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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의 교훈, 대담 1 (1991년)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5. 11. 16. 19:09

금세기의 교훈 대담 I.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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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I (1991)

 

 

 

 

 

 

 

 

 

 

 

 

1

 

평화주의, 전쟁, 공산주의와의 조우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 대담을 본질적 요점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귀하의 가장 중요한 저서에서 귀하가 매우 완벽하게 표현한 마르크시즘에 대한 귀하의 비판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이 비판의 핵심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귀하가 생각해냈는지, 귀하가 1945년에 발간한 저서에서 귀하가 체계적으로 전개한 플라톤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는 거짓 예언자들대한 공격의 필요성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귀하는 확신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는가.

 

실제로, 이 질문으로 인하는 나는 멀리 19197월로 돌아가는데 당시 나는 아직 17세가 되지도 못했다. 물론 나는 내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논증했던 입장에 매우 빠르게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마르크시즘을 비판할 목적으로 마르크시즘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검토하기로 결정한 것은 19197월의 나의 17번째 생일 이전이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서, 19202월 내가 물론 내 평생 심층적으로 전개하고 있던 입장을 나는 본질적으로 완성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알다시피 그것은 매우 오래전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 매우 드물다고 나는 말하겠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귀하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1차 세계대전 이전 나는 어린이로서 평화주의자였다. 나의 양친도 평화주의자였다: 나의 부친은 서재에 평화주의적 저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군국주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는 내 주의의 사람 대부분이 ㅡ 내 가족의 친구들, 기타 등등 ㅡ 180도로 바뀌어 전쟁 지지자가 된 사실에 놀랐고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19147월 말 우리는 휴가 중이었고 나의 부친은 비엔나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 부친이 불행히도 ㅡ 그것은 그가 사용한 단어인 불행히도였다 ㅡ 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우리에게로 올 수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 편지는 나의 생일 전날 쓰여서 ㅡ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ㅡ 전쟁이 실제로 나의 생일날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는 몇 시간 전에 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 곧 나는 비엔나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학생 모두가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다.

 

귀하도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가?

 

내가 그 분위기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조금 영향을 받았지만, 물론 1차 대전 동맹국들(Central Powers)이 승리하여 빠른 평화회복을 희망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 대부분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실재적 승리와 같은 어떤 것도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귀하는 정말로 귀하가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는가?

 

내가 여전히 몇 행을 기억하는 시를 내가 썼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시는 평화에 대한 축하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시에서 나는 적이 모두 자기네 나라로 가버려서 우리가 이제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 시에서 평화가 승리라거나 승리와 같은 것이라고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가 191410월경에 쓰였다는 것과, 이미 새해 초부터 우리의 적이 패배하여 자기네 나라로 가버렸다고 ㅡ 그것은 원래 시에 포함된 주제였다 ㅡ 말할 정도로 승리를 예견한 것에 대하여 충분히 내가 부끄러웠음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리하여 곧 나는 1차 대전 동맹국들(Central Powers)의 적을 패퇴시킨다는 생각에 실제로 반대했다고 말하자.

 

무엇 때문에 귀하는 그 전쟁을 더 날카롭게 반대했는가?

 

1915년인지 16년에 나는 발생할 것 같은 사건에 관하여 나의 부친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실제 요점은, 어린애였기 때문에 나는 우파가 승리하리라 확신했다는 것이다 ㅡ 그것은 물론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아무튼 1915년 초 벨기에에 대한 침공 이후에 나는 독일이 특정 조약들을 파기했음을 알았고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우리 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하여 전쟁에서 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다소 앞으로 나아가서, 귀하가 최초로 10월 혁명의 관념에 관하여 들은 것은 언제였는지 귀하는 기억할 수 있는가?

 

그 유명한 조약을 탄생시킨 것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열린 러시아와 제1차 대전 동맹국들(Central Powers) 사이의 회담이 열린 때였다. 나는 15세가 약간 넘었고 러시아인들이 그곳에서 행한 연설에 크게 감명받았다. 트로츠키(Trotsky)는 물론 주요 연사였고, 기묘하게도 다양한 연설의 개요가 오스트리아에서 (내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독일에서도 또한) 인쇄되었다. 이것이 먼저 나를 공산주의자들로 유혹한 것이었다. 나에게 또한 1905년의 혁명 동안 학생 지도자였던 러시아 태생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에 맞으면 무엇이든 할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의 연설 때문에 사실상 나는 그의 경고를 다소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에 관하여 귀하를 매료시킨 것은 평화에 관하여 말하고 군사적 승리라는 관념을 비웃는 러시아인들의 연설이었는가?

 

말하자면 나는 당시부터 나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 주요 문제를 이미 대면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찬성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리고 귀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19년 평화가 이룩된 후 곧 나는 공산당 사무실로 가서 그들에게 심부름꾼 소년으로서 나의 역할을 제공했다. 지도자 중에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돌프 아이즐러(Rudolf Eisler)의 세 자녀가 있었다: 게하르트(Gehardt), 한스(Hans) 그리고 프리티(Fritti) (Elfride의 약칭) 아이즐러(Eisler)였는데 그녀는 당시 이미 이혼했지만, 그녀의 남편 성을 따라 프리드란더(Friedlander)였다. 게하르트는 나중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동생 한스(Hans)는 동독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프리티 프리드란더(Fritti Friedlander), 루트 피셔(Ruth Fischer)라는 이름으로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귀하가 일반적으로 귀하의 공산주의자 친구들에 관하여 말하는 귀하의 자서전에서 귀하가 이 인물들을 언급한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왜 귀하는 이번에 그들의 이름을 대고 싶어 했는가?

 

내가 그들과 가졌던 것은 흥미로운 회합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매우 친절했고 나를 조금 망쳐놓았으며 처음에 나는 그들을 신뢰했다. 그러나 곧 나는 모스크바에서 온 전보가 그들을 180도로 바꾸어놓아서 전날 그들이 말했던 것을 정반대로 말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하루마다 완전히 바뀔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단 한 가지 원칙만 있었는데, 그것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모스크바를 추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알아채었을 때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는 위기에 봉착했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는바, 아이즐러 형제들은 어떤 지성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귀하는 틀림없이 그들의 인격 결함에서가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의 깊이에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전향하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이것이, 귀하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완료한 연구를 시작한 방식인가? 아마도 이것이, 귀하가 마르크시즘에 대한 귀하의 핵심적 비판을 설명해야 하는 요점이다.

 

그렇다, 당신이 옳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ㅡ 나는 이제 구분하지 않겠다 ㅡ 틀림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로 온다고 예언했다. 그것은 역사와 경제의 연구를 통하여 확실하게 확립될 수 있는 역사의 필연이었다. 그것은 증명될 수 있었다. 공산주의는 틀림없이 도래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사악한 형태였다: 자본주의는 끝장나야 했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전복되어야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다음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가 지구를 지배할 완전히 새로운 사회인 훌륭한 사회가 올 터이다. 저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교설을 일종의 쥐덫인 함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쥐였다.

 

귀하의 자서전에서 귀하는 결국 어떻게 마르크스적 논증의 핵심을 파악했는지를 기술한다. ‘그 핵심은 다음 도덕적 법칙에 함축적으로 호소하면서 역사적 예언으로 구성된다: 불가피한 것이 발생하도록 도우라!’라고 귀하는 기술했다. 함정이라는 관념에 대하여 귀하는 조금 더 말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 교설은 나은 세상의 도래를 약속하는데 역사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틀림없이 도래하는 사건의 상황을 일으키거나 야기하는 데 도움을 줄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의, 특히 전쟁과 폭력을 증오하는 나와 같은 사람의 의무였다. 이것이 저항의 대상이 된다고 안다면 당신은 범죄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반드시 도래하는 것에 저항했고, 당신의 저항을 통하여 공산주의가 불가피하게 확립되었을 때 발생할 모든 죽음과 모든 지독한 폭력에 대하여 당신은 자신을 책임지도록 만들었거나 공동으로 책임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도래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확립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인간이 희생됨과 함께 최소한의 저항이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불가피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이해한 모든 사람에게 사회주의가 실현되도록 모든 것을 다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것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저 기묘한 일들을 저질러서 매일매일 자신을 부정했던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공산주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화되었다; 저것은 역사에 대한 결정적 질문이었고, 모든 행동에 대한 주요 이유였고, 모든 선택에 대한 정당화였다. 사람들, 심지어 지도자들도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했다 ㅡ 그러나 그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주요점은 공산주의자들이 결국 틀림없이 도래하는 것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것이 내가 함정을 언급함으로써 내가 의미했던 것이었고, 나 자신이 얼마 동안 그 함정에 빠져있었다.

