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ant

칸트 3大 비판서 완역한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

이윤진이카루스 2012. 4. 25. 15:25

1988년부터 번역 … “칸트는 자기 사상대로 살다간 巨人”
[인터뷰] 칸트 3大 비판서 완역한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
2009년 06월 15일 (월) 14:32:05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백종현 서울대 교수  
최근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의 번역본을 선보였다. 이로써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에 이어 3대 비판서가 완역된 셈이다. 서양 철학사의 거목인 칸트의 주요 저서가 새롭게 번역이 됐다는 점에서, 이번 완역은 일종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수신문>은 이번호에서 칸트의 3대 비판서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완수한 백종현 교수를 인터뷰했다. 백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칸트 철학의 무게와 원전 번역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봤다.

△이번 판단력 비판 번역 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오랜 만에 언론에서 칸트의 이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칸트가 서양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해주시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비판하거나 추종하면서 철학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서는 철학할 수 없다”, “칸트는 철학사상계 중앙의 대저수지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들이 칸트 안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러한 평가에서 보듯 서양철학사에서 칸트 사상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돼 왔습니다. 오늘날 서양사상의 원류를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 기독교 사상, 수학적 자연과학 사상 등 셋이라고 볼 때 칸트 철학이야말로 이 세 물줄기의 대(大)합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20세기 초에 칸트를 “근대 서양에 다시 태어난 공자(孔子)”라 평하면서, 그 친화성을 강조했고,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에서도 가장 오래고 가장 넓게 이루어진 것이 칸트연구입니다. 이정직(李定稷)이 쓴(1903?1910경) 「康氏[칸트]哲學說大略」은 한국 사람이 쓴 최초의 서양철학에 대한 글로 간주되고 있고,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칸트전공 박사만 해도 100명이 넘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철학계의 기본적인 철학 개념들이 칸트를 매개로 형성됐고, 그의 지식이론, 인간존엄 사상, 미학이론, 세계평화 사상, 자유와 평등의 법사상은 현대 한국 사회문화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Kant) 선대의 성 표기가 ‘Cant’이었던 점을 빗대어 “Kant는 Can't다’고 촌평하는 이들이 있듯이, 그리고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칸트는 시대와 문화 의식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해석됨으로써만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입니다. 한국어 역주 작업도 그 일환이라 봅니다.”


△칸트 3대 비판서 각각의 핵심 테제와 상호 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인간이 추구하는 眞·善·美·聖이라는 궁극적 가치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우선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세 물음을 제기하는데, 『순수이성비판』은 첫째 물음, 곧 진리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며 그 결실이 칸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이라 하겠고,『실천이성비판』은 둘째 물음, 곧 善의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는바 그 결실이 그의 윤리학이고,『판단력비판』의 후반부는 다른 종교철학 저술과 함께 셋째 물음, 곧 최고선 및 聖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결실이 희망의 철학인 칸트의 이성종교론입니다. 이에 덧붙여 『판단력비판』의 전반부는 말하자면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 시도하고 있고, 그 결실이 그의 미학이론이라 할 것입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비롯해, 칸트 저작 중 대표적인 기존 번역본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번역본들이 국내의 서양 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순수이성비판』은 제 역서 이전에 이미 8종이, 『실천이성비판』은 2종, 『판단력비판』은 1종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제1, 2비판서는 최재희 선생님 번역판이, 제3비판서는 이석윤 교수님의 역서가 널리 읽혀온 것으로 압니다. 또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형이상학서설』, 『윤리형이상학 정초』,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인간학강의』, 『형이상학강의』, 『교육학강의』, 기타 역사철학 관련 논저 등 『윤리형이상학』을 제외한 주요한 칸트 저술은 이미 한국어 역서가 있습니다. 이 역서들을 접하지 않은 한국의 철학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1930년대부터 등장한 <철학개론> 유의 책 내용은 절반 이상이 칸트 철학으로 채워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졸저,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0 참조), 칸트 철학은 한국인의 초기 서양철학 이해의 기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최재희 선생님의 역서를 이용했는데, 그분의 『순수이성비판』의 각주 중에는 제가 붙인 것도 있고, 최재희 선생님의 『실천이성비판』 출판 때에는 제가 출판사 박영사 편집부에 직접 가서 전과정의 책임 교정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3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생시절에나 교수할 때나 세미나는 학자 양성 과정인 만큼 칸트 원서로 했고, 역서는 참고로만 활용했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칸트 주요 저작의 새로운 번역을 계획하셨는지요.


