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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만남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1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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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만남

 

우리의 미국 방문에서 가장 크고 가장 지속적인 충격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발생했다. 나는 프린스턴 대학에 초대받아서 훨씬 더 긴 논문의 요약판인 양자역학에서 그리고 고전물리학에서 비결정론(Indeterminism in Quantum Physics and in Classical Physics)”에 관한 논문 한 편을 한 학술회의에서 강독했다. 토론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동의하는 말을 몇 마디 말했고 보어(Bohr),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의 도움을 받아서 논증하여 양자역학에서 상황은 완전히 새롭고 고전물리학에서 상황과 전혀 비교될 수 없다고 상세하게 (우리 둘만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말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나의 강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내가 받은 최고의 칭찬으로서 나는 간주한다.

나는 처음에 폴 오펜하임(Paul Oppenheim)을 통하여 우리가 머물던 그의 집에서 나의 강독 이전에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것을 내가 매우 망설였지만, 그는 내가 다시 오도록 만들었다. 합해서 나는 그를 세 번 만났다. 우리의 대화의 주요 화제는 비결정론이었다. 나는 그의 결정론을 그가 포기하도록 설득했는데 그 결정론은, 변화는 인간의 망상이거나 매우 망상에 근접한다는 4-차원적 파르메니데스의 덩어리 우주에 해당했다. (이것이 자신의 견해라는 데 그는 동의했고, 그 견해를 토론하는 동안 나는 그를 파르메니데스라고 불렀다.) 사람이나 다른 생명체가 시간 속에서 변화와 진정한 승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실재적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존하는 시간 조각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으로 연속적으로 떠오른다는 이론에 의하여 해명될 수 없었다; 이유인즉 이런 종류의 의식 속으로의 떠오름에 정확하게, 이론이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저 변화들의 승계와 동일한 특징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다소 명백한 생물학적 논증들을 끝어들였다: 생명체의 진화와 생명체들 특히 고등동물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은, 시간이 또 다른 (이방성[異方性: anisotropic]) 공간좌표인 양 시간을 해석하는 여하한 이론을 토대로 실제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 결국 우리는 공간좌표를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간좌표들이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좌표를 실체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공간좌표는 거의 전체적으로 자의적 구축물이다. 그렇다면 왜 시간좌표를 ㅡ 틀림없이 우리의 관성체계에 합당한 시간좌표 ㅡ 실재적으로서뿐 아니라 절대적으로서, 다시 말해서 변화가 불가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여하한 것과 (우리의 움직임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은 제외하고) 독립적으로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가?

시간과 변화라는 실재는 내가 보기에 실재론의 핵심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그렇게 간주하고 슈뢰딩거와 괴델[Gödel] 같은 실재론을 관념론적으로 반대하는 몇몇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간주되었다.)

내가 아인슈타인을 방문했을 때, 쉴프(Schilpp)가 편집한 생존하는 철학자들의 장서(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에서 아인슈타인 편이 막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간과 변화라는 실재에 반대하여 아인슈타인의 두 가지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나온 논증을 이용한 당시 유명한 괴델(Gödel)의 기고문을 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저 책에서 강력하게 실재론을 지지하고 나왔다. 그리고 분명히 괴델의 관념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답변에서, 괴델의 우주론적 방정식에 대한 해결책은 아마도 물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배제되어야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가능한 한 강력하게, 시간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에 대항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나의 확신을 아인슈타인-파르메니데스에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또한, 관념론적 견해가 결정론 및 비결정론 모두와 양립될 수 있을지라도 열린우주를 ㅡ 과거와 현재가 정말로 미래에 엄격한 제한을 가할지라도, 미래가 어떤 의미에서도 과거나 현재에 포함되지 않는 우주 ㅡ 지지하여 분명한 태도가 취해져야 함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상식을 너무 쉽게 포기하려는 우리의 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 매우 강력한 논증이 (가령 괴델의 논증과 같은) 실재론에 반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느 날 혹시 어쩔 수 없이 실재론을 포기할 것임을 내가 그랬던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이 기꺼이 인정한다고 내가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분명히 실재론을 (그 실재론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이 상식에 근거했던)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에 관하여 그리고 비결정론에 (다시 말해서, 물리학의 불완전성) 관하여, 실재론에 관한 상황과 상황이 정확하게 비슷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신학적 용어로 사물을 표현하는 그 자신의 방식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이 태초부터 모든 것을 세상에 집어넣기를 원했다면 하느님은 변화가 없는, 생명체와 진화가 없는 그리고 인간과 변화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없는 우주를 창조했을 터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심지어 하느님에 의해서도 기대되지 않은 사건들이 있는 살아있는 우주는 죽은 우주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 입장으로 인하여, 양자역학이 완벽하다는 보어의 주장을 향한 그의 비판적 자세가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분명히 하려고 나는 또한 노력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의 문제를 더 멀리 밀고 나갈 수 있다고 그리고 일반적 과학은 미완성으로 (이런저런 의미에서) 판명되기 쉽다고 제안하는 한 가지 입장이었다.