 

몇 개월 동안이다. 그러나 그 후 귀하는 귀하의 생각을 바꾸었다. ㅡ 귀하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별도로 ㅡ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났는가?

 

내가 매우 의심스러워하는 다양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몇몇 공산주의자들이 주요 경찰서에 잡혀있던 비엔나에서 공산당은 그들의 석방을 위하여 주로 젊은이들이 참석한 시위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발포했고 여섯 명의 시위자가 살해되었다. 내가 그 사건을 목격했다: 나는 현장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발생한 사건이 더 참혹할수록 상황이 나아진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상황은 혁명을 위하여, 위대한 혁명을 위하여 필수적 분노를 촉발하는 데 모두 도움이 될 터이다. 그래서 그들은 발생한 사건들로 후회하지 않았지만 나는 저 젊은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감을 정말로 느꼈다.

 

이 요점은 귀하의 자서전에서나 귀하 삶의 그 시기에 관하여 귀하가 말하는 이전 인터뷰들에서 전혀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몇 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비엔나에서 경찰에게 살해되는 동안 귀하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은 희생자들이지 발포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리고 귀하가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때였다. 저게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일종의 책임을 느꼈다. 나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자신이 위험한 곳에 서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곳에 서서 총알을 맞으라고 부추기고 있었고,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자신들의 목숨을 걸라고 말할 권리가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없었다. 그 젊은 시위자들은 노동자들이었고, 우리는 마르크시즘을 판단할 수 있고, 말하자면 지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나는 이미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학생들이었고, 우리는 두꺼운 책들을 읽을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지시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상황의 본질은 이렇다; 공산주의는 틀림없이 도래해서 우리는 투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껴서 나는 우리가 말했던 것과 상항이 실제로 같은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가 틀림없이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증거들이 유효하다고 내가 실제로 알고 있었던가? 그 점을 내가 보장할 수 있었던가? 실제로 나는 스스로 마르크스의 책을 읽을 수 없던 사람들에게 가서 나는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시험하고 검토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이라고, 그가 내놓는 증거들이 유효하다고, 공산주의는 틀림없이 도래해서 우리가 승리할 것이고 이 모든 결과가 귀결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귀하는 그 후에 어떻게 했는가?

 

나는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를 실제로 완벽하게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마르크스를 이용했고, 나는 마르크스를 이용해야 했지만, 그것은 내가 지닌 매우 피상적 지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마르크스의 이론이 증명될 수 있는지를 실제로 검토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2

 

마르크시즘에 대한 주요 비판

 

 

 

 

그때 귀하는 마르크시즘에 대한 귀하의 핵심적 비판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귀하는 그 비판에 착수했는가?

 

나는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고 그 책의 주요 논증들이 다음과 같음을 깨달았다. 1: 자본주의는 개혁될 수 없고 파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나은 사회를 가지려면 자본주의는 파괴되어야 한다. 2: 비참함의 증가에 대한 논증으로 노동자들의 운명이 점점 더 악화한다는 관념이다; 그리고 저것이 자본주의를 파괴해야 할 필요에 대한 이유이다. 세 번째이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논증은 자본가들은 개별적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가들 자신이 체제의 희생자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언급하지 않음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이 점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란 자본가가 노동자만큼 잡혀있어서 그 기계로 인하여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일종의 기계라고 말한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를 인격적으로 비난해서 자본가들에 대하여 인격적 증오를 부추기려고 애를 썼다. 마르크스는 실제로, 자본가는 악의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나쁜 사람이라는 견해를 속류 마르크시즘(vulgar Marxism)’이라고 지칭했다. 나는 여기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선전에 반대가 되는 흥미로운 논증을 발견했는데 그 주요 선전은 속류 마르크시즘에 의하여 정확하게 규정되었다. 그리고 물론 공산당은, 혁명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공산당에게 도움을 주는 여하한 것도 수행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속류 마르크시즘을 지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다시 함정이 있다. 공산당의 기능은, 도래하는 공산주의를 촉진하기 위하여 공산당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증오를 유발하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것이 당시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연구를 통하여 내가 도달한 기본적 분석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대한 귀하의 비판의 주요점 모두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 다른 주요점들이 나중에 나타났다.

 

한 가지 다른 주요 논증이 특히 있는데 내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발간한 후에 겨우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기술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허구일 따름이고 악마가 꾼 꿈이다. 물론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가난한 사람은 항상 고통을 당하여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약자를 도우라는 도덕적 요구가 항상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약자가 노동자라고 ㅡ 우리는 나중에 내가 생각하는 약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ㅡ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만, 굶주림 및 노동자가 처한 상황의 문제는 더 이상 마르크스 시대의 상황이 아니다. 나는 당시 사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나빴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사회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로서 기술했던 사회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주요 주장은 자본주의가 파괴될 수 있을 따름인 반면, 자본주의는 개혁될 수 있었다. 나중에 마르크스 자신이 아마도 영국에서 ㅡ 게다가 영국에서만 ㅡ 사회적 혁명이 폭력 없이 도래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사회가 개혁될 수 있다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저것은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은, 마르크스의 생애에 훌륭하고 매우 중요한 개혁인 엄청난 개혁들이 영국 및 특히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서 정말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관하여 말한 것은 실제로 자신의 생애에 발생한 사실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자본가 및 노동자가 상황을 점점 악화시키는 구조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Ein Kapitalist schlagt vielen tot 한 명의 자본가가 많은 다른 사람을 살해한다 ㅡ 자본가가 점점 줄어들어 거의 모든 사람이 그 후 희생자와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그의 관념을 표현하는 많은 언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 종류의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어서 우리가 우리 사회를 마르크스적 의미로 자본주의적 사회로 지칭한다면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데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표현한 용어는 우리의 사회에 현재에도, 그렇게 과거에도 적용될 수 없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크시즘에 대한 나의 주요 비판이지만, 또 다른 비판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국가의 숨은 독재자들이라고, 자본주의하에서 국가는 독재체제이며 자본가들은 독재자들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꿈이다. 자본가들이 정치적으로 결정적 권력을 지녔던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상황은 항상 훨씬 더 복잡했다. 경제적 조건은 사회의 생활에서 큰 중요성을 띤다는 매우 중요한 관념을 ㅡ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이전에 믿었던 것과 반대로 ㅡ 사회과학과 역사과학에 도입했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마르크스 이전에 진지한 경제역사학과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발견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자신의 발견을 엄청나게 과장하여 경제를 통하여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그는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실수다. 왜냐하면 사회란 고도로 복잡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종교, 국적, 우정이나 학연과 같은 다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비엔나에는 거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학교의 동창생들이고 그 후 친구 관계를 계속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옥스퍼드 대학이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모든 정당의 거의 모든 정치가가 그 대학 동창들이다. 이 모든 원인이 역할을 수행하여 자본가들의 독재체제라는 단순한 관념은 실제 상황과 전혀 일치한 적이 없다.

 

 

 

 

 

 

 

 

 

 

 

 

 

 

 

 

 

 

 

 

 

3

1962

 

사하로프, 흐루쇼프 그리고 소비에트의 쇠퇴

 

 

우리는 쥐덫에 대한 귀하의 비판을 해명했고, 귀하가 어떻게 쥐덫에 갇혔다가 탈출했는지를 귀하가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소비에트 공산주의, 그리고 어떻게 전체 국가들과 수백만의 사람이 소비에트 공산주의로부터 빠져나왔는지의 문제로 선회하자.

