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왜 일찍 죽는가, 그리고 살아남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특수한 경우에 자신이 발견한 자연적 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그 설명을 명제로서 일반화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과학적 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논리나 가설이나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논리가 가설이나 이론이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 우주적으로 적용되어 유사한 현상을 동일하게 설명하여 그 현상을 규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어 내가 남쪽지방의 기온이 매년 상승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지구온난화’라는 명제로 그 현상을 설명 한다면 나는 그 명제를 전 세계적으로 적용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세계의 도처에서 온난화는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모든 곳에서 매년 기온은 상승한다. 이렇게 되면 나의 주장은 보편성의 띠는 반면에 과연 지구온난화라는 명제가 참인지에 대하여 과학자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사실을 확인하려고 달려든다.
천재는 영어로 genius라고 표현하는데 원뜻은 창조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 세계에서는 천재가 자연이나 인간사회의 특수한 모습을 포착하여 공간이나 소리로 표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과학적 의미에서 천재는 자연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지만 천재를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 평범한 사람들은 그 아이디어를 이해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운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한 동양의 전통적 천재라는 의미는 논외로 해야 하는 까닭이 있는데 우선 한자로 표현되는 천재라는 의미가 하늘에서 내는 인간재목, 즉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제시하는 문제해결책을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할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해결책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 문제해결책의 정당성을 비판조차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현대적 천재는 존재한다. 부언하여 현대적 천재는 과학적으로 -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나 이성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 비판이 가능한 문제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에서 천재는 아마도 황하의 범람을 다스리는 사람이었고 그는 곧 중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리라. 그만큼 옛날 황하의 범람은 지금처럼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자연적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황하의 홍수를 다스릴 수 있다면 그는 중국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중국인들은 그의 말에 복종했던 것이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불행하게 여생을 마친 한국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이었으리라. 청년 이승만은 구한말 자신이 내뱉는 개혁사상 때문에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혁명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감옥생활을 할 때 영어사전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미국에 망명해서도 미국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졸업하는 기염을 토한다. 앵글로색슨족도 그런 업적을 남긴 적이 없다고 하니 이승만의 두뇌는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자, 이제 천재란 자연적 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정의(定義)하고 천재가 왜 일찍 죽는지, 그리고 천재가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찰해보자.
인간은 정말로 불행하게도 미래를 미리 살 수 없다. 부연하여 인간은 과거를 반추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게 고작이지 미래를 예언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미래를 예측한다면 그 예측은 과거나 현재에서 도출될 따름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유인즉 미래의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은 과거나 현재의 환경과 적어도 조금은 다르기 때문이고 크게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2009년에 관찰된 개기월식이 앞으로 60년 후에 다시 관찰될 것이라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토대로 예언한다할지라도 그 사실은 60년 후의 이야기이므로 우리로서는 확신적으로 60년 후에 개기월식을 다시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60년 후에 개기월식을 볼 가능성은 높다할지라도 과학적으로 모든 사람이 틀림없이 60년 후에 개기월식을 다시 볼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
미래에 대하여 예언이나 예측을 우리 인간을 할 수 없는 반면, 미래의 세상은 새로움이나 진기함이 펼쳐지는 세상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의 세상은 과거의 세상이나 현재의 세상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지만, 미래에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진기함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지금 불합리하게 미래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는가? 물론 그렇다. 내가 미래에는 진기함이, 다시 말해서 과거나 현재에 없던 것이,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역시 내가 과거나 현재로부터 도출한 결론 때문이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비행기가 현대에 나타났고 고작 50세를 넘지 못하던 한국인의 평균수명임 80이 가까우니 나는 미래에 진기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예언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한국 땅에 대형 지진이 발생하여 국가에 심각한 피해가 올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형 지진이 올 것이라는 주장에는 합리적인, 다시 말해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그런 주장을 사람들은 주목하지 못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이 되어 심한 비판을 받아 심지어 그 충격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사망하게 된다.
