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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과 비판, 귀납 없이 학습하기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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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과 비판, 귀납 없이 학습하기

 

10. 두 번째 일탈: 독단적 및 비판적 사유; 귀납 없이 학습하기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동물심리학 분야에서 탁월한 이론을 세운 분인데 그 이론을 그는 각인(刻印: imprinting)”으로 부른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결론으로 도약하는 선천적 작동장치(mechanism)가 어린 동물에게 있다고 시사한다. 예를 들어 새로 태어난 새끼거위는 자체가 목격한 최초로 움직이는 물체를 자기 어미로서 받아들인다. 이 작동장치는, 새끼거위에게 다소 위험할지라도, 정상적 상황에서 잘 적응된다. (이 작동장치는, 우리가 로렌츠로부터 배우는 바와 같이, 선택된 양부모[養父母: foster parents]에게도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 상황에서는 성공적 작동장치이다; 그리고 완전히 정상적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렌츠의 각인에 관한 다음 요점이 중요하다:

(1) 그것은 관찰에 의한 학습 과정이다 ㅡ 유일한 과정은 아니다.

(2) 관찰의 자극 하에서 해결되는 문제는 타고난다; 다시 말해서 새끼거위는 자기 어미를 찾도록 유전적으로 조건이 주어진다: 새끼거위는 자기 어미를 보리라 기대한다.

(3)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론이나 기대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나거나 유전적으로 조건이 주어진다: 그 이론이나 기대는 실제적 관찰을 멀리 넘어서는데, 실제적 관찰은 (말하자면) 주로 생명체에서 수행되는 이론을 방출하거나 촉발할 따름이다.

(4) 학습 과정은, 특정 시간이 (짧은 시간) 걸리겠지만, 반복적이 아니 흔히 생명체의 편에서 어떤 활동이나 노력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그 과정은 정상적으로 조우되는 상황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황을 포함한다. 그런 반복적이지 않은 학습 과정에 대하여 나는, 그 과정이 -귀납적이라고 말하겠는데 반복을 귀납의 특징으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복적 학습 이론은 지시적[instructive] 학습으로 라마르크적[Lamarckian]인 반면, -반복적 학습의 이론은 선택적[selective]이나 다윈적[Darwinian]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언어사용법과 관련된다: 누군가가 각인(imprinting)을 귀납적 과정으로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나는 나의 용어사용법을 바꿔야 할 뿐이다.

(5) 관찰 자체는 자물쇠에서 열쇠를 돌리는 것과 같은 역할만 한다. 관찰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고도로 복잡한 결과가 거의 완벽하게 사전에 형성된다.

(6) 각인(imprinting)은 학습의 비가역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각인은 수정이나 개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내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알텐베르크[Altenberg]에서 소년으로서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 우리에게 공동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을지라도) 1922년 나는 그의 이론에 대하여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여기서 각인(imprinting) 이론을, 나 자신의 추측을 설명하는 수단으로서만 이용하겠는데 나 자신의 추측은 유사하지만 달랐다. 나의 추측은 동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C. 로이드 모건[Lloyd Morgan]에게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H. S. 제닝스[Jennings]에서 더 많이 영향받았을지라도) 인간, 특히 어린이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추측은 이랬다.

학습 과정 대부분은 (혹은 아마도 모두는) 이론 형성을 본질로 삼는다; 다시 말해서 기대의 형성을 본질로 삼는다. 이론이나 추측의 형성에 항상 독단적이고 흔히 비판적단계가 있다. 이 독단적 단계에, 각인(imprinting)과 함께, 특징 (2)(4) 그리고 왕왕 (1)(5)도 있지만 보통 (6)은 없다. 비판적 단계는, 기대가 실망이나 반증으로 끝나서 압력을 받아 독단적 이론을 포기하는 것을 그리고 다른 독단을 시험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간혹 독단이 아주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서 어떤 절망이 와도 그 독단이 흔들릴 수 없는 것을 나는 주목했다. 이 경우 ㅡ 비록 이 경우만일지라도 ㅡ 독단적 이론은 각인(imprinting)에 근접하는데 각인(imprinting)에 관하여 (6)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나는 (6)을 일종의 신경증적 정신착란으로서 간주하고 싶었다 (내가 신경증에 흥미가 없었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시작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발견의 심리학이었다.) (6)을 향한 이 태도로 인하여,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마도 각인(imprinting)과 관련이 있을지라도 각인과 달랐음이 밝혀진다.

