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4 (번역 수정본)
달이 파르메니데스의 두 가지 길에
자체의 빛을 조금 비추는 방식 (1989년)
이 논문에서 나는 엘레아(Elea) 출신의 파르메니데스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인격 혹은 그가 끼친 영향에 대하여 말하지 않겠는데 그는 기원전 약 515-445년에 살았다: 역사관련 주석들은 이 저서의 논문 6의 부록과 다른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더 정확하게, 현존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서사시의 단편 글들이 유발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라고 내가 믿는 것을 해결하려고 내가 노력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서사시는 6음각으로 쓰였는데 분명히 호메로스(Homer)의 영향을 받은 서사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서사시는 철학적 작품이고 아마도 ‘자연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으면서 선배들인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를 언급한다.
I
그 서사시는 두 개의 부와 서문으로 (서시[序詩]) 구성되어 있었다. 서시에서 젊은 파르메니데스는 초인적인 수단에 의하여 여행하여 ‘여신(女神)’의 (아마도 디케[Dikē]와 동일하다) 환대를 받는다. (1) 자연이나 실재에 관하여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아서 비밀인 진리를, 또한 (2) 인간이 지닌 그릇된 견해를 파르메니데스에게 밝히겠다고 ‘여신’은 선언한다. 그다음 여신은 자기 말을 시작하는데 여신의 말은 분명히 두 부분으로 나뉘어 통상적으로 (1) 진리의 길과 (2) 견해의 길로 구분된다.
진리의 길인 1부의 내용은 완벽하게 놀라운데 특히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
이 논문은 1989년 3월에 쓰였는데 논문 5가 확충된 것이고 논문 3에 대한 사전 연구이다. {주석12 (마지막 3문장), 주석13 및 15는 1991년에 작성되었다. 편집자.}
의 자연철학 맥락에서 (2부가 명징하게 들어맞는 맥락) 그러하다: 여신은 (a) 먼저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이자 반(反)-감각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여 (b) 움직임이란 불가능하여 세상은 실제로 하나의 거대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동질성의 단단한 구형(球形) 덩어리로 구성되어 그 안에서 어떤 사건도 발생할 수 없다는 논지에서 정점을 이루는, 일종의 (순전히 논리적인) 증거로 나아간다;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1부 실재 세상인 이 진리의 길은, 견해의 길인 2부 현상의 세계와 뚜렷이 대조된다. 후자는 평범한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상으로서, 움직임과 변화와 발전 및 대조의 다채로운 세상이며 ‘빛과 밤(night)’으로 구성되어 풍요롭고 다양하다.
현존하는 1부의 단편 글들은 매우 거의 매우 완벽하도록 함께 들어맞아 갈 수 있어 보인다; 현존하는 2부의 단편 글들은, 파르메니데스 이전의 다른 모든 철학적 작품들의 단편 글들처럼, 분명히 매우 불완전하다. 아마도 1부의 특이한 완벽성에 가까움은, 1부가 흥분을 자아내어 파르메니데스 선배들의 어떤 작품보다 더 빈번하게 인용되고 필사되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2부의 불완전성은 플루타르코스의 증언에 비추어 명백해진다.
II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시를 둘러싼 사실에 대한 매우 간략한 기술(記述)은 이만큼 하자. 그 시는 그리스 학자들에 의하여 지루하고 시적(詩的)이 아니며 유사-논리적 문체로 쓰인 것으로 흔히 기술된다. 이런 판단은 내가 보기에 오류다: 그의 주제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대하게 되는 것보다 그의 글이 더 활기차고 흔히 더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유능한 판단자라고 나는 주장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언급하고, 나는 이제 나의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서술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적어도 최고의 다섯 가지 경험적 (천문학적) 발견을 수행했다는 믿을만한 보고서가 우리에게 있다: (i) 달은 (셀레네: Selene) 구형(球形)이다; (ii) 달은 태양으로부터 자신의 빛을 받는다; (iii)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비실재적이다: 그것들은 그림자 장난이다 (그리고 태양이나 등잔 빛에 노출된 작은 구[球]의 도움을 받아 모형화될 수 있다); (iv) 개밥바라기와 (the Evening Star: Hesperus) 샛별은 (the Morning Star: Phosphorus) 동일한 것이다; (v) 지구의 형체는 구형(球形)이다.
