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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6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4. 11. 24. 07:20

파르메니데스의 세게 논문 6 (번역 수정본) 초기 그리스 우주론에서 파르메니데싀 시와 그 출처에 대한 주해.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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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6

(번역 수정본)

 

초기 그리스 우주론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와 그 출처에 대한 주해

 

 

1 우주론의 중요성

우리의 서구 문명은 과학에 근거한 문명이다. 서구 문명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갈릴레오(Galileo), 케플러(Kepler) 그리고 뉴튼(Newton)이 설립한 과학에 근거한 문명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케플러(Kepler)와 뉴튼의 과학은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우주론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서구 문명이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진리의, 민주주의의, 정의(正義), 인간애의 그리고 심지어 인간 형제애의 이념을 전수받은 것도 그리스인들로부터였다; 서구 문명의 정치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된 이념들을 전수받은 것도 그리스인들로부터였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서구문학을 그리스인들에게 빚지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과학 및 우주론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문학과 과학 모두는 이야기로, 신화(神話) 만들기로 그리고 특히 우주론적인 신화 만들기로 시작한다.

이야기나 신화 만들기가 구체적으로 인간 언어의 출현으로 인한 초기 결실의 하나라고 나는 제안한다. 자기표현도 의사소통(communication)도 인간의 언어에 고유하거나 특징적이지 않다: 이유인즉 동물 또한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동물들과 의사소통하기 때문이다. 동물이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197358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캔터베리 대학(the University of Canterbury)에서 수행한 헨리 댄 브로드헤드(Henry Dan Broadhead) 기념 강좌.

인간이 언어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태를 기술(記述)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실적이거나 가능한 상황을, 사실적이거나 가능한 사실들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은 최고로 중요하다. 가장 단순한 사건에 대한 심지어 가장 단순한 언어적 기술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도 최고의 업적이고,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상상력이 자극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있는 이야기하기가 발생한다; 아마도 실패에 대한 핑계를 제시하는 이야기들이나, 사냥에서 어떤 성공을 과장하는 이야기들이 발생한다.

이야기하기는 특별히 인간적인 업적으로 보이는데, 참된 이야기와 거짓 이야기를 구별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하여 진리의 문제가 등장하여, 보고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보고서의 진위를 검토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비판적 검토가 없다면 전형적으로 상상적인 설명적 이야기들이나 신화(神話)들로 구성될 과학을 구분해내는 것은 이 비판적 검토라고 내가 제안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문학과 과학은 뿌리가 같다; 문학과 과학은 둘 다 상상하여 설명하는 이야기에, 상상하여 설명하는 신화(神話)에 뿌리를 둔다.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과학에서 비판에 의하여 수행되는 우세한 역할이다: 사실과의 대응이라는 관념에 의하여, 진리라는 규제적 관념에 의하여 지배되는 저 종류의 비판이 수행되는 우세한 역할이다.

가장 중요한 신화 가운데 우주론적 신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를 우리에게 설명하는 신화가 있다. 그리스에서, 초기 철학과 초기 과학을 낳았던 것은 이 우주론적 신화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수정이다.

브로드헤드(Broadhead)가 그렇게 열광적으로 흥미를 지녔던 그리스 비극처럼, 그리스의 우주론적 신화와 초기 그리스 과학은 자체의 주제와 문제를, 호메로스(Homer)와 헤시오도스(Hesiod)의 상상적 운문에서 최초로 상술된 저 사유의 세계들에서 얻는다.

도전적이지만 과장되지는 않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면: 호메로스로부터 초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우주론자들에게로 향하는 단지 2 내지 3단계가 있다: 탈레스(Thales),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에게로, 계속해서 그다음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플라톤, 유클리드(Euclid),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와 아리스타코스(Aristarchus)에게로 향하는 단지 2내지 3단계가 있다. 그리고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와 아리스타코스로부터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케플러(Kepler), 뉴튼과 아인슈타인(Einstein)에 이르기까지 다시 몇 단계만 있다. 그래서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거의 3,000년이 지나서, 우리 문명의 여명기에 존재했던 위대한 신화창조자들이 지녔던 상상적 꿈이 진리를 향한 발걸음이었음을 증명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여기에다 나는 이 발전을 본질적으로 귀중한 것으로서 간주한다고 부언할 것이다: 그 발전이 우리의 정신을 독단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이유뿐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ㅡ 현상의 세계 뒤에 있는 새로운 실재 ㅡ 열어준다는 이유로도 내가 귀중한 것으로서 간주한다고 부언할 것이다. 이것을 나는 모든 기술적 응용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사항일 따름이다. 나는 이제 세부사항으로 왔다.

 

2 땅과 하늘의 발견

더 좁은 의미의 우주론은, 우주의 구조나 평면도를 기술하는 사변적 이론으로 구성된다. 넓은 의미에서의 우주론은 또한 우주기원론을 포함하는데, 다시 말해서 우주 창조와 기원 및 진화에 관한 사색을 포함한다. 예상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주기원론은 초기 우주론적 사색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우주기원론은, 우리의 우주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발견 덕택에, 20세기 우주론에서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 및 그리스인들과 마오리족의 창조 신화 사이에는 두드러진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또한 몇 가지 예기치 않은 차이점도 있다. 이유인즉 신화를 창조하면서 그리스인들과 (E. B. 타일러[Tylor]에 따르면) 마오리족은 땅을 여신(女神)으로 인격화하고 하늘이나 창공을 남성신(男性神)으로 인격화하는 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땅과 하늘을 인격화하면서 반대 성을 부여했다: 이집트 신화는 땅을 신() (Geb)으로 그리고 하늘을 여신 누트(Nūt)로 말한다. 이 성()의 전도(顚倒)는 놀라운데 이유인즉 땅을 여성화하는 일은 지구가 열매 맺기 ㅡ 다른 곳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중요한 기능 ㅡ 때문에 제안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불합리하게 놀라지는 않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을 부여하는 데서 차이점이 그다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어에서, 많은 다른 인도-게르만 언어들과 반대로,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이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과는 별도로, 땅과 하늘에 관한 이야기 중 몇몇은 두드러지게 유사한데 그리스인들과 마오리족의 이야기가 특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헤시오도스(Hesiod)신통기(神統記:Theogony)라는 창조 신화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늘 신() 우라노스(Ouranos)와 지구의 여신 가이아(Gaia)가 포옹한 채 붙어서 마침내 가이아의 아들 크로노스(Chronos)가 그들을 강제로 떼어놓아 그리하여 땅과 하늘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지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는, (타일러[Tylor]에 따르면) 조지 그레이 경(Sir George Grey)100여 년 전 뉴질랜드의 총독이었을 때 마오리 언어로 처음 서술된 마오리족의 창조 신화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 신화는 아마도 그 신화가 지닌 가치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그 신화는 하늘과 땅의 자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늘인 랭이(Rangi)와 땅인 파파로부터라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사물이 나왔지만 하늘과 땅은 {헤시오도스에게서처럼} 붙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의 자녀가 부모를 떼어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부모를 죽여야 하는지 자문을 구했다. 그때 숲의 아버지인

타네-마후타(Tane-mahuta)가 다섯 명의 거인 형제들에게 말했다,

부모를 떼어놓아서 하늘은 우리 위에서 멀리 있도록 하고 땅은

우리의 발아래 놓이도록 하는 것이 낫다. 하늘을 우리에게 낯선

이가 되게 하지만 땅은 우리를 돌보는 어머니로서 우리 가까이에

머물게 하라.’

