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실험에 대한 전체론의 위험성
24 사회적 실험에 대한 전체론적 이론
전체론적 사유는 특히, 자체가 사회적 실험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론에 미치는 영향에서 해롭다 (위 2절에서 설명된). 대규모나 전체론적인 사회적 실험이 조금이라고 가능할지라도 과학적 목적에 극도로 부적당하다는 역사주의적 견해에 점진적 공학자가 동의할지라도, 실재론적이 되기 위하여 역사주의와 유토피아주의 모두에게 공통적인 사회적 실험이 사회 전체를 개조하려는 유토피아적 시도의 특징을 띠어야 한다는 전제를 그 공학자는 강력하게 부인할 것이다.
우리의 토론을, 유토피아적 강령에 대한 매우 분명한 반론 즉, 그런 과업을 위하여 필요한 경험적 지식을 우리가 지니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토론으로써 시작하면 편리하다. 물리공학자의 청사진은 실험적 기술(技術: technology)에 근거한다; 물리공학자의 활동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청사진은 실용적 실험에 의하여 시험된다. 그러나 사회공학자의 전체론적 청사진은 비교 가능한 실용적인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물리공학과 전체론적 사회공학 사이에서 주장되는 유추는 붕괴한다; 전체론적 계획하기는 ‘유토피아적’으로서 올바르게 서술되는데 왜냐하면 자체의 계획에 대한 과학적 토대가 어디에도 없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비판에 직면하여,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실용적 경험에 대한 그리고 실험적 기술(技術: technology)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실험을 수행하는 것으로부터 혹은 유토피아적 공학자의 견해로 동일 한 것에 해당하는 것인 전체론적 공학으로부터 위축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결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이 크건 작건 우리는 그 지식을 모두 사용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주장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항공기 디자인에 관하여 얼마간의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 지식을 지니지 않았던 어떤 개척자가 감히 항공기를 디자인하여 그 항공기를 시험했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주의자는, 자신이 옹호하는 전체론적 방식은 사회에 적용되는 실험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지어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유인즉 그는, 역사주의자와 공동으로, 공장에서나 마을에서나 심지어 지역에서 실행되는 사회주의 실험과 같은 소규모 실험들이 전적으로 결정적이 아닐 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고립된 ‘로빈슨-크루소 실험들’은 ‘거대한 사회(Great Society)’에서 현대 사회생활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 실험들은 심지어 ‘유토피아적’이라는 별명을 ㅡ 이 용어가 역사적 경향에 대한 무시를 함축하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ㅡ 받을 자격이 있다. (이 경우에서 함축은, 증가하는 사회생활의 상호 의존성을 향한 경향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일 터이다.)
유토피아주의와 역사주의가, 사회적 실험은 (그런 것이 있다면) 전체론적 규모로 실행된다면 가치를 띨 수 있을 터라는 견해에서 일치함을 우리가 안다. 이 널리 믿어지는 편견은, 사회적 분야에서 ‘계획된 실험’을 실행할 입장에 우리가 놓이지 않는다는 그리고 이 분야에서 지금까지 실행된 ‘우연한 실험’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역사를 참작해야 한다는 믿음을 포함한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하여 두 가지 반론을 가지고 있다: (α) 이 견해가, 과학적일 뿐 아니라 과학 이전이기도 한 모든 사회적 지식에 근본적인 저 점진적 실험을 간과한다는 것; (b) 전체론적 실험은 우리가 지닌 실험적 지식에 크게 기여할 것 같지 않다는 것; 그래서 그 전체론적 실험은, 이 실험이라는 용어가 획득된 결과를 기대되는 결과와 비교함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수단을 지적하는 데 사용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결과가 불확실한 행위와 동의어라는 의미에만 ‘실험’으로서 지칭될 수 있다는 것.
