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맥스웰(Maxwell)의 도깨비
다니엘 베르누이(Daniel Bernoulli)와 라플라스(Laplace) 이래 우연 이론(the theory of chance)은 물리 이론의 문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 이론은 클라우시우스, 맥스웰, 볼츠만, 플랑크(Planck), 깁스(Gibbs)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기체 운동이론으로써 (나중에 통계역학으로 발전한다) 물리 이론을 침공했다; 그리고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연 이론은 사디 카르노(Sadi Carnot)가 세운 열역학 이론을 거의 흡수했다.
열역학과 운동이론의 원래 강령이 (통계역학) 지닌 근본적인 반(反)-파르메니데스적 특징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운동이론은 바로 시작부터, 파르메니데스적 및 반(反)-파르메니데스적 경향 사이의 갈등의 씨앗을 잉태했다: 운동이론은 반(反)-파르메니데스적 열역학을, 방정식 형태로 된 파르메니데스적 원자론 원칙들을 통하여 설명해치우려는 시도였다. 운동이론의 주요 목적은, 적어도 오랫동안 엔트로피의 열역학 법칙이 지닌 본질적으로 비가역적 부등식을 이 본질적으로 가역적인 등식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클라우시우스가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명명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이것은 카르노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 1법칙이어서 아마도 카르노-켈빈-클라우시우스[Carnot-Kelvin-Clausius] 원리로 지칭될 것이다). 클라우시우스는 엔트로피 법칙을 우주에 대한 사형선고로서 (‘열의 죽음 [thermal death]’) 해석했다; 분명히 급진적으로 반(反)-파르메니데스적인 관념이다. 많은 반례들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열린 체계에서 분명히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을지라도, 이 사형선고는 오랫동안 매우 진지하게 수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클라우시우스의 시절과 일반상대성 이전에 우주론이 폐쇄된 세계로부터 무한한 우주로 전진했을 따름이고 무한한 우주로부터 폐쇄된 세계로 전진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클러크 맥스웰(Clerk Maxwell)이 1871년에 운동이론에 관한 최초의 커다란 수수께끼인 자신의 유명한 ‘분류하는 도깨비’를 발견했을 때 운동이론 내부의 파르메니데스적 및 반(反)-파르메니데스적 경향 사이의 긴장이 느껴졌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맥스웰의 도깨비는 기체로 채워진 상자 속으로 격막(膈膜)을 삽입하고 격막에 있는 작은 구멍에 차단막을 설치함에 의하여 엔트로피 법칙을 파괴한다. 민첩한 분자가 왼쪽으로부터 혹은 느린 분자가 오른쪽으로부터 접근할 때마다 그는 차단막을 닫는다. 그렇게 분자들을 분류함에 의하여 그는 왼쪽의 기체를 더 뜨겁게 만들고 오른쪽의 기체를 더 차게 만든다; 그래서 그 체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한다.
맥스웰의 도깨비는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여전히 강력해지고 있다. 거의 그 도깨비가 태어난 날부터 도깨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수없는 시도가 있었을지라도 그리고 그의 비존재가 자주 증명되고 그의 비존재에 대한 설명들이 흔히 제시되었을지라도, 그 도깨비는 완벽하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틀림없이 곧 자신의 100세 생일을 경축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도깨비가 우리 모두보다 더 오래 살 것이고 그 도깨비의 비존재에 대한 모든 증거와 설명이, 생성되는 것만큼 빠르게,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서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맥스웰의 도깨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신작이면서 가장 기발한 증거임과 동시에 논박 중 하나는 데니스 가보 교수(Professor Dennis Gabor)에게서 기인하는데 그는 고전물리학에 따라서 도깨비가 존재할 수 있으나 양자물리학에 따라서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히는 모형을 구축했다. 가보의 도깨비는 충분히 영리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여하한 고전적 반증도 피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가보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제 2법칙은 고전물리학에서 거짓이고 오직 양자역학에서만 유효해짐이 밝혀진다.
맥스웰의 도깨비에 대한 가보의 모형은 일반적으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가보가 나에게 말한 바와 같이); 이것으로 인하여, 거의 한 세기 동안 열심히 연구한 후에도, 전체 문제가 매우 두드러진 양태로 여전히 얼마나 매우 열려있는지가 실증된다.
충분히 현명해서 한 고전물리 체계를 운영할 수 있는 맥스웰 도깨비를 우리가 구축할 수 있다는 데 나는 가보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양자이론이 그렇게 현명한 도깨비를 이길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분명히 그 도깨비의 재치가 충분히 큰 분자들에 대해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전물리학은 유효하지 않고 양자물리학이 유효하다는 전제 위에서도); 그리고 이것은 그 도깨비의 성공을 보증하는 데 틀림없이 충분하다.