이론 형성에 관한 이 방법을, 나는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 방법으로서 간주했다. 그러나 내가 이론적 독단의 형성을 시행으로 명명했을 때, 나는 무작위적 시행을 의미하지 않았다.

시행과 착오의 과정에서 시행의 무작위성이라는 문제를 고찰하면 (혹은 고찰과 다른 행위) 다소 흥미롭다. 간단한 산술적 사례를 들자: 그 숫자의 구구단을 우리가 암기하지 못하는 어떤 수로 (가령, 74856) 나눔은 통상적으로 시행착오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행이 무작위임을 의미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78에 대한 구구단을 우리가 정말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무작위로 선택하는 방법에 의하여 10개의 자리수 0, 1,... 9중 하나를 나누기 위하여 그리고 오류의 경우 동일한 무작위 절차에 의하여 나머지 9개의 숫자 중 하나를 (오류 숫자는 제외되고) 나누기 위하여 컴퓨터를 프로그램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더 체계적인 절차보다 열등할 터이다: 적어도 우리는, 선택된 숫자가 너무 작기 때문에 혹은 그 숫자가 너무 크기 때문에 컴퓨터의 최초 시행이 오류인지를 컴퓨터가 의식하도록 만들어서 두 번째 선택을 위한 숫자들의 범위를 줄여야 한다.

이 사례에 무작위라는 관념이 원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긴 나눗셈에서 잘 정의(定義)된 가능성의 (한 자리 숫자들) 집합으로부터 수행되는 선택이 모든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의 동물학적 사례 대부분에서 가능한 반응의 (여하한 정도의 복잡성을 띤) 범위나 집합은 사전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 범위의 원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확률을 그 원소에 귀속시킬 수 없지만 명확한 의미에서 우리가 무작위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터이다.

그리하여 얼마간의 재능으로써 무작위 관념이 적용될지도 모르는 고도로 인위적인 조건을 (쥐를 실험하기 위한 미로) 우리가 구축할지라도, 시행착오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혹은 보통 무작위적 시행으로써 작동한다는 관념을 우리가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그 관념의 적용 가능성만으로 물론, 시행이 사실상 무작위적이라고 확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컴퓨터는 숫자를 선택하는 더 체계적인 방법을 이롭게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미로를 달리는 쥐는 또한 무작위적이 아닌 원칙에 근거하여 움직일 것이다.