 

소비에트 쇠퇴에 대한 이유들이 매우 흥미롭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시즘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시작해야겠다. 러시아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중요한 전개 상황이 있었지만, 문헌이 확산하면서 마르크시즘이 최초로 진지하게 연구되어 일종의 철학이나 다면적인 지성적 교설로 변한 것은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과 같은 인물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독일에서였다. 물론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마르크시즘은 모든 수준에서 교육받던 학생들이 교화된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령 흐루쇼프 시대에 왔을 때 공산당 지도체제에 있던 누구도, 상황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면,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진지하게 생각되었다: 자본주의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 ()은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는 미국과 영국으로 점점 인식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커다란 자본주의 국가여서 파괴되어야 했다. 모든 나머지 이론이 사라졌지만, 이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비망록에는 전체 비망록의 단서인 매우 간단한 서술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말살은 사회발전에 결정적 문제이다.’ 혹은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역사발전에서ㅡ 의미는 동일할 터이다.

 

저 책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책이 진짜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이 그 책을 조작했다면 그 책은 엄청난 업적일 터이다. 그 책은 스탈린과의 전화 통화를 포함하여 600쪽이 넘는 매우 상세한 책이어서 그런 책을 조작하려면 수많은 연구 연도가 필요할 터이다. 게다가 그 책의 연혁이 이상할지라도 이런 점은 실제로 진지하게 제시된 적이 없다. 그 책은 소련으로부터 밀반출되었고 내가 알기로 영국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러시아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책을 진본으로 간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 책이 실제로 흐루쇼프의 생애와 견해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제할 수 있다. 우리가 20세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그 책은 많은 도움을 주며 특히 1962년의 쿠바 위기에 의하여 대표되는 위대한 전환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왜 귀하는 저게 그렇게 중요했다고 생각하는가?

 

내 견해로 소련은 저 시점에서 냉전에서 패했는데 당시 미국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저것은 마르크스 정권의 유일하게 남은 관념이 실패한 때였다; 그것은 광범위한 몰락을 일으킨 쇠퇴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왜 바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때 소련이 미국을 파괴할 가능성을 지닌 최초의 시기였다. 소련인들은 사하로프가 자신의 비망록에서 말하는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 역사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결정된 목표인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희망을 지니지 못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바꾼 것이 이 책이었다. 그는 당시 범죄자로서 무책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귀하는 귀하 자신이 1981년 뉴욕에서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박애주의자, 위대한 영웅으로서 극찬한 197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사하로프가 수소폭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 귀하는 생각을 바꾸었는가?

 

그가 나중에 한 일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그의 책은 초기 시절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든 상황을 담고 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면을 살필 수는 없다: 저것은 역사학자들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를 들어 이런 것을 인용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그 폭탄의] “깨끗한(clean)” 복제품을 시험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폭탄의 위력을 감소시킬 터이지만 거대한 폭탄(Big Bomb)은 이전에 실험된 폭탄을 여전히 크게 능가할 것이어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수천 배 더 강력할 것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몇천 배나 더 강력한 폭탄.’ ‘(several)’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것이 최소한 셋을 의미한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다음 사실을 고려하면 저것은 보수적 전제이다. 사하로프는 자신의 인격에서 많은 의문스러운 점을 지니고 있지만, 진실을 서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그는 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ㅡ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보다 다소 더 약한 폭탄의 복제품에 대하여 ㅡ 몇천 배라고 말한다면, 그 폭탄은 적어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3,000배 더 강력한 것이었다. 사하로프는 베리아(Beria)의 협조받으며 스탈린 치하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그 폭탄 제조와 관련하여 베리아와 한 시간이나 긴 사적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여러 해 동안 실험한 후에 실제로 결정적 실험이 1961년에 ㅡ 내가 생각하기에 9월에 ㅡ 실시되었다. 흐루쇼프는 물론 이 일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었고 자신이 이렇게 회상한다: ‘미국이 쿠바에 있는 미사일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기에 너무 늦을 때까지 미사일이 쿠바에 있다는 것을 미국이 모르게 쿠바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배치하는 생각을 내가 가진 것은 내가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이었다.’

 

그 폭탄은 시험을 통과했고 흐루쇼프는 쿠바를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그 생각이 그에게 떠오른 것은 짧은 거리인 터키에 배치된 미국 핵탄두에 대하여 그가 생각하고 있던 불가리에서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삼스러웠나?

 

한 가지 새삼스러웠던 것은 소비에트 핵 잠재력의 규모였다. 수소폭탄이 실험된 후 1년 만에, 흐루쇼프는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폭탄들은 쿠바로 운송되었고 미국이 알아챘을 때 이미 38개의 폭탄이 발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쿠바에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에게 모든 폭탄을 쿠바로 운송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추가하여 서술하는바: ‘우리는 워싱턴과 같은 작은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뉴욕, 시카고 그리고 다른 거대한 산업도시들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미사일을 이미 배치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다르게 말했지만, 그는 비망록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 순간만큼 미국이 그렇게 실제적인 파멸의 위협에 직면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하게 계산해보자. 쿠바에 이미 설치된 38개의 핵탄두 각각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탄두보다 3,000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 파괴 잠재력은 한 도시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114,000배 더 컸다.

 

세계의 역사가 당시 파멸에 근접했다고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알지 못했던 것은 소비에트 핵 잠재력의 실제 규모였다. 이것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로버트 케네디는 그 위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고 그 위기에 관하여 중요한 책을 썼다. 물론 그들은 폭탄이 대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폭탄의 실제 규모를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규모는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사하로프가 제공하는 정보로부터만 알려진다. 나는 심지어 그 주제에 관한 가장 최근의 저서인 마이클 베슐로스(Michael Beschloss)가 쓴 참고문서가 많은 저서에서도 나는 그 규모를 읽은 적이 없다.

 

귀하가 의미하는 바는 역사학자들이 사하로프의 말을 아직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나는 역사학자들을 공격하고 싶지 않다; 역사학자들에게 그다지 많은 시간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저 구절을 언급하는 사하로프의 저서에 대한 어떤 검토서도 읽지 못했다.

 

사하로프가 만든 수소폭탄의 규모 때문에 귀하는 사하로프에 관한 귀하의 생각을 바꾸었는가? 결국, 그 폭탄의 파괴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에 있는 또 다른 구절에 주목하자. ‘대형폭탄의 실험을 끝낸 후, 군부가 효과적인 운반체 없이 그 폭탄을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보았다 (폭격기는 격추되기가 너무 쉬웠다).’ 그러므로 사하로프는 자기 임무가 아닐지라도 그 폭탄이 사용될 수 없어서 근심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다른 것을 보자:

 

나는 잠수함에서 발사되어 물을 증기로 바꿀 핵-추진 제트엔진을 장착한

거대한 어뢰라는 관념을 꿈꾸었다. 목표물은 수백 마일 떨어진 적의

항만들이 될 터이다. 해군 전문가들은, 우리가 적의 항만들을 파괴할 수

있다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우리를 확신시켰다. 어뢰의 몸통은

폭발하는 수뢰를 견디고 어뢰 저지 그물을 뚫기에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어뢰들이 목표물에 도달하면 100메가톤의 위력이

물밑과 공중 모두에서 폭발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를 낳을 것이다.

 

사하로프가 자신이 명령받은 것을 수행하는 수동적 학자만이 아니고 자신이 능동적 역할을 맡았던 사람임을 당신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가 부언하는바:

 

나는 어뢰 기획의 초기 단계에 해군 소장 포민(Fomin)과 상의했다. 그는

무자비한 대량 살상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고 진저리를 쳤으며 함대의

장교들과 수병들은 공개된 전장에서 무장한 적과만 싸운 데 익숙하다고

언급했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다른 사람과 그 기획을 토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사람이 그 기획을 이해하는 것을 나는 괘념치 않았다;

기획은 현재의 군사적 원칙과 맞지 않아서 필요한 낭비적 예산을 쓴다면

어리석은 일일 터이다.