천재는 창조적인 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천재는 자연적 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논리나 가설을 구축하여 그 현상을 설명하여 그 현상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이 전부는 아니라할지라도 일부가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연적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천재는 많은 위험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위험하지 않은 문제의 대처방안이라는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환언하여 편안하게 자연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조사하고 연구하고 실험이나 시험을 하여 이론이나 가설을 구축하는 모든 과정에서 많은 노력과 노심초사가 당연히 뒤따르며, 설사 실험 및 시험과 적용과정에서 위험한 요소를 통과하였다할지라도 천재가 구축하는 이론이나 가설은 여전히 비판을 받을 처지에 놓인다. 왜냐하면 위험을 통과하여 여러 사람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천재의 이론이나 가설도 일시적으로 유효할 뿐이기 때문인데, 이유인즉 사람이 미래를 미리 살 수 없는 바와 같이 천재가 내놓은 이론이나 가설도 미래를 살 수 없지만 미래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천재의 이론이나 가설은 미래에도 실험 및 시험을 당하고 적용을 당해서 유효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인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따라서 관습이나 법률이나 윤리조차도 인간의 생존에 대하여 하위 개념이며 생존에 종속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우선 살고 보고픈 것이다. 우선 생명을 보존해야 그 다음에 예의도 차리고 조직을 만들어 법률이나 절차를 정하여 더욱 생존을 보장하려고 든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은 보장되어 있지 않는데, 이유인즉 현재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과거의 상황조차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간의 생존은 항상 불안정하다. 인간의 생존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는 자연이나 인간 사회에서 많은 문제가 항상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은 사멸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재들과 과학자들은 이론과 가설을 구축하여 누구의 이론과 가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재들은 위험에 노출된 행위를 감행하는 것이다.
어느 가톨릭 신부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고대에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불투명하다. 부언하면 고대 히말라야 산맥의 작은 왕국에서 세자가 부귀영화와 인생의 무상함에 절망하여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을 하면서 진리를 깨달아 제자들을 가르치고 중생을 제도하려고 했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사형당한 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하여 남겨진 성서 속의 이야기들은 많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학자들 중 한 명은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주요 이유는 종교가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육제도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여 종교를 갖지 않는 것도 한 가지 선택권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을 창조론자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는 스승의 언행에 대한 연구 및 기술(記述)은 매우 정교하고 마치 나무가 가치를 치듯 새로운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수 천 년 세월을 발전(?)해왔지만 스승의 존재나 언행에 대한 근본적인 부인이나 비판은 금기시 되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교리는 비판이 금기시 된다는 점 때문에 독단(獨斷: dogma)이며 따라서 근본적인 혁신이나 혁명이 불가능하다. 즉,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아무튼 45년 동안 수행한 싯다르타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가르치는 데 주저했는데 이유인즉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나만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이 고유의 독립된 실체가 없으며, 모든 게 원인과 조건 따라 서로 기대어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가르쳤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극락과 서방정토라는 실체를 만들고, 영원히 여기에 머무르는 ‘나’를 믿으며, 미륵불과 아미타불 같은 신(神)도 만들어냈다. 예수도 유사하게 유태민족의 수호신을 믿으며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 유태인들의 폭 좁은 민족주의를 형제애, 나아가 인류애로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끊임없이 훈계하지면 결국 총애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을 당하고 제자 유다에게는 최종적으로 배신당하여 사형대에 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벌어지는 소위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하다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살 당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살아 있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천박한 지식을 뽐내며 아테네시민들을 현혹하여 정치지도자가 되려는 중우정치의 아수라장을 비판한 소크라테스의 혜안은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중우정치라는 게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즘인데 아직도 만개하지 않은가? 50대 초반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국의 조각가 권진규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라’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작품에 천착하였지만 예술가들의 세계에서도 시류와 영합하여 작품추구보다는 처신에 능란해야 살아남고 소위 출세하여 유명해질 수 있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천재의 삶이 몰이해되고 심지어 왜곡되어 온전하지 못한 현실은 고대 세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한다. 천재는 요절하기 쉬운 것이다.
