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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

이윤진이카루스 2025. 11. 2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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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

 

민주주의가 민중의 통치였던 적은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민주주의가 주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그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도덕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항상 혼란을 야기하고 도덕적 문제의 면모를 띠는 한 가지 문제는, 그러나, 순전히 언어적이다: ‘민주주의민중의 통치를 의미하여 매우 많은 사람이 이 후자(後者) 용어가, 서구에 사는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국가 형태에 대한 이론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은 행정부의 다양한 형태에 대하여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다 ㅡ 분명히 그들이 정부의 가능한 형태 중 어느 형태가 좋거나 나쁘고, 낫거나 더 나쁜지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에 따라서, 헌법의 다섯 가지 명칭에 다다랐다. 이 관념은 플라톤에 의하여 많이 사용되었는데 플라톤은 다음 도식으로 그 관념을 제시했다:

 

12 전제정치(Monarchy): 한 사람의 선량한 사람에 의한 통치이면서

그 왜곡된 형태가 참주정치(tyranny)

한 사람의 나쁜 사람에 의한 통치이다.

34 귀족정치(Aristocracy): 몇 사람의 선량한 사람에 의한 통치이며

그 왜곡된 형태가, 몇 사람의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들에 의한 통치인 과두정치

(oligarchy)이다.

5 민주정치(Democracy): 국민, 다수, 민중에 의한 통치.

 

경우 플라톤은 오직 한 가지 형태만을 확인하는데 그 형태는 많은 형태 가운데서 항상 많은 나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쁘다.

이 도식 뒤에 놓여있는 문제 상황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은 어떤 의미에서 우활한(迂闊: naive) ‘누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가? 누가 통치력을 행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함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 우활한 질문은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와 같이 작은 국가에 틀림없이 제시될 수 있는데 그 도시국가에서 모든 중요 인사들이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질문은 오늘날 여전히 정치 토론의 근저에 놓여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적 정치가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레닌,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이 고도로 개인적 문제를 ㅡ 흔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ㅡ 지치지 않고 숙고했다. 그래서 그들이 일반적 규칙을 언명했을 때, 그것은 통상적으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플라톤의 답변은 최고의 인물이 통치해야 한다였다; 그것은 분명히 도덕적 답변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가 통치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자본가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실제로 국가를 통솔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독재 권력을 발휘해야 한다! 여기서 도덕적 요소가 조금 숨어있지만, 통치해야 하는 사람은 자연히 나쁜 자본가들이 아니라 선량한 프롤레타리아이다.

히틀러에 관하여 나에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의 답변은 단지 였다. 그의 선배들처럼 그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근본적이라고 분명히 생각했다.

50년 전 나는 이 질문을 최종적으로 파묻어버렸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도덕적 명령에 대응하는, 거짓이면서 궁극적으로 터무니없는 해결책을 낳는 거짓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적 관점에서, 정치적 적()을 도덕적으로 사악하다고 (그리고 자신이 속한 정당을 선하다고) 간주하면 고도로 비도덕적이다. 저것은 항상 나쁜 증오를 낳고, 권력 제한에 기여하지 않고 권력을 강조하는 태도를 낳는다.

원래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소위 선량하거나 나쁜 사람들이나 계급이나, 인종 혹은 심지어 종교가 아니라 정부의 다양한 형태를 비교하는 것이었던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정부의 형태가 있는가?’라는 완전히 다른 질문으로 우리가 대체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그 플라톤적 질문과 반대인 우리 스스로 사악하거나 심지어 무능하기만 하고 피해 입히는 정부를 없앴을 수 있는 정부의 형태가 있는가?’라는 질문.

그런 질문은 소위 민주주의의 근저에 무의식적으로 놓여있다고 나는 논증할 터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은 국민이 통치해야 하는지에 관한 플라톤의 질문과 매우 다르다고 나는 논증할 터이다. 그런 질문들이 우리가 사는 현대 서구 민주국가의 기저를 이루듯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저를 이루었다.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독재정치나 전제정치를 도덕적으로 사악한 ㅡ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참기 어려울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참기 어려운 ㅡ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그런 정치체제를 인내하기만 함으로써 잘못된 일을 저지른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치체제를 인내하라고 강요당하지 않는다. 저것이 1944720일 독일에서 히틀러 암살음모자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 히틀러 암살음모자들은 19333월에 수권법(授權法: Enabling Law)이 민주주의적으로 채택되자 자신들이 빠진 가공할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다. 독재체제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상황을 강요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이다. 독재체제는 인도적으로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독재체제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도덕적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저것이 우리가 소위 민주주의적 국가 형태에 대하여 실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고, 저것이 민주주의적 국가 형태의 유일한 도덕적 정당화이다. 민주주의는, 그렇다면 국민 주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독재체제로부터 제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장착된 제도이다. 민주주의는 권력 축적인 독재 통치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부가 자기 권리와 의무를 준수하지 않으면 또한 우리가 정부의 정책이 나쁘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면 정부를 피를 흘리지 않고 제거하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쟁점인 질문은 통치자인 한 사람 누가가 아니라 한 가지 정부인 어떻게이다. 요점은, 정부가 너무 많이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혹은 낫게, 그것은 어떻게국가가 운영되는가의 문제이다.