 

완전히 당황해서’! 저것이 비망록 전체에서 사하로프가 그와 같이 말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한 방에 뉴욕을 파괴할 수 있는 이 가공할 것을 꿈꾼 후에 그는 남의 의견을 듣고, 남과 상의하고, 함대로 가서 어떤 제독의 의견을 구하는데 그 제독은 이렇게 말한다: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하로프는 완전히 당황한다!

 

귀하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과 알고 지냈다. 귀하는 그 폭탄 제조와 사용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나치가 그 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폭탄 제조를 지지하여 자신의 편지에 서명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편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시기에, 흐루쇼프의 말을 이용하면 자본주의를 박멸하기(liquidate)’를 원하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공격적 지도자들의 수동적 도구만이 아니었다. 그는, 반대로, 자본주의란 박멸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수소폭탄이 실험될 때 그는 39세였고 이 해군 제독을 만나러 갔을 때 40세였다.

 

귀하는 사하로프가 무시무시한 일들을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왜 귀하는 10년 전에 내렸던 판단을 바꾸었는가? 귀하가 초기에 판단한 사하로프를 다시 재판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에 의하여 밝혀지는바, 사하로프같이 위대한 지능을 소유한 사람, 소비에트 정권이 러시아를 지독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던 사람이 ㅡ 그리고 정말로 몇 년 후에 알았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저서에서 사하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노동자였다ㅡ 이것은 독일의 나치 전범자들 모두가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번은 흐루쇼프에게 나는 나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자신이 수소폭탄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폭탄실험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다. 사하로프는 자신이 만든 초대형 폭탄의 모든 실험으로 인하여 수천 명의 사람이 방사선 때문에 암에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는 그 실험을 실행하지 않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화를 내면서 그에게 과학적쟁점이 아니라 정치적쟁점에 끼어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저 때 사하로프가 나는 나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하로프에 관하여 언급될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그의 비망록은 자세히 읽혀야 한다.

 

그러나 사하로프에게는 또 다른 면이 또한 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크게 용기를 내어, 정권에 도전했고 민주주의적 변화의 지지자가 되었다.

 

미국을 파괴할 새로운 종류의 무기인 어뢰를 설계하는 작업이 그가 요구받지 않고도 생각해낸 자신의 주도권이었음은 그의 비망록 221쪽을 보면 분명하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를 박멸한다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서 쥐덫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미래 역사의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을 결정하는 법칙을 안다는 원칙에 근거한 일종의 지성적 블랙홀과 같았다. 게다가 당신은 40세의 그가 나이로 판단을 내리기에 너무 젊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나중에 자기 견해를 바꾼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40세에 당신을 살인하고 몇 년 후에 후회하며 살인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살인자가 아닌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사하로프의 말년에 대하여 높은 견해를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판단을 수정할 필요가 나에게 정말로 있다. 나는 그가 전쟁범죄자로서 시작했다고 말하겠고, 나는 말하자면 그 자신이 나중에 시행한 행동에 의하여 완전히 사면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하로프가 러시아에서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귀하가 참작할 수 없는가?

 

그가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함정을 보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예를 들어 17세에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인 자유국가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는 러시아에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상상이 가능한 가장 강력한 정도로 탁월한 지능과 재능 그리고 용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미치는 이념의 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틀림없이 사하로프는 전자(前者)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귀하의 주장으로 돌아가서, 흐루쇼프가 실제로 비밀리에 수소폭탄을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면 먼저 폭탄을 썼을 것이라는 무슨 증거가 있는가? 흐루쇼프는 미국과 대등한 발판에서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에 대항하는 쿠바에 있는 미사일) 회담을 열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던가?

 

미국과 합의를 이루기 위하여 쿠바로 114,000개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위력을 지닌 폭탄들을 당신은 쿠바로 운반하지는 않는다; 저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짓이다. 흐루쇼프에게 발사할 준비가 된 폭탄들이 있었다면, 흐루쇼프는 그 폭탄들을 사용했을 터인데 이유인즉 미국인들이 가능한 한 빠르게 보복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시오, 나에게 당신들을 죽이기에 충분한 폭탄이 있소 ㅡ 그 폭탄들에 대하여 당신은 나에게 무얼 주겠소?’라고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가능한 한 빠르게 자신들의 폭탄을 쿠바로 쏘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분명하지 않은가? 미국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터이고 흐루쇼프는 틀림없이 자기 적이 자기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터이다. 상황을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틀림없이 저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호주머니에 백만 불이 있음을 내가 알고 나에게 총이 있고 귀하에게도 총이 있어 나는 나의 총으로 당신을 공격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총을 소유하는지를 내가 당신과 토론하기 위하여 왔어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누가 먼저 발사하는가의 문제일 따름이다.

 

귀하는 소련의 쇠퇴와 연결하여 사하로프와 1962년의 위기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귀하는 저 연결을 다소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귀하의 견해로, 흐루쇼프의 군사적 모험이 실패한 것은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귀하는 1962년이 소련이 미국을 패퇴시키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하는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이 사하로프가 만든 수소폭탄을 가지기 이전에는 그들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ㅡ 그것은 살인을 말한다 ㅡ 않고 미국을 파괴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첫 번째 기회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다시 나타난다면 미국인들은 망설이지 않을 것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저것과 동시에 급격한 쇠퇴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귀하는 군사적 균형이 소련과 공산주의의 운명에 열쇠였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마르크스주의 교설로부터 남은 한 가지 기본적 관념인 유일한 기본적 관념은 자본주의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재정권의 지배계층은 자신을 자본주의가 파괴되고 세상을 구할 역사의 도구로서 보았다. 그러나 1962년 이후 그들은 사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폭탄을 만들었다. 저것은 절대적으로 지성적 면에서 점수가 0이다. 그 후 그들의 희망은 계속해서 악화하였고 이제 우리는 폭탄 한 개가 적어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3,000개의 위력을 갖는 1,400개의 폭탄을 가져서 적어도 합계 42십만 개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이 폭탄 각각은 암시장에서 판매될 것이고 그 암시장에서 중국인들이 또한 아마도 경쟁적으로 구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것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실제로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우리는 이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귀하에게 소련의 쇠퇴에 대한 귀하의 설명을 완성하라고 요구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대신 1962년을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개략적인 군사적 균형을 위한 마지막 기회로서 아마도 볼 것일지라도, 귀하는 1962년이 미국을 군사적으로 박멸할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공산주의 정권은 그 후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마지막 변화는 고르바초프(Gorbachev)와 동시에만 왔다.

 

고르바초프와 동시에만 러시아 정치 전체에 대한 근본적 전제를 자신이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러시아인들은 자기들의 임무가 자본주의를 ㅡ 다시 말해서, 미국을 ㅡ 파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우리가 발견한다. 고르바초프는 실제로 여러 번 미국에 다녀와서 미국의 현실을 보았다; 그는 러시아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이 이해한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러시아가 정신을 차리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고르바초프가 나는 소련 인민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중요한 진술을 말한 것이다. 저것은 그가 발설한 극소수의 예리한 표현 중의 한 가지 표현이다: 그 표현은 그가 상황을 통찰하고 소련 인민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인데 그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 중에서 사하로프와 같은 사람이 최고로 공격적이 될 수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고르바초프의 장점은 미국인들이 정상적인 반면 자국민은 정상적이 아님을 이해한 것이다. 태도가 미국에서 실제로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은 이 무시무시한 게임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 미국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것이다.

