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삶이었고
감으면
기나긴 세월이 축적되어
선험적으로 다가오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대의 모습이 아롱거렸는데
슬픈 것인지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자고,
다가오는 시간에 대비하자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그대는 무슨 음성에 귀 기울이고
육체는 왜 현재에서 배회하고
정신은 늘 방황하는지
빛과 암흑이 서로 어울렸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이 멈추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공간은 머물러
사랑도 깨달음도 실패한다.
슬프다고 울적해질까,
즐겁다고 희희낙락댈까?
[후기]
Unsere Erkenntnis entspringt aus zwei Grundquellen des Gemüts, deren die erste ist, die Vorstellungen zu empfangen (die Rezeptivität der Eindrücke), die zweite das Vermögen, durch diese Vorstellungen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Spontaneität der Begriffe); durch die erstere wird uns ein Gegenstand gegeben, durch die zweite wird dieser im Verhältnis auf jene Vorstellung (als bloße Bestimmung des Gemüts) gedacht. Anschauung und Begriffe machen also die Elemente aller unserer Erkenntnis aus, so daß weder Begriffe, ohne ihnen auf einige Art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noch Anschauung ohne Begriffe, ein Erkenntnis abgeben kann. Beide sind entweder rein, oder empirisch. Empirisch, wenn Empfindung (die die wirkliche Gegenwart des Gegenstandes voraussetzt) darinnen enthalten ist: rein aber, wenn der Vorstellung keine Empfindung beigemischt ist. Man kann die letztere die Materie der sinnlichen Erkenntnis nennen. Daher enthält reine Anschauung lediglich die Form, unter welcher etwas angeschaut wird, und reiner Begriff allein die Form des Denkens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Nur allein reine Anschauungen oder Begriffe sind a priori möglich, empirische nur a posteriori.
Wollen wir die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Vorstellungen zu empfangen, sofern es auf irgendeine Weise affiziert wird, Sinnlichkeit nennen, so ist dagegen das Vermögen, Vorstellungen selbst hervorzubringen, oder die Spontaneität des Erkenntnisses, der Verstand. Unsere Natur bringt es so mit sich, daß die Anschauung niemals anders als sinnlich sein kann, d. i. nur die Art enthäl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Dagegen ist das Vermögen, den Gegenstand sinnlicher Anschauung zu denken, der Verstand. Keine dieser Eigenschaften ist der anderen vorzuziehen. Ohne Sinnlichkeit würde uns kein Gegenstand gegeben, und ohne Verstand keiner gedacht werden.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Daher ist es ebenso notwendig, seine Begriffe sinnlich zu machen, (d. i. ihnen d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beizufügen,) als seine Anschauungen sich verständlich zu machen (d. i. sie unter Begriffe zu bringen). Beide Vermögen, oder Fähigkeiten, können auch ihre Funktionen nicht vertauschen.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 Deswegen darf man aber doch nicht ihren Anteil vermischen, sondern man hat große Ursache, jedes von dem andern sorgfältig abzusondern, und zu unterscheiden. Daher unterscheiden wir die Wissenschaft der Regeln der Sinnlichkeit überhaupt, d. i. Ästhetik, von der Wissenschaft der Verstandesregeln überhaupt, d. i. der Logik.
-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
우리의 지식은 정신의 두 가지 근본적 근원들로부터 출현하는데 그 첫 번째는 재현들을 받는 능력이고 (인상[印象: der Eindrücke]들에 대한 수용성[受容性: die Rezeptivität]) 두 번째는 그 능력을 통하여 대상의 재현을 아는 능력이다 (개념들[을 생산하는]의 자발성[自發性: Spontaneität]); 전자(前者)를 통하여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후자(後者)를 통하여 저 주어진 재현과 (정신의 결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관련하여 대상이 사고된다. 그리하여 직감과 개념들은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의 요소들을 구성하여, 어떤 정도로도 그 개념들과 일치하는 직감이 없는 개념들과 개념들이 없는 직감은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 직감과 개념들 모두는 순수하거나 혹은 경험적이다. 직감과 개념들에 (대상의 실제적 존재를 전제하는) 감지가 포함될 때, 직감과 개념들은 경험적이다: 그러나 재현에 감지(感知: Emfindung)가 혼합되지 않을 때 직감과 개념들은 순수하다. 감지는 감각적 지식의 물질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그래서 순수한 직감은 그 아래서 사물이 직감되는 형태만을 포함하며, 순수한 개념은 일반적인 대상에 대한 사고의 형태만을 포함한다. 순수한 직감들이나 순수한 개념들만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경험적 직감들과 경험적 개념들은 경험적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정신의 수용성(受容性: Rezeptivität), 즉 재현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어떤 정도로 영향을 받는 한, 감성(Sinnlichkeit)으로 지칭될 것이라면, 재현들을 자체로부터 생산해내는 정신의 능력인 지식의 자의성(自意性: Spontaneität)은 오성(悟性: 이해력: Verstand)으로 지칭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을 그렇게 구성되어서 직감은 감각적인 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는데 다시 말해서 직감은 대상으로부터 우리가 영향을 받는 방식만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감각적 직감의 대상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기능은 오성(悟性: 이해력: Verstand)이다. 이 특징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우선하지 못한다. 감성 없이는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지 않고 오성(悟性: 이해력: Verstand)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고되지 않는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감은 맹목적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개념들을 감성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개념들에 대상을 감지로써 덧붙인다는 것) 우리의 직감들을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만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직감들을 개념 아래 두는 것) 필요할 따름이다. 두 가지 능력 또는 재주는 자체의 기능들을 교환할 수 없다. 오성(悟性: 이해력: Verstand)은 어떤 것도 직감할 수 없고 감각은 아무 것도 사고할 수 없다. 오직 그것들의 결합을통해서만 지식이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하나의 공헌을 다른 하나의 공헌과 혼동할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는 하나들 다른 하나로부터 신중하게 분리하여 구분할 강력한 근거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반적인 감성의 규칙들에 대한 과학, 즉 감성학을 일반적인 오성(悟性: 이해력: Verstand)의 규칙들에 관한 과학, 즉 논리학으로부터 구분한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