이유인즉 우리는 항상 왜-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뉴튼이 자기 이론을 진리라고 믿었을지라도 자기 이론이 궁극적 설명을 제시한다고 믿지 않아서 그는 원격작용에 대하여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라이프니츠(Leibniz), 역학적 밀치기(mechanical push)(소실점[消失點: vanishing point]에서 작용) 궁극적이라고 믿지 않아서 반발력(repulsive forces)을 통한 설명을 요구했다; 나중에 물질에 대한 전기적(electrical) 이론에 의하여 주어진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우리는 항상 또 다른 왜-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왜-질문은, 옛 이론을 설명할뿐 아니라 그 이론을 수정하는 한 가지 새로운 이론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물리학의 진화가 끝없는 수정과 나은 근사치의 과정일 것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이론이 참일 따름이기 때문에 그 이론이 더 이상 수정에 좌우되지 않는 단계에 우리가 도달할지라도 그 이론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을 터이다 ㅡ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 터이다. 이유인즉 괴델의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定理)가 유효할 터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수학적 배경을 고려하면, 주어진 (형식화된) 이론에서 결정될 수 없을 터인 문제에 답변하기 위하여 기껏해야 그렇게 참인 이론의 무한수열이 필요할 터이다.

그런 고찰로 인하여 객관적인 물리적 세상의 불완전함이나 비결정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런 고찰로 인하여 우리의 노력에 있는 본질적 불완전성이 밝혀질 따름이다.a 그러나 그 고찰로 인하여, 물리적 세상이 결정론적이라는 견해를 과학이 진정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단계에 과학이 도달할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가능할지라도) 또한 밝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상식의 판단을 수용해서는 ㅡ 적어도 이 논증이 반증될 때까지 ㅡ 안 되는가?

이것이, 내가 아인슈타인-파르메니데스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한 논증의 요지이다. 이것 외에도 조작주의, 실증주의와 실증주의자들 및 그들이 지닌 형이상학에 대한 기묘한 두려움, 검증 대() 오류판정, 오류판정 가능성 그리고 단순성과 같은 문제를 더 간략하게 우리가 또한 토론했다. 단순성에 관한 나의 제안이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더 단순한 이론은 사건의 가능한 상태를 배제하는, 자체의 더 큰 능력 때문에 선호된다는 것을 당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아인슈타인이 생각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는 놀랐다; 다시 말해서, 더 간단한 이론이 지닌 나은 시험가능성.

우리가 토론한 또 다른 주제는 보어(Bohr)와 상보성이었다 ㅡ 전날 밤 보어가 토론회에 기여한 뒤 피할 수 없는 주제;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쉴프(Schilpp)의 저서에서 자신이 지적한 것을 가장 강력한 용어들로 반복했다: 최대한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보어가 상보성에 의하여 의미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지적.

원자폭탄 이론의 사소함에 관한, 한 명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견해에서 기인하는 아인슈타인의 신랄한 비평 몇 가지를 나는 기억하는데 러더포드(Ruderford)가 원자력 이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다소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아마도 이 비평들은 그가 원자폭탄과 그 폭탄에 포함된 모든 것을 혐오해서 다소 변질되었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진심으로 말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본질적으로 옳았다.

아인슈타인의 개성이 남긴 인상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 인상은, 사람들이 그에게 즉각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함으로써 기술될 것이다.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솔직성, 그의 친절, 그의 훌륭한 감각, 그의 지혜 그리고 거의 어린애 같은 그의 단순성을 함축적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이 생존했을 뿐 아니라 평가받고 그렇게 큰 명예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미국을 위하여 의미심장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128-132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