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장
구획설정(DEMARCATION)
17. 구획설정 문제의 중요성.
귀납법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을 다시 제시한 후에 나는 그 해결책의 파문을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그 형이상학적 단계까지 - 그 원래 규모를 멀리 초월하여 - 추적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법 문제의 파문에 대한 나의 탐색은, 내가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불완전할 것이다. 정말로 내가 실제로 귀납법을 신뢰하지 않으며 내가 심지어 귀납법이 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거의 항상 나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이렇다: 당신이 귀납법을 포기한다면 사이비-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사념으로부터 경험적 과학들의 이론들을 어떻게 당신은 구분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구획설정의 문제이다. 내가 제안하는 바, 그 문제는 시험가능성이나 논박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을 과학적 이론들이 지닌 구별적 특징으로서 수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주어진 설명으로부터, 그 중요성을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처음 보기에 그 문제는 실제적 관심의 문제라기보다는 심지어 고지식한 사람의 문제로 더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명칭이나 구별이나 분류나 구획설정에 무엇이 있는가?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자 조바심한다면, 세상에 관하여 배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의 장래 지식이 배정되어야 할 칸이나 부서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목과 다른 지식의 분류는, 행정적 단위들로서 편리할지라도, 허구이고 크게 오도한다. 과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한 나는 물론 날카로운 구획설정과 같은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은 항상 형이상학적 아이디어들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어떤 형이상학적 아이디어들과 문제들은 (변화의 문제나, 사라지는 거리에서의 행동[action at vanishing distances]을 통하여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데카르트의 프로그램과 같은) 규제적 아이디어들로서 수세기동안 과학의 발전을 지배했다; 반면 다른 것들은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시도인 원자론과 같은) 점차
과학적 이론들로 변화했다. 물론 반대 방향으로의 전개 또한 있었다: 몇몇 실증주의자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바와 같이, 상당한 숫자의 형이상학적 교설들이 과학의 낡은 교설의 반향으로서 밝혀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실증주의 자체 역사의 도움을 받아 예시할 수 있다. 마흐(Mach) 자신의 실증주의와 현상주의는, 원자론과 물질 구조에 대한 다른 이론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물질이나 ‘본질’과 같은 물리적 존재는 없을 따름이라는 가설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고안된 원래 존경받을만한 과학 이론이었다고 언급될 것이다. 마흐는 현상주의적 물리학의 - 특히 현상주의적 열역학의 - 성공과, 제 2법칙을 원자구조나 분자구조를 통하여 설명하려는 볼츠만(Boltzmann)의 방식에 놓인 난제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 마흐가 제안한 해결책은 이 문제들과, ‘본질’이나 ‘물질’과 관련된 모든 다른 문제들이 사이비-문제들이라고 암시했다; 물론 ‘물질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들을 포함하여.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1905년 브라운운동에 관한 작업 덕택에 맥스웰과 볼츠만의 이론이 지닌 완벽한 물리적 중요성이 확립되었다. 브라운운동은 자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해석을 통하여 결정적인 실험의 위상을 이룩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브라운운동의 존재는 열역학 제 2법칙의 현상주의적 해석을 반증했다.이것으로써 물질의 원자구조와
관련된 문제는 진짜 물리학적 문제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 마흐의 실증주의와 현상주의는 실증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의미 중 한 가지 의미에서 점점 형이상학적이 되었다: 그 실증주의와 현상주의는 과학자로서 과학자들이 포기했지만,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과학자들이 철학자들로 - 혹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들이 문제에 봉착하면 때때로 그러하는 바와 같이 옹호자들로 - 변모했을 때 과학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머뭇거리고 남아있던 한 편의 낡은 물리학이 되었다. (아래 ✡113절, 다시 말해서 후기[The Postscript] III권, 양자이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의 21절 또한 참조.)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뚜렷한 구획설정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구획설정의 중요성은, 만약 있다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획설정의 문제가 고도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구획설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데, 이론들을 분류하는 어떤 내재적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가지 사실적이고도 중요한 문제들이 밀접하게 이론 분류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과학의 논리에 관한 모든 주요 문제들이 이론 분류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절의 첫머리에서 나는 이 결합의 한 가지를 언급했다: 귀납적 방법은 우리에게 구획설정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견해. 이전에 언급된 또 다른 견해는 - 과학적 가설들에 대한 논증가능성의, 그리하여 합리성의 문제 - 물론 과학적 가설들에 대한 시험가능성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시험가능성을 어떤 종류의 논증가능성으로 간주할 것이다: 경험적 논증들을 통한 논증가능성, 관찰과 실험의 도움을 받는 논증들. 귀납법의 문제와의 세 번째 결합은 내가 귀납법의 문제의 네 번째이자 형이상학적 단계를 그 문제의 세 가지 논리적이자 방법론적인 단계들과 구분했던 방식에 의하여 밝혀진다. 그 문제의 네 번째 단계에서 - 다시 말해서 참인 자연법칙이 존재하는지의 문제로서 - 그 문제는 이전 단계들의 특징과 뚜렷하게 다른 특징을 띠고, 이 차이점은 시급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 이 설명에 대하여 그 문제의 존재론적 특징은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했다: 순전히 존재론적인 서술들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 그 서술들이 조금이라도 논증되려면 우리는 그 서술들의 경험적 반증불가능성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서술들과 문제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록 비결정적으로라 할지라도) 그 서술들에 대하여 논증하는 단순한 장치를 통하여 확립하려고 나는 노력했다.
구획설정의 문제는 물론 또한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내가 2절 첫머리에서 지식과 관련된 철학의 핵심적 문제로 지칭했던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경쟁하는 이론들이나 믿음들 사이에서 판결을 내리거나 결정하는 방식의 문제는, 내가 그곳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 이론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를 결정하는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이성적 이론들과 비이성적 믿음들을 구분하거나 구획설정을 하는 문제를 낳는다; 경험적이거나 ‘과학적’ 이론들을 ‘형이상학적’ 이론들과 구분하거나 구획설정을 하는 문제와 흔히 동일시되는 (아마도 다소 성급하게) 문제.
그리하여 구획설정의 문제는 이론들은 ‘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으로 지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론들을 분류하는 문제를 뛰어넘는다. 정말로 그 문제는 지식 이론에 관한, 그리하여 철학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몇 가지에 진입로를 제공한다.
그러나 구획설정의 문제는 또한 실제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다. 내가 귀납법 문제에 흥미를 갖기 전과, 내가 방금 언급한 귀납법과 구획설정의 문제들 사이의 연결 관계들을 이해하기 몇 년 전에 나는 이 문제와 그 문제의 해결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은 1919년이었는데 당시 나는 경험적 과학의 위상을 주장하는 다양한 심리학적이자 정치적인 이론들을,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psychoanalysis)’과 아들러(Adler)의 ‘개별 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 및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materialist interpretation of history)’을 의심하게 되었다.이 이론들 모두는
내가 보기에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논증되었다. 많은 숫자의 논증들이 그 논증들을 지지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그러나 비판과 반증은 적대적으로서, 명백한 진리를 악의적으로 거부하는 증상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비판과 반증은 논증들보다는 적의(敵意)로 수용되었다.
이 이론들에 관하여 내가 발견한 두드러지고 위험한 점은 그 이론들이 부단히 계속되는 관찰 증거에 의하여 ‘검증되었(verified)’거나 ‘확인되었(confirmed)’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여러분은 눈을 뜨자마자 검증하는 증거들을 도처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신문을 펼칠 때마다 지도자들에서부터 광고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문지면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검증하는 증거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는 특히 신문이 언급하지 않는 것에서도 그 증거를 또한 발견할 것이다. 프로이트파이건 아들러파이건 정신분석학자는 자신의 이론들이 매일, 심지어 매시간 자신의 임상적 관찰에 의하여 검증됨을 발견한다고 여러분에게 확신하여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시험될 수 있는가? 이 분석들은, 가령 빈번히 ‘검증된’ 점성술사의 점성술보다 실제로 더 잘 시험되었는가? 그 이론들의 지지자들의 눈에는 어떤 상상 가능한 사건이 그 이론들 반증할까? 모든 상상 가능한 사건들은 ‘검증’이 아니던가? 그 이론들의 지지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정확하게 - 그 이론들이 항상 맞아떨어졌고, 그 이론들이 항상 ‘검증되었다’는 - 이 사실이었다. 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사실상 약점이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검증들’은 논증들로서 간주되기에는 너무 싸구려라는 생각이 나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증을 찾는 방법은 내가 보기에 너무 불건전하다 - 정말로 그 방법은 내가 보기에 사이비-과학의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이 방법을 다른 방법으로부터 - 가능한 한 엄격하게 이론을 시험하는 방법 - 다시 말해서 비판의 방법인 반증하는 사례들을 찾는 방법으로부터 가능한 한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를 깨달았다.