그럼 자연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자세히 알아보자. 생명체는 내재적으로 - 다시 말해서 유전적으로 - 기대나 규칙성을 품고 산다. 이 기대는 내일 아침에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같이 과거의 경험으로 축적되어 우리 몸의 일부로 유전인자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 기대가 없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내일 해가 뜬다는 기대가 없다면 - 그 기대가 맞든 틀리든 - 우리는 삶을 포기는 게 고작이다. 모든 생명체는 기대를 가지고 산다는 사실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아메바에게도 분명히 의식은 있다. 부언하여 아메바도 시간상으로 자신의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 즉, 자신은 살아있고 최소한도 얼마간 미래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 의식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다. 움직임은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기대가 없는 아메바는 움직이지 않으면 정지하여 결국 사멸한다. 식물에게는 의식이 있을까? 이 문제를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으로 증명해보자. 귀류법은 어떤 명제를 부정함으로써 그 부정이 틀렸음을 증명하여 역으로 그 명제가 옳음을 증명하는 논증방법이다. 즉, 식물에게 의식이 없다는 주장을 반증하면 우리는 식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 나무에 의식이 없다면 나무뿌리는 땅속으로 퍼지는 동안에 바위를 만나면 비켜가지 않고 계속 그 바위를 뚫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바위는 나무의 뿌리 힘에 의하여 뚫리는 경우가 드물어서 뿌리는 바위를 비켜가며 땅 속을 파고든다. 따라서 식물에게도 의식은 있다.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인 파리지옥 같은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생명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는 자연적 현상이 - 환경적 조건 - 변하거나 생명체 내부의 유전적 구조가 변함으로써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가 지닌 기대가 어긋나면 문제가 발생한다. 화산이 폭발하여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거나 생명체 내부의 유전인자가 변이를 일으키면서 생명체는 생존에 관한 문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생명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 두 가지 요인이 서로 영향을 미쳐서 상승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하여 천재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기대를 지니고 생활하여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는 빈도가 높고 따라서 좌절하여 심리적 타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천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거나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들이나 과학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단계 과정을 거친다:
문제1 (P1) → 임시이론 (TT: Tentative Theory) → 오류제거 (EE: Error Elimination) → 문제2 (P2)
이 도식에서 문제1은 우리가 처음 조우하는 문제로 그 문제에 대하여 천재나 과학자들은 임시이론을 구축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해결책이나 이론에는 거의 반드시 오류가 있기 마련이어서 - 오류가 없다면 아직 그 오류를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 임시이론을 시험하거나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경우에 오류가 발견된다. 물론 과학적인 이론처럼 시험에 부쳐서 그 이론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시험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문제에 - 형이상학적 문제 - 대한 해결책은 비판적인 토론이다. 따라서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책이자 모든 체계적인 이론은 자체의 오류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오류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여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경우는 없고 새로운 문제2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천재들이나 과학자는 계속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심리적 중압감에 시달린다. 위 도식은 가장 단순화된 문제해결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고 이 도식을 기초로 분화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제1에 대한 임시 해결책인 임시이론은 수없이 많을 수 있다. 환언하여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그것도 한 사람이 여러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임시이론에서는 다원론이 필수적이 되고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가 필수적이 된다. 임시이론이 복수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시험에 부쳐, 그리고 비과학적 이론인 형이상학적 이론의 경우에는 비판적 토론에 부쳐 거짓이거나 부적당하여 제거되는 임시이론 또한 무수히 많을 수 있어서 임시이론은 단수가 아닌 복수이며 마지막 단계인 문제2 또한 그러므로 무수히 많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세밀하게 분화된 문제해결 과정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TTa → EEa → P2a
↗ ↘
P1 → TTb → EEb → P2b → CED
↘ ↗
TTn → EEn → P2n
여기서 CED는 비판적 평가토론 (Critical Evaluative Discussion)을 의미하는데 즉, 문제해결 과정에 대하여 참석자들이 비판적으로 토론하여 토론과정의 결과를 학습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삶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데에 관심이 없거나 적어서 낙관적으로만 살려는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위험을 겪거나 심리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 대부분은 삶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연구하고 공부하여 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그럭저럭 생애를 보내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천재가 일찍 사망할 가능성이 천재가 아닌 사람보다 더 높으며 따라서 천재는 요절한다는 명제가 대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명제는 경향성을 지닌다. 부연하여 천재가 제시하는 문제해결책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어서 가치를 지니며, 천재에게는 일찍 죽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천재가 반드시 요절한다고 정해진 법칙은 없다. 마치 질병을 치료하는 모든 처방약이 사람의 몸에 조금이라 부작용을 낳듯이 천재가 창안하는 문제해결책도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지만 그 부작용이 최소한이라는 점에서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문제해결책을 일시적으로만 수용하고, 다시 발생하는 부작용은 문제2로 남는다.
