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이별연습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28. 07:07

                            이별연습

 

 

    2010년 2월 아내가 40년 지기들과 2박 3일 동안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전에도 어떤 경로로 유럽여행을 아내는 떠났지만, 한창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 여행에서 나는 이별이라는 단어를 상기할 수 없었다. 지금 아내와 나는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항공기 출발시간에 맞추어 아내를 김포공항 국내선 출발에 내려주고 뒤쫓아 간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아내의 친구 한 명과 마주쳤다. 나이 차이가 없는 내 자신이 그렇게 늙었을까 싶은 정도로 아내의 40년 지기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저 곱기만 하던 아내도 이제는 적어도 삶의 절반 문턱을 넘어서고도 세월이 꽤 흘렀다. 나는 전날 백화점에 들러 쿠키와 갓김치, 그리고 포장된 선지해장국을 사서 아내가 가지고 가도록 했는데 그게 여행을 떠나는 아내를 위하여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편이 아내의 제주도 여행에 반대하여 농담 반으로 몰래 집을 빠져나오는 분도 일행이어서 나는 도망치듯 얼른 김포공항을 나와서 귀가해버렸다.

   삶이 허망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삶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주장이다. 삶에 대하여 비관적이 되어 버리면 그나마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모두 허사가 된다. 나의 삶이 허망하여 아무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단순화 하여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까닭은 내 자신을 몽땅 부인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내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생은 정말로 빠르게 지나간다. 장자(莊子)에서는 사람의 생애가 마치 말이 문 앞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기껏해야 일백 년을 사는 게 사람의 목숨인데 약 60년 세월이 어제 시작된 느낌이니까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도 겨우 삶에 대한 느낌은 시간상으로 하루가 넘을 따름이다. 일생을 돈 걱정, 집 걱정 없이 살며 호의호식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삶이 짧다는 느낌은, 가난 속에서 일생을 허덕거리며 산 사람이 느끼는 바와 같을 것이다. 아니,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장밋빛 인생을 보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생이 꿈을 꾼 듯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런 사람은 별로 노력할 필요도 없이 수월하게 생활했으니 엄격한 의미에서 자신이 피땀으로 이룩한 업적이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편안하게 사는 생애를 원하니 아마도 가난과 그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병고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리라.

   2008년 9월 어느 일요일에 나는 집에서 청소를 하다가 허리에 무리가 와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서 결국 119 구급대원을 불러서 구급차에 실려 동네병원 응급실로 갔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고 아들은 부모가 늙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응급실에서 뼈가 상했는지 엑스레이를 찍고 이상이 없자 MRI라는 최첨단 기기를 동원하여 척추부분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척추에 조금 이상증세가 보였다. 의사의 말로는 수술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지만 척추 부분의 물렁뼈가 조금 삐져나왔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진찰결과로 듣고 이틀을 입원했다가 퇴원한 적이 있었다. 올해 2월에 근무지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일어서는데 다시 허리가 삐끗하여 간신히 화장실에서 나왔다가 결국 119 구급차에 실려 근처 대학병원으로 갔다. 역시 뼈가 상했는지 엑스레이를 찍고 소문난 정형외과에서 보낸 구급차에 누워서 그 정형외과로 이동하는데 구급차 속에 누워서 마치 임사체험을 하는 느낌을 가졌다. 희미한 구급차 내부의 불빛과 흔들리는 차량의 움직임을 느끼며 누워서 창밖을 간간히 보면 가로등이 무수히 지나갔다. 대학병원으로 찾아온 아내는 구급차 안 내 옆에서 다소 무료하지만 긴장한 표정으로 병원까지 나를 동행했다. 창문에 천으로 된 장식이 달린 길쭉한 구급차의 내부에 누워서 조금 흔들리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영화에서 나오는 장례식 장면 같았으며, 다시 내가 일어날 수 없다면 이대로 끝난다는 생각이 불현듯 다가왔다.

