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ant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이윤진이카루스 2012. 1. 4. 08:12

http://blog.daum.net/whichgoal/3275349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1784)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3년 12월호 516쪽 참고)*


* 1783년 <월간 베를린(Berlinische Monatsschrift)> 12월호(508-517쪽)에 베를린의 개신교 목사인 쵤너(Johann Friedrich Zöllner, 1753-1804)는 그해 9월호에 익명의 필자가 주장한 사회적인(교회 밖에서 치르는) 성혼식에 대한 반박논문 <교회를 통하지 않은 혼인성사가 과연 정당한가?>를 게재했다. 쵤너 목사는 교회적인 결혼이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펴면서, “계몽이라는 이름 하에” 사람들의 심중에 엄습한 혼란을 지적했다. 그는 이 글 516쪽에서 “계몽”이라는 개념 아래에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각주로 달았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계몽시키는 일을 착수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중요한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곳에서도 그에 대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목사의 논문에서 제기된, 그것도 주석에 숨겨져 있는, 이 질문은 철학사로 볼 때 매우 생산적이고 좋은 결실로 이어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선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86)이 <월간 베를린> 1784년 9월호(193-200쪽)에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호(481-494쪽)에 계몽에 대한 유명한 정의를 담고 있는 칸트(Immnuel Kant, 1724-1804)의 이 논문이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말미에 나오는 각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논문을 쓸 시점까지도 Kant는 멘델스존의 답변을 모르고 있었다. 칸트의 이 글은 칸트 전집(Kant, Werke in 10 Bänden, herausgegeben von Wilhelm Weischedel, Darmstadt 1983) 제 9 권 <인간학, 역사철학, 정치학 및 교육학>의 53-61쪽에 실려 있다. - 역자.



1. 계몽(啓蒙)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未成熟)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 ‘미성숙(未成熟)’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미성숙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성 자체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決斷)과 용기(勇氣)의 결핍(缺乏)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Sapere aude(과감히 지혜롭고자 하라 - Horaz: 역자)! 당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의 표어이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적인 성숙에 따라 이미 오래전에 다른 사람의 지도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naturaliter majorennes, 신체적인 성년: 역자) 게으름과 비겁(卑怯)으로 인해서 일생동안 기꺼이 미성숙의 상태로 머물게 되고 어렵지 않게 후견인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미성숙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편안하다. 만약 나에게 이성(理性)의 역할을 해줄 책이나 나의 양심(良心)이 되어줄 정신적 지도자나 나의 건강(健康)관리를 판단해줄 의사 등이 있다면, 나는 수고스럽게 스스로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비용을 지불할 능력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 생각해야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꺼이 그 번거로운 일을 떠맡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값싸게 감독권을 챙길 줄 아는 후견인들은, 성숙에 도달하는 것이 무척 힘겨울 때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아름다운 족속, 즉 여성을 포함해서)이 그것을 매우 위험하게 여긴다는 것을 잘 간파하고 있다. 후견인들은 우선 자신의 가축을 우둔하게 만들고 나서도, 그 온순한 짐승이 가둬놓은 울타리 너머로 감히 한 발짝을 내디딜 엄두조차 못 내도록 철저하게 예방한다. 그 후에도 그 짐승들이 혼자 걸어 나가려고 시도하면 항상 앞으로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위험은 그렇게 크지 않다. 왜냐하면 몇 번 뒹굴고 넘어진 다음에는 결국 혼자 힘으로 걷는 것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패한 예가 하나만 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용기를 잃고 그 후에 있을 모든 시도들을 은밀하게 포기해버리고 만다.

