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지식론과 플라톤의 지식론
I
플라톤의 저서 변명(Apology)은 자신에 대한 기소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옹호하는 말과 짧은 보고서를 담고 있다. 나는 그의 말을 진짜로서 간주한다. 그 말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대담한 질문을 받고 델포이(Delphi)의 신탁이 다음과 같이 답변한 것을 소크라테스는 듣고 자기가 얼마나 놀라고 경계했는지를 기술한다: ‘아무도 더 현명하지 않다.’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문했다: 도대체 아폴로 신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이유인즉 내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우 현명하지도 않고 심지어 조금도 현명하지 않다’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신탁의 판단에 의하여 신이 의미하는 바를 자신이 풀 수 없음을 소크라테스는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반증해보기로 소크라테스는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현명한 것으로 간주되던 어떤 사람으로부터 ㅡ 아테네의 정치가 중 한 명 ㅡ 배우려고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변명[Apology] 21D): ‘나는 틀림없이 이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 우리 중 누구도 훌륭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도 역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뭔가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정치가들과 이야기를 해본 후에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에게 갔다. 결과는 동일했다. 그다음 소크라테스는 기술자들에게 갔다. 당시 이 사람들은,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정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다른 것들, 심지어 가장 훌륭한 것들도 또한 알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은 그들이 지닌 진정한 지식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결국 델포이 신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에 도달했다: 분명히 신(神)은 소크라테스에 관하여 말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다;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처럼 실제로 자신이 현명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할 목적으로만 신(神)은 이 이름을 이용했다.
II
우리의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통찰은 ㅡ 내가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ㅡ 최고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통찰이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 of Socrates)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된 적이 없다. 이 소크라테스의 통찰은 흔히 진지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 통찰은 역설적으로서 간주되었다. 플라톤 자신은 우리의 무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그리고 그와 함께 소크라테스의 자세를 결국 배척했다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지성적 겸손에 대한 요구를 배척했다.
정치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론을 플라톤의 이론과 우리가 비교하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이 특정 요점은 틀림없이 정치학 박사학위에 특히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가 정치가는 현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에 두 사람 각자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정치가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자신의 무지를 완벽하게 의식해야 함을 그것이 의미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지성적 겸손을 옹호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네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인식하라!’
대조적으로 플라톤은, 정치가는 현명해야 한다는 요구를 현명한 자의 통치를 위한, 궤변가들의 통치를 위한 요구로서 해석한다. 교육을 잘 받는 변증가인 박식한 철학자만이 통치할 능력이 있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왕이 되어야 하고 왕은 완전히 훈련받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유명한 고집이 의미하는 바이다. 철학자들은 흔히 플라톤이 내건 이 조건에 의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왕들은 오히려 인상을 덜 받았다고 우리가 생각할 것이다.
정치가들이 현명해야 한다는 요건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의 더 큰 대조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지성적 겸손과 지성적 오만 사이의 대조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와 ㅡ 인간 지식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인정 ㅡ 과학주의 ㅡ 지식과 지식인에게 그리고 과학과 과학자들에게 그리고 지혜와 현명한 사람에게 그리고 배우는 사람과 배운 사람에게 권위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이론 ㅡ 사이의 대조이다.
이것으로부터, 인간 지식에 대한 평가에서의 차이로 인하여 ㅡ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차이 ㅡ 대조되는 윤리-정치학적 목표들과 요건들이 발생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 1996년, 31-3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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