검증을 찾는 방법은 무비판적일 뿐만 아니라 주창자나 독자 모두에게서 무비판적 자세를 또한 확대했다. 그리하여 그 방법은 합리성의 태도인 비판적 논증의 태도를 파괴하려고 위협했다.
프로이트는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론들의 주창자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명쾌하고도 설득적인 주창자였다. 그러나 그의 논증방법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는 사례들을 분석하여 그 사례들이 자신의 이론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혹은 자신의 이론이 분석된 사례들에 대한 일반화로서 기술될 것임을 증명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비판을 연기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자신이 모든 합당한 비판에 대하여 나중에 답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내가 몇 가지 중요한 경우들에 다소 더 세밀하게 조사했을 때 그의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많은 독자들은 만족했다.
이것들이 단순한 주장들도 아니고 공허한 비난도 아님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프로이트의 대작이자 그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그의 최고 걸작으로 올바르게 여겨지는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의 근본적인 주장에 대한 프로이트 자신의 토론을 분석함으로써 다소 상세하게 그것들을 검증할 것이다. 그의 접근방법은 비판적이었던가?
18. 검증주의의 한 가지 경우.
그렇지 않다면 고도로 영리한 환자가 너무 영리하지 않은 이유로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의 불완전한 논리는 자신의 거부에 대한
한 가지... 강력한 동기의 존재에 관한 증거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이 절의 목표는 유명한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구획설정의 문제가 이론들을 과학적 및 비과학적 이론들로 구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책이 과학적 이론들이나 과학적이라고 주장되는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 시급하게 필요함을 밝히는 것이다. 나는 그 목적을 위하여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프로이트의 대작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선택했다. 먼저 그 책의 주장들을 분석하려는 나의 시도들이 구획설정에 관한 나의 견해 개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두 번째로
내가 여기서 밝히려고 노력할 몇 가지 심각한 결점들에 불구하고 그 저서는 당연한 의심을 넘어 한 가지 위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의심할 바 없이 불완전하고 (프로이트 자신이 밝히는 바와 같이) 틀림없이(necessarily) 다소 편향적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그리고 자신의 저서에 제시된 프로이트의 꿈 분석은 근본적으로 옳다고 나는 적어도 확신했다. 심지어 ‘순수한’ 관찰도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 그 관찰은 틀림없이(necessarily) 해석의 결과이다 - 나는 ‘틀림없이(necessarily)’라고 말한다. (관찰은 우리가 지닌 이론에 비추어 항상 수집되어 배열되고 해석되어 측정된다. 부분적으로 이런 이유로 우리의 관찰은 우리의 이론들을 뒷받침하는 경향을 띤다. 이 뒷받침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채택해서 우리가 지닌 이론에 대한 ‘검증’보다는 반증을 찾지 않는다면 거의 가치가 없거나 가치가 전혀 없다.) 심지어 가장 사심이 없는 관찰에게 유효한 것도 꿈의 해석에 또한 유효할 것이다.
이 절에서 내가 수행하기를 제안하는 것은 꿈의 해석에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여 주장하는 프로이트의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 책에서 프로이트의 주요 목표는 ‘꿈은, 자체의 본질적 특성에서, 소망의 실현을 대변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프로이트는 물론 이
이론에 - 악몽과 고민 꿈(anxiety dreams)의 존재 - 대한 매우 분명한 반론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반대론을 거부한다. ‘실제로 고민 꿈으로 인하여 꿈은 소망성취라는 일반적인 명제를 (내가 마지막 장에서 인용한 사례들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지는 않는 듯하다; 정말로 고민 꿈들은 그런 명제들을 어불성설로서 낙인을 찍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대론을 맞이하는 데는 커다란 난제가 없다’고 그는 여기서 우리의 주요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을 설명하는 구절에서 서술한다.이 반대론을 맞이하는 방법은 자체의 표면에서 고민 꿈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자체의 ‘내재적 내용’에서) 소망성취라는 것을 밝히는 데 놓여있다고 그는 설명한다.이로 인하여 프로이트는 ‘꿈의 본질적 특징’에
관한 자신의 주요 주장을 매우 가볍게 ‘수정하게’되는데 그 본질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꿈은 (억압된) 소망에 대한 (위장된) 성취이다.’
프로이트는 반복해서 모든 고민 꿈의 내재적 내용을 소망성취로서 폭로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다시 단언한다. 그리하여 그 프로그램은 예를 들어 550쪽에서 다시 단언되고 심지어 557쪽에서 훨씬 더 완벽하게 다시 단언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는다: ‘그리하여 불쾌한 꿈과 고민 꿈은 단순한 만족의 꿈에서와 같이 우리의 이론의 의미에서 그만큼 소망성취일 따름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포기한다 - 그러나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으면서. 이 주장에 대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157쪽에서) 일찍 ‘나의 이론과 반대가 되는 듯이 보이는 매우 빈번한 꿈들’을 토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우리는 고민 꿈을 소망성취로 축소시키려는 프로그램이 성취되지 않은 소망 꿈으로 틀림없이 남을 것이라는 낌새를 알아챈다; 왜냐하면 161쪽에서 고민 꿈속에서 고민은 그 꿈의 내용에 고민이 단지 ‘피상적으로 덧붙은’ 꿈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162쪽과 거기에 붙은 편집자의 각주 또한 참조.) 236쪽에서 우리는 고민은 ‘신경증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우리는 꿈의 소원 성취적 목표가 붕괴하는 한계에 근접한다’는 것을 안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한 것이다; 487쪽 아래 또한 참조.) 그래서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580쪽에서 프로이트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은 고민 꿈을 소원성취 꿈으로 축소하는 문제를 회피했을 따름임을 의식하게 된다: ‘나는 물론 고민 꿈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증거와 마주칠 때마다 소망성취 이론에 반대하는 이 주요 증인에 대한 증거를 내가 회피하려고 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인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이제 고민 꿈에 대한 설명을 향하여 적어도 몇 가지 암시들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그러나 그 암시들은 불충분하다; 적어도 그 암시들은
프로이트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민을 전개하는 물리적 과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성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모순적인 것이 더 이상 없다’는 옛 주장의 반복과 비교하여 우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 계몽적인 것이 출현하지 않는 두 쪽 다음에, 프로이트는 그 시도를 통째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582쪽에서 고민 꿈에 관한 모든 화제는 명백하게 ‘꿈 정보의 심리학적 골조 외부에’ 속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화제가[꿈 이론] 자는 동안에 무의식적인 것의 해방이라는 단 한 가지 요인에 의하여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고민-꿈에 대한 토론을 생략하고 그 꿈을 둘러싼 모든 모호함에 이 모든 쪽을 할애하는 필요성을 회피할 수 있을 텐데.’1911년에 후속판본에서는 아니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하여 함축적이면서 분명히 무의식적인 부인일 따름이라 할지라도 상세한 부인을 요약한다: ‘꿈속에서의 고민은 고민의 문제이자 동시에 꿈의 문제는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다음 네 쪽에서 프로이트는 세 가지 고민 꿈을 토론하고 부분적으로 분석한다. 그의 목표는 고민 꿈들이 소원성취임을 증명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단지 ‘신경증적 고민이 성적(性的) 근원으로부터 나타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582쪽). 이것은 분명히 고민이 특정 소망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고민 꿈은 틀림없이 소망-성취의 특징을 지닌다는 추론을 정당화 하지는 않는다. (이 잘못된 추론은 프로이트를 읽은 독자들 몇 명이 도출했던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은 세 가지 꿈 중에서 첫 번째 꿈은, 부분적으로, 소망-성취라는 것을 제안할 따름이라는 것과 그는 두 번째 및 세 번째 꿈과 관련하여 그런 종류의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프로이트가 모든 고민 꿈은 소원-성취라는 것을 밝히는 (그가 습관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같은 상세한 분석들을 통하여) 자신의 원래 프로그램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히 결국 그가 그 프로그램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민 꿈은 고민 문제가 된다: 고민 꿈은 이제 꿈에 대한 이론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신경증에 관한 심리학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582쪽); 다시 말해서 소원-성취 이론의 한 부분. 나는 분명히 그런 의도 변화를 비판하는 마지막 사람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의식적 수정도 아니요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 구절이 쓰인 후 9년이 지나서 프로이트는 고민 꿈을 소원-성취로 축소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했던 쪽에서 (135) ‘자신 책에 대한 독자들과 비판자를’에 대하여 날카로운 질책을 퍼붓는다. 그는 그들이 고민 꿈을 포함하는 모든 꿈이 소망-성취라는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에 따라 ‘고민 꿈이 해석되었을 때 소망의 성취로 판명될 것’이라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저서의 말미에서만이라고 할지라도 몇 년 전에 포기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135쪽). ‘이 책의 독자들과 비판자들이 이 고찰과, 분명하고도 내재적인 꿈의 내용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에 눈을 감는 고집을 믿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나의 요점은 사실상 고집스러웠던 것은 독자들과 비판가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과 비판가들은 고민 꿈의 문제를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고민 꿈을 소망-성취 꿈으로 축소하는 것이 ‘커다란 난제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135쪽과 557쪽) 그들이 처음 말을 들은 데 대하여, 그리고 결국 이 축소가 심지어 시도되지도 않았고 대신 ‘꿈 문제가 아닌’ 것으로서 배척된 것을 발견한 데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나는 비판을 거부하는 프로이트의 태도를 비판하고 싶다.정말로 나는 프로이트가 비판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이 지칭하기를 좋아하는 바와 같이 ‘획일적인 비판(uniformed criticism)’을 향한 태도 - 달리했더라면 자신의 이론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독단적이었음에는 의심할 바가 없는데, 그 추종자들은 순교자들과 이단자들과 분열주의에게서나 완성되는 종교를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만드는 경향을 띠고 있었고 비판자를 적으로서 - 아니면 적어도 ‘획일적인(uniformed)’으로서 (다시 말해서 분석될 필요가 있는) - 간주했다.