3. 따라서 개인(個人)이 (혼자서: 역자) 인간에게 거의 자연처럼 되어 버린 미성숙을 떨치고 나오는 것은 어렵다. 인간은 그러한 상태에 애착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나 형식들과 같이 이성의 사용 혹은 심지어는 자연적 소질의 오용에 대해 가르쳐주는 기계적인 도구들은 오히려 미성숙으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가로막는 족쇄(足鎖)들이다. 그러한 족쇄를 떨쳐버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유로운 보행에 적응이 안 돼 있기 때문에 가장 좁은 도랑조차도 불안한 도약으로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의 정신을 수련함으로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안전하게 걸음을 옮기는 데 성공하는 개인은 단지 극소수에 불과하다.

4. 그에 반해 대중(Publikum)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다. 게다가 대중에게 오직 자유(自由)만 허용해준다면 스스로를 계몽하는 일은 거의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자유만 부여되면 심지어 대중의 편에 선 후견인 중에서도 항상 몇몇의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자기 스스로 미성숙의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주적 사고(自主的 思考)라는 인간의 소명과 내재적 가치(內在的 價値)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정신을 확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전에 후견인들의 강압에 의해 미성숙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된 대중들이 자기 스스로 계몽할 수 없는 몇몇 후견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그 속박 속에 머물도록 사주를 받게 되면, 역으로 그들도 그들의 후견자들을 강요하여 그 속에 (함께) 머물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선입견(先入見)을 심어주는 것은 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것을 심은 당사자 혹은 선행자였던 사람에게 복수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아주 느리게 계몽에 도달할 수 있다. 혁명(Revolution)을 통해 어쩌면 개인적인 전제정치나 물욕 혹은 지배욕에 사로잡힌 압제는 제거될 수 있겠지만 결코 사고방식(思考方式)의 진정한 혁신(wahre Reform der Denkungsart)은 달성될 수 없다. 오히려 낡은 선입관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 후에는: 역자) 다만 새로운 선입관들이 아무 생각이 없는 군중을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는 견인차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5. 그런데 이러한 계몽을 성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만 자유(Freiheit)일뿐이다. 여기서 요청되는 자유란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해롭지(위험하지) 않는 자유, 즉 스스로의 이성을 모든 방면에서 ‘공공적(公共的)으로 사용(öffentlichen Gebrauch)하는 자유’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사방에서 “따져 묻지 말라(räsoniert nicht)!”는 외침을 듣는다. 장교는 “따지고 들지 말고 그저 훈련하라.”고 말하고, 세무관리는 “숙고하지 말고 납세하라.”고 외친다. 성직자는 “따지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한다. (다만 이 세계의 단 하나뿐인 군주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1740-1786: 역자 - 만이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그리고 그대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服從)하라!”고 말한다.) 이처럼 도처에서 자유가 제약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제한이 과연 계몽에 가장 방해가 되는가? 그리고 어떤 것은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촉진하게 되는가?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이성을 공공적(公共的)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로와야 한다; 그리고 이성의 공공적인 사용만이 인류의 계몽을 실현시켜줄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을 사적(私的)으로 사용하는 것은 계몽의 진행에 특별히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종종 매우 엄격하게 제한(制限)되어야 한다.

