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중등학교를 떠났나
8. 결정적 연도: 마르크시즘; 과학과 사이비-과학
내가 상당한 기간 강력하게 느꼈던 것을 매우 분명하게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오랜 병마로 고통을 받던 때인 아마도 1917년인 전쟁의 마지막 지독한 몇 년 동안이었다: 우리의 유명한 중등학교에서 (“김나지움[Gymnasium]”과 ㅡ 말하기 끔찍하지만 ㅡ “레알김나지움(Realgymnasium)”으로 불리는) 우리의 스승들이 잘 교육을 받고 학교를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을지라도, 우리는 충격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우리의 스승들의 가르침 중 많은 가르침이 극단적으로 지루했다는 것은 ㅡ 많은 시간 게다가 절망적으로 고문을 가하는 시간 ㅡ 나에게 새롭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면역이 들었다: 그 이래 나는 지루함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가 학습과 관련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학교에서 우리가 적발되기 쉬웠다: 우리는 집중하도록 강요당했다. 나중에 교사가 지루하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흥미롭고 참으로 고무적인 스승님을 경험한 단 한 가지 과목이 있었다. 그 과목은 수학이었고 담당교사의 성함은 필립 프로이트(Philipp Freud)였다 (그분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친척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개월 이상 병을 앓은 후에 내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 심지어 수학에서도 나의 반은 진도를 나가지 못했음을 나는 발견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계몽되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학교를 떠나려고 열심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 1차 세계대전의 결과, 기근, 비엔나에서의 굶주림으로 인한 폭동과 통제 불가능한 물가상승이 자주 서술되었다. 그것들은 내가 성장한 세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끝난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냉혹하고 격렬한 내전 기간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16살이 넘었고 그 변혁으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 변혁을 고취하게 되었다. 나는 1918년 말에 학교를 떠나서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처음에 청강생이었던 비엔나 대학에 등록했는데 1922년까지 입학시험을 (“마투라[Matura]”)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나는 청강생이 되었다. 장학금은 없었지만, 대학 등록금이 아주 소액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어떤 강좌 과정도 들을 수 있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년, 31-2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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