천재는 자연현상이나 사회적 현상에서 문제를 발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해결책을 만들어내어 시험하거나 비판을 받는 과정에서 심리적이거나 물리적 중압감을 받아서 요절할 수 있다고 나는 설명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생명체가 살아가는 자연환경에서 환경적 조건이 변화하여 생명체에게 위해성 요소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위해성 요소를 자연의 돌연변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생명체의 유전적 구조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는 그 유전적 구조의 변화를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유전적 구조의 돌연변이가 왜 생기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는 것 또한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왜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는지 알지 못한다. 천재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해결책을 시험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보통사람보다 높아진다. 그리고 천재의 유전적 구조가 보통사람보다 더 자주 변함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천재가 요절할 가능성이 높다는 명제를 우리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전적 구조가 변한다는 것은 돌연변이가 출현한다는 의미이고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유전적 장치는 유전적 구조에서 반복적으로 변이나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돌연변이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위의 문제해결 과정에 관한 도식에서 임시이론인 시도된 해결책들이 많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위하여 많은 돌연변이가 필수적이 된다. 그렇다면 왜 생명체의 몸 안에서는 유전적 구조의 돌연변이가 반복적으로 일어날까? 상상컨대 우리 몸은 외부의 환경적 조건에 적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반응하고자 한다. 따라서 외부의 환경적 조건이 변하면 생존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 안에서는 유전적 구조가 돌연히 변하게 되지 않을까? 만약 나의 이 설명이 옳지 않다면 인간의 유전적 구조는 태고시절부터, 다시 말해서 유원인 시절의 유전적 구조부터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환경에 적응을 할 필요가 없는 유전적 구조는 몇 십만 년 전이나 현재나 동일해야 하지 않은가? 더구나 유전적 구조를 포함하여 인간의 몸이 변한다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생명체의 유전적 구조가 변해야 하는 까닭은 생명체가 자체 내부의 위험보다 더 큰 위험을 외부로부터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부의 큰 위험이란 환경적 조건의 변화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까? 다시 말해서 왜 돌연변이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일까? 생명체 내부의 유전적 돌연변이는 외부의 환경적 조건이 변하면 그 조건을 극복하거나 그 조건에 적응하기 위하여 발생한다고 추측되는데, 변화된 환경적 조건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그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면 돌연변이를 일으킨 생명체가 사멸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가 발생하면 생명체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그 문제에 대항하고자 하는데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이 돌연변이가 시도된 해결책 즉, 임시이론이 된다. 그러나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생명체가 이론을 다수 만들어서 대항해도 성공을 거두는 이론이 소수이거나 없는 경우가 많은 바와 같이 돌연변이가 외부의 환경적 조건의 변화를 극복하거나 그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경우 또한 소수이거나 없다. 그러므로 돌연변이는 결국 대부분 사멸하고 동시에 돌연변이를 일으킨 생명체 또한 죽어간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멸종한 종(種)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매머드나, 인간의 경우에는 네안데르탈인이나 북경원인이 사멸한 원인은 변화된 환경조건을 극복하거나 그 조건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여 자체의 유전적 구조가 돌연변이를 일으켰지만 결국 살아남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위 설명이나 과정을 정리해서 설명하면,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자연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여 해결책을 만들어내는데 특히 천재는 보통사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시도된 해결책인 유전적 구조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 시도된 해결책 대부분이 외부의 환경적 조건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제시한 천재 또한 덩달아 사멸하게 되는 것이다. 즉, 천재는 자신이 지닌 재능 때문에 자신보다 열등한 인간보다 일찍 죽는다는 결론이 생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우수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보다 단명하다는 명제가 설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윤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까? 인류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나 예수 또한 결코 선종하지 못했다. 선종이라는 말은 ‘잘 죽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일생이 보람이 있었다거나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재판의 결과로 독이 든 잔을 마시고 독살되었으며 예수 또한 사형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일생은 서두에서 내가 주장한 “인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따라서 관습이나 법률이나 윤리조차도 인간의 생존에 대하여 하위 개념이며 생존에 종속되는 개념이다.”와 상반되는 사례이다. 이런 분들 또한 천재의 범주에 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천재가 요절하지 않고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먼저 천재의 가치는 그 천재가 요절하든 장수하든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천재가 남긴 업적은 인류의 역사나 생명체의 역사를 - 즉, 우주의 역사 - 통하여 길이 남는다. 