 

이야기는 지속되면서 흥미롭고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가 모든 세부사항에서 헤시오도스의 더 유명한 이야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더 비판적인 우주론의 심층적 발전을 위하여 이 신화들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땅과 하늘을 인격화하여 인격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중에 확정된 형체가 주어진 물리적 몸체로서 땅에게 신분을 부여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하여 지구의 주위를 선회하는 텅 빈 구형(球形)의 수정(水晶)과 같은 하늘에 관한 이론이 태어났다. 이 단계들이 결코 분명하지는 않지만, 두 단계 모두 우주론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 지구가 확정된 형체를 지닌 ㅡ 예를 들어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바와 같이 원반과 같은 형체를 지녔거나, 혹은 나중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가 수용한 단계에서, 구형(球形)의 형체를 지닌 ㅡ 물리적 몸체라는 것은 더욱 특히 결코 분명하지는 않다. 이유인즉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지구라는 용어는 행성을 ㅡ 물리적 몸체 ㅡ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발아래의 땅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농작물을 생산하는 땅; 그리고 진흙 같은 종류의 물질로 때때로 점토를 닮았지만 마르면 쉽게 부서지게 되는 땅. 전체 지구를 물리적 몸체로서 간주하기를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지구를 여신으로서 인격화한 중요한 창조 신화들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이 단계에 대하여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인격화 즉, 명칭 부여하기이다. 심층적 사색을 위하여 그 대상을 탄생시키는 것은 이것이고, 궁극적으로 ㅡ 그리스에서 ㅡ 비판적 검토를 위하여 대상을 탄생시키는 것도 이것이다. 고대 이집트와 근동에서 이 마지막 단계는 실행되지 않았던 듯하다. A. 윌슨(John A. Wilson)은 다양한 이집트 창조 신화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표면적으로 고대 이집트인이 개의치 않았다고 말한다. ‘이집트인들은 다양한 신화를 수용함과 동시에 그 신화를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고 그는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동일한 고대 문서나 비문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 발견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에서 우리는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또한 발견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다양한 작가들에게 속하고 통상적으로 다양한 시대에 속한다. 초기 그리스 산문 작가 중 한 명인 페레키데스 시로스(Pherecydes Syros), 기원전 550년경에 살았다고 보고되고 지금은 통상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데 헤시오도스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지만 특정 세부사항에서 헤시오도스와 상반되는 지구와 하늘의 결혼 이야기를 서술했다. ‘() 자스(Zas)와 크로노스(Chronos) 및 크토니에(Chthoniē)는 영원했다고 그는 하늘 신() 제우스(Zeus) 대신 덜 흔한 이름 자스(Zas)’를 사용하고 땅의 여신 가이아(Gaia)나 게(Gē) 대신 크토니에(Chthoniē)’을 사용하면서 글을 쓰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크토니에에게 게(Gē)라는 이름이 주어졌는데 왜냐하면 자스(Zas)가 그녀에게 명예의 선물로 지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하늘의 신() 자스(Zas)는 게(Gē)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넓고 아름다운하늘의 외투를 주는데 그 외투가 때때로 지구를 둘러싸는 하늘로서 해석되었다.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하늘과 땅이라는 인격적 신(), ()속하는 동시에 또한 신()에 의하여 인격화되는 대상들인 하늘과 ㅡ 아마도 별 같은 보석이 뿌려진 외투에 의하여 대표되는 ㅡ 땅 사이의 부분적 분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우주론적 모형의 하나로서 기술될 것을 경험한다: 땅은 신()의 결혼 선물이 될 물리적 대상이다; 그리고 땅을 감싸고 있는 하늘의 외투이거나 천막인 빛나는 하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다양하고 특정 면들에서 훨씬 더 풍요로운 우주론적 모형이, 훨씬 앞서서 호메로스(Homer)일리아드(Iliad)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Theogony)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일리아드 8권에서 어떻게 제우스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훼방 놓는 올림포스의 신을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us)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처넣겠다고 위협하는지 우리가 듣는다; 그리고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구덩이는 땅 위의 하늘만큼 저승(Hades) 아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우리가 안다.

창공과 가장 깊은 타르타로스 사이의 중간에서 균형 잡힌 지구에 대한 이 묘사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Theogony)에서 설명되고 상술되는데 신통기(神統記:Theogony)에서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는 땅과 지옥 사이의 거리와 같다; 이유인즉 청동 모루가 아흐레 걸려서 그 거리 중 한 거리를 통과하여 떨어질 터이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된다. 이것은 하늘과 땅 격차의 거대함에 대한 추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늘과 반()-하늘 사이 중간에서 균형 잡힌 지구를 지닌 모형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려고 고안된 이론들이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땅에서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구덩이까지의 거리와 같다는 이론은, 우리가 땅 위에 걸쳐진 것을 보는 텅 빈 궁륭형 하늘에 땅 아래의 또 다른 텅 빈 반구(半球)가 대응한다는 이론으로서 밖에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개의 반구(半球)가 한 개의 완벽한 공동(空洞)의 구형(球形)을 형성하면서 서로 상호보완 작용을 한다는 이론. 이 모형의 한 가운데서 텅 빈 구형(球形)을 두 개의 반구(半球)로 나누어 하나는 땅 위에 다른 하나는 땅 아래 두는 평평한 원통형 원반인 수평적 지구를 우리가 가정해야 한다.

나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기술하는 우주론적 모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나는 그 모형을 현대물리학이 출발하는 기점의 하나로서 안다. 그러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과학자도 심지어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사시인이자 종교적 시인으로서 올바르게 간주된다.

 

3 철학의 시작

철학적 사색은 이오니아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상정된다: 밀레토스(Miletus)의 탈레스(Thales)와 그의 제자이자 친척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상정된다. 그리고 정말로 매우 새롭고 중요한 것이 이 두 사람에 의하여 추가되었다. 그들은 비판적 접근방식 즉, 비판적 전통을 추가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부터 기인하는 우주의 모형과 같은 설명적 신화를 비판적 눈으로 보는 전통. 초기 그리스 철학이나 초기 그리스 과학이 신화 만들기에 추가한 것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새로운 태도라고 나는 제안한다: 비판에 비추어 설명적 신화를 변경하는 태도인 비판적 태도. 합리성으로서 다소 느슨하게 기술될 것의 특징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은, 진리에 더 근접하려는 희망에서 수행되는 설명적 이야기들이나 설명적 이론들에 대한 이 비판적 검토이다. 그리고 이 신화들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고 신화 만들기로부터 과학을 매우 많이 닮은 것으로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발전을 설명하는 것이 이 비판적 검토이다. 이론들은 사색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엄격한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들은 점점 더 큰 등급의 진리유사성을 드러낸다. 이 발전이 설명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비판적 태도가 이오니아 철학파에게 전통이 되었다는 추측에 의해서이다.

탈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그리스 철학의 창시자로서 인정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안에 따르면, 또 다른 호메로스의 전통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라는 호메로스의 신화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바다는 신()들의 최초 아비였고, 그리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 신()들이 물에 의하여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강()의 여신 스틱스(Styx)에 의하여 맹세하는 이유이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술하는 바, ‘매우 오래된 것은 가장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존경을 받는 것은 그것에 의하여 사람이 맹세하는 것이다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이 옳든 그르든, 탈레스에 따르면 물이 만물의 근원이고 땅은 물 위에 떠 있다는 말을 우리가 듣는다. 이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유사한 설명적 신화가 고대 이집트에서 흔했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땅이, 선박처럼, 물 위에 놓여있다는, 혹은 물 위에 떠있다는 이론이다 ㅡ 예를 들어 지진을 설명하려고 고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론.

