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딸아이를 떠나보내며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28. 07:11

   2009년 12월 19일 토요일, 32년 동안 나와 살던 딸아이가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났다. 나와 아내 그리고 둘째 아이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상실이었지만 남은 가족은 딸아이의 결혼이 끝나고 곧 그 빈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네 식구가 살 던 집안에서 한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은 4분의 1이 빈다는 의미다. 몇 번이고 눈물을 글썽이던 아내와 반대로 나는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에 눈물도 나지 않았고 섭섭한 감정도 별로 일지 않았다. 다정다감한 아내와 다소 무심하고 냉정한 나의 성격이 대비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이제 딸아이는 제 몫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엄마를 믿고 심지어 설거지조차 하지 않았던 딸아이는 이제 온전히 주부의 책임을 맡아야 할 것이다. 정말로 분가하여 살림을 나면서 인간은 성인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리라.

   인간에게는 강력한 두 가지 본능이 있다. 한 가지는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의식주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나머지 한 가지는 번식의 본능으로 짝짓기를 통하여 자손을 낳는 본능인데 이 두 가지 본능 모두는 강력한 육체적 욕구를 동반한다. 그래서 식욕과 성욕은 인간이 이 지구상에 태어나면서 발전시켜온 난폭하기까지 한 욕망이다. 그렇다면 번식 즉, 자식을 낳아 출가시키기까지 인간의 종족보존의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우선 이 종족번식의 예를 동물을 통하여 관찰해보자. 인간을 제외한 동물 또한 강력한 종족번식의 본능을 드러낸다. 그래서 가냘픈 어미 새가 둥지에 있는 새끼 새를 공격하는 뱀에게 과감히 맞서는 동영상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중국고사에서는 새끼를 빼앗긴 원숭이가 100여리를 계속 쫒아오다가 죽었기에 그 시체를 해부했더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포함하는 동물이 새끼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인데 이 ‘본능적’이라는 용어를 칸트(Kant)식으로 표현하면 ‘선험적(a priori)’이 된다. 즉, 칸트에게 ‘선험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태고부터 생존을 위하여 자연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을 의미하는데 칸트 자신은 그 경험을 새로운 지식인 후천적(a posteriori) 지식을 얻는 데 필수적(necessary)이고 참된 또는 명백한(apodeictic)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이 칸트의 단정에는 오류가 있다. 우선 선험적 지식은 후천적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된다는 칸트의 주장은 옳을 수 있지만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르고, 그 선험적 지식이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경험적으로 시험한 결과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지식이라면, 필수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칸트의 말은 선험적 지식이 우리에게 유전적으로(genetically) 선험적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선험적 지식은 우리에게 유전인자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모든 지식은, 과거나 현재나 심지어 미래에도, 가설적 특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선험적 지식 역시 참되거나 명백하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의 선험적 지식이 참되거나 명백한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미래에도 그 지식은 유효할 수밖에 없는데 과거의 선험적 지식 모두 논박되거나 반증되어서 배척되거나 수정된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파메니데스(Parmenides)는 달이 기울고 차는 것은, 실제로 달이 줄어들었다가 커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서 인간의 눈에만 그렇게 변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챘는데 철학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당연히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일반화하려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하여 파메니데스는 세상에 변화란 없다, 오직 인간의 감각만이 변화를 느끼며 그 변화는 실제로 없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은 환상이자 기만이라는 이론에 도달하는데 궁극적으로 우주는 변화가 없는 한 개의 덩어리라는 우주론을 내놓는다. 파메니데스가 주장하는 덩어리 우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가득 찬 우주이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기에 변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뭇잎의 색깔이 변하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나무가 타서 재가 된다. 그리하여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레우키푸스(Leucippus)는 파메니데스의 주장을 논박하여 세상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원자와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원자론을 제시한다. 즉, 세상은 공간이 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공간이 분명히 존재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메니데스가 창시한 한 개의 덩어리 우주라는 개념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신학에서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개념으로 - 실제로 파메니데스는 하느님이 하나이며 그 하느님은 공모양(우주)이라고 주장했다 - 현재에도 살아있다.

   서양과학과 서양철학은 파메니데스의 변화 불가능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그 이론에 반대하는 데모크리스와 레우키푸스의 반박이론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주장으로 계승되었다. 부연하여 파메니데스의 변화가 없는 세상이란 물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근본 원리를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 따라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나 운동량 불변의 법칙이 도출되어 물리학에서는 등식이 도입되어 그 법칙을 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E = mc도 등식이므로 결국 파메니데스의 사상을 기본틀로 한다.