그런 사람들이 요절해야 하는 상황은 본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사회에도 손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재들이 살아남아서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는 진보를 이룩할 수 있으며, 그 진보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혜택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예수가 주장하는 형제애 때문에, 싯다르타가 말하는 만물의 유전성 때문에 인류의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지적(知的) 겸손은 허세를 부리는 모든 정치가와 학자들에게 날카로운 계명이 되지 않는가?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때문에 우리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체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지 않은가?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천재들이 인류의 복지와 진보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잃어가며 행동했던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천재가 요절하는 것은 간략하게 말해서 돌연변이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풍토 때문이다. 관습을 비판하고 상식에 대드는 행위는 비민주적인 국가에서 특히 용인되지 않는다. 관습을 따르고 상식을 지키면 누구나 다른 사회구성원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무탈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습과 상식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까닭은 사회란 변하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원주민인 야노마미 족은 문명사회와 접촉을 하면서 새로운 질병이 생기는 바람이 평균수명이 낮아졌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장수촌을 연구한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장수촌은 비교적 다른 마을과 교류가 적은 산골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의 장수촌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교통이 불편하여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산골에 밀집해 있다. 이런 사실들은 문명과 문명이 - 환경적 조건의 변화와 유전자의 돌연변이 - 충돌하면 심리적 압박감을 포함한 여러 가지 질병이 또한 충돌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풍토병, 즉 그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질병이 있기 마련인데 그 지방에 오래 살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토착민들은 그 질병에 걸리지 않을 따름이다.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성병을 원주민에게 옮겨 원주민들이 다수 죽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현지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유럽인들 또한 있다. 더구나 오지에서 외부문명과의 접촉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토착민들에게 문명의 진보라는 개념이 있을까? 자연과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인간은 거의 유일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임시이론을 내놓아서 다시 그 임시이론을 적용하거나 시험하면 이론의 오류가 발생하여 그 오류를 제거하여 다시 적용하거나 시험하면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여 다시 토론을 거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을까?
위에 언급된 과학적 문제해결의 도식은 결국 동양과 서양 사이에 문명충돌이 적나라하게 벌어졌던 지중해 연안, 즉 유럽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지금도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 유럽의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지역은 역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과 동양이다. 이 지역, 특히 유럽지역에서 사람들은 종교라는 이념으로 인류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서 깨달은 결론이 사상의 자유였고, 비판의 자유였고, 종국적으로 민주주의였다. 사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 발생한 고귀한 직접민주주의를 역사적 굴곡을 거치면서 회복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럽에서 천재가 단명하게 삶을 마칠 확률은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천재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아무리 기이한 의견이어서 사람들이 그 의견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적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적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에게 추방당하여 미국에서 불행하게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이승만의 젊은 시절은 자신의 천재성이 찬란하게 빛나던 때였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승만은 지금도 하와이 동포들 일부가 ‘예수와 같은 분’으로 떠받든다고 한다. ‘예수와 같은 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표현은 선지자(先知者), 즉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간파하고 있는 사람으로 풍부한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달리 표현해서 선지자는, 보통사람들이 걷고 있을 때, 말을 타고 달리는 선구자다. 보통사람들이 선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주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한 가지 시각은 존경이요, 다른 한 가지 시각은 주로 몰이해로 생기는 질시(嫉視)나 논리적인 반대사상이다. 만약 두 가지 시각 모두로 선구자를 바라보게 되면 경외감(敬畏感)이 생기는데 경외감은 천재를 존경은 하되 따르기가 두려운 마음이다. 천재를 존경만 하면, 천재의 말을 추종만 하면 별탈이 없다. 그러나 천재를 두려워하거나 멀리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의미는 천재의 주장에 전적으로 따르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천재는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천재의 주장을 철저히 추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지 진리를 탐구하거나 자연적이나 사회적 문제에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행동을 하와이에서 직접 겪은 한국이민자들이 증언하는 이승만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이승만이 하와이 한국이민자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을 부추긴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평가인 ‘선구자’와 ‘이간질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천재 이승만을 평가할 수 있을까?