땅이 바다에 의하여 지탱된다는 탈레스의 이론은 흥미롭고, 순전히 합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론은 심각한 내재적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그 이론은 무한회귀를 유발한다. 이유인즉 그 이론에 의하여 바다는 무엇에 의하여 지탱되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런 이론을 제시하면 ‘{처음 사례에서} 땅 자체에 대하여 제기된 바와 같이 땅을 지탱하는 물에 관하여 동일한 의문이 제기될 것임을 잊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탈레스의 친척이자 제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가 탈레스의 이론에 반대하여 당초에 제기했던 비판일 개연성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이 대담하고 중요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사변적 이론이 최소한도 내가 전에 언급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우주 모형에서 영감을 받았을 개연성도 있다.

이유인즉 아낙시만드로스가 지구는 공중에 떠 있다. 지구를 지탱하는 것은 없다. 지구는 만물로부터 등거리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지속한다고 가르쳤다고 우리가 듣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낙시만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평형 때문에 지구가 정지해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말하는 바, ‘이유인즉 극단까지 평형적 관계를 지닌 중심에 {우주의} 확립된 물체에 아래나 {아마도} 옆보다는 위로 움직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체가 반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지해있다.’

지탱되지 않고 자유롭게 매달려있는 지구라는 이 이론은, 원거리에서 지구에 작용하는 힘의 균형에 의하여 지구가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자체의 대담성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 이론은 뉴튼의 이론 쪽으로 첫걸음이 된다; 그리고 나의 견해로 아낙시만드로스의 대담한 이론이 없었다면 뉴튼을 낳고 뉴튼을 초월하는 과학적 사고의 발전이 아마도 없었을 터라고 우리가 말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으로 향하는 이 숨이 막힐 지경인 단계는, 그렇게 많은 경험론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지구의 근원과 올림포스 신()들의 음모에 대한 상상적 이야기를 지닌 신화적 운문인 호메로스(Homer)일리아드(Iliad)헤시오도스(Hesiod)신통기(神統記:Theogony)에 대한 비판적 수정에 근거했다.

우주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새로운 모형이 구형(球形) 형체를 지구에 아니라 하늘에 귀속시킨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유인즉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의 형체가 자체의 높이는 자체 너비의 3분의 1인 북의 {혹은 짧은 원통의} 형체이기때문이다. (한 가지 나중의 보고서는 지구의 형체가 구형[球形]이라는 교설을 아낙시만드로스에게 귀속시키지만, 이 보고서가 오류라는 것이 지금은 일반적으로 수용된다.) 지구가 원반의 형체가 아니라 구형(球形) 형체를 지니고 있다고 최초로 선언했던 위대한 사상가는, 이 가설을 달까지 확대했고 아마도 모든 천체에 확대했는데, 엘레아(Elea) 출신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였던 듯하다.

 

4 우주론자로서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던 오래된 이오니아의 식민지인 밀레토스(Miletus)에 살았다. 파르메니데스 또한 그리스의 식민 도시국가의 시민이었다. 그의 고향 도시는 엘레아(Elea)로 불리었는데, 남부 이탈리아에 상당히 새롭게 건설된 식민지였다; 그 도시는 기원전 540년에 건설되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아마도 기원전 515년에 태어났는데 이 식민지에서 태어난 1세대에 속했던 듯하다.

초기 철학자들과 우주론자들에 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출처의 단편적 특성 때문에 해결되지도 않고 해결될 수도 없을 것으로 보이는 많은 문제가 있다; 물론 파피루스 기록이 새로 발견된다면 새로운 해결책이 발견될 동떨어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지라도. 초기 우주론의 거장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파르메니데스는 동시에 그의 업적이 아마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로 둘러싸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의 시의 3분의 1이나 심지어 절반이었을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이유인즉 파르메니데스가, 그의 직계 선배 3명이 그랬던 바와 같이, 산문으로 집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운문으로 집필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문체를 모방하여 집필되었는데 그의 언어는 자주 그들을 암시한다. 그 시는 파르메니데스가 여신(女神) 디케(Dikē)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술한다. 여신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그 계시는 두 가지 구별되는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여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진리를 ㅡ 전체 진리를 ㅡ 계시한다: 실재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들의 세계에 관하여 진리를 ㅡ 전체 진리를 ㅡ 계시한다. 2부에서 여신은 현상의 세계에 관하여,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의 망상적 세계에 관하여 말한다. 그녀는 2부의 첫머리에서 이제부터 그녀의 말이, 다른 설명보다 더 진리와 같을지라도, 참이 아니라 기만적이고 심지어 사기성이라고 파르메니데스에게 경고한다.

파르메니데스의 계시를 두 부분으로 이렇게 분리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진리의 길견해의 길로 구별되는데, 파르메니데스의 작품에 관하여 최초이자 가장 큰 미해결 문제를 야기한다. 여신의 계시가, 그녀가 명시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우주에 대한 참인 설명뿐 아니라 참이 아닌 설명도 포함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기묘하고 난해하다. 이것으로 인하여 논평자에게 ㅡ 파르메니데스의 저술을 이해하여, 가능하면 설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ㅡ 핵심적인 문제가 부과된다고 나는 제안한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계시의 두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2부는 의견의 (또한 흔히 견해[doxa]로 불린다) 길로 지칭되는데 참이 아닌 것으로서 그래서 기만적인 말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여신 자신에 의하여 기술되고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을 설명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고도로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2부가 강력하게 이원론적일지라도, 다소 전통적인 노선 위에 있다: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하나의 건축자재를 상정(想定)하는 대신, 파르메니데스는 현상의 세계이자 우리의 평범한 세계인 부단히 변화하는 세계이며 죽은 운명인 인간의 세계에 건축자재의 이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에 두 가지 건축자재가 필요한데, 그 자재는 (night)’으로 지칭된다. 위 논문 4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그는 이 변화의 세계에 있는 만물이 빛과 밤의 혼합물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가정한다. 이 혼합물로부터 지구와 천체가 필연의 여신인 아난케(Anankē)의 감독을 받아서 발생하며, 아난케는 모든 것을 조종한다고 언급된다.

여신의 계시 중 2부인 견해의 ㅡ 죽을 운명인 인간의 습관적 견해의 ㅡ 길은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아마도 피타고라스(Pythagoras)와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선배의 노선을 다소 따르는 우주론이다; 그러나 그 2부는 지구가 공 모양이라는 교설과 달에 대한 이론과 같은 중요한 독창적인 관념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계시의 1부인 진리의 길은 독창적일 뿐 아니라 혁명적이기도 하다. 1부가 그렇게 독창적이고 대담하여 그 이론이 몇몇 비평가들에 의하여 미친 짓에 근접하는 것으로서 기술되어 철학사에서 독특하다고 언급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은 1부가 우주론적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1부가 우주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오류다. 2부인 견해의 길이 우주론이라면 1부도 틀림없이 그렇다; 이유인즉 분명히 파르메니데스가 여신의 계시인 이 두 부분을,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반대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1부를 실재에 관하여, 실재적 세계 질서인 실재적 우주에 관하여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리고 2부를, 현상의 세계를 ㅡ 죽을 운명인 인간에게 나타나는 바와 같은 세계 ㅡ 기술하는 기만적 견해를 보고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나는 진리의 길이 우주론을 포함한다고 제안한다: 견해의 길은 진리를 기만적으로 닮은 것으로 밝혀지는 것을 기술하는데 그 닮은 것은 진리에 훨씬 미치지 못하여 망상으로 기술될 것인 반면 진리의 길은 실재적 우주인 세계의 실재적 질서에 관한 실재적 진리를 밝힌다.

