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화천 동촌마을

이윤진이카루스 2012. 1. 6. 19:19

“섬 아닌 섬…집에만 있으니 시간이 더디 가오”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시대. 수많은 목소리가 세상의 데시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들리지 않는 외침이 있다. 세상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절규가 있다. <한겨레>가 여론의 사각지대를 찾아가 그들의 말을 전하는 ‘낮은 목소리’를 시작하는 이유다.
BY : 낮은목소리 | 2012.01.06 | 덧글수(0) | 트랙백수 (0)
 

[낮은목소리] 겨울마다 고립되는 벽지마을 사람들

모든 사람은 이동할 권리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권리다. 이것을 빼앗는 자체가 ‘형벌’이다. 범죄 피의자가 가장 먼저 박탈당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로운 이동권이다.

일반 시민들의 경우, 겨울철 폭설과 같은 기상이변 때문에 이동권이 제약받는 것을 한두번쯤 경험한다. 기상이변에 따른 불편이야 누구나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상이변도 아닌 평범한 기상 상황에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된다면, 분명 국가의 방재체제에 불만을 품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늘 이동의 자유를 제약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불만과 불편함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낮은 목소리’는 자유로운 이동에 장애를 겪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강원도 화천의 ‘동촌마을’이다. 동촌마을은 분명 ‘육지’임에도 배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호수가 어는 1월 말부터 녹는 4월까지는 여지없이 ‘고립’된다. 다행히 아직 물이 얼지 않아 취재를 할 수 있었다.

포털 지도검색에도 없는 곳
도로 끊겨 배 타고 들어가야…
자가용 없어도 배는 필수
여든 넘은 노인도 배 몰아

그곳은 내비게이션에도, 포털의 지도 정보에도 나오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의 정확한 주소는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2리’다. 포털 지도 서비스에서 동촌리를 검색하니 산 가운데 ‘점’ 하나가 찍혔다. 지도상에는 평화의 댐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가 동촌리를 멀리 우회하고 있었다.

 동촌2리의 김정일(43)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찾아가는 법을 묻기 위해서였다. 신호가 두어번 울리더니 ‘뚜뚜’ 소리와 함께 끊겼다. 몇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집 전화로 하니 그제야 연결이 됐다.
“내비게이션에 일단 ‘비수구미’를 치세요. 거기 도착해서 다시 전화를 주세요.”
설명은 간단했다. ‘비수구미’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꽤 알려진 곳이다. 아름다운 계곡과 천혜의 낚시터 때문에 여름에는 관광객들이 종종 찾는다.

아침 일찍 출발해 오전 11시께 화천 읍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천 읍내는 ‘산천어 축제’ 준비로 한창 분주했다. 생선 모양의 조형물과 펼침막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동촌2리를 가려면 화천 읍내를 빠져나와 평화의 댐으로 가는 ‘평화로’를 타야 한다. 그 길도 꽤 구불구불했다. 한반도의 평화만큼이나.

음지에는 아직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커브를 틀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운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겨울철 방문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구절양장의 ‘평화로’를 40여분 정도 달리자 ‘비수구미’라는 푯말이 보였다. 핸들 방향을 돌리자마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나 볼 법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핸들을 잡는 손엔 땀이 차기 시작했다. 타이어에 체인을 장착하고 기어를 2단으로 고정시켰다. 길 중간중간 보이는 낙석은 운전을 더 불안하게 했다. 10여분을 그렇게 기어가자, 이번엔 그나마 시멘트 포장이었던 길이 자갈밭으로 변했다. 차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10여분을 더 가니 이번엔 호수가 펼쳐졌다. ‘파로호’다. 1944년 일제가 전력 생산을 위해 댐을 세우면서 만들어진 호수다. 그곳은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다. 수만명의 중공군과 한국군이 수장된 곳이다. 파로호라는 이름도 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뜻에서 직접 붙였다고 한다.

눈으로 덮인 자갈길 바로 옆은 호수였다. 미끄러져 차가 빠져도 아무도 모를 듯했다. 몇분 뒤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는 끝나 있었고, 앞에는 푸르다 못해 시커먼 호수뿐이었다.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바로 집 전화로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금방이 아니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날씨는 흐려졌다. 마침 그날은 오후부터 눈 예보도 있었다.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한 30여분 흘렀을까. 멀리서 ‘부웅’ 하는 모터 소리가 났다. 작은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장님이십니까?”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안도가 됐다.
“아니 길에 왜 염화칼슘 같은 거 안 뿌리셨어요?”
따지듯 물었다.
“거긴 도로가 아니라서 염화칼슘 같은 거 지원이 안 나와요. 그리고 뿌릴 사람도 없고요.”
배의 속도는 빨랐다. 마력이 좋은 놈이라고 했다. 115마력인데, 모터 값만 2천만원 정도란다. “구입할 때 지원은 해주나요?”라고 물었다. 이장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기름은 군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다. 이장의 배와 같은 115마력 모터의 경우 한해 1200ℓ를 보조해준다. 마력이 더 작은 배들은 800ℓ를 보조해준다.
“턱없이 모자라요.”

