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知的) 감옥으로부터 탈출
우리 대부분은, 특히 철학자 대부분은 많은 숫자의 이론을 의식적으로 지니고 게다가 비판적 검토를 거친 후에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론들을 논증에 의하여 옹호하고 훌륭한 논증이 그 이론들에 반대하여 제기되면 그 이론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적거나 많게 무의식적이어서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이론들을 또한 붙잡고 있다; 그리고 이 무비판적으로 붙잡힌 이론들은, 지속적으로 저 다른 이론들을 의식적으로 붙잡는 데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를 흔히 포함한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려졌다: 베이컨은 그런 무의식적 상정(想定)을 우상으로서 그리고 편견으로서 묘사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대화 상대방이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도록 자주 만든다: 대화 상대방의 특정 입장에, 그 상대방이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는 이론이나 관점이 있다고 암시한다는 것과 왕왕 심지어 상호 간에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이론이나 관점이 있다고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자주 만든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가 ‘인간(mortals)’이 무비판적으로 지닌 망상적 견해에 대하여 말한다.
가장 오래되고 더 흥미롭고 아마도 더 중요한 철학의 과제 중 하나의 과제가 그런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고 그런 입장이 포함하는 이론이나 견해를 ㅡ 특히 무비판적으로 당연시되는 이론이나 견해 ㅡ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공통적 상정에 의하여, 공통적 선호(選好: preferences)에 의하여 혹은 공통적 혐오에 의하여 연관된 관련 견해 덩어리들이 있다고 흔히 발견된다. 분명히 이 입장이나 관점 또는 견해 덩어리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흔히 편리하고 심지어 필요하다. 그래서 ‘주의(主義“ isms)’가 생긴다.
‘주의(主義” isms)’가 현대 철학에서 유행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주의나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나쁜 취향의 징표로 느껴진다는 것은, 이론이나 입장 또는 견해 덩어리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유행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유행은, 특히 철학에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유행은 자체가 ‘주의(主義isms)’일 뿐이기 ㅡ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주의(主義: isms)’ ㅡ 때문에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귀납과 관련된다. 많은 철학자와 심지어 몇몇 과학자가 귀납이 상식이라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지금 흔히 ‘귀납적 과정’으로 지칭되는 것의 실제 사용이 진지하게 부인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것은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래 3절 참조). 그러나 우리는 아무튼 상식적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철학자들은 탁자와 의자나 운석, 혹은 혼령이나 (기계 안이나 밖 양쪽에 있는) 분석언명(分析言明: analytic statements)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과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매우 인내하며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과 ‘주의(isms)’에 대한 토론은, 귀납적 과정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토론만큼 철학에 거의 근본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 문제를 비판적으로 토론하자. 아마도 귀납적 과정이 ㅡ ‘귀납적 논리’ ㅡ 존재한다는 상정은 결국 편견이어서 정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단지 신화이자 그릇된 ‘주의(主義: isms)’이다 (‘귀납주의’).
귀납주의 같은 것이 있다면 이것은 왜 ‘주의(主義: isms)’가 유행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유인즉 무비판적으로 믿어지는 ‘주의(主義: isms)’가 귀납주의에 대한 위험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이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은 ㅡ 당신의 정신을 순화하라 ㅡ 순진했다. 그래서 귀납주의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거나 아니면 ‘주의(主義: isms)’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면 나은 듯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믿어지면 분명히 무비판적으로 믿어지는 이 이론들은 흔히 우리의 언어에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어휘뿐 아니라 그 언어의 문법적 구조에도 포함된다. 이것은 내가 알기로, 버트런드 러셀이 처음 알았고 당시 러셀은 많은 철학적 이론이 ‘모든 명제는 주어-술어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도-유럽 언어의 문법적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정인 그릇된 상정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나중에 유사한 교설이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그는 더욱 특히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우리의 언어에 의존한다고 강조했다.
언어에 관한 이 사실들은 다음의 급진적 결론을 옹호하는 데 왕왕 사용된다.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우리 언어의 포로라고 언급될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우리의 언어에 포함되는 이론을 (예를 들어 본질에 대한,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통해서를 제외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ㅡ 예를 들어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ㅡ 우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의 탈출할 수가 없는데 이유인즉 비판적 토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도움을 받아서 실행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적 토론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ㅡ 감옥 안에 ㅡ 남을 터이다. 다른 구조의 새로운 언어를 ㅡ 본질적으로 우리의 옛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될 수 없는 언어 ㅡ 학습함에 의해서만 그리하여 새로운 문화와 충돌 및 새로운 문화로 전향을 통해서만 우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수 있을 터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아마도 더 큰 감옥인 또 다른 감옥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이다.