1부인 진리의 길에 계시된 우주론은 간단하지만 냉혹하다: 그것은 죽은 세계이자 변화도 움직임도 없는 우주다. 이 우주는 완벽하게 동질성이자 구조가 없는 아주 둥근 하나의 구형 덩어리로 구성된다. 이 우주에는 부분이 없다: 그 우주는 하나다. 그 우주에는 기원이 없고 그리하여 우주기원론도 없으며 그 우주는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며 항상 변화도 없고 색깔도 없이 정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진리의 길이라는 교설은 파르메니데스 이전 모든 우주론과 또한 파르메니데스가 진리의 길과 대비시키고 싶어 하는 견해의 길이라는 우주론과 완벽하게 다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밝히는 진리의 길이라는 교설이, 우주론적 전통과 공유하는 몇 가지 측면이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의식적으로 실재와 현상을 대립시켜 변화하는 현상 뒤에 변화하지 않는 참된 한 가지 실재를 의식적으로 상정(想定)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선배들 또한, 덜 급진적이고 아마도 의식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매우 유사한 차별성을 이용하여 암묵적으로 사색했다. 탈레스(Thales)는 만물이 이라고 말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이나 원리인 아르케(αrchē)가 무한하고 비확정적인 것인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그 원리가 공기라고 말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숫자라고 말했고 아마도 우주의 원리는 숫자 1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것들을 언급하면서 그들 각자는 현상 뒤에 있는 숨겨진 참된 실재를 상정했다. 이것으로 인하여 파르메니데스가 밝히는 진리의 길이, 파르메니데스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선배들보다 더 급진적일지라도, 우주론적 전통의 과정을 따름이 밝혀진다.

유사한 언급이 일원론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방금 언급된 파르메니데스의 모든 우주론적 선배들은 일원론자들이었는데, 이원론자였을 피타고라스는 제외가 가능하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일원론에서 자신의 선배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을지라도, 역시 일원론자였다; 그는 자신의 선배들을 그 선배들의 이론체계가 진정으로 일원론적이 아니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듯하다: 논리적으로 그 선배들의 이론체계가 견해의 길에서 여신이 그러는 바와 같이 최소한도 두 가지 원리를 ㅡ 빛과 밤(night)처럼 ㅡ 이용하여 작동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듯하다.

다르고 아마도 더 중요한 요점은 이렇다. 여신은, 진리의 길을 계시함에 의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이 또한 묵시적으로 조우했던 문제이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핵심적 문제로서 기술될 문제인 변화의 문제에 대하여 해결책을 묵시적으로 제공한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ㅡ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물체는 자신의 정체를 잃지 않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물체가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다면 그 물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체가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다면 그 물체는 더 이상 변화한 물체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해결책은 안정된 물체는 없다는 것과, 표면적인 모든 물체는 화염처럼 실제로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직 변화만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해결책을,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했던 듯하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해결책은 매우 급진적이고 진리의 길에서 여신에 의하여 자신에게 계시되는데, 변화는 망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변화는 없다. 그리하여 진리의 길에 의하여 우주론적 전통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다. 변화하지 않는 덩어리 우주라는 이론이 한 가지 우주론이다.

 

5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론자가 아니었다

많은 철학자는 오늘날 존재론 즉, 존재에 대한 이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많은 철학자는 존재론을 파르메니데스에게 귀속시킨다. 나는 존재론 즉, 존재에 관한 이론과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론이 파르메니데스에게 진지하게 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가 있을 리 없다와 같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 아닌 명제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있는 (존재하는) 것만 있다 (존재한다)’와 같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명제로부터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 아닌 명제를 도출함에 의하여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 아닌 명제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 아닌 명제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명제로부터 유효하게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오늘날 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처럼, 존재론을 존재에 관한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으로 우리가 지칭한다면 그런 존재론은 공허한 이론이고 그 공허한 이론으로부터 흥미로운 것이 도출될 수 없다: 공허하지 않은 존재론의 불가능성은 내가 파르메니데스의 대담한 노력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해야 하는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결론을 도출하지 않을지라도, 파르메니데스가 실제로 존재에 관한 언어적 논증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변화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우주론적 문제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지녔던 문제를 우리의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우주인지 혹은 죽은 덩어리 우주인지에 관한 문제로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being), 혹은 존재(being)’라는 단어의, 아니면 연결사 이다(is)’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에 관한, 우리의 우주에 관한 문제이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가 본질적으로 우주론자였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그리고 그가 존재론적논증을 이용한 한, 그는 그 논증을 다만 우주론적 결론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도구로서 이용했다. 그의 도구가 이것을 혹은 다른 결과를 성취하기에는 무력했다는 것에 의하여 그의 존재론이 지닌 취약성이 강조될 따름이다. 그러나 존재론이 흥미로운 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라도 존재론이 파르메니데스의 핵심적 관심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효한 이유가 아닐 터이다: 존재론은 그에게 여전히 단지 우주론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도구였다.

 

6 파르메니데스의 새로운 지식론

찰스 칸(Charles Kahn)이 강조하여 논증한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주요 업적을 지식에 대한 새로운 길의 발견으로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업적을 오늘날 지식론 즉, 인식론으로 지칭되는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것은 또한 방법론으로 지칭될 것이다. ‘방법이라는 단어는 물론 methodos로부터 (metαhodos로 구성된) 유래하여 탐구의 길(a way of search)’이나 연구의 길(a way of inquiry)’을 의미하는데, 그의 시에 적어도 9번이나 등장하는 용어로 파르메니데스가 정확하게 (hodos)의 의미로 사용하여 여신이 밝히는 계시의 두 부분에 대하여 진리의 길견해의 길로 제시했던 것이다.

지식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 문제는 항상 의심으로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주장들의 근거가 충분히 확립된 것이 아니라는, 그 주장들이 불충분한 이유들에 근거한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문제는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특히 지식에 대하여 상반되고 경쟁하는 주장이 많이 있을 때 발생한다. 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상반되는 이야기들은 충돌의 의식 없이 이집트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비판적인 정신을 지닌 그리스 우주론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우주 이론가들의 상반되고 통상적으로 독단적인 많은 주장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야기했다: 이 상반되는 이야기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어느 이야기를 우리는 선호해야 하는가?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지식의 문제에 관여했다는 징표가 있다. 결정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권위를 지닌 개인적인 특성이라고 그가 주장했던 듯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마치 자신들이 잠을 자는 것처럼행동할 뿐 아니라 생각하고도 있는 반면, 오직 신()들만이, 그리고 신 다음에 최고의 인간만이 ㅡ 선택된 사람들(the elite) ㅡ 진짜 지식이나 지혜와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듯하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 이전에 가장 중요한 지식론자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였다. 크세노파네스는 대중적인 신학에 의문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의문을 표시한) 표시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창조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신()들을 인간으로 변형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신론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하나의 신을 인간 및 전통적인 신들과 전혀 다른 독특한 존재로서 ㅡ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사용하면 일종의 움직이지 않는 동력자로서 ㅡ 기술하려는 시도를 발전시켰다. 동시에 우리가 신들에 대한 확실성 및 세계에 대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지닌 지식 모두가, 그 자신의 지식을 포함하여, 추측으로 남는다고 그는 또한 지적했다. 이 요점을 추적하기 위하여 아마도 크세노파네스의 시 몇 행을 내가 번역한 것을 나는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들에 관하여서도 그렇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그렇다.

