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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7 부록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5. 3. 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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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7 부록

(번역 수정본)

소크라테스 이전 인식론에서 대립하는

것들과 존재에 관한 주해

 

 

I

대립하는 것들이나 상반되는 것들에 관한 관념은 ㅡ 뜨겁고 차고, 축축하고 건조하고, 밝고 어두움, 존재와 비존재, 생성과 파괴, 성장과 위축, 제한과 무제한 ㅡ 서로 싸우는 활동적인 힘으로 생각되었는데 매우 오래된 관념이다. 그 관념은 세계의 많은 원시적 관점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 원시적 관점들의 대립은 갈등이자 전쟁이다. 이 관념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그는 앞 논문에서 논의된 위대하고도 근본적인 변화의 문제를 본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의 선배들도 변화를 보고 그 변화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가 지닌 문제의 특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찰스 칸(Charles Kah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사람들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Apeiron)처럼 살아있으면서 생명을 주지만 부패될 수 없고 영원한 원칙(아르케: archē)으로부터 변화하고 부패될 수 있는 세계가 출현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아페이론은 변화하는 것들을 낳지만, ‘자제를 제외하고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데 반면 전쟁을 벌이는 대립하는 것들은 부패될 수 있고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대립하는 힘들 중에서 더 강한 힘은 약한 힘을 힘으로 눌러서 먹어 치우거나 흡수할 수 있다. 결국 아낙시만드로스는 대립하는 것들 각각은 틀림없이 부패하여 그 근원이 된다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아페이론으로 틀림없이 복귀한다. ‘옳고 작정된 것에 따라서 그곳에 물체의 생성이 있고 그쪽으로 사물의 파괴가 일어난다; 이유인즉 물체들은 시간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서로 보상하고 배상하기 때문이다.’ 칸이 설명하기를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계절뿐 아니라 성장과 쇠퇴의 모든 다른 율동적 형태를 포함하는 영원한 순환에 따른다’. 이 형태들 가운데 우리는 인간관계의 주고받기뿐 아니라 전쟁이나 갈등의 형태 및 질서를 포함시킬 것이다; 위반에 대하여 벌칙을 부과하는 질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관념들이 서구 우주론적 사상의 배경을 형성한다고 칸은 비평한다.

 

II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이전의 아낙시만드로스 후계자 중에서 파르메니데스에게 미친 영향이 내가 보기에 분명한 두 사람에 대하여 나는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크세노파네스는 주로 인식론의 아버지로서 ㅡ 우리가 지닌 지식의 한계를 고찰한 최초의 사람 ㅡ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우주론적이고 신학적 사상을 기술하는데 그 사상은 추측의 그물망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는 확고한 진리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다고 주장하여 모든 인간적 지식이 지닌 추측성 특징을 주장하는데 그 추측성 특징을 그는 신적(神的) 지식과 대치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신()들과 세계에 대한 인간적 관념들이,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에 의하여 훼손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이 냉엄하게 비판적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크세노파네스는 회의론자가 아니라 비판적 합리주의자 같은 사람이었다; 이유인즉 그는 우리가, 우리의 추측 활동인 우리의 상상으로써 진리를 향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크세노파네스를 경멸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크세노파네스처럼, 그의 사상도 아낙시만드로스의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게다가 크세노파네스처럼 그는 인식론자이고 그의 인식론적 관념들은 크세노파네스의 인식론적 관념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적(神的) 지혜와 인간의 추측 (개선될 수 있는) 사이의 대비는 유지되지만 수정된다. 그 대비는 신적(神的) 지혜와 (그가 주장하는 바, 그 자신이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로 참여하는) 절망적으로 잠들어 있는 다른 사람들 둔감 사이의 대비가 된다. 자신의 인식론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크세노파네스를 정정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로 인하여,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식론적으로 의식하게 만든 것이 크세노파네스였음을 밝히는 경향이 드러난다. 인식론적 문제가 ㅡ 지식에 대한, 이해에 대한, 지혜에 대한 문제 ㅡ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그렇게 중요해져서 그가 지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선언함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에 의하여 자신의 저서를 시작함은 흥미롭다. 이 인식론적 서론으로 인하여 전통이 발생했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 그의 서론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것의 직계 후손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의 인식론적 서문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다. 그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강화된다; 그리고 그 전통은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사회학 교재의 많은 현대적인 인식론적이거나 방법론적인 서문에까지 추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요 공헌이 아니다. 인식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지녔던 주요 문제가 아니었다. 앞의 논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기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위대함은 물리학과 우주론의 핵심적 문제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변화의 문제. 물론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를 발견했다거나 변화의 우주론적 역할을 주목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는다. 그가 발견한 것은 모든 변화의 역설적 특징이었다. 그는 문제가 ㅡ 거의 논리적 문제 ㅡ 있음을 알았다: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변하는 물체가 변하는 동안에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것과 그러나 물체가 변한다면 물체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변화라는 관념에 본질적이다.