이 감옥에 갇힌다는 교설에 많은 것이 있다고 내가 보지만, 그 교설의 결과들은 과장된다. 문화충돌로 초래되는 도움이 무한히 귀중할지라도, 우리는 왕왕 문화충돌 없이도 일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비판적 노력을 통하여 우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벽 이곳저곳을 우리가 허무는 데 성공할 것이다.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 감옥의 벽 하나를 발견했거나 의식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지적(知的)이기 때문에 이 벽 중 하나를 인식하면 그 벽을 허무는 것에 해당한다: 감옥에 갇히는 것의 본질은, 감옥의 벽에 우리가 지적(知的)으로 눈이 먼 것이다.
감옥의 벽 하나를 러셀이 발견하여 결과적으로 허물었어도 그가 ㅡ 또는 우리가 ㅡ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낡은 벽 몇 개가 여전히 서 있었고 다만 이유가 바로 그 벽들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주어-술어 문법이 책임져야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벽의 파괴도, 우리가 이제 탈출하여 열린 공간으로 나갈 수 있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넓은 감옥으로 (관계의 언어라는 감옥) 탈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낙담해서는 안 된다. 미리 배당된 한계 없이 더 넓은 감옥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훨씬 더 넓은 또 다른 감옥으로 탈출함으로써 원칙적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가 해방할 수 있는 지적(知的) 감옥에 우리를 가두는 종신형은, 감당될 수 있는 선고일 뿐 아니라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흥미진진한 전망을 여는 선고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적(知的) 삶에 가치가 있는 과제이다.
지적(知的)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에 관한 몇 가지 완벽하게 유사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언어에서뿐 아니라 언어 내부에서 전제나 이론 혹은 관점으로 구성된 다양한 체계에서도 (그것들은 ‘총체적 이데올로기[total ideologies]’로 지칭되었다) 감옥에 갇힐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이 이유로 우리가 비판도 할 수 없고 초월할 수도 없을 전제들이다. 이 모든 것이 인정될 수 있을지라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토론은 참석자들이 기본 원칙에 합의하지 않거나 공통적 배경이나 ‘개념적 이론구조(conceptual framework)’를 공유하지 않으면 결실을 맺을 수 없다고 흔히 언급된다. 나는 그런 주장의 진실성을 부인한다. 참석자들이 모든 요점에 합의한다면 토론이 참석자들에게 매우 만족스러울지라도 덜 유쾌한 조건에서 토론이 더 유용할 것이다.
이 다양한 소신 체계를 의식하게 만들어 탐색적 검토 이후 사용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소신 체계를 우리가 잠정적으로 선택할 것이, 철학적 비판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전제로 구성된 일관적 이론체계를, 다시 말해서 ‘접근’이나 ‘주의(主義: isms)’를 (귀납주의나 실증주의 혹은 직관주의와 같은) 이해하고 검토하며 비교하여 비판해야 한다고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의 저 모임에서 내가 ‘귀납주의’로 불렀던 접근방법이나 태도인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해석을 나의 말에 부과하기 마련인 태도를 분석하고 비판할 기회를 내가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해결책을 설명하려는 나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색하는 사람은 어떤 이론구조를 개뱔하는 경향을 띠고 그 구조 속으로 그들이 조우할 모든 새로운 관념을 맞추려고 시도한다; 통상적으로 사색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주치는 새로운 관념을,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론구조에 적절한 언어로 번역한다. 철학의 가장 특징적 과제 중 하나는, 필요하면, 이론구조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의식적으로 믿어지든 아니든, 매우 많이 당연시되어 소신에 대한 비판이 불합리하거나 불성실하다고 느껴질 소신을 공격하는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론구조 자체가 공격당할 때마다 그 이론구조를 옹호하는 사람은 통상적으로 자기 자신이 채택한 이론구조의 내부에서 그 공격을 해석하여 반박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구조를 겨냥한 비판적 논증을 저 이론구조에 적절한 언어로 번역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는 치명적 왜곡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주의(主義: isms)’를 통하여 토론하면, 이론구조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강조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이것이 감소할 것이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14-1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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