이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터 연비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1ℓ에 2㎞도 채 못 간다. 읍내와 마을을 수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이장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주민들이 갖고 있는 불만이다.
동촌리는 1리와 2리로 나뉜다. 1리는 4개반, 2리는 2개반으로 또 나뉜다. 1리의 3개반을 빼놓곤 전부 육로가 없다.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자가용은 없어도 집마다 배는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도 직접 배를 몬다.

호수 중간에 잠깐 배를 세우고 대화를 나눴다. 김정일 이장은 지난해 이장이 됐다. 전에 하던 이장이 너무 오래하니 지치셨단다.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지만 이장이 됐다. 결혼도 아직 못했다. 이곳 이장은 정말 할 일이 많다. 우편물도 돌려야 하고(그것도 배로!) 사건·사고가 터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한다. 마을은 대부분 60대 이후의 분들만 산다. 편찮으신 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번은 한 할아버지가 송이를 캐다가 큰 낙상사고를 당했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진 중상이었다. 이곳은 119를 불러도 헬기가 뜨지 못한다. 군사보호지역이라서 지원이 안 된다. 119 구급차는 도로가 끊긴 곳에서 대기한다. 오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린다. 할아버지를 업고 다시 배에 실어 나르고, 온 주민이 총출동했다. 이런 사고가 터지면 제일 먼저 나서야 하는 게 이장이다. 취재 도중 만난 마을 어른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파로호 양쪽으로 펼쳐진 산속에는 인가가 한두개씩 보였다. 처음엔 모여 살았는데 점점 사람들이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한두 가정씩만 남게 됐다. 지금은 총 22가구가 살고 있다.
원래 이곳은 동촌리가 아니라 ‘수동’이었다고 한다. 물 동쪽에 있다는 뜻이었다. 저 밑의 마을은 ‘수하리’다. 나중에 동촌으로 바뀐 것이다. 이장이 어릴 때만 해도 초등학교가 있었다. ‘수동분교’ 출신이다.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다시 배에 속도를 냈다. 찬 바람이 옷을 파고들었다. 살갗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20여분을 가니 이장의 집이 나왔다. 튜브로 만든 간이 선착장에 배를 댔다. 간이 선착장의 경우 군에서 설치 지원을 해줬다. 그런데 그것도 항의를 하니 겨우 해준 거다. 화천군에서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평화의 댐까지 가는 유람선을 만들었는데 이게 규모가 큰 배여서 지나갈 때 파도가 엄청났다. 주민들 배가 뒤집힌 경우가 허다했다. 주민들이 항의하니 그때 선착장 설치를 지원해줬다고 한다.

마을 주민 대부분 60대 이상
제일 어린 막내가 ‘이장님’…
여름엔 관광객들 간혹 오지만
호수 어는 겨울엔 완전 고립

진돗개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 목걸이도 없다. 묶어 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기름을 나를 수가 없어 심야전기 보일러로 난방을 한다. 마침 점심시간이 돼서 이장의 어머니가 끓여준 떡만둣국에 고들빼기김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었다.
동촌리로 오는 뱃길은 두개다. 비수구미 쪽과 화천읍 구만리 선착장이 출발점이다. 젊은 사람들은 보통 비수구미 쪽에 차를 대고 이동한다. 거리는 4㎞ 정도다. 노인들은 차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구만리 선착장에 배를 대고 거기서 버스로 이동한다. 그나마 비수구미는 평화의 댐 때문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이 뚫리면서 마을에 조금 더 가까운 곳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게 된 셈이다. 그 전에는 모두 22㎞ 정도 떨어진 구만리 선착장에서 노를 저어 들어왔다. 4시간 정도 걸렸다. 전기도 88올림픽 이후인 1989년에 처음 들어왔다. 그 전까진 방은 호롱불로 밝히고 전기가 급하면 자동차 배터리를 썼다.

동촌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콩 농사를 많이 지었다. 땅이 척박하니 논은 없고 전부 밭이다. 그마저도 지금은 노인들만 있다 보니 대부분 농사는 접었고, 민박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여름에는 낚시 손님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그렇다고 다른 유원지처럼 붐비는 것은 아니다. 이장네도 원래는 어업을 했다. 파로호는 정말 다양한 민물고기가 많은 곳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군에서 어류를 보호해야 한다며 금지시켰다. 이장은 고기가 정작 없어진 건 어업 때문이 아니라 평화의 댐을 만들면서 물을 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고기 씨가 다 말랐단다. 어류를 보호한다면서 어마어마하게 큰 유람선을 운행하는 것도 이해 못하겠다고 했다.