6.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가진 자신의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란 각자가 ‘배운 사람(Gelehrter)으로서 독자세계(Leserwelt)의 전 청중 앞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어느 정도 각자에게 친숙하게 주어진 ‘시민(市民)으로서의 지위나 직책 안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게 될 때, 나는 그것을 ‘이성의 사적인 사용’이라고 말한다(여기서 칸트는 독특한 방식으로 “배운 사람에 의한 이성의 공공적인 사용”과 “시민에 의한 이성의 사적인 사용”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인간(자연인: l'homme naturell)”을 “시민(사회인 또는 역할인: l'homme de l'homme: le citoyen)”과 대비시키는 루소가 시도를 따르고 있다. J.J. Rousseau, 인간불평등기원론, 참조. -역자). 따라서 공동체의 이익을 담지(擔持)해야 하는 많은 분야에서는,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일치(강압)를 통해서라도 공공의 목적을 지향하게 하고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목적을 파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몇몇 구성원들로 하여금 단지 수동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일정한 기구(조직)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당연히 여기서는 논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다만 (법에 대한: 역자) 무조건적인 복종(服從)만이 요구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러한 기구의 한 부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전체적인 공동체 나아가 심지어는 세계시민사회(世界市民社會)의 한 부분(Glied der Weltbürgerschaft)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즉 저서를 통해 엄밀한 의미의 대중에게 접근하는 학자(學者)의 자격에서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수동적인 한 구성원으로서 봉사하고 있는 공공의 일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숙고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7. 그렇기 때문에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장교(將校)가 근무 중에 그 명령의 유용성이나 적합성에 대해 순수하게 논의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커다란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배운 사람으로서 군복무의 모순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을 그의 청중, 즉 군대 일반의 논의에 붙이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시민은 자기에게 부과된 조세(租稅)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 그가 수행해야 될 납세의 의무를 경솔하게 비난하면 (전체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파문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배운 사람으로서 그러한 과세의 부당함과 불공정에 대항해서 공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게 될 때, 그는 결코 시민의 의무에 위반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직자(聖職者)도 그가 섬기는 교회의 신조에 맞춰 교리를 배우는 학생들이나 교회의 회중에게 설교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러한 조건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학자(學者)로서 교회의 상징(교리)이 갖는 오류에 대해서 꼼꼼히 검토하고 또 호의적인 생각을 전개하고 나아가 종교제도나 교회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제안을 청중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러한 자유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양심에 거리낌으로 남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직책에 따라서 교회의 대변자로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때, 그는 자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임으로 가르칠 수 있는 아무런 재량권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규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설교하도록 위탁받은 것을 따르고 수용해야 한다. 그는 “우리교회도 교회가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증(명의 근)거들을 충실히 가르치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즉 그는 비록 자기 스스로의 확신에 근거해서는 결코 서명하지 않을 것 같더라도 자기가 대변해야만 하는 바로 그 교의(敎義)에서 자기교회를 위한 모든 실질적인 도움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 진리가 결코 담겨질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나아가 적어도 어떤 경우에도 내면적인 종교성 자체에 모순이 되는 것이 발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후자처럼 그 속에서 완전히 모순적인 것을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결코 양심을 가지고 자신의 직책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 임명된 목사로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의 사적(私的)인 사용’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교회는 언제나 다만 하나의 사적인(häusliche, 공공기관의 성격을 가질 수 없는) 공동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목사로서 그는 자유롭지 않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임받을 것을 수행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러나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글을 통해서 원래적 의미의 청중, 말하자면 세계를 향해 말을 하는 학자,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 자기 자신의 인격으로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왜냐하면 영적인 영역에서 일반 민중의 후견인 역할을 해야 하는 성직자들 스스로가 미성숙의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부조리들을 영속화시키는 부조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어떤 성직자단체, 예컨대 교회연합체인 성의회(聖議會 Klassis: 네덜란드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있듯이)가 모종의 불변적인 신조에 대해서 서로 맹세하고 서약함으로써 각 개별교회를 지속적으로 후견감독하고 그를 통해 민중을 이끌려고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제도자체조차 영속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과연 정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계몽을 영구히 저지하기 위해서 체결된 그러한 계약은, 설사 그것이 최고의 권력기관, 즉 의회나 혹은 가장 성대한 평화조약을 통해 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무효이다. 한 세대가 뒤 따라 오는 세대로 하여금 그들의 (특히 이렇게나 절박한) 인식을 확장하고 오류를 제거하고 계몽 그 자체를 계속적으로 진척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협정을 결의하고 체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일은 바로 계몽의 진척을 본질적인 사명으로 삼는 인간성(人間性)에 대한 중대한 범죄(犯罪)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결의가 월권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채택되었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갖는다.

