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비합리주의 비판

이윤진이카루스 2023. 6. 16. 13:08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비합리주의 비판.hwp
0.04MB

 

                     결정론, 관념론 그리고 비합리주의 비판

 

철학적 이론의 전형적인 사례는 경험의 세상에 관한 칸트의 결정론 교설이다. 칸트는 실제로 비결정론자였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상태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마련되면, 우리가 일식이나 월식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게 확실히 우리의 미래 행태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터이라고 말했다.

더 일반적인 용어들로, 사람들은 결정론적 교설을 다음과 같이 언명할 수 있을 터이다.

경험적 세상의 (혹은 현상적 세상의) 미래는 그 세상의 현재 상태에 의하여, 그 세상의 제일 작은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미리 결정된다.

또 다른 철학적 이론은 예를 들어 버클리(Berkeley)나 쇼펜하우어의 관념론이다; 우리는 다음 논지에 의하여 여기서 관념론을 아마도 표현할 것이다: ‘경험적 세상은 나의 관념이다’, 혹은 세상은 나의 꿈이다’.

세 번째 철학적 이론은 그리고 오늘날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이론 인식론적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인데, 그 비합리주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본질적인 사물들의 세상을 파악하거나 알 수 없다고 우리가 칸트로부터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세상을 알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하거나 우리의 이성을 수단으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 세상을 알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희망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본능이나 시적(詩的) 영감 혹은 마음 상태나 감정과 같이, 이비성적이거나 초-합리적 수단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우리 자신이 그런 본질적 물체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비합리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익숙하고 즉각적인 지식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리하여 본질적 물체들이 무엇과 같은지를 알아낼 수 있다.

이 비합리주의의 간단한 주장은 19세기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 대부분에게 매우 특징적이다; 기발한 쇼펜하우어의 예를 들면, 우리가 본질적인-물체로서 의지(will)이기 때문에, 의지가 틀림없이 본질적인-물체라는 것을 그는 이런 방식으로 발견했다. 현상으로서의 세상은 관념(idea)인 반면, 본질적인-물체로서의 세상은 의지이다. 이상하게도 이 구식이 되어가는 철학이, 그 철학에 있는 칸트 이후의 오래된 관념들과의 두드러진 유사성이 (여하한 것도 황제의 새 옷 밑에 숨겨져 남아있을 것인 한) 숨겨진 채로 남아있을지라도 혹은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옷으로 성장(盛裝)하고, 한 번 더 최신 유행이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오늘날 모호하고 인상적인 언어로 제시되어서, 본질적인-물체로서의 인간은 궁극적으로 의지라는 그의 자기-계시적 직관이 다른 자기-계시적 직관에 이제 자리를 내주었는데 그 다른 자기-계시적 직관은 사람 자신이 그렇게 철저히 권태로운 것이어서 사람이 지닌 바로 그 권태로 인하여 본질적인-물체가 무(: Nothing)라고 그 본질적인-물체가 본질적인 공허(空虛: Emptiness)인 허무(虛無: Nothingness)라고 증명된다는 것이다. 나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이 실존주의적 변형에서 어느 정도의 독창성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 실존주의적 변형의 독창성은, 쇼펜하우어가 자기-위안에 대한 자신의 능력들을 그렇게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증명된다. 그가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은 몇몇 실존주의자들이 발견한 것에 대략 반대인 것: 자신에 의하여 권태로워진, 자신-속에서-권태롭게 만드는 사람의 철저한 권태 의지, 활동, 긴장, 흥분이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다: 칸트 이후 그리고 합리주의 이후 시대의 커다란 유행은 니체(Nietzsche)(‘예감에 의하여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자신의 후예를 의심하는’) 올바르게 유럽의 허무주의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앞에 다섯 가지 철학 이론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첫째, 결정론: 미래는, 현재에 의하여 완전히 결정되는 만큼, 현재에 포함되어 있다.

둘째, 관념론: 세상은 나의 꿈이다.

셋째, 비합리주의: 우리는 비합리적이거나 초-합리적인 경험들을 겪는데 그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본질적인-물체들로서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인-물체들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지식을 지닌다.

넷째, 주의설(主意說: voluntarism):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로서 인식한다. 본질적인-물체는 의지이다.

다섯째, 허무주의: 우리의 권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 nothings)로서 인식한다. 본질적인-물체는 허무(虛無: Nothingness)이다.

