기심이다. 이것이 다음에서 내가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α) 의미로만 사용하고 (b)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이기주의이기심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이다. 작은 표를 만들면 유용할 것이다:

(α) 개인주의(α') 집단주의의 반대이다.

(b) 이기주의(b') 이타주의의 반대이다

이제 이 네 가지 용어들은, 규범적 법칙들의 법전에 대하여 어떤 자세나 요건 혹은 결정이나 제안을 기술한다. 반드시 모호하겠지만 이 용어들은 사례에 의하여 쉽게 예시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현재 목표와 관련하여 충분히 정확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집단주의는 우리가 플라톤의 전체론을 논의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하기에 집단주의로써 시작하자. 우주이든, 도시이든, 종족이든, 인종이든, 혹은 다른 집단이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은 수단으로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앞장에서 몇 구절로 예시되었다. 이 구절 중 하나를 더욱 완벽하게 다시 인용하면: ‘부분은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전체를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전체는 당신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이 인용문은 전체론과 집단주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던 (구절의 서두에서 알려질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인용문이 지니는 강력한 매력을 전달한다. 그 매력은 다양한 감정, 예를 들어 집단이나 종족에 속하고자 하는 갈망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매력에 있는 한 가지 요인은, 이타주의를 찬성하는 도덕적 호소이자 이기심이나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적 호소이다. 당신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당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플라톤은 암시한다.

이제 내가 만든 작은 표를 한 번 보면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가 아니며, 또한 이타주의나 이타심과 동일하지도 않다. 집단적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 예를 들어 계급 이기주의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집단주의와 같은 것은 이기심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른 한편으로, ()-집단주의자,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자는 동시에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는 다른 개인을 돕기 위하여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 하나는 아마도 디킨스(Dickens) 것이다. 디킨스가 지녔던 이기심에 대한 열렬한 증오와 인간의 약점 모두를 지닌 개인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흥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력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무명의 집단들에 겨냥된다면, 지금 우리가 집단적 단체나 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또한 심지어 진실로 헌신적인 이타주의에 대한 혐오와도 연결된다. (나는 Bleak House에 나오는 공공의 의무에 헌신하는 부인인 젤리비[Jellyby] 부인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예시들로 인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의 의미가 충분히 명확하게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예시들로 인하여, 내가 만든 표의 어떤 용어도 다른 칸에 있는 두 용어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가지 결합이 가능하다).

이제 플라톤에게도,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에게도 이타적 개인주의가 (예를 들어 디킨스의 이타적 개인주의와 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플라톤에 따르면, 집단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이기주의이다; 그는 모든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고 모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다. 이것은 용어사용법의, 언어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네 가지 가능성 대신에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오늘날까지 윤리적 문제를 고찰함에서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개인주의를 공격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집단주의를 옹호하여, 그는 우리가 지닌 이타심이라는 인도주의적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 자신의 공격에서, 그는 모든 개인주의자를 이기적으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헌신할 수 없는 것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 공격은 플라톤에 의하여 우리가 지닌 의미로서의 개인주의를 겨냥, 다시 말해서 인간 개인의 권리를 겨냥한다 할지라도 물론 매우 다른 표적인 이기주의에 도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끊임없이 플라톤에 의하여,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다.

플라톤은 왜 개인주의를 공격하려고 했던가? 그는 자신의 포화로 개인주의를 겨냥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개인주의는 아마도 평등주의보다 새롭게 출현한 인도주의적 신념을 훨씬 더 많이 방어하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정말로 종족주의를 와해시키고 민주주의를 발흥시킨 위대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플라톤의 기괴한 사회학적 직감은, 그가 적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변함없이 적을 감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인주의는 정의에 관한 오래된 직감적 관념의 한 부분이었다. 정의란 플라톤이 설명할 바와 같이 국가의 건강과 화합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다루는 어떤 방식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사람에게 내재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에 의하여 강조된다고 기억될 것이다. 이 개인주의적 요소는 페리클레스 세대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페리클레스 자신은 법률은 동등한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그들의 개인적 분쟁에서보장해야 함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웃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결정한다면 그를 괴롭히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국가는 사람들을 풀어놓을 목적으로,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언급과 비교하라.) 페리클레스는 이 개인주의가 이타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 그리고 그의 연설은 행복하게 다재다능하고, 자주적으로자란 아테네 젊은이를 기술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결합되어, 우리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핵심적 원칙이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서는 말하지 너의 종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우리 문명에서 성장하여 그 문명을 자극하는 모든 윤리적 교설의 핵심이다. 개인주의는 또한, 예를 들어, 칸트의 중심적이고 실용적인 원칙이다 (‘항상 인간 개인이 목적임을 인식하라, 그리고 인간 개인을 당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만으로 이용하지 말라’).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서 그렇게 강력했던 다른 사상은 없었다.

플라톤은 이 교설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신분제도 국가에 대한 적을 옳게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어떤 다른 체제전복적인원칙보다도 개인주의를 증오했다. 이것을 훨씬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개인에 대한 정말로 놀라운 적대감이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적게 감지되는 법률(Laws)에서 두 구절을 나는 인용하겠다. 첫째 구절은 국가(Republic)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한데, 국가(Republic)아녀자와 재산의 공동체를 그 구절은 토론한다. 플라톤은 여기서 국가(Republic)에 나오는 국체를 국가의 최고 형태로 기술한다. 최고의 국가에서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모든 소유물은 공동 재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로부터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것을 근절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자연으로 인하여 사적이고 개인적이 된 것들조차도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이 된다. 우리의 눈과 귀와 손도 마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인 양 보고, 듣고, 행동하는 듯하다. 모든 사람은 칭찬하고 비난함에서 최고도로 의견일치를 이루도록 주조되고, 그들은 심지어 동일한 것에 대하여 동시에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모든 법률은 도시를 최고도로 단결시키기 위하여 완성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무도 방금 상술한 원칙보다 국가의 최고 우수성에 대하여 더 나은 기준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국가를, ‘신성하다와 국가의 모형혹은 형태혹은 원형으로, 다시 말해서 국가의 형상이나 이데아로 기술한다.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모든 영예로 감싸서 실현하려던 희망을 포기했을 때 표현된 국가(Republic)에 있는 플라톤 자신의 견해이다.

두 번째 구절은, 역시 법률(Laws)에서 나오는데, 아마도 훨씬 더 솔직하다. 강조하건대 그 구절은 주로 군사적 원정과 군사적 훈련을 다루지만 플라톤은 이 동일한 군국주의적 훈련이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 그리고 최초의 아동기부터고수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다른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자들 및 스파르타 숭배자들처럼, 플라톤은 군사 훈련이라는 최고로 중요한 의무는 심지어 평화 시에도 최우선이어야 하고, 그 의무가 모든 시민의 전체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유인즉 완전한 시민들과 (모두 군인이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바로 동물들도 자신의 전체 삶을 항구적이고 총동원 상태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술하는바, ‘모든 원칙 중에서 가장 큰 원칙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도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각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무엇이든 하려는 습관이 들어서는 안 된다, 열정에 의해서든 심지어 장난기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시와 평화 시에 ㅡ 지도자에게로 그는 자신의 눈을 돌리고 그 지도자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도 그는 지도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세수를 하거나 식사를 해야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오랜 습관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꿈을 꾸지 않는 것과 완전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삶은 총체적 공동체 속에서 영위될 것이다. 전쟁에서 구원과 승리를 확보하는 데 이것보다 우수하고 더 낫고 더 효과적인 법률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 시와, 초기 아동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무질서의 모든 흔적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삶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인간에게 종속당하는 야생 동물의 모든 삶으로부터도 무질서의 흔적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심한 말이다. 사람이 개인을 적대시하기에 이보다 더 진지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 증오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특정 경험인 감지되는 사물로 구성된 변화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그가 증오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증오했다. 정치 분야에서, 개인은 플라톤에게 사악한 사람 그 자체이다.

이 자세는 반()-인도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일지라도, 일관되게 이상화되었다. 이 자세는 인도적으로, 비이기적으로, 이타적으로,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었다. E. B. 잉글런드(England), 예를 들어, 법률(Laws)에서 나온 이 두 구절 중에 첫 구절을 이기심에 대한 열정적 비난이라고 부른다. 유사한 말이 바커(Barker)에 의하여 그가 플라톤의 정의 이론을 토론할 때 사용된다. 그는 플라톤의 목표가 이기심과 시민의 불화를 화합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익에 관한 옛 조화가.. 그래서 플라톤의 가르침 속에서 복원된다; 그러나 그 조화는 조화에 관한 의식적인 의미로 고양되었기 때문에 새롭고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한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러한 진술과 무수히 많은 비슷한 진술들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유인즉 이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은 반()-개인주의가 이타심과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동일시로 인하여 반()-인도주의적 정치선전의 성공적인 효과가 발생했고, 우리 시대까지 윤리 문제에 관한 사고가 혼란되었다는 나의 주장이 이런 이유로 예시된다. 그러나 이 동일시와 허장성세에 속아서 플라톤의 명성을 도덕에 대한 스승으로 추앙하고 플라톤의 윤리학이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 신앙에 가장 근접한다고 세상에 선언한 사람들이 전체주의를 향한, 그리고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체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 해석을 향한 길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험한 일인데 이유인즉 기독교가 전체주의적 이념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 종교재판은 다시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솔직한 사람들이, 플라톤이 지녔던 의도가 내보이는 인간애에 설득당하는 이유 몇 가지를 더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집단주의적 교설의 근거를 준비하면서 플라톤은 보통 경구나 속담을 (피타고라스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함으로써 시작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공유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기심이 없고, 고상하며 우수한 감정이다. 그렇게 기릴만한 전제에서 출발한 주장이 완전히 반()-인도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요점은, 플라톤의 대화편인 특히 그가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영향 하에 있던 국가(Republic) 이전에 쓰인 대화편에,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감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가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소크라테스의 교설을 언급한다. 분명히, 이 교설은 이타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의 집단주의 이론과 같은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에서, 불의는 특정 인간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반하는 행위이어서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지라도 집단만 그 행위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특징을 발견하지 못한다. 정의에 관한 이론은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이고, ‘소크라테스(여기서는 아마도 실제 소크라테스와 매우 닮았다) 내놓는 불의의 사례는 사람을 따귀를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혹은 살해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행위를 당하는 것이 그런 행위를 가하는 것보다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정말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매우 비슷하고, 정의에 대한 그의 교설은 페리클레스의 정신과 탁월하게 들어맞는다. (이것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10장에서 실행될 것이다.)

이제 국가(Republic), 그런 개인주의와 양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완전히 적대적으로 정의에 관한 새로운 교설을 전개한다. 그러나 독자는 플라톤이 여전히 고르기아스(Gorgias)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쉽게 믿을 것이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저술에서 제시된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교설을 플라톤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Republic)에서 소크라테스의 적들이 불의를 가하는 것이 좋고 유쾌하며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는 반론을 내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물론 모든 인도주의자는 그런 냉소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 면전에서 정의에 대한 그런 사악한 말을 내가 허용한다면 나는 죄를 지을까 두렵다 자신의 목적을 언명할 때, 그를 믿는 독자는 플라톤의 선의를 확신하고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기꺼이 따라간다.

플라톤이 주는 이 확신의 효과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냉소적이고도 이기적인 말을 따르고 그 말과 대조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많이 확산되는데, 트라시마코스는 최악의 정치 불량배로 그려진다. 동시에 독자는 개인주의를 트라시마코스의 견해와 동일시하고, 플라톤이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와중에 플라톤 시대의 모든 체제전복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트라시마코스 같은 개인주의적 도깨비에 (그의 모습과 볼셰비키 사상이라는 현대 집단주의적 도깨비 사이에는 큰 유사점이 있다) 놀라서 덜 분명하기 때문에 더 실재적이고 더 위험한 또 다른 형태의 야만성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플라톤이 개인의 힘이 옳다는 트라시마코스의 교설을, 국가의 안정과 힘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옳다는 똑같이 야만적인 교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요약한다. 자신의 급진적 집단주의 때문에, 플라톤은 사람들이 보통 정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부르는 문제들에, 다시 말해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항의성 주장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데조차 흥미를 갖지 못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주장을 국가의 주장에 조정하는 일에도 흥미가 갖지 않는다. 이유인즉 개인이 완전히 열등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국가 전체를 위하여 최선인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입법한다.. 이유인즉 내가 정당하게 개인의 이익을 가치의 열등한 수준에 두기 때문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는 오직 집단적 전체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고, 정의는 그에게 집단의 건강, 통합, 그리고 안정일 뿐이었다.