그리고 우연히 사람이 최종적인 진리를 발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것은 추측으로 짜인 그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final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내가 여기서 추측(guesses)’으로 번역한 단어는 dokos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파르메니데스가 쓰는 용어 doxa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doxa라는 용어는 통상적으로 견해로 번역되고, 심지어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도 추측이나 추측 작품으로서 번역될 개연성이 높다.

크세노파네스로부터 인용된 운문은, 우리의 주제에 관해서뿐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 관해서도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운문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인즉 내가 그 운문에서 나 자신의 지식론에 대한 일종의 선례를 보기 때문이고, 그 선례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과학적 이론은 신화, 크세노파네스의 말로써, ‘추측으로 짜인 그물이다. 과학적 이론은, 비록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진리와 같아질지라도,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거나 가설적으로 남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미지의 것에 ㅡ 숨겨진 실재에 ㅡ 점점 더 낫게 근접할지라도. 그러나 심지어 이 견해도 크세노파네스가 선례를 남겼는데 크세노파네스는 다음 운문 때문에 기억된다:

 

()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워서 사물을 더 잘 알 것이다.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u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we may learn, and know things better.

 

이제 진리의 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이 완벽하고 확실한 진리의 (크세노파네스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했던) 신적(神的) 계시 형태를 띰을 고려하면 파르메니데스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도로 비판적일지라도 때때로 독단론으로 틀림없이 기울었던 듯하다. 아마도 심지어 그가 당초에 크세노파네스보다 자기비판으로 덜 기울었다고 우리가 상상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의 길에 상당히 참신한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와 이 상상을 우리가 결합한다면 파르메니데스가 처음에 견해의 길이라는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을 구축하여 수용하였다가 나중에서야 그것을 의심하게 되어서 마침내 그것을 망상적이고 기만적인 것으로서 배격했을 개연성이 있는 듯하다. 그의 의심으로 인하여 그는 우주론에서 지식론에 도달하였다고 우리가 상상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우주론이 단지 망상적 견해나 추측(doxa)이라고 확신하게 되어서 그는 진리의 길 즉, 진정한 지식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이 길은 궁극적으로 여신에 의하여 그에게 계시된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렇다: 지식의 길 탐구에 의하여 어떻게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이 주장하는 움직임이 없는 덩어리 우주라는 기묘한 이론에 이르렀는가?

그가 걸어간 주요 단계를 우리가 재구축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째 단계는, 이 재구축에 따라서, 진정한 지식과 단지 추측이나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진정한 지식은 단순한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에 도달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진정한 지식에 무엇이 필수적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답변은 진정한 지식이란 참된 것에 대한 지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참된 믿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그 이상의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흔들릴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있는 신념인데,참된 신념이 {정당화될 수 있고 확실한} 전혀 없는 인간이 지닌 견해{불확실하고 흔들릴 수 있는} 반대가 된다. 우연히 진리와 조우할지라도 우리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단지 추측하고 있다고 (정말로 크세노파네스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옹호하여 충분한 이유유효한 논증을 충분하게 내놓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지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장이 논증에 의하여, 이성에 의하여 정당화되거증명될 수 있다조건으로만 우리가 지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식은, 전적으로 신뢰될 수 있고 정말로 확실해야 하는데, 확실한 전제로부터 추론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두 번째 단계로 그가 진리를 증명 가능한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에서 그는 현대적 직관주의[直觀主義: intuitionism]의 선례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진리와 조우할 것이라고 가르쳤던 크세노파네스로부터 그는 이탈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단계는 증명 가능한 진리에 대한 합리적 지식과,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습득된 기만적인 사이비-지식과 같은 소위 모든 다른 지식을 예리하게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지성주의(知性主義: intellectualism) ,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확립되고 그는 경험을 거부하게 된다. 경험은 단순히 견해나 습관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거부된다: 참이 아닌 사이비-지식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거부된다. 경험과 습관 및 견해는 확실하증명 가능한 진리를 결코 낳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참이 아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지식에 대한 요건은 합리적 방법, 논리적 방법, 증명의 방법에 대한 요건이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전환의, 계시의 특징을 지닌 단계에 의하여 합리적 방법을 이렇게 요구하는 데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신이 파르메니데스에게 주었던 시 몇 행을 번역하겠다; 여신이 파르메니데스에게 경험과 감각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시: 눈과 귀와 혀라는 감각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시; 그리고 여신이 이성을 예찬하는 시.

 

... 경험인 많이 시험된 습관으로 하여금 너를 옥죄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너의 먼 눈이나 막힌 귀나 심지어 너의 혀가 이 길을 따라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오직 이성에 의하여 내가 여기서

너에게 반증으로서 설명한 흔히 논쟁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abit,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ed ear, or even your tongue, along this way!

But by reason alone decide on the often-contested argument

Which I have here expounded to you as disproof.

 

다음 단계는, 사태가 실재적인 사실이라는 조건으로만 그 사태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태를 수 있다는 칸(Kahn)에 의하여 해설된 논지를 낳는다. 또는, 파르메니데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이유인즉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중일 수 있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For, what can be known is the same as what can be existing.

 

그리하여 자체의 본질에서 진정한 지식이란 반드시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한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도달한다: 알려질 수 있어서 틀림없이 반드시 존재하는 이 물체에 대하여 우리는 이성에 의하여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

물론 파르메니데스가 실제로 말한 것을 발견하여 원문을 재구성하여 이해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명백한 결론으로부터, 그가 자신의 주요 단계들에 관하여 내놓는 몇 가지 암시로부터 그의 주요 논증을 재구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진리의 길에 있는 연역적 증거가, ‘그것(It)’이 알려질 수 있는 물체로 아마도 유형적(有形的) 물체인 그것은 이다(It is)’그것이 사례다(It is the case)’ 혹은 그것은 존재한다(It exists)’와 같은 관념으로 시작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이다(is)’존재하다(exists)’, 결론에 비추어, 유형성(有形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연역적 증거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나 분석적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서 재구축될 것이다 (논리 속의 증거가 그러해야 하는 바와 같이). 재구축은 다음과 같다.

 

전제: 오직 참으로 사례인 것만이 (알려지는 것과 같이) 사례가 될 수 있으며,

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첫 번째 결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두 번째 결론: ()나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세 번째 결론: 세계는 가득 차 있다: 세계는 분리가 없는 연속적인

덩어리이다.

네 번째 결론: 세계는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여신의 우주론인 덩어리 우주 이론이 그녀의 진정한 지식론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여기서 내가 오류로 간주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지식론 중에서 두 가지 교설을 내가 아마도 언급할 것이다. 그 교설들은, 두 가지 교설 모두가 그의 논증에서 한 가지 역할을 정말로 수행하고 플라톤의 철학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수행할지라도, 그의 논증에 필수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 교설은 그가 진리를 확실하고도 증명 가능한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지식(epistēmē)과 그리고 브로우어[Brouwer]의 진리 개념과 동일한 듯하다.) 내 견해로 이것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도달한 입장로부터의 퇴행인데 크세노파네스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도 우연히 진리와 조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오류로서 간주하는 두 번째 교설은, 참이고 불변하는 실재에 진정한 지식이 대응한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현상들에 추측이나 견해가 대응한다는 교설이다. (이 교설은 파르메니데스에게서보다 플라톤에게서 더 명시적이다.) 반대로 우리는 현상 뒤에 있는 참인 실재를 추측(doxa)의 ㅡ 상상이나 가설의 (예를 들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실행하는 바와 같이) ㅡ 방법과 비판의 방법에 의하여 접근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추측과 논박의 방법에 의하여.