이 결과를 염두에 두고 나는 이제 나의 첫 번째 문제를 언명할 수 있다:
(I)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진리의 길에서 실행한 바와 같이, 어떻게 성공적인 천문학자이자 경험론자가 급진적으로 관찰과 감각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이 문제를 파르메니데스의 감각주의로부터의 반동으로 명명하겠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2부가 그의 시대의 과학적 및 우주론적 전통에 들어맞으면서 그 전통을 더 멀리 확대하는 관념들과 비평이 풍부했다는 것은 플루타르코스의 유명한 언급에 의하여 증명이 되는데 (아래 주석2 참조), 플루타르코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시 2부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시 2부가 우주론과 자연사를 탁월하고도 충분하게 다루고 있다고 간주하고 고도로 독창적인 (예를 들어 진정한 발견들을 포함하는) 작품이라고 간주하였음이 그 유명한 언급에 의하여 밝혀진다; 이것은,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시비만 걸던 다른 저술가의 많은 ㅡ 혹은 대부분의 ㅡ 저서와 대비되었다.
나의 두 번째 문제를 언명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파르메니데스가 설파한 두 가지 세상인 실재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미증유의 심연을 명확히 해야 한다.
여신(女神)이 밝히는 실재의 세상인 진리의 길과 인간이 보는 현상의 세상인 견해의 길 사이의 불일치는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의 전통이었다고 인정된다. 확실한 진리이자 신(神)들만이 (그리고 신들이 계시하는 사람들) 습득할 수 있는 진리와 죽을 운명인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견해와 추측에 지나지 않은 것에 대한 그 선배들의 구분이 그 불일치에 의하여 그 선배들의 전통에서 계속되는 한 그 선배들의 전통이었다고 인정된다. 게다가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은, 특이한 것을 (천둥 및 번개; 혹은 바다에서 특이하게 높은 파도; 혹은 특이한 인간의 행태; 혹은 사랑의 힘; 혹은 행성들의 특이한 움직임 같은 것들)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는 평범한 세상 뒤에 있는 세상을 (신들과 악마들의 세상) 창안했다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이 주장하는 두 가지 세상인 실재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을 대립시킴에 의하여 완전히 가려졌다. 이유인즉 (i) 실재의 세상은 (물론) 참된 세상인 반면, 현상의 세상은 철저히 거짓이기 때문이다: 현상의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비-물질이고, 기껏해야 그림자놀이이다. (ii) 실재의 세상에 속하는 어떤 것도 (다시 말해서, 1부 (b)) 현상의 세상에서 설명이 아마도 필요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현상의 세상은 철저히 거짓이고 철저히 망상적이기 때문에, 그런 설명에 의하여 현상의 세상이 지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터이다. (흥미로운 유일한 설명은 어떻게 그런 망상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1부 (a)에서 설명된다: 그런 망상은 전적으로 이성에 의존하는 대신 우리가 감각 경험을 신뢰함으로부터 발생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감각 경험은 자기-부정을 낳는다.)
이 두 가지 요점 (i)과 (ii) 각각으로 인하여 두 가지 ‘세상’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열린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칸트의 철학을 제외하고 유사한 것을 포함하는 다른 철학을 알지 못한다: 칸트 또한 완벽하게 알 수 없는 본질적인 물체의 세상인 실재의 세상 및 우리에게, 우리의 감각과 동시에 우리의 이성에게 나타나는 바와 같은 물체의 세상인 현상의 세상을 안다. 칸트가 아는 본질적 물체의 세상은, 칸트가 주장하는 실재의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상의 세상에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작동하는 않는 한,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는 실재의 세상과 닮았다. 그러나 칸트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의 차이점은 매우 크다. 칸트에게 현상의 세상은 또한 실재성을 지닌다: 칸트에게 현상의 세상은 자연과학이 참인 기술에 의하여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것이고 참인 이론들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반면 실재의 ㅡ 본질적인 물체의 ㅡ 세상은 우리로부터 숨겨져서 그리하여 ㅡ 우리에게 ㅡ 단지 그림자 세상과 같은 것으로서 영원히 알려질 수 없다.
이원론적인 세상 체계로 된, 나에게 알려진 모든 다른 (서양) 철학 특히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아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에서 메울 수 없었던 격차를 메우려고 시도했다: 그 철학 모두는, 실재의 세상이 우리 인간이 지닌 현상의 세상을 설명하는 기능을 지닌 이론체계에 의지했다. (나는 이 방법론을 ‘전통적 방식’이라고 부르겠다.) 이것은 원자론자들에게 매우 분명하게 성립하며 심지어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의 세상에도 성립한다; 1부에 기술된 파르메니데스의 실재적 세상처럼 실재적이며 참된 동시에 변하지 않는 이데아. 이 ‘전통적 철학’에서 이데아들은 우리가 살다가 죽는 덜 실재적이고 덜 참된 현상의 세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제 나는 나의 두 번째 문제를 언명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는 두 가지-세상 체계가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버넷(Burnet)의 표현을 사용하면 악랄한 ‘시대착오(anachronism)’처럼,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나타나는 이 시대착오는 ㅡ 거의 역사적인 역설 ㅡ 설명되어야 한다.