모든 철학자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철학자는 문제를 자기-동일적(self-identical) 실체를 (변화에 대한 실체의 잠재력, 변하는 실체의 실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긴 전통에 의하여 좌우된다. 파르메니데스, 레우키포스(Leucippus) 그리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덕분에 물리학이 오랫동안 매우 성공적인 변화이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변화를 포함하는 모든 변화는 운동에 기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라는 문제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변화의 문제가 우주론의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음을 동의하는 사람이 그렇게 적은 이유이다; 그리고 변화의 문제가 헤라클레이토스가 지녔던 훌륭한 문제였음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적은 이유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해답은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선배들처럼 그는 변화를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으로서 ㅡ 한 쌍의 대립하는 것들 중 하나로부터 나머지 하나로의 변화로서 ㅡ 보았다: 축축한 것은 건조한 것이 된다. 그래서 정말로 대립하는 것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에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들로 인하여 변화의 구조, 정말로 전체 세계의 구조가 결정된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해답을 일곱 가지 논지의 형태로 서술할 수 있다.

(1) 변화하는 물체는 없다: 세계를 사물들의 ㅡ 심지어 변하는 사물들의 ㅡ 집합체로 구성된 것으로서 상상하면 틀린다.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되지 않고 과정들로 구성된다.

(2) 우리의 감각들에 물체들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측정되거나 안정된과정들이다 ㅡ 서로 접근 막아 평형을 이루는 대립하는 힘들.

(3) 우리 자신은 물체들로서 우리 자신에게 나타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탐색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탐색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물체가 아니고 타오르는 화염처럼 과정이었다. , 화염은 꾸준히 타오른다면 둔감한 사람들에게, 반쯤 잠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탐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체처럼 ㅡ 변하는 물체 ㅡ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과정이다.

(4) 다소 분리 가능한 과정들이 있을지라도 모든 과정은 서로 맞물려 있다. 모든 과정은 물체들처럼 분리될 수 (그래서 셀 수) 없다. 전체 세계는 한 가지 세계 과정이다.

(5) 그리하여 변화 중에 역설적으로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으로 틀림없이 남아있는 물체는 없다. 그러나 과정들은, 다시 말해서 변화들은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립하는 것들을 포함하는데 그것들에 의하여 각각의 변화와 모든 변화가 규정된다: 대립하는 것들은 대비의 극점으로서만 다시 말해서 함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혹은 변화가 과정과 같은 것을 구성하는 변화의 극점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동일한 것이 살아있고 죽고, 깨어나고 잠들고 젊고 늙는다. 이유인즉 이것들이 변했을 때 저것들이고 저것들이 변했을 때 이것들이기 때문이다.... 찬 것들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게 된다; 축축한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축축해진다.’

(6) 이것은 전체 과정인 전체 세계에도 성립한다: 변화하면서 전체 세계는,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이기 때문에 동시에 변화정지로 지칭되는 대립하는 것들에게조차 적용되는 대립하는 것들의 동일성 때문에 변화하면서 전체 세계는 정지되어 있다’.