(α)에 관하여 사회적 실험에 대한 전체론적 견해로 인하여, 우리가 사회생활에 대하여 많은 양의 실험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고 지적될 것이다. 경험이 있는 사업가와 경험이 없는 사업가나 조직가 또는 정치가나 장군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그들이 사회에서 경험한 것에서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관찰을 통해서 혹은 자신들이 관찰한 것을 숙고함에 의해서 뿐 아니라 어떤 실용적 목표를 성취하려는 노력에 의하여 습득된 경험한 것에서의 차이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습득된 지식은 통상적으로 과학 이전의 종류이고, 따라서 신중하게 고안된 과학적 실험에 의하여 습득되는 지식보다 우연한 관찰에 의하여 습득되는 지식과 더 유사하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지식은 단순한 관찰에 근거한다기보다 실험에 근거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한 이유는 아니다. 새로운 가계를 개업하는 식료품업자는 사회적 실험을 실행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극장 앞에서 줄을 서는 사람도, 다음번에 자신의 좌석을 예약함에 의하여 자신이 이용할 실험적인 전문적 지식을 얻는데 그 지식은 다시 사회적 실험이다. 그리고 실용적 실험만이,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가격은 모든 공급 증가에 의하여 낮아지기 마련이고 모든 수요 증가에 의하여 인상되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가르쳤음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다소 더 큰 규모의 점진적 실험에 관한 사례는, 자신의 생산품 가격을 바꾸려는 독점자의 결정일 터이다; 개인 보험회사에 의해서건 공공 보험회사에 의해서건 새로운 유형의 건강 및 고용 보험의 도입; 혹은 경기순환과 싸우려는 새로운 판매세나 정책의 도입. 이 모든 실험은 과학적 목적이라기보다 실용적 목적을 참작하여 실행된다. 게다가 대기업의 이익을 즉각적으로 증대시키려는 목적 때문이라기보다 시장에 대한 대기업의 지식을 증대시키려는 (물론 더 나중 단계에서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의도적 목적 때문에 몇몇 대기업에 의하여 실험이 실행되었다. 그 상황은, 조선이나 항해술과 같은 문제에서 우리의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지식이 최초로 습득된 물리공학 및 과학 이전의 방법에 대한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이 방법이 개선되어 궁극적으로 더 과학적인 경향을 띠는 기술(技術: technology)에 의하여 대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실험에 근거할 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에 근거하여 동일한 방향으로 더 체계적인 접근방식에 의하여 대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는 듯하다.
이 점진적 견해에 따라서 과학적 방법 즉, 비판적 방법을 점점 더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크게 중요할지라도 과학 이전의 접근방식과 과학적인 실험적 접근방식 사이에 뚜렷하게 표시된 구분선이 없다. 두 가지 접근방식 모두는 근본적으로, 시행착오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우리는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순히 관찰한 것을 등재하지 않고 몇 가지 다소 실용적이고 확정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능동적으로 시도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우리는 진보를 이룩한다: 우리가 저지른 오류를 독단적으로 계속하는 대신 그 오류를 인정하고 비판적으로 이용하려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분석이 하찮게 들릴지라도 이 분석은 모든 경험과학의 방법을 서술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더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시도의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있을수록 그리고 더 비판적으로 우리가 항상 저지르는 오류를 우리가 비판적으로 찾을수록 이 방법은 점점 더 과학적 특징을 띤다. 그리고 이 공식은 실험의 방법뿐 아니라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관계도 포함한다. 모든 이론은 시도이다;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이 작동하는지를 알려고 시험되는 잠정적 가설이다; 그리고 실험에서 밝혀지는 모든 입증은, 우리의 이론이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알아내려는 시도에서 비판적 정신으로 실행된 시험의 결과일 따름이다.