이 자기-방어적 태도는 검증을 찾는 태도와 동류이다; 검증을 도처에서 대규모로 발견하는 태도; 특정 경우들이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동시에 그 특정 경우들을 ‘꿈 문제가 아니라 고민 문제’로서 배척하는 - 정말로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20절에서 토론된 바와 같은 전형적인 ‘규약주의적[conventionalist] 계략’;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가 지칭하는 바와 같은 ‘면역조치[immunization]’) - 태도.
이 태도가 채택되자마자, 상상가능한 모든 경우가 검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1919년에 행태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다음 두 가지 경우를 사례로 예시했다. 사람은 자식을 익사시키려는 의도로 물속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식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행태에 관하여 이 근본적으로 다른 경우들 각각은 프로이트가 사용하는 용어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 그리고 부수적으로 아들러(Adler)가 사용하는 용어로도. 프로이트에 따르면 두 번째 사람은 승화를 성취한 반면 첫 번째 사람은 억압으로부터 (가령 자신이 지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의 어떤 성분이 지닌)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S. 베른펠트[Bernfeld]가 예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정신분석은 사람이 억압을 하거나 승화할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지만 사람이 전자[前者]를 할 것인지 후자[後者]를 할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아들러(Adler)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은 열등의식에 시달렸고 (아마도 자신이 감히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할 욕구를 낳으면서); 그리고 두 번째 사람도 그러했다 (그의 욕구는 자신이 감히 자신의 생명을 건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을 통하여 해석되지 않을, 그리고 두 가지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에 의하여 ‘검증’으로서 주장되지 않을 인간 행태에 관하여 상상 가능한 사례를 생각할 수 없다.
[✡(1980년에 추가됨.) 앞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이제 믿는 바, 너무 강하다. 바틀리(Bartley)가 나에게 지적한 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여 제외된 - 특정 종류의 가능성이 있는 행태가 있다. 그리하여 억압된 동성애를 통한 프로이트의 편집증 설명은 편집증을 앓는 개인에게서 능동적인 동성애의 가능성을 제외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비판하고 있던 근본적 이론의 한 부분이 아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분명하게 편집증적인 능동적 동성애자에 대하여 그 동성애자가 실제로 편집증도 아니고 전적으로 능동적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경우들이 사실상 검증들로서 해석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이론에 대한 특정 반대론을 프로이트가 다루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상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자체의 주제가 소망의 좌절이거나 분명히 소망된 것의 실현으로 보이기 때문에 나의 이론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빈번한 꿈들’을 언급한다 (157쪽). 이 ‘반(反)-소망 꿈’의 한 무리는, 그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이론이 오류일 것이라는 환자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꿈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우리와 관련되지 않는 또 다른 무리가 있다.) 그리하여 명백한 반증은 ‘검증’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자신의 꿈이 분석자를 반증하기보다는 분석자를 돕고 승인하기 위하여 꾸어지는 환자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 ‘돕는 꿈들’은 (프로이트가 때때로 그 꿈들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물론 또한 검증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른 것들처럼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소원-성취이기 때문이다.
이 ‘돕는 꿈들’을 향한 보다 비판적인 태도는 이것일 것이다. 돕는 꿈들은 (프로이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분석가가 내놓는 제안에 - 분석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영향을 받기 쉬운 환자에게 부과했다는 사실에 - 기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석가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몇 가지 다른 ‘임상적 검증들’이나 아니면 정말로 그 임상적 검증들 모두가 이런 종류의 구조에 기인한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구조의 단순한 가능성이 이 ‘검증들’을 무효화 하지 않는가?
프로이트 자신은 이 문제를 보았으며 그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분석가는 자신이 먼저 이 가능성을 - 다시 말해서 그렇게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능성을 - 회상하게 되었을 때 아마도 처음에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프로이트는 토론을 시작한다.이것은 흥미로운 언급이다:
‘분석가’는, 프로이트처럼, 자신의 ‘임상적 검증’ 전체 건물이 무너지려고 위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분석가의 고민은 자신에게 이런 충격적 가능성을 회상시키는 사람이 단지 ‘회의론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라앉는다: ‘꿈꾸는 자가 자신이 그것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 그것들은 분석가에 의하여 예기된다는 것 - 알기 때문에 회의론자는 이것들이 꿈에 나타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프로이트는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분석자 자신은, 정당하게,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정당하게’인가?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반대로 세 쪽이 지나서 회의론자가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할 때 - 그는 당시 ‘어떤 사람’이라고 지칭된다 - 심지어 프로이트 자신도 더 이상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이렇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분석에서 이용될 수 있는 꿈 대부분이 사실상 [분석가]의 제안을 받고 생겨나는 돕는 꿈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렇다면 분석적 이론의 관점에서 이 견해에 반대하여 어떤 것도 언급될 수 없다. 이 경우에, ... 우리가 얻은 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우리의 의미에서 제안의 효과를 이해함으로써 얼마나 적게 해를 입는지가 밝혀지는 나의 서문강좌(Introductory Lectures)에서 나에게는 고찰들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만 있다.’
서문강좌(Introductory Lectures)에 대한 언급이 누군가 마지막 두 가지 인용구 사이의 불일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어서 나는 두렵다. 누군가가 비판적으로 사고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충격’ 상태에 빠질 것이다; 특히 그가 서문강좌(Introductory Lectures) 14번째의 행간에서 (요점 4에 대한 처음 6행이 있는 그곳 참조.) 프로이트와 아들러와 슈테켈(Stekel)의 환자가 각각 프로이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꿈의 내용을 자신들의 의사들이 애호하는 이론들에’ 적용하면서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하여,... 지배에 대하여...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각자 꿈을 꾸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이 시작되었다고 읽는다.
그러나 서문강좌(Introductory Lectures)로부터 내가 그 강좌들을 인용하게 된 구절로 돌아오면 이 네 쪽의 변증론에서 지적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논증은 조각그림 논증(Jigsaw puzzle argument)이다 (각각 312-313 및 143쪽). 그 논증은, 분석가가 미묘한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데 성공하여 ‘그림이 의미를 띠게 되고 공백이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는 해결책이 발견되었음을 그리고 다른 해결책이 없음을 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문맥에서처럼 그 논증이 제안의 결과에 대한 분석가의 의심을 추방하기 위하여 사용된다면 어떤 논증도 그 논증보다 위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분석가가 놀란 것은 수수께끼가 압력을 받아서 - (뻣뻣하기보다는 탄력적이거나 조형적으로 판명되는) 작은 조각들을 장소에 밀어 넣거나, 아마도 환자가 다양한 ‘공백’에 멋지게 들어맞도록, 측정하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몇 가지 새로운 조각들을 만들 것이라는 돕는 환자에게 주는 자신의 무의식적 제안에 의하여 - 조립될 것이라는 가능성뿐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결정적인 반대의견 없이도 조각그림 논증은 수용될 수 있는데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을 우리가 우리 앞에 지니고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렇다: 다른 이론들은 자체의 수수께끼를 들어맞도록 항상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투쟁이나 계급투쟁을 통한 역사 해석을 고려하라: 그 해석들 모두는 역사에 관한, 그리고 현재 정책에 관한 수수께끼를 얼마나 잘 ‘해결하는’가. 역사에 관한 점성술적 해석에도, 혹은 올림푸스 산에서 벌어지는 신(神)들 사이의 옥신각신에 대한 호머(Homer)의 해석에도, 혹은 집단적인 죄와 처벌과 속죄를 통한 구약성서의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들 각각은 자체의 수수께끼를 성공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그것들의 소신은 - 그리고 프로이트의 소신 -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것들 모두는 성공하고 만다. (그리고 아들러와 슈테켈도 성공했다.)