이 태도는 아테네 민주주의 배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표현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그 태도는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태도이거나 태도여야 한다. 어떤 무리가 국민을 대표할지라도 ㅡ 군인, 공무원, 노동자와 고용자, 기자, 라디오와 텔레비전 해설자, 작가, 테러리스트나 젊은이 ㅡ 우리는 그들이 권력을 차지하거나 통치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고 그들을 억지로 두려워하게 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그들의 강요에 대항하여 스스로 방어하고 싶고, 필요하다면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저런 것이 우리 서구 정부 형태의 목표이고, 그 형태를 언어적 모호성과 습관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그런 정부 형태는 모든 형태의 통치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한 가지 예외는 주권의 통치인 법치이다.

 

요점: 정부는 피를 흘리지 않고 갈아치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견해는, 정부의 형태에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로 인하여 우리가 그 정부를 갈아치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ㅡ 갈아치운 다음에 새로운 정부가 권력의 고삐를 잡는다. 이 갈아치우기가 투표자나 국회의원 다수 혹은 헌법재판소의 다수 판사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ㅡ 새로운 선거를 통해서건 의회를 통해서건 ㅡ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닉슨 대통령의 실제적 제거인 사임보다 미국의 민주주의적 특징을 더 명백하게 증명한 것은 없다.

정부 교체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이 권력 부정인 제거 위협이다. 정부나 수상을 지명하겠다는 긍정적 권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은 저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새로운 정부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어떤 위험이 있다; 이유인즉 정부를 지명하면 그 지명이 선거권자들이 면허를 준 것으로서, 민중의 이름으로 그리고 민중의 의지를 통하여 허용된 합법화로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와 민중이 선택한 정부가 저지를 실수나 심지어 범죄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국민은 무엇을 아는가?

잠시 후 우리는 정부나 정책을 판단할 수 있고 아마도 우리는 정부나 정책을 승인할 것이어서 그 정부를 재선출할 것이다. 혹시 우리는 미리 그 정부를 오랫동안 승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우리는 정부를 알지 못하여 정부가 우리의 신뢰를 남용할 것이라고 우리가 상정(想定)할 수 없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이 관념을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우리 가운데 소수가 정책을 고안하여 실행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그 정책을 판단할 수 있다.’ 이 간결한 공식은 나의 견해로 근본적이다. 그 공식은 민중의 통치(rule by the people)라는 개념을, 심지어 민중 주도권(popular initiative)이라는 개념을 배제함을 주목하라. 민중의 통치와 민중 주도권은 민중에 의한 판단(judgement by people)이라는 매우 다른 개념으로 바뀐다.

페리클레스는 (혹은 아마도 투키디데스 ㅡ 그들은 아마도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심지어 어떤 종류의 다른 난제도 없을 때도, 민중이 통치할 수 없는 이유를 매우 간략하게 말한다. 관념은 ㅡ 특히 새로운 관념 ㅡ 몇 명의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명확해져서 개선될지라도, 개별적 개인들의 작품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많은 사람이 결과적으로, 특히 그들이 그 관념이 낳은 결과를 직접적으로 경험했다면, 그 관념이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평가를, 그런 예-아니오 결정을 더 많은 유권자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 주도권(popular initiative)’과 같은 표현은 기만적이며 정치 선전적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소수가 주도한 것이고 기껏해야 비판적 평가를 받으려고 민중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 제시되고 있는 조치가 그 조치를 평가하는 유권자의 능력 밖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에서 떠나기 전에, 사람들이 혹은 어린이들이 민중 통치(popular rule)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고 ㅡ 참도 아니고 참이 될 수도 없는 ㅡ 교육받을 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하여 나는 경고하고 싶다. 이유인즉 그들이 이것을 별안간 의식하게 되면, 전통적인 언어적 혼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에 빠질 뿐 아니라 속임수를 느끼고 실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 영역에서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테러를 유발할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런 경우들을 알고 있었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97, 68-72쪽 ㅡ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