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을 정당화할 것인가, 오류로 판정할 것인가
우리의 이론이나 소신에 대하여 여하한 긍정적 정당화나 여하한 긍정적 근거를 우리가 제시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바틀리가 주장하는 바, 아마도 회의론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전 합리주의자와 다르게).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것에 대하여 여하한 긍정적 근거도 우리가 제시할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그런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그런 근거를 추구해야 한다는 소신 자체가 합리적도 아니고 참인 소신도 아니지만, 장점이 없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소신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장점이 없는[without merit]’이라고 서술한 곳에 ‘근거가 없는[baseless]’이라는 단어를 나는 막 쓰려던 참이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언어가, 나 자신의 접근방법 안에서 공격당하는 무의식적 전제에 의하여 단지 얼마나 많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가 제공된다. 장점이 결핍된 견해만 틀림없이 근거가 없다고 ㅡ 사실무근이거나 정당화되지 못하거나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근거가 없는 ㅡ 비판 없이 전제된다. 반면 나의 견해를 토대로 모든 견해가 ㅡ 좋고 동시에 나쁜 ㅡ 이 중요한 의미에서 근거가 없고 사실무근이며 정당화되지 못하고 뒷받침되지 못한다.)
나의 접근방법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한 정당화라는 핵심적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ㅡ 항상 이해되었던 바와 같이 ㅡ 비합리주의자나 회의론자의 해결책만큼 명백하게 부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데 대한 타당한 긍정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 유사할지라도 틀림없이 그 문제와 날카롭게 구분되는 또 다른 세 번째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긍정적 해결책을 제시함에서 회의론자 및 비합리주의자와 나는 다르다. 이 세 번째 문제는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에 선호될 수 있는지의 ㅡ 그리고 선호될 수 있다면 왜 ㅡ 문제이다. (나는 그 이론이 진리에 더 근접한 근사치라고 우리가 생각하거나 추측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그 이론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추측할 근거가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이론이 선호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명백하게 긍정적이다.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선호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에 우리가 자주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 근거의 본질은,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지금까지 비판을 더 잘 견디었다는 것과 더 잘 견딘 방법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의 진리에 대한 소신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써 제시되는 저 긍정적 근거와 구분하기 위하여 나는 그런 근거를 비판적 근거로 지칭하겠다.
비판적 근거에 의하여 이론이 정당화되지 않는데 이유인즉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지금까지 비판을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그 이론이 실제로 참이라고 생각하는 데 여하한 근거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비판적 근거에 의하여 이론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지라도 그 근거는 그 이론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옹호하는 데 (그러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제안된 다른 이론 모두나 다른 이론 몇 가지라기보다 그 이론을 사용하겠다고 우리가 결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런 비판적 근거로 인하여 물론 우리의 선호가 추측성 이상이라고 증명되지 않는다: 새로운 비판적 근거가 그 이론에 반대하여 말하거나 유망한 새로운 이론이 제시되어 비판적 토론의 재개를 요구하면 우리의 선호를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선호에 대한 근거 제시는, 물론 정당화로 (일상언어로) 지칭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비판된 의미에서 정당화가 아니다. 우리의 선호는 우리의 토론과 관련된 현재 상태에 관해서만 ‘정당화’된다.
나중까지 이론에 대한 선호의 표준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연기하고 나는 이제 출현한 새로운 문제 상황에 대한 바틀리의 견해를 제시하겠다. 고전적 정당화 문제에 부정적 해결책을 제시한 이후 새로운 비판의 문제인 내가 긍정적 해결책을 제공하는 문제에 의하여 그 고전적 정당화 문제를 내가 대체했다고 말함으로써, 그 상황을 그가 매우 두드러지게 기술한다.
정당화 문제로부터 비판의 문제로 이 전환이 근본적이라고 바틀리는 제안한다; 그리고 그 전환은, 다른 모든 사람이 (내가 포함된다) 정당화의 문제를 지식론의 핵심 문제로서 수용하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전환으로 인하여 오해가 발생한다.
