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의 폭력물을 언론검열하라
7
‘텔레비전은 인류를 타락시킨다.
텔레비전은 전쟁과 같다’
귀하가 ‘도덕적 타락’을 말할 때 귀하는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매우 간단하고도 직설적으로, 나는 범죄 증가와 질서정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정상적 느낌의 실종을 내가 염두에 둔다. 유럽에서,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지만 우리는 범죄가 특별히 예외적이었던 사회에 살았다.
귀하는 과거를 신화화(mythologizing)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는 이 질서정연한 사회가 또한 작고, 더럽고, 당신이 원한다면, ‘부르주아적’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당신이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호주머니에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전제할 수 있는 ㅡ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 대하여 지금 전제하는 것과 같이 ㅡ 세계였다. 저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러나 교수인 포퍼 귀하는 항상 낙관주의 철학자였다. 라이프니츠(Leibniz)가 표현한 바와 같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고의 세계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귀하가 항상 만들었다. 귀하는 더 이상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낙관론자임은 참이지만, 절대적으로 당신이 암시하는 정도로는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고의 세계라고 나는 주장한 적이 없다; 우리가 겪은 지독한 전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지금까지 존재한 세계 가운데서 최고의 세계라고 내가 말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전쟁을 낳은 폭력의 경험이 매우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 시대에, 서양 세계는 상황을 개선하려고 거대하고도 성공적인 노력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금 분명히 퇴보가 존재하고, 눈으로 그 퇴보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그 퇴보가 우리가 끊임없이 보고 생각하는 폭력에 기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대규모의 퇴보가 전적으로 텔레비전에 기인할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저것이 과장된 듯이 보이지는 않는가?
사실상 다른 원인이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 안에 폭력이 생겨났지만. 마지막 큰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은 50년 전 일이다.
귀하의 대담이 L’Unità에 발표된 후 몇 개월 만에 나타난 반대의견에 대하여 나는 이제 귀하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는 당신에게 나의 기억을 말하고 싶다. 1920년 나는 유치원을 맡고 있었고 그 유치원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요리사에게 남편이 있었는데 그 남편에 대하여 (나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소문일 따름이었다) 그 남편이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는데 머리에 총알이 여전히 박혀있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정말로, 내가 그 유치원을 맡은 후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다. 한번은 그가 아내에게 화를 내어 오랫동안 부엌칼을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대고 있었다. 나는 개입했고 조금 용기를 내어 칼을 빼앗았다.
귀하가?
그렇다. 놀랄 필요 없다. 나는 매우 젊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냈다. 어린이들을 넘겨줄 다른 어른이 없었지만, 그 어린이들이 한 인간을 또 다른 인간이 칼로 위협하는 것을 본 장소로부터 나는 그 어린이들을 재빨리 도피시켰다.
귀하가 이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 사건이 그 어린이들의 생애에 ‘매우 예외적인’ 것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 어린이들 각자에게, 그 사건이 그 어린이들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그들이 목격한 가장 심각한 사건으로 아마도 남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 사건은 이론적 문제 이상으로 실제적 문제이다. 그 남편의 폭력이 겨우 2년 전에 끝난 전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은 또한 매우 개연적이다. 그리고 오늘날, 2차 세계대전 후 50년이 지나서 어린이들은 살해되거나 학살당하거나 폭행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귀하에게 첫 번째 반대의견을 제시하겠다. 달라져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인류에게 커다란 능력이 있다. 사실상 귀하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자기 환경에 반응할 수 있는 방식을 항상 지적했다.
그렇다. 어린이는 극단적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적응하지만, 폭력에 대한 어린이의 적응이 정확하게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 적응의 가장 논리적 귀결은 어린이도 총을 살 미래이다. 고려해야 할 두 번째 일은 폭력에 반대하여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 그러나 몇 명의 부모가 저렇게 하는가? 교사들? 교사는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희망을 품지 못한다. 텔레비전은 항상 훨씬 더 흥미롭고, 더 짜릿하고, 더 흡수력이 있고, 순진한 어린이들을 유혹할 수 있고, 어린이들의 나은 요점, 특히 삶에 대한 어린이들의 흥미를 또한 더 농락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 패배를 모르는 공식이 있는데 ‘행동하라, 더 많이 행동하라’이다 ㅡ 저것이 텔레비전 프로듀서들의 전체 철학이다. 교사가 저것에 대항하여 어떤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이성의 목소리밖에 없다. 텔레비전이 개발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겨우 과거 10~15년 사이에 완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 후 텔레비전은 눈사태처럼 덮쳤다. 교사들에게 텔레비전에 저항할 가망이 없다.
또 다른 반대의견은 텔레비전이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폐기는 터무니없는 일일 터이다; 텔레비전 폐기는 전기 없는, 전화 없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전기, 전화, 자동차도 없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무엇에 해당하는가? 이 모든 것이 규제되지 않는가? 매우 정확한 교통 규칙이 있지 않은가? 고속도로 교통법 없이 자동차를 모는 믿을 수 없는 위험을 생각해보라. 아, 내가 알기에 저 종류의 반대의견은 너무 훌륭해서 참이 될 수 없다! 보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도로에서 교통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규율 및 자율적 규율을 가지기를 내가 원한다고 설명하라, 우리에게 운전면허가 있어야 한다, 아닌가? 그리고 당신이 위험하게 운전한다면 운전면허가 압수된다, 아닌가? 자, 텔레비전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자.
자유적 유형의 반대의견도 있다. 귀하는 ‘열린사회’의 이론가여서 귀하는 시장경제의 역할을 지지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관한 한 귀하는 철칙을 세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저 반대의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장에 자체의 규칙이 없는가? 이탈리아의 출판사가 나의 책을 출판한다면 그 출판사는 나에게 저작료를 지급할 필요가 없는가? 저게 ‘열린사회’와 위배되는가? 모든 삶의 행위에 우리가 규칙을 도입하지 않으면 혼란이 일터이다. 또한 저게 전부가 아니다. 기능하려면, 시장에 규칙뿐 아니라 특정 정도의 신뢰, 자율적 규율 및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엄청난 힘인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힘이 텔레비전에 있다는 나의 논증으로 내가 돌아온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우리가 제한하지 않으면 텔레비전은 계속해서 우리를 문명으로부터 끌어내릴 것이고 교사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텔레비전에 대하여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에 폭력밖에 없다. 나는 4~5년 전에 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내가 알기에 누구도 이 무시무시한 권력을 막고 싶어 하지 않는다.
칼 경, 아마도 상황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포퍼가 옳다면 어떻게 하나?’라고 묻고 있습니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97년, 58-61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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