처음에 보기에 움직임이 없는 덩어리라는 이론은 정말로 거의 미친 이론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이론이 물리학의 진보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는 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7 파르메니데스와 과학의 방법

현대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적어도 세 가지 지속적인 업적을 이룩한 공적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 그는 논증의 연역적 방법을, 그리고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지금 지칭되는 가설-연역적 방법(the hypothetico-deductive method)을 발명한 사람이었다.

(2) 그는 변화하지 않는 즉, 불변하는 것이 자기-설명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그리고 불변하는 것이 설명에서 출발점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강조함에서 옳았다. 이 강조로 인하여 (메이에르송[Meyerson]이 논평한 바와 같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나 운동량 보존의 법칙과 같은 보존 원리에 대한 탐구와, 또한 자연에 대한 이론이나 법칙을 수학적 방정식의 형태로 제시하는 방식이 태어났다: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물체는 어떤 물체와 동일하게 남는다; 어떤 숨겨진 규모는 특정 변형과 관련하여 불변한다.

(3)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소위 물질 연속성 이론의 시작이었으며 우주론 학파이자 물리 학파의 시작이었다. 물질 연속성 이론으로 시작하여, 물질론에서 파르메니데스 이론과 원자론 학파와의 지속적인 적대관계가 슈뢰딩거(Schrödinger)와 현대의 양자장() 이론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구조라는 문제의 해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나아가 파르메니데스의 관념들이 또한 논박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깨닫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유인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을 요점--요점으로 논박하여 자신들의 교설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 원자론자이자 우주론 학파인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간접적인 선구자로서 파르메니데스를 우리가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연역적 이론체계를 가설-연역적 이론체계로 변환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연역적 이론체계를 오류로 판정하였다.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연역이 지닌 유효성을 수용하였고 또한, 존재하는 것은 자연에서 유형적(有形的)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함축적 상정(想定)을 일부 수용하였다: 그들은 가득 차고 분리 불가능한 몸체들의 존재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교설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임이란 불가능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 지닌 진리를 합당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 지닌 허위성으로부터 파르메니데스의 전제가 지닌 허위성까지 논증하면서 파르메니데스가 내놓은 증거를 단계별로 논박하는데 다음과 같다:

 

(4') 움직임이 존재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3') 그리하여 세계가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세계가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거대한 덩어리라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하여 가득 차고 유형적(有形的)인 물체나 작은 덩어리가 많으며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많은 원자들이다.

(2') 오직 가득 찬 것만 존재한다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빈 것, 공간

또한 존재한다.

(1') 그리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공간이 정말로 존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가득 찬 것뿐 아니라 빈 것도 존재한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원자들과 공간이다.

이것은 연역적 이론체계에 대한 최초의 논박 즉, 반증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론물리학의, 혹은 심지어 일반적인 과학적 이론화의 시작을 표시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의 길과 함께 물질 연속성 이론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물질의 불연속성 이론인 물질 원자론의 할아버지로 언급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대한 비평자에게 핵심적인 문제로서 내가 이전에 기술한 것을 토론하는 데로 나는 이제 선회한다.

 

8 기만적인 견해의 길이 왜 여신의 계시에 포함되는가?

파르메니데스에 관하여 최고로 박식하고 최고로 천재적인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인 찰스 칸(Charles Kahn)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은 시의 2부에 제시된... 우주론의 당혹스러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을것이고, 자신은 파르메니데스의 원리에 근거하여그 문제는 실제로 해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이 절망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같은 것을 시도하겠다.

지식의 영역에 열쇠를 쥐고 있는 여신은 왜 자신의 계시에 참이 아니며 심지어 사기적인’ (그녀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것을 포함시키는가? 그리고 그녀는 견해의 길이라는 기만적인 형태(deceitful pattern)’를 왜 만들어내는가?

나는 이 문제에 밀접하게 관련된 세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나의 첫 번째 답변은 매우 간단한데,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시 2부에서 여신을 자신의 화자(話者)로 삼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 답변은 이렇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새롭게 구분된 양편에 무게를 싣지 않고서 실재현상 , 진리의 길과 견해의 길 사이의 격차를 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참인 실재의 세계를 기술할 뿐 아니라 기만적인 현상의 세계를 또한 기술해야 했다.

두 번째 답변은 이 새로운 구분과 파르메니데스가 들어본 적이 없는 실재의 세계를 기술한 것이 정말로 여신만이 답변할 수 있었던 문제를 즉각 제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 문제를 의미한다: 이 변화가 없는 덩어리가 실재의 세계라면, 어떻게 망상적 현상의 세계가 출현했는가? 이것이 정확하게 여신이 견해의 길에서 우주기원론과 함께 답변하는 문제이다.

세 번째 답변이자 세 가지 답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답변은, 여신이 진리에 대한 그 높은 등급의 근사치 때문에 견해의 길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 길의 커다란 진리 유사성(truthlikeness) 때문에 견해의 길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답변은 인간의 세계인 현상의 세계가 지닌 질서나 배열에 관한 여신 자신의 말에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말에) 근거한다. 이유인즉 여신이 현상의 세계에 대한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을 토론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전적으로 진리처럼 보이도록 배열된 저 세계에 대하여

너에게 말하겠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인간의 개념에 의하여 길을 잃지 않으리라.

 

Now of that world so arranged to seem wholly like the truth I

shall tell you;

Then you will be nevermore led astray by the notions of

mortals.

 

이 시를 해석하면서 내가 eoίκotα pαntα전적으로 진리처럼 보이는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파르메니데스가 크세노파네스의 용어사용법을 이용하여, 헤시오도스(Hesiod)신통기(Theogony)를 암시하고 있다는 추측에 나의 해석을 나는 근거시킨다. 신통기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시 속의 여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뮤즈 신()들이, 헤시오도스에게 자신들이 진리를 계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진리를 닮거나 진리와 같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자체의 용어사용법에서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의 일종의 가교를 형성하는 크세노파네스의 단편 글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추측할 것과 같이, 진리를 닮는다,

 

This, as we well may conjecture, resembles the truth,

 

여기서 진리를 닮는다(혹은 진리와 같다’) eoίκotα toίs etumoίsί라는 표현을 번역한 것인데 그 표현은 부분적으로 헤시오도스의 용어사용법과 부분적으로 파르메니데스가 나중에 사용한 용어사용법을 이용한다.

여신이 막 기술하려는 현상의 세계가 전적으로 진리와 같은 듯하고 그리하여 인간이 말하는 전통적 이야기들보다 (혹은 신화들) ㅡ 그로 인하여 인간이 쉽게 길을 잃는 이야기들보다 ㅡ 더 진리와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이 두 행을 해석한다. 그리하여 여신은, 자체의 진리 유사성(truthlikeness) 때문에 ㅡ 오늘날 우리가 말할 것과 같이 진리에 대한 그 이야기의 근접성 ㅡ 기만적인 이야기인 견해의 길을 이야기하겠다고 여신이 말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래서 여신이 전적으로 옳다고 내가 제안한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견해의 길은 정말로, 여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세 가지 의미에서 거짓이지만 진리와 같은 이야기요 신화이다.

(1) 무엇보다도 현상은 참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은 틀림없이 어떤 정도 진리를 닮는다.