이유인즉 바틀리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이론이나 소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화하는 방식을 밝힌다는 것이 지식론의 표면적 과제라고 모든 사람이 전제했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모든 철학은 정당화주의적 철학이었다. 합리주의자와 경험론자 및 칸트주의자뿐 아니라 회의론자와 비합리주의자 또한 이 전제를 공유했다. 회의론자는, 우리의 이론이나 소신을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여, 지식 탐구에 파산을 선고한다; 반면 동일한 근본적 수용 때문에 비합리주의자가 (예를 들어 종교주의자) 근거 탐색에 ㅡ 다시 말해서, 합리적으로 타당한 논증 탐색에 ㅡ 파산을 선고하고 비합리적 출처에서 나오는 권위와 같은 권위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우리의 지식, 즉 더 정확하게 우리의 소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회의론자와 비합리주의자 모두는 정당화의, 혹은 긍정적 근거 존재의 문제가 근본적이라고 전제한다: 그 사람들은 모두 고전적 정당화주의자이다.
바틀리는 나의 접근방법이 사실상 정당화주의와 전혀 다를지라도, 통상적으로 어떤 형태의 정당화주의로 오해되었다고 논평한다. 이유인즉 이런 면에서 회의론자와 비합리주의자를 닮아서, 내가 고전적 정당화 문제에 부정적 해결책을 제시할지라도 동시에 내가 고전적 문제를 몰아내고 회의론적도 아니고 비합리주의적도 아닌 해결책을 참작하는 새로운 핵심적 문제에 의하여 그 고전적 문제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제시한 해결책이, 우리의 지식이 ㅡ 우리의 추측성 지식 ㅡ 성장할 것이라는, 그리고 그 지식이 이성을 이용함으로써 성장할 것이라는 견해와 양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논증을 이용함으로써.
고전적 정당화의 문제가 지체의 핵심적 위치에서 제거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그 문제가 무의미한 것으로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먼저 이해되지 않으면, 나의 입장이 오해되기 쉽다고 바틀리가 제안한다. 그러나 정당화주의자에게 이것은 알기 매우 어렵다. 이유인즉 정당화주의자가 흄(Hume)처럼 다음과 같이 논증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왜 당신은 특정 사실의 문제를 신뢰하느냐고 물으면..., 당신은 어떤 근거를 나에게 말해야 한다;...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소신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제 E. M. 포스터처럼 나는 소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소신에 관한 철학에 흥미가 없으며, 소신과 소신의 정당화 혹은 근거나 합리성이 지식론의 주제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흄의 이 구절에서 ‘신뢰한다(believe in)’라는 말을 ‘관하여 이론이나 추측을 제안한다(propose a theory or a conjecture about’로 대체하거나 ‘당신의 소신(your belief)’을 ‘당신의 추측(your conjecture)’으로 우리가 대체한다면 그의 선언이 힘을 잃는다. 이유인즉 자신들의 추측이 ‘전혀 근거가 없다’라고 듣고 충격을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foundation)’ 즉, 정당화를 지닌다는 것은 소신에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추측이나 가설에 대하여 요구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흄이 ‘근거(foundation)’라는 (나의 표현 ‘긍정적 근거에 의한 정당화’에 대응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에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몇몇 사람은 예를 들어 ‘물리 이론의 근거’에 대하여 말한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화주의적 말이거나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물리 이론이 추측이거나 가설이어서 혁명적 변화에 종속된다고 깨닫자마자 우리는 아마도 물리 이론의 ‘근거’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선호할 ㅡ 물리 이론에 대한 우리 소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선호할 것과 같이 ㅡ 것이다.
