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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험한 공산주의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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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험한 공산주의

 

나는 중등학교의 사회주의 학생연합의 (sozialistische Mittelschüler)의 회원이 되어 그들의 모임에 나갔다. 나는 사회주의 대학생의 모임에도 나갔다. 이 모임에서 연사들은 때때로 사회민주당에 그리고 때때로 공산당에 속했다. 그들의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은 당시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땅하게, 전쟁의 공포를 길게 이야기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전쟁을 종식함에 의하여 러시아에서 자기들의 평화주의를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평화는 자기들이 주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저 특정 시기에 그들은 평화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들의 정치선전에서, “불필요한폭력을 반대했다. 주로 나의 친구 아른트(Arndt)가 공산주의자에 대하여 나에게 말할 바 때문에 나는 한동안 공산주의자를 의심했다. 그러나 1919년 봄에 몇몇 친구와 함께, 나는 공산주의자의 정치선전에 의하여 전향했다. 2~3개월 동안 나는 공산주의자로 자처했다.

나는 곧 환멸을 겪을 수 있었다. 내가 공산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그리고 내가 곧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된 사건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 사건은 나의 17살 생일 바로 전에 발생했다. 비엔나에서,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고 비엔나 중부 경찰서에서 구금되어 있던 몇몇 공산주의자의 탈주를 도우려고 했던 비무장 젊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위가 벌어지는 동안 총격이 발생했다. 몇몇 젊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나는 경찰의 잔인성에 공포와 충격을 받았지만, 나 자신에 의해서도 공포와 충격을 받았다. 이유인즉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 비극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 일부가 있다고 ㅡ 적어도 원칙적으로 ㅡ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도래를 가속하기 위하여 계급투쟁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 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혁명으로 인하여 몇몇 희생자가 생길지라도 자본주의가 전체적인 사회주의적 혁명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저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ㅡ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의 일부. 당시 나는 그런 계산이 과학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을지를 자문했다. 전체 경험과 특히 이 문제로 인하여 나는 일생 혐오감을 느꼈다.

공산주의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신조이다. 공산주의는 지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역사관련 발전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덜 폭력적이고 더 공정한 세상인 나은 세상을 여전 희망했지만,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지 ㅡ 내가 생각했던 것이 혹시 가식이 아니었는지 ㅡ 의심했다. 나는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읽었지만 내가 실제로 그것을 이해했던가? 우리가 다소 멀리 떨어진 목적에 의하여 그 수단을 정당화하는 신조를 수용하기 이전에 우리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바와 같이 나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는가?

내가 복잡한 이론을 다소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이론과 관행에서 오류였던 것을 실제로 상당히 주지했음을 자인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억눌렀다 ㅡ 부분적으로 나의 친구들에 대한 우정 때문에, 부분적으로 명분에 대한 충심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점점 더 자신을 깊이 빠지게 만드는 행동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무가치한 요점에 관하여 우리가 우리의 지성적 양심을 희생하자마자 우리는 너무 쉽게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명분의 근본적 선함을 확신시킴에 의하여 우리는 자기-희생을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데, 그 명분의 선함은 요구되는 작은 도덕적이거나 지성적 타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도덕적이거나 지성적인 모든 희생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우리는 추가적으로 투자함으로써 명분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지성적 투자를 기꺼이 지지하게 된다. 그것은 돈을 낭비하고 좋다고 또 낭비하는 것과 같다.

이 행동 방식이 나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알았고 그래서 나는 공포에 질렸다. 나는 그 행동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특히 나의 공산주의자 친구들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하여 나는 나중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터인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위험한 신조를 무비판적으로, 독단적으로 수용했다.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인하여 나는 먼저 회의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겨우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모든 합리주의에 반발했다. (내가 나중에 발견한 바와 같이, 이것은 실망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전형적인 반발이다.)

내가 17살이 되었을 때쯤 나는 반()-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그 신조의 독단적 특징과 그 신조의 불가해한 지성적 오만을 깨달았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독단을 위하여 혹은 아마도 실현불가능으로 판명될 꿈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의무로 만드는 일종의 지식 사칭은 지독한 일이었다. 그것은 특히 읽고 사유할 수 있는 지식인에게 나빴다. 그런 함정에 빠진 것은 지독하게 암울한 일이었다.

내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자마자,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있던 결함과 허점 및 모순이 명백해졌다. 그 이론의 핵심적 요점을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및 독재와 관련하여 생각하라: 프롤레타리아가 누구였는가?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 공산주의자들이 다수가 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공장노동자 가운데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다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작은 소수였고 분명히 그것은 다른 곳에서도 동일했다.