중국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서로 감투싸움을 하는 중에 - 임시정부 내의 감투싸움은 일본군에 학병으로 강제로 징집당하여 중국에서 임시정부로 탈출한 후 광복군으로 활약한 김준엽의 저서 ‘장정’이나 장준하의 저서 ‘돌베게’에 기술된 내용이다 - 백범이 주도하여 일본인 요인을 암살하거나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시도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당시 가장 민주주의가 번성하던 한 국가인 미국에서 재미동포들의 성금을 모으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아마도 대화를 중시하는 미국 민주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세계적 추세의 영향을 받아서 - 이승만은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역량이나 열망을 적어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 한국민족이 무장투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취할 수 있는 독립운동은 방식은 외교를 통한 방식밖에 없었다. 환언하여 이승만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현실로 인정하고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민자들 사이에서 패가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한국이민자들은 임시정부의 노선을 지지할 것이요, 현실론인 외교적 독립운동을 선호하는 한국이민자들은 이승만을 ‘선지라’로 추앙할 것이다. 당연히 하와이 한국이민자들은 두 패로 갈려져서 불화하고 불목했다. 예수 또한 당시 예루살렘에서 유태민족은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이란 엘리트주의에 몰두해있던 유태인에게 모든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사랑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사상을 설파함으로써 유태인 사회에 불화와 불목을 가져왔다. 이승만은 해방 후 한국으로 귀환하여 미국의 힘을 등에 없고 초대대통령이 되지만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김구의 암살배후세력을 비호함으로써 - 김구 암살의 배후세력은 친일세력이었다 - 민족주의적 분노를 사게 되고 그 분노는 이승만의 추방으로 귀결되었다.
두말 할 것 없이 이승만이 한국인들로부터 추방을 당한 역사에는 흔히 천재들이 자신에게조차 귀중한 합리적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적(敵)을 만나지 못하거나 그런 적을 만난다할지라도 자만이 지나쳐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던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승만의 눈에는, 아기를 낳으면 뜨거운 물이나 약품으로 손을 소독하여 산모와 아기를 만져서 감염을 막아야 한다는 기초적인 의술의 지식조차 없어서 영아사망률이 30~40%까지 이르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당시 신흥문명국으로 정착된 명성을 지녔던 일본인들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정권을 잡은 후에 친일한 자들을 사면하고 중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이런 자만을 hubris라고 지적하였고 그런 자만에는 반드시 보복(nemesis)이 뒤따라 자만하는 자는 멸망한다고 경계했다. 오늘날 유럽인들이 이룩한 문학과 예술 및 과학에서 보이는 절제미의 극치는 과장과 허세, 그리고 망상을 경계하여 실제를 사실대로 파악하려는 사실주의(Realism)의 근간을 이루며, 우리가 사실대로 문제를 파악하여야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해결책을 구축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에서 사실주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칸트와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가 주장한 바와 같이 사람의 진술이나 기술(記述)이 진리나 진실인지는 그 진술이나 기술이 사실과 합치될 때 밝혀지는 것이라면, 진리나 진실을 알아야 우리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은가?
유럽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 민주주의이다. 실제로 유럽이 아시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과학과 과학적 개념이라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이성적 사회에만 과학이나 과학적 개념이 전해질 수 있다는 단서가 붙는다. 이성적 사회는 합리성이 통하는 사회로 그 사회는 폭력과 사기행각이 횡행하는 ‘닫힌사회’ 즉, 계급독재나 정치적 전횡이 만연하는 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 즉,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의견을 낼 수 있는 사회로 한 마디로 표현해서 민주주의이다. 이 민주주의가 지니는 이상 중 하나가 관용이다. 모든 인간이 실수로부터, 심지어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관용이 그 인간사회의 기초를 이루어야 하며, 그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실수와 죄악을 제거하는 비판이 또한 그 사회에서 허용되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천재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탐구하고 발표하고 비판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억압된 상황에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진보는 이룩되지 않는다. 원래 정신적으로 진보를 이룩한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굴레나 억압은 인간정신을 속박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의 진보를 저애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잃으면 인간은 모든 것을 잃는다. 마치 동물처럼 살아가는 자유를 잃은 노예에게 무슨 진보가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자유로운가, 그리하여 천재들이 미쳐버리거나 자살을 선택하거나 요절하지 않고 자신이 제시하는 해결책들이 합당한 비판을 받으면서 허용되는 사회인가?