가설을 제안하는 데 대한, 그리고 그 가설을 비판적 토론에 부치는 데 대한 몇몇 근거를 우리가 제공할 수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왜 ㅡ 더 비판될 수 있고 더 엄격하게 비판되는 이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ㅡ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을 제시하는지에 대한 설명의 성격에 더 부합한다. 이 근거들과 그 근거들의 논리적 역할은 흄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참이라면 우리가 해결하고자 원하는 문제를 해결할 터라고 (케플러 법칙을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했던 뉴튼의 이론처럼) 지적함으로써 가설을 제시하는 데 완벽하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근거는, 가설을 제공하여 그 가설이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추천하는 데 매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근거가 그 가설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데 근거가 아닐 터이다. 그런 근거는 심지어 그 가설을 잠정적으로 수용하거나 심지어 그 가설을 선호하는 데 근거도 되지 않을 것인데 이유인즉 그 문제를 훨씬 더 잘 해결하는 알려진 다른 가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II
이런 방식으로 흄의 인식론적 문제가 ㅡ 정당화하는 긍정적 근거를 제시하는 문제 즉, 정당화의 문제 ㅡ 왜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또는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모든 이론보다) 한 이론을 선호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비판적 근거를 제시하는 전혀 다른 설명의 문제에 의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가설 중 어느 가설이 선호될 ㅡ 비교적으로 ㅡ 가설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가설들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문제에 의하여 아마도 대체될 것이라고 우리가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정당화주의자는, 내가 실제로 한 문제를 또 다른 문제로 대체하지 않았다고 반대할 것이다.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을 선호하는 근거’ 대신 내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우리가 믿는 근거’라고 말했을 수 있었을 터라고 정당화주의자는 먼저 논증할 것이다. 이 요점이 언어적인 한 나는 기꺼이 그 요점을 인정한다; 이유인즉 내가 소신에 대하여 철학화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단어들에 관하여 결코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이 근거’에, 가령 이 이론 중 첫 번째 이론이 참이라고 믿는 데 대한 근거와 동일한 특징이 아마도 있지 않다고 정당화주의자가 인정할지라도 그는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근거’가 ‘긍정적 근거’라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을 터라고 지적할 것이다: ‘우리가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이 낫다고 믿는 근거’가 어떤 이론의 ㅡ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이론이 두 번째 이론보다 낫다는 이론의 (그 이론이 지칭되는 바와 같이 ‘메타-이론[meta-theory]’) ㅡ 진리를 신뢰하는 데 대한 근거라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을 터라고 지적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주의자는 내가 실제로 정당화 문제를 다른 문제에 의하여 대체하지 않았다고 아마도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정당화주의자는 자신이 인정한 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일 터이다. 먼저 이론 A가 이론 B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메타-이론과 이론 A가 사실상 참이라고 (혹은 ‘개연적’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메타-이론 사이에 막대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메타-이론 중 한 가지 메타-이론을 뒷받침하는 타당하거나 중대한 근거로서 혹시 간주될 논증들 사이에 막대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경합하는 설명적 이론들이나 추측들을 (가령 물질의 구조에 대한) 토론하면서, 비판적 논쟁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추측 α가 추측 b보다, 또는 심지어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다른 추측보다 크게 우월하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상황을 공정하게 요약할 수 있다: 추측 α가 이것들 중 어떤 것보다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로 보인다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추측 α가 심지어 실제로 참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러나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추측 α가 이 분야에서 생성될 최고의 추측이라거나 추측 α가 실제로 참으로 보인다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메타-이론 중 하나는 우리 수행하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를 단지 공정하게 요약할 것이고, 저 의미에서 단지 부정적이고, 단지 비판적일 것이다; 반면 나머지 메타-이론은 일반적으로 전혀 이것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메타-이론이 우리의 소신이나 우리의 직관적 확신의 현재 상태를 요약할지라도.)
두 번째, 전통적 의미에서 또 다른 이론보다 한 이론의 선호가 올바른 선호라고 긍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확립하려는 시도가 다시 나에게 없다. 정당화의 문제는 이동되지만 않는다: 그 문제는 폐기된다. 메타-이론은 또한 긍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메타-이론은 추측성이다 ㅡ 그래서 비판에 노출된다.