나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나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시험이 가능한 과학의 특징보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이전의 원자론의 - 혹은 아마도 호머가 수집한 올림푸스 산의 이야기들의 - 특징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심지어 형이상학적 이론도 이론이 없는 것보다 무한히 더 낫다는 것을 그 작품은 틀림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내가 상상컨대 그 작품은, 모두 물리학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던 원자론이나 유물론이나 물질의 전자기론이나 패러데이(Faraday)의 장이론에 비교될 수 있는 심리학에 대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부단히 ‘검증되고’ 있기 때문에 그 작품은 틀림없이 경험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믿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위험한 독단론은 항상 검증주의와 나란히 진행한다. 내 자신은 ‘꿈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훌륭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질문이 제기된다면 프로이트의 소망-성취 이론을 제외한 답변들도 적어도 프로이트의 이론만큼 합당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분석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자료도 다음 답변에 매우 잘 들어맞을 것이다: ‘모든 꿈은 갈등의 - 갈등을 일으키는 소망들이나, 소망과 소망을 좌절시키려고 위협하여 걱정이나 문제들을 야기하는 장애물 사이의 갈등의 - 결과이다.’
이제 꿈속에서 소망은 소망된 것의 재현에 - 다시 말해서 소원
성취에 - 의하지 않고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성취의 재현은 대부분의 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꿈들이 성취로 끝난다할지라도 갈등과 좌절은 항상 강력하게 재현된다 (심지어 어린 시절이나 굶주림 꿈이란 가장 단순한 꿈에서조차); 그리고 그 꿈들은 고민 꿈에서 압도적이 되는데 고민 꿈은 고민 신경증의 증상 될 필요는 없다.
이 이론을 -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프로이트에게 귀속시킬 - 그의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만이 나의 의도이다.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프로이트가 어디에서도, 고민 꿈은 소망-성취의 일반적인 공식에 대한 반증이라는 - 오래 전에 ‘완고한’ 독자들과 ‘무식한’ 비판가들에 의하여 제안된 바와 같이 - 지금은 인정되는 단순한 사실을 주목하는 대안 이론을 (여기서 개괄된 것과 같은 것) 토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증거에 비추어 자신의 이론과 경쟁하는 유망한 이론과 서로 견주어 보며 비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론을 비판하는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지니고 그 이론을 검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가능한 한, 그리고 - 고민 꿈의 사례가 밝힌 바와 같이 - 자신이 처음 꿈의 해석에 관한 걸작을 간행했을 때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심지어 초월하여, 합당하게 만든다.
1919년에 나로 하여금 프로이트 학파와 아들러 학파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도록 유도한 이유들이 다소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은 다른 과학 이론들과 - 가령 실험 신경학(experimental neurology)이나 생화학(bio-chemistry) - 동일한 정도로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론들이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이론들이 주장하는 바를 거부했다. 오늘날 이 기준이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폭넓게 수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급된 세 가지 이론들은 그 기준을 통하여 거의 토론되지 않는다. 대신에 그 이론들은 계속해서 확인하는 증거를 - ‘검증’을 - 통하여 토론된다.
이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구획설정의 문제를 보게 되었다. 현재 환경에서 이 세 가지 이론 중 어떤 이론의 반증가능성에 관하여 내가 옳거나 그른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 이론들은 단지 사례로서, 예시로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나의 목표는 나의 ‘구획설정의 문제’가 처음부터 이론들을 평가하는, 그리고 이론들이 주장하는 바를 판단하는 실용적인 문제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물론 ‘과학’과 ‘형이상학’으로 불리는 몇 가지 과목들을 분류하거나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목표는 오히려 시급한 실용적인 문제였다: 어떤 조건에서 경험에 대한 비판적 요구가 -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요구 - 가능한가?
19. 시험가능성 그러나 의미는 아니다.
나는 반증가능성이라는 철학적 독단이나 검증가능성이라는 철학적 난제들이 나를 구획설정의 문제로 이끌지 않았음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처음에 구획설정의 문제를 설명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을 말했다. 더 정확하게 그 문제는 매우 실용적이고 시급한 문제였다 - 이론이 수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 이론이 경험적 논증에 (다시 말해서 관찰과 실험의 도움을 받는 논증) 의하여 주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논증들이 진지한 시험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 나의 문제는 별안간 논리적
문제로, 방법론적 문제로, 그리고 심지어 과학 자체의 문제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이론을 판단하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론을 판단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이론이 반증될 수 없어서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이론은 평범한 과학적 기준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시험을 견디는 정도를 평가함으로써) 판단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시험가능이나 반증가능성이 과학적 이론 체계의 기준으로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는 경험적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과 사이비-과학 사이의 구획설정 기준으로서.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을 의미의 기준으로서 (‘무의미한 헛소리’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제안한다는 생각이 당시나 그 후에도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1927년이나 그 즈음에 비엔나 학파가 검증가능성을 의미의 기준으로 수용했음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두 가지 전혀 다른
근거를 들어 나는 즉각 이 절차에 반대했다: 먼저 유의미함을 구획설정의 기준을 수용하는 것은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횡설수설로서 낙인을 찍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다고 느낀 독단; 그리고 두 번째로 검증가능성이 의미의 기준으로서 제시되어 간접적으로 구획설정의 기준으로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불합리하여 정말로 필요한 것의 반대가 되었던 해결책. 왜냐하면 나는 그 해결책이 너무 좁은 동시에 너무 넓었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비의도적으로) 과학적 이론들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그리하여 그 이론들을 형이상학과 동일한 수준에 (다시 비의도적으로) 위치시킨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4절 및 부록 ✡ii 참조.).
게다가, 그 해결책이 과학적 토론은 (특정 합리적 토론의 종류처럼) 비판적 토론이며 그 토론의 근본적인 태도는 검증이나 확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중요한 의미에서 ‘검증주의적’이었다.
한편으로 경험적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 사이비-과학이나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이나 순수 수학 사이에서 구획설정을 하는 넓은 경계선은, 의미와 어불성설이라는 영역 사이라기보다는, 의미의 영역 핵심을 바로 관통하여 - 구분선 양쪽에 유의미한 이론들을 두고 - 그어져야 한다. 더욱 특별히 나는 형이상학은 틀림없이 무의미하다는 독단을 배척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원자론과 같은 어떤 이론들은 오랫동안 시험이 가능하지 않아서 반증이 가능하지 않았고 (게다가 부수적으로 검증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이론들은 물리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그리고 다른 이론들도 반대의 운명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 이론들을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기술하는 것은 분명히 타당하지 않다. 나는 몇 명의 형이상학자들이 (나는 특히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횡설수설을, 그리고 더욱 나쁘게, 가식적인 횡설수설을 내뱉는 데 몰두했다고 기꺼이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라고 이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횡설수설을 너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더 낫을 듯하다. 분명히 횡설수설이나 의미 결여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의 기본적 문제로 선택하거나 그 문제를 폭로하는 일을 자신의 주요하거나 혹은 자신의 유일한 임무로 선택하는 것은 다소 불건전하고 현명하지 못하다: 의미-분석은, 정신-분석처럼, ‘자체를 자체의 치료법으로 오해하는 질병’으로 쉽게 변질 될지도 모른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읽은 독자들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의미와 유의미 대(對) 횡설수설이나 무의미에 관한 전체 문제를 내가 배척하는 데서 내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보다 더 명시적일 수 없었다. 나는 그 문제를 사이비-문제로서, 구획설정의 문제를 설명하는 잘못된 시도로서,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잘못된 해결책으로서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위치를 일관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단언했다.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미의 검증 가능성 기준을 수정하여 그 기준을 의미의 반증가능성 기준으로 갈음할 것을 제안한 실증주의자’로 흔히 낙인이 찍힌다. 1949년경 이 낙인에 추가사항이 덧붙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제 자신을 실증주의자로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한다.’나는 항상 엄격하게
실증주의를 비판했다고, 그리고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부록 ✡i과 (1933년) 4, 10, 79 및 85절을 (1934년) 찾아보아서 이 사실을 발견할 것을 요청한다.
나는 이것에도 불구하고 이 낙인이 나의 생애 마지막까지 나에게 달라붙을 것이라는 사실에 체념한다. (그리고 아마도 철학의 역사가 우리 같은 계몽주의의 느림보들을 지속적으로 주목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서 이 낙인은 나에게 달라붙을 것이라고; 한편으로는 하이데거[Heidegger]풍의 비이성적이고 반이성적인 철학적 메시아 신앙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철학적 방법에 대한 이미 압도적이고 여전이 확대되는 수요를 고려할 때 그것은 먼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에게는 나의
생애 마지막까지 구획설정의 문제를 의미의 문제와 혼동하는 일이 실증주의 학파의 주요 실수 중 하나라고 반복하여 말할 의도가 있다.