내가 버넷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는, 내가 견해의 또는 망상의 세상이라고 불렀던 것이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라고 말함에 의하여 이 역설을 설명해치우려고 시도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는 한 가지 세상만을 포함한다. 다른 한 가지 세상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ㅡ 다른 사람들이 (피타고라스학파?) 지니고 있을 것이고 그 자신이 예전에 지녔을 거짓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파르메니데스가 실제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은 실재가 1부에서 여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부는 움직이는 물체의 복합성에서 우리 거짓 믿음을 계속하지 말라는 경고로서만 작동한다: 그런 세상은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계시받기 전에 신뢰했던)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계시의 내용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계시로 인하여 파르메니데스가 계시받기 전에 믿었던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계시로 인하여 모든 다른 인간들이 믿고 믿었던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따름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대착오와 역사적 역설이 사라진다고 분명히 버넷이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칸트의 본질적 물체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이라는 이원론과 표면적인 유사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버넷의 의견에 의하여 파르메니데스와 칸트 사이의 유사점이 크게 감소한다고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 버넷의 의견에 의하여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메니데스의 동시대 사람들 모두는 그의 이론체계가 추악한 역설이라고 느꼈는데, 그 사실이 그 이론체계의 시대착오에 대하여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파르메니데스의 훌륭한 제자이자 친구였던 제논(Zeno)은 파르메니데스의 작품이 이렇게 취급을 당하는 데 대한 증인일 뿐 아니라, 제논(Zeno)이 그런 취급에 대항하기 위하여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실재 움직임이라는 관념이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교설만큼 적어도 역설적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비롯하여 후기의 모든 서양 철학자들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Zeno)의 이론체계가 역설적이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역설적임을) 또한 발견했다. 유일한 예외는 아마도 플라톤이다.
버넷의 언급은 (초기 그리스 철학[Early Greek Philosophy], 1908년 판본, 209쪽, 주석3), 칸트 이후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가 덜 역설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며 그러므로 칸트 이후에 출현했더라면 시대착오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암시로서 수용될 것이다. 정말로 버클리(Berkeley) 이후와 훨씬 더 칸트 이후 그 이론체계는 한 철학자가 버클리나 칸트의 관념론을 ㅡ 아마도 이 이론체계들의 비합리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로서 ㅡ 영리하게 전도(顚倒)시킨 것으로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는 칸트 이전 2,300년 전에 출현했고 사실상 시대착오이자 역설이었기 때문에, 나의 두 번째 문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재언명될 것이다:
(II) 파르메니데스의 시대에 그리고 그의 지성적 상황에, 열정적인 진리 추구자가 세상에 대하여, 기묘하지만 물질적인 실재에 대하여 그렇게 역설적인 견해를 만들어내어 그 견해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던 것을 어떻게 우리가 설명할 수 있거나 이해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를 파르메니데스의 표면적인 시대착오의 문제라고 부르겠다.
세 번째 문제가 있다 ㅡ 여신의 계시 1부와 2부 사이의 설명적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아래 VII절에서 언명되어 해결될 것이다.
III
이것들이 나의 두 가지 문제이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나는 그 문제들에 관하여 몇 가지 비평을 간략하게 덧붙이겠다.