III
더 중요한 반대론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정당화 문제를 또 다른 문제에 의하여 대체했다는 나의 주장이 회의론자나 비합리주의자의 주장과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나의 주장처럼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정당화주의자가 말할 것이다. 후자(後者)의 주장 근거 없다는 것은, 나의 답변이 상대주의와 실용주의 및 잘 알려진 유사한 관점들과 동일하거나 기껏해야 그 관점들의 변종으로 판명된다고 정당화주의자가 논증할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이유인즉 한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그 이론이 어떤 다른 이론보다 나은지 혹은 더 나쁜지의 문제에 의하여 우리가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분명히 진리에 관하여 상대주의적 입장을 채택한다고 정당화주의가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후자(後者) 문제가 이 이론들의 성공의 도움을 받아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나 자신을 실용주의자로서, 또는 아마도 심지어 규약주의자(conventionalist)로서 내가 폭로한다 (정당화주의자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반대론으로 인하여, 내가 믿지 않는 정당화주의적 교설이 나에게 함축적으로 귀속된다. 이유인즉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나은지의 문제에 의하여 우리가 대체해야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 이론이 어떤 실용적 의미에서 또 다른 이론보다 더 성공적일 때마다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낫다고 내가 말하지도 않는다. 두 가지 요점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나의 입장은 이렇다. 나는 진리 탐구가 ㅡ 혹은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인 이론 탐구 ㅡ 지극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합리적 비판은 어떤 이론이 참이라는 그래서 그 이론이 고안되어 해결하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 이론이 참인지의 문제를, 그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나은지의 문제에 의하여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이론의 진리를 선호하여 타당한 근거를 (긍정적 근거) 우리가 생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한 이론이 참인 것에 반대하는 혹은 한 이론과 경합하는 이론들의 진리에 반대하는 타당한 근거를 (비판적 근거) 우리가 생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의하여 내가 대체한다. 게다가 한 이론이 또 다른 이론보다 낫다거나 우월하다거나 기타 등등으로 기술하는 것은 그 이론이 진리에 더 근접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고 내가 믿는다.
진리는 ㅡ 절대적 진리 ㅡ 우리의 목표로 남는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의 비판의 함축적 표준으로 남는다: 거의 모든 비판이, 비판되는 이론을 반증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이 참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예외가 한 이론이 유관하지 않다고 ㅡ 그 이론이 고안되어 해결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ㅡ 밝히려고 시도하는 비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찾고 있던 참인 이론을 실제로 우리가 발견했다고 밝히는 근거를 (긍정적 근거) 우리가 결코 제시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참인 이론을 (참이면서 유관한 이론) 탐색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가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근거가 ㅡ 다시 말해서 훌륭한 비판적 근거 ㅡ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진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근거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이유인즉 첫째로 특정 이론이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황에 따라서 참이 아니라고 우리가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새로운 이론이 앞선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근접한다고 믿을 (맞아요, 심지어 믿을) 몇 가지 잠정적 근거를 우리가 발견했을 것이다.
추상성을 감소하기 위하여 나는 역사관련 사례를 제시하겠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토론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자 중 아무도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 참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특수 상대성이 기껏해야 단지 근사치일 수 있다고 (왜냐하면 특수 상대성이 가속이 붙지 않은 운동에만 타당하므로)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추가적 근사치인 일반 상대성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는 이 이론도 참일 수가 없고 단지 근사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그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나은 근사치를 탐구했다.
‘상대성 이론’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흔적이 아인슈타인의 태도에 없다: 그는 진리를 탐구했고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는 근거를 ㅡ 비판적 근거 ㅡ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 자신이 진리를 향하여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고 ㅡ 자기 이론이 이전 이론들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기 이론이 알려진 경합하는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근접했다고 ㅡ 밝히는 비판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 사례로 인하여, 비판의 문제에 의하여 정당화 문제를 대체하면서 사실과 대응으로서 고전적 진리론을 우리가 포기할 필요가 없고 우리 비판 표준의 하나로서 진리 수용을 포기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는 나의 주장이 뒷받침될 것이다. (다른 가치들은 우리의 문제, 그리고 설명력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흔히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심지어 언제 진리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고 내가 믿을지라도, 규제적 관념(regulative idea)으로서 절대적이거나 객관적 진리라는 고전적 관념을 내가 유지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미치지 못할 표준으로서 절대적이거나 객관적 진리라는 고전적 관념을 내가 유지한다. 그 이룩된 변화는 진리 관념에 관련되지 않지만, 진리를 안다는 여하한 주장과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이론에 있는 진리를 확립하기에 충분하거나 심지어 매우 근접하게 충분한 논증이나 근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
논증이나 근거에 의하여 우리의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뒷받침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받을 필요는 없다. 이유인즉 이론 평가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기능이 비판적 추론에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토론의 결과로서 우리의 이론 가운데서 우리가 비판할 수 있고 차별할 수도 있다. 그런 토론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참인 이론과 거짓인 이론을 구분할 (확실하게, 혹은 거의 확실하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간혹 거짓 이론과 참일지도 모르는 이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특정 이론에 대하여, 현재 우리의 비판적 토론 상태에 비추어 그 이론이 제출된 다른 이론보다 훨씬 낫게 보인다고 우리가 흔히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흥미라는 관점에서 낫게 보인다고 우리가 흔히 말할 수 있다; 혹은 진리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에서 낫게 보인다고 우리가 흔히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성의 비판적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부정적인) 기능을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추론이 통상적으로 생각되었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강력하며 덜 비효율적이라고 강조한다. 합리적 비판은 정말로 지식에서 우리가 배우고 성장하여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수단이다.