“제가 1985년 2학기부터 칸트 3비판서의 원서로 대학원 세미나를 매학기 이끌었는데, 그때 한 선배 교수님께서 저에게 독일에서 칸트를 연구한 첫 한글세대 교수이니 기왕이면 종래의 철학 용어들을 재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셔서 1988년 10월 전국철학자대회(제1회) 자리에서 ‘칸트 철학 용어 再考’를 제안하는 주제 발표를 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작업을 했습니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출간한 3비판서를 20년 넘게 역주 작업해 이제 겨우 초판을 펴냈습니다. 다행히 독자들이 꾸준히 있어 매년 1~2쇄씩 중간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부분적으로 수정 작업을 하고 있고, 맨 먼저(2002) 출간했던 『실천이성비판』은 출판사의 호의로 현재 완전 개정판 작업을 마쳐서 곧 재출간할 예정이며, 이어서 칸트 이성종교이론의 정수가 담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도 2년 쯤 후에는 출간하려고 한참 작업 중에 있습니다.“


△또 기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본은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고 싶은데요.


“최재희, 이석윤 두 분 선생님의 역서는 사소한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번역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간 35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전집도 거의 다 간행됐고, 국내외 연구가들에 의해 수많은 논저와 주석서가 나와 그를 반영한 영미권과 일본의 새로운 칸트 전집도 나온 상황이라 제가 그 성과를 고려해서 새 우리말 칸트 역주서를 출간한 것이 어느 정도는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칸트철학계가 백가쟁명의 상태라 우리말 칸트 철학 용어 통일이 쉽지 않아서, 칸트가 3비판서에서 사용한 동일한 용어가 우리말로는 서로 다르게 번역돼 원서를 보지 않는 독자는 해독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주요 저술들을 한 사람이 일관되게 번역하고, 또한 비교적 상세한 해제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칸트의 다른 저술들과 강의록을 찾아내 주해에서 함께 비교 검토하고 있는 저의 역주서들이 원서 없이도 칸트를 읽는 분들에게는 칸트 사상에 이르는 하나의 그런대로 평탄한 길을 제공한 것으로 봅니다.”


△서울대 철학과, 철학사상연구소 일에, 개인 연구까지 하시면서 번역까지 병행했으니,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떤 점이 개인적으로 어려웠는지, 보람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외국어로 돼 있는 철학 저술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외국어와 우리말이 일대일로 대응해야만 하고, 번역자가 또한 이 두 언어에 고루 정통해야 하는데, 이것들 모두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기껏해야 번역은 원전에 대한 역자의 이해와 언어 능력의 범위 내에서 두 언어 사이에 엄존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있을 수 있는 비근한 말을 찾아 엮어 대응시키는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역자라도 연륜에 따라 동일한 원전을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겠고, 세대가 바뀌면서 사용 어휘나 어감을 포함해서 언어생활에 변화가 생기면 그 또한 다른 번역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역주서도 이런 제한 아래서만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역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사상, 자기 글이 아닌 글이기 때문에 문체, 어휘, 어감을 가능한 한 원서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원서가 수수하고 건조하게 쓰여 있는데 이를 화려하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 놓는 것도 원서의 훼손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를 일일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수차례 확인 작업을 해야 합니다. 칸트 저술의 경우 독일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달라 뒤바꾸는 것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제 경우는 매년 칸트 원서를 대학원 세미나에서 학생들과 한줄한줄 읽어나가고 있고, 또 역서 출판에서는 저의 번역 초고를 저와 함께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재차 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동작업의 결실입니다. 흔히들 과학 분야는 연구단이 연구를 수행하는데 반해 인문학은 학자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하는데, 저는 이제는 인문학도 연구단 수준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인문학이야 말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는 사람 사이의 학문’, 집단적 지혜가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작업이 바로 연찬이고 그 속에서 학풍이 조성되고 학파 학설이 형성될 것으로 봅니다. 주위에 탁월한 젊은 학도들이 다수 있는 것이 저의 복이고, 그래서 저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힘들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고전의 역주작업이란 고전의 향취 속에서 틈틈이 배움을 나눠 갖는 일이니까요.”


△국내의 많은 철학자들은 번역에 크게 주안점을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유럽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이 더디고, 부족한 것도 잘 알려진 사정입니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국내의 철학 원전 번역의 실태와 전망에 대해 총체적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인문학의 경우는 80% 이상 인류 공동 자산의 전승이 그 과업이라고 봅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주자나 율곡처럼 어쩌다 나타나는 탁월한 인사들만이 창작을 내 전승할 자산을 늘려주지요. 창작할 능력이 있는 이는 창작 업적을 내 그 본분을 다하고, 그럴 재주가 없는 이는 전승의 소임을 맡아 그간 공부하도록 지원해 준 사회에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저도 더러 논문도 쓰고 저술도 냅니다만, 논문이든 저술이든 역서이든 인문학은 인간사회에 향취와 품격을 더하는 것이 그 의의인 만큼 그에 기여한 정도에서 평가하고 평가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경우는 그렇기에 고전의 역서가 [평범한] 저술에 비해 그 가치가 덜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칸트의 원저에 비할 때 그 역서는 미천한 것입니다만.) 저서이든 역서이든 출판되면 일정 부수가 팔릴 때 출판사가 계속 사업을 해나갈 수 있을 텐데,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학술서 판매는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당 기간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책값이 그 저작의 공력에 비례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께에 따라 ?종이 값 산정 방식으로? 정해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책은 출판되면서 이미 폐지로 활용할 때의 값이 매겨지는 셈입니다. 그림도 크기로 값을 매겨 사고파는 세상이기는 합니다만.
  현재 의미 있는 철학 원전은 한문을 포함해서 모두 외국어로 쓰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철학 저술이 한국어로 쓰여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인데 아직 우리 자신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저술을 생산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의 역주해는 철학 연구의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역주해 작업은 연구가 아니라고 본다면 이는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최근에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 등 의미 있는 역서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학술어 사용도 중구난방의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를 지나 의견이 대체로 모아지는 시점에서는 학회나 어떤 연구소 차원에서 주요 사상가의 전집(현재는 니체가 나왔고, 플라톤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출간도 기획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철학 출판 시장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칸트는 물론이고, 여러 그리스 고전, 근대철학의 고전 등등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이 많지만, 최근 철학자들의 책들만 집중적으로 번역 출간되는 현상이 그렇거든요. 학문적 깊이 보단 입맛을 추구하는 대중과 출판사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러한 대중의 입맛에 영합하고자 하는 일부 학자들이 문제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현상인지….