나의 첫 번째 문제에 관하여, 파르메니데스가 감각 경험으로부터 반발한 것은 내가 보기에 예전에 언명되어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그 문제가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많은 비평가에 의하여 목격되거나 심지어 모호하게라도 느껴졌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사람은 2부의 파르메니데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인정된다 (내가 제안하는 바, 나의 첫 번째 문제가 원문의 증거와 조화를 이루어 해결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바와 같이). 그러나 그들이 나의 문제 (I)에 이것보다 더 가까이 접근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다른 문제는 모든 사람이 느끼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보다 버넷에 의해서 심지어 더 분명하고 더 강력하게 목격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버넷은 자신이 2부를 ㅡ 인간이 지닌 견해의 길 ㅡ 고유한 장소에 둠에 의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상하게 오류를 저질렀다. 파르메니데스가 현상의 망상적 세상을 기술하여 그 세상이 절대적 비존재라고 가르친다는 데서 버넷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에 의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시의 시대착오성이 감소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파르메니데스의 시가 시대를 초월하여 역설적이고, 파르메니데스를 (그리고 제논[Zeno]을) 포함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고 역설적이라는 (우리가 2부와 분리하여 파르메니데스의 1부의 시대착오적이고 역설적인 특성을 잊을지라도) 사실 때문에, 적어도 버클리까지 시대착오적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IV
나의 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ㅡ 물론 가설적 해결책 ㅡ 소개하는 데로 전환하기 전에 나는 그 해결책이 원문으로 잘 확립된 사실에 ㅡ 한 가지 심리학적 상정(想定)이 마련되었다는 한 가지 예외와 함께 ㅡ 근거할 따름이라고 말하고 싶다. 발견자가 자신의 발견 중 한 가지에 의하여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신이 이제 모든 수수께끼의 해결책인 철학자의 돌을 발견했다고 느끼는 일이 매우 흔히 발생한다고 나는 상정(想定)한다: 자신의 발견이 모든 것을 조명한다고 (그리고 정말로, 때때로 그렇기는 하다) 느끼는 일이 매우 흔히 발생한다고 상정(想定)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숫자가 모든 것의 본질이라는 피타고라스의 사상;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homo mensura)라는 원칙: 혹은 매우 최근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양자 이론적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원론’에서 도출되어 자신의 ‘상보성 원리’를, 생명의 비밀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와 같은 생물학의 문제까지 혹은 자유의지의 문제와 같은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까지 보어(Bohr)가 확대한 것; 혹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초기 믿음으로 자신의 불확정성 원리가 물리학이 (거의? 아니면 이미?) 끝에 왔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더 세밀한 측정이 불가능한 곳에 증명가능하게 도달하여 더 깊은 수준으로 침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이 아마도 말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발견을 일반화하여 독단화하는 경향’으로 지칭될 것에 대한 이 사례들에, 나는 분명히 희귀한 반증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호메로스(Homer)가 창조한 신(神)들이 조악하게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이어서 세상을 움직이고 다스리는 신의 힘은 틀림없이 완전히 다르다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일신론적인) 발견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던 (B34, 나의 번역)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그러나 확고한 진리에 관해서, 아무도 그 진리를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신(神)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인간이 완벽한 진리를 말할지라도
자신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모든 것이 추측으로 짜인 그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perfect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크세노파네스는 희귀한 사상가였다: 자기가 발견한 것을 보편적인 독단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발견을 추측으로서 인정한다; 가설로서 인정한다. 인간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 모든 것과 같이, 그가 발견한 것은 ‘추측으로 짜인 그물’일 따름이다.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의 것일 리가 없다.
이 반증 사례가 밝히는 바와 같이, ‘발견을 일반화하여 독단화하는 경향’은 반대로 일반화되어서 독단화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해결책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겠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그의 시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인상이 추측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인식한다.)
V
이제 나는 나의 첫 번째 문제인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주의로부터 반동한 문제에 대하여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으로 왔다.
파르메니데스는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가 시간에 따라 차고 기운다는 관찰이 (모든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거짓임을 발견했다. 셀레네는 그런 종류의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그녀의 변화는 망상이다. 그 변화가 그렇게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모든 사람이 관찰을 할 수 있는 듯하여도, 사실상 그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명확한 관찰, 특히 변화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은 철저히 미덥지 못하다; 그래서 관찰된 움직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셀레네는 항상 크기와 형태가 같은 구(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말할 것이다: 달이 차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다는 발견은 반대로 관찰의 도움을 받아서 이룩되었다. 셀레네가 항상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듯함을 (DK 28B15) 관찰하지 않고 그런 발견이 이룩될 수 없었을 터이다; 그것은 (이성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바) 달이 달빛을 태양으로부터 받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찰은 관찰의 허위성을 함축할 것이다 ㅡ 반증의 (논박[elenchus], 또는 더 구체적으로,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으로 허위성에 대한 간접적 증거) 분명한 경우이다. 햇빛 속에서 공을 손에 쥐고 공 주위를 사람이 도는 (또는 공이 사람 자신의 주위를 도는) 동안 공 위에서 빛과 그림자가 노니는 것을 관찰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눈에 보이는 달 몸체의 변화는 그림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이것 어느 것도 추론이 (논리적) 없었다면 발견될 수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 추론은 미덥다: 추론은 정말로 진리의 길이다; 유일한 길.
이것이 첫 번째 핵심적 문제에 대하여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이와 같이 논증함에 의하여 자신의 엄격한 합리주의에 쉽게 도달하였음은 내가 보기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먼눈을 뜨게 하는 것으로서 ㅡ 자신의 감각적 눈의 빈곤성에 자신의 정신적 눈을 열게 하는 것으로서 ㅡ 쉽게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신(神)의 계시와도 같았다. 이것은 진리였고, 이것은 진리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 진리의 길은 심지어 관찰의 세상이 거부되기 이전에 처음으로 틀림없이 확립되었다.