다른 한편 시행착오의 방법이 적응의 문제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에 (가령, 미로에) 적용되는 여하한 경우, 시행은 통상적으로 문제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거나 문제에 의하여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다; 또한 시행이 우연히 행운이 아니라면 시행한다고 해도 문제의 (알려지지 않은) 해결책이 예상될 수 없다. D. T. 캠벨(Campbell)의 용어사용법으로, 시행은 틀림없이 맹목적이라고 (나는 아마도 시행이 틀림없이 문제의 해결에 맹목적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우리가 말할 것이다. 시행 ㅡ 독단에 상응하는 ㅡ 이후 그 시행이 운 좋은 추측이었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시행으로부터가 아니라 오류 제거 방식인 비판적 방식으로부터이다; 다시 말해서 시행이 제거되는 것을 당분간 피할 정도로, 다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히 성공적이었는지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은, 문제가 요구하는 것에 항상 전적으로 맹목적이지는 않다: 문제로 인하여 흔히, 시행이 선택되는 범위가 (한 자리 숫자의 범위와 같은) 결정된다. 이것은 다비트 카츠(David Katz)에 의하여 잘 서술된다: “굶주린 동물은 환경을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양분한다. 도망치는 동물은 도피하는 길과 은신처를 본다.” 게다가 문제는 시도가 성공하는 데 따라서 다소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범위가 좁혀질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경우도, 특히 인간의 수준에서 또한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전제된 범위의 한계를 타개하는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 이 경우는, 범위의 선택 자체가 시도일 것임을 (무의식적 추측) 그리고 비판적 사고는 특정 시행이나 추측을 거부하는 것뿐 아니라 더 깊은 추측으로서 서술될 것을 ㅡ 가능한 모든 시행의 범위라는 전제 ㅡ 본질로 삼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사유의 많은 경우에서 발생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창조적 사유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문제에 대한 흥미의 강도(剛度: intensity)와 별도로, 덜 창조적인 사유가 자기 시행을 선택하는 범위의 한계를 타개하는 ㅡ 혹은 범위를 변화시키는 ㅡ 능력이다. 이 능력은 분명히 비판적 능력인데 비판적 상상력으로서 서술될 것이다. 그 능력은 흔히 문화 충돌의 결과, 다시 말해서, 관념들 사이의 혹은 관념들로 이루어진 구조들(frameworks) 사이의 충돌 결과이다. 그런 충돌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상상력의 일반적 한계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급은, 창조적 사유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과학적 발견에 대하여 심리적 이론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그들이 찾는 것은 성공적 사유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성공적 사유에 대한 이론을 요구하면 충족될 수 없다고, 그리고 그 요구는 창조적 사유에 대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공은 많은 것에 ㅡ 예를 들어 행운에 ㅡ 좌우된다. 성공은 유망한 문제를 만나는 것에 좌우될 것이다. 성공은 기대되지 않은 것에 좌우된다. 성공은, 최신 유행에 따르는 것과 자기 관념을 산출하는 것 사이에서 사람의 시간을 운 좋게 나누는 것과 같은 것에 좌우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창조적이거나 발명적사유에 필수적인 것은 고도로 비판적 사유와 어떤 문제에 대한 강력한 흥미의 (그리하여 반복적으로 시도하려는 결심) 결합이다; 심지어 비판력이 떨어지는 사유에 대하여 시도가 (추측) 선택되는 범위의 한계를 결정하는 저 가정(presuppositions)을 공격하는 결기와의 결합; 지금까지 의심받지 않은 오류의 근원을 우리가 알게 만드는 상상적 자유와의 결합: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편견의 가능성인 지금까지 의심받지 않은 오류의 근원.

(창조적 사유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 대부분은 상당히 불모상태라는 ㅡ 아니면 심리학적이라기보다 논리적이라는 ㅡ 것이 나의 견해이다.a 이유인즉 비판적 사유나 오류 제거는 심리학적 용어로보다 논리학적 용어로 더 잘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행이나 새로이 형성된 독단혹은 새로운 기대는 주로, 특수한 문제를 낳는 선천적 욕구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대를 형성하려는 (어떤 특수 분야에서인데 그 분야는 자체로 몇 가지 다른 욕구와 관련된다) 선천적 욕구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부분적으로, 좌절된 이전 기대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물론, 시행이나 독단의 형성에서 존재하는 개인적 재간이라는 요소가 또한 있을 것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재간이나 상상력은 오류 제거라 비판적 과정에서 자체의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고 내가 생각한다. 인간 정신의 최고 업적 중 하나인 위대한 이론 대부분은 앞선 독단에 비판이 덧붙여진 산물이다.