마르크스 논증의 핵심을 내가 파악했다고 내가 확신하기까지 나는 몇 년을 공부했다. 그것은, 다음 도덕적 법칙에 함축적으로 호소함과 결합하여, 역사관련 예언으로 구성된다: 불가피한 것이 실현되도록 도우라! 심지어 당시에도 나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비판을 출판할 의도가 없었는데 이유인즉 오스트리아에서 반()-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나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반()-마르크스주의는 나중에 파시스트로 명명된 저 권위주의적 운동과 매우 근사하게 동일했다. 물론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했다. 그러나 내가 서술한 것을 출판할 의도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6년 후인 1935년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권의 서적이 ㅡ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935년과 1943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당시에 (틀림없이 1919년이나 1920)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든 것 중 한 가지 것은 나의 마르크스주의자 친구와 동료 학생 중 몇몇이 보여준 지성적 건방짐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자 계급의 미래 지도자임을 거의 당연시했다. 내가 알고 있던 바, 그들에게 지성적으로 자격이랄 게 없었다. 그들이 주장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조금 안다는 것이었다 ㅡ 심지어 완벽한 지식이 아니고, 틀림없이 비판적 지식이 아닐지라도. 육체노동자의 삶에 관하여 그들 대부분은 나의 지식보다 지식이 적었다. (나는 적어도 공장에서 전쟁 동안 몇 개월 일했다.) 나는 그 태도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가 크게 특권을 누렸다고 ㅡ 정말로 자격 없이 그렇게 ㅡ 내가 느껴서 나는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또한 정당 정치에서 영향력을 결코 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실제로 육체노동자가 되려고 몇 번 시도했다. 콘크리트로 굳은 도로 표면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곡괭이로 파내기 위하여 필요한 체력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에 나의 두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나의 마지막 시도는 캐비넷 제작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지 않았지만, 문제는 나의 흥미를 끈 특정 사변적 관념들이 나의 작업에 끼어든 것이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얼마나 비엔나 노동자들의 위대한 운동을 ㅡ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의하여 지도되는 ㅡ 찬양했는지 말할 장소이다 ㅡ 그 노동자들의 사회 민주주의적 지도자들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를 치명적 오류로서 내가 간주했을지라도. 그들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자기들의 임무에 대하여 놀라운 신념을 불어넣을 수 있었는데 그 신념은 다름 아닌 그들이 믿었던 인류 해방이었다. 사회 민주주의적 운동이 주로 무신론적이었을지라도 (자신들을 종교 사회주의자로서 서술하는 작고도 찬양받을만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운동 전체는 열렬한 종교적이고 박애주의적 신념으로서 서술될 수 있을 뿐인 것에 의하여 고취되었다. 그것은 노동자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교육하는 노동자에 대한 운동이었다; 노동자를 해방하고 그리하여 인류를 해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노동자를 교육하는 노동자에 대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내도록 노동자를 교육하는 노동자에 대한 운동이었다. 노동자의 제한된 여유 시간에 젊고 늙은 많은 노동자가 공개강좌나 인민대학(Volkshochschulen)”의 한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기-개발에 뿐 아니라 자녀 교육에도 그리고 주택개량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칭찬받을만한 강령이었다. 아마도 가끔 우월감 표시를 드러내는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술 대신 산행을, 스윙 음악(swing) 대신 고전음악을, 모험소설 대신 심오한 저서를 찾았다. 이 활동 모두는 평화로웠고 파시즘과 잠재적 내전의 분위기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한 매우 불행하게도, 노동자가 민주주의적 방식을 포기하고 폭력을 사용하라는 노동자 지도자들한테서 나오는 반복적이고 혼잡한 위협의 ㅡ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호한 태도에서 나온 유산 ㅡ 분위기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훌륭한 운동과 그 운동이 파시즘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파괴됨에 의하여 몇몇 영국과 미국의 관찰자에게 (예를 들어, G. E. R. 게디[Gedye]) 깊은 인상이 남았다.

심지어 내가 마르크시즘을 배척한 이후에도 나는 몇 년 동안 사회주의자로 남았다; 그리고 개인적 자유와 결합한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일 터이다. 이유인즉 평등한 사회에서 겸손하고,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있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아름다운 꿈으로만 인식하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자유가 평등보다 더 중요한다는 것; 평등을 이룩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자유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자유가 실종되면 자유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심지어 평등도 없을 것이라는 것.

마르크시즘과 조우한 것은 나의 지성적 발전에서 주요 사건 중 한 가지 사건이었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내가 잊은 적이 없는 몇 가지 교훈을 나는 배웠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소크라테스의 말인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의 지혜를 나는 배웠다.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나는 오류가능주의자가 되었고 지성적 겸손이라는 가치가 나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시즘으로 인하여 나는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의 차이점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32-6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