9. “어떤 것이 한 민족에 대해 과연 법률로 제정되어도 좋은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척도는 “그 민족이 그것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법률로 제정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에 달려 있다. 이렇게 제정된 입법이라 할지라도 다만 더 나은 법률에 대한 기대에서, 말하자면 정해진 짧은 기간동안만, 일정한 질서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도입된 질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동안이라고 할지라도 현행제도가 갖는 결함에 대해 학자의 자격으로 자신의 의견을 공공연히, 즉 글을 통해서 밝힐 수 있는 자유가 각각의 시민들, 특히 성직자에게 허용되게 될 때, 그들은 기존질서의 속성에 대한 통찰을 공공적으로 확산시키고 확신시켜 마침내 그러한 통찰의 목소리(비록 모든 사람의 목소리는 아닐지언정)를 서로서로 통합함으로써, 말하자면 구시대적인 것을 끝내고자 하는 교단들을 훼방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나은 통찰에 비추어 종교제도의 변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교회들을 보호하자는 적극적인 제안(提案)을 군주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만 한 개인의 생애기간 동안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공공연히 의심할 수 없는 항구적인 종교헌장에 대해 합의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개선을 향한 인류의 진보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없애고 무력화하여 마침내 후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10. 사실 한 개인으로 봐서는 개인적으로 그가 알아야만 하는 것에 대한 계몽을 일정한 시간동안만 연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몽 자체를 단념하는 것은 -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심지어 후손을 위한 것이든 간에 - 인류의 신성한 권리(權利)를 해치고 발로 짓밟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민족 스스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결코 그렇게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군주가 국민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입법자로서 군주가 갖는 권위는 바로 국민의 총의(總意)를 자기 자신의 의지 안으로 수용하고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확립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진정한 개선 혹은 진정한 것으로 상정되는 개선이란 필연적으로 시민적인 질서와 공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군주만이 국민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하도록 맡겨둘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국민 스스로가 전력을 다해 노력해야 되는 자기규정과 자기발전이 다만 상호간의 폭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예방(豫防)하는 일을 회피할 아무런 이유도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 “황제도 (문법에 관한 한: 역자) 문법가보다 더 높지 않다.”(Caesar non est supra Grammatios. 출처미상: 역자)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영역에서조차 마치 최고의 식견을 갖고 있는 양, 국민들의 통찰을 순수하게 이끌어 주려고 애쓰는 저술들마저 정부의 감독 아래에 둘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몇몇 전제적 정치가들의 종교적 전제주의를 모방하여 전체 백성을 억압할 정도로, 최고 권력의 품격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종교문제에 개입하는 군주가 있다면, 그는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꼴이 될 것이다.

11.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계몽된’ 시대에(in einem aufgeklärten Zeitalter) 살고 있는가?”라고 묻게 된다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계몽’의 시대에(in einem Zeitalter der Aufklärung) 살고 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여러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일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성을 확실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또한 그런 상태에 처해질 수 있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못 미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겐 다만 스스로 자유롭게 노력할 수 있는 영역들이 열렸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계몽을 막는 일반적인 장애물(障碍物)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징표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시대는 ‘계몽(啓蒙)의 시대’ 또는 ‘프리드리히의 세기’이다.

12. 종교적인 일들에 있어서 국민들에게 어떤 것도 지시하지 법이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지기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관용(관대함)’이라는 오만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조차 거부하는 군주라면, 그는 이미 스스로 계몽되어 있고 감사의 마음을 품는 당대나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인간을 최초로 미성숙상태에서 해방시켜 모든 사람에게 양심과 관련된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한 사람으로 찬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한 군주 아래에서라면 존경을 받을 만한 성직자들이 직무상의 의무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학자의 자격으로 여기저기서 현재 채택된 종교적 신조에서 벗어나는 판단과 견해를 세상 사람들이 검토할 수 있도록 자유스럽고 공공적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직무상의 의무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더욱이 그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自由)의 정신은 외국으로까지 확산되어 나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스스로의 임무를 오해하고 있는 정부에 의해서 가해지는 외적인 방해들과 투쟁을 해야 하는 나라에까지 확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를 허용하더라도 공동체의 공공적인 안녕과 통일에 아무런 염려할 것이 생겨나지 않다는 분명한 사례가 그러한 정부에게 전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역자) 사람들을 미개상태에 머물도록 붙들어 두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자만 없다면, 누구나 점차적으로 그러한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 노력하게 될 것이다.