독단 형성과 관련하여 나에게 먼저 분명해진 것은, 아이들에게 ㅡ 특히 작은 아이들 ㅡ 그들 주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규칙성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음식물을 위한 것과 사랑받는 것을 위한 것뿐 아니라 정해진 일상을 위하고 정해진 기대를 위한 환경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구조적 불변자들을 (“물체들은 발견될 수 있는 그런 불변자들이다) 위한 것이기도 한 선천적 욕구가 있었다. 이 유아적 독단주의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에 의하여 관찰되었다: “헨리와 존은 여전히 매일 해리엣과 집시들의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었고 에마(Emma)가 원래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특이하게 이야기를 바꾸면 여전히 악착같이 [에마]를 바로 잡아 주고... 있었다.” 특히 더 나이를 먹은 아이들에게 변화를 즐기는 면이 있었지만 주로 한정된 범위나 기대의 틀 안에서였다. 예를 들어 놀이가 이런 종류였다; 그리고 놀이의 규칙들은 (불변자들) 흔히 관찰만에 의해서 학습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나의 주안점은, 사유의 독단적 사유 방식은 규칙성에 대한 선천적 요구에 그리고 발견에 대한 선천적 작동장치(mechanisms)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규칙성을 탐색하도록 만드는 작동장치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주장 중 한 가지 주장은, 우리가 유전과 환경에 관하여 유창하게 말한다면 유전의 압도적 역할을 ㅡ 다른 것 가운데서 자체의 객관적 환경의 (생태적 지위) 측면이 동물의 주관적이거나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환경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주로 결정하는 ㅡ 우리가 과소평가하기 쉽다.

나는 학습 과정의 세 가지 주요 유형을 구분했는데 첫 번째 유형은 근본적인 것이었다:

(1) 발견의 의미에서 학습: (비판적) 오류 제거에 의하여 제어되는 이론이나 기대의 형성 혹은 규칙적 행태의 (독단적) 형성,

(2) 모방에 의한 학습. 이것은 (1)의 특별한 경우로서 해석될 수 있다.

(3) 악기 연주나 자동차 운전 학습에서처럼 반복이나 연습에 의한 학습. 여기서 나의 주장은, (a) 진정한 반복은 없고 더 정확하게 (b) 오류 제거를 (이론 형성에 뒤따르는) 통한 변화와 (c) 특정 행위나 반응을 자동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그 행위나 반응이 생리학적 수준으로만 가라앉도록 그리고 주의하지 않고도 수행되도록 허용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성과 규칙을 발견하기 위한 선천적 의향이나 욕구의 중요성은, 많이 연구된 과정인 어린이의 언어 학습인 많이 연구되었던 과정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일종의 모방에 의한 학습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초기 과정이 시행과 비판적 오류제거의 과정이라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비판적 오류 제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발전에서 본질적 의향과 요구의 힘은, 자신들의 청력 상실로 인하여 자신들의 사교적 환경에서 말을 하는 상황에 정상적 방식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서 제일 잘 보일 수 있다. 가장 확신적인 경우는 아마도 로라 브리지먼(Laura Bridgman)처럼 ㅡ 혹은 헬렌 켈러인데 그녀에 대하여 나는 나중에 들었을 따름이다 ㅡ 청력손상과 동시에 시력을 잃은 어린이들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경우에도 우리는 사교적 접촉을 발견하고 ㅡ 헬렌 켈러는 자기 스승과의 접촉 ㅡ 우리는 모방도 또한 발견한다. 그러나 심지어 헬렌 켈러가 스승이 그녀의 손에 쓴 철자를 모방한 것은, 그 의사소통적 기능이 심지어 개(dog)에 의해서도 이해될 수 있고 반응될 수 있는 소리인 긴 기간에 걸쳐 들려준 소리를 평범한 어린이가 모방하는 것과 동떨어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으로 인하여, 언어습득에 중요한 환경적 요소가 틀림없이 있다고 밝혀진다. 게다가 어린이의 언어습득은 거의 전적으로 모방에 의한 학습의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지닌 다양한 생물학적 양상을 숙고하면 유전적 요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밝혀진다. 그리하여 조지프 처치(Joseph Church)의 다음 언급에 나는 동의한다: “유아기에 발생하는 변화의 어떤 부분이 육체적 성숙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성숙은 경험에 대하여 순환적 정보(feedback) 관계에 있음을 ㅡ 생명체가 수행하고 느끼고 그 성숙에 대하여 수행한 것 ㅡ 우리가 안다. 이것은 성숙의 역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숙을 미리 운명이 정해진 생물학적 특징의 단순한 만개로서 간주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출하는 신호와 그 신호를 수용하는 경험보다 유전적으로 확립된 성숙 과정이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고 주장하여 처치(Church)와 의견을 달리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만개를 자극하기 위하여 이것의 어떤 최소한도가 필요할지라도, “(water)”이라고 철자된 단어가 헬렌 켈러가 손으로 느낄 수 있어서 그녀가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을 의미했음을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은 (처치[Church]에 의하여 언급되지 않은) “각인(imprinting)”과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차이점도 많다. 유사점은, 그녀에게 일어난 지워질 수 없는 각인(imprinting)과 단 한 번의 경험이 억압된 의향과 욕구를 방출한 방식이었다. 명백한 차이점은, 경험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개방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녀가 언어에 숙달하게 된 엄청난 변화의 범위였다.