 

귀하는 고르바초프의 저 장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귀하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귀하가 리카르도 치아베르제(Riccardo Chiaberge)와 최근에 대담한 것을 읽었는데 그 대담에서 귀하는 옐친(Yeltsin)자아에 도취된 사람이었던 반면, 고르바초프의 저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완전히 공허하고’, ‘구식이고 더 나쁘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르바초프가 아마도 선의를 지닌 사람이겠지만, 관념이나 계획이 없다고 항상 말했다. 당신은 그의 저서로부터 실제로 그 저서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방금 언급한 차이점을 정말로 이해해서 그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옐친(Yeltsin)에 관해서 그의 자아상은 별도로 하고 주요점은 고르바초프에 대하여 보복한다는 그의 집착이었다.

 

아무튼 소련 정권의 방향 재설정과 그 후 해체가 발생한 것은 이 사람들 때문이었다. 귀하 생각에 이 붕괴를 일으킨 주요 사건은 무엇이었나?

 

붕괴를 일으킨 것은 헝가리를 통하여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한 사건이다. 소련이 지적(知的)으로 일종의 빈 공간으로 쪼그라들었을지라도 소련은 영원히 혹은 적어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 시민과 그들의 차량이 서방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헝가리인들의 결정으로 인하여 동독 정권이 몰락했고 그로부터 모든 사건이 뒤를 이었다. 당시 재앙을 피하려고 고르바초프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군대를 헝가리로 파견했어야 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아무튼 미국인들은 저 상황에서 묵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1989년 이후 사건들에 대한 주요 움직임은 헝가리에서 왔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의 정치적 의제

 

법치와 어린이

 

 

그리하여 소련 정권의 종말에 우리가 왔다. 저 이전 모형-국가 자체와 일반적인 세계 정치 모두에 대하여 귀하가 생각하는 함의가 무엇인지 귀하는 말할 수 있는가? 정치이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도출해야 하는 결론이 무엇인가?

 

첫 번째 요점은 우리가 상명하복으로부터 자유-시장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 모든 정부가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니는 것은 법치를 확립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곳에서도 법치가 언급되는 것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러시아에 틀림없이 법치가 필요하다. 고르바초프가 한 일과 그가 했어야 하는 일 사이의 철저한 차이점을 당신에게 밝히고 싶다. 그는 기괴하고도 우스운 짓을 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주식시장을 개설했다. 우리는 그리스정교회의 후원하에 크게 축하연을 벌이는 그 주식시장의 개장에 대한 사진을 보았다.

 

모스크바의 주식시장이 기괴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구매할 주식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식도 배당도 없었다; 실질 화폐가 없었고 루블화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식거래를 원했다! 먼저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당원으로서 정치적으로 선발된 판사들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법치가 존립하도록 돕는 것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법치에 헌신하는 판사들이다. 지금까지, 소련에서 판사들은 본질적으로 독재체제의 도구였다; 법전을 기초로 모든 사람이 정규적 재판과 기타 등등을 확신할 수 있는 법전이 없었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자유-시장 사회가 있으려면 자신이 법전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자유-시장 사회가 없이 ㅡ 심지어 법치에 대한 오랜 전통이 있는 여기 영국에서조차도 ㅡ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법치의 필요성은, 여기에도 많은 부패와 시장에 대한 간섭이 있기 때문에, 분명해야 한다. 경찰은 부단히 주식시장에서 개입하여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감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양에서 우리가 법치를 위하여 싸워야 할지라도 러시아에서는 법치가 정부의 최우선이자 유일한 임무여야 한다. 그 대신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하려는 모든 방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어떤 종류의 사업도 다른 사람이 제시하지 않는 것을 ㅡ 새로운 빵, 새로운 콩, 새로운 사과, 기타 등등 ㅡ 제시함으로써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 자유 시장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상부로부터 확립될 수 없다. 사람들에게 필요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제공되어야 하지만 저것이 가능하려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귀하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존재한다는 문제이자 어떻게 오늘날 세계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지의 결정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시장 자유와 국가의 개입 사이의 관계인 경제에서 자유로운 주도권의 방어와 공적인 정치적 행동이라는 필수 불가결한 과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공산주의적 계획 경제의 위기는 서양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ㅡ 과거에 존재했을지라도 ㅡ 일종의 야성적이고 정치적으로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귀하가 전체주의적 체제의 사회공학을 매우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귀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순진한 견해를 모든 국가개입의 결여로서 인정한 적이 없다. 귀하는 심지어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사회민주주의의 노선에 따라서 점진적인 민주주의적 개입주의를 선호한다고 서술했다. 동구와 서구 모두에서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혹시 유용할 정치적 견해에 대한 열쇠가 여기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귀하가 생각하기에 시장과 사회적 개입 사이의 올바른 균형이란 무엇인가?

 

개입 없는 자유 시장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시작하자. 이것으로 인하여 그 전체 질문이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방식과 전체 질문이 달라진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 고대 지중해의 시장에게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페니키아로부터 선박들이 아테네에 도착했고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그러나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 어린이 몇 명 데리고 가자 무역은 끝장이 났다. 물론 페니키아인들은 감히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당신은 이해하는가? 페니키아인들은 도둑질했고 그들이 주로 도둑질한 것은 사람들이었으며 저것으로 인하여 시장의 안정이 방해받았다. 법적 제도가 먼저 안착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자유 시장이 없다. 사고파는 행위와 강도질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국가의 법체계에 의해서 확립될 수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유사 강도질의 ㅡ 즉, 부패의 ㅡ 사례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자유 시장에 맞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는 짓들을 꾸미고 일을 벌인다. 영국에서 맥스웰 사건(Maxwell affair)이 최근의 사례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사건 역시 맥스웰이 자신이 갚을 수 없었던 수백만 달러를 은행들로부터 빌렸다는 의미에서, 부패와 횡령의 사건이다. 법적 체제 없이 소위 자본주의를 확립하려는 시도를 생각해보라 ㅡ 그런 시도는 불가피하게 부패와 강도질로 끝난다. 그러므로 다소간의 국가적 개입의 차이는, 법적 체제가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 사이의 차이와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다.

 

귀하는 특히 동구에서 지금 매우 널리 퍼져있는 정치의 모든 기능을 제거할 필요에 대한 몇 가지 관념을 뒤집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특히 러시아 사회의 진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전 소련에 법적 체계와 자유 시장과 같은 것을 확립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모든 종류의 모험이 뒤따를 것이다. 사람들은 러시아에 와서 많은 돈을 벌어 돌아가지만, 틀림없이 뒤에 의무사항을 남긴다. 법적 체제가 없으면 단지 혼란만 전개될 수 있다: 저것이 나의 주요 논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르크시즘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간과된다; 그들은 경제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라서 합법성이 위장된 강도질이기 때문에 그들은 법적 체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것은 합법성을 보는 매우 잘못된 방식이다.

 

그래서 귀하의 견해로 국가개입은 법적 체제와 법치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이고 법적 체제와 법치는 자유 시장에 필수적 사전요건이다. 이제 공적 행동의 규모가 우파와 좌파의 역할을 정의(定義)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자. 그러나 우파좌파라는 이 단어들이 귀하에게 여전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 단어들은, 여전히 언급하기가 유용한 정치에서 영구적 분할을 표시하는가?

 

나에게 정말로 큰 소망이 있다. 나의 소망은 마르크시즘의 소멸과 동시에 정치의 핵심으로서 이념이 야기하는 압박감을 우리가 제거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시즘은 반()-마르크스주의라는 이념을 불러왔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했던 것은 두 가지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완전히 실성했던 두 가지 이념 사이의 충돌이었다. 그 이념들의 배후에 실재적인 것이 없었고, 오직 잘못된 문제들만 있었다. 내가 열린사회로부터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과업들의 우선순위 목록을 재확립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귀하가 말하는 우선순위 목록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첫 번째 요점은 평화다. 평화는 모든 문명사회, 여전히 문명화되고 있는 사회가 혹시 협력해서 암시장에 나오는 사하로프가 만든 폭탄들 중국에서 만든 폭탄과 기타 등등을 모두 구매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우리는 그 폭탄들을 살 수 있다. 왜 우리가 구매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이 아마도 그 폭탄들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이 모든 국가는 가능하면, 안보상의 이유로 몇 개만 남기고 그 폭탄들을 제거할 수 있는 문명인들이 그 모든 폭탄을 손에 넣는 것을 보장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과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이념적 요점이 아닐 터이다.