 

VI

지금까지 인도주의적 윤리로 인하여 정의에 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견해와 같은 것을 아직 개괄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이 전체주의적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이론을 개인의 윤리에 적용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과제 모두가 이제 시작될 것인데, 두 번째가 먼저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정의를 발견했다는 플라톤의 주장 중에서 세 번째 주장인 지금까지 겨우 대략적으로만 개괄된 주장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겠다. 여기에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있다:

자 당신이 나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목수가 구두 만들기를 시작하고 제화공이 목수일을 시작한다면 도시에 해롭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아니 별로요.’ 태생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나 돈을 버는 계층의 구성원이.. 군인 계층에 들어온다면; 아니면 군인이 수호자 계층에 그럴 가치도 없이 들어온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이런 종류의 비밀 음모는 도시의 몰락의 의미할 터인가?’ 매우 분명히 그렇지요.’ 우리의 도시에는 세 계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음모나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의 이전이 도시에 대한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그래서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하겠지?’ 틀림없이 그렇지요.’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자신의 도시에 대한 극악한 죄악은 불의라고 선언하겠지?’ 물론이지.’ 그렇다면 이것은 불의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도시 속에 있는 각 계층이 자기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급도, 이것은 정의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논증을 보면, (α) 엄격한 신분제도를 완화하면 도시가 틀림없이 붕괴한다는 사회학적 전제를 우리는 발견한다; (b)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을 불의라는 한 가지 주장의 변함없는 반복; 그리고 (c) 그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이제 여기서 사회적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 플라톤의 이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가 발생은 해로움이라고 그가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학적 전제 (α)를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해서만 중지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불의의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c)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것은 (b)이다; 플라톤의 주장을 일별하면 그의 사고 전체 흐름에는 다음 질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 해로운가? 그것은 해를 많이 끼치는가, 혹은 적게 끼치는가?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고 불의라고 그는 변함없이 되뇐다.

플라톤이 한 가지 궁극적 기준인 국가의 이익만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안다.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선량하고 덕행이며 정의롭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나쁘고 악하고 불의이다.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은 도덕적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행동은 부도덕하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도덕 법전은 엄격하게 공리주의적이다; 그것은 집단주의적이나 정치적인 공리주의이다. 도덕성에 대한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도덕성은 정치적 위생학일 뿐이다.

이것은 도덕성에 관한 집단주의적, 종족적, 전체주의적 이론이다: ‘나의 집단 이익에 속하는 것은 선량하다; 혹은 나의 종족에 속하는 것; 혹은 나의 국가에 속하는 것.’ 이 도덕성이 국제 관계에 대하여 함축하는 바는 알기 쉽다: 국가 자체는 어떤 행동을 해도, 국가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잘못일 수가 없다는 것; 국가가 자체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국가의 힘을 증강시킬 수 있다면, 국가는 자신의 백성에게 폭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를 공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국가의 비도덕성에 대한 명시적 인정과 결과적으로 국제 관계에서 도덕적 허무주의의 옹호인 이 추론은 헤겔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전체주의적 윤리의 관점에서, 집단적 공리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완전히 옳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덕행이다. 훈련이라는 군사적 덕행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그 시민의 덕행이다. 그리고 이 덕행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덕행 이론체계에서 정의가 담당하는 저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다. 그 까닭은 국가라는 커다란 시계태엽 속에 있는 톱니는 덕행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 톱니는 자신의 크기, 모양, , 기타 등등이라는 덕행으로 자신의 임무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톱니들은 올바른 장소에 각각 맞추어져서 그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첫 번째 형태의 덕행인 특정 임무를 위한 적합성은 톱니의 특정 임무에 맞추어 차별을 초래할 것이다. 어떤 톱니는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크기만 하다면 덕행을 갖출 것인데, 다시 말해서 들어맞는다; 다른 것들은 강하면; 다른 것들은 부드러우면 들어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는 덕행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전체의 덕행이 될 것이다: 적당하게 함께 맞추어지는 덕행 ㅡ 화합을 이루는 덕행. 이 보편적 덕행에게 플라톤은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과정은 완벽하게 일관적이어서 전체주의적 도덕성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정당화된다. 개인이 톱니에 지나지 않는다면, 윤리는 그 개인을 어떻게 전체에 맞추는가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플라톤이 말하는 전체주의의 진정성을 믿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른 나머지 계급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요건은 단호하지만, 그의 이상은 상층 계급이 노동 계급을 최대한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이상은 전체의 안정이다. 그러나 그가 착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유는 다시 순전히 공리주의적이다. 착취의 제한은 계급 지배를 안정시키는 데 이익이 된다. 수호자가 너무 많이 갖고자 한다면,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안정되고 안전한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에 의하여 도시의 모든 재산을 전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면, 분명히 그들은 헤시오도스(Hesiod), “절반은 전체보다 더 많다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알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급 특권을 제한하려는 이 경향도 상당히 흔한 전체주의의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전체주의는 비도덕적이지만 않다. 전체주의는 닫힌 사회의 ㅡ 집단의, 혹은 종족의 ㅡ 도덕성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집단적 이기심이다.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솔직하고 일관적인 것을 고려하면, 왜 그에게 앞의 두 가지 주장과 함께 긴 서문이 필요했던가? 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이 모든 불안감은 왜일까? (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이 불안감이 단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절들의 비합리적인 특징은 해명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플라톤의 집단적 태엽장치가 그 모든 황당무계함과 무의미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제시되었다면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플라톤은 자신이 부수려고 했던 힘의 도덕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는 감히 그 힘에 도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 힘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새로 출현한 인도주의가 갖는 도덕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냉소적이고도 의식적인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자신의 더 선량한 양심에 개인주의의 사악함을 설득하려는 비극적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받는 인상은 후자(後者)이며, 이 내부 갈등이 플라톤이 발휘하는 매력의 주요 비결이다. 플라톤이 새로운 이념에 의하여, 특히 위대한 개인주의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순교에 의하여 자신의 영혼의 깊은 곳까지 감동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의 지식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미치는 이 영향력에 대항하여, 항상 공개적은 아닐지라도, 싸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로 인하여 때때로 그가 주장하는 전체주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몇 가지 인도주의적인 관념을 발견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철학자들이 플라톤을 인도주의자로 대변할 수 있던 이유가 설명된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주장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인 자신의 세대에 처음으로 전개된 이론을 취급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잘못 취급하는 방식이다.

이 이론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정치적 요건이나 정치적 제안에 관한 언어(5III절과 비교하라) 사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본질주의적인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그 실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주의적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정치적 의무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국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국가 활동의 합법적 목표로서 우리는 무엇을 고려하라고 제안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근본적인 정치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우리는 국가 없이, 다시 말해서 무정부로 사는 것보다는 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살기를 선호하는가? 우리가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것은 공학자(technologist)가 정치적 제도를 구축하거나 재구축할 수 있기 전에 답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질문이다. 이유인즉 그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특정 제도가 그 기능에 잘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인도주의자의 답변은: 내가 국가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보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나 자신의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보호를 요구한다. 나는 더 큰 주먹이나 더 큰 총을 가진 사람들에게 좌지우지 당하며 살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다. 나는 공격과 방어의 차이점이 인정되기를 바라고 방어는 국가의 조직된 힘에 의하여 지원되기를 바란다. (방어는 현재 상황[status quo]의 방어이고 제시된 원칙은 이것에 해당한다 ㅡ 현재 상황[status quo], 그 개정을 위한 법률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 법률에 의해서만이나 화해에 의해서만 혹은 중재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 하지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정될 수 없다는 것.) 나는 나 자신의 행동 자유가 국가에 의하여 다소 축소되는 것을 볼 각오가 철저히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내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조건으로 남아있는 자유에 대한 보호를 내가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공격에 대하여 국가가 방어해주기를 내가 원한다면, 공격할 나의 자유를 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국가의 근본적 목적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시민들을 해치지 않는 저 자유의 보호를 나는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제한하여야 하고, 자유를 공평하게 제한하는 것을 이룩하기에 필요한 것 이상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것이 인도주의자와 평등주의자, 개인주의자의 요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공학자가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상당히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에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요구이다.

이와 같은 목표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많은 반대의견이 제기되었다. 일단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정되면 자유에 대한 전체 원칙이 무너진다, 그리고 어떤 제한이 필요하고 어떤 제한이 무분별한지는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권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혼동에서 비롯된다. 그 반대의견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목표를 실현하는 길에 놓인 몇 가지 중요한 전문적 난제와 혼동한다. 자유의 보호가 국가의 의무인 저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시민에게 남겨질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렵다. 그러나 저 한계를 근접하게 결정함과 같은 과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민주국가들의 존재에 의해서 증명된다. 사실상, 이와 같은 근접적인 결정 과정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그것은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난제는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를 변경하도록 강요할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는, 간단히 진술되어, 국가는 범죄, 즉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결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 자유가 끝나고 범죄가 시작되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전체 반대의견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자유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먹을 마음대로 어떤 방향으로든 휘두를 수 있다고 항의하는 악당에 대하여 판사가 당신이 주먹을 휘두르는 자유는 당신 이웃의 코의 위치에 의하여 제한된다라고 현명하게 대답했다는 일화에 의하여 답변된다.

내가 여기서 개괄한 국가에 대한 견해는 보호주의라고 불릴는지도 모르겠다. ‘보호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자유와 반대되는 경향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은 보호주의로 특정 산업 이익을 경쟁에서 보호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덕주의자는 보호주의로 국가 관리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도덕적 보호 장치를 세워야 한다는 요구를 의미한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적 이론이 이런 경향 어느 것과도 관련되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이론의 한 가지라 할지라도, 그 보호주의라는 이름이 자유주의적이지만 엄격한 무간섭 정책(흔히, 그러나 완전히 올바르지 못하게, ‘자유방임[laissez faire]이라 불린다)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국가간섭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종류의 자유도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분명히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교육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태만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그리고 국가가 모든 교육시설이 모든 사람에게 이용될 수 있도록 감독해야 한다면 어느 정도의 국가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 국가 너무 많이 통제하면 자유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데 그 까닭은 국가의 지나친 통제가 세뇌 교육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 제한이라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는 틀에 박힌 공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항상 어중간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환영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정치적 문제가 지니는 자극과 이런 종류의 정치적 갈등이 없으면 자유를 위하여 싸우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곧 사라질 터이고, 그와 함께, 그들의 자유도 사라질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유와 안전, 즉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는 안전 사이에서 주장되는 충돌은 환상으로 판명된다. 이유인즉 자유란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유 시민에 의하여 통제되는 국가만이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합당한 안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진술되면, 국가에 대한 보호주의적 이론에는 역사주의나 본질주의의 요소가 없다. 그 이론은, 개인과 보호주의적 목적을 결합하여 국가가 시작되었다거나, 역사에서 어떤 실제적인 국가도 이런 목적에 따라서 통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론은 국가의 본성에 관하여, 혹은 자유의 천부적 권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론은 국가가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론은 정치적인 요구, 더 정확하게, 특정 정책을 채택하라는 제안을 언명한다. 그러나 국가가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결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술하는 많은 규약주의자들이, 비록 그들이 어설프고 기만적인 언어로 ㅡ 역사주의의 언어 ㅡ 이 요구를 표현했을지라도, 바로 그 요구를 표현할 의도를 지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요구를 표현하는 비슷한 기만적인 방식은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국가의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국가란 상호간의 보호를 위한 결사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이론들은 진지하게 토론되기 전에, 말하자면 정치적 행동을 위한 요구나 제안이라는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적 특징으로만 이루어지는 끝없는 토론이 불가피하다.

그런 바뀜의 한 가지 사례는 이렇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버크(Burke)와 많은 현대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재론되었다. 이 비판은 보호주의가 국가의 임무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란 (버크의 말을 사용하면) ‘다른 존경으로 고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란 일시적이고 멸망하는 본성을 지닌 조악한 동물적 생존에만 굴종하는 것들에서의 협력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합리적인 목적으로 결속된 것보다 더 높고 고상한 것으로 언급된다;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다.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높은 임무를 지니고 있다. 국가에게는 도덕적 임무가 있다. ‘덕행을 보호하는 것이 그 이름에 걸맞은 국가가 하는 일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가 이 비판을 정치적 요구의 언어로 변환시키면, 우리는 보호주의에 대한 이 비판자들이 두 가지 것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들은 국가를 숭배의 대상물로 만들고 싶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소망에 반대하여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종교적 문제이다; 그리고 국가 숭배자들은 스스로 어떻게 그들의 신조를 그들이 지닌 다른 종교적 믿음, 예를 들어 10계명의 1계명과 화해시킬지를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요구는 정치적이다. 실제로, 이 요구는 국가의 관리가 시민들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은 권력을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삶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법성인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의 영역이 고유한 도덕성을 희생하여 증가되어야 한다는 요구인데 그 고유한 도덕의 영역은 국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정에 의하여 ㅡ 우리의 양심에 의하여 ㅡ 강제되는 영역이다. 그러한 요구나 제안은 합리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제기하는 사람은 분명히 이것이 개인이 지닌 도덕적 책임의 종말이며,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터임을 알지 못한다고 그런 요구에 반대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개인적인 의무가, 종족주의적 금기와 개인의 전체주의적 무책임으로 대체될 터이다. 이 태도 전체에 반대하여, 개인주의자는 국가의 도덕성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평균 시민의 도덕성보다 상당히 낮은 경향을 띠어서 국가가 국민의 도덕성을 억제하는 것보다 그 반대상황으로 국민의 도덕성이 국가를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자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현존하는 민주국가는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사회공학에서 매우 큰 업적을 냈다고 틀림없이 언급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다른 개인들이 저지르는 많은 형태의 범죄와 공격이 실제로 억제되었거나 많이 감소되었으며, 법정은 이해관계가 얽힌 어려운 소송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의를 다루었다. 이런 방식이 국제 범죄나 국제 분쟁까지 확대되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민들의 평화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시민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집행기관은 공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국제 범죄를 억제하는 공학적 문제는, 그 문제가 솔직하고 합리적으로 다루어지자마자, 실제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가 분명하게 제시되면, 사람들을 지역적 규모와 세계적 규모 양쪽에서 보호기관이 필요하다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가 숭배자는 계속해서 국가를 숭배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제도 공학자가 국가 내부의 기능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국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라.