“제 소견으로는 현재 우리 출판 사정은 어느 쪽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므로 어느 쪽이든 우선 앞서 나갈 수 있는 쪽이 앞서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세상일들이란 세월이 가면서 균형이 맞춰지지 않던가요. 다만 저 자신도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정확성과 진정성을 결여한 책의 출판은 사회에 해독을 입히는 것입니다. 책의 출판 양이 증가하는 만큼 비평의 틀도 갖춰져 선량한 독자들을 부정확하고 불량한 책 더미로부터 보호하는 체제도 잘 수립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사회의 성숙도도 높아졌으니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향후 어떤 연구 및 번역 계획이 있으신가요.


“고전 읽기는 영혼(독자)과 영혼(저자)의 대화입니다. 제가 칸트 읽기에 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칸트에 공명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칸트의 사상을 합리적 이상주의라고 봅니다. 과학적 지식의 혁혁한 성과를 체험한 근대인들은 과학적 지식을 지식의 전형이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그럴 듯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벌립니다. 이때 칸트의 이성비판이 하는 일은 참된 지식과 사이비 지식이 뒤섞이지 않도록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 또한 명확하게 한계를 짓습니다. 곧, 지식은 자연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 국한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안에서 의식주를 구해 살면서도 理想 실현을 기획하고, 내가 자연스럽게 하는 짓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구별하고, 한 송이 장미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악한 인간에게는 몸서리를 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에게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식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지식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참 지식의 가치 곧 진리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의 가치 곧 선, 그리고 참한 느낌의 가치 곧 미 역시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섬세한 미감을 가진 이, 윤리적으로 올곧게 행위하는 이 또한 진정한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루 존귀함을 그 까닭을 밝혀 설명하고, 그 자신이 그의 사상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많은 독자들 또한 저와 함께 칸트에 공명하기를 기대합니다. 교수생활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르러 있는 저는 이제 칸트 종교철학의 대표작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연구와 번역을 마저 마치고, 간간이 써나가고 있는 인간 문화의 본질에 관한 글을 좀 더 써보려 합니다. 남들과도 대화를 해 볼 수준이라고 스스로 판정이 되면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의로써 대화에 응해 주실 독자에게 미리 감사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1988년부터 번역 … “칸트는 자기 사상대로 살다간 巨人”
[인터뷰] 칸트 3大 비판서 완역한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
2009년 06월 15일 (월) 14:32:05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백종현 서울대 교수  
최근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의 번역본을 선보였다. 이로써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에 이어 3대 비판서가 완역된 셈이다. 서양 철학사의 거목인 칸트의 주요 저서가 새롭게 번역이 됐다는 점에서, 이번 완역은 일종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수신문>은 이번호에서 칸트의 3대 비판서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완수한 백종현 교수를 인터뷰했다. 백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칸트 철학의 무게와 원전 번역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봤다.

△이번 판단력 비판 번역 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오랜 만에 언론에서 칸트의 이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칸트가 서양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해주시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비판하거나 추종하면서 철학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서는 철학할 수 없다”, “칸트는 철학사상계 중앙의 대저수지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들이 칸트 안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러한 평가에서 보듯 서양철학사에서 칸트 사상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돼 왔습니다. 오늘날 서양사상의 원류를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 기독교 사상, 수학적 자연과학 사상 등 셋이라고 볼 때 칸트 철학이야말로 이 세 물줄기의 대(大)합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20세기 초에 칸트를 “근대 서양에 다시 태어난 공자(孔子)”라 평하면서, 그 친화성을 강조했고,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에서도 가장 오래고 가장 넓게 이루어진 것이 칸트연구입니다. 이정직(李定稷)이 쓴(1903?1910경) 「康氏[칸트]哲學說大略」은 한국 사람이 쓴 최초의 서양철학에 대한 글로 간주되고 있고,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칸트전공 박사만 해도 100명이 넘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철학계의 기본적인 철학 개념들이 칸트를 매개로 형성됐고, 그의 지식이론, 인간존엄 사상, 미학이론, 세계평화 사상, 자유와 평등의 법사상은 현대 한국 사회문화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Kant) 선대의 성 표기가 ‘Cant’이었던 점을 빗대어 “Kant는 Can't다’고 촌평하는 이들이 있듯이, 그리고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칸트는 시대와 문화 의식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해석됨으로써만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입니다. 한국어 역주 작업도 그 일환이라 봅니다.”