IV
바틀리의 간단한 언명과 ㅡ 정당화가 정당화가 아닌 비판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는 것 ㅡ 다양한 정당화주의적 철학에서 정당화를 겨냥하지 않는 비판적 철학으로 전환에 포함된 초점의 변화에 대한 그의 강조는 매우 계몽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독자도 혹시 이득을 볼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바틀리의 언명을 제시하기로 결심했다. 바틀리의 언명으로 인하여 비판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정당화주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자주 오해받는 이유를 내가 아는 데 도움을 받았다: 유효한 비판이라는 관념을 깎아내려, 특정 소신들을 정당화하려는 특정 시도의 무효성을 증명하는 편협한 과제로 만드는 경향이 정당화주의 철학자들에게 있다. 비록 내가 비합리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로 여하한 이론이나 소신도 엄격하고도 탐구적인 합리적 비판에 부쳐질 것이고 또 부쳐져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이론이나 소신을 아마도 논박할 근거를 ㅡ 합리적 논증을 ㅡ 찾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바틀리의 언명에 의하여 또한 다양한 비합리주의자들이 우리의 소신을 정당화하려는 합리주의와 합리주의적 시도에 반대하여 언급했던 그렇게 많은 것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상 합리성의 태도를 구분하는 것은 단지 비판에 대한 개방이라고 내가 제안했다.
비합리주의자는 이성과 관찰을 제외한 ‘지식의 근원’을 ㅡ 예를 들어 영감이나 동정적(同情的: sympathetic) 이해 ㅡ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때 전적으로 옳다; 혹은 전통인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지식의 근원’이고 전통에 있는 명백한 오류성 때문에 합리주의자들에 의하여 흔히 무시당한다. 그러나 여하한 종류나 출처 혹은 근원의 지식이 있으며 그런 지식은 합리적 비판을 초월하거나 합리적 비판으로부터 제외된다고 제안할 때 비합리주의자가 위험스럽게 틀렸다.
V
동등하게 틀린 것은, 합리적 비판도 몇 가지 증명될 수 없는 추정에 틀림없이 항상 근거하여 그 비판의 타당성이 본질적으로 이 추정에 관련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합리적 비판과 같은 처지라는 견해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입장 A가, 그러나 반대로 확립하기가 불가능한 입장 B와 관련하여 비판받고 있는 상황을 우리가 직면하고 있다는 견해; 그리하여 B와 관련한 A에 대한 여하한 비판도 결정적이 ㅡ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물론 ㅡ 아닐 것이다.
이 논증의 개별적 구성요소 대부분이 매우 옳다. 그러나 결론이 전혀 귀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판에서 흔히 정당화될 수 없으면서 증명될 수 없는 추정을 이용하여 우리가 연구한다고 나는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판은 정말로 결정적이 아니다. 그러나 여하한 종류의 증명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우려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비판적 합리주의자의 비판적 논증은 ㅡ 그가 자신의 논증을 통하여 비판 중인 이론과 꼭 마찬가지로 ㅡ 추측성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매우 간단하다. 정당화주의적 논증은, 긍정적 근거를 퇴행적으로 낳으며, 결국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는 근거에 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논증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를 초래할 터이다.) 그래서 정당화주의자는 그런 ‘궁극적 추정’은 틀림없이 어떤 의미에서 논증을 초월하여 비판될 수 없다고 통상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나의 접근방법에서 제시되는 비판적 근거인 비판은 여하한 의미에서도 궁극적이 아니다; 그 비판은 역시 비판에 개방되어 있다; 그 비판은 추측성이다. 우리는 그 비판을 무한히 지속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그 비판은 재검토와 재고찰에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무한회귀는 생성되지 않는다: 이유인즉 어떤 것이라도 증명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확립하려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 추정을 수행할 필요가 없다. 무한회귀를 초래하여 토론의 궁극적 용어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만 증거나 정당화에 대한 요구이다.