 

목록에 대해서는 이만큼 하자. 내가 든 사례들을, 신중하게 고찰한 후에, 나는 그 이론 각각이 거짓임을 확신한다고 이 다섯 가지 이론들 각각에 대하여 내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골랐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나는 첫째로 비결정론자이고, 두 번째로 실재론자이며, 세 번째로 합리주의자이다. 나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례에 대하여, 무한한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지닌 실재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완전한 지식과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고 나는 칸트 및 다른 비판적 합리주의자들과 함께 기꺼이 인정한다. 물리학이나 어떤 다른 과학에 의해서도 이 목적으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의지다라는 주의론적(主意論的) 공식에 의해서도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권태롭게 만드는 허무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에 대하여, 나는 그들을 연민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페루지노(Perugino) 색깔에 대한 맹인이나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귀머거리처럼 말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내가 거짓으로 믿는 몇 가지 철학 이론들을 나의 사례로서 선택하는 일을 주시했는가? 그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서술에 포함된 문제를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를 내가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이론들 각각이 거짓이라고 내가 간주할지라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들 각각이 논박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 서술을 듣고 여러분은 내가 합리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나 어떻게 이론을 동시에 거짓이고 논박불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떻게 합리주의자가 한 이론에 대하여 그 이론이 거짓인 동시에 논박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이론이 거짓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이론을 논박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반대로, 이론이 논박불가능하다면, 이론이 참이라고 그가 인정해야 하지 않은가?

이 문제들로써 나는 마침내 우리의 문제에 도달했다.

마지막 문제는 상당히 간단하게 답변될 수 있다. 이론의 진리가 그 이론의 논박불가능성으로부터 추론될 것임을 믿는 사상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등하게 논박 불가능한 두 가지 양립될 수 없는 이론이 예를 들어, 결정론과 결정론의 반대인 비결정론 있을 것임을 고려하면, 명백한 오류이다. 이제 두 가지 양립될 수 없는 이론들이 모두 참일 리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이론 모두가 논박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논박불가능성이 진리를 수반할 수 없음을 우리가 안다.

그리하여 이론의 진리를 그 이론의 논박불가능성으로부터 추론함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논박불가능성을 해석하든, 수용될 수 없다. 이유인즉 보통 논박불가능성이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터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순전히 논리적 의미이다: 우리는 순전히 논리적 수단에 의하여 논박 불가능한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위하여 논박 불가능한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관적인(consistent)’과 동일한 것을 의미할 터이다. 이제 이론의 진리가 도저히 그 이론의 일관성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논박 불가능한의 두 번째 의미는 논리적 (혹은 분석적) 상정(想定)뿐 아니라 경험적 (혹은 종합적) 상정(想定)을 또한 이용하는 논박들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그 의미는 경험적 논박들을 인정한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 ‘논박 불가능한경험적으로 논박될 수 없는이나, 더 정확하게 가능한 경험적 서술과도 양립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경험과 양립될 수 있는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칼 포퍼,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1989, 193-195

 

A typical example of a philosophical theory is Kant's doctrine of determinism, with respect to the world of experience. Though Kant was an indeterminist at heart, he said in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that full knowledge of our psychological and physiological conditions and of our environment would make it possible to predict our future behaviour with the same certainty with which we can predict an eclipse of the sun or of the moon.

In more general terms, one could formulate the determinist doctrine as follows.

The future of the empirical world (or of the phenomenal world) is completely predetermined by its present state, down to its smallest detail.

Another philosophic theory is idealism, for example, Berkeley's or Schopenhauer's; we may perhaps express it here by the following thesis: 'The empirical world is my idea', or 'The world is my dream'.

A third philosophic theory - and one that is very important today - is epistemological irrationalism, which might be explained as follows.

Since we know from Kant that human reason is incapable of grasping, or knowing, the world of things in themselves, we must either give up hope of ever knowing it, or else try to know it otherwise than by means of our reason; and since we cannot and will not give up this hope, we can only use irrational or supra-rational means, such as instinct, poetic inspiration, moods, or emotions.

This, irrationalists claim, is possible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we are ourselves such things-in-themselves; thus if we can manage somehow to obtain an intimate and immediate knowledge of ourselves, we can thereby find out what things-in-themselves are like.

This simple argument of irrationalism is highly characteristic of most nineteenth-century post-Kantian philosophers; for example of the ingenious Schopenhauer, who in this way discovered that since we, as things-in-themselves, are will, will must be the thing-in-itself. The world, as a thing-in-itself, is will, while the world as phenomenon is an idea. Strangely enough this obsolescent philosophy,

 

󰊙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4th to 6th edn., p. 172; Works, ed. Cassirer, vol. v, p. 108.