△칸트 3대 비판서 각각의 핵심 테제와 상호 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인간이 추구하는 眞·善·美·聖이라는 궁극적 가치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우선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세 물음을 제기하는데, 『순수이성비판』은 첫째 물음, 곧 진리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며 그 결실이 칸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이라 하겠고,『실천이성비판』은 둘째 물음, 곧 善의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는바 그 결실이 그의 윤리학이고,『판단력비판』의 후반부는 다른 종교철학 저술과 함께 셋째 물음, 곧 최고선 및 聖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결실이 희망의 철학인 칸트의 이성종교론입니다. 이에 덧붙여 『판단력비판』의 전반부는 말하자면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 시도하고 있고, 그 결실이 그의 미학이론이라 할 것입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비롯해, 칸트 저작 중 대표적인 기존 번역본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번역본들이 국내의 서양 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순수이성비판』은 제 역서 이전에 이미 8종이, 『실천이성비판』은 2종, 『판단력비판』은 1종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제1, 2비판서는 최재희 선생님 번역판이, 제3비판서는 이석윤 교수님의 역서가 널리 읽혀온 것으로 압니다. 또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형이상학서설』, 『윤리형이상학 정초』,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인간학강의』, 『형이상학강의』, 『교육학강의』, 기타 역사철학 관련 논저 등 『윤리형이상학』을 제외한 주요한 칸트 저술은 이미 한국어 역서가 있습니다. 이 역서들을 접하지 않은 한국의 철학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1930년대부터 등장한 <철학개론> 유의 책 내용은 절반 이상이 칸트 철학으로 채워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졸저,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0 참조), 칸트 철학은 한국인의 초기 서양철학 이해의 기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최재희 선생님의 역서를 이용했는데, 그분의 『순수이성비판』의 각주 중에는 제가 붙인 것도 있고, 최재희 선생님의 『실천이성비판』 출판 때에는 제가 출판사 박영사 편집부에 직접 가서 전과정의 책임 교정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3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생시절에나 교수할 때나 세미나는 학자 양성 과정인 만큼 칸트 원서로 했고, 역서는 참고로만 활용했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칸트 주요 저작의 새로운 번역을 계획하셨는지요.


“제가 1985년 2학기부터 칸트 3비판서의 원서로 대학원 세미나를 매학기 이끌었는데, 그때 한 선배 교수님께서 저에게 독일에서 칸트를 연구한 첫 한글세대 교수이니 기왕이면 종래의 철학 용어들을 재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셔서 1988년 10월 전국철학자대회(제1회) 자리에서 ‘칸트 철학 용어 再考’를 제안하는 주제 발표를 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작업을 했습니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출간한 3비판서를 20년 넘게 역주 작업해 이제 겨우 초판을 펴냈습니다. 다행히 독자들이 꾸준히 있어 매년 1~2쇄씩 중간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부분적으로 수정 작업을 하고 있고, 맨 먼저(2002) 출간했던 『실천이성비판』은 출판사의 호의로 현재 완전 개정판 작업을 마쳐서 곧 재출간할 예정이며, 이어서 칸트 이성종교이론의 정수가 담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도 2년 쯤 후에는 출간하려고 한참 작업 중에 있습니다.“


△또 기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본은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고 싶은데요.


“최재희, 이석윤 두 분 선생님의 역서는 사소한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번역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간 35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전집도 거의 다 간행됐고, 국내외 연구가들에 의해 수많은 논저와 주석서가 나와 그를 반영한 영미권과 일본의 새로운 칸트 전집도 나온 상황이라 제가 그 성과를 고려해서 새 우리말 칸트 역주서를 출간한 것이 어느 정도는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칸트철학계가 백가쟁명의 상태라 우리말 칸트 철학 용어 통일이 쉽지 않아서, 칸트가 3비판서에서 사용한 동일한 용어가 우리말로는 서로 다르게 번역돼 원서를 보지 않는 독자는 해독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주요 저술들을 한 사람이 일관되게 번역하고, 또한 비교적 상세한 해제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칸트의 다른 저술들과 강의록을 찾아내 주해에서 함께 비교 검토하고 있는 저의 역주서들이 원서 없이도 칸트를 읽는 분들에게는 칸트 사상에 이르는 하나의 그런대로 평탄한 길을 제공한 것으로 봅니다.”


