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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

이윤진이카루스 2025. 3. 1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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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파르메니데스도 인식론적 서문으로써 시작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크세노파네스의 인식론을 수정함을 그는 주로 수용한다: 신적(神的) 지식인 진리는, 인간이 지닌 지식의 거짓 주장과 반대가 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그는 신적(神的) 지식에 대한 참여를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세노파네스에게서 유래하는 인식론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경험한다:

 

신적(神的) 지식 인간의 (오류이거나) 오류 가능한 견해

진리 현상, 겉보기, 망상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 대립하는 것들과 함께 더 정확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능가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근거를 바탕으로 즉각 헤라클레이토스를 무찌른다: 대립하는 것들은 적어도 동일하지 않다. 이 비동일성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서론에 명백하게 함축되어 있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에 스며든다.

그는 나아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또 다른 한 쌍의 인식론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대비한다:

 

이성 감각 (감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성의 우월성을 틀림없이 인정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는 그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대립?) 긋지 못한다 ㅡ 그리하여 자신의 통상적인 방법을 위반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이성과 감각 감지를 날카롭게 대비시킨 것은 중요한 조치이다. 유럽의 사상은 그 후 그것의 지배를 받아왔다.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의존하고 있을지라도 파르메니데스는 인식론의 진정한 창시자로서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인식론은 철학의 핵심에 남았다.

우리가 우주론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다시 대립하는 것들로써 작동함을 발견한다. 근본적인 쌍은

 

존재 (= 존재하는 것) (=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헤라클레이토스가 생각하지 못했던 쌍이다. 그가 생각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이 대립하는 것들의 동일성을 주장했을 터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나아가 (a) 그것들이 동일할 리가 없다는 것과, (b) 헤라클레이토스가 (혹은 변화를 신뢰하는 여하한 사람), 논리적 논박을 부정하여 그것들이 동일하다고 틀림없이 주장할 것임을 증명한다.

 

대립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반대적이다. 이것은 두 개의 대립하는 것들의 반대적 주장인

 

소크라테스는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부분적으로 양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주장들은 함께 거짓이 될 수 있다 ㅡ 그러나 함께 일 수는 없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을 참으로 생각하려면, 우리는 존재론적 결론으로 이끌려간다: 소크라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존재하다와 같은 존재론적 술부의 경우에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은 함께 참일 리 없다.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참이라고 전제하려고 시도하면 불합리가 발생한다. 존재론적 술부의 경우, 상반되는 것들은 부정적인 것들처럼 작동한다: 그것들의 선언판단(選言判斷: disjunction)은 항진명제이고 한 쌍의 상반되는 것 중 하나만 참일 수 있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 220-221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