두 번째 요점은 나의 견해로 인구폭발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인구폭발 문제는 진정으로 세계적 쟁점이다. 환경에 대한 모든 대화는 그 대화 배후에 있는 실재적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환경파괴는 인구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만 발생한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실제로 모든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근본적 요점이다.

모든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세 번째 문제는 교육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영국 상원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그 문제에 관하여 강연을 요청받았다. 나의 논지는 우리는 텔레비전과 다른 매체를 통하여 아이들을 폭력으로 교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정말로 언론검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귀하 자신과 같은 자유주의자가 그렇게 말해야 했다는 것은 놀랍다. 대중매체의 타락은, 자유주의자들의 방임에 대항하여 흔히 미국에서 ㅡ 그러나 또한 독일의 문화 비판에서 ㅡ 이루어지는 반론의 표적이다. 외설과 폭력에 의하여 발생하는 피해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주제이다.

 

정확하게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이유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언론검열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는 책임에 달려있다. 모든 사람이 책임을 느끼고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매체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우리에게 언론검열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러는 동안 사태가 점점 더 악화하였다. 사람들은 더 많은 폭력을 원하고 텔레비전에서 더 많은 폭력을 보고 싶어 한다. 상황이 이렇게 계속될 수는 없다.

나는 신문에서 다른 두 명의 소년과 함께 아버지의 돈을 훔치면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이탈리아의 소년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 사건 자체보다 더 많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소년이 받은 수많은 지지 편지이었다.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우리가 아이들을 폭력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내가 경고했을 때 이것은 내가 옳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 지지 편지들은 물론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어린이들한테서 오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어서 아이들이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아이들과 영화를 보러 갈 때, 위험한 상황이 나타나면 그들이 눈을 감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아이들이 말처럼 길들고 그들의 공포 감정과 혐오 감정이 습관으로 길들기 때문에 점점 더 폭력을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것으로써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법치는 무엇보다도 폭력을 예방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ㅡ 정말로 저것은 법치에 대한 훌륭한 정의(定義)이다. 법에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주먹질할 수 없다. 내 주먹의 자유는 귀하의 코 가격을 금지하는 법규에 의하여 제한된다. 저것이 법치의 근본적 관념이다. 그래서 폭력에 대한 일반적 혐오가 무너지고 바뀌면, 법치를 지키고 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일반적 합의가 실제로 약해진다. 우리의 문명이 약해진다.

 

그래서 귀하가 정한 우선순위 목록의 세 번째 요점은 아이들의 교육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및 기타 등등을 가르쳐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합당하게 교육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 대부분이 지닌, 폭력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저항하는 마음을 우리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귀하와 같은 자유주의자에게 완전히 기묘한 일종의 도덕적 간섭주의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때때로 ㅡ 예를 들어 환경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논증하면서 ㅡ 귀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에 맡기는 것을 선호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대중매체의 타락은 시장의 결과이다.

 

자유 시장은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유 시장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절대적 자유란 터무니없다. 칸트가 이것을 언명했던 방식을 수용하자. 각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당신의 자유에 대한 나의 자유의 양립 가능성은 우리가 각자에 대하여 폭력을 포기하는 데 달려있다. 나는 당신을 때려눕히지 않을 것이고 당신도도 나를 때려눕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가 제한됨을 안다. 우리가 저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폭력을 금지하는, 살인을 금지하는 법규들이 필요하다. 상황은 항상 동일하다. 사람들이 당신을 때려눕힐 꿈을 꾸지 않는다면 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때려눕힐 꿈을 꾼다면, 정말로 이런 종류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아이들을 더 잘 교육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더 적게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치는 비-폭력에 달려있고, 우리가 이 사실을 잊는다면 법률이 출판과 텔레비전과 같은 분야에서 더 많이 개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매우 간단한 원칙이다: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의하여 부과되는 한계 안에서 각자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 그러나 우리가 현재 행동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계속한다면, 우리는 곧 살인이 일상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귀하는 또한 도덕적 원칙이기도 한 정치적 원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 대하여 심층적인 도덕적 책무를 지니고 있고, 저것은 우리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고안할 수 있는 최고의 영향력을 포함하여,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말할까. 실제로 관련된 새로운 원칙은 없고 내 주먹을 움직이는 규칙은 당신의 코에 의하여 제한된다는 자유주의의 근본적 원칙만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가진 최고로 중요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법치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나의 진보적 원칙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는다.

 

귀하는 정치적 의제에서 귀하가 보고 싶을 주요 우선순위들이 무엇인지 ㅡ 평화, 인구폭발 중지, 그리고 비폭력으로 교육 ㅡ 언급했다. 그리고 귀하는 그것들에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그들이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라는 의미인가?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내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으로 지칭했던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파-좌파적 상황을 실제로 갈음할 수 있을 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목표들을 성취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적시해야 하고, 그 목표를 사회 특정 부분의 목표가 아니라 사회 모든 부분의 목표가 실제로 되어야 한다. 저것과 별도로, 우리는 내가 약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ㅡ 상황이 매우 열악하여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과 같은 ㅡ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선순위 목록에 들어가야 하고, 그 목록은 물론 모든 사람이 논쟁하도록 열려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지긋지긋한 정당 제도를 갈음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지긋지긋한 정당 제도는 현재 국회의원들이 첫째로 자신이 속한 정당에 의존하고 있고 겨우 두 번째로 그들이 대표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들이 정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하면 국회의원들이 나는 당신의 대표자이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국가로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것이 이 나라와 다른 나라들에서 예전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 견해로 마르크시즘의 붕괴는 우리가 저 방향으로 가는 기회이다. 나는 어떤 정당이 ㅡ 어떤 정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ㅡ 자신들의 정당을 위하여 이 우선순위 목록을 수용한다고 말하기를 정말로 소망한다. 저것으로 인하여 다른 정당들도 그 목록을 수용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터이다.

 

귀하는 방금 우리에게 민주주의적 개입주의에 대한 귀하의 견해와 귀하가 생각하는 우선순위 목록을 말했다. 이것을 토대로, 어떤 종류의 정치 모형이 우리 시대에 매우 적합하다고 귀하는 생각하는가: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 서구적 사회주의, 혹은 어떤 아직 고안되어야 하는 어떤 다른 형태의 정치적 관행?

 

훌륭한 정치 모형은, 결국 자체의 과제를 문화적 지도력을 확립하려는 존재로서 보지 않는 민주주의일 터이다. 그 정치 모형은 방금 내가 언급한 평화와 모든 다른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목적은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서 상층부에 의하여 영도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많은 교육과 기타 등등을 의미한다; 엄청난 양의 문화적 소망이 텔레비전에 의하여 파괴되었음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내가 젊었을 때 모든 방식이 지독하게 열악하였고,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나빴다.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했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특히 하층 여성들에게 선택권도 희망도 어떤 것도 전혀 없었다. 가사를 담당해야 하는 여성들은 처절하게 무시무시한 시간을 겪었다: 그들은 2주에 겨우 하루를 ㅡ 12시간 ㅡ 자유롭게 보냈는데 그들이 어떤 사람과도 알고 지내지 못했다면 저것이 의미하는 바를 당신이 상상할 수 있다. 12시간 ㅡ 노예 상태보다 더 열악하다! 저것이 1914년 이전 미국에서의 상황이었고 유럽에서는 1920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훨씬 나은 세상에서 살지만, 그 세상은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미친 교육에 의하여 위험에 처한 세상이다. 우리는 이것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고, 우리가 크게 책임을 지는 교육 유형을 이룩하자마자 우리는 폭력이 드물었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에서 폭력이 점점 더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것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목표들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행동을 시작할 수 있는가? 어떤 에너지로? 그런 우선순위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는 어떻게 실제로 이룩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에 대한 전통적 반대론에 직면한다: , 자유주의가 반대하는 세력을, 반대하는 열정과 이해관계 및 신념을 이겨내기에 너무 약하다는 것.