△서울대 철학과, 철학사상연구소 일에, 개인 연구까지 하시면서 번역까지 병행했으니,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떤 점이 개인적으로 어려웠는지, 보람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외국어로 돼 있는 철학 저술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외국어와 우리말이 일대일로 대응해야만 하고, 번역자가 또한 이 두 언어에 고루 정통해야 하는데, 이것들 모두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기껏해야 번역은 원전에 대한 역자의 이해와 언어 능력의 범위 내에서 두 언어 사이에 엄존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있을 수 있는 비근한 말을 찾아 엮어 대응시키는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역자라도 연륜에 따라 동일한 원전을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겠고, 세대가 바뀌면서 사용 어휘나 어감을 포함해서 언어생활에 변화가 생기면 그 또한 다른 번역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역주서도 이런 제한 아래서만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역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사상, 자기 글이 아닌 글이기 때문에 문체, 어휘, 어감을 가능한 한 원서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원서가 수수하고 건조하게 쓰여 있는데 이를 화려하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 놓는 것도 원서의 훼손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를 일일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수차례 확인 작업을 해야 합니다. 칸트 저술의 경우 독일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달라 뒤바꾸는 것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제 경우는 매년 칸트 원서를 대학원 세미나에서 학생들과 한줄한줄 읽어나가고 있고, 또 역서 출판에서는 저의 번역 초고를 저와 함께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재차 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동작업의 결실입니다. 흔히들 과학 분야는 연구단이 연구를 수행하는데 반해 인문학은 학자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하는데, 저는 이제는 인문학도 연구단 수준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인문학이야 말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는 사람 사이의 학문’, 집단적 지혜가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작업이 바로 연찬이고 그 속에서 학풍이 조성되고 학파 학설이 형성될 것으로 봅니다. 주위에 탁월한 젊은 학도들이 다수 있는 것이 저의 복이고, 그래서 저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힘들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고전의 역주작업이란 고전의 향취 속에서 틈틈이 배움을 나눠 갖는 일이니까요.”


△국내의 많은 철학자들은 번역에 크게 주안점을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유럽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이 더디고, 부족한 것도 잘 알려진 사정입니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국내의 철학 원전 번역의 실태와 전망에 대해 총체적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인문학의 경우는 80% 이상 인류 공동 자산의 전승이 그 과업이라고 봅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주자나 율곡처럼 어쩌다 나타나는 탁월한 인사들만이 창작을 내 전승할 자산을 늘려주지요. 창작할 능력이 있는 이는 창작 업적을 내 그 본분을 다하고, 그럴 재주가 없는 이는 전승의 소임을 맡아 그간 공부하도록 지원해 준 사회에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저도 더러 논문도 쓰고 저술도 냅니다만, 논문이든 저술이든 역서이든 인문학은 인간사회에 향취와 품격을 더하는 것이 그 의의인 만큼 그에 기여한 정도에서 평가하고 평가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경우는 그렇기에 고전의 역서가 [평범한] 저술에 비해 그 가치가 덜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칸트의 원저에 비할 때 그 역서는 미천한 것입니다만.) 저서이든 역서이든 출판되면 일정 부수가 팔릴 때 출판사가 계속 사업을 해나갈 수 있을 텐데,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학술서 판매는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당 기간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책값이 그 저작의 공력에 비례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께에 따라 ?종이 값 산정 방식으로? 정해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책은 출판되면서 이미 폐지로 활용할 때의 값이 매겨지는 셈입니다. 그림도 크기로 값을 매겨 사고파는 세상이기는 합니다만.
  현재 의미 있는 철학 원전은 한문을 포함해서 모두 외국어로 쓰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철학 저술이 한국어로 쓰여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인데 아직 우리 자신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저술을 생산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의 역주해는 철학 연구의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역주해 작업은 연구가 아니라고 본다면 이는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최근에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 등 의미 있는 역서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학술어 사용도 중구난방의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를 지나 의견이 대체로 모아지는 시점에서는 학회나 어떤 연구소 차원에서 주요 사상가의 전집(현재는 니체가 나왔고, 플라톤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출간도 기획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철학 출판 시장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칸트는 물론이고, 여러 그리스 고전, 근대철학의 고전 등등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이 많지만, 최근 철학자들의 책들만 집중적으로 번역 출간되는 현상이 그렇거든요. 학문적 깊이 보단 입맛을 추구하는 대중과 출판사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러한 대중의 입맛에 영합하고자 하는 일부 학자들이 문제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현상인지….


“제 소견으로는 현재 우리 출판 사정은 어느 쪽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므로 어느 쪽이든 우선 앞서 나갈 수 있는 쪽이 앞서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세상일들이란 세월이 가면서 균형이 맞춰지지 않던가요. 다만 저 자신도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정확성과 진정성을 결여한 책의 출판은 사회에 해독을 입히는 것입니다. 책의 출판 양이 증가하는 만큼 비평의 틀도 갖춰져 선량한 독자들을 부정확하고 불량한 책 더미로부터 보호하는 체제도 잘 수립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사회의 성숙도도 높아졌으니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향후 어떤 연구 및 번역 계획이 있으신가요.