 

VII

이제 이 운동의 연혁으로 돌아가면,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이론은 처음에 고르기아스(Gorgias)의 제자인 소피스트 리코프론(Lycophron)에 의하여 제시된 듯하다. 그는 (역시 고르기아스의 제자인 알키다마스[Alcidamas]처럼) 천부적 특권 이론을 공격한 최초인 한 사람이었다고 이미 언급되었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이론을 그가 믿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기록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코프론이 보호주의 이론을 시작했음을 매우 개연적인 방식으로 리코프론에 관하여 말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의 후계자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명료함으로 리코프론이 그 이론을 언명했음을 우리는 안다.

리코프론은 국가의 법률을 사람이 서로에게 정의를 확신시키는 공식 계약으로서 간주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국가의 법률에는 시민을 선량하거나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리코프론이, 국가가 범죄 예방을 위한 협동적 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국가를 불의의 행동에 대항하여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그리고 시민들의 평화로운 교류, 특히 교역을 허용하는 위한) 도구로서 간주했다고 그는 부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는, 리코프론이 자신의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서 다시 말해서 사회계약에 근거한 국가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서 설명했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반대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국가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유인즉 리코프론은 국가의 본질적 목적이 시민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코프론이 평등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보호주의에 대한 요구를 채택하여 공학적 관점에서 이 목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했음을 의미한다.

이 형태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사회계약이라는 전통적인 역사주의 이론이 직면하는 반대 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다. 예를 들어 바커(Barker)에 의하여 계약 이론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하여 하나하나 충족되었다 흔히 설명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커의 요점들을 검토하면 그 요점들은 리코프론의 이론을 확실히 충족시키지 못함이 밝혀질 것인데, 리코프론을 바커는 나중에 계약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의 초기 형태를 세웠을 개연성이 있는 창시자로 본다 (이 요점에서 나는 바커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다). 바커의 요점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α) 역사적으로 계약은 없었다; (b) 국가는 역사적으로 설립되지 않았다; (c) 법률은 규약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 우세한 힘, 아마도 본능, 기타 등등에서 출현한다; 법률은 법전이 되기 전에 관습이었다; (d) 법률의 힘은 제재에, 법을 집행하는 국가의 보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을 지키려는 개인의 각오에, 즉 개인이 지닌 도덕적 의지에 있다.

반대 이론 (α), (b) 그리고 (c)는 본질적으로 상당히 옳다고 인정되는데 (몇 가지 계약이 있었다 할지라도) 오직 그 역사주의적 형태에서만 그 이론과 관련되고 리코프론의 설명과의 무관함이 즉각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반대 이론들을 고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반대 이론 (d)는 정밀한 고찰을 받을 만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공격받은 그 이론은 다른 이론보다 의지’, 아니 개인의 결정을 더 강조한다; 실제로, ‘계약이라는 단어는 자유의지에 의한 합의를 의미한다; 그 단어는 아마도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법률의 힘은 개인이 법을 수용하고 지키겠다는 각오에 있음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d)가 계약 이론에 대한 반대 이론이 될 수 있을까? 유일한 설명은, 바커가 계약이란 개인의 도덕적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기적인 의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이 해석은 플라톤의 비판과 일치할 개연성이 더 짙다. 그러나 사람은 보호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이기적일 필요가 없다. 보호는 자기보호를 의미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험에 든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며 더 작은 정도로 (혹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할 것이다. 보호주의의 근본적인 관념은: 강한 자의 위협으로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라 이다. 이 요구는 약한 자에 의하여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 강한 자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한 요구라고 제시하는 것은 최소한도로 말해서도 기만적인 것이다.

리코프론의 보호주의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반대로부터 자유롭다. 그 보호주의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인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호주의를 강탈당했다. 그 보호주의는 후세대들에까지 다음과 같이 왜곡된 형태로 전해졌다; 사회계약에서 국가의 기원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론으로서; 혹은 국가의 진정한 본질은 규약이라는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본질주의적 이론으로서; 그리고 인간이 지닌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본성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이기심의 이론으로서.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권위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영향 때문이다.

 

VIII

플라톤이 리코프론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유인즉 그가 (매우 개연적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리코프론의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이론은 처음에는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나중에는 국가(Republic)에서 언급되는 이론과 쉽게 일치될 수 있다. (두 저작 어디에서도 플라톤은 그 창시자를 언급하지 않는데 플라톤의 적이 살아있을 때 플라톤에 의하여 자주 채택된 태도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 이론은 국가(Republic)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Trasymachus)처럼 윤리적 허무주의자인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상술된다. 국가(Republic)에서는, 그 이론이 글라우콘(Glaucon)에 의하여 상술된다. 어느 경우에도 화자(話者)는 자신이 제시하는 이론에 대하여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두 구절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 다시 말해서 정의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한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마치 그 이론의 논리적 전제가 반드시 이기적이며 심지어 허무주의적인 양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견해가, 불의를 저지르고 싶지만 저지르기에는 너무 약한 사람들과 그러므로 강한 사람도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옹호되는 양; 그 이론의 유일하게 필요한 전제는 범죄, 즉 불의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요구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공정하지 못한 제시.

지금까지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나오는 두 구절은 평행선인데 그 평행선은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두 구절 사이에는 비평가들이 간과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은 이것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는 그 이론이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이론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가 소크라테스를 또한 반대하기 때문에 보호주의 이론은 암시적으로 플라톤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된다. 그리고 정말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허무주의자 칼리클레스에 반대하여 그 이론의 몇 가지 특징을 옹호하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국가(Republic)에서 동일한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칼리클레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상술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글라우콘에 의하여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은 허무주의적으로서 제시되고, 소크라테스는 이기심에 관한 이 사악한 교설을 파괴하여 승리하는 영웅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있는 경향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 그 구절들은 사실상 완전히 바뀐 얼굴을 드러낸다. 칼리클레스의 적대적 제시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의 경향은 보호주의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국가(Republic)는 보호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여기에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발췌된 칼리클레스의 말이 있다: ‘법률은 주로 약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람들 다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법률을..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혹시 이길 강한 사람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 그리고 그들이 불의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이웃을 이기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등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평등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한다고 나는 말하겠다.’ 우리가 이 설명을 보며 칼리클레스의 공개적 조롱과 적의에서 기인하는 것을 제거하면, 우리는 리코프론의 이론이 지닌 모든 요소를 발견하다: 평등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불의에 대한 보호. 심지어 강한 자에 대한 언급과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하고 있는 약한 자에 대한 언급은, 풍자만화의 요소가 참작된다면, 보호주의적 관점에 정말로 잘 들어맞는다. 리코프론의 교설이, 국가가 약한 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주장인 물론 결코 수치스럽지 않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은 조금도 비개연적이지 않다. (이 요구가 어느 날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표현된다: ‘온유한 자들만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칼리클레스 자신은 보호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강자의 천부적권리를 지지한다. 소크라테스가 칼리클레스를 반대하는 논쟁에서 보호주의를 구원하러 왔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보호주의를 자신의 핵심적 논지와 ㅡ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ㅡ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최근 말하던 바와 같이, 많은 의견들이 정의는 평등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 ‘.. 규약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스럽고, 정의는 평등이라고 확인한다.’ (그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강력하게 반[]-민주주의적인 몇 가지 경향을 또한 드러낸다. 그에 대한 설명은, 플라톤이 고르기아스[Gorgias]를 저술할 당시 자신의 전체주의적 이론을 아직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심정은 이미 반[]-민주주의적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누구라도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가 둘 다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진짜로 설명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국가(Republic)로 방향을 선회하면, 그 저작에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를 논리적으로는 더 엄격하지만 윤리적으로는 변함없는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대한 해석으로 제시한다; 글라우콘은 말한다, ‘나의 주제는 정의의 기원이며 그 기원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인가이다. 어떤 사람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가하는 것이 천성적으로 탁월한 일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불의를 당하는 나쁨은, 불의를 가하는 바람직함을 많이 능가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를 것이고 물론 불의를 당하기도 할 것이어서 그들은 두 가지를 충분히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불의를 물리칠 정도나 불의 가하기를 즐길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계약을 맺어서 상호간에 아무도 불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거나 불의를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면 더욱 이롭다고 결정한다. 이것이 법률이 설정되었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론에 따른 정의의 본성이자 기원이다.’

그 합리적 내용에 관한 한, 이것은 분명히 동일한 이론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재현되는 방식 또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의 칼리클레스의 말과 세부적으로 닮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이제 보호주의 이론은, 그 이론이 냉소적인 이기심에 근거한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더 이상 옹호되지 못한다; 그 반대이다. 우리가 지닌 인도주의적 감정, 우리가 지닌 도덕적 분노는 이미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의하여 일깨워져 우리를 보호주의의 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 이론은 그 인도주의적 특징이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밝혀졌는데, 플라톤에 의하여 반()-인도주의적으로 보이고, 정말로, 불의를 저지르고도 안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불의란 훌륭한 것이라는 혐오스럽고 전혀 신빙성이 없는 교설의 결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저 없이 이 요점을 강조한다. 인용된 구절이 확장되어 이어지면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에 관한 소위 필수적인 가정(假定)이나 전제를 더 자세하게 상술한다. 그가 언급하는 이것들 중에는, 예를 들어,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라는 견해; 단지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약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가 확립된다는 견해; 그리고 시민 개인에게는 범죄로 이루어지는 삶이 매우 이로울 터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은 제시된 이론을 글라우콘이 진짜 해석했다고 명시적으로 확언한다. 이런 방식에 의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독자 대부분과 아무튼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여기에 전개된 보호주의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무자비하고 냉소적인 이기심과 동일하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개인주의의 모든 형태는 똑같은 것, 즉 이기심과 같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설득한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적들, 그리고 특히 계약 이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카르네아데스(Carneades)에서부터 홉스(Hobbes)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가 주장하는 치명적인 역사주의적 제시뿐만 아니라 자시들의 이론적 근거가 윤리적 허무주의라는 플라톤의 확신 또한 채택했다.

이제 그 이론에서 주장되는 이기적 근거에 대한 상술은 플라톤이 보호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한 전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술이 차지하는 공간을 고려할 때, 그가 더 훌륭한 주장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말을 아끼는 버릇이 아니라 그가 그런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우리는 안심하고 전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주의는 우리가 지닌 도덕적 감정의 도움을 받아서 ㅡ 정의 관념에 반하는, 그리고 정당함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느낌에 반하는 공개적 모욕으로서 ㅡ 일축되어야 했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의 교설에 대한 위험한 적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 인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조의 대표이기도 한 이론,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게는 소중했던 모든 것에 대한 주적(主敵)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교묘하다; 그 방식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의하여 그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방식이 내가 보기에 속임수라고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평하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공격당한 이론에는, 불의는 사악하다 다시 말해서 불의는 예방되어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부도덕한 어떤 전제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 이론이 이기심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이론이 도출되는 허무주의적 이론과 동일하지 않고, 반대되는 것으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국가(Republic)와 이후 저작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을 짓누르고, 전체주의적인 도덕 이론을 전개함에 의하여 종족주의의 주장을 재설립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새로이 출현한 인도주의적 도덕성에 강한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이는 대신에, 그는 심지어 평등주의를 토론하기조차 회피했다. 그리고 천부적으로 우수한 주인 인종의 전체주의적 계급 통치라는 대의명분에서 인도주의적 감정의 지지를 그는 성공적으로 받았으며 그 감정의 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 계급 특권은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정의의 본질이다. 결국, 이 주장은 정의가 국가의 힘과 건강, 그리고 안정에 유용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다음과 같은 현대 전체주의 정의(定義)와 매우 유사한 주장: 정의(Right), 나의 국가나 나의 계급 혹은 나의 정당의 힘에 유용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이야기 전체가 아니다. 계급 특권에 대한 강조에 의하여,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정치 이론의 핵심에 놓는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가장 현명한 자, 가장 훌륭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였다. 이 탁월한 답변으로 인하여 그가 주장하는 이론의 특징이 수정되지 않는가?

 

 

 

주석

 

6 : 전체주의적 정의(正義)

 

플라톤의 사회학을 분석하면 그의 정치강령은 쉽게 나타난다. 그의 근본적인 요구는 두 가지 공식 중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데, 첫째는 그가 주장하는 변화와 정지에 대한 이상주의적 이론에 대응하고, 둘째는 그의 자연주의에 대응한다. 이상주의적 공식은: 모든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켜라! 변화는 악이고 중지는 신성하다. 국가가 그 원형을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다시 말해서 도시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정확하게 모방한다면 모든 변화는 중지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자연주의적 공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우리 선조들이 살던 원래 국가로,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설립되어 안정된 원시 국가로 돌아가라;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의 종족적 가부장제로, 소수의 현명한 자가 무지한 다수를 지배하는 자연적인 계급 지배로 돌아가라.

실제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강령의 모든 요소가 이 요구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요소들 자체가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안정된 계급 지배를 위한 조건에 관한 플라톤의 사회학적 교설들과 틀림없이 결합된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주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A) 엄격한 계급 구분; 다시 말해서 목자(牧者)와 파수 견으로 구성된 지배 계급은 인간 가축과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B) 국가의 운명과 지배 계급 운명의 동일시; 이 계급과 이 계급의 단결에서 독점적 이권; 그리고 이 단결에 복속하는, 이 계급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한 엄격한 규칙과 계급 구성원의 이권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집단화하기.

이 주요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들이 도출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C) 지배 계급은 군사적 덕행 및 훈련 같은 것을 독점하고, 무기를 휴대할 권한과 모든 종류의 교육받을 권리를 독점한다; 그러나 이 계급은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특히 돈을 버는 일로부터 제외된다.