(7)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 대하여, 우주처럼 ()이 대립하는 모든 것의 정체라고 말한다:()은 낮과 밤, 겨울과 여름, 전쟁과 평화, 포만과 굶주림이다.’ (아낙시만드로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을 우주적 원리와 일치시킨다.)

요컨대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는 흔히 보이지 않는 과정들의 현상들로서 물체를 설명하는 물체론에 의하여, 변화 중의 물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역설을 헤라클레이토스가 해결한다. 과정, 그리고 특히 세계 과정은 자기-동일적(self-identical) 변화들인데 그리하여 동시에 대립되기도 하고 동일한 대립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명백하고 투명하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은 역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탁월하고도 혁명적인 이론을 헤라클레이토스에게 귀속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내가 보기에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관계와 단편 글에 관한 일관적 해석이 제시된다.

III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파르메니데스도 아낙시만드로스의 (그리고 아마도 또한 피타고라스의) 전통 안에 분명하게 서 있다. 내가 보기에 파르메니데스가 크세노파네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많은 징표가 있다.

크세노파네스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신적(神的) 지식으로부터 추측이나 견해를 구분한다. 그러나 신인동형론이라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비판을 그는 발전시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상식적 해석이 인간의 망상이라는 이론을 만든다.

그러나 결정적 영향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나오는 듯하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담론(logos)에 대하여 자가당착(antilogia)인 요점-()-요점으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논박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논리적 무기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무찌른다: 대립하는 것들의 동일성.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파르메니데스도 인식론적 서문으로써 시작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크세노파네스의 인식론을 수정함을 그는 주로 수용한다: 신적(神的) 지식인 진리는, 인간이 지닌 지식의 거짓 주장과 반대가 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그는 신적(神的) 지식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세노파네스에게서 유래하는 인식론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경험한다:

 

신적(神的) 지식 인간의 (오류이거나) 오류 가능한 견해

진리 현상, 겉보기, 망상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 대립하는 것들과 함께 더 정확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능가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근거를 바탕으로 즉각 헤라클레이토스를 무찌른다: 대립하는 것들은 적어도 동일하지 않다. 이 비동일성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서론에 명백하게 함축되어 있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스며든다.

그는 나아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또 다른 한 쌍의 인식론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대비한다:

 

이성 감각 (감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성의 우월성을 틀림없이 인정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는 그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대립?) 긋지 못한다 ㅡ 그리하여 자신의 통상적인 방법을 위반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이성과 감각 감지를 날카롭게 대비시킨 것은 중요한 조치이다. 유럽의 사상은 그 후 그것의 지배를 받아왔다.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의존하고 있을지라도 파르메니데스는 인식론의 진정한 창시자로서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인식론은 철학의 핵심에 남았다.

우리가 우주론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다시 대립하는 것들로써 작동함을 발견한다. 근본적인 쌍은

 

존재 (= 존재하는 것) (=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헤라클레이토스가 생각하지 못했던 쌍이다. 그가 생각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이 대립하는 것들의 동일성을 주장했을 터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나아가 (a) 그것들이 동일할 리가 없다는 것과, (b) 헤라클레이토스가 (혹은 변화를 신뢰하는 여하한 사람), 논리적 논박을 부정하여 그것들이 동일하다고 틀림없이 주장할 것임을 증명한다.

 

대립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반대적이다. 이것은 두 개의 대립하는 것들의 반대적 주장인

 

소크라테스는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부분적으로 양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주장들은 함께 거짓이 될 수 있다 ㅡ 그러나 함께 일 수는 없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을 참으로 생각하려면, 우리는 존재론적 결론으로 이끌려간다: 소크라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존재하다와 같은 존재론적 술부의 경우에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은 함께 참일 리 없다.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참이라고 전제하려고 시도하면 불합리가 발생한다. 존재론적 술부의 경우, 상반되는 것들은 부정적인 것들처럼 작동한다: 그것들의 선언판단(選言判斷: disjunction)은 항진명제이고 한 쌍의 상반되는 것 중 하나만 참일 수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