   이제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지식이 후천적 지식을 얻는 데 필수적이라고 동의하거나 필수적이 아니라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 선험적 지식이 ‘참되’거나 ‘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지닌 선험적 지식은 오히려 수없이 실수를 저질러서 ‘이렇게 행동해서는 실패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의미한다. 부연하면,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진리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한 편으로 그 말은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부단히 진리를 찾아서 그 진리를 기준으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실패하고 말아서 그 실패한 무수한 사례를 ‘선험적’으로 기록하고 전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구상에서 이룩한 것은 모두 실패작이란 말인가? 아니다. 여기서 철학자들은 진리근사치인 박진성(迫眞性: Approximation to truth: truthlikeness: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진리에 얼마나 근접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 인간은 진리에 도달한 적도 없고 앞으로 진리를 획득할 수도 없을지라도 진리와 유사한 것을 발견함으로써 생활에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문명은 절대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는 않을지라도 비교적 건강하고 확고한 토대를 지니고 발전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 토대가 수정이나 교정을 전제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시 그 토대가 완벽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비판이 없는 사회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토대를 비판할 수 없는 사회는 진보를 담보할 수 없다.

   자, 이제 본론인 인간의 번식본능 즉, 인간이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본능으로 돌아가자.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칸트식으로 표현해서 ‘선험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는 실패한다.’라는 패러다임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즉, 대대로 이렇게 살았던 선조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가 자신을 사랑하고 교육시키는 근본이 될 따름이다. 환언하면 부모는 자식에게 부단히 자식의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 종족 보존적 사랑을 전제로 -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에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한 가족의 역사에서 축적된 ‘선험적’ 지식이 한정적이라는 - 설사 유전인자에 각인되어 있다할지라도 - 사실과 미래에 전개될 세상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과거를 연구하여 현재나 미래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가정이 이 넓은 세상에서 온갖 경험을 하고 그 실패담을 정확하게 기술하여 자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많은 경험적 실패를 - 물론 진리근사치에 따른 성공도 있을 수 있다 - 공유하여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문화적 소통이 필요하다. 그런 문화적 소통은 결국 서적이나, 방송, 기타 문헌을 통한 정보교환일 것이며 그 정보교환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전달될 수 있을 뿐이지만 틀림없이 우리는 비판을 거쳐서 - 파메니데스가 인간의 감각기관이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하고, 그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간이 얻는 지식을 망상과 기만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 정보를 수용해야 한다.

   동물에게도 신호를 하거나 간단한 의사를 소통시킬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코끼리를 실험한 과학자들은 사자무리가 나타나면 코끼리들은 위험신호를 의미하는 주파수의 소리를 낸다고 한다. 또한 우리는 새들이나 개, 고양이가 먹이를 찾거나 위험을 느낄 때 고유한 소리를 내어 서로 소통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에게는 비판하는 표현적 기능이 없다. 다시 말해서 동물들에게는 진리근사치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비판을 통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생태적 지위 (niche)를 수정하거나 변경할 능력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인간만이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지구상의 동식물 중에서 왕자의 자리를 차지했는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반성을 통하여, 즉 스스로 비판함으로써 발견한 진리근사치라는 개념은 물론 아직도 많은 인간들이 의식하거나 알지 못할지라도 매우 독특하고 심지어 고상한 지식이기 때문에, 또 인간이 자식에 실행하는 교육이란 그런 반성을 통하기 때문에 매우 미묘하다. 미묘하다는 표현을 나는 여기서 ‘매우 어렵다’나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가정 밖에서 늘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자식들에게 부모는 ‘교육을 한다’는 행동지침 외에도 자식들의 경험에서 새로운 현상을 간접 경험할 수도 있다. 동시에 부모가 습득한 선험적 지식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자식을 교육함에서 ‘신중해야 하며’, 그 교육은 ‘매우 어렵다.’ 인간의 교육이 지닌 그런 특성 때문에 그 교육은 다른 동물들의 교육과 달리 긴 기간을 필요로 한다.

   이제 부모와 자식의 이별을 이야기하자. 우선 이 이별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기억하자. 서로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이라면 구태여 이별하여 분가시키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분가가 불가피하다면 어떻게 이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먼저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부모들은 이미 스스로 신체의 노쇠를 경험하고 있어서 삶이란 영속될 수 없음을 몸으로 느낀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은 어제와 달리 마음과 같이 움직여주지 않으며 벌써 병원에 다녀오는 횟수도 적지 않고 점점 늘어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부모로서 아이들의 보호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삶의 한계에 대한 이런 인식이 거의 본능적이거나 선험적이라고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까닭은 동물들 또한 새끼를 분가시키기 때문이다. 부모 새들이 새끼에게 비상(飛翔)하는 방법과 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둥지를 떠나게 만들거나, 들짐승들이 새끼에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보금자리에서 나가게 만드는 것은 그 짐승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영원히 살 수 없어서 새끼들을 영원히 보살필 수 없음을 선험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생명체에는 자신의 종(種)이 번식을 통하여 영속하기를 바라는 본능이 변함이 없으니.