20. 시험이 불가능한 서술들.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에는 의미의 기준으로서 의도가 있다는, 앞 절에서 수정된 잘못된 전제는 많은 혼란을 낳기 쉽다. 그 전제는 나의 의도를 오해할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나의 이론과 불일치한다. 그리하여 그 전제가 나의 이론에 부과된다면 결과는 스스로 모순적이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어떤 유의미한 서술을 고려하여 그 서술의 부정을 형성한다면 결과는 분명히 다시 유의미한 서술일 것이다. 부정은 항상 서술의 앞에 ‘사실이 아니다(It is not the case that)’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서 형성될 것이다. 이제 어떤 무의미한 표현을 고려하고 이 말들을 덧붙이라: 결과는 분명히 다시 무의미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일관적이고 합당한 기준에 의하여 만족되어야 하는 다음 요건에 도달한다: 유
의미한 서술의 부정은 유의미해야 하고, 무의미한 표현의, 말의 무의미한 배열의 부정은 무의미해야 한다.
이 요건은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표현의 유의미함에 대한 기준으로 해석된다면 어긋난다.
왜냐하면 반증될 수 있는 보편적 언명의 부정은 반증될 수 없는 존재언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우리가 어느 날 흰 까마귀를 발견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언명의 부정인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우주 어느 곳에) 검지 않은 까마귀가 존재한다’는 존재언명이다; 그리고 이 존재언명은 여하한 양의 관찰 보고서에 의해서도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시험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의미를 지닌 기준이라면, 이 존재언명은 비록 유의미한 보편적 언명에 대한 부정이라 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요건은 어긋난다. (이것이 의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그 요건은 사실상 검증가능성 기준에 의하여 어긋났다.)
이것은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오류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과학과 형이상학을 구획설정 하는 나의 기준을 의미의 기준으로서 해석하는 여하한 시도로부터 터무니없는 결과가 반드시 도출됨을 보여줄 따름이다. 어떤 철학자들이 - 동시에 의미와 터무니없는 말 사이의 구획설정이 아닌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철학자들 - 나의 구획설정 기준이 불만족스럽다고 알았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나의 이론에서 존재언명의 위상은 매우 간단하고 솔직하다. 존재언명들의 의미에 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존재언명들은 자체의 부정인 보편적 서술만큼 유의미하다. 그리하여 위에 설명된 요건은 당연한 문제로서 충족된다 (비록 내가 결코 의미에 관한 이론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존재언명이 지닌 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특징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내가 주장하는 기준이, 이론적 체계의 문맥으로부터 선택된 서술에게라기보다는 이론적 체계에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처음부터 지적한 바와 같이: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부록 i을 참조). 이것은 내가, 이론이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이론이 말하는 것에 훨씬 더 흥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동일한 이론은 더 크거나 더 작은 숫자의 가설들의 (전제들) 도움을 받아서,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15절에서), 나의 기준에 따라서, 몇 가지 과학적 존재언명은, 다시 말해서 시험될 수 있는 문맥에 속하는 존재언명들은 과학적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그곳에서 제시된 사례는 ‘원자번호 72를 지닌 원소가 존재한다’는 서술이다. 이 원소를 어떻게 발견할지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은 고도로 시험 가능한 이론의, 그리고 한 이론의 부분으로서 과학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 존재언명이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이 원소가 어떻게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암시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 이론의 한 부분으로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언명이 시험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언명이 형이상학적이라고 기술해야 할 것이다: 그 원소를 찾아내는 데 대한 훨씬 더 큰 숫자의 실패가 그 언명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서 해석될 수 없을 것인데 이유인즉 우리는 다음 시도가 그 원소를 생산하지 않아서 그 이론을 결정적으로 검증할지를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존재언명들은 시험될 수 있고 다른 존재언명들은 시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은 문맥에 의존할 것이어서 아마도 문맥의 변화에 따라서 변할 것이다.
21.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문제.
과학과 형이상학을 사이의 구획설정에 관한 나의 기준에는 이론적 체계들에만 적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자체의 평가를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 존재언명들에 대한 문제보다 더 중요한 - 요점이다.
이 요점은 처음부터 강조되었는데, 나의 기준을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준과 구별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자들은 의미에 대한 자신들의 기준이 어떤 언어적 표현에도, 그 표현의 문맥을 언급하지 않고, 적용된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은 표현이 속한 언어의 규칙들에 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미의 기준으로 인하여 어불성설이 나타나는 곳마다 그 어불성설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목표를 ‘언어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 제거’로서 기술했다.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 말하자면
어불성설 - 과학적 이론들로부터 제거하는 것을 허용할 방법, 기법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형이상학이 어불성설이라고 믿지 않으며, 나는 과학으로부터 모든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이 가능하다고도 믿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요소들은 나머지들과 너무 밀접하게 서로 뒤섞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거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요소가 과학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능할 때마다 제거행위 모두는 유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과학으로부터 시험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하면 반증을 회피하는 방법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머지 이론의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경향을 띨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몇 가지의 경우에서 과학적 이론은 자체 안에 제거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요소들이 있다는 발견에 의하여,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상당히 진보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에는 그런 요소들을 탐지하려는 도구로서의 의도가 없다. 나에게는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그렇게 사용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의도가 없다. 나는 사실상 그 구획설정의 기준이 몇 가지 경우에 아주 유용함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형이상학적 요소들의 발견과 과학으로부터 그 요소들의 제거가 일상적인 일이거나 기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자들은 그런 기법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지닌다. 실증주의자에게는 그 견해가 문법적인 동시에 유사한 언어적 실수를
(결국 대부분의 저술가들이 저지르는) 탐색하는 것만을 포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들의 내용이 전적으로 중요해지는 곳에서는 이론이 유의미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개선되고 있을 때처럼, 그 임무는 이성적 비판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 비판은 항상 단순한 기법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하여 창조적인 과정이다. ‘형이상학적 요소들의 제거’는 한두 가지 문장의 생략 만에 놓여있지 않고, 통상적으로, 자체의 해석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에 의하여 고취된 이론의 재건을 항상 포함한다.
우리는 또한 동일한 이론이 흔히 규약주의적 의미에서 (반증이 불가능한 정의[定義]의 집합으로서) 해석되거나 혹은 규약주의에 대한 나의 토론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19절 이하) 경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획설정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이론의 경험적 특징을 판단하고자 한다면, 이론의 해석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달려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발견하는 임무가 형식주의(formalism)를 분석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그 임무는 비판을 통하여, 시행착오를 통하여 이론을 개선하는 일반적인 임무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경우가 뉴튼을 버클리(Berkeley)가 비판한 것이다. 버클리는 뉴튼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초자연적인(occult)’ 즉, 형이상학적인 특징에 대하여 탁월한 비판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저서 운동에 관하여(De motu)에서,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수용한 마흐(Mach)의 그 이론에 대한 개선 제안을 앞서 제안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파동설과 관련하여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이론은 시험이 가능하게 되어 마이컬슨(Michelson)의 실험이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개념들의 제거를 바람직하게 만든 것은 그 개념들이 지닌 내재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특징이 아니라, 단지 뉴튼의 역학의 문맥을 고려하여, 그 개념들이 시험이 불가능한 요소들을 대표했다는 사실이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비결정성 공식<indeterminacy formulae>을 산포관계<scatter relations>로서 내가 해석한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실증주의를 (‘관측가능량<observables>’) 비판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내가 그의 형이상학적 독단으로서 간주했던 것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고 아마도 또한 언급될 것이다: 비결정성 공식이 인간 지식의 한계를 가리켰다는 그이 이론.]
22. 반증과 검증 사이의 불균형.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경험적 반증과 검증 사이에는 근본적인 논리적 불균형이 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몇 사람들은 이 불균형의 존재를 부인했을지라도, 그들의 논증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 예상되었고 완벽하게 답변되었다.
이 근본적인 불균형은 내가 생각하기에 진심으로 부인될 수 없다: 일련의 관찰 단칭명제들은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기초적 서술들[basic statements]’) 간혹 보편적 법칙을 반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명제들은 법칙을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법칙을 검증할 수는 도저히 없다. 정확하게 동일한 사실이, 그 명제들은 (보편적 법칙의 반증을 의미하는) 존재언명을 검증할 수는 있지만 그 존재언명을 반증할 수는 없다고 말을 함으로써, 표현될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진 불균형을 보여준다.