(D) 지배 계급의 모든 지적(知的) 행위는 검열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주조하고 통일시키는 목적으로 지속적인 정치선전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 입법 그리고 종교에서의 모든 혁신은 금지되거나 억제되어야 한다.

(E) 국가는 자족적(self-sufficient)이어야 한다. 국가는 경제적 자급자족을 겨냥해야 한다; 그 까닭은 그렇지 않다면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거나 그들 스스로 상인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상인에게 의존하면 지배자들의 권력이 약화할 터이고, 지배자들 스스로 상인이 된다면 그들의 단결과 국가의 안정이 약화할 터이다.

이 강령은 전체주의적으로서 정당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강령은 틀림없이 역사주의적 사회학을 근거로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전체주의적이지도 않고 역사주의를 근거로 세워지지도 않은 요소인, 플라톤의 강령과 관계된 다른 특징은 없는가? ()과 미()를 향한 플라톤의 열정적인 욕망은 어떠한가, 또는 지혜와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떠한가? 현명한 자인 철학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자신이 만든 국가의 시민을 행복하고 도덕적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떠한가? 그리고 국가란 정의(正義: justice)를 바탕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가? 심지어 플라톤을 비판하는 저술가들도 그의 정치강령은 시민들의 행복과 정의(正義: justice)의 지배라는 그의 목표에 의하여, 어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전체주의와 분명히 구별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철학은 자유 사상에 대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심한 공격이라는 크로스먼(Crossman)의 언급으로부터 그의 비판적 자세가 측정될 수 있는데, 플라톤의 계획은 그 안에서 모든 시민이 실제로 행복한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그가 여전히 믿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조드(Joad)인데, 그는 플라톤의 강령과 파시즘의 강령 사이의 유사성을 다소 길게 토론하지만, 플라톤이 주장하는 최고의 국가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내재하는 그런 행복을 이루기때문에, 그리고 이 국가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정의(正義)’라는 이념을 토대로 건설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의 정치강령이, 전체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기는커녕, 전체주의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 견해에 대한 반대의견들이 플라톤의 이상화를 선호하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편견에 근거한다고 나는 믿는다. 크로스먼이 이러한 경향을 지적하여 파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은 다음 진술로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플라톤은.. 자유 사상의 모든 원칙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반동자로서 완전히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실제 생활에서 격리되어 신()의 초월적 도시를 꿈꾸면서 높은 경지로 추앙되었다,.. ’ 그러나 크로스먼 자신은, 그렇게도 명백하게 폭로했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로우트(Grote)와 곰페르츠(Gomperz)국가(Republic)법률(Laws)에 있는 몇 가지 교설들의 반동적 특징을 지적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도 이 교설들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플라톤이 근본적으로 인도주의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적대적 비판은 무시되었거나,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으로 여겨지고, 혁명가들에 의하여 혁명가로 여겨지던 플라톤을 이해하여 평가하지 못했다고 해석되었다. 플라톤에 대한 이런 종류의 완전한 신뢰는 의심할 바 없이 여전히 우세해서, 예를 들어 필드(Field)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라고 경고할 필요를 느낀다. 이것은 물론 매우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플라톤을 혁명적 사상가나 적어도 진보주의자로 만들려는 경향이 꽤 퍼지지 않는다면, 그 지적은 분명히 중요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필드 자신이 동일한 종류의 신뢰를 플라톤에게 보내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플라톤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새롭고 체제전복적인 조류를 강하게 반대하고있었다고 말을 이어갔을 때, 그는 확실히 플라톤이 증언하는 이 새로운 조류의 체제전복성을 너무 쉽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적들은 항상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체제전복을 꾀한다고 비난해왔다. 그리고 거의 늘 그들은 정직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위대한 이상주의자를 이상화하는 일은 플라톤 글의 해석뿐만 아니라 번역에도 퍼져있다. 인도주의자가 틀림없이 말하는 것이라는 번역자의 견해와 맞지 않는 플라톤의 격렬한 언급들은 흔히 완화되거나 잘못 이해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플라톤 작품인 소위 공화국(Republic)’이라는 바로 제목의 번역에서 시작된다. 이 제목을 들을 때 우리의 처음 생각에 와 닿는 것은 저자가 혁명가가 아니면 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제목은 아주 단순히, 이런 연상과는 관계가 없이 그리스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영어 형태이고 그 단어를 적당한 영어로 번역하면 정치체제도시 국가혹은 국가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번역인 공화국은 플라톤이 반동적이었을 수가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틀림없이 기여했다.

()과 정의(正義), 그리고 언급된 다른 이념들에 대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의 정치적 요구가 순전히 전체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이라는 나의 논지는 방어될 필요가 있다. 이 방어를 수행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 네 장에서 역사주의에 대한 분석을 중단하고 언급된 윤리 이데아와, 그 이데아들이 플라톤의 정치적 요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집중하겠다. 이 장에서, 나는 정의의 이데아(Idea of Justice)를 검토할 것이다; 다음 세 장에서는 가장 현명한 자와 가장 우수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교설 및 진리, 지혜, () 그리고 미()의 이데아를 검토하겠다.

 

I

우리가 정의(正義)’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한 용어들이 항상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종류의 언어적 질문이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그 질문에 확정된 답변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특히 인도주의적인 일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α) 시민의 의무를 동등하게 분할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자유의 제한을 동등하게 짊어지는 것; (b) 법률 앞에서 시민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 물론 (c) 법률이 개별 시민이나 집단, 계층에 특혜도 불이익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d) 법원의 불편 부당성; 그리고 (e) 국민인 시민에게 제공될 이익의 (부담뿐만 아니라) 균등분배. 플라톤이 정의로써 이런 종류 어느 것을 의미했다면, 그의 강령이 순전히 전체주의적이라는 나의 주장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고 플라톤의 정치학이 수용될 수 있는 인도주의적 토대에 근거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정의로써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정의(正義: justice)’로써 플라톤은 무엇을 의미했던가? 나는 국가(Republic)에서 그가 올바르다라는 용어를 최상의 국가의 이익과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최상의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엄격한 계급 구분과 계급 지배를 유지함으로써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내가 옳다면, 플라톤의 정의 요구로 인하여 그의 정치강령은 전체주의 수준에 남는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하여 감동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정의(Justice)국가(Republic)의 핵심적인 화제이다; 사실상, ‘정의에 관하여(On Justice)’가 그 저서의 전통적인 부제(副題)이다. 정의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플라톤은 앞장에 언급된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먼저 국가에서 이 이데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다음에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그 결과를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플라톤의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빠르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 답변이 오직 4권에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답변에 이르는 고찰들은 이 장 후반에 더 자세하게 분석될 것이다. 간단히, 그 고찰들은 이러하다.

도시는 인간 본성과 인간 본성의 욕구 그리고 인간 본성의 한계를 근거로 세워진다. ‘우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 각자가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고 우리가 서술했고 반복해서 말한 것을 당신들은 기억할 것이다; , 자신의 본성이 자연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저 직업.’ 이것으로부터 플라톤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힘써야 한다고, 목수는 목수일에만 전념해야 하고, 제화공은 구두 만들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자연적인 직업을 바꾼다면 별로 해가 되가 않는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 (아니면 돈을 버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군인 계층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군인이 수호자 계층으로 그럴 자격 없이 들어간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음모는 도시의 멸망을 의미할 것이다.’ 무기휴대는 계급의 특권이어야 한다는 원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이 주장으로부터 플라톤은 세 계급 내부의 변화나 상호 혼합은 틀림없이 불의라는, 그리하여 그 반대는 정의라는 최종 결론을 도출한다;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층까지 도시 속의 각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이것이 정의일 것이다.’ 이 결론은 잠시 뒤에 재확인되고 요약된다: ‘도시는 정의롭다.. 그 도시의 세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그러나 이 서술의 의미는, 플라톤이 정의를 계급 지배와 계급 특권의 원칙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계급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원칙은 간단명료하게 국가란 지배자가 다스리고, 노동자가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의 일을 한다면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은, 위에서 분석된 바와 같이 우리가 가진 평범한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반면, 플라톤은 계급 특권을 정의롭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차이점은 저것보다 더 나아간다.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 간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관계에 기초한 국가 전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반면, 우리는 정의를 개인들을 대함에서 어떤 종류의 평등을 의미한다. 국가는 만약 건강하고 강력하고 단합되면 정의롭다 ㅡ 안정된다.

 

II

그러나 혹시 플라톤이 옳지 않았을까? ‘정의는 그가 말하는 것을 혹시 의미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런 질문을 논의할 의도가 없다. 만약 누가 정의는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스리는 의미라고 믿는다면, 나는 불의를 환영할 것이라고 대답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말에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요구나, 우리가 채택하기로 결정한 정책을 구성하는 제안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 뒤에는,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에 대한 그의 요구와 그 계급 지배를 성사시키려는 그의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는 옳지 않을까?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이 단어를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부응하지 않을까? 혹시 그리스인들은 정의국가의 건강과 같은 전체론적인 것을 의미해서 플라톤으로부터, 법률 앞에서의 시민들의 평등과 같은 우리들이 가지는 현대적 정의 개념에 대한 전례를 기대한다는 것은 완전히 부당하고 비역사적이지 않을까? 이 질문은 정말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전체론적인 관념은, ‘로마인처럼 구체적으로 법률적이 아니라오히려 구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인전통적인 그리스 의견인 그리스적 천재성 특징이라는 주장이 대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 사실상, 그리스인들이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 자신의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용법과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먼저 대화편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국가[Republic]보다 앞선 저술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견해로서, 그리고 규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와도 일치하는 정의는 평등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말하는 플라톤 자신을 언급하겠다. 나아가 플라톤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것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부적으로 노예로 태어난다는 이론을 상술한, 평등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나는 인용하겠다. 그는 정의라는 용어에 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을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의로운 것의 화신으로 그가 기술하는 판사에 대하여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을 복원하는 것이 판사의 임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정의를 일종의 평등이다라고, 평등, 인간에게 한 부분으로 속하는것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심지어 정의에 대한 그리스어가 평등 분배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틀렸다). (‘정의시민들에게 전리품과 명예를 평등하게 배당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법률[Laws]에서 플라톤의 견해와 일치하는데, 그 저술에는 전리품과 명예를 배당하는 데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이 ㅡ 숫자적, ‘산술적평등과 비례적평등 ㅡ 구분된다; 비례적 평등은 문제의 사람들이 지닌 덕행과 교육, 그리고 재산의 정도를 참고한다 ㅡ 그리고 그곳에서 이 비례적 평등은 정치적 정의로 언급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 원칙을 토론할 때, 그는 민주주의적 정의란 (비례적 평등과 구별되는) 산술적 평등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정의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인상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플라톤 이후에 고르기아스(Gorgias)법률(Laws)의 영향을 받아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기술한 것뿐만도 아니다; 그것은 더 정확히 말하여 정의라는 단어를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자 보편적이고 고대적인 표현이다.

이 증거를 참작하여, 국가(Republic)에 있는 전체론적이고 반()-평등주의적인 정의에 대한 해석이 한 가지 혁신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반대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 플라톤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계급 지배를 정의로운 것으로서 제시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결과는 경악스러운 것이었고 몇 가지 의문을 불러온다. 왜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정의가 일반적으로 평등을 의미하는데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개연성이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정의로운국가라고 사람들을 설득함으로써 그 국가를 정치적으로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단어들이 아니고 단어들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러한 시도는 그에게 가치가 있었을까? 물론 가치가 있었다; 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에게 자신이 솔직하게 정의를, 즉 독자들이 갈망하던 정의를 옹호한다고 설득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권위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정의 개념보다 그의 정의 개념이 더 진실하고 더 낫지 않은지 자문하기 시작한 평등주의자들과 개인주의자들 사이에 그는 의심과 혼동을 흩뿌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목표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하여 어떤 일이든 참아내고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힘을 쓸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인도주의적인 힘을 얻어내는 것, 혹은 적어도 평등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전체주의 신봉자들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가 국가(Republic)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 때문이다: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 때,.. 그의 용기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러나 사람이 불의를 당했다고 믿을 때, 그의 활기와 분노는 즉각 타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이 정의롭다고 믿는 편에 서서 싸울 때, 사람은 굶주림과 추위와 어떤 종류의 고통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은 똑같이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거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양된 상태를 지속하여, 극복할 때까지 견디어내지 않는가?’

이것을 읽으면, 플라톤이 신념의 힘과 무엇보다도 정의에 대한 신념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국가(Republic)가 이 신념을 왜곡시키고, 정반대 신념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증거를 검토하면, 플라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 느껴진다. 평등주의는 그에게 최고의 적이어서 그는 평등주의를 파괴하려고 애를 썼다; 분명히 평등주의는 커다란 악이고 커다란 위험이라고 성실하게 믿으면서.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정직한 공격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감히 적에게 공개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나는 나아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겠다.