13. 내가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상태로부터의 탈출인 계몽의 주안점을 의도적으로 ‘종교(宗敎)적인 사항’에 국한한 이유는 첫째로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이 예술과 학문에 관하여 시민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종교적인 미성숙 상태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해롭고 또한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계몽)를 장려하는 국가주관자의 사고방식은 그 자체로 머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입법(立法)’에 관해서조차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이성(理性)을 공공적(公共的)으로 사용(使用)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기존의 입법에 대한 자유분방한 비판(批判)과 함께 개선에 대한 의견(意見)을 세상에 공공연히 밝히도록 허용하더라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역자) 전혀 위험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빼어난 실례를 갖고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군주는 그 어디에서도 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4. 그러나 스스로 계몽되어 그림자(허상)에 대해서 겁을 먹는 법이 없지만 다만 공공적인 안녕을 보증하기 위해서 잘 훈련된 일군의 무리들을 확보하고 있는 군주만이 자유국가(공화국)조차도 감히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간에 마음먹는 대로 따져보되 (일단 합의에 이른 것에 대해서는: 역자) 다만 복종하라(Räsoniert, soviel ihr wollt und worüber ihr wollt; nur gehorcht)!” 바로 여기에 인간적인 일들이 보여주는 기이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진행)과정이 나타난다. 그러한 (계몽의) 과정을 거시적으로 고찰하게 되면, 거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 안에 역설적인 것이 담겨있다. 즉 ‘시민적인 자유(bürgerliche Freiheit)’의 정도를 확장하면 할수록 그것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자유(Freiheit des Geistes)’에 유리해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오히려 엄청난 제약을 가져오게 된다(“시민적 자유”와 “정신의 자유”를 대비하는 것은 앞에서 나온 “이성의 사적인 사용”과 “이성의 공공적인 사용”을 서로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역자). 그와 반대로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감소시키게 되면 오히려 시민들이 자신의 전반적인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딱딱한 껍질(시민적 자유에 대한 통제: 역자) 안에 자연에 의해 가장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맹아(萌芽)인 ‘자유로운 사고로의 경향과 사명’이 일단 일깨워지고 나면, 그러한 경향과 사명은 점진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이를 통해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행위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 심지어는 ‘정부의 근본방침’에도 영향을 주게 되어, 그 결과로 정부는 ‘단순한 기계’(Julien Offray de Lamettrie(1709-51)의 저서 <l homme-machine="HOMME-MACHINE">를 빗댄 말 - 역자)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마침내 ‘그의 존엄(尊嚴)에 걸맞게 대우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1784년 9월 30일.



*나는 오늘(9월 30일)에야 9월 13일자의 의 광고를 통해 이번 달 <월간 베를린(Berlinische Monatsschrift)>에 동일한 질문에 대한 Mendelssohn씨의 답변이 실려 있다는 것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의 답변의 글을 손에 넣지 못했다. 만약 내가 그것을 읽었더라면 양자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 얼마나 서로 일치하는지를 다만 시험하는 목적으로 실리게 될지도 모르는 이 글의 발표를 유보했을 것이다 - 원주. 

'I. Kan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트 철학 용어 사전 사이트  (0) 2012.01.04
Kritik der reinen Vernunft (1st Edition)  (0) 2012.01.04
What Is Enlightenment?  (0) 2012.01.04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0) 2012.01.04
칸트 원작 사이트  (0) 2012.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