 

전통적 반대론에 대하여 나는 전통적인 자유적 답변으로 대답한다: 우리가 폭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 30년 전 폭력을 선호하는 어떤 정당도 없었을 터임을 고려하라; 모든 사람은 우리가 폭력 없는 세상을 원한다는 것에 동의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자명한 전제는 거의 잊혔다. 이탈리아에서 저 소년을 지지하는 편지와 관련된 경우로 인하여 폭력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실제적 위협이라는 것과,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일종의 습관으로서 폭력에 빠져든다고 밝혀진다. 한 명의 소년이 돈 때문에 자기 부모를 살해하기 때문에, 그 소년은 말하자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칭송받는다. 그것은 정말로 가공할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상황을 조성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발생시켰다. 우리는 그 사건을 알았으면서도 너무나 어리석어 항의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상황에 대하여 대책을 세울 때이다 ㅡ 그때 이상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없다.

 

종교인, 교회는 그 문제에 해답을 지닌 사람이 세속적 자유주의자나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종교인과의 협력을 지지한다. 결국 종교인 자신이 자기 관념을 전파하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물론 이라크와 이란 및 기타 지역에서 근본주의자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종교인이 폭력을 사용한다면 협력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비폭력에 대하여 동일한 관념을 지닌 종교인에 ㅡ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으로 그들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면 ㅡ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귀하는 자유주의가 종교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주의는 종교 없이도 생존할 수 있지만 분명히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과 협력해야 한다. 물론 거의 모든 사람이 마르크시즘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제 마르크시즘의 붕괴와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모든 사람이 돈을 뒤쫓고 금과 석유 기타 등등을 뒤쫓는다고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육된 관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시즘이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라고, 모든 사람은 부유해지기만을 원하여 돈과 자동차 및 무기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관념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궁극적으로 훌륭한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희망은 ㅡ 상황은 항상 이랬고 항상 더 많이 이럴 것이라고 말하는 역사에 대한 절망적으로 이기주의적 해석일 뿐인 ㅡ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 위험이 전적으로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그 개념의 위기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복합적 요인들이 있다. 이런 유형의 냉소적 접근방식은 전()-마르크스주의 교사들의 특징인데 우리가 사회에서 보는 폭력적 장면과 연결된다. 당신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이 모든 것의 영향력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독일의 경우에서 역사 해석이 세 가지 기간을 통과했다고 주장했다. 먼저 독일은 모든 국가보다 우월하여 세상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헤겔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민족주의적 관념이 있었다. 그다음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왔다. 그리고 이제 냉소적 해석이 존재한다. 그리고 헤겔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기간에 독일이 최고여야 한다고 학교에서 교육된 바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 권력과 돈이 항상 세상을 지배했고 항상 미래에도 지배할 것이라고 교육된다. 이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이다. 반대 상황이 사실이다. 흑인의 자유를 위하여 80만 명이 목숨을 바친 미국의 역사를 보기만 하면 된다.

 

현재 폭력과 전쟁의 가장 심각한 원인 중 한 가지는 민족주의인 듯하다. 유럽을 포함하여 독립 국가를 이루려는 늘어나는 열망을 귀하는 어떻게 보는가? 전쟁과 퇴보의 위험으로서 보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려는 동질적 언어, 인종 혹은 종교를 지닌 민족들의 권리로서 보는가?

 

핵심적 쟁점은, 지금처럼 인구가 밀집된 세계에서 민족주의에 의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가 위험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위험하고 법치에도 위험하다. 먼저 내가 알기에 유럽인들의 논쟁에서 충분히 고찰되지 않았지만, 민족성 문제에 핵심적 요점이 있다: , 소수민족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족-국가라는 전체 관념은 이 원칙을 당신이 먼저 수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결국,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우연한 이민의 결과이다. 유럽은 사람들이 쫓겨 간 아시아의 반도(半島)이고 그 사람들이 대서양에 도달해서 흩어졌다. 그 후 다양한 종족이 다시 섞여서 오늘날 독일을 제외하고 소수민족이 없는 나라는 없다. 저것이 소수민족 보호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저것이 그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는 시각이다. 모든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국가를 가질 수는 없지만, 모든 소수민족은 교육, 언어 그리고 종교에 관하여 자신들을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식들로 보호되어야 한다.

 

 

 

 

 

 

 

 

 

 

5

역사주의에 대하여 다시 한번 반대하여

 

미래는 열려있다

 

 

귀하는 항상 역사의 개념에 결정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역사주의에 대한 귀하의 공격은 특히 항상 날카롭고 직설적이었다. 이것이, 특정 시대와 특정 문화적 환경에서 ㅡ 예를 들어 전쟁 후와 다시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이탈리아 ㅡ 귀하의 저서가 일반적으로 잘 수용되지 않은 한 가지 이유이다. 나 자신은, 내가 젊은이로서 귀하의 많은 관념을 읽을 때 그 관념에 매혹당했을지라도 내가 귀하의 반()-역사주의를 완전히 싫어하게 된 것을 인정한다. 전체주의적 체제에 대한 귀하의 비판은 큰 설득력이 있었지만, 나는 귀하가 역사주의에 특히 마르크시즘에 반대하여 쏟아냈던 엄청나게 많은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보기에 역사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주의는 완전히 틀렸다. 역사주의자는 역사를 그 근원으로부터 흐르는 일종의 강()으로 보아서, 자신이 그 강이 다음에 흘러가는 곳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데서 자신이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것은 도덕적으로 아주 그릇된 태도이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강()이나 강()과 같은 것은 항상 은유일 따름이다. 그 속에 실재성이 없다. 당신은 과거에 발생했던 일을 연구하지만 이제 저 사건은 끝나서 당신이 저 사건에 도움을 주거나 당신 자신이 그 사건을 따라 헤엄치기 위하여 어떤 것도 예견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현재에서 행동하고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동의한다, 어떤 사람이 나는 그 사건이 그런 방식으로 끝날 것임을 항상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매우 불쾌한 유형의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귀하의 자서전을 읽었고 다시 이 인터뷰의 시작에서 귀하가 17세 나이에 아이즐러(Eiseler) 형제들과의 만남에 관하여 말했을 때, 귀하가 오래전에 내놓은 비판을 그렇게 많은 사건이 입증하는 것을 보면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나는 의아하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귀하의 비판을 처음 언명했을 때 귀하는 여전히 실제로 소년이었다.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견해로 방향을 바꾸기 이전이나 바꾼 이후에 나는 옳다라고 귀하는 틀림없이 생각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귀하는 나는 강()이 이 길로 통과할 것임을 항상 알았다라고 말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가?

 

나는 상황이 그렇게 끝나서 기쁘지만 내가 항상 어디에 실수가 있었는지를 알았다는 것에 오늘 나는 행복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것은 별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없어졌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고 생각하는 것, 지금부터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지만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과거를 결코 투사할 수 없다.