 

dressed up in new clothes, has once again become the latest fashion, although, or perhaps just because, its striking similarity to old post-Kantian ideas has remained hidden (so far as anything may remain hidden under the emperor's new clothes). Schopenhauer's philosophy is nowadays propounded in obscure and impressive language, and his self-revealing intuition that man, as a thing-in-itself, is ultimately will, has now given place to the self-revealing intuition that man may so utterly bore himself that his very boredom proves that the thing-in-itself is Nothing - that it is Nothingness, Emptiness-in-itself. I do not wish to deny a certain measure of originality to this existentialist variant of Schopenhauer's philosophy: its originality is proved by the fact that Schopenhauer could never have thought so poorly of his powers of self-entertainment. What he discovered in himself was will, activity, tension, excitement - roughly the opposite of what some existentialists discovered: the utter boredom of the bore-in-himself bored by himself. Yet Schopenhauer is no longer the fashion: the great fashion of our post-Kantian and post-rationalist era is what Nietzsche ('haunted by premonitions, and suspicious of his own progeny') rightly called 'European nihilism'.󰊚

Yet all this is only by the way. We now have before us a list of five philosophical theories.

First, determinism: the future is contained in the present, inasmuch as it is fully determined by the present.

Second, idealism: the world is my dream.

Third, irrationalism: we have irrational or supra-rational experiences in which we experience ourselves as things-in-themselves; and so we have some kind of knowledge of things-in-themselves.

Fourth, voluntarism: in our own volitions we know ourselves as wills. The thing-in-itself is the will.

Fifth, nihilism: in our boredom we know ourselves as nothings. The thing-in-itself is Nothingness.

 

So much for our list. I have chosen my examples in such a way that I can say of each one of these five theories, after careful consideration, that I am convinced that it is false. To put it more precisely; I am first of all an indeterminist, secondly a realist, thirdly a rationalist. As regards my fourth and fifth examples, I gladly admit - with Kant and other critical rationalists - that we cannot possess anything like full knowledge of the real world with its infinite richness and beauty. Neither physics nor any other science can help us to this end. Yet I am sure the voluntarist formula, 'The world is will', cannot help us either. And as to our nihilists and existentialists who bore themselves (and perhaps others), I can only pity them.

 

󰊚 Cf. Julius Craft, Von Fusserl zu Heidegger, 2nd edn., 1957, e.g. pp. 103 f., 136 f. and particularly p. 130, where Kraft writes: 'Thus it is hard to understand how existentialism could ever have been considered to be something new in philosophy, from an epistemological point of view.' Cf. also the stimulating paper by H. Tint, in the Proc. Aristot. Society 1956-7, pp. 253 ff.

 

They must be blind and deaf, poor things, for they speak of the world like a blind man of Perugino's colours or a deaf man of Mozart's music.

Why then have I made a point of selecting for my examples a number of philosophical theories that I believe to be false? Because I hope in this way to put more clearly the problem contained in the following important statement.

Although I consider each one of these five theories to be false, I am nevertheless convinced that each of them is irrefutable.

Listening to this statement you may well wonder how I can possibly hold a theory to be false and irrefutable at one and the same time - I who claim to be a rationalist. For how can a rationalist say of a theory that it is false and irrefutable? Is he not bound, as a rationalist, to refute a theory before he asserts that it is false? And conversely, is he not bound to admit that if a theory is irrefutable, it is true?

With these questions I have at last arrived at our problem.

The last question can be answered fairly simply. There have been thinkers who believed that the truth of a theory may be inferred from its irrefutability. Yet this is an obvious mistake, considering that there may be two incompatible theories which are equally irrefutable - for example, determinism and its opposite, indeterminism (이 문장의 분사구문 considering that there may be two incompatible theories which are equally irrefutable - for example, determinism and its opposite, indeterminism 중에서 consideringif we consider로 바꾸어 써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Now since two incompatible theories cannot both be true, we see from the fact that both theories are irrefutable that irrefutability cannot entail truth.

To infer the truth of a theory from its irrefutability is therefore inadmissible, no matter how we interpret irrefutability. For normally 'irrefutability' would be used in the following two senses:

The first is a purely logical sense: we may use 'irrefutable' to mean the same as 'irrefutable by purely logical means'. But this would mean the same as 'consistent'. Now it is quite obvious that the truth of a theory cannot possibly be inferred from its consistency.

The second sense of 'irrefutable' refers to refutations that make use not only of logical (or analytic) but also of empirical (or synthetic) assumptions; in other words, it admits empirical refutations. In this second sense, 'irrefutable' means the same as 'not empirically refutable', or more precisely 'compatible with any possible empirical statement' or 'compatible with every possible exper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