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을 만든 사악한 사하로프
그때 소련이 미국을 파괴할 가능성을 지닌 최초의 시기였다. 소련인들은 사하로프가 자신의 비망록에서 말하는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 역사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결정된 목표인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희망을 지니지 못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바꾼 것이 이 책이었다. 그는 당시 범죄자로서 무책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귀하는 귀하 자신이 1981년 뉴욕에서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박애주의자, 위대한 영웅’으로서 극찬한 197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사하로프가 수소폭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 귀하는 생각을 바꾸었는가?
그가 나중에 한 일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그의 책은 초기 시절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든 상황을 담고 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면을 살필 수는 없다: 저것은 역사학자들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를 들어 이런 것을 인용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그 폭탄의] “깨끗한(clean)” 복제품을 시험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폭탄의 위력을 감소시킬 터이지만 거대한 폭탄(Big Bomb)은 이전에 실험된 폭탄을 여전히 크게 능가할 것이어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수천 배 더 강력할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몇천 배나 더 강력한 폭탄.’ ‘몇(several)’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것이 최소한 셋을 의미한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다음 사실을 고려하면 저것은 보수적 전제이다. 사하로프는 자신의 인격에서 많은 의문스러운 점을 지니고 있지만, 진실을 서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그는 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ㅡ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보다 다소 더 약한 폭탄의 복제품에 대하여 ㅡ ‘몇천 배’라고 말한다면, 그 폭탄은 적어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3,000배 더 강력한 것이었다. 사하로프는 베리아(Beria)의 협조받으며 스탈린 치하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그 폭탄 제조와 관련하여 베리아와 한 시간이나 긴 사적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여러 해 동안 실험한 후에 실제로 결정적 실험이 1961년에 ㅡ 내가 생각하기에 9월에 ㅡ 실시되었다. 흐루쇼프는 물론 이 일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었고 자신이 이렇게 회상한다: ‘미국이 쿠바에 있는 미사일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기에 너무 늦을 때까지 미사일이 쿠바에 있다는 것을 미국이 모르게 쿠바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배치하는 생각을 내가 가진 것은 내가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이었다.’
그 폭탄은 시험을 통과했고 흐루쇼프는 쿠바를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그 생각이 그에게 떠오른 것은 짧은 거리인 터키에 배치된 미국 핵탄두에 대하여 그가 생각하고 있던 불가리에서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삼스러웠나?
한 가지 새삼스러웠던 것은 소비에트 핵 잠재력의 규모였다. 수소폭탄이 실험된 후 1년 만에, 흐루쇼프는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폭탄들은 쿠바로 운송되었고 미국이 알아챘을 때 이미 38개의 폭탄이 발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쿠바에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에게 모든 폭탄을 쿠바로 운송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추가하여 서술하는바: ‘우리는 워싱턴과 같은 작은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뉴욕, 시카고 그리고 다른 거대한 산업도시들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미사일을 이미 배치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다르게 말했지만, 그는 비망록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 순간만큼 미국이 그렇게 실제적인 파멸의 위협에 직면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하게 계산해보자. 쿠바에 이미 설치된 38개의 핵탄두 각각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탄두보다 3,000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 파괴 잠재력은 한 도시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114,000배 더 컸다.
세계의 역사가 당시 파멸에 근접했다고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알지 못했던 것은 소비에트 핵 잠재력의 실제 규모였다. 이것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로버트 케네디는 그 위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고 그 위기에 관하여 중요한 책을 썼다. 물론 그들은 폭탄이 대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폭탄의 실제 규모를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규모는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사하로프가 제공하는 정보로부터만 알려진다. 나는 심지어 그 주제에 관한 가장 최근의 저서인 마이클 베슐로스(Michael Beschloss)가 쓴 참고문서가 많은 저서에서도 나는 그 규모를 읽은 적이 없다.
귀하가 의미하는 바는 역사학자들이 사하로프의 말을 아직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나는 역사학자들을 공격하고 싶지 않다; 역사학자들에게 그다지 많은 시간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저 구절을 언급하는 사하로프의 저서에 대한 어떤 검토서도 읽지 못했다.