 

III

국가(Republic)는 아마도 정의에 관하여 저술된 저서 중에서 가장 자세한 해설서일 것이다. 그 저서는 정의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데, 자신에게 알려진 더 중요한 이론을 하나도 플라톤이 빼먹지 않았다고 우리를 믿도록 유도하는 그런 방식으로 검토한다. 사실상, 플라톤은 당시 견해 가운데서 정의를 추적하여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의를 새로 찾는 것이 필요했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당시 이론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정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isonomy’) 견해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생략은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간과했거나 의도적으로 그 이론을 피한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국가(Republic)가 쓰인 정성을 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려면 적들의 이론을 플라톤이 분석해야 하는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매우 개연성이 적다. 그러나 당시 평등주의 이론이 받은 광범위한 인기를 고려할 때 이 가능성은 훨씬 더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개연적인 주장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는데 그 까닭은 플라톤이 평등주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국가(Republic)를 집필할 때 그 이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쉽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장 (2절에서)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나중에 (8절에서) 자세히 밝혀지는 바와 같이, 평등주의는 심지어 옹호되기조차 하는 앞선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국가(Republic) 어디에서도 평등주의의 장점과 단점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평등주의의 영향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라는 저서 자체가 평등주의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Republic)에서 평등주의는 매우 대중적인 민주주의적 신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평등주의는 조롱으로만 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듣는 평등주의에 대한 모든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설적 공격과 잘 어울리고, 정의가 논의의 주제가 아닌 곳에 가해지는 비아냥과 심술로 짜여진다. 정의와 관련된 평등주의 이론이 플라톤에 의하여 간과되었을 가능성은 그러므로 배제되며, 그가 자신의 이론과 완전히 반대로 영향력이 있는 이론에 대한 토론이 필수적임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역시 배제된다. 국가(Republic)에서 그의 침묵이 단지 몇 가지 농담에 (그가 그 농담들이 억압하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분명히 생각했을지라도) 의하여 깨진다는 사실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하기를 의식적으로 거절하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모든 중요한 이론이 검토되었다는 믿음을 각인시키는 플라톤의 방식이 어떻게 지적(知的) 솔직함의 기준과 일치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평등주의 이론을 토론에서 배제한 이유가 틀림없이 자신이 그 선량함을 굳게 믿었던 대의명분에 철저히 몰입했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이 쟁점에서 플라톤이 실제로 계속 침묵을 지키는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플라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평등주의 운동은 그가 증오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였으며 국가(Republic)와 다른 나중 작품에서 그 자신의 이론이 대체로 새로운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라는 강력한 도전에 대한 답변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인도주의의 주요 원칙을 논의하고 대응하는 플라톤의의 전체주의 원칙과 대조하겠다.

정의와 관련된 인도주의적 이론은 세 가지 주요 요건, 즉 제안을 내놓는다, 이름하여 (α) 본래의 평등주의 원칙인데, 다시 말해서 천부적특권을 없애자는 제안이고, (b) 개인주의라는 일반원칙이며 (c)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정치적인 요건이나 제안에 대하여 정반대로 대응하는 플라톤의 원칙이 있는데, 이름하여 (α

) 천부적 특권의 원칙, (b

) 전체론이나 집단주의라는 일반원칙, 그리고 (c

)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은 개인의 과제이자 목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ㅡ 나는 이 세 가지 요점을 본 장의 4, 5, 그리고 6절을 할당하여 순서에 따라서 토론하겠다.

 

IV

원래의 평등주의란 국가의 시민은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요건이다. 평등주의는 태생이나 가족관계, 혹은 재산이 사법관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는 시민들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권이 부여될지라도 천부적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평등주의적 원칙은 플라톤이 태어나기 몇 년 전,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하여 보전된 연설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에 의하여 훌륭하게 언명되었다. 10장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더 자세하게 인용될 것이지만 두 문장만 여기서 인용한다: ‘우리의 법률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동등한 정의를 제공하지만, 우리는 탁월함에 대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시민이 뛰어나면 그에게 공직이 우선적으로 제공되지만,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점에 대한 보상으로서이다; 그리고 가난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페리클레스는 말한다. 이 문장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예제도를 주저 없이 공격하는 위대한 평등주의 운동의 몇 가지 근본적 목표들을 표현한다. 페리클레스 자신의 세대에서, 이 운동을 대표한 사람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안티폰(Antiphon) 그리고 히피아스(Hippias)였는데, 그들 모두는 앞장에 인용되고, 헤로도토스(Herodotus) 또한 이 운동의 대표자였다. 플라톤의 세대에는, 이 운동이 알키다마스(Alcidamas)와 리코프론에(Lycophron) 의하여 대표되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위에 인용하였다; 또 다른 지지자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원칙은 물론 이 모든 것과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천부적 지도자를 위한 천부적 특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평등주의 원칙과 싸웠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자신의 요구를 확립했던가?

평등주의적 요건의 가장 유명한 언명들 몇 가지가 인상적이지만 의문스러운 천부적 권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그 대표적인 언명들 몇 가지가 자연적인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인간의 평등을 지적함에 의하여 이 요건들을 선호하여 논증했다는 것은 앞장서부터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그 주장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평등하고 다른 점에서는 불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규범적 요건은 이런 사실로부터 혹은 다른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논증이 모든 평등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용되지는 않았고, 그 한 사람으로서 페리클레스가 심지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면 흥미롭다.

플라톤은 자연주의가 평등주의 원리 내부에서 약점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챘고 그는 이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특정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 호소력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정치선전으로서 얻어지는 호소와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당신의 하인과, 당신이 소유한 노예와, 동물과 다름없는 육체 노동자와 당신은 자연적으로 동등합니까? 이 질문은 웃긴다! 플라톤은 이 반응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천부적 평등 주장에 경멸과 조롱, 그리고 조소로 대항한 최초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자연주의적 주장을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적들에게 플라톤이 그 주장을 애써 귀속시키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대한 풍자인 메넥세노스(Menexenus)에서 플라톤은 평등법에 대한 주장과 천부적 평등에 대한 주장을 함께 연결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 체제의 기초는 탄생의 평등이다라고 그는 빈정거린다. ‘우리 모두는 형제다, 그리고 모두는 한 어머니의 자녀다;.. 그래서 탄생과 관련된 자연적인 평등으로 인하여 우리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을 갈망하도록 설득당한다.’

나중에 법률(Laws)에서, 플라톤은 평등주의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다음 공식으로 요약한다: ‘불평등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면 틀림없이 불평등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공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발전하여 평등한 사람에게는 평등을, 불평등한 사람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공식이 된다. 이 공식은, 평등주의에 대한 표준적 반대론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평등이란 사람들이 오직 평등하다면 뛰어날 터이지만,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평등하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불가능하다는 반대론. 표면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이 반대론은 실상 매우 비현실적인데, 그 까닭은 정치적 특권이란 인격의 자연스러운 차이점을 토대로 세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플라톤은 국가(Republic)를 저술할 때 이 반대론에 많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듯싶은데, 이유인즉 그가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론은 평등한 사람과 불평등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을 분배한다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한 곳에서만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언급을 제외하고 그는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하기보다는 평등주의를 잊는 것을 선호한다.

요약하여 플라톤은 평등주의 이론이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에 의하여 옹호되었기 때문에 그 이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적은 없지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그 이론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고 언급될 수 있다; 그는 평등주의 이론을 공격하였지만 솔직하게도 공개적으로도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반()-평등주의인 자신의 천부적 특권에 대한 원칙을 확립하려고 어떻게 노력했을까? 국가(Republic)에서, 그는 세 가지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데 두 주장은 주장이라고 할 것도 없다. 첫째 주장은, 국가에 대한 다른 세 가지 덕목이 검토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네 번째인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덕목이 틀림없이 정의라는 놀라운 언급이다. 이것이 주장으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나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주장으로 의미가 있음이 확실한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주로 이용하는 화자(話者)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미덕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하는지 아는가?’ 두 번째 주장은 더 흥미로운데 이유인즉 그 주장이, 자신의 반()-평등주의가 정의는 평등이라는 평범한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적인) 견해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 전부를 인용한다. 도시의 지배자는 또한 도시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고 논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닌 재판권의 목표가 아닌가?’ ㅡ 대화상대자인 글라우콘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일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인가?’ 그렇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속하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의라고 의견일치가 되겠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 우리가 지닌 정의에 대한 평범한 개념에 따라, 정의로운 재판권의 원칙임이 확립된다. 여기서 두 번째 논쟁은 끝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 (혹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 정의라는 결론을 초래하는 세 번째 주장에 (아래에서 분석될) 길을 내주는데 그 사회적 위치는 자기 자신의 계급이나 신분제도와 관련된 사회적 위치이다 (혹은 직업).

이 두 번째 논증의 유일한 목적은, ‘정의란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회적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속하는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독자들이 다음 추론을 도출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나의 자리는 (혹은 나의 직업)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은 (혹은 내 직업을 수행하는 것) 정의롭다.’ 이것은 다음 주장과 거의 같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수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당신의 돈을 훔치겠다는 이 계획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계획을 유지하여 실행하는 것, 다시 말해서 당신의 돈을 훔치는 것은 정의롭다.’ 우리가 내리기를 플라톤이 바라는 결론은 자신의 것이라는 용어의 의미로 조잡스러운 재주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인즉 문제가, 정의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계급인 모든 것이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물로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양도될 수 없는 소유물로서도 취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은 그런 원칙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 원칙으로 인하여 공산주의로의 전이가 분명히 불가능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를 기르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이 조잡스러운 재주는, 아담(Adam)플라톤 자신의 정의에 대한 견해와 그 단어의 대중적.. 의미 사이의 접합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플라톤이 설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자신이 정의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려고 애를 쓰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주장은 훨씬 더 진지하다. 그 주장은 전체론이나 집단주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목적이라는 원칙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아래 5절과 6절에서 이렇게 분석되어 토론될 것이다.

그러나 이 요점들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발견을 플라톤이 기술하기 전에, 플라톤이 써놓은 서문을 주지시키고 싶다. 그 서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것을 고려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긴 서문은 ㅡ 이것이 플라톤 자신이 서문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ㅡ 독자가 실제로 자신의 비판적 능력을 둔화시키려고 고안된 극적인 장치의 연출을 마주하고 있을 따름일 때, 계속되는 논쟁이 있다고 믿도록 만듦에 의하여 독자가 정의 발견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시도로 보인다.

수호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지혜를 발견하고 보조원들에게 고유한 미덕으로서 용기를 발견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하겠다는 의도를 선언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발견할 두 가지 일이 남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절제와,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탐구의 주요 대상인 이름하여 정의라는 다른 것.’바로 그것이다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절제는 빼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항의하고 소크라테스는 거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혹은 불성실한 것’) 터이다라고 말하면서 말을 들어준다. 이 작은 논쟁은 정의를 다시 시작하는 데 독자를 대비하도록 만들고,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발견할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독자에게 암시하며, 글라우콘은 논쟁을 계속하면서 플라톤의 지적(知的) 솔직함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그리하여 독자는 지켜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에 절제를 토론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절제란 노동자에게 고유한 덕행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는 그가 주장하는 절제와 구별될 수 있는지의 많이 논의된 질문은 쉽게 답변될 수 있다. 정의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절제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ㅡ 다시 말해서 더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다. 자신의 배를 금수처럼 채우는 노동자들에게 어떤 다른 덕행이 고유한가?) 절제가 발견된 다음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마지막 원칙은 어떠한가? 분명히 그것은 정의일 것이다.’분명히 그렇지라고 글라우콘은 답변한다.

, 친애하는 글라우콘이여, 우리는 사냥꾼처럼 정의가 숨은 곳을 에워싸고 가까이서 지켜보아야 하네, 그리고 우리는 정의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멀리 가지 못하게 해야 하네: 이유인즉 분명히 정의는 이 장소 근처 어디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네. 자네는 잘 살펴서 그 장소를 찾는 게 좋겠어. 그리고 자네가 처음 발견하면 나에게 소리를 치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글라우콘은 독자처럼 물론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앞장을 서달라고 간청한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기도하세 그리고 나를 따라오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땅이 관목으로 덮여서 건너기 힘들고 어두워서 탐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 발견한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야지’. 그러나 무엇을 계속하나? 우리의 탐사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논쟁을? 그러나 우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것 속에는 의미란 조금도 없다라고 항의하는 대신에 글라우콘과 그와 함께 있는 순진한 독자는 순종적으로 대답한다: ‘그럼, 우리는 계속해야지.’ 이제 소크라테스는 무엇인가 보인다(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보고하며 흥분한다. ‘만세! 만세! 글라우콘! 길이 있는 것 같아! 이제 사냥감은 도망치지 못할 거야!’라고 그는 소리친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이라고 글라우콘은 대답한다. ‘정말, 우리는 완전히 바보였어. 멀리서 우리가 찾던 것이 늘 우리 발밑에 있었다니! 그러고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이런 종류의 감탄사와 반복되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계속하는데 글라우콘이 독자의 느낌을 표현하며 끼어들어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묻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기술하고 있던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항상 말했다라고만 말하자, 글라우콘은 독자의 성급함을 표현하여 말한다: ‘서문이 좀 길군: 나는 그것이 무엇과 관련되는지 듣고 싶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때야 플라톤은 내가 개괄한 두 가지 주장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글라우콘의 마지막 언급은 플라톤 자신이 이 긴 서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비판적 능력을 잠재우고, 화려한 언어 불꽃놀이를 극적으로 펼쳐서 독자의 주목을 이 탁월한 대화편의 지적(知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 ㅡ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판명되었다 ㅡ 외에는 나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플라톤이 그 약점을 알고 있었고 그 약점을 숨기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V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문제는 평등과 불평등에 관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문제를 계속 논의하기 전에, 몇 가지 언어 사용에 대한 비평이 필요할 듯하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라는 용어는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α) 집단주의의 반대로, 그리고 (b) 이타주의의 반대로 사용될 수 있다. 전자(前者)의 의미를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지만 후자(後者)에 대한 동의어는 몇 가지가 있어서 예를 들면 이기주의이기심이다. 이것이 다음에서 내가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α) 의미로만 사용하고 (b)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이기주의이기심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이다. 작은 표를 만들면 유용할 것이다:

(α) 개인주의(α') 집단주의의 반대이다.