“고전 읽기는 영혼(독자)과 영혼(저자)의 대화입니다. 제가 칸트 읽기에 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칸트에 공명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칸트의 사상을 합리적 이상주의라고 봅니다. 과학적 지식의 혁혁한 성과를 체험한 근대인들은 과학적 지식을 지식의 전형이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그럴 듯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벌립니다. 이때 칸트의 이성비판이 하는 일은 참된 지식과 사이비 지식이 뒤섞이지 않도록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 또한 명확하게 한계를 짓습니다. 곧, 지식은 자연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 국한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안에서 의식주를 구해 살면서도 理想 실현을 기획하고, 내가 자연스럽게 하는 짓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구별하고, 한 송이 장미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악한 인간에게는 몸서리를 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에게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식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지식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참 지식의 가치 곧 진리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의 가치 곧 선, 그리고 참한 느낌의 가치 곧 미 역시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섬세한 미감을 가진 이, 윤리적으로 올곧게 행위하는 이 또한 진정한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루 존귀함을 그 까닭을 밝혀 설명하고, 그 자신이 그의 사상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많은 독자들 또한 저와 함께 칸트에 공명하기를 기대합니다. 교수생활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르러 있는 저는 이제 칸트 종교철학의 대표작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연구와 번역을 마저 마치고, 간간이 써나가고 있는 인간 문화의 본질에 관한 글을 좀 더 써보려 합니다. 남들과도 대화를 해 볼 수준이라고 스스로 판정이 되면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의로써 대화에 응해 주실 독자에게 미리 감사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1988년부터 번역 … “칸트는 자기 사상대로 살다간 巨人”
[인터뷰] 칸트 3大 비판서 완역한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
2009년 06월 15일 (월) 14:32:05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백종현 서울대 교수  
최근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의 번역본을 선보였다. 이로써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에 이어 3대 비판서가 완역된 셈이다. 서양 철학사의 거목인 칸트의 주요 저서가 새롭게 번역이 됐다는 점에서, 이번 완역은 일종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수신문>은 이번호에서 칸트의 3대 비판서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완수한 백종현 교수를 인터뷰했다. 백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칸트 철학의 무게와 원전 번역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들어봤다.

△이번 판단력 비판 번역 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오랜 만에 언론에서 칸트의 이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칸트가 서양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해주시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비판하거나 추종하면서 철학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서는 철학할 수 없다”, “칸트는 철학사상계 중앙의 대저수지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들이 칸트 안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러한 평가에서 보듯 서양철학사에서 칸트 사상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돼 왔습니다. 오늘날 서양사상의 원류를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 기독교 사상, 수학적 자연과학 사상 등 셋이라고 볼 때 칸트 철학이야말로 이 세 물줄기의 대(大)합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20세기 초에 칸트를 “근대 서양에 다시 태어난 공자(孔子)”라 평하면서, 그 친화성을 강조했고,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에서도 가장 오래고 가장 넓게 이루어진 것이 칸트연구입니다. 이정직(李定稷)이 쓴(1903?1910경) 「康氏[칸트]哲學說大略」은 한국 사람이 쓴 최초의 서양철학에 대한 글로 간주되고 있고,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칸트전공 박사만 해도 100명이 넘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한국철학계의 기본적인 철학 개념들이 칸트를 매개로 형성됐고, 그의 지식이론, 인간존엄 사상, 미학이론, 세계평화 사상, 자유와 평등의 법사상은 현대 한국 사회문화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Kant) 선대의 성 표기가 ‘Cant’이었던 점을 빗대어 “Kant는 Can't다’고 촌평하는 이들이 있듯이, 그리고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칸트는 시대와 문화 의식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해석됨으로써만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입니다. 한국어 역주 작업도 그 일환이라 봅니다.”


△칸트 3대 비판서 각각의 핵심 테제와 상호 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인간이 추구하는 眞·善·美·聖이라는 궁극적 가치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우선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세 물음을 제기하는데, 『순수이성비판』은 첫째 물음, 곧 진리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며 그 결실이 칸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이라 하겠고,『실천이성비판』은 둘째 물음, 곧 善의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는바 그 결실이 그의 윤리학이고,『판단력비판』의 후반부는 다른 종교철학 저술과 함께 셋째 물음, 곧 최고선 및 聖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결실이 희망의 철학인 칸트의 이성종교론입니다. 이에 덧붙여 『판단력비판』의 전반부는 말하자면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 시도하고 있고, 그 결실이 그의 미학이론이라 할 것입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비롯해, 칸트 저작 중 대표적인 기존 번역본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번역본들이 국내의 서양 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순수이성비판』은 제 역서 이전에 이미 8종이, 『실천이성비판』은 2종, 『판단력비판』은 1종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제1, 2비판서는 최재희 선생님 번역판이, 제3비판서는 이석윤 교수님의 역서가 널리 읽혀온 것으로 압니다. 또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형이상학서설』, 『윤리형이상학 정초』,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인간학강의』, 『형이상학강의』, 『교육학강의』, 기타 역사철학 관련 논저 등 『윤리형이상학』을 제외한 주요한 칸트 저술은 이미 한국어 역서가 있습니다. 이 역서들을 접하지 않은 한국의 철학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1930년대부터 등장한 <철학개론> 유의 책 내용은 절반 이상이 칸트 철학으로 채워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졸저,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0 참조), 칸트 철학은 한국인의 초기 서양철학 이해의 기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최재희 선생님의 역서를 이용했는데, 그분의 『순수이성비판』의 각주 중에는 제가 붙인 것도 있고, 최재희 선생님의 『실천이성비판』 출판 때에는 제가 출판사 박영사 편집부에 직접 가서 전과정의 책임 교정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35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생시절에나 교수할 때나 세미나는 학자 양성 과정인 만큼 칸트 원서로 했고, 역서는 참고로만 활용했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칸트 주요 저작의 새로운 번역을 계획하셨는지요.