(2) 두 번째, 견해의 길은 거짓이지만 여하한 시대의 거의 모든 최고의 과학이론이 거짓이지만 진리 같음과 동일한 의미에서 진리 같다. 그 과학이론 대부분은 거짓인데 통상적으로 비판적 과학방식에 의하여 향상될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는 상상적으로 과도한 단순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학이론들은 적어도 앞선 이론들보다 진리에 나은 근사치들이라는 정도까지 진리와 같다. 이 모든 것은 견해의 길에 나타나는 우주론에도 적용되는데 그 우주론은 적어도 지구의 형체에 대한 이론에서 그리고 달의 상()에 대한 이론에서 앞선 이오니아인들의 우주론을 대체했다.

(3) 견해의 길이 진리 같다는 세 번째 의미는 더욱 구체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견해의 길은 몇 가지 면에서 그가 말하는 진리의 길을 닮았고 그래서 견해의 길은 심지어, 초기 우주론들이 공언한 일원론에도 불구하고, 초기 우주론들보다 더 밀접하게 진리의 길을 닮았다고 언급될 것이다. 비록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견해의 길이 엄격하게 이원론적일지라도, 예를 들어 4원소와 같은 다른 다원론적 이론체계보다 역시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진리의 길이 의미하는 엄격한 일원론에 더 가깝다. 현상의 세계에 대한 어떤 설명도 진정으로 일원론적이 될 수 없다고 파르메니데스가 제안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빛과 밤[night]이라는 이원론을 조금 닮은 장[: field]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은, 아인슈타인의 대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물리학에서 대체되지 않았다고 언급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길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은 견해의 길에서 지구와 달 그리고 특히 하늘의 구형성(球形性)이 수행하는, 그리고 진리의 길에서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구형(球形)의 덩어리 우주가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더욱이 구형(球形) 하늘과 구형(球形) 덩어리 우주 모두는 필연의 여신 아난케(Anankē)가 지닌 방추에 묶여 있다. 마지막으로 견해의 길에서 빛과 밤(night)이 수행하는 역할과 진리의 길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수행하는 역할 사이에 대응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이 토론된 견해에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의미보다 진리 유사성이라는 두 번째 의미가,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시에 견해의 길을 포함하기에 훨씬 더 많은 강력한 동기를 파르메니데스에게 부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과학적 발견이, 특히 지구의 구형성(球形性)과 달에 대한 이론이 여신의 말에 포함될 정도로 충분히 중요하고 진리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옳았다고 나는 제안한다.

왜 견해의 길이 여신의 계시에 포함되어 있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여기에 제시된 해결책은, 여신이 견해의 길을 참이 아니고 거짓이며 기만적인 것으로서 배척하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견해의 길은 (심지어 내가 그 길을 해석하는 바와 같이) 자체를, ()의 선언으로서 위험할 정도로 기만적으로 만들 정말로 실제로 거짓인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 아니다; 또한 심지어 견해의 길이 사실적으로 참인 현상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내놓는 데 정말로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견해의 길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 혹은 증명 가능하 참인 것과, 다시 말해서 파르메니데스가 의미하는 바의 참인 것과 매우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견해의 길은, 가령 진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이나 현대적 관점에 대해서보다,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했던 진리에 ㅡ 즉, 증명 가능한 진리 ㅡ 대하여 훨씬 더 강력하게 대비된다. (이 견해는, 그 견해에 따라서 진리가 단지 사실들과의 대응일 따름인데, 앞에 인용된 글에서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완벽한 진리와 조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크세노파네스에 의하여 또한 함축적으로 주장되었던 듯하다.) 이 현대적 견해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와 다른데 파르메니데스에게 진리는 참되고 확실한 지식으로 전적으로 신뢰될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전에 내가 말한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에게 진리가 증명 가능한 진리에 한정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추측은 지식이 아니라 견해에 지나지 않고 그리하여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는 표현으로 기술할 모든 것이 또한 견해이다; 증명될 수 없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의미에서 참이 아니고, 그것은 지식이다라는 모든 주장은 기만적이다. 이제 우리가 가정해야 할 유일한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종류의 단순한 견해가 진리에 더 가까울 것이거나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을 것 혹은 더 진리와 유사하거나 진리와 덜 유사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라고 내가 주장한다. 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그는 용기를 얻어 여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로운 신화인 자신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계시하도록 ㅡ 그러나 경고와 함께 ㅡ 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대하여 제안된 번역을 뒷받침하여, 나는 아마도 몇 가지 흡사한 사례를 언급할 것이다. 첫 번째이자 가장 명백한 사례는 에르의 신화(the Myth of Er)티마이오스(Timaeus)와 같은 몇 가지 신화의 저술가인 플라톤인데, 그는 이 신화들이 기껏해야 진리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믿기에 실제로 옹호될 수 없지만 자신들이 억제하지는 않았던 중요한 발견을 이룩하였던 몇 명의 위대한 현대 과학자들이 또한 있다. 나는 뉴튼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슈뢰딩거(Schrödinger)를 언급하겠다. 뉴튼의 중력이론은 원격 작용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나 뉴튼 자신은 원격 작용을 매우 큰 어불성설이어서 철학적 문제에서 유능한 사고 기능을 지닌 사람은 그 속에 빠질 수 없다고 내가 믿는 것으로서 배척했다. 이것은 억센 ㅡ 파르메니데스가 발견한 것을 비난하여 여신이 사용한 말보다 아마도 훨씬 더 억센 ㅡ 말이다. (뉴튼은 이 난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신성[神性]과 공간의 편재[遍在]에 대한 이론으로 ㅡ 아마도 진리의 길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관념 ㅡ 선회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더 만족스러운 이론에 대한 근사치로서만 간주했다: ‘실제로 현재의 이론은... 단지 제한적인 경우로서만 유효{하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시간-독립적인 동시에 시간-종속적인 파동방정식의 발견자인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시간은 망상이며, 시간과 함께 변화와 죽음의 세계도 망상이라고 믿었으며 참된 실재 세계는 시간이 없고 죽음도 없는 정신적 통합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뉴튼, 아인슈타인, 슈뢰딩거도 이 과학적 발견을 억제하지 않았는데 그 과학적 발견을 뉴튼은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아인슈타인은 단지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서, 그리고 슈뢰딩거는 파르메니데스적 망상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들이 내놓는 이유들은, 파르메니데스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는 견해의 길에 기술된 발견을 억제하지 않도록 하는 이유들과 흡사했다. 파르메니데스와, 가령 슈뢰딩거 사이의 차이점은 이런 면에서 뉴튼 이래 과학이 (= 견해) 성공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버리기가 덜 쉬워졌다는 것일 따름이다.

이제 나는 파르메니데스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로부터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덜 중요한 심리학적 추측으로 선회하여, 그 추측을 그의 시에 대한 몇 가지 가능한 영감의 근원으로서 간단하게 토론하고 끝내겠다.