나는 이제 나의 두 번째 문제인 파르메니데스가 지녔던 표면적인 시대착오의 문제로 방향을 바꾼다. 여기서 일반화해서 독단화하는 파르메니데스의 경향에 관한 나의 상정(想定)이 작동한다.
달이 변하지 않는 구형(球形) 몸체라는 위대한 발견은 파르메니데스에 의하여 일반화되어 아마도 전세상이 변하지 않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견해에 도달한다. 혹시 모든 변화, 모든 움직임은 빛과 그림자의 망상적 장난질이며 빛과 밤(night)의 장난질일까? 혹시 우리가 모든 움직임이 불가능하다고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정말로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을 증명한다. 그가 내놓는 증거는 그의 글 1부 진리의 길에 대한 긍정적인 우주론적 귀결이다.
진리의 길은 그의 시에서 두 가지 주요 기능을 지닌다: 진리의 길은, 감각주의가 항상 논박되어 합리주의가 진리로 통하는 유일한 길임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길은 실재 세상에서 움직임인 물질적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증거는 매우 교묘하다. 그 증거는 철저히 선험적이어서 모든 경험적 전제가 없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1) 존재하는 것만 존재한다.
(2) 무(無)는 존재할 수 없다.
(3) 공간은 없다.
(4) 세상은 가득 차 있다.
(5) 세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움직일 공간이 없다 ㅡ 그리하여 변화할
(일종의 움직임인) 공간도 없다.
(6) 움직임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여신이 제시하는 증거이다: 증거로서 그것은 무오류이고 그리하여 신적(神的)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없다; 반대로 단순함, 섬세함과 얼마간의 어수룩함이 있다: 위대한 선구자가 지니는 모든 징표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달을 파르메니데스가 위대하게 경험적으로 발견한 것에 대한 선험적 연역이고, 그 발견을 일반화한다. 그리하여 이 발견은 설명되고 그 설명과 함께 우주가 설명된다! 심지어 2,500년이 지나서 우리에게도, 움직임을 전제하면 역설이 발생함을 밝히는 제논(Zeno)의 유명한 증거에서 결함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파르메니데스가 설파하는 증거에서 결함을 발견하기란 거의 동등하게 어렵다.
파르메니데스가 증거를, 강력한 논리적 증거를 내놓아야 했음을 주목하라. 그 증거가 없다면, 감각보다는 이성이 우리에게 진리를 부여한다는 그의 교설은 결실을 맺지 못할 터이다; 그리고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그의 교설은 사산(死産)된 역설일 터이다.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을 위하여, 자신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그 교설이 그에게 필요했다: 그 자신이 변하는, 빛에서도 변하고 심지어 밤에도 변하는 세상의 실재성을 신뢰하던 인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내놓는 증거가 논박임을 주시하라. 그 증거는 논박(elenchus)으로 경험주의 교설과 변화가 존재한다는 교설을 논박하는 것이며 분명히 많이 논쟁된 논박이었다 (DK 28B7: 5, πολύδῃριν ἔλεyxον). 제논(Zeno)과 고르기아스(Gorgias)가 내놓은 증거도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초기 수학적 증거 대부분의 (혹은 모든?) 경우이기도 했는데 이유인즉 그 증거들이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논박(elenchus)은 증명의, 증거의 논리 분야에서 최고 통치자이다. 논박은 소크라테스에게도 여전히 최고의 통치자이며, 내가 생각하기에 플라톤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정말로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들을 사용하여 작동하는 공리적 방식과 (가령, 유클리드의) 대조적으로, 거의 절대적인 증명 방식이다. 그리고 귀류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증거로서 사용하는 3단논법과 (다시 말해서 전개) 대비를 이루는데, 3단논법을 시도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귀납법을 창안하였으며 (우리가 위 2쪽에서 안 바와 같이) 3단논법을 시도하면서 절망하여, 소크라테스가 ㅡ 자신이 내놓은 반증에서만일지라도 ㅡ 자신의 논박(elenchus)에서 사례와 범례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책임을 지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심지어 더 위대한 생물학자였을지라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반증이나 논박을 사용하여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 철학자들의 우수성 일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파르메니데스와 나의 핵심적인 문제로 선회하자. 나의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 제시된 해결책이 매우 풍요로운 이론임을 나는 밝혔다: 그 해결책에는 커다란 설명력이 있다. 그 해결책으로 인하여, 1부가 관찰이라는 방식을 (= 길) 자기-모순적으로서 비판하는 이유가 설명되고 (일반화하려는 경향 때문에) 내가 제시한 해결책에 따라서 파르메니데스에게 관찰적 경험주의를 파괴했던 동일한 논박 방식에 의하여, 움직임의 불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임무를 1부가 스스로 진 이유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이 문제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인하여 파르메니데스에게 주장되는 시대착오라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이 즉각 생긴다.