아메바를 비롯한 하등생명체는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면 죽는 수가 고작이다. 미꾸라지는 논바닥이나 도랑이나 저수지에 살다가 자신이 기대하는 바와 달리 한발이 찾아오고 물이 말라버리면 죽는 방법밖에 없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말라가는 논바닥을 파보면 미꾸라지들이 습기를 찾아서 흙속으로 몰려드는 현상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가뭄이 계속되면 결국 미꾸라지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결론적으로, 아메바를 포함하는 하등생명체는 자신의 기대가 - 기대는 고등생명체인 인간에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이론이나 가설로 나타난다 - 어긋나면 기대를 지닌 자신이 사멸한다. 그렇다면 고등생명체인 인간은 자신의 기대처럼 비가 올 것을 예상했다가 가뭄이 든다면 죽는 수가 고작인가? 강물을 길어서 가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첫 번째로 기대이자 이론이자 해결책을 시도할 것이다. 강물조차 말랐다면 이제는 두 번째 해결책으로 샘물을 찾아서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우물을 더욱 깊이 팔 것이다. 두 번째 시도된 해결책으로 물을 구할 수 없다면 세 번째 해결책으로 가뭄이 덜 하거나 발생하지 않는 지역으로 이주를 결심할 것이다. 이 모든 해결책에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필요하고 그 의견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고등생명체인 인간은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고 그런 까닭으로 하등생명체보다 생존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등생명체인 인간이 강구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필수적인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미꾸라지가 가뭄 속에서 몰살당하고 먼 옛날 매머드나 공룡이 멸종한 이유는 하등생명체인 그들이 자신들의 생존방식을 문제에 적합하게, 다시 말해서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합당한 문제해결책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해결책을 합당하게, 즉 문제를 해결한 가능성을 높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천재가 내놓는 문제해결책에서 천재의 주관성을 가능한 한 많이 배제하여 문제해결책을 객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이 위에 인용된 문제해결의 도식이다. 객관성이란 실제로 사실을 의미한다. 문제를 적시함도 사실적이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사실적이라면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게 당연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객관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천재의 가설이나 이론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다른 천재들이나 과학자들이 그 가설에서 결함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그 가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유효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나 가설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천재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나 가설을 반증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위상은 여전히 우뚝 솟아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설사 어느 천재가 내놓는 가설이나 이론이 다른 사람들의 반증을 받아서 효력 없음이 증명되어 폐기될지라도 그 가설이나 이론을 창안한 천재는, 아메바처럼, 생명까지 잃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이론이나 가설을 반증하여 죽임으로써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인간이 창안하는 이론이나 가설은 인간을 대신하여 죽기 때문에 천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재가 살아남기 위해서 천재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론이나 가설에 결함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을 처음부터 인정해야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내놓는 해결책에서 오류를 찾고자 엄격하게 비판을 가할 때 스스로 협조해야 자신의 이론이나 가설에 숨어있는 오류를 탐지하기 쉽고 따라서 사회의 진보는 쉽고도 빠르게 이룩될 수 있다. 그것보다는 천재 스스로 자신이 창안한 이론을 반증하려고 노력하여 자신이 창안한 이론 속에 오류가 없는지를 엄격하게 검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천재들 또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천재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와 원자론의 시조인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주장인데 지식인들이 지녀야 하는 이런 겸손을 사람들은 지적 솔직성 (intellectual honesty)라고 부른다. 지적 솔직성이란 결국 천재가 오래 살 수 있고 동시에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위한 지향점이 아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분한다면 자연의 세상인 제 1세계와, 인간이 자연의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만 아직 주관적 세계인 제 2세계와,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제해결책을 객관화하여 실제로 제 1세계와 제 2세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한 가설이나 이론을 산출하는 제 3의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이 포함된 물리적으로 자연의 세상인 제 1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여 주관적인 제 2세계에서 애를 쓴다. 제 2세계에서 인간이 산출하는 문제해결책은 고작해야 주관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 해결책이 폐기된다. 이제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에 대한 주관적인 문제해결책이 만들어지는 제 1세계 및 제 2세계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따라서 위험 또한 증가한다. 우리가 조우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객관성을 띤다면 -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가설이나 이론인 문제해결책이 적어도 상당히 사실성을 띤다면 - 천재가 일찍 생명을 잃어야 하는 위험은 크게 감소한다;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인간의 생명이 희생될 가능성은 역비례 하여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인간이, 아니 천재가 내놓은 가설이나 이론을 객관화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고 지금까지 내가 토론한 바는 바로 가설이나 이론의 객관화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물론 제 1세계에서 생물학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제 2세계를 뛰어넘어 제 3세계까지 우리가 도달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천재가, 아니 인간이 오래 살 수 있는 제 3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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