이것은 또한 예술에서 심각한 쇠퇴와도 관련이 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과거의 위대한 작품들을 ㅡ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ㅡ 본 사람은 누구나 틀림없이 예술에서 쇠퇴가 일어났음을 인정한다. 분명히 미켈란젤로는 거장이었고 거장으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오늘날 저와 같은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에서 일반적 쇠퇴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예술가가 미래에 관하여 역사주의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훌륭한 작품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미래를 위한 지도자가 되는 데 정신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작하는 작품들의 품질에 라기보다 자신들에 너무 많이 관심을 기울여서, 자신들의 시대보다 앞서가려고 애쓰는 나쁜 예언자들과 나쁜 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대보다 앞서려고 애쓰지만 실제로 미래를 예견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없다. 마르크스를 보라. 그는 모든 기계가 항상 증기로 움직일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기계가 계속해서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기면도기와 같은 것은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항상 더 커지는 대신, 기계들은 점점 더 작아지는 듯하고 ㅡ 우리 자신의 개인적 쓸모에 맞는 듯하다. 다시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통하여 역사를 보았다. 그러나 역사가 물질적인 것과 연결되는 한, 역사는 소비재에 대한 문제이고 소비재는 점점 개선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철도는 물건을 생산하거나 물건을 운반하려는 관심에서 부설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부설되었다. 여행객, 우편과 기타 등등을 위한 말이 끄는 마차가 있었고 그 후 갑자기 서로 붙어서 증기기관이 끄는 10대씩이나 되는 객차를 당신이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마차(coach)’는 여전히 이 나라에서 객차에 대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래서 객차로 인하여 여행에 과거보다 훨씬 더 돈이 적게 들게 되었다. 객차란 친척을 만나러 가거나 다른 마을이나 혹은 박물관 및 기타 등등을 방문하러 가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용 용역(personal service)이었다. 당신은 저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가? 개인용 용역(personal service) ㅡ 저것은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저것을 혁명으로 보지 않았다.

그다음 헨리 포드의 혁명이 왔는데 그 혁명으로 인하여 백만장자뿐 아니라 노동자도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는 위대한 혁명이고 동시에 누구도 자동차를 예견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마르크스도 자동차를 전혀 예견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개인용 용역에 관하여 다음 위대한 발명이 무엇일지 예견할 수 없다. 그 발명품의 하나가 커다란 축복일 수 있었을지라도 커다란 공포가 되었는데 저것이 텔레비전이다. 부언하여 나 자신이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귀하는 기술적 혁명에 대한 이 목격으로부터 강()의 흐름을 안다는 역사주의적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릴 터인가?

 

그 주장은 백치 같을 따름이다. 역사에서 실재적인 것은 항상 예견될 수 없는 혁명인 ㅡ 예를 들어 전자제품 혁명 ㅡ 반면, 그 주장은 예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역사의 의미나 방향에 관한 문제를, 아니면 우리가 또한 혹시 지칭할 바와 같이, 역사철학의 문제를 제의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다. 우리가 몇몇 과학적 근거로써 우주의 차원에 관해 질문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또한 역사의 의미에 관하여, 역사가 인식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질문할 수 없는가?

 

나는 이것이 지적(知的: intellectual) 오류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역사의 의미가 필요하지 않다. 역사에 칭송될 많은 것인 다수의 훌륭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칭송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두려워해야 할 것을 또한 배울 수 있고, 두려워해야 할 것 중에 소위 역사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의미는 항상 오도하고 오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에 오류나 부정적 과정이 시작된 지점인 소위 등장의 시점(point of entry)’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제 이것은 사실들에 의하여 대체된 것으로 보이지만, 관념은 등장의 시점을 오류의 출구인 출구의 시점(point of exit)’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었다. 나는 귀하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귀하가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도 등장의 시점을더 멀리 뒤에 두는 이유를 알고 싶다.

 

나의 견해로 마르크시즘은 바로 시작부터 오류였다고 이미 말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은 친구들을 찾는 대신 적()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를 돕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과 나는 인류의 주요 문제들에 대하여 훌륭한 해결책을 인류가 발견하는 데 돕고자 관심을 쏟는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는 죽여야 할 적()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ㅡ 그래서 그는 저 적()으로서 자본주의를 창안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흐루쇼프로부터 이것이 어떻게 큰 실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등장의 시점이란 없다: 그것은 바로 시작부터 오류였다; 책임 대신 증오였다. 거대한 야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야망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을 증오했던 모든 사람 ㅡ 이 사람들이 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특정 것들이 다르게 실행되었더라면 모든 것이 아마도 옳았을 것으로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일이다.

 

바로 시작부터 마르크스에게 오류가 있었다고 귀하가 생각하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마르크시즘이 훨씬 더 멀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는 관념이었다.

 

그렇다, 마르크시즘은 마르크스 이전으로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역사주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나는 이미 언급했다. 우리는 역사에 관한, 전체주의와 운명의 신화(the myth of destiny)에 관한 목적론적 근원을 조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내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서술한 것을 우리가 다시 검토할 따름일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문제로 방향을 바꾸자 ㅡ 민주주의의 문제. 공산주의의 붕괴이래, 우리에게 큰 집중(convergence)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에 관한 어떤 기본적 원칙에 합의할지라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문제, 모순과 난제로 가득 찬 분야이다. 사실상 귀하 자신은 민주주의가 지닌 역설에 대하여 매우 자주 언급한다. 그 역설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그리스어의 문자적 의미인 대중의 지배(rule of the people)’로 수용된다면, 우리는 본질적 문제로부터 이탈한다. 이유인즉 민주주의의 주요점은 독재체제 예방, 다시 말해서 자유 부재 예방, 법치가 아닌 통치의 형태 예방이기 때문이다. 저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미 고대 시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란 대중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체제의 위험 예방임을 알고 있었다. 저것이 약 80년 동안 그들이 도편추방이라는 관행을 도입했던 이유이다. 그들은 인기를 차지하여 다수에 의하여 권력을 쥘 대중적(popular) 폭군이나 독재자, 대중영합주의자(populist)의 ㅡ 우리가 오늘날 지칭할 것과 같이 ㅡ 위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도편추방의 기능은 너무 대중영합적인 사람은 누구나 추방됨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범죄자로서 간주되지 않았다: 그는 범죄행위를 저질러서 기소되지 않았다. 도편추방은 누군가가 나라 안에서 너무 인기를 얻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책이었을 따름이다.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저술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의 유명한 현충일 연설을 당신이 읽으면 저것이 실제로 위급한 쟁점이었음을 안다.

이제 처칠(Churchill)이 예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는 모든 다른 형태의 정부를 제외하고 최악의 정부 형태인데, 모든 다른 형태의 정부는 훨씬 더 나쁘다. 민주주의는 특별히 훌륭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훌륭한 것은 틀림없이 민주주의 자체가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출현한다. 민주주의는 독재체제를 예방하는 수단이다 ㅡ 그게 전부이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여 범인으로 판명되지 않는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과 기타 등등이 또한 참이다. 이 모든 원칙은 법치의 일부여서 민주주의는 법치를 보전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다; 다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다수는 과거에 상당히 자주 그랬던 바와 같이 심지어 투표로 독재체제를 도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서 (다수를 통하여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지 않았던 독일과 달리) 결정적 순간에 90% 이상이 히틀러에게 투표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폭군체제와 독재체제를 예방하기 위하여 정치적 갈등을 규제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의 정치적 갈등에서 우리는 항상 좌파와 우파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현대의 정치적 갈등의 영구적 속성이 아닌가?

 

나는 이미 저것에 답변했다.

 

귀하는 이념적 갈등을 초월할 시간이 왔다고 말함으로써 답변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 끝난 것으로서 혹은 거의 끝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음을 고려하여, 우파와 좌파의 역할에 대하여 귀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귀하가 말하지 않았다.

 

저것에 대한 나의 답변은 내가 이미 말한 것에 함축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좌파의 원래 기능은 약자를 지지하는 것이었고, 저것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 후 이 기능은 왜곡되었다. 좌파는 이념적 이유로 심지어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닌 때 소위 노동을 지지했고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미래에 좌파가 어떤 역할을 가져야 한다고 귀하는 생각하는가?

 

당신은 주위를 둘러보고 약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자문하라. 오늘날 어린이들이 약자의 유일하게 큰 계급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요컨대, 아이들 앞에서 성인들이 지금 범죄를 저지른다. 저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 저질러지는 사악하고 범죄적인 모든 것은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모든 동물은 본보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모방함으로써 배운다는 것을 우리가 잊는다. 시간이 남아 있을 때 행동하려고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