두 번째 문제는, 단순히 기묘한 진리의 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우주론적으로 일반화 한 것에 달려있다고 지적함에 의하여, 풀린다. 그 해결책은 분명하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는 자기 시대의 ‘물리학자’들이 수행하는 역사적 전통에서 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의 위대한 발견인 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전적으로 이 전통 속에 있으며, 그의 일반화 방법도 그렇다 ㅡ 탈레스(Thales)의 이론 ‘모든 것은 (한 가지 형태의) 물이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 ‘모든 것은 (한 가지 형태의) 불이다’ 및 ‘모든 것은 변한다’와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 비교하라. 그러므로 심지어 ‘세상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교설도 전적으로 이 전통 안에 있다. 오직 관찰적 경험주의를 급진적으로 배격한 것과 합리적 증거의 방식을 (논박)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으로 채택한 것만 분명히 그의 선배들의 전통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 일탈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제시한 해결책에 의하여 완벽하게 설명된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는 결코 시대착오적이 아니고 위대한 이오니아학파 우주론자들의 전통에 완전히 부합한다.
그러나 내가 제시한 해결책의 설명력이 훨씬 더 크다. 그 해결책에 의하여 2부에 대한 해석의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가 해결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아니 더 정확하게 그가 만난 여신은 2부의 바로 첫머리에서 이해하기 매우 힘든 것을 말한다. 그녀는 현상의 세상이라는 망상이, 인간이 빛과 밤(night) 중에서 아마도 밤(night)만을 채택하는 대신 규약에 의하여 두 가지 실체 (또는 형태) 모두를 채택하여 명칭을 부여하겠다고 동의함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한다: ‘밀집되고 무거운 몸체’이며 분명히 물질적 덩어리 우주이고 하나이며 유일한 실재 (B8: 59, νύκτ' άδαῇ: 빛의 부재, 다시 말해서 실재에 대한 망상의 부재). 이 규약, 두 번째 실재에 대한 이 언어적 발명품인 ‘빛’은 인간이 길을 잘못 들어서서 망상의 희생자가 된 장소이다.
이 기묘한 구절에 대한 설명은 나의 주요 문제 중 한 문제가 아니었다. 첫 번째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에는 (그 해결책은 우연히 두 번째 문제 또한 해결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원문을 언어학적으로 설명하여 해석하는 문제로만 보이는 이 구절을 설명하거나 심지어 조명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하여, 내가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언어학적인 이 문제가 또한 해결된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달에게 돌아가자. 달이 차고 기운다는 망상에 대한 설명은 무엇인가? 분명히 변하는 빛이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문자 그대로 그림자 장난이다 ㅡ 구형(球形) 몸체 위에서 빛과 밤이 노니는 것! (이것은 위 2절의 초입에 언급된 모형에 의하여 작은 규모로 또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빛은 비-물체이다: 빛은 물체가 아니다; 그리고 오직 물체만 존재할 수 있다: 비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물체만이 합당하게 이름을 지닐 수 있다: 비물체는 이름이 주어지지 말아야 했고 동시에 실재로서 인정되지 말아야 했다. 달 같은 것만이, 어두운 물질인 달만이 자체가 받는 조명과 별도로 물체이다 (정말로 밀집되고 무거운 몸체): 조명을 받은 물체라기보다는 물체 그 자체;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이 비실재적인 비물체인 빛에 이름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실재보다 선호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빛이 인간의 감각 하나를 매혹하여 시각에 아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경고하는바, 당신의 감각을 경계하고 오직 당신의 이성만을 신뢰하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달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관하여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성이다!
그래서 움직임이라는 망상은 시각의 망상인데 까닭은 이름을 받지 말았어야 하는 빛이라고 지칭되는 비물체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이 위대한 망상의 희생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망상적 세계인 존재하지 않는 변화와 움직임의 세계가, 자신들의 감각기관을 신뢰하는 인간에 의하여 신뢰받았던 이유이다.
이것은 1부에서 2부로 이전하는 표면적으로 유일한 언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고, 이 난해한 구절에 (DK 28B8: 53-9) 대한 해석이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여기에 원문과 관련된 문제는 남아있지 않다.