   현대화라는 숨찬 질주에 익숙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며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지난해인 2009년 2월 16일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임종하기 며칠 전 남긴 녹화장면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하면 무수히 많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없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불교계에서 말하는 선문답을 하고 계신다. 평소에 항상 명백하게 말씀을 하셔서 듣는 이가 일말의 의문도 없이 이해했던 분의 안색이 창백하고 말투까지 어눌하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난감하다. 살아있으면 선행을 많이 하고, 인생이 끝나면 하던 선행에서 손을 놓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고, 또 바보로 평가했던 추기경께서는 한국 민주화 과정의 격랑 속에서 주인공으로 가난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 편에 섰는데 그래도 죄인이고 바보였다는 의미는 당신의 행동이 미흡했다고 여기는 까닭이리라. 그렇게 삶은 누구에게나 후회로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아마도 모든 사람이 후회할 것이다. 정말로 ‘바보처럼 살았네!’하고 나중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을 회고할 것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도 있고 ‘사람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선하다’라는 말도 있어서, 영화나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도 흔히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은 옳지 않다. 인간이 마지막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가 끝까지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살아가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애써 잊고자 노력하여 의식 속에서 감추지만 결국 그런 노력은 헛된 것임이 밝혀진다. 과오를 저지른 것도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이지만 그 과오를 쉽게 감추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일도 헛된 까닭에 역시 어리석다. 환언하여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고 선하지만 어리석다.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결국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인생의 전반부를 보내고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후반부를 알 수도 없는 나는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고대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의 말처럼 ‘비겁으로 인한 수모가 틀림없이, (힘을 내어 애국심을 발휘할 때 그에게 닥친 느껴지지 않은) 죽음보다, 더 비통하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생은 후회하기에 너무나 짧지 않은가?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행복이란 자유의 열매이고 자유는 용기의 열매라고 믿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위축되지 않는다.’ 긴 휴가를 받아서 뒹굴고 지내는 시간이 깊어지면 마치 고질병처럼 도지는 것이 지난날 어리석었던 행동이나 그런 행동으로 받은 양심의 가책인데 그야말로 가시가 되어 나를 괴롭혀서 이러다 심장마비로 급사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또 용기 없이 행동한 경우도 여전히 어리석음으로 남아 나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맹목적으로 동물적인 삶을 지탱하기 위하여 바르게 말하지도 못하고 행동하지도 못했던 과거 나의 모습이 오늘 뼈아프게 떠오르고, 어김없이 미래에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굴하게 생명을 구걸할 정도로 인생은 소중한 것인지?’ 자문하지만 역시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용기를 통하여 자유를 얻고 자유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여행을 떠나는 아내에게 여행지에서 먹을 음식을 건네면서 나는 ‘이별연습’이라고 아내의 여행을 정의했다. 아내는 웃으며 음식을 받아 가방에 넣는다. 언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도 모르는 부부의 이별을 이제 우리는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몇 십 년을 함께 살아간다할지라도 아내와 내가 느끼는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지나가서 마치 꿈을 꾼 느낌이리라. 일장춘몽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생각나지만 꿈이나마 길기나 한가? 지나간 과거의 행동 대부분이 후회스럽듯이 내가 아내에게 한 대부분의 행동 또한 지금 회고하면 못마땅하다. 이렇게 삶이 빨리 지나감을 깨달았더라면 그 짧은 순간순간에 아내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가 주장한 바와 같이 나의 ‘매일 매일을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어차피 짧은 인생이자 결혼생활이었겠지만 얼마나 보람찬 세월이었겠는가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시작할 시간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고 그 주장을 수용하여 과거를 반성하는 길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활태도이다. 늙어서 철든다고 자신의 신체가 허약해지고 언제 병원에 실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지경이 돼서야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아내는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한 친구들과 지금 제주도의 올레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저녁이면 걷기를 끝내고 숙소인 성산 일출봉 부근에 있는 섭지코지에서 이야기의 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곧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그들은 각각 자신의 가정으로 귀환할 것이다. 이미 사위와 며느리를 본 그들의 삶은 서로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에 대하여 어떤 삶을 계획하는 것일까?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고 하는데 말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는 이별연습이 여러 번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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