이장네도 민박을 치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엔 친구와 함께 투자를 해서 펜션을 지었는데, 손님이 많지 않아서 걱정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기가 힘드니 손님들이 찾아올 리가 없다. 이장은 텅텅 빈 펜션을 보여주면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1월 말이 되면 물이 얼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오고 싶어도 못 온다. 노인들은 12월에 월동 준비를 끝내고 완전한 칩거에 들어간다. 이장의 경우 물이 얼면 4륜 바이크에 썰매를 매달아 얼음 위를 달려 읍내를 오고 간다. 겨울에 일단 얼기 시작한 호수의 얼음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 얇아도 얼기 시작하는 얼음은 단단해서 깨지지 않고, 아무리 두꺼운 얼음이라도 녹기 시작할 때면 위험하단다.

이곳 사람들에게 4륜 바이크는 배처럼 필수품이었다. 웬만한 가정에는 하나씩 있다.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다. 보통 6월이 되면 장마를 대비해 파로호 물을 빼기 시작하는데, 30~40m는 수위가 빠진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배를 대는 곳도 집에서 멀어진다. 거기서 짐을 집까지 나르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길이 왜 안 날까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던져봤다.
“저희도 건의 많이 하죠. 군에서도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고. 그런데 자꾸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일처리가 늦어지더라고요. 거기다가 군에서는 자동차 길보다 탐방로를 내는 게 관광객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오히려 꺼리는 측면도 있어요.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자연 훼손이 두려우면 현지 주민만 이용할 수 있는 길이라도 만들어 줘야죠.”

길이 안 나는 것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생태마을 조성 탓도 있지만, 원주민들이 대부분 떠난 마을 토지의 상당수가 외지인 소유인 탓도 있다. 개발 바람을 탄 투기가 우려되는 것이다. 워낙 풍광이 좋은 곳이라 이미 군데군데 별장도 들어섰다. 김 이장도 “여기 땅 90%는 외지인 소유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달달한 믹스 커피의 맛이 쓰게 느껴졌다.

이번엔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박영목(85) 할아버지 댁에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서 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 50년 전에 들어왔다. 처음 왔을 때 할머니를 뗏목에 싣고 4시간 노를 저어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여기가 섬 아닌 섬이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 때문에 기자의 목소리가 커지자 안방에서 자고 있던 이화영(84) 할머니가 깼다. 손님이 있는 것을 본 할머니는 곧 커피를 내왔다. 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조근조근 말해주었다.
“원래는 춘천에서 살았는데, 거기로 피난 온 한 할머니를 만났어. 근데 그 할머니가 자기가 살던 데가 그렇게 경치도 좋고 물도 좋고 했다고 자랑을 하는 거야. 그래서 전쟁 끝나고 살기도 어렵고 하니깐 한번 가보자 하고 왔지. 뗏목을 타고 4시간을 들어오는데, 뭐 이런 데가 있나 싶더라고. 처음엔 할아버지랑 많이 싸웠어.”

40대 ‘젊은이’들은 썰매 사용
“예전엔 4시간 노저어서 왔어”
개발과 환경보호 딜레마 속
지자체는 생태관광에 중점

할머니는 무릎관절염이 심해 거동이 불편하다. 한달에 한번 춘천에 있는 병원에 간다. 구만리 선착장까지 할아버지가 30분 동안 배를 몰아 데려다 주면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춘천에 간다. 올 때는 다시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간다. 시간을 어떻게 맞추는지 궁금했다. 여기 사람들은 한시간 정도는 그냥 기다린다고 한다.
불편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전제품 하나 고장나도 마중을 나가서 수리기사를 실어와야 한다. 출장비는 출장비대로 비싸다. 거기다가 기름값은 기름값대로 들어간다.
할아버지에게 “이제 나이가 더 드셔서 배 못 몰면 어떡하실 거냐”고 물었다. 허탈한 답이 돌아왔다. “그냥 집에 있어야지 뭐. 허허.”

할머니는 “제발 길 좀 내달라고 기사 좀 써줘”라며 연신 언성을 높였다.
아직 젊은 이장과 달리 할아버지네는 이제 4월까지 완전한 고립에 들어간다. 이곳의 물은 늦게 얼고 늦게 풀린다. 할아버지는 “자다가, 텔레비전 보다가, 자다가, 또 텔레비전 보다가 그런 식으로 시간 보내”라며 또 허허 웃었다.
길을 내는 것이 쉬운 건 아니다. 대규모 토목사업이니 말이다. 예산이 100억원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22가구를 위해 그런 예산을 쓴다는 건 열악한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상황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장은 돌아가는 길에 화천읍에서 택배를 부쳐 달라고 짐을 부탁했다. 된장을 담가 택배 판매를 하고 있었다. 한번 읍내에 나갔다 들어오는 게 ‘큰일’인 사람의 부탁이라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길이 없어서 좋은 점은 없냐고 물었다.
“있죠. 일단 공기 좋잖아요. 그리고 좀도둑들도 없고. 길 나도 그게 걱정이에요. 여기 노인들 다 문 열어놓고 사는데… 길 뚫리면 별별 사람들 다 들어올 텐데….”
동촌을 빠져나오자마자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하게 서울로 가는 길에 할머니가 배웅하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집에만 있으니깐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 시간이 빨리 가야 빨리 죽을 텐데….”
화천/글·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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