“제가 1985년 2학기부터 칸트 3비판서의 원서로 대학원 세미나를 매학기 이끌었는데, 그때 한 선배 교수님께서 저에게 독일에서 칸트를 연구한 첫 한글세대 교수이니 기왕이면 종래의 철학 용어들을 재검토하는 작업도 병행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셔서 1988년 10월 전국철학자대회(제1회) 자리에서 ‘칸트 철학 용어 再考’를 제안하는 주제 발표를 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작업을 했습니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출간한 3비판서를 20년 넘게 역주 작업해 이제 겨우 초판을 펴냈습니다. 다행히 독자들이 꾸준히 있어 매년 1~2쇄씩 중간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부분적으로 수정 작업을 하고 있고, 맨 먼저(2002) 출간했던 『실천이성비판』은 출판사의 호의로 현재 완전 개정판 작업을 마쳐서 곧 재출간할 예정이며, 이어서 칸트 이성종교이론의 정수가 담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도 2년 쯤 후에는 출간하려고 한참 작업 중에 있습니다.“


△또 기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본은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알고 싶은데요.


“최재희, 이석윤 두 분 선생님의 역서는 사소한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번역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간 35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전집도 거의 다 간행됐고, 국내외 연구가들에 의해 수많은 논저와 주석서가 나와 그를 반영한 영미권과 일본의 새로운 칸트 전집도 나온 상황이라 제가 그 성과를 고려해서 새 우리말 칸트 역주서를 출간한 것이 어느 정도는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칸트철학계가 백가쟁명의 상태라 우리말 칸트 철학 용어 통일이 쉽지 않아서, 칸트가 3비판서에서 사용한 동일한 용어가 우리말로는 서로 다르게 번역돼 원서를 보지 않는 독자는 해독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주요 저술들을 한 사람이 일관되게 번역하고, 또한 비교적 상세한 해제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칸트의 다른 저술들과 강의록을 찾아내 주해에서 함께 비교 검토하고 있는 저의 역주서들이 원서 없이도 칸트를 읽는 분들에게는 칸트 사상에 이르는 하나의 그런대로 평탄한 길을 제공한 것으로 봅니다.”


△서울대 철학과, 철학사상연구소 일에, 개인 연구까지 하시면서 번역까지 병행했으니,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떤 점이 개인적으로 어려웠는지, 보람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외국어로 돼 있는 철학 저술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뿐만 아니라 해당 외국어와 우리말이 일대일로 대응해야만 하고, 번역자가 또한 이 두 언어에 고루 정통해야 하는데, 이것들 모두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기껏해야 번역은 원전에 대한 역자의 이해와 언어 능력의 범위 내에서 두 언어 사이에 엄존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있을 수 있는 비근한 말을 찾아 엮어 대응시키는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역자라도 연륜에 따라 동일한 원전을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겠고, 세대가 바뀌면서 사용 어휘나 어감을 포함해서 언어생활에 변화가 생기면 그 또한 다른 번역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역주서도 이런 제한 아래서만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역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사상, 자기 글이 아닌 글이기 때문에 문체, 어휘, 어감을 가능한 한 원서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원서가 수수하고 건조하게 쓰여 있는데 이를 화려하고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 놓는 것도 원서의 훼손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 문단, 한 문장, 한 단어를 일일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수차례 확인 작업을 해야 합니다. 칸트 저술의 경우 독일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달라 뒤바꾸는 것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제 경우는 매년 칸트 원서를 대학원 세미나에서 학생들과 한줄한줄 읽어나가고 있고, 또 역서 출판에서는 저의 번역 초고를 저와 함께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원서와 대조하면서 재차 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동작업의 결실입니다. 흔히들 과학 분야는 연구단이 연구를 수행하는데 반해 인문학은 학자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하는데, 저는 이제는 인문학도 연구단 수준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인문학이야 말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는 사람 사이의 학문’, 집단적 지혜가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작업이 바로 연찬이고 그 속에서 학풍이 조성되고 학파 학설이 형성될 것으로 봅니다. 주위에 탁월한 젊은 학도들이 다수 있는 것이 저의 복이고, 그래서 저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힘들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고전의 역주작업이란 고전의 향취 속에서 틈틈이 배움을 나눠 갖는 일이니까요.”