점진적 공학자나 기술자에게 이 견해들은, 그가 과학적 방법을 사회연구에 그리고 정치에 도입하고 싶어 한다면 매우 필요한 것은 비판적 태도 및 시행뿐 아니라 착오도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류를 기대하는 것뿐 아니라 오류를 의식적으로 탐색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항상 옳다는 것이라는 비과학적 약점이 있고, 이 약점은 전문 및 아마추어 정치인 가운데 특히 일반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과 같은 것을 정치에서 적용하는 유일한 길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인 결점이 없는 정치적 조치는 있을 리가 없다는 전제를 기초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결점을 찾고 이 결점을 발견하여, 이 오류를 공개해서 이 오류를 분석하고 이 오류로부터 배우는 것, 이것이 정치과학자뿐 아니라 과학적 정치가가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과학적 방법은, 실수를 무시하고 실수를 숨겨서 그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실수를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리 자신이 확신하는 커다란 기법(技法: art)을 더 큰 기법에 의하여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더 큰 기법은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수용하여 그 실수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하여 이 지식을 적용하여 우리가 미래에 그 실수를 피할 기법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전체론적 실험으로부터 혹은 더 정확하게 전체론적 꿈에 근접하는 규모로 수행되는 조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인 요점 (b)로 (내가 앞 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전체론적 실험이 ‘사회 전체’를 개조한다는 급진적 의미에서 전체론적 실험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회한다. 우리의 주요점은 매우 단순하다: 우리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많은 사람의 생명을 포함하는 우리의 행동이 야기하는 실수를 향하여 우리가 비판적 태도를 지속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매우 큰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이유는 도덕적일 뿐 아니라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이기도 하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일이 실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정 조치가 결과 중 어떤 결과에 책임이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특정 결과를 특정 조치에 정말로 귀속시킨다면 우리는 문제의 전체론적 실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이전에 습득된 어떤 이론적 지식을 토대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전체론적 실험은 특정 결과를 특정 조치에 귀속시키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실험에 ‘전체 결과’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평가하기는 틀림없이 어렵다. 이 결과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지니고 독립적이며 비판적 서술을 확보하려는 심지어 가장 큰 노력도 성공적으로 판명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실행될 개연성이 적다; 반대로, 전체론적 계획과 그 계획의 결과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이 용인되지 않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이유는, 대규모로 계획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드럽게 표현하면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상당한 불편을 틀림없이 초래하는 과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획에 반대하고 계획에 대하여 불평하는 경향이 항상 있을 것이다. 이 불평 중 많은 불평에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진전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귀를 막을 것이다; 사실상 비합리적 반론을 억누르는 것이 그의 업무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비합리적 반론들과 함께 그는 틀림없이 합리적 비판도 변함없이 억누른다. 그리고 불만 표현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하여 심지어 가장 열정적인 만족 표현도 감소하여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사실, 다시 말해서 개별 시민에 대한 계획의 결과를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없다면 과학적 비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체론적 계획하기와 과학적 방법을 결합하는 난제는 지금까지 지적된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다. 전체론적 계획자는,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쉽지만 많은 개별적 사람의 정신에 분배되어 집중된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필수적일 터인 모든 저 지식을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광범위한 결과를 낳는다. 그렇게 많은 개인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어서, 개인적 차이점을 제거함에 의하여 전체론적 계획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문제를 단순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틀림없이 교육과 정치선전에 의하여 이해관계와 신념을 통제하여 정형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신에 권력을 행사하려는 이 시도는 사람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알아낼 가능성을 파괴하는데 이유인즉 그 시도가 사유의 자유로운 표현, 특히 비판적 사고의 자유로운 표현과 분명히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 시도는 틀림없이 지식을 파괴한다; 그래서 권력 장악이 클수록 지식 실종이 클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권력과 사회적 지식은 보어[Bohr]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서 ‘상보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술하기 어렵고 유행하는 이 용어에 대하여 유일하게 명백한 예시로 심지어 판명될 것이다.)