이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나의 주장에 반대하여 - 그리하여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에 반대하여 - 제기되었던 다양한 반대론들 가운데서 첫눈에 보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반대론이다. 우리가 언명을 반증할 때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언명에 대한 부정을 검증하는데 이유인즉 언명 α에 대한 반증은 그 언명의 부정인 비-α의 검증으로서 항상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반증대신에 검증을 말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로도 말할 수 있다: 사물들을 표현하는 이 두 가지 방식들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언어적이고 그리하여 그 두 가지 방식들은, 논리적인 이유로, 완전히 균형이 맞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경험적 시험을 시도된 반증으로서, 혹은 부정적 사례의 (언명 α의) 탐색으로서 기술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그 시험을 시도된 검증으로서, 혹은 긍정적 사례의 (언명 비-α의) 탐색으로서 기술할 수 있다. 유사하게 언명 α의 검증에 대한 장애물도, 논리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틀림없이 언명 비-α의 반증에 대한 장애물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그리하여 ‘영원한 운동 기계가 있다’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해서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내뿜는 기계’와 같은 존재언명을 검증하기란 어려운데 왜냐하면 우리는 아마도 그런 기계를 찾기 위하여 전 세계를 뒤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무한한 기간 동안 그런 기계가 나타나면 조사를 해야 할 것); 그러나 분명히 이런 존재언명의 부정을 - 다시 말해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내뿜는 모든 기계는 틀림없이 유한한 시간이후에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전칭명제 - 반증하는 것은 틀림없이 꼭 그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한 가지 언명에 대한 검증은 다른 한 가지 언명에 대한 반증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반증과 검증을, 혹은 반증가능성과 검증가능성을 구분하는 것이나 ‘반증가능하거나’ 혹은 ‘시험 가능한’ 언명들을 ‘과학적’으로서 구획설정을 하여 또 다른 반증이 불가능한 (아마도 일방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 ‘형이상학적’으로 지칭되는 - 언명들의 집합으로부터 그 언명들을 구분한다는 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 이 명백한 전제들로부터 귀결된다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모든 백조는 희다’는 서술이 반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증주의자는 이 보편적 서술에 대한 모든 반증이 ‘희지 않은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존재언명에 대한 검증과 수용에 해당할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 서술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존재언명을 ‘형이상학적’으로 지칭하는 것을 틀림없이 틀렸다. (이로부터 통상적으로 도출되는 교훈은 과학적 서술과 형이상학적 서술 사이의 구분은 시험가능성과 같은 그런 것들에 - 다시 말해서 서술들 사이의 관계에 -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들 안에서 발생하는 개념들에 - 관찰가능하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전제들 모두를 내가 참으로서 - 정말로 하찮게 참인 것으로서 - 수용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문단에 서술된)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들을 거부하는데, 그 결론들 중 어떤 결론도 부수적으로 그 비판하는 사람들의 전제로부터 귀결되지 않는다.
먼저 나는 한 가지 요점을 -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전제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내보이는 - 치워버리고 싶다. 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결론 부분에 나오는, ‘영원한 운동 기계가 존재한다’와 같은 온전한 존재언명을 검증하는 데 때때로 방해가 되는 ‘걸림돌들’이나 ‘난제들’에 대한 언급을 의미한다. 물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이다 - 이 서술에 대한 경험적 검증은 분명한 이유들 때문에 정확하게 - 그 서술의 부정인 보편적 법칙에 대한 경험적 반증만큼 - 어렵거나 정확하게 쉽다. 그러나 나는 이 ‘난제’에 대하여 나는 걱정하지 않아서 그 난제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 난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지도 않았다. 나는 검증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고립된 온전한 존재언명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그 언명을 반증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시험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존재언명을 반증하는 논리적 가능성을 그 언명에 대한 보편적 부정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나는 물론 항상 강조했다. 그리하여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장애물들이나 난제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관련이 없다. 게다가 그들의 언급은 검증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검증주의자들은 온전한 존재언명들을 검증하는 난제와 별도로, 그 언명들에 대하여 어떤 난제도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장애물들’이나 ‘난제들’에 대한 그 요점은 그리하여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배척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르고 아마도 더 관련이 있는 요점들로 나아갈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반증과 검증의 문제들이 어떤 면에서 ‘균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균형들이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 양수(positive number)와 음수(negative number) 사이의 영향력이 큰 균형의 존재가 정수(整數: integer) 체계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막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 근본적인 불균형의 존재를 막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수에는 실제곱근(real square root)이 없는 반면 양수에는 실제곱근(real square root)이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반증 가능한 서술에 대한 부정이 틀림없이 검증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는 의미에서 반증가능성과 검증가능성이 ‘균형적’이라고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내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그곳에서 나는 심지어 전칭명제들을 부정적 존재언명들로서 기술했다) 반복해서 강조했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내세우는 전제들에서 내세우는 유일한 사실인데, 자체의 존재를 내가 지적했던 근본적인 불균형에 대한 논증이 아니다.
이 불균형에는 온전히 논리적이고 또한 방법론적이거나 발견적인 면이 있다.
자체의 논리적 면에 관해서 (일방적으로 반증 가능한) 보편적 서술은 상응하는 (일방적으로 검증 가능한) 존재언명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더 강력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다음은 잘 알려진 논리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1) 모든 사물에는 속성 P가 있다는 보편적 서술로부터, 특정 종류의 모든 사물과 관련하여, 혹은 담론의 특정한 비어있지 않은(non-empty) 우주의 모든 요소들과 관련하여, 이런 종류나 우주에 속하는 개체 α에 대하여 우리는
(2) 개체 α에는 속성 P가 있다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2)로부터, 반대로, 우리는
(3) 속성 P를 지닌 개체가 존재한다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1)은 (2)와 (3)을 수반하고, (2)는 (3)을 수반한다. 그러나 (3)은 (1)이나 (2)를 수반하지 않으며, (2)는 (1)을 수반하지 않는다.
혹은 다시 말해서, (1)은 논리적으로 (2)와 (3)보다 더 강력하고, (2)는 (3)보다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반증 가능한 존재언명들과 일방적으로 검증 가능한 존재언명들의 경우에 중요한 불균형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보다 복잡한 서술들에게도 동일하다. (24절 참조.)
자체의 논리적인 힘 때문에 보편적 서술들은 설명적 가설들(explanatory hypotheses)로서 중요할 것이다; 보편적 서술들은 (특히 단칭 초기조건[singular initial conditions]과 결합하여) 단칭 사건들이나 명제들을 설명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격리되거나 심지어 단칭명제들과 결합된 온전한 존재언명들은 통상적으로 너무 허약해서 무엇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격리된) 존재가설들보다 보편적 가설들에 흥미를 갖는 이유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불균형의 방법론적이거나 발견적인 면에 - 비판적이거나 반증주의적 태도와 검증주의적 태도 사이의 차이점에 - 다다른다.
과학에 대한 검증주의자들의 관점은 다소 다음과 같다: 이념적으로 과학은 모두 참인 서술들로 구성된다. 우리가 그 서술들 모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은 틀림없이 적어도 우리가 검증한 (혹은 아마도 ‘확인하거[confirmed]’나 ‘개연적[probable]’으로 밝힌) 모든 서술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검증된 존재언명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에 속한다.
반증주의자의 견해는 다르다. 반증주의자에게는 과학이 대담한(daring) - 가설들이 매우 많이 주장을 해서 가설들이 쉽게 거짓으로 판명될 의미에서 ‘대담한(daring)’ - 설명적 가설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반증주의자는, 설명적 이론의 위상을 위하여 그릇된 가설들을 발견하여 제거하려고 소망하고 그리하여 또한 다른 통찰들을 습득하려고 소망하기 때문에, 가설들에 대하여 흠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온전한 존재언명들에 대하여 반증주의자는 그 언명들이 지닌 약점 때문에 그리고 그 언명들이 이론체계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언명들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존재언명들이 수용된 기초명제(basic statement)에 의하여 수반된다면 반증주의자들은 그 존재언명들을 과학 속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럴 경우에도 존재언명들에 대한 관심이 존재언명들을 수용하는 것이 그 언명들에 대한 보편적 부정을 거부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사실에만 놓여있다.
불균형에 반대해서 흔히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론은 이렇다: 우리가 수용하는 기초명제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반증도 절대적으로 확실할 리가 없다. 나는 이것을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경험적 근거(empirical basis)’라는 장에서 (V장) 철저히 토론해서, 다른 인식론이 나의 인식론만큼 그것을 고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귀납법 이론가들은 이 문제를 철저하게 토론하는 적이 없다 - 그들의 경험적 근거가 확고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들의 이론들이 무너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반증과 검증 사이의 불균형을 반증한다는 주장에 관하여, 상황은 매우 단순하다. 한 가지 기초명제나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을 고찰하라. 그 명제들이 참인지 아닌지는 영원히 미심쩍은 문제로 남는다. 우리가 그 명제들을 참으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명제들이 참이건 아니면 그 명제들이 거짓이건, 보편적 법칙은 그 명제들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들이 참이라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할지라도 보편적 법칙은 여전히 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명제들이 참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면, 보편적 법칙이 그 명제들에 의하여 반증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불균형은,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이 참이라면 보편적 법칙을 반증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어떤 조건에서도 그 집합은 보편적 법칙을 검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이 보편적 법칙을 반증할 수 있을 상황은 존재하지만 그 집합이 보편적 법칙을 검증할 수 있을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이 백조는 검다’는 서술을 참으로 수용한다면, 우리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보편적 이론을 반증했음을 우리는 논리에 의하여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행성은 한 달 전보다 태양으로부터 지금은 더 멀다’라는 서술을 참으로 수용한다면 ‘모든 행성은 태양을 자체의 공통적 핵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돈다’는 이론을 반증했음을 논리에 의하여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문제의 단칭명제를 수용했을 때 우리가 오류를 저질렀을 것임은 - 특히 두 번째의 경우에 - 참이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이론에 대한 반증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수용한 이론을 부정하는 단칭명제를 (‘기초명제’) 수용한다면 우리가 틀림없이 어느 곳에서 오류를 - 교정되어야 하는 오류 - 저질렀음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하고 있는 이론을 부정하는 기초명제를 우리가 수용한다면 이 이론을 반증된 것으로서 우리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하한 기초명제를 수용할 때마다 어떤 이론들은 그것에 의하여 반증된 것으로 함축적으로 선언되어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이론들을 논리적으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기초명제들이 어떤 이론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또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이론은 검증되지 않았다: 우리가 참으로 수용해야 하는 이론은 없다. 그리하여 불균형이 있다.