VI
이제 나는 첫 번째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요약하겠다. 실재적인 것은 아주 둥글고 무거우며 밀집하고 변하지 않는 덩어리 우주인데 그 우주는 아주 둥글고 무거우며 변하지 않는 달을 일반화한 것이다. 변화하는 우주라는 망상은, 달이 차고 기운다는 망상처럼, 비실재적인 그림자 장난질을 낳는 빛의 (비물체)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은 확립될 수 있지만 오직 이성과 (반)증거의 방법에 의해서 확립된다. 이것이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확립되자마자 우리는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인간이 자신들의 감각들을 ㅡ 특히 시각을 ㅡ 신뢰할 정도로 그리고 심지어 망상을 유발하는 감각을 사고(思考)로서 오해할 (DK 28B16) 정도로 충분히 어리석기 때문에 인간이 신뢰하는 존재하지 않는 망상적 세상을 기술(記述)할 수 있고 반면 오직 추론만이 실재적 사고 다시 말해서 실재에 대한 사고이다.
위의 마지막 언급으로 인하여 우리는 표면적으로 원문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글 B16의 문제인데 (나의 의견으로) 항상 오역되었다; 사실상 심지어 최근 번역 중 한 가지도 내가 보기에 완전히 터무니없다. 예를 들어 커크(Kirk), 레이븐(Raven) 및 스코필드(Schofield)는 (1983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어느 순간에도 방황하는 사지(四肢)의 혼합물이 그러하듯,
그렇게 정신도 인간에게 존재한다; 이유인즉 생각하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인데, 즉 모든 사람 각자에게 그들이 지닌 사지(四肢)의 본질이다;
이유인즉 우세한 것은 사고(思考)이기 때문이다.
As is at any moment the mixture of the wandering limbs,
so mind is present to men; for that which thinks is the
same thing, namely the substance of their limbs, in each
and all men; for what preponderates is thought.
이 번역은 고전학자가 아닌 누구에게나 이해불가능해서 나는 우려한다. 나의 운문 번역은 (유사 6음각으로 된) 이제, 1963년 이래 다소 손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다:
한때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감각기관의 혼합물 안에 있는 것이,
인간에게 참된 지식으로 보인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인간의
지성적 정신과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의 변화하는 본성을 동일한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각자와 모든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이 혼동 속에서 득세하는 것을 ‘사고(思考)’라고 부른다.
What is, at any one time, in the much-erring sense organs'
mixture,
That seems genuine knowledge to men. For they take as the
same thing
Man's intellectual mind, and his sense organs' varying nature.
'Thought' they call what in this muddle prevails, in each man
and all.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낳는 망상과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평가절하하는 데 대한 전형적인 파르메니데스의 공격이다. 이해하기가 아주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어 원전과 같다고 (그리스어 원전보다 더 난해하지는 않을지라도)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두 번 읽으면 의미가 통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여신의 요지와 완벽하게 맞아 들어간다: 그것은 ‘이전에 우리의 감각에 들지 않았던 어떤 것도 우리의 지성에 들지 않는다’는 경험론적 원칙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단편 글 16이 1부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1부에서 파르메니데스는 그가 이 단편 글에서 비웃는 이론에 반대하여 자신의 지식론을 언명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2부에서 단편 글 16의 현재 위치는, 그 글을 진지한 친(親)-경험주의적 구절로서 그 단편 글을 오역한 데 기인한다. 그 진지한 친(親)-경험주의적 구절을 우리가 물론 오직 잘못된 2부에 위치시킬 수 있었다) 내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이해되면 단편 글 16은 단편 글 6 가까이에 ㅡ 아마도 B6과 B7 사이에 ㅡ 놓여야 하는데 거기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존재하지 않는 물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득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질문으로부터 당신의 사고를 거두라; 많이 시험된
큰길인 경험이 당신을 억제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리고 당신의
먼눈이나 당신의 막힌 귀나 심지어 당신의 혀가 이 길을 따라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이성만으로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반증으로 설명한
자주 논쟁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Never shall it prevail that things that are not are existing.
Keep back your thought from this way of inquiry;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ighways,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ed ear, or even your tongue, along this way!
But by reason alone decide on the often-contested
Argument that I have expounded to you as disproof.
VII
다른 문제들보다 덜 핵심적인 나의 세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언명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우주론자는 현상의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현상의 세상의 뒤에 있는 세상을 구축한다. (정말로 이것은 비-실증주의적 과학의 방법이거나, 내가 위에서 ‘전통적 방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전통이 그의 위대한 발견에서 최고조에 달할지라도, 전통과 결별한다: 그의 실재적 세상인 진리의 길은 그가 말하는 망상의 세상에 (오류일 따름인) 대한 설명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질문에 다다른다:
(III) 실재적 세상과 (1부의) 망상적 세상 (2부의)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설명은 이제 무엇인가?