사하로프가 만든 수소폭탄의 규모 때문에 귀하는 사하로프에 관한 귀하의 생각을 바꾸었는가? 결국, 그 폭탄의 파괴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에 있는 또 다른 구절에 주목하자. ‘대형폭탄의 실험을 끝낸 후, 군부가 효과적인 운반체 없이 그 폭탄을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보았다 (폭격기는 격추되기가 너무 쉬웠다).’ 그러므로 사하로프는 자기 임무가 아닐지라도 그 폭탄이 사용될 수 없어서 ‘근심’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다른 것을 보자:
나는 잠수함에서 발사되어 물을 증기로 바꿀 핵-추진 제트엔진을 장착한
거대한 어뢰라는 관념을 꿈꾸었다. 목표물은 수백 마일 떨어진 적의
항만들이 될 터이다. 해군 전문가들은, 우리가 적의 항만들을 파괴할 수
있다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우리를 확신시켰다. 어뢰의 몸통은
폭발하는 수뢰를 견디고 어뢰 저지 그물을 뚫기에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어뢰들이 목표물에 도달하면 100메가톤의 위력이
물밑과 공중 모두에서 폭발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를 낳을 것이다.
사하로프가 자신이 명령받은 것을 수행하는 수동적 학자만이 아니고 자신이 능동적 역할을 맡았던 사람임을 당신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가 부언하는바:
나는 어뢰 기획의 초기 단계에 해군 소장 포민(Fomin)과 상의했다. 그는
무자비한 대량 살상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 진저리를 쳤으며 함대의
장교들과 수병들은 공개된 전장에서 무장한 적과만 싸운 데 익숙하다고
언급했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다른 사람과 그 기획을 토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사람이 그 기획을 이해하는 것을 나는 괘념치 않았다; 그
기획은 현재의 군사적 원칙과 맞지 않아서 필요한 낭비적 예산을 쓴다면
어리석은 일일 터이다.
‘완전히 당황해서’! 저것이 비망록 전체에서 사하로프가 그와 같이 말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한 방에 뉴욕을 파괴할 수 있는 이 가공할 것을 꿈꾼 후에 그는 남의 의견을 듣고, 남과 상의하고, 함대로 가서 어떤 제독의 의견을 구하는데 그 제독은 이렇게 말한다: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하로프는 완전히 당황한다!
귀하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과 알고 지냈다. 귀하는 그 폭탄 제조와 사용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그 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폭탄 제조를 지지하여 자신의 편지에 서명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시기에, 흐루쇼프의 말을 이용하면 자본주의를 ‘박멸하기(liquidate)’를 원하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공격적 지도자들의 수동적 도구만이 아니었다. 그는, 반대로, 자본주의란 박멸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수소폭탄이 실험될 때 그는 39세였고 이 해군 제독을 만나러 갔을 때 40세였다.
귀하는 사하로프가 무시무시한 일들을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왜 귀하는 10년 전에 내렸던 판단을 바꾸었는가? 귀하가 초기에 판단한 사하로프를 다시 재판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에 의하여 밝혀지는바, 사하로프같이 위대한 지능을 소유한 사람, 소비에트 정권이 러시아를 지독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던 사람이 ㅡ 그리고 정말로 몇 년 후에 알았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저서에서 사하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노동자였다’ ㅡ 이것은 독일의 나치 전범자들 모두가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번은 흐루쇼프에게 ‘나는 나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자신이 수소폭탄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폭탄실험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다. 사하로프는 자신이 만든 초대형 폭탄의 모든 실험으로 인하여 수천 명의 사람이 방사선 때문에 암에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는 그 실험을 실행하지 않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화를 내면서 그에게 ‘과학적’ 쟁점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에 끼어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저 때 사하로프가 ‘나는 나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하로프에 관하여 언급될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그의 비망록은 자세히 읽혀야 한다.
그러나 사하로프에게는 또 다른 면이 또한 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크게 용기를 내어, 정권에 도전했고 민주주의적 변화의 지지자가 되었다.
미국을 파괴할 새로운 종류의 무기인 어뢰를 설계하는 작업이 그가 요구받지 않고도 생각해낸 자신의 주도권이었음은 그의 비망록 221쪽을 보면 분명하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를 박멸한다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서 ‘쥐덫’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미래 역사의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을 결정하는 법칙을 안다는 원칙에 근거한 일종의 지성적 블랙홀과 같았다. 게다가 당신은 40세의 그가 나이로 판단을 내리기에 너무 젊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나중에 자기 견해를 바꾼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40세에 당신을 살인하고 몇 년 후에 후회하며 살인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살인자가 아닌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사하로프의 말년에 대하여 높은 견해를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판단을 수정할 필요가 나에게 정말로 있다. 나는 그가 전쟁범죄자로서 시작했다고 말하겠고, 나는 말하자면 그 자신이 나중에 시행한 행동에 의하여 완전히 사면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하로프가 러시아에서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귀하가 참작할 수 없는가?
그가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함정’을 보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예를 들어 17세에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인 자유국가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는 러시아에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상상이 가능한 가장 강력한 정도로 탁월한 지능과 재능 그리고 용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미치는 이념의 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틀림없이 사하로프는 전자(前者)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97년, 23-7쪽 ㅡ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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