사실상 그 불균형은 지금까지 지적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내가 인정하는 경험주의의 전통적 원칙은 이론들이 관찰 증거에 비추어 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적어도 간혹 어떤 기초명제를 수용할 것을 결심해야 한다는 것을 - 단지 임시적으로만, 그리고 많은 시험과 숙고를 거친 후에 -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초명제를 수용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어떤 이론을 논리적으로 배척하게 된다. 이론의 수용에 관한 한, 혹은 이론의 검증에 관한 한 이것과 유사한 것은 없다.
그리하여 기초명제들과 이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기초명제들의 불확실성이 서로를 무효화한다기보다는 강화한다: 두 가지 모두는 검증에 반하여 작동한다; 그리고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반증에 반하여 일방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경험적 토대의 불확실성 문제는, 기초명제들과 이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 문제와 전혀 다른 지평에 놓인다. 그 특징은 우리가 항상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심지어 수학적인 증거에서도) 상투적인 말의 특징과 같다; 반면 이론에 대한 검증불가능성의 특징은, 보편적 법칙이 지닌 진리를 확립하는 데 대하여 우리가 충분한 경험적 전제들을 경험할 수 없다는 - 그 전제들이 참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 보다 흥미로운 말의 특징과 같다. 그리하여 그 두 가지 문제는 분리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심지어 반증도 절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 참이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에 관한 근거들은, 불가능한 원리로 그리하여 다소 의심스럽지만 않은 이론에 대한 검증을 제시하는 근거들과 전혀 다르다. 경험주의의 원리 자체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이론들을 반증하는 불균형과 가능성.
이 모든 것은 매우 하찮아서, 반증과 검증 사이의 논리적 불균형의 존재가 나를 비판하는 실증주의자 대부분에 의하여 부단히 부인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다시 서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 심한 것은 맥락의 문제(the problem of context)와,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맥락으로부터 나온 서술들에게보다는 이론들의 체계들에 적용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반대론이다. 이 반대론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결론에 대한 모든 반증은, 반증된 결론들 도출하는 데 사용된 모든 전제들의 집합의 단칭전제와 부딪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가설도 반증될 수 없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런 전제들의 집합에 속하는 어떤 특정 가설에 허위성을 귀착시키는 것은, 모든 실험에 들어가는 커다란 숫자의 전제들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그리하여 위험하다.
이 반대론은, 비록 개괄적으로라 할지라도,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16절 마지막 문단, 특히 주석 2에서; 그리고 18, 19, 20절 및 다른 곳에서) 토론된 반대론들에 속한다. 답변은 우리가 정말로 이론들의 체계들만을 반증할 수 있다는 것과 허위성을 그런 체계 안의 어떤 특정 서술에 귀속시키는 일은 항상 고도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지적한 근본적인 불균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복잡한 이론이나 이론들의 체계에 대한 반증의 책임을 단칭가설에 우리는 간혹 매우 성공적으로 귀속시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하는 임무가 나에게 남는다.
우리가 행하는 실제적인 방법론적 절차들의 많은 모습들이 그런 귀속들을 더 성공적으로 만드는 우리의 노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이론들에는 먼저 층들을 이룬 - 깊이와, 보편성과, 정밀의 층들 - 구조가 있다. 이 구조로 인하여 우리는 이론의 보다 위험하거나 노출된 부분들과, 우리가 노출된 가설을 시험하면서 당연히 여길 - 비교해서 말하면 - 다른 부분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험에 포함된 나머지 이론들을 다소 문제가 없는 것으로서 - 일종의 ‘배경지식(background knowledge)’으로서 - 취급하면서, 선택된 특정 가설을 통상적으로 의식적으로 시험하는 사실을 설명한다.이
배경지식은 보통 시험하는 동안에 우리에 의하여 변하는데, 그 사실은 아마도 배경지식에 포함된 오류들을 무효화하는 경향을 띤다.
아마도 이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면은, 우리가 검토 중인 새로운 가설과 - 우리가 시험하려고 시도 중인 가설 - 다른 몇 가지 가설들 사이에서 결정적인 시험들을 준비할 방법을 우리가 항상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하는 시험들이 시도된 반증들이라는 사실의 결과이다; 그 시험들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시험하고 싶어 하는 이론을 반증할 목적으로 고안된다는 - 어떤 경쟁하는 가설들에 비추어 고안된다는 - 사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적인 시험에서 배경지식이, 우리가 결정적인 시험을 통하여 결정을 강제하려고 노력하는 가설들 각각에 관하여 똑같은 역할을 하도록 - 이것이 가능한 한 - 만들려고 항상 노력한다. (뒤엠[Duhem]은 결정적 실험들이 그 실험들이 수행하기로 예상되는 바와 같이, 경쟁하는 가설들 중 한 가설을 확립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음을 밝히면서 그 실험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반증을 토론했을지라도 - 다른 가설보다 한 가지 가설에 토론이 귀착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 그는 내가 결정적 시험의 기능이라고 - 경쟁하는 이론들 중에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기능 - 주장하는 기능을 토론한 적은 없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오심(誤審)을 절대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결점이 없는 가설들 비판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내가 밝힌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특히 19 및 20절에서, 그리고 또한 29절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의 요소는 반증을 수용하는 것이나, 혹은 그 반증을 다른 가설보다 한 가설에 귀속시키는 것에 항상 포함된다.
우리의 과학적 절차들은 전적으로 규칙에 근거하는 적은 없다; 추측과 예감이 항상 포함된다: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추측과 위험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위험을 어떻게 축소할 수 있을까? 가망성이 있어 보이는 모든 결정의 -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들에 대한 모든 조정의 - 결과들을, 가능한 한, 철저히 생각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말하자면, 모든 가망성이 있는 조합들을 철저히 생각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상황은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내야 하는 다른 경우에서와 동일하다: 이론에 대한 반증을 그 이론의 특정 부분에 귀착시키는 결정은 정말로 가설의 채택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포된 위험은 똑같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재간과, 용기가 - 그리고 얼마간의 행운 - 필요하다.
그리하여 반증을 이론들의 체계의 특정 부분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한 일상적인 절차, 자동적인 구조는 - 새로운 이론들을 고안하는 데 대한 일상적인 절차가 없는 것과 꼭 같이 -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를 끝없이 탐구하는 데서 모든 작업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논증들이 붕괴하는 장소와 우리의 논증들이 멀리 도달하는 정도 두 가지 모두를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이 이 연구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하여 논리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내가 기술한 근본적인 논리적 불균형은 틀림없이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경험적 반증과 그 반증의 불확실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반증가능성에 대하여 온전하게 논리적인 기준과 구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론에 대한 잠재적 반증자들의 존재 (진리가 아니라). 반증가능성과 결합된 유사한 난제들을 없다. 반증가능성은 경험적 반증에 영향을 미칠 문제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23. 심지어 사이비-과학들도 유의미할 이유. 과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프로그램.
구획설정에 - 다시 말해서, 시험가능성 - 대한 나의 기준은 어떤 구체적인 난제들에서 철학자에게 뿐만 아니라 과학자에게도 필요하다. 그 기준은 경험을 통하여 진지하게 토론될 수 있는 이론들을 골라낸다. 그 기준은 그렇게 토론될 수 없는 다른 이론들이 있다고 과학자에게 경고한다; 그래서 그 기준은 이 다른 이론들이 시험될 수 없기 때문에 시험과 다른 방법들을 통하여 검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과학자가 주목하도록 한다. 과학자가 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다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 이론들을 배척하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간주할 것이다. (‘반증불가능성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위 7절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과학자는 항상 위험하게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사이비-과학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으로부터 실제로 흥미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간혹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이비-과학의 고전적 사례로서 우리는 점성술을 고려할 것이다.