(b) 이기주의(b') 이타주의의 반대이다

이제 이 네 가지 용어들은, 규범적 법칙들의 법전에 대하여 어떤 자세나 요건 혹은 결정이나 제안을 기술한다. 반드시 모호하겠지만 이 용어들은 사례에 의하여 쉽게 예시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현재 목표와 관련하여 충분히 정확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집단주의는 우리가 플라톤의 전체론을 논의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하기에 집단주의로써 시작하자. 우주이든, 도시이든, 종족이든, 인종이든, 혹은 다른 집단이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은 수단으로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앞장에서 몇 구절로 예시되었다. 이 구절 중 하나를 더욱 완벽하게 다시 인용하면: ‘부분은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전체는 부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전체를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전체는 당신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이 인용문은 전체론과 집단주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던 (구절의 서두에서 알려질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인용문이 지니는 강력한 매력을 전달한다. 그 매력은 다양한 감정, 예를 들어 집단이나 종족에 속하고자 하는 갈망을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매력에 있는 한 가지 요인은, 이타주의를 찬성하는 도덕적 호소이자 이기심이나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적 호소이다. 당신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당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플라톤은 암시한다.

이제 내가 만든 작은 표를 한 번 보면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의 반대가 아니며, 또한 이타주의나 이타심과 동일하지도 않다. 집단적 혹은 집단의 이기주의, 예를 들어 계급 이기주의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집단주의와 같은 것은 이기심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다른 한편으로, ()-집단주의자,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자는 동시에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는 다른 개인을 돕기 위하여 희생할 각오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 하나는 아마도 디킨스(Dickens) 것이다. 디킨스가 지녔던 이기심에 대한 열렬한 증오와 인간의 약점 모두를 지닌 개인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흥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강력했는지는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무명의 집단들에 겨냥된다면, 지금 우리가 집단적 단체나 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또한 심지어 진실로 헌신적인 이타주의에 대한 혐오와도 연결된다. (나는 Bleak House에 나오는 공공의 의무에 헌신하는 부인인 젤리비[Jellyby] 부인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예시들로 인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의 의미가 충분히 명확하게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예시들로 인하여, 내가 만든 표의 어떤 용어도 다른 칸에 있는 두 용어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가지 결합이 가능하다).

이제 플라톤에게도,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에게도 이타적 개인주의가 (예를 들어 디킨스의 이타적 개인주의와 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플라톤에 따르면, 집단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이기주의이다; 그는 모든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고 모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할 따름이다. 이것은 용어사용법의, 언어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유인즉 플라톤이 네 가지 가능성 대신에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심지어 오늘날까지 윤리적 문제를 고찰함에서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개인주의를 공격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집단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집단주의를 옹호하여, 그는 우리가 지닌 이타심이라는 인도주의적 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 자신의 공격에서, 그는 모든 개인주의자를 이기적으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헌신할 수 없는 것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 공격은 플라톤에 의하여 우리가 지닌 의미로서의 개인주의를 겨냥, 다시 말해서 인간 개인의 권리를 겨냥한다 할지라도 물론 매우 다른 표적인 이기주의에 도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끊임없이 플라톤에 의하여, 그리고 대부분의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다.

플라톤은 왜 개인주의를 공격하려고 했던가? 그는 자신의 포화로 개인주의를 겨냥했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유인즉 개인주의는 아마도 평등주의보다 새롭게 출현한 인도주의적 신념을 훨씬 더 많이 방어하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해방은 정말로 종족주의를 와해시키고 민주주의를 발흥시킨 위대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플라톤의 기괴한 사회학적 직감은, 그가 적을 만나는 모든 곳에서 변함없이 적을 감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개인주의는 정의에 관한 오래된 직감적 관념의 한 부분이었다. 정의란 플라톤이 설명할 바와 같이 국가의 건강과 화합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다루는 어떤 방식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사람에게 내재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에 의하여 강조된다고 기억될 것이다. 이 개인주의적 요소는 페리클레스 세대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페리클레스 자신은 법률은 동등한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그들의 개인적 분쟁에서보장해야 함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웃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결정한다면 그를 괴롭히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것을, 국가는 사람들을 풀어놓을 목적으로,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언급과 비교하라.) 페리클레스는 이 개인주의가 이타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 그리고 그의 연설은 행복하게 다재다능하고, 자주적으로자란 아테네 젊은이를 기술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결합되어, 우리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핵심적 원칙이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서는 말하지 너의 종족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우리 문명에서 성장하여 그 문명을 자극하는 모든 윤리적 교설의 핵심이다. 개인주의는 또한, 예를 들어, 칸트의 중심적이고 실용적인 원칙이다 (‘항상 인간 개인이 목적임을 인식하라, 그리고 인간 개인을 당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만으로 이용하지 말라’).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서 그렇게 강력했던 다른 사상은 없었다.

플라톤은 이 교설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신분제도 국가에 대한 적을 옳게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어떤 다른 체제전복적인원칙보다도 개인주의를 증오했다. 이것을 훨씬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개인에 대한 정말로 놀라운 적대감이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적게 감지되는 법률(Laws)에서 두 구절을 나는 인용하겠다. 첫째 구절은 국가(Republic)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한데, 국가(Republic)아녀자와 재산의 공동체를 그 구절은 토론한다. 플라톤은 여기서 국가(Republic)에 나오는 국체를 국가의 최고 형태로 기술한다. 최고의 국가에서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모든 소유물은 공동 재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로부터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것을 근절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자연으로 인하여 사적이고 개인적이 된 것들조차도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이 된다. 우리의 눈과 귀와 손도 마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인 양 보고, 듣고, 행동하는 듯하다. 모든 사람은 칭찬하고 비난함에서 최고도로 의견일치를 이루도록 주조되고, 그들은 심지어 동일한 것에 대하여 동시에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모든 법률은 도시를 최고도로 단결시키기 위하여 완성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무도 방금 상술한 원칙보다 국가의 최고 우수성에 대하여 더 나은 기준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국가를, ‘신성하다와 국가의 모형혹은 형태혹은 원형으로, 다시 말해서 국가의 형상이나 이데아로 기술한다.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모든 영예로 감싸서 실현하려던 희망을 포기했을 때 표현된 국가(Republic)에 있는 플라톤 자신의 견해이다.

두 번째 구절은, 역시 법률(Laws)에서 나오는데, 아마도 훨씬 더 솔직하다. 강조하건대 그 구절은 주로 군사적 원정과 군사적 훈련을 다루지만 플라톤은 이 동일한 군국주의적 훈련이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 그리고 최초의 아동기부터고수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다른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자들 및 스파르타 숭배자들처럼, 플라톤은 군사 훈련이라는 최고로 중요한 의무는 심지어 평화 시에도 최우선이어야 하고, 그 의무가 모든 시민의 전체 삶을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유인즉 완전한 시민들과 (모두 군인이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바로 동물들도 자신의 전체 삶을 항구적이고 총동원 상태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술하는바, ‘모든 원칙 중에서 가장 큰 원칙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도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각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무엇이든 하려는 습관이 들어서는 안 된다, 열정에 의해서든 심지어 장난기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시와 평화 시에 ㅡ 지도자에게로 그는 자신의 눈을 돌리고 그 지도자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도 그는 지도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세수를 하거나 식사를 해야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오랜 습관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꿈을 꾸지 않는 것과 완전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삶은 총체적 공동체 속에서 영위될 것이다. 전쟁에서 구원과 승리를 확보하는 데 이것보다 우수하고 더 낫고 더 효과적인 법률은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 시와, 초기 아동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무질서의 모든 흔적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삶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인간에게 종속당하는 야생 동물의 모든 삶으로부터도 무질서의 흔적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심한 말이다. 사람이 개인을 적대시하기에 이보다 더 진지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 증오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특정 경험인 감지되는 사물로 구성된 변화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그가 증오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증오했다. 정치 분야에서, 개인은 플라톤에게 사악한 사람 그 자체이다.

이 자세는 반()-인도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일지라도, 일관되게 이상화되었다. 이 자세는 인도적으로, 비이기적으로, 이타적으로,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었다. E. B. 잉글런드(England), 예를 들어, 법률(Laws)에서 나온 이 두 구절 중에 첫 구절을 이기심에 대한 열정적 비난이라고 부른다. 유사한 말이 바커(Barker)에 의하여 그가 플라톤의 정의 이론을 토론할 때 사용된다. 그는 플라톤의 목표가 이기심과 시민의 불화를 화합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익에 관한 옛 조화가.. 그래서 플라톤의 가르침 속에서 복원된다; 그러나 그 조화는 조화에 관한 의식적인 의미로 고양되었기 때문에 새롭고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었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한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러한 진술과 무수히 많은 비슷한 진술들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유인즉 이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은 반()-개인주의가 이타심과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동일시로 인하여 반()-인도주의적 정치선전의 성공적인 효과가 발생했고, 우리 시대까지 윤리 문제에 관한 사고가 혼란되었다는 나의 주장이 이런 이유로 예시된다. 그러나 이 동일시와 허장성세에 속아서 플라톤의 명성을 도덕에 대한 스승으로 추앙하고 플라톤의 윤리학이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 신앙에 가장 근접한다고 세상에 선언한 사람들이 전체주의를 향한, 그리고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체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 해석을 향한 길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험한 일인데 이유인즉 기독교가 전체주의적 이념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 종교재판은 다시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솔직한 사람들이, 플라톤이 지녔던 의도가 내보이는 인간애에 설득당하는 이유 몇 가지를 더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집단주의적 교설의 근거를 준비하면서 플라톤은 보통 경구나 속담을 (피타고라스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함으로써 시작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공유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기심이 없고, 고상하며 우수한 감정이다. 그렇게 기릴만한 전제에서 출발한 주장이 완전히 반()-인도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하리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요점은, 플라톤의 대화편인 특히 그가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영향 하에 있던 국가(Republic) 이전에 쓰인 대화편에, 진정으로 인도주의적인 감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가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소크라테스의 교설을 언급한다. 분명히, 이 교설은 이타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의 집단주의 이론과 같은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에서, 불의는 특정 인간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반하는 행위이어서 사람이 불의를 저지를지라도 집단만 그 행위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특징을 발견하지 못한다. 정의에 관한 이론은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이고, ‘소크라테스(여기서는 아마도 실제 소크라테스와 매우 닮았다) 내놓는 불의의 사례는 사람을 따귀를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혹은 살해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행위를 당하는 것이 그런 행위를 가하는 것보다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정말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매우 비슷하고, 정의에 대한 그의 교설은 페리클레스의 정신과 탁월하게 들어맞는다. (이것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10장에서 실행될 것이다.)

이제 국가(Republic), 그런 개인주의와 양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완전히 적대적으로 정의에 관한 새로운 교설을 전개한다. 그러나 독자는 플라톤이 여전히 고르기아스(Gorgias)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쉽게 믿을 것이다.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저술에서 제시된 정의에 관한 집단주의적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교설을 플라톤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Republic)에서 소크라테스의 적들이 불의를 가하는 것이 좋고 유쾌하며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쁘다는 반론을 내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물론 모든 인도주의자는 그런 냉소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 면전에서 정의에 대한 그런 사악한 말을 내가 허용한다면 나는 죄를 지을까 두렵다 자신의 목적을 언명할 때, 그를 믿는 독자는 플라톤의 선의를 확신하고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기꺼이 따라간다.

플라톤이 주는 이 확신의 효과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냉소적이고도 이기적인 말을 따르고 그 말과 대조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많이 확산되는데, 트라시마코스는 최악의 정치 불량배로 그려진다. 동시에 독자는 개인주의를 트라시마코스의 견해와 동일시하고, 플라톤이 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와중에 플라톤 시대의 모든 체제전복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트라시마코스 같은 개인주의적 도깨비에 (그의 모습과 볼셰비키 사상이라는 현대 집단주의적 도깨비 사이에는 큰 유사점이 있다) 놀라서 덜 분명하기 때문에 더 실재적이고 더 위험한 또 다른 형태의 야만성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플라톤이 개인의 힘이 옳다는 트라시마코스의 교설을, 국가의 안정과 힘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옳다는 똑같이 야만적인 교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요약한다. 자신의 급진적 집단주의 때문에, 플라톤은 사람들이 보통 정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부르는 문제들에, 다시 말해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항의성 주장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데조차 흥미를 갖지 못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주장을 국가의 주장에 조정하는 일에도 흥미가 갖지 않는다. 이유인즉 개인이 완전히 열등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국가 전체를 위하여 최선인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입법한다.. 이유인즉 내가 정당하게 개인의 이익을 가치의 열등한 수준에 두기 때문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는 오직 집단적 전체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고, 정의는 그에게 집단의 건강, 통합, 그리고 안정일 뿐이었다.

