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국가에 도덕성이 있는가

이윤진이카루스 2022. 3. 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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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시되었고, 버크(Burke)와 많은 현대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재론되었다. 이 비판은 보호주의가 국가의 임무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고 주장하며, 국가란 (버크의 말을 사용하면) ‘다른 존경으로 고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란 일시적이고 멸망하는 본성을 지닌 조악한 동물적 생존에만 굴종하는 것들에서의 협력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합리적인 목적으로 결속된 것보다 더 높고 고상한 것으로 언급된다; 국가는 숭배의 대상이다.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보다 더 높은 임무를 지니고 있다. 국가에게는 도덕적 임무가 있다. ‘덕행을 보호하는 것이 그 이름에 걸맞은 국가가 하는 일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가 이 비판을 정치적 요구의 언어로 변환시키면, 우리는 보호주의에 대한 이 비판자들이 두 가지 것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첫째로, 그들은 국가를 숭배의 대상물로 만들고 싶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소망에 반대하여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종교적 문제이다; 그리고 국가 숭배자들은 스스로 어떻게 그들의 신조를 그들이 지닌 다른 종교적 믿음, 예를 들어 10계명의 1계명과 (모세의 10계 중 1 계명은 여호와 이외에 누구도 섬기지 말라이다) 화해시킬지를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요구는 정치적이다. 실제로, 이 요구는 국가의 관리가 시민들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은 권력을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삶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합법성인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의 영역이 고유한 도덕성을 희생하여 증가되어야 한다는 요구인데 그 고유한 도덕의 영역은 국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정에 의하여 우리의 양심에 의하여 강제되는 영역이다. 그러한 요구나 제안은 합리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제기하는 사람은 분명히 이것이 개인이 지닌 도덕적 책임의 종말이며, 도덕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터임을 알지 못한다고 그런 요구에 반대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개인적인 의무가, 종족주의적 금기와 개인의 전체주의적 무책임으로 대체될 터이다. 이 태도 전체에 반대하여, 개인주의자는 국가의 도덕성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평균 시민의 도덕성보다 상당히 낮은 경향을 띠어서 국가가 국민의 도덕성을 억제하는 것보다 그 반대상황으로 국민의 도덕성이 국가를 억제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치를 도덕화하자는 것이지 도덕을 정치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호주의적 관점에서, 현존하는 민주국가는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사회공학에서 매우 큰 업적을 냈다고 틀림없이 언급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하여 다른 개인들이 저지르는 많은 형태의 범죄와 공격이 실제로 억제되었거나 많이 감소되었으며, 법정은 이해관계가 얽힌 어려운 소송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정의를 다루었다. 이런 방식이 국제 범죄나 국제 분쟁까지 확대되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민들의 평화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시민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집행기관은 공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국제 범죄를 억제하는 공학적 문제는, 그 문제가 솔직하고 합리적으로 다루어지자마자, 실제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가 분명하게 제시되면, 사람들을 지역적 규모와 세계적 규모 양쪽에서 보호기관이 필요하다고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가 숭배자는 계속해서 국가를 숭배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제도 공학자가 국가 내부의 기능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국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라.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971, 1, 11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