이것에 비추어 나는 다음과 같은 처치(Church)의 언급이 합당한지 의심한다: “아기의 걷기 작동장치(walking mechanism)’가 만개했기 때문에 아기가 걷는 것이 아니라, 걷기가 가능한 행동 방식이 되는 일종의 공간지향을 아기가 성취하기 때문에 걷는다.” 내가 보기에 헬렌 켈러의 경우 그녀 스승의 손가락이 건드리면 물(water)을 표시했음을 발견하기 전에 그리고 그 스승의 특정 손가락 건드림이 표시적이거나 참고적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그녀가 도약하기 전에 언어적 공간에 지향이 없었거나 아무튼 극도로 희소했다. 그곳에 틀림없이 있었던 것은, 신호들을 해석하려는 결기이자 의향이자 욕구였다; 그리고 모방에 의하여, 시행착오의 방법에 의하여 (-무작위적 시행들과 철자 오류들을 비판적으로 제거함에 의하여) 이 신호를 배우려는 욕구이자 결기.

이 분야에서 협동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선천적 의향들이 틀림없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고, 동정하고, 움직임을 모방하고, 모방된 움직임을 제어하여 수정하려는 의향; 그 움직임을 이용하려는 그리고 그 움직임의 도움을 받아서 의사소통하려는 의향; 언어에 반응하려는 의향; 명령, 요청, 충고, 경고를 수신하려는 의향;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서술을 해석하여 그런 서술을 생성하려는 의향. 헬렌 켈러의 경우 (정상적 어린이의 경우와 반대로) 현실에 대하여 그녀가 받은 정보 대부분은 언어를 통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우리가 아마도 소문으로 지칭할 것을, 경험과 심지어 그녀 자신의 상상과 당분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동일한 기호적 암호를 통하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언어습득의 사례로 인하여, 비판적 단계가 뒤따르는 독단적 단계로 구성되는 나의 자연스러운 배열의 도식이 너무 간단하다고 나는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소멸하는 수정하려는 선천적 의향이 (다시 말해서, 오류를 제거하려고 신축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언어습득에 분명히 있다. “생쥐들(mice)”이라고 말하기 배운 다음에 어린이는 (house)”의 복수형으로 “hice"를 사용할 때 규칙성을 발견하려는 의향이 작동하고 있다. 어린이는 곧, 아마도 어른이 내놓는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을 수정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습득에 언어구조가 경직되는 ㅡ 아마도 위 3 (c)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자동화의 영향을 받아서 ㅡ 한 단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사례로부터 모방이 시행과 오류제거 방식의 특별한 경우라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례로서만 나는 언어습득을 사용했다. 그것은 또한 한편 독단적인 이론 형성, 기대 형성이나 행태적 규칙성의 형성 단계들과 다른 한편 비판 단계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사례이다.