 

VI

지금까지 인도주의적 윤리로 인하여 정의에 대한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견해와 같은 것을 아직 개괄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이 전체주의적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이론을 개인의 윤리에 적용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과제 모두가 이제 시작될 것인데, 두 번째가 먼저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정의를 발견했다는 플라톤의 주장 중에서 세 번째 주장인 지금까지 겨우 대략적으로만 개괄된 주장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겠다. 여기에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있다:

자 당신이 나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목수가 구두 만들기를 시작하고 제화공이 목수일을 시작한다면 도시에 해롭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아니 별로요.’ 태생적으로 노동자인 사람이나 돈을 버는 계층의 구성원이.. 군인 계층에 들어온다면; 아니면 군인이 수호자 계층에 그럴 가치도 없이 들어온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와 이런 종류의 비밀 음모는 도시의 몰락의 의미할 터인가?’ 매우 분명히 그렇지요.’ 우리의 도시에는 세 계층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음모나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의 이전이 도시에 대한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그래서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하겠지?’ 틀림없이 그렇지요.’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자신의 도시에 대한 극악한 죄악은 불의라고 선언하겠지?’ 물론이지.’ 그렇다면 이것은 불의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도시 속에 있는 각 계층이 자기의 직업에 종사한다면, 보조원과 수호자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계급도, 이것은 정의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논증을 보면, (α) 엄격한 신분제도를 완화하면 도시가 틀림없이 붕괴한다는 사회학적 전제를 우리는 발견한다; (b)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을 불의라는 한 가지 주장의 변함없는 반복; 그리고 (c) 그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이제 여기서 사회적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이 플라톤의 이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가 발생은 해로움이라고 그가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학적 전제 (α)를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변화는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해서만 중지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불의의 반대가 정의라는 추론 (c)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것은 (b)이다; 플라톤의 주장을 일별하면 그의 사고 전체 흐름에는 다음 질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 해로운가? 그것은 해를 많이 끼치는가, 혹은 적게 끼치는가? 도시에 해를 끼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고 불의라고 그는 변함없이 되뇐다.

플라톤이 한 가지 궁극적 기준인 국가의 이익만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안다.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은 선량하고 덕행이며 정의롭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나쁘고 악하고 불의이다.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은 도덕적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협하는 행동은 부도덕하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도덕 법전은 엄격하게 공리주의적이다; 그것은 집단주의적이나 정치적인 공리주의이다. 도덕성에 대한 기준은 국가의 이익이다. 도덕성은 정치적 위생학일 뿐이다.

이것은 도덕성에 관한 집단주의적, 종족적, 전체주의적 이론이다: ‘나의 집단 이익에 속하는 것은 선량하다; 혹은 나의 종족에 속하는 것; 혹은 나의 국가에 속하는 것.’ 이 도덕성이 국제 관계에 대하여 함축하는 바는 알기 쉽다: 국가 자체는 어떤 행동을 해도, 국가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잘못일 수가 없다는 것; 국가가 자체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국가의 힘을 증강시킬 수 있다면, 국가는 자신의 백성에게 폭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를 공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국가의 비도덕성에 대한 명시적 인정과 결과적으로 국제 관계에서 도덕적 허무주의의 옹호인 이 추론은 헤겔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전체주의적 윤리의 관점에서, 집단적 공리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완전히 옳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덕행이다. 훈련이라는 군사적 덕행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그 시민의 덕행이다. 그리고 이 덕행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덕행 이론체계에서 정의가 담당하는 저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다. 그 까닭은 국가라는 커다란 시계태엽 속에 있는 톱니는 덕행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 톱니는 자신의 크기, 모양, , 기타 등등이라는 덕행으로 자신의 임무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톱니들은 올바른 장소에 각각 맞추어져서 그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첫 번째 형태의 덕행인 특정 임무를 위한 적합성은 톱니의 특정 임무에 맞추어 차별을 초래할 것이다. 어떤 톱니는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크기만 하다면 덕행을 갖출 것인데, 다시 말해서 들어맞는다; 다른 것들은 강하면; 다른 것들은 부드러우면 들어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는 덕행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전체의 덕행이 될 것이다: 적당하게 함께 맞추어지는 덕행 ㅡ 화합을 이루는 덕행. 이 보편적 덕행에게 플라톤은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과정은 완벽하게 일관적이어서 전체주의적 도덕성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정당화된다. 개인이 톱니에 지나지 않는다면, 윤리는 그 개인을 어떻게 전체에 맞추는가의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플라톤이 말하는 전체주의의 진정성을 믿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한 계급이 도전을 받지 않고 다른 나머지 계급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의 요건은 단호하지만, 그의 이상은 상층 계급이 노동 계급을 최대한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이상은 전체의 안정이다. 그러나 그가 착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유는 다시 순전히 공리주의적이다. 착취의 제한은 계급 지배를 안정시키는 데 이익이 된다. 수호자가 너무 많이 갖고자 한다면,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안정되고 안전한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에 의하여 도시의 모든 재산을 전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면, 분명히 그들은 헤시오도스(Hesiod), “절반은 전체보다 더 많다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알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급 특권을 제한하려는 이 경향도 상당히 흔한 전체주의의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전체주의는 비도덕적이지만 않다. 전체주의는 닫힌 사회의 ㅡ 집단의, 혹은 종족의 ㅡ 도덕성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집단적 이기심이다.

플라톤의 세 번째 주장이 솔직하고 일관적인 것을 고려하면, 왜 그에게 앞의 두 가지 주장과 함께 긴 서문이 필요했던가? 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이 모든 불안감은 왜일까? (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이 불안감이 단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절들의 비합리적인 특징은 해명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플라톤의 집단적 태엽장치가 그 모든 황당무계함과 무의미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제시되었다면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플라톤은 자신이 부수려고 했던 힘의 도덕적 호소력을 알고 있었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는 감히 그 힘에 도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 힘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새로 출현한 인도주의가 갖는 도덕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냉소적이고도 의식적인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자신의 더 선량한 양심에 개인주의의 사악함을 설득하려는 비극적 시도를 우리가 목격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받는 인상은 후자(後者)이며, 이 내부 갈등이 플라톤이 발휘하는 매력의 주요 비결이다. 플라톤이 새로운 이념에 의하여, 특히 위대한 개인주의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순교에 의하여 자신의 영혼의 깊은 곳까지 감동을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의 지식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미치는 이 영향력에 대항하여, 항상 공개적은 아닐지라도, 싸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로 인하여 때때로 그가 주장하는 전체주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몇 가지 인도주의적인 관념을 발견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철학자들이 플라톤을 인도주의자로 대변할 수 있던 이유가 설명된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주장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인 자신의 세대에 처음으로 전개된 이론을 취급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잘못 취급하는 방식이다.

이 이론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정치적 요건이나 정치적 제안에 관한 언어(5III절과 비교하라) 사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본질주의적인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그 실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주의적 질문에 답변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정치적 의무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국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국가 활동의 합법적 목표로서 우리는 무엇을 고려하라고 제안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근본적인 정치적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우리는 국가 없이, 다시 말해서 무정부로 사는 것보다는 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살기를 선호하는가? 우리가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것은 공학자(technologist)가 정치적 제도를 구축하거나 재구축할 수 있기 전에 답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질문이다. 이유인즉 그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특정 제도가 그 기능에 잘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인도주의자의 답변은: 내가 국가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보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나 자신의 자유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보호를 요구한다. 나는 더 큰 주먹이나 더 큰 총을 가진 사람들에게 좌지우지 당하며 살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다. 나는 공격과 방어의 차이점이 인정되기를 바라고 방어는 국가의 조직된 힘에 의하여 지원되기를 바란다. (방어는 현재 상황[status quo]의 방어이고 제시된 원칙은 이것에 해당한다 ㅡ 현재 상황[status quo], 그 개정을 위한 법률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 법률에 의해서만이나 화해에 의해서만 혹은 중재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 하지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정될 수 없다는 것.) 나는 나 자신의 행동 자유가 국가에 의하여 다소 축소되는 것을 볼 각오가 철저히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내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조건으로 남아있는 자유에 대한 보호를 내가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공격에 대하여 국가가 방어해주기를 내가 원한다면, 공격할 나의 자유를 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국가의 근본적 목적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시민들을 해치지 않는 저 자유의 보호를 나는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제한하여야 하고, 자유를 공평하게 제한하는 것을 이룩하기에 필요한 것 이상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것이 인도주의자와 평등주의자, 개인주의자의 요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공학자가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서 상당히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의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에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요구이다.

이와 같은 목표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많은 반대의견이 제기되었다. 일단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정되면 자유에 대한 전체 원칙이 무너진다, 그리고 어떤 제한이 필요하고 어떤 제한이 무분별한지는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권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고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혼동에서 비롯된다. 그 반대의견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목표를 실현하는 길에 놓인 몇 가지 중요한 전문적 난제와 혼동한다. 자유의 보호가 국가의 의무인 저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시민에게 남겨질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렵다. 그러나 저 한계를 근접하게 결정함과 같은 과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민주국가들의 존재에 의해서 증명된다. 사실상, 이와 같은 근접적인 결정 과정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그것은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난제는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를 변경하도록 강요할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요구는, 간단히 진술되어, 국가는 범죄, 즉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결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 자유가 끝나고 범죄가 시작되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전체 반대의견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자유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먹을 마음대로 어떤 방향으로든 휘두를 수 있다고 항의하는 악당에 대하여 판사가 당신이 주먹을 휘두르는 자유는 당신 이웃의 코의 위치에 의하여 제한된다라고 현명하게 대답했다는 일화에 의하여 답변된다.

내가 여기서 개괄한 국가에 대한 견해는 보호주의라고 불릴는지도 모르겠다. ‘보호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자유와 반대되는 경향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은 보호주의로 특정 산업 이익을 경쟁에서 보호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덕주의자는 보호주의로 국가 관리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도덕적 보호 장치를 세워야 한다는 요구를 의미한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적 이론이 이런 경향 어느 것과도 관련되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이론의 한 가지라 할지라도, 그 보호주의라는 이름이 자유주의적이지만 엄격한 무간섭 정책(흔히, 그러나 완전히 올바르지 못하게, ‘자유방임[laissez faire]이라 불린다)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국가간섭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종류의 자유도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분명히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교육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태만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그리고 국가가 모든 교육시설이 모든 사람에게 이용될 수 있도록 감독해야 한다면 어느 정도의 국가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 국가 너무 많이 통제하면 자유에 치명적인 위험이 되는데 그 까닭은 국가의 지나친 통제가 세뇌 교육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 제한이라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는 틀에 박힌 공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항상 어중간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환영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정치적 문제가 지니는 자극과 이런 종류의 정치적 갈등이 없으면 자유를 위하여 싸우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곧 사라질 터이고, 그와 함께, 그들의 자유도 사라질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유와 안전, 즉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는 안전 사이에서 주장되는 충돌은 환상으로 판명된다. 이유인즉 자유란 국가에 의하여 보장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자유 시민에 의하여 통제되는 국가만이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합당한 안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진술되면, 국가에 대한 보호주의적 이론에는 역사주의나 본질주의의 요소가 없다. 그 이론은, 개인과 보호주의적 목적을 결합하여 국가가 시작되었다거나, 역사에서 어떤 실제적인 국가도 이런 목적에 따라서 통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론은 국가의 본성에 관하여, 혹은 자유의 천부적 권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론은 국가가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론은 정치적인 요구, 더 정확하게, 특정 정책을 채택하라는 제안을 언명한다. 그러나 국가가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결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술하는 많은 규약주의자들이, 비록 그들이 어설프고 기만적인 언어로 ㅡ 역사주의의 언어 ㅡ 이 요구를 표현했을지라도, 바로 그 요구를 표현할 의도를 지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요구를 표현하는 비슷한 기만적인 방식은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국가의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국가란 상호간의 보호를 위한 결사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이론들은 진지하게 토론되기 전에, 말하자면 정치적 행동을 위한 요구나 제안이라는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적 특징으로만 이루어지는 끝없는 토론이 불가피하다.

그런 바뀜의 한 가지 사례는 이렇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버크(Burke)와 많은 현대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재론되었다. 이 비판은 보호주의가 국가의 임무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란 (버크의 말을 사용하면) ‘다른 존경으로 고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란 일시적이고 멸망하는 본성을 지닌 조악한 동물적 생존에만 굴종하는 것들에서의 협력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합리적인 목적으로 결속된 것보다 더 높고 고상한 것으로 언급된다;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다.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높은 임무를 지니고 있다. 국가에게는 도덕적 임무가 있다. ‘덕행을 보호하는 것이 그 이름에 걸맞은 국가가 하는 일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가 이 비판을 정치적 요구의 언어로 변환시키면, 우리는 보호주의에 대한 이 비판자들이 두 가지 것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들은 국가를 숭배의 대상물로 만들고 싶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소망에 반대하여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종교적 문제이다; 그리고 국가 숭배자들은 스스로 어떻게 그들의 신조를 그들이 지닌 다른 종교적 믿음, 예를 들어 10계명의 1계명과 화해시킬지를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요구는 정치적이다. 실제로, 이 요구는 국가의 관리가 시민들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은 권력을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삶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법성인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의 영역이 고유한 도덕성을 희생하여 증가되어야 한다는 요구인데 그 고유한 도덕의 영역은 국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정에 의하여 ㅡ 우리의 양심에 의하여 ㅡ 강제되는 영역이다. 그러한 요구나 제안은 합리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제기하는 사람은 분명히 이것이 개인이 지닌 도덕적 책임의 종말이며,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터임을 알지 못한다고 그런 요구에 반대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개인적인 의무가, 종족주의적 금기와 개인의 전체주의적 무책임으로 대체될 터이다. 이 태도 전체에 반대하여, 개인주의자는 국가의 도덕성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평균 시민의 도덕성보다 상당히 낮은 경향을 띠어서 국가가 국민의 도덕성을 억제하는 것보다 그 반대상황으로 국민의 도덕성이 국가를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자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현존하는 민주국가는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사회공학에서 매우 큰 업적을 냈다고 틀림없이 언급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다른 개인들이 저지르는 많은 형태의 범죄와 공격이 실제로 억제되었거나 많이 감소되었으며, 법정은 이해관계가 얽힌 어려운 소송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의를 다루었다. 이런 방식이 국제 범죄나 국제 분쟁까지 확대되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민들의 평화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시민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집행기관은 공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국제 범죄를 억제하는 공학적 문제는, 그 문제가 솔직하고 합리적으로 다루어지자마자, 실제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가 분명하게 제시되면, 사람들을 지역적 규모와 세계적 규모 양쪽에서 보호기관이 필요하다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가 숭배자는 계속해서 국가를 숭배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제도 공학자가 국가 내부의 기능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국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라.