 

9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심리학적 추측

왜 견해의 길이 계시에 포함되었는가?”라는 핵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제안이 수용될지라도,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난제들이 남는다. 한 가지 난제는, 견해의 길에서 파르메니데스가 만물이 혼합에 의하여 생성되는 원리나 원소로서 빛과 밤(night)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색깔들이 빛과 밤의 혼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괴테(Goethe)의 색채론에서와 같이, 백색과 흑색의 혼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밀접하게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의 세계인 현상의 세계가 언어적 규약으로부터 발생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흥미로운 제안이다. 이제 자연규약의 대립과 그 대립을 진리거짓의 대립과 등치시키는 것은 그리스 사상에서 전통적이고, 비록 그 대립이 자체의 권위적인 언명을 파르메니데스의 동시대인인 핀다로스(Pindar)로부터 받았을지라도 파르메니데스 자신과 함께 발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파르메니데스의 용어사용법이 아주 다르고 그가 사용하는 대립하는 것들이 (증명 가능한 진리와 견해) 전통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인 자연규약보다 서로 더 급진적으로 대립될지라도 그 대립 자체의 권위적인 언명은 파르메니데스 자신과 함께 발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파르메니데스가 기술하는 대립하는 것들이 기묘하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나 실재의 세계와, 심지어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의하여 창조되는 거짓 세계인 현상의 세계 사이의 대립을 사용한다: 인간의 명칭부여에 의하여, 인간의 언어를 형성하는 주로 자의적인 규약들에 의하여 창조되는 거짓 세계인 현상의 세계 사이의 대립을 사용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이 지닌 이 기묘한 측면과, 우리의 세계인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실재에 관한 그의 의심과 연관된 문제에 심리학적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그것들은 프로이트(Freud)가 아마도 신경증(Neurosis)으로서 ㅡ 프로이트가 실재 원리(reality principle)’로 지칭한 것에 대한 배척으로서 ㅡ 기술했었을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니고 심지어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기술이 주로 규약이나 창조에서 ㅡ 정말로 매우 영향력이 있는 규약 ㅡ 기인하는 것으로서 정말로 간주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비록 내가 정신분석학자들의 정신분석에 반대하지 않을지라도) 정신분석을 하는 철학자들이나 시인들의 여전히 다소 유행하는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1969년 캔터베리(Canterbury) 출신으로 나의 대학원 제자였던 노엘 브래들리(Noel Bradley) 박사가 나에게 전해 준 괴테에 대한 제안에 감명받았는데 나는 그를 1937년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에서 처음 만났다. 괴테가 아마도 완전히 색맹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색채는 백색과 흑색의 혼합이라는 ㅡ 다시 말해서 모든 색깔은 회색조라는 ㅡ 괴테가 말하는 색채론의 기묘한 이론이 설명될 것이라고 그가 제안하였다. 브래들리는 또한 임상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경험에서, 색맹으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의 실재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가 채택될 것임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인간의 신뢰성에 불신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자의적인 규약의 강력한 요소를 포함한다는 믿음이 발생한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모든 것은 아주 합당한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파르메니데스 역시 완전한 색맹이었을 것임을 나에게 암시했다. 이 추측은 조악할 뿐 아니라 물론 실험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 추측은 또한 파르메니데스를 해석하는 문제를 푸는 데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추측은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들어맞고 예기치 않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파르메니데스는 진리의 길에서 색깔을 단 한 번만 언급하는데 그 진리의 길에서 움직임이라는 변화와 색깔의 변화는 비실재적이라고 그래서 그것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자 더 정확하게 규약적인 명칭 부여하기인 규약적인 단어 사용으로부터 출현하여 규약이라고 자신이 말한다. 게다가 파르메니데스의 지식론은 물론 색깔이 비실재적임을 의미하는데 파르메니데스에게 언어적 규약으로 이루어진 비실재적 세계인 시각적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색깔이 비실재적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의 길 바로 앞부분에서 망상의 세계가 빛과 밤(night)(한 가지만이 ㅡ 무거운 물질로 구성된 어두운 세계 ㅡ 실재적인 반면, 두 가지를 실재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수용하거나 인간이 규약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산물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지는, 색깔은 (만약 어떤 것이라면) 색맹인 사람에게 보일 것과 같이 흑색과 백색의 혼합임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심리적이거나 더 정확하게 생리학적인 추측의 가장 암시적인 측면은, 그 추측으로 인하여 경험의 세계를 향한 파르메니데스의 양면적인 태도에 대한 심리학적인 배경이 설명될 터라는 점이다: 경험의 세계를 그가 여신의 계시에 포함함과 동시에 그가 경험의 세계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 동시에 자신이 기만적인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엄숙한 경고를 내놓는 여신.

 

10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대한 이 주해의 요약

내가 보기에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기묘하지만 또한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우주론자로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 모형을 수정하여 완성한 지구 구형성(球形性) 이론의 주창자로서 그리고 달의 구형성(球形性)과 달이 빌려온 빛으로 빛난다는 이론 및 달의 상()에 관한 이론의 주창자로서 간주한다. 이 발견들은 계속해서 아리스타코스(Aristarchus),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뉴튼과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탐구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길라잡이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론에서 파르메니데스가 발견한 것에 의하여 왜소해졌다. 그는 모든 우주론과 모든 과학이 숨겨진 실재인 현상의 세계 뒤에 있는 본질적인 물체의 탐구라는 전통을 ([]-실증주의적으로서 기술될 개연성이 높은 전통) 세운 사람이었다. 그는 우주를 기술하는 최초의 연역적 이론체계를 세웠는데, 그 이론체계에 대한 논박이 물리학의 초석을 낳았다. 아무튼 그 이론체계는 이론물리학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체계가 물리학에서 수학적 방정식을 이용하여 연구하는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물질의 연속성 이론을 처음 도입하여서, 더 간접적으로, 현대적 원자론을 낳는 원자와 공간이론의 원조가 되었다.

견해의 길이라는 우주론으로써,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우주기원론으로써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에게, 특히 국가(Republic)의 에르 신화(the Myth of Er)와 또한 티마이오스(Timaeus)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티마이오스는 우주기원론에 관한 획기적인 작품 한 가지가 되었다. 플라톤의 지식론에 미친 그의 영향은 지대했다. 합리적 증거를 고집하면서 그는 너무 멀리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비판적인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데서, 그리고 감각이 참된 지식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자신이 비판하는 데서 옳았다.

 

11 결어

주로 과학이 비판적 접근방식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과학이론들은 신화와 다른 창작물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비판적 접근방식은 진화론적 선택 압력과 같은 것을 이론에 발휘하여 그 이론이 더 큰 진리 유사성으로 향하도록 격려한다. 이 관점은 내가 옹호하려고 시도하는 지식론의 일부이다. 이 관점으로 인하여 나는 특히 초기 과학자들 가운데서 신화와 이론 사이의 유사점을 찾게 되었고, 또한 파르메니데스에게서 그렇게 크게 발달한 (비록 어떤 면에서 그가 독단론자일지라도) 비판적 접근방식의 징표를 찾게 되었다.

이 비판적 태도는 그리스의 기적으로서 그렇게 잘 기술된 것의 특징이다. 어떻게 이 기적이 출현하였을까?

이와 같은 기적은 결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조성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설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비판적 태도에 대한 매우 부분적인 설명이 가능하고, 상당히 흥미롭다. 비판적 태도는 부분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의 충돌이 낳은 산물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호메로스(Homer), 비록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문화충돌을 기술한다.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같은 초기 철학자들 몇 명은, 전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위대한 여행가이자 이집트와 동양의 지혜를 배우던 사람들이었다. 소아시아 지역의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페니키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 접촉하고 있었고, 그리스의 위대한 인물들 몇몇, 특히 헤로도토스는 문명충돌의 중요성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여행을 많이 한 크세노파네스는 이오니아의 도시 콜로폰(Colophon)에서 태어났는데 전통적 신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접근방식과 또한 자신의 일신론적 신학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족이나 민족이 지닌 신학 사이의 충돌을 의식적으로 이용하고, 그 자신의 일신론적 신학은 모든 전통으로부터 두드러지게 이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