그러나 비판적 단계가 이어지는 독단적 단계라는 이론이 너무 간단할지라도, 중요한 것이 ㅡ 기대, 행태의 규칙성 ㅡ 형성되어 오류 제거가 그것을 다루기 시작할 수 있는 단계인 앞선 독단적 단계가 없으면 비판적 단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견해로 인하여 흄(Hume)이 심지어 논리적 근거를 토대로 귀납을 배척한 이후에도 집착한 이론인 귀납에 의한 학습이라는 심리학적 이론을 내가 배척하게 되었다. (습관에 관한 흄[Hume]의 견해에 대하여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내가 말한 것을 나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로 인하여 나는 또한, 편향되지 않은 관찰 같은 것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관찰은, (적어도 모호하게 추측된 어떤 규칙을 발견하거나 조사하려는) 목표를 지닌 활동이다; 문제에 의하여 그리고 기대의 맥락에 (내가 나중에 그 맥락을 기대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으로 지칭한 바와 같이) 의하여 영향받는 활동이다. 수동적 경험과 같은 것은 없다; 각인된 관념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각인된 연상 작용은 없다. 경험은 생명체가 능동적으로 탐사한 결과로, 규칙성이나 불변자를 탐색한 결과이다. 이해관계와 기대의 그리하여 규칙성이나 법칙의 맥락에서를 제외하고 지각(知覺: perception)과 같은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나는, 추측이나 가설이 틀림없이 관찰이나 지각에 선행한다는 견해에 다다랐다: 우리에게 선천적 기대가 있다; 우리에게, 능동적 탐사에 몰두하는 동안 통상적으로 우리가 반응하는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되는, 잠재적 기대의 형태로 된 잠재적 선천적 지식이 있다. 모든 학습은, 특정 이전 지식을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어떤 선천적 지식을 수정하는 것이다 (모든 학습은 그 이전 지식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내가 1921년과 1926년 사이에 잠정적으로 그리고 조악한 용어사용법으로 설명한 것이 이 심리학적 이론이었다. 캐비넷 제작자 수습공 동안 나를 매혹해 정신을 빼앗은 것은 우리 지식의 형성에 대한 이 이론이었다.

나의 지성적 편력에 관한 기묘한 것 중 한 가지 것은 이것이다. 당시 나는 독단적 사유와 비판적 사유 사이의 대조에 관심을 가졌을지라도, 독단적 사고를 과학 이전 단계로서 (그리고 독단적 사고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는 -과학적인 것으로서) 내가 간주했을지라도 그리고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오류판정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연계할 수 있음을 내가 깨달았을지라도 이 모든 것과 귀납이라는 문제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반복에 의한 귀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복에 의하여 새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단순한 발견에 의하여 귀납이라는 문제를 내가 해결했다고 나는 믿었을지라도, 여러 해 동안 이 두 가지 문제는 나의 정신의 다른 (그리고 그것은 거의 물샐틈없는 듯이 보인다) 부분에서 살았다: 과학의 귀납적 방법으로 주장되는 것은 (독단적) 시행 방법과 (비판적) 오류 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했는데 (독단적) 시행 방법과 (비판적) 오류 제거의 방법은 아메바에서 아인슈타인까지 모든 생명체가 발견한 방식이었다.

물론 나는, 이 두 가지 문제 모두에 ㅡ 구획설정의 문제, 귀납의 문제 ㅡ 대한 나의 해결책이 동일한 관념을 사용했음을 인식했다: 독단적 사유와 비판적 사유의 분리라는 관념의 사용을 인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문제는 전혀 다른 듯이 나에게 보였다; 구획설정에 다윈적 선택과 유사점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나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귀납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구획설정의 문제를 잘못 해결해서 ㅡ 사이비-과학으로부터 과학을 고양한 것은 참이고 안전하며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을 발견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그리고 이 방법은 귀납의 방법이라는 그릇된 (실증주의적) 믿음으로부터 ㅡ 출현했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 이상의 방법에서 틀린 믿음.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1993, 44-53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