△국내의 많은 철학자들은 번역에 크게 주안점을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유럽 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이 더디고, 부족한 것도 잘 알려진 사정입니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국내의 철학 원전 번역의 실태와 전망에 대해 총체적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인문학의 경우는 80% 이상 인류 공동 자산의 전승이 그 과업이라고 봅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주자나 율곡처럼 어쩌다 나타나는 탁월한 인사들만이 창작을 내 전승할 자산을 늘려주지요. 창작할 능력이 있는 이는 창작 업적을 내 그 본분을 다하고, 그럴 재주가 없는 이는 전승의 소임을 맡아 그간 공부하도록 지원해 준 사회에 보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저도 더러 논문도 쓰고 저술도 냅니다만, 논문이든 저술이든 역서이든 인문학은 인간사회에 향취와 품격을 더하는 것이 그 의의인 만큼 그에 기여한 정도에서 평가하고 평가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경우는 그렇기에 고전의 역서가 [평범한] 저술에 비해 그 가치가 덜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칸트의 원저에 비할 때 그 역서는 미천한 것입니다만.) 저서이든 역서이든 출판되면 일정 부수가 팔릴 때 출판사가 계속 사업을 해나갈 수 있을 텐데,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학술서 판매는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당 기간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책값이 그 저작의 공력에 비례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께에 따라 ?종이 값 산정 방식으로? 정해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책은 출판되면서 이미 폐지로 활용할 때의 값이 매겨지는 셈입니다. 그림도 크기로 값을 매겨 사고파는 세상이기는 합니다만.
  현재 의미 있는 철학 원전은 한문을 포함해서 모두 외국어로 쓰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철학 저술이 한국어로 쓰여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인데 아직 우리 자신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저술을 생산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의 역주해는 철학 연구의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역주해 작업은 연구가 아니라고 본다면 이는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최근에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 등 의미 있는 역서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학술어 사용도 중구난방의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를 지나 의견이 대체로 모아지는 시점에서는 학회나 어떤 연구소 차원에서 주요 사상가의 전집(현재는 니체가 나왔고, 플라톤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출간도 기획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철학 출판 시장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칸트는 물론이고, 여러 그리스 고전, 근대철학의 고전 등등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이 많지만, 최근 철학자들의 책들만 집중적으로 번역 출간되는 현상이 그렇거든요. 학문적 깊이 보단 입맛을 추구하는 대중과 출판사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러한 대중의 입맛에 영합하고자 하는 일부 학자들이 문제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현상인지….


“제 소견으로는 현재 우리 출판 사정은 어느 쪽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므로 어느 쪽이든 우선 앞서 나갈 수 있는 쪽이 앞서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세상일들이란 세월이 가면서 균형이 맞춰지지 않던가요. 다만 저 자신도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정확성과 진정성을 결여한 책의 출판은 사회에 해독을 입히는 것입니다. 책의 출판 양이 증가하는 만큼 비평의 틀도 갖춰져 선량한 독자들을 부정확하고 불량한 책 더미로부터 보호하는 체제도 잘 수립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사회의 성숙도도 높아졌으니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향후 어떤 연구 및 번역 계획이 있으신가요.


“고전 읽기는 영혼(독자)과 영혼(저자)의 대화입니다. 제가 칸트 읽기에 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칸트에 공명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칸트의 사상을 합리적 이상주의라고 봅니다. 과학적 지식의 혁혁한 성과를 체험한 근대인들은 과학적 지식을 지식의 전형이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그럴 듯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의 옷을 입히는 작업을 벌립니다. 이때 칸트의 이성비판이 하는 일은 참된 지식과 사이비 지식이 뒤섞이지 않도록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 또한 명확하게 한계를 짓습니다. 곧, 지식은 자연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 국한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안에서 의식주를 구해 살면서도 理想 실현을 기획하고, 내가 자연스럽게 하는 짓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구별하고, 한 송이 장미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악한 인간에게는 몸서리를 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에게는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식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지식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참 지식의 가치 곧 진리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의 가치 곧 선, 그리고 참한 느낌의 가치 곧 미 역시 인간이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섬세한 미감을 가진 이, 윤리적으로 올곧게 행위하는 이 또한 진정한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루 존귀함을 그 까닭을 밝혀 설명하고, 그 자신이 그의 사상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많은 독자들 또한 저와 함께 칸트에 공명하기를 기대합니다. 교수생활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르러 있는 저는 이제 칸트 종교철학의 대표작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연구와 번역을 마저 마치고, 간간이 써나가고 있는 인간 문화의 본질에 관한 글을 좀 더 써보려 합니다. 남들과도 대화를 해 볼 수준이라고 스스로 판정이 되면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의로써 대화에 응해 주실 독자에게 미리 감사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