점성술의 역사는, 천문학의 역사와 함께, 행성들은 신(神)들이라는 종교적인 신념까지 (심지어 플라톤도 주장했던 바와 같이)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이 다신론적 신앙은 점성술과 천문학 모두에서 배척되어서 점성술과 천문학 모두는 행성들이 신(神)들을 본떠서 단지 명명되었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점성술은 다신론을 배척하는 반면 오래된 신(神)들의 명칭들에 지속적으로 마술적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가 계산될 수 있는 ‘영향력들’로서 취급했던 전형적으로 신적(神的)인 능력들을 지속적으로 행성들에게 귀속시키기도 했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학파와 다른 이성주의자들에 의하여 거부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된 이유들로 인하여 그것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거부를 너무 멀리까지 실행했다. 예를 들어 조류(潮流)에 관한 달(月)이론은 역사적으로 점성술이 낳은 것이다. 뉴튼이 그 이론을 수용하기에 앞서 그 이론은 대부분의 이성주의자들에 의하여 미신으로 배척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튼의 만유인력 법칙은, 달이 ‘달 아래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 뿐만 아니라 달 위의 천체 몇 개가 중력인 영향력을 지구에, 그리하여 지구 아래의 사건들에 정말로 미침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과 반대로 밝혔다. 그리하여 뉴튼은, 갈릴레오를 포함하는 몇 명의 최고 두뇌들에 의하여 신빙성을 잃은 사이비-과학으로서 배척된 교설을, 주저하지만 의식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사이비-과학적 이론을 손에서 버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를 놓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복잡할지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는 케플러(Kepler)에 의하여 제공될 것인데 그의 이론들은 과학과 점성술의 기묘한 혼합물이었다. 단지 주저하면서 점성술적 아이디어들을 수용했던 뉴튼과 달리, 케플러는 플라톤-피타고라스적 전통에 속하여 별들의 ‘영향력들’을 믿었는데 특히 행성들에게 미치는 태양의 영향력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플러는 고도로 정교하고 자기-비판적인 천문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가설들을 지치지 않고 기발하고도 고도로 비판적인 시험에 부치면서 최고로 이용 가능한 천문학적 증거에 비추어 그 결과들을 검토했다. 그의 탁월한 자기-비판적 태도로 (‘참 나는 바보였구나’라고 그는 서술했다) 인하여 - 그의 아름다운 가설들 중 몇 가지 가설들이 지닌 공상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 그는 과학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점성술사들은 부수적으로 자신들이 내놓는 이론들이 엄청나게 많은 검증에 - 압도적인 귀납적 증거에 - 근거한다고 항상 자랑했다. 이 주장은 진지하게 조사되거나 탐구된 적이 없어서 그 주장이 참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claim has never been seriously investigated and exploded, and I do not see why it should not be true인데 문맥상 exploded는 explored의 오기로 보인다: 역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점성술이 검증되었는지는 흥미롭지 않다; 점성술이 그 점성술을 반증하려는 성실한 노력에 의하여 진지하게 시험된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이제 점성술이라는 사이비-과학에서 고도로 중요한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 원자론으로 - 방향을 선회할 것이다. 아무튼 아보가드로(Avogadro) 이전의 ‘입자론’이 지닌 형이상학적 특징은 분명하다. 그 입자론을 반증할 가능성이 없었다. 입자들을 탐지하지 못하는 것이나 입자들에 대한 증거는 그 입자들이 너무 작아서 탐지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항상 설명될 수 있었다. 분자의 크기에 대한 추정치를 낳은 이론에 의해서만 이런 도피 방향이 다소 막혀서 반증이 원칙적으로 가능해졌다. (‘검증’은 원칙적으로 이전에 가능했다: 가령 현미경의 발명은 현미경으로 관찰될 수 있는 분자들의 발견을 상상컨대 아마도 낳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자론은 분자의 크기에 대한 추정치에 매달리자마자 시험이 가능해졌다. 이 사례는 시험가능하지 않은 이론이 - 형이상학적 이론 - 시험이 가능해질 때까지 발전되고 강화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하다면 시험가능하지 않은 이론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기술하는 심각한 오해를 낳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 이론을 마흐(Mach)가 그랬던 바와 같이 손에서 배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나는 원자론에 관한 사례가 매우 고도로 특징적이고 매우 고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례를 반복해서 언급했다.초기 원자론은 그
이론이 시험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이 세상을 방대한 일반화를 통하여 원대한 규모로 상상했다는 의미에서도 형이상학적 체계였다: ‘원자들과 공동(空洞)만 있다’ (레우키푸스[Leucippus],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그 이론의 근본적인 개념이 원자와
공동(空洞) 모두는 - 데모크리투스가 충격적인 논리로 밝힌 바와 같이 - 관찰이 불가능해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자론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써 알려진 것을 설명했다: 원자론은 우리에게 알려진 세상 배후에 있는 알려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구축했다.그리고 원자론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증주의자들에 의하여 (심지어 1905년 이후에도), 베이컨에서 마흐(Mach)에 이르는 모든 귀납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버클리(Berkeley)에서 뒤엠(Duhem)에 이른 모든 도구주의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1905년 이래 실증주의자들은 이해가능하게도 이 요점에 대하여 더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의미한 횡설수설이 변질되어 의미가 될 수 있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상 원자론이라는 사례는, 형이상학이란 무의미한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교설의 불합리성을 확립한다. 그리고 그 사례는, 무의미한 교설을 구원하려는 헛된 희망에서 무의미한 교설에 대하여 이곳저곳에서 하찮은 비밀스런 교정을 해내는 정책의 불합리성을 확립한다.
아무튼 원자론은 과학에 대한 자체의 영향이 시험 가능한 많은 과학적 이론들의 영향력을 능가한 시험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한 탁월한 사례이다. 이런 종류의 또 다른 원대한 이론은 세상에 대한 데카르트의 시계장치 이론 (clockwork theory)이었거나 (그 이론이 모든 물리적 인과성을 추진력에 의한다는 교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이론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지칭될 것과 같이 움직이는 확대된 물질을 통하여 물리적 세상을 해석하는 홉스(Hobbes), 데카르트, 그리고 보일(Boyle)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이지만 당시까지 가장 뛰어났던 이론은 패러데이(Faraday), 맥스웰(Maxwell), 아인슈타인, 드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프로그램으로 세상을 - 공동(空洞)뿐만 아니라 원자들 - 연속적인 장(場: fields)을 통하여 생각하는 프로그램이었다.이 훌륭한 프로그램이 몇 명의 다른 위대한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었다(was)’라고 말한다. (후기의 III권 참조.)
이 형이상학 이론들 각각은 시험이 가능해지기 전에 과학에 대한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 이론들 각각은 우리의 연구 방향과, 우리를 만족시킬지도 모르는 설명의 종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이론들 각각은 이론의 깊이에 대한 평가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생물학에서 진화론, 세포론, 그리고 박테리아 감염 이론 모두는 적어도 일정한 시간동안 유사한 부분을 담당했다. 심리학에서 감각주의(sensationalism)는 일종의 심리학적 원자론의 (다시 말해서 모든 경험들은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적 요소들, 예를 들어 감각자료들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는 이론) 형태와 정신-분석의 형태를 띨 것인데, 또한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언급되어야 한다.)
이 형이상학적 프로그램들이 과학에 중요했다할지라도 그 프로그램들은 과학자들이 다른 방식들로 아용하는 시험 가능한 이론들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들로부터 과학자는 자기의 목표를 - 자기가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여길 것인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의 실제적 발견 - 도출한다. 경험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할지라도 이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은 토론에 개방되어 있다; 그 프로그램들은 자기들이 고취하는 희망에 비추어, 혹은 자기들이 책임을 져야할 절망에 비추어 변경될 것이다.
물론 과학에 가치가 없는 (또는 내가 그렇게 믿는) 형이상학적 아이디어들이 또한 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15절에서 (27절 또한 참조) 토론된 ‘온전한 존재언명들’ 몇 가지가 여기에 속한다. ‘바다-뱀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가능한 시험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여하한 말이 그 주장에 덧붙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에게 특별히 흥미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온전한 존재언명들은, 과학사의 한 부분이 된 적은 없다 할지라도, 간혹 암시적이고 심지어 유용했다고 판명되었다. 정말로 온전히 형이상적인 이론인 ‘철학자의 돌이 (즉, 비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물질) 존재한다’는 비록 반증이 불가능할지라도 검증된 적이 없고 지금은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철학자의 돌이라는 사례가, 적어도 이런 경우에 시험가능성의 결여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은 서술이 지닌 존재관련 특성이지 애매하거나 무의미한 용어들의 출현이 아님을 부수적으로 보여준다: ‘비금속’과 ‘금’은 개념들에 관한 한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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