 

VII

이제 이 운동의 연혁으로 돌아가면,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이론은 처음에 고르기아스(Gorgias)의 제자인 소피스트 리코프론(Lycophron)에 의하여 제시된 듯하다. 그는 (역시 고르기아스의 제자인 알키다마스[Alcidamas]처럼) 천부적 특권 이론을 공격한 최초인 한 사람이었다고 이미 언급되었다. 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이론을 그가 믿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기록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코프론이 보호주의 이론을 시작했음을 매우 개연적인 방식으로 리코프론에 관하여 말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의 후계자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명료함으로 리코프론이 그 이론을 언명했음을 우리는 안다.

리코프론은 국가의 법률을 사람이 서로에게 정의를 확신시키는 공식 계약으로서 간주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국가의 법률에는 시민을 선량하거나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리코프론이, 국가가 범죄 예방을 위한 협동적 결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국가를 불의의 행동에 대항하여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그리고 시민들의 평화로운 교류, 특히 교역을 허용하는 위한) 도구로서 간주했다고 그는 부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는, 리코프론이 자신의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서 다시 말해서 사회계약에 근거한 국가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서 설명했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은 흥미롭다. 반대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국가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유인즉 리코프론은 국가의 본질적 목적이 시민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코프론이 평등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보호주의에 대한 요구를 채택하여 공학적 관점에서 이 목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했음을 의미한다.

이 형태로 리코프론의 이론은, 사회계약이라는 전통적인 역사주의 이론이 직면하는 반대 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다. 예를 들어 바커(Barker)에 의하여 계약 이론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하여 하나하나 충족되었다 흔히 설명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커의 요점들을 검토하면 그 요점들은 리코프론의 이론을 확실히 충족시키지 못함이 밝혀질 것인데, 리코프론을 바커는 나중에 계약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의 초기 형태를 세웠을 개연성이 있는 창시자로 본다 (이 요점에서 나는 바커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다). 바커의 요점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α) 역사적으로 계약은 없었다; (b) 국가는 역사적으로 설립되지 않았다; (c) 법률은 규약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 우세한 힘, 아마도 본능, 기타 등등에서 출현한다; 법률은 법전이 되기 전에 관습이었다; (d) 법률의 힘은 제재에, 법을 집행하는 국가의 보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을 지키려는 개인의 각오에, 즉 개인이 지닌 도덕적 의지에 있다.

반대 이론 (α), (b) 그리고 (c)는 본질적으로 상당히 옳다고 인정되는데 (몇 가지 계약이 있었다 할지라도) 오직 그 역사주의적 형태에서만 그 이론과 관련되고 리코프론의 설명과의 무관함이 즉각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반대 이론들을 고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반대 이론 (d)는 정밀한 고찰을 받을 만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공격받은 그 이론은 다른 이론보다 의지’, 아니 개인의 결정을 더 강조한다; 실제로, ‘계약이라는 단어는 자유의지에 의한 합의를 의미한다; 그 단어는 아마도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법률의 힘은 개인이 법을 수용하고 지키겠다는 각오에 있음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d)가 계약 이론에 대한 반대 이론이 될 수 있을까? 유일한 설명은, 바커가 계약이란 개인의 도덕적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기적인 의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이 해석은 플라톤의 비판과 일치할 개연성이 더 짙다. 그러나 사람은 보호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이기적일 필요가 없다. 보호는 자기보호를 의미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험에 든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며 더 작은 정도로 (혹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자신들을 위하여 국가의 보호를 요구할 것이다. 보호주의의 근본적인 관념은: 강한 자의 위협으로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라 이다. 이 요구는 약한 자에 의하여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 강한 자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한 요구라고 제시하는 것은 최소한도로 말해서도 기만적인 것이다.

리코프론의 보호주의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반대로부터 자유롭다. 그 보호주의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인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호주의를 강탈당했다. 그 보호주의는 후세대들에까지 다음과 같이 왜곡된 형태로 전해졌다; 사회계약에서 국가의 기원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론으로서; 혹은 국가의 진정한 본질은 규약이라는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본질주의적 이론으로서; 그리고 인간이 지닌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본성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이기심의 이론으로서.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권위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영향 때문이다.

 

VIII

플라톤이 리코프론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유인즉 그가 (매우 개연적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리코프론의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이론은 처음에는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나중에는 국가(Republic)에서 언급되는 이론과 쉽게 일치될 수 있다. (두 저작 어디에서도 플라톤은 그 창시자를 언급하지 않는데 플라톤의 적이 살아있을 때 플라톤에 의하여 자주 채택된 태도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 이론은 국가(Republic)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Trasymachus)처럼 윤리적 허무주의자인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상술된다. 국가(Republic)에서는, 그 이론이 글라우콘(Glaucon)에 의하여 상술된다. 어느 경우에도 화자(話者)는 자신이 제시하는 이론에 대하여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두 구절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역사주의적 형태로, 다시 말해서 정의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한다. 두 구절은 그 이론을 마치 그 이론의 논리적 전제가 반드시 이기적이며 심지어 허무주의적인 양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 관한 보호주의적 견해가, 불의를 저지르고 싶지만 저지르기에는 너무 약한 사람들과 그러므로 강한 사람도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옹호되는 양; 그 이론의 유일하게 필요한 전제는 범죄, 즉 불의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요구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공정하지 못한 제시.

지금까지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나오는 두 구절은 평행선인데 그 평행선은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두 구절 사이에는 비평가들이 간과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은 이것이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는 그 이론이 칼리클레스(Callicles)에 의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이론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가 소크라테스를 또한 반대하기 때문에 보호주의 이론은 암시적으로 플라톤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옹호된다. 그리고 정말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허무주의자 칼리클레스에 반대하여 그 이론의 몇 가지 특징을 옹호하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국가(Republic)에서 동일한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칼리클레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상술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글라우콘에 의하여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은 허무주의적으로서 제시되고, 소크라테스는 이기심에 관한 이 사악한 교설을 파괴하여 승리하는 영웅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에 있는 경향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는 그 구절들은 사실상 완전히 바뀐 얼굴을 드러낸다. 칼리클레스의 적대적 제시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의 경향은 보호주의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국가(Republic)는 보호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여기에 고르기아스(Gorgias)에 나오는 발췌된 칼리클레스의 말이 있다: ‘법률은 주로 약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람들 다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법률을..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혹시 이길 강한 사람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 그리고 그들이 불의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이웃을 이기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등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평등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한다고 나는 말하겠다.’ 우리가 이 설명을 보며 칼리클레스의 공개적 조롱과 적의에서 기인하는 것을 제거하면, 우리는 리코프론의 이론이 지닌 모든 요소를 발견하다: 평등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불의에 대한 보호. 심지어 강한 자에 대한 언급과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하고 있는 약한 자에 대한 언급은, 풍자만화의 요소가 참작된다면, 보호주의적 관점에 정말로 잘 들어맞는다. 리코프론의 교설이, 국가가 약한 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주장인 물론 결코 수치스럽지 않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은 조금도 비개연적이지 않다. (이 요구가 어느 날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표현된다: ‘온유한 자들만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칼리클레스 자신은 보호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강자의 천부적권리를 지지한다. 소크라테스가 칼리클레스를 반대하는 논쟁에서 보호주의를 구원하러 왔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보호주의를 자신의 핵심적 논지와 ㅡ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ㅡ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들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최근 말하던 바와 같이, 많은 의견들이 정의는 평등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 ‘.. 규약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스럽고, 정의는 평등이라고 확인한다.’ (그 개인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강력하게 반[]-민주주의적인 몇 가지 경향을 또한 드러낸다. 그에 대한 설명은, 플라톤이 고르기아스[Gorgias]를 저술할 당시 자신의 전체주의적 이론을 아직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심정은 이미 반[]-민주주의적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누구라도 고르기아스[Gorgias]국가[Republic]가 둘 다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진짜로 설명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국가(Republic)로 방향을 선회하면, 그 저작에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를 논리적으로는 더 엄격하지만 윤리적으로는 변함없는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대한 해석으로 제시한다; 글라우콘은 말한다, ‘나의 주제는 정의의 기원이며 그 기원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인가이다. 어떤 사람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가하는 것이 천성적으로 탁월한 일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불의를 당하는 나쁨은, 불의를 가하는 바람직함을 많이 능가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를 것이고 물론 불의를 당하기도 할 것이어서 그들은 두 가지를 충분히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불의를 물리칠 정도나 불의 가하기를 즐길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계약을 맺어서 상호간에 아무도 불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거나 불의를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면 더욱 이롭다고 결정한다. 이것이 법률이 설정되었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론에 따른 정의의 본성이자 기원이다.’

그 합리적 내용에 관한 한, 이것은 분명히 동일한 이론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재현되는 방식 또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의 칼리클레스의 말과 세부적으로 닮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이제 보호주의 이론은, 그 이론이 냉소적인 이기심에 근거한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더 이상 옹호되지 못한다; 그 반대이다. 우리가 지닌 인도주의적 감정, 우리가 지닌 도덕적 분노는 이미 트라시마코스의 허무주의에 의하여 일깨워져 우리를 보호주의의 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 이론은 그 인도주의적 특징이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밝혀졌는데, 플라톤에 의하여 반()-인도주의적으로 보이고, 정말로, 불의를 저지르고도 안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불의란 훌륭한 것이라는 혐오스럽고 전혀 신빙성이 없는 교설의 결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저 없이 이 요점을 강조한다. 인용된 구절이 확장되어 이어지면서, 글라우콘은 보호주의에 관한 소위 필수적인 가정(假定)이나 전제를 더 자세하게 상술한다. 그가 언급하는 이것들 중에는, 예를 들어,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라는 견해; 단지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약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가 확립된다는 견해; 그리고 시민 개인에게는 범죄로 이루어지는 삶이 매우 이로울 터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은 제시된 이론을 글라우콘이 진짜 해석했다고 명시적으로 확언한다. 이런 방식에 의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독자 대부분과 아무튼 모든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여기에 전개된 보호주의 이론이 트라시마코스의 무자비하고 냉소적인 이기심과 동일하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개인주의의 모든 형태는 똑같은 것, 즉 이기심과 같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설득한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적들, 그리고 특히 계약 이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카르네아데스(Carneades)에서부터 홉스(Hobbes)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가 주장하는 치명적인 역사주의적 제시뿐만 아니라 자시들의 이론적 근거가 윤리적 허무주의라는 플라톤의 확신 또한 채택했다.

이제 그 이론에서 주장되는 이기적 근거에 대한 상술은 플라톤이 보호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한 전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술이 차지하는 공간을 고려할 때, 그가 더 훌륭한 주장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말을 아끼는 버릇이 아니라 그가 그런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우리는 안심하고 전제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주의는 우리가 지닌 도덕적 감정의 도움을 받아서 ㅡ 정의 관념에 반하는, 그리고 정당함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느낌에 반하는 공개적 모욕으로서 ㅡ 일축되어야 했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의 교설에 대한 위험한 적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나타난 인도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조의 대표이기도 한 이론,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게는 소중했던 모든 것에 대한 주적(主敵)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교묘하다; 그 방식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의하여 그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방식이 내가 보기에 속임수라고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평하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공격당한 이론에는, 불의는 사악하다 다시 말해서 불의는 예방되어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부도덕한 어떤 전제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 이론이 이기심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국가(Republic)에서 그 이론이 도출되는 허무주의적 이론과 동일하지 않고, 반대되는 것으로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국가(Republic)와 이후 저작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자신의 시대에 나타났던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보호주의적인 경향을 짓누르고, 전체주의적인 도덕 이론을 전개함에 의하여 종족주의의 주장을 재설립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새로이 출현한 인도주의적 도덕성에 강한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평등주의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이는 대신에, 그는 심지어 평등주의를 토론하기조차 회피했다. 그리고 천부적으로 우수한 주인 인종의 전체주의적 계급 통치라는 대의명분에서 인도주의적 감정의 지지를 그는 성공적으로 받았으며 그 감정의 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 계급 특권은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정의의 본질이다. 결국, 이 주장은 정의가 국가의 힘과 건강, 그리고 안정에 유용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다음과 같은 현대 전체주의 정의(定義)와 매우 유사한 주장: 정의(Right), 나의 국가나 나의 계급 혹은 나의 정당의 힘에 유용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이야기 전체가 아니다. 계급 특권에 대한 강조에 의하여, 플라톤의 정의 이론은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정치 이론의 핵심에 놓는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가장 현명한 자, 가장 훌륭한 자가 다스려야 한다였다. 이 탁월한 답변으로 인하여 그가 주장하는 이론의 특징이 수정되지 않는가?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