도깨비의 성공 가능성은 브라운운동(Brownian motion)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최초 논문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고전열역학은 {다시 말해서, 제2 법칙}, 현미경으로 자체를 구분 가능하게 만드는 규모를 심지어 지닌 몸체에게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더 이상 간주될 수 없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액체가 (또는 기체) 통과할 수 있는 격막 위에서, 삼투압이 용질(溶質: solute)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여하한 ‘작은 부유 소립자들’에 의하여 실행될 것임을 밝히는데 그것들이 격막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항상 상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맥스웰의 도깨비를 구축할 수 있고, 극도로 비효율적일지라도 완벽하게 실용적인 두 번째 종류의 영구 운동기계를 다음과 같이 구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리 실린더 안에 우리는, 작은 구멍이 뚫린 피스톤을 설치하는데 그 구멍을 통하여 공기가 쉽게 통과할 수 있다. (피스톤은 기계적 장치에 의하여 실린더의 바로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상정된다.) 그다음 우리는 너무 커서 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한 개의 작은 풍선을 피스톤의 왼쪽에 삽입한다.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따르면, 피스톤을 오른쪽으로 내모는 삼투압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피스톤의 움직임을 반대로 하고자 원한다면, 여기서 매우 쉬운 역할인 맥스웰의 도깨비 역할을 수행할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피스톤을 맥스웰의 구멍과 차단막에 맞춘다; 그 구멍은 풍선을 통과시킬 정도로 커야 한다. 그다음에 우리는 실린더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풍선이 구멍을 통과하여 흘러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단막을 닫는다. 그렇다면 잉여 압력이 피스톤의 오른쪽으로 향할 것이다.
이 기계장치는 단순화될 수 있다: 피스톤의 직경과 비교하여 맥스웰의 구멍이 작아서 풍선이 매우 드물게만 구멍을 통과하도록 우리가 보장한다면, 우리는 차단막을 생략할 수 있고 어떤 조치도 취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 압력의 방향은 어떤 한정된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이다; 물론 (평균적으로)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일지라도.
정보이론의 역사를 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영구 운동기계에 (자동적으로 작동하면서 정보가 입력되지 않는) 의하여 1929년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공표한 유명한 사고 실험이 논박됨을 즉시 알 것이다. 레옹 브리루엥(Leon Brillouin)은 실라르드의 실험에 대하여, ‘최초로 정보와 엔트로피 사이의 관련성’을 그 실험이 밝혔다고 말한다. 이것이 다시 행해져야 할까봐 나는 우려한다. (나는 물론 섀넌의 공식[Shannon's formula]을 비판하지 않는데 그 공식을 나는 아래 28절에서 더 자세하게 토론한다.)
이 고찰들로 인하여 1957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매우 잠정적으로 표현된 의심이 올바를 것임이 또한 밝혀진다. 그것은, ‘밀폐된 원통 안에 있는 기체나 액체가... 일방통행식 밸브가 장착되어’ (매우 약한 용수철을 달고), 물론 고도로 느릴지라도, ‘튜브를 통하여 부단히 순환할’ 것이라는 의심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심지어 급진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것이다: 당신이 충분히 오랫동안 ㅡ 몇십억 년 ㅡ 기다릴 수 있다면 당신의 펑크 난 타이어는 터질 것이다.
위의 구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정보가 입력되지 않고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맥스웰의 도깨비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파르메니데스적 변론을 파괴하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다.
이유인즉 맥스웰에 (그리고 실라르드) 따라서, 우리에게 그 도깨비의 지능과 재주, 지식이 있다면 ㅡ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 ㅡ 우리 자신이 엔트로피 법칙을 깰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역성을 확립할 수 있으며 가역성과 함께, 물리학에서 파르메니데스의 힘을 재확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것은, 반(反)-파르메니데스적인 비가역성이 우리가 완벽하게 정보를 받지 못함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맥스웰의 도깨비가 아니고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이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 주장의 ㅡ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진리의 길의 ㅡ 실패는, 우리의 무지인 인간이 지닌 정보의 실패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파르메니데스 자신에 의하여 설명되었던 바와 같이, 설명된다. 그리하여 여전히 파르메니데스의 두 가지 길이 우리에게 있다 ㅡ 원인과 결과가 동등하여 내재적으로 새로운 일이 발생할 수 없는 세계라는 진리의 길이나 가역성, 그리고 비가역성과 진화라는 세계가 있다. 폰 노이만(von Neumann)에 따르면, 현상의 세계인 이 두 번째 세계는 (정확하게 망상의 세계가 아닐지라도) 자체가 지닌 그 존재를, 죽을 운명인 인간이 지닌 고유한 한계와 활동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되면 맥스웰의 도깨비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가 ‘세계의 주관적 및 객관적 면모들을 분리하는 난제’라고 불렀던 것의 전조가 되는데 그 난제는 ‘자의적으로를 제외하고, 관찰된 체계의 일부인... 것과 관찰자의 도구인... 것을 결정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리학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 연구 강령의 현대적 해체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변론과 마주친다. 그가 말하는 견해의 길의 이런저런 부분이, 관찰된 비(非)-파르메니데스적 변화의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서 ㅡ 변화하는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 변론으로서 ㅡ 항상 나타난다. 현대 물리학자들의 파르메니데스적 변론으로 인하여, 관찰자나 ‘주체(subject)’가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표현한 바와 같이) 반드시 객관적인 물리학의 세계에 침공하여 그 세계가 주관화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변론은, 파르메니데스의 변론이 그랬던 바와 같이, 인간이 지닌 근절될 수 없는 무지의 도움을 받는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년, 178-181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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