답변: 그 관계는 ‘전통적 방식’을 전도(顚倒)한 것의 일종이다. 전체 망상의 세상은 정말로, 그 세상의 총체적 폐지가 ㅡ 그 세상의 망상적 특성을 발견하는 것 ㅡ 발견이자 고도로 중대한 단계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참된 세상을 구축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위대한 계시이다: 빛과 밤(night)이 자체의 망상을 투영하는 화면이다.
이 답변은, 망상으로 이루어진 오류의 세상을 설명하고 그 시의 두 부분을 또한 결합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지닌 세상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기 위하여 1부만을 고찰하면 충분하지 않다: 2부의 망상의 세계는 1부의 이해를 위하여 필요하다. 1부만이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이라는 견해는 그러므로 오류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위대한 발견에서 내가 전통적 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현상의 세상 뒤에 있는 실재 세상을 가설화함에 의하여 현상의 세상을 설명했는데, 그것은 위대한 이오니아인들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방법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 1부와 2부 사이의 관계가 ‘전통적 방식’의 전도(顚倒)라는 이론을 내가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위대한 발견을 이룩했을 때 ‘전통적 방식’을 사용했지만, 현상의 세상이 비실재적이고 거짓이며 망상이나 악몽에 ㅡ 믿을 수 없는 꿈 ㅡ 지나지 않는다고 결정하여 전통적 방식을 전도(顚倒)시켰다.
현재 내가 이 해결책을 ㅡ 전도(顚倒) ㅡ 선호할지라도 모든 것이 한 단어를 해석하는 데 달려있고 아마도 심지어 그 단어의 한 글자에 (이 논문의 부록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달려있음이 분명해져야 한다. 이 단어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버린다면, 혹은 그 단어가 아래 부록에서 제안된 바와 같이 수정된다면 1부와 2부 사이의 ‘전통적 방식’이 유지될 수 있다. 이 경우 파르메니데스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하여 여기 해결책에 설명된 일반적인 전통에서 훨씬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듯하다.
VIII
나는 역사관련 결과들에 대한 비평을 끝으로 이 논문을 끝내겠다.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합리주의적 논박(elenchus)은 ㅡ 움직임의 실재에 대한 논박 ㅡ 파괴적 인상을 끼쳤다. 제논(Zeno),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소피스트들, 심지어 소크라테스와 분명히 플라톤이 그 영향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일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추종자들인 동시에 반대자들은 분명히 원자론을 창안한 사람들인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인데 이 두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우주론에 경험적인 논박을 내놓기 위하여 그의 논박을 전도(顚倒)시켰다:
움직임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부터 안다.
그리하여: 세상은 가득 차 있지 않다;
공간이 있다.
비존재, 무(無)가 정말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존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이고 가득 참과 동시에 무(無)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세상은 ‘원자들과 무(無)’로 구성된다.
그래서 세상은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세상은 원자들의 합성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새로운 물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빛은 실재적일 것이다: 빛 원자들이 (광양자: photons) 있을 것이다. 비실재적인 것은 밤(night)이다: 밤은 단지 빛의 부재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대한 경험적 논박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체의 단계적 수정을 위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이용했다. 나의 의견으로 나중에 ‘이론물리학’으로 불렸고 오늘날에 ‘수리물리학’으로 불리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이 경험적 논박이었다. 표면적으로 터무니없는 파르메니데스 이론의 존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이용되었다. 여기에 이론이 있었고 이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론도 항상 없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하나이자 유일하게 발견학습법적이다: ‘이론을 창안하라! 그 이론은 나쁠 것이지만 당신은 끊임없는 비판에 의하여 그 이론을 수정할 수 있다.’
원자론은, 오류로 판정하는 연역적 논증의 직접적인 결과였던 최초의 물리적 가설이 되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실제로 새로웠던 것은 그의 공리적-연역법이었는데 그 법을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가설적-연역법으로 변환시켜서 과학적 방법론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반(反)-감각주의적일지라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와 아낙사고라스 및 데모크리토스의 세계처럼 자연철학에 ㅡ 사변적 자연과학에 ㅡ 속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론적 서사시는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 한 가지를 띤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신비롭고 오역되고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대신, 이제 명료하고 아름답고 이해가능하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으로 나타난다.
헬리오스에 대한 셀레네의 갈망을 아는 무한한 기쁨을 나에게 주는 것에 대하여 나는 파르메니데스에게 개인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 (DK 28B14-15):
태양빛이라는 선물을 받아,
밤에 빛나며,
지구 주위를 그녀는 배회하네.
언제나 그녀의 응시를
헬리오스의 빛을 향하여 돌리면서.
Bright in the night,
With the gift of his light,
Round the Earth she is erring.
Evermore letting her gaze
Turn towards Helios' rays.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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