   다 커버린 자식, 부언하여 혼자서도 기본적인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자식은 부모가 보기에 집안에서 아직 어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은 신체적으로나 연령적으로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어릴 때 부모가 뒷받침하던 사례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에 매달린다. 자식들의 그런 행동은 생존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생존은 편안함이나 부모의 보호로만 충분하지 않다. 그런 편안함이나 보호는 자식들이 아직 어릴 때에 필수적 조건이지만 어린 시절이 끝나고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삶에는 투쟁도 있고 모험도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음을 ‘선험적’으로 경험한 부모는 그런 자식들의 관성적인 행동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분가라는 강제적 선택을 하는 면도 있다. 또한 이미 성인이 된, 다시 말해서 충분히 자립할 정도로 ‘선험적’ 교육을 받은 자식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은 모험심을 갖게 된다. 그런 자식들은 부모의 교육을 간섭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미 부모들의 교육은 효율적이지 못하여 서로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삶을 - 물론 교통 및 통신이 발달한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은 떨어져 살면서도 항상 소통을 통하여 생존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 살게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앞으로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며, 이제 부모는 더 이상 자식에게 교육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결혼식장에 들어가던 나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응당해야 할 삶의 한 과정이려니 하고 나는 의무처럼 내가 할 일을 해치웠다. 딸아이의 평가대로 격식을 매우 어설퍼하는 나는 결혼식에서 사위와 딸아이가 절을 하는 것에도 놀라고 말았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에서 사돈어른의 강권(?)에 마지못해 두 아이의 절을 또 받고 말았다. 사돈어른은 결혼식이 끝나고 뷔페식당에서 꼭 만나자고 나의 다짐을 받고 만다.

   딸아이의 결혼식은 토요일 오후 3시 10분에 시작하는 그날 하루의 마지막 결혼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느긋이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으려니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돌잔치가 그 식당에서 예정되었기 때문에 식당주인은 우리들에게 음식을 한꺼번에 갖다놓고 식사를 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언짢은 말이 서로 오고간 후에 그렇게 많이 남았던 음식들이 음식물쓰레기통에 담겨 밖으로 나갔다. 돌잔치를 위하여 다시 새로운 음식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리라.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손도 대지 않은 저렇게 많은 고급음식이 그대로 음식물쓰레기가 되어 가축의 사료가 된다니 주말마다, 휴일마다 버려지는 귀한 음식물을 어쩌란 말인가?

   1970년대 중반 내가 아내와 결혼하던 때, 뷔페라는 이름을 지닌 음식은 아마도 한국에 없었다. 혹시 고급호텔에 그런 음식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고급호텔이라는 게 몇 개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 호텔에서 드나드는 사람은 외국인이었지 내국인은 언감생심 호텔에서 무슨 짓을 한다는 말인가? 시골에서는 결혼식 접대음식이 국수가 고작이었으니 서울이라고 별로 다를 게 없었으리라. 아무튼 나는 입던 양복을 입었고, 아내도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결혼식을 치렀다. 우리는 그야말로 빈털터리로 방 한 칸 얻어서 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딸아이와 사위는 신혼여행을 떠나고 나는 아내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딸아이의 결혼을 직장에도,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축의금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아내의 친구들과 직장에는 결혼식이 알려져 축의금이 들어왔다. 그 축의금 봉투를 정리하다가 아내는 조그만 앨범을 발견했고 그게 왜 축의금 봉투와 함께 있는지 모르겠다면 나에게 건넸다. 무심코 지갑정도 밖에 되지 않는 크기의 앨범을 들치던 나의 심장으로 번개같이 전율이 스쳐지나갔다. 늙은 노인 세 명의 사진은 나의 증조모, 조부, 조모의 사진이었고 나머지는 고모, 조카 등 모두 이북에서 돌아가셨거나 생존해있는 친척들의 흑백사진이었다. 그 앨범은 지난봄 3월 27일 아침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예전에 미국에 있는 동생을 통하여 이북으로 송금을 하면서 이북에서 받은 것이었는데, 딸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한 나의 동생이 가져왔던 것이다.

   나는 그만 눈물을 그렁거리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기신지 알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흑백으로 재생되어 내 눈에 들어왔다. 치매를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나와 내 아들인 손자를 보고 이북의 할아버지를 닮았다던 나의 할아버지가 저렇게 남루한 의복을 입으시고 늙은 채로 가족사진을 찍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양반집으로 시집을 오셔서 그렇게 억척같이 노력하셔서 새부자집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저렇게 초라하게 늙으셨던 것이다. 그 후,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채 나의 조부모는 이북에서 쓸쓸하고도 가난하게 세상을 하직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고향 1991 10’이라고 겉에 써놓은 그 앨범은 이제 내가 죽을 때까지 나의 소유물로 남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흔히 볼 수 있던 굶주리고 남루한 친척들의 모습이 이제 나의 뇌리에서 나의 일생을 지배할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처절한 사람들의 모습이 흑백사진에 투영되어 나에게 전해오는 메시지라니! 분노와 좌절과 절망과,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 밖에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딸아이와 사위에게 잘 살라고 나는 두 번이나 축복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무더기로 끝도 없이 버려지는 손도 안 댄 고급음식들을! 그리고 절망만 안고 세상을 노려볼 기력조차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잘 살아라, 잘 살아라, 그러나 잘 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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