모든 이 언급은 과학적 방법이라는 문제에 국한된다. 그 언급으로 인하여, 계획하는 유토피아적 공학가가 지닌 근본적 선의(善意)를 질문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는 놀라운 전제가 함축적으로 허용되는데 그 공학가에게 적어도 독재 권력에 근접하는 권위가 주어진다. 토니(Tawney)는 다음과 같은 말로 루터(Luther)와 그의 시대에 대한 토론을 마친다: ‘유니콘과 불의 요정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적이어서, 마키아벨리와 헨리 VIII 세의 시대에 저 드문 괴물인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군주에 대한 숭배를 쉽게 믿는 자양분이 생겼다.’ 여기서 ‘유니콘과 불의 요정’이라는 단어들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군주’로 대체하라; 두 가지 명칭을 그 명칭들에 대한 더 명백한 명칭들로 대체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군주’라는 표현을 ‘자애로운 계획 권위자’로 대체하라: 그러면 여러분 시대를 너무 쉽게 믿는 것에 대한 서술이 여러분에게 있다. 이 너무 쉽게 믿는 것은 여기서 반론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계획자가 지닌 무제한적이고 변함없는 자애로움을 전제하면서, 그 계획자들이 자신들의 조치가 야기하는 결과가 자신들의 선한 의도와 일치하는지를 언제고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분석이 밝힌다고 언급될 것이다.
점진적 방법에 대하여 상응하는 비판이 제시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이 방법은, 어떤 궁극적 선(善: good)을 추구하고 그 선(善: good)을 위하여 싸우기보다 (전체론자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바와 같이) 사회의 가장 크고 가장 시급한 악(evils)을 찾아내어 대항해서 싸우기 위하여 더욱 특히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확정된 악행에 대항하는, 구체적 형태의 불의와 착취에 그리고 궁핍이나 실업과 같이 피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항하는 체계적 싸움은 사회에 대한 멀고도 이상적인 청사진을 실현하려는 것과 매우 다른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더 쉽게 평가되어서 이 방법이 권력의 축적을 그리고 비판 억압을 틀림없이 야기한다는 자연발생적 이유가 없다. 또한 구체적 악행과 구체적 위험에 대항하는 그런 싸움은, 유토피아 건설이 그 계획자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일지라도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싸움보다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개연성이 더 크다. 공격을 준비하거나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서 침략을 방어로 선전함에 의하여 공공의 지지를 동원할 목적으로 대중의 비판이 통상적으로 억압되는 반면, 침략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방어하는 민주 국가에서 대중의 비판을 억압하지 않고도 필요한 포괄적 조치를 (심지어 전체론적 특징을 띨) 위하여 충분한 지지가 기꺼이 제공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것에 의하여 아마도 조명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방식이 사회학 분야에서 적용되는 참된 실험적 방법이라는 유토피아주의자의 주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주장은 우리의 비판에 의하여 축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리공학과 전체론적 공학 사이의 유추에 의하여 이것은 더욱 예시될 수 있다. 물리적 기계가 청사진을 그리고 청사진과 함께 그 기계의 생산을 위한 전체 공장, 기타 등등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많은 점진적 실험이 사전에 수행되었다는 이유로만 가능하다. 모든 기계는 매우 많은 작은 개선의 결과이다. 모든 모형은 틀림없이, 시행착오의 방법에 의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조정에 의하여 ‘발전’된다. 생산 공장의 설계에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표면적으로 전체론적 계획은, 모든 종류의 실수를 우리가 이미 저질렀다는 이유로만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계획이 커다란 오류를 낳는다고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물리공학과 사회공학 사이의 유사점은, 더 세밀하게 조사된다면, 전체론자를 반대하게 되고 점진적 사회공학자를 선호하게 된다. ‘사회공학’이라는 표현은 이 유사점을 암시하는데 일말의 권리도 없이 유토피아주의자에 의하여 무단으로 점거되었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년, 83-92쪽 ㅡ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일반화는 기간에 국한되는가 (수정본) (0) | 2025.10.24 |
|---|---|
| 실험적 조건의 변화가능성 (0) | 2025.10.24 |
| 전체론에 대한 비판 (0) | 2025.10.24 |
| 역사주의와 전체론의 불순한 연합 (0) | 2025.10.24 |
| 점진적 공학 대(對) 유토피아적 공학 (0) | 2025.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