이 반대의견과 관련된 것은, 순전히 비판적인 방법이 ㅡ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긍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삼가는 방법 ㅡ ‘내재적(immanent)’ 유형의 비판에 자체를 한정해야 할 터라는 근거로 불가능하다는 널리 수용되는 견해이다. 한 편의 비판이 이론의 전제와 추정 모두를 그리고 그것들만을 채택함으로써 내부로부터 이론을 공격하면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cism)’으로 지칭된다; 그리고 비판이 비판되는 이론과 다른 전제나 추정으로부터 나아가 외부로부터 이론을 공격하면 ‘초월적 비판(transcendent criticism)’으로 지칭된다. 그러나 내재적 비판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된다; 이유인즉 내재적 비판이 비판되는 이론 내부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할 수만 있으므로 일관된 이론에 대항해서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순 지적이, 논리를 상정하거나 전제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내재적이 아닐 것이라고 심지어 언급될 것이다: 모순을 불법화하는 논리.) 그래서 일관된 이론에 대한 모든 비판,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비판은 틀림없이 ‘초월적’이라는 결론이 이룩된다. 그곳으로부터 공격받는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어떤 비판도 비결정적이거나 무효한 것으로서 항상 배척할 수 있을 터라고 ㅡ 정말로 어떤 초월적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상정이나 전제에 긍정적 정당화가 주어질 수 없을 터라면 ㅡ 주장된다. 그래서 비판과 긍정적 정당화의 방법은 같은 처지에 있는 듯이 보일 터이다.
비판적 방법에 관한 좁은 시야와 비교적 무의미에 대한 이 겉으로 보기에 합당한 관점은 오류이다. 그 관점은, 사유체계에 대한 비판자 모든 혹은 대부분이 자신들의 비판적 공격에서 자신들을 유도하는 또 다른 사유체계를 채택한다는 올바른 관찰과 연결되는 듯하다. 비판이 정말로 자체의 근원이나 유도 또는 영감과 관련하여 ‘초월적’이 되는 경향을 띨지라도 이것은 비판이 그 용어의 논리적 의미에서 ‘초월적’이 되어야 한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자기-비판적 비판자는 자기 비판의 초월적 근원 흔적을 자신이 떨칠 수 없다면 자기 비판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혹시 자신의 사유체계에 의하여 유도당할지라도 자기-비판적 비판자는 자기 비판이 내재적이 ㅡ 그리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항하여 더 효과적이 ㅡ 될 때까지 자기비판을 변형시킬 것이다. 이유인즉 검토되고 있는 이론이 상정이나 독단 또는 추측이나 기타 등등의 체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이론은 예를 들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나 경합하는 이론들보다 더 성공하지 못하는 것으로나 해결될 문제를 단지 바꾸는 것, 기타 등등으로서 내재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내재적 비판에 의하여 심지어 일관된 이론 내부의 심각한 약점이 지적될 것이다. 모순 지적에 관하여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내재적 비판으로서 수용될 것인데 정확한 이유가 이론이 해결하기 시작한 문제가 앞선 이론들을 부정했던 것에 (예를 들어 실험의 결과) 대하여 일관된 설명을 제시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판받는 이론을 자극하고 홀로 그 이론에 요점을 제공하는 문제 상황에, 논리적 원칙의 ㅡ 모순을 배척하는 규칙과 같은 ㅡ 수용을 포함하는 (그리고 멀리 초월하는) 상정이나 전제가 항상 담기고 내재적 비판에 대하여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는 상정이나 전제가 항상 담긴다. (예를 들어 이론의 언명을 초래하는 문제 상황이 특정 관찰이나 실험을 설명하는 과제를 포함한다면, 다른 실험들이 그 이론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ㅡ 물론 그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실험의 결과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ㅡ 사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재적 비판은 가능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내재적 비판에 국한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초월적 비판을 사용할 권한이 완전히 있다. 이것의 본질은 경합하는 이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이론이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한 이론이 약점을 드러낸다고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데 틀린 것이 없다. 반대로 이런 종류의 상호 간 초월적 비판으로 인하여 결국 우리가 한 이론이 경합하는 이론보다 선호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선호될